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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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주만/ 회원 칼럼니스트  <리처드 3세>라는 작품의 주인공인 리처드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비열한 모략을 세우는 왕족이다. 그는 늘 단검을 지니고 다니는데, 살인 도구라기보다는 권력에 대한 그의 욕망을 표현하는 오브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의 한 장면에서 리처드가 단검과 성경책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내 가슴에 다음 대사를 찔러 넣었다.  “내가 이 검으로 죄 없는 가슴을 찔러대며 죽여도, 다른 손에 든 성경 한 구절만 읊어대면 모두가 나를 선한 사람으로 여기지.”  리처드의 이중성과 당시 사람들이 종교를 맹목적으로 받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성경을 내세운 리처드를 향한 선과 악의 판단을 거둬버리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것이 비단 셰익스피어 시대의 현상일 뿐일까.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나는, 이것이 당시의 상황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 내 민주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며, 주권이 국가와 권력층에서 국민으로 넘어오는 단계에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흐름은 다른 것 같다.  얼마 전, 대법원장 임명을 두고, 동성애를 합법화시키려 한다며 교단 주도하에 임명반대 서명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 구약의 “동성애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그를 반성경적인 사람으로 공표했고, 성도들은 그 말에 찬동하여 임명반대 서명을 한 것이다.  본래 성경의 기본 정신은 ‘공평과 정의로운 사회’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이웃사랑’인데, 그런 기독교가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이웃을 차별해도 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사진 출처 - 아트앤스터디, 슬픔의 철학  기독교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돌발행동이 아니다. 기독교는 현재 위태로워진 보수정권에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힘을 실어줘 왔다.  초대 한국기독교의 일부는 미국기독교 장로회 교단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미국장로회는 자본주의 기독교 중에서도 복음주의(성경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사회적 부패 행동을 숨기고 포장하기 위해 교회와 성경을 이용했다.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으로 반인권적인 행동들을 저지르곤, 성경에 있는 금식기도와 회개를 하며 거룩한 척 잘못을 숨겼던 것이다. 한국에도 이런 미국장로회 기독교가 들어와, 소위 ‘가진 자’들의 부패를 숨겨주며 사회적으로는 청렴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돕고 도왔다.  3.1절 광화문 집회 때에도, 한국기독교총회와 한국기독교연합회 등 기독교 대표 단체들이 직접 참가신청을 받기도 하며 주최 측으로서 모습을 보였다. 약 100년 전, 선조들이 나라를 위해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식민지 지배에 저항했던 그날, 성조기와 이스라엘기, 심지어 일장기까지 흔들며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기독교 단체가 대법원장 임명을 반대했던 진짜 속내를 여기에서 추론할 수 있다. 현 정권이 국가기관의 장을 임명하는 것에 반하고자 했던 이유다.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을 잊은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치적 이권을 차지하고자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진정한 의도를 숨긴 기독교와, 왕좌를 향한 욕망을 숨기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읊어댔던 리처드의 모습이 큰 차이가 있을까. 결국은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속내였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현존하는 모든 기독교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나 단체의 이익을 얻기 위해 진짜 속내를 숨기고 성경을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기독교가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 성경 안의 근본적인 내용과 기독교의 정통 교리는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에 적합하다. 우리는 대부분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와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인권을 말하는 우리도 이러한 부분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혹여라도, 인권존중이라는 선한 신념을 자신과 단체의 이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면 리처드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인권존중이 사회에서 공기처럼 작용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누군가 인권이라는 간판 뒤에 숨어 다른 이익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늘 경계해야 한다. 주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작가 지망생
2018-06-20 | hrights | 조회: 1070 | 추천: 19
박선영/ 회원 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중3 아들과 중1 딸의 엄마인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잘 도와주고, 마음도 잘 이해해주는 딸이 너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의 온 신경이 아들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는 일,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 식사를 챙기는 일, 전화로 계속 아들의 스케줄과 상태를 확인하는 일, 심지어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아들의 짜증을 받아주는 일까지 그는 기꺼이 해내고 있었다. 딸도 오빠보다 자신이 소홀히 여겨지는 것에 대해 매번 서운함을 토로한다고 했다. 그래도 딸은 엄마를 배려하고 기다려주니까, 이것저것 요구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아들이 더 눈에 밟히는 것이다.   딸의 역할은 교실에서도 이어지는 듯하다. 타인을 잘 배려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는 교사들의 대화에서 매년 되풀이 된다. 교사의 일을 잘 도와주고 무슨 일이든 시키면 똑 부러지게 해내는 여자 아이들. 관심 없는 남자 아이들과는 달리, 지치고 힘든 교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아는 여자 아이들. 이런 사례들이 매년 쌓이고 쌓여서 ‘여자 아이는 관계 지향적’이라는 교사의 믿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런데 여자 아이들이 관계 지향적이어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자 아이들은 고학년쯤 되면 친한 친구끼리만 무리지어 다니고, 교실에는 그 무리가 서로 견제하는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자 아이들 간의 관계 지형도는 시시각각 변하기도 해서 교사가 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3년 간 6학년을 맡으면서 여자 아이들 간의 관계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특히 교사 앞에서는 한없이 착한 여자 아이들이 SNS 같이 교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들은 너무 낯설고 충격적이다. 여자 아이들 간의 이러한 ‘관계 갈등’은 복잡하고 애매해서 교사를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교사는 또다시 ‘여자는 관계적 동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얼마 전에 어느 교대의 실습 교재 일부를 보게 되었다. 아동 발달에 있어 놀이의 중요성을 서술한 부분이었는데 여기에서도 여자 아이의 관계 지향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숙련된 기능이 필요하고, 규칙이 있는 경쟁적인 놀이를 통해 독립심과 집단 활동에 필요한 조직력 등을 배움으로써 직업 세계에서의 성공을 준비한다’, ‘반면 여아는 인간관계가 발달하며 이는 미래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양육자 역할과 가정의 사적 생활을 위한 준비를 돕는다’, ‘결국 놀이에서 남아는 경쟁을 중시하고, 여아는 관계를 중시하는 데 따라 세상을 보고 사는 것도 달라진다.’ 2018년의 예비 교사들도 여자에게는 관계를 민감하게 돌보는 능력이 있으며, 이에 따라 여자와 남자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배운다.  이쯤 되면 ‘관계 지향성’은 여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여남의 생물학적 ‘성차’에서 비롯된 것이고, 여성의 타고난 특성인 것일까? 아직도 이러한 논리가 통하나 싶다. 성평등 교육이 의무화 되어 있고, ‘성 역할 고정관념’, ‘젠더’ 등의 말이 흔히 통용되는 시대에 말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굳어진 이 생각은 우리에게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여성이 관계 지향적’이라는 결론을 귀납적으로 도출하기 위한 사례와 경험들을 모아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고도 놓치는 혹은 무시하는 반례들 또한 너무 많다. 다양한 개인은 예외가 되어 지워지고, ‘확증 편향’을 통해 여성이 관계 지향적이라는 믿음은 더욱 강화된다. 사진 출처 - 텀블벅  성 역할의 ‘역할’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여성 또는 남성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고 있다. 1990년에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출간하면서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을 창시했다. 젠더 수행성은 젠더가 고정된 본질적 정체성이 아니라, 규범에 따르는 행위와 습관의 반복 그 자체임을 뜻하는 개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사회는 아주 오랫동안 여성이 관계에 복무하도록 만들어 왔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결국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서 언급했던 어느 교대의 실습 교재에서 찾을 수 있다. ‘미래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양육자 역할과 가정의 사적 생활’, 바로 이것이 여성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성, 어린 여자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여자는 딸로서 어머니를 도우며 돌봄과 집안 살림 등의 역할을 보조해야 한다.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며 관계를 챙겨야 한다. 이러한 여자의 행동 특성은 결혼 상대를 찾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조건이 된다. 그렇게 결혼한 여자는 또다시 가족 구성원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관계를 잘 보살피지 않거나 자기 것을 잘 챙기는 여성,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이 가족 관계나 연애 관계, 혼인 관계 등에서 ‘실패’하는 것을 두렵게 만든다. 여전히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다양한 장벽들이 존재하며, 여성의 노동에는 남성의 노동과는 다른 가치가 매겨진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관계일지라도 그로부터 벗어나 자립하기 어렵다. 이는 모두 여성을 사적 영역으로 몰아넣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은 관계에 종속된다. 여성이 이와 같은 삶을 살 때 이익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모든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관계맺음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만 노력이 강요될 때, 관계의 평등은 깨진다. 어떤 특정 인간 집단이 관계에서 희생해야 하는 구조가 있다면 그것이 ‘차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여남의 성차 문제로 환원하려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이 각자 갖고 있는 차이가 이러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이 모든 관계를 끊고 살아야 한다거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이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친절하지 않아도,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웃지 않아도, 아이보다 내 삶을 더 중시해도, 엄마 같은 누나가 아니어도, 가족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친구의 부탁을 거절해도 괜찮다. 여성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관계가 많아질수록 성평등한 사회는 가까워진다.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
2018-06-07 | hrights | 조회: 1703 | 추천: 38
임영훈/ 회원 칼럼니스트  한성 백제, 송파구에 산다면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어릴 적부터 올림픽 공원 근처 둔촌동에 살았기에 풍납, 몽촌토성은 익숙했지만, 한성 백제라는 단어는 쉽게 들을 수 없었다. 지금은 ‘강동, 송파 일대의 토성과 유적들이 백제의 한강 도읍인 한성에서 유래되었다’가 정설이다. 몽촌토성을 품은 올림픽 공원으로 초등학교 졸업 사진을 찍으러 갈 때는 몰랐던 말, 심지어 20대 시절까지도 공원을 자주 갔지만 한성 백제는 기억에 없다.  기억은 십여 년 전부터 서울시가 ‘한성 백제’ 타이틀을 강조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번듯한 한성 백제 박물관이 공원 내에 건립된 지도 이제는 꽤 지났다. 올림픽 공원과 현재 사는 동네인 풍납동의 크고 작은 공원에서는 ‘한성 백제’ 타이틀로 연간 여러 차례의 축제와 전시, 행사를 개최한다.  이런 변화가 사실 ‘나’라는 한 명의 송파구민, 풍납동민에게 그리 영향은 없었다. 집 앞뒤로 유적지란 이름으로 개발이 보류된 공원들이 있어 집을 나설 때면 상쾌한 내음과 함께 비둘기들이 퍼덕대는 정도가 차이다. 말하자면 공원 그 자체는 나의 인권인 쾌적한 생활환경과 더불어, 집주인의 관심사인 집값에도 긍정적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서울시가 한성 백제 사업에 열을 올리면서, 풍납동 일대에 일체의 재개발과 재건축이 사실상 금지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알고 보면 말이 집 앞뒤로 공원이지, 이 두 권역이 유적지라면 그 사이에 위치한 열 몇 채의 집들, 특히나 내가 사는 곳에도 무언가 파묻혀 있을 확률이 높다. 이런 연유로 우리 앞 동만 세 채가 헐려 나갔고, 동네로는 수백 채의 집들이 그대로 공터가 되었다. 서울 시내에 이렇게 공터가 많은 곳은 어디에도 찾기 힘들 것이다.  십 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서울시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기 어렵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곳의 재건축을 금지할 뿐 아니라, 기존의 집들도 궁극적으로 모두 매입해 동네 전체를 ‘한성 백제’로 복원 내지 박물관화 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무도한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이상 이것은 당장은 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재개발이 금지된 집주인들이 시에 (시세보다 비싸게) 사달라고 의뢰한 주택들조차 몇 년은 기다려야 매입이 이루어진다. 현실은 자금 부족, 원대한 이상인 한성 백제의 복원은 느리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다.  글을 쓰면서 복원 사업의 구체적인 보상 방법과 계획을 알아보았으나, 간단한 검색으로는 알기 힘들었다. 대부분 풍납동에 사는 분들이 최근에 집들이 많이 헐린다고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올린 포스팅이었고, 이런 글들의 정보는 서울시의 토성 복원 계획과 보상 방안에 대해 한 다리 건너서 들은 수준이었다. 다만 알아보다 보니 우리 집 근처의 구역에서 헐리는 곳들은 왕궁 추정지로 보였고, 조금은 거리가 있는 토성이 길게 이어진 지역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토성의 완전 복원을 추진하고 있었다. 풍납 토성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지만, 현재 일부는 주택과 도로 등으로 중간중간 끊겨 있다.  과연 한성 백제의 복원이란 것이 가능한지, 또 가능하더라도 한성 백제로 추정되기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해온 원주민들이 점진적으로 ‘소개’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마치 소말리아 소개 작전처럼 이곳의 주민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소개되고 있다. 재건축이 없고 소멸되는 집들은 늘어나므로, 주민은 감소한다. 역사 유물의 보존이라는 지고의 가치 아래서, 일부 주민들은 재산권 제한을 넘어 아예 살던 집에서 떠나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나야 집 없는 전세민으로, 공터에 걸린 ‘재산권 보장하라!’는 플래카드에는 여전히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있던 집이 헐리고 블록 깔린 주차장, 우레탄 깔린 공터로 바뀌는 것이 수년간 반복되니 이제는 혼란스럽다. 공사 전(위), 후(아래)의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정말로 동네 전체가 궁극적으로 없어지는 것일까? 이것이 낭설일지라도, 좀 과장한다면 천 년도 이전에 거주했던 백제인들의 삶의 흔적이, 같은 땅에 거주하는 그 후예들의 생활권에 우선하는 것일까?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재산권을 넘어 실거주권마저 포기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  아직 우리 집이 헐리지 않았기에, 주차장과 공터, 공원이 늘어나니 나에게는 여전히 좋은 현상이다. 그럼에도 철 지난 ‘전 국토의 산업화’란 구호처럼, ‘전 풍납동의 한성 백제화’라는 구호는 뭔가 섬뜩하다. 이곳의 집이 모두 없어지고 한성 백제 시절의 도성, 그날의 이곳을 완성하는 때가 실제로 올 것인지, 그것이 가야할 방향인지는 물음표가 달린다. 동 주민으로서 드는 실질적, 생활적 의문이기에, 인권을 중요시 하는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해석될 지도 궁금하다.  <인권의 발명>이란 책에서는 인권이 필요에 따라 발명된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유물이나 역사에 대한 보존이라는 가치도 시대에 따라 그 경중과 우선이 변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21세기에 들어, 훼손되고 잃어버린 20세기까지도 보상해야 할 것 같은 당위성 아래 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사는 풍납동에서는 그래 보인다.  집과 땅의 가치를 뒤로 두는 동네 공터화, 평탄화는 요즘 같은 부동산 시대에, 사실 신선하다. 그럼에도 한성 백제 복원의 화살이 나에게,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올 때가 머지않았다는 우려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유물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 희생해야 할 사람은 집 주인인 너뿐 아니라 거주민인 나 자신도 곧 포함될 것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올량이면 이렇게 외치고 싶다. ‘거주권이 우선이다!’ 임영훈: 미국에 실을 팔고 있습니다. 가끔 천도 팔지만 어떻게 해야 팔리는지는 모릅니다.
2018-05-30 | hrights | 조회: 1440 | 추천: 11
김현진/ 회원 칼럼니스트  ‘인권’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지 4년째 되는 나는 그야말로 인권꿈나무이다. 그런데 인권을 알게 되면 피곤하고 고급지게 영생할 수 있다는 조효제 교수님의 말처럼, 나도 그 길에 들어선 듯하다. 어떤 현상을 봐도 그 기준을 ‘인권’으로 삼는 나 자신을 보면 참 놀랍기도,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참 매력적이라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덕분에 학교의 풍경들을 인권을 기준으로 바라보고 학생들을 대하는 말과 행동을 인권친화적으로 바꾸고 참 행복한 교사로 살 수 있었다.  나는 2016년도에 강원도교육청의 의뢰로 실시한 학교인권실태조사를 위해 인터뷰어로 참여하였고, 특성화고의 인권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모 특성화고교에 가서 학생과 보호자들을 만났다. 예전에 출퇴근하며 또는 업무차 방문했을 때 보았던 그 학교의 모습(어두컴컴하고, 덩치가 산만한 남학생들이 1300여명이 다니는 학교)을 떠올리며 방문했는데, 실제로 내가 만난 학생들은 생각보다는 밝은 표정이었다(어쩌면 이것도 내 안의 또 다른 편견일 수 있다). 인터뷰에 참가한 학생들은 그 학교 전공과목 중, 상위 성적의 전공과 학생들이었으며 그 과는 일종의 특례가 적용되는 과였다. 특례의 내용은 그 과를 졸업하고 하사관으로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2016학년도에 그 제도가 처음 실시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매우 높은 성적의 지원자가 몰렸고, 100명 이상이 불합격했다고 전해 들었다. 사진 출처 - 경기교육  고교 입학 성적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 친구들은 일반계고에 지원해도 별 ‘문제없는’ 학생들이다. 그런데 면접에 참여한 학생 모두에게 ‘왜 이 학교에 진학했냐?’고 물으니 취업난을 고려해서 지원했다고 답했다. 부모님과 의논 끝에 대학에 가서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공부를 하느니 취업을 빨리 하고 돈을 버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 지원했다는 매우 세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학교 밖에서 A고를 다닌다고 하면 뭐라고 하느냐?’란 질문(특성화고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학생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알기 위해 질문했다)에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음……. 뭐라고 특별히 말을 하진 않는데요, 그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어떤 의미에요?”  “음……. 특성화고 다닌다고 하면 바라보는 그 시선이 있어요.”  “네?”  “제가 다니는 교회에 우리 학교에 합격했다고 했더니, 어른들이나 선배들이 저를 되게 안쓰럽게 바라보더라고요.”  그러자 다른 친구가 밝은 목소리로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취직하기 어려운데 참 대견하다고 해요.” 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특성화고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3학년 1학기가 끝나면 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이것도 전망이 좋은 과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부터 순서대로 나간다. 전망이 좋은 과 소속이라고 해도, 자기 전공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실습을 하게 되면 다행이다. 그러나 몇 년 전 모 특성화고 인터넷 비즈니스과 전공학생이 대형 패밀리 레스토랑 주방에 취업했다가 그 곳의 폭력적 분위기와 구타 그리고 강도 높은 노동을 견디지 못한 끝에 자살한 사건(거의 묻혀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을 보면 비단 좋은 전공학과라고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적이 우수하다고 원하는 곳에 실습을 나간다고도 볼 수 없다. 그렇게 죽은 학생에게 ‘그렇게 의지가 약해서 밥은 먹고 살겠니?’라는 댓글만 달리지 않아도 꽤 괜찮은 사회이다.  모 특성화고의 보호자들을 면접할 때 들은 어느 보호자의 건의사항이 떠오른다. 애들이 실습 나가기 전에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보호자의 얘기에, “노동인권교육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했더니.  ‘네, 그게 그거 맞죠? 실습 나가서 죽었다는 애들 기사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요.’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너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비슷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 말고, 그들이 만날 노동현장의 현실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교와 사회는 언제쯤 만들어질까? 마이스터고에 진학한 친구들은, 정말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마이스터고를 밀어붙인 그 권력자가 마이스터의 의미는 알고 그랬는지는 의심이 되지만.  김현진 : 18년 간 국어교사로 살다가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직업을 바꾼 철들기 싫은 어른
2018-05-23 | hrights | 조회: 1296 | 추천: 9
김시형/ 회원 칼럼니스트  “고객님, 택배가 두 개 있는데요?”  처음엔 무슨 소린가 싶었다. 최근에 무인택배함을 이용하면서 발송자가 내 연락처를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나는 무인택배함 비밀번호 알람 메시지를 못 받는 중이었다. 6개월 전에 택배 하나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왜 택배가 안 오지 싶으면 바로 택배사 홈페이지를 검색한다. 배송 추적을 확인해보니, 분명히 무인택배함에 도착해 있었다. 6개월이 흘러간 사이에 무인택배실은 리모델링 되었고, 무인택배함도 모두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새로운 무인택배함에는 고객센터 전화번호가 큼직하게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전화를 걸어보니, 이번에 배달 된 택배뿐만 아니라 예전에 잃어버린 택배도 고스란히 무인택배함에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약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택배 사진 출처 - 필자  고객센터에서 원격으로 조종해서 무인택배함 문을 열어주었다. 열어보니, 정말 내 택배가 있었다. 택배 아저씨께서 바닥에 두고 가셨다는 택배가 리모델링한 새무인택배함에서 발견된 것도 이상하다. 사실 황당하기도 해서 발견한 상태로 고스란히 기숙사 방으로 가져와 사진으로 남겼다. 택배 봉투가 왜 이렇게 심하게 손상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누가 건드린 것일까?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한다. 그래도 찾았다는 데에 의의를 두자며,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접는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난 뜬금 없게도 세월호를 떠올렸다. 찾은 시기는 올해 4월 초이다. 난 택배 봉투가 심하게 손상된 모습을 보면서 4월하면 연상되는 세월호가 떠올랐다. 어쩌면 얼마 전에 본 영화인 「공동의 기억: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내용 중에 목포에 거치되어 있는 세월호를 보면서, 세월호를 건져 올린 것으로 끝이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참에 생존자의 인터뷰도 참고할 만하다.  “생존학생들은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구조된 게 아니라 탈출했다고 말해요. 왜 사고가 아니라 사건인지, 구조가 아니라 탈출인지 한 번쯤 모두가 의문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그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의문을 풀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생길 테고 그 한 명이 우리와 함께할 거라고 믿어요” (세월호 생존자 김도연 양의 말, 한국일보, 2017년 4월 16일자)  택배 한 두 개 정도야 잃어버릴 수도 있고, 피해가 경미하다보니 그 원인들을 파헤치는 일도 대충 접어도 된다. 하지만 세월호는 다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마치 일개 사고로 취급하고 원인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제2의 세월호 참사’, ‘제3의 세월호 참사’가 기다릴 수 있다. 세월호 참사는 사건이다. 그것도 국가가 국민의 보호 의무를 저버렸을 때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대형 참사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활동하게 될 2기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게 갈채를 보낸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김시형 : 윤리를 지식이 아닌 ‘삶’으로 이해하는 대학원생
2018-04-26 | hrights | 조회: 1057 | 추천: 6
서진석/ 회원 칼럼니스트  대학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혼자 여행을 떠났다. 오랫동안 못 본 가족들을, 취업하면 또 언제 볼까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다. 또, 바닷가에서 제철을 맞은 방어도 먹으며 식도락 여행도 겸할 심산이었다. 테마도 있고, 먹는 맛도 있고, 반갑게 만날 가족도 있으니 값진 여행이 될 것 같았다. 부산을 시작으로 순천, 광주를 거쳐 돌아오는 계획을 짰다. #부산  첫째 사촌형은 결혼 전보다 살이 많이 불어 있었다. 형은 갓 돌이 지난 조카를 처음으로 보여줬다. 자신을 닮아 장군감이라고 이야기하는 형의 얼굴엔 봄꽃처럼 밝고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들자랑이 끝나자 형은 방어가 제철이라며 집근처 횟집으로 안내했다. 활어회와 마시는 술에 취하는 줄도 모르게 술병은 쌓여만 갔다. 그러다 최고의 이적료를 받고 이적한 축구선수 호날두에 자신을 비유하며, 새 직장을 자랑하던 형의 안색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갓 아빠가 됐는데, 왜 할아버지 역할까지 해야 할까”. 대학 졸업 직후 대기업에 입사한 형은 돌아가신 큰아빠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 형이 처음으로 푸념을 뱉어냈다. 그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항상 당당하고 모든 걸 아는 것 같아 보였던 형의 처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다음 날 새벽출근인 형을 위해 자리를 일찍 정리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조카를 재우고 있던 형수의 몰골은 무너지기 직전이었지만 조카를 보는 눈만은 반짝였다. 마치 형과 형수의 삶은 조카의 그림자 같았다. #순천  갓 취업한 둘째 사촌형을 만났다. 형은 호기롭게 “첫 월급 탔는데 먹고 싶은 거 다 먹자”며 위대(大)한 나의 식성을 자극했다. 나는 순천에서 가장 맛있는 고기 집을 찾아내고 말았다. 메뉴판을 보고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도 취업하면 한 턱 내지, 뭐’라는 기약 없는 약속으로 죄책감을 물리쳤다. 고기를 먹으며 사촌형의 첫 직장생활을 물어봤다. “취업하니깐 좋아?”. 사촌형은 말없이 소주만 삼켰다. 약간은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사촌형의 입이 열렸다. “내가 이러려고 취직한 건지 모르겠다”. 사정을 들어보니 형은 ‘쓰레기(담당)’로 불리고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형의 첫 업무는 쓰레기 관련 민원처리였다. 매일같이 ‘쓰레기’로 불리며 쓰레기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게 형은 너무 힘들다고 했다. 기대했던 직장생활과 너무 달라서 괴롭다고 했다. 형의 긴 수험생활의 끝이 아름다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술을 잘 못 먹는 형은 그날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웃음인지 슬픔인지를 건네며 내게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보니깐 좋다, 진석아” #광주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잠시 작은아빠를 만났다. 오랜만에 본 그의 모습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작은아빠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항상 교통비 이상의 ‘차비’를 주시며 별로 잘날 것도 없는 조카가 자랑스럽다고 말해준다. 그런 작은아빠는 사실 정만큼이나 아픔도 많다. 술에 취할 때면 종종 불쑥 화를 내는데, 가슴이 너무 아파서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오래 다닌 직장에서 잘리고, 외숙모가 떠나자 작은아빠는 지금처럼 약해져버렸다. 그는 항상 웃어주며 “우리 멋진 조카”를 외쳤었는데. 지금은 많이 야위었다. 아마도 그래서 비싼 옷과 세련된 머리스타일을 고집하는 지도 모른다. 광주를 떠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여행 중 처음으로 후회했다. 차마 드리지 못한, “작은아빠, 건강 생각하셔서 약주 좀 줄이셔요”라는 말이 허공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가족들의 얼굴이 한 명씩 떠올랐다. 새로운 가족을 꾸려나가는 형, 직장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형, 세월의 풍파로 생기를 잃어가는 작은 아빠. 가족은 무엇일까. 창가에 비친 내 얼굴에 질문을 던지니, 가족들의 웃음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봐서 좋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차비로 써라, 그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가족을 꾸리는 건 삶의 주어가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는 과정일 것이다. 나의 행복이 최우선이었던 모습은 과거로 남겨두고, 나는 잠시 희생되기도 한다. 자식의 웃음, 동생의 성장, 형의 아픔이 한 데 어우러져 우리라는 단위로 공유된다. 못난 모습에도 잠시 기다려주고, 힘들 때 위로를 건네고, 맛있는 걸 함께 먹으며 같은 시간을 보낸다. 여기엔 어떤 조건도 부담감도 없다. 그저 가족이기만 하면 된다. 가족이 주는 조건 없는 위로는 하루를 버티고 새로운 날을 만들어갈 힘을 준다. 바로 이런 힘이 ‘비혼’과 다양한 가족형태가 등장 하는 사회 속에서도, ‘가족’을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로 유지시키는 게 아닐까. 비록 가족이라는 이름과 형태가 바뀔 지라도 말이다. 여행과 가족의 의미를 정리하니, 만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가족들이 벌써부터 보고 싶어진다. 서진석 : 기자가 되기 위해 배우며 살고 있습니다.
2018-04-10 | hrights | 조회: 1194 | 추천: 5
서동기/ 회원 칼럼니스트  나도 모르게 내 이름으로 가입된 펀드상품이 있었다. 한참 펀드 붐이 불던 2007년, TV에선 <경제야 놀자>와 같은 금융 프로그램이 유행을 했다. 투자가 어떻고, 펀드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지방에 살던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당시 각종 언론에서는 투자를 해야 성공한다고, 남들 다하는 금융상품에 함께 하지 않으면 멍청한 것이라고 부채질을 해댔다. 그럴 듯한 말들에 혹한 어머니께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펀드상품에 가입하셨다.  하지만 한 달에 5만원씩 85만원을 적립했을 때,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터졌다. 반 토막이 나고 연일 깎여나가는 잔고에 깜짝 놀라 돈을 더 넣지는 못하셨지만 허탈한 나머지 쌈지에 가지고 계시던 통장을, 어머니는 10년 만에 꺼내어 등록금에 보태라고 건네셨던 것이다. 가입되어 있는 상품의 이름은 <삼성그룹적립식증권투자신탁1호>. 막연하게 투자처를 찾던 어머니는 안정적일 것이라 생각한 삼성그룹 펀드에 가입을 해두셨다.  그런데 해지 신청서를 작성한 타이밍이 참 묘했다. 지난 2월 2일, 금요일이었다. 은행 직원은 주말을 끼고 영업일을 기준으로 월요일이 지나, 2월 6일 화요일 주식시장의 종가를 기준으로 최종 환급금액을 산정해준다고 설명했다. 별 생각 없이 은행을 나왔는데 괜스레 삼성의 주가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삼일 뒤인 월요일에 이재용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진출처 - 필자   ‘이재용이 월요일에 석방되면 화요일 삼성 주식이 더 오르려나?’   ‘이재용이 풀려나면 주식이 좀 뛰어서 한 3만원은 더 받지 않을까?’  나는 그날 저녁부터 직원의 권유로 설치한 어플리케이션으로 금액을 들춰보면서 펀드 환급금을 많이 받는 데 도움이 되는 판결은 무엇일지를 곰곰이 따지고 있었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김용철 씨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분노하고, ‘삼성공화국’을 비판하는 기사들과 칼럼에 공감하던 나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적극 도왔던 삼성의 행태에 분노하고,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삼성도 공범이다’를 외치던 나는 어머니가 등록금에 보태라고 10년 만에 꺼내주신 삼성펀드 통장을 손에 들고 이재용의 석방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이재용의 석방이 주가를 올려 줄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왜인지 나의 논리회로는 이재용이 석방되면 삼성에 좋은 일이고, 주식에도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고, 펀드 환급금에도 좋은 영향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참 소박하고 후진 생각이다. 굵직한 재판이 풍년인 요즘 판결 소식을 들으면 이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대부분 피식 부끄럽고 마는데, 가끔 이 기억이 무섭고 두려울 때가 있다. 서동기 :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읽고 묻고 공부하는 중입니다.
2018-04-04 | hrights | 조회: 1013 | 추천: 10
조예진/ 회원 칼럼니스트  꽃피는 3월이 다가온다. 학생들도 그렇겠지만 교사들도 3월이 두렵다. 올해는 어떤 나날이 펼쳐질까. 수월하게 지나가는 해가 있고, 뭐 하나 그냥 넘어가지 않는 해가 있다. 무사한 한 해를 기원하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각오를 하며 집을 나서는데 여전히 바람은 쌩하니 불고 봄은 멀리 있는 듯하다.  작년에 여기저기 몸이 아팠다. 예전부터 약했거나 꾸준히 살폈던 부분도 있었지만, 건강검진 결과 자궁 쪽이 좋지 않다고 나왔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산부인과에 들렀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겠지만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각오가 필요하다. 굴욕의자에서 검진 받을 때 불편한 것은 둘째치고, 진료실에서는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이다. 상태를 설명하신 의사 선생님께서는 주 2~3회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고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셨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조신하게 앉아 있지 않으면 혼날 것 같았다.  진료실을 나와 병원의 진료 시간을 확인해보았다. 평일 오후 6시 진료 마감, 5시까지는 접수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검진 결과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앞으로 진료 받을 생각을 하니 더 복잡해졌다. 수업 시간표를 확인했다. 화요일에 7교시 수업이 없으니, 화요일에 병원에 가는 것이 낫겠다. 5시까지 병원에 도착하려면 수업을 바꿔야 하는데 쉽게 바꿀 수 있을까. 조퇴할 때 무슨 이유를 대야 할까. 종례와 청소는 누구에게 부탁할까.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학교는 말이 빠른 곳이다. 2층 교장실에서 한 얘기가 5층 교무실까지 퍼지는 데 30분이 안 걸린다는 말이 있다. 나도 모르는 학교 이야기를 우리 반 아이들이 시시콜콜 먼저 알고 있기도 한다. 걱정을 빙자하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싫었다. 나의 조퇴 사유는 치과 진료, 은행 업무, 가족 간병 등으로 매번 바뀌었다. 사람 좋은 남자 학년부장은 내가 말하는 여러 핑계를 그냥 넘어가 주었고, 자주 조퇴를 달았는데도 윗분들은 내 조퇴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 아이들은 내가 없으니 청소를 더 잘하고 더 밝은 것 같았다. 사진 출처 - 필자  병원에 온 환자들은 20대에서 60대까지 나이가 다양해 보였다. 큰 병원으로 옮긴다며 진료실을 나서며 눈물짓는 어느 환자의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았다. 아프다는 판정을 받으니 배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화장실도 자주 갔다. 괜히 마음이 우울해졌다. 별일 아닌데도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내가 자주 일찍 나가는 것을 걱정한 몇몇 여선생님들에게만 사실을 공유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병을 앓고 있었다. 며칠 동안 인터넷으로 검색한 무시무시한 병명들을 대충 다 들은 것 같았다. 공통점은 대부분 나처럼 여러 핑계를 대가며 혼자 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서 수업을 하는 교사들에게 자궁 질환이 흔한 건 당연한데도 산부인과 검진을 꺼려, 1년에 한 번씩 받아야 하는 자궁경부암 검진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동료들도 여럿이었다.  10년째 학생들의 선호 1위 직업이라는 교사들조차 아프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이 세상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아픈 것을 참고 화장실을 못 가며 일을 하고 있을까 짐작되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하며 병원은 다닐 수 있을까. 몸이 아픈 것을 자기 관리의 문제로 치부하지는 않을까. 당장 학교에서도 몸이 아파 조퇴하고 싶다는 학생에게 일단 참아보라고 하지 않는가.  미투(#MeToo) 운동이 한창이다. 나도 아프다, 나도 사람이다, 라는 외침이다. 유난히 뉴스를 많이 봤던 작년처럼 세상에 많은 관심을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사람들이 덜 아팠으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올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 같다. 3월이 온다. 봄이 온다.   조예진 :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는 좋아하지만 수능 필수 한국사는 싫어합니다.
2018-03-06 | hrights | 조회: 1408 | 추천: 8
방효신/ 회원 칼럼니스트  2월은 졸업 시즌이다. 요새는 학생 대표뿐 아니라 모든 학생이 단상에 올라가서 졸업장을 받는 편이다. 취지는 좋으나 졸업식을 준비하는 교사들 사이에서 간단치 않은 성 정치가 펼쳐진다. 사회에 비해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학교에서 자신의 직급과 나이, 성별을 확인하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정장을 차려입은 일반 교사가 긴 탁상에 쌓인 졸업장을 하나씩 챙겨서 교장에게 건넨다. 교장은 전달받은 졸업장을 다시 학생에게 준다. 졸업장 내용은 단상 아래에 있는 부장 교사가 마이크를 잡고 대신 읽는다. 교장 혼자 해도 될 일을 세 명이 나눠서 진행하는 모습은 흡사 행위 예술인가 싶은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꽃순이’가 누구였는지 뒷담화가 꼭 있다. 학교에서 가장 젊고 예쁜 여교사가 남교장 옆에 서서 졸업장이나 꽃다발 건네기, 즉 시상 보조를 한다. 졸업식 행사를 주관하는 교무부장은 업무 지시를 빙자하여 ‘꽃순이’ 역할을 ‘어떤’ 교사에게 미리 부탁한다.  부탁을 받든 못 받든 교사는 기분이 나쁘다. 부탁을 받은 교사는 없던 정장을 사면서 ‘왜 그 때 거절 못했지?’, ‘내년에는 내가 안 하겠지!’ 하고 후회한다. 부탁을 못 받은 어떤 교사는 ‘이제 나도 한물 갔구나’ 자책하거나 ‘뭐가 부족하지?’라며 씁쓸해 한다. 며칠 전, 경기도의 모 중학교에서는 비슷한 나이의 여교사 2명이 ‘꽃순이’ 역할을 부탁받았다. 교무부장은 졸업식 당일 차림새를 훑어 보고 1명을 ‘초이스’했다.  공적인 자리에서 폭력적인 경험을 당하면 시간이 지나도 자꾸 생각난다. 나는 발령받은 첫 학교에서 신규교사 환영식 때 치마 정장을 안 입었다며 교무부장에게 따로 불려가서 한소리 들었다. 출근 전에 자꾸 옷차림을 점검하는 내 모습이 싫어졌고, 이듬해 2월에 졸업식 꽃순이는 당연히 안 시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외양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였다. 20대였던 그 때 졸업식 시상 보조를 맡았는데 이걸 부탁하는 부장교사가 나더러 ‘영광으로 알라’며 어깨를 툭 치는 것이다. 나이와 외모를 기준으로 남자 교장에게 대응하는 여교사를 선발하는 관례에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걸까? 선발되는 순간, 부조리함을 알았으니 내 얼굴 표정은 일그러졌고 다시는 시상 보조를 맡지 않았다. 어느 초등학교 졸업식 풍경. 주인공은 누구인가? 사진 출처 - 필자  ‘성’이 매개가 되어 권력관계를 확인하고 억압이 관철되는 것은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다. 결혼 휴가를 받기 위해 교장에게 소식을 알리면 “임신한 건 아니지?”라는 말을 먼저 듣는다. 남교사들끼리 모이면 학교 내 여교사들의 외모 순위를 매기고, 얼굴 성형 여부에 내기를 건다. 교육청 내 배구대회 응원이라며, 선수가 아닌 교사들도 회식에 동원되고 선수로 활약한 교사는 모두 앞에서 교장에게 러브샷을 제안받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거절도 못한다. 은밀한 성추행은 아닌지라 문제 제기하기도 뭣하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선호하는 시대라 초등학교에도 남교사가 많아졌다. 여교장은 예전에 당신이 당했던 희롱 방법을 성역할만 바꾸어 소비한다. 졸업식 시상 보조에 어리고 준수한 남교사가 선발되고, 아무도 가지 않는 교장 옆자리에 앉아 물이라도 권해야 한다. 마초 같지 않으면, “너 게이냐?”라는 공격을 받는다. 여교사들은 나이가 들면 성차별적인 업무를 젊은 여교사에게 떠넘기기라도 하는데, 남교사들은 ‘남자이기 때문에‘ 힘든 업무를 더 맡는 경향이 있어서 억울해 한다. 성평등을 외치는 여교사들이 오히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키보드로 분풀이한다.  교직 사회가 여초집단이라, 친여성적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초사회인 병원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나 선정적인 장기 자랑 사태를 보라. 사회가 이렇게 성폭력적인데, 어느 직장인 들 오고가는 말과 눈빛이 안전할 수 없다. 최근 여자 검사들의 성희롱 경험 드러내기, 최영미 시인이 쓴 문단 내 ‘괴물’ 시인 이야기, 연극 연출가의 성추행 파문을 보며 교직의 #미투 사건도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성희롱으로 징계된 충북이나 인천의 교장 사례는, 당시 피해자의 용기와 저항으로 드러난 일부에 불과하다. 선후배, 업무 지시, 전보발령, 승진 점수, 성과급, 학년배정 등의 이유로 꽃순이들은 눈을 질끈 감는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 착각한다. 성희롱은 지속된다, “저는 불편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방효신: 초등학교 교사, 전교조 조합원, 페미니스트. 세상은 바뀌나요?
2018-02-21 | hrights | 조회: 1489 | 추천: 31
김시형/ 회원 칼럼니스트  퇴사를 준비하는 중이다. 이번이 두 번째 퇴사이다. 이번 퇴사는 이미 예정된 터였다. 유아휴직 대체근로로 약 10개월 기간을 계약하고 입사하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직장에서 평생직장이었으면 했던 막연한 꿈이 상실되어서 그런지, 두 번째 퇴사는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담담하게 준비하고 있다. 두 번째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박사학위 논문을 순전히 내 힘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현재로서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온전히 내 자신 뿐이다.  두 번째 직장은 첫 번째 직장과는 달리 회사 분위기가 좋았다. 수직적인 관료제는 커녕 대다수 임원들이 일반 직원들을 수평적으로 대한다. 또한 시차변형 출근제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유연하여 직장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돕는 측면도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직장에서는 계속 일하고 싶었다. 학위 논문을 마치면 논문을 마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직장은 계속 다니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기대감을 무너뜨린 것은 지난 연말에 있었던 논문 심사와 관련 있다.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내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안위만 급급하게 살피는 지도교수의 ‘태도’를 경험하면서, 논문을 끝내지 않으면 기약 없이 지도교수에게 질질 끌려 다닐 수 있겠다는 경각심이 생긴 것이다.  칼럼을 통해서 지도교수의 태도를 고발하고 더군다나 험담하겠다는 의도는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해둔다. 오히려 학풍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내가 겪은 일은 기록하여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왜 지도교수는 학생이 논문을 검토해달라고 지난해 5월부터 요청했는데도 묵묵부답이었을까? 그리고 항상 자신의 시간에만 맞춰서 그리고 자신의 일정에 따라 아무 소식도 없이 미국으로 날아갔다. 지도교수 역할이 논문 심사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당신이 알고 있었더라면 미리 언질을 해주든지, 또는 당신이 1년 동안 연구년이기 때문에 지도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지도를 할 수 있도록 위임을 하든지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다행히 논문심사 위원회가 구성되고 심사 위원장님과 다른 심사위원님들의 배려로 지도교수 없이 논문 심사 날짜가 잡혔다. 지도교수가 연구년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시간이 허무하게 날려버릴 뻔했다. 그런데, 막상 심사일정이 잡히니까 미국에 있는 지도교수는 심사 전날이 되어서야 코멘트를 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방학동안 펑펑 놀던 초등학생이 밀린 방학숙제를 처리하듯이. 그런 코멘트는 지도교수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도 보낼 수 있었던 거였다. 그나마 심사 당일에 받은 코멘트조차도 완전한 코멘트는 아니었다. 이렇게 기를 쓰고 종심을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연출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코멘트인가? 결국 작년에 딱 1번 코멘트를 받았다.  지난해 ‘연세대 텀블러 폭탄’ 사건의 대학원생은 몇 달 전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그 대학원생이 그렇게라도 했을까 싶다. 그런데 이 대학원생의 지도교수는 질책이라도 했지. 나의 경우는 ‘방치’다. 하지만 학생이 끊임없이 요청하는 것에도 약 10개월 동안 반응하지 않다가 심사 일정이 잡히니까 바로 전날에 반응하는 지도교수의 모습을 보면서 울컥했다. 코멘트는 일종의 ‘공격’인데, 나에게 전혀 ‘방어’할 수 있는 시간을 안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너 왜 이렇게 못 싸우니?’ 하지만 난 어디에서도 항변을 할 수 없었다. 실컷 두들겨 맞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구석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애초에 입학할 때 물어야했을 물음을 묻는다. 대학원은 과연 어떤 목적을 지닌 걸까? 학교는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가 아니다. 학생은 대학원을 유지하고 교수 월급을 유지시키는 상품이 아니다. 적어도 학교 본연의 기능인 교육을 수행하는 기관이 아닐까? 먼저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박사학위를 받을 사람을 키워내는 기능은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교육기능을 토대로 박사과정 학생과 지도교수가 ‘연구 동료’가 되어서 지금 여기에 등장하는 전공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는 토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박사과정 학생만 죽어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교수도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몇몇 동료들에게 내가 지난 연말에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면 ‘네가 참어’, ‘원래 그래’, ‘조심해. 괘씸죄에 걸려서 학위 못 받을 수 있어’, ‘원래 지도 교수는 지도 안 해’ 등의 대답이 일반적이다. 내가 기대하는 대학원과 현실의 격차가 참으로 크다. 옛말에 제자는 학문으로 낳은 자식이라 하지 않나? 하기야 요즘 세상에 학문하는 교수를 찾은 내가 바보 같다. 물론 순수 학문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이해하고 실무적인 논문을 지향했지만, 지도교수는 실무적인 논문도 거들떠보지 않은 채 10개월을 흘려보냈다. 지도교수는 학생이 원고를 써서 봐달라고 아무리 요청을 해도 묵묵부답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지도교수가 전화하면 연말·연초에 바쁜 업무 다 제쳐두고서라도 전화를 받지 못하면 무례한 학생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코멘트를 단 1번이라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게 생각해야 하고 박사과정은 지도교수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심리적 주눅이 깔린 분위기 속에서 내 안에서 자책감만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자책감이 무서운 사실은 애초에 내가 품었던 연구 열정이 사라지도록 만든다. 아이러니다. 대학원은 연구열정을 키워주는 공간이어야 하지 않은가? 출근길에 우연히 찍은 사진 사진 출처 - 필자  퇴사가 한 달이 채 남지 않던 출근길에 뜻하지 않은 플랜카드를 보았다. 사실 어릴 적부터 무난하게 성장해오고 부모님도 나의 의견을 항상 존중해주셨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 나의 일정이 휘둘리는 경험을 못한 탓일까? 그래, 내가 너무나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반성한다. 그동안 ‘갑질’이라는 말에 대한 이해를 진심으로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갑질’이라는 말이 내 가슴을 깊게 후비고 지나간다. 학생의 형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안위만 급급하게 챙기는 지도교수의 ‘태도’가 갑질이다. 이 갑질은 비단 나의 지도교수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지도하는 사람이라면 주의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갑질은 노사관계와 더불어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 숨어있고, 대학원의 현장에서도 만연된 문화이다.  플랜카드를 만드신 을께서 보낸 메시지는 내 안에서 천둥처럼 울린다. 지도교수 앞에서 끽 소리 할 수 없는 을 중의 을, 나는 대학원생이다. 플랜카드에서 보여준 을이 보내준 용기에 힘입어 나도 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기로 한다. 갑질에 굴복하여 논문을 관두는 것이 아니라, 갑질과 싸워 승리하고 싶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오래된 격언을 믿으며 직장인이란 옷을 벗고 오로지 대학원생이 되어 펜을 들고 일상에 숨어있는 갑질과 싸우련다. 내가 겪은 갑질은 끝나야 하니까. 김시형 : 윤리를 지식이 아닌 ‘삶’으로 이해하는 대학원생
2018-02-20 | hrights | 조회: 1060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