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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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현진, 박선영, 임영훈, 정석완, 조소연, 주만, 주윤아, 최우식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그 애, 수능 전에 자살했어.” 한 통의 전화로, 연락이 안 되던 친구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통화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스무 살의 봄, 나는 오랜 친구를 잃으며 20대를 맞이했다. 그녀는 대학 문턱을 넘기 위해 스스로에게 매겨지는 성적 등급을 올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1등급, 2등급 그리고 3등급. 성적이 점점 떨어질 때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이 못 먹는 고기가 되어간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능이 가까워 왔을 때, 자신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열아홉 살에 삶을 포기했다. 안타깝게 떠나간 어린 시절의 친구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나에게 있어 그녀의 죽음은 나와 주변인들에게 한정된, ‘개인적인’ 비극이었다. 내가 또 다른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지난해 여름, 한 여성이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그녀는 부당한 해고를 당하고 수년간 투쟁해온 KTX의 여승무원 중 한 명이었다. 오랜 시간 눈물과 고통 속에 투쟁했으나, 그녀들은 끝내 코레일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패소했다. 법원의 판결이 약자에게 등을 돌린 순간, 코레일에 내야 하는 고액의 반환금은 가족이 함께 짊어져야 하는 빚이 되었고 여승무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녀들의 마지막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은 ‘KTX 여승무원 투신자살’이었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오래전 친구의 죽음이 겹쳐졌다. 어린 시절의 내 친구는 모범생이었다.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전전하는 하루의 끝에 친구와 통화하며 숨을 돌리는 짧은 시간조차 ‘낭비’라는 죄책감을 느끼던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오롯이 착한 학생이었던 그녀가 평가 제도의 압박에 지쳐 잠시 휘청거렸을 때, 사회의 입시 교육 제도에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여지와 대안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안타깝게 삶을 마감하지 않고 성장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아마도 여승무원이 마주한 현실을 그녀도 마주했을지 모른다. 성실히 근무한 끝에 부당한 처우를 마주하고, 그 부당함을 감내하지 않으면 해고를 당해야 하며, 사회 정의를 세우는 기관에 의해 벼랑으로 내몰리는 현실 말이다. 과연 그들의 죽음에 자살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 인간보다 힘이 강한 거대 자본의 사회와 그 사회를 위해 인간을 순위 매겨 평가하기 위한 제도는 필연적으로 비인간적 고통을 양산한다. 사회가 구조적 문제로 인해 생겨난 개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감내’를 강요하는 것이다. 구조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감내한 이들은 사회인,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해고자, 탈락자, 폭도로 내모는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여승무원과, 어린 학생. 그들은 견디기 어려운 사회에서 더 이상 걷지 못해 날아올랐다. 사회구조가 요구하는 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결국, 인간이 살지만 인간적이지 못한 사회 구조에 의한 타살이었다. 비인간적인 사회 구조로 인해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의 죽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날은 해고당한 가장이, 어느 날은 군대 사회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린 군인이. 또 어느 날에는 어린 자식을 차디찬 바닷속에 낡은 배와 함께 묻어야 했던 부모가.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사회 구조로 인해 죽어가도, 사회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인간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사람과 함께 상실하고 있는 또 하나가 있다. 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의미다. 우리는 사람을 잃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무뎌지고 있다. 무딤을 넘어 죽음을 조롱하고 피붙이를 잃은 유가족이 시체를 팔아 돈을 번다는 참혹한 말이 공감을 얻어내는 사회가 되었다. 이 속에서 하나의 죽음도, 수백의 죽음도 사회를 바꾸는 물음이, 외침이 되지 못하고, 그저 한해의 사망 통계 속의 숫자로만 기록되고 있다. 누군가 유족과 고인을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해도 사회에 이를 저지할 기제가 없고, 정치권력은 사람의 죽음 앞에 쉽게 등 돌린다. 이는 우리 사회에 사람의 가치에 대한 내면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도, 사람을 함부로 잃어선 안 된다는 것도 사회의 인식 속에서 흐려지고 있다. 사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식과 무엇이 옳다는 견고한 합의가 없으니 사회의 주체가 거꾸로 되어간다. 구조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구조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양상이다. 비인간적인 구조는 치밀하게 모습을 감추고, 문제를 축소한다. 문제의 원인을 일부로, 개인으로 돌리고 은폐와 축소, 대타를 통해 문제를 잠재우고 존속해 나가는 것이다. 제2의 세월호가 되어가고 있는 옥시 사태 또한 명백한 구조의 문제다. 비인간적 평가제도, 경제 구조에 지쳤으면 벼랑으로 밀려나지 않고 쉴 자리와 대안을 찾을 여지가 필요하고, 잘못된 구조로 인해 사람을 잃었으면 구조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조를 향한 당신의 물음이, 외침이 절실하다.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인이 아닌, 구조를 향한 물음이. 사람을 잃는 것은 아프고, 막지 못한 것은 부끄러워야 한다. 우리가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더라도, 더 이상의 상실을 막기 위해 물음을 던져라.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치지 않고 물음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왜 잃게 되었는가를.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8 | 추천: 0
최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목욕탕에 가면 자주 마주치는 아이들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생 5명이다. 목욕탕 아래층 수영장에서 수영수업을 마치고 목욕탕으로 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체력이 끝내준다. 수영을 하고 난 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운 넘친다. 다이빙은 기본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 싶으면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수영과 물총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로 인해 욕도 많이 들어먹었다. 내가 본 것만 5번이 넘는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어른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야, 이건 하지 말자. 혼나겠다.”하며 난동(?)을 자중한다. 어른들이 한꺼번에 목욕탕으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마을 앞 장승처럼 얼음이 된다. 철이 든다는 게 저런 건가 싶어 재미있기도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론 안쓰럽기도 하다. 며칠 전이었다. 그날도 그 아이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온탕에 앉아 눈망울이 시뻘게져 있었다. 남탕 관리인에게 된통 혼이 나고 있었다. “야 이 XXX야. 문 닫고 다녀. 가정교육 어떻게 받았니?” 목욕탕 문이 약간 열려있었던 모양이다. “실수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기가 죽어 변명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괜찮아”라는 위로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들과 처음 대화했을 때가 문득 생각났다. “수영하면 재미있니?”라고 묻자, 아이들이 하나같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엄마가 시켜서 하는 수영은 재미가 없다고 했다. 의아했다. 내가 어릴 적만 하더라도 수영장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요즘 아이들에게 수영은 국어나 영어와 같은 학교 수업의 연장선이었다. 사교육에 지친 아이들에게 목욕탕은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시간이었다. 목욕탕에서 떠드는 건 분명 잘못된 행동이다. 하지만 나름 노력하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어른들의 경멸 어린 시선과 악담이 아이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히는 건 참 안타깝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아이답고, 아이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때론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잘못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아이니까. 잘 모르니까. 잘 타이르고 따뜻한 말로 알려주면 된다. 그게 어른들의 역할이고 사회의 역할이다. 우리 사회는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가 아이다우면 철이 없다고 한다. 아이가 어른스러우면 대견하고 착하다고 칭찬한다. 마치 철없는 아이는 비정상적이고, 철든 아이가 정상적인, 교육을 잘 받은 아이인 듯하다. 대개 아이들의 어른스러움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때가 많다.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가난과 빈곤, 가족의 부재, 혹은 학대의 결과물인 경우도 많다. KBS 다큐멘터리 <동행>에 나오는 부모를 보살피는 어른스러운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게다. 아이도 어른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정작 어른이 된다면 더 이상 아이스러울 수 없다. 아이스러움, 아이다움은 아이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권리다. 그들의 아이스러움을 박탈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지나친 강요이자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철들다’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른스러움을 바라는 생각은 철없는 생각이다. 최지영씨는 국정화 교과서와 위안부 문제 등의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9 | 추천: 0
오민석/ 청년 칼럼니스트 전 세대보다 못살게 되는 최초의 세대, 전후 가장 희망 없는 세대. 청년 세대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열정페이, 비정규직, 좁은 취업문 등 청년들이 마주한 문제들을 나열해보면 끝이 없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한 세대 전체가 소수자가 되어버렸다. 절망과 함께 자존감도 추락하고 있다. 최근 SNS 등에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맨몸으로 차도에서 굴러다니거나, 자동차 바퀴에 다리를 깔아 부러뜨리기도 한다. 일상의 낮은 만족감을 일탈로 채우고 있다. 극우 성향 젊은 누리꾼의 집합소인 일베는 날이 갈수록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자라는 세대는 괜찮을까? 나날이 심각해지는 가정폭력 사건들이 모든 걸 말해준다. 가정에서 당한 폭력을 밖에서 다른 아이에게 되갚아준다. 폭력은 돌고 돈다. 최근 학교폭력 방지 교육 등으로 표면적인 학교폭력은 적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대신 스토킹 등 새로운 유형의 학교폭력이 증가했다. 폭력 그 자체가 없어지진 않았다. 근본적으로 변한 건 없다. 일본에서는 청년세대를 ‘유토리 세대’라고 부른다. 2000년대에 주입식 교육을 개혁해서 조금 여유로운 교육(유토리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일본 기성세대는 유토리 세대의 특징으로 ‘나약하고, 쉽게 좌절하고, 꿈꾸지 않고, 시키는 것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등을 꼽는다.   사진 출처 - 문화일보 한국에서라면 어떨까. 지금 한국의 기성세대 역시 이런 눈으로 청년세대를 바라보는 건 아닐까. 이런 ‘청년혐오’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그 혐오가 내면화된 결과는 끔찍하다. 이들은 ‘자살하고 싶다.’ ‘빨리 자살하자.’ 같은 농담을 툭툭 던진다. 평범한 대화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응답하라 1988에 이어 시그널까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대단한 인기였다. 봉황당 골목이 1988년 쌍문동의 어디였을지 추측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짙어도 너무 짙다는 생각도 든다. 많은 사람이 앞보다는 뒤를 보고 있다. 박정희 향수는 물론 80년대에 대한 향수도 나타나고 있다. 저항마저 현실이 아니라 추억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응답해야 하는 걸까.) 우리 세대는 응답할 곳이 없다. 우리가 응답해야 할 곳은 오직 바로 이 순간이다. 하지만 향수에 밀려 지금 이 순간은 보이지 않는다. 당장 총선에서 새로운 세대가 잘 보이지 않는다. 녹색당이나 노동당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언제쯤 우리 세대의 상태 창에서 응답 없음이 사라질까. 오민석씨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기는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4 | 추천: 0
어느 청춘 P, 안녕. 고향에 내려가니 어때. 서울보다 공기도 맑고 사람도 붐비지 않지? 회사를 다니면서 고향 지점에 발령 났으면 좋겠다고 한 네 얘기가 생각나. 그만큼 가고 싶어했던 고향인데. 회사를 그만 두고 밟는 고향 땅은 차가웠겠지. 네가 그토록 얻고 싶었던 정규직 자리를 수습기간 중 잃게 됐으니. 회사를 그만둔 후 어떻게 부모님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났을까. 정규직이 되면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효도도 해야겠다 생각했을 텐데. 부모님께 열심히 회사 다니고 있다며 안부 전화를 드렸을 텐데. 부모님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매일 과중한 노동으로 고생은 다 하고, 위에서 주는 구박도 다 받고, 그런 상황에서도 참고 견뎠을 너를 떠올리셨을 테니까. 남들보다 조금 튀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조금 더 실수했다는 이유로 회사는 너를 얼마 전 퇴출시켰어. 회사와 맞지 않는다며 네 사소한 잘못들을 ‘경위서’라는 이름으로 객관화해 포장시켜서. 너는 내게 앞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울 것 같다고 고백했지. 네가 마지막으로 회사에 나온 날, 상사는 “다른 회사가 너에 대한 평판 조회를 하면 괜찮은 직원이었다고 말해주겠다”고 했다며. 회사는 네가 어느 직장을 가든 네가 사회 부적응자라는 것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닐 거라는 두려움을 심어줬어. 밥그릇을 빼앗은 것 이상으로 네 인생에 어둠을 드리웠어. 사진 출처 - 미디어스 나는 사실 네가 왜 회사를 나왔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아. 너는 같은 잘못에도 더 큰 지적을 받았어. 다른 직원이 하면 웃어넘길 행동이지만 네가 하면 이상한 행동이 돼버렸지. 100번 양보해 네가 ‘이상한’ 사람이라 해도, 그곳이 괜찮은 회사였다면, 자기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번 얼러도 보고 혼도 내보고 노력을 해봤을 거야. 또 이 나라의 법이 수습사원에 대한 보호를 더 철저히 해주는 것이었다면, 너는 경위서 몇 장만으로 네 이름에 빨간 줄을 긋지 않아도 됐겠지. 너는 앞으로 수습사원과 같은 약자가 함부로 잘리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어. 그 길이 정치든, 언론이든, 사회단체든 어딘지는 상관이 없다고 했지. 너같이 나약한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 갈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줘. 그리고 나도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게. 그때까지 너 자신에 대한 사랑을 놓지 말아줘. 네가 사회 부적응자가 아니라 우리와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우리들은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를 믿어.
2017-06-28 | hrights | 조회: 64 | 추천: 0
전세훈/ 청년 칼럼니스트 ① 39만 4천 원 ② 22만 8140원 ③ 38만 원. 앞의 금액들은 무엇일까. ①의 39만 4천 원은 대학생들의 월평균 생활비다. ②는 월평균 드는 대학생들의 취업 비용을 의미한다. ③의 38만 원은 아르바이트로 대학생들이 벌어들이는 월평균 수입이다. 39만 4천원이 생활비로 필요한데, 실제 버는 돈은 38만 원에 불과하다. 그러니 평균적으로 1만 4천 원이 마이너스가 되는 셈이다. 거기다 취업 비용까지 고려했을 때, 청년들 통장의 마이너스는 더 증가한다. 문제는 이 상황을 청년들 스스로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고통은 청년들과 그 부모들이 지고 있다. 현재 서울시와 성남시에서는 청년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당에 대한 논의가 나왔지만, 반대가 극심한 상황이다. 서울시의 경우에는 흔히 니트족을 심사해서 최대 6개월까지 월 평균 50만 원씩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성남시는 성남시에서 3년 이상 거주한 청년에게 분기마다 25만 원씩, 연 100만 원을 수당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청년수당’이 비효율적인 예산 사용을 하는 정책이며, 청년실업의 근본적인 대책이 아닌 단기적 대책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일부 지자체장들의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며 ‘악마’나 ‘바이러스’와 같은 원색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전체적인 경제 상황을 고려치 않는 ‘무작위 비판’에 불과하다. 그동안 청년들이 심한 취업난을 겪었던 국가들에서는 대부분 청년수당이 존재해 왔다. 프랑스에서는 청년들이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신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취지로 청년수당을 실시했다. 국민이 어려울 때 국가가 도와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18~26세 청년들에게 직업교육을 조건으로 월 57만 원의 현금수당을 제공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시장에서 청년이라는 주체를 보호하고, 생산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취업 교육과 함께 수당을 제공한다. 경제문제를 전 국가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공공철학’이 기반이 된 정책이다. 이외에도 스웨덴, 호주 등에서 청년수당을 실시하고 있다. 청년수당을 실시했던 국가들은 우리나라의 ‘청년수당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재정난에 시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청년수당 실시 이후, 청년 실업률이 감소해 국가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청년수당이 ‘국고를 낭비한다’는 비판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동안 우리 정부가 실시한 청년취업지원사업은 모두 실패했다. 연간 2조 원의 예산을 쏟아 부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작년 7월 정부는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부처별 사업이 중복되어 비효율적인 정책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다 일자리의 ‘질’에 대한 고민이 없다보니 이직률이 높고, 구직 단념으로 이어졌다. 정부가 그나마 성공 사례로 꼽는 청년취업패키지 조차도 1년간 구직 유지율이 20%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기존 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없다. 이런 비효율적인 정책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야 말로 국고낭비다. 이에 비해 훨씬 더 적은 비용이 드는 청년수당을 국고낭비라며 실시를 반대하는 것은 진영논리에 따른 비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사진 출처 - 매일경제 경제체질 개선을 통해서 청년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장기적 정책으로써 경제체질의 개선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매월 높은 물가와 취업 비용을 감당하느라 하루하루가 고통인 청년들을 도와줄 단기적 대책 역시 필요하다. 경제학자 공병호는 『10년 후, 한국』에서 청년들의 사회진출 비용이 높고, 청년들이 그 비용을 계속해서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마련하고자 할 경우에는 전문성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청년들이 계속해서 높은 사회진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등에 매달릴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이 부족해진다. 때문에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청년들이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단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청년수당이다. 이제 청년도 복지의 대상이다. 지금의 청년수당 논쟁을 보다보면, 작년에 유행했던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라는 말이 떠오르고는 한다. 복지정책은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방법’이다. 일을 하지 않는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주는 혜택이 국고낭비이거나, 장애인이나 노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하지 못하기에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하는 이는 없다. 비록 근본적으로 불행함을 해결 못한다고 할지라도,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복지정책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매월 생활비와 취업 비용이 부족해 마음 졸이는 청년들이 많다. 취업 준비에 전념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년들도 있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힘든 청년들에게 청년수당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방법은 아닐까. 전세훈씨는 빈곤과 고용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4 | 추천: 0
오민석/ 청년 칼럼니스트 동일노동 동일임금. 일본의 아베 신조 수상이 시정연설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정규, 비정규로 나뉜 이중적인 임금체계가 일본 경제를 좀먹고 있다는 판단이다. 일본은 비정규고용이 약 40%를 넘는다. 아베 수상은 이와 함께 경제계에 임금인상도 요구했다. 평화헌법을 훼손하고 국가주의를 강화시키고 있는 아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박근혜 정부와는 엄청난 온도 차이가 있다. 물론 그저 발언일 뿐이고 실천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에서는 이런 ‘경제 개혁’을 보수의 우두머리가 주장할 바탕이 되어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더 심각하다.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50%다. 일본보다 10%가량 더 높다. 파견, 인턴, 하청 등의 복잡한 고용 구조를 통과하면서 임금격차는 훨씬 더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꼼수 착취’는 일본이 먼저 시작했다. 이제는 스승을 뛰어넘어선 착취국가가 되었다.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노동·고용 정책들은 하나같이 이 착취구조를 더 심화시키는 것들이다. 근로기준법에서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는 ‘중간착취’(노동자 파견 등)의 길을 더 쉽게 열어주고, 비정규직 고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린다고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먼 나라 이야기다. 홍보용으로 만든 카카오톡 이모티콘 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비정규직일수록 임금이 높아야 한다.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형태이기 때문에 임금을 훨씬 더 받아야 한다. 그것이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자발적인 비정규직이다. 하지만 한국의 비정규직은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감내하면서도, 임금은 더 적다. 일본에서는 보수여당까지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주장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정말 당연한 구호다. 한국 정부와 여당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한국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곳이 또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2016년 2월 2일 오후 3시)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접전을 벌이고 있다. 버니 샌더스는 미국에서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다시 꺼낸 인물이다. 1년 전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사람이 이제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막강한 상대와 겨뤄서 박빙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자가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로 등장해서 부의 분배와 재분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아베 정부가 소극적이지만 노동조건 개선을 말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만이 이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혼자서 가는 외롭고 쓸쓸한 길이다. 이 외로운 길의 끝에 과연 국민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민석씨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기는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8 | 추천: 1
연혜원/ 청년 칼럼니스트 불황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자들부터 내치기 시작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마지막 주,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탄원서가 한 장 붙었다.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붙인 것이었다. “우리 아파트에서 근무 중인 경비원 32명 중 11명에 대하여 경비용역업체인 ‘○○㈜’에서 입주자대표회의나 관리사무소에 사전 협의도 없이 12월 31일부로 근로계약이 만료된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개별 통보를 하였습니다 … (중략) … 이를 반대하는 입주민들께서는 아래의 경비용역업체에 개별적으로 연락하여 의견(항의 등)을 직접 제기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억의 저편에서 몇 년 전 친구의 대학교가 재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교내 청소부 아주머니들부터 자르기 시작했다는 슬픈 얘기가 떠올랐다. 고용자들의 봉급은 늘 피고용자의 수십 배가 넘지만 조금이라도 이윤이 줄어들면 이상하게 가장 돈을 적게 받는 노동자부터 해고된다. 우리 아파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비용역업체는 재계약을 하면 늘어날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경비원들을 해고하는 간편한 결정을 내렸다. 11명의 경비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실직 위기에 놓였다. 탄원서에 적힌 대로 해당 경비용역업체에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따지고 싶었지만 업체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담당자가 부재중이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며, 본인은 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담당자는 언제 출근하냐”고 물었지만 “너무 일찍 출근해서 모르겠다”는 희한한 답변이 돌아왔다. 겨우 내 연락처와 이름을 남기는 것으로 전화 통화는 끝났다. 그 날 퇴근길에 경비실에 놓인 부당해고에 반대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했다. 저녁을 먹다가 우리 가족이 모두 그 성명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굳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사진 출처 - 국제신문   새해가 됐다. 아파트 단지 내를 걷다 분리수거 함을 정리하고 계신 경비원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왠지 죄스러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경비원 11분의 소식을 물었다. 놀랍게도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11명 모두 재계약 하게 됐습니다. 내일 새로 교육 받습니다.” 바라던 일인데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성명서도 그렇고 주민들 반발이 너무 심해 그쪽에서 재계약 하겠다고 굽혔습니다”. 동화책에서나 봤던 미담을 듣는 기분으로 나는 한참 동안 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내게 아저씨께서 인사하셨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희망을 잃고 살아왔던 것 같다. 연대에 거는 희망은 이윤추구를 우선시하는 사회 앞에서 순진한 환상으로 치부 당한지 오래다.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 여럿이 힘을 모으는 일은 오로지 경제적 이윤을 늘릴 때만 그 당위성을 인정받는다. 얼굴도 마주치기 힘든 아파트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경비원들의 실직을 막아낸 일은 내게 잊고 있었던 오랜 희망을 다시 꺼내 주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연대의 희망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 일으켜 세워주는 이가 없을 뿐이다. 연혜원씨는 복지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철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6 | 추천: 0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참 이상한 사과다. 미안하다는 너는 후련해 보인다. 내 입으로는 절대 사과하지 않겠다는 태도도 뻔뻔스럽지만, ‘잘했다’며 환영인사 받는 모습도 마뜩찮다.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겠다며 윽박지르는 뻔뻔함마저 갖췄다. 이상하다 못해 참 나쁜 사과이면서, 또다시 상처를 안겨주는 사과다. 사과를 받은 쪽은 되레 변명하기 바쁘다. 제 몫이 아닌 사과를 받은 까닭이다. 정작 피해 당사자는 받을 수 없다는, 그 사과를 받아오기 위해 선물까지 얹어 줬다. 세밑 소식치고는 고약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해결방안 얘기다. 두 나라 각각 공통된 합의문을 발표하지 못하고, 외교적 해법이라는 이유로 애매한 단어 뒤에 숨어 버렸다. 말의 밑동을 잘라 서로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 비겁함이 엿보인다. 가령, ‘법적’ 책임이 아니라, ‘책임’이다. ‘일본 정부’의 계획적인 관여가 아닌 ‘군’의 관여다. 아베 정부가 최초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혔다며 의의를 찾아 나서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 이미 1995년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했고, 사죄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잃은 것은 10억 엔뿐”이라는 아베의 말이 귓등을 때린다. 그의 말처럼 새로울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한국이 그 제안을 수용했다는 점 빼고는.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비겁한 외교적 거래를 했을 뿐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 모든 이상함과 비겁함이 모여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니 기가 찰 수밖에 없다. 참다못해 대학생들은 위안부 피해자를 대신해 소녀상을 지키겠노라 거리로 나섰다. 기록적인 한파는 중요치 않았다. 침낭조차 허용 안됐던 거리 위에서 덮은 비닐 위의 살얼음, 그마저도 중요치 않았다.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은 단 한 가지도 고려되지 않았던 합의, 그리하여 피해자들도 국민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합의의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되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합의는 끝났다는데, 수요시위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는 세계 최장 기간의 시위 기록을 매주 경신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매주 자신의 요구사항을 분명히 외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위안부 진상 규명. 일본 국회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기록. 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최종적, 불가역적(finally and irreversibly)’란 말은 두 정부의 그릇된 협상에 쓰여서는 안 될 말이다.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다. 협상으로 해결되어서는 안 될 일을 협상해버린, 무책임한 정부를 보고 있는 국민의 고통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다.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5 | 추천: 0
이보라/ 청년 칼럼니스트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 방식을 타인에게 무작정 강요하는 중장년층을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꼰대는 유행어일 뿐 아니라 사회 문제의 주요 원인이다. 꼰대식 교육은 아이들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파괴해버린다. 꼰대식 직장 문화는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경직된 조직 분위기를 만든다. 꼰대 같은 아버지는 자식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가정 내 소통을 마비시킨다. 이 같은 현상을 봤을 때 꼰대는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꼰대는 경멸의 대상이 됐다. 반공 독재 시절, “너 빨갱이지?” 라는 말이 널리 쓰였듯 오늘날엔 “너 꼰대지?”라는 말이 통한다. 2016년 ‘반꼰대 시대’에서는 “꼰대가 되지 말라”는 설교를 곧잘 들을 수 있다. 젊은이들도 자기들끼리 꼰대가 되지 말자고 주의하는 분위기다. “나이 따지지마, 꼰대 같아.”, “자기주장 좀 줄여, 그게 꼰대야”라는 말들을 주고 받는다. 꼰대 테스트, 꼰대 퇴치법 등도 인터넷 상에서 떠돌고 있다. 나도 최근 주변에서 ‘꼰대가 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나이가 어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반말을 했을 때, “왜 예의를 안 지키느냐”고 따졌더니 나이를 따지는 꼰대로 몰렸다. “기자는 영향력을 많이 끼치기 때문에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직업윤리를 강요하는 꼰대라 한다. “사람이 태어났으면 남들을 위해서 나누면서 살아야지 왜 자기만 아냐”고 주장하면 ‘진보’ 꼰대 소리를 듣는다.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겠지만 단지 예의와 직업,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주관을 드러낸 것일 뿐이었는데 꼰대로 격하된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꼰대라는 말은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성을 거부하자는 데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꼰대가 되지 말라는 주장이 왜곡돼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기도 한다. 그동안 꼰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둔감해진 것은 아닐까. 꼰대를 비판하는 스스로가 또 다른 꼰대는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보라씨는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갖고 머니투데이에서 인턴기자로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9 | 추천: -1
전세훈/ 청년 칼럼니스트 “수업 시간에선 비판적 지성을 배우다가, 교양필수(취업관련) 과목에서는 기업에 대한 순종을 말해요.” 얼마 전 모교에 들렸을 때, 후배가 해준 말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진보성’을 내세워왔던 곳이다. 그런 학교도 정부의 구조개혁 평가를 거스르지 못했다. 대학 평가 이후, 학생들이 “잘못된 불의에 저항이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에 총장은 “수도권 변두리에 있는 학교가 교육부에 대항할 힘이 있겠냐”며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비판적 지성과 정의를 가르쳐 왔던 학교는 대학 평가 이후 순종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과 통폐합이 시작이 됐고, 학교가 가지고 있었던 특성은 사라졌다. 학교의 모습은 변했다. 가장 달라진 것은 배우는 내용이다. 철학, 문학 등의 과목들이 사라진 자리에 프레젠테이션 스킬, 엑셀 등의 과목이 자리를 매웠다. 현실적으로 대학 구조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볼 수는 있다. 학령인구가 급격하게 줄어 2018년이면 대입 정원이 고교 졸업자 수를 넘어선다. 8년 후인 2023년이면 고교 졸업생이 39만 명까지 줄어든다. 이 때문에 지금의 대학 정원을 56만 명을 조정해야 한다. 1980년대 교육조치, 19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 등의 정책으로 인해 별 다른 규제 없이 대학이 늘었다. 여러 해 동안 대학들의 자율 조정을 유도해왔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이제 객관적 조정자가 필요하게 된 상황이 됐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대학 구조개혁에 따른 대학 평가 방식은 실패작이다. 지금까지의 대학평가 방식은 정원감축에 대한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졸속적으로 개발한 평가지표로 300개가 넘는 대학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현재 구조개혁 평가의 방향으로는 대학들이 쉽게 손댈 수 있는 학과 구조조정이나 학사 관리 항목에 중점을 뒀다. 평가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대학들은 무리한 학과 통폐합 한 등 급조된 정책을 쏟아냈다. 단기 비정년 전임교원을 많이 채용하고 전임교원확보율을 높여 좋은 평가를 받은 대학들도 있었다. 대학이 기업화가 되어 가치창출 대신에 수익창출이 대학의 목적이 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는데, 현재의 대학 평가는 오히려 ‘대학의 기업화’ 현상을 부추기는 듯한 모습이다. 사진 출처 - 서울여대 학보 만평 또 다른 큰 문제는 서울 외 지역에 있는 대학들, 소위 ‘지방대학’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점이다. 이번 평가 만해도 하위 2개 등급에 속한 대학들이 대부분 지방대였다. <프레시안> 보도에 따르면 인구 1000여 명 정도의 소규모 대학이라고 할 지역에서 창출되는 경제적인 부는 수백억 원에 달한다고 할 정도지만 이러한 지방대학의 장점들을 현재 대학평가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재정자립도가 약한 지방대학들이 정원감축과 재정 지원 제한을 받게 되면 자연히 학교 운영이 어려워진다. 이렇게 되면 다음 평가에서도 좋은 결과를 받을 수가 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대학평가 이전에 대학이 어떤 교육을 맡을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대학을 줄인다는 단순한 논리로 대학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영국이나 미국은 ‘학문의 상아탑’ 역할을 강조하고, 그에 비해 북유럽 국가들은 산업과의 연계를 더 강조하는 실용적 경향이 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대학이 맡을 교육에 대한 철학이 사회적 합의를 이뤘다면 그에 맞는 정책을 펼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학이 맡는 교육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정책을 바꾸고, 그때마다 졸속적으로 만든 대학평가로 학생 수 줄이기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대의 파우스트 총장은 “대학의 본질은 인생을 만들어가는 가르침, 오래된 유산을 전달하려는 가르침, 미래를 설계하는 가르침”에 있다고 했다. 대학은 인생을 만들어가고, 미래를 설계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맡을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세훈씨는 빈곤과 고용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