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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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시형, 박용석, 방효신, 서동기, 서진석, 정석완, 조동순, 조예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S양은 올해 25세로 나와 동갑이다. 둘의 공통점은 그뿐이었다. 그녀는 미국의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나는 지방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녀의 재산은 이미 1,300억 원의 주식가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나의 재산은... 빚도 재산이라 치자면, 1,300만원의 학자금 대출이 전부다. 그녀는 화장품 회사의 경영을 준비하고 있지만, 나는 그 회사 가맹점포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다. 그녀는 비범했고 나는 평범했다. 우리는 정확히 대척점에 서있다. 나와 S양의 가장 큰 차이는 노력이나 능력의 크기가 아닐 것이다. 운이다! 그녀는 이미 12살에 주식 일만 주를 보유했다고 하니 삼신할매의 랜덤 운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할 만하다. 당시 나의 조부모가 남겨준 유산은 아빠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S양과 나는 각자 부모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서 밟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학력이 그러하다. S양의 부모와 나의 부모의 학력 차는 S양과 나의 학력 차로 고스란히 옮겨온다. 그리고 그 부모 역시 그들 자신의 부모와 같은 삶을 살았다. 비단 S양과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의 교육과 소득 수준 차이가 그 자녀의 임금 격차로 이어진다는 연구결과는 이미 여럿 발표됐다. 대물림이다. 요즘 청년들은 이런 사회를 ‘헬조선’이라 명명한다. 지옥이라는 뜻의 ‘hell’과 조선이 더해져, 현재의 한국이 지옥과도 같다는 뜻이다. 이들이 고발하는 헬조선의 모습은 꽤나 선명한데, ‘열정과 노력, 의지 세 단어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곳’이면서 ‘성수저설-인간은 날때부터 물고 태어난 수저의 재질로 인생이 결정된다-이론이 완벽히 성립하는 곳’이다. S양의 노력은 회사의 경영자를 만들어 낼 테지만 내 노력은 기껏해야 2년짜리 계약 인생일 가능성이 높다. 나의 노력보다는 수저가 내 삶을 결정하는 사회,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해도 도통 나아지지 않는 사회다. 사진 출처 - 사이트 ‘헬조선’-http://hellkorea.com 그동안 청년들은 이 사회 내에서 성공을 바랐다. 남과 비교하며 우위를 점해야 하는 경쟁은 아프긴 했으나, 청춘이라는 시간에 수반되는 고통으로 인식했다. 기다리면 지나갈 것이라고, 성장하는 중이라는 마약 같은 말도 더해졌다. 누구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한권씩 가지고 다니며 위로받기도 했다. 이제 청년들은 깨닫는다. 나를 아프게 하는 고통은 청춘이라는 시기가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가 가하는 것임을. 그러자 청년들이 현실을 바로 바라보고 외친다. “이곳은 헬조선이다”라고. 헬조선은 청년들의 선언이다. 제 사회를 헬조선이라 깨닫는 순간, 비로소 헬조선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청년은 주어진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왜 자신들에게 이러한 현실이 주어졌는지에 대한 고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은 미약하지만 변화의 거점이 될 것이다. 이미 지옥인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헬조선이라 외치는 일뿐이다.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 | 추천: 0
안상현/ 청년 칼럼니스트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다. 반말에 욕도 한다. 목소리는 또 왜 그리 우렁찬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내버려두면 일이 터진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게 이렇게 고된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한 가족캠프에서 운영요원으로 있을 당시 이야기다. 캠프에는 말썽꾸러기가 유독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잘 따라주는 몇몇 얌전한 아이들이 유달리 예뻐 보였다. 운영회의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1회 캠프는 70%가 차상위계층 가정이라 애들이 좀 거칠었을 거예요. 그래도 2회부터는 일반가정이 대부분이니까 분위기도 다르고 일하기 좀 더 수월할 겁니다.” 회의 때 캠프운영실장에게 들은 말이다. 편견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개연성을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르던 배경을 알게 된 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굳이 명단을 보지 않아도 누가 취약계층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는 이가 모두 썩어 검은 입을 갖고 있었고 치통 때문에 캠프 프로그램에 불참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단 앞에서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낑낑대던 모녀도 있었다. 가방을 들어드리려 다가갔을 때, 아이의 어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도움을 거절하진 않았지만 내려가는 내내 어머니는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불신하는 건가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운영요원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 3일간 함께한 만큼 낯선 사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가방을 잡은 채로 어정쩡하게 내려갔다. 내려오는 도중 모녀의 이야기를 엿듣게 됐다. “엄마는 사모님이 바로 출근하라고 하셔서 내일 같이 못 있어줄 거 같아. 미안해...” “괜찮아~ 엄마.”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짐짓 쾌활한 척 답하는 아이의 모습이 더 이상 말썽꾸러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아마 가사도우미 일을 하시는 듯했다. 낡은 등산조끼를 걸친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가방 손잡이를 놓지 못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사소한 도움마저 받아본 경험이 적었던 것이리라. 위선(僞善)과 위악(僞惡) 사진 출처 - 네이버 카페 그 후 악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떤 상처처럼 느껴졌다. 예외인 아이들도 있었지만 캠프 안에서만큼은 집안 형편에 따른 아이들의 태도 차이가 쉽게 구분됐다. 슬러시를 먹기 위해 줄을 설 때도 줄을 지키는 아이들과 새치기 하는 아이들의 그룹은 비례했다. 슬러시가 다 떨어졌다고 하면 쉽게 수긍하고 돌아가는 아이와 왜 없냐며 따지고 매달리는 아이도 비슷하게 나눠졌다. 가난이 미치는 영향이 어디까지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부모 수준에 비례하는 자녀의 교육수준이나 직업, 소득수준 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소득불평등이 기회불균등을 야기한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패러다임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빈곤은 그 이상으로 더 많은 것들을 대물림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능성이다. 그런 아이의 성격과 태도가 빈곤의 작품이라면 기회의 균등은 무의미다. 기회의 유무를 넘어 기회를 대하는 모습마저 결정돼 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캠프에서 겪은 일들은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부인할 수 없는 근거들이 많다. 빈곤과 아동 발달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논문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지난달 미국의학협회저널 소아과학(JAMA Pediatrics)에는 가족의 빈곤이 아동의 두뇌 발달과 학업 성취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논문이 실렸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빈곤층 자녀들의 회백질은 또래 평균보다 8~10% 적었다. 회백질은 대뇌 신경세포가 모이는 부분으로, 적은 부위가 마침 행동과 학습을 담당하는 전두엽과 측두엽이었다. 작년 1월에 나온 미국 교육학자 찰스 넬슨의 연구논문도 비슷한 결과를 시사한다. 빈곤이 아이들의 가능성마저 오염시키는 ‘원죄’가 되어가고 있다. “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僞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신영복 교수(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저서 <담론>(돌베개)에 나오는 글귀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명예를 얻고자 한다. 위선이다. 반면 약자는 약하다는 걸 들킬까봐 거친 모습으로 자신을 가린다. 취약계층 아이들이 그렇다. 그들의 성격이 거칠다 해도 그건 보이는 것일 뿐 본질이 아니다. 아이들은 악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빈곤에 의해, 그리고 자신들의 빈곤을 감추기 위해 위악의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안상현씨는 다문화 사회에 관심을 갖고 문제점을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 | 추천: 0
연혜원/ 청년 칼럼니스트 <문제> 다음 중 은행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고르시오. ①번호표를 뽑는 고객 ②입구에서 인사하는 직원 ③ATM기를 이용하는 고객 ④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는 고객 ⑤물 마시는 직원 정답은 ‘⑤물 마시는 직원’이다. 은행원이 고객들 앞에서 물을 마시면 해당 점포의 서비스 점수가 깎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객들 눈에 띄지 않는 금고에 들어가면 물을 마실 수 있지만, 쉴 틈 없이 고객을 대면하는 업무 특성상 ‘금고에 들어가는’ 짬을 내기가 쉽지 않다. 은행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대다수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고객들 앞에서 물을 마시지 못한다. 한 프랜차이즈 외식업체는 고객 대응 매뉴얼에 고객 앞에서 물을 마시는 행동을 ‘핸드폰 사용’, ‘잡담’과 같은 ‘근무태만’으로 분류해 놨다. 갈증(渴症)은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졸린 것처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현상이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마시는 행동이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없고 게으르다(표준국어대사전)’는 뜻의 ‘태만’으로 분류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쩌면 이 사회는 서비스업 종사자가 고객 앞에서 물을 마시면 고객이 불쾌해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상식에 비춰볼 때 고객이 ‘물 한잔만 마시고 일하겠다’는 은행원에 불쾌감을 느끼거나 ‘서비스가 엉망’이라고 저평가할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갈증을 참으라는 것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 본업인 서비스 말고는 어떤 ‘인간성’도 고객에게 들키지 말라는 강요다. 이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인간’이 아닌 ‘도구’로 취급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구글   물을 제때 마시지 못한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건강’이라는 기본권도 침해 받는다. 의사들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장시간 화장실에 가지 못하면서 ‘방광염’에 많이 시달리는데, 이때 물을 충분히 마시지 못하면서 병을 더 키우게 된다고 지적한다. 최근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겪으면서 서비스업 종사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처우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서비스업은 불특정 다수를 가까이서 접하는 직업인만큼 종사자들이 메르스로부터 스스로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현실에 반영된 것이다. 이후 실제로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했다. 메르스처럼 위급한 질병은 아니지만, 갈증을 제때 해결하는 것도 서비스 종사자들에겐 기본권과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문제다. 고용주들이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서비스업 종사자들도 고객 앞에서 당당히 물을 마실 수 있다. 연혜원씨는 복지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철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 | 추천: 0
이보라/ 청년 칼럼니스트 “하루아침에 영웅이 돼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제게 교육의 방향과 대안을 물어보시더라고요.” 2012년 2월 고등학교 자퇴를 앞두고 1인 시위를 벌였던 최훈민 씨(21)와 올해 4월 고등학교 자퇴 후 피켓을 든 김다운 양(18)의 말이다. 최 씨와 김 양은 각각 광화문 광장에서 2주간, 경남 진주 시내 한복판과 주요 고교 앞에서 두 달간 홀로 피켓과 대자보를 들었다. 한국의 잘못된 교육을 멈춰달라고, 다시 생각해보자고 주장했다. 고등학생들의 반란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김 양이 '여러분의 학교엔 진정 배움이 있습니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사진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빠르게 확산됐다. 언론과 대중의 관심은 고마운 것이었다. 최 씨와 김양이 시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뜻을 함께 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다리를 제공했다. 2012년 2월 고등학교 자퇴를 앞두고 1인 시위를 벌인 최훈민씨(21, 오른쪽)와 올해 4월 자퇴 후 피켓을 든 김다운양(18). 사진제공=김다운, 씨투소프트   하지만 집중된 관심만큼 기대도 넘쳤다. 사람들은 점차 최 씨와 김 양을 이상화하기 시작했다. 교육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처럼, 단 칼에 교육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구세주처럼 이들을 대했다. 김 양을 만나는 사람들은 김 양에게 ‘고2라는 나이에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모순을 다 파헤치고 있다’ ‘삶의 주체로 우뚝 선 김다운이 멋있다’며 우러러봤다. 최 씨에게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시선들로 인해 1인 시위는 단지 특출한 인물을 조명하는 쇼로 변질돼갔다. 이 소년, 소녀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온 것은 자신이 불합리하다고 느꼈던 교육 문제를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기 위해서였다. 김 양이 피켓에 ‘여러분의 학교엔 진정 배움이 있습니까?’라고 쓴 것은 자신도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한 것이었다. 최 씨가 피켓에 ‘희망의 우리 학교를 함께 만들어요’라고 적은 것은 변화를 위한 행동을 혼자가 아닌 함께 하자는 의미에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간과한 채 최 씨와 김 양에게만 일방적으로 정답과 행동을 요구했다. 사람들은 ‘교육의 영웅’에 모든 문제를 맡기려 했다. 자기가 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며 책임지거나 희생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영웅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약한 본성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이에 나부터 진정한 배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또 그런 ‘나’들이 모인 우리가 함께 대안을 모색해보고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최 씨와 김 양이 춥거나 더운 길거리에서 불편을 감내하며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변화를 위해 함께하는 ‘우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보라씨는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갖고 머니투데이에서 인턴기자로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 | 추천: 0
전세훈/ 청년 칼럼니스트 “1955년.” 미국 정보통신 혁명을 이끈 거물들이 태어난 시기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구글의 에릭 슈미트는 모두 1955년생이다. 다른 미국의 컴퓨터 거물들도 1953년에서 1956년 사이에 태어났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컴퓨터 거물들이 태어난 나이가 비슷하다. 다음 카카오 김범수 사장,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 의장, NXC(넥슨지주회사) 김정주 대표도 모두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에 태어났다. 이렇게 컴퓨터 거물이 태어난 시기가 비슷한 이유는 산업 구조적인 이유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컴퓨터 혁명이 1975년에 일어났다. 이 혁명의 수혜자가 되려면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20대 초반에 이른 사람이 가장 이상적이다. 1950년 이전에 태어났다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일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10대였다면 학생이란 신분으로 묶여 사회로 진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IT 붐이 일어났던 시기에 컴퓨터를 접하고, 익힐 수 있었던 사람들만이 컴퓨터 분야에서 성공할 수가 있었다.   사진 출처 - 이투뉴스   재능, 노력, 기회 이 세 가지가 적절하게 맞물린 사람들만이 성공을 맛볼 수 있다. 재능과 노력은 개인의 몫이라도, 기회를 만드는 것은 개인이 할 수 없다. 미국의 컴퓨터 거물들이 지금의 그 자리에 있는 이유는 물론 잠자는 시간까지 줄인 그들의 노력과 특별한 재능이 결합됐기 때문이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가 그들의 재능과 노력의 바탕이 됐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스티븐 잡스의 경우 그가 살던 도시가 실리콘벨리로 재개발이 되면서 컴퓨터를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엘리트 사립학교에 들어갔고, 그 학교의 어머니회에서 당시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했던 ‘시간 공유 컴퓨터 터미널’을 덜컥 설치해주는 행운을 누렸다. 만약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나이가 10살 정도가 많아 1945년에 태어났다면, 이미 안정된 직장과 가정이 있어서 새로운 분야로 진출할 생각을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 청년 세대(15~29세)의 상황은 답답하기만 하다. 청년 세대들이 노력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나날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현재 청년 고용률은 41.7%에 불과하다. 청년들은 그럴수록 자신에게 투자해 ‘스펙’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높은 등록금과 물가 때문에 그럴 수만도 없다. WEF(World Economic Forum)가 발표한 우리나라 국민 평균 소득은 2010년 기준 229개국 가운데 49위 정도다. 이에 반해 등록금은 OECD 국가 중 4위 정도다. 등록금을 감당하며 공부하기만도 벅차다. 그렇게 취직하면 끝이 날까. 그나마 구한 일자리도 비정규직이 절반 이상이다. ‘단군 이래의 최고의 스펙’을 달성할 만큼 근면했던 한국의 청년들은 지금도 고시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또 돈을 벌기 위해 일도 하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이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가. 한국의 청년들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1975년 청년 잡스가 잡았던 것과 같은 기회를 한국 청년들도 잡을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 구조를 위해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전세훈씨는 빈곤과 고용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 | 추천: 0
신종환/ 청년 칼럼니스트 841년 신라 48대왕인 경문왕은 즉위 후 별안간 귀가 당나귀처럼 길어졌다고 한다.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으나 왕의 감투를 만드는 복두장은 부득이하게 왕의 당나귀 귀를 보고 말았다. 경문왕은 복두장에게 자신의 귀가 당나귀와 같다는 것을 남에게 말하지 않을 것을 명하였다. 복두장은 명에 따라 평생 이를 비밀로 간직하다 죽기 전 도림사지 근처의 대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 지른다. 이후 그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대나무 숲 설화이다. SNS에서는 그 이름을 딴 ‘○○ 대나무 숲’ 이라는 이름의 커뮤니티가 유행처럼 생겨났다. 처음에는 ‘출판사 옆 대나무 숲’ ‘언론사 대나무 숲’ 등 여러 분야의 관계자들이 모이는 대나무 숲들이 열풍을 주도했다. 하지만 지금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페이스북에서 각 대학교의 커뮤니티 사이트 역할을 겸하는 ‘○○ 대학교 대나무 숲’이다. 대학교 커뮤니티의 주된 형태인 페이스북 ‘대나무 숲’은 익명을 보장하는 제보 시스템을 기반으로 글이 게시되고 실명 댓글이 달리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대나무 숲’이란 이름으로 운영되는 커뮤니티가 대학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닐 텐데 유독 대학교의 커뮤니티로 기능하는 ‘대나무 숲’이 눈에 띄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작년 1월 중앙대는 청소 노동자들의 대자보와 이에 동조하는 대자보 일체에 대해 장당 100만 원을 내라는 간접강제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두 달 전 서울여대 학보는 대자보에 관한 동문들의 비판 성명을 싣지 못해 백지학보를 발행했다. 앞서 나열한 사건들과 그 외의 대학 당국이 직·간접적으로 자행한 억압에 의해서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대학교의 페이스북 익명 커뮤니티를 통칭해서 ‘○○ 대학교 대나무 숲’으로 묶었지만 각 커뮤니티의 문화에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다양한 커뮤니티들을 하나의 현상으로 묶어서 볼 수 있는 것은 ‘억압’과 ‘욕구’라는 공통된 요인이다. ‘억압’은 어느 곳에서는 대학 당국이 직접 행사하는 억압에서 구성원이 대학의 문화에서 느끼는 일상적인 억압까지 있을 것이다. 그중 아무래도 동성애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의견제시 등이 자주 눈에 띄게 된다. 그러나 결국 모든 제보들은 털어놓지 않을 수 없는 욕구들이 만든 현상이다. 다만 욕구의 공·사적임과 비중에 따라 달라 보일 따름이다. 최근에 대나무 숲의 새로운 흐름인 ‘어둠의 대나무 숲’ 페이지 또한 좀 더 검열로부터 자유로운 제보를 특징으로 한다.   몸이 없이 목소리만 오가는 대나무숲은 서로 관계를 맺기 쉽지 않은 단편적인 공간이다. 그 단편성이 앞으로는 어떻게 작용할까 사진 출처 - 산림청   앞서 열거한 대나무 숲의 특징들에 대해 무분별한 익명의 폭력을 우려하는 의견도 있고, 새로운 공론장의 가능성을 점치는 의견도 있다. 대나무 숲마다 차이는 있지만 폭력성과 공격성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자정하려는 노력들이 보이고 비난 보다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더 눈에 띤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기대를 갖고 지켜봐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긍정성과 부정성을 떠나 그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대나무 숲은 말의 기회를 박탈당한 욕구들이 모인 곳이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억압이 만들어낸 대안공간에서 발생했다. 대나무 숲이 활발해지는 까닭에는 건강한 문화를 만들려는 노력의 축적과 대나무 숲만의 장점도 있겠지만, 응어리져 있고 말할 길이 막혀있는 현상이 더 널리 일상화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대나무 숲이 새로운 공론장으로써 자리할 수 있겠냐는 앞의 물음들에, 나는 절반의 동의를 표할 수 있다. 건설적인 의견교환의 가능성도 존재하고, 사적인 고민을 얘기했을 때, 위로와 동감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긍정성들은 오직 허공에의 외침으로서만 긍정적이다. 새로운 공론장이나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닿는 디딤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나무 숲의 긍정성 중에 아직 디딤돌의 역할을 할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대나무 숲에 올라오는 제보들을 ‘외침’이라고 칭한다. ‘외침’들은 외쳐지고, 이내 사라진다. 사회에서 억압받는 일이 없을 수 없고, 그 억압들을 줄이는 것이 대나무 숲의 몫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한 대나무 숲의 기능 이상으로 기대를 갖고 대나무 숲에 기대와 관심을 표하는 것은 우려스럽다. 억압에 대한 물음의 꼬리를 물고 쌓이고 해결의 변증법의 토대로서의 대나무 숲이 가능할까. 구성원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빠르고 유동적이며 다양한 제보들이 수시로 올라오는 구조의 대나무 숲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숙성되지 못하는 짧은 논의와 위로들에 익숙해지고 더 의지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신종환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 | 추천: 0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중동의 낙타가 옮긴 질병이 요란하다. 병원은 물론이고 사람이 모일 양 싶은 곳-심지어 명동마저도-은 모조리 기피지역이 되었다. 약국과 편의점 등지에서 파는 손 소독제와 마스크는 이미 동난 지 오래다. 한국이 중동의 여러 나라를 제치고 발병국 2위라고 하니 의미 없는 소란은 아닐 듯싶다.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정부는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다. 한국의 청년들을 중동으로 다 보내라며, 중동으로의 국외 취업을 알선했던 정부는 ‘부재’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난 관조자의 모습이다. 한편 치사율이 95%나 된다는 탄저균은 불현듯 한국으로 ‘배송’됐다. 발송지인 미국으로부터 살아있는 채로 날아온 것이다. 이 균을 대도시에 100kg만 살포해도 적게는 100만 명, 많게는 300만 명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하니 새삼 섬찟하다. 심지어 한국정부는 미국 당국의 성명서 발표가 있은 후에야 너무나 손쉽게 위험물질이 국경을 넘나든다는 것을 알아챘다니 늑장도 이만하면 고질병이다. 모든 병원성 위험물질이 국내에 들어오면 질병관리본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원칙이나, 미군 측은 표본이 비활성화 상태인 줄 알았기에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한국에 반입되는 물질의 위험성 판단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합리한 협정 탓에 미국은 언제나 당당하고, 한국의 정부는 여전히 ‘부재’한다. 국가는 수차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모두 배의 침몰을 생중계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서서히 물 밑으로 사라져가는 지점이 늘어날수록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가슴속에 새겨진 낙인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할 주체는 ‘부재’했다. 컨트롤타워인 수장의 행적은 묘연했고, 유가족에게 고개를 숙이는 대신 돈다발을 흔들었다. 더욱 암울한 사실은, 오늘의 한국을 휘어 감고 있는 불안이란 놈이, 지도자의 무능함이나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날선 표현이지만, 국가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국가라는 껍데기(형체)는 존재하고 있지만, 국가를 체감(본질)할 수 없는 시대.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말처럼,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통치하려 드는 이른바 ‘국가 없는 국가주의’다. 국민들에게는 갖가지 의무를 요구하면서도 권리에 대한 요구는 모른 체다. 어쩌면 도둑놈 심보 일는지도 모르겠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강제력을 사용해 처벌하지만 정작 국가가 필요한 순간들에서는 어김없이 사라진다. 메르스는 병원 탓이고, 탄저균이 국내에 유입된 사실은 사고일 뿐이고, 세월호는 유병언 탓이다. 이렇게 책임을 덧씌우다 보면 국가의 혐의는 옅어진다. 국가의 유일한 목표이자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비극은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맞잡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국가는 국민과의 약속을 하나둘 외면한다. 국가의 최대 임무인 안전 보장은 이제 더 이상 국가의 수중에 놓여있지 않고, 사회적 가치들은 시장의 숫자로만 존재한다. 시장의 영역에서 안전은 반드시 사수해야 할 가치가 아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에서 (정신적)가치는 환대받지 못한다. 계산기를 두드려가면서 셈할 수 있는 (물질적)이익만이 신자유주의의 본령이다. 메르스 여파로 한산한 명동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메르스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삼성서울병원의 응급실 이송요원은 메르스 증상을 앓고 있었으나 관리대상으로도 파악되지 못했다. 환자의 안전과 직결되는 병원의 업무는 간접고용된 직원에게 맡겨졌다. 병원의 외주화가 메르스를 키운 셈이라는 지적은 일견 타당한 듯하다. 몇 푼 아끼고자 하는 탐욕 속에 소중한 가치들이 소멸된 것이다. 안전 역시 비슷한 모양새다. 어떻게 안전할 수 있느냐 보다는,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안전을 만들어 내자는 무자비한 합리성이다. 우리가 느끼는 공포의 핵심은 위기의 순간, 국가가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세월호가 그랬고, 탄저균이 반입됐을 때도, 메르스가 확산됐을 때도 또다시 되풀이 됐다. 메르스가 사라지고, 박근혜 정권이 막을 내리면 안전할까. 다시금 그 빈자리를 어떤 위험이 차지할지 모르는 일이다. 국가는 자신들의 역할을 시장에 넘겨줬고, 시장은 이를 싼 값에 처리했다. 이들의 짬짜미 속에서 소외된 것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국가는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국가다. 안전과 생명처럼 시장에 휘둘렸을 때 부작용이 심각한 몇몇 영역은 국가의 수중에 남겨두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남시의 공공 의료 확충 정책이 눈에 띈다. 성남시는 적자로 인해 병원들이 철수한 자리에 시립병원을 건립하고, 가정마다 주치의를 두는 의료서비스 정책인 국민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려 한다. 적어도 의료부분에는 경제적 논리로 판단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들을 책임지고 보장해주자는 것이다. 국가 역시 자신들이 제자리에 있음을, 즉 국민을 책임지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시장에게 넘겨 준 권력을 다시금 찾아와야 하는 곳은 비단 의료영역뿐만이 아니다. 위기는 사고로, 질병으로 이어졌지만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고, 국가의 해결을 필요로 한다. 국민들은 국가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다. 희망의 시작은 국가가 책임을 지는 순간부터다.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 | 추천: 0
안상현/ 청년 칼럼니스트 중국 당나라 시대 형법인 <당률>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고독(蠱毒)’을 만들거나 기르는 자는 처벌한다(賊盜律, 造畜蠱毒). 조선시대의 법률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도대체 고독이 뭐 길래 처벌까지 하는 걸까. 고독 자체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독이다. 세 마리 독충(蟲)을 하나의 항아리(皿)에 담아 마지막 한 마리가 남을 때까지 싸우게 한다. 살아남은 벌레는 이전보다 더 치명적인 독을 품게 되는데 벌레를 고(蠱)라 하고 그 독을 고독이라 한다. 설화에 가까운 오래된 이야기다. 하지만 상상 속 이야기로만 즐길 순 없다. 지금 이 사회에서 고독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청년들 이야기다. 얼마 전 한 지방대학교 축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축제무대 앞에 총학생회 간부들을 위한 VIP석을 따로 마련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의 특권의식과 일반 학우들에 대한 차별이 문제였다. 하지만 청년들이 바라본 지점은 달랐다. ‘역시 지잡대’,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머리에 X만 차서는...’식의 말이 들려온다. 마치 악폐습의 원인이 입시성적인 것 같았다. 이런 인격비하에 가까운 발언에도 해당 대학 출신이라는 사람들은 그저 부끄러워만 한다. 간혹 여기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노력하지 않는 자들의 불평불만’이나 ‘실패자의 변명’, ‘열등감’ 같은 낙인이다.   한 유명 웹툰에서 모 대학의 ‘VIP석 사건’을 풍자했다. 그에 관한 ‘BEST’ 댓글들 사진 출처 - 네이버 웹툰 (2015년 6월 20일자 캡처)   같은 대학, 같은 전공 내에서도 비슷한 일들은 빈번했다. 처음 대학을 들어갔을 때 동기로부터 받은 질문은 ‘정시 출신이냐?’였다. 당시 정시 출신은 성골에 가까웠다. 지균충, 기균충이라는 말도 있었다. 서울 지역 내 각 대학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지역균형선발전형과 기회균등선발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벌레로 묘사했다. 지방캠퍼스, 전과, 편입 등 우리는 같은 대학, 같은 전공 안에서도 출신을 구분하며 서로의 우월감과 열등감을 확인했다. 이런 차별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 당당해졌다. “초·중·고 12년 간 악써서 공부했는데 그 정도 차별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실제 보면 능력의 차이가 있어요.” 등 차별의식의 뒷배에는 ‘능력주의’가 있었다. 우리는 차별이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대우’라고 여겼다. 자신보다 못한 조건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더라도 능력의 우열을 가르는 것만큼은 확고했다. 능력과 노력에 있어 ‘옆’은 없다. 오직 ‘위’, ‘아래’만 있을 뿐. 위에 있는 자는 상위 포식자처럼, 아래에 있는 자는 먹잇감처럼 행동한다. 먹잇감이라 생각되면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상위포식자라 여겨지면 천적을 만난 것처럼 위축된다. 먹이사슬에 순종하는 청년들은 고독을 긍정한다. 되레 독충이 더 강한 독을 갖는 게 뭐가 문제냐며 반문한다. 청년의 실업률과 고용률은 서로 반대되는 추세다. 사진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강해져 가는 능력주의는 정말 정당할까. 노력해서 온전히 능력을 갖출 수 있다면, 능력과 성공의 관계가 1:1에 가깝다면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사회가 능력주의와 가까워 보이진 않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 보고서(OECD Skills Outlook, 2015)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년들 중 취업자와 무직자 간 능력 차이는 1% 이하로 회원국 중 가장 낮았다. 이대로 낙오자들의 평균능력이 계속 높아진다면 결국 마주하는 건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는 세상, 능력만으론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일 것이다. 그만큼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제약도 선명해지고 있다. 청년들의 교육과 임금수준이 부모의 교육과 임금수준에 비례한다는 연구결과들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성공과 실패에 개인의 몫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개인의 몫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능력이 더 이상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노예 검투사마냥 서로를 공격하면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최후의 승자에게 수여되는 명예와 재물이 얼핏 정당해 보일지 모른다. 관중이 보내는 환호에 중독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웅 같던 챔피언마저 결국 노예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겨루는 경쟁이 최고의 노예를 가리는 시합에 불과하다면 고독한 승자가 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안상현씨는 다문화 사회에 관심을 갖고 문제점을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 | 추천: 0
이다솜/ 청년 칼럼니스트 5월 24일은 세계 여성 비무장의 날이다. 그런 5월 24일을 기념해, 세계의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비무장지대에 모였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라는 목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지구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걷기 퍼포먼스에는 두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아일랜드 분규를 해결하는 데 공로를 세운 메리어드 매과이어, 라이베리아의 내전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리마 보위가 함께했다. 메리어드 매과이어는 북아일랜드 출신의 평화활동가로, 지난 2009년에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향하는 구호선에 탔다가 이스라엘군에 나포되어 국외 추방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리마 보위는 여성평화운동을 조직하여 라이베리아의 인종 문제로 인한 내전을 종식하는 데 애썼으며, 현재는 트라우마 치유 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또 월트 디즈니의 손녀 애비게일 디즈니, 미국의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도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지지하기 위해 이번 프로젝트에 연대한다. 애비게일 디즈니는 라이베리아의 평화활동가 리마 보위를 만난 후 여성, 전쟁, 평화라는 주제에 천착하며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지나친 이상주의라고. 지나친 순수함이라고. 그 여성들이 비무장지대를 걸어온다고 해서 하루아침 사이 과연 무엇이 바뀌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앞장서서 함께한 김반아 박사는 말한다. 그런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의 ‘두려움을 모르는 순수함’이 바로 지금껏 역사의 원동력이 되어온 거라고. 남북의 끊임없는 갈등, 그리고 그 상황을 둘러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 평화통일은 분명‘골치 아프고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라는 것이 반드시 불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한 사람으로 이번 걷기에 참여했다. 분단을 넘어서는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5월 24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으로 향했다. 보수 세력의 맞불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흰색 옷을 입는 국제여성평화걷기 팀에 대항하는 의미로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모여 있었다.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국제여성평화걷기가 시작되었고,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이 행사는 평화롭게 종료되었다. 국제여성평화걷기 사진 출처 - 필자   걷기 행사 뒤 이튿날, 서울시 청사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회의에도 역시 보수 세력은 맞불 시위를 하며 자리를 지켰다. 엄마부대봉사단, 어버이연합 등은 “국제여성평화걷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북한 인권을 외면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탈북 여성인 이애란 씨는 국제여성평화회의가 진행되는 도중, “북한의 핵개발이나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해서는 여기 있는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예상치 못한 이애란 씨의 항의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라이베리아 평화활동가 리마 보위는 그녀에게 다가가 “당신과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공감한다. 우리 역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라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실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연설이었다. 그녀는 머나먼 미국에서 한반도까지 평화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온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다니던 학교에는 한국전쟁에 징집될 뻔한 학생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학생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싸운 참전용사로,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고통이 실제 전쟁이 진행되었던 한반도 주민들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지구촌 어떤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상기하며 연설을 끝맺었다. 그녀는 이번 행사를 모두 마치고 난 파티 자리에서, 참여자들에게 ‘We are linked’라고 쓰인 팔찌를 선물로 남기고 갔다. 나는 믿는다. 언젠가 우리는 분단을 넘어, ‘보통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반도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한반도에서 냉전의 망령을 쫓아내는 한바탕 유쾌한 굿판을 벌이기 위해, 분단이라는 굳은살을 슬슬 문질러 풀기 위해 국제여성평화걷기가 일회성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화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우리의 걸음은 분명, 끊어진 남북의 허리를 잇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은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열망과 상상력으로 잔뜩 부풀어 오르는 중이다. 이 꿈을 함께하는 모두에게 우주의 기운을 담아 열렬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이다솜씨는 여성과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7 | 추천: 0
박보경/ 청년 칼럼니스트 새터(새내기 배움터)를 떠나는 첫날, 학회장 언니가 말했다. “여자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고, 남자 친구들은 올라와서 짐 나르자.” 그 말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분위기는 내가 끝까지 여대를 고집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여대를 가진 못했지만 대학 생활을 하면서 나는 종종 여성으로서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사회의 분위기를 대학은 그대로 흡수했다. 취준생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회 구조도 더 쉽게 보였다. “은행권 준비할 거야? 남자가 여자보다 더 쉬워. 여자는 똑같이 스펙 쌓고도 얼굴이 이뻐야 하거든.” 총학생회 부회장 출신의 여자 친구는 면접을 볼 때마다 학생회 이력에 관한 질문을 꼭 받았고, 다들 부담스럽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결국 친구는 이력서에서 ‘부회장’을 지웠고 지금은 학생회 경력 자체를 지울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은행 인턴인 한 친구는 노골적으로 이쁜 여자를 밝히는 남자 직원들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했다. 술자리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외모와 몸매 이야기를 하며 시시덕 거리는 분위기는 친구에게 상처로 다가왔다. -가부장제 여전히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위의 이야기들처럼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차별도 있고, 너무 깊고 당연시되어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차별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제도가 ‘가부장제’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가부장제는 더 깊고 단단한 세월을 보냈다. 가부장제 하에선 육아는 당연히 여자의 역할이고 자연스럽게 남자의 역할은 아내와 아이를 위해 돈 버는 것이 된다. 왜 요즘 유행하는 노래도 있지 않은가. “어머님이 누구니~ 어떻게 너를 그렇게 키우셨니~” 이처럼 자식의 육아 몫은 어머니에게 있다. 이런 가부장제 하에 억압받은 여성들은 병이 생긴다. 그게 바로 우울증이다. 우울증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우울증의 종류가 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생리 우울증, 육아 우울증, 출산 우울증, 갱년기 우울증 등.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한 통계에서 2013년 한해 심한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 수가 66만 4600명이었으며 여성 환자의 비중은 약 77%로 남성 환자의 2배 이상 많았다고 한다. 우울증 환자의 치료 과정을 살펴보면 갱년기 여성의 경우 ‘삶의 목표 찾기’가 치료 과정의 주요 과제다. 이런 현실을 본다면 여성의 우울증은 신체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여성의 사회화 과정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런데,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오롯이 여성일까? 어찌 보면 남성이 가부장제의 가장 불쌍한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최근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들이 한창 클 나이에 아빠들은 제일 바쁘다. 때문에, 남자아이들은 인간적인 아버지보다는 사회적으로 정해져있는 남성의 역할을 습득한다. 그래서 그들은 무조건 강해야 하며, 어깨에 짐을 져야 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재작년(2013년) 우리나라 자살률 중 연령별 자살 분포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집단은 남성 노인이었다. 남성에게 씌워진 책임감, 가정 내에서의 고립감은 가부장 제도의 결과물이다. <아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아빠와 자식들의 관계는 엄마와 자식들의 관계보다 항상 멀다. 외롭다. ‘부성애’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다. 남성의 부성애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빠를 부탁해>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 요즘 티비에 ‘아빠’가 자주 나온다. 특히 배우 엄태웅을 보면 가슴이 찡하다. 사소한 것에 감동하고 쉽게 눈물 흘리는 그의 모습은 남성의 틀을 깨부수고 있다. 이제 슈퍼맨이란 가면을 쓴 아빠를 가정으로 불러야 한다. 가면을 벗은 맨 얼굴의 사회는 분명 따뜻할 것이다. 박보경씨는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