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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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현진, 박선영, 임영훈, 정석완, 조소연, 주만, 주윤아, 최우식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재작년 돌잔치 행사장에서 반년 정도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가본 이들은 알겠지만, 돌잔치 행사장의 분위기는 대부분 유쾌하다. 행사장 분위기에 따라 ‘팁’이 결정되기 때문에 사회자는 필사적으로 농담을 많이 던진다. 성장 동영상, 덕담, 축의금 경쟁, 사은품 추첨 등 여러 코너가 있지만, 가장 웃음이 많이 터지는 부분은 돌잡이다. 아르바이트했던 곳에서는 연필, 지폐, 명주실, 판사봉, 청진기, 마이크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레퍼토리는 항상 같았다. 먼저 사회자가 부모님께 무얼 잡았으면 하는지 묻는다. 부모님의 답변은 대부분 돈이다. 연필도 가끔 나온다. 마이크를 얘기한 부모님은 한 명도 못 봤다. 부모님이 돈이라고 하면 사회자는 뭘 아시는 분이라며 익살스럽게 동의한다. 돈이라고 하지 않으면? 한 번 더 선택할 기회를 준다. 그러면 모두가 웃는다. 아,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돌잡이가 시작되면 아이의 손에 모든 관심이 쏠린다. 사회자가 접시를 슬쩍 돌려 지폐가 아이 앞으로 가도록 놓기도 한다. 적극적인 부모님은 지폐를 들고 흔들기도 한다. 아이가 손을 뻗었다. 잡은 건? 명주실이다! 아...! 박수 소리가 작다. 부모님은 어쨌든 웃어 보인다. 사회자는 요즘 시대는 건강이 재산이라며 급히 다음 코너로 넘어간다. 사진 출처 - pixabay 태어난 지 1년 된 아이가 생일잔치에서 돈을 잡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아이가 장래 행복해지기 위해 돈이 가장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행복에 있어 돈이 중요하다는 개념과 돈이 다른 가치들(건강, 지혜, 명예 등)에 우선한다는 개념은 조금 다르다. 조금 다른 가족이 있었다. 돌잔치 사회자가 평소와 같이 물었을 때, 이들 부모는 한목소리로 명주실을 말했다. 아이의 행복에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 수백 번의 돌잔치를 지켜보며 처음 들은 대답이었다. 이 부부는 평소 내가 믿고 있던 행복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복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돈이 나와 타인의 행복을 판단하는 척도가 아니라, 돈이 행복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인 그런 행복 말이다. 그리고 이제 막 돌이 된 그 부부의 아기는, 앞으로 꽤 값진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행복에 대한 자기 정의가 필요하다. 직업적, 경제적인 행복밖에 상상하지 못한다면, 그는 그렇게 될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한입 베어 먹는 1,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이 진정한 행복인지, 아니면 행복에 도달하기엔 조금 모자란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자녀에게 물려줄 행복을 우린 조금 더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자가 질문을 조금 바꾸는 것도 좋을 것이다. ‘부모님, 자녀가 어떤 종류의 행복을 거머쥐길 바라시나요?’ 라고.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5 | 추천: 0
-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제주도에서 6월 한 달을 보냈다. 명분은 힐링이 필요해. 쉬지 않고 뭔가를 해야 하는 도시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일명 '제주도 한 달 살기'에 도전했다. 백수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제대로 누리고 왔다. 시간적으로는 자유인이지만 금전적으로는 노예 상태였으므로 바다 앞 럭셔리 펜션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차선책은 게스트 하우스 스탭, 일명 종업원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마다 조금씩 여건이 다르지만 보통 한 달에 보름 정도만 일하고 남은 날들은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일하는 날도 방 청소가 끝나면 체크인을 시작하는 오후 4시까지는 자유다. 일단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숙식제공을 빌미로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긴 했다. 하지만 취업준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벗어두고 싶었다. 일하는 날이면 게스트 하우스가 위치한 제주시 근방을 돌고, 쉬는 날에는 멀리 서귀포시까지 나갔다. 나는 할머니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아침잠이 없다. 새벽부터 일어나 슬금슬금 청소를 시작한다. 퇴실하는 손님 순서로 청소를 하다보면 늦어도 정오에는 일이 끝난다. 오늘의 목적지를 정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바닷가 근처의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를 반복하고, 인적이 드문 돌담길을 바다가 보일 때까지 걸었다. 테마는 ‘카페 탐방’이었다. 나는 커피 없인 하루도 못사는 카페인중독자다. 커피 맛이 유명하거나 특색 있는 메뉴를 판매하는 카페는 여행지에서 빠뜨릴 수 없다. 사실 일부러 계획할 것도 없었다. 바다가 가까운 곳부터 제주 시내까지 홍대 근처에 있을 법한 ‘힙’한 카페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힙하다’는 말을 듣고 특정 신체부위를 떠올릴 지도 모르지만, 이건 엉덩이와 다리 사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트렌디하다는 뜻이다.) 카페 덕분에 해변까지 유명해진 경우도 있다. 세화해변은 해변가에 위치한 ‘카페 공작소’와 함께 유명세를 탔다. 세화리에 가면 해변가보다 카페 공작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카페뿐만 아니라 음식점,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가 펴내는 독립출판물을 판매하는 책방 등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제주댁 이효리를 시작으로 제주도는 힙스터들의 유토피아가 된 듯하다. 힙스터는 단순히 유행에 민감한 것을 넘어 주류 문화보다 독립문화적 가치를 쫓는 사람들을 말한다. (뭔지 감이 잘 안온다면 당신은 힙스터가 아니다.) 이런 힙한 사람들, 자연과 더불어 여유로운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여행을 오고, 작업실을 차리고, 아예 자리를 잡는다. 제주도의 새로운 풍경으로 자리잡아가는 문화공간들은 자연스럽다. 제주도 특유의 푸르른 풍경과 젊은 감성의 조합은 제주를 찾는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으니. 전통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들은 가족여행객과 중국인들이 가득하다면, 제주를 찾는 젊은이들이 꼭 들르는 곳은 ‘인생 프사(프로필 사진)’를 남길 수 있는 공간들이다. 카메라만 가져다 대면 각이 나온다. 카페 안에 가득한 사람들을 피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사진 출처 - 필자 하지만 한층 힙해진 제주도를 마냥 환영하기에는 씁쓸한 맛이 있다. 내 머릿속에는 죽어있던 도심 곳곳을 새롭게 바꿔놓자마자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나는 젊은 예술가들의 뒷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제대로 힙한 멋쟁이들이 값이 싼 지역으로 들어와 낡은 동네의 분위기를 바꿔놓으면, 임대료가 치솟아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역설을 말한다. 소위 육지인들에게는 힙스터의 파라다이스, 힐링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제주도민들에게 제주도는 삶의 현장이다. 제주살이의 에메랄드빛 환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제주도가 고향인 대학 친구를 만났다. 서울이 아닌 제주에서 만나 느낌이 다르다며 깔깔댔다. 힐링하러 왔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너도 참 대단하다며 추켜세웠다. “제주도 너무 좋다! 서울에 있으면 고향 생각나겠다. 이 좋은 제주도를 어떻게 떠나왔어?” 내가 물었다. “여기서는 미래가 안 보여서.” 친구의 대답에 ‘힐링’ 운운한 것이 미안해졌다. 지난해 한 취업포털 조사 결과 전체 채용공고의 40.9%가 서울에 집중돼 있었다. 경기도까지 합치면 수도권에 일자리의 반이 넘는 65.6%가 몰려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통계들 중 취준생인 내 뇌리에 박힌 숫자다. 제주 지역 일자리는 0.4%로 전국 최하위였다. 그나마 생기는 일자리도 육지에서, 중국에서 건너온 사장님들에게 제주도 청년들이 고용된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일자리를 얻고, 성실하게 일하다 보면 종업원도 멋들어진 바닷가 카페를 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몰려든 자본으로 몇 년 새 뻥튀기 된 땅값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6 | 추천: 0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언니들, 이거 나만 불편해?” 한 여성 커뮤니티에서 등장한 이 말은 ‘여교사’, ‘처녀작’처럼 여성차별적인 현상이나 언어에 불편함을 표할 때 자주 쓰이면서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유행어에 설명서처럼 따라오는 단어가 ‘프로불편러’다. ‘프로불편러(Pro+불편+-er)’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프로처럼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은 여성차별을 조장하는 글과 상관없는 유머글이나 일상글에도 “언냐(‘언니야’를 줄여 말하는 것으로, 여성 특유의 말투를 묘사한 것)들,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여성 커뮤니티 유저들이 사소한 것에도 ‘불편함’을 제기해서 논란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글에도 위와 같은 댓글을 달며 ‘프로불편러’라고 불리는 일부 여성들을 되레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프로불편러를 희화화한 코너를 내보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코미디프로그램 <SNL>에는 일명 ‘프로불편러’를 조롱하는 듯한 방송을 해 논란을 낳았다. 사진 출처 - tvN 프로불편러는 본래 남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은폐되어 있거나, 혹은 대부분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불편함’을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예민한 DNA를 그들은 가지고 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예민함은 기성제도와 반대 노선을 걷는 것이므로 사회에서는 늘 소수이자, 비주류이다. 만약 이 소수의 프로불편러가 ‘불편함’을 표현하면, 다수는 이에 대해 불편해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다수는 그들이 믿고 있던 세계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소수가 다수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도 하다. 그 이유로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외치는 프로불편러의 ‘소수의견’이 사회적 각성을 일으키기 보다는, 다수가 ‘피곤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그들을 불편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은 남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는 ‘불편함’을 일단 불편해하고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흔히 쓰이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말은 무언가에 의문을 갖거나 문제를 지적하기보다 ‘다수의 의견에 묻어가라’는, 암묵적으로 동의된 사회적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길 바라는’ 사회에서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프로불편러의 존재가 다수의 눈총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이것이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소수자’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다수자’가 불편해하는 소통구조 하에서, 다수는 소수의 입을 막는다. 프로불편러의 정당한 문제제기가 그저 ‘유난스러움’으로 격하되고 그 과정에서 소수자에 대한 잔학한 폭력이 수반된 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미국 노동자들이 일으킨 ‘메이데이 운동’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이들은 “기계를 멈추자!”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880년대 후반, 밤낮없이 기계가 돌아가던 공장에서 기계만도 못한 삶을 살던 노동자들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최소 노동시간 8시간의 인간다운 삶을 살자고 나선 것이었다. 당시 너나 할 거 없이 공장을 세우고 노동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당연시 여기던 자본가와 기득권층은 그들을 재억압하기 위해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즉, 소수의 프로불편러가 억압에 대한 저항을 하면 다수가 그들에게 재억압을 가하는 식이다. 이러한 억압과 폭력의 악순환은 프로불편러의 입을 막는 행위가 되고, 사회의 유익한 담론을 만들어 내는 기회를 박탈해버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다수의 억압에 저항하는 소수의 프로불편러에 의해서 변화되어왔다. 만약 역사 속에 프로불편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껏 세계사에서 있어왔던 수많은 인식의 전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이단으로 몰리고, 화형을 당하는 등 억압과 재억압을 감수하며 ‘불편함’을 알리려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와 제자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들은 아직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미국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운동을 계기로 전 세계에 공감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8시간 노동’은 꿈의 노동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짐작하지 못했을 뿐, 프로불편러는 일상 속에 늘 존재해왔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혹은 침묵하는 보편적 사실에 돌을 던지고야 마는, 그런 ‘일침러’들 말이다. 비단 ‘김여사’나 ‘~~녀’ 담론에 반대하며 “언니들, 이거 나만 불편해?”를 외치는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금지를 주장하는 성소수자와 장애인, 부당해고와 임금삭감에 저항하는 노동조합,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단체 등 일상 속의 프로불편러가 다양한 사회 군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불편러는 이 사회에 ‘메이데이’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다수가 막연하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수의 ‘애매함’을 파고드는 소수의 ‘구체적’ 지적은 결국 사회구성원들이 ‘나는 왜?’ 나아가 ‘우리사회는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유익한 담론을 공론장으로 이끌어낸다. 편향된 하나의 가치가 굳어지는 사회에 구조 요청을 보내는 ‘메이데이’를 통해 그들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적어도 이들의 ‘메이데이’ 외침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릇이 크다’라는 말은 아량이 넓은 사람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 ‘큰 그릇’보다 필요한 것은 ‘빈 그릇’이다. 제 아무리 ‘큰 그릇’이라도 하나의 생각만 담다보면 넘쳐흐르기 마련이다. ‘빈 그릇’은 ‘무엇이든 담을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일종의 사회적 배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나와 다른 ‘소수의견’이라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관용이, 소수의 불편을 품어낼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6 | 추천: -1
최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자유는 책임을 뜻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를 두려워하는 이유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자유와 책임을 동의어로 봤다.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기준에 비춰본다면 한국 언론은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리고 얼마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상위권에 있는 나라들, 그러니까 광범위한 언론자유를 누리는 국가들을 쭉 훑어보면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가한다는 북유럽에 몰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언론자유 수준이 민주주의 수준과 직결된다는 게 분명해 보인다. 언론자유지수를 보면 한국은 ‘정부는 비판을 참지 못 한다’며 70위로 평가받았다. 2005년에는 30위, 2014년에는 51위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언론의 자유가 침해받은 사례는 많다. 기사 사전검열과 보도지침은 비판을 참지 못하는 정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언론이 오히려 자유를 두려워한 적도 많았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책임과 짝을 이룬다. ‘세월호’는 한국 언론의 민낯을 보여줬다. 받아쓰기식 보도, 선정적 보도 등 부끄러운 사례가 끝없이 이어진다. 각종 언론단체는 수많은 반성과 자성을 내놓으며 책임 있는 언론이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옥시’사태를 보면 달라진 게 없다. 가습기 살균제가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5년도 더 됐다. 언론은 5년간 옥시 피해자들의 절규를 등한시했다. 검찰이 특별수사팀을 꾸리고 나서야 집중보도하기 시작했다. 정치/자본 권력을 감시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전할 ‘자유’를 언론 스스로 외면해온 것이다. 옥시 유가족 대표는 “언론의 관심이 고맙기도 하면서 당황스럽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일찍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줬다면, 이렇게 많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다. 옥시 전 사장 신원호가 검찰 수사에 앞서 포토라인에서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청사 안에서는 동행인에게 “내 연기 어땠어요?”라는 발언을 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그날 그 발언에 관한 기사 수십 건이 보도됐다. 확인 결과, 이 발언은 사실이 아니었다. 신원호는 물론 검찰 역시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자극적 기사 낚시질은 언론의 자유가 아닌 ‘언론사의 자유’일 뿐이다. 언론사의 자 는 일개 기업의 이윤추구의 자유나 다름없다. 사진 출처 - flickr.com 자유가 책임과 동의어라는 시각에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몇 년째 하락중인 것이 꼭 정부와 권력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자유에 합당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은 언론사의 방종도 한몫했을 것이다. 2014~2016년 언론자유지수 하락(51~70위)과 세월호 보도, 기사 어뷰징, 옥시 사태 등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공정한 보도, 약자를 위한 보도는 언론의 책임인 동시에 언론의 자유이기도 하다. “나는 언론인인 동시에 사형수라고 생각한다.” 한 이집트 기자가 했다는 말이다. 그는 파타 엘시시 군부정권을 고발하는 기사를 비밀리에 취재 중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하는 이유를 묻자, “언제든 내 취재가 발각되면 정부가 날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나는 이집트의 언론인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출처: 시사IN, 한국 언론자유지수 70위… 역대 최하위 기록). 비판을 참지 못하는 정부를 목숨을 걸고서라도 비판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훨씬 높지만, 이집트 언론이 훨씬 부러워지는 요즘이다. 참고로 이집트 언론자유지수는 159위다. 최지영씨는 국정화 교과서와 위안부 문제 등의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0 | 추천: 0
김정웅/ 청년 칼럼니스트 ‘한국 3대 거짓말’이라는 농담이 있었다. 처녀의 “난 시집 안 갈거야.”, 장사꾼의 “이거 밑지고 파는 거야.”, 노인들의 “빨리 죽어야지.” 말은 그렇게 할지라도, 결과적으론 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는 게 웃음 포인트였을 테다. 그런데 2016년의 한국에선 이 농담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국 사회 무한경쟁의 지옥도 속에서, 경쟁 밖으로 밀려난 청년과 자영업자, 노인들이 하는 저 말들을 꼭 거짓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드라마 ‘스타일’ 사진 출처 - SBS 처녀의 거짓말 : 대학을 다니다 알게 된 누나 한 명이 있다. 내가 누나를 처음 알게 된 신입생 시절, 흔히 말하는 결혼 적령기가 가까웠던 누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은 절대 결혼을 하지 않겠노라고 종종 선언하곤 했다. 나는 그 선언을 참 특이한 것으로 여겼다. 심지어 누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할 것이라고 넘겨짚기까지 했었던 기억이 난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누나는 정말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누나의 생각은 한결 같았다. 그런데 누나를 바라보는 나와 이 사회의 시선은 많이 달라졌다. ‘결혼을 포기한 청년’이라는 말. 너무나 익숙해져 더 이상 특별할 것이 없는 말이다. 평범한 청년인 나도 요즘 결혼을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 아니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부쩍 많이 든다. 결혼을 못하는 청년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3포, 5포, 7포를 넘어 N포세대가 된 지금의 청년들. 청년 실업, 높은 집값, 낮은 소득수준같이 어렵고 다각적인 원인이 얽혀 있다. 확실한 것은 모두 '돈'에 물려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좋은 수저를 물지 못한 청년들은 이제 진심으로 결혼을 포기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장사꾼의 거짓말 : 우리집은 횟집을 한다. 따로 사람을 쓰지 않고 부모님께서 운영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음식 팔아서 남는 게 없다는 말씀을 버릇처럼 하신다. 그때마다 매출액에서 재료비, 임대료, 수도세, 전기세 등을 뺀 순익을 계산해 말씀해주시곤 한다. 들을 때마다 위태위태한 우리집 가계 수입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요즘 요식업 트렌드가 무한리필이라 좋은 집이 많으니 그런 식당 한 번 가보시라고 지나가듯 말씀을 드렸다. “다들 그렇게 싸게 팔면 우리 가게는 뭘 먹고 사니.”라는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자영업 창업 대비 폐업률 85%. 자영업자 10명 중 9명이 망한다는 얘기다. 장사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다. 안정적 노후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은퇴자들은 영세자영업으로 내몰리고 있다. 공급이 무한정 늘어나니 경쟁은 심화된다. 가격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다. 영세상인은 물건을 밑지고 팔며 ‘인건비 따먹기’로 근근이 생계를 버텨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노인의 거짓말 : 몇 년 전 군 생활을 마친 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자신이 겪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대형마트 경비 아르바이트를 하며 순찰을 돌던 도중 화장실에서 목을 맨 노인의 시신을 발견했었다는 것이다. 친구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와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인근에서도 종종 이런 일이 있다’고 설명해주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주었다. 공포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만 알았는데, 그 정도 일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종종’ 있곤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빨리 죽을 거라는 노인의 농담이 현실이 된 것은 가장 비참하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노인 자살률 OECD 1위, 10만 명 중 116.2명, 선진국 노인 자살률보다 무려 20배가 높다. 왜 노인들이 세상을 등지려 하는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문제다. 한 가지 단서를 빈곤에서 찾을 수 있겠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50%, 이 또한 선진국 중 단연 1위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한 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는 날엔 자신을 모욕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이라고. 이 나라 노인들은 이 땅에서 자신을 모욕해가며 살아가는 일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것인가. 그리하여 삶 자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인가. 청년 문제, 영세상인 문제, 노인 문제. 예전 농담이 지금의 우리 사회 병폐들을 담고 있다. 세 문제는 모두 하나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가난’. 가난이 저들에게 결혼을, 생계를, 삶을 포기하도록 가혹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3대 거짓말’ 농담을 듣고도 웃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경쟁에서 밀려나는 이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보호를 아끼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 농담에도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김정웅씨는 사회와 정치의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2 | 추천: 0
강은진/ 청년 칼럼니스트 취업, 연애, 결혼 등 우리들이 이제까지 믿어온, 당연하고 평범한 삶과 점점 멀어지는 N포세대 대부분은 윗세대의 그늘을 갖고 있다. 지금 청년들의 부모들은 자신들이 먹고살기 힘들어 혹은 그때는 못 배워서, 갖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자신들의 욕망을 자식들에게 강요한다. 그들은 요즘 세상에는 직업의 귀천이 없다 하면서도 여전히 차별을 둬 남들과 비교하며, 내 자식이 피라미드 상층부에 못 들면 인생 실패한 것 마냥 한탄한다. 결혼문제에서도 사랑보다 돈의 자리가 커져가고, 부모들끼리의 싸움에 지친 자녀들은 파혼하네 마네 하기가 일쑤다. 남들과 다른 면이 내 자식에게 있으면 개성으로 인정하기보다, 흉이라 생각하는 부모 때문에 떳떳하게 자기를 표현하지 못해 어둠을 가진 젊은이들도 꽤 많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는 언뜻 보면 따뜻하게 인생 찬가를 외치는 듯하지만, 마냥 밝은 세계만을 묘사하지 않는다. 실없는 웃음과 유머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관계의 이름을 빌린 폭력, 부모 자식 간의 뒤틀린 관계를 날것 그대로 들이민다. 모두 “널 사랑해서, 널 너무도 잘 알아서, 널 위한 일을 하는 것뿐이야."라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엄마가 딸에게 갖는 지독한 집착은 오히려 딸에게 있어 트라우마가 돼버리고,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데 집중하느라 정작 자식들에게 사과하는 법을 몰라 죽을 때까지 화해도 못한다. 각자 자신의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상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 준다. 이들은 대개 공통적으로 성인이 된 자식을 여전히 자기 ‘소유’라 착각한다. 그 소유에서 몹쓸 ‘권력’이 생겨난다.   tvn 드라마 - <디어 마이 프렌즈> 사진 출처 - tvn   괴물은 어떤 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밖으로 좀처럼 꺼내기 꺼려하는 부모 자식 간의 애증으로 얼룩진 권력과 폭력의 역사는 단순히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다르게 변주되어 우리 사회 깊숙이 넓게 침투해있다. “젊음을 돈으로 살 수 없으니, 젊은이를 헐값에 사들여” 소유하려 드는 열정 페이도 그렇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지향하는 회사 안에서도 그 강압적 권력구조가 그대로 재현된다. 항상 더 많이 가지고, 더 오래 겪어 본 기성세대의 고용주들이 자식 같은 청년들에게 “다 너 잘되라고, 너 경험 좀 하라고”라는 걱정 어린 충고와 함께 갑질을 한다. 아들 같고 딸 같다고 하며 불쾌한 손을 뻗고, 심지어 지나치게 사생활에까지 간섭한다. 이런 사회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유독 두드러지지 않는가? 외국 특히 유럽 청년들도 요즘 캥거루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관계 속 권력의 폭력성은 한국보다 덜하다 느껴진다. 일단 생존을 책임지는 경제권을 순전히 부모가 독점하고 있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크다. 혼자 아르바이트를 해도 임금 자체가 한국 청년들의 것 보다 더 높다. 시급으로 살 수 있는 식료품을 비교해보면 여기보다 더 풍족하고 질도 좋다. 월세 보증금이나 등록금 또한 더 싸다. 이러한 조건들은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다. 정부를 비롯한 기성세대들만이 풀 수 있는 곤란하고도 무거운 숙제를 청년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젊지만 힘은 없는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청년들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어도 그것이 앞서 말한 부모들의 착각처럼 소유와 권력에 취해 우리들을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재 청년들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노력들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봄에서 비롯한 것들인지 묻고 싶다. 강은진씨는 책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국문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6 | 추천: 0
박꽃/ 청년 칼럼니스트 “여성들 중에는 자기의 외모가 남성중심사회에서 굉장히 잘 먹혀들어 간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있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에서 몇 차례 후원회원 인터뷰를 맡은 적이 있다. 그 때 만난 한 남성 연극연출가는 꽤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남성 중심적 사회가 유지되는데 남성만큼이나 기여하는 여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는 이런 존재를 ‘공모하는 여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사진 출처 - ‘공모하는 여성’ (보부아르, 제2의성) 자신이 매력적인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생각을 토대로 자신감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사교성을 발달시킨 여성들은 실제로 꽤 많다. 이런 경우 그녀를 싫어할 남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한 번 꼬셔볼까?’ 하는 동물적 접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개 외적 경쟁력을 바탕으로 내적 자신감까지 겸비하게 된 여성은 뭇 남성의 호감을 사게 마련이다. 그런 여성은 ‘예민할 이유’가 없다. 존재가 호감으로 이어지는 마당에 구태여 조연 취급을 받거나 모욕당하는 여성들의 감정에 이입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이런 여성을 근거로 들어 페미니스트를 비하한다.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기 때문에 자격지심으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식이다. 경쟁력 있는 외모를 가져서 남자들에게 사랑 받으면 그런 투쟁을 할 리 없다는 것이다. 공모하는 여성은 이런 이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 쉽게 부인될 수 있는 것이다. 젠더 트러블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는 미소년같은 중성적 외모로 사상만큼이나 외모가 매력적인 페미니스트로 평가받는다. 올해 초 “1년간 연기 쉬고 페미니스트 활동에 전념하겠다.”고 선포한 엠마 왓슨을 비롯, 헐리웃 여배우들 다수가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한다. 그녀들이 외적 자격지심 때문에 페미니즘을 말할까? 엠마 왓슨 사진 출처 - UN Women 공모하는 여성의 존재가 페미니즘의 역사에 안긴 가장 큰 고민은 오히려 이런 것이다. ‘어떤 여성은 차별 받겠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같은 생각을 하는 여성이 다수 존재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여성 평등 운동의 동력을 확장할 수 있을까? 같은 여성조차도 페미니즘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답은 결국 ‘성별을 뛰어 넘은 페미니즘’에 있다. 그것이 내가 한국여성의전화에 후원하는 '남성 회원'을 인터뷰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이상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성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주의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조롱당하거나, 모욕당하거나, 상처받은 개인 중에는 남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까지 감싸 안을 때 페미니즘의 생명력이 확장될 수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과거 칼럼에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바탕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노무현은 남성이지만, 남성주의적 패권과 권력 담합에 강제로 희생된 힘없는 개인이기도 했다. 때문에 페미니즘은 언제고 그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남성이지만 남성주의에 무릎 꿇려진 약자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페미니즘이 더 이상 성별구도가 아닌 ‘강자에 맞서는 약자’의 프레임으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강남역 화장실에서 이유 없이 살해된 여성을 추모하며 눈물을 흘리던 여러 남성들을 기억한다. 나와 함께 10번 출구 부근에 나란히 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들은 주로 2-30대의 젊은 남성이었다. 이 세대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기득권으로 통칭되는 세력의 남성주의적 폭력성에 시달려본 경험이 있는 사회적 약자들일 가능성이 높다. 남성 역시 약자의 심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된 시류는 지금, 페미니즘 운동의 확장성을 말하고 있다. 공모하는 여성은 성별만 여성일 뿐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반대로 남성주의의 테두리 밖으로 삐져나온 남성, 남성주의적 폭력성에 상처받을 수 있는 남성은 언제든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존 레전드가 페미니스트일 수 있는 이유이고, 정희진이 노무현을 안타까워할 수 있는 이유이며, 이 글을 보는 당신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3 | 추천: 0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5월17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묻지마 범죄로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은 남혐 여혐 논쟁으로 번졌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여진 포스트잇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혐오범죄 논의를 거치며 상대 이성을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점점 과격해진 시위는 5월22일 급기야 ‘남혐·여혐 싫다, 서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의 피켓을 든 여중생을 여성시위대가 집단 구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해자가 정신병력이 있던 것으로 밝혀져 위 사건이 남성 전반에 퍼진 여성혐오를 대표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대표성 논쟁과는 별개로 ‘여성 혐오가 사회전반에 도를 넘고 있다’라는 데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있다. 오랜 시간 존재해온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과 억압, 최근에 이르러서는 여성혐오의 경험까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여성차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또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사회적 차원의 여성혐오 범죄라는 결론을 내릴지라도)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논리는 다분히 이분법적이며, 사회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2007년 조승희의 총기난사 사건을 두고 미국의 모든 한국인 유학생이 잠재적 범죄자라고는 단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논리는 어느 지점에서 발생했을까? 여성의 억압과 차별 해결을 위해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흡사 2세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지배구조와 남성우월주의가 여성을 억압한다는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고, 페미니즘 운동을 남성에 대한 공격의 도구로 바꾸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작년 미국에서는 SNS를 이용한 여성들의 ‘반페미니즘’ 선언까지 일어났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역시 핑크 코끼리, 여중생 등 여성혐오 시위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존재했는데, 급진적인 페미니즘의 폭력성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나타내는 단서일 수 있다. 강남역 10번출구 추모 쪽지 사진 출처 - 아시아경제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바바라 버그는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내렸다. “페미니즘은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이다. 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는 자유, 사회의 억압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페미니즘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단순히 남성이라는 존재를 넘어 남성 혹은 여성 스스로조차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제도적, 규범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억압’이다, 남성은 페미니즘의 장애물이 아니며, 페미니즘의 성공을 위해 여성은 물론 남성의 공감 또한 필요하다. 크게 2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여성집단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페미니즘 담론은 남성집단의 자발적인 자성과 행동변화를 유도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정치적 설득력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표적인 움직임으로 엠마 왓슨이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유명해진 ‘he for she’캠페인이 있는데, 남성들 역시 그들의 어머니, 여동생, 배우자 등을 위해 페미니즘에 동참해줄 것을 독려한다. 둘째,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 역시 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이때 남성은 페미니즘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페미니즘을 ‘보수적, 억압적 성적규범으로부터의 자유’로 정의한다면, 페미니즘은 ‘호전적인 남성’, ‘경제적 책임자로서의 남성’과 같은 성적규범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포함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 공동체 내부에서 여성만이 보수적 성적 규범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남성 성역할에 관한 고민은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양육자로서의 어머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동 양육자인 아버지’가 동시에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남성 또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일반 여성이 참여하는 여성시위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시위가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았잖아’와 같이 성적 대립구조를 부추겨서는 제자리걸음만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남성이 여성의 잠재적 조력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손을 내밀 때 페미니즘은 더 큰 타당성과 행동력을 갖게 될 것이다. 사건 발생 이후 현재 7일, 강남역 살인사건은 계속 주요 보도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페미니즘을 ‘포지셔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섬세한 전략이 필요하다.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1 | 추천: 0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돈 모으기 왜 이렇게 어렵냐.” 친구가 자리에 쓰러지듯 카페 의자에 앉으며 말을 던졌다. 간만에 모인 우리는 하나 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A는 졸업한지 이제 1년이다. 학원 선생님으로 일하며 돈을 모으고 있지만 원룸 보증금 마련은 멀었다. 일주일에 3일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생활비를 번다. 아끼고 아껴 200만 원 남짓을 모았지만, ‘살 만한 곳’은 보증금 300만 원부터 시작이다. ‘괜찮은 곳’은 500만 원은 줘야 한다. 친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전화해 힘들다고 말했다며 울먹였다. 월 20만 원짜리 고시원 생활은 한동안 계속 될 듯하다. B는 7월이면 지금 사는 집의 계약이 만료된다. 슬슬 방을 알아봐야 하는데, 부동산에 방을 보러 다니는 것만큼 진 빠지는 일이 없다. 눈치를 보며 가격을 점점 올리는 부동산 아줌마를 쫓아다니다보면 눈은 높아지고 스스로는 작아진다. 기껏해야 5평도 안 되는 집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에 전화를 하고 실시간으로 방 구하는 앱을 들여다봐야 한다. 서울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가격이 떨어지지만, 북쪽 끝이건 서쪽 끝이건 지하철이 닿는 서울 안에는 있어야 한다. 취준생이니까. 취업 스터디도 학원도 도서관도 설명회도 모두 서울에서 열린다. 나 역시 집을 찾아 떠날 때마다 딜레마에 빠진다. 삶의 질을 포기할 것인가, (부모님)등골브레이커가 될 것인가. 그 삶의 질이라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다. 벌레나 곰팡이가 없고 물 잘 나오는 곳. 처음 집을 구할 때는 최대한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싼 곳을 줄기차게 외쳤다. 보증금 100만 원에 관리비 포함 20만 원이라는 집은 정말 누울 수‘만’ 있는 크기였다. 순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본 독방이 떠올랐었다. 변기로 쓰는 구멍 대신 멀쩡한 화장실이 있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그 화장실도 집 밖 복도 끝에 있는 공용이긴 했지만. 키가 작아 다행이지 키 큰 사람은 발이 현관으로 나올 지경이었다. 참고로 나는 160cm가 소원인 사람이다. 결국 등골브레이커가 되기로 했다. “아, 행복주택은 어떻게 됐어?” A가 물었다. 셋 다 떨어졌다.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2016년 행복주택 물량을 당초 14만 가구에서 15만 가구로 확대했다는데, 우리 셋의 주거와는 거리가 먼 모양이다. 1분기 신청을 앞두고 취준생도 행복주택 신청자격을 얻었다. 집다운 집에서 몇 년 동안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었다. 1분기 신청 결과, 최고 경쟁률은 서울 가좌지구로 평균 47.5: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1분기 공급되는 4곳 지구 중 대학생과 졸업한 지 2년이 넘지 않은 졸업생에게 50%를 배치하는 ‘대학생 특화단지’는 가좌지구 한 곳 뿐이었다. 가좌지구의 50%는 해당 자치구 내의 대학 재학생과 졸업자에게 우선권이 돌아갔다. 우선 선발권을 얻지 못한 나는 행복주택의 ‘행복’을 누릴 수 없었다. 47.5:1의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사람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사회초년생·취준생·대학원생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은 행복주택이 유일하다. 가좌지구의 362세대에 들지 못한 1만 6천여 명은 또 각자 집을 찾아 헤매야 한다. 편히 두 발 뻗을 집이 절실한데도 신청 자격도 얻지 못한 청년들도 많다. 대학 졸업 후 2년이 지난 대학원생이나,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직장·재산이 없어도 신청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 바라는 게 더럽게 많죠 (그렇죠) 쉬고 싶죠 시끄럽죠 다 성가시죠?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그럴 땐 이 노래를 초콜릿처럼 꺼내 먹어요 … “방 말고 집에서 살고 싶다.”는 B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집이 없다. 몸을 누이고 짐을 쌓아두는 방이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1~2년 단위로 옮겨 다녀야 한다. 학교에도 직장에도 속하지 못한 우리는 먹고 자는 곳에도 속해있지 못하다. 자이언티(Zion.T)의 노래 ‘꺼내먹어요’의 가사처럼, 집(방)이라 부르는 곳이 있지만 늘 집이 그립다. 사진 출처 - magdeleine 이집트에는 ‘사자들의 도시’(City of deads)라는 곳이 있다. 역대 파라오의 무덤이 늘어선 역사 유적지가 아니다. 살 곳을 찾지 못한 도시 난민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장소다. 사람들은 과거 귀족층이 묻혀있는 무덤과 무덤 사이 공간을 이용해 집을 짓고 살아간다. 사회적으로 죽은 자들이 시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곳이 사자(死者)들의 도시다. 집 없는 서울 사람들은 무덤 대신 도시 속으로 스며든다. 늘어선 건물들 사이사이의 좁은 틈새를 찾아 헤맨다. 어딘가 두 발을 딛고 삶을 꾸릴 수 있는 공간을 얻기 위해서. 물론 운이 좋으면 틈이 아닌 번듯한 집에서 살 수 있다. 정부에서 정해준 ‘행복’의 기준에 들어맞는다면 말이다.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6 | 추천: 0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1997년의 겨울이었다. 매일 아침 일을 나가 저녁에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회사를 하루걸러 하루 나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집에서 쉬는 날이 잦아졌다. 유명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은 실직자들이 쏟아져 나오던 당시, 아직 알파벳도 몰랐을 시절의 나는 ‘IMF 사태’를 이렇게 기억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실직의 위기를 겨우 피하는 대신 몇 가지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우선 정규직 명함을 반납했다. 아버지의 책상은 원래 다니던 회사의 ‘하청업체’로 옮겨졌다. 그마저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비정규직으로, 아버지는 또 다른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IMF 사태 이후 약 20년 만에, 당시의 칼바람이 다시 불어오고 있다. 이른바 ‘5대 구조조정’(조선·해운·건설·철강·석유화학)이라고 불리는 부실기업 중 가장 먼저 칼을 빼든 건 조선업계다. 현대중공업은 전체 직원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인력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약 3000명 안팎이지만, 사내하청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8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감축이다. 언제 내 목이 잘릴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칼 날 앞에, 임시로 고용된 하청업체·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대량 해고의 직격탄을 맞는다.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는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구호 아래 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며 지나치게 친기업 정책으로 짜여졌다. 구조조정의 경우에도, 노동자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경영진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오로지 ‘경제적 효율성’만을 앞세우는 한국의 구조조정은 지난 IMF 사태처럼 노동자에게 구조조정의 피해를 떠안게 하고, 더 이상 돌아갈 곳도 없도록 사회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자본의 논리로 구성원을 가차 없이 잘라낸다는 점에서,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은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것과도 닮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대학생들에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단과대학이나 학과가 실종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대학 구조조정’, 바로 학과통폐합 전쟁이다. 취업사관학교로 전락한 대학에서는 더 이상 순수학문과 인문학, 예술은 대학의 돈벌이(취업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학은 경영학이나 영어, 컴퓨터공학 등 취업에 유리한 학과들만 입맛대로 골라 ‘글로벌’, ‘융합’, ‘인재’ 같은 식의 그럴 듯한 말들로 꾸며 학과를 ‘기형적’으로 결합시켜버린다. (실제로 내가 다니는 대학에서는 법학과 경제학, 무역학, 행정학 등을 하나로 합쳐 ‘글로벌법정경대학’이라는 단과대학을 탄생시켰고, 그 때문에 사회과학대학에 있는 나머지 학과는 없어질 뻔하였다.) 사진 출처 - 뉴스1 기업과 대학의 구조조정이 ‘닮은 꼴’인 이유는 또 있다. 대학 구조조정도 기업의 구조조정과 마찬가지로 방식이 대체로 일방적이고 수직적으로 이루어진다. 학과 통폐합에 반대하는 대학생들과 대량해고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아무리 피켓 시위를 해도 결정권을 가진 윗사람이 의견을 수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는 이들에게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학과가 없어진 학생들은 한순간에 소속이 사라지고 전공과목의 수강권리도 박탈당하는 상태가 된다. 마찬가지로, 돌아갈 회사가 없어진 해고 노동자들은 턱없이 부족한 퇴직금으로 앞으로의 밥벌이를 걱정해야 한다. 회사는 뒷날의 책임을 오로지 노동자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의 구조조정 사태들이 보여주고 있는 민낯이다. 안전장치가 없는 채로 한국 사회는 구조조정을 외치고 있다. 대학 구조조정의 마수는 대학생뿐만이 아니라 예비 대학생들에게도 뻗칠 수 있다. 전국 21개 대학이 정부의 ‘프라임 사업’에 따라 이공계열 위주의 학과개편을 실시하면서 문과계열의 입학정원을 4000명 이상 감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문과계열의 청소년들에게는 사실상 벌써부터 구조조정이 시작된 셈이다. 조선·해운업의 구조조정도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할 일이 아니다. 구조조정이 없을 것 같은 안정적인 직장으로 꼽히는 공기업도 구조조정의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 한국석유공사 등 에너지공기업은 부실한 실적을 이유로 실제로 그 대상이 되었다. 또한 구조조정은 더 이상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쉬운 해고가 가능한 나라’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도 구조조정의 주인공이다. 더 이상 이 사회에서 ‘안전지대’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구조조정은 일부 기업과 대학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논의해야 할 논란거리다. 바야흐로 ‘구조조정’ 권하는 사회다. 선택받은 소수만 살아남고, 다수는 사회구조 하위층에 머무른다는 ‘20 대 80 사회’는 더욱 고착화될 뿐이다. 사회적 약자나 취약계층에게 최소한의 금전적 지원은 물론 재취업을 도울 수 있는 훈련 및 자활제도와 같은 ‘사회안전망’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IMF 때 아버지는 해고의 낭떠러지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썩은 동아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잘리면 발 디딜 곳도 없을 것 같은 공포, 새 삶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은 20년 전에도, 현재도 노동자들이 뚜렷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20년 전과 지금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기시감만은 아닐 것이다. 뚜렷한 대안 없이 경제적 효율성만을 외치며 약자를 마구 잘라내버리는 한국사회의 구조를 이제는 조정해야 하지 않을까. 선택받지 못한 자들도 살아갈 수 있는 ‘안전지대’가 있는 공동체를 위해, 한국 사회를 ‘구조조정’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5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