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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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현진, 박선영, 임영훈, 정석완, 조소연, 주만, 주윤아, 최우식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전세훈/ 청년 칼럼니스트 ① 39만 4천 원 ② 22만 8140원 ③ 38만 원. 앞의 금액들은 무엇일까. ①의 39만 4천 원은 대학생들의 월평균 생활비다. ②는 월평균 드는 대학생들의 취업 비용을 의미한다. ③의 38만 원은 아르바이트로 대학생들이 벌어들이는 월평균 수입이다. 39만 4천원이 생활비로 필요한데, 실제 버는 돈은 38만 원에 불과하다. 그러니 평균적으로 1만 4천 원이 마이너스가 되는 셈이다. 거기다 취업 비용까지 고려했을 때, 청년들 통장의 마이너스는 더 증가한다. 문제는 이 상황을 청년들 스스로가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고통은 청년들과 그 부모들이 지고 있다. 현재 서울시와 성남시에서는 청년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당에 대한 논의가 나왔지만, 반대가 극심한 상황이다. 서울시의 경우에는 흔히 니트족을 심사해서 최대 6개월까지 월 평균 50만 원씩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성남시는 성남시에서 3년 이상 거주한 청년에게 분기마다 25만 원씩, 연 100만 원을 수당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청년수당’이 비효율적인 예산 사용을 하는 정책이며, 청년실업의 근본적인 대책이 아닌 단기적 대책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일부 지자체장들의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라며 ‘악마’나 ‘바이러스’와 같은 원색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전체적인 경제 상황을 고려치 않는 ‘무작위 비판’에 불과하다. 그동안 청년들이 심한 취업난을 겪었던 국가들에서는 대부분 청년수당이 존재해 왔다. 프랑스에서는 청년들이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신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취지로 청년수당을 실시했다. 국민이 어려울 때 국가가 도와줄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18~26세 청년들에게 직업교육을 조건으로 월 57만 원의 현금수당을 제공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시장에서 청년이라는 주체를 보호하고, 생산력을 높이는 방식으로 취업 교육과 함께 수당을 제공한다. 경제문제를 전 국가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공공철학’이 기반이 된 정책이다. 이외에도 스웨덴, 호주 등에서 청년수당을 실시하고 있다. 청년수당을 실시했던 국가들은 우리나라의 ‘청년수당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재정난에 시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청년수당 실시 이후, 청년 실업률이 감소해 국가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청년수당이 ‘국고를 낭비한다’는 비판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동안 우리 정부가 실시한 청년취업지원사업은 모두 실패했다. 연간 2조 원의 예산을 쏟아 부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작년 7월 정부는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부처별 사업이 중복되어 비효율적인 정책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거기다 일자리의 ‘질’에 대한 고민이 없다보니 이직률이 높고, 구직 단념으로 이어졌다. 정부가 그나마 성공 사례로 꼽는 청년취업패키지 조차도 1년간 구직 유지율이 20%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기존 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없다. 이런 비효율적인 정책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야 말로 국고낭비다. 이에 비해 훨씬 더 적은 비용이 드는 청년수당을 국고낭비라며 실시를 반대하는 것은 진영논리에 따른 비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사진 출처 - 매일경제 경제체질 개선을 통해서 청년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장기적 정책으로써 경제체질의 개선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매월 높은 물가와 취업 비용을 감당하느라 하루하루가 고통인 청년들을 도와줄 단기적 대책 역시 필요하다. 경제학자 공병호는 『10년 후, 한국』에서 청년들의 사회진출 비용이 높고, 청년들이 그 비용을 계속해서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마련하고자 할 경우에는 전문성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고 지적한다. 즉, 청년들이 계속해서 높은 사회진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등에 매달릴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이 부족해진다. 때문에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라도 청년들이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단기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청년수당이다. 이제 청년도 복지의 대상이다. 지금의 청년수당 논쟁을 보다보면, 작년에 유행했던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라는 말이 떠오르고는 한다. 복지정책은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방법’이다. 일을 하지 않는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주는 혜택이 국고낭비이거나, 장애인이나 노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하지 못하기에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하는 이는 없다. 비록 근본적으로 불행함을 해결 못한다고 할지라도,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복지정책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매월 생활비와 취업 비용이 부족해 마음 졸이는 청년들이 많다. 취업 준비에 전념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청년들도 있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힘든 청년들에게 청년수당은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방법은 아닐까. 전세훈씨는 빈곤과 고용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5 | 추천: 0
오민석/ 청년 칼럼니스트 동일노동 동일임금. 일본의 아베 신조 수상이 시정연설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정규, 비정규로 나뉜 이중적인 임금체계가 일본 경제를 좀먹고 있다는 판단이다. 일본은 비정규고용이 약 40%를 넘는다. 아베 수상은 이와 함께 경제계에 임금인상도 요구했다. 평화헌법을 훼손하고 국가주의를 강화시키고 있는 아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박근혜 정부와는 엄청난 온도 차이가 있다. 물론 그저 발언일 뿐이고 실천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에서는 이런 ‘경제 개혁’을 보수의 우두머리가 주장할 바탕이 되어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더 심각하다.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50%다. 일본보다 10%가량 더 높다. 파견, 인턴, 하청 등의 복잡한 고용 구조를 통과하면서 임금격차는 훨씬 더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꼼수 착취’는 일본이 먼저 시작했다. 이제는 스승을 뛰어넘어선 착취국가가 되었다.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노동·고용 정책들은 하나같이 이 착취구조를 더 심화시키는 것들이다. 근로기준법에서 강력하게 규제하고 있는 ‘중간착취’(노동자 파견 등)의 길을 더 쉽게 열어주고, 비정규직 고용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린다고 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먼 나라 이야기다. 홍보용으로 만든 카카오톡 이모티콘 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비정규직일수록 임금이 높아야 한다.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형태이기 때문에 임금을 훨씬 더 받아야 한다. 그것이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자발적인 비정규직이다. 하지만 한국의 비정규직은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감내하면서도, 임금은 더 적다. 일본에서는 보수여당까지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주장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정말 당연한 구호다. 한국 정부와 여당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한국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곳이 또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2016년 2월 2일 오후 3시)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접전을 벌이고 있다. 버니 샌더스는 미국에서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다시 꺼낸 인물이다. 1년 전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사람이 이제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막강한 상대와 겨뤄서 박빙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자가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로 등장해서 부의 분배와 재분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아베 정부가 소극적이지만 노동조건 개선을 말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만이 이 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혼자서 가는 외롭고 쓸쓸한 길이다. 이 외로운 길의 끝에 과연 국민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민석씨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기는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 | 추천: 1
연혜원/ 청년 칼럼니스트 불황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자들부터 내치기 시작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마지막 주,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탄원서가 한 장 붙었다.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붙인 것이었다. “우리 아파트에서 근무 중인 경비원 32명 중 11명에 대하여 경비용역업체인 ‘○○㈜’에서 입주자대표회의나 관리사무소에 사전 협의도 없이 12월 31일부로 근로계약이 만료된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개별 통보를 하였습니다 … (중략) … 이를 반대하는 입주민들께서는 아래의 경비용역업체에 개별적으로 연락하여 의견(항의 등)을 직접 제기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기억의 저편에서 몇 년 전 친구의 대학교가 재정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교내 청소부 아주머니들부터 자르기 시작했다는 슬픈 얘기가 떠올랐다. 고용자들의 봉급은 늘 피고용자의 수십 배가 넘지만 조금이라도 이윤이 줄어들면 이상하게 가장 돈을 적게 받는 노동자부터 해고된다. 우리 아파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비용역업체는 재계약을 하면 늘어날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경비원들을 해고하는 간편한 결정을 내렸다. 11명의 경비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실직 위기에 놓였다. 탄원서에 적힌 대로 해당 경비용역업체에 전화를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따지고 싶었지만 업체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담당자가 부재중이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며, 본인은 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담당자는 언제 출근하냐”고 물었지만 “너무 일찍 출근해서 모르겠다”는 희한한 답변이 돌아왔다. 겨우 내 연락처와 이름을 남기는 것으로 전화 통화는 끝났다. 그 날 퇴근길에 경비실에 놓인 부당해고에 반대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했다. 저녁을 먹다가 우리 가족이 모두 그 성명서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굳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사진 출처 - 국제신문   새해가 됐다. 아파트 단지 내를 걷다 분리수거 함을 정리하고 계신 경비원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왠지 죄스러운 마음에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경비원 11분의 소식을 물었다. 놀랍게도 환한 미소가 돌아왔다. “11명 모두 재계약 하게 됐습니다. 내일 새로 교육 받습니다.” 바라던 일인데 믿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성명서도 그렇고 주민들 반발이 너무 심해 그쪽에서 재계약 하겠다고 굽혔습니다”. 동화책에서나 봤던 미담을 듣는 기분으로 나는 한참 동안 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내게 아저씨께서 인사하셨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희망을 잃고 살아왔던 것 같다. 연대에 거는 희망은 이윤추구를 우선시하는 사회 앞에서 순진한 환상으로 치부 당한지 오래다.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 여럿이 힘을 모으는 일은 오로지 경제적 이윤을 늘릴 때만 그 당위성을 인정받는다. 얼굴도 마주치기 힘든 아파트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경비원들의 실직을 막아낸 일은 내게 잊고 있었던 오랜 희망을 다시 꺼내 주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연대의 희망은 아직 잠들지 않았다. 일으켜 세워주는 이가 없을 뿐이다. 연혜원씨는 복지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철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 | 추천: 0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참 이상한 사과다. 미안하다는 너는 후련해 보인다. 내 입으로는 절대 사과하지 않겠다는 태도도 뻔뻔스럽지만, ‘잘했다’며 환영인사 받는 모습도 마뜩찮다. 더 이상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겠다며 윽박지르는 뻔뻔함마저 갖췄다. 이상하다 못해 참 나쁜 사과이면서, 또다시 상처를 안겨주는 사과다. 사과를 받은 쪽은 되레 변명하기 바쁘다. 제 몫이 아닌 사과를 받은 까닭이다. 정작 피해 당사자는 받을 수 없다는, 그 사과를 받아오기 위해 선물까지 얹어 줬다. 세밑 소식치고는 고약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해결방안 얘기다. 두 나라 각각 공통된 합의문을 발표하지 못하고, 외교적 해법이라는 이유로 애매한 단어 뒤에 숨어 버렸다. 말의 밑동을 잘라 서로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 비겁함이 엿보인다. 가령, ‘법적’ 책임이 아니라, ‘책임’이다. ‘일본 정부’의 계획적인 관여가 아닌 ‘군’의 관여다. 아베 정부가 최초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밝혔다며 의의를 찾아 나서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다. 이미 1995년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했고, 사죄와 반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잃은 것은 10억 엔뿐”이라는 아베의 말이 귓등을 때린다. 그의 말처럼 새로울 것은 전혀 없었다. 다만, 한국이 그 제안을 수용했다는 점 빼고는. 한국은 한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비겁한 외교적 거래를 했을 뿐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이 모든 이상함과 비겁함이 모여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니 기가 찰 수밖에 없다. 참다못해 대학생들은 위안부 피해자를 대신해 소녀상을 지키겠노라 거리로 나섰다. 기록적인 한파는 중요치 않았다. 침낭조차 허용 안됐던 거리 위에서 덮은 비닐 위의 살얼음, 그마저도 중요치 않았다.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은 단 한 가지도 고려되지 않았던 합의, 그리하여 피해자들도 국민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합의의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되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합의는 끝났다는데, 수요시위는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는 세계 최장 기간의 시위 기록을 매주 경신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매주 자신의 요구사항을 분명히 외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범죄 인정. 위안부 진상 규명. 일본 국회의 사죄. 법적 배상. 역사 교과서 기록. 위령탑 및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 ‘최종적, 불가역적(finally and irreversibly)’란 말은 두 정부의 그릇된 협상에 쓰여서는 안 될 말이다.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다. 협상으로 해결되어서는 안 될 일을 협상해버린, 무책임한 정부를 보고 있는 국민의 고통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다.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6 | 추천: 0
이보라/ 청년 칼럼니스트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 방식을 타인에게 무작정 강요하는 중장년층을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꼰대는 유행어일 뿐 아니라 사회 문제의 주요 원인이다. 꼰대식 교육은 아이들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파괴해버린다. 꼰대식 직장 문화는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경직된 조직 분위기를 만든다. 꼰대 같은 아버지는 자식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가정 내 소통을 마비시킨다. 이 같은 현상을 봤을 때 꼰대는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꼰대는 경멸의 대상이 됐다. 반공 독재 시절, “너 빨갱이지?” 라는 말이 널리 쓰였듯 오늘날엔 “너 꼰대지?”라는 말이 통한다. 2016년 ‘반꼰대 시대’에서는 “꼰대가 되지 말라”는 설교를 곧잘 들을 수 있다. 젊은이들도 자기들끼리 꼰대가 되지 말자고 주의하는 분위기다. “나이 따지지마, 꼰대 같아.”, “자기주장 좀 줄여, 그게 꼰대야”라는 말들을 주고 받는다. 꼰대 테스트, 꼰대 퇴치법 등도 인터넷 상에서 떠돌고 있다. 나도 최근 주변에서 ‘꼰대가 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나이가 어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반말을 했을 때, “왜 예의를 안 지키느냐”고 따졌더니 나이를 따지는 꼰대로 몰렸다. “기자는 영향력을 많이 끼치기 때문에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직업윤리를 강요하는 꼰대라 한다. “사람이 태어났으면 남들을 위해서 나누면서 살아야지 왜 자기만 아냐”고 주장하면 ‘진보’ 꼰대 소리를 듣는다. 극단적인 사례일 수 있겠지만 단지 예의와 직업,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주관을 드러낸 것일 뿐이었는데 꼰대로 격하된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꼰대라는 말은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성을 거부하자는 데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꼰대가 되지 말라는 주장이 왜곡돼 사람들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기도 한다. 그동안 꼰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둔감해진 것은 아닐까. 꼰대를 비판하는 스스로가 또 다른 꼰대는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보라씨는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갖고 머니투데이에서 인턴기자로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7 | 추천: -1
전세훈/ 청년 칼럼니스트 “수업 시간에선 비판적 지성을 배우다가, 교양필수(취업관련) 과목에서는 기업에 대한 순종을 말해요.” 얼마 전 모교에 들렸을 때, 후배가 해준 말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진보성’을 내세워왔던 곳이다. 그런 학교도 정부의 구조개혁 평가를 거스르지 못했다. 대학 평가 이후, 학생들이 “잘못된 불의에 저항이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에 총장은 “수도권 변두리에 있는 학교가 교육부에 대항할 힘이 있겠냐”며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비판적 지성과 정의를 가르쳐 왔던 학교는 대학 평가 이후 순종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과 통폐합이 시작이 됐고, 학교가 가지고 있었던 특성은 사라졌다. 학교의 모습은 변했다. 가장 달라진 것은 배우는 내용이다. 철학, 문학 등의 과목들이 사라진 자리에 프레젠테이션 스킬, 엑셀 등의 과목이 자리를 매웠다. 현실적으로 대학 구조평가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볼 수는 있다. 학령인구가 급격하게 줄어 2018년이면 대입 정원이 고교 졸업자 수를 넘어선다. 8년 후인 2023년이면 고교 졸업생이 39만 명까지 줄어든다. 이 때문에 지금의 대학 정원을 56만 명을 조정해야 한다. 1980년대 교육조치, 19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 등의 정책으로 인해 별 다른 규제 없이 대학이 늘었다. 여러 해 동안 대학들의 자율 조정을 유도해왔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이제 객관적 조정자가 필요하게 된 상황이 됐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대학 구조개혁에 따른 대학 평가 방식은 실패작이다. 지금까지의 대학평가 방식은 정원감축에 대한 합리적인 방식이 아니었다. 졸속적으로 개발한 평가지표로 300개가 넘는 대학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현재 구조개혁 평가의 방향으로는 대학들이 쉽게 손댈 수 있는 학과 구조조정이나 학사 관리 항목에 중점을 뒀다. 평가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 대학들은 무리한 학과 통폐합 한 등 급조된 정책을 쏟아냈다. 단기 비정년 전임교원을 많이 채용하고 전임교원확보율을 높여 좋은 평가를 받은 대학들도 있었다. 대학이 기업화가 되어 가치창출 대신에 수익창출이 대학의 목적이 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는데, 현재의 대학 평가는 오히려 ‘대학의 기업화’ 현상을 부추기는 듯한 모습이다. 사진 출처 - 서울여대 학보 만평 또 다른 큰 문제는 서울 외 지역에 있는 대학들, 소위 ‘지방대학’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점이다. 이번 평가 만해도 하위 2개 등급에 속한 대학들이 대부분 지방대였다. <프레시안> 보도에 따르면 인구 1000여 명 정도의 소규모 대학이라고 할 지역에서 창출되는 경제적인 부는 수백억 원에 달한다고 할 정도지만 이러한 지방대학의 장점들을 현재 대학평가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재정자립도가 약한 지방대학들이 정원감축과 재정 지원 제한을 받게 되면 자연히 학교 운영이 어려워진다. 이렇게 되면 다음 평가에서도 좋은 결과를 받을 수가 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이다. 대학평가 이전에 대학이 어떤 교육을 맡을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라 대학을 줄인다는 단순한 논리로 대학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영국이나 미국은 ‘학문의 상아탑’ 역할을 강조하고, 그에 비해 북유럽 국가들은 산업과의 연계를 더 강조하는 실용적 경향이 있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대학이 맡을 교육에 대한 철학이 사회적 합의를 이뤘다면 그에 맞는 정책을 펼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학이 맡는 교육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정책을 바꾸고, 그때마다 졸속적으로 만든 대학평가로 학생 수 줄이기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대의 파우스트 총장은 “대학의 본질은 인생을 만들어가는 가르침, 오래된 유산을 전달하려는 가르침, 미래를 설계하는 가르침”에 있다고 했다. 대학은 인생을 만들어가고, 미래를 설계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이 맡을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세훈씨는 빈곤과 고용 문제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0 | 추천: 0
오민석/ 청년 칼럼니스트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시위에 참여했다. 집에 돌아오자 폭력시위, 폭동 이런 단어들이 뉴스에 난무했다. 의문이 들었다. 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왜 시위대의 것만 폭력이 되는 것일까? 폭력이라고 부르는 힘의 위치와 역학관계는 현장에서 늘 변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도 힘의 관계는 금방금방 변한다. 전세역전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한 건 누구의 힘이 정당한가이다. 이 정당성을 근거로 힘의 사용은 훨씬 확장되고 그 힘 자체도 강력해진다. 정당성의 프레임을 확보했는지에 따라서 역사의 판단도 송두리째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은 항상 이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11월 14일 힘의 사용(폭력)에 대해서 어떤 단어가 붙여졌는지 보자. 경찰의 물리력은 진압 혹은 과잉진압이라는 반면, 시위대의 물리력은 폭력, 불법폭력 혹은 폭동이라는 말까지 붙여지고 있다. 어감과 의미가 훨씬 거친 느낌을 준다. 어떤 프레임이 감지된다. 시위대의 폭력만 폭력이다. 폭력이 과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이 프레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장면을 제대로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사진 출처 - 머니투데이 폭력이 피해를 불러온다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사회구조가 훨씬 폭력적이다. 시위현장에 나온 사람들은 한국의 수많은 소수자들이었다. 알바, 농민, 학생, 성소수자, 빈민... 헬조선에서 끊임없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사회구조의 폭력에 견디지 못해 자기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 중 몇몇이 겨우 거리로 삐져나왔다. 그 절망적인 ‘삐져나옴’이 폭력이 되고 있다. 카메라가 주목하는 것은 온통 그것밖에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근대의 폭력은 국가로 수렴한다. 사회학자 기든스는 “근대란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으로는 감시, 밖으로는 군사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 국가가 등장함을 뜻한다”고 말했다. 제도적 폭력의 정점에 국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에 대한 경계의 방향은 시민이 아니라 국가 공권력이어야 한다. 공권력이 혹시 시민들에게 과도하게 사용되지는 않는지, 시민들의 안전과 생명보호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감시하고 경계해야 한다.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에서 공권력은 국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데 심각하게 무능했다. 다른 사회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계부채는 100조 원에 달하고 있고, 행정집행은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힘으로 찍어 누른다. 1차 민중총궐기에 가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민중총궐기 관련으로 경찰로부터 출석 요구를 받는 일도 있었다. 내 주위에도 몇 명 있었다. 해고당한 사람들에게 손배소가 걸렸고 강정과 밀양에서는 공동체가 깨졌다. 이런 공권력 사용은 스스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수를 두는 거다. 힘의 행사에 정당성을 확보할 자신이 없고 이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도 없으니 시위대의 요구에 대답하긴 커녕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려고 애쓰고 있다. ‘시위대의 폭력만 폭력으로’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비겁한 짓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시위를 지적했다. 노동이나 환경 같은 특정 이슈에 대해서 싸우는 것만큼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정당한 것인지 바라보는 프레임을 만드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정당하다고 한들 그 프레임을 확보하지 않으면 여론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우리에게 유리한 프레임, 정당성의 프레임을 먼저 확보하면 다른 이슈에서의 싸움도 한층 수월해진다. 국가 공권력은 여러 프레임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공권력이 정말 스스로 정당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을 정당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번에도 ‘폭력시위’라는 프레임을 가져가서 여론을 이끌었다. 의경보다 의경 뒤에서 폭력 딱지를 붙이는 공권력이 더 무섭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오민석씨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생기는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4 | 추천: 0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한 사내가 길 위에 서 있다. 무언가 담겨 있는 묵직한 비닐봉지 두 개를 양손에 쥔 채. 이 남자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탱크다. 한 대의 탱크가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라는 천안문 앞의 긴 길을 따라, 족히 열대가 넘는 ‘탱크 무리’를 마주하고 있다. 탱크는 금세라도 사내를 짓밟을 수 있다는 듯 조금씩 앞으로 나선다. 탱크가 나아가는 방향을 따라 그는 악착같이 포신 쪽으로 몸을 옮긴다. 그렇게 사내는 물러서지 않고, 탱크를 막아선다. 그 사내는 ‘Tank Man(탱크 사나이)’이다. 사내가 막고자 한 것은 시민을 짓밟으려 한 군홧발이었다. 중국의 시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중국의 민주화를 외쳤고, 무장한 군인과 탱크는 시민을 포위했다. 그렇게 광장은 피로 얼룩졌고, 여태껏 정확한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사망자만 천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괜한 억측이 아니다. 탱크를 막아선 사내의 행방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이른바 천안문 사태다. 이날 탱크맨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영국의 사진작가 스튜어트 프랭클린(Stuart Franklin, 1965-)은 이렇게 회상한다. “인민군 탱크가 인파를 향해 달려오자 한 청년이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탱크를 가로 막았다. 탱크가 청년을 피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청년도 오른쪽으로 틀고, 다시 탱크가 방향을 잡으면 청년도 용수철처럼 왼쪽으로 움직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주시했다. 탱크가 무자비하게 청년을 깔아뭉개고 통과하지는 않을지 불안했다.” 천안문 사태 당시 한 청년이 시민을                    민중총궐기 당시 백남기 농민이 포위하러 온 탱크를 막아서고 있다.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사진 출처 - 헤럴드경제                                      사진 출처 - 공무원신문 2015년 한국이다. 한 노인이 광화문 광장에 서 있다. 시민 각개의 외침이 광장에 모인 그날,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 경찰은 ‘폴리스 라인, 아름다운 질서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라는 문구의 띠를 두른 채 차벽을 쳤다. 게 중 몇몇은 광장에 모인 사람을 향해 직사로 물대포를 쏘아댔고, 노인은 자신을 정조준한 물대포를 맞다 쓰러졌다. 농민 백남기 씨다. 의식조차 없는 그에게 더 조준할 것들이 남았는지, 차가운 말들이 날아와 꽂힌다. 한 여당 의원은 “선진국에선 총을 쏴 시민들이 죽어도 정당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언론에서는 “폭력난동과 평화시위도 분간 못하냐”고 되뇌어 말한다. 이제 폭력시위(불법)냐, 평화시위(합법)냐의 논쟁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탱크맨과 농민 백남기 두 사내 모두 내 몫을 대신해 광장에 서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수많은 ‘나’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 주고, 수많은 ‘나’들의 자리를 채워 주었다. 조금이나마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내 몫을 대신 치러주는 이들의 희생 덕분이다. 대신 터져 나온 희생들이 모여 4.19를 만들고, 5.18을 만들었을 게다. 따져보면 나의 공포와 두려움은 이들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국가의 무자비함은 시공간을 가른 채 존재해왔다. 어쩌면 항시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마다 제2의 탱크맨, 제2의 백남기 역시 시공간을 가른 채 존재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탱크맨과 농민 백남기는 곧 우리들의 또 다른 이름이자, 비어 있으니 앞으로 채워가야 할 이름이다. 밖이 소란스럽다. 탱크도 몰려오고, 최루액 섞인 물대포도 쏟아진다. 우리는 기꺼이 탱크를 막아설 수 있을 것인가. 기꺼이 물대포를 맞을 수 있을 것인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남겨진 우리의 도리는 분노와 저항이다. 나부터 차벽을 막아서자. 나부터 차벽을 두고 욕이라도 내뱉자.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듯, 그렇게.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0 | 추천: 0
연혜원/ 청년 칼럼니스트 청년실업이 뉴스의 고정소재가 된 지 오래지만, 간간이 주변에서 취업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나도 그 운이 좋은 한 명이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취업이라는 티켓이 엄청 비싼 것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직장을 얻으면서 전부를 잃었으니 말이다. 회사는 당연한 듯이 너의 삶의 전부가 되겠노라 선언했고, 소심하게라도 반항하고자 조심스럽게 가족과 친구라는 이름에 팔짱을 끼면 불같이 화를 냈다. 한 번은 한 선배가 회식자리에서 집에 있는 아내로부터 온 전화를 받느라 장시간 밖에 있다 들어왔다. 부장님이 한 마디 했다. “너만 마누라 있냐!” 다른 선배는 이제 갓 돌 지난 아기가 화요일까지만 자기 얼굴을 기억한다고 했다. 일 때문에 주말에만 제대로 얼굴을 보니 수요일쯤 되면 아빠 얼굴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대학생 땐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고, 취업하면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다던 말은 소름 돋게 맞는 말이었다. 그나마 취업준비 할 땐 손가락 빨면서라도 이따금씩 보던 친구들이 취업을 하기 무섭게 뿔뿔이 흩어졌다. 가족만큼 자주 보던 친구를 이젠 계절에 한 번 보기도 어려워졌다. 같이 사는 가족도 아침 먹을 때 겨우 보니 할 말이 없다.   사진 출처 - TVN 드라마 <미생>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는 평일엔 밤 11시 전에 귀가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회사 방침은 정시 퇴근이지만 회사 방침을 지키는 상사는 없다고 한다. 그렇게 야근은 생활의 일부가 됐다. 공기업은 신의 직장이라 했던가. 그렇지도 않았다. 공기업에 근무하는 친구는 주말마다 회사 사람들과 등산을 가야 한다. 한 중견제과회사에 입사한 친구의 사태는 더 심각하다. 본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적어도 1년 이상은 주 6일 영업지부로 출근해야 한다고 했다. 연봉은 세 전 2천만 원을 간신히 넘지만 목표 영업매출을 채우지 못하면 그마저 자기가 부담해야 한다. 친구는 대부분의 신입사원들이 목표매출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첫 해 월급은 본사로 가기 위해 회사에 바치는 상납 정도로 봐야 한다고 했다. 꿈에도 그리던 취업을 했지만 누구도 행복해지지 못했다. 견디는 사람과 견디지 못하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래도 취업준비 할 때가 좋았지’라는 꼰대 같은 말도 하기 싫다. 지옥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된 데 감사하며 가족도 친구도 맘놓고 볼 수 없는 척박한 이 현실에 모두가 굽실거리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삶에 있어 직장과 월급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소중한 것인지 질문하고 싶다. 연혜원씨는 복지와 교육에 관심이 있는 철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9 | 추천: 0
이보라/ 청년 칼럼니스트 700개의 공들이 날아다닌다. 투명하고 거대한 유리통 안에서 사방으로 튀겨진다. 각기 다른 색과 숫자를 지닌 공들 중 일부만이 통의 배출구로 빠져나올 수 있다. 제일 강하고 권력이 있어 보이는 누군가가 버튼을 누른다. 비슷비슷한 공들 중 몇 개만이 선택돼 배출구로 나온다. 나온 공의 개수는 단 5개. 숫자는 ‘100234’, ‘100321’, ‘100099’, '100021', '100697'. 복권이 추첨되는 장면일까. 아니다. 우리 회사의 공개채용 전형 모습이다. 현재 우리 회사에서 필요한 인원은 단 5명이다. 올 초 미리 인원을 충원하기도 했고 많은 인원은 필요하지 않아서다. 최근 ‘0명’을 뽑는다는 공채 공지를 보고 700명이 모였다. 이들은 자기소개서에 회사가 원하는 인간이 바로 ‘나’라고 썼다. 곧 치러질 면접 자리에선 자신만의 소신, 신념 따위는 주머니에 넣어둘 것이다. 인상이 좋아보이도록 이를 활짝 내보일지도 모른다. 이후 회사에서 가장 힘이 센 누군가가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버튼을 누를 것이다. 합격자 5명을 제외한 695명은 사회인이 될 수 있는 배출구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복권에 당첨 되지 못한 얼굴을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flicker 난 당첨자였다. 몇 달 전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물론 6개월 간 희망고문이 있었다. “몇 명 전환시켜줄지 모른다”,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두루뭉술한 말만을 믿고 열심히 일했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발제 거리를 찾았으며, 취재를 위해 새벽 4시에 스쿠터에 올라 도로를 달린 적도 있다. 최종 면접에서 “인상이 어두워보인다”는 임원의 판단에 탈락할 뻔도 했지만 결국 나는 배출구행 공이 됐다. 하지만 배출구로 나오지 못한 인턴들도 있었다. 나와 거의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수준의 학교를 나와 비슷한 일을 하던 친구들이다. 이들은 정규직 전환 조건이 없는 전형으로 입사했다. 이 때문에 인턴으로 일하는 동시에 회사 공개채용 전형을 거쳐야 정규직이 된다. 700개의 공 중 5개가 돼야 한다. 그들은 나보다 더 오랫동안 유리통 안에 갇혀 숱한 부딪힘을 감내하고 있다. 한 인턴 친구가 회사 공채 면접을 앞둔 날, 이 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 이보라씨는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갖고 머니투데이에서 인턴기자로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