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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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시형, 박용석, 방효신, 서동기, 서진석, 정석완, 조동순, 조예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김정웅/ 청년 칼럼니스트 지하철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구도심을 관통하는 1호선이다. 가정용 스탠드부터 셀카봉, 어깨결림용 파스, 팔토시 같이 특별한 공통점도 없는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판매하는 이동상인이나, 척 봐도 불편해 보이는 몸을 이끌고 모 복지관의 비참한 상황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빼곡히 적은 메모를 돌리는 사람 등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다양한 군상들 중에는 한국에서 기독교에 대해 나쁜 인식을 갖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주 예수를 믿으라”를 끊임없이 외치는 그들. 말하자면 현대 한국에 나타난 ‘순교자’들이다. ‘순교자’의 유형은 다양하다.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목청 크게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 일갈하는 ‘마르틴 루터’형, 건강이 염려되는 외양을 가진 가녀린 노파가 한 사람씩 아이컨택을 시도하며 조곤조곤히 그리스도를 믿길 당부하는 ‘마더 테레사’형, 어떻게 저 많은 레파토리를 외웠는지 성경구절과 그 시사점을 쉬지 않고 쏟아내며 주위를 감탄하게 만드는 ‘수다맨’형 등……. 유형은 다르지만 이들 순교자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도 있다. 공격적 선교에 익숙지 않은 대다수의 비교인들에겐 거부감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들을 마주하면 보통은 시선을 피하거나, 심한 경우엔 혀를 차거나 면전에서 비난을 하기도 한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밤중에 높은 곳에 올라가면 수없이 많은 붉은 십자가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나라. 세계 순위권의 대형교회가 다수 모여 있다는 이 나라. 종교 중 기독교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 나라에, 이 열렬한 ‘순교자’들의 포교는 무엇을 이루기 위함인가? 도대체 누가 이들을 보냈단 말인가? 역시 이 나라에 그릇되게 정착한 일부 기독교회가 사회 각지로 조직적인 포교망을 갖추고 파견하는, 소위 ‘개독교’의 하수인들이었던 걸까? 뜻밖에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연히 만났던 어느 목회자는 ‘순교자’들이 한국 기독교회에도 부담이 되는 존재들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국 교회에서 그런 거부감 드는 포교방식으로 기독교의 교세가 확장된다고 판단했을 리가 없다. 그 목회자는 교회가 그들에게 일정 비용을 지불해가며 “여기여기 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6시간 하고 오세요.”라며 조직적인 파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의 순교 상당수는 자발적인 행위라는 얘기였다. 조직적인 파견체계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순교자’들의 신비. 그럼 이들은 왜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그런 수고를 도맡아 한단 말인가? 그 실마리 중 하나는 이들이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마주한 ‘순교자’들은 대체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라거나 하는 식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이가 많았다. 원만한 경제활동이 어렵고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버린 사람들을 받아주는 우리 사회 몇 군데 안 되는 곳 중 하나가 교회다.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 교회는 오는 사람을 마다하는 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겁고 짐진 자들이 교회에 보금자리를 트는 일이라면 더더욱. 로마 시대에 박해받던 이들을 구성원으로 받아준 초대 교회의 정신에 감화된 이들이 순교에 앞장섰던 역사처럼, 현대 한국의 ‘순교자’들은 그렇게 하나 둘씩 시키는 사람 없이도 자발적으로 지하철에, 거리에 나타나 복음을 전파하는데 한 몸 바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사실 소외받는 이들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해 왔다. 시대에 따라 힘든 이들을 품는 주체는 달라져왔고 그 역할을 교회가 맡는 게 꼭 나쁘다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개념이 정착된 오늘날 그들을 보듬어야할 1차적인 책임은 국가에게 있다. 국가가 소외 계층을 다시 원만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게 해주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그 역할의 일부분을 교회가 떠안아 버린 것이다. 이에 감화된 이들 일부가 거리로 지하철로 나서며 국가도, 교회도, 시민들도 원하지 않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목청 높이는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말하는 ‘지옥’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 아니라 이 사회의 빛이 닿지 않아 소외된 곳들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김정웅씨는 사회와 정치의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5 | 추천: 0
강은진/ 청년 칼럼니스트 1년간 다녔던 회사를 퇴사했다. 과도한 업무와 근무시간, 그에 반해 적은 월급이 대외적 이유였지만, 날 괴롭힌 가장 큰 이유는 ‘배워온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것이었다. 남을 도와야 한다고 배웠기에 동료나 상사가 도움을 요청하면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미뤄진 그들의 일은 모두 내 일이 되어버려 떠안기가 부지기수였다. 퇴사자가 발생하면 그 1인분의 일도 나 또는 다른 누군가의 몫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업무는 늘었다. 나도 좀 편해지고 싶었기에 어느새 그들처럼 뺀질거리며 업무를 피할 줄 아는 능숙한 사회인이 되어갔지만 그는 내가 아니었다. 그런 태도는 내가 배워온 윤리가 아니었다. 지난 9월 방영했던 TV 다큐멘터리 <SBS 스페셜- 은밀하게 과감하게 요즘 젊은것들의 사표>가 한창 젊은이들 사이에 화제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입사를 위해 학벌과 스펙을 갖춰 결실을 맺었지만 1~3년 차, 심하게는 1년도 못 채우고 끈기 없게 그만둬 버린 청년들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그들은 이른바 ‘똥군기’, 도가 지나친 회식 문화, 폭언과 폭력, 성차별 등 개인의 인권이 짓밟히는 근무환경에 회의감을 느껴 회사를 박차고 나간다. 어디 대기업뿐일까. 나 뿐 아니라 내 주변 친구들도 대중소기업이나, 학교, 공기관, 매장 영업직 등 다양한 곳에 종사하고 있지만 직장생활에 대해 들어보면 다 똑같다. 내가 이러려고 부모님 고생시키며 몇 년간 공부하며 이 자리에 왔나 싶은 한탄들 천지다. 다큐 속 기업의 인사담당자나 상사들은 “요즘 애들~” 운운하며(신입면접자들이 엄연히 20대 후반 이상의 성인임에도 방송에서 이런 호칭을 쓰는 것도 거슬리지만...) “기본도 모르는 개념 없는 신입들 때문에 업무효율이 떨어져 손해”라고 자기네 사정을 호소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 세대들이 자초한 것 아닌가? 어이없는 신입을 만든 것도 윗세대들의 교육과 사회이지 않은가? 어렸을 때부터 자유와 평등을 배우면서 자라온 우리 젊은 세대들은 어느 정도 머리가 익어가는 나이가 될 때 수능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시작해 경쟁 속으로 끌려간다. 나를 돌아보는 성찰? 인성교육?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는가. “좋은 대학 가야지”, “대기업 가야지”, “연봉이 이 정도 되는 곳은 가야지” 같은 강박에 시달리며 고생 끝에 입사하지만, 이제까지 쌓아온 가치관과 현실 간 괴리가 찾아온다. 한길만 보느라 경험 못한 성장통을 이십대 후반, 서른에 이르러 된통 치르는 것이 현재 서랍 속에 사표를 숨겨둔 젊은 일개미들의 현실이다. 사진 출처 - 양경수 일러스트 <그림왕 양치기 약치기> ‘평생직장’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다 참고 지내야 해, 지나가는 거야, 다 그런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견뎌온 기성세대는 끈기 없는 젊은것들이 심히 못마땅할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났던 그들에게는 한 곳만 파면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었겠지만, 요즘은 금수저, 흙수저 얘기가 괜히 나오겠나. 우린 그런 거 없다. 윗세대들이 열심히 우물을 파던 삽 대신 우린 다양한 길로 연결되는 그물, 네트워크를 가졌다. 사표 쓴 젊은이들은 당당하게 꿈을 찾아, 곧게 뻗은 좋은 길 차 버리고 험한 여정에 나선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해외로 나가거나 알바, 프리랜서로 관계망을 형성해 사업을 벌이려는 사람도 있다. 다큐에는 그런 자식들을 걱정하고, 보기엔 좋은 직장을 때려치운 것을 원망하는 부모들도 나오지만, 씁쓸함을 뒤로 하고 결국 “스스로 선택한 길 후회 없이 살라.”는 응원을 사랑하는 자식에게 보낸다. 나도 퇴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처음엔 앞날이 막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을 저지르고 나서는 두 달 동안 여유 있게 지친 심신을 달랜 후 더 조건이 좋고 궁합이 맞는 곳으로 이직에 성공했다. 어차피 어딜 가나 똑같이 고생하는 회사를 각자 사정대로 그만두고 나오는 청년들을 철없다 손가락질하는 윗세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하라면 하라는 대로 말 잘 듣는 당신들의 ‘애들’이 아니다. 퇴사 이유가 아주 하찮게 느껴지더라도 그 개인에게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절실한 이유이다. 부당하고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은 어딜 가나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곳을 향해 찾아갈 줄 아는 우리는 어른이다. 앞날이 위험하고 잘 보이지 않더라도, 도전할 줄 아는 우리는 청춘이다. 쯧쯧, 혀를 차기보다 응원해달라. ‘젊은 것’(따옴표)들의 퇴사는 끈기 없음의 결과가 아니라 더 낫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한 시작이다. 강은진씨는 책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국문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8 | 추천: 1
박꽃/ 청년 칼럼니스트 잠이 오지 않는 새벽, 옆집 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다. 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보통 여자의 괴성이나 통곡소리가 들린다.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할 때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지금 112에 신고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평소에 지나다니며 마주친 그 집 부부의 모습과 새벽에 들려오는 괴성의 추이를 듣고 있으면 한쪽이 얻어맞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것이 요즘에는 약간 타협적으로 변했다. ‘내가 지금 112에 신고하면 오지랖이겠지.’하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언젠가 금태섭 변호사가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본 후로 그렇다.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를 주변 이웃이 신고하고, 법이 엄벌하면 정의를 실현하는 것 같아도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두 부부가 완전히 헤어지지 않는 이상 남편을 수세에 모는 상황은 아내폭력을 더욱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고뇌가 묻어있었다. 매년 몇 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하고 살해당할까? 여성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는 매년 ‘분노의 게이지’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다. 지난 3월 발표된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91명이다. 이 정보의 토대는 ‘언론에 보도된’ 기사다. 보도되지 않는 사건은 훨씬 많을 테니 사실상 최소한의 통계인 셈이다. 내 경우에는 옆집 부부싸움을 신고할까 말까로 새벽마다 스스로와의 투쟁을 하느니, 여성폭력을 없애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라도 하는 것이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겠다고 판단한 탓에 올해 초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에 조사된 통계를 발표하는 관례상 당시 2015년 한 해 통계치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 작성되고 있는 단계였고, 나는 2015년 1월에서 3월까지의 분량을 맡았다. 그때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 선생님 중 한 분은 걱정의 언사를 보냈다. “이런 자료 자꾸 보다보면 정신건강에 안 좋아요. 그러니 쉬엄쉬엄 하세요.” 웃으며 그러겠노라고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게 사실이다. 워낙 관심과 문제의식을 많이 갖고 있던 분야라 새삼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건 큰 자만이었다.   사진 출처 - 알렉산드로 팔롬보, #StopViolenceAgainstWomen 캠페인   여성폭력은 기본적으로 힘 센 놈이 약한 놈을 괴롭히는 구도라는 점에서 모두 악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정에서 남편에 의해 일어나는 아내폭력이 가장 비인간적이다. 그 가정에 자녀가 있을 때 그렇다. 아내에게 갖은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녀에게 직간접적인 학대가 가해지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사례 중에는 이런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가 14살 아들에게 어머니를 모욕하도록 강요했다. 물그릇에 물을 떠와 5차례 어머니 머리에 붓게 하고, 허리띠로 어머니를 세게 30대를 때리라고 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인 내가 너를 더 세게 300대를 때릴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이건 광주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결국 남편은 아내 폭행뿐만 아니라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도 기소됐다. 많은 경우 여성폭력은 아동학대까지 동반한다. 그런데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든 건, 아내가 그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아마 남편과 헤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내는 생존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남편은 아동복지법 위반만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사진 출처 - 알렉산드로 팔롬보, #StopViolenceAgainstWomen 캠페인 옆집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다소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기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아주 가까운 공간에서 누군가가 꽤 심각해 보이는 폭행에 노출된다고 추정되는데, 덩달아 학대당하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아야 할 때 인간으로서 어떤 비참함을 느낀다. 이 비참함이 근본적으로 해소되려면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많은 여성단체들이 여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교육프로그램에 사활을 거는 것 같다. 가해자가 쉽게 양성되지 못하는 사회적 토양을 조성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교육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서, 당장 현실을 바꾸기는 힘들다. 내 옆집에,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인다. 설령 외부에 그 폭력을 알려지게 만들어서 단기적으로 가해자가 처벌받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종래에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감당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란해진다. 이건 실천할 수 없는 정의다. 가정이라는 영역은 너무 사적인데, 결국 그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처벌은 공적인 영역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간극을 피해자의 고통 없이 메꿀 수 있을까? 박꽃씨는 현재 무비스트 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5 | 추천: 0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올해 초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의 핵심주제는 ‘4차 산업혁명’이었다.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우리는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기술 혁명의 직전에 와 있다.”라고 말했다. 산업 혁명, 기술 혁신이라는 단어는 언뜻 장밋빛으로 비칠 수 있지만, 그 과정에는 많은 고통이 따른다. 신산업의 성장은 기존 산업의 퇴보를 의미하며, 새로운 기술 변화에 발맞추어 제조업이 개편된다면 전반적인 산업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 요란한 산업 구조조정의 예로 현재 진행 중인 조선업 대란이 있다. 세계 경기 침체와 경쟁 심화로 조선업의 부가가치가 점차 감소하여, 수익성이 낮은 국내 기업들이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이런 상황에서 항상 강조되는 입장은 경영부진의 원인이 현대사회에 역행하는 경직된 노동구조, 즉 노조와 정규직 과보호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경영계는 이를 근거로 비정규직 보호법 완화 및 파견근로 확대를 요구한다. 그러나 기술 변화의 위험성과 경기 변동성은 기업의 일만이 아니다. 노동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노동시장 선진화 방안이라며 제시되는 대책들은 늘 노동 수요의 유연화, 즉 쉬운 해고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경직적 노동구조가 원인이라면 노동 공급의 유연화, 즉 고용보험과 교육지원 또한 해결책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경남신문 이번 조선업 대란의 여파로 전문가들은 협력업체 포함 2만 명에 가까운 조선 인력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스스로 실업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다. 울산광역시 설문조사 결과 조선 사업 구조조정으로 인한 실직 예정자의 88%는 재취업을 원하며, 그중 61%는 희망업종으로 여전히 조선업을 꼽았다. 조선업 전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을 실직자들 스스로 가장 잘 알지만서도 그들에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이 국가가 전문적인 직업능력개발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하는 지점이다. 직업훈련 프로그램은 여러 정책적 기능을 갖는데, 먼저 노동자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안전망 기능을 한다. 노동자는 종사하던 업종이 사회 변화에 의해 후퇴할 때,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훈련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여 유망 업종으로 이직함으로써 안정적인 생계유지가 가능하다. 이러한 개개인의 선택이 모인 사회적 차원에서는 업종 간 인력 수급 불균형을 빠르게 해소하고, 유망 신산업의 발전을 가속하는 기능을 한다. 장기적으로는 시장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수준 높은 인적자원을 축적하여 신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 동일한 노동유연화 정책이지만, 비정규직 확대와는 전혀 다른 정책 기능을 갖는 셈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의 구조조정 개념은 새로운 유망 산업으로의 (인적)자원 이동이라는 개념보다는 사업을 축소하고 인력을 감축하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결과 인력개발 프로그램 역시 장기 교육 및 교육기간 중 생활비 보조가 아닌, 1년 이하의 단기 기술 교육, 취업정보 제공 프로그램이 주를 차지한다. 전폭적인 교육 지원 정책으로 손꼽히는 국가는 독일이다. 독일은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하며, 자녀가 25세가 될 때까지 수당을 지급한다. 대학생 무이자 대출 제도 등도 갖추고 있다. 현재 독일이 우수한 인재와 높은 제조 기술력을 보유하고, Industry 4.0 전략을 앞세워 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상황은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요약하면 대기업 구조조정 때마다 기업 도산을 막기 위해 비정규직을 확대하자는 논의는 결과 중심적인 접근방식이다. 이는 단순히 사회변동의 리스크를 기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전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변동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부문 간 이동을 활발히 할 수 있도록 교육지원을 확대하는 것이 본질적인 접근이며, 사회변동에 대한 국가 전체의 리스크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다.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7 | 추천: 0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간만에 동향 친구 A를 만났다. 고등학교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 몇 안 되는 귀한 친구다. 이공계 학과를 나온 A도 요즘 취직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신촌에서 만난 A는 나처럼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었다. 가방 속엔 둘 다 노트북이 들어있다. 하반기 공채가 시작된 탓이다. ‘오랜만에 수다 떨자’던 만남의 목적은 어느새 ‘자소서(자기소개서) 돌려보기’로 바뀌었다. 카페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요즘엔 공대도 취직이 쉽지 않다더니, A도 ‘자소서 쓰기-자소서 쓰기-필기시험-자소서 쓰기-면접’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 친구는 ‘문과보다 이과가 취업하기 좋지 않냐’는 말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문과 나온 친구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일지 몰라도 대기업이나 공기업이 아니면 이거밖에 못 했냐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과 쪽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는 것은 똑같은 데 남들이 알아주는 곳에 가야한다는 압박이 크단다. 그러다보니 정작 어떤 직무를 하고 싶은 지는 뒷전이 된다고 한탄했다. 스스로를 잘 팔리는 상품인 것처럼, 어디에나 맞출 수 있는 만능 제품인 것처럼 고군분투해야하는 건 문과나 이과나 매한가지다. 우리는 한참 자판을 두드리다가 헤어졌다. 격려 인사도 잊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해! 시험 잘 보자!” ‘오늘 아침: 바나나랑 요거트’ ‘오오.. 잘 지켰네! 나는 삼김(삼각김밥)이랑 하루견과 ㅠ 망함’ 대학친구 셋이 모인 단체 카톡방이다. 우리는 365일 다이어트 중이다. 취직시험 공부를 하다 보니 살이 쪘다. 아침‧점심은 편의점 음식이나 빵으로 때우기 일쑤고, 저녁에는 야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면접에 가면 외모가 중요하단다. 아니, 실상은 같은 값이 아니라도 다홍치마다. 면접관들의 기준을 알 수가 없으니 외모 지상주의라고 욕하기도 뭐하지만, 합격자들을 보면 죄다 예쁘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했던 친구 B는 3년 만에 꿈을 접었다. B가 발표를 하면 넓은 강의실 끝에 앉아 있어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전달력 있는 목소리가 B의 무기였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필수 코스라는 아카데미에서는 친구에게 더 마른 몸과 더 예쁜 얼굴을 요구했다. 다이어트와 성형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의실에 친구의 전신사진을 띄워놓고 외모지적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B는 충분히 예뻤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비교와 반복되는 탈락이 B를 작아지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며 아나운서를 포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외모 지상주의’를 탓하며 분노한다. 아나운서처럼 얼굴이 알려지는 직업이 아니고도 외모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일화는 차고 넘친다. 이건 어딘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며, 공부하는 것도 힘든데 먹는 것까지 줄여야 하냐며 욕하다가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다짐 한다. ‘나 살찜 ㅠㅠㅜㅜㅜㅜ 우리 운동 열심히 하자!’ 고등학교에 입학한 17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늘 ‘열심히 하자!’를 입에 달고 있다. 대학가는 데 목숨을 걸었던 그 때도, 취업에 허덕이는 지금도. 공부도 과제도 운동도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열심히 해야 할 판이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칠판에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라고 써 붙여진 교실에서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공부했다. 집중력이 흐려지거나 놀고 있는 나를 볼 때면 ‘왜 더 열심히 하지 못 하지’라며 자책했다. 사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공부하라는 명제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도, 하면 된다식 논리는 나를 옭아맸다. 취업 기숙학원이 인기라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재수생 기숙학원의 취업판이다. 숙식과 수업만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과를 엄격히 관리해주는 곳이다. 어떤 학원은 원생끼리 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번호로 부른단다. 교도소가 따로 없다. 나는 고등학교 3년을 내내 기숙사에서 지냈다. 기숙사와 기숙학원은 전혀 다르지만, 처음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가 생각났다. 잠을 자는 방 말고 공부하는 면학실이 따로 있었다. 오후 10시,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11시부터 12시까지 의무로 공부를 해야 했다. 이후에는 선택적으로 공부를 하거나 방에 올라가 쉴 수 있다. 기숙사 입소 첫날, 공부 깨나 한다는 애들이 모여 있다 보니 서로 눈치싸움을 하느라 자정이 지나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2시가 넘어서야 빈자리가 생겼다. 일주일쯤 지나자 각자의 페이스로 돌아가긴 했지만, 졸린 눈꺼풀을 비비며 버티던 그날 밤은 내 고등학교 생활의 축소판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까워진 친구들과 동고동락하며 3년을 버텼다. 대입보다 막막한 취업 앞에 서로 격려해 줄 친구 하나도 없이 지낸다니.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다. 사진 출처 - pixabay 생존을 위해 열심히 달리기만 해야 하는 우리는 언제쯤 열심히 ‘안’해도 괜찮아질까. 좋은 대학 명패를 위해서 20살 이후로 모든 행복을 미뤘더니, 이제 사회의 구석이라도 차지해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자유와 행복은 모두 나중 일이다. 우리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유예한다. 대체 열심히 안 해도 괜찮은 때가 오긴 오는 걸까. 늘 행복을 미루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이런 고민도 사치다. 질문은 ‘열심히’의 반대말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어 이 전선에서 자진퇴각을 할 수도 없다. 그래도 하고 싶은 직업이라도 명확한 나는 괜찮은 편이라 자위하면서, 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원하던 일이니 보람찰 것이라 기대하면서, 씁쓸함을 목 뒤로 밀어 삼키며 신문을 넘겼다. 다음 장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반퇴시대, 인생 후반 설계하자 인생 이모작 시대다. 퇴직 후에도 생계를 위해 구직시장을 떠날 수 없다…’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8 | 추천: 0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얼마 전 미국의 영화배우 클로이 모레츠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여성 대통령으로!’라며 지지 발언을 하는 것을 보았다. 당당히 소신을 밝히는 그녀의 모습이 멋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러웠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린 여자 연예인이 ‘저는 소신 있는 000정당의 000를 지지합니다.’라고 하면 당장에 삼촌들의 우상에서 끌려 내려와서 눈물의 석고대죄를 할 판국이 아닌가. 굳이 가정을 하지 않아도 정치적 소신발언으로 유명한 방송인 김제동에게는 늘 퇴출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공공연히 정치적인 행위, 발언을 하고 다니는 것 에 대한 단죄다. 우리 사회에서는 공인이 정치적인 소신을 밝히면, 그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의 여부보다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문제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이 껄끄러운, 개인이 공공연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특정의 것’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다. 토론장이나 선거철, 정치인 같은 특정 장소나 특정 시기, 특정 행위자를 벗어나면 ‘정치적’인 것은 단죄의 대상이 된다. 정치적인 문제를 일상적으로 이야기 하거나, 정치적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이지 않은, 유난스러운 것으로 보는 시선이 늘었다. 정치적인 것을 특정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우리나라 정치권력의 그릇된 행보와, 그에 대해 쌓인 불신이 한몫을 한다. 한국 정치권력의 부패를 목격하는 경험, 정치권에서 일방적으로 소통을 거절당하는 경험이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시민 모두의 권리가 아닌, 특정이 소유하는 것으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우리는 정치적이라는 것에 대해, 정치라는 것에 대해 너무나 그릇되고 억압적인 잣대를 키워나가고 있다. 정치가, 정치적인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질'을 가지고 잘못된 억압을 만드는 것이, 만드는 사람이 문제일 뿐이다. 오랜 세월 그릇된 방향으로 뿌리박힌 정치적 억압이, 관행이 문제인 것인데 그 억압이나 그릇된 관행을 탓하는 것을 넘어 ‘정치적인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인식은 문제가 많다. 정치가 낳은 그릇된 결과를 개선하는 것도 외면이 아닌,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정치의 기본적 특성은 이해관계를 둘러싼 배분, 의사조정 과정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회체계는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 민주 사회를 살아가는 주권자라면 당연히 정치적이며, 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적이 되는 것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개인에게 ‘정치적’이라는 프레임이 공공연히 씌워지는 순간 그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순수하게 호소하는 시위조차도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이미지와 엮이면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으로 배치되는 입장의 구도를, 선악의 구도로 치환하는 양상이 보인다. 그렇기에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단체나 개인을 매장시키는 것이 손쉬운 사회가 되었다. 그런데 결국 정치적이라는 비판에 내재하는 본질은, 나와 다른 정치적 입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름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으나 배척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 사회는 그 무엇보다도 정치적 관용이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하나의 정치적 입장을 ‘다른 것’으로 규정하고, 다른 것이면 악으로 몰아간다. 소위 고도로 과장된 종북 몰이가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잔인하게 효과적일 수 있는 배경에도 정치적 다름에 선악의 구도를 씌워 ‘단죄’의 대상으로 보는 논리가 기능하고 있다. 빈번하게 ‘정치적 단죄’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정치는 더 먼 것, 관심을 가지면 피곤해지는 것, 특정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는 이와 같은 분위기의, 의식의 개선이 시급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정치적 관용과, 정치에 대한 거리감의 회복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다름을 단죄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지하고, 비난이 아니라 소통을 위해 입을 열어야 한다. 보다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정치는 모두의 것, 모두가 말하는 것, 모두가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를 외면하거나, 멀리 있는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정치가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유리되어 특정의 것이 되지 않도록, 정치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과 내가 정치적임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정치적이어야 함을. 이곳은 민주시민의 사회이지, 특정인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3 | 추천: 0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저에게 산다는 건, 버티는 거예요” 청년들의 현실 고민과 갈등을 솔직담백하게 그려내 많은 20대들의 공감을 사며 최근 종영한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윤진명이라는 인물은 ‘산다는 것’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그녀는 식물인간 동생, 동생을 간병하는 어머니 대신 가장 노릇을 하며 낮에는 대학 수업, 저녁에는 레스토랑 홀서빙 알바, 새벽에는 편의점 알바를 하며 취준생의 최전선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하루 버티기에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대기업 공채 면접 기회라는 희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최종 면접의 결과는 낙방이었다. 불합격의 이유는 알고 보니 ‘복장 불량’. 구두를 살 돈이 없어 레스토랑 알바에서 신던 낡은 구두를 면접장에 신고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수년간 계속한 알바로 앞코가 다 까져버린 검정 구두, 상처투성이였던 그녀의 발에 기업은 ‘불량’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나 또한 (극중 윤진명처럼 투잡을 뛰지는 않았지만) 학기 중에 알바를 병행했던 적이 있다. ‘간단한 구직비용’, 즉 매달 토익응시료나 자격증 준비 비용정도는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내고 싶어서였다. 나와 같은 이유로 알바를 했던 취준생 친구들도 이 ‘간단한 구직비용’ 때문에 용돈을 벌면서도 허리띠를 졸라매야했다. 마치 CMS자동이체처럼, 각종 공인영어시험과 자격증 준비비용은 그나마도 몇 푼 안 되는 알바비에서 매 달 썰물같이 빠져나갔다. 그만둘 수도 없는 알바 때문에 취업공부를 할 시간도 없다는 하소연은 우리들 대화의 일상 주제였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취준생들은 ‘어디 하늘에서 돈이 뚝! 하고 떨어지면 어떨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곤 한다. 맘 편하게 취준만 걱정하고 살기에는, 기본적인 구직비용을 짊어지는 것조차도 버거운 청춘들이었던 것이다. 드라마 <청춘시대>에서 극 중 윤진명(한예리)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고 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진하는 ‘생계형’ 취준생의 단상을 그려내며 이 시대 청춘의 삶을 현실적으로 대변했다. 사진 출처 - JTBC   서울시의 청년수당은 이런 청춘들에게 마른하늘에 단비 같은 정책이다. 만 19세에서 29세까지, 저소득층이며 주당 근로시간이 30시간 미만인 청년들에게 한 달에 50만 원씩 6개월간 지급하는 청년수당은 청년들의 텅 빈 주머니를 채워주며 구직활동을 지원하는 복지정책이다. 현재 서울시가 추진하는 청년수당은 그야말로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청년수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돈 50만 원을 그냥 쥐어주는 꼴’, ‘복지 포퓰리즘과 복지병이 우려되는 정책’이라며 비판한다. 청년수당에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말하는 “고작 50만원이 취업에 도움이 되겠어?”라는 문법의 기저에는 사실 청년들의 속사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의 시선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청년들의 구직비용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은 아직 빈곤하기만 하다. 청년수당을 단순 ‘공돈을 쥐어주는 정책’, ‘포퓰리즘 정책’으로만 보기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청년수당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유니온, 민달팽이 등 여러 청년단체가 직접 논의하고 기획하여 무려 2년간의 치열한 토의를 거쳐서 나온 ‘청년메이드’ 정책이다. 사실 청년이 처한 현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은 당사자, 바로 청년들이다. 청년수당은 단순히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급조된 정책이 아니라, 정책의 주인공인 청년들의 제안을 아래로부터 수렴해온 결과물이다. 서울시는 다년간 정책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청년맞춤형 정책을 민주적으로 이끌어냈다. 청년수당을 단지 표나 인기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청년수당의 본질은 ‘공돈만 쥐어주는 정책’이 아닌, 청년 스스로 구직관련 활동을 찾아나서며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OECD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고학력 니트(NEET)족은 4명 중 1명이라고 한다. 게다가 국내 니트족의 38.7%가 ‘원하는 일자리가 없어’ 비구직 상태라는 것이 드러났다. 매해 최고치를 기록하는 청년실업률, 높은 취업 장벽과 구직난도 심각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길을 잃어버린 청년들이 거리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청년수당은 틀에 짜인 직업 고용 훈련과 취업연계제도에 적응하기 힘든 ‘사회 밖’ 청년도 포용할 수 있는 복지정책이다. 서울시는 연계사업으로 마음이 맞는 청년들이 모여 스스로 진로모색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도록 하는 커뮤니티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청년들은 ‘공돈’ 50만 원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고, 구직활동을 능동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 단, 청년수당 대상자의 취업활동 진행상황에 대한 평가는 월별 보고서의 공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청년수당의 출발점이 ‘청년메이드’였듯이, 정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도 청년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청년수당은 청년정책이 계속해서 실패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청년정책의 활로를 찾는 기대효과를 노릴 수 있다. 그동안 박근혜 정부의 청년정책을 되돌아보면, 임금피크제 도입·공공기관 청년의무고용할당제 등 청년취업정책을 주로 대기업과 공공기관에만 집중하여 청년들이 처한 실제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청년들의 취업알선을 도와주는 ‘취업성공패키지(이하 취성패)’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취성패’를 통한 고용유지율이 45%에 못 미치는가 하면 제한된 훈련과정, 직무와 관련 없는 질 낮은 일자리 연계 등으로 취업자의 절반이 퇴사하는 등 허점이 여럿 존재한다. 청년수당은 청년들의 피부에 와 닿는 금전적 지원을 함으로써 소외된 청년의 사회참여율을 높이는 정책이다. 현재 정부가 ‘적극적인 일자리정책을 실천하지 않고 돈만 쥐어준다’며 청년수당을 힐난하는 것은 청년수당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고 맹비난을 하는 것과 같다. 청년수당은 오히려 정부의 청년일자리 정책이 연달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년에게 새로운 구직 사다리를 만들어줄 정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청년수당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이 필요하다. 청년수당 지급대상자가 되면 비싼 방 임대료를 낼 때 쓰겠다는 청년부터 학원비와 인터넷강의료에 사용하며 알바 할 시간을 벌겠다는 청년들까지, 각자의 사연만큼 청년수당의 사용처도 다양하다. 여유가 필요한 청년들에게 한 달 50만 원이라는 돈은 단순한 공돈 그 이상이다. ‘사는 것은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며 하루하루 사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취업준비생들, ‘간단한 구직비용’이라도 벌기 위해 각종 알바를 전전하는 청년들, 미래도 진로도 잃어버린 사회 밖 청년들을 위해 청년수당은 절실하다. 각박한 취업시장 속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청년들이, 우리 사회 속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입장료인 셈이다. 청년들이 이 ‘공돈’을 통해 얻게 될 것은 돈과 시간, 그뿐만 아니라 정서적 여유와 넉넉한 마음일 것이다. 청년수당의 진짜 목적은 아마도 ‘공(空)돈’이 단지 ‘빈 돈’이 되지 않도록 청춘들을 위로하려는 것이 아닐까.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6 | 추천: 0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민중은 개·돼지다.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 한 고위급 공무원이 부적절한 발언으로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다. 아마 그는 억울할 것이다. 이미 자신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회에 만연한 현실을 말했는데 얼마나 억울할까. 그는 자신의 발언이 왜 부적절한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소위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단이 민중을 개돼지 취급한 것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인가. 그의 말은 인권이 배제된 자본주의 사회가 감추고 있던 속살을 제대로 보여줬다. ‘인간’을 위해서는 턱없이 형식적인 제도의 인권과 정치인의 혀끝에만 존재하는 평등한 사회. 국민을 위한 제도가 비인간적이며, 국민의 계층이 나뉘고 공고화되고 있음은 우리나라의 노동자가 처한 현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 청년이 홀로 안전문을 수리하던 중 지하철에 치여 온몸이 바스러졌고, 곧이어 숨을 거두었다.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 일했지만, 정작 위험의 순간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숨을 거둔 그의 나이는 고작 열아홉이었다. 이 어린 청년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한 명이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매일을 에어컨 실외기 수리를 위해 낡은 건물의 난간들을 옮겨 다녔다. 낡은 선반은 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고, 안전장비 하나 걸치지 못한 그는 맨몸으로 낡은 선반과 함께 추락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하청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죽음 앞에, 이들의 ‘고용주’가 내세운 말 역시 한결같았다. 바로 ‘안전규칙 미준수’였다. 그들은 이 말 한마디로 죽음의 원인과 책임을 모두 고인에게 전가해버렸다. 하청 노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과 시스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안전 수칙을 지킬 수 없는 업무 강도, 그럼에도 열악한 임금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만드는 책임 전가식 하청 계약 등은 그들의 입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다. 하청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낮은 임금과 더 열악한 환경에 놓인다. 그러나 이들에게 일자리와 임금은 생계, 그 자체이며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에 물러설 수가 없다. 늘어나는 하청 노동 속에서 ‘인간안보’에 적색 신호가 켜진 지 오래지만, 국가도, 기업도,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하청노동자 비율은 2012년 37.7%에서 2013년 38.4%, 2014년 38.6%, 2015년 상반기 40.2%로 늘고 있다. 산재 발생 비율은 하청 노동에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 하청 노동자들은 점점 하나의 ‘계급’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청 노동자라는 계급이 가지는 특성은 안전 보장의 가장 밑바닥, 인권의 존재 의미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정한 존재들이 아닌, 우리 국민의 대다수다. 이런 사태가 계속해서 방치된다면, 생존의 기본 권리조차 주장하기 어려운 최악의 노동 환경은, 하청 노동만의 문제는 아니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자본이 노동자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렇듯 비인간적이다. 국가와 사회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는 대다수의 하청 노동자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정부는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정부가 매번 외치는 노동 처우 개선과 발전을 믿고 기다려서는 발전이 없다는 것이 국민을 개·돼지로 본다는 공무원의 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국민이 아니라 개와 돼지를 관리하는 관리자에게, ‘인권’을 보장하라는 말이 통할 리가 있겠는가. 제도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형식적인 노동자 보호법을 개선하고 실제 노동자의 현실 개선에 직결될 수 있도록 정부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 하청의 불가피함을 해결할 수 없다면, 최소한 기업과 하청 노동자 사이에 깨트릴 수 없는 국가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 자본과 기업이 몇 푼의 돈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켰다면, 그들 자체에게도 사회에서 존립이 불가능할 정도의 규제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 노동문제의 해결은 국민의 삶의 질,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는 ‘인간안보’ 문제의 해결이다. 오늘 국민의 ‘인간안보’가 보장받지 못하는데, 내일을 위한 ‘국가의 안보’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노동자가 힘겹게 올라서야 했던 낡고 위태로운 발판은 그 개인의 앞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안전의 사각지대라는 것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미 사회 전체가 불안전지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인간 안보가 지켜지는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문제를 직시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죽음 앞에서 잠시 울컥하는 마음으로 잠시 혀끝에, 눈가에 반짝 스치는 탄식과 애도는 공염불이다. 정당한 약속과 진실한 이행이 없는 권력과 기업을 향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고용과 노동 사이에 연결된 하청의 고리를 끊어낼, 비수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민은 국가가 키우는 개도, 돼지도 아니며 결코 하청되어선 안 될 인권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5 | 추천: 0
최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이름이 뭐예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용된 질문 중 하나다. 그만큼 인간에게 ‘이름’이라는 두 글자는 친숙하고 친근하다. 인간은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가장 먼저 ‘이름’을 지으려 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현상이든 ‘이름’이 지어져야 인간사회에서 받아들인다. 인간은 작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명할 때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하게 된다. 생김새, 성격에서부터 특징과 기능까지 다양하게 말이다. 사회에 가장 알맞을 듯한 ‘이름’을 뽑아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일단 이름이 지어지면 사회는 이름에 담긴 뜻을 재조정한다. 이름은 사회의 제도와 세월과 인간의 욕망과 끊임없이 뒤섞인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미가 생성되고 사라지고 고착된다. 이를 통해 ‘이름의 사회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사회화를 거친 이름은 애초 인간이 지었던 ‘이름’ 본연의 의미와는 전연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런 이름은 본뜻보다 강력하고 편향적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적 영역을 지배하기 쉽다. 인간은 그 이름에 담긴 사회적 감성과 시선에 종속된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인간의 머릿속에 본뜻보다 강력한 사회적 의미가 발동된다. 니거(nigger)라는 단어가 있다. 어원은 라틴어 niger(니게르)다. ‘검다’는 뜻이다. ‘니거’도 ‘검다’는 뜻이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흑인 노예를 ‘니거’라 칭했다. 흑인 노예들이 검었기 때문이었다. ‘니거’라는 단어는 노예제도와 200년이 넘는 세월과 인간의 사악함으로 사회화를 거쳤다. 자연스레 ‘니거’는 ‘흑인에 대한 경멸적 호칭’이라는 강력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됐다. 흑인들은 사회화를 거친 ‘니거’라는 단어에 편견과 차별의 시선, 폭력적 감성을 느낀다. 본래의 뜻인 ‘검다’는 사라졌다. ‘니거’와 같이 사회화를 거치면서 부정적 어감을 가지게 된 이름은 많다.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gay’와 ‘faggot’,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lesbian’, 그리고 조센징 등 모두 본뜻과 사회적 뜻이 다른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은 공통적으로 사회적 소수자 혹은 약자를 지칭한다. 강자와 다수를 지칭하는 이름은 사회화를 거치더라도 부정적 어감을 가지는 경우가 매우 적다. 사진 출처 - pixabay.com 왜 그럴까? 무의식적으로 강자와 다수에게 편입되려는 인간의 본능과 관련 있다. 경쟁과 생존에 익숙해진 인류에게 강자와 다수에 편입되어야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논리는 지배적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구별이 아닌 등급과 수준으로 차이를 구별하는 차별이 인간의 본능과 잘 맞아떨어진다. 인간이 지은 이름이 이런 논리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통용되다보니 자연스레 소수자를 대변하는 이름 역시 부정적 어감을 가지게 된다. 올해 미국에서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사건이 많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연설에서 니거(nigger)라는 금기어를 이례적으로 사용했다. “흑인을 니거(nigger, 검둥이)라 부르지 않는다 해서 인종차별이 종식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름이 사라지더라도 그에 담겼던 시선과 감성은 지속된다는 뜻이다. 작명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능에 대한 반성이다. 최지영씨는 국정화 교과서와 위안부 문제 등의 역사 문제에 관심이 있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17 | 추천: 0
강은진/ 청년 칼럼니스트 “사랑이 밥 먹여 주냐? 연봉도 적다며.” “얘, 너희만 좋자고 하니? 체면이 있지.” “자네 번듯한 집도 없이 지금 결혼하겠다는 건가?” 최근 방송하고 있는 공익광고 <새로운 결혼문화>에 나오는 말들이다. 광고에서 보이듯 한창 사랑의 보금자리를 만들어갈 예비부부들이 가족과 친구들의 참견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달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30대 미혼남녀 839명을 대상으로 결혼 안 하는 이유를 조사한 결과 49.7%가 ‘기대치에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라 했고, 가장 필요한 결혼 정책에 대해서는 61.2%가 ‘청년고용의 안정화’를 꼽았다. 체면과 번듯함이 중요한 결혼을 만족시키기 위해, 경제적 안정이 뒤따르지만 그렇지 못해 포기하고 안 하는 것이 지금 현실이다. 이런 체면과 경제적 불안정 때문에 청년들의 연애와 사랑의 의미들 또한 변질되어 혼란스럽다. 그들 연애의 대부분은 소셜미디어로 중계된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는 타인에 대한 깊이 있는 공감보다는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과의 진실한 관계보다 어느 맛집을 가서 얼마짜리를 먹었는지,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어디를 가서 얼마나 특별한 경험을 했는지를 과시한다. 심지어 자신이나 상대방의 외모도 견적 받는다. 대화 내용도 그대로 노출되는데, “내가 이만큼 하는데, 넌 왜 그만큼 못해주냐.”는 식의 다툼이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손익으로 계산되고 값이 맞으면 거래한다. 능력이 없으면 이 거래에 끼지도 못하고 낙오된다. 사진 출처 -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영국의 사회연구가 캐서린 하킴은 그의 저서 <매력 자본>에서 결혼은 이미 시장화됐을뿐더러, 연애 또한 돈이 없으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자본화 때문에 우리가 ‘보이는 것’에 현혹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하킴은 시대에 맞춰 그런 보이는 매력을 다양하게 개발해 갖추고 적재적소에 써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하지만, 내가 봤을 땐 그런 노력도 상품을 팔기 위한 광고나 전략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 경쟁으로 얻어지는 애정이 과연 만족감을 줄까? 오히려 번듯함을 향한 허영과 타인에 대한 무례한 간섭을 부추기는 꼴이 아닐까? 끝이 없을 것이다. 앞서 미혼남녀들이 말하듯 청년들의 사랑을 위해 고용이 안정됐으면 하는 바람도 크지만, 이 또한 여기서 그칠 일이 아니다. 경제적 결핍과 불안정함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불안 때문에 보이는 면에 현혹돼, 타인을 비난하거나 침해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이미 물질들로 바뀌어 표현되어 왔다. 관계나 애정은 항상 심오한 것이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상품처럼 쌈박하게 굴러갈 수 없다. 항상 모가 나있고 잘못돼서 망가지기도 하지만 이런 불량품들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 아닌가. 이 당연한 사실을 간과하고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완벽하고 보기 좋은 것만 너무 강요하지는 않는지. 안온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하는 진실된 배려부터 시작해봄을 권한다. 강은진씨는 책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국문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