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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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저출산 상황이 지속되자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에 골몰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저출산종합대책’을 내놓고, 국회에서도 여당 중심의 ‘저출산대책위원회’가 발족되어 가동 중이며, 저출산 관련 사회적 논의가 봇물을 이룬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보니, 저출산 관련 리포트가 1401건, 논문이 260건, 전문자료 25건이 올라와있다. 이들은 대체로 저출산이 지속되면 고령화 사회가 급격히 진행되고, 생산 가담 인구, 즉 노동력이 줄어들면서 점점 더 노인 인구 부양 부담이 가중될 뿐더러, 결국 경제 구조가 악화되어 삶이 피폐해질 것이라는 논지를 편다. 그래서 육아에 대한 개개인의 경제적 구조적 부담도 줄일 수 있도록 보육시설도 확충하고 교육체계도 바꾸어야 한다며 여러 정책들을 내어놓는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프랑스, 미국 등도 같은 고민을 했다 하고 그 결과 출산율이 다소 높아졌다고도 한다.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도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출산장려책을 펼치는 중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유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제법 효과도 거둔다고 한다. 출산율이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고 있다니 말이다. 물론 이런 정책 자체는 얼마든지 긍정적일 수 있다. 좀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일단 좋은 일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이고 근본적으로 사태를 단순화시켜보면 누구든지 느낄 수 있는 일이겠으나, 출산을 장려하는 목적에 담긴 ‘비인간적’ 발상은 우려스럽다. 출산에 담긴 인간학적, 철학적 의미는 잘 묻지 않거나, 묻더라도 관료적 정책 중심의 사회에서는 곧 묻혀버리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출산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사건이다. 그 자체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 인간학적 의미를 놓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인간적 길로 들어서게 될 가능성이 크다. 생명이란 무엇인지,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 ‘성스러운’ 가치를 끝없이 물어야 한다. 생명 현상을 다른 숨겨진 의도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이 곧 파국의 길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생명을 생명의 원리에 맞게 키워가는 일은 그 생명을 낳은 이들, 그리고 그와 관계된 모든 이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생명의 원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자세가 ‘종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육아를 공동으로 한다는 사회적 책임감도 확산되어야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도록 제도적 뒷받침도 확대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 생명 출산의 주체인 여성주의적 시각이 충분히 반영되어야 하되, 생명의 탄생을 기업 논리나 경제 논리로 몰고 가서는 절대로 곤란하다. 그리고 ‘정치적’ 의도가 담긴 관료주의적 시각도 늘 경계해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에 의해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사는 일만큼 인간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인간이 비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 자명한 일도 또 없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병원 신생아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우리 사회에 비인간적인 일은 다반사로 벌어진다. 그런 일이 많을뿐더러, 구조 자체가 비인간적이다. 인간 세상이 왜 비인간적 구조 속에 놓이게 되었는가? 더 말할 나위 없이 인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지구는 인간으로 넘쳐나고 있다.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 각종 갈등과 전쟁, 생존 경쟁에 내몰리면서 발생하는 인간 소외 등 각종 문제들은 사안별로 거론하기 불가능한 지경이다. 지구라는 큰 생명을 기준으로 보면 인간은 지구라는 몸에 생겨난 ‘암세포’에 비유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아이를 많이 낳으라니.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닌데도 아이를 많이 낳으라니. 물론 출산 장려가 생명에 대한 존중감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그와 반대로 생명 문제마저 경제적 척도로 평가되고 장려하는 모양새라 심히 걱정스러운 것이다. 비인간적 현상의 원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너무 많은 데서 온다. 모두 지구상에 인구가 줄어야 해결될 문제들이다. 그것은 그저 ‘기술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유엔’ 등과 같은 기관을 중심으로 인구 줄이기 운동을 펼치자 제안할 필요마저 있다. 인구가 적어서 걱정인 나라가 있다면 인구가 많아서 걱정인 나라의 걱정도 덜 겸, 제대로 된 다문화사회도 이룰 겸, 그들 나라로부터 사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게 지구상에도 지역 간에도 평등의 문화를 가능한대로 진작시켜아가야 한다. 인구가 줄어들고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 괜한 오해에서 오는 갈등과 분쟁도 줄어들 것이고, 인간 평등, 지역 평등에도 기여할 것이다. 자민족 중심주의가 기초에 놓인 민족이나 지역 간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적극적인 다문화 정책을 펼치면 된다. 그렇게 해서 지구가 가난해진다면 그것은 도리어 인간화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추구해야 할 일이자 자세이기도 하다. 다 같이 좀 못살 필요가 있다. 물론 혼자만 못 살도록 방관해서는 안 되지만... 그런 식으로 자본이나 시장만능주의에 인간을 내몰고, 자본을 더 생산하는 인간만을 인간 대접 해주는 분위기는 좀 없애자. 너무 ‘나이브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다함께 좀 더 가난해졌으면 좋겠다. 다함께 가난해지면서도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많다. 그만큼 인간다운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12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해 오는 결혼이민자들이 매년 증가하여 2009년에는 167,090명의 결혼이민자가 국내에 체류하게 되었다. 이들이 이룬 다문화가족의 자녀의 수도 가파르게 늘고 있는데 행정안정부의 2008년과 2009년도의 자료를 보면 1년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취학 연령에 속한 다문화가족의 자녀는 교육과학기술부가 개별학교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보면 결혼이민자 자녀의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는 것과 또한 중·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있는 자녀들의 숫자가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문화가족 자녀의 연령별 현황 (’08. 5, 행안부) 구분 계 만6세미만 만7세 ~ 12세 만13 ~ 15세 만16 ~ 18세 학생수 58,007명 33,140명 18,691명 3,672명 2,504명 비율 100% 51.7% 32.2% 6.3% 4.3% (’09. 5, 행안부) 구분 계 만6세미만 만7세 ~ 12세 만13 ~ 15세 만16 ~ 18세 학생수 103,484명 61,700명 27,586명 7,785명 6,431명 비율 100% 59.6% 26.7% 7.5% 6.2%   다문화가족 자녀 학교 급별 현황 : 18,778명 (’07년 대비 39.6% 증가) 구분 초 중 고 계 인원 증감(%) 인원 증감(%) 인원 증감(%) 인원 증감(%) 2005년 5,332 583 206 6,121 2006년 6,795 27.4 924 58.5 279 35.4 7,998 30.6 2007년 11,444 68.4 1,588 71.9 413 48.0 13,445 68.1 2008년 15,805 38.1 2,213 38.9 760 84.0 18,778 39.6   그런데, 보건복지가족부가 2008년에 다문화가정 아동의 발달 상태를 측정한 연구를 보면 다문화가족 아동들이 동작지능은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학생들과 별 차이가 없으나 언어지능은 현저히 낮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전체 다문화가족 자녀들이 ‘학습지체’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식으로 오도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다문화가족 자녀가 한국어 능력발달에 어려움을 겪는 요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아동 양육의 주된 담당자인 결혼이민자여성이 제한된 모국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주로 어눌한 한국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사교육이나 부모의 학습지도처럼 다문화적 상황과는 관련 없는 곳에 그 장애의 요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문화가족의 자녀들의 학업성취도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조사와 대책을 마련할 필요는 있다. 다문화가족 자녀의 한국어 능력발달 장애를 방치할 경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따돌림을 당하거나 차별 혹은 놀림을 받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회의 새로운 소외계층을 낳는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는 다문화가족 부모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려는 일부 학교에서 실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도 되고 있다. 그러면 다문화가족 자녀들의 한국어 능력을 향상시키고 학교 사회 적응력을 기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보건복지가족부는 다문화가족 자녀의 언어발달과 학업능력 향상을 위해 먼저 영유아 언어발달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참으로 올바른 정책이라 생각된다. 특히 방문교육사업인 아동양육지원서비스는 부모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결혼이민자여성의 자녀양육에 긍정적인 지지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혼이민자의 모국어를 통한 적극적 언어자극을 권장하는 것이 자녀의 언어발달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성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2009년 한 해 동안 95가정에 아동양육 방문교육을 실시하여 결혼이민여성과 그 자녀의 언어사용 형태를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결과를 보면, 일반가정 자녀와 다문화가족 자녀의 신체적인 성장발달은 같으나 언어발달에 있어서는 70%이상의 다문화가정 자녀가 일반가정 자녀에 비해 언어발달이 많이 늦었다. 일반가정 자녀의 경우 엄마가 들려주는 말을 통해 언어발달을 하는 반면 결혼이민여성은 한국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단지 몇 마디 단어로 자녀와 관계를 갖게 되어 자녀가 습득하는 언어가 언어로 인식되지 못하고, TV나 비디오에서 나오는 말도 자녀의 언어발달에 영향을 주지 않아 언어발달이 현저히 떨어졌다. 또한 엄마가 모국어로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데 시부모나 남편이 한국말로 자녀를 양육하도록 강요하고, 엄마의 자존감이 낮아 모국어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부끄럽거나 창피하게 생각하고 한국어로도 모국어로도 자녀와 소통하지 않고 눈짓이나 행동으로 자녀와 관계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학력이 높은 결혼이민여성의 자녀의 경우 출생하면서 엄마나라 말로 양육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엄마나라 말로 된 동화책을 구입해서 자녀가 엄마나라 말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아빠도 아빠나라 말로 자녀와 소통하면서 자녀가 이중 언어를 가정 안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이중 언어 발달을 도움으로써 자녀의 학습능력도 일반가정 아이보다 더 높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다문화가족 자녀의 경우 일반적으로 모든 다문화가족 자녀가 언어발달이 늦는다고 단정 짓는 것 보다는 부모의 학력이나 사회적 위치, 경제적 수준, 자아존중감의 정도에 따라서 언어발달이나 학습능력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성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2009년 7월부터 12월까지 52명의 다문화가족 자녀의 언어발달을 진단을 진단하여 그 중 30명의 자녀에게 어휘 구문발달 촉진, 대화·의사소통 및 사회성 증진과 부모상담, 부모-자녀관계 향상 프로그램을 언어발달 지도사를 통해서 실시하였다. 유아기는 언어와 사회성 발달의 결정적 시기이고, 다문화가족 자녀의 경우 일반가정에 비해 언어발달이 늦어 학습부진의 문제로 이어가는 경우가 많아 일상생활에서 다문화가족 자녀의 언어발달을 촉진하고 학습 및 사회생활 적응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취학 전 아동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다. 그 중 3~4명은 언어가 월등하게 향상되었고 20명은 서서히 발달하고 있고 나머지 5~6명 정도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더 주목할 만 한 점은 다문화가족 여성인 엄마가 사회생활을 하거나 자아 존중감이 높을 경우 자녀의 언어발달도 좋았고 집중력도 높은 반면, 엄마가 위축되어 있거나 소극적인 자녀는 산만하고 금방 싫증을 내어 학업성취도가 낮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환경 중에 부모의 자존감이 아이들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88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터넷에 ‘알몸 졸업식 뒤풀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올라오면서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지난 11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중학교 졸업식이 끝난 뒤 선배인 고교생 20명이 남녀 졸업생 15명을 알몸으로 만들고 이들을 촬영한 것이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속에는 남녀 중학생들이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쓴 채 알몸으로 인간 피라미드를 쌓는 장면, 속옷을 벗는 장면 등 수치스러운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결국 졸업식 알몸 뒤풀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가해학생 전원을 기소하기로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이들이 어린 중학생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무서운 중딩’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매우 평범하 편이다. 우리가 살아왔던 모습의 학생들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떻게 말를 걸어야 할지, 대화를 풀어나가야 할지 도무지 막막한 아이들도 있고 교사들에게 대거리를 하거나 욕설을 퍼붓고, 아주 가끔 폭력을 쓰는 아이들도 있고, 수업이 안 돼서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교사들도 있다. 경기도 고양지역의 한 중학교 졸업식에서 남.녀 학생들이 전라의 모습으로 뒤풀이를 하는 사진 10여장이 13일 인터넷 사이트에 유포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사진은 인터넷에 유포된 일부 사진.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오늘날 우리 아이들의 가정 모습을 살펴보면, 부모들 대부분 맞벌이를 하고 있거나 부모들의 이혼과 별거로 인해 홀로 아이를 키우거나, 조부모님 댁에 맡겨서 키워지곤 한다. 그런 아이들은 유소년기의 대부분을 학원과 인터넷, 게임, 텔레비전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속에서 경쟁과 파괴의 경험을 가지게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 우리는 진심으로 이들을 바라보았는지.... 우리의 학교모습 역시 고백하건데 졸업식날 졸업반 담임을 제외하고 참석을 가급적 피하고, 교실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실출입을 못하게 했다. 지난해 가을 인터넷에 떠돌던 학교폭력의 변종인 ‘빵셔틀’이 문제가 됐을 때도 이 언어조차 생소해 학생들에게 물어보던 중 내가 평소에 지켜보던 학생임을 알고서 괴로워했다. 결국 대통령의 관심으로 인해 가해학생을 형사처벌하는 사회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해주었을까? 미성숙한 학생시절의 잘못을 사회적 주홍글씨로 완성하는 것보다는 이들에게 가정, 학교, 사회가 공동책임을 지고 이들의 인성을 더욱 돌볼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해서 이들의 변화를 지켜보았으면 한다. 교사부터 학생들에게 경쟁을 중시하고 가슴으로 사는 아름다운 마음 교육에는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야 한다. 아이들의 소리에 더더욱 귀 귀울이며 그들의 문제에 가슴깊이 같이 고민할 수 있는 통로들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를 보내기보다는 흠을 잡고 몰아붙이는 무서운 세상 속에 이 아이들이 살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서로를 배려하며 친구끼리 서로 아끼는 것부터 예쁘게 사는 모습이라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22 | 추천: 0
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굴곡 많은 우리 역사는 법관에게 힘겨운 과제를 부여해 왔다. 위헌적인 실정법은 법관에게 합헌적인 판결이 성립할 수 있는 재량의 여지를 박탈했다. 1950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 중에 우리 헌법상 최초의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를 발한다.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이 그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도의 비상사태(“비상사태라함은 단기4283년6월25일 배한괴뢰집단의 침구에 인하여 발생한 사태를 칭한다. 특별조치령 제2조)를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중형(重刑)이 규정되어 있다. 절도나 손괴(損壞) 행위만 저질러도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며, “정보제공, 안내, 기타의 방법”으로 위와 같은 행위를 도우면 마찬가지로 처벌된다. 더욱이 재판은 한 번으로 종결되며(單審制), 판결을 하면서 증거설명을 생략할 수 있다. 위헌적인 법령이었다. 더 큰 문제는 위 긴급명령이 자의적으로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을 격파하고 있다는 대통령 담화를 신뢰한 채 피난 시기를 놓친 국민들을 ‘부역행위자’로 매도하며 특별조치령에 따라 처단하였다. 그러나 모든 법관이 실정법에 따라 재판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판사였던 유병진은 여러 가지 구실을 달아 무죄를 선고한다. “부역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부역을 할 환경을 만들어주지 말라. 일단 후퇴할 때라도 국민을 속이지 말고 피난할 여유를 주라” 유병진 판사가 그의 저서 ‘재판관의 고민’에서 밝힌 생각이다. 위헌적인 실정법을 적용해야 하는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신시대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 위헌 조치를 쏟아냈고 다수의 법관은 실정법에 따라 재판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사실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악법도 법이다”를 권위주의 정부가 ‘도덕’과 ‘윤리’시간에 지속적으로 교육해 온 배경이 여기에 있다. 최근 법원은 일련의 사건들에서 실정법을 준수한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도 검찰(‘일부 검찰’이겠지만 검사동일체 원칙상 ‘검찰’이라고만 한다)과 일부 세력은 색깔론을 제기하며 법원의 좌경화를 성토하고 있다. 그러나 미네르바 사건, KBS 정연주 사장 사건, PD수첩 사건들에 관한 법원의 판단은 지극히 정상적일 뿐 반대진영이 주장하는 좌경이나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롤모델(role model)로 삼는 ‘선진국’ 법원은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 확실하다(다만 선진국 판사들은 우리 같이 대단한 검찰 동료가 없기에 이런 사건들을 해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에 관하여 우리사회가 1987년 이후 20년 이상 묵묵히 이룩한 성과이다. 법원 모습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하지만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강기갑 의원에 대한 공무집행방해 사건의 판결이다. 변호사 단체까지 나서 판결의 법리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은 과거 긴급조치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던 때의 사고방식에서 조금도 전진하고 있지 못하다. 담당판사가 어떠한 고민의 결과 무죄라는 결론에 이르렀는지에 대하여 제대로 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검찰이 법리를 무시한 엉터리 판결이라고 엄청난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 기소 자체의 정당성에 대하여는 추호의 의심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이 과연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기소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다수의 정상적인 국가들은 우리처럼 검찰에 무제한의 기소재량을 주지 않는다. 대배심(grand jury)과 같이 시민이 기소 여부를 판단하도록 보장하기도 하고, 사전에 판사의 예비심사를 거치도록 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도가 없는 우리의 경우 검찰은 기소 재량을 신중히 행사해야 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검찰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자신의 재량을 강자(强者)의 논리에 충실하게 행사했다. 권력자의 범죄에 대하여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며 칼을 거둔 것이 대표적이다. 강기갑 의원 사건의 경우 국회의 자율권을 고려해 가능한 공소권을 발동하지 않는 방향으로 검찰권을 행사할 재량이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검찰의 불기소가 국회의 문제는 국회의 자율로 해결하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공무집행방해’라는 지극히 협소한 측면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이르게 된 파행적인 국회 운영을 방지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우리 법원은 전통적인 기본권 분야에 있어서는 상당히 성숙한 판결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용산 사태에서 극명히 드러난 것처럼 생존권이라든지, 난민(難民) 지위 인정과 같은 사회적 기본권 분야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기본적인 실정법 차원의 고민에서 맴돌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대기업 총수 등 경제적 강자에 대한 관대한 판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최근 두드러지는 법원의 ‘부경화’(富傾化)’ 현상이다. 2010년 법관이 고민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71 | 추천: 0
홍승권/ 인권연대 운영위원 1년 가까이 장례도 치르지 못하던 억울한 원혼들의, 시커멓게 그을리고 뒤틀린 육신을 마침내 땅속에 안장시키는 장례가 지난 주말에 있었습니다. 이미 떠난 지 오랜 그 몸을 비로소 땅에 뉘었으니, 비록 뒤늦은 일이지만, 원혼들과 유족들을 위해서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장례식 날, 서울역에서부터 용산 남일당 앞까지 무장한 경찰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어 과연 이 장례가 소위 정부와의 합의 아래 치러지는 것인지 의문스러웠습니다. 저들이 이건희 단독 사면이나 세종시 원안 수정 강행 등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합의’니 ‘타결’ 뉴스로 여론을 어르려고 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돌아가신 분들이며 상주의 처지를 생각할 때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희 사면의 예에서 보듯이 가진 자들에게는 한없이 ‘프렌들리’한 이명박 정부는 정말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끝끝내 가혹하군요. 저들이 진정 국민을 섬기며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나선 무리인지, 또 다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찰의 진압 교본에도 없는 상식 이하의 ‘대국민 전투’로 국민을 살상하고서도 아직까지 경찰 간부 중에서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는 이가 없는 채로, 또 진상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피해자들인 철거민들이 거꾸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그리고 이런 식의 재개발로 이 같은 비극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게 제도를 보완하지 않는 한, 이번 장례로 용산참사(백기완 선생께서는 참사가 아니라 ‘학살’이라고 하셨지요!)가 일단락되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유족들은 오랜, 길에서의 생활을 접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집안 살림을 돌보아야 하겠지만, 우리에겐 원혼들의 피맺힌 바람을 기필코 이루어내야 할 책무가 새삼 지워진 셈입니다. 돌이켜보면, 남일당 그 자리에 나와 내 형제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억울한 상황과 죽음을 내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함께한 사람은 그야말로 소수였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천주교 사제들과 송경동 시인을 필두로 한 문화예술인들, 그리고 이름 없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 참사 355일 만에 열린 ‘용산참사 장례식’을 마친 유족과 시민 3000여명이 지난 1월 9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앞에서 노제를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내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다들 강도를 만난 이를 못 본 척 피해 가는데, 사회로부터 따돌림 당하던 한 사마리아 사람이 곤경에 처한 그 사람을 기꺼운 마음으로 돌보아 주었고 곧 이러한 사람이 이웃이라고 예수는 가르쳐 줍니다. 이웃 사랑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체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분명하게 성경에 나와 있건만, 한국 사회에서 이천만 명이나 된다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예수님 말씀을 어디에다 감춰놓고 교회를 다니는 걸까요? 하기사 그 예수님을 따른다는 교회에서도 웃어른인 장로라는 자가 전과 14범의 몸으로 파렴치한 거짓을 일삼으며 거뜬히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또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입으로는 법치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서민을 위한다고 강조하면서 하는 일마다 그와 정반대이니, 새삼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요즘 이 정권이 하는 짓을 보면,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 이처럼 우리 말과 글이 본디의 뜻과 완전히 다른 뜻으로 쓰인 예가 또 언제 있었을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용산참사의 원인을 되짚어보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국민들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에서부터, 왠만한 정치인이나 언론 할 것 없이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되뇌는 현실을 보면 우리 모두 경제발전과 돈 되는 것에 환장한 속물이고 그런 연유로 오늘날과 같은 비극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라도 돈이 주인행세 하는 지금의 세상 이치나 논리를 무시해 버리고 좀더 자유롭게 살 여지는 없는 걸까요? 2010년 올해는 지방선거와 교육감선거 등 굵직한 현안들이 있습니다. 그동안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가 될 이 소중한 선거를 통해, 국정 운영에 대해 개념도 없고 거짓말투성이에 몰상식한 저들에게서 권력을 되돌려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이 정권이 오로지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더는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사는 동네에선 5년 전부터 지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은평시민신문’이라는 인터넷판 지역신문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동안 이 신문을 통해 구청과 구의회가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형편없이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귀한 지역신문이 드디어 지난 연말부터 종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해, 앞으로는 더욱 많은 지역 구민들에게 구의 소식들을 좀더 상세히 잘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일들이 우리의 일상과 환경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얼마쯤 낙관하는 전망을 펴 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힘을 내 열심히 살아 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184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개인적으로 술을 푸는 날이 많았던 해다. 올 초 새해 계획부터가 영 글러먹었다. 올 한해만 마무리하면 10년 변호사 생활을 꽉 채웠기에 무작정 변호사 일을 쉬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런 구체적 대안도 없었다. 변화도 발전도 없는 사무실의 답보상태에 스스로 지쳐버렸다. 정체를 극복할 힘도, 자신감도 원천적으로 샘솟지 않는 데 자신을 가두어 두는 것이 참으로 답답했다. 10년을 꽉 채울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런데 변한 게 하나도 없다. 타성이 극복하기 어려운 중병이라는 차가운 현실이 거대한 벽처럼 서 있다. 술을 풀 수밖에 없는 무서운 세상, 더러운 세상이다. 술 푸는 내 귀에 들리는 세상의 민심이다. 술에 취해 세상을 뒤집어야 속이 후련해진다. 시국이 10년을 훌쩍 되돌아 퇴보하고 곳곳에 정체만 난무할 뿐 진전이 없다.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는 구호소리가 사뭇 진지하게 다가온다. 얻은 적도 없어 잃어버릴 것도 없는 입장에서는 시답잖게 들렸었다. 타령을 늘어놔 봤자 설거지, 청소나 할 신세에 불과할 뿐이라고 얕본 게 화근이었나 보다. 곳곳에서 패퇴할 뿐 승전보가 그닥 없다. 타올랐던 촛불은 어느새 원점이 되고 말았다. 시대를 초월하여 다시 피아를 구분케 하고 있다. 영 돌파구도 마뜩찮다. 되돌이표 노래를 불러야 할 참이다. 깔보았던 역량에 당하고 보니 자책과 타박만이 남았다. 스스로 진로에 대해 어떻게 나아갈지 고민이 부족했다. 가야 할 머나먼 길에 대한 청사진 없이 무대포로 질렀다. 한참이나 걸어 나와 보니 빈 수레만 요란하다. 아무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누군가 끝까지 버티면 된다는 일리 있는 소리도 했지만 언 발에 오줌누기식이다. 무대포 정신으로 뚫고 나갈 국면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는 희망을 준다. 변화를 풀어낸 이들이 마냥 부럽다. 노쇠한 줄로만 알았던 오키나와 변호사들 사이에 몇 년 사이에 순식간에 젊은 변호사들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무기력한 모습을 보며 핀잔주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역전이 되었다. 변변찮은 사무실 하나 제대로 꾸려나가지 못하고 지쳐나가는 동안 그들은 묵묵히 사람들을 모았나 보다. 장기 침체의 나락에서 작은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며 우리를 놀라워하던 그들이 대국에 맞장을 뜨며 최전선에 후배들을 앞장세워 나가고 있다. 뜨뜻미지근했던 모습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비등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다. 아뿔싸, 거기에 해답이 있었다. 침체와 나락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작은 변화를 소중히 하며 거기에 인생을 걸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과 똑같은 이상을 지향하는 후배들에게 길을 밝혀주고 있는 오키나와의 할아버지 변호사들을 닮고 싶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오키나와 주민들과 함께 한 그들의 모습이 큰 위안이 된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더 이상 소진하지 말아야겠다. 무기력에서 벗어나 일상의 작은 변화부터 만들어 나가고 싶다. 신명나는 세상을 향한 지름길이 분명하다. 새해 희망을 다듬어본다. 지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와 자유법조단 오키나와지부의 평화교류회 사진 출처 - 민변 블로그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25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학 시절부터 지금껏 가슴에 담고 사는 책 중에 리처드 바크의「갈매기의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 들었었지만 참 좋은 이야기여서인지 여기저기서 다시 듣게 되는 이야기 중에 ‘독수리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새 이야기’는 늘 우리가 지녀야 할 꿈과 삶에 대해 성찰하도록 하는 것 같아 올해의 끝자락에 여러분과 성찰을 나누고 싶습니다.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라는 갈매기가 있었는데 그 갈매기는 다른 갈매기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혼자 일어나 깊은 밤바다 높은 상공에서 수직 하강을 연습합니다. 몇 백 번을 반복 연습하다가 실수도 자주하여 날개가 찢기기도 하지만, ‘조나단’은 다친 곳이 아물기만 하면 다시금 깜깜한 바다 위로 날아가 연습에 몰두합니다. 높이 날아오르는 것뿐 아니라 멀리 나는 것도 좋아해서 먼 바다에 홀로 갔다 오기도 합니다. 갈매기는 큰 바다를 날아다니는 새 중의 새여야 한다고 믿는 ‘조나난’은 부두의 쓰레기 더미에 떼로 몰려 음식 쓰레기를 골라 배를 채우는 숱한 갈매기들에게 먼 바다 얘기를 해주고 갈매기답게 높이 날아다니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곤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갈매기 마을에 회의가 열리고 ‘조나단’은 위험한 존재로 낙인이 찍혀 추방당하고 맙니다. ‘조나단’이 추방당한 곳으로 그의 친구 갈매기가 찾아와 함께 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말이 오래오래 가슴에 남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도 부두의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쉽게 찾으며 바다 위를 날아 용맹스럽고 치열하게 물고기를 사냥하는 갈매기다움을 잊고 또 잃고 사는 부류와 ‘조나단’과 같은 훨씬 적은 수의 부류로 구성되어 있지 않나요? ‘높이 날기 싫은 갈매기들’과 ‘높이, 가장 높이, 날고 싶어 하는 갈매기들’ 중에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지요? 혹은 이제라도 선택을 다시하고 싶지는 않으신지요? 이젠 ‘독수리 이야기’ 차례입니다. 독수리는 70년까지 살 수 있답니다. 그러나 70년을 살려면 40살 정도 이르렀을 때엔 신중하고도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왜냐 하면 이즈음이 되면 발톱이 안으로 굽어진 채 굳어져 먹이를 잡기조차 어려워지고, 길고 휘어진 부리는 독수리의 가슴 쪽으로 구부러졌으며, 날개는 약해지고 무거워지고 깃털들은 두꺼워져서 날아다니기조차 어렵게 되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제 독수리는 그대로 몇 년 더 살다 죽든지, 아니면, 고통스러운 혁신의 과정을 통하여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든지,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합니다. 그대로 죽지 않고 환골탈태 하려면 그 독수리는 무려 5개월 동안 산꼭대기 절벽 끝에 둥지를 틀고 전혀 날지 않고 둥지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이 기간 동안 독수리는 자신의 부리가 없어질 때까지 바위에 대고 사정없이 내리치고, 새로운 부리가 나올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 부리가 새로 자라게 되면, 이번에는 그 부리를 가지고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다고 합니다. 발톱이 새로 나서 다 자라나면 이번에는 낡은 깃털을 다 뽑아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5개월이 지나면 그 독수리는 새로운 부리, 새로운 발톱, 새로운 깃털을 갖고 새로이 비행하며, 이후 생명을 30년 연장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이 두 가지의 ‘새 이야기’는 (정치권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시민들을 위한 성찰 자료이기도 합니다. 1948년 제1공화국부터 약 40년 후인 1987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시민사회는 독수리처럼 “그대로 죽든지, 아니면, 고통스러운 혁신의 과정을 통하여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든지, 그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의 결과가 ‘6월 항쟁’이자 민주화였다면, 그 1987년부터 20년이 좀 넘는 지금 우리는 다시금 그러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세월이 워낙 빠르고 세상이 워낙 빨리 변하니까 40년 주기가 이젠 절반인 20년 주기로 단축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구요. 돌이켜보건대, 1987년 당시 우리 시민사회는 독수리처럼 절벽 끝 둥지 안에 오랜 동안 머물며 수행하는 환골탈태의 고통을 이미 오랫동안, 그 오랜 독재정권 시기 동안, 지내온 직후였으며 ‘민주화’라는 극적인 변화에 대한 ‘타는 목마름’과 범국민적인 공감대가 있었지만, 그 이후 ‘6월 항쟁’ 20주년을 이미 몇 년 지나온 현재의 우리는 어떤지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고난의 시절을 함께 싸워 이겨내자던 70년대, 80년대 당시의 반독재투쟁의 외침이 지금에 와서도 다시 울려 퍼져야 하지 않나 싶은데도 말입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 죽지 않고 독수리처럼 다시금 태어나려는 결심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 아닌가 싶습니다. 허나, 혹시 우리는 새로이 거듭 사는 것을 벌써 잊고 귀챠니즘, 매너리즘, 무사안일주의, 혹은 패배주의에 깊이 빠져 제2의 인생을 아예 포기하는 독수리들은 아닌지요? 이빨과 발톱으로 잔뜩 무장한 사자는 스스로 ‘동물의 왕’으로 자처하지만, 몸에 작은 상처라도 패이면 그보다 약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잘 낫지 않고 상처가 속으로 깊이 곪아 들어간다 합니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는 내년에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유가족들과 함께 하는 작은 미사가 매일 저녁 이어질 것이며, ‘사유화’한 공권력과 ‘법치주의’라는 허무맹랑한 명분으로 중무장한 정부는 그 질긴 외면을 햇수로 2년째 거듭할 것입니다. 속으로 들어가 곪아가는 그 상처는 겉에선 아문 것 같지만 예후는 점점 더 안 좋아질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이 주어져도 어떤 것은 그 시간 동안 ‘부패’하고 있을 뿐이지만, 어떤 것은 그 시간을 ‘발효’하려고 쓴다지요. 사자의 상처가 점점 곪아 들어가는 그 시간을 우리는 스스로 독수리로서 환골탈태의 힘든 노력을 하는 시간으로 맞대응하자고 외치고 싶습니다. 스스로 갈매기처럼 높이 날아 수직 강하하는 호된 훈련의 기간으로 삼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이 세상이 점점 아픔과 어두움으로 ‘부패’되어 간다고 느끼는 절망을 참 세상이 여러분에 의해서 ‘발효’되어 간다는 희망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바꾸어 내고야마는 그런 새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높이 날아오르려는 갈매기들과 환골탈태하여 새로이 거듭 사는 독수리들인 여러분! 저 역시도 여러분 가운데의 하나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리라 다짐합니다.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68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백성의 원성도 줄어들 것이다. 위엄과 사나움만 가지고는 원망을 막을 수 없다, 위엄만 앞세워서도 안 되고 법이 너무 가혹해서도 안 된다. 사납게 정치해서는 백성의 원성을 막을 수 없다. 마치 넘치는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 홍수로 인한 피해는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니 어찌할 길이 없다. 제방을 터 물길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는 일만 못하다.”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6세기에 정나라 재상을 지낸 자산의 말이다. 까마득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자들의 행태는 비슷하고, 문제점도 비슷하며 힘없는 백성이 겪는 고초도 비슷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다. 이 정부는 법치주의 생떼를 부리며 수많은 촛불 시위자 처벌(위헌결정),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무죄), KBS 정연주 사장 해임과 기소(무죄) 등을 자행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국민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나움이 그 정도를 넘치자 원망도 같이 넘쳐흐른다. 더하여 정부의 4대강 사업 강행처리는 사나움을 넘어서 광기까지 번득인다. 국회에서의 예산자료 요청을 묵살하고, 국가재정법을 탈법적으로 우회하여 국회 예산심사를 회피하면서 경제적 타당성조차 검증받지 않고, 환경영향평가는 졸속으로 추진하며 안중에도 없고, 앞으로 생태계 파괴와 문화재 훼손 등으로 이어질 미래의 모습까지 상상해 보면 흡사 ‘막가파’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의 오만한 행정 권력 행사에 백성의 의사가 깃들 자리는 없다. 그래서 국민은 정말로 피곤하다. 백성이 피곤해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정부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가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자, 4대강 사업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을 쓰고 말잔치를 벌린다. 그래도 국민의 70%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 그래도 정부는 물길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국민은 더욱 피곤해지고 있다. 4대강 물줄기를 막겠다고 백성도, 절차 및 과정도 무시하고, 그저 몰아붙이는 현 정부의 짓은 여론을 가로막는 제방을 쌓는 것과 동일하게 보인다. 국민과 소통하고 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가는 소도 웃을 짓’이다. 소통은 나와 다른 자, 집단들과의 대화이다. 지난 12월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4대강 예산 삭감을 위한 비상행동 선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4대강 사업 중단을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 소 수입을 계기로 촉발된 민중들의 자발적인 촛불시위가 온 들녘에 울려 퍼지자 정부는 서둘러 컨테이너 명박산성을 쌓았다. 컨테이너 명박산성이 국민과의 소통을 막는 1차 산성이었다면, 4대강 사업 강행은 국민과의 소통을 만천하에 거부․선언한 2차 명박산성이다. 명박산성을 높이 쌓을수록, 4대강 제방을 높이 쌓을수록 국민과의 소통은 단절되고, 백성의 원성은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모든 제방과 산성을 무너뜨리는 홍수가 발생할 것이다. 국민의 힘에 의한 홍수는 역사상으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 정권이 4대강을 막는 행위는 마치 홍수를 부르는 짓처럼 보인다. 갈등과 분열, 강행의 대가는 그대로 힘없는 백성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할 몫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플 뿐이다. 어찌되건 현 집권자들은 역사 앞에 명박산성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의 주인인 백성은 힘들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둥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01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대수는 ‘호치민’이라는 제목의 노래에서 사회주의 베트남 건국의 지도자 호치민(胡志明)을 이렇게 소개한다.(랩이니까 그냥 소리 내어 읽으면 된다. 단, 한대수 식의 경상남도 사투리로. 이 노래에서 멜로디는 후렴구-‘호치민 호치민 호치민’-가 전부이며, 괄호 안의 ‘아 그래요’는 표준어를 구사하는 20대 여성의 평어체 대사다. ) “호치민에 대해서 말하자면 참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학자의 집안이고 불란서 점령 당시에  왜 서양세력이 자기 나라를 이렇게 장기간 동안 점령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또 워낙 문학가 집안이니까 여러 책을 보면서  연구를 하게 되죠    호치민 호치민 호치민    그래서 적을,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라라는  요런 명언이 있으니까 불어를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요)  그런데 불란서를 가야 되겠는데 유람선의 요리사 조수로 취직하게 됩니다  불란서에서 불란서 공산주의자들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또 거기에서 맑시즘을 배웠고  드디어 어떠한 계기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합니다 (아 그래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대학교에 입학해서  과연, 제국주의, 자본주의 요런 데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다가 러시아의 힘을 얻고 중국에 또 이사를 갑니다  여러가지 민중의 고통, 민중의 핍박, 또 프롤레타리아  거기에 대해서 배우고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옵니다  호치민 호치민  미국이 이젠 등장하는데 그 부패된 고딘디엠 정부를 지원하면서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아주 지속된 전쟁의 끝없는 폭격  약 3200일의 끝없는 폭격을 밤낮으로 당하면서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이겨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부정확한 서술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한대수 특유의 직관이 십분 발휘된 드라마틱한 설명이다. 부정확한 서술이 있는 곳은 마지막 부분이다. 마치 10년 전쟁 전체를 호치민이 지휘한 것처럼 한대수는 노래했지만, 호치민은 전쟁이 끝나기 6년 전인 1969년 베트남 독립기념일에 세상을 떠났다. 호치민이 주로 활약했던 건 프랑스와의 전쟁이었고, 미국과의 전쟁을 주도한 것은 남베트남 출신의 레 두안이었다. 이미 1960년께 권력의 상당부분은 호전적이었던 레 두안에게 넘어가 있었고, 호치민은 당의 상징적인 얼굴로서, 외교적 대표로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실용주의자였던 호치민은 인민들의 고통만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미국과의 전면전을 망설였다. 나는 평소, 북한의 사회주의가 왜 유난히 교조적이고 전투적인지, 왜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 중에 유일하게 북한에서만 부자 승계가 이뤄지는지 궁금했다. 한때는 모든 걸 기후 탓으로 돌리며 비과학적 결론에 이른 적도 있었다. 호치민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쿠바나 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나라들이 북한보다 훨씬 유연하고, 부자 승계도 없는 이유를, 날씨가 따뜻해서 먹을 것이 풍부하니까 사람들이 욕심이 적기 때문인 것으로 마구잡이로 재단했다. 하지만 베트남을 좀 더 들여다보면서, 사회과학에서 이런 식의 ‘기후 결정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됐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레 두안이라는 인물은 갑자기 죽지만 않았다면 거의 김일성처럼 됐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짐작하다시피, 호치민의 권력 행사는 대단히 민주적이었다. 주석의 이름으로 강제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모든 결정을 토론에 의존했다. 호치민은 반대했으나 강경파들에 의해 강행된 토지개혁이 민심의 반발에 부닥쳐 결국 호치민이 나서 사과를 해야했던 것도 좋은 사례다. 호치민의 생애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키는 대목은 한대수의 노래에 나와 있지 않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독립에 성공한 뒤, 호치민은 으리으리한 총독궁을 놔두고 그 옆의 정원사(우리로 치면 마당쇠) 오두막에서 살았다. 적어도 주거 면에서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던 백범 김구의 소원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이런 겸손함과 청빈함으로 민중들의 마음을 얻었다. 호치민은 여러가지 면에서 김구와 닮았다. 어릴 때부터 독립 운동에 매진했고, 사심이 적었다.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슴 밑바닥에 깔고 있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호치민이 제국주의를 몰아낼 수단으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데 반해, 김구는 사회주의 역시 외세의 일종으로 보아 배격했다는 점이다. 프랑스와 미국, 러시아, 중국 등 세계를 떠돌며 국제감각을 익힌 호치민이 실용주의적 관점으로 사회주의를 채택한 반면, 한국과 중국에 시야가 국한돼 있던 김구는 일체의 외세를 배제하고 우리 민족만의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주의자에 가까웠다. 호치민이 한 때 미국을 이용해 프랑스를 몰아내려고까지 했을 정도로 국제정치에 민감했던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이승만이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이승만은 신탁통치안을 교묘하게 비틀어 ‘찬탁=공산주의’라는 프레임을 만들어내고, 이를 반공 세력의 결집 기회로 활용한다. 이어 반공의 깃발아래 미국과 친일파, 지주들을 등에 업고 남쪽에서 권력을 잡았다. 백범 김구 사진 출처 - 백범 김구 기념관 이 때 형성된 극우 헤게모니는 군부독재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김구 선생을 존경하지만, 해방 공간만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나는 지금 김구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게 아니다. 호치민의 실용주의와 국제감각을 말하는 것이다. 생전의 노무현은 이렇게 썼다. “김구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은 왜 패배자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패배했는가? 역사에서 올바른 뜻을 가진 사람은 왜 패배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 역사에서는 정의가 패배한다’는 역설적 당위로 귀착되었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노무현이 만난 링컨>에서) 노무현 스스로도 ‘패배하는 정의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견처럼 보여 슬픈 대목이다. 노무현은 도덕적 수단(당정분리, 권력기관의 자율화)으로 우리 사회의 부도덕(지역주의, 수구언론)을 이기려고 했던 반(反)마키아벨리주의자였다. 그 불가능해 보이던 실험은 예상대로 패배했다. 노무현이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김구는 단지 정의의 편이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아까 말한 대로, 숨가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잘 몰랐거나 일부러 무시한 채 어떤 진공 상태의 이상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로서 노무현의 패배는 민중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실체적 관심보다는 일종의 당위로서의 정치투쟁(수구언론과의 싸움을 포함하여)에 치중함으로써 민중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안목에 남달리 예민했던 노무현은 현실의 민중들이 원하는 것을 포착하는데 상대적으로 서툴었다. 이명박은 노무현의 전도된(뒤집힌) 형태다. 역사에 무감하고 도덕에 무관심하다. 역사적으로 부도덕한 자들은 도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부도덕을 증명한다. 식언은 예사다. 그리고 자신이 특정 계급의 대표라는 사실을 기술적으로 숨기고 있다. 지지율이 떨어질만 하면 재래시장에 나가 떡볶이를 먹으며 서민 경제를 걱정한다.(이런 정치 쇼야말로 노무현이 가장 혐오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혼부부 보금자리 아파트 같은 기만적인(언발에 오줌누기라는 의미에서!) 술책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있다. 위장 전술은 지금까지 잘 먹히고 있다. 한 편으론 정부 기관이 앞장서서 직장 폐쇄를 강행하고, 파업권 등 각종 헌법적 권리를 짓밟고 있다. 리영희 선생이 예견한 대로, 이 정권 하에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고(실제로 그렇지 아니한가), 범죄는 늘어날 것이며, 계급 갈등이 격화되는 투쟁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방송을 장악해 정권을 연장한다면 그 갈등은 더욱 커져 폭발 직전에 이를 것이다. 이 정권에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사람이 남아 있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명박의 감동적인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는 (사담 후세인이 주도한) 이라크 혁명 정부의 청렴성과 과단성, 비전을 상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정부의 평등의식(준공기념식을 준비하는 현대건설에게 차양을 치려면 수상이 앉아있는 단상과 객석에 똑같이 치던지, 아니면 걷어버리라는 지시가 내려졌다)에 놀라며, 말레이시아가 무서운 속도로 우리를 따라잡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한다. 이 때(1995)까지만 해도 인간 이명박에게는 역사의식과 평등의식이 남아 있었다. 이제 와서 그때를 돌이켜보라는 것은 정녕 부질없는 권유일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전문)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24 | 추천: 1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느 날 아침 출근을 위해 지하철 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려 한다. 평소 몸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발걸음이 내디뎌졌고, 순간 앞사람과 충돌할 뻔 했다. 어제와 달리 에스컬레이터는 하행이 상행으로, 상행이 하행으로 바뀌어 있었고, 우측보행이라는 표어 같은 것이 바닥에 붙어 있다. 한동안 주로 다니는 지하철역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에스컬레이터를 타려할 때마다 발이 꼬이는 황당한 경험을 해야 했다. “아차~. 에이 씨~.” 우측보행이라니....... 그리고 나서 얼마 후 밥 먹으며 TV를 보는데 우측보행을 생활화하자는 내용의 공익광고 같은 것이 화면에 흐른다. 선진국에서는 우측보행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둥, 어떤 아이가 아빠로 보이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가고 있고, 맞은편에서는 유럽인쯤으로 보이는 백인이 뭔가를 보면서 아이의 정면으로 걸어오고 있는데, 아이는 어느 쪽으로 걸어가야 하느냐고 아빠로 보이는 사람에게 묻고, 아빠로 보이는 사람은 아이에게 서로 부딪히지 않고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측보행을 해야 한다는 식의 뜬금없는 얘기를 한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사촌 형이 대학교 앞 차도에서 뒤에 오던 무보험 차량에 치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칠순을 앞에 둔 나의 어머니는 일방통행로에 서 있다가 뒤에서 오던 차에 발목을 치어 지금도 원활한 보행에 지장을 느끼신다. 내가 아는 대학생 한명은 이면도로에서 뒤에 오던 차가 왼쪽 무릎을 치어 평생 등산하기 어렵게 됐다. 난 어려서부터 좌측보행, 정확히는 좌측통행을 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으면서도 좌측통행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행동을 하기 싫은 것이다. 그런데 나이 먹고 나서 정부가 우측통행 아니 우측보행을 하라고 하니 더 하기 싫다. 더군다나 우측보행을 하는 것이 마치 선진국민, 문명인의 보행방식이라는 식의 얘기를 들으니 하기 싫은 기분을 넘어 역겹게 느껴진다. 난 지금 화가 나있다. 왜 내가 걸어가는 방향을 정부가 일률적으로 정하려고 하는가? 좌측통행도 자연인의 보행방향을 획일화 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 관점이라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평생을 몸에 익혀 살아온 통행방식을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고 또 다시 이를 획일화 시키려 한다. 게다가 그것에 선진국형, 문명국형이라는 식의 수식어까지 붙여 한순간에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을 후진국형, 야만국형 인간으로 만들었으니 화가 안 날 수 없다. 사람의 의식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조화되어야 한다. 설령 아무리 우측보행이 보행방식에 있어서 우수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려는 순간, 우측보행은 그 자체로 최소한의 가치도 갖지 못한다. 차량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통행방식이 무엇인지, 사람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보행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 그것을 넘어 우측보행을 일률적인 인간의 보행방법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문화적 규범, 법률로 만들고(실제로 한나라당 박대해 의원은 이를 입법추진중이다), 인간의 의식에 주입하려는 것은 규범, 법률을 가장한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심지어 어떤 교통문화 단체에서는 이와 같은 우측보행을 파쇼적인 발상이라거나, 레드 콤플렉스의 반영이라고 아주 강하게 비판한다. 난 현재 진행 중인 우측보행 계도 광고가 정부가 강제력(예산, 광고 내용, 실제 생활에서의 에스컬레이터 등의 배치 변경 등)을 통해 인간의 행동유형을 획일화 시키려는 발상에 연결된 것이라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인 시도라고 비판하고 싶다. 더구나 이번 정부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는 것은 자신의 존재 근거인 국민을 기만하고 또 무시하고 있는 증거라고 비판하고 싶다. 복지예산 증액은커녕 이를 줄이기 급급하면서도 이처럼 근거 없고,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책으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정부(물론 이보다 4대강 공사에 쓰일 천문학적인 액수의 예산을 생각하면 목구멍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에 대하여 능력이 없으면 차라리 잠자코 있으라고 비판하고 싶다. 현재의 보행문화, 통행문화에 문제가 있더라도, 정부로서는 이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한 노력에 앞서 차도와 인도(보도)가 구분되지 않은 전국에 산재한 많은 보차비구분도로에서 발생하는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한 대책부터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지방에 가보면 갓길을 걷는 사람들이 빠르게 곁을 지나쳐가는 차량으로 인하여 느끼는 위협이 과연 어느 정도 될 것인지, 그로 인한 생활상의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일지 감히 가늠하기 힘든 도로들이 무수히 많다. 이런 위험스런 상황이 정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장님 정부고, 무능력하며 무책임한데다 낭비벽 심한 정부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정부가 전체주의적, 파쇼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19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