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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관의 고민(정 원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3 16:16
조회
276

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굴곡 많은 우리 역사는 법관에게 힘겨운 과제를 부여해 왔다. 위헌적인 실정법은 법관에게 합헌적인 판결이 성립할 수 있는 재량의 여지를 박탈했다. 1950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 중에 우리 헌법상 최초의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를 발한다. “비상사태하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령”이 그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도의 비상사태(“비상사태라함은 단기4283년6월25일 배한괴뢰집단의 침구에 인하여 발생한 사태를 칭한다. 특별조치령 제2조)를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중형(重刑)이 규정되어 있다. 절도나 손괴(損壞) 행위만 저질러도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며, “정보제공, 안내, 기타의 방법”으로 위와 같은 행위를 도우면 마찬가지로 처벌된다. 더욱이 재판은 한 번으로 종결되며(單審制), 판결을 하면서 증거설명을 생략할 수 있다. 위헌적인 법령이었다. 더 큰 문제는 위 긴급명령이 자의적으로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군을 격파하고 있다는 대통령 담화를 신뢰한 채 피난 시기를 놓친 국민들을 ‘부역행위자’로 매도하며 특별조치령에 따라 처단하였다. 그러나 모든 법관이 실정법에 따라 재판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지방법원 판사였던 유병진은 여러 가지 구실을 달아 무죄를 선고한다. “부역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부역을 할 환경을 만들어주지 말라. 일단 후퇴할 때라도 국민을 속이지 말고 피난할 여유를 주라” 유병진 판사가 그의 저서 ‘재판관의 고민’에서 밝힌 생각이다.

위헌적인 실정법을 적용해야 하는 상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신시대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 위헌 조치를 쏟아냈고 다수의 법관은 실정법에 따라 재판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사실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악법도 법이다”를 권위주의 정부가 ‘도덕’과 ‘윤리’시간에 지속적으로 교육해 온 배경이 여기에 있다.

최근 법원은 일련의 사건들에서 실정법을 준수한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도 검찰(‘일부 검찰’이겠지만 검사동일체 원칙상 ‘검찰’이라고만 한다)과 일부 세력은 색깔론을 제기하며 법원의 좌경화를 성토하고 있다. 그러나 미네르바 사건, KBS 정연주 사장 사건, PD수첩 사건들에 관한 법원의 판단은 지극히 정상적일 뿐 반대진영이 주장하는 좌경이나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롤모델(role model)로 삼는 ‘선진국’ 법원은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 확실하다(다만 선진국 판사들은 우리 같이 대단한 검찰 동료가 없기에 이런 사건들을 해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에 관하여 우리사회가 1987년 이후 20년 이상 묵묵히 이룩한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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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모습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하지만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강기갑 의원에 대한 공무집행방해 사건의 판결이다. 변호사 단체까지 나서 판결의 법리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은 과거 긴급조치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던 때의 사고방식에서 조금도 전진하고 있지 못하다. 담당판사가 어떠한 고민의 결과 무죄라는 결론에 이르렀는지에 대하여 제대로 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검찰이 법리를 무시한 엉터리 판결이라고 엄청난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 기소 자체의 정당성에 대하여는 추호의 의심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사건이 과연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기소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다수의 정상적인 국가들은 우리처럼 검찰에 무제한의 기소재량을 주지 않는다. 대배심(grand jury)과 같이 시민이 기소 여부를 판단하도록 보장하기도 하고, 사전에 판사의 예비심사를 거치도록 하기도 한다. 이러한 제도가 없는 우리의 경우 검찰은 기소 재량을 신중히 행사해야 함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 검찰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자신의 재량을 강자(强者)의 논리에 충실하게 행사했다. 권력자의 범죄에 대하여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며 칼을 거둔 것이 대표적이다. 강기갑 의원 사건의 경우 국회의 자율권을 고려해 가능한 공소권을 발동하지 않는 방향으로 검찰권을 행사할 재량이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검찰의 불기소가 국회의 문제는 국회의 자율로 해결하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공무집행방해’라는 지극히 협소한 측면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에 이르게 된 파행적인 국회 운영을 방지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우리 법원은 전통적인 기본권 분야에 있어서는 상당히 성숙한 판결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용산 사태에서 극명히 드러난 것처럼 생존권이라든지, 난민(難民) 지위 인정과 같은 사회적 기본권 분야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기본적인 실정법 차원의 고민에서 맴돌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대기업 총수 등 경제적 강자에 대한 관대한 판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최근 두드러지는 법원의 ‘부경화’(富傾化)’ 현상이다. 2010년 법관이 고민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