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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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고등학교 때, 나는 정기적으로 서랍 검사를 당했다. 아버지가 주도하고 어머니가 거들었다. 덕분에 창간호 때부터 모아둔 몇 달 치 한겨레신문과 각종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히기도 했다.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겨레신문을 ‘소장’하겠다는 욕구를 버리고, 가판에서 사서 읽은 뒤 학교 교실에서 여러 친구들과 돌려 읽었다. (그 시절, 대구에서 고등학생들끼리 한겨레신문을 돌려 보는 것은 ‘지하 유인물’을 읽는 경험과 비슷한 것이었다) 돈을 내고 사서 읽은 책은 다른 친구 집에 (녀석에겐 검열관을 자처할 아버지가 없었다) 맡겨 뒀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딱 하나 있었다. 시 습작 노트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 끄적거린 잡문 묶음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기억과 감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해도, 그걸 들여다볼 ‘특권’을 허락할 순 없었다. 거의 일주일마다 그 노트를 숨길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머리가 아픈 건 사실 두 번째 문제고, 이걸 누군가 읽어봤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참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시 습작은 대학교 졸업 학기를 끝으로 결말을 내렸고, 신문사 입사 이후엔 단 한번도 이 노트에 ‘신작’을 보태지 않았지만, 이 잡문 묶음은 지금도 내 보물 1호다. 그것은 일기를 대체했던 ‘월기’이자,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청(소)년 시절을 더듬을 유일한 자취다. 초등학교의 일기 검사가 초등학생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국가인권위의 판단을 둘러싼 논란을 보고, 나는 참 의아했다. 일기의 교육적 효과 운운하는 사람들은 어린시절, 거의 예외 없이 겪었을 일기의 ‘폐해’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렸음에 틀림없다. 의무에 불과한 일기 쓰기 때문에 한 달 전 날씨까지 기억해 내야 했던 일은, 어떤 이유를  더해도 그저 불필요하고 허접한 노동력 낭비다. 그런 일기는 글쓰기 능력 배양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과의 대화’다. 이는 단단하게 내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을 전제로 한다. (검사라 불리는) ‘검열’을 의식한 성찰이란, 아예 성립불가능한 말이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나 자신과 어떻게 대화하는 지를 이해한다는 의미다. 교사 또는 부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 시선에 맞춰 나를 포장하는 기술을 익힌 사람은 결코 ‘글’을 쓸 수 없다. 학교 숙제로서의 일기를 열심히 쓴 학생 가운데 훗날 본격적인 문필가가 된 경우가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한 통계적 수치를 제시할 순 없지만, ‘경험적’으로 보자면 일기와 글쓰기는 결코 ‘길항’의 관계가 아니다. 검열에 익숙해진 세계관으로 ‘창조’를 도모할 수는 없다. 혹시 탈선이나 비행의 ‘조짐’을 일기를 통해 파악하려는 욕구가 ‘교육적 효과’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우선 어른들이 걱정하는 종류의 탈선과 비행을 (이런 단어 자체가 얼마나 ‘어른 중심적’인 말인가) 꼬박꼬박 일기장에 적을 만큼, 순진한 학생은 많지 않다. (학교 과제로서의) 일기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충실하거나, (내밀한 개인기록으로서의) 일기를 쓸 정도로 자기와의 대화에 목마른 학생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일탈’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교육적 수단을 고려하자면, 그저 일기를 쓰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구분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일기 쓰기를 '적극 권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신과의 대화를 통한 성찰에 도움이 된다는 ’교육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 한겨레신문  사실 일탈의 조짐을 발견해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철저하게 ‘범죄수사’의 관점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바라보는 행위다. 이런 방식이라면 차라리 거짓말 탐지기를 신체검사 때마다 학교에 들여와 정기적인 ‘바른 생활 점검’을 시도할 일이다. 그런 지경이 되면, 일기 쓰기는 이제 글쓰기와 성찰을 빙자한 국어, 도덕 교육이 아니라, 검열관 앞에서 적어 내려가는 ‘자술서’라는 본질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정상화를 조금이라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결국 이런 교육적 효과에 대한 기대는 결국 다른 교육 수단을 통해 도모되는 게 옳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글쓰기 능력을 길러주려면, 책읽기와 독후감 등 ‘공식화’된 작문 수업의 활성화가 더 바람직하다. 청소년기의 일탈행동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손쉬운 자술서 검열 대신 어렵고 힘들지만 가장 효과적인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게 좋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기름을 다 빼고 난 다음에서야, 일기는 제 자리를 찾는다. 자신과의 대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기록. 그 안에 둥지를 틀고 나의 ‘자존’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인권운동의 출발이 스스로의 인권을 자각하는 일에 있다면, 인권교육의 강화는 ‘누구의 검열도 의식하지 않는 성찰적 대화로서의 일기 쓰기’를 권장하는 일에 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내 서랍을 뒤지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 스스로 시를 쓰기 시작하셨다. 얼마 전에는 지방의 한 문학잡지에 ‘등단’까지 하셨다.  ‘운동권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자신과 대화하는 ‘성찰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신 듯 하다. 여기에 혹시 아들의 은밀한 기록을 들쳐본 경험이 긍정적 영향을 줬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들어 부쩍 ‘비밀’이 많아진 7살짜리 딸에게 내 ‘잡문 묶음’을 보여줄까 말까 고민 중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너만의 세상을 일궈가라는 격려와 독려가 될 수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세상에서, 인권은 그 본래적 가치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다. 시 쓰는 할아버지는 시 쓰는 손녀의 습작노트를 뒤져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시 쓰는 일을 서로 대견하고 존경스럽게 여길 뿐이다. 일기 쓰기는 그렇게 자존을 향한 성찰,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인권의식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보내야 마땅하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34 | 추천: 1
여의도 성모병원의 718, 719호실은 특별한 사람들이 입원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광산노동자들이 진폐증을 치료받는 자리입니다. 전국적으로 5, 6만 여명의 진폐환자들이 있고, 입원 환자만 3천 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은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관심사에서 본의 아니게 밀려났습니다.     산재보험의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의료수가가 낮고 장기간에 걸친 입원 치료가 필요하기에 병원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의료인력의 확충이 어려운 난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의도성모병원은 1963년부터 40여 년 동안 묵묵히 이런 환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6개의 진폐요양기관이 있지만, 여의도 성모병원이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서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병원입니다. 현재 진폐환자들의 연령이 고령(70세 이상)인 데다가 진폐는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이기에 시간이 흐르면 그 끝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환자와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어쩌면 찌푸리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그러기에 여의도 성모병원의 진폐병동 유지는 병원의 수익성 유무를 넘어선 진정한 사회봉사요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삶에 위로가 되셨던 그리스도의 ‘약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참모습입니다. 지금은 사양산업이지만, 60-80년대에 우리는 땅속 깊은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광부들의 노고 덕분에 따스함을 입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줄 알면서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많은 이들 덕분에 우리는 생활의 윤택함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힘든 불치병을 얻은 5, 6만 여명의 환자들은 인간생활의 윤택함을 누리지 못하고 병고와 싸우고 있습니다. 문제는 진폐가 환자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병의 치료를 위해 가정의 전 재산이 쓰여졌고, 따로 간병인을 쓸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아내가 환자인 남편 곁에서 24시간 간호하고 있기에 경제적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여분도 없는 막다른 가정도 상당수 있습니다. 비록 배운 것이 많지 않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식구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온 몸을 굴속에 던져 열심히 땀방울을 흘렸건만, 남은 것은 병든 몸뚱이요 너무도 오랜 시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정신적, 경제적 고달픔을 안겨주고 있으니,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도 끈질기게 붙어 있는 생명 줄이 환자들에게는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더욱이 시간의 흐름과 효율적인 기계문명의 발전 속에서 이들의 피맺힌 절규와 아픔도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탄광막장체험을 하고 있는 사진  천주교회는 병원사목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사목위원회를 통해 80년대부터 이들을 위한 사목을 시작하였습니다. 진폐환자들과 진폐로 숨진 이들의 가족을 위해 보상금을 마련해 주었고, 현재는 담당 신부와 상담전문 수녀의 파견과 자원봉사자들을 양성하여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으며, 광산노조 및 그 가족들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환자들의 보다 질적인 치료와 인권보호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과 경기지역에 산재해 있는 재가진폐환자가정을 방문하여 그분들이 처한 다양한 어려운 현실 안에서 당면한 구체적인 도움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외로움에 지치고 육체적인 고달픔에 지친 환자와 보호자들의 대화상대가 되어주며, 경제적 궁핍이 심한 가정에는 매월 일정액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에 필요한 재정 확보를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후원회원을 모집하여 함께 봉사하고자 하는 선의의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로서 첫째는 지속적으로 상담 자원봉사자들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자원봉사활동으로 말미암아 환자들이 탄광에서의 체험과 폐광이후의 삶의 과정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서로의 아픔을 알아주고 이해하며 위로의 장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환자들에게 힘을 주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둘째는 선의의 의료진을 확보하여 재가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재가진폐환자란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진폐환자로서 진폐로 인해 장해등급은 받았으나 진폐법이 인정하고 있는 요건에 해당되지 않아서 입원이 안 되는 환자입니다. 그래서 휴업급여와 요양치료에서도 제외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위한 자원의료봉사자들의 확보와 가정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가족과 함께 환자의 간병을 도와 줄 자원 간병인 봉사자들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셋째는 진폐환자의 치료와 요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병원들이 수익성의 저하를 이유로 진폐병동을 폐쇄하는 일이 없도록 정부기관에 보다 적극적인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것과 이들이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넷째는 경제적 지원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궁핍이라는 이중의 삶의 무게를 힘겹게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더불어 사는 사회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많은 후원자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는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있는 영신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직자,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합니다.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진폐환자를 간호하고 계시는 세실리아 수녀님  매년 ‘노동자의 날’을 맞이하면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어려움과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지만, 안타까운 것은 몇몇 단체의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가난한 진폐환자들을 위해 애쓰고 있는 여의도성모병원 관계자와 의사분들, 여러 요양원에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많은 이들의 노고를 보며 감사함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도 같은 일이지만, 그 노고에 누구도 찬사를 보내는 이 없지만, 환자와 가족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수많은 작은 노동자들의 수고를 잊지 말고, 이 약한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새로운 산업의 분위기 속에서 다시는 이런 산업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업관계자의 의식전환이 이루어지고 노동자들의 희망도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37 | 추천: 1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높기로 이름이 나 있다. 그래서 이만큼(?)의 경제성장도 이루었고 각국의 어린이들이 겨루는 학력에서도 늘 수위를 다툰다고 들었다. 물론 늘 들어왔던 것처럼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만이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신념이 너무 과도하여 많은 교육문제를 낳고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 많은 문제 중 오늘은 평가를 중심으로 문제점에 접근하고자 한다.     교육은 학생을 중심으로 국가(교육인적자원부)와 학교(교사), 가정(학부모)의 관심과 여러 경제적, 정책적 투여(in put)와 가치관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결과물(out put)이라고 볼 때, 평가는 그 결과물을 가지고 논하는 과정일 것이다. 대상을 가지고 나눈다면 학생평가와 교사평가, 학교평가, 교육부평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학교와 교육부 평가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므로(정부에서) 우선 학생평가, 교사평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면... 우선 교사평가! 요즘의 분위기로 보면 교사는 철밥통이고 평가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교사들도 평가를 받는다. 학교장으로부터 근무평가를 비공개로 받고, 그 평가는 오로지 승진을 위한 것에만 활용되고 있으며, 평가 받는 교사 본인에게도 절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승진을 목표로 한 교사들에게는 교장의 권한이라는 것이 무척 실질적 권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다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발생할 부조리는 예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으로도 문제점이 지적된 근평(근무평정)에 대하여는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현재 교육부에서는 또다시 교사평가를 논하고 있다. 또한 그 방법이 구태의연하다. 한번의 공개수업으로 교사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폐해 또한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말이다. 1년동안 한번의 공개수업을 성공적으로 하여 좋은 평가를 받으면 나머지 교육활동에 대하여는 면죄부를 부여 받는 것인가? 아니면 나머지 교육내용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리고 설사 한번의 공개수업이 중요하다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희생될 나머지 시간과 교육내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평가란 시행후 재생산으로 이어져 피드백되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의 정책이나 교육환경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 교사를 평가하는 방식은 상당히 수치적인 발상이고 교육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위한 평가는 반드시 아이들에게 그 결과가 피드백 되는 방향으로 생각되어져야하고 실제 그것이 교육의 질을 높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학생평가! 일상적으로 학생평가는 교과서에 의해 학습한 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시험보고 채점하고, 평균과 등수를 매겨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7차 교육과정에 의한 평가는 우리가 자랄 때 받았던 평가와는 그 방식이 다르다. 우선 교과서의 내용만 보더라도 만들 때는 다양한 내용을 공통으로 만들지만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재량이다. 순서대로 진도를 나갈 필요도, 끝까지 다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가르치는 교사가 내용을 보고 나누고 합하고 재구성하여 자의적으로 지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가도 수행평가를 하는 것이다. 즉 교사가 투여한 내용을 그때그때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학력저하 운운하며 일제고사나 지필고사를 시 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시행되고 있는 형편이다. 학부모들이나 정부 당국은 일단 교육의 목표가 인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화교육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공부시켜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 학력을 바탕으로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줄세우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자연히 그 줄에서 뒤쳐지거나 이탈한 학생은 도태되고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 중심적이고 서열화된 수치의 평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국가경쟁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줄세우기식으로 평가하지 않아도 국가 경쟁력은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타고난 본성과 잠재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줄세우기식의 평가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어려서부터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소속된 단체속에서 일등이었으면하는 바램으로 미리 가르치고 미리 투여한다. 지켜보거나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지필평가를 요구하는 학부모의 바램도 그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필고사를 통해 수치화된 성적을 알아야만 모자라는 부분을 학원에서든 과외를 통해서든 빨리 채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교육 과정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새로운 지식을 접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교육의 과정인데 확인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결과에 대해 학부모들은 참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기르다보면 한없이 기다려야하고, 한걸음 떨어져 지켜보아야하는데, 우리 학부모들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결과물을 빨리 알고 싶은 것이다. 지필고사나 일제고사 방식의 평가는 소수(상위 10%)의 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대부분(90%)의 학생들에게는 좌절감만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은 내 아이는 상위 10%에 들 것으로 생각하고 수치화된 평가를 요구하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전 뉴스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경기가 어려워 살기 힘들었던 지난해에도 학원비 등의 과외비는 10% 정도 상승하여 지출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요즘 서점이나 문구점마다 문제풀이를 위한 문제집이 동이 났다고 한다.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다가 시험이 끝나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지식인가?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다. 단테의 신곡이라는 단순한 줄 잇기식 지식이 아니라 이제 단테를 읽어보고 그 내용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진정한 지식임을... 그리고 교육의 내용은 진정한 지식을 담고 있어야하고, 교육과정은 진정한 지식을 통한 고민과 토론 과정을 거쳐야 하고, 평가는 그 과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하며 반드시 피드백되어야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교육을 결정짓고 관여하는 중요 요소들! 학부모와 교사 그리고 교육부! 이제 조급함을 날려 버리자! 교육은 그렇게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적인 관심과 다양한 투여를 하고 한없이 지켜보고 한없이 기다리자!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30 | 추천: 1
말과 관련된 속담들이 많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말만 잘 하면 어떤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다는 말), 글속에 글 있고 말 속에 말 있다(말과 글은 그 속뜻을 잘 음미해 보아야 한다는 말),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로 온 동네를 다 겪는다(실천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말만으로 해결하려 듦을 이르는 말), 내가 할 말을 사돈이 한다(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남이 대신 해 주어 잘 되었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제가 한 말 때문에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을 항상 조심하라는 뜻),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자기가 먼저 남에게 잘 대해 주어야 남도 자기에게 잘 대해 준다는 말) 등이다.     이런 속담을 통해 말이 가지는 의미를 반추해 본다. 말은 약속이다. 말은 속내의 표현이다.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의 일상생활이요, 사회생활이며, 국가간 외교이다. 말이 갖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말은 행동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불문의 율이 있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이래저래 문제가 심각하다. 아빠가 아무리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한들 아이들로서는 함께 생활하며 뒷바라지는 하는 엄마만큼 아빠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다. 아이들은 바쁜 아빠를 보며 함께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로부터 아빠가 하는 말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곤 한다. 말이 가지는 막강한 규정력을 느끼면 느낄 수록 말의 사용에 있어 특히 심리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고 싶다. 부부싸움의 많은 것이 말에서 시작하여 말에 의해 상처받고 말에 의해 조정된다. 상대방이 툭 던지는 말에 의해 가슴깊은 상처를 안고 지내는 사람들은 상대의 말과 행동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번지며 결국 상대방의 성격까지 걸고 넘어진다. 이 세상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루어가는 가장 중요한 행동이 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쓰임새가 있다. 관료사회에서는 서열이 잡혀있고 아래에서 위에 말하는 분위기가 직접화법보다는 에둘러 유화시켜 나가는 간접화법이 횡행한다. 자기의 솔직한 말을 표현하기 힘든 곳이고 말할 자유가 억제당하는 곳이다. 재판관은 관료체질에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재판을 하다보면 피고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재판관을 상대로 그 재판장의 재판지휘에 심히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못내 법정을 존중한다는, 피고인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입에 발린 그럴싸한 간들거리는 변들을 쏟아낼 때마다 스스로 패기없고 주눅든 모습에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다. 시국사건 재판에서 실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정당성을 강력히 피력하다 재판관의 눈 밖에라도 날까봐 조심조심 우회로를 따라 적당히 정당성을 주장하며 사상이라도 검증될 시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으로 그 좁은 우회로를 간접화법을 따라 스쳐스쳐 겨우 빠져나올 때마다 재판과 재판관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곤 한다. 한총련 학생들에 대한 재판에서 으레 나오는 질문은 미국은 제국주의냐,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냐, 남한 정부는 사대정권이냐는 식의 사상검증식 질문이고 여기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 학생의 양형이 결정되는 형국이다. 미리 간접화법에 대한 주의라도 주지 않으면 속없는 학생은 그 재판이 무엇을 심판하는지 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무 생각없이 예라고 대답하면 참으로 냉혹하고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 기다린다. 피를 말리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직접화법이 살아남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본다. 간접화법은 인간에 대한 예의,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직접화법이 불러올 상대방에 대한 경멸과 조롱, 적대적 감정의 표현,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포용, 설득, 인내심의 부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으면 한다. 그런 자리에 간접화법이 들어서 인간사회를 부단히 인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언중유골이라고 뼈있는 말들이 오가는 정치, 외교의 현장에서 말의 의미를 새겨본다.     언행불일치는 비단 가정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와 외교에 있어 말이 가지는 규정력은 대단하다. 정치와 외교에서 책임있는 지위나 나라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말은 바로 국내외의 중요한 정책을 표현하는 의미를 가진다. 말로써 이루어지는 정치, 외교라해도 될 듯 싶다. 독도와 관련된 대통령의 서신이 파문을 던졌다. 대통령의 말이 외교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는가도 싶더니 의례 그 말의 해석을 둘러싼 언론의 앞서감을 나무라는 또 다른 말이 선보이곤 한다. 그래도 이번에 독도 관련 대통령의 발언은 언행일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 신뢰가 지지율의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친미적 자주, 자주국방의 용어는 웬지 의심스럽다. 언행불일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전지휘권이 외국에 있는 나라에서 자주국방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차적으로 고민해야 할까 반문하고 싶다. 그러나 패권질서가 자리잡은 힘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굴절된 의식은 언행불일치의 현실을 합리화하고 공고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래서인지 이라크 전쟁은 침략전쟁일지는 몰라도 그에 참가하여 파병하는 것이 번듯한 말잔치로 도배질되어도 친미사대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는 쥐죽은 듯 조용한 이슈로 소멸되어간다. 세계의 패권을 쥐락펴락하는 나라의 국무장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전쟁과 평화를 오가며 우리 민족의 숨통을 조였다 폈다 하는 현실이다.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지다보니 많이 무감각해지고 있는 현실이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일국의 국무장관의 입에서 나온 폭정의 전초기지와 주권국가의 말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북한에 대한 표현으로서 주권국가는 그 나라의 국무장관의 입에서는 나온 최초의 발언으로서 그녀의 말대로 심사숙고 끝에 한 말이니 이제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북한을 공격할 의사는 없다고 재삼 약속하므로 빨리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길이라는 얼뜨기 사대꾼들의 번드레한 말이 여론을 도배한다. 우습다.     왜냐면 바로 얼마 전 인준청문회에서 한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은 주권국가라는 말 한마디로 취소나 된 듯 호들갑을 떠니 말이다. 조금만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북을 공격할 의사는 없다라는 말이 가지는 패권적, 호전적 의미를 무섭게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감히 다른 나라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나라가 그 나라 외에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주권국가라는 말 한마디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의 변경 가능성을 거론하며 6자회담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고 지레짐작하여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기 전에 지체없이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 북한에 이롭다 하는 것은 진지한 조언자, 충고자로 비치기 보다는 미국의 새로운 압력에 가세하는 형국이다. 분명 폭정의 전초기지로서는 붕괴의 대상이지만 주권국가로서 인정될 때는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진지하게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만큼 대화에 빨리 나오라고 하나 대화에서 주권국가로서 인정하는 실내용을 갖추고 협상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어 다시는 주권국가가 폭정의 전초기지로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고 선제공격의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어찌되었든간에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독도의 주권을 수호하는 대통령의 직접화법에서 우리는 주권국가의 힘을 느껴보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오는 현실적 외교의 모습에서 참으로 답답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 가슴시리곤 한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간접화법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상전이 존재한다. 미국에 대한 북한의 성명이 벼랑끝에 몰린 죽음을 각오한 자들의 절박한 저항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세계최강대국에 맞서 할 말은 하고 사는 우리들의 반쪽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오늘도 뇌리를 맴돈다. 폭정의 전초기지와 주권국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미국의 직접화법은 북을 적대국가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위해 북한 주민의 해방을 위해 체제를 붕괴하고 선제공격도 감행할 수 있는 그런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권국가라는 발언은 북한을 일정하게 달래는 신중한 고려 속에 나온 간접화법이다. 주권국가라는 발언의 해석을 둘러싸고 이는 미국이 북한과 수교까지 고려한 관계개선의 의지를 보인 것이고 체제붕괴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선언이고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므로 북한이 더 이상 지체없이 6자회담의 대화의 문으로 나와야 할 마지막 기회라고 몰아세워 본들. 과연 그런가. 남해에 들어온 핵잠수함과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대규모로 방어훈련으로 포장되어 진행되는 그런 마당에 주권국가라는 그 말을 신뢰하며 대화에 나설 수 있을까. 더 이상 말과 행동의 괴리에서 벗어나 우월적 여론을 등에 업고 자신의 외교전략, 패권전략을 동원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미국의 고도의 외교전, 심리전이 통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세계가 깨어있다. 북미간의 가는 말과 오는 말이 평화적 공전의 정신 아래 화해롭게 진행되어 불신을 씻기를 바란다. 공정한 협상 분위기 속에 합의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약속이 동시에 제대로 이행되어 한반도와 동북아에도 평화정착의 훈풍이 불어오기를 고대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절박한 전쟁의 위험에서 영원히 벗어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평화적 생존의 희망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1 | 추천: 1
우리는 ‘비정규직’이란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는 언론보도를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으로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다. 그들 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상적인 시민으로 취급받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이런 일자리를 얻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설령 이해하거나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들이 겪게 되는 좌절감을 어떤 것도 보상해 줄 수는 없다. 정부는 비정규직을 시장체제하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정부는 기업들이 중국 등 해외로 이전하는 상황에서 이상만을 쫓아 비정규직을 보호할 수는 없다고 한다.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정도 보호하는 것도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언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즈음 같은 상황에서 기업에게 뭘 더 요구한다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거나 뭘 모르는 얘기를 하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외국의 근로자들이 월 10만원의 급여를 받으면서 일하는 것에 비하면 한국의 비정규직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받는다는 식의 계산을 해 보기도 한다. 이런 돈을 들이면서까지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만 해도 애국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정부와 언론은 ‘시장(市場)’에 기대어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시장이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리가 시장경제질서를 택하고 있다고 하여 시장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정당화하거나 배척하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일까? 시장의 흐름에 거스르는 것은 부당하거나 공허한 주장에 불과한 것일까? 정부나 언론이 간과한 것은 시장경제질서란 민주주의 토대 위에서만 건강하게 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란 건강한 시민의 참여와 투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일부 기업이나 언론기관들은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선 선거의 결과를 자신의 뜻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그들은 “사업을 잘 하기 위해서” 혹은 “경제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용서해 달라고 한다. 그들은 그 행동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을 지켜야 할 때만 민주주의를 떠올릴 따름이었다. 민주주의가 어떤 희생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애써 외면하였다. 극단적으로 얘기할 때, 민주주의라는 영역에 들어오면, 그들의 권리는 없다.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건강한 시민이다. 그들은 사회의 일반적인 관습이나 윤리, 질서를 이해하고, 사회의 현안에 대한 공론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이다. 물론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전체와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는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시민은 자신의 힘으로 일하고 그 대가로서 생활한다. 그리고 하루 중 일부는 가족과 지내며 동네나 회사 근처의 술집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정치에 관한 토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생활을 통하여 그들은 사회 전제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시민들이 참여한 선거를 통해서만 그 민주적 정통성을 얻을 수 있다. 시민의 참여 없는 정부, 왜곡된 여론이나 힘에 의하여 형성된 정부는 정통성을 상실한다. 지금의 정부는 공공연히 참여정부라는 얘기를 떠들고 있다. 그런데 ‘참여’란 것은 개별 시민이 기계적으로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업이나 언론기관의 임원들이 정부의 각료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시민이 제도 운영에 참여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시민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바라봐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의 참여가 민주적 정부의 유일한 정통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현실적으로 이러한 시민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종사하는 사업장에서 소외되어 있고, 자신들이 행하는 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비정규직은 설령 자신이 그 일을 좋아 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종사하는 기업의 발전에 기여하였더라도 아무런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처지의 비정규직들에게 전체 사회의 공론 형성에 참여하라거나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고민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처사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근로자들 중 절반을 건강한 시민으로 육성할 수 있느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 혹은 정부가 비정규직을 존엄성을 가진 주체로서 대우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시장(市場)’만을 이유로 비정규직 문제를 논의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이란 것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참여하여 운용되는 것인 이상, 그것은 민주주의제도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가 건강하지 않으면, 그 시장도 건강해 질 수 없다. 그런데 건강한 민주주의란 건강한 시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국민들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우받고 그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 때에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성장할 수 있다. 비정규직들이 자신들이 존엄하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앞날은 어두울 뿐이다. 정부는 시장을 핑계로 자신의 임무를 방기해서는 아니된다. 정부는 경제를 정상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기반인 민주주의를 유지·발전시켜야 할 의무이다. 민주주의가 없는 시장이라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학교 법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4 | 추천: 1
나는 전교조 세대라고 한다.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나를 가르치고 나를 일깨워 주고 나를 알게 하여 준 선생님들이 무수히 해직됐다. 전교조가 결성되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학년의 친구들 중 일부는 교육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며 대자보를 붙이고, 농성을 하기도 하고, 신문을 만들어 돌리기도 했다.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처지에 눈물짓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바로잡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에 절규했다. 그때 난 온순한 양처럼 열심히 공부만 했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복직된 선생님이 돌아와 교단에 섰다. 함께 했던 선생님들은 여전히 복직되지 않은 채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선생님은 우리에게 예전처럼 같은 내용의 과목을 가르치기 위해 돌아왔다. 온순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말썽부리지 않는 나인데, 돌아오신 그 선생님께 대들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그냥 들이댔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이 굴었던 것 같다. 철없이 굴어 마음 아프게 했고, 마음 아프게 해서 지금 마음 아프다. 내가 변호사 생활을 시작할 무렵 같은 사무실의 선배 변호사로부터 소개받은 사건이 하나 있다. 교원징계재심청구사건이 그것이다. 내용인즉슨, 전교조 선생님들이 사학재단의 비리에 항의하다가 징계파면을 당했고, 그 징계처분이 부당하다고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 다시 판단하여 달라는 청구를 한 것이다. 사학비리라는 것을 처음 접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재심청구를 통해 학교로 돌아온 선생님들과 사학재단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생각해보니 그 재단의 분쟁도 이제 곧 5년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징계를 통해 학교에서 내쫒고, 다시 돌아오고, 재단에서 고소해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고, 학부모들이 손해를 배상하라고 소송을 하고, 다시 징계를 하고, 또 고소하고, 재판받고, 같은 동료 선생님이 손해를 배상하라고 소송을 하고, 또 소송을 하고……. 아무리 분해도, 그래도 선생님들인데, 선생님들이 참아야 하고 지저분한 일에 발 담그지 마시라고 조언해온 게 4년째다. 그런데 이제 앞이 보이질 않는다. 언제쯤 끝날 것인지 알 수 없다. 끝날 때까지 선생님들에게 참고만 있으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 와중에 참 많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사립학교다 보니 공립학교에 비해 다른 학교로 전근 갈 일이 별로 없어 선생님들끼리 참 친하단다. 아마도 재단의 비리가 없었다면 선생님들끼리는 참 좋은 동료로 오래 오래 같이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가끔 맘에 들지 않아도 서로 갈등하고, 질시하고, 증오하지는 않았을 거다. 어려서 밥 먹여주고 같이 놀아주던 동료 선생님의 딸아이에게 평소 하던 대로 말하고 행동한 것이 범죄가 되어 인신을 옭아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텐데, 이제는 그렇다.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힘든 일상이 그 선생님들에게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사립학교법을 두고 말들이 많다. 연일 계속 터지는 사학비리와 그로 인한 학사파행을 막기 위해 사립학교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여야 한다는 입장과 정치권력에 의하여 통제되던 사학을 사립의 본질에 맞게 사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쪽으로 개정하여야지 현재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립학교법을 개악하려는 것이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원래 학습권과 교육권이라는 것은 종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데서 비롯된 자유와 권리이다. 그리고 종교의 간섭을 어느 정도 넘어선 시점에서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그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종교의 권위에 대항하여 사립학교를 건립하여 교육을 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찾던 것이 근대 들어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의 국가주의적, 파시즘적 교육을 배제하고 누구든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향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발하는 교육에 관한 자유와 권리를 찾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는 교육의 자유와 권리 신장에 있어서 사립학교가 갖는 중요성이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립학교법 개정에 관한 논의를 지켜보면서, 연일 불거져 나오는 사학비리 소식을 접하면서,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는 측의 입장을 이해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특히 교육의 자유와 권리의 주체가 교육의 자유와 권리를 어떤 방식으로 보장받아야 하고, 그를 위해 어떤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적어도 한번은 고민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들의 주장 안에 학생은 없다. 학생들의 학습권을 어떤 식으로 온전히 보장할 것인지, 그를 위해서 교육의 담당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넘어 애당초 교육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관념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대구의 한 사학재단에서 분쟁이 발생했다는 말을 들었다. 온갖 회유와 협박과 폭력이 난무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답답했다. 누가되었든 적어도 5년은 멍들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5년이지 그 동안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힘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되도록이면 조용히, 되도록이면 온건하게, 되도록이면 당하기만 하면서, 되도록이면 말을 아끼면서 분쟁을 해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럴 것 같으면 분쟁은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니까.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다시 복직하셨던 선생님에게 대들었던 내 모습이 참으로 많이 후회된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그 분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치기어린 행동으로 다시 가슴을 후빈 내 모습이 참 후회스럽다. 왜 그 선생님이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었는지 요즘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든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7 | 추천: 1
밤에 서울 하늘을 날아본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네온 십자가를 보았을 것이다. 예전에 일본 신부님 한 분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 모습을 보고 한국 교회의 유례없는 성장을 꽤나 부러워하며 기독교가 한국 사회 속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물론 부끄러워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근래에는 신자 한 분이 요즘처럼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 적이 없다며 한탄하는데 별다른 대답도 못하고 같이 안타까워하기만 한 적이 있다.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종교계 내분이나 종교인들의 치부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연이어 접하게 되는 충격적인 소식들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아들이 운영하는 스포츠신문의 자금 지원문제에 대한 의혹과 관련하여 투명성을 요구하자 많은 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분한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이명박 서울시장의 어이없는 발언, 김선일 씨의 죽음을 두고 “그가 기독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한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의 망언, “동남아시아 지진해일은 이교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했다는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망언 등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것이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부산의 어느 사찰 경영권을 두고 벌이는 불교인들의 이전투구가 그러하고, 제약회사의 리베이트 수십억 원을 횡령한 사건으로 고발당한 지방 한 가톨릭병원의 비리 역시 같은 문제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남다르긴 하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어 축복까지 해주었던 저들이 근래에는 연합단체를 만들어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면서 극우세력의 나팔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급기야는 평화를 외쳐야 할 저들이 이 땅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자고 괴성을 지르기까지에 이르렀다.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하여야 할 본분을 저버리고, 불의에 분연히 항거하여 억눌린 이들을 도와야 할 현실을 외면한 채 기득권 수호에 앞장서는 교회들은 곧 무너질 바벨탑임이 분명하다. 그 휘황한 십자가라도 내려두면 좋겠다. 종교 간에 대립과 반목이 여전하고 구원의 주체가 신이 아니라 마치 종교 구성원들의 차지인 양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만 더해가는 것이 현실이지만, 사실은 고등종교 대부분이 이웃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그 본질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갖고 있다. 그들이 이웃과 세상에 대해 관심 갖는 근저에는 각 종교의 영성과 철학이 자리하고 있고 그것은 사회운동이나 복지와 구별되는 고유한 자기 원칙과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기독교의 ‘사랑’이고 불교의 ‘자비’일 것이다. 그 사랑과 자비가 무의미한 구호가 아니라 진정 자기 철학의 소중한 한 부분이라면 세속의 노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실천으로 증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비인간화의 혼탁한 시대에 종교인들의 책무가 더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7대 종단으로 구성된 ‘한국종교인평화회의’가 발표한 ‘남아시아재난 극복을 위한 범종교적 지원방안 마련을 위한 공동결의’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지진해일 참사’에 대한 각 종단의 해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피해지역의 사회 현실과 종교적 상황을 존중, 종교 및 문화적 갈등을 야기치 않도록 노력하기로 했다”는 결의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자연생태계 보전을 위해 목숨을 건 지율 스님의 단식을 보며,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됐든 새삼 “이 시대에 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게 되었다. 종교와 종교인은 언제 어디서나 성속을 불문하고 희망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미 정리된 진부한 주제이지만 아직도 현실에서는 그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신학적 주제로서의 교회론과 역사적 현실태로서의 교회가 보여주는 괴리이다. 신학적으로 교회는 건물이나 공간, 종교예식을 위한 물건들의 존재여부 보다 신앙을 삶의 근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와 모임이며, 그 신앙내용을 증언하고 재현하는 종말론적이고 대안적인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실 교회에서 종말론적인 긴장이나 대안적인 모습을 발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본질을 망각하고 자기 존재 유지만을 추구하면서 세속화 되어 온 것이 기독교 역사이다. 물론 끊임없이 이를 견제하고 처음 모습의 회복을 주창한 개혁세력들도 있었다. 어찌 기독교뿐일까.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종교의 변화과정은 본질과 현상의 모순을 극복해 보려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론조사 결과 삶이 팍팍해질수록 종교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고 한다. 삶에 지친 민중들이 아직은 종교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증거이다. 종교가 세상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한 노력도 필요할 테지만 그것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종교와 종교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과 구별할 수는 없다. 21세기의 새 패러다임인 생명과 평화라는 도도한 큰 길 위에서 모든 종교인들이 초심으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대원 위원은 현재 성공회 서울교구 신부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7 | 추천: 1
거기에도 비가 내렸니? 얼음장 밑 송사리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연분홍 꽃물 같은 화사한 얼굴로 새 봄소식 전해 주는 단비 말야.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의 철모르는 잔설들도 녹여 파릇파릇 봄동 돋게 할 내내 희망 같은 봄비 말이지. 따뜻한 우물이 있는 동네라고 했지? 온정리(溫井里), 조선 최고의 물 좋은 온천이 있고 그 봉우리 다 헤아릴 수도 없이,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또 삼일포며 장전항…. 얼마나 그 풍광이 차고 넘치면 이름도 해금강이라 했겠니?   곳곳을 둘러쌓은 마을 경계 철조망을 넘어 온정리, 네가 사는 마을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으니 너는 참 좋겠다"는 말을 입가에 맴돌리다가 혼잣말로도 내어놓지 못하고 이내 삼켜버렸던 것은 아마도 내가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보다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고, 실체도 보이지 않는 분단의 흔적을 지나 통일의 밭을 일구는 농부의 마음으로 왔음에도 여전히 낯선 모습들 때문이었을 거야. 남 측 통일전망대를 거쳐 장전항, 그리고 온정리로 들어가는 그 길을 나는 방문 일정이 잡히고 난 그 뒤로 참 많이 상상했었단다. 동해선 연결도로는 잘 뚫렸을까, 그 길도 쪽빛바다를 오른쪽으로 두고 달리는 시원한 길일 테지. 북 측 군인아저씨들의 복장이나 표정들은 어떨까. 사정이 너무 어렵다고들 하는데 혹 왈칵 눈물이라도 흘리면 어쩌나 등등…. 나는 이번 북 측 방문이 처음이지만 예전에 일본의 민족학교에는 가본 적이 있었단다. 도쿠야마(德山)라는 곳의 조선학교였는데 교문에서부터 강당 운동장에까지 나부끼는 현수막의 내용만으로도 내가 북 측의 어느 학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지만 수업 중간이었음에도 전교생이 다 나와서 간단하나마 환영행사로 맞아주는걸 보고 생소하지만 무척 감사했던 적이 있지. 그때 그 젊은 교장선생님과 80, 90년대 남 측의 청년학생운동에 대해 당돌한(?)어조로 묻던 여선생님의 따뜻한 인상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단다. 그때는 변변히 분단된 나라의 남 측에서 온 손님으로써 멋진 인사말 한번 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혹 이번에 너희들 앞에서 내가 인사를 해야 하진 않을까 하는 헛생각에 피식 웃기도 했지. 온정중학교 앞에서 썰매놀이를 하던 네가 내게 손을 흔들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잠깐 본 너의 모습이지만 그 또래만이 할 수 있는 활기찬 표정과 웃음이 너무 고마웠다. 이미 녹슬어 보이지도 않는 낡은 군사 분계선 푯말을 지나 겹겹이 쌓인 철조망과 병사들의 위험스러워 보이는 총구를 피해 들어간 호기심 많은 남측 이방인에게는 무척 호사스런 선물이었지.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을 호호 불어가며 썰매질에 열심인 너를 보며 가슴이 아릿했단다. 깨진 유리창을 헌 비닐이나 널빤지로 대신한 너의 학교나 나무 한그루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 그럼에도 어디서 구했는지 마른 나뭇가지를 한 지게 짊어지고 가는 늙은 농부의 힘겨운 발걸음도 역시 그랬고…. 쌀과 곡식이 있으나 그것을 조리할 불이 없어서 애를 먹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을 때만 해도 사실 설마했었다. 추운 날씨에도 장갑과 마땅한 의복도 없이 온기 없는 방에서 한겨울을 나야한다는 얘기도 잘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일행이 싣고 간 연탄 5만 장의 소중함보다는 내머리 속엔 잡히지도 않는 민족·통일·화해 따위의 단어만 떠올렸나보다. 진작에 제대로 씻을 수 없어 부르튼 너의 차가운 손을 생각해야 했다. 진작에 온기 하나 없는 한 밤을 떨며 뒤척일 너의 몸을 껴안는 네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어렵사리 싣고 간 연탄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어서 고맙다. 지금까지 35만 장이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남녘 동포들의 소박한 온정을 인정해줘서 고맙고 꼭 필요할 때 전해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말도 해줘서 고맙다. 전하는 이들의 조심스런 마음을 당당하게 받는 너희 동네 아저씨의 넉넉한 웃음도 고맙다. 온정리에서 고성 읍내까지 그 먼 길을 자전거로 우마차로, 도보로 촘촘하게 채우며 생의 근거를 찾아다니는 너희 마을 사람들의 활기도 참 고맙다. 남 측에 다시 돌아와 생각해보면 네게 미안한 일이 참 많았구나. 마을 회관 간판이나 단고기집 혹은 유아원의 아이들을 담고 싶어 처음 간 집 곳간 문 열어보듯 카메라를 아무데나 들이댔던 일이나 너의 해맑은 웃음보다는 너의 남루한 옷차림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내가 참 부끄럽다. 먼저 금강산에 관광을 갔던 사람들은 철조망으로 둘러진 경계 때문에 마을 구경을 할 수 없었다고 불평을 하지만 그 철조망이 오히려 네가 맘껏 뛰어놀던 금강산이라는 천혜의 놀이터를 빼앗아 버린 것 같아서 참 미안하다. 훗날 통일이 되고 나도 백발이 성성했을 때 고향이 금강산 온정리인 청년을 만난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지금쯤 또다시 따스한 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마른 들판의 언 땅을 갈라 새순이 돋으면 우리 그 새싹의 희망을 믿으며 통일의 그날을 약속했으면 좋겠다. 네가 내게 보여준 그 짧은 시간의 웃음이 봄날 진달래 북녘으로 오르듯 가을날 단풍 남녘으로 내리듯 하여 이 땅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로 곱게 스며들었으면 좋겠다. 다시 살아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남녘의 얼치기 통일꾼인 한 아저씨가. (이 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기고된 글로 1월말 금강산 밑 온정리 마을에 연탄을 배달하러 간 뒤의 소회를 정리한 글입니다. 약 5만장(대형 트럭 8대분)의 연탄을 온정 중학교 앞에 내려놓고 왔습니다. 통일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는데 보탬이 될까 싶어 나눕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 및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1 | 추천: 1
이번 설 연휴에 가족들과 함께 기억에 오래 남을 좋은 영화를 보았다. 정윤철 감독, 조승우, 김미숙 주연의 <말아톤>. 동네 극장 맨 앞자리에 앉아 스크린을 올려다 보느라고 목이 아팠지만, 영화를 보면서 많이 웃고, 글썽이는 눈물을 간신히 추스르기도 했다. 자폐증인 ‘윤초원’의 엄마는 아들이 달리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엄마와 아들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훈련을 한다. 하지만 마라톤 코치와의 갈등 속에서, 엄마는 문득 깨닫게 된다. 내 아들이 병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명백한 장애를 가지고 있고,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른 상태라는 사실을 그동안 자신이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영화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화두는 (자폐증)장애인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폐증 아들을 기르는 엄마에게 가장 큰 충격은, 내 아들이 결코 정상인이 아니고 장애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정상이라고 믿고 싶었을 때는 지나치게 힘든 훈련을 요구했지만, 아들이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는 마라톤 같은 힘든 일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아들은 달리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가던 그에게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은 경험이었다. 아들을 위해 큰 희생을 해 온 엄마는 어느새 아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고, 아들이 엄마 품을 벗어나 세상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폐증 아들을 가장 사랑하는 엄마도 아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불안정하다. 어쩌면, 직접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월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기가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몫은 ‘함께 살아가기’ 사회는 장애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그들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보아야 하나, 아니면 우리와 다름 없는 존재로 보아야 하나. 초등학교 통합교육 시책에 따라 자폐증 장애아들과 같은 교실에서 생활하게 될 내 아이들에게, 그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가르쳐 주어야 할까.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고, 사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몫은 ‘판단’이나 ‘바라보기’가 아니고 ‘함께 살아가기’이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그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함께 살아가야하고, 사회는 그들이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제도, 기반 시설 등을 마련해야 한다. 그들이 상대적으로 소수이므로 사회에 경제적인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뿌리칠 수 없는 ‘우리’의 일부이므로 그런 부담은 우리 자신을 위해 꼭 필요하다. 한국은 지금까지 그 부담을 거의 가족에게 전담시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 소득 2만 달러를 바라보는 한국은 우리 안의 소외된 우리를 돌보는 데 그 경제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나는 해보지 못한 경험이지만, 내 아이들이 학교에서 장애아 친구들과 해맑은 웃음을 함께 웃는 모습은, 내 꿈 중의 하나이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2-18 | hrights | 조회: 74 | 추천: 0
지난 연말 담뱃값이 1갑당 500원씩 올랐다. 빈부노소를 비롯하여 수많은 애연가를 거느리고 있는 담배가 무려 25퍼센트나 오른 것이다. 2500원짜리 담배는 하루 한 갑 피우는 사람이면 한 달에 7만5천원, 하루 두 갑 피우는 사람에겐 15만원의 경제적부담을 지운다. 여유있는 사람에겐 별 문제 아닐지 모르겠으나 가난한 서민에겐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담배값 인상은 속칭 ‘골초’를 포함하여 많은 애연가를 거느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큰 저항없이 단행되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모진 결의를 하는 사람들이 그 전에 담뱃값이 인상될 때에 비해 많이 생겨났다. 물론 어려운 경제상황을 반영하는 세태이겠지만... 요즈음 그런 모진 결심을 했던 주위 사람들이 하나 둘 다시 담배를 피기 시작하고 있다. 선진국에 비하면 그래도 담뱃값이 싼 편이라는 상황논리와 보건환경 개선이라는 명분에 등떠밀려 별로 큰소리로 저항도 못해보고 많은 애연가들은 울며겨자먹기로 현실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 목소리 한 번 변변히 못내보고 현실을 수용하되 차마 담배는 끊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겠지만 힘든 노동을 하다가 간간이 쉬어야 할 때가 있다. 군대에서 고된 훈련을 받다가 달콤한 ‘10분간 휴식’을 누리듯이. 그럴때 아주 유용한 것이 ‘담배’라는 기호품이다. 한참 바쁘게 일하다가 갑자기 일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쉬는 것은 ‘눈치’보이는 일이다. 주머니에서 담배라도 하나 빼어물고 불을 붙여 담배연기를 빨고 내뿜는 시간이야말로 눈치보이지 않고 고단한 몸을 잠시 쉬게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 것이다. 물론 담배 안 피는 사람도 그 순간은 옆에서 잠시 쪼그려 앉아 함께 쉴 수 있다. 이처럼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담배는 단지 기호품으로서만이 아니라 고된 육체노동의 와중에 잠시 쉴 틈을 제공하는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는 ‘필수품’이다. 그런데 이런 소중한 담배를 값의 인상때문에 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이런 건설현장노동자들은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더라도 담배를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디 건설노동자만이겠는가. 작가에게 있어서 담배는 창작의 중요한 동반자이다. 대부분의 가난한 작가들에겐 담뱃값 인상은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살이에 더욱 큰 경제적고통을 안겨주는 일이다. 우리나라엔 ‘솔’이라는 담배가 있다. 값이 200원이다. 수년 전 담배인삼공사가 계속 새로운 모델의 출시로 값을 올리면서 가난한 빈곤층을 위해 만든 ‘정책담배’이다. 그 전부터 있어왔던, 한 때는 가장 고급이었던 담배였지만 이제는 도시영세민 또는 농어촌민을 위한 저가담배가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도시에서도 이 ‘솔’을 구입해 피울 수가 있었다. 항상 비치하지는 않았지만(별로 찾는 사람이 없어서) 미리 주문하면 한 보루나 두 보루씩 구할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판매를 중단해 버렸다. 이제는 전량 시골로만 간다는 담배가게 아주머니의 설명을 들었었다. 담배인삼공사(지금은 민영화 되어서 이제는 공사라는 말 대신에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때가 되었지만)에 따르면 ‘솔’은 연간 1천만갑을 생산하고 있고 이는 전체 생산량의 0.2%수준이란다. 담배의 종류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생색을 내는 수준의 생산량이다. 이런 저가 담배를 더 많이 생산하여 도시영세민도 큰 경제적부담 없이 끽연권을 보장받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담배인삼공사는 정부(복지부)의 정책을 시행을 할 뿐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게다가 담배인삼공사는 민영회사인데 손해보는 담배를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답을 들었다. 글쎄, 민영회사이기는 해도 영화산업의 스크린쿼터제 같은 정책이 개입될 여지는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도시영세민의 삶이 농어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여 결코 낫다고 할 수 없을 터, 도시영세민을 위해 저가담배를 많이 만들어 공급한다면 5천원 이상의 고급담배가 나와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약간의 여유있는 사람들로부터의 판매수익금을 그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한 제품생산 여력으로 삼으면 사회는 보다 공평해지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건강상의 이유로, 또는 금연분위기의 확산으로 자연스레 담배를 끊도록 해야지 담배값인상으로 금연을 유도하려 하는 것은 사회적불평등의 확산 밖에 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정부는 저가담배를 보다 많이 만들 수 있도록 정책을 전환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들의 끽연권 보장 및 가계부담 경감에 노력을 기울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2017-02-17 | hrights | 조회: 79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