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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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오항녕(연변대 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3월 이후 지역 건설업체와의 집단교섭 및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던 울산 건설플랜트의 노조의 파업이 71일 만인 5월 27일 노사정 합의를 통해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6월 1일 조합원 투표가 찬성으로 결정나더라도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겨두게 되었다. 주요 쟁점이었던 사측과의 집단교섭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 노조가 이후 합법적인 활동을 약속함으로써 그동안의 파업이 불법적이었음을 시인한 결과가 되었으며 파업과 관련한 민·형사상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합의 주체인 ‘공동협의회’의 성격이 애매하여 합의사항이 이행되지 않더라도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70여일간의 장기파업에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노조가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즈음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던 시민사회가 이들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투쟁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눈 부릅뜨고 합의사항 이행과정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막노동 하는 노가다는 사람도 아니랍니까?” “저희는 더 이상 남편들이 모멸감 속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는 꿈을 꾸며 올라 왔습니다.” 지난 5월 23일 오전 아주머니 몇 분이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풀어 놓으셨다. 농성 중이거나 구속된 울산 플랜트노조 노동자 가족들이 직접 남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모진 꼴을 겪은 뒤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목이 메어 안타까움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이미 새로운 천 년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고 전쟁과 착취의 20세기 닮은꼴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지만, 민주화를 이루었다며 그 성과물들을 자랑해대는 이 대명천지에 80년대에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노동조건과 기업의 행태에 분노를 진정하기 힘들었고 뒤늦게야 남편들의 작업환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 거리에 나선 부인들의 마음이 읽혀져 괴로웠다. ‘정직원 외 출입금지’ 라는 간판이 달린 식당이나 휴게실, 화장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니 가족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겠지만 현장에서 겪었을 모멸감을 20-30년씩 어떻게든 참아가며 일해야만 했을 노동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법이 있잖아요. 약한 자를 위해서 있는게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게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하루였어요.” 농담처럼 내뱉곤 하던 말이었는데, 허가를 받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집회에서 연행되었다가 나온 한 아주머니가 이야기 끝에 남긴 이 이 한마디가 너무도 절절하게 들렸다. 가족들은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정부에 있음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근로기준법의 노동보호제도와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 제도를 무력화시켜 버리는 다단계 하도급 체계를 개선할 것과, 화장실과 식당 그리고 휴게실 설치가 요구의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전체 72개 하청업체 중 41개 업체가 교섭 대표단까지 꾸렸다가 돌변하여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검찰과 경찰은 파업 돌입 5일만에 노조 지도부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며 발빠르게 과잉진압에 나섰으며, 언론까지 가세하여 노조의 폭력성만을 일방적으로 부각하여 보도하는 등 마치 기업과 공권력과 언론이 사전모의라도 한 듯 삼위일체가 되어 대응하는데 어찌 정부가 이에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인가. 이미 대표적인 비리부패산업으로 알려져 있는 건설 분야에 어떻게든 그들 모두가 깊이 유착되어 있고, 노조로 인해 그 비리구조가 드러나고 끊어져 나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막노동이라는 단어는 “닥치는 대로 하는 육체노동, 막일, 대수롭지 않은 허드렛일”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라면 울산 건설플랜트 현장의 노동자들은 절대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닥치는 대로 하는 성격의 일도 아닐뿐더러 대수롭지 않은 허드렛일은 더구나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결단이 필요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역군들이다. 행동과 성질이 거칠고 불량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노가다’가 아니라 이 사회와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을 막노동이라 부르던 허드렛일이라 부르던, 그들을 노가다라고 부르던 노동자라 부르던 그들이 주인이다. 부디 울산 건설플랜트 노조의 노동자들이 누군가의 도움으로가 아니라 스스로가 주인임을 깨닫고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앞으로 상황이 어찌 진행되던 안주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 바란다.   김대원 위원은 현재 성공회 서울교구 신부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90 | 추천: 1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이스라엘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테러다 뭐다 해서 얼핏 위험하고 시끄러운 곳이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인류 역사와 그 역사에 필수불가결하다시피 뒤따르는 분쟁의 축소판이란 생각에, 거기에다 뭔가 재미있는 게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구미가 동했다. 대부분의 여행, 특히 고향땅을 벗어나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방문한 나라의 좋은 면만을 보는 게 일반적이다. 비싼 돈까지 들여 큰 맘 먹고 나서는 길이니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게 여행은 언제부터인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많은 삶, 그리고 그 속에 놓인 아픔마저도 함께 하고픈 마음을 잠시나마 풀어놓고 오는 장으로 자리해오고 있다. 그것은 아마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껏 줄기차게 생각해오고 있는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연민이나 안타까움 같은 게 내면 깊숙이 놓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국적기를 이용하는 바람에 이집트를 거쳐 가야하는 여정이 좀 번거로운 면도 없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도착한 날부터 이집트에서는 수십 년만에 일어났다는 데모 소식을 들을 수 있어 색다른(?) 체험이었다. 1981년 집권과 동시에 비상계엄을 실시하며 이집트를 철권 통치해온 무바라크 대통령이 나라 안팎의 반대 여론에 밀려 올 2월 26일 직선제 개헌안을 내놓은 이후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데모는 우리가 머물던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민들에게마저도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그들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야권과 시민단체 등이 벌이고 있는 무바라크 퇴진 운동은 ‘키파야(‘충분하다’는 뜻의 아랍어) 운동’이라 불리는데 독재도 충분하고, 24년간의 대통령직 재위도 충분하고, 무바라크가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정치 조작도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뼈아픈 독재를 체험해야 했던 시절이 떠올라 어떻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치밀기도 했지만 어찌하랴 잠시 스쳐가는 3자인 것을…. 이스라엘 땅에 첫발을 들여놓던 때는 무척이나 긴장된 순간이었다. 가방에 넣어갔던 ‘팩소주’ 때문에-아마 그들의 입장에선 액체폭발물이 아닐까 염려할 만도 하다-몇 시간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잡혀 있어야 했다는 선배의 경험담이 뇌리에서 생생히 살아난데다 이스라엘 보안요원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도 인상이 하나같이 딱딱해 원래 웃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세계지도를 펴놓으면 간신히 점 하나 차지하는 나라, 전라남북도를 합친 크기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인류의 역사에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내 생각은 온통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질문은 인류와 인류의 존재양식에 관심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숙제로 연결됨을 알게 됐다.   거리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군인들. 처음엔 늘 전시상황이니 그런가보다 했는데 군인들의 얼굴이 아무래도 어려 보여 알아보니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국민이면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을 의무적으로 군에서 복무해야 한다는 설명에 가슴 한 곳이 무거워졌다. ‘저들이 총을 들기에 충분히 이성적일까?’라는 생각보다는 ‘저들이 왜 비슷한 또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살상하는 일로 내몰려야 할까’ 하는 생각에 슬픔이 몰려왔다. 세계 3대 종교의 성지답게 인간의 종교 혼으로 이뤄진 듯한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은 저마다의 신을 가슴에 품은 순례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성경을 알면 믿음을 알고, 이스라엘을 알면 세계사를 안다’는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예루살렘은 순례객들로 하여금 지금껏 자신이 지녀온 뭔가를 확인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을 심어주었다. 통곡의 벽(Western Wall), 게쎄마니 동산, 최후의 만찬, 올리브산, 십자가의 길 등 무수히 많은 말들이 역사와 얽히는 땅을 돌아보는 가운데 숨이 턱 막히는 체험을 했으니 그 곳이 바로 분리장벽 건설이 한창인 베들레헴이었다. 2년 전 이스라엘이 “자살폭탄 테러범들의 침입을 차단한다”는 명분 아래 쌓기 시작한 이 8미터짜리 장벽으로 예루살렘시 경계에 걸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분리장벽에 포위된 모양새였다. 또 팔레스타인 자치도시인 베들레헴 안에 있는 유대교 성지 라헬의 무덤을 시 구역과 분리해 이스라엘 쪽에 포함시킴으로써 흡사 벌레 먹은 사과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순례자의 눈을 잠시 떠나자 자신들만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수많은 이들을 감옥 아닌 감옥에 가두려는 인간의 노력이, 하늘에 오르려 바벨탑을 쌓던 그토록 지혜롭던(?) 인류의 조상들에 겹쳐 떠오르며 가슴까지 먹먹해지는 아픔이 밀려왔다. 인류를 분열시키고 전쟁으로 몰아갔던 게 그 알량하고 얄팍한 지식 때문이 아니었던가. 예수가 묻혔다는 ‘거룩한 무덤성전’. 지금도 가톨릭을 비롯해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교회, 에디오피아 정교회 등 수많은 종파가 갈가리 찢어 소유하고 있는 성전은 인류가 그토록 갈구하는 평화와 사랑이 지상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며 저마다의 평화만을 평화로 강요하는 현생 인류의 모자람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이 이 오명을 벗고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 속에 살기 위해선 그 자신들만의 힘만으로는 힘들다는 게 순례 속에서 건진 결론이었다. 그들에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돌아보게 하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착한 사마리아인’이 필요하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5 | 추천: 1
이중국적자들이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한국 국적을 버리는 것을 제한하는 국적법 개정안이 지난 4일 국회를 통과했다. 6월초부터 개정법이 시행되면, 병역 의무를 다하기 전에는 한국 국적을 자유롭게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개정법 시행 전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매일 백여 명씩 국적 포기를 신청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병역 의무를 피하기 위해 국적 포기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까지는 이중 국적을 가진 남성이 모든 면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살다가, 17세 이전에만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재외동포’가 되면 병역 의무를 회피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추가적인 법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국내 체류기간 한정, 대학 입학 때 재외동포 특례입학과 편입 대상에서 제외, 부동산 취득 제한, 금융거래 제한, 건강보험 적용대상 제외 등을 통해서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버린 사람들이 내국인과 같은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막겠다는 의도이다. 또한 병역 기피를 위한 국적포기자는 차후에도 국적회복을 불허하고. 재외동포법상의 모든 권리와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라고 한다. 뉴스가 전하는 여론은 새로운 국적법 개정안에 찬성하는 쪽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 국민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하는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중국적을 이용하는 계층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속지주의를 채택한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 국적을 얻고, 또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얻은 ‘운좋은’ 어떤 남성이 한국에서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는 한국의 사회적인 혜택을 누리다가, 군대갈 나이가 되어서야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일반 국민들로서는 ‘많이 손해 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상당히 여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혜택만 받고 의무는 짊어지지 않으려는 일부 얌체족에 대한 질타는 당연하다(한국 국적을 가지고 태어나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그들이’ 혜택으로 여기는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한편으로는 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특정한 소수의 사람들을 꼭 집어서 주류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논리를 가지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수많은 재외국민, 동포들이 온 세계에 널리 퍼져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이러한 법이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중국적을 얻게 된 사람들의 처지를 포용할 수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번 국적을 포기하게 되면 다시는 한국 국적을 회복할 수 없고, 재외동포로서의 자격까지 잃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경직된 법적용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런 일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언급된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던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서구에서는 기득권층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가해서 목숨을 잃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 없는 일반 국민들은 훨씬 더 많은 수가 희생을 당했다. 강제징집을 당해서 전쟁에 참여하거나, 군인도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이유도 없이 죽어간 일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사유재산과 그들이 가진 사회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참전한 기득권층의 ‘이유 있는’ 용기를 칭찬하기 보다는, 저항하지 못하고 전쟁 속에서 죽어간 민간인들이 희생되어야 했던 필연성을 따져보아야 하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던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아니라, 전쟁에 대한 반대가 우리의 구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일을 보고 한 원로 소설가는 군대에서 음식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을 먹고, 드럼통에 얼굴을 처박는 혹독한 기합을 받았던 일을 자랑스럽게 추억하면서, ‘그 모두가 사람 되라고 받은 훈육과 기합’이었다고 감격스럽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군대가 이렇게 추억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군복무를 할 수 있을 때, 군대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기꺼이 국방의 의무를 준수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끝으로,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를 몰아내는 좋은 방법은, 이런 저런 수단으로 껍데기를 분간해내서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감으로써, 기득권에 매달려 체면도 없이 이기적인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껍데기를 골라 버리는 방법이다. 우리가 할 일은 껍데기를 골라내는 데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가 스스로 부끄러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94 | 추천: 1
내신등급제로 시끌벅적합니다. 고등학생들이 시험 때문에 자살을 하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급기야 일군의 고등학생들이 시내 한 복판에서 추모 촛불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학부모는 교육부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지금의 입시제도는 학생들에게 입시부담을 1/12로 경감시킨 게 아니라 입시부담을 12배로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았다’며 교육부를 맹성토 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교육부 수장에 어떤 사람이 오건, 제도를 어떻게 고치건 지금의 입시문제가 온전히 해결되기란 어려운 일임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 부처 중에서 없어도 되는 부처로 손꼽히는 데가 ‘교육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학벌사회를 조장하는 사회시스템의 문제임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에 사회가 바뀌지 않는 다음에야 제도를 어찌 고치건 입시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고질적인 문제로 우리 앞에 태산처럼 다가설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살건 못 살건 거의 모든 가정에서 사교육비를 엄청 쏟아 붓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라는 것처럼 기득권 및 시스템을 유지 온존시키는 가장 강력한 매개는 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녀들의 사교육비 지출을 위해 맞벌이는 물론이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짤리지 않고 해야 하며, 허리띠 바짝 졸라매 자녀에 대한 교육투자를 해야 합니다. 저축이니 내 집 마련이니 하는 것들은 후순위로 밀려야 하지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나 선생을 통해 주입된 일류대 만능의 이데올로기에 그냥 젖어들어 그 황금기를 온통 공부에 찌들어 지냅니다. 좋아하는 운동을 즐기거나 다양한 독서를 통해 세상의 이치에 대한 생각을 해볼 겨를이나 폭넓은 교양을 쌓을 여유도 갖지 못하고 그저 취직의 관문인 대학에 잘 들어가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인이 되기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 어떤 때보다 진취적이고 패기와 용기로, 끊임없는 도전의식과 의문부호로 똘똘 뭉쳐있어야 할 나이에 너무 일찍 박제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상태로 자란 아이들에게서 한 사회를 질적으로 한 단계 성숙시킬 만한 상상력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등골이 휘어져라 교육비를 퍼붓고 맹자 어머니 저리가라 할 정도로 10년 이상 온 신경을 곤두세워 자식 교육문제에 골몰해 보아도 서울에 있는 명문대는커녕 전국에 있는 유수의 4년제 대학에 보내는 것조차 하늘의 별따기인 실정입니다.   결국 사회에서 출세가 보장된다고 일컬어지는 몇몇 주요 ‘관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은 강남 분당권을 비롯한, 이미 어느 정도 선택된 가정의 아이들이 주축을 이루고 강북권 등의 아이들은 졸업해도 취업 여부는 전혀 보장이 안 되는 ‘기타대’들에 가게 되거나 아예 대학 진학의 꿈도 못 이루게 되지요. 물론 그 과정에서 반이 넘는 아이들은 이미 교육과정에서 철저히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구요. 부의 대물림이 교육이라는 수단으로 이제 고착화된 것 같습니다.       확률 상 뻔히 보이는 결과인데도 로또대박의 꿈을 움켜쥐고자 하는 부나비처럼 많은 사람이 이런 흐름에 그저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꼭 이렇게 밖에는 할 수 없는 걸까요? 물론 아이에게 성적 때문에 상처받게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사교육 현장으로 내몰게 되거나 또는 아이들이 스스로 학원에 등록해 공부하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그 길 밖에는 없는 건지요. 과외나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절대빈곤 하에 놓인 아이들은 물론이려니와 웬만큼의 투자로는 어림도 없을 일인데도 올인을 하다시피 하여 아이들의 미래를 꿈꾸는 서민들에게 교육을 통한 계급의 변화가 과연 용이한 일일까요. 차라리 그 꿈을 다른 각도로 가지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고 당장, 또는 내일의 행복을 담지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아이의 미래가 반드시 지금의 학업에만 달려있지 않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비현실적인 발상 같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믿음’을 갖고 도도히 흐르는 흐름에서 벗어나 잠깐 둑 위로 올라앉아 보다 넓은, 자유로운 길을 개척할 여지는 없을까요? 학창시절에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게 한다면 더욱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랄 터이고 그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무슨 일이든 도전해 볼만 하지 않을까요? 아 물론 학벌이 필요치 않은 분야에서이겠지만요. 학벌 없이도 사회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또 일정하게 나름의 영역에서 성취해 내는 사람이 늘어나야 학벌사회가 서서히 무너지고 결국 고질적인 입시문제도 서서히 해결되어 나가리라 생각됩니다.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기 어려운 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부터 실천해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6 | 추천: 1
이만큼 민주화 되었다는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민주화의 현 주소가 여기까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동안 위법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 유가족 단체들과 시민단체들은 입을 모아서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법을 제정하라고 수십 년 동안 목을 놓아 외쳐왔다.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합의를 자축하며 이번 임시국회 회기인 5월 3일에 과거청산법을 처리하였고, 시민단체 등은 과거사청산법을 차라리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해괴한 일인가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고, 과거청산을 바래왔던 수많은 국민들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는 사이 입법안은 아름다운 합의와 타협, 상생이라는 꼬리표를 자랑스럽게 달고 악법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4년 7월 3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대통령보고, 같은 해 8월 15일 대통령의 강력한 포괄적인 과거청산 의지 표명, 같은 해 12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과거청산 입법안에 대한 행정자치위원회의 공청회까지만 하여도 이제 비로소 해방 이후 단 한번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제 식민지 강점하의 친일 행위, 6∙25 한국동란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 이승만 독재부터 지속된 군부 독재정권 치하에서 자행된 온갖 인권 유린과 국가 폭력의 해묵은 숙제를 풀고 화해를 위한 조치를 밟아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논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희망을 가졌다. 그런데 그런 바람은 부질없는 것이었고, 국민이 개혁을 위하여 뽑아준 열린우리당은 국민의 여망을 짓밟고 “과거청산법”이 아닌 “역사왜곡∙은폐법”을, “국민화해법”이 아닌 “국민정쟁법”, “민주인사탄압법”, “신국가보안법”을 한나라당과 손잡고 만들었고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니 기가 막히고, 망연자실할 뿐이다. 통과된 법안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적대시하는 세력들에 의한 폭력과 인권유린, 테러, 학살, 의문사’ 등을 조사 범위로 정하고 있다.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일개 조항에 불과하지만, 들여다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독소 조항이고, 악의가 꿈틀대고 있다. 과거 어두운 독재정권 치하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민주화 운동 내지 통일운동을 하였던 모든 진보 세력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덫에 걸려 어김없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자로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이 땅에 이만한 정도의 민주화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민주화 운동 세력들을 다시 재조사하겠다는 것은 바로 민주인사를 탄압하겠다는 것과 동의어이며, 고문 등으로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밝히겠다는 국가 폭력의 진실규명에도 물 타기를 시도하겠다는 의지이며, 종국에는 조·중·동 등의 보수 신문과 손을 잡고,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켜, 해방 전후의 좌우 대립과 같은 국면을 조성하여 과거청산 자체를 무력화 시키려는 세력들의 음흉한 칼날이 숨어 있는 무서운 조항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부산동의대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1975년 4월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리자 가족들이 법원 앞길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가 현실화 할 경우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법의 취지는 전혀 달성하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극심한 국론 분열과 대립만을 초래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청산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과거청산의 주체로 나서 칼을 휘두르는 꼴이니 어떻게 이법을 악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이 법은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서 예컨대, KAL기 폭파사건, 인혁당 사건,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건 등등은 아예 조사조차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으니 과거의 진실을 은폐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정작 조사해야 할 사건은 조사할 수도 없고, 이미 수없이 법을 악용하여 무차별적으로 처벌받아온 민주 인사는 조사를 하겠다는 적반하장도 유분수가 아닌 법이 아닌가. 더욱이 위원회의 구성을 여당과 야당이 나눠 먹기식으로 구성하고 있으니 각자의 정파를 대변하는 자들이 과거청산 기구의 주체로 들어와 정쟁만을 일삼을 것이고, 그 경우 진실 규명은 딴전이 되고, 독립성과 공정성, 중립성을 잃은 인사들에 의한 진실규명의 결과 또한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시민단체와 국민들도 받아들이지 않아 끊임없는 분쟁만 초래할 것이다. 1975년 4월9일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게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내리자 가족들이 법원 앞길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과거청산의 대상이 될 대다수의 사건들은 조작, 고문 등의 의혹이 수없이 제기되어왔고, 작게는 십여 년 멀게는 백 년 전의 사건까지 포함되어 충분한 조사 권한이 확보되어도 진실규명이 어려운 사건들인데도 아무런 조사 권한도 없는 껍데기 권한으로 어떻게 진실을 규명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나의 이런 우려가 결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랬지만 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이 같은 우려가 곧 현실화 될 것으로 확신한다. 과거청산법의 악법 독소조항이 위력을 발휘하는 비극적인 현실이 된다면 이 법을 제정한자들 역시 과거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고, 법률 또한 청산이 될 것이다. 피 묻은 역사의 숨결에 귀 기울이고 반성하라. 이제 껍데기는 제발 물러가라.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80 | 추천: 1
새학기가 시작되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특수학급의 학생들이 입학을 하게 된다. 학생들은 담임교사와 함께 하루를 보내던 초등학교 때와 달리 학급에서 독립적으로 생활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학교에 입학할 때 지체부자유가 심한 학생은 특수학교로 지원을 하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발달장애(영화에서 소개된 말아톤의 주인공이 가진 장애), 경증의 자폐증, 정신지체, 학습장애(정서장애) 등의 경증의 장애를 가진 학생은 일반학교에 입학을 해서 통합교육을 받고 있다.     통합교육이란 장애를 가진 학생과 비장애 학생들이 함께 생활하고 배움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편견 없이 상호 협조하여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자 하는 교육환경을 의미한다. 외국의 대부분의 장애 아동들도 이같은 통합교육의 틀 속에서 장애를 최소화하기 위한 특수교육을 병행하고 있기도 한데,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통합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통합교육의 가장 큰 미덕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장애아동이 장애아동과 함께 어린시절부터 함께 학습하고 생활할 기회가 제공될 경우 장애아동과 비장애 아동 모두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에게 매우 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배형진씨  ⓒ 한겨레신문   하지만 학교에서의 현실은 이와 다르게 통합교육의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중학교에는 학교의 학급수에 따라 한두 개 반 정도의 특수학급(개별학습이라고도 함)과 한두 명의 특수교사들이 교육을 한다. 장애학생들은 일반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국어, 수학, 영어시간에는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따라서 장애학생들의 원만한 학교생활을 위해서는 비장애학생들의 충분한 이해와 배려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다. 입시교육이 강조되는 학교교육에서 일반학생들 또한 성적과 입시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이로 인해 학생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생활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다. 좁은 교실에서 40여 명의 학생들이 생활을 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조그마한 피해가 오더라도 참지 못한다. 이 경우 신체적인 장애(두통, 복통, 갑작스러운 경련 등)가 나타나고, 심하면 상대방에게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장애학생에 대해서도 이해와 배려보다는 장애학생들도 자신들과 동등하게 대할 것을 교사들에게 요구하는가 하면, 심지어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장애학생들에게 화풀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장애학생들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발달장애와 약간의 자폐증상을 가진 문식과 철수가 일반학생에게 매일 붙들려 가서 돈을 빼앗기고, 하교 길에 앵벌이를 강요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심지어 이들은 문식이와 철수의 옷을 벗겨 포르노사이트의 행위를 흉내내도록 하면서 그 장면을 즐기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철수가 학교 가기를 거부하면서 어렵게 어머니에게 사실을 이야기 했고, 같은 증상의 장애인인 철수어머니는 학교에 와서 이 사실을 알렸다.(종종 장애 학생 부모 또한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문식과 철수를 괴롭힌 가해학생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지만, 일용 노동일을 하는 아버지와 둘이서 살면서 방과 후에는 늘 PC방을 드나들던 학생이었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내용으로 문식이와 철수를 늘 괴롭히면서 교사들과 학급의 학생들에게는 돌봐 주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미처 예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학생들을 보살피고 올바르고 지도해야 하는 것이 교사들의 역할이지만, 학급학생 스스로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주며 생활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고 효과적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생들은 장애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색해 한다. 도움을 주는 방법을 모르기도 하지만, 인터넷매체의 영향으로 혼자만의 놀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들이 아름답게 어울리는 모습을 기대하기에는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80 | 추천: 1
고등학교 때, 나는 정기적으로 서랍 검사를 당했다. 아버지가 주도하고 어머니가 거들었다. 덕분에 창간호 때부터 모아둔 몇 달 치 한겨레신문과 각종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히기도 했다.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겨레신문을 ‘소장’하겠다는 욕구를 버리고, 가판에서 사서 읽은 뒤 학교 교실에서 여러 친구들과 돌려 읽었다. (그 시절, 대구에서 고등학생들끼리 한겨레신문을 돌려 보는 것은 ‘지하 유인물’을 읽는 경험과 비슷한 것이었다) 돈을 내고 사서 읽은 책은 다른 친구 집에 (녀석에겐 검열관을 자처할 아버지가 없었다) 맡겨 뒀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딱 하나 있었다. 시 습작 노트였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혼자 끄적거린 잡문 묶음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기억과 감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해도, 그걸 들여다볼 ‘특권’을 허락할 순 없었다. 거의 일주일마다 그 노트를 숨길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머리가 아픈 건 사실 두 번째 문제고, 이걸 누군가 읽어봤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참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시 습작은 대학교 졸업 학기를 끝으로 결말을 내렸고, 신문사 입사 이후엔 단 한번도 이 노트에 ‘신작’을 보태지 않았지만, 이 잡문 묶음은 지금도 내 보물 1호다. 그것은 일기를 대체했던 ‘월기’이자,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청(소)년 시절을 더듬을 유일한 자취다. 초등학교의 일기 검사가 초등학생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국가인권위의 판단을 둘러싼 논란을 보고, 나는 참 의아했다. 일기의 교육적 효과 운운하는 사람들은 어린시절, 거의 예외 없이 겪었을 일기의 ‘폐해’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렸음에 틀림없다. 의무에 불과한 일기 쓰기 때문에 한 달 전 날씨까지 기억해 내야 했던 일은, 어떤 이유를  더해도 그저 불필요하고 허접한 노동력 낭비다. 그런 일기는 글쓰기 능력 배양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과의 대화’다. 이는 단단하게 내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을 전제로 한다. (검사라 불리는) ‘검열’을 의식한 성찰이란, 아예 성립불가능한 말이다. 글을 잘 쓴다는 건, 나 자신과 어떻게 대화하는 지를 이해한다는 의미다. 교사 또는 부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 시선에 맞춰 나를 포장하는 기술을 익힌 사람은 결코 ‘글’을 쓸 수 없다. 학교 숙제로서의 일기를 열심히 쓴 학생 가운데 훗날 본격적인 문필가가 된 경우가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한 통계적 수치를 제시할 순 없지만, ‘경험적’으로 보자면 일기와 글쓰기는 결코 ‘길항’의 관계가 아니다. 검열에 익숙해진 세계관으로 ‘창조’를 도모할 수는 없다. 혹시 탈선이나 비행의 ‘조짐’을 일기를 통해 파악하려는 욕구가 ‘교육적 효과’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우선 어른들이 걱정하는 종류의 탈선과 비행을 (이런 단어 자체가 얼마나 ‘어른 중심적’인 말인가) 꼬박꼬박 일기장에 적을 만큼, 순진한 학생은 많지 않다. (학교 과제로서의) 일기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충실하거나, (내밀한 개인기록으로서의) 일기를 쓸 정도로 자기와의 대화에 목마른 학생들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일탈’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교육적 수단을 고려하자면, 그저 일기를 쓰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구분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일기 쓰기를 '적극 권장‘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신과의 대화를 통한 성찰에 도움이 된다는 ’교육적 효과‘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 한겨레신문  사실 일탈의 조짐을 발견해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의도 자체가 철저하게 ‘범죄수사’의 관점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바라보는 행위다. 이런 방식이라면 차라리 거짓말 탐지기를 신체검사 때마다 학교에 들여와 정기적인 ‘바른 생활 점검’을 시도할 일이다. 그런 지경이 되면, 일기 쓰기는 이제 글쓰기와 성찰을 빙자한 국어, 도덕 교육이 아니라, 검열관 앞에서 적어 내려가는 ‘자술서’라는 본질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의 정상화를 조금이라도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결국 이런 교육적 효과에 대한 기대는 결국 다른 교육 수단을 통해 도모되는 게 옳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글쓰기 능력을 길러주려면, 책읽기와 독후감 등 ‘공식화’된 작문 수업의 활성화가 더 바람직하다. 청소년기의 일탈행동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손쉬운 자술서 검열 대신 어렵고 힘들지만 가장 효과적인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게 좋다. 이렇게 ‘교육’이라는 기름을 다 빼고 난 다음에서야, 일기는 제 자리를 찾는다. 자신과의 대화.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만의 기록. 그 안에 둥지를 틀고 나의 ‘자존’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인권운동의 출발이 스스로의 인권을 자각하는 일에 있다면, 인권교육의 강화는 ‘누구의 검열도 의식하지 않는 성찰적 대화로서의 일기 쓰기’를 권장하는 일에 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내 서랍을 뒤지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 스스로 시를 쓰기 시작하셨다. 얼마 전에는 지방의 한 문학잡지에 ‘등단’까지 하셨다.  ‘운동권 아들’ 때문에 속을 태우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히 자신과 대화하는 ‘성찰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신 듯 하다. 여기에 혹시 아들의 은밀한 기록을 들쳐본 경험이 긍정적 영향을 줬다면, 더 바랄 게 없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들어 부쩍 ‘비밀’이 많아진 7살짜리 딸에게 내 ‘잡문 묶음’을 보여줄까 말까 고민 중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너만의 세상을 일궈가라는 격려와 독려가 될 수 있을 듯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는 세상에서, 인권은 그 본래적 가치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다. 시 쓰는 할아버지는 시 쓰는 손녀의 습작노트를 뒤져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시 쓰는 일을 서로 대견하고 존경스럽게 여길 뿐이다. 일기 쓰기는 그렇게 자존을 향한 성찰,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인권의식의 품으로 온전히 돌려보내야 마땅하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8 | 추천: 1
여의도 성모병원의 718, 719호실은 특별한 사람들이 입원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 광산노동자들이 진폐증을 치료받는 자리입니다. 전국적으로 5, 6만 여명의 진폐환자들이 있고, 입원 환자만 3천 여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은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관심사에서 본의 아니게 밀려났습니다.     산재보험의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의료수가가 낮고 장기간에 걸친 입원 치료가 필요하기에 병원의 수익성이 떨어지고 의료인력의 확충이 어려운 난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의도성모병원은 1963년부터 40여 년 동안 묵묵히 이런 환자들을 정성껏 치료해 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6개의 진폐요양기관이 있지만, 여의도 성모병원이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서 최상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병원입니다. 현재 진폐환자들의 연령이 고령(70세 이상)인 데다가 진폐는 치료가 불가능한 불치병이기에 시간이 흐르면 그 끝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환자와 가족들은 마지막까지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어쩌면 찌푸리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이들의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그러기에 여의도 성모병원의 진폐병동 유지는 병원의 수익성 유무를 넘어선 진정한 사회봉사요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삶에 위로가 되셨던 그리스도의 ‘약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참모습입니다. 지금은 사양산업이지만, 60-80년대에 우리는 땅속 깊은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광부들의 노고 덕분에 따스함을 입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줄 알면서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많은 이들 덕분에 우리는 생활의 윤택함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힘든 불치병을 얻은 5, 6만 여명의 환자들은 인간생활의 윤택함을 누리지 못하고 병고와 싸우고 있습니다. 문제는 진폐가 환자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병의 치료를 위해 가정의 전 재산이 쓰여졌고, 따로 간병인을 쓸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아내가 환자인 남편 곁에서 24시간 간호하고 있기에 경제적 활동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생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여분도 없는 막다른 가정도 상당수 있습니다. 비록 배운 것이 많지 않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식구 잘 먹이고 잘 입히려고 온 몸을 굴속에 던져 열심히 땀방울을 흘렸건만, 남은 것은 병든 몸뚱이요 너무도 오랜 시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정신적, 경제적 고달픔을 안겨주고 있으니,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도 끈질기게 붙어 있는 생명 줄이 환자들에게는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더욱이 시간의 흐름과 효율적인 기계문명의 발전 속에서 이들의 피맺힌 절규와 아픔도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탄광막장체험을 하고 있는 사진  천주교회는 병원사목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사목위원회를 통해 80년대부터 이들을 위한 사목을 시작하였습니다. 진폐환자들과 진폐로 숨진 이들의 가족을 위해 보상금을 마련해 주었고, 현재는 담당 신부와 상담전문 수녀의 파견과 자원봉사자들을 양성하여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으며, 광산노조 및 그 가족들과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환자들의 보다 질적인 치료와 인권보호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과 경기지역에 산재해 있는 재가진폐환자가정을 방문하여 그분들이 처한 다양한 어려운 현실 안에서 당면한 구체적인 도움의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외로움에 지치고 육체적인 고달픔에 지친 환자와 보호자들의 대화상대가 되어주며, 경제적 궁핍이 심한 가정에는 매월 일정액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에 필요한 재정 확보를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후원회원을 모집하여 함께 봉사하고자 하는 선의의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제로서 첫째는 지속적으로 상담 자원봉사자들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자원봉사활동으로 말미암아 환자들이 탄광에서의 체험과 폐광이후의 삶의 과정을 나누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서로의 아픔을 알아주고 이해하며 위로의 장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으며, 환자들에게 힘을 주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둘째는 선의의 의료진을 확보하여 재가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재가진폐환자란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진폐환자로서 진폐로 인해 장해등급은 받았으나 진폐법이 인정하고 있는 요건에 해당되지 않아서 입원이 안 되는 환자입니다. 그래서 휴업급여와 요양치료에서도 제외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위한 자원의료봉사자들의 확보와 가정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가족과 함께 환자의 간병을 도와 줄 자원 간병인 봉사자들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셋째는 진폐환자의 치료와 요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병원들이 수익성의 저하를 이유로 진폐병동을 폐쇄하는 일이 없도록 정부기관에 보다 적극적인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것과 이들이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넷째는 경제적 지원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궁핍이라는 이중의 삶의 무게를 힘겹게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더불어 사는 사회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많은 후원자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는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할 수 있는 영신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직자,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합니다.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진폐환자를 간호하고 계시는 세실리아 수녀님  매년 ‘노동자의 날’을 맞이하면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어려움과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지만, 안타까운 것은 몇몇 단체의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지만 묵묵히 가난한 진폐환자들을 위해 애쓰고 있는 여의도성모병원 관계자와 의사분들, 여러 요양원에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많은 이들의 노고를 보며 감사함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도 같은 일이지만, 그 노고에 누구도 찬사를 보내는 이 없지만, 환자와 가족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수많은 작은 노동자들의 수고를 잊지 말고, 이 약한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항상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새로운 산업의 분위기 속에서 다시는 이런 산업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업관계자의 의식전환이 이루어지고 노동자들의 희망도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81 | 추천: 1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높기로 이름이 나 있다. 그래서 이만큼(?)의 경제성장도 이루었고 각국의 어린이들이 겨루는 학력에서도 늘 수위를 다툰다고 들었다. 물론 늘 들어왔던 것처럼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는 교육만이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신념이 너무 과도하여 많은 교육문제를 낳고 있다고 판단되는데 그 많은 문제 중 오늘은 평가를 중심으로 문제점에 접근하고자 한다.     교육은 학생을 중심으로 국가(교육인적자원부)와 학교(교사), 가정(학부모)의 관심과 여러 경제적, 정책적 투여(in put)와 가치관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결과물(out put)이라고 볼 때, 평가는 그 결과물을 가지고 논하는 과정일 것이다. 대상을 가지고 나눈다면 학생평가와 교사평가, 학교평가, 교육부평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학교와 교육부 평가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므로(정부에서) 우선 학생평가, 교사평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면... 우선 교사평가! 요즘의 분위기로 보면 교사는 철밥통이고 평가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교사들도 평가를 받는다. 학교장으로부터 근무평가를 비공개로 받고, 그 평가는 오로지 승진을 위한 것에만 활용되고 있으며, 평가 받는 교사 본인에게도 절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승진을 목표로 한 교사들에게는 교장의 권한이라는 것이 무척 실질적 권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다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발생할 부조리는 예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으로도 문제점이 지적된 근평(근무평정)에 대하여는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현재 교육부에서는 또다시 교사평가를 논하고 있다. 또한 그 방법이 구태의연하다. 한번의 공개수업으로 교사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폐해 또한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말이다. 1년동안 한번의 공개수업을 성공적으로 하여 좋은 평가를 받으면 나머지 교육활동에 대하여는 면죄부를 부여 받는 것인가? 아니면 나머지 교육내용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리고 설사 한번의 공개수업이 중요하다하더라도 그것을 위해 희생될 나머지 시간과 교육내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평가란 시행후 재생산으로 이어져 피드백되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의 정책이나 교육환경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 교사를 평가하는 방식은 상당히 수치적인 발상이고 교육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위한 평가는 반드시 아이들에게 그 결과가 피드백 되는 방향으로 생각되어져야하고 실제 그것이 교육의 질을 높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학생평가! 일상적으로 학생평가는 교과서에 의해 학습한 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시험보고 채점하고, 평균과 등수를 매겨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7차 교육과정에 의한 평가는 우리가 자랄 때 받았던 평가와는 그 방식이 다르다. 우선 교과서의 내용만 보더라도 만들 때는 다양한 내용을 공통으로 만들지만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재량이다. 순서대로 진도를 나갈 필요도, 끝까지 다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가르치는 교사가 내용을 보고 나누고 합하고 재구성하여 자의적으로 지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가도 수행평가를 하는 것이다. 즉 교사가 투여한 내용을 그때그때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학력저하 운운하며 일제고사나 지필고사를 시 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시행되고 있는 형편이다. 학부모들이나 정부 당국은 일단 교육의 목표가 인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화교육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든 공부시켜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 학력을 바탕으로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줄세우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자연히 그 줄에서 뒤쳐지거나 이탈한 학생은 도태되고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결과 중심적이고 서열화된 수치의 평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국가경쟁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줄세우기식으로 평가하지 않아도 국가 경쟁력은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타고난 본성과 잠재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그것은 줄세우기식의 평가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어려서부터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소속된 단체속에서 일등이었으면하는 바램으로 미리 가르치고 미리 투여한다. 지켜보거나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지필평가를 요구하는 학부모의 바램도 그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지필고사를 통해 수치화된 성적을 알아야만 모자라는 부분을 학원에서든 과외를 통해서든 빨리 채울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교육 과정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새로운 지식을 접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교육의 과정인데 확인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결과에 대해 학부모들은 참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기르다보면 한없이 기다려야하고, 한걸음 떨어져 지켜보아야하는데, 우리 학부모들은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결과물을 빨리 알고 싶은 것이다. 지필고사나 일제고사 방식의 평가는 소수(상위 10%)의 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대부분(90%)의 학생들에게는 좌절감만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은 내 아이는 상위 10%에 들 것으로 생각하고 수치화된 평가를 요구하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전 뉴스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경기가 어려워 살기 힘들었던 지난해에도 학원비 등의 과외비는 10% 정도 상승하여 지출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요즘 서점이나 문구점마다 문제풀이를 위한 문제집이 동이 났다고 한다.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다가 시험이 끝나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지식인가? 우리는 경험상 알고 있다. 단테의 신곡이라는 단순한 줄 잇기식 지식이 아니라 이제 단테를 읽어보고 그 내용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진정한 지식임을... 그리고 교육의 내용은 진정한 지식을 담고 있어야하고, 교육과정은 진정한 지식을 통한 고민과 토론 과정을 거쳐야 하고, 평가는 그 과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하며 반드시 피드백되어야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교육을 결정짓고 관여하는 중요 요소들! 학부모와 교사 그리고 교육부! 이제 조급함을 날려 버리자! 교육은 그렇게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적인 관심과 다양한 투여를 하고 한없이 지켜보고 한없이 기다리자!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8 | 추천: 1
말과 관련된 속담들이 많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말만 잘 하면 어떤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다는 말), 글속에 글 있고 말 속에 말 있다(말과 글은 그 속뜻을 잘 음미해 보아야 한다는 말),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로 온 동네를 다 겪는다(실천은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말만으로 해결하려 듦을 이르는 말), 내가 할 말을 사돈이 한다(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남이 대신 해 주어 잘 되었다), 혀 아래 도끼 들었다(제가 한 말 때문에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을 항상 조심하라는 뜻),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자기가 먼저 남에게 잘 대해 주어야 남도 자기에게 잘 대해 준다는 말) 등이다.     이런 속담을 통해 말이 가지는 의미를 반추해 본다. 말은 약속이다. 말은 속내의 표현이다.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의 일상생활이요, 사회생활이며, 국가간 외교이다. 말이 갖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말은 행동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불문의 율이 있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이래저래 문제가 심각하다. 아빠가 아무리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한들 아이들로서는 함께 생활하며 뒷바라지는 하는 엄마만큼 아빠의 존재를 느낄 수는 없다. 아이들은 바쁜 아빠를 보며 함께 놀아주지 못하는 아빠로부터 아빠가 하는 말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곤 한다. 말이 가지는 막강한 규정력을 느끼면 느낄 수록 말의 사용에 있어 특히 심리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고 싶다. 부부싸움의 많은 것이 말에서 시작하여 말에 의해 상처받고 말에 의해 조정된다. 상대방이 툭 던지는 말에 의해 가슴깊은 상처를 안고 지내는 사람들은 상대의 말과 행동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번지며 결국 상대방의 성격까지 걸고 넘어진다. 이 세상에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루어가는 가장 중요한 행동이 말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쓰임새가 있다. 관료사회에서는 서열이 잡혀있고 아래에서 위에 말하는 분위기가 직접화법보다는 에둘러 유화시켜 나가는 간접화법이 횡행한다. 자기의 솔직한 말을 표현하기 힘든 곳이고 말할 자유가 억제당하는 곳이다. 재판관은 관료체질에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재판을 하다보면 피고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재판관을 상대로 그 재판장의 재판지휘에 심히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못내 법정을 존중한다는, 피고인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으로 입에 발린 그럴싸한 간들거리는 변들을 쏟아낼 때마다 스스로 패기없고 주눅든 모습에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다. 시국사건 재판에서 실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정당성을 강력히 피력하다 재판관의 눈 밖에라도 날까봐 조심조심 우회로를 따라 적당히 정당성을 주장하며 사상이라도 검증될 시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으로 그 좁은 우회로를 간접화법을 따라 스쳐스쳐 겨우 빠져나올 때마다 재판과 재판관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곤 한다. 한총련 학생들에 대한 재판에서 으레 나오는 질문은 미국은 제국주의냐,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냐, 남한 정부는 사대정권이냐는 식의 사상검증식 질문이고 여기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 학생의 양형이 결정되는 형국이다. 미리 간접화법에 대한 주의라도 주지 않으면 속없는 학생은 그 재판이 무엇을 심판하는지 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무 생각없이 예라고 대답하면 참으로 냉혹하고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 기다린다. 피를 말리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직접화법이 살아남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본다. 간접화법은 인간에 대한 예의, 존중이라는 측면에서 직접화법이 불러올 상대방에 대한 경멸과 조롱, 적대적 감정의 표현,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포용, 설득, 인내심의 부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으면 한다. 그런 자리에 간접화법이 들어서 인간사회를 부단히 인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언중유골이라고 뼈있는 말들이 오가는 정치, 외교의 현장에서 말의 의미를 새겨본다.     언행불일치는 비단 가정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와 외교에 있어 말이 가지는 규정력은 대단하다. 정치와 외교에서 책임있는 지위나 나라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말은 바로 국내외의 중요한 정책을 표현하는 의미를 가진다. 말로써 이루어지는 정치, 외교라해도 될 듯 싶다. 독도와 관련된 대통령의 서신이 파문을 던졌다. 대통령의 말이 외교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는가도 싶더니 의례 그 말의 해석을 둘러싼 언론의 앞서감을 나무라는 또 다른 말이 선보이곤 한다. 그래도 이번에 독도 관련 대통령의 발언은 언행일치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 신뢰가 지지율의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친미적 자주, 자주국방의 용어는 웬지 의심스럽다. 언행불일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전지휘권이 외국에 있는 나라에서 자주국방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차적으로 고민해야 할까 반문하고 싶다. 그러나 패권질서가 자리잡은 힘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굴절된 의식은 언행불일치의 현실을 합리화하고 공고화하는데 기여한다. 그래서인지 이라크 전쟁은 침략전쟁일지는 몰라도 그에 참가하여 파병하는 것이 번듯한 말잔치로 도배질되어도 친미사대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는 쥐죽은 듯 조용한 이슈로 소멸되어간다. 세계의 패권을 쥐락펴락하는 나라의 국무장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가지는 의미는 전쟁과 평화를 오가며 우리 민족의 숨통을 조였다 폈다 하는 현실이다.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지다보니 많이 무감각해지고 있는 현실이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일국의 국무장관의 입에서 나온 폭정의 전초기지와 주권국가의 말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북한에 대한 표현으로서 주권국가는 그 나라의 국무장관의 입에서는 나온 최초의 발언으로서 그녀의 말대로 심사숙고 끝에 한 말이니 이제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북한을 공격할 의사는 없다고 재삼 약속하므로 빨리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 전쟁을 막고 평화를 가져오는 유일한 길이라는 얼뜨기 사대꾼들의 번드레한 말이 여론을 도배한다. 우습다.     왜냐면 바로 얼마 전 인준청문회에서 한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말은 주권국가라는 말 한마디로 취소나 된 듯 호들갑을 떠니 말이다. 조금만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북을 공격할 의사는 없다라는 말이 가지는 패권적, 호전적 의미를 무섭게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감히 다른 나라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나라가 그 나라 외에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주권국가라는 말 한마디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의 변경 가능성을 거론하며 6자회담의 분위기가 성숙되었다고 지레짐작하여 미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기 전에 지체없이 대화에 복귀하는 것이 북한에 이롭다 하는 것은 진지한 조언자, 충고자로 비치기 보다는 미국의 새로운 압력에 가세하는 형국이다. 분명 폭정의 전초기지로서는 붕괴의 대상이지만 주권국가로서 인정될 때는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진지하게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만큼 대화에 빨리 나오라고 하나 대화에서 주권국가로서 인정하는 실내용을 갖추고 협상이 성과적으로 진행되어 다시는 주권국가가 폭정의 전초기지로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고 선제공격의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는 어찌되었든간에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다. 독도의 주권을 수호하는 대통령의 직접화법에서 우리는 주권국가의 힘을 느껴보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오는 현실적 외교의 모습에서 참으로 답답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 가슴시리곤 한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간접화법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상전이 존재한다. 미국에 대한 북한의 성명이 벼랑끝에 몰린 죽음을 각오한 자들의 절박한 저항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세계최강대국에 맞서 할 말은 하고 사는 우리들의 반쪽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오늘도 뇌리를 맴돈다. 폭정의 전초기지와 주권국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미국의 직접화법은 북을 적대국가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위해 북한 주민의 해방을 위해 체제를 붕괴하고 선제공격도 감행할 수 있는 그런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권국가라는 발언은 북한을 일정하게 달래는 신중한 고려 속에 나온 간접화법이다. 주권국가라는 발언의 해석을 둘러싸고 이는 미국이 북한과 수교까지 고려한 관계개선의 의지를 보인 것이고 체제붕괴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선언이고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므로 북한이 더 이상 지체없이 6자회담의 대화의 문으로 나와야 할 마지막 기회라고 몰아세워 본들. 과연 그런가. 남해에 들어온 핵잠수함과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대규모로 방어훈련으로 포장되어 진행되는 그런 마당에 주권국가라는 그 말을 신뢰하며 대화에 나설 수 있을까. 더 이상 말과 행동의 괴리에서 벗어나 우월적 여론을 등에 업고 자신의 외교전략, 패권전략을 동원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미국의 고도의 외교전, 심리전이 통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세계가 깨어있다. 북미간의 가는 말과 오는 말이 평화적 공전의 정신 아래 화해롭게 진행되어 불신을 씻기를 바란다. 공정한 협상 분위기 속에 합의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약속이 동시에 제대로 이행되어 한반도와 동북아에도 평화정착의 훈풍이 불어오기를 고대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절박한 전쟁의 위험에서 영원히 벗어나 평화롭게 살아가는 평화적 생존의 희망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92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