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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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전임연구원, 전임 간사 얼마 전 이사를 했다. 집을 중요한 재산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이사라고 하면 보통 좀 더 넓은 집이거나 좋은 조건으로 옮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사실 이는 왜곡된 이미지일 뿐 대다수의 서민은 오른 임대비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보통이다. 은평구 응암동에 살다가 서대문구 남가좌동으로 이사 온 지 2년 만에 다시 이사를 한 우리 가족 또한 마찬가지 처지다. 이번에 우리를 받아준 곳은 은평구 수색동이다. 일산으로 가는 서울의 마지막 동네다. 응암동에 살 때는 집이 서울시립병원 옆 비탈이었다. 여름에는 땀이 나고, 겨울에는 눈이라도 오면 종종걸음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남가좌동에서는 집은 낡았지만 그나마 조금 덜 비탈진 곳이었다. 그 때 세 살배기인 아이와 함께였던 우리 부부는 그 작은 차이를 위안으로 삼으며 살았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를 한 수색동은 응암동처럼 다시 집 바로 뒤에 등산로가 있는 비탈이다. 이사를 하는 날 이 것 저 것 처리를 하느라 비탈을 몇 차례 오르내렸더니 다리가 뻐근 거렸다. 게으른 탓에 운동을 안 한 이유도 있겠지만, 만만치 않은 경사도도 단단히 한 몫 했을 게다. 뭐 아래보다 공기도 좋고, 좋은 산책로도 있으니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답답한 가슴은 풀리지 않았다. 이번 이사는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살고 있던 남가좌동은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는 곳이다. 도시 재개발도 여러 가지 구분이 있는데, 그 중 계획에 따라 진행될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 ‘뉴타운’ 지역이라고 한다. 남가좌동이 바로 소위 ‘가좌뉴타운’ 지역이다. 2년 전 이사를 들어갈 때부터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당시에는 재개발조합이 설립조차 되지 않은 상태여서 우리 부부는 ‘떡고물’을 바라보고 이사를 감행했다. 이주가 시작되면 세입자에게도 일정한 이주비가 나오는데 그걸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많지는 않은 돈이지만 워낙 가난한 우리 가족에게는 그 떡고물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주택임대차계약 상 2년 계약을 하면서도 집주인에게 가능하면 이주가 시작될 때까지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뒀다. 주인도 그러자고 했다.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재개발조합도 설립되고 1년 안에 이주가 이루어진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런데 계약만료가 다가오자 집주인이 당황스러운 얘기를 꺼냈다. 시골로 내려가 있던 집주인이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라며 집을 비우던지 세를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꿍꿍이 속인지 올려달라는 세도 턱없는 수준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 부부는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떡고물도 떡고물이려니와 현재 가지고 있는 돈으로 과연 다른 곳에 집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집주인과 협상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도 낡은데다 얘기도 붙이기 싫어 그만두기로 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버틴다고 꼭 유리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서울시 2차 뉴타운 사업 12개 지구 중 하나인 가좌뉴타운 지구 제2구역 재개발 공사 착공식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렇게 이사를 결심한 우리 가족을 받아줄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부동산값 하락으로 전세비도 내렸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들의 얘기일 뿐이다. 겨우 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별개의 상황인 것이다. 은행이자가 바닥을 치면서 소액임대차의 경우 전세가 없어지고 월세로 전환을 많이 해 오히려 부담만 높아졌다. 많지 않은 수입에 상대적으로 높은 월세는 서민들의 어깨를 더욱 짓누른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내 발품을 팔아 찾은 곳이 이번에 이사한 수색동이다. 한숨은 돌렸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수색동 역시 ‘재건축’이 예정된 곳이다. 계약 때부터 중개업자는 2년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시기상 떡고물도 바라볼 수 없는 집이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깨끗한 집이어서 우리 부부는 각오하기로 했다. 다음 이사에는 아예 서울을 떠나리라는 결심도 했다. 현재 우리 가족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우울한 위안도 들려온다. ‘용산참사’ 이후 정부가 재개발에 대해 보다 합리적인 조정기구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재개발 시장이 주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참사’를 겪고서야 외양간 고치기 바쁜 이 사회가 그저 씁쓸할 뿐이다. 아마 우리 가족과 같은 상황은 대다수의 서민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풍경일 것이다.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안전하고 평화롭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권리’라고 규정한 주거권은 한국에서는 그저 먼 얘기다. 품위는커녕 평화도 찾기 어렵다. 주거가 권리의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개발업자나 부동산 투기꾼들의 돈벌이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보금자리’는 허울이다. 주거에 사람은 없고 돈만 남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가족과 같은 ‘이주인생’들의 한숨은 그치기 어렵다. 용산참사와 같은 상황 또한 반복이 뻔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용산참사에 대해 ‘참사’에만 너무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언론도 그렇고 시민사회의 대응도 MB의 공격적 정책과 경찰의 진압작전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 같다. 물론 이번 참사에 대해 MB와 경찰은 응당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검찰의 면죄부는 책임회피의 방어막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도시 개발과 관련한 이런 일들이 어디 MB정부에서만의 일이던가. 돈이 주거를 장악하고 난 이후로 줄곧 계속되어 왔고 예상되던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더 큰 교훈과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주거에서 돈을 떼어내는 일, 개발의 중심에 인간이 설 수 있도록 하는 논의가 시급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한숨을 먹이삼아 성장하는 도시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도록 말이다. 더구나 ‘삽질’에 목마른 MB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주거에 대한 사고의 근본적인 전환점을 찾는 작업은 절실함 이상이다. 지금 서울 곳곳은 재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계획되어 있다. 그 속에서 한숨을 쉬는 서민들 또한 부지기수다. 근본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 무작정 ‘MB탓’의 함정에서 나오지 못하는 한 우리 가족과 같은 이들은 이제 서울과 작별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도시가 좋다거나 서울을 떠나기 싫다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도시도 서울도 싫다. 그렇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내몰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우리 가족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 또한 개발의 혜택을 누려야 할 인간이기 때문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39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시민단체 활동은 8년차, 민변이라는 법률가단체에서 활동한지 3년차, 요즘 일이 거의 폭탄 수준이다. 정말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지경이다. 단체에서 상근활동을 하면 항상 입버릇처럼 “요즘 너무 바쁘다 ...구시렁구시렁... ”하지만 이 입버릇이 무색해 질 정도로 일의 양과 질이 확연히 다르다. 요즘처럼 일자리가 부족하고 청년실업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시대에 바쁜 것을 불평하면 욕먹을 수도 있지만 솔직히 일을 하면서도 흥이 나기보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버틴다는 생각도 드니 일폭탄이 반갑지만은 않다. 모름지기 결과가 있으면 그 원인이 있는 법! 언제부터 왜 이렇게 바빠졌는지 되짚어 보면, 시작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도 하기 전에 국가인권위를 대통령 직속화한다고 하여 추운 겨울에 노숙을 하며 반대활동을 했던 일이었다. 꽃피는 봄이 오고 계절이 바뀌자 광우병 쇠고기를 수입한다고 해서 전 국민적 저항을 맞아 촛불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였고, 사실 얼씨구나 축제구나 하면서 촛불을 따라 다니다가(이때는 진짜 재미있었다) 경찰들의 무식, 폭력, 불법 3종 세트 진압이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인권침해 감시하러 매일 밤을 광화문과 시청 앞에서 보내게 되었다. 촛불이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자 길가에서 촛불 들던 사람, 유모차 어머님들, 광고 중단 전화를 걸었던 네티즌들을 검찰이 상상 불허 불구속·구속기소, 약식명령을 청구하니, 이 역시도 법률가단체에서 책임져야 하기에 비록 거리의 촛불은 사그라졌지만 검찰의 칼날을 막기 위한 활동들이 이어졌다. 여전히 촛불 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기소, 약식명령, 정식재판 등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번에는 국회 쪽에서 국민들의 표현·집회·언론의 자유를 말살하고, 재벌과 소위 1% 부자들을 위한 법률들을 우르르 발의하고선 이를 통과시키려고 하니 이 또한 꼭 막아야 하는 것들인지라 다시 추운 겨울날 여의도와 사무실을 오가며 기자회견과 집회, 농성을 해야 했다. 다행히 한 해는 넘겼지만 여전히 시한폭탄인 상태가 지속되어, 다시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논객이 덜컥 구속되었고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이에 관련된 활동을 하던 중, 다시 용산에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하여 6명의 인명이 희생되고 이를 위한 진상조사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2월이 되어 국회에서는 다시 무더기 악법들을 통과하려 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청와대 정리하면 중간에 잠깐씩 짬이 있긴 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시작과 함께 일폭탄이 터졌다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바빠지면 바빠질수록 한국의 인권은 더욱 후퇴될 것이 자명하고, 이를 원위치 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이 활동하는 상근자들과 밥을 먹으면서 누군가에게서 “이명박 정부와 우리가 업무협약을 맺은게 아닌가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다른 관련단체들도 다 그러하겠지만 법률가단체인 민변의 측면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진행하고 저지른 대부분의 업무가 직접 연관되어 있고, 그 파괴력이 국민모두의 인권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임을 잘 알기에 긴급히 활동을 해야 하는 것들이다. 말도 안 되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지 그들이 벌여 놓은 일들 정리할 때까지만 조금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비상(非常)이 일상(日常)된 것 같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가졌던 ‘아마도 5년 동안 많이 바빠지겠다.’ 는 막연한 예측이 어떠한 현실이 되었는지 톡톡히 느끼고 있는 요즘, 바쁘다고 투덜댈 수만은 없다. 앞으로도 별로 덜 바빠질 수는 없을 듯하여, 주어진 일폭탄에 맞서기 위해선 개인적 각오도 새롭게 다지면서 일을 좀 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나누어 해야겠다.(이 정부 덕분에 효율적인 일처리 방식을 배우게 되는구나!) 더불어서 같이 활동하는 활동가들과 함께 작은 힘을 키우기 위한 연대도 좀 더 노력하여야겠다. 지금은 비록 조금 밀리지만 그래도 조만간 이명박 정부에 똥침!!과 멋진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도 재미있는 상상이다. 그게 제 2의 촛불이면 더더욱 좋고.
2017-07-11 | hrights | 조회: 214 | 추천: 0
전국완/ 신목중학교 교사 몇 해 전 가르쳤던 한 아이가 생각난다. 수업시간에 늘 ‘딴 짓’을 하고, 심지어 칼 등으로 손장난을 하다가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유혈이 낭자하게 피를 쏟아 온 교실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던 그 아이. 수업에 아무 의욕도 없고, 잠시도 가만히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래서 모든 교과목 선생님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아이였다. 학급당 인원이 48명이나 되는 까닭에 그렇지 않아도 힘든 수업을 더욱 버겁게 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 아이가 내 수업시간(국어)에 ‘도덕 선생님’이란 제목의 시를 썼다. ‘오늘도 수업시간에 딴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도덕선생님이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며 나비의 속삭임처럼 물으셨다. “OO야, 너 무슨 일 있니?” 하고……. 순간 내 몸이 풍선처럼 부웅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얀 갈매기가 나는 저 바다에 도덕선생님과 함께 푸른 하늘이 되고 싶다.’ 나는 이 짧은 시를 읽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늘 수업을 방해하고 힘들게 해서 단골로 야단맞던 그 아이가 이렇게 고운 마음결을 지니고 있었을 줄을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완벽한 시는 아니었지만, 읽는 순간 뭉클한 감동이 전해져 왔다. 때 묻지 않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푸른 하늘이 되고 싶다’는 부분에선 이 아이가 일상 속에서 느꼈을 어려움도 짐작하게 되었다. 시 속의 주인공인 젊은 도덕선생님에게도 이 시를 들려주며 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데에 얼마나 인색했던 지를 아프게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수업 들어가는 모든 반 아이들에게 이 시를 읽어주며 ‘시인의 탄생’을 요란하게 알렸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그 아이는 늘 나의 특별한 시선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그의 ‘딴 짓’에 화가 나지 않았으며, 그 아이도 조금씩 달라지는 게 보였다. 급기야 사회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가끔 복도에서 만나면 너무나 천진한 모습으로 인사해 주는 그 아이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도록 행복했다. 문득 돌아보니 내 삶의 여정에도 ‘나를 알아 준, 내 상처를 알아봐 준’, 참 많은 이들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춘기 시절 잦은 전학으로 친한 친구 하나 없이 어둡고 쓸쓸했던 나를 알아봐 주고 내 삶에 환한 빛을 부어주며 ‘국어선생님’이라는 꿈을 꾸게 해 주신 중 2때 국어선생님, 한동안 난청으로 힘들어했던 나를 위해 1년간 짝꿍을 자청했던 고 3때 친구, 해직시절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 한 우리들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었던 시민단체 여러분들, 그리고 수술 후 복직한 나에게서 ‘우울의 징후’를 감지하고는 의미 있는 강연회니 탁구니 산행이니 하며 쉼 없이 나를 ‘건드려 준’ 동료들……. 그러고 보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그들이었지 싶다. 그렇기에 그들은 내게 ‘타자’가 아니다. 얼마 전 읽은 정화스님의 글이 생각난다. 우리네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이 원래 ‘둘’이 아닌 커다란 ‘하나’이며, 그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조화롭게 관계를 맺으며 지탱해 주고, 성장해 가는 유기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를 ‘타자화’ 하고 ‘대상화’하며, 결국 소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네 삶은 더 이상 소통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를 얻게 되었다. 서로의 처지에 관심도 없고, 아픔을 들여다 봐 줄 생각도 전혀 없는, 그야말로 철저한 ‘타인’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이번 용산 철거민 참사는 이러한 우리네 삶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냉혹한 ‘타자’들에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되었던 그들이 건물 옥상 위에 지어 올린 ‘망루’는 자신들을 ‘철거민’으로 대상화하여 내몬 이 세상을 향한 처절한 절규이며, 생존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그럼에도 못들은 척 외면하다가 급기야는 법을 내세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정말 무섭게 느껴진다. ‘예수불신지옥’이라고? 아니, 이런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이를 무심하게 넘기며 아무렇지 않아하는 ‘타자’들이 숨 쉬는 이 땅이야말로 무시무시한 지옥이지 않을까? 겨울바람이 매섭다. 그래도 아침 운동 길에 본 나무들은 가지마다 꽃봉오리를 매단 채 봄준비가 한창이다. 이 꽃망울이 터질 때 쯤 나는 설렘과 흥분을 안고 새로운 아이들과 또 다시 새 학기를 시작한다. 이들에게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하나의 덩어리임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신음하는 이웃들을 옆에 두고 나만 혼자 행복해질 수는 절대 없음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의 ‘나’는 수많은 삶의 고비마다 ‘내 아픔을 알아 준 또 다른 여러 명의 ‘내’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간증처럼 들려주고 싶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56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대학 시절, 박시형이라는 북한 역사학자가 1979년에 쓴 <발해사>를 읽은 적이 있다. 1989년 서울에서 정식 출간된 그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뭔가를 설명할 때는 언제나 ‘수령님 교시’가 먼저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 ‘교시’라는 것도 대부분 ‘공자 왈 맹자 왈’ 에 다름 아니다. 가령 ‘발해의 문화’를 서술하는 부분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우수한 문화를 향유한 문화민족이었습니다.”고 밝힌 다음 발해의 문화를 설명한다. ‘발해인의 무예’를 설명할 때는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운동을 잘 했습니다.’는 식이다. 우스갯소리로 “옳은 얘기, 맞는 얘기는 수령님이 다 해버렸다.”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시형은 1946년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를 지낸 북한 역사학계의 원로다. 그런 사람은 뭘 설명하건 ‘위대한 수령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는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럼 만약 위대한 수령님이 잘못 말씀하신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령 수령님이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담배를 사랑하는 민족이었습니다.’라고 교시했다면 국민건강을 위한 금연논의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수령님께서 ‘우리 민족의 여성들은 예로부터 현모양처가 많았습니다. 요리도 잘했습니다. 자식농사도 잘 지었습니다.’라고 교시했고 우리가 그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겨야 한다면 양성평등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는 순간 비판정신은 빛을 잃어버린다. 심한 경우 자기 머리로 생각할 필요도 없어진다. 한국에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입만 열면 ‘위대한 수령님’으로 시작하는 북한은 비판거리이거나 조롱거리다. ‘땡전뉴스’까진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수령님 뒤에 숨어 비판정신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당장에 속 편하고 마음 편하니까 누구도 거역하기 힘든 어떤 권위를 만병통치약처럼 휘두르는 건 아닐까. 비판과 토론이 사라지고 ‘위대한 수령님’만 쳐다본 결과는 뭘까. 병자호란 이후 ‘소중화(小中華)’ 의식과 예학(禮學) 중심의 고루하고 보수적인 학문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새로운 학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지적 정체’를 낳았던 조선시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를 지배한 사상조류는 대부분 ‘노론’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다.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경우 “송나라 주자의 말씀은 단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며 심지어 주자학을 비판한 학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711년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 막부의 거물이자 유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에게 “귀국에는 만국전도도 없는가.”라며 면박을 당했다. 일본 학자들이 세계를 배우고 있을 때 통신사 일행은 기껏 청나라도 중화문명의 정통인 조선을 존중한다는 얘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50여년이 지난 1764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의 최신 학술정보 수집에 나서야 할 정도로 학문수준이 역전됐다. 후마 스스무(夫馬進) 교토대 교수에 따르면 “1826년 연행사 일원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신재식이 청나라 학자들과 벌인 논쟁에서 이 조선 선비는 16세기 이후 근래의 학자는 단 한 사람도 거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지난해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미국 발 금융위기 속에서 ‘미국=글로벌 스탠더드’라 확신하는 그 많은 경제학 교수들과 전문가들, 경제 관료들은 제대로 된 설명조차 못하며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위대한 미국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만 되뇌며 규제완화와 금융 중심의 시장만이 살길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정작 미국은 금융위기 이후 규제강화와 금융통제에 나서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미국 발 금융위기를 규제완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거나, 개방을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선진국들은 금융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데 한국 정부만 자본시장통합법이나 금산분리 완화 법제화, 산업은행 민영화를 추진하려 한다. 1997년 외환위기도 ‘오로지’ 우리가 잘못해서 당한 일이고 그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준 ‘글로벌 스탠더드’의 ‘교시’를 따르고 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위대한 수령님 품에 안기는 순간 비판정신은 사라진다. 우리가 ‘글로벌 스탠더드’란 이름으로 미국이라는 위대한 수령님에 의지하는 순간 미국 발 금융위기는 규제완화를 제대로 못해서 생긴 일이 돼 버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수령님 말씀이 아니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라는 비판정신이다. 우리에겐 ‘내 탓이오’가 아니라 ‘따질 건 따지자’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52 | 추천: 0
이은규/ 전 천주교청주교구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 눈이 참 많이 내렸습니다. 오후 내내 내린 눈은 성당 뜰을 가득 채웠습니다. 빗자루로 눈을 쓸었습니다. 지나가는 분이 조언을 하십니다. “다 내린 다음에 치우세요.” “네” 무심하게 대답하고는 잠시 비질을 멈추었습니다. 쓸고 지나 온 길을 돌아보니 새로이 얌전히 내려앉은 눈이 길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잠시 쉬었다 쓸고를 반복하였습니다. “쓸어도 쓸어도 쌓이는 것이 욕망이며 허영이 아니겠는가. 그때그때 살피면서 치우고 쓸어야 인간이라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들어설 새 정부가 무도합니다. 단어만 가지고는 '새정부'라 하니 뭔가 새로운 기운, 좋은 기운의 정부일 듯 한데 영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도하다는 느낌, 그 느낌은 이렇습니다. 허름한 단칸방,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는 방에 흙투성이 작업화를 신고 들어와 험하게 세간살이들을 뒤지고 쪽박을 깨고 이불을 내팽개쳐대는 불한당, 그렇지요 불한당 같이 무도하게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시끄러운 사람들입니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이 그렇고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생각하자니 갈수록 설상가상 일듯해서 제 마음이 번잡스럽습니다.(중략)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다 가지려 하면 반드시 다 잃습니다.” 일 년 전 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에 기고했던 글의 일부입니다. 인수위 때였음에도 싹이 노란 정권인 것 ‘같다는’ 취지의 글이었습니다. 당시 ‘설마’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기에 마음이 번잡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일 년, 무도한 ‘느낌’은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으로 무도한 정부입니다. 삽질의 대가들답게 온 산하를 파헤치려 하고 그것도 모자라 알량한 세치 혀로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날카로운 삽날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분열과 대립, 갈등과 경쟁이 이들의 생존전략입니다. 나는 다만 본 것을 말할 뿐입니다. 나의 숨은 욕망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은 추하고 더럽고 거기에다 두려움 많은 정치권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는 형국입니다. 안 되면 남 탓, 잘 되면 내 탓이라는 도둑놈 심보로 가득 찬 진짜 도둑놈 세상입니다. 도둑놈을 보고 도둑놈이라 부르지 못하는 세상,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돈과 권력의 노예로 살라 합니다. 나는 다만 본 것을 말할 뿐입니다. 나의 숨은 욕망이 이와 같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8일 오전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첫번째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그렇습니다. 다 가지려고 합니다. 도무지 만족할 줄 모릅니다. 나는 다만 볼 뿐입니다. 나의 숨은 욕망이 꼭 이 무도한 정권을 닮았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권은 인간답게 사는 것을 금지된 희망이라며 붉은 부적을 온 천지에 덕지덕지 붙여대고 있습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공동체의 소통과 희망, 연대에 넉넉한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 인간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가난하고 불편해도 이정도면 됐다 하는 자족감으로 다른 인간을 위해 기꺼이 비껴주고 물러서는 인간이고자 합니다. 밥은 필요하지만 밥보다 중요한 것이 많음을 깨달아 생활하는 인간으로 살고자 합니다. 다행히도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백년을 산들, 천년을 산들 도대체 내 것은 하나도 없음을 수용하는 인간의 나이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새해입니다. 얼이 썩은 정권에게 인간적으로 덕담하나 오롯이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인간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도둑들의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도둑은 반드시 쫓겨나고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멸망할 자리를 알아서 파고 기어 들어가는 이 정권이 측은하고 불쌍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단 하나입니다. 인간의 시간을 기다리며 비질을 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13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KBS의 제야 방송이 시위장면을 의도적으로 은폐, 조작하면서 말이 많자, 당시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위를 방송하려고 중계하러 나간 것은 아니다. 사실은 우리 행사가 방해받은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당시 시위대의 구호와 피켓이 생방송을 방해한 것이라는 문제제기가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 방송수칙이란 무엇보다 깨끗하고 사고 없는 방송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방송과 그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들에 충실하겠다는 태도를 어찌 쉽게 탓하랴. 어차피 미디어라는 것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을 보여줄지를 선택하고 편집하는 과정이 미디어의 힘이자 권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여주지 않았나’ 프레임 안의 내용만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 것들에 늘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미디어는 항상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보여지는 것보다 보여지지 않은 것들이 카메라의 시선을 더 잘 보여준다. 오히려 보여지지 않은 것들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도 있다. 나는 당시 KBS의 ‘태도’에서 그들의 ‘시선’을 본다. 시위대의 구호가 누군가에게는 귀담아들어야 할 민중들의 분노를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생방송을 망치는 ‘사고’였다. 작년 한해 쇠고기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고 연말마저 법안 상정 문제로 전기톱에 소화기로 싸움을 벌이는 국회의 모습은 국민들을 불쾌하게 했다. 이런 정국인데 제야 방송 당시 시위대의 구호를 소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상황에 가장 민감해야 할 언론의 태도와는 영 맞지 않다.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방송무대 위에 뛰어든 방해자와 같은 취급을 한다는 것은 현 사태를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어리석음을 보여줄 뿐이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방해자와 같은 취급을 한 것일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려버린 건 아닐까. 언론 수난시대다. 방송법과 신문법 개정으로 인해 정부에 치이고 공영방송위기에 국민들도 예민하다. 국민들은 비판적 지지를 한다. 지지를 하면서도 잘못하면 크게 질타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그래서 기회다. 원하면 누구나 정보 생산자가 될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에 주류 미디어인 언론은 그 입지가 점점 줄어드는 위기다. 이 위기 앞에서 오히려 언론의 본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언론은 취약해진 역할을 새로이 확립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경제나 권력에 포획되지 않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것은 언론 투쟁 목표의 핵심일 수밖에.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주류 미디어 언론은 오히려 무가치의 길로 갈 것이다. 김수영은 ‘창작자유의 조건’이란 글에서 “적어도 언론 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 자유가 있다고’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했다. 곧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입맛대로 검열할 것이라는 예상은 지나친 것‘이라 할지라도 지나침이 없다. 50년대 작가가 쓴 이 글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다만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입막음이 있던 그때와 다르게 ’언론법은 민생법‘이라는 경제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성장은 대부분이 바라는 욕망이다. 의심하지 않고 포획되는 순간 언론은 언론이 아니게 될 것이다. 물론 언론의 자유에서 말하는 이 자유가 제 멋대로를 뜻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쉽게 경제의 논리에 포섭되므로.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용되는 자유는 쉽게 오용된다. 돈이 가장 강력한 척도인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 있는 자들이 쉽게 살 수 있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누구나 체감한다. 그래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가 만들어내는 계급과 위계마저도 비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이 그런 역할에 앞장서고 힘없는 목소리들에 목소리를 입혀 주어야 할 일이다. 타종 왜곡방송 논란이 불거진 KBS 1TV '가는 해 오는 해'. 사진 출처 - 마이데일리 불현듯 대학방송기자 시절 떠올라 대학생인 나는 언론의 자유하면 학교 방송국 기자 활동이 떠오른다. 아프다. 부끄럽다. 누군가는 ‘모르는 것이 많은 학생에 대한 가르침이야’라고 토닥이지만 실지 그것은 명백한 검열이었다. 대학 언론의 위기라는 말이 많은데 그 원인 중 하나가 학교 당국의 지나친 검열로 인해 말 그대로 대학의 ‘부속’ 언론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검열을 받는 자가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며 또 얼마나 쉽게 그걸 내면화하는지 안다. 대학생 기자였던 내가 이러할진대 실전에서 뛰는 기자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등록금 관련 보도를 할 당시 멘트를 수없이 고쳐야 했다. 교수의 권유로 내보내지 못한 방송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열 때문에 복잡해질 것 같은 주제는 피해가는 내 모습을 보았다. 여전히 충격으로 남는 기억 하나는, 멘트를 결재 받을 때 ‘대학의 주인으로서 학생은’ 이라는 문구를 빨간 동그라미로 꽁꽁 싸서는 문장 밖으로 빼내며,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야? 라고 묻던 누군가의 그 음성과 표정이 지워지지 않는다. 난 몇 주에 걸쳐 멘트를 계속 수정해야 했고 결국 남은 글들은 그 어느 것 하나 논쟁될 부분이 없는 앙상한 몇 가지 사실들뿐이었다. 기계적 중립성을 강요당하면서도 내 주장을 힘껏 하지 못했던 그 무력한 내 입을 아직 부끄러워한다. 나는 대체 언론보도는 무엇이냐고 수없이 반문하며 소심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원래 그런 거지’라고 자위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대학생기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위태로워 했다. 언론은 위기다. 그리고 기회다. 주류 미디어인 언론에 대한 불신과 목마름을 느끼는 국민들에 의해 이미 제야 행사의 보여 지지 않은 장면들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언론이라 불리어 왔던 언론들은 과연 어떤 제 역할을 찾아갈 것인가. 여전히 그 힘과 그 중요성을 믿는 사람들은 정부의 미디어 악법 개정에 투쟁하고 지지한다. 나 역시 언론의 자유와 공영성을 침해하는 것들에 반대하며 싸우는 자들을 지지하고 지켜볼 것이다. 언론의 목소리를 들어줄 ‘귀’는 바로 이곳에 있다. 나는 언제 언론의 심장이 가장 뜨겁게 뛰는지 알고 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26 | 추천: 0
체험학습 허락이 성추행보다 더 나쁜 한국 사회를 고발한다!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차장 16일 오후, 결국 서울시교육청이 7명의 교사에게 파면·해임을 최종 통보했다. 그리고 학교 교장들이 17일부터는 학교에도 나오지 말라고 했다. 학생들과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제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이 없는 빈 교실에서 쓸쓸히 겨울방학을 맞이해야만 한다. 지난주에 서울시교육청 앞을 두 번 갔었다. 지난 10일, 서울시교육청이 ‘일제고사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던 7명의 교사들에게 파면·해임 중징계를 내린 후, 교육청 앞에 철야농성장이 마련되었다. 매서운 겨울 날씨 속에 새벽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천막을 설치할 수 없어 이동용 난로, 은박지 깔개, 무릎 위 침낭이 전부였다. 파면·해임의 찬바람 속에서 관련 교사들은 다시 한 번 겨울의 칼바람과 싸우고 있었다. 7명의 교사 중 2명의 교사를 알고 지냈다. 이 중 한 여교사는 나와 목소리가 비슷해 형, 동생 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일요일, 이 교사의 제자들이 찾아왔다.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한 손에는 직접 제작한 ‘표현의 자유권’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아이들은 선생님과 교육청 앞에서 함께 농성장을 지켰다. 얼마 후, 선생님이 서대문역까지 아이들을 바래다주었다. “오늘 추운데, 와줘서 고마워~” “...” 아이들이 말을 잘 잇지 못한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로 말을 해본다. “선생님~ 또 올게요~” 여교사는 아이들의 머리와 어깨를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서로 침묵의 포옹을 한다. “부모님 걱정하시고, 날씨도 추우니까 집에 빨리 들어가야 돼~”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서로 손을 흔든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마음이 아팠다. 영하의 날씨에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있는 선생님을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바라봤을까?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 파면·해임이 되는 이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무슨 꿈을 꾸며 살 수 있을까? 이 아이들에게 ‘정의’를 말하는 어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두려움이 앞선다. 다시 교육청 농성장 바닥에 앉았다. “OOO쌤~ 안 추워?” “모자 쓰고 있으니까 안 추워~” 방한용 토끼모자를 쓰고 있는 OOO 선생님이 환하게 웃는다.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셔?” “처음에는 화를 내셨지. 그런데 지금은 엄마가 많이 추우니까 따뜻한 옷 사 입으라고 돈도 주셨어~ 하하하” 오랜만에 엄마가 주신 용돈(?)에 밝게 웃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말을 이어간다. “어제 스무 분이 넘는 학부모님들이 모임을 하셨고, 날 초대했어. 그리고 함께 해주시겠다고 하더라~” 말하는 동안 OOO 교사의 얼굴엔 밝은 미소가 계속 이어졌다. 차가운 아스팔트와 매서운 겨울바람의 추위도 잊혀진 얼굴이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10월 실시된 초·중학교 '일제고사' 당시 학생들의 야외체험학습을 허락한 전교조 소속 공립교사 7명에 대해 중징계(3명 파면, 4명 해임)를 결정한 가운데, 지난11일 오후 서울시교육청앞에서 열린 징계 철회 및 공정택 교육감 퇴진 촉구 기자회견에서 파면통보를 받은 정상용 교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은 지난 7월 선거에서 선거비의 약 80% 가량인 18억여 원을 학원 및 사학 관계자, 급식업자 등에게서 빌리거나 후원받았다. 그러함에도 이 사안에 대해서는 눈 가리고 아웅식 수사만 펼쳐지고 있다. 더불어 서울시교육청이 이전에 성추행 및 촌지 교사에게는 3개월 정직 및 감봉이라는 경징계만 내렸는데, 이번 파면·해임과는 형평성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결국 이번 중징계는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의 날인 12월 10일에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현 정권 비판에 따른 보복성징계를 내린 암울한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암울한 한국사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서민들 잘 살게 해주는 정책이라고 하며 부자 감세·대기업 규제 완화 등의 꼼수정책 구현, 건국60주년 기념 영상에 ‘4.19데모’ 라고 헌법 유린, 일본 우익의 교과서 개악의 논리와 똑같이 근현대사 왜곡·강제 집행, 대운하 준비단계인 4대강 사업 예산 증액 등의 2009년도 예산안 단독 처리, 남북관계 파탄, 언론 통제 등 헤아릴 수 없는 위기이다. 최근에 현대리서치와 경향신문의 설문에 의하면 63%가 민주주의가 후퇴되었다고 말하고 있고, 이명박 대통령(25%), 정부(22%), 한나라당(14%), 야당(8%) 순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결국 20여 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쌓아왔던 절차적 민주주의는 다시금 후퇴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기관이 저질러왔던 잘못을 밝히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반성과 보상을 병행하였다. 그러나 올 해 아직 많은 과거사가 해결되지도 못한 채 여러 과거사위원회가 폐지되었고, 이명박 정부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후퇴와 위기가 드러났다. 이는 결국 훗날 불편한 진실의 또 다른 과거사를 양산한 것이다. 2008년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내일의 또 다른 과거사로 판을 치고 있다.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에 우리는 또 다시 오늘의 어두운 민주주의의 후퇴를 과거사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할지 모른다. 지난 9월, 이용훈 대법원장이 사법 60주년 기념식에서 과거 권위주의 시절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과 관련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미래를 향하여 새로 출발하려면 먼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도덕적 용기와 자기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하면서 법관이 올곧은 자세를 온전히 지키지 못해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질서의 수호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고, 그 결과 헌법의 기본적 가치나 절차적 정의에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제 곧 파면·해임교사들의 소청심사 청구와 행정소송이 진행될 전망이다. 더불어 다가오는 23일에도 학부모, 청소년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교사들이 이를 허락하고자 하는 가운데 서울시교육청이 관련 교사들을 중징계한다고 한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사과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권위주의 정부의 전교조 교사 파면·해임의 보복성 징계라는 불편한 진실이 훗날 과거사 청산으로 등장하지 않는 판결을 기대해본다. 더 이상 과거사로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미래사가 생겨서는 절대 안 된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0
-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등 종교계 설립 사립대학 사례를 보면서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담위원 종교계 관련 언론 기사를 보면, 참 좋은 일 많이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수만 포기의 김장김치를 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찡하다. 한 집안 김장도 제대로 함께 못해 구박당하는 처지에서 보면 더욱 존경스럽다.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종교계지만, 그래도 남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나눈 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특히 종교지도자가 직접 나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하루 일정을 내어 몸으로 봉사를 하고, 성심 성의껏 낮은 자세를 보여준다는 것은 흐뭇하다. 비록, 단 하루 언론에 비쳐지는 ‘쇼’라고 치부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일어났으면 하는 일이다. 수십 년 전 공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시절에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일구어준 종교지도자들의 정신은 그래서 존경스럽다. 그러나 이런 고귀한 정신을 갉아 먹는 일부 사례들이 있어 안타깝다. 특히, 학교가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종교계 설립 대학에서 일어나는 합법을 앞세운 소송방식의 처리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강남대학교는 신학교로 출발해 복지관련 계통에서 주목받아온 수도권 인근에서 급성장한 종합대학이다. 학교 측은 ‘이찬수 교수’에 대한 교육부 소청심사위의 결정에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하였고 최근 강남대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제 강남대 스스로가 답할 차례인데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 강남대의 당시 교목실장 등 종교지도자들은 합법이라는 괴물을 앞세워 총장, 이사장에게 승소를 확신했다고도 한다. 사실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다들 잊어버린 한 교수의 사례이지만, 인권 종교관련 시민단체들은 대책위까지 구성하고 계속 주장해 왔다. 학교 측은 소송으로 시간을 끌다 제풀에 지쳐 포기하게 하거나 보상금으로 대충 덮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강남대에서 부당하게 해직되었던 이찬수 교수는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승소하였지만 아직 복직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이 교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 강좌를 진행하였다. 다른 학교의 사례를 보아도 보통 힘 있는 종교사학이 쓰는 방법은 법정 소송이다. 법대로 해 나갈 테니 법정에서 다퉈보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종교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종교사학에서 이런 합법이라는 괴물을 이용하고 있다. 어느 사학은 우리나라에서 다섯 손가락에 안에 든다는 대형 법무법인에게 소송을 맡기거나 전관예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한다. 막대한 재력과 대학이라는 인맥을 갖고 대응하며, 여기에 상당한 종교적 결집력과 맹목성도 결합되어 위력을 발휘하려 하였다. 목사님이라는 지위를 가진 강남대와 관련된 종교지도자들은 반성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때이다. 또한 총장이면서 신실한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천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학력위조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먼저 고백한 사람과 끝까지 숨기려한 사람 어떤 사회지도자가 대중의 심판을 받았는지 곱씹어보아야 한다. 내일 강남대 홈페이지에 이찬수 교수가 복직되고 자신의 기본권과 명예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강남대를 지켜보던 종교계 등 시민단체에게 또 하나의 공부할 사례가 생겼다. 서울 금천구에 있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원생 35명이 제적을 당했다. 전체 대학원생 150여 명 가운데 5분의 1에 해당한다. 학생들의 종교는 다양하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무종교인 학생이 절반정도, 불교를 믿는 학생과 가톨릭과 기독교학생이 반반으로 정부 통계청 인구조사 상황과 비슷하다는 의견도 있다. 사학 분규가 일어난 대학에서 등록금 미납을 이유로 석·박사 과정 학생이 제적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조계종 스님이자 중앙종회(국회의원 격)까지 지낸 스님이 학교법인 이사장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사태를 불교계에 알리기 위해 서울 조계사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불교계 언론들은 이 대학의 복잡한 사정은 종교계의 재산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대학 설립자이기도 한 전 이사장(덕해 스님)과 그의 제자(상좌)인 현 이사장(지욱 스님)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전 이사장과 가까운 총장을 현 이사장이 해임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특히 현 이사장 지욱스님 측은 설립자인 은사가 판단력이 흐려져서 친인척들이 개입하여 불교대학을 다른 대학에 팔아넘기려 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학교를 지키려 총장을 해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이사회 구성원 자신이 주지로 있는 사찰신도회 회장 및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인 중진 스님을 이사로 새로 영입하는 등 측근으로 이사회 구성을 모두 마친 상황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라는 지적이다. 결국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들에 대한 해임 및 징계를 위해 학생들부터 ‘기강’을 잡기위한 조치라는 것이 졸업한 한 학생의 주장이다. 여기에 학교 측의 ‘서투른 대응’이 있었다고 한다. 학생들 등록의 조건으로 ‘확인서’ 서명을 요구한 것이나 특정 교수들이 학생을 선동한다면서 교수 2인에게 조건부 사직서를 요구한 것에 대해 제적 학생들은 ‘비상식인 처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신입생 면접일에 용역 직원을 고용해 재학생들이 학교에 출입하는 것을 막았고, 분규 이후 갑자기 학내에 CCTV를 설치한 것도 학생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으로 한 시사주간지는 보도하고 있다. 총장 직무대행 김 모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총장 해임 사건을 계기로 교수협의회와 학생회가 유착해 조직적으로 등록 거부를 한 것이다. 등록 기회를 충분히 주었는데, 등록기일 안에 등록을 안 하면 제적 처리한다는 학칙에 따라 행정적 처리가 끝난 사안이다. 확인서 작성은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한 것이었고, 학생들을 살리기 위한 학교 측의 구제책이었다”라고 말했다. 현재 직위 해제된 황 모 전 총장은 ‘총장 지위 보전 가처분 신청’을, 제적 학생들은 ‘학생 지위 보전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놓은 상태이다. 지난 12월 2일 법원은 조정을 거쳐 학교 측과 제적학생들이 합의하도록 하였다. 특별한 이의가 없는 한 제적된 학생들은 다시 정상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제적학생대표는 재학생, 교육과학기술부, 불교 언론계, 종단, 한국상담심리학회, 한국정신치료학회, 기타 제적생 측에서 외부에 분규상황을 알렸던 곳에 공식사과문을 전달하고 학내분규의 종식과 학교복귀를 공식 발표하겠다는 조정안을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명 중에서 10명이 속해 있는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은 또 다른 법정공방에 처해 있다. 학교법인 측은 사학법이 위임한 모든 권한을 동원하여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한 절차를 밟아 교수들을 처리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0월 15일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이, 학생들의 제적만은 강행하지 말라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이사장 스님도 가처분의 결과와 상관없이 본 소송으로 들어갈 것을 직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 언론에서 비추어지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종교계 인사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광고의 한 장면이 되고 만다. 더 강렬한 인상은 종교계 설립 대학이 더 이익을 챙기고, 비상식적이고 부당한 처신을 한다는 이미지가 더 남는 이유가 있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고, 서민들의 얇은 살림살이에 자녀들의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수조원에서 수천억 원을 대학 적립금으로 쌓아 놓는 대학이 많다는 지적이다. 특히 종교계 설립 사립대학이 돈을 많이 쌓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돈을 무기로 종교사학은 좋은 일을 해야 한다. 연말 김장을 담아 어려운 이웃을 나누어 주듯 국가의 복지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가야 한다. 그런데, 현재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와 학교법인 보문학원은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한 불교계 시민단체는 지난 10월말 학교 측에 공문을 보내 1)법적공방을 마무리하고 조정할 수 있는 방안협의 2)조계종 중진 스님들이 배석하여 공동 협의 3)교수협의회 및 학생회 대표자와 협의할 사항 검토를 요청했다. ‘법적공방으로 엄청난 송사비용은 결국 막대한 낭비가 되며, 모두가 피해자가 만드니, <중재법>과 같은 내용을 검토하여 서로 화해할 길을 찾아보자는 주장이다. 아직 중재보다는 대형 법무법인을 통한 소송이 더 확실한 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또 다른 이찬수 교수가 발생할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종교지도자의 결단은 다소 독단적이고 위법적이어도 밀어 붙이는 힘이 있다. 좋은 일에 쓰면 약이 되지만 반대인 경우 답이 없다. 수만 명이 모여 종교차별을 주장하다가도 종교지도자의 한마디에 없던 일이 되기도 한다. 어이없는 경우여도 대놓고 비판하지도 못하는 것이 종교계 내부의 현실이며, 과제이다. 더구나 사립학교법 등 법이 권한을 위임해 준 대학법인의 경우 종교지도자의 권한은 막강하다.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진 강자가 휘두르는 합법의 폭력은 괴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권 시민단체의 역할과 중재가 필요한 이유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53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전임연구원, 전임 간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과 대한민국에서 사는 국민이 이를 확인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헌법과 국민에 의해 확인받고 있지 않은 몇 개의 공화국이 존재한다. ‘공화국’이라는 말의 본래의 의미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역설적인 의미에서 많이 붙여 쓰곤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 소위 ‘삼성공화국’ ‘부동산공화국’ ‘서울공화국’ ‘강남공화국’ 등이다. 어느 것 하나 공화국의 의미와는 먼 것들이다. 공화국에서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어야 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하지만 이들 공화국은 그저 삼성, 부동산, 서울, 강남만이 주인공이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대한민국에 그런 공화국이 또 있다. 바로 ‘CCTV공화국’이다. 범죄예방, 도난방지라는 명분을 가지고 태어난 CCTV는 목욕탕, 지하철, 엘리베이터, 사무실, 사업장, 은행, 병원, 상점, 길거리, 교도소, 공공기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 기술 또한 눈부시게 발전했다. 한쪽으로만 고정되어 있고 사람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화면은 이제 옛말이다. 360도 회전은 기본이고, 줌 기능에 음성녹음까지 최첨단의 길을 걷고 있다. 어떤 감독처럼 CCTV를 활용해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어도 될 정도다. 기술발전과 확대일로를 걷는 CCTV에 대한 인권단체들의 우려와 국가인권위원회 권고가 잇따르자 2007년 「공공기관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에 CCTV 관련 조항을 신설해 공공기관에서의 CCTV 운영에 제한을 하는 듯 했다. 그렇지만 동법 제4조의2 제1항에서는 CCTV의 설치를 “범죄예방 및 교통단속 등 공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라고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사실 ‘공익’이라는 명분만 있으면 설치에 아무런 제약도 없다. 또한 제2항에서는 “설치목적 범위를 넘어 카메라를 임의로 조작하거나 다른 곳을 비추어서는 아니 되며, 녹음기능은 사용할 수 없다”고 되어 있지만, ‘공공기관 개인정보보호심의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회전과 줌 기능은 물론이고 음성녹음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CCTV 설치 운영을 법으로 제한받고 있는 공공기관도 이런 상황인데, 관련 법률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민간분야에서의 오남용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대한민국은 ‘CCTV공화국’ 문제는 점점 똑똑해지고 있는 CCTV가 정말이지 우후죽순처럼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CCTV가 안전과 보안에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이제 CCTV는 그야말로 프라이버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놀이터와 공원까지 진출하려고 한다. 이는 경찰청이 아동과 부녀자 실종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놀이터에서도 옷매무새를 매만져야 하고, 공원에서의 낭만적 연애도 이제는 망설여질 것이다. 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교육과학부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2010년까지 초·중·고 70%에 CCTV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고스란히 대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대학만 예를 들어도 이미 기숙사 입구는 수위아저씨 대신 CCTV에게 안전을 맡긴 상태다. 도서관 또한 도난방지를 위한 CCTV 15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당국은 최근 이를 66대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사생활 침해가 잠깐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도서관 자치위원회는 “찬성 의견이 약 97%”에 이른다는 근거를 제시해 당위성을 제공했다. 그동안 대학생들이 지문인식, 스마트카드 학생증, 대학 게시판의 무분별한 개인정보 노출에 대해 별다른 감수성을 보이지 않아 97%라는 찬성률은 새삼 놀랍지도 않다. 다만 CCTV를 학문의 전당인 도서관까지 끌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도난의 문제가 큰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CCTV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상력의 빈곤은 유감이다. 경찰서 CCTV 관제센터 모습 사진 출처 - 경향신문 CCTV는 사적인 영역을 무분별하게 감시하고 이를 화상이라는 형태의 기록으로 남기는 그 자체도 인권침해이지만, 또한 목적과는 다른 오남용을 통해 적극적 인권침해로 이어진다는 점이 더 문제다. 그리고 오남용의 내용 또한 설치목적에서 범죄예방, 교통단속, 도난방지 등을 내세우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즉, 불특정 다수를 지켜야 할 CCTV가 불특정 다수 또는 특정한 소수를 감시하는 역할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교통상황 체크나 주차단속용 CCTV가 ‘집회채증용’으로 활용되고, 도난방지를 위한다는 목욕탕 CCTV가 ‘음란물 배포’의 주범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어디에선가 찍힌 내 모습이 어느 날 인터넷에서 인기게시물로 떠돌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폭력을 예방하겠다는 CCTV는 학생들의 숨통을 조일 것이고, 도난을 방지하겠다는 도서관 CCTV는 또 다른 음란물 또는 개그물로 떠돌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뿐만 아니라 CCTV는 절대로 예방적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사후적 처리에 조금 도움이 될 뿐이다. 범죄를 계획한 사람이 CCTV 때문에 망설일까. 모자를 쓰거나 선글라스, 마스크 등 훌륭한 수단이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전혀 효과가 없다고 할 수 없겠지만 투여되는 예산의 크기와 다수 대중의 인권을 침해하고 얻는 효과라고 하는 것이 과연 만족할만한 수준인지 의심스럽다. CCTV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CCTV는 이제 보편의 언어가 되어 가고 있는 형국이다. 오남용 대상이 바로 자신이 될 수 있음에도 별 문제의식을 갖지도 않는다. 우리는 나오고 싶은 텔레비전과는 달리 출연하지 않고는 하루를 넘길 수 없는 ‘CCTV공화국’에 살고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안전’을 담보로 너무 많은 양보를 하고 있다. 하루하루 첨단기술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이 아니던가. 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 설치된 CCTV를 잘만 활용하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부러울 이유가 없다. ‘실용’을 부르짖는 이명박 정부에게 이를 적극 활용할 것을 조언하는 바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27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현재 한국은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이다. 또한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 때나 유엔인권조약기구 심의 시에 한국 정부는 한국 사회의 인권보호측면을 무지하게 강조한다. 최근 촛불집회 때의 공권력에 의한 무차별적 연행, 구금, 구속에 대해 한국 시민단체는 유엔인권특별보고관에게 인권침해상황을 알리고, 이에 대한 조사를 청원하였다. 이에 유엔인권옹호자, 표현의 자유, 고문 특별보고관은 한국정부에 한국시민단체의 청원을 바탕으로 한국정부 측에 인권침해사실을 질의하였다. 한국 정부는 10월 16일 공식답변을 통해 한국의 시민사회단체가 제기한 인권침해사항은 일방적이고 형평성에 맞지 않고, 불확실하거나 잘못된 정보에 기인한다고 하였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법집행을 했을 뿐이라고 답변하면서, 유엔인권조약에 전혀 위배되지 않았고 국제인권기준에 맞는 조치를 취했다고 하였다. 젠장!! 솔직히 단체에서 국제연대활동을 하다보면 가끔 외국 활동가들에게서 한국의 인권상황이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낫다는 평을 듣게 되고, 메일링서비스를 통해 전달되는 아시아 국가의 인권침해사례를 접하게 되면 나 스스로도 한국이 그러한 국가의 상황에 비하면 낫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제기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악수하는 이명박 대통령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물론 여전히 한국에서는 대낮에 총격을 당하거나 납치를 당하거나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사건으로 1400명의 사람이 경찰서 신세를 지거나, 수십 명이 구속이 되고, 구백 명이 넘는 사람이 수백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지거나, 처할 예정인 사례는 해외에서도 드물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터넷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인터넷공간에 대통령과 정부의 정책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가서 몇 시간 내지는 며칠을 조사 받아야 하고, 몇몇 신문사에 광고를 낸 회사에 전화를 걸어 광고 중단을 요구했다고 특정한 사람들을 출국금지 시켜 공포감을 주고, 일부는 주동자(?)라는 이유로 구속시키는 IT강국은 내가 알기로는 없다. 유모차를 끌고 아이들과 함께 나왔다고 해서 아동학대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집회 시에 자동차를 끌고 나와서 집회무리와 함께 이동하며 빵빵 거렸다고 일반도로교통방해 혐의를 받아야 하며, 단순히 집회에 참여하여 차량도로로 다녔다는 이유로 집시법과 도로교통법 혐의(그럼 월드컵 때 차량시위하고 도로에서 차선을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외쳤던 사람들도 모두 소환되어 처벌받아야 하나?), 멀쩡한 언론사의 사장을 갈아 치우고 이에 항의하는 노조원들을 이런저런 꼬투리로 해직하는 상황이 버젓이 발생하면서 적법한 진압을 했다고 되레 호통 치는 경찰우두머리가 있는 나라가 과연 인권이사회 이사국의 자격이 있는지, 유엔회의에서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고 큰소릴 칠 만한 나라인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다. 더 큰 문제는 촛불이 사그라진 지 꽤 되었지만 정부 경찰, 검찰의 조사, 구금, 구속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는 그 범위를 넓혀 먹고사는 문제까지 사사건건 조여오니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다. 한국정부의 인권보호니 인권선진국 발언도 토 나오지만 나 스스로 한때 비슷하게 생각했던 부분도 심하게 쪽 팔린다. 사실 없는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이 달랐을까 싶기도 하지만 정부가 촛불을 밟아 끄면서 인권의 영역을 계속 침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현재의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다. 더 갑갑한 것은 이제 1년도 안 지났다는 것이다. 날씨도 추워지고 있는데...
2017-07-11 | hrights | 조회: 21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