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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보여주지 않았을까’ - 장윤미/국민대 학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6:22
조회
228

장윤미/ 국민대 학생



KBS의 제야 방송이 시위장면을 의도적으로 은폐, 조작하면서 말이 많자, 당시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위를 방송하려고 중계하러 나간 것은 아니다. 사실은 우리 행사가 방해받은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당시 시위대의 구호와 피켓이 생방송을 방해한 것이라는 문제제기가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다. 방송수칙이란 무엇보다 깨끗하고 사고 없는 방송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방송과 그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들에 충실하겠다는 태도를 어찌 쉽게 탓하랴.

어차피 미디어라는 것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을 보여줄지를 선택하고 편집하는 과정이 미디어의 힘이자 권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보여주지 않았나’ 프레임 안의 내용만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 것들에 늘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미디어는 항상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보여지는 것보다 보여지지 않은 것들이 카메라의 시선을 더 잘 보여준다. 오히려 보여지지 않은 것들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도 있다. 나는 당시 KBS의 ‘태도’에서 그들의 ‘시선’을 본다. 시위대의 구호가 누군가에게는 귀담아들어야 할 민중들의 분노를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생방송을 망치는 ‘사고’였다. 작년 한해 쇠고기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고 연말마저 법안 상정 문제로 전기톱에 소화기로 싸움을 벌이는 국회의 모습은 국민들을 불쾌하게 했다. 이런 정국인데 제야 방송 당시 시위대의 구호를 소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상황에 가장 민감해야 할 언론의 태도와는 영 맞지 않다.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방송무대 위에 뛰어든 방해자와 같은 취급을 한다는 것은 현 사태를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어리석음을 보여줄 뿐이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방해자와 같은 취급을 한 것일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려버린 건 아닐까.

언론 수난시대다. 방송법과 신문법 개정으로 인해 정부에 치이고 공영방송위기에 국민들도 예민하다. 국민들은 비판적 지지를 한다. 지지를 하면서도 잘못하면 크게 질타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그래서 기회다. 원하면 누구나 정보 생산자가 될 수 있는 1인 미디어 시대에 주류 미디어인 언론은 그 입지가 점점 줄어드는 위기다. 이 위기 앞에서 오히려 언론의 본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언론은 취약해진 역할을 새로이 확립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경제나 권력에 포획되지 않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것은 언론 투쟁 목표의 핵심일 수밖에.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주류 미디어 언론은 오히려 무가치의 길로 갈 것이다.

김수영은 ‘창작자유의 조건’이란 글에서 “적어도 언론 자유에 있어서는 ‘이만하면’이란 중간사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언론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 ‘이만하면 언론 자유가 있다고’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 했다. 곧 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언론은 언론이 아니다. ‘정부가 언론을 장악하고 입맛대로 검열할 것이라는 예상은 지나친 것‘이라 할지라도 지나침이 없다. 50년대 작가가 쓴 이 글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다만 언론에 대한 노골적인 입막음이 있던 그때와 다르게 ’언론법은 민생법‘이라는 경제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성장은 대부분이 바라는 욕망이다. 의심하지 않고 포획되는 순간 언론은 언론이 아니게 될 것이다. 물론 언론의 자유에서 말하는 이 자유가 제 멋대로를 뜻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쉽게 경제의 논리에 포섭되므로.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용되는 자유는 쉽게 오용된다. 돈이 가장 강력한 척도인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 있는 자들이 쉽게 살 수 있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누구나 체감한다. 그래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가 만들어내는 계급과 위계마저도 비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언론이 그런 역할에 앞장서고 힘없는 목소리들에 목소리를 입혀 주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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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종 왜곡방송 논란이 불거진 KBS 1TV '가는 해 오는 해'.
사진 출처 - 마이데일리


불현듯 대학방송기자 시절 떠올라

대학생인 나는 언론의 자유하면 학교 방송국 기자 활동이 떠오른다. 아프다. 부끄럽다. 누군가는 ‘모르는 것이 많은 학생에 대한 가르침이야’라고 토닥이지만 실지 그것은 명백한 검열이었다. 대학 언론의 위기라는 말이 많은데 그 원인 중 하나가 학교 당국의 지나친 검열로 인해 말 그대로 대학의 ‘부속’ 언론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검열을 받는 자가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며 또 얼마나 쉽게 그걸 내면화하는지 안다. 대학생 기자였던 내가 이러할진대 실전에서 뛰는 기자들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다. 등록금 관련 보도를 할 당시 멘트를 수없이 고쳐야 했다. 교수의 권유로 내보내지 못한 방송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열 때문에 복잡해질 것 같은 주제는 피해가는 내 모습을 보았다. 여전히 충격으로 남는 기억 하나는, 멘트를 결재 받을 때 ‘대학의 주인으로서 학생은’ 이라는 문구를 빨간 동그라미로 꽁꽁 싸서는 문장 밖으로 빼내며,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야? 라고 묻던 누군가의 그 음성과 표정이 지워지지 않는다. 난 몇 주에 걸쳐 멘트를 계속 수정해야 했고 결국 남은 글들은 그 어느 것 하나 논쟁될 부분이 없는 앙상한 몇 가지 사실들뿐이었다. 기계적 중립성을 강요당하면서도 내 주장을 힘껏 하지 못했던 그 무력한 내 입을 아직 부끄러워한다. 나는 대체 언론보도는 무엇이냐고 수없이 반문하며 소심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원래 그런 거지’라고 자위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대학생기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위태로워 했다.

언론은 위기다. 그리고 기회다. 주류 미디어인 언론에 대한 불신과 목마름을 느끼는 국민들에 의해 이미 제야 행사의 보여 지지 않은 장면들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언론이라 불리어 왔던 언론들은 과연 어떤 제 역할을 찾아갈 것인가. 여전히 그 힘과 그 중요성을 믿는 사람들은 정부의 미디어 악법 개정에 투쟁하고 지지한다. 나 역시 언론의 자유와 공영성을 침해하는 것들에 반대하며 싸우는 자들을 지지하고 지켜볼 것이다. 언론의 목소리를 들어줄 ‘귀’는 바로 이곳에 있다. 나는 언제 언론의 심장이 가장 뜨겁게 뛰는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