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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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지난 2주일간 농촌에서는 예취기(풀깍는 기계) 소리가 온 동네와 인근 야산을 뒤덮었다. 그 하나는 추수를 앞두고 마지막이 될 논두렁을 깎는 소리요 또 하나는 추석을 앞두고 조상의 묘소를 깎는 소리이다. 거기에 하나 더! 마을 부역으로 동네 길 옆의 풀 깎는 소리가 더 해진다. 다름 아닌 추석 때 귀향하는 이들을 위한 동네길 풀깍기 행사인 것이다. 70, 80세 노인들이 아침부터 나와 동네 안길들을 정리하고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한 냥 흐믓한 미소를 띄우며 신작로를 바라다본다. 아마도 그런 노인들의 수고도 모른 채 도시의 자녀들은 자가용으로 휭하니 지나올 게 뻔한데도 말이다. 올해도 농촌의 노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줄 것 준비하면서 짝사랑의 마음으로 추석을 맞이할 것이다. 어쩌면 농촌은 도시를 향해 짝사랑만하고 있는 것 같다. 농촌의 부모들이 도시에 사는 자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고, 도시민들의 소비패턴에 농민들의 생계가 달려 있으니 그렇고... 누가 그랬던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있다고. 굳이 도.농만을 비교해 놓고 보면 세상은 도시를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두운 곳을 밝히는 복지문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방과 후 공부방이 3년 만에 자리를 잡아 간다. 두 명의 전담교사와 3명의 강사를 두고 동네 마을회관을 임대해 공간도 확보했다. 일 벌리기 좋아하는 동네 청년들이 조금 더 욕심을 내자고 한다. 그 이름도 거창한 ‘고탄지역 농촌복지센타’!!! 5개리 마을 노인 분들을 위한 복지서비스와 외국인주부 한글교실, 여성농업인을 위한 강좌(평등부부 교육..)사업 등 종합적인 농촌복지사업. 일이 커져 버렸다. 밀면 밀리는 우유부단한 나로서는 다음날부터 여기저기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일단 ‘청년 자원봉사단’을 조직해 정기적으로 시내병원을 다니시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 분들을 차로 모셔드리는 교통봉사를 시작했다. 중학교 선생님인 동네 형수님이 외국인주부 한글교실을 시작했고, 10월에는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서 춘천시내 5개 단체와 연합 축제(작은 마을 큰잔치)도 마련되었다. 사진 출처 - 필자 일손이 부족하다. 노인복지를 담당할 일꾼은 동네 주민 중에 한 분을 내정해 두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다. 65세 이상 노인 분들의 가정방문을 통한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각각의 맞춤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인데 인건비 마련이 문제다. 시내의 여러 복지단체를 알아보았더니 그 중 한군데에서 그 쪽으로 취직하는 것으로 해서 인건비를 지급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그 단체 노인복지 팀장과의 면담에서 우리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시에 ‘기초생활 수급자’로 등록되어 있는 노인 분들만 가능하며, 매일매일 업무일지를 써야 하는데 방문해서 해야 할 일이 12가지로 정해져 있단다. 일 안하고 놀 수 있으니 불시에 감시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다른 건 그렇다 하더라도, 농촌 노인들이 여러 가지 서류를 준비해 시에 등록한 분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 정해진 12가지 외에 다른 일은 쳐주지도 않는다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관장님 말씀이 오랜 기간 동안 다듬어진 나름대로의 규칙이라 시나 정부의 지적사항이 나오면 단체도 힘들어진다고 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도시 중심의 복지정책이었다.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 ‘농촌복지’에 대한 자료를 뒤져보니 여러 논문들에서 그런 얘기가 나온다. ‘도시 중심의 복지정책...’ 한 시간을 걸어서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가고, 또 한 시간을 버스타고 병원에 가고, 또 한 시간을 기다려 진료를 받고, 되풀이해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농촌 노인들의 심정을 정책입안자들은 알기나 할까? 올해 날씨 무지하게도 속 썩였다. 올해 같으면 농사지도를 새로 써야 할 판이라고들 한다. 고추는 안 말라 물러 썩어가고, 과수는 잦은 비에 맛도 없는데 거기다 낙과까지 생기고 벼도 잎마름병에 낟알도 굵지 않다. 그래도 양옆의 너른 뜰은 황금빛 손을 흔들며 추석 귀향 객들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황금빛 논이 잡초로만 무성한 농촌이 되지 않도록 농촌의 짝사랑을 이제는 받아줄 때가 된 것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03 | 추천: 1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좋은 영화들은 막이 내린 후에까지 강렬하게 가슴에 여운을 남기곤 한다. 스페인 영화 ‘마리포사(나비의 혀)’ 역시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지옥은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가슴 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증오와 잔인함, 폭력이 바로 그 지옥에 다름 아니다.” “자유를 잃는 것은 인간 존재의 이유를 잃는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정신, 그것은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누구도 뺏어갈 수 없는 보물과도 같다.” 이러한 대사는 곧 스페인 내전에 휩싸여 파시즘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로 물들여질 아름다운 시골 마을의 이미지와 오버랩 되면서 더욱 의미 깊게 다가온다. 할아버지 선생님인 그레고리오는 어린 제자인 몬초의 맑은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따스하게 말을 건네듯 교육하는 노련한 교사이자 나름의 신념을 지킬 줄 아는 진정한 인품을 지닌 스승이다. 영화는 천식 때문에 늦은 나이에 학교를 들어가게 된 몬초와 노교사인 그레고리오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몬초에게 학교 선생님의 이미지는 매를 때리며 훈육하는 무서운 사람이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실에 들어서지만 아이들의 놀림소리와 엄하게 보이는 선생님의 농담 한마디에 그만 오줌을 지리고 만다. 몬초는 교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산 속 깊이 숨어버린다. 다음 날 몬초는 자신의 집에 찾아와 잘못을 비는 할아버지 선생님을 문틈 사이로 훔쳐본다. “잘못을 했으면 어른이라도 아이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 할 만큼 할아버지 선생님은 권위적이지 않다. 어린 몬초는 그런 선생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본다. 같은 반 아이들도 더 이상 몬초를 놀리지 않았고 “입학 첫날 자신도 오줌을 조금 쌌다”고 고백하는 단짝 친구도 생겼다. 몬초는 선생님을 따라 글씨도 써보고 공놀이도 하며 조금씩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여간다. 그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단연 야외 수업이다. 나선형처럼 돌돌 말려진 아름다운 나비의 혀를 설명하시는 선생님의 손길을 따라 몬초의 커다란 눈망울은 반짝인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산길과 들길을 산책하며 나비도 채집하고 물놀이도 하면서 대자연이 만들어준 천연 학습교실에서 마음껏 뛰논다. 몬초에게 그레고리오 선생님은 가정이라는 1차적 사회집단에서 학교라는 2차적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성장시키는 인도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고귀한 정신을 배워 나가도록 하는 참스승으로 존재한다. 사진 출처 - 영화 '마리포사' 그의 자연과학적이자 무신론적인 철학은 고스란히 수업 내용에 반영된다. 왜냐하면 그는 광폭하고 권위적이며 폭력적인 파시즘에 대비되는 자유와 낭만, 자연과 사람에 대한 사랑, 민주적이고 이상적인 철학의 실천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으로 되어가는 가톨릭교회와 프랑코 장군을 위시한 기존 봉건제의 기득권을 누리고자 하는 세력에 반기를 들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등의 다양한 이념에 기반해 있는 공화정의 정신을 사랑한다. 수업 내용을 설명할 때 교실의 아이들이 마음껏 떠들더라도 결코 매를 들지 않는다. 다만 그는 창 밖을 고요히 바라 볼 뿐이다. 목청껏 떠들던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차분히 가라앉고 수업은 다시 시작된다. 체벌이 없어도 교육은 존재한다. 몬초는 가슴 깊이 그레고리오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고 진정한 인간 정신의 고귀함과 가치를 체득해 나간다. 그러나 1936년 좌파의 지지를 받던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한 이후 정치범 석방, 노동자 복직, 프랑코의 해외 좌천 등의 파격적인 개혁 정책을 펴자 기존의 기득권층들은 프랑코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스페인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1939년의 제 2차 세계대전 불씨를 안은 파시스트들은 곧 프랑코 정권을 지지하고 공화주의자들을 비롯한 좌파적 성향을 띤 사람들에 대한 마녀 사냥을 시작한다. 평화롭던 몬초의 가르시아 마을에도 색출작업이 시작되고 그레고리오 선생님은 하루아침에 ‘사악한 무신론자요, 극악한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만다. 극단적 리얼리즘에 대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 ‘떼시스’의 제작자이기도 했던 루이스 쿠에르다 감독이 선택한 엔딩신은 역시 충격적이다. 아름다운 스페인의 시골마을에 대비되는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권력의 추악함과 섬뜩한 공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깊은 슬픔’을 남긴다. 다시 너니? 그토록 요란스레 올라와서 다시 푸르게 하는 너의 방문이 내겐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았거든. 다시 너니? 대지가 죽은 생명과 새로운 생명으로 너의 가슴을 풍요롭게 하는 동안 네 가슴은 그토록 대책 없이 터지도록 자라는 구나. 다시 너니? 이름 모를 무덤 위에 참호의 흙덩이 위에 꽃을 피우며 피로 얼룩진 이 조국에 그 형형색색의 형상을 만드는 자가? 다시 너, 봄이니? (라파엘 알베르티, ‘스페인 내전 중의 한 해 봄’, 1938)
2017-07-11 | hrights | 조회: 496 | 추천: 0
종교사학에 인권기준 제시해야 할 서울시교육청 - 특정 종교의식을 자율 참여라며 강요하는 종교사학 손상훈/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사무국장 서울 은평구에 소재하는 한 중학교는 종교사학으로 교육목표 4가지가 신앙, 실력, 자율, 건강이다. 이 중 하나인 신앙의 일반목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산다’이며, 구체적인 교육목표가 성경 학습, 예배 생활, 전도와 봉사이다. 그리고 교육실천사항으로 성경 읽기, 성경 연구, 요절 암송, 경건한 예배, 기도 생활, 찬송 생활, 교회 출석, 기도 생활, 봉사 생활 등을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이 내용만 본다면, 학교인지 교회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지난해 12월 서울 은평구에 있는 종교사학에 22년간 재직하고 있던 한 교사가 더 이상 중학생들에게 종교 강요를 하지 않겠다고 양심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서울시교육청에 종교교육 및 종교의식의 인권 침해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지만 변화한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종교과목이 90점을 넘지 않으면 국어, 수학 등 다른 과목에서 100점을 받아도 과목 우수상을 받지 못하는 규정이 삭제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서울시교육청은 이 교사에게 보낸 3차례의 문서회신에서 종교사학이 종교교육과 의식을 자율적으로 진행하면 문제가 되지 않으며, 지적한 문제 사항들도 학교장 재량 사항이라고 답했다. 매일 아침, 저녁 실시하는 조회 종례 시 강제 경건회 및 매주 실시되는 학년예배에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하는 것도 학생들의 자율적 참여를 권장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불참학생이나 불만학생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여 소수의견을 가진 학생을 지도하도록 자체방안을 강구할 것도 권고하였다고 한다. 종교사학에 22년간 재직하고 있던 한 교사가 더 이상 학생들에게 종교 강요를 하지 않겠다고 양심선언을 하였다. 사진 출처 - 필자 하지만, 이 학교는 학부모 상담을 통해 문제제기를 할 수 없도록 철저히 지도한 결과 종교과목 이외의 다른 과목을 선택한 학부모가 단 한사람도 없다고 한다. 이 학교는 개신교였던 교사가 무종교인이 되고, 그 동안 관행적으로 해오던, 강제적인 특정종교의식이 자율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교사들의 분발을 이끌어 내었다. 선생님들 또한, 그동안 무관심을 반성하고 학생들을 더 많이 상담하여, 학생들이 인근 교회에 자발적으로 많이 다니게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담임교사가 학급경영 요람에 기재하게 되어있는 ‘전도 현황표’ 및 ‘전체 경영 계획’을 보면, 학기별로 교회출석을 독려하여 인원수를 적어 성과를 표시해야 한다. 또한 ‘학급선도일지’를 기록하여 학생들의 교회출석을 확인해야 한다. 학생종교란은 개신교를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기타교파 6개로 나누고 학생 수를 표시하며, 나머지 종교는 천주교, 불교, 무종교, 기타종교로 다시 나누어 학생수를 표시하도록 해 놓았다. 학년 초에 절반정도에 가깝던 무종교였던 학생들은 대부분 이 학교의 개신교 교단에 소속된 것으로 바뀌게 된다. (아래 표는 양심 선언한 교사의 반이어서 무종교인 학생들이 비슷한 숫자로 유지되고 있다) 학교의 교사들이 선교실적을 올려야 하고, 교장과 교감에게 매년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숫자상으로라도 바꿔 놓아야 하는 게 학교 현장의 상황이다. 종교사학의 교사들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서울시교육청은 학교장 재량권에 관한 사항이란다.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으면서, 건학이념인 특정한 종교교육과 종교의식을 자율적으로 원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해 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청은 온데간데없다. 사진 출처 - 필자 현재 종교사학의 선생님들은 그동안의 나태를 회개하고, 오히려 더 열심히 학생들을 면담하여, 불신자이거나 무종교인 학생들이 집 근처 교회에 다니도록 하고,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하도록 상담하고 권유한다. 인사권이 있는 종교재단에 잘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의 종교 활동에 부합하는 것으로 자기최면을 걸게 되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강제 종교의식 참여와 종교교육은 자율적으로 종교 활동에 참여하게 하도록 하는 것으로 둔갑하고 교육부의 고시와 서울시교육청의 권고는 왜곡되게 변질되고 있다. 마치 봉사와 선교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와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해외 선교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종교사학의 종교교육과 종교 활동이 자율을 가장하며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차별하는 것처럼, 교사들도 자기 최면의 늪에 빠지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서울시교육청은 학교장 재량, 종교사학의 건학이념을 이유로 외면하고 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동등한 관계가 아님에도, 구체적인 세부 인권기준이 없이 방치해온 결과 학교 현장은 ‘종교자유 침해와 차별의 실험장’이 되어 가고 있는 모양새다. 정신적인 기본권이 침해되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강자인 선생님의 권유를 잘 들어야 성적을 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선생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 약자로서 민주시민교육이나 인귄 교육이 아닌 굴종하고 줄서기를 중학생 시절부터 배우게 되는 것이다. 오는 8월 31일 금요일 오후4시 서울 중앙 지방법원 민사법정 455호에서 강의석씨(현재 서울법대 3학년 재학)가 2005년 10월에 제기한 ‘종교자유 침해 손해배상 소송’의 결심공판이 열린다. 강의석씨는 지난 2004년 서울 대광고등학교에 재학 중에 예배선택권을 주장하다, 퇴학처분을 받고 45일간을 단식하는 등 종교사학의 종교교육과 특정종교의식이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원고인 강의석씨는 3년이 지났지만 종교사학의 현실이 변화된 게 없다고 법정에서 밝히고 있으나, 피고인 서울시교육청은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주장하고, 대광학원은 학교도 피해자이며, 종교의식을 예전부터 자율적으로 진행해 왔으며 지금도 자율적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사학에서 일어나는 자율을 가장하는 인권 침해, 더욱 교묘해진 종교 강요, 서울시교육청은 이제라도 인권침해에 대해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92 | 추천: -1
전종휘/ 한겨레 기자 때론 답답하다. 늦은 밤 두들기고 있는 이 컴퓨터가 간혹 가다 말썽을 빚을 때면 ‘그놈’이 그리워진다. 반 푼짜리 알량한 글을 써 목구멍의 거미줄을 걷어내는 내게 컴퓨터의 느닷없는 파업이란, 더구나 마감시간을 코 앞에 두고서는 더욱, 당혹스런 것이다. 그래서 더, 내겐 그놈이 필요하다. 리셋 단추. 그놈은 16년 전 대학 1학년 때 몸담은 학교 영자신문사 사무실의 386AT 컴퓨터 본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첫 만남이었다. 당시 컴퓨터를 켜기 위해서는 5.25인치 도스 디스켓을 반드시 꼽고 전원을 켜 야했던 286XT 컴퓨터에 비해 하드디스크라는 획기적인 물건을 달고 태어난 386 컴퓨터는 그야말로 경이의 대상이었다. 그 빠른 처리속도며 각종 프로그램을 자체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은 획기적인 발상의 결과물로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하게 여겨진 386 컴퓨터도 잦은 오류에 시달렸다. 자주 멈췄다. “이스케이프 키를 눌러도 반응이 없으면, 컨트롤, 알트, 딜리트 키를 동시에 눌러보고, 그래도 안 되면 리셋 단추를 꾹 누르세요.” 방학 중 들은 컴퓨터 수업 시간에 강사는 이렇게 상황 대처 요령을 가르쳐줬다. 그냥 전원 단추를 눌러 꺼버리는 것보다 훨씬 컴퓨터에 가해지는 충격이 작다면서. 그놈의 효능은 녹록지 않았다. 컴퓨터가 부리는 모든 말썽에 그놈은 항상 통했다. 그놈을 부른 뒤 잠시 뒤에 보면 컴퓨터는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런 프로그램도 실행되지 않은, 맑고 단순한 상태로의 회귀. 찜찜함 없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새로운 상상을 기획할 수 있는 자신감의 재충전. 다시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고 새하얀 백지 위에 멋진 그림을 그리고픈 열정, 바로 그곳에 걸린 방아쇠와 같은 게 그놈이었다면 너무 심한 과장일까? 그러나 지금 내겐 그놈이 없다. 해거름녘 학교 앞 호프집 벽에 걸린, 멋진 몸매에 비키니 차림의 달력 모델에게 윙크를 보내며 맥주 500cc 4잔을 연속 ‘원샷’한 뒤 필름이 끊겨버릴 정도로 객기 충만하던 학생 기자는 어느덧 3명의 식솔을 거느린 8년차 직업 기자가 되었건만, 16년 전 내게 카타르시스를 안기던 리셋 단추가 내 컴퓨터에는 없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답답할 때가 있다. 그래서 그놈이 더욱 그립다. 그러고 보면 그놈이 필요한 게 어디 나뿐이랴. 눈을 조금만 돌려보자.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오류와 시스템 정지 상태에 있으면서도 리셋 단추를 누르지 않고 있는 분야와 사람들이 숱하다. 여전히 일탈 방지의 이름으로 청춘의 꽃을 피워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제 머리와 옷 모양의 자유를 주지 않고 있는 초중고 교실에도, 진리 탐구와 비판적 지식인 양성보다는 높은 토익점수와 직장이 요구하는 기술을 갖춘 취업준비생 육성 쪽으로 학풍을 이끌고 있는 대학 총장들의 방에도, 실력보다는 미국 대학 박사학위를 더 우러르고 여기에 편승해 없는 학력을 만들어 사람을 속이는 이들의 마음 속에도, 그놈을 연결해놓고 한번 눌러볼 순 없을까. 지난 7월에 있었던 구속노동자 석방 및 사면복권을 위한 공동행동 기자회견 모습   해묵은 분단의 철책을 앞에 놓고도 남북 정상회담 소식이 선거판에 미칠 영향만을 셈하느라 주판알 튕기기에 바쁜 정당인의 손가락과,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나라를 이끌어갈 비전이 보이지 않음에도 무조건 ‘대통합’이라고 허무하게 침 튀기는 정치인들의 입, 그리고 자신의 선거를 돕다 불법을 저질러 선거법을 위반한 정치사범과 회삿돈을 내 돈처럼 꺼내어 쓰다 꼬리를 밟힌 천박한 경제사범들은 형기에 못 미쳐 감옥에서 마구 꺼내주면서도 국제사면위원회가 인정한 양심수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 등에게는 형량 그대로의 감옥살이를 방조하는 대통령의 ‘짝가슴’에도, 리셋 단추는 정녕 필요 없는 것일까. 광복절 62돌을 맞으며, 정의가 불의에서 광복하고 자유가 억압에서 광복하며 공존이 차별로부터 광복하기 위해, 사회 곳곳에서 리셋 단추가 눌리어지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나는 직업적으로 쓰는 나의 반 푼짜리 글이 우리 공동체의 ‘그놈’이 되길 여전히 꿈꾸어본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35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명이 운명을 달리하였고, 여전히 21명이 인질로 잡혀있어 생사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벌어져서는 안 될 사태가 벌어졌기에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그분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합니다. 하지만 이를 보도하고 있는 언론과 인터넷상에서의 이야기들이 추측과 오해를 증폭시킬 뿐 현 사건을 종교적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6월 고 김선일씨의 경우처럼 문제의 본질이 전쟁과 파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이 이슬람과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에게 돌아갔던 것과 같은 양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래의 글은 올해 초(1월)에 제가 활동하고 있는 ‘경계를 넘어’ 라는 단체로 한 여고생이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을 적은 글입니다. 이 글이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직접 관련이 있지는 않지만, 이번 사태의 문제점이 어디에서 출발하였는지를 판단케 해주는데 도움 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 : 현재 이슬람 문화권 지역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많은 인권 침해가 없을 수가 없어요! 여기에 대한 세계의 대책은 무엇인가요? (명일여고 이xx) 답 :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구상의 분쟁 중 많은 곳이 이슬람 문화권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소말리아 등의 나라는 인구의 95%이상이, 이슬람을 믿는 사람, 즉 무슬림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 또는 무슬림은 폭력적이고 테러리즘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잘못된 정보와 오해에 기반으로 한 추측입니다. 더욱이 미국에서 2001년 발생한 911 사건으로 인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기독교 국가는 이슬람을 테러의 온상지로, 무슬림을 극단주의자로 묘사해 왔습니다. 그 이후 미국은 911사건의 주범으로 알 카에다라는 조직을 섬멸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고, 그의 연장선상에서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였지요. 그리고 여전히 테러와의 전쟁을 명목으로 최근의 소말리아에 공중폭격을 감행하였고, 팔레스타인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제 1 정당인 된 하마스라는 단체에 테러리스트 딱지를 붙여서, 팔레스타인에 유입되는 인도적 국제 지원금을 막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어서 내부의 분쟁을 촉발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분쟁의 원인과 그 시작점에는 이슬람은 폭력적인 종교이고 무슬림은 극단주의자라는 사고가 자리 잡고 있어요. 저에게 처음 이 질문을 접했을 때 질문을 하셨던 님도 이러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 속에서 질문을 시작하시지는 않았는지 조금은 걱정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해와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질문에서 사용했던 단어들을 풀이하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릴까 합니다. 이슬람? 이슬람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과 분쟁? 앞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의 주류 언론이 세상의 뉴스를 만들고 있는 현실에서, 이슬람처럼 그 본디 의미와 내용이 뒤틀린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이라고 하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을 들면서 개종을 원치 않는 사람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며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고 본디 이슬람은 전 세계의 3대 종교 중 하나로써 알라를 믿고 무함마드를 마지막 선지자(신의 뜻을 알리는 예언자)로 여기는 종교입니다. 여기에서 알라는 기독교나 유대교가 믿는 유일한 신, 즉 하느님과 동일한 신입니다. 가끔 한국에서 알라신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고 알라는 곧 유일신 즉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 칭하며 그들은 기독교의 성경처럼, 꾸란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적혀진 경전을 읽으며, 그 안에 적혀진 하느님의 말씀을 삶에서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는 한국 이슬람교 중앙성원 www.koreaislam.org 이나 한국 이슬람 학회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세계 최대 무슬림 인구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의 남자 무슬림들의 예배모습 전체 인구 중 다수의 사람들이 무슬림인 나라를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중동 즉 아랍지역에 무슬림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전체 무슬림은 약 16억 명으로, 아랍, 중동지역의 무슬림은 전체의 18%정도이고 나머지 82%는 비 아랍지역에 있습니다. 30%의 무슬림들은 인도대륙에, 20%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 17%는 동남아시아에, 10%는 구소련에서 독립한 중아시아의 나라들과 중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기에 이슬람 문화권의 분쟁지역이라는 질문은 몇 몇 이슬람국가에서의 분쟁으로 수정이 되어야 하겠지요. 분쟁, 그 원인과 인권침해 현재 이슬람 국가 내에서 분쟁이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팔레스타인지역이 대표적이고 코소보 사태,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 체첸과 러시아, 소말리아와 이디오피아 분쟁 또한 그 내면에는 종교적 이유가 있어요. 그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많은 분쟁과 내전 등이 진행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경우에는 가장 표면적인 이유를 살펴보면, 2001년 911사건 이후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한 알 카에다 그룹을 911사건 주범으로 선언하였고, 2002년 미국의 침공 이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던 탈레반 그룹이 알 카에다를 비호하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여 2001년 겨울에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했고 2002년 4월에 미군을 중심으로 한 동맹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지상공격을 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알 카에다 색출작업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폭 등으로 인하여 사망한 민간인 수만도 500여명이 넘고 수천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만 명의 난민을 발생하였습니다. 미국을 위시로 한 동맹군은 약 3개월간의 지상 작전을 끝마치고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탈레반에서 하미드 카르자이에게 넘겼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전히 많은 미군을 비롯한 동맹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에 과거 탈레반 정권 군대와 민병대들이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과 동맹군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어 민간인과 동맹군의 사망자수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라크에서의 미군병사 다음으로 이라크의 경우에는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를 문제 삼아 미군을 중심으로 한 미 동맹국의 군인들이 2003년 3월 이라크를 전격으로 침공한 경우입니다. 미군은 정확히 3월 20일 첫 공습을 감행했고, 바로 지상군이 투입되면서 침공이 시작된 지 한달도 되지 않아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하였고, 5월 초 전쟁 종료 선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이라크에서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이라크 내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을 침공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침공을 감행했고 대량살상무기를 밝히지 못하자 알 카에다를 비롯한 테러집단이 이라크에서 활동한다는 이유를 만들어 냈으며, 이라크에 강제적으로 자신들의 질서와 가치, 이념을 주입했습니다. 이라크 침공이 정당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수천 년간 자신들의 질서를 가지고 살아왔던 많은 이라크 인들은 당연히 저항을 했고, 이에 미국은 군사작전으로 화답하였습니다. 저항과 군사작전은 피의 악순환을 가져왔고 이라크 내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침공이 종료된 후부터 지속된 점령은 이라크 내의 일부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과도한 힘을 실어주고, 일부의 정치세력은 따돌림으로써 내부 갈등을 증폭시켰습니다. 이에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라크내부 종파 싸움이 치열하다고 하면서 이 갈등이 미국 점령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묘사를 하지만 미국 점령이전에는 이라크에서 수니파, 시아파 구분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의 경우는 1948년 이스라엘이 서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수천 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건국을 선언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아랍지역의 분쟁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 분쟁의 요인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실현시키려 했던 정치적 시오니즘(유태 민족주의)과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잘못된 정책들로 인한 것입니다. 특히나 영국은 제 1차 세계대전 중 중동을 지배하기 위하여 상호 모순된 약속을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이중으로 하였고, 영국, 프랑스 상호간에 중동지역의 분배를 협정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문제를 탄생시킨 장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는 팔레스타인평화연대 www.pal.or.kr 로 가시면 얻을 수 있습니다. 1948년 일방적인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하여 수백 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난민 신세가 되었고 주변국을 떠돌아야 했습니다. 주변 아랍국에서는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여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1956년 제 2차 중동전쟁, 1967년 제 3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지만 번번이 패배하였고, 이스라엘은 3차 중동전쟁을 통하여 팔레스타인 본토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랍국의 패배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조직되었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요구와 희망을 대표하는 단체로 발전하였고, UN을 비롯한 100여개의 국가에서 합법적인 기구로 승인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아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이스라엘은 1973년 4차 중동전쟁, 그리고 1982년 레바논 침공 등 아랍지역 긴장을 고조시켰고, 내부적으로도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내에 계속적인 정착촌을 건설하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탄압함으로써 분쟁을 계속 유발하였습니다. 1987년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 트럭이 자발리야 캠프의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운 2대의 트럭을 고의로 들이받아 팔레스타인 노동자 4명이 사망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중봉기(인티파다)가 시작하였습니다.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산되었지만 이스라엘의 강경 무력진압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사망자 1,392명이 발생하였고 어린이도 이중 353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미국의 중재에 따른 오슬로 평화협상으로 긴장국면이 완화된 듯 하였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땅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태도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문제는 악화되었고,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말리아의 난민들 이러한 분쟁으로 인하여 인권침해는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와 같은 경우에서는 미국의 점령이후 민간인 사망자의 수가 조사기관마다 다르지만 최소 6만에서 최대 60만 명에 이르고 부상자는 그 수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대가족을 구성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라크의 경우에서 보면 적어도 식구 중, 가족 중 한명은 점령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라크와 같은 경우에는 1991년 걸프전으로 인하여 수만 명이 사망하였고, 그 이후 미국을 위시로 한 UN의 경제제재로 인하여 15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그 중 삼분의 일 이상이 어린이였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는 오랜 내전으로 인하여 수백만의 난민이 발생된 상황에서 미국의 공습과 지상공격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의해 정권은 바뀌었지만 오랜 내전 속에서 고통을 받았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는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후로 수도 카불등지와 같은 곳은 탈레반 잔존세력 색출을 위한 군사작전으로 인하여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예를 들면, 빵을 사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온 아이들을 이스라엘 군인이 조준 사격을 하여 사망한 사건도 있었고,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졌다고 하여 그 마을 어린이들 팔과 다리를 이스라엘 군인들이 모두 부러뜨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내 가자지구의 발전소를 폭격하여 140만 가자지구 사람들은 전기가 없는 문명시대 이전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는 지극히 일부의 예일 뿐이고 이러한 상황들이 매일처럼 반복되고 있습니다. 인권의 침해가 아닌 인권의 말살입니다. 세계의 대책? 일단은 여기서 세계가 UN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미국이라면, 세계의 모든 대책은 지금 당장 중단되어야 합니다. 앞서 밝힌 바대로 미국은 911사건 이후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이슬람을 악마화, 테러리스트의 온상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엄청난 부국, 군사강대국이 되었고, 소련의 몰락과 냉전시대의 붕괴이후 자국의 부와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세계 각국에 전쟁을 일으켰고, 공산주의의 대체용으로 이슬람을 선택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슬람 지역 국가의 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경우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 쫓는 이스라엘 건국의 출발은 영국이었지만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난 후 미국은 수십억 달러의 군사, 경제 지원을 계속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간접적으로 키워왔습니다. 코소보 사태 당시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한 미군 병사. 아이들에게 산타역할을 하지만 당시 무수한 미군 전투기 오폭으로 인하여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함 지금도 미국은 세계의 경찰국이라고 자칭하면서 이라크에 군대를 계속 보내고 있고,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소말리아에도 첨단 비행기를 이용하여 폭격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유는 항상 테러집단을 처벌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행동에 의해 죽는 사람은 대부분 민간인들이고 여성이고 어린이입니다. 더욱이 문제인 것은 미국의 미친 전쟁에 한국을 비롯한 많은 서구의 나라들이 동조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많은 국가들이 미국의 영향력 때문에 비겁하게 미친 전쟁에 타협을 하거나 협조를 한다는 것이지요. 이미 한국도 아프가니스탄 전쟁 시부터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었고,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세계에서 영국 다음으로 많은 3천명 이상의 군인을 이라크에 보냈고 지금도 수천 명의 한국군이 이라크 북부 아르빌 지역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한국정부는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에 의한 자살폭탄공격에 대해서만 테러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물론 이슬람 무장세력 내에 알 카에다와 같은 급진 테러 조직과 납치와 범죄를 행하는 단체가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단체가 이슬람을 대변하지도 않을뿐더러 전체의 5%도 안 되는 세력입니다. 이슬람지역 대부분의 목소리는 테러와 납치는 신의 뜻에 반하는 행위라고 하며 범죄행위로 금기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서구 언론에 의해서 전달되지 않고 전체의 5%도 안 되는 목소리가 전체의 목소리인양 보도되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이 모습을 이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UN을 비롯한 국제기구는 더 이상 세계 평화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합니다. 수백여 개 국의 회원국으로 구성된 UN도 실상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깐요. 팔레스타인의 경우에서 UN은 1967년 이스라엘의 점령지역의 철수를 담은 결의안 242호를 공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지금껏 점령지에서 철수하지 않고, 점령지역을 오히려 넓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당시 유엔 안보리에서는 이라크 침공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미국은 단독으로 침공하였고 그 이후 UN 안보리로부터 사후 승인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두려움을 느끼며 평화를 사랑합니다. 말도 안 되는 전쟁이 발생한다면 그 전쟁을 반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쟁과 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과연 일반 사람들 대부분 반대하는 전쟁이 왜 계속 일어날까요? 그것은 소위 국가의 높은 곳에 있는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확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전쟁이 필요하다고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여기에 소위 메이저 언론들과 군수산업 자본가들도 결탁하여 전쟁과 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흔들립니다. 때로는 모른척합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권력자와 자본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잘못된 정보로써 전쟁의 필요성을 주입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전쟁과 분쟁은 쉼 없이 계속됩니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지역의 분쟁의 역사는 그들 자체가 호전적이고 비평화적이어서가 아니라 서구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나라들은 이를 방치하거나 무관심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그 답의 시작은 전 세계 사람들이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현실을 똑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전쟁과 분쟁으로 인한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고, 나의 고통으로 받아 안아야 합니다. 마치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식이 되어야겠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전 세계 사람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고통을 끝내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고, 더 이상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에 의한 전쟁은 꼬리를 감추고 저 멀리로 가버릴 것입니다. 지금 이슬람 지역의 분쟁과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 받는 그 곳의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손을 잡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98 | 추천: -1
장윤미/ 국민대 학생 공해 속에서 현기증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버스에 올라 땀내 나는 사람들 사이에 몸을 섞으며 안정된 위치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 문득 시선을 돌린 곳에 보이는 글귀가 내 머리를 더욱 지끈거리게 했다. '고된 입시, 너는 더 강해질 수 있다.‘ 버스에 부착된 입시학원의 광고 문구였다. 모든 수험생들을 철인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광고 속의 한 입시학원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불편했다. 광고에 고무되기는커녕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대체 왜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하는 걸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데 왜 우리는 더욱 지독하고 치열해져가는 입시에 자신을 맞추려 하며 행복은 커녕 자꾸만 불행해져 가는 걸까. 더욱 지독해지는 경쟁사회. 누군가를 밀어내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는 서바이벌 사회. 입시를 넘어 대학사회로 들어왔지만 더 이상 대학은 자유와 사색의 장이 아니다. 대학 졸업장은 취업을 위한 자격증에 불과한 시대가 되어 버렸고, 취업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은 고등학교보다 더 심해졌다. 경쟁사회로 변해버린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대학생들이 꿈꿀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력서를 빛나게 할 높은 학점과 평균 이상의 영어점수 그리고 해외연수, 인턴생활과 같은 규정된 경험들 뿐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고된 입시 공부를 하고 고된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한다. 현재의 불행을 삼키면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대체 왜 우리는 그 ‘행복’의 구성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만 할까?   사진 출처 - 필자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개의 꿈이 있기 마련인데, 경쟁을 부추기기만 하는 사회속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사회가 정해준 행복을 얻기 위해 획일적으로 경쟁에 몰입하는 것 뿐이다. 오로지 명문대를 향해, 좋은 회사에 내 자리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서 100명의 사람들이 서로를 밀어내고만 있다. 하지만 경쟁속에서 모두가 승리자가 될 수는 없다. 승리자가 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밀어내야한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될 뿐이다. 그리고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경쟁은 사람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든다. 최근 대학가에 불고 있는 공무원 열풍을 보면 이러한 모습들이 분명해진다. 공무원으로 채용되는 인원은 정해져 있는데 전국의 수십만 명의 대학생들이 고시에 목을 매고 있다.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하나로 말이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진정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대학생들이 몇 퍼센트나 될까. 그저 안정된 삶에 대한 희망하나로, 남을 밀어내야만 하는 소모적이고 팍팍한 경쟁사회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과연 이 치열한 경쟁 전차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자꾸만 높아가는 경쟁이 대체 우리에게 무얼 안겨주는 건지, 정말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왜 희망을 부추기는가. 더 강해질 수도 있다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부추기는가. 왜 다양한 꿈을 꾸지 못하게 하는가. 아니, 왜 우리는 다양한 꿈을 꾸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 몸에 붙은 불안의 이물질을 떼어내고 내 시선의 프레임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없다. 우리는 그저 이것이 삶이라고 자위하면서 생활의 의욕만을 펌프질하는 사회에 공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다시 사유해보자.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자꾸만 불행해지는 우리의 모습을 관망해보자.경쟁에서 승리하는 1명이 되는 것보다, 99명의 패배자들이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 더 행복한 일인지도 모른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580 | 추천: 0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90년대 중 후반 무렵 한국 문학계에는 뚜렷이 드러나는 하나의 트랜드가 있었다. ‘후일담’ 문학이라고 명명된 이 흐름은 박일문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같은 세기말적 우울증과 패배의식이 짙게 깔린 작품들을 필두로 영화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문화현상에 영향을 끼친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에 생겨난 이 흐름은 비단 한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무장 봉기와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에 대한 열망은 서서히 극단적이고 순수한 낭만주의의 한 종류로 인식되어갔다. 세기말을 목전에 앞 둔 1997년에는 쿠바 무장봉기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사령관’ 체 게바라를 추모하는 음반이 프랑스에서 제작되고 전 세계적으로 그의 사진집이 제작되었으며 그의 얼굴을 담은 온갖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현상은 실패했다고 규정내린 거대담론에 대한 향수이자 자신에게 정면으로 항거하던 위대한 혁명가의 일생을 로맨틱하고 열정적인 팝 아이콘으로 교묘하게 바꾸어 한 몫 챙기려는 자본의 타산성 짙은 의도였다. 공산주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남미대륙을 잠식해 들어가는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무장봉기노선을 선택한 엄격하고 영민한 한 혁명가는 단지 불꽃처럼 자신의 삶을 불사른 열정만이 도드라지는 방랑가이자 자유주의자로 인식되어졌다.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담고 있는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가 이러한 트랜드에 일조하고 있다는 일부의 비판을 전적으로 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제작자인 로버트 레드포드의 색깔이 너무 진하다는 평가와 함께 체 게바라에 대한 인물의 창조 과정이 거칠다는 지적이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미국의 독립 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를 창시한 인물로 사회의 부조리한 억압에 대한 항거, 자유, 고통 받는 민중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지만 결국 ‘미국적 영웅신화’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길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시작된 남미 여행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버금가는 브라질의 시네바노보의 경향을 띠고 남미 민중의 일상과 정서를 카메라에 옮겨온 월터 살레스 감독이지만 체 게바라가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 그의 삶의 길목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이 여행기를 그저 감동적인 휴머니즘으로 전환시킨다.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1952년 1월 의대생이던 23살의 체 게바라와 생화학을 전공하는 친구 알레르토 그라나다의 “억누를 수 없는 열정과 길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떠난 남미대륙 횡단 여행기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체 게바라가 직접 쓴 ‘나의 첫 대여행’과 ‘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즈-남미여행에 관한 기록’, 알베르토 그라나다의 여행일지인 ‘체와 함께 한 남미여행’을 토대로 쓰여졌다. 젊은 그들은 안데스 산맥, 칠레, 아타카마 사막, 잉카의 쿠스코에서 아마존 강에 이르는 장대한 여로를 계획한다. 4개월간의 야심찬 여행의 종착점 베네수엘라에서 어여쁜 아가씨들과 와인 잔을 기울이며 축하파티를 열 예정이었던 평범했던 대학생들은 8개월로 연장된 여행기간처럼 의도하지 못한 낯선 성장과 변화를 경험한다. 어릴 때부터의 고질병인 천식에 시달려야 했던 점을 빼면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큰 기복 없는 삶을 살아왔던 체 게바라는 남미 대륙을 횡단하면서 서서히 변해간다. 사진 출처 -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아르헨티나의 음악가이자 남미 악기 수집가이기도 한 구스타보 산토라챠의 연주는 풍광과 지역에 따라 그 지역 특유의 악기로 팜파스의 초원과 거대한 사막과 맑은 호수를 변주해 낸다. 그는 길 위에서 “삶의 불공평함”을 경험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의 힘이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던 인디오들의 삶의 터를 유린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경찰과 동행한 지주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평생 살아왔던 고향으로부터 쫓겨나 광산으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공산당원 부부로부터 한없는 연민을 느끼며 침략자의 야만과 폭력으로 쓰러진 고대 문명으로부터 아득한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어둑하고 눅눅한 칠레 재래시장에서 만난 민중들, 아마존 정글 사이 고립된 섬 안에서 마주친 나환자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인생을 향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들은 길 위에서 개인적 성장과 유적 인간으로서의 성숙을 동시에 경험한다. 월터 살레스 감독은 특히 산파블로 나환자촌에서의 체 게바라의 행적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남겨놓는다. 50여 년 전과 다를바 없는 남미 대륙의 현실 체 게바라 자신의 일기에서는 단지 한 단락으로 표현되어 있는 에피소드이나 영화에서는 중요한 클래이막스 장면으로 처리된다. 나환자들이 머무는 섬과 그들을 돌보는 의사나 수녀들이 생활하는 곳을 가로지르는 긴 강이 게바라에게는 안타깝게 분열되어가는 라틴 아메리카 민족의 은유로 다가온다. 그는 떠나기 전날 밤의 환송파티에서 나환자들이 머물고 있는 섬을 향하여 검은 강 속에 뛰어든다. 차가운 강물 속에서 장시간 수영한다는 일이 고질적인 천식환자인 체 게바라에게는 마치 사형선고와 같다는 사실을 이미 복선이 되는 에피소드로 관객에게 일러둔 상태에서 고통스러운 수영장면을 목격하는 일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보다는 “한순간 순간 숨쉬기 위해 삶 전체와 싸워와야” 했던 게바라의 투지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촬영 내내 50여 년 전 체 게바라가 경험했던 남미 대륙의 현실을 여전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는 월터 살레스 감독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진 출처 - 네이버   그러나 체 게바라가 그들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음을 고백했던 것과는 달리 살레스 감독의 시선은 내내 타자에 머물러 있다. 단지 외부자의 시선으로 연민과 동정만이 가득할 뿐인 것이다. 아름답고 경이로운 남아메리카의 풍광을 어느 누구보다 인상 깊게 담아냈으나 그 곳에는 갑작스레 출현하는 영웅만이 존재할 뿐 인간은 부재하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47 | 추천: 0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 1. "이 연사 힘차게 힘차게 외~칩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6월 25일 즈음이 되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목소리 큰 학생들을 선별해 ‘반공웅변대회’를 했던 기억이 있다. 반공 글짓기, 반공 포스터, 반공 표어 등등 이북 동포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 시키던 작업(?)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직도 이런류의 웅변대회가 남아있었다. 지난 달 어느 저녁, 밥을 먹다말고 바깥사람은 갑자기 뭔 생각이 났는지 깔깔깔 웃으며 낮에 있었던 얘기를 한다. 바로 ‘자유수호 웅변대회’. 자유총연맹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였는데 이것이 예전의 ‘반공웅변대회’하고 내용이 비슷한 것이었다. 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나와서 웅변을 하던 중에 갑자기 장난감 총을 꺼내 좌중을 향해 ‘두두두두’하며 총쏘는 시늉을 하더라는 것이다. 내용은 한국전쟁 얘기를 하며 뭐 그렇고 그런 주장을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그 날 저녁 우리는 부부싸움을 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 2. 우리 옆 동네 미술(조각)을 하던 나 보다 몇 살 많은 두 부부가 있었는데 작년 00군으로 이사를 갔다. 공교롭게도 그 집 아이와 바깥사람은 학생과 담임 선생님으로 만났다. 아이는 부모의 재능을 이어 받았는지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고, 학교 대표로 뽑혀 군대회 미술경시대회에 나갔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직접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 대회가 아니라 학교에서 그림을 그려 언제까지 군 교육청에 제출하면 된단다. 얼마가 지났을까 바깥사람은 속상해 죽겠다고 푸념을 털어 놓는다. 이유인 즉슨 옆 반 선생님이 제출할 그림을 거의 다 그려준다는 것이었고, 아이는 대상을 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대회에 나가서는 입상도 못 했다고 한다. 왜? 도대회는 학생이 당일날 대회장에 가서 직접 그리니까- 그 날 저녁 우리는 부부싸움을 했다. # 3. 미선이,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의해 저 세상으로 가던 해, 월드컵으로 전국이 들썩이던 2002년. 그 해 4월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 준비로 온통 분주하던 때, 나는 일본으로 세미나를 가게 됐다. 미군기지 환경오염실태 발표자로 추천되어 난생 처음으로 외국을 나가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 가기 전 부랴부랴 결혼식 준비를 끝내놓고 신혼여행 날짜만 잡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바깥사람은 학교에 얘기를 해서 휴가를 내야 한다고 했다. 여행사에 가기로 한 날 바깥사람이 만나자 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진정시키고 들어보니, 교감선생님이 지금은 학기 초라 여러 가지로 바쁘니 나중에 신혼여행을 가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울먹이며 가게 해달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알았다며 돌아서는 바깥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신혼여행간다고 빠지고 또 앞으로는 출산휴가다 뭐다 빠질거 아냐, 아무튼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정말 문제야, 문제”하더란다. 그 날 학교로 찾아가겠다던 나와 안된다는 바깥사람은 예비부부싸움을 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 4. 바깥 사람이 00교대 4학년이던 1999년 어느 날. 며칠 전부터 바깥 사람은 곧 있을 교생실습에 들떠 온통 그 얘기뿐이다. “무슨 옷을 입을까?” “몇 학년을 맡게 될까?” “아이들이 못 생겼다고 하면 어떡하지?”... 교생실습이 끝나기 전 날. 왠일인지 전화를 받지 않다가 오늘 학교 선생님들과 회식을 했다며 내일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다음 날 저녁을 먹으며 그 간 있었던 교생실습 얘기로 바깥사람은 내내 쫑알쫑알 거렸다. 설레임과 벅찬 그 첫 마음을 영원히 잃지 않는 좋은 선생님이 되라는 훈계도 해 줬다. 그런데 그 회식이 있던 날, 같이 갔던 친구 몇 명은 울고불고 했단다. 그 학교에 한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노래방에 가서 교생실습 나온 여학생들과 강제로 브루스를 추고 더듬고, 술을 먹이고...일명 성추행을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선배들 사이에서도 아주 유명한 선생이란다. 내가 조금은 흥분해서 “너도 브루스 쳤어?” 하니, “난 추자고 하는데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어. 괜찮아”한다. 그 날 우리는 예비 부부싸움을 했다. ======================================================================================= 바깥사람은 절대 이런 저런 학교일들이 문제가 되면 안된다며 신신당부를 했는데, 글로 옮기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또한 많은 좋으신 선생님들께도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학교 곳곳에는 이런 말도 안되는 현실이 있더군요. 나 하나만 잘하면 되겠지 하는 바깥사람에게 다그치기도 합니다. 가끔은 우리 아이를 계속 학교에 보내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부모의 한 사람으로, 선생님을 부인으로 둔 남편으로 훌륭하신 선생님들께 깊이 머리 숙여 부탁드립니다. 저희 부부 싸움 안하게 도와주세요.
2017-07-11 | hrights | 조회: 461 | 추천: 0
전종휘/ 한겨레 기자 “두발의 자유를 허하라, 복장 단속을 하지 말라, 함부로 때리지 말라.” 믿기지 않겠지만, 이런 요구들은 1987년 하반기 노동자 대투쟁 때 울산 현대중공업 등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내 건 것이다. 당시 회사 간부들이 작업장 입구에 `바리깡'을 들고 서 있다가 머리가 긴 노동자가 지나가면 붙잡고 그들의 두피에 직접 고속도로를 냈다고 한다. 생산직 노동자들이 옷도 자유롭게 입을 수 없었고, 툭하면 간부들에게 작업장에서 얻어맞았다. 그 때는 6월 항쟁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린 군사독재 정권이 직선제 개헌 약속을 한 직후였는데, 노동자들이 처한 인권 상황은 이처럼 말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거름 삼아, 20여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진보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시민들의 정치사회적 자유는 확대됐다. 국가권력이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지던 통제도 많이 약화됐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꽃은 싱그러움을 더하고 키도 많이 큰 듯하다. 그 꽃은 법제도와, 일반의 상식 등을 텃밭으로 삼고 자라왔다. 하지만 그 밭에는 독버섯도 여전하다. 분명, 사회의 발전 방향을 보았을 때 뿌리가 뽑혔어야 할 것들이 여전히 꽃 옆에 기생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되레, 그 꽃이 꽃이 아니지 않을까 싶게 의심하게 만드는 힘마저 느끼게 만든다. 그 독버섯의 이름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보안법과 집회및시위에관한 법률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걸 어떻게 표현하고 행동하는지를 법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처벌하는 게 바로 보안법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최근 국가보안법 사건 일지 그림 출처 - 한겨레 대한민국 군대와 관련해 이미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지식을 공개해도 처벌하는 게 보안법이다.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식이다. 그런데 6월 항쟁 당시 부산지역 상임집행위원이던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취임한 2003년 이후 보안법으로 구속된 이의 숫자만 이미 140여명에 달한다. 한나라당의 탄핵 뒤 이어진 여대야소 국면에서도 이 ‘리바이어던’의 목숨을 끊지 않은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또 다시 평화나 개혁, 대통합처럼 ‘동지는 간 데 없는데 나부끼는 깃발’을 내걸고 재집권을 도모하는 모습은 차라리 코미디다. 때로 미국 추종적인 듯 보이는 공무원들이 유엔과 미국의 철폐 권고를 무시하고 “그럼 간첩은 어떻게 잡느냐”며 이 법을 존속하기 위한 작태를 보이는 것도 심히 불편하게만 다가온다. 보안법의 든 자리가 형법의 난 자리보다 훨씬 더 커보일테다. 집시법은 또 어떤가. 6월 항쟁 때도 웬만한 집회는 대부분 불법이었다. 민주화를 향한 민중의 욕망이 분출되는 매일매일의 현장들이 법적으로는 모두 금지됐다. 심지어 그 해 7월 9일 1백만 명이 모였다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마저도 형식적으로는 불법 집회였던 셈이다. 지난 4월19일 명동에서 열린 '집시법 불복종 행동' 에 참여한 인권단체 회원들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부정직한 국가 권력이 반대의 목소리를 가장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집시법이다. 법 집행의 자의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보안법이나 집시법이나 오십보백보다. 시민의 헌법적 권리와 자유의 확보보다는 행정력 집행의 편의성에 관심이 더 많은 경찰에게 집시법은 참으로 편리한 도구다. 이 법도 현 정권 들어 올바른 방향으로 고쳐졌다거나 개정을 추진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권이 생존을 건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자신의 생존권이 걸린 이들이 반대시위를 할 때, 이 법은 정권의 뜻을 지키고 반대 목소리를 억압하는 데 가장 앞장섰다.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게 보안법과 집시법이다. 민주주의의 꽃이 봉오리를 맺으려는 데 주먹만한 우박을 뿌리는 악법이 바로 이 법이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목숨을 부지하는 이 법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들의 숨통을 끊을 자는 누구인가. 대선이 이제 6달도 남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민주 시민이거나 양식이 있는 국민이거나 양심 있는 시민인 우리들이 고민을 해야 할 지점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65 | 추천: 0
당신의 개입이 평화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는가? - 아프리카의 이라크 '소말리아'의 비극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지난 5월 15일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한국인" 선원 4명이 탑승하고 있던 2척의 어선이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2006년 4월 ‘동원호 납치’ 이후 다시금 한국의 언론에 소말리아가 언급이 되었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소말리아인근 해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자, 소말리아는 오래된 내전으로 인하여 나라가 피폐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유명한 한국 연예인이 자선(?)활동을 위해서 아프리카로 떠날 때 자주 언급이 되는 나라중 하나이기도 한 소말리아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약간 뜬금없지만 전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는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또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1960년 식민지 해방부터 최근까지의 소말리아의 상황 소말리아는 1960년 유럽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상황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그 이후 바렐 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독재정권의 시절을 겪었고, 이후 소말리아 내부 부족그룹과 군벌세력에 의해서 법과 질서가 없는 무정부 상태에 놓여졌다. 더군다나 1990년도 초반 엄청난 가뭄과 기근으로 인하여 수백만 명이 아사의 지경까지 갔다가 유엔의 긴급 식량지원으로 인하여 최악의 상태는 모면하였지만 계속되는 군벌간의 전투로 인하여 소말리아는 피폐해져만 갔다. 미국과 유엔은 군사작전을 동원하여 소말리아 대표군벌의 지도자 아이디드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면서 1995년에 미군과 유엔군은 소말리아로부터 철군을 하게 된다. 계속되는 무법, 무정부상황, 군벌간의 전투로 인하여 소말리아는 극도의 사회 혼란상황으로 치 닫게 되었고, 이 상황으로 인하여 1999년에 이슬람 상인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법정연대가 탄생되었고 전체 소말리아 인구의 95%이상이 무슬림인 소말리아의 종교적 조건과 이슬람 상인 자본의 결집으로 탄생한 이슬람법정연대의 영향력은 점차 확산되었다. 이에 자신들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한 소말리아 내부군벌들은 반테러연합이라는 것을 결성하여 이슬람법정연대와 대립하게 된다. 미국은 반테러연합에 자본과 군수용품을 지원하였지만, 이슬람법정연대의 영향력 확산을 막기에는 부족하였다. 2004년 인근국가 케냐에서는 유엔의 중재로 소말리아 주요 부족 지도자들이 모여 선거를 하여 소말리아 과도정부가 출범하였지만, 수도 모가디슈의 군벌들도 어쩌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이며, 인근 기독교국가인 에디오피아 국경에 위치한 바이도아 지역에서 유명무실한 존재로 남아있었다. 2006년 6월 이슬람법정연대는 수도 모가디슈의 군벌을 몰아내고 수도를 접수하였고, 계속적으로 그 영향력을 소말리아 전역으로 넓혀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에디오피아는 미국의 군사기술 지원과 자금, 군수품 지원과 소말리아 과도정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써 이슬람법정연대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소말리아로 진군을 하게 된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에디오피아 군은 개전 2주 만에 수도 모가디슈를 점령하고 2007년 1월말에는 실질적인 소말리아 전역을 점령하게 되면서 표면적으로 전쟁은 끝난 듯 보였다. 2007년 1월 이후 미국은 아프리카연합(AU, 이하 AU)을 통해서 평화유지군의 명분을 이용하려 했지만, 친미국가인 우간다를 제외하고는 여타의 AU국가들은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고, 소말리아에서 발을 빼려했던 에디오피아 군대는 소말리아에 계속 주둔하게 된다. 소말리아 과도정부는 가시적인 소말리아 평화를 위해 에디오피아 군대의 힘을 비러 각 군벌의 무장해제를 진행하려 했으나 실패하게 되고 에디오피아의 침공 시 교전을 피하고 소말리아 내부로 스며들었던 이슬람법정연대의 세력과 각 군벌은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에디오피아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어 소말리아 내부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반미시위중인 소말리아인들 사진 출처 - 재미존   특히나 3월말에 있었던, 에디오피아군과 모가디슈에 자리한 '하위예'부족과의 전투, 이에 기존의 이슬람법정연대의 전투 합류로 인하여 알려진 사망자가 1086명이고 부상자는 4000여명이 넘는 최악의 전투가 발생하였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또한 4월 중순에는 에디오피아 군대와 이슬람 무장 세력과의 교전으로 최소 165명이 숨지고 229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소말리아의 '엘만'인권단체가 발표했으며, 4월 21일에는 모가디슈에서 에디오피아군이 이슬람법정연대 진압작전 중 교전으로 인하여 52명이 죽고 120명이 부상당했다고 알려졌다. 또한 소위 AU의 "평화유지군"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우간다 군대 역시 계속적인 소말리아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3월 말의 최악의 전투 또한 그 시작은 우간다 군대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3월과 4월의 교전이 한풀 꺾인 5월 1일에 모가디슈로 진입하였지만, 5월 16일 저항세력의 폭탄공격으로 인하여 우간다 군인 4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더 큰 문제는 지속되는 에디오피아군과 지역 군벌, 이슬람법정연대그룹과의 교전으로 인하여 모가디슈 전체 인구 중 1/3에 해당하는 35만 명 이상의 소말리아 사람들이 모가디슈를 빠져나와 최악의 피난민의 상황이 되었고, 남아있는 모가디슈 소말리아 사람들도 급성 설사병과 콜레라에 시달리고 있으며 식량과 의약품, 깨끗한 물 등이 모두 부족한 상황이지만 교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유엔이 지원하는 구조대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소말리아 사람들의 고통은 외형적으로 정부가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지속되어왔던 무정부상태보다 더한 상황에 처해있다. 아프리카의 이라크 "소말리아" 현재까지의 소말리아의 모습을 보면 2003년부터 진행된 이라크 비극의 역사와 배경은 다르지만 또한 대단히 유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911사태, 테러와의 전쟁 선언 이후 미국은 이라크를 직접 침공하였고, 소말리아는 에디오피아를 내세워 간접 침공하였다. 똑같이 알 카에다라는 테러집단을 침공의 이유로 삼았으며, 현재 지배정부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 있으며, 국가 내부의 상황은 침공전보다 훨씬 더 악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결과적으로 작년의 이슬람법정연대 영향력 하에서의 소말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최소한의 질서와 평온이 유지되었던 상황이었지만 미국과 에디오피아, 그리고 소말리아 과도정부에 의해 이마저도 박탈당한 상태이다. 또한 그들 국가의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며, 또한 생존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상황에 처해있다. 더욱이 폭력이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폭력은 민중들의 삶에 내면화되어 사태의 해결방식 또한 폭력에 의존케 한다. 수도 모가디슈에서의 소말리아 아이들 사진 출처 - 잭켈리   현재의 사태를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는 현실타협적인 안으로써, 외세가 배제된 상황에서 소말리아 과도정부가 소말리아내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부족들의 권력을 일정정도 인정하면서 이슬람법정연대까지 포괄하는 연대체를 꾸리는 것이겠지만, 이슬람법정연대를 테러집단이라고 낙인찍은 미국이 그 배후의 영향력을 거두지 않는 이상 이는 이라크에서 당장 평화가 오는 것만큼 이나 힘든 일일 것이다. 이라크의 상황이 그러하듯이 외세가 계속적으로 개입될 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욱 꼬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이라크를 통해서 지켜보고 있다. 비극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그 해답이 없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유지, 확장하는데 있으며 그러는 동안 다수의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생존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는 비극의 상황 속에서 지내야 할 것이다. 이라크에서 "평화와 재건"을 자랑스럽게 수행하고, 레바논에도 군대를 파병하려는 한국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소말리아에서 지속되고 있는 전쟁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말리아인들의 불행과 고통의 책임을 미국과 제국주의, 과도정부, 에디오피아 이런 것들에게만 떠넘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정부도 그리고 그 정부 속에서의 나 역시도 이러한 구조와 연결 속에서 소말리아인, 이라크인들의 불행과 고통에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8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