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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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지난 주 정창윤씨를 면회하기 위해 안동교도소에 전화를 걸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돌려서 전화를 받더니 하는 말이 징벌 중이라 3월 13일까지는 면회가 안 된다는 거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금치(규율 위반을 이유로 재소자를 0.75평 정도의 좁은 징벌방에 가두고 외부와의 소통을 금지시키는 가혹한 징벌)10일이면 상당히 과중한 징벌인데 도대체 무엇 때문이냐”며 따져 물었다. “다른 수형자에게 불법 서신을 보냈습니다. 더 이상은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문득 며칠 전 정창윤씨가 편지와 전화로 다급하게 면회를 와달라며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면서 온 몸에 소름이 느껴졌다. 현재 안동교도소장인 한 모 씨는 부산교도소에 있을 때 교도관들에게 조사를 받는 모든 재소자들에게 사슬, 수갑 등 ‘계구’ 사용을 적극 독려하는 방침을 내렸고 이로 인해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권고까지 받았지만 “직원 사기 및 근무의욕을 위축시키는 것”이라고 반발하면서 오히려 “인권위 진정 등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은 직원은 위로·격려”한다며 포상까지 내린 문제의 인물이라고 했다.(<한겨레신문> 1월 25일자 참조) 정창윤 씨는 전국철거민연합 회원으로 2005년 6월 ‘오산 수청동 철거반대투쟁’ 때문에 구속 돼 지금까지 옥살이를 하고 있고 앞으로 1년은 더 있어야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그는 안동교도소에 2년 가까이 수감되어 있으면서 열악한 재소자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했고 2006년에는 그 때문에 한 달 동안 징벌을 먹기까지 했다. 지난 해 8월 정창윤씨는 같은 사동에 수감되어 있던 포항건설노조 심진보씨와 함께 쥐가 들락날락거리는 ‘푸세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고, 법정 공휴일 재소자 운동시간 보장, 생방송 뉴스 시청을 보장할 것 등을 요구하며 보름 넘게 단식투쟁을 벌였다. 두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정당했지만, 교도소 측은 예산 핑계를 대며 버티다가 여러 노동, 인권 단체들이 합세해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자, 화장실 개선 등 몇 가지 처우개선 요구를 수용하였다. 그 일이 있고나서 안동교도소는 점차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해가 바뀌자마자 정창윤씨로부터 편지가 온 것이다. 서신 검열을 의식해서인지 교도소 상황에 대해 에둘러 말하고 있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어렴풋이 그간의 사정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지난해 3월 사슬이 채워진 부산교도소 수용자 홍아무개씨의 발목에 깊은 상처가 패여 있다. 아래는 한아무개 전 부산교도소장이 재임 때 적극적인 계구 사용을 지시한 문건. 국가인권위원회 제공 사진 출처 - 한겨레 지난 1월경, 안동교도소에서는 교도관에 의한 재소자 폭행사건이 벌어졌다고 했다. 맞은 재소자는 스스로 ‘민주노동당 당원’이라고 밝힌 원 모씨였다. 인권을 억압하는 잘못된 법과 제도 탓에 억울하게 구속된 양심수들에게 감옥은 또 하나의 투쟁현장이다. 자신의 요구뿐만 아니라 직접적 연관이 없는 다른 재소자들의 개인적 불만이나 인권침해 사례까지 떠안고 교도소 측과 투쟁을 벌이면서 일종의 ‘해결사’ 역할을 떠맡아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나 정창윤 씨처럼 불의를 보면 용납하지 않고 단호하게 투쟁해서 안 될 것 같은 요구들도 쟁취해 내는 ‘투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정창윤씨는 원 씨로부터 구타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 같은 사동에 있는 심진보씨와 함께 ‘투쟁계획’을 짰다. 원 씨에게 우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부터 하라고 했고, 적절한 날을 잡아서 소내에서 함께 단식 등의 방식으로 강력하게 항의를 해보자고 권유했다. 구속노동자후원회에도 서신을 보내 시급히 연대해 줄 것을 호소했다. (다른 일정 때문에 개입할 시기를 놓쳐 한탄스럽다.) 세 사람이 D-DAY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교도소 측이 낌새를 챘다. 그들은 원 씨에게 먼저 접근해서 모종의 압력을 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3월 들어 먼저 싸워보자며 문제를 제기했던 원 씨가 갑작스레 국가인권위원회에 냈던 진정을 취하해 버렸다. 2월말 경 투쟁의 동지였던 포항건설노조 심진보 씨를 갑작스레 포항교도소로 이감시켰다. 예전에 심 씨가 가족들이 있는 포항으로 보내달라고 한 적은 있었으나 그동안은 콧방귀도 뀌지 않다가 왜 하필 이맘 때 이감을 보낸 것인지 석연치가 않았다. 그리고 나서 3월 4일, 정창윤씨에게 “불법서신 수수”라는 올가미를 씌워 징벌을 내렸다. 아직까지도 감옥에서는 다른 사람과 서신을 교환할 때 “소장의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는데(행형법 제18조) 정창윤씨가 피해자인 원 모씨에게 허가받지 않은 쪽지 편지-감옥 은어로 “비둘기”-를 보냈다는 게 징벌 사유다. 원 씨는 소 측의 압력에 굴복해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정창윤씨가 전달한 “비둘기”를 교도관들에게 넘겨주었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들끼리 쪽지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사실 같은 교도소내 재소자들끼리 편지를 교환하지 못하게 막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교도관들은 그동안 알아도 모른 체하며 지나칠 때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정창윤씨는 이번에 ‘금치 10일’이라는 중한 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간의 과정을 통해 징벌을 내린 교도소 측의 속내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우선 소 측은 문제가 된 ‘재소자 구타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외부로 알려지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또한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고 하니, 이번 기회에 인권문제라면 물불 안 가리고 저항하는 정창윤씨 같은 “골치 아픈” 사람들에게 본 떼를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와 유사한 일들이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일어나고 있다. 민주적 통제가 불가능한 감옥이란 폐쇄 시설에서 ‘교정’ 관료들은 재소자들을 그야말로 지배하고 있다. 지배를 받아야 하는 재소자들의 인권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그릇’과도 같다. 그나마 마련되어 있는 공식적인 통제장치들이 제 구실을 못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지난 해 8월 28일, 구속노동자후원회는 안동교도소 문제와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독거사동의 화장실을 비롯해서 정창윤, 심진보 씨가 제기했던 8가지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시정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무려 7개월만인 지난 2월 15일, ‘사건처리 결과’를 통지해 왔다. 하나같이 “인권침해에 해당하지 않”고 “구제조치가 필요하지 않”다는 둥의 무성의한 내용뿐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침해구제 제2위원회가 통보한 사항 중 몇 가지만 훑어봐도 이들이 정말 안동교도소를 갔다 왔는지 의심스럽고, 설사 갔다 왔다 해도 소 측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반영한 듯하다. 안동교도소는 겨울에 난방시설이라고는 사동 복도에 설치된 라지에이터가 전부고 재소자들은 온기 하나 없는 마룻바닥에서 온수를 담은 페트병을 끌어안고 새우잠을 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에 대해 “라지에이터를 통하여 난방을 하고 수용 거실 내 온도를 측정하여 난방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조사결과 인권침해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며 기각결정을 내렸다. 거실과 복도는 두터운 벽으로 막혀있는데, 라지에이터를 틀어준다고 해서 실내 온도를 얼마나 끌어 올릴 수 있을까? 몇 몇 교도소에서는 온돌을 설치하거나 전기 매트를 깔아주는 방식으로 난방을 하고 있는데, 이런 곳과 비교하면 안동교도소 재소자들은 분명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UN 피구금자 처우에 관한 최저기준규칙(제60조)이 규정한 “유사성의 원칙”(수형생활과 자유생활 사이의 차이를 극소화 할 것)에 비춰보면 어림없는 수준이다. 행형법상 매일 1시간 이내 운동시간을 보장하도록 돼 있는데도 안동교도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주 5일 근무 시행이후 일요일과 공휴일에 재소자들에게 운동을 시키고 있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근무자 인력의 운영상 불가피”하므로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이명박 정부 아래서 재소자 권리 보장을 위해 당장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그렇다면 재소자들이 일요일과 공휴일에 1시간 정도 운동할 권리를 영원히 박탈당할지도 모르는데 태연하게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소수자 종교의 자유 보장과 관련한 진정, 구체적으로는 무슬림들의 종교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는데 국가인권위원회는 동문서답 하듯이 “매월 종교 집회를 실시하고 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며 기각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종교집회는 물론 매월 이루어진다. 종교집회는 사회에서는 보통 매주 1회인데 감옥이라고 해서 매월 1회만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의 요구는 이슬람교를 비롯한 상대적 소수 종교인 경우에도 어떤 식으로든 종교집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가 감옥인권 개선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갈수록 현실에 안주해서 정부 관료들과 똑 같이 ‘상황의 불가피성’만을 되된다면 인권 진전에 도움이 안 되거나 걸림돌 밖에 될 게 없다. 만일 국가인권위원회가 현재 안동교도소장이 부산교도소에 재직하면서 저지른 “계구”착용 남발 등 명백한 재소자 인권유린과 위원회의 권고마저 이행하지 않는 안하무인식 태도에 분명하게 경종을 울렸다면 안동교도소에서 이와 같은 구타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정창윤씨에게 부당하게 징벌을 가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안동교도소의 최근 상황은 일시적으로 감옥인권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서 안심할 게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더 커다란 투쟁으로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 준다. 안동교도소장은 지금 당장 정창윤씨에 대한 부당한 징벌을 철회하고, 재소자 구타사건에 대해 진상을 밝혀라!
2017-07-11 | hrights | 조회: 395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보호”라는 단어는 참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사전을 찾아보니 영어로는 “protection", "잘 돌보아 지킴”, “잘 돌 보아 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요즈음 들어 부쩍 한국 사회에서 “보호”라는 말이 권력관계를 상징하며 특정한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위선적인 용어로 쓰인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다. 출입국 관리법(제51조)을 보면 “불법 체류 외국인”이라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도주하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는 경우” “보호명령서를 발부받아 그 외국인을 보호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출입국관리법은 “불법 체류 외국인”, 주로 이주노동자를 단속할 근거가 되는 모법이고, 실제 법이 운용되는 현실을 볼 때 위에 있는 법조항에서 “보호명령서”는 “체포영장”으로, “외국인을 보호할 수 있다.”는 “외국인을 체포 또는 구금할 수 있다.”로 정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법무부는 “출입국관리법상 외국인의 단속 및 보호는, 불법 체류 외국인 출국이라는 행정목적을 담보할 대체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출국시까지 출국준비를 위한 여권·항공권 마련, 체불 임금 해결 등을 위한 최단기간의 집행보전수단을 의미”하므로 “신체의 자유 제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형사범의 구금과는 그 목적이 달라” “외관만으로...형사사법절차의 인신구속과 동일한 선상에서 판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한겨레 신문 “왜냐면”/박재완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정책본부 사무관] 하지만 전국의 교도소(구치소), 경찰서 유치장 등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외국인 보호소”라고 하는 곳이 적용받는 법규가 다를 뿐 인권침해 정도가 훨씬 더 심하기 때문에 “형사사법절차상 인신구속”과 내용적으로 다르다고 볼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지난 1월 4일 나는 화성 외국인 보호소를 다녀왔다. 슈바슈 부타토키는 네팔출신 이주노동자이고 ‘이주노동자 노조’ 조합원이다. 그는 지난 7월 3일경 수원지역에서 열렸던 “경기지역 차별철폐 대행진”에 참가하려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단속” 자격이 없는 경찰관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다. 그는 구금되자마자, 절차상 하자가 있는 법 집행에 항의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그 결과를 기다리며 7개월째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슈바슈의 경우처럼 ‘강제단속’ 과정에서는 무수히 많은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당연히 자기 방어권 차원에서 이의제기를 할 수 있고 이러한 절차는 지금보다 더 충분히 보완되고 강화될 필요가 있다. ‘강제단속’을 당해 “보호소”에 잡혀 온 이주노동자들은 권리 구제절차(알량한 수준이지만)에 대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문제를 제기해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은데다 무엇보다 감옥과 다를 바 없는 “보호소” 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분노스럽지만 정부의 강요에 따라 순순히 강제출국을 당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전국의 “외국인 보호소”에는 슈바슈를 비롯한 상당수 이주노동자들이 난민신청과 “보호 해제”등 권리를 찾기 위해 고통스런 수감생활 속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에게 “보호소”는 잠시 거쳐 가는 곳이 아니라 ‘형사범’이 생활하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역할을 한다. 설사 그들 대다수가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이라 하더라도 출입국관리법에도 규정되어 있듯이 “피보호자의 인권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며 국적,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한 차별”은 없어야 한다. 지난 해 12월 24일, 슈바슈는 크리스마스이브 종교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신청을 했지만 직원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 슈바슈가 항의하자, 담당 직원은 “너 죽을래!”라는 말과 함께 옷소매를 끌어당겨 주저앉힌 다음, “여기서 기도해”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화성보호소 측에서는 ‘폭언, 폭행한 사실은 없다.’며 강력 부인했고, 종교행사에 참석 못한 것도 슈바슈가 그 시간에 면회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슈바슈는 그날, 면회를 하지 못했다. 누군가 면회를 왔다 그래서 면회실로 달려갔지만 아무도 없어서 곧장 방으로 되돌아 왔다고 했다. 양쪽의 말이 전혀 다르다. 나를 비롯해 “화성보호소”를 항의 방문했던 경기지역 노동, 인권 단체 활동가들은 소장에게 슈바슈를 면담했느냐고 물어 보았다. 소장은 대뜸 “내가 어떻게 일개 보호 외국인을 면담할 수 있느냐?”고 말한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사건이 있은 지 열흘이 지났지만 “보호소” 직원들의 이야기만 들어보고는 우리들에게 “사실 무근”이라며 발뺌을 계속했고, 슈바슈를 “NGO 빽”만 믿고 거만하게 구는 사람쯤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2월,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여수외국인 보호소 화재참사 추모식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화성보호소는 전국에서 가장 큰 “보호 외국인” 수용시설이다. 하지만 수감된 이주노동자들의 처우는 감옥 수준에도 못 미친다. 감옥에서는 1일 1시간 이내의 운동시간이 주어지는데 화성보호소에서는 1주일에 2~3회, 그것도 30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난방시설도 열악하다. 보일러가 아니라 하루에 세 번 가량 천장에 있는 스팀을 통해 더운 바람이 나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방안에서도 몸이 으슬으슬 떨릴 정도라고 한다. “보호소” 측에서는 그동안 난방비 예산이 부족해서 그랬는데 최근에는 도시가스를 유입해서 평균 18~20℃의 실내온도를 유지시켜 놓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따뜻한 나라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을 감안한다면 인색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화성보호소에는 파키스탄 출신인 라나 박타르 칸, 이란 출신인 이라즈, 가나 출신인 마이클 오키네 등 난민신청을 요구하며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여러 명 있다. 이들은 모두 2년 넘게 이곳에서 ‘생 징역’을 살고 있다. 법무부는 ‘경제적 이유’에 따른 난민은 아예 인정되지 않고 ‘정치적 이유’에 따른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간혹 인정해줄 뿐이다. 이들은 모두 개종에 따른 본국의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한국에 난민신청을 해왔는데 법무부가 이들의 난민 신청을 기각시켜서 기나긴 법정소송이 진행하고 있다. 감옥보다 못한 곳에서 2년 넘게 갇혀 있다 보니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게 나빠져 있다. 이라즈는 위염을 앓고 있고, 라나는 눈병과 피부병, 마이클은 눈병과 전립선 비대증의 증상을 보이고 있다. 아플 때마다 의무실에 가지만 의무실에서는 제대로 된 치료를 해주지 않고 적당히 약만 지어준다. 고통을 계속 호소하면 외부 병원에 가라고 하는데 진료비는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하므로 돈이 없으면 갈 수 없다. 2년 넘게 일도 못하고 수감생활만 해온 이들에게 돈이 있을 리 없다. 구속노동자후원회에서는 2~3개월에 한 번씩 영치금을 넣어 주긴 하지만, 비싼 병원비를 충당하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 한 번은 마이클의 치료 문제 때문에 화성보호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의무과장에게 이럴 경우 국가에서 보조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의무과장 하는 말,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그게 가능한데 이렇게 오셨으니 한 번 힘써 보지요!’ 며칠 후 “보호소”는 마이클을 가까운 수원지역의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이렇게 가능한 일을 누군가 따지고 항의해야만 마지못해 처리해 주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라나는 말한다. “반장이 매일 와서 ‘난민 안 둬!’, ‘파키스탄으로 가!’라고 말해요! 맞는 것보다 말로 때리는 게 더 아파요!” 수감된 이주노동자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서 권리 행사를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을 우리는 “보호”라고 말할 수 없다. “보호소”의 역할이 진정 보호에 있다면 무엇보다 그들의 인권 보호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아니면 위선적인 간판은 그만 내려 버리던가? 이런 문제는 비단 화성보호소만의 문제만도 아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수용하고 있는 전국의 모든 “외국인 보호소”가 안고 있는 문제이며 더 심각한 곳도 많이 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오로지 정부의 “강제추방 정책” 때문에 이곳으로 잡혀왔다. 그렇기 때문에 형사범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최대한의 인권보장”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못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지난 해 2월 11일, 이주노동자 10명의 목숨을 앗아간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이후 비난 여론이 빗발쳤지만 “외국인 보호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수용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하기엔 예산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정부가 “강제추방”을 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잡아들이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김영삼 정권 때부터 시작된 ‘산업연수생 제도’와 노무현 정권이 도입한 ‘고용허가제’에 이르기까지 역대 한국정부가 취해 왔던 이주노동자 정책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의 근거는 체류 가능 기간 3년을 넘기고도 계속 체류하고 있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가 22만여 명(전체 이주노동자의 절반)에 이르고 있고, 국제인권규범마저 무시한 야만적인 수급조절 정책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인권 후진성이 만 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지금 이 시간에도 “고용허가제” 실패의 책임을 이주노동자들에게 떠넘기며 “노예무역” 시대에나 있을 법한 야만적인 “인간 사냥”을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최근 법무부는 이주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노동조합 조직을 말살하기 위해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극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까지만 위원장 등 이주노조 핵심간부들을 표적연행 한 후 강제추방 시켰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출입국 규제와 강제추방 정책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계속해서 헐값에 착취하고 더 나아가 한국노동자들의 노동조건마저 하향 평준화시키려는 기업주들의 이윤 욕구에서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교활하고 야만적인 규제정책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세계 노동자들의 권리와 욕구를 짓밟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저항에 직면하고 말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우리들의 친근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16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지난 토요일 오전, 원주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원주교도소에서 1년 반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해고노동자 변외성 씨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내다뵈는 야산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은 오래 전에 끝이 났고, 앙상한 나무 가지에 듬성듬성 매달린 마른 잎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쁘신데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세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예요!” 늘 그렇듯이 인사는 대강 짧게 몇 마디하고 곧장 ‘용무 확인’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안하면 삼십분도 안 되는 짧은 면회시간에 할 말을 다 못할 수도 있다. 변변한 난방시설 하나 없는 감옥은 지금, 방안에 가만히 있어도 몸이 오그라들 판이다. 그런데도 변외성 씨를 비롯한 구속노동자들은 집단 단식 투쟁을 결행하고 나섰다.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개악법”, “노사관계 로드맵”, “한미 FTA" 등으로 민주주의와 노동자, 서민들의 기본권을 시궁창에 처박았다. 이를 반대하던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철퇴를 휘둘러 지금까지 1,018명(10월 31일 현재)의 노동자를 구속했다. 2005년 울산건설플랜트노조, 2006년 포항건설노조, 2007년 뉴코아-이랜드 노동자들, 노무현 정권 내내 탄압을 받아 온 화물, 덤프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쇠창살에 맺혀 마를 날이 없다. 변외성씨는 대경상운이라는 택시회사에 입사해서 성실하게 일을 해왔으나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5년 전에 해고를 당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대중교통의 일익을 담당하는 택시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프다. 그래도 웬만한 택시 회사엔 노동조합이 있다. 하지만 노조 간부들은 대부분 사장들과 한 통속이 돼 조합원 등골을 빼먹는 거간꾼들이다. 업체 사장들 또한 정치인들, 큰 부자들 구역질나는 뒤치다꺼리 해주다가 거저 사장자리 꿰찬 위인들이니 ‘인권 마인드’는 커녕 ‘경영 마인드’도 없고, 노동자 알기를 ‘껌’으로 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민주노조인데, 사정이 이러니 여간 힘들지가 않다. 2002년 대경상운에서는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투쟁이 벌어졌고, 사측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한 조합원이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끔찍한 사태 앞에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변외성 씨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과 맞바꿔야 하는 민주노조 깃발, 이 땅 노동자의 처절한 현실이 한 순간에 고압 전류처럼 그의 뇌뢰에 내리 꽂혔다. 분신한 동료의 치료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그는 마지막까지 투쟁했지만 투쟁은 어정쩡 마무리되고 해고자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원직 복직”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투쟁하는 신산한 해고 노동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재판 받으랴, 전국 해고 노동자들의 모임인 전해투(민주노총 전국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랴, 가정을 돌 볼 겨를은 없었다. 모아 두었던 전세금을 까먹기 시작하더니 이곳저곳 빈민촌을 전전하다 결국 ‘뉴타운’ 개발이 예정된 상도동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세입자들을 규합해서 한동안 철거 반대투쟁에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분노스런 사건 하나가 그를 다시 노동자 투쟁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그가 조합원으로 있었던 노조의 상급단체, 한국노총이 정부, 경총을 도와 “복수노조 허용”을 3년 유예시키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후퇴시키는 “노사관계로드맵” 법안에 합의를 해준 것이다. 2006년 9월 19일 그는 다른 해고노동자 7명과 함께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을 찾아갔다가 천만 뜻밖에 구속이 되고 말았다. 분신한 동료의 치료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변외성씨는 마지막까지 투쟁했지만 투쟁은 어정쩡 마무리되고 해고자 신세로 전락했다. 벼랑 끝이 따로 없었다. 아내와 슬하의 세 남매는 보금자리마저 잃고 거리로 내쫓길 판인데 남편은 구속이 돼 까마득한 2년 6개월의 감옥살이를 해야 하니.... 새벽마다 요구르트 배달을 하는 아내는 한 달에 두 번 원주까지 남편을 면회하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다. “올해 큰 딸이 수능을 치렀는데, 합격을 해도 고민이다. 사회의식도 있고 참 총명한 아인데, 전에는 대학에 붙기만 하면 어떻게든 입학금은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대화 내내 두 눈에 광채를 번뜩이던 그였지만 가족 이야기를 꺼낼 때면 슬쩍 말꼬리가 흐려진다. 1년 3개월, 적지 않은 감옥살이를 했건만 아직 절반이 더 남았다. 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할 때까지 이 가정은 과연 유지 될 수 있을까? 몸은 비록 감옥에 묶여 있어도 투지와 신념만큼은 꺽은 적이 없었다. 투쟁이 필요할 때면 그는 언제라도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그동안 옥중 단식투쟁을 무려 6번이나 감행했다. “비정규직 철폐”, “재소자 인권 보장”, “양심수 석방” 등을 촉구하며 굶고 또 굶었다. “교도소 관료들의 경직된 태도를 바꿔내는 것은 수형자들의 몫”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며 여러 차례 투쟁을 벌인 결과, 텔레비전 생방송 뉴스 시청 등 열악했던 원주교도소 재소자들의 처우를 상당히 개선시켰다. 덕분에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두둑이 신망을 쌓아놓긴 했지만, 소장이나 “윗 대가리”들이 바뀔 때마다 재소자 처우가 오락가락하고 있어 그 때마다 새롭게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고 한다. 행형법 개정 같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국회에서 잠자고 있으니, 인권단체들이 분발해달라고 한다. 교정 당국은 구속노동자들이 집단 단식 투쟁을 한다고 하자, 마치 ‘범죄 모의’라도 되는 양 기겁하며 구속노동자들 끼리 서신 왕래마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외부 단체나 가족들에게 보내는 서신 또한 법무부 교정국의 허가 없이는 발송할 수 없도록 차단하고 있다. 원주교도소는 치졸하게도 변외성 씨에게 “자꾸 골치 아프게 하면” 그동안 요구해왔던 수도권 교도소로의 이감은 힘들 거라며 협박까지 한다. 변외성 씨는 그동안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부인이 주말에 면회라도 편히 올 수 있도록 수도권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달라며 간절하게 요구해왔다. 그러나 어떠한 방해도 한 맺힌 구속 노동자들의 결연한 투쟁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11월 19일,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이 “삼성 족벌 해체”, “비리 몸통 이건희 등 구속”, “양심수 전면 석방” 등을 촉구하며 제일 먼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는 삼성 재벌의 노동자 인권 유린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3년 가까이 실형을 살고 있다. 4년 전 북한을 방문한 것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민주노동당 당원인 전주교도소의 박종기 씨 또한 같은 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11월 26일부터는 변외성씨와 2006년 포항건설노조 투쟁으로 구속된 황우찬 민주노총 포항시협 의장, 이지경 포항건설노조 전 위원장이 “비정규직 철폐, FTA 반대”, “하중근 열사 사망 책임자 처벌”, “포스코의 건설노조 탄압 중단”, “삼성재벌 비리 특별검사 도입”, “한나라당 이명박, 이회창 낙선 운동”, “양심수와 생계형 민생사범을 포함한 대사면”을 촉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할 것이다. 12월 3일에는 역시 같은 요구를 내걸고 포항건설노조, 전해투 소속 구속노동자 7~8명이 연대 투쟁에 동참한다. 노무현 정권의 황혼은 평온하게 저물어 가고 있지만, 그들의 손에 억울하게 구속된 노동자들은 차가운 감옥 안에서 분노로 치를 떨며 곡기를 끊은 채 항거하고 있다. 이제 “민주 시민”들이 나서야 할 때다. 구속노동자들의 이 처절한 투쟁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2017-07-11 | hrights | 조회: 421 | 추천: -1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두터운 감옥 장벽 안으로 인권의 햇살이 비춰들기 시작했다고 말하면 반만 맞다. 비록 인권이란 말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부당하고 참혹한 처우와 규율에 맞서 몸을 내던졌던 수많은 이름 모를 재소자들이 있었고, 이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민주화”와 더불어 감옥은 서서히 인권의 사각지대 밖으로 끌려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양심수,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차례로 출현하는 시대가 되었어도 한국의 감옥은 여전히 ‘인권의 무덤’속을 헤매고 있다. 지금도 안동교도소에서는 “닭장보다, 개집보다도 못한” 교도소 환경을 개선하라며 심진보 씨(포항건설노조 파업으로 구속)와 정창윤씨(오산 수청동 철거민 투쟁으로 구속)가 보름 넘게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 건설노동자와 철거민,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서럽게 천대받아 온 일단의 사람들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최소한의 요구를 내걸고 정부와 힘센 자본에 맞서 저항했다. “민주화”된 대한민국 사회는 이들의 간절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범법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투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감옥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1980년에 지어졌다는 안동교도소는 그 연륜 만큼이나 시설 환경이 낙후되어 있다. 두 사람은 별도의 독거 사동에 수감되어 있다. 독거실의 크기는 화장실을 포함해서 0.8평밖에 안 된다. 키가 1m72cm인 심진보씨는, 너무 비좁아 똑바로 누울 수조차 없다고 한다. 화장실 문제는 특히 심각하다. 용변을 보고나서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야 내려가는 반 수세식인데다 낡고 깨진 변기 틈새로 쥐들이 들락날락거린다. 화장실엔 문짝도 없고 55cm 정도 되는 칸막이만 있으니 악취도 심하고, 밖에서 누군가 들여다 볼 때마다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곤 한다. 이렇게 더러운 변기 옆에서 매일 같이 식기를 닦고 빨래를 한다. 세탁물 건조대를 자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빨래도 방안에서 말려야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쇠창살 간격(4cm×3.2cm/40칸)이 너무 촘촘해서 햇볕도 잘 들어오지 않고 창문 밖으로 빨래를 내걸 수도 없다. 안동교도소에는 이렇게 생긴 독거실이 두 개의 건물(사동)에 몰려 있다. 정창윤씨의 말에 따르면 이곳엔 주로 정신분열증 환자나 ‘요주의 인물’들이 수용된다고 한다. 머지않아 추운 겨울이 다가오지만 이곳에 설치된 난방이라고 해봤자, 복도에 있는 스팀이 고작이다. 더운 바람은 거실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마루 바닥은 낡아 움직일 때마다 들썩거리고 벌어진 틈새로 묵은 먼지와 오물들이 스멀스멀 풍겨져 나온다. 벽지라도 있으면 냉기가 덜 할 텐데, 언제부턴가 “보안상의 이유”라며 벽지마저 뜯어버렸다. 사진은 청송교도소의 복도 모습 재소자 인권 보장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2003년도 이후 전국 교도소(구치소)에서 약간의 시설 환경 개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자동차로 치면 차체에 있는 근본 결함은 남겨둔 채 간단한 부품 몇 개 교체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구속남발로 인한 과밀 수용 문제, 2~3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 구금시설, 외부 감시가 불가능한 폐쇄형 감옥 위주의 행정체계 등 재소자들의 인권을 억누르는 한국 감옥의 구조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안동교도소는 이런 작은 변화마저 거치지 않은 채 고장 난 차처럼 그대로 굴러가고 있다. 시설 뿐 만 아니라 재소자 관리를 총괄하는 소장을 비롯한 안동교도소 관료들의 의식 수준 또한 낙후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어느 날 교육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취사장에서 밥이 설었다는 이유로 점심이 나오지 않았다. 밥이 없으면 건빵(대용식량)이라도 지급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항의하자, 교도관들은 규정에 없다며 아무런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정창윤씨는 안동교도소의 이런 사정을 구속노동자후원회를 비롯한 외부의 인권단체에 알리기 위해 긴급하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교도관들이 내용을 검열하고 나서는 ‘안 붙이면 안 되겠느냐?’며 회유를 하더니, 이를 거부하자, 등기우편을 이틀이나 늦게 발송하였다고 한다. 심진보 씨가 부인에게 발송한 등기우편도 아무런 이유 없이 일반 우편으로 둔갑해서 20일 가량이나 늦게 도착된 적도 있다고 한다. 재소자로부터 접수된 편지는 신속하게 발송(늦어도 24시간 이내)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렇게 마음대로 늦게 발송해 놓고도 교도소 측은 사과 한마디 없었다. 교도소장은 심진보 씨가 면담하는 자리에서 시설 개선과 재소자 처우개선을 강력히 요구하자, ‘그걸 바꾸려면 10억, 20억이 들어간다.’며 볼멘소리를 하더니, 10분도 안돼 ‘누가 이런 면담을 주선했느냐?’며 부하직원을 호통 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고 한다. 교도소장의 예산타령은 핑계라는 생각도 든다. 안동교도소는 지금 민원실 등 외부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공간에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다. 건설 노동자인 심진보씨는 화장실 변기를 고치고 콘크리트 칸막이를 높이고 벽지를 바르는 데 그다지 큰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그는 ‘전시 행정에 들이는 노력과 예산의 반에 반만이라도 들인다면 재소자들이 보다 인간적인 환경에서 생활할 수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이들의 요구가 교정당국이 들어줄 수 없을 만큼 무리한 것인가? 언젠가 나는 재소자들의 불만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모 교도소의 총무과장과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는 교정학 박사과정을 전공하고 있다며 내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대뜸 “한국의 재소자 인권은 세계적인 수준인데 왜 자꾸 재소자 인권만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며 “무고한 여성들을 성추행하고 연쇄 살해한 범죄자들에게도 인권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냐? 그 피해자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며 따지고 들었다. 전혀 관계없는 두 가지 사실을 연결시켜 주장하는 그의 억지 논리가 황당하게 들렸지만 어쩐지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의 답변은 똑같다. 끔찍한 범죄행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형벌이 뒤따라야 되겠지만, 자의적인 가혹행위나 인간이 살 수 없는 열악한 곳에 구금해 놓고 부가적인 고통을 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게다가 전국 구금시설에 수감된 4만여 명의 재소자들 가운데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기본권을 억누르는 잘못된 법 때문에 억울하게 구속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외부의 통제가 불가능하고 인권이 숨 쉴 수 없는 감옥을 내버려 두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권력자들에게 “공포정치”의 수단을 남겨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들은 이 수단을 이용해서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알량한 인권마저 통째로 앗아 갈지 모른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714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새벽 2시경, 밤을 지새기에는 몸도 피곤하고 내일 할 일도 있고 해서, 없는 돈에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쏟아지던 비도 그쳤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도 두 사람이나 들어갔으니 ‘오늘 밤 별 일은 없겠지’ 생각 했다. 그런데 아침 9시경, 피곤한 몸을 부시시 일으켜 사무실로 향하는 나에게 문자가 날라왔다. 홈에버 상암점과 뉴코아 강남점에 경찰이 들어와서 조합원들을 잡아 가고 있으니, 빨리 모이라는 것이었다. 부리나케 홈에버 매장에 당도해보니, 어제 밤 연대왔던 대열은 보이지도 않고 전경 버스들만 빼곡히 월드컵 경기장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닭장차 사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매장 입구는 방패를 든 전경들에 의해 겹겹이 에워싸여 있었고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여성 조합원들이 하나 둘 끌려나오고 있었다. 우악스런 손길이 가녀린 여성 노동자의 사지를 번쩍 들어 닭장차에 밀어 넣자, 그녀는 울부짖으며 빠져 나오려 안간힘을 써 본다. 마치 영화에서 거대한 괴물이 사람을 번쩍 들어 한입에 털어 넣듯이, 경찰은 그렇게 여성 조합원들을 한명씩, 한명씩 집어 삼키고 있었다. 그 앞에서, 일개 시민에 불과한 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뉴코아-이랜드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파업에 공감하면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이 심정적으로나 거리상으로 너무나 가까이 있는 이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담배나 반찬거리 등을 사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드는 슈퍼마켓, 할인점에서 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서민가정에서는 주부들이 아이들 학비라도 벌기 위해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이와 같은 유통 매장 아니면 식당이다. 그동안 노동시장에서 이들의 노동력은 부당하게 저평가 되어왔고, 업주들 또한 싼 맛에 고용해서 적당히 일을 시키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라도 짤라 버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지난 20일 오전 서울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몰매장에 경찰들이 진입해 점거 농성을 펼친 노조원들을 연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한 때 생활용품 업체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나는 제품을 팔기 위해 이런 매장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적이 있다. 매출 목표를 채우는 게 영업사원의 지상과제다 보니, 매장에서 자신들이 파는 제품이 더 좋은 위치에 진열될 수 있도록 서로들 엄청나게 경쟁을 한다. 그러다 보니 유통 매장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영업사원들이 반드시 우군으로 만들어야 할 첫 번째 대상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음료수를 사들고 다가가 친한 척 너스레를 떨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화가 끝날 때 쯤 “우리 제품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이따금씩 그들이 하는 일을 도와줄 때도 있다. 한겨울에도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음료수, 세제 박스를 몇 번씩 날라다가(까대기) 진열하는 일들을 반복하고, 매장 진열 위치를 완전히 뒤 바꾼다든지, 재고조사를 하는 날에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남들 쉬는 법정 휴일 날에 쉬지도 못할 뿐더러 월차, 생리휴가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직장생활은 아무런 미래가 없어 보였다. 이런 곳에 정말 노동조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쟁에 의해 철저히 개별화되어 있고, 다양한 근무형태로 점포마다 뿔뿔이 찢어져 있는 이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이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냈다. 그 선봉에 까르푸(홈에버 전신) 노동자들이 있었다. 나는 비록 그 끔찍한 노동현장에서 떠나 있었지만 내 일처럼 기뻐했던 것 같다. 내 경험 속에서 노동조합이 “진짜 있어야 돼”라고 생각했던 곳, 또 하나는 건설현장이었다. 그나마 잘 버티고 있던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짤리게 되자, 먹고 살기 위해 나는 건설현장 잡부가 되어야 했다. 욕설이 난무하고, 뙤약볕 아래서 온갖 허드렛일을 허리가 휠 정도로 해대도 “너 필요 없으니 내일부터 나 오지 마!” 작업반장의 한마디에 해고가 돼 버리니, 순간순간 눈치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이곳에도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아직 광범위하게 조직되진 않았지만 그 시작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면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떨어지고 있다고 걱정을 하지만, 어느 샌가 노동조합은 이렇게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까지 다가와 있다. 곳곳에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끈질기게 투쟁해 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아니고서야 누가, 어떤 방법으로 이들의 권리를 되찾아 준단 말인가? 용접으로 굳게 밀봉된 매장에서 20여일을 버텨낸 뉴코아-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눈물과 대체인력 투입으로 파업을 방해하고 노조까지 파괴하려 했던 악랄한 사용자에 맞서 포스코 본사 사무실을 9일간 점거했던 포항 건설노동자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요즈음 내 마음속에서 오버랩 된다. 시시각각 엄습해오는 강제 진압의 공포와 배고픔을 견뎌내며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는 내발로 걸어 나오지 않겠다.’고 버텼던 결연한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그것은 너무나 많이 빼앗겨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는 사람들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질러대는 한이요, 독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정부는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점거할 때마다,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경찰력을 동원해서 건물을 포위하고 노동자들을 감금한 채 물과 전기를 끊고, 심지어 음식 반입마저 금지시키는 야만적인 ‘고사작전’을 전개한다. 작년에 포스코 본사를 점거했던 포항건설 노동자들에게는 “국법 질서를 문란”케 만든 “폭도”라는 누명이 씌워졌고, 진압 작전으로 인해 2명의 노동자가 죽고, 70명이 구속되었다. 작년 포항건설 노동자에 대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2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사진은 하중근 씨의 장례식날 모습 사진 출처 - 프레시안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헌법과 법률로 보장하고 있는 나라에서, “생산과정”을 실질적으로 중단시키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행위를 ”불법“으로 몰아세우는 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노동조합이 파업에 돌입한다 해도, 공장이나 매장이 예전과 다름없이 가동되고 있다면 기업주는 노조와의 협상에 그다지 적극성을 띄지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기업 경영진은 노조가 협상을 요구하면 시간을 질질 끌거나, 협상에도 응하지 않다가, 막상 파업에 들어가면, 불법적으로 대체인력을 투입해서 공장을 가동시키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노동자들은 물리력을 동원해 작업장을 점거할 수밖에 없는데, 정부와 법원이 이것을 “불법”으로 몰아, 형사 처벌한다면 대한민국에서 파업권은 보장되지 않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뉴코아-홈에버 노동자들, KTX 승무지부 노동자들, 포항건설 노동자들...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는 날, 우리 사회는 보다 인간이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은 그들에게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 주고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해주었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나 같이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꿈꾸는 세상일 것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정부라면, 더 이상 국민의 꿈과 권리를 짓밟지 말기 바란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71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나는 심신이 너무나 지치고 억울하여 이제는 솔직히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이대로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소!” 2006년 3월 10일. 이재익 씨는 징역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7일 만에 대구구치소를 나섰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자유의 공기는 매서운 꽃샘추위와 함께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코트 깃을 올려붙여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분노와 모멸감으로 무너져 내린 가슴에서 뿜어 나오는 허탈한 한기가 이미 그의 몸을 꽁꽁 얼려 놓았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대구영업소 차장이었던 이재익(51) 씨는 직책이 말해 주듯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기보다 “삼성맨”으로서 살아가는데 긍지와 애착을 느꼈던 평범한 사람이다. 악랄한 삼성생명의 구조조정 1984년 삼성생명에 입사한 그는 꼼꼼하고 우직한 성실성이 빛을 발해 특진 1회, 관리자 대상 3회, 밀레니엄 대상 1회라는 화려한 포상 경력에다 인사고과는 늘 AAA 등급(최우수 등급)을 달렸다.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던 그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삼성의 독단적인 ‘황제식 경영’이었다. 1997년 한국 경제 전체에 가해진 거대한 외부 충격(경제위기)으로 삼성그룹은 휘청거리게 되었는데, 그 일등공신은 ‘실패작’으로 판명난 삼성자동차였다. 불똥은 곧 삼성생명으로 옮겨 붙어 “희생양”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삼성생명의 “구조조정”은 3천여 명의 애꿎은 직원들을 차가운 거리로 내몰았다. “무노조 경영”이 체질화 되어 있는 삼성에서 “구조조정” 에 대한 노사 합의나 공개된 논의 절차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겉으로는 “장기승진 누락자,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직급별 고령자, 근무성적 불량자” 등을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밝혔으나 악화가 양화를 밀어 내듯이 칼자루를 쥔 상사들에게 아부할 줄 모르고 바른 말도 서슴없이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대거 포함됐다. 이재익 씨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6개월 치 임금을 보장해주는 조건에 “명예퇴직”을 요구받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듬해 곧장 전보 명령이 떨어졌다. 연간 평균 실적이 전국 최하위권이면서 폐쇄가 예정된 구미영업소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법인 영업소에 근무해 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이것은 사실상 나가라고 등 떠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2000년 상반기 전국 법인 영업소 중 1등, 하반기에는 3등을 차지했다. 덕분에 ‘관리자 대상 금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2001년 5월 중 단행된 3차 구조조정의 회오리를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그해 10월부터 전국 2백여 개 영업소를 폐쇄시키는 4번째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어렵사리 살려 놓은 구미 영업소도 한두 달 영업실적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전격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영업소가 폐쇄되는 마당에 영업소장이 서 있을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퇴직 위로금 1억을 줄 테니 나가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이재익 씨는 이번에도 단호히 거부했다. 삼성생명은 이재익 씨에게 나름대로 당근책을 제시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자 혹독한 보복을 가해 왔다. 차장 직급에다 영업소장을 맡았던 20년 고참사원을 대구법인 영업국으로 발령을 내면서 신입사원들이나 맡는 ‘업무담당’이란 직책으로 발령을 냈다. 그마저도 담당자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내려진 중복발령이었기에 그는 아무런 일감도 주어지지 않는, 사실상 대기발령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삼성에 맞선 이재익 씨의 투쟁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고 했던가. 회사를 자신의 분신인양 생각하며 20년 가까이 몸 바쳐 일해 왔던 그였기에 느껴야 했던 배신감과 모멸은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독기어린 투지가 그의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그의 저항은 처음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대기발령 이후 별다른 업무가 없었기에 이전과 달리 회사의 공식 근무시간(오전9시-오후6시)에 맞춰 정시 출퇴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본사 인사팀이 직접 개입하고 나섰다. 2002년 4월 이재익 씨는 서울로 불려 올라갔다. ‘다른 직원들은 8시 30분까지 출근하는데 왜 9시에 출근 하느냐’며 사표를 쓰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이재익 씨 역시 이 문제에 관해 충분히 대항할 논거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각종 공문서, 사내 통신, 노조의 공문서 등 9시~18시가 공식근무시간 임을 입증해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1993년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후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7시~16시로 변경한 적이 있었다. 실질적인 근무시간이 더욱 늘어나게 되면서 직원들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삼성은 슬그머니 근무시간을 원위치 시켰다. 하지만 현장에서 공식근무시간보다 30분 더 일찍 출근해서 일하도록 강요하는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삼성생명은 이러한 관행을 이유로 이재익 씨에게 사표를 강요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재익 씨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맞섰다. 회사가 그동안 공식근무시간을 어기고 직원들에게 초과 근무를 시켰으니 “시간외 수당”을 내놓으라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던 이 소송은 1년여 만에 패소했다. 하지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공식근무시간 문제가 앞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그의 인생의 발목을 잡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건강마저 악화되기 시작했다. 가슴 떨림과 현기증, 불면증에다 속이 더부룩하고 구토와 신물이 넘어오는 증세 때문에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하지만 영업국장은 ‘통근치료’가 가능하다며 그가 제출한 병가원을 여러 차례 반려시켰다. 2003년 3월 10일, 이재익 씨는 몸이 너무나 아파 출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국장은 그의 집 앞까지 차를 몰고 나타나 “무단결근”이라며 “짤리고 싶지 않으면 무조건 출근하라”고 협박을 해댔다. 그를 강제로 차에 태워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까지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재익 씨는 이튿날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다. 국장은 그를 보자마자,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새파란’ 후배 직원들 앞에서 노골적인 망신을 주었다. 이재익 씨는 자신의 방어를 위해 삼성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그러더니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더 이상 버티지 말고 결단을 내리라”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런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가 3일째 되던 날, 국장은 그로부터 자신이 원하던 답변을 얻지 못하자, “왼팔을 꺾고 목을 조르는” 폭행을 가했다.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112에 신고를 했다. 본사에도 전화를 해 국장의 폭언과 폭행을 중단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검찰과 사법부는 삼성과 한 통속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초동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이 사건을 “폭행에 의한 상해”로 기소 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지만 검찰은 오히려 이재익 씨가 “상사를 모욕하고 업무를 방해”했다며 벌금 50만원에 약식기소를 해버린 것이다. 재판정에 선 이재익 씨는 판사에게 “검찰의 사실 오인에 의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자 검사는 ‘정식 공판이 청구된 사건인지 몰랐다’며 징역6개월을 구형하는 상식 밖의 행위를 자행했다. 그 후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으나 벌금 50만원이 확정되었고 회사는 이를 빌미로 징계위원회를 개최해 그에게 6개월의 정직을 때렸다. 하지만 이재익 씨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동안 앓아왔던 병증이 ‘산재’라고 판단한 그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을 신청했고, 2003년 7월 29일 공단은 그의 병이 “회사와의 갈등상황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한 “불안신경증”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일하다가 다쳐도 회사 측의 공작으로 인해 산재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던 삼성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판정은 뉴스거리가 되었다. 이재익 씨는 “사무실 폭행사건” 재판에서 출근부를 조작하고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한 여직원을 “위증죄”로 고소했다. 하지만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은 이번에도 놀라운 둔갑술을 발휘하며 그를 “무고죄”로 몰아 구속 기소하고 말았다. 재판에서 “위증”여부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고”혐의를 뒤집어 쓴 채 형사처벌을 당해야 하는 위기일발의 상황이 전개됐다. 쟁점은 삼성생명의 공식근무시간은 언제인가, 대구법인 영업국 사무실에서 이재익 씨가 폭행을 당한 것이 사실인가. 그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꼼꼼히 챙겨둔 회사 공문서들을 모아 한 다발이 넘는 증거자료들을 제출했다. 삼성생명은 사문서에 불과한 대표이사의 확인서, 어용노조 위원장의 확인서가 전부였다. 그는 검찰에 위증의 당사자들과 대질심문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6년 10월 25일 출소한 지 7개월여 만에 이재익 씨는 삼성생명으로부터 징계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삼성과 사법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노동자들과 함께 더 커다란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희망사항은 너무나 소박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지만, 삼성생명은 내가 입사하여 결혼을 했고, 자식을 키웠고,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오! 그러기에 나는 반드시 명예를 회복하고 꼭 돌아가야만 하오!”
2017-07-11 | hrights | 조회: 257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끝내 한미FTA 협상이 타결되고 말았다. ‘뚝심의 정치인’ 노무현의 리더쉽은 다시 한번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지층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권의 “능력부족”과 “좌파 논리” 때문에 ‘실패한 정권’이라고 규정하던 주류 보수 언론들이 이제는 앞장서서 노무현을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추켜세우며 용비어천가를 쏟아내고 있다. 한미FTA가 새마을 운동, 서울 올림픽과 함께 한국의 “국가 수준을 끌어 올린” “건국 이후 최대의 치적” 가운데 하나라나. 하지만 한편에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수많은 민초들의 통곡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지난 4월 1일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협상이 열리던 하이야트 호텔 앞에서 택시 노동자 허세욱(54)씨가 온몸에 신나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는 온몸이 장작처럼 활활 타들어가는 그 순간에도 한미 FTA 반대 구호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무정한 불길은 빠른 속도로 번져 구호를 외치던 목구멍까지 태우고 그의 뇌 속에서 의식을 빼앗아 갔다. 숯덩이로 변한 그의 육신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그 언덕길엔 달랑 동전 몇 개 떨어져 있었다. 허세욱씨는 노동운동, 시민운동의 지도적인 인사도 아니었고, 언변이 출중한 선동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빠듯한 월급을 쪼개 여러 시민단체 회원이 되었고 민주노동당 평당원으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히 집회 현장을 지켰다. 그와 절친했던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반전 집회, 노동자 집회, 촛불시위... 각종 시국 집회 현장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3월 30일, 그가 분신을 결행하기 이틀 전 나는 광화문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한미 FTA 협상 타결 시한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알고 보니 이것도 쇼였지만) 광화문 열린 시민공원에서 단식농성을 진행하던 범국본 농성단이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청운동 동사무소 앞으로 이동하려 하자 수천 명의 전경들이 달려 나와 곳곳을 에워 쌓다. 처음에는 공원 입구를 봉쇄하더니 인도와 지하도까지 틀어막았다. 지난 1일 저녁 촛불문화제에 참가했던 시위대가 '한미 FTA 중단'을 외치며 서울 을지로, 안국동을 거쳐 청와대로 진출하려했으나 광화문 앞에서 경찰에 막혀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각종 행사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허세욱 아저씨 삼삼오오 이동하던 대열이 광화문 일대 지하도를 틀어막은 전경들 때문에 30분 넘게 오도 가도 못한 채 갇히게 되었다. 전경들은 몸자보를 두른 농성단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일반 시민들의 통행까지도 차단하고 있었다. 경찰의 막가파식 인권 침해에 일반 시민들까지 나서서 목이 터져라 항의해 봤지만 막무가내였다. 경찰은 주권자인 평범한 국민들의 목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상사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그들은 우리들의 인권을 감금했다. 허세욱씨는 나와 함께 그곳에 갇혀 있었다. 열이 받쳤다. 그들 말대로 “불법 집회”를 한 것도 아닌데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인도를 지나가겠다는 건데 그것까지 가로막다니... 감금상태에서 풀려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우리는 숱한 항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전기를 든 채 느물느물 웃고만 있던 전경부대 중대장 앞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소속이 어디냐고 물었고, 경찰이 이렇게 불법을 저질러도 되냐고 따졌다. 그는 여전히 이죽거리며 “서울 경찰”이라고만 답변했다. 옆에 있던 허세욱씨는 나보다 더 화가 나 있었다.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경찰에게 달려들었고 주변 사람들이 간신히 뜯어 말렸다. 우리는 결국 몸자보를 벗고 일반 시민처럼 위장(?)하고 나서야 전경들 없는 골목길을 따라 청운동 사무소 앞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허세욱 이름 석자를 알지 못했다. 그때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절벽 앞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자유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쓰고 다수 민중의 생존권과 자유를 마음대로 농단하고 있는 파렴치한 독재권력 앞에 순간 떠밀릴 수밖에 없는 저항하는 소수의 정당한 울분. 어떤 사람이 택시노동자가 한미FTA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분신까지 하느냐며 악플을 달았다고 한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갖추지 않은 그가 밉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 죽음의 방법으로서 가장 처절한 자살을 선택해야 했다면 그가 왜 그런 길을 선택했는지, 결단의 순간에 그가 던졌을 실존적 물음은 무엇이었는지 반추해 보는 게 예의가 아니겠는가? 한미 FTA가 타결 된 지난 2일 세종문화회관에 모인 시민들이 허세욱씨의 쾌유를 기원하며 한미 FTA 원천무효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더 미운 것은 진실을 호도한 채 엄청난 광고와 물량 공세로 대중에게 한미 FTA가 ‘대한민국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라며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 노무현 정권과 보수 언론이다. 그들의 입에서 잠시 눈을 뗀 다음 냉철한 이성으로 협상 과정과 내용을 들여다보라! 그들이 말하는 “경제 체질 개선”이 다 무엇인가? 한국의 경제와 사회제도 전반을 신자유주의 첨단국가인 미국을 본 따(글로벌 스탠다드) 강력한 구조조정을 해버리겠다는 것이다. 지난 경제위기 과정에서 보았듯이 기업 구조조정의 고통은 노동자, 서민들이 고스란히 짊어져야 한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말대로 한국 경제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지 않기 위해 세계 최대 시장 미국과 서둘러 FTA를 체결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챙겨가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진짜 “샌드위치”가 되는 것은 국적을 불문하고 서로 피 튀기며 경쟁해야 하는 기업체의 노동자들이다. 저들은 그 고통에 대해 말해주지 않고 있다. 소비자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논리다. 미제 골프채, 미제 승용차 값이 조금 싸진다 해도 한 달 백만 원 안팎의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것을 구입할 능력도 없고 사용할 일도 없다. 치솟을 약값 때문에 몸이 아파도 치료받지 못할 일이 더 걱정이다. 광우병 의심나는 쇠고기, 몸에 해로운 유전자 변형 농산물을 비싼 국산 농산물을 대신해서 먹게 되는 게 혜택일 수 있을까? 한미 FTA를 밀어붙인 정부 관료와 기업주들은 이런 음식물은 먹지 않을 것이다. 허세욱 아저씨, 살아만 계셔 주십시오! 허세욱씨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온 몸을 던졌다. 가족도 없이 16년째 택시 운전을 하며 어렵게 살아오면서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의 삶은 나의 형, 삼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더욱 착잡하고 분통이 터진다. 한미 FTA가 파괴하는 것은 평범한 우리 모두의 삶인데 우리가 세운 대통령과 국회는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었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공장을 멈추고, 생업을 멈추고 거리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노무현은 한미FTA 체결로 전경련, 경총 등 대한민국 대주주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혹자의 말대로 그는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노동자, 민중에게 영웅 따위는 필요 없다. 허세욱씨 처럼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새롭게 투쟁 대열에 합류하고 묵묵히 실천할 때만이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백사람의 노무현 보다는 한 사람의 허세욱이 더욱 소중하다. 허세욱 아저씨, 당신이 그립습니다. 제발 살아만 계셔 주십시오!
2017-07-11 | hrights | 조회: 258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세상의 흐름을 읽는 열린 리더십”, “상생의 메신저”, “‘투쟁보다 일자리’라는 한마디로 수백만 구직자와 가족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바로 위원장님에게 쏟아지는 보수언론의 찬사입니다. 위원장님이 이처럼 재계와 언론으로부터 한국의 어떤 노동운동 지도자도 들을 수 없었던 상찬을 받는 데는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 9월 11일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노사관계 로드맵”을 처리한 후 위원장님의 파격적인 행보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외투자 유치를 위해 일본, 미국, 유럽 가리지 않고 뛰어 다니셨고 최근에는 세계적 신용평가업체 무디스 대표단을 불러 그들의 “송곳”같은 시험문제에 답하시느라 “진땀”깨나 흘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위원장님의 이런 노력은 아마 어떤 외교통상부 관료나 대기업체 CEO 못지않은 활약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저는 아둔해서 그런지 위원장님이 보여주신 “파격적인” 행보가 언제까지 계속될지가 더 궁금했고,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직면한 최대의 문제는 단순한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인데 위원장님이 혹 현장 감각을 잃어버리신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위원장님은 국가 이미지 개선으로 외국인 투자가 늘어나면 기업 수익이 커지고 그만큼 노동자들의 권익도 향상 될 거라는 재계와 보수언론의 ‘경제성장 도미노 이론’을 그대로 재생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수도 없이 강조돼왔고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그런 과정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도 노동자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위원장님은 금융노조에 계셨기 때문에 론스타 같은 “먹튀 자본”의 폐해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위원장님께서 유치해야 한다고 보는 해외자본도 이런 투기성 자본이 아니라 건실한 산업투자 자본을 의미하시겠지만 그 둘은 칼같이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 한국노총을 방문한 무디스 대표단은 위원장님에게 한국 노동시장에서 “정규직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경직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왜 이렇게 형용모순에 가까운 말을 하고 갔을까요? 그들의 관심사가 바로 그곳, 여전히 강력한 노조 조직력을 갖추고 있는 대기업·공공부문에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위원장님은 이 질문에 노조 조직률 10%와 영세 중소노동자를 예로 들며 “전체적으로 그렇게 보기 어렵다.”고 답변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에게는 동문서답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어쨌든 위원장님의 노력 덕분에 건실한 외국인 투자가 많이 이루어진다 해도 노동자들의 권익은 그다지 나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해고된 채 300일 넘게 투쟁하고 있는 하이닉스·메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한라·라파즈 사내하청인 우진산업 노동자의 사례를 보십시오! 한국노총을 방문한 무디스 대표단과 한국노총의 이용득 위원장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들이 해외에서는 어떻게 했을지 모르나 한국에 와서는 국내 기업들과 똑같이 정규직 이 아닌 비정규직들을 많이 고용하고, 이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자 대량해고 시켰습니다. 노동부,노동위원회가 나서서 ‘부당해고’라고 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위원장님은 너는 “전투적 조합주의”신봉자지, 민주노총 똘마니지? 라고 추궁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지도 않고 감옥에 있는 구속노동자들을 옥바라지 하는 작은 인권단체에서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희 단체는 민주노총 , 한국노총 조합원, 이주노동자, 한국노동자 가리지 않고 노동운동, 정치 투쟁 과정에서 구속된 노동자들이라면 조직과 정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글이 조금 길어지고 있지만 정말로 제가 진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부터입니다. 영등포구치소에는 지난 9월 19일 한국노총 사무실로 위원장님을 방문했다가 구속된 8명의 해고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중 5명은 한국노총 조합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9월 11일 위원장님이 노사정 대표자회의에서 정부와 재계와 손을 잡고 “노사관계 로드맵”관련 법안들을 통과시켰을 때 누구보다 분노했던 노동자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대부분 버스, 택시 등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어용노조”를 혁파해 보려다 미운털이 박혀 해고된 노동자들입니다. 해고로 인해 생계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민주노조”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일념 하나로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넘게 풍찬노숙하며 복직 투쟁을 전개해왔습니다. 위원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노사관계 로드맵”에 명시된 “복수노조 3년유예”, “해고자 금전보상제” 규정은 바로 이들 해고노동자들에게 “핵폭탄”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9월 11일 위원장님은 합의안에 서명한 후 당당히 노사정위원회 사무실을 걸어 나오며 항의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향해 “야합 같은 거 안한다.”며 거칠게 맞대응을 하셨습니다. 이렇게도 당당했던 위원장님의 태도를 보면서 위원장님과 한국노총 간부들의 확고한 소신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 사안은 한국노총, 민주노총 조합원, 더 나아가 1,500만 노동자들의 이해가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국노총 조합원들 중에서도 위원장님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구속된 해고노동자들처럼 자신의 생각을 격렬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노총이 민주적인 노동조합이라면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 열어놓고 토론을 벌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원장님과 한국노총 간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9월 19일 해고 노동자들이 점거농성을 시도하려 하자, 곧장 경찰을 불렀고 해머와 야구방망이를 동원해서 벽을 부수고 노동자들을 7층 난간으로 내몰았습니다. 무려 네 번이나 구속된 경험이 있는 강성철씨는 “개인적으로는 악질 자본에 의해서 몇 번의 구속 경험이 있긴 했어도 이렇게 슬프고 원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노동조합 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심 판사들은 8명의 해고노동자들이 “조직적, 계획적, 지능적”으로 쇠파이프와 신나통을 가지고 한국노총 건물을 방화하려 했다며 1년에서 1년6월까지 실형을 선고해 놓고 있습니다. 두명의 노동자는 집행유예 기간이기 때문에 항소시에서 실형이 확정되면 곱징역을 살아야 할 지도 모릅니다. 구속된 노동자들은 편지에서 “조합원의 피눈물로 지은 사무실 벽을 해머와 야구방망이 등으로 부수고 들어오는” 경찰과 한국노총 간부들을 보면서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노동자들이 과연 판사의 말처럼 “계획적, 조직적, 지능적”으로 방화를 시도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당시 농성장은 7층이었고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기 때문에 불을 부친다면 그들의 생명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위원장님은 지난 1월 2일 신년사에서 재계를 향해 “법률에만 기대지 말고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실천해나가자고 말했습니다. 서로 이해관계가 많이 대립되는 사용자들에게 이토록 자애로우신 위원장님께서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활동했던 옛 동지들은 법에 따라 “응징”하라고 요구하는 상황을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위원장님과 한국노총이 나아가고 있는 길이 진정 우리 사회 다수인 노동자, 서민들을 위한 길이라면 노선이 다른 노동자들일지라도 포용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노동운동 내부의 의견 충돌에서 빚어진 사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편파적인 국가 권력에게 내맡겨 일단의 노동자들이 가혹한 탄압을 받도록 강요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위원장님의 결단을 기대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86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새해 벽두부터 언론에 연속으로 얻어맞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이다. 현대자동차노조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은 언론의 금도를 넘어서고 있다. 조그만 사실을 부풀리는 건 기본이고 없던 사실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거의 모든 언론들이 일치단결해서 ‘탐욕의 화신’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들의 주장만 듣다보면 지난 IMF 경제 위기를 불러 온 책임도 현대자동차노조에 있고 앞으로 불거질 위기 또한 그들의 책임인 것처럼 들린다. 1월 3일 시무식 무산 사태만 해도 원인은 사측이 관례적으로 지급해 오던 150%의 상여금 가운데 50%를 떼먹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세간에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엄청난 고임금을 받는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들만큼 일을 많이 하는 노동자들도 없을 것이다. 자동차 업계가 몇 년간 호황을 유지해 온 덕에 잔업, 휴일 특근이 연중 계속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젊었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 요량으로 쉬지 않고 일하다보니 평균 주 50시간을 근무하고 있는 처지다. 그들은 일한만큼 더 받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상여금 지급 약속을 지키지 않은 현대자동차 경영진은 내버려 둔 채 이번 사태의 책임을 온통 현대자동차노조에 뒤집어씌우고 있다. 이런 파상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지켜보면서 이번 사태가 단지 ‘상여금 50%를 더 줄 것이냐, 안 줄 것이냐’에 한정되지 않는, 전체 노동계와 재계 사이에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매우 중대한 쟁점이 숨겨져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는 현대자동차노조가 민주노총이 주도한 정치파업에 꾸준히 참가하면서 34시간가량의 생산 손실이 빚어졌고 이 때문에 생산목표를 98%밖에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삭감해서 지급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노조와 회사 측 사이에는 단체협약 내용을 둘러싼 해석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그동안 관례적으로 연말 150%의 상여금을 생산목표에 관계없이 받아왔던 것은 명백하며 지난 해 단체협상 과정에서 윤여철 사장 또한 이를 인정한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지난 해 현대자동차는 1조 2천억 가까운 순이익을 남겼다. 더욱 교활하게도 현대자동차와 언론은 현대자동차노조가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개악법안, 한·미 FTA 반대 파업 등 정치파업에 ‘개근’한 것을 계속 문제 삼고 있다. 아마도 그들이 이러한 공세를 펼치는 목적은 상여금 삭감이라는 직접적 손실을 입을 조합원들에게 ‘노동자들은 정치적인 문제로 파업해서는 안 되고 잦은 파업은 나에게 불리할 뿐’이라는 생각을 주입시키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울산에서 올라온 현대자동차 노조원과 금속산업노련 소속 노동자들이 10일 오후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정몽구 회장이 노사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 줄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동안 정부와 언론은 현대자동차노조를 비롯한 대기업노조의 “이기주의”를 끊임없이 비난해 왔다. 하지만 현대자동차노조가 참여했던 정치파업이야말로 저소득층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욱 나락으로 빠뜨리는 비정규직 개악법안, 한·미 FTA를 좌절시키기 위한 사회적 연대였다. 비록 파업이 전국적으로 더욱 강력하게 전개되지 못해 비정규직 개악안 등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현대차 노동자들은 1인당 30만 원 정도의 임금 손실을 무릅쓰면서도 이 같은 정치 파업에 참여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여금 50%(조합원 1인당 100여만 원)를 아까와 하는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어떠했는가? 경영권을 아들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회사공금 수천억을 횡령해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불법 증여 행각을 벌이다가 발각이 되어 구속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검찰과 법원의 ‘솜방망이’처벌에 의해 두 세달 만에 풀려났고 곧 사면될 거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쓴 변호사 비용만도 4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들이 물 쓰 듯 써대는 돈은 바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삶을 쥐어짜서 얻은 것들이다. 특히나 98년 이후 현대자동차 그룹 산하에 정규직 일자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대거 채워지면서 그 수가 1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들은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절반밖에 안되고 생산라인이 폐쇄되면 언제든지 해고되는 등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려 왔다. 심지어 근로기준법에 주어진 연, 월차 휴가마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얼마 전,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실형을 살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한 분이 자신의 심경을 담은 편지와 함께 상고이유서를 보내왔다. 지난해 7월 13일 현대자동차로부터 법원의 “출입금지가처분명령을 위반”했다며 고소를 당해 1심에서 실형 8월을 선고받았고 11월 10일 항소심마저 기각돼 대전교도소에서 꼼짝없이 징역을 살고 있는 전 현대차아산사내하청지회 부지회장 권수정씨였다. 그녀를 포함해 해고자 신분인 세 명의 전직 비정규직 간부가 모두 같은 건으로 구속돼 실형을 살고 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건으로 실형을 살아야 하는지 의아스럽기만 했는데 읽다보니 더욱 분노가 치민다. 2003년 3월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는 의장라인 하청 노동자였던 송성훈 씨가 월차를 쓰겠다고 했다가 관리자에게 칼로 아킬레스건을 절단당하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적어도 근로기준법에도 보장된 월차를 쓰다가 칼에 찔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지회(금속노조 산하)를 만들었고 그녀는 부지회장이 되었다. 2004년 초 사내하청지회는 현대자동차의 불법파견을 노동부에 고소하였고, 2004년 10월 노동부는 현대자동차 울산, 전주, 아산공장이 ‘파견근로’가 허용되지 않는 업종임에도 1만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불법적으로 고용해왔다고 판정하였다. 그러나 국가기관인 노동부가 불법이라고 판정해도 현대자동차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들도 그들을 처벌하지 못했다. 오히려 회사는 노조 간부들을 대량해고 하고 법원에 출입금지 가처분을 신 청해서 공장 출입마저 가로막았다. 그러던 중 2005년 9월초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비정규직노조 조합원이었던 류기혁씨가 사측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노조 사무실 옥상에서 목을 매 자살하는 참변이 벌어졌다. 아산 비정규직지회는 연대파업에 돌입했고, 9월 7일 공장안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 때 회사는 백주 대낮에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권수정씨를 비롯한 조합원들을 납치해서 봉고차에 태우고 30여 분이 넘게 돌아다니다가 외딴 산골 논바닥에 유기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조합원들은 회사와 용역깡패들을 모두 고소했지만 검찰은 “출입금지 가처분 명령을 받은 자가 회사 안에서 업무방해 하는 것이 인정되므로 납치해서 내다버린 회사의 폭력 또한 이유가 이해된다”며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회사로부터 고소·고발당한 비정규직노조 간부들은 줄줄이 경찰에 소환되어 ‘업무방해’,‘공무상 표시무효’등의 혐의로 잇달아 구속되고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녀만 해도 세 차례나 구속을 당해야 했고 이번엔 끝내 실형을 살게 되었다. 검찰은 최근 현대자동차가 저지른 “불법파견”에 대해 기소할 수 없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 에 고용된 1만 여명 비정규직 노동자의 존재는 바로 세계 시장에서 현대 자동차가 가지는 가격 경쟁력의 원천이요, 기업 대물림을 이루는데 필요한 불법 자금의 돈줄이 되어 왔다. 때문에 현대자동차로서는 불법으로 고용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고 법도 정부도 그들을 강제하지 못한다. 이런 현대자동차가 이제는 정규직 노조의 정치파업을 문제 삼으면서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상여금마저 깎으려 하고 있으니 만일 여기에 노조가 굴복하게 된다면 정규직, 비정규직 가릴 것 없이 현대자동차 계열사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지금보다 더욱 후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서라도 현대자동차노조의 이번 투쟁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 언론은 더 이상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라! 기업 위기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 돌려지고 기업 성장의 과실은 “배부른” 기업주들이 몽땅 챙겨가는 현실에서 ‘희생과 양보의 미덕’을 실천해야 할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2017-07-11 | hrights | 조회: 240 | 추천: 0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감옥에 있는 조선남 시인이 우리 단체로 스무 편 가량의 시를 보내왔다. 침침한 불빛아래서 볼펜으로 편지지에 꾹꾹 눌러 쓴 정성스런 원고, 시인의 피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번진 이 의지의 덩어리를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 여기에 소개하기로 하였다. 조선남은 누구인가. 본명은 조기현. 건설 일용직 목수로 전국의 건설현장을 오가며 일했고 1989년부터 ‘노동해방문학’을 통해 시 쓰기를 시작했다. 제1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고 『희망수첩』 등 몇 권의 시집을 낸 바 있다. 그의 시에는 땀에 찌든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의 애환이 오롯이 담겨있고, 노동자·민중이 바라는 ‘해방세상’의 밑그림이 새겨져 있다. 대구경북건설노조 위원장이었던 그는 지난 6월 “불법파업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구속 돼 1심에서 3년 실형을 선고받고 현재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선고공판이 있는 날 새벽 4시 일어나 가슴을 친다/ 나의 미욱한 싸움은 수많은 동지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평생 일 밖에 몰랐던 동지들이/ 폭도로 몰려 줄줄이 잡혀와 중형을 선고 받았고/ 또 오늘 저들의 법정에 죄인이 되어 선다” (『우리가 다음에는』) 그는 “밤새 가슴을 쮜어 뜯으며”“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미친듯이” 부른다고 했다. (『미친듯이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였던가. “신혼여행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마석 모란공원을 둘러보았고/ 초겨울 전국노동자 대회 전야제에 첫아이 핏덩이를 엎고 따라나서던 아내”(『아내의 사랑』중에서)도 있고 “가족들도 생각해야지....”하며 “안타까운 눈빛”“간절함”으로 “가슴을 찌르는 비수”같은 “처가 식구들”도 있다.(『천형의 길』중에서)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손톱이 다 닳도록” 비좁은 독거방 벽에 “그리움의 피”로 새기는 이름은 동지들이다.(『벽』중에서) “모래 바닥에 혀를 묻고 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노가다 밥 먹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고 맹세를 하면서도/ 죽지 못해 다시 새벽에 현장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절망보다 무거웠던 생의 피울음으로 살아”(『형산강 다리, 해방의 다리를 건널 때까지』중에서)온 건설일용직 노동자들. 그들은 “차별없는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미친듯이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더니/ 우리 가슴팎에 대못을 꽝꽝” 박았다.(『비둘기』중에서) 그러더니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포스코 자본의 70%가 넘는 외국인 주주를 위해/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대처하라”며 “살인명령”을 내렸다. “전국에서 불러들인 수백,수천의 전투경찰들은/ 집회를 하고 있는 일당쟁이 건설노동자들을 포위했다”(『살인명령』중에서) 그들은 “함정을 파고, 덫을 놓고, 언론까지 대기 시켜놓고/ 토끼몰이를 하듯, 해산명령도 없이 굶주린 이리떼처럼 덤벼들었다”(『우리가 다음에는』에서) 7월 16일. 하중근 열사는 경찰의 “방패에 찍혀, 뒤통수를 내리치는 소화기에 맞아/ 두개골이 깨어지고/ 진압봉과 군화발에 밟혀/ 갈비뼈가 부러졌다”(『살인명령』중에서) 시인은 이 땅의 깨어 있는 모든 양심들을 향해 부르짖는다. “살해당한 하중근 동지의 넋은 끝내 형산강 다리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살인자도, 살인교사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치료가 끝나지 않은 부상당한 동지들은 다리를 절며 병원을 오가고, 다친 상처보다/ 피가 솟구치는 분노를 삭일 수 없는 먹먹한 가슴이 더욱 아픕니다/ 세상의 밝은 빛 한번 보지 못한/ 우리 아가의 영혼은 어디에 떠돌고 있을까/ 이대로 끝나는가?/ 참혹한 투쟁의 상처는 아직 피가 흐르는데/ 무장한 경비대에 가로막혀 정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출근을 저지당해 일자리를 빼앗긴 동지들/ 노동조합 탈퇴를 조건으로 취업하라는/ 굴욕과 모멸 속에 얼마나 더 서럽게 울어야 하는가/ 밤마다 포스코 높은 굴뚝에 불기둥이 솟는데/ 끌려간 동지들은 쇠창살을 부여잡고/ 이 밤 피울음을 토해내고 있는가/ 연락이 끊긴 애비가 구속된 줄도 모르고/ 울면서 애비를 찾는 착한 딸 아이의/ 서러운 흐느낌이 가슴을 저려오는데/ 우리의 투쟁은 여기서 끝났는가/ 동지여!”(『형산강 다리, 해방의 다리를 건널 때까지』중에서) 다음은 시인의 결론이다. “그날/ 아! / 그날의 함성과 만세소리/ 목이 찢어져라 부를 동지의 이름 기억하며/ 오늘의 모멸과 매질을 견뎌내자/ 감옥의 무거운 철문에 동지의 이름을 새겨 넣듯 노동자의 가슴에 해방의 이름을 새겨 넣자/ 형산강 다리/ 건설노동자의 해방의 다리를 건널 때까지/ 오늘을 잊지 말자!/ 동지여!”(『형산강 다리, 해방의 다리를 건널 때까지』중에서) 지난 28일 서울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고 하중근 열사 공동대책위원회' 사진 출처 - 프레시안 국가인권위원회는 11월 27일, 하중근 열사가 사망한 지 119일 만에 무거운 입을 열었다. “지난 2006.7.16 포항 형산로터리 노조 집회와 관련하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에서 제출한 진정사건을 조사한 결과 경찰의 금지통고 남용, 과잉진압 행위 등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하중근 씨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수사의뢰, 과잉진압 등에 대해서는 현장지휘관인 포항남부경찰서장을 징계, 서울지방경찰청 특수기동대장을 경고 조치할 것 등을 권고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기회주의적인 국가인권위원회 관료들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비겁한 결정문이었다. 단순하게 요약하면 ‘당시 집회 시위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은 인정되나 이것 때문에 하중근 열사가 사망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경찰 현장 책임자에게만 과잉진압 책임을 물어 적당히 징계할 것을 권고하며 사망원인은 검찰이 알아서 잘 밝혀 주기를...’ 과연 검찰이 하중근 열사를 죽인 살인범을 잡아낼 수 있을까?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포항건설노조 구속 노동자 한 분이 11월 13일, 검찰의 항소이유서 사본과 함께 한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지난 9월 25일 대구지법 포항지원(1심)은 포스코 점거농성으로 구속된 노동자 58명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하고, 그 중 27명에게는 1년 6월에서 3년 6월까지 실형을 선고했다. 노무현 정권 들어 최대의 ‘옥사’였고 가장 가혹한 실형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지경 포항건설노조 위원장을 포함한 17명에 대해 1심 재판부가 내린 판결이 “지나치게 가볍다”며 항소를 제기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찰의 항소이유서에는 삶의 벼랑 끝에서 목숨을 건 파업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의 기본권에 대한 배려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쇳가루 한번 뒤짚어 쓰지 않고도 한해 6조원 가까운 순이익을 챙겨가는 포스코의 대주주들을 위해서 건설노조의 파업을 “포항지역 최대의 불법집단 행동”으로 둔갑시켜 놓았고, 조합원들을 “소요죄에 상당하는 사회적 위험을 야기 시킨 자들”이라고 비약시키며, “집단 흉기 등 감금”“집단 흉기 등 폭행” 등 다섯가지나 되는 ‘폭처법’ 죄목으로 단단히 엮고 있다. 검찰은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수적 우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쟁취를 위해 법질서를 파괴”했다며 “법의 준엄한 심판”을 요구한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은 2만 5천명이나 되는 경찰병력을 동원해서 포스코의 불법대체인력 투입을 도왔고, 평화스런 집회 시위현장을 폭력으로 유린하며 하중근 열사와 임산부의 뱃속에 든 태아까지 살해했다. 경찰, 지역 언론과 포항시장, 지역 유지들은 합세해서 건설노조를 고립시키고 경찰폭력을 부추겼다. 진정 민주주의와 법질서를 파괴한 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을 단죄하지 않고서는 제2, 제3의 하중근 열사가 생겨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중근 사망사건”을 또 다른 ‘살인의 추억’으로 남겨놓아선 안 된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8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