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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솟구치는 구속노동자들의 분노 -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7:40
조회
426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지난 토요일 오전, 원주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원주교도소에서 1년 반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해고노동자 변외성 씨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내다뵈는 야산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은 오래 전에 끝이 났고, 앙상한 나무 가지에 듬성듬성 매달린 마른 잎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쁘신데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세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예요!” 늘 그렇듯이 인사는 대강 짧게 몇 마디하고 곧장 ‘용무 확인’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안하면 삼십분도 안 되는 짧은 면회시간에 할 말을 다 못할 수도 있다.

변변한 난방시설 하나 없는 감옥은 지금, 방안에 가만히 있어도 몸이 오그라들 판이다. 그런데도 변외성 씨를 비롯한 구속노동자들은 집단 단식 투쟁을 결행하고 나섰다.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 개악법”, “노사관계 로드맵”, “한미 FTA" 등으로 민주주의와 노동자, 서민들의 기본권을 시궁창에 처박았다. 이를 반대하던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철퇴를 휘둘러 지금까지 1,018명(10월 31일 현재)의 노동자를 구속했다. 2005년 울산건설플랜트노조, 2006년 포항건설노조, 2007년 뉴코아-이랜드 노동자들, 노무현 정권 내내 탄압을 받아 온 화물, 덤프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눈물이 쇠창살에 맺혀 마를 날이 없다.

변외성씨는 대경상운이라는 택시회사에 입사해서 성실하게 일을 해왔으나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5년 전에 해고를 당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대중교통의 일익을 담당하는 택시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프다.

그래도 웬만한 택시 회사엔 노동조합이 있다. 하지만 노조 간부들은 대부분 사장들과 한 통속이 돼 조합원 등골을 빼먹는 거간꾼들이다. 업체 사장들 또한 정치인들, 큰 부자들 구역질나는 뒤치다꺼리 해주다가 거저 사장자리 꿰찬 위인들이니 ‘인권 마인드’는 커녕 ‘경영 마인드’도 없고, 노동자 알기를 ‘껌’으로 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민주노조인데, 사정이 이러니 여간 힘들지가 않다.

2002년 대경상운에서는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투쟁이 벌어졌고, 사측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한 조합원이 노동조합법,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끔찍한 사태 앞에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변외성 씨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목숨과 맞바꿔야 하는 민주노조 깃발, 이 땅 노동자의 처절한 현실이 한 순간에 고압 전류처럼 그의 뇌뢰에 내리 꽂혔다. 분신한 동료의 치료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그는 마지막까지 투쟁했지만 투쟁은 어정쩡 마무리되고 해고자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원직 복직”을 위해 풍찬노숙하며 투쟁하는 신산한 해고 노동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재판 받으랴, 전국 해고 노동자들의 모임인 전해투(민주노총 전국해고자복직투쟁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랴, 가정을 돌 볼 겨를은 없었다.

모아 두었던 전세금을 까먹기 시작하더니 이곳저곳 빈민촌을 전전하다 결국 ‘뉴타운’ 개발이 예정된 상도동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세입자들을 규합해서 한동안 철거 반대투쟁에 매달려야 했다. 하지만 분노스런 사건 하나가 그를 다시 노동자 투쟁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그가 조합원으로 있었던 노조의 상급단체, 한국노총이 정부, 경총을 도와 “복수노조 허용”을 3년 유예시키고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후퇴시키는 “노사관계로드맵” 법안에 합의를 해준 것이다. 2006년 9월 19일 그는 다른 해고노동자 7명과 함께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을 찾아갔다가 천만 뜻밖에 구속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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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한 동료의 치료비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변외성씨는
마지막까지 투쟁했지만 투쟁은 어정쩡 마무리되고 해고자 신세로 전락했다.


벼랑 끝이 따로 없었다. 아내와 슬하의 세 남매는 보금자리마저 잃고 거리로 내쫓길 판인데 남편은 구속이 돼 까마득한 2년 6개월의 감옥살이를 해야 하니.... 새벽마다 요구르트 배달을 하는 아내는 한 달에 두 번 원주까지 남편을 면회하는 것조차 버거울 지경이다.

“올해 큰 딸이 수능을 치렀는데, 합격을 해도 고민이다. 사회의식도 있고 참 총명한 아인데, 전에는 대학에 붙기만 하면 어떻게든 입학금은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대화 내내 두 눈에 광채를 번뜩이던 그였지만 가족 이야기를 꺼낼 때면 슬쩍 말꼬리가 흐려진다. 1년 3개월, 적지 않은 감옥살이를 했건만 아직 절반이 더 남았다. 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할 때까지 이 가정은 과연 유지 될 수 있을까?

몸은 비록 감옥에 묶여 있어도 투지와 신념만큼은 꺽은 적이 없었다. 투쟁이 필요할 때면 그는 언제라도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그동안 옥중 단식투쟁을 무려 6번이나 감행했다.

“비정규직 철폐”, “재소자 인권 보장”, “양심수 석방” 등을 촉구하며 굶고 또 굶었다.

“교도소 관료들의 경직된 태도를 바꿔내는 것은 수형자들의 몫”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며 여러 차례 투쟁을 벌인 결과, 텔레비전 생방송 뉴스 시청 등 열악했던 원주교도소 재소자들의 처우를 상당히 개선시켰다. 덕분에 동료 재소자들로부터 두둑이 신망을 쌓아놓긴 했지만, 소장이나 “윗 대가리”들이 바뀔 때마다 재소자 처우가 오락가락하고 있어 그 때마다 새롭게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고 한다. 행형법 개정 같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데 국회에서 잠자고 있으니, 인권단체들이 분발해달라고 한다.

교정 당국은 구속노동자들이 집단 단식 투쟁을 한다고 하자, 마치 ‘범죄 모의’라도 되는 양 기겁하며 구속노동자들 끼리 서신 왕래마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외부 단체나 가족들에게 보내는 서신 또한 법무부 교정국의 허가 없이는 발송할 수 없도록 차단하고 있다.

원주교도소는 치졸하게도 변외성 씨에게 “자꾸 골치 아프게 하면” 그동안 요구해왔던 수도권 교도소로의 이감은 힘들 거라며 협박까지 한다. 변외성 씨는 그동안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부인이 주말에 면회라도 편히 올 수 있도록 수도권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달라며 간절하게 요구해왔다.

그러나 어떠한 방해도 한 맺힌 구속 노동자들의 결연한 투쟁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11월 19일,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이 “삼성 족벌 해체”, “비리 몸통 이건희 등 구속”, “양심수 전면 석방” 등을 촉구하며 제일 먼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는 삼성 재벌의 노동자 인권 유린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3년 가까이 실형을 살고 있다. 4년 전 북한을 방문한 것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민주노동당 당원인 전주교도소의 박종기 씨 또한 같은 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11월 26일부터는 변외성씨와 2006년 포항건설노조 투쟁으로 구속된 황우찬 민주노총 포항시협 의장, 이지경 포항건설노조 전 위원장이 “비정규직 철폐, FTA 반대”, “하중근 열사 사망 책임자 처벌”, “포스코의 건설노조 탄압 중단”, “삼성재벌 비리 특별검사 도입”, “한나라당 이명박, 이회창 낙선 운동”, “양심수와 생계형 민생사범을 포함한 대사면”을 촉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할 것이다. 12월 3일에는 역시 같은 요구를 내걸고 포항건설노조, 전해투 소속 구속노동자 7~8명이 연대 투쟁에 동참한다.

노무현 정권의 황혼은 평온하게 저물어 가고 있지만, 그들의 손에 억울하게 구속된 노동자들은 차가운 감옥 안에서 분노로 치를 떨며 곡기를 끊은 채 항거하고 있다. 이제 “민주 시민”들이 나서야 할 때다. 구속노동자들의 이 처절한 투쟁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