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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맞선 이재익의 처절한 투쟁 -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7:36
조회
264

이광열/ 구속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


 
“나는 심신이 너무나 지치고 억울하여 이제는 솔직히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이대로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소!”

2006년 3월 10일. 이재익 씨는 징역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7일 만에 대구구치소를 나섰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자유의 공기는 매서운 꽃샘추위와 함께 다가왔다. 본능적으로 코트 깃을 올려붙여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분노와 모멸감으로 무너져 내린 가슴에서 뿜어 나오는 허탈한 한기가 이미 그의 몸을 꽁꽁 얼려 놓았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대구영업소 차장이었던 이재익(51) 씨는 직책이 말해 주듯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기보다 “삼성맨”으로서 살아가는데 긍지와 애착을 느꼈던 평범한 사람이다.

악랄한 삼성생명의 구조조정

1984년 삼성생명에 입사한 그는 꼼꼼하고 우직한 성실성이 빛을 발해 특진 1회, 관리자 대상 3회, 밀레니엄 대상 1회라는 화려한 포상 경력에다 인사고과는 늘 AAA 등급(최우수 등급)을 달렸다.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였던 그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삼성의 독단적인 ‘황제식 경영’이었다.

1997년 한국 경제 전체에 가해진 거대한 외부 충격(경제위기)으로 삼성그룹은 휘청거리게 되었는데, 그 일등공신은 ‘실패작’으로 판명난 삼성자동차였다. 불똥은 곧 삼성생명으로 옮겨 붙어 “희생양”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삼성생명의 “구조조정”은 3천여 명의 애꿎은 직원들을 차가운 거리로 내몰았다.

“무노조 경영”이 체질화 되어 있는 삼성에서 “구조조정” 에 대한 노사 합의나 공개된 논의 절차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겉으로는 “장기승진 누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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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노컷뉴스


직급별 고령자, 근무성적 불량자” 등을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밝혔으나 악화가 양화를 밀어 내듯이 칼자루를 쥔 상사들에게 아부할 줄 모르고 바른 말도 서슴없이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대거 포함됐다.

이재익 씨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6개월 치 임금을 보장해주는 조건에 “명예퇴직”을 요구받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듬해 곧장 전보 명령이 떨어졌다. 연간 평균 실적이 전국 최하위권이면서 폐쇄가 예정된 구미영업소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법인 영업소에 근무해 본 경험이 없는 그에게 이것은 사실상 나가라고 등 떠미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2000년 상반기 전국 법인 영업소 중 1등, 하반기에는 3등을 차지했다. 덕분에 ‘관리자 대상 금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2001년 5월 중 단행된 3차 구조조정의 회오리를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그해 10월부터 전국 2백여 개 영업소를 폐쇄시키는 4번째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어렵사리 살려 놓은 구미 영업소도 한두 달 영업실적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전격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영업소가 폐쇄되는 마당에 영업소장이 서 있을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퇴직 위로금 1억을 줄 테니 나가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이재익 씨는 이번에도 단호히 거부했다.

삼성생명은 이재익 씨에게 나름대로 당근책을 제시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자 혹독한 보복을 가해 왔다. 차장 직급에다 영업소장을 맡았던 20년 고참사원을 대구법인 영업국으로 발령을 내면서 신입사원들이나 맡는 ‘업무담당’이란 직책으로 발령을 냈다. 그마저도 담당자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내려진 중복발령이었기에 그는 아무런 일감도 주어지지 않는, 사실상 대기발령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삼성에 맞선 이재익 씨의 투쟁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고 했던가. 회사를 자신의 분신인양 생각하며 20년 가까이 몸 바쳐 일해 왔던 그였기에 느껴야 했던 배신감과 모멸은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독기어린 투지가 그의 가슴속에서 불타올랐다. 그의 저항은 처음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대기발령 이후 별다른 업무가 없었기에 이전과 달리 회사의 공식 근무시간(오전9시-오후6시)에 맞춰 정시 출퇴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본사 인사팀이 직접 개입하고 나섰다. 2002년 4월 이재익 씨는 서울로 불려 올라갔다. ‘다른 직원들은 8시 30분까지 출근하는데 왜 9시에 출근 하느냐’며 사표를 쓰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이재익 씨 역시 이 문제에 관해 충분히 대항할 논거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각종 공문서, 사내 통신, 노조의 공문서 등 9시~18시가 공식근무시간 임을 입증해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1993년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이후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7시~16시로 변경한 적이 있었다. 실질적인 근무시간이 더욱 늘어나게 되면서 직원들의 불만이 팽배해지자, 삼성은 슬그머니 근무시간을 원위치 시켰다. 하지만 현장에서 공식근무시간보다 30분 더 일찍 출근해서 일하도록 강요하는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삼성생명은 이러한 관행을 이유로 이재익 씨에게 사표를 강요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재익 씨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공세로 맞섰다. 회사가 그동안 공식근무시간을 어기고 직원들에게 초과 근무를 시켰으니 “시간외 수당”을 내놓으라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던 이 소송은 1년여 만에 패소했다. 하지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공식근무시간 문제가 앞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그의 인생의 발목을 잡게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건강마저 악화되기 시작했다. 가슴 떨림과 현기증, 불면증에다 속이 더부룩하고 구토와 신물이 넘어오는 증세 때문에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하지만 영업국장은 ‘통근치료’가 가능하다며 그가 제출한 병가원을 여러 차례 반려시켰다. 2003년 3월 10일, 이재익 씨는 몸이 너무나 아파 출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국장은 그의 집 앞까지 차를 몰고 나타나 “무단결근”이라며 “짤리고 싶지 않으면 무조건 출근하라”고 협박을 해댔다. 그를 강제로 차에 태워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까지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재익 씨는 이튿날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을 했다. 국장은 그를 보자마자,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새파란’ 후배 직원들 앞에서 노골적인 망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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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익 씨는 자신의 방어를 위해
삼성에 맞선 투쟁을 전개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그러더니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더 이상 버티지 말고 결단을 내리라”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런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가 3일째 되던 날, 국장은 그로부터 자신이 원하던 답변을 얻지 못하자, “왼팔을 꺾고 목을 조르는” 폭행을 가했다.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112에 신고를 했다. 본사에도 전화를 해 국장의 폭언과 폭행을 중단시켜 달라고 촉구했다.
검찰과 사법부는 삼성과 한 통속

하지만 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초동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이 사건을 “폭행에 의한 상해”로 기소 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지만 검찰은 오히려 이재익 씨가 “상사를 모욕하고 업무를 방해”했다며 벌금 50만원에 약식기소를 해버린 것이다. 재판정에 선 이재익 씨는 판사에게 “검찰의 사실 오인에 의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자 검사는 ‘정식 공판이 청구된 사건인지 몰랐다’며 징역6개월을 구형하는 상식 밖의 행위를 자행했다. 그 후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으나 벌금 50만원이 확정되었고 회사는 이를 빌미로 징계위원회를 개최해 그에게 6개월의 정직을 때렸다.

하지만 이재익 씨의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동안 앓아왔던 병증이 ‘산재’라고 판단한 그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요양을 신청했고, 2003년 7월 29일 공단은 그의 병이 “회사와의 갈등상황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한 “불안신경증”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일하다가 다쳐도 회사 측의 공작으로 인해 산재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던 삼성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대한 근로복지공단의 산재판정은 뉴스거리가 되었다. 이재익 씨는 “사무실 폭행사건” 재판에서 출근부를 조작하고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그를 궁지로 몰아넣은 한 여직원을 “위증죄”로 고소했다.

하지만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은 이번에도 놀라운 둔갑술을 발휘하며 그를 “무고죄”로 몰아 구속 기소하고 말았다. 재판에서 “위증”여부를 입증하지 못하면 “무고”혐의를 뒤집어 쓴 채 형사처벌을 당해야 하는 위기일발의 상황이 전개됐다. 쟁점은 삼성생명의 공식근무시간은 언제인가, 대구법인 영업국 사무실에서 이재익 씨가 폭행을 당한 것이 사실인가.

그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꼼꼼히 챙겨둔 회사 공문서들을 모아 한 다발이 넘는 증거자료들을 제출했다. 삼성생명은 사문서에 불과한 대표이사의 확인서, 어용노조 위원장의 확인서가 전부였다. 그는 검찰에 위증의 당사자들과 대질심문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6년 10월 25일 출소한 지 7개월여 만에 이재익 씨는 삼성생명으로부터 징계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삼성과 사법권력으로부터 버림받은 노동자들과 함께 더 커다란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희망사항은 너무나 소박하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지만, 삼성생명은 내가 입사하여 결혼을 했고, 자식을 키웠고,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오! 그러기에 나는 반드시 명예를 회복하고 꼭 돌아가야만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