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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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장윤미/ 국민대 학생 여성학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을 건네셨다. “우리 다음 한 주간은 상대방에게 그 어떤 외모에 대한 코멘트도 달지 않도록 해봐요.” 타인을 평가하는 외모라는 압도적인 시선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해보라는 뜻이었다. 일주일 동안 노력해보며, 내가 얼마나 외모로 상대방을 평가해 왔는지를 절실히 느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외모에 관한 언어가 어떻게 잠재적으로 서로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얼마나 내가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의 기준에 기여해왔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참 폭력적인 사회구나.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회의적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다 -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이때 우리들이 말하는 폭력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이 난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폭력에 대해 그만큼 예민할까. 사이버폭력, 언어폭력, 성폭력 등등 많은 사회적 문제에 폭력이라고 이름붙일 줄만 알지 폭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만큼의 감수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결국 우리가 눈을 찌푸리고 적극 항거하는 것은 가시적인 폭력이다.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에만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렇게 폭력에 대한 무딘 감수성은 인간관계에서 모세혈관처럼 뻗어있는 수많은 폭력적인 잣대를 보지 못하게 한다.   여성문화예술기획 주최로 열린 `빅우먼 패션쇼-통 큰 엄마와 언니, 그리고 명랑 딸들의 축제' ‘빅우먼 패션쇼’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 유쾌한 딴죽을 거는 의미로 기획됐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최근, 한 고등학생이 자신의 심한 여드름에 대한 고민으로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유서에는 자신을 비하하는 내용과 친구들의 놀림으로 괴로워한 흔적이 있었다. 이 죽음에는 그 어떤 가치보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 그걸 기준으로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 슬픈 사회의 모습이 있다. 과거, 폭력이 눈에 보이는 독재시대와는 달라졌다. 훨씬 더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 안에 폭력을 발설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고, 자신이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대로 순응한다. 그러다보면 우린 우리가 왜 불행한지도 모른 채 그냥 이게 삶이라고 자위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다 죽을지도 모른다. 또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우리들은 폭력에 있어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이자 피해자인지 알지 못하며, 사회가 피폐해져 간다고 잠시 애도하고 말 뿐이다. 오늘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친구에게 “살쪘구나. 살 좀빼” 그렇게 말하며 듣는 당사자도 모르게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 또 스스로 다이어트 강박에 휩싸여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젠 나도 느낀다. 그건 곧 잘못된 사회의식을 공고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야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감지하기 위해. 우리도 알지 못하게 의식화된 것에 대한 검증과 비판의식 없이는 이 보이지 않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81 | 추천: 0
“너무나 아프지만 기억해야만 하겠다.” - 영화 ‘거북이도 난다’를 보고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의 가장 큰 매력은 ‘우화성’에 있다. 우화는 그 자체로 현실을 의미하지 않지만 우화의 비틀기와 풍자성은 현실적 요소를 바탕으로 한다. 아이나 동물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리얼하고 예리한 ‘촌철살인’이 된다.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사회에 적당히 길들여지고, 적당히 악해진 어른 세계는 순수한 동심의 시선에 더욱 더 굴절되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라는 워즈 워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영혼은 그 사회의 시금석과도 같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이 말한 것처럼 “아이들의 죽음은 신의 죽음과 같다.” 사회와 어른에게 있어서 아이가 갖는 상징성이란 바로 ‘희망’이기 때문이다. 어떤 최악의 고난의 상황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아이는 자라주길 바라는 것이다. 연약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으로. 영화 ‘거북이도 난다’라는 제목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이다. 걷는 것조차 느릿하고 위태로운 거북이가 날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날 수 있다는 신념과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영화제목이 암시하듯 아이들이 머무는 현실은 영화 내내 보여지는 진흙탕처럼 질퍽하고 끔찍하기 그지없다. 소수민족으로 핍박받아온 역사를 고스란히 견뎌온 쿠르디스탄 지역의 쿠르드계 감독인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 본 경험 없이 그저 영화가 좋아서 이란의 유명한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을 자원한다. 그러나 그는 키아로스타미처럼 사색적이고 고요한 성찰이 담긴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키아로스타미와 달랐다. 그의 카메라는 아름다운 올리브 나무숲과 황홀하고 풍요로운 대자연보다는 비행기의 폭음과 탱크 잔해, 지뢰나 탄피 등을 놀이기구와 생계수단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신의 민족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 출처 - 영화 '거북이도 난다'   그의 영상 속의 배경은 신비롭게 눈 덮인 산야와 평화로이 날아오르는 새떼처럼 아름답지만 그 배경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풍경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쿠르드족은 권력의 정점을 쥐고 있던 후세인을 위시한 주류 민족으로부터 핍박받던 소수민족으로서 독립을 위해 미국 정부를 지원했다가 이라크 군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물론 쿠르드족 지도자들의 선택에 대한 평가는 분분했을 테지만 대다수의 쿠르드족의 생존과 독립의 문제는 모든 대의를 넘어서고도 남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도 쫓겨나 난민으로 더럽고 초라한 천막 안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 쿠르드족의 역사는 그야말로 광야에 흩날리는 질기디 질긴 야생초와 다름이 없다. 그들이 태어나 살아가는 곳은 다름 아닌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국경지역. 서로 넘어오기만 하면 총을 갈겨대고 강대국들은 앞을 다투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지뢰를 묻어 놓았지만 이곳을 떠나 달리 살아갈 방법도 여유도 없는 쿠르드족 아이들은 목숨을 걸고 지뢰를 캐며 살아간다. 아이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며 가장 좋은 교육과 환경 속에서 자랄 권리가 있지만 쿠르드족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정치 싸움과 전쟁 게임에 가장 여린 가슴 속에 씻어지지 않을 상처를 입는다. 지뢰 때문에 두 팔을 잃은 헹고, 이라크 군인들에게 윤간 당한 아그린, 그 악몽의 씨앗으로 태어났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아기 리가,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른 같은 약삭빠름과 흥정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던 위성과 같은 아이들을 본다는 것은 영화 감상이 아닌 일종의 천형이나 고문을 감내해야 할 만큼의 고통을 가슴 가득 느끼게 된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독재자인 후세인이 땅도, 식량도, 심지어 하늘까지 빼앗아 버렸다고 탄식하지만 구원군으로 여겨졌던 미국에 대한 비판도 드러낸다. 위성은 구세주이며 친구처럼 여겼던 바로 그 미국이 묻어 놓은 지뢰 때문에 자신의 다리를 잃게 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군과 탱크 행렬을 차갑게 외면하고 절뚝이며 걸어가는 위성의 엔딩신은 고바디 감독의 정치적 시선을 드러내 준다. 감독 자신의 말처럼 “나의 카메라는 목숨과도 같은 무기”가 된다. 사진 출처 - 영화 '거북이도 난다' 그는 실제로 다리가 없고 팔이 없는 아이들을 배우로 기용하고 탄피가 기괴하게 쌓여있는 곳에서 마치 다큐를 찍듯이 영화를 ‘보여준다.’ 특별한 사건의 창작과 플롯이 없어도 고바디의 카메라는 현실을 고발하고 관객의 머리와 가슴을 내려치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영화 ‘거북이도 난다’는 매우 정치적인 작품이기도 하지만 영상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드라마 곳곳에 배치된 상징적인 복선들은 이 영화만이 갖는 아우라적 신비감을 더해주며, 일년에 한번만 눈이 온다는 쿠르디스탄 지역의 눈 덮인 산야 위로 아득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비상은 허한 아그린의 눈망울을 더없이 닮아 있다. 가슴을 찢는 듯이 절규하는 여인의 노래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오를 즈음엔 관객이 받는 천형 같은 고문 역시 끝나지만 가슴 속에 찍힌 화인이 주는 고통은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먹먹해 온다. 그리고 중얼거리며 되뇌게 된다. “너무나 아프지만 기억해야만 하겠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05 | 추천: 0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간사 얼마 전 나는 중국 길림성의 연길을 다녀왔다. 05년부터 해서 세 번째 방문이다. 해마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 청소년들 간의 교류활동을 펼치고 있고, 나는 그 곳에서 여러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는 터라 조선족 청소년들과는 어느덧 미니 홈페이지 친구 사이가 되었다. 이번에 중국 연길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 몇 명의 조선족 친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비행기가 1시간 넘게 연착하면서 2시간 넘게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9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라 무척 반가웠고, 2시간 넘게 기다리면서 우리를 환한 얼굴로 맞이해준 조선족 친구들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이 중에 은옥(가명)이라는 연변대학교 학생을 떠올려본다. “은옥아~ 너무 반가워~” “간사님~ 안녕하세요~ 오신다는 얘길 듣고, 이렇게 나왔어요~” “은옥이는 고급중학교 때 모습하고 똑같은데 벌써 대학 2학년생이네~” “그런가요? 하하하~” 은옥이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를 다니는 학생이다. 나와는 2년 전 여름, 청소년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고, 우리 단체와는 3년 전부터 인연이 닿았던 친구다. 3년 전에 단체에서 연변대학교와 공동으로 진행한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타고, 그 해 여름, 한국 청소년과의 교류 프로그램에도 참여한 후, 3년 째 여름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해온 친구다. 원래 집이 심양이어서 연길과는 기차로 무려 11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거리임에도 은옥이는 현재 연변대학교 조문학부를 다니고 있다. 중국은 가을 학기가 신학기인지라 2년 전 여름에 내가 은옥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연변대 조문학부 입학을 기다리는 입학생이었다.   지난 5월, 연변대학교 종합청사에서 열린 한·중 청소년 친선평화백일장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조선족 청소년 사진 출처 - 필자     “은옥아~ 가을 신학기부터 연변대 조문학부에서 공부하지?” “네” “여기에서 거리가 꽤 멀텐데, 어떻게 연변대를 선택하게 되었어? “음... 작년 봄에 백일장 대회, 그리고 여름에 한국 청소년들과의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면서 민족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아~ 그랬구나.”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해야할 지 많이 방황했었는데, 교류 프로그램들을 경험하면서 조선 문학을 공부해야겠다 싶어졌어요~” “그래. 그럼 은옥이는 언제부터 심양에 살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향은 이 곳이 아니에요.” 은옥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엄마, 아빠가 모두 한국으로 일하러 왔기 때문이다. 두 분 중에 한 분이 먼저 한국으로 오신 후, 이어 또 한 분이 한국으로 오셨다. 이는 은옥이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국 내에 약 13만 여명의 조선족 분들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만큼 많은 조선족 청소년들의 엄마, 아빠들이 한국에 계신다. 은옥이도 여느 조선족 청소년처럼 부모님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었다. “은옥아~ 엄마, 아빠 보고 싶지?” “네~ 두 분 모두 멀리서 고생하고 계셔서 안타까워요~” “심양 집에 한 번도 못 오셨어?” “네~ 한국으로 가신 후, 몇 년 동안 한 번도 못 오셨어요~ 조문학부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꼭 한국으로 공부하러 갈 거예요~” “그래~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백일장 대회에 참가한 도문시 OOO소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도문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측의 남양시와 마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지난 2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참사를 떠올려본다. 희생자들 중에는 조선족 동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춘절 명절을 앞두고 10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려고 했던 아들은 불법체류자이며,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계기관에 의해 부검이 된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약 3만 여명의 조선족 근로자가 불법체류자 신분의 상황 속에서 오늘도 그들은 감시와 단속의 어두운 곳에서 숨어살아야만 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여전히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으며, 교묘한 방식으로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부모님을 둔 조선족 청소년들은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조선족 동포를 대하는 모습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까? 그들의 대답을 가만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벌써부터 이번 여름에 만날 은옥이가 보고 싶어진다. 반가운 두 눈빛과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작년 백일장 대회에서 수상한 룡정시 OO소학교 6학년 학생의 ‘병아리’ 시를 옮겨본다. 병아리 애처롭게 삐약삐약 울어대는 병아리 나처럼 엄마 잃고 그리움에 울어대나 병아리야, 울지마 네가 자꾸 울면 한국간 울엄마 생각에 내 눈에서도 마알간 이슬이 똘랑 떨어진단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77 | 추천: 0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우리 동네에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집이 있다. 우리 작목반원이기도 한 용이 형(가명)은 몇 번에 걸쳐 이장직을 수행해 온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하루는 개를 잡았다며 단고기를 먹으러 오라기에 점심시간에 맞춰 달려갔다. 이미 동네 아저씨들 몇 분이 오셔서 드시고 있었고, 한쪽에는 젊은 농군들의 상이 따로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들과 우리 젊은 농군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주머니와 형수는 내내 고기를 발려내고 밥과 국을 나르고 ‘국이 식었다’ ‘두릅 좀 더 가져와라’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는 아저씨의 주문에 비위를 맞춰야 했다. 두 분은 우리의 식사가 끝나 상을 물리고 커피를 한 잔씩 돌리고 나서야 주방에 쪼그리고 앉아 식은 단고기에 점심을 드실 수 있었다. 시골에 살면 가끔은 ‘내가 지금 2007년도에 살고 있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일이 생긴다. 세월이 뒤로 가는 듯한 느낌, 불합리한 관습과 관행 등 나의 앞선(?)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도 있다.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 선대로부터 다듬어져 온 나름대로의 질서와 법칙이 시골을 유지하고 있는 힘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시골 아낙네들의 삶을 보면 아직도 변함없이 억눌려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아이들의 보육은 물론 두 번의 새참과 세끼의 식사, 농사일까지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특히나 노동도 노동이지만 여성으로의 위상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소위 여자는 잘 길들여져야 된다는 남성들의 사고방식은 농촌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차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여성의 지위는 마을단위에서도 나타난다. 마을마다 부녀회가 있는데 역할은 마을잔치나 기타 마을 부역이 있을 때 식사준비가 그것이다. 남자들은 외부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접대하고 부녀회는 음식준비며 설거지 등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한다. 그래서 잔치 때 외부 손님들 부르지 말고 함께 준비하고 함께 놀고 즐기는 마을 잔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 보지만 통하지 않는다. "여성노동자의 삶과 희망"을 주제로 한 사진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트렉터를 모는 50대 농촌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출처 - 일다   요즘 우리 동네 인근 5개리 마을이 묶여 농림부로부터 사업을 하나 따 냈다. ‘농촌마을종합개발계획사업’ 5개년 사업인데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되는 사업이다. 5개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연일 회의다. 마을마다 의견을 모으고 5개리 대표들이 모여서 안을 만들고 이제 시작이니 5년간은 이 사업으로 바쁘게 생겼다. 그런데 추진위원회에 여성추진위원은 없는 거다. 전체 회의에서도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여성과 관련한 사업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농촌공사 직원은 부녀회의 역할이 크고 여성을 위한 다양한 사업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마을의 대표들은 별 관심이 없다. 이제야 여성 추진위원을 두어야 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몇 년 전부터 공부방을 하면서 정부 지원사업을 들척거리며 보는데 ‘여성농업인센터’라는 사업을 알게 되었다. 어린이 집을 비롯하여 방과 후 공부방, 그리고 여성농업인들을 위한 상담과 강좌 등 잘 운영되기만 한다면 여성농업인들에게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사업이다. 가사일과 육아, 농사일까지 숨 돌릴 틈 없는 시골 아낙네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쉼터가 되리라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다. ‘농촌마을종합개발계획사업’에 종합복지센터를 짓는데 한 층을 여성농업인센터로 만들려고 안도 올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농촌 여성들 스스로의 자각일 것이다. 가정에서는 무시당하고 마을에서는 소외되는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자각, 그리고 실천. 그렇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아직도 변하지 않는 가부장적 농촌사회도 조금씩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용이 형네에서는 아직도 거실과 방에서 손주들과 아내, 며느리가 있든 없든 아버님의 담배연기가 피어오른다. 용이 형 아버님은 그것이 가장으로서의 권위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당신! 아이들도 있는데 앞으로 담배는 나가서 피워요!!!” 아버님을 꾸짖는 아주머니의 당찬 목소리를 듣고 싶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14 | 추천: 0
전종휘/ 한겨레 기자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존재양식 자체가 고립을 상징한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섬의 슬픔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내재적 가치가 뭍에 의해 폭력적으로 침탈당해온 그 역사 속에 있다. 오키나와가 그렇다. 13세기에 세워진 류큐왕조가 1879년 일본의 침공으로 무너지면서 이 땅에는 피와 화약의 냄새만이 아름다운 해변을 메워왔다. 일본의 자치단위인 현으로 편입된 이후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일본 본토에 수탈당해야 했고, 전쟁 말기에는 수만명의 현지인이 징용과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온 한국인들과 함께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돼 숨졌다. 그렇게 이어진 미군 점령의 역사는 주일미군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진화하고 있다. 지역민들은 주일미군 재배치 문제로 십수년째 가열찬 투쟁을 벌여왔다. 미군의 후텐마 비행장을 헤노코로 옮겨오고 본토의 기지마저 이 곳 오키나와로 옮겨오려는 사업이 논란거리다. 이미 주일미군의 3/4 이상이 몰려있다는 오키나와는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군기지 반대투쟁에는 우치난주로 불리우는 정통 오키나와인들이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과 생김새부터가 차이가 난다. 얼굴선이 비교적 굵어 다소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오키나와 전체 주민의 30-40% 정도로 추정되는 우치난주들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외지인이 “당신도 일본인 아니냐”고 물으면 대단히 기분 나빠 한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겪어온 고난의 역사를 여전히 되새김질하며 일부는 일본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고 있기도 하다. 섬의 눈물을 헤아리기 위해 그 먼 오키나와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미 4.3항쟁이라는 역사의 큰 아픔을 겪은 바 있는 우리의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로 들끓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해군은 12만평의 제주 남해안을 매립할 계획이다. 해당 지역 해녀들은 완벽하고 항구적인 ‘직장폐쇄’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 한-미 자유무역 협정 협상 타결로 감귤나무를 바라보며 한숨짓던 지역민들은 해군기지 문제가 불거지며 다시 눈물짓고 있다. 물론 해군기지 후보지에 살지 않는 다른 제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 경제발전에 은근한 기대를 걸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상지 가운데 한 곳인 위미1리의 오동옥 반대대책위 위원장은 기지건설을 경제발전으로 연결하는 건 미신이라고 단정한다. “1함대사령부가 있는 강원도 동해시 송정동의 경우 실제 가서 조사해보니 1980년 4월 인구가 1만2500여명에서 지난해에는 5300여명으로 대폭 줄었더라고. 노인네만 남고 젊은이는 떠났다고 그래. 또 송정초등학교 졸업생이 같은 기간 270명에서 38명으로 줄었대. 경제발전은 무슨 경제발전이야.” 지난달 제주 현지 취재를 하면서 주민 인터뷰를 하던 중 뭉툭한 내 콧날이 순간적으로 식초를 뿌린 듯 시큰해지는 경험을 했다. 역시 해군기지 후보지 가운데 한 군데인 화순항의 한 주민이 “위미리건 화순항이건 해군기지를 제주에 지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을 때다. 그 때만 해도 서귀포시 강정동이 주민총회를 거쳐 기지 유치를 자원하고 나서기 전이라 위미리 아니면 화순항 둘 중 한 곳에 기지가 세워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던 때다. 그 주민의 말은 연대의 정신을 표명한 것이다. 그림 출처 - 한겨레 그 꼭같은 얘기를 1년여 전 오키나와에서도 들은 바 있다. 후텐마 비행장이 위치한 기노완시의 요이치 이하 시장을 만났을 때다. 시장은 당시 “비행장을 이곳 기노완시에서 빼되 나하시의 헤노코에도 옮겨 짓지 말라. 아예 오키나와에서 나가라”라고 말했다. 요이치 시장의 말이나 화순 주민의 말이나 지명만 다를 뿐. 섬의 슬픔을 아는 사람들은 충분한 면적의 정서적 공감대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최근 종적을 감춰버린 노들섬 맹꽁이를 생각할 때면 기분이 묘해진다. 서울시의 무분별한 땅고르기 작업에 지난해 서식처로 파악된 바 있는 수로가 막히고, 땅이 압착돼 살던 집이 무너져 내렸을 그 맹꽁이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들도 섬은 슬프다고 생각할까? 어딘가에 숨어 자신들에게 연대의 뜻을 밝혀줄 따뜻한 가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우린 장마철에야 한번씩 밖으로 나와 울어젖힌다는 맹꽁이들의 삶과 죽음을, 그들의 울음을 통해 확인하기 위해 장마전선이 몰려올 올 7월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2017-07-11 | hrights | 조회: 410 | 추천: 0
어느 이라크 난민 가족의 이야기 - 요르단에서 함께 한 10개월의 기억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2005년 11월 중순. 요르단에서 아랍어를 배우고 있던 내가 살고 있던 집 아래층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너무도 눈이 예뻤던 여자아이 둘,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듯 한 개구쟁이 남자아이 하나, 그리고 쭈뼛쭈뼛 눈치를 보면서 나를 경계했던 3살짜리 남자 아이 하나, 그리고 외부의 노출이 거의 없는 큰딸과 어머니, 마지막으로 배가 산만하고 여타의 아랍인처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있던 아빠 아부 아핫메트. 그들이 이사 온 첫날 나는 그들이 이라크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반가워서(나도 이라크에서 2003년, 2004년에 약 1년 동안 있었기에) 저녁에 과자를 한 아름 사서 그들에게 전해주면서 환영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2005년 11월 말.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그 집 꼬마 녀석들이 자꾸 내 방문 앞에서 알짱거리면서 내게 놀아달라는 듯 눈치를 보냈다. 나도 그 곳에서 외로웠던지라 아이들을 내 방안으로 불러서 과자를 먹으면서 오직 몸짓 발짓으로 아이들과 놀았다. 아이들과 노는 데에 언어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2005년 12월. 그 집 아빠가 커다란 물통을 들고서 나에게 와서 아주 미안한 듯이 물을 좀 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부에서 오는 물은 일곱 식구가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혼자 살고 있던 내게는 조금 남아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하였다. 그리고 제대로 씻지 못해 온 몸에 피부병이 있었던 아이들도 내 집에서 목욕을 시켰다. 아이들 피부병이 조금 나아지는 듯 했다. 남자 꼬마아이가 후세인, 여자아이가 디아나, 처음에는 낯을 가렸다. 조금 지나니 말썽꾸러기 사진 출처 - 필자 일곱 식구가 쓰기에는 물조차 부족해 2006년 1월. 우연찮게 그 집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 집 아빠는 근처 음식점에서 점원으로 있으면서 약 120디나르(약 17만원)를 받고 있었고, 집값으로 매달 65디나르, 수도세 전기세, 가스비를 합치면 20디나르, 남는 돈은 35~40디나르(5~6만원)이다. 요르단 암만의 물가가 그리 싸지 않다. 그나마 월급이 제때에 나오지 못하면 수일동안 굶기도 했다. 그쯤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던 나는 매주 주말 음식을 준비해서 그들과 함께 먹었다. 2006년 3월. 새 학기가 시작이 되어도 그 집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한다. 이라크 난민이기 때문이다. 요르단 정부에서 이라크 난민 아이들의 취학을 막았다. 아이들은 거의 하루 종일 집안이나 집 근처 반경 20미터 내에서만 놀았다. 왜냐하면 근처의 아이들이 이라크 난민의 아이라고 멸시하고 경시해 밖으로 나가 노는 것을 부모들이 말렸다. 그래서 막내아이는 계속 밖으로 나가서 놀고 싶어 했고,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에게 혼났다. 2006년 5월. 더 더워지기 전에 아이들과 그 집 식구들이랑 남들처럼 공원이라는 곳에 가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택시 두 대를 나누어 타고 요르단 암만 내에 있는 큼지막한 공원에 놀러 갔다.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리저리 사방을 돌아다닌다. 그 집 아빠와 엄마와 나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그 곳에 나와 있는 요르단 가족들의 한가로운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모습이 살아가는 건데….’ 하며 한숨을 지었다. 누구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꼭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는다는 걸 느꼈다. 2006년 8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정식학교는 아니지만 NGO가 운영하는 크리스천 미션계열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받아주었다. 아이들은 요르단에 온 지 2년 만에 가는 학교인지라 방방 뛰어다녔고, 나도 덩달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집 부모들은 아이들이 학교 다니면서 필요한 학용품 구입 걱정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슬림답게 신이 도와줄 거라며 애써 웃음 지었다.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암만에서의 체류기간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가족들과 함께한 2005년 마지막 날 사진 출처 - 필자 2006년 9월.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끝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지막 주를 그들과 함께 보냈다. 그 집 아빠 엄마와 큰 딸은 다른 나라로 가기를 원했다. 유럽이나 일부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난민인정제도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그 제도가 수천, 수만 명 중 한 사람이 될까 말까하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 어떠한지를 묻곤 했다. 한국은 난민인정 자체가 힘들뿐만 아니라, 설사 인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지원이나 도움이 전무하기에 솔직히 “거지같은 나라”라고 했다. 마지막 날, 그들의 울음을 등지고 나는 그들을 떠나왔다. 마음 한 곳에 큰 돌덩이가 맺힌 듯 했다. 희망을 말하기엔 현실이 너무 버거운 이라크 난민 2007년 4월. 한국에 돌아온 지도 5개월이 넘었다. 새로운 일로 많이 바빴기에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가 이 글을 쓰기로 하면서 그들과 전화를 했다. 다행히 다들 건강하다고 했고, 아빠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늘어만 가고 있는 이라크 난민에 대한 정책이 바뀌어서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요르단에서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데….”라고 했다. 나는 한참을 가슴 답답해 하다가 힘없이 다시 전화를 하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현재 요르단에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라크인들이 70만 명을 넘었고, 시리아에는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시리아와 요르단을 넘어가고 있는 난민들은 수천 명이다. 그 중에 운이 좋은 사람은 넘어가고 다수는 다시 이라크로 되돌아온다. 운이 좋게 넘어간 사람도 짧은 체류기간이 넘으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다. 이 뿐만 아니라 이라크 내 난민도 150만 명이라고 한다. 이리저리 합치면 약 400만 명이 넘는다. 아부 아핫메트는 나에게 “…… 알라케림, 일랄리까, 인샬라.”(신은 관대하시다. 신이 허락하신다면 또 보자)라고 이야기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다시 팍팍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73 | 추천: 0
‘개미’보다 못한 ‘인간’ -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장윤미/ 국민대 학생 얼마 전, 자유권 중 집회시위의 자유 제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한 지라, 국가의 자의적인 법조문 해석과 공권력 남용에 대한 불만부터 시작해 집회시위의 자유가 정말 있느냐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졌다. 그렇게 집회시위의 자유의 취약점에 대해 사람들이 토론하는 사이, 무수하게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던 생각은 좀 더 원론적인 문제였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국가와 싸울 것이 아니라 민중들을 감응시키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하는 거였다. 공권력이 집회시위를 막는 방향으로 행사될 수 있는 것도 그들을 못마땅해 하는 서민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회나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교통이 통제돼서 짜증나고, 불쌍한 전·의경들 괴롭혀서 나쁘고, 때로는 할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 취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수자의 목소리에 감응하지 못하는 사회 한미 FTA 체결이 서민들의 삶에 초래할 위협을 선전하는 집회시위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주의 깊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서민들을 귀 기울이게 하는 시위가 되지 못하는 지도) 그런데 하물며 생존을 위해 메마른 거리로 나온 장애인들의 시위가, 한미 FTA를 반대하는 농민들이, 재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들릴까. 나는 가끔 주위 대학교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한미 FTA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른다.”가 대다수다. 이보다 더 중요한 대답은 “물론 농민들이나 몇몇 집단이 피해를 보겠지만 대세가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어쨌든 경제적으로 혜택을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들 말이 맞고 틀렸고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대체 왜 우리들은 소수자의 아픔에 감응하지 못할까 하는 거다. 이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누군가는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 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왜 단 한 명의 아픔에 같이 울어주지 못하는가. 그 한 명의 아픔을 위해 다 같이 한 걸음 늦춰 보조를 맞춰줄 수는 없는 걸까.   지난 4월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미FTA 무효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벌인 뒤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흥미 있는 구절이 있다. 한 개미가 두려움이나 즐거움이나 분노를 느끼게 되면, 호르몬이 몸 내부에서 순환할 뿐만 아니라 몸 바깥으로 나가 다른 개미들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 덕분에, 개미들은 한 마리가 소리치려 하거나 울려고 하면 수백만의 개미가 동시에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 개미도 이러할진대 인간들은 왜 이리 무정한가. 누군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 그렇다면 소수자를 배제한 다수를 위한 사회, 그 다수를 위한 사회 속에서 또 양산될 소수자, 그리고 다시 소수자를 배제한 다수를 위한 사회. 이러한 연산 과정의 사회 속에서 결국은 누가 남을 것이고 그건 무엇을 위한 사회일까. 집단적 고독으로 달려가는 ‘편도티켓’ 아닐지 누군가 ‘우리 모두는 소수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언제나 잠재적 소수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를 버스 속에서 그냥 얌전히 실려 간다. 그렇게 얼기설기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들은 결국 집단적으로 고독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첫걸음으로, 고통 받는 소수자들에게 감응할 수 있는 감수성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멀기만 하다. 어쩌면 난 그저 한때 타오를 뿐인 젊음의 열정으로 사회의 변화만을 꿈꾸는, 현실의 대세에 감응하지 못하는 젊은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85 | 추천: 0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인생에서 간혹 마주치는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는 마음에 드는 영화를 발견할 때이다. 가슴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머리 속을 명료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머리 속을 텅 비게 만들어 버리면서 심장 근처가 아프도록 물결치며 떨려오는 영화도 있다. 물론 영화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판타지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오거나 이슈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5공화국 시절 우민화 정책인 3S(Screen, Sports, Sex)의 하나이기도 했을 만큼 사람들에게 엄혹한 현실을 잊게 하는 자기 위안의 탈출구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과 삶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영화를 보거나 감독이 던져주는 여러 색깔의 갖가지 시선을 따라가며 공감하다 보면 때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삶의 향기가 순간적이나마 달라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화 ‘말아톤’을 보고 나면 막 세수를 마친 사랑스런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말갛게 갠 자신의 영혼과 마주치게 된다. 맞춤법에 어긋나는 영화의 제목은 얼룩말을 좋아하는 주인공 초원이 그림일기의 ‘내일의 할일’란에 마라톤을 말아톤이라고 쓴 것에서 따 온 것이다. 영화 말아톤은 스물 살 청년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감정표현이나 조절이 어려운 자폐아, 초원의 이야기이다. 이제까지의 영화나 다른 예술 작품은 신체적 또는 정서적 장애인을 다룰 때에 주인공이 지닌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이겨내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거나,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장애인의 이야기지만 시선은 철저히 ‘일반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영화 말아톤의 시점은 그 반대이다. 정윤철 감독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닫아버린 아이’인 자폐아에 비해 정상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숱한 기만과 허위를 만들어내고 그 관계 속에 기대어 살아가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사진 출처 - 영화 '말아톤' 홈페이지   경기장의 치어걸들을 보고 단상 위로 올라가 같이 춤을 추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실례가 될 말도 서슴없이 해버리는 초원이가 감정 표현에 장애가 있다는 말은 오히려 어폐가 있어 보인다. 정윤철 감독의 시선이 날카로우면서도 따스한 까닭은 초원이 이 세상 사람과 교감하는 방식이 소위 어른들로 불리는 일반인의 그것과 다만 ‘다른 것’ 뿐이라는 ‘차이’를 드러낸다는데 있다. 극 중 초원이가 낮게 읊조리는 대사처럼 “얼룩말은 다른 말들과 내구력에 차이가 있어 가축으로 길들이지 못한 것”이다. 영화 말아톤은 ‘그들에게는 우리와 다르지만 분명 자신만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소통하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소통’은 동일한 것이 아닌 다른 것 간에 이루어질 때 더욱 설레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원의 엄마인 경숙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비정상아로 손가락질 받던 아들이 달리기를 할 때만큼은 정상적으로, 아니 비장애아들보다 더욱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라톤 완주의 꿈을 키웠지만 그 꿈은 초원이 아닌 자신의 위안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소통은 세계선수권 대회를 제패하고도 마라톤을 포기한 코치 정욱이 마침내 초원을 이해하게 될 때에도 생겨난다. 정상적이지만 오히려 꿈을 잃고 방황하는 정욱의 손을 끌어 초원은 자신의 벅찬 심장 박동의 리듬을 들려준다. 감전되듯이 얼어붙은 정욱은 그 순간 그토록 사랑했던 달리기 그 자체와 꿈을 위해 달렸던 자신의 열정을 기억해낸다. 초원 또한 “비 오는 날이 뛰기에는 더 좋지!”라고 기분 좋게 소리치는 정욱에게 굳게 닫혔던 가슴의 문을 서서히 열어간다. 초원에게 정욱은 코치이자, 아버지이자, 같은 꿈을 가슴에 품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다분히 정윤철 감독의 바램처럼 보이는 이 소중한 소통의 순간들은 초원이 마라톤을 거의 완주하는 장면에도 들어있다. 이글거리던 트랙은 갑자기 초원이 늘 다니던 길과 마트와 전철 안으로 변하고, 오해 때문에 초원을 때렸던 청년들까지 한마음으로 초원을 응원한다.   초원은 정욱의 손을 끌어 자신의 벅찬 심장 박동의 리듬을 들려준다. 사진 출처 - 영화 '말아톤' 홈페이지   드넓은 평원 위에 한 마리의 얼룩말이 뛰놀고 그 뒤를 무한한 자유와 함께 뛰어가는 초원의 모습은 환상처럼 표현되고 초현실적이거나 마술주의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역설적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말아톤의 매력은 달리기를 닮은 리드미컬한 영상의 흐름과 음악, 정교한 카메라 워킹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나비’, ‘밀애’를 찍은 권혁준 촬영 감독은 초원의 머리카락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리듬과 바람과 나무의 숨결까지 잡아냈고, 김준성 음악 감독은 초원의 심장처럼 벅차오르는 감동을 따스하고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에 녹여낸다. 정욱과 초원의 교감을 표현한 ‘뛰는 가슴’, ‘대지를 적시는 비’를 비롯한 O.S.T는 대단히 아름답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 말아톤을 생동감 있게 뛰어오르게 한 원동력은 억척스러우면서도 자식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자연스럽게 연기한 김미숙과 그녀의 아들 역을 맡은 조승우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충무로에서 일찌감치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그는“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계산된 연기를 해나갔지만 나중에는 그냥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별로 변화가 없는 초원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수백 가지 인상과 감성을 창조해낸 배우, 조승우의 ‘타고난 감각과 신들린 몸의 연기’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795 | 추천: 0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간사 지난 보름 동안,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한미FTA라는 거대한 녀석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타고, 이부자리까지 하였다. 물론 여전히 이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분들도 있긴 했으나, 어느 언론사에서 제3의 개항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한국사회는 거대한 한미FTA 파도에 크게 휩쓸려 왔고, 앞으로는 더욱 더 크게 휩쓸려 갈 전망이다. 필자가 한미FTA 타결 이전에 타결 반대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배부하면서 현장에서 느낀 것이지만, 작년에 비해 많은 이들이 한미FTA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주요한 의제로서 자리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안타깝게도 노무현 정권은 국민, 국회의 의사 수렴 과정을 배제한 채 결국 졸속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지난 2일, 한미FTA가 극적(?)으로 타결됐다. 정말 극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계속해서 협상 기한이 연장되었고, 한 국가의 경제활동에 매우 큰 영향력을 펼치는 협상이 마치 시청률이 낮은 어느 한 드라마가 연속적 흐름도 없이 갑작스럽게 마감하듯이 졸속으로 처리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세계 최대 경제 강국과의 자유협정을 맺었다며 기뻐하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독소조항 등 우리에게 불리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망국적 결과라고도 외치고 있다. 현재 한미FTA 타결 이후 곳곳에서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고, 향후 비준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더불어 정치, 경제, 시민사회, 학계 등의 다양한 입장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가운데 필자는 미국이 개성공단 등 여러 북한지역 상품을 과연 한국산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가져보면서 글을 써내려 가보고자 한다. 지난 2일 오후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미FTA 협상 타결 발표 기자회견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카란 바티아 미무역대표부 부대표가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먼저, 이와 관련된 한미FTA 내용을 살펴보자.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에서 일정 기준 하에 역외가공지역(Outward Processing Zone : OPZ)을 지정하고, 개성공단 등 여타 북한지역의 제품을 한국산과 동일한 특혜관세를 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이 일정 기준이라 하면 한반도 비핵화 진전, 역외가공지역 지정이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 역외가공지역내 일반적인 환경 기준, 근로 기준·관행, 임금, 경영·관리 관행 등을 언급하고 있다.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를 살펴보면 한미 양국 공무원으로 구성, 협정 발효 후 1년 후 개최하고, OPZ 지리적 구역 지정, OPZ 지정기준의 충족여부의 판정, OPZ 생산품이 특혜관세를 받기 위한 요건 마련, OPZ 총 투입가치의 비율을 조정하는 기능을 할 예정이다. 하나 덧붙여 설명하자면 역외가공지역이라 하면 한 당사국에서 원자재(부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제3국으로 수출하여 추가공정을 거친 후, 가공물품들을 당사국으로 재수입하는 생산방식을 역외가공이라 하며, 이 역외가공을 인정받은 지역을 말한다. 그럼, 과연 북한지역 상품이 미국으로부터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하나씩 따져보자. 먼저, 역외가공지역 지정을 위한 일정한 기준 내용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비핵화 진전과 관련, 지난 2002년부터 부시 정권은 북한으로부터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 원칙을 고수해 왔다. 그러면서 인권, 마약, 위조지폐 등의 문제를 언급하며 더욱더 북한을 고립화 시켜왔던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인지 의문스럽다. 또한 근로에 관련된 환경, 임금, 관리 등의 기준 관련, ILO 기준 등을 의미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현실적인 북한체제가 이러한 것들을 미국의 요구대로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보지 않는바, 역외가공지역 지정을 위한 일정한 기준 내용은 매우 큰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둘째, 미국은 개성공단 원산지 인정을 정치적으로도 접근할 것이다. 즉 지금처럼 계속하여 경제봉쇄정책을 펼칠 것이며, 적성국 교역금지법을 적용할 것이다. 어느 한 방송토론회에서 한나라당 의원, 그리고 한 대학교 통상대학원장조차도 미국은 개성공단 등 북한의 외화량 증가를 안보 측면에서 경계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개성공단의 원산지 인정의 실현가능성은 불확실하다고 했다. 결국 이것은 한미FTA의 경제적 측면을 벗어난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질서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인 만큼 미국은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제네바 합의, 9.19 공동성명 이행을 깨뜨린 미국의 행동을 경험해 봤다. 셋째, 역외가공지역 상품의 한국산 인정의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작년부터 총 여덟 차례의 실무협상 및 한 차례의 통상장관회담을 통해 한미FTA 협상이 타결되었는데, 실제로 미국 측은 여덟 차례의 협상까지 개성공단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단지 최종 고위급협상에서 일정한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역외가공지역’이라는 개념을 영화의 까메오와 같이 깜짝 등장시켰을 뿐이다. 또한 현재 협정문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까지의 정부 발표를 살펴보면 협정 합의문에 ‘개성공단’이 정식으로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개성공단내 '좋은사람들' 공장에서 북측 여성 노동자들이 남녀 속옷을 만들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마지막으로, 현재 한국과 미국의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 입장이 너무 다르다. 미국 입장은 이번 협정은 개성에서 생산된 제품을 포함하지 않으며, 협정에서 개성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며, 한국 정부의 입장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통일부에서 4월 10일에 발표한 개성공단 관련 공식입장을 살펴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용을 그대로 옮겨 쓰자면 “미국 측 일부 인사들이 한미FTA 협정문상 개성공단제품에 대해 특례원산지를 인정한다는 명시적 문구가 없음을 이유로 소극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아래에 “미국 측도 역외가공지역이 개성공단을 전제로 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함.”이라고 안타깝게도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다. 이제 한미FTA 발효까지는 국회 비준까지의 중요한 일정을 남겨두고 있다. 벌써부터 많은 곳에서 사회적 갈등,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아픈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내용들이 제대로 밝혀지고, 그리고 그 내용들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입장이 올바르게 반영될 수 있는 사회적 조정시스템이 갖춰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는 하루 빨리 협정문을 공개하고, 그 협정문과 관련된 이면합의, 장외협상 등의 내용들을 샅샅이 밝혀야 할 것이다. 더불어 국회, 시민사회, 학계, 재계 등 다양한 진영에서도 한미FTA 발효로 가져오는 한국사회의 그늘을 제대로 직시하고, 비준을 저지시키기 위한 행동, 목소리를 내야만 할 것이다. 동상이몽(同床異夢), 아전인수(我田引水) 등 어렸을 때 배웠던 한자 숙어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나 혼자 만의 생각인가.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벌써 많은 곳에서 이번 한미FTA 협정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갖고 있고, 그 속에 숨어있는 독소조항 등의 이면합의를 우려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정부의 개성공단 원산지 인정 언급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정부의 꿈은 결국 ‘동상이몽’격으로 끝나지 않을까.
2017-07-11 | hrights | 조회: 381 | 추천: 0
농협운영 ‘대충 대충’ 안 된다 조합원들의 정당한 요구도 묵살하는 농협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농촌은 60~70대 노인들의 마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들어오면 이일 저일 맡게 되는데 올해 내게도 임무가 주어졌다. 동네사람으로 조금은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새마을 지도자(새마을 운동이 아직도 진행 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와 농협 대의원(우리 마을은 2명 배정)이 그것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으나 마을 회의에서 하라고 하니 ‘예’ 하고 맡을 수밖에 없었다. 2주전인가 흥겨운 노랫소리에 이어 이장님의 방송목소리가 온 마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늘 마을 진입로에 사과나무를 심으려고 합니다. 그러니만큼(우리 이장님 꼭 쓰시는 말씀) 아침밥을 일~찍 잡숫고 삽을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동네 부역이 잡힌 것이다. ‘갑자기 웬 사과나무?’라고 생각하면서 삽을 들고 나갔다. 사정을 들어보니 동네 아저씨들(대부분 60대 후반에서 70대) 몇 분이 마을회관에서 농담을 나누시다가 마을 진입로가 너무 썰렁하니 사과나무를 심으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그날로 충주로 가서 사과나무를 사 온 것이다. 어찌 보면 재미있고 어찌 보면 황당하기도 한 사건이다. 농촌에는 도시나 사회의 조직과는 다른 의사결정 구조가 있다. 쉽게 얘기하면 성문법 보다는 불문법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마을에도 공식적인 구조가 있긴 하다. 이장과 반장(3인), 새마을 지도자, 개발위원(2인) 등 긴급하거나 작은 일들은 이들이 모여 논의하고 마을의 큰일은 주민 전체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 그러나 사과나무 사건처럼 동네 유지(?)분들의 사랑방 의견은 절대적이다. 농담으로 심어진 사과나무 사과나무 몇 그루 심는데 동네 회의를 통하지 않아 문제가 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 정도는 시골에 살면서 재미있는 얘기꺼리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농협이라는 거대 금융조직에서 그런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농협에 문제가 많다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려왔지만 깊숙이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 농협 대의원이 되면서부터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농협 대의원이 된 것은 마을 전체 회의를 통해서였다. 2년 임기가 끝나는 우리 마을 대의원이셨던 어른 두 분이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게 좋겠다며 나와 먼저 귀농한 형님을 추천하셨고 동네 분들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어 대의원을 하게 된 것이다.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농협중앙회 건물 사진 출처 - 한국경제   그런데 그 마을회의가 있고 다음날부터 조합장, 전무, 지소장, 이사 등 무지 바쁘실 분들이 우리 이장님께 전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용인즉슨 “왜 젊은 사람들을 시켰냐?”, “젊은 사람들이 농협 발전에 저해가 되는데 지금이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냐”는 등의 내용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옆 동네에서는 자체 선관위원 입회하에 조합원 투표까지 했을 정도로 엄연히 ‘작은 선거’다. 그러니 조합장 등의 이런 행위는 명백한 선거 개입이다. 우리 조합원 손으로 뽑힌 조합장이 일개 마을 대의원 선출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옆 동네에서 2년간 대의원을 하셨던 형님은 대의원 총회에서 예산안 등 문제제기를 몇 번 하자 농협 측에서 사전작업(?)을 해 이번에 대의원에서 떨어지셨다고도 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머지않아 조합장 선거가 있다고 했다. 조합장 입장에서는 젊은 사람들은 자기편이 아니니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농협의 부실과 존폐위기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일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농협 운영도 사과나무 심듯이? 또 한 번은 조금 먼 옆 동네 형님이 전화를 하셔서 농협본소로 나오라기에 부랴부랴 달려갔다. 지난해 대의원 총회 때 예·결산이 공식적으로 통과되지 않고 일방적 날치기로 통과되었기에 농림부에 질의하였더니 관계 자료를 농협에 요구하여 보내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합 정관에 대의원 3%의 요구가 있을 때는 자료공개 요청을 ‘접수’할 수 있었기에 자료요청서에 동의하고 사인을 했다. 총무부에 접수를 하려고 들어갔더니 조합장은 접수를 받을 수 없다 한다. 이유는 없다. 무조건 안 된다고 한다. 자료를 주고 안주고는 다음 문제니 접수라도 받아 달라고 해도 안 된단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그 형님 얘기가 조합 정관을 보자고 해도 안 보여 준단다. 역시 이유는 없다. 조합원이, 대의원이 자기 조직의 정관도 볼 수 없다? 세상에 이런 조직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문제제기를 할 만한 우리가 대의원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조합장은 농협을 작은 마을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마을에서 사과나무 심듯이 조합을 운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농민들의 피와 땀의 대가가 농협 대출이자 갚고 조합장 등 몇 분의 1억에 가까운 월급을 채우는데 쓰이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땅을 일구고 땀의 가치를 느끼며 조금은 여유롭게 살고자 했던 귀농의 꿈이 조금씩 뒤로 미뤄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5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