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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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건 협상도 아니고 국민들을 위한 것도 아녀" - 개그콘서트의 <같기도>판 한미 FTA 김지연/ 방송 작가 지난해 2월, 정부가 느닷없이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나선지 어느덧 1년. 두 나라가 어영부영 몇 차례인가 만나더니 벌써 협상 막바지란다. 다음 주 서울에서의 끝장 협상을 마지막으로 끝내겠단다. 결국 미국 무역촉진권한 종료시점에 맞춰, 당초 미국이 원하던 대로 타결해주겠다는 뜻이다. 물론 뼈를 포함한 쇠고기 시장 전면개방 압력을 포함한 농업부터, 자동차, 섬유, 의약품, 무역구제까지, 쟁점 현안은 여전히 그대로고 우리가 얻은 것은 없다. 군자금 유용 의혹 등 북핵 현안에 밀려 개성공단 원산지 인정 문제는 단 한번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미국에 우리 입장을 전달했고, 계속 견지해가겠다는 협상단의 설명은 하나마나한 말이다. 이익이 되면 체결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체결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낮은 수준의 합의 언급도 애시 당초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다. 협상 자체가 경제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에서 출발됐음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메이플라워호텔에서 19일(현지시간)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고위급 협상에서 각국 대표가 무역구제 등 핵심쟁점 협상에 들어가기 전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런 와중에 방송시장 개방설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더니 CNN이 한국어 방송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리가 떠돈다. 아니 떠도는 것이 아니라 거의 기정사실화 돼가는 분위기다. 한미 FTA 반대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미국 거대 미디어그룹 타임워너사 파슨스 회장 입에서 나온 소리다. 정황상 노무현 대통령과 교감 없이 할 수 없는 소리고, 그렇다면 실무차원의 협상 단계도 이미 넘어 문제라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농업, 자동차, 섬유, 무엇하나 중요치 않은 것이 없지만, 방송은 또 다른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외국 뉴스를 한국어로 듣는다...일각에선 글로벌 시대에 이미 안방에 들어온 CNN뉴스를 사람들이 보다 쉽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는데 뭐가 문제냐 하겠지만, 막상 너무나 일상화돼있어서 눈치 채기 어려운 TV라는 매체의 여론형성력, 영향력, 활용가치까지 따져 본다면 그 파장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굳이 CNN이 <타임>, <포춘>, <라이프>, <피플> <워너브라더스>, <카툰 네트워크>, 등, 출판은 물론 영화, 인터넷, 케이블, 방송 분야에 총 60개 계열사를 둔 막강한 복합미디어 재벌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또 CNN의 정치적 입장과 성향 역시 모르는 척 덮어둔다 하더라도, CNN을 앞세운 미국이, 미국 자본을 기반으로 만든 미국 뉴스를, 한국 정부의 너무도 친절한 인도 속에 한국의 안방까지 가지고 들어와 노리는 것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전, 정책, 가치관 확산일 것이 분명하다. 이는 비단 우리가 그저 일상적인 TV보기 안에서 그 같은 미국의 가치를 별다른 여과 장치 없이 받아들이고 단순히 광고료만 낸다는 의미를 넘어 미국의 정치적 입장, 미국의 경제 정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질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더한 것이다. CNN의 한국어 방송은 미국의 정치적 입장, 미국의 경제 정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질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문득 푸줏간 앞의 개라는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푸줏간 주인에 대한 공포와 고기에 대한 욕망 때문에 전진할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는 개 한 마리. 그리고 니체의 이 말을 접하고 ‘욕망은 용기를 통해 자유를 얻고 용기는 욕망을 통해 풍요를 얻는다’라는 주석을 스스로 붙였다는 한국의 한 젊은 인문학자의 말도 떠오른다. 욕망을 접거나 용기를 내거나 할 수 없다면, FTA고 뭐고 지금이라도 모두 그만둬야할 일이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다시는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또렷한 이정표를 세워둬야 할 일이다. 한미 FTA,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협상도 아니고, 국민과 국익을 위한 것도 아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88 | 추천: 0
우와 기쁜 소식 -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 안국동 5거리 육교를 추억하며 안진걸/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팀장 국회가 아무 일도 안한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어쩔 수 없이라도(표를 의식해서라도) 좋은 일을 하나 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냉정한’ 평가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뜻으로 좋은 법을 만드는 데 앞장서는 국회의원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온 민주주의의 성과라고 ‘온정한’ 평가를 하는 게 맞겠지요. (좋은 법을 많이 만들어 사회통합을 제고하는 것이 ‘인간해방’이라는 이론도 있습니다.) 최근 들은 소식 중에 ‘북-미 대화의 훈풍’과 함께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드디어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것이죠. 많이 부족한 부분이 있겠지만, 시작이 반이겠죠. 참 많은 장애인들이, 장애관련 단체들이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된다 해도 장애인들에게는 여전히 많은 고통과 차별, 편견의 벽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법 시행과 함께 더 많은 분야에서, 더 세심하게 싸우고 개선해나가야 합니다. 최근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가 제기한 ‘시각장애인들의 지폐 식별에 있어서의 고통’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20여만 명의 시각장애인들은 생활의 기초가 되는 돈 문제로(지폐 식별이 잘 안 되서)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싸우고 개선해 나가야할 일들이 첩첩산중처럼 쌓여있는 것이 우리 장애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암튼, 장애인차별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장애를 이유로 한 고용, 교육, 재화와 용역의 제공 및 이용, 사법·행정절차, 서비스제공 및 참정권 행사, 가정·복지시설 및 건강권 등 여러 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직·간접 차별이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시정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3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됩니다. 또 국가인권위원회 내에 장애인차별시정소위원회를 두도록 하고 그 조직 및 업무, 권리구제 등은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준용토록 하였습니다. 이 기쁜 소식 와중에 그 예전, 안국동 5거리에 있었던 육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안국동 5거리(광화문-대학로-종각-풍문여고-인사동 방향)에는 육교가 있었거든요. 참여연대 건물이 있는 안국빌딩 앞길과 종로경찰서 앞길을 잇는 육교였지요.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앞에는 장애인들이 다닐 수 없는 육교가 있다? 안국동에서 인사동으로, 인사동에서 안국동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육교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이 육교가 아니면 안국역 지하도 외에는 건널 방법이 없기도 했고요. 육교에서 광화문 쪽으로는 횡단보도는커녕 육교도 없었던 ‘비인간적’인 시절이었지요. 이 문제는 인권 영화 <여섯 개의 시선>에도 잠깐 나오기도 합니다.(광화문 대로를 휠체어로 건너는 장애인 장면) 지금은 없어진 이 육교를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교 바로 앞의 안국빌딩 구관(舊館)에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애인과 관련한 중요한 사무를 처리하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이 있었음에도 장애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barrier)’인 육교가 10년도 더 넘게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당국은 육교를 없앨 고민은 못할망정 ‘예술’을 위한다는 이유로 육교에 호피 모양의 장식품을 두르는 데 큰돈을 쓰기도 했었죠.(‘호피 퍼포먼스’ 예술 그 자체는 참 좋았던 기억입니다.) 그때 육교 앞에서 차마 건너갈 엄두를 못 내고 돌아서야 했던 장애인들의 절망을 생각한다면 지금도 가슴이 저밉니다. 그 육교는 한 출판사의 청원이 제기된 것을 계기로 2001년께 철거됐습니다. 안국빌딩 구관에 입주해 있던 <열린지평>은 장애인 관련 서적을 출판하는 곳으로, ‘비장애인들의 보행권 차원에서도, 장애인들의 이동권 확보 차원에서도 육교가 없어져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했고, 결국 이를 행정당국이 받아들여 육교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너무 쉽고도 당연한 일을 왜 그동안 우리 사회는 해내지 못했을까... 그런 고민을 해봤습니다. 그것은 현실의 어떤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애정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앞에 장애인들은 다닐 수 없는 육교가 있다?’ 여기에 대한 정당하고도 자연스러운 의문을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또는 의문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회의 변화라는 것은 이처럼 구체적인 관심과 애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많은 이들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겠는가... 동시대인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애정,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회변화의 에너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과 애정이 사회의 개인적·집단적 희망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안국동 5거리 육교와 같은 ‘장벽’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희망을 만들어간다는 일은 어쩌면 이런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을 기뻐합니다. 앞으로 저도 장애인 형제·자매들과 함께 더 많이 싸우고, 개선해나갈 것을 다짐해봅니다. 육교를 없애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계간 <열린지평>2001년 겨울호 표지입니다. 육교가 없어진 곳에 설치된 횡단보도를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기쁘게 건너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진 출처 - 필자
2017-07-11 | hrights | 조회: 392 | 추천: 0
철창에 갇힌 교사들을 석방하라 - 공안기관의 시대착오적 탄압일 뿐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간사 지난 1월 25일, 난 겨울방학 교사 자율연수에 참여를 했다. 이 연수는 학교 교사들이 모여 통일교육 행사 실태 및 교육 개정안 내용을 분석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필자는 교사들과 인사도 나누고, 학교 통일교육과 관련한 여러 내용을 배울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일부 교사들이 강의실을 떠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을 띠었다. 그날 오후에 진행되는 구속교사 석방 촉구를 위한 결의대회에 참석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며칠 전까지 함께 학교 교육을 얘기하던 동료 교사가 구치소에서 구속수사를 받고 있으니 더욱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구속교사 석방 촉구? 8, 90년대에나 있을 법한 얘기가 다시 흘러나온다. 광장의 힘으로, 촛불의 승리로 평가받던 노무현 정권, 바로 이 참여정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정권 초기부터 이 참여정부에는 광장의 힘, 촛불의 승리의 거대한 파도를 감싸 안아줄 넓은 바다조차 없었을 수도 있겠다. 한 쪽에선 장관급 회담, 한 쪽에선 구속 수사 이 글을 읽는 지금 평양에서는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리고 있다. 지난 6자회담의 2․13 조치 이행, 미사일 문제 이후 경색된 남북 관계의 회복을 위해 담당 책임자들이 악수를 하고,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군포의 한 구치소에는 현직 교사 2명이 장관급 회담의 화사함과는 대조적으로 철창 안에서, 그리고 어둠 속에서 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1월 18일에 체포 연행된 이후, 보안분실을 거쳐 구치소 수감까지 벌써 42일이 지났다. 그럼 왜 이렇게 현직 교사들이 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것일까? 시간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동안 공안당국과 보수언론은 전교조를 이적 용공단체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 전교조 부산지부 통일학교 활동, 임실 지역 중학교 통일 등반행사 등에 용공의 잣대를 들이댔다. 그러나 트집 잡을 만한 것이 없다보니 결과적으로 지붕만 쳐다보는 꼴이 되었었다. 하지만 승냥이는 먹잇감(?)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그대로 물러설 그들이 아니었다. 지난 1월 12일, 서울지방검찰청과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는 두 현직 교사 가택에 들어가 압수수색의 이유를 제대로 드러내지도 않고, 컴퓨터는 물론, 개인 문서. CD 등을 모두 압수해 갔다. 그 두 교사는 2005년과 2006년 전교조 서울지부 통일위원장이었던 김 교사, 그리고 2004년 통일위원장이었던 최 교사였다. 더불어 같은 날 수사기관은 학생신상자료가 들어있는 학교 업무용 컴퓨터까지 빼앗아가 버렸다. 이후 두 교사들은 1월 22일에 출두하겠다는 의사를 경찰에 밝혔고, 경찰 측에서도 동의하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도 1월 18일 오전에 두 교사는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어 장안동 보안분실에 끌려갔고, 20일 구속 영장이 발부되어 현재 군포 지역의 구치소에서 계속하여 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공안당국의 발표 내용은 이렇다. 두 교사가 전교조 게시판에 선군정치 승리 포스터를 게재함으로써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했으며,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는 것이다. 또한 불온서적을 읽고 인터넷에 인용했기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외쳐댄다. 보수언론도 맞장구를 치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공안당국의 행위는 내용이나 과정에서 모두 부당하며, 전교조 길들이기를 위한 시대착오적인 탄압이라 밖에 할 수 없다. 왼쪽 - 조선일보(Nkchosun.com)와 시사조선에 실려있는 선군정치 사진 오른쪽 - 전교조 서울지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선군정치 관련 포스터. 왼쪽 - 교육부 평화학교(http://tongil.moe.go.kr)에 있는 북한 사진들 오른쪽 - 서울교육청 발행 통일교육 지도자료 '북한사회의 이해'에 실린 사진 일부. 국가보안법,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첫째, 범죄사실이 전혀 성립되지 못한다. 북한의 사회상과 주민들의 생활을 담은 사진 중 선군정치 관련 포스터 한 장이 국가 질서를 위태롭게 했다고 볼 수 없으며, 더불어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하는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약 이것이 위법 행위라면 이보다 더 많은 내용의 선군정치 사진을 게재한 통일부, 교육인적자원부, 보수언론 등의 담당자도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일 것이다. 둘째, 현직 교사들에 대한 구속수사 과정이 부당하다. 일정한 주거지가 있고, 이미 자료 등을 모두 압수당했으므로 증거를 인멸할 염려도 없고, 경찰에 협조를 했고, 자진출두 약속까지 하였으므로 도주 염려까지 없는 상황이므로 구속의 법적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엄청난 액수의 주가 조작을 한 기업인도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상황에서 현직 교사들은 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셋째, 수사기관이 구속 과정상 불법 행위들을 자행했다. 헌법과 형법에 엄연히 ‘피의사실 공표죄’라는 것이 존재함에도 수사과정에서 근거 없는 허위사실까지도 누설하였고, 피의자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명예 또한 훼손하였다. 더불어 개인동의나 영장 없이 개인 정보 검색, 도청 의혹 등 사생활 침해에 의한 기본권이 박탈당함으로써 헌법, 통신비밀보호법, 형사소송법 등을 위반하였다. 교사가 교육과 관련된 내용의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를 통해 보다 분석적인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교사의 몫이다. 그런데 이 땅의 공안당국과 보수언론들은 이러한 교사의 당연한 몫에 6․15 시대를 역행하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녹슨 칼을 아직도 마구 휘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건설해 놓은 ‘살기 좋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해치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수갑을, 그리고 펜끝을 매섭게 휘두르고 있다. 아니 겉으로는 애국자인척 대한민국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쓸지 몰라도, 사실은 오랫동안 축적해 놓은 그들의 밥그릇을 절대 놓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밥그릇이 깨질 위기일수록 그들은 국보법 위반자를 마구 만들어내 미치도록 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이제는 이들의 그 대단한 활약상(?)이 국보법 폐지와 함께 곧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를 기대해 본다. 폐탄광촌의 막장 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어두운 곳으로 말이다. 그리고 미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얘기하는데, 과거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의 후신인 국가보안법이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바래본다. 마지막으로, 찬바람이 불어오는 지금도 구치소 안에서 수사를 받고 있는 두 교사들이 하루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교단에 설 수 있길 바란다. 이상 소설 ‘태백산맥’을 읽은 국가보안법 위반자 수백만 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바람이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58 | 추천: 0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어느 일요일 아침 전화벨이 울린다. “여기 면사무소인데요.” 우리 딸내미 유치원 보육료 지원과 관련한 면사무소 공무원의 안내 전화였다. 일요일 날 어쩐 일이냐고 하니 “새로운 업무인데 머리가 나쁘니까 일요일이라도 나와야지요.” 한다. 흐뭇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시골로 내려오고 나서 시골사람들 빼고 가장 절친하게 만나는 사람들이 농협직원, 면사무소 공무원, 시 기술센타 공무원들이다. 내가 시골에 정착하고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데 공무원들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파트너였다. 모든 행정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은 공무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공무원 한사람이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일하느냐에 따라 시골사람들 희비가 엇갈린다. 그러나 공무원들과 일을 하다보면 좋은 소리 나올 수 없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어떤 분은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 기다리고 점심식사 끝나면 퇴근시간 기다리는 사람들이 공무원이야”라고 심하다 싶을 정도로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공무원은 농사꾼의 중요한 파트너 옆 동네 한 젊은 친구가 귀농을 하면서 1년 전 ‘창업농 후계자’라는 것을 신청했다. 젊은 농부 육성이라는 농림부의 주요 정책 중 하나이고 신청자도 많지 않기에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신청자 대부분이 선정된다. 그런데 얼마 전 선정 결과를 확인해보니 1년 전에 제출한 서류가 면에서 누락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면에서 시로, 시에서 농림부로 올라가 1년 동안의 서류심사를 거쳐 선정되는 이 후계자 서류가 면에서 썩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해보니 담당 공무원이 1년 동안 세 번 바뀌는 과정에서 업무 인수인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 답답한 건 따지고 싸우고 해서 공무원 한사람 징계 받게 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 이 동네에서는 공무원들에게 찍혀 생활하는데 많은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거다. 춘천의 환경농업을 하는 농가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상대하기조차 싫어하는 공무원이 한명 있다. 농민들이 모이면 이 사람 얘기가 단골로 등장한다. 춘천의 환경농업 일을 맡아 처리하는 직책이기에 환경농업을 하는 농민들은 누구나 1년에 몇 번 씩은 마주쳐야 하는 공무원이다. 그러나 ‘벽창호’라는 말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다. 자신감인지 줏대인지 잘 모르겠으나 그 고집으로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아무리 얘기하고 설득하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 싸우기도 해보고 좋게 얘기도 해 보지만 여전히 자기 멋대로다. 그 멋대로인 고집이 농민들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야 무슨 문제가 있을까마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내가 보기에는 농민과 농촌의 사정은 둘째고 행정의 편리함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밖에 보여 지지 않는다. 공무원 사회를 잘 모르지만 행정이나 정책이나 그 혜택을 받는 국민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실천되어야 마땅한 일이겠으나 과중한 업무 탓인지 기분 좋은 행정 서비스를 받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림 출처 - 부산일보   진정성을 가진 공무원을 기대한다 농촌의 농민들을 공무원이나 농협직원들은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공무원도 노조가 있고 농협 직원들도 노조가 있으니 ‘노동자 공무원, 사장 농부’는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사장들이 노동자의 펜 끝에 의해 좌지우지 되니 살기 좋은 세상인가? 어느 한 개인을 비난하자는 것도 노동조합을 비판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이 사회의 가장 아래쪽에서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공무원들이 그 자신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국민들의 편에 서서 이 사회를 든든히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램일뿐이다. 계속되는 경제난 속에서 공무원은 안전한 직업 1순위로 꼽힌다. 공무원을 보면 그 나라의 미래가 보인다고 했다. 단순히 시간만 때워도 짤리지 않는다는 철밥통 직업의식을 가진 공무원이 아니라 일요일 날 전화 한통 걸어주는 공무원, 시골의 이름도 없는 농부와도 진지하게 토론하는 농림부의 사무관이 더 많아지길 기대해 본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99 | 추천: 0
김지연/ 방송 작가 본격적인 대선정국이 시작되면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이 대목을 맞았다. 한나라당 대선예비후보들의 난타전부터 정계개편을 둘러싼 여권 내부의 파열음, 탈당행렬까지 특히 정치권이 연일 쏟아내는 새로운 소식들은 매일 매일 뭔가 특별하고 새로운 것으로 방송을 채워내야만 하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이 더 이상 아이템 기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게 해준다. 언론환경이 상대적으로 좋아진(?) 탓일까.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오면서 시사 전문채널도 생겼고,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굵직한 시사프로그램만도 10개가 넘게 각자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그래서 청취자들이 이런 환경을 반가워하고 있는지, 다양한 현안과 정보를 제공해줘서 청취자들의 각종 정치적 판단, 혹은 먹고 사는 문제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나로선 회의적이다. 택시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하다보면 왜 이렇게 하루 종일 골치 아픈 얘기만 해대냐고 불평 하는 분들을 접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되살아나는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존재감 아무튼 분명한 건 시사프로그램들이 많아지면서 제작하는 사람들의 여건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노동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질적 정신적 환경이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어떤 현안을 어떤 방식으로 분석하고 다룰 것인지, 사회적 아젠다 세팅을 위해 긴 호흡으로 준비해야할 것들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할 시간도 여력도 없다. 그렇게 여유부리다가는 여타 다른 방송들에게 베스트 인터뷰이를 빼앗기고, 뉴스 생산할 기회도 박탈당한다. 진지한 기획보다 재빠른 선점이 중요하고, 전화기 숫자버튼을 누가 더 빨리 눌러 원하는 인물에게서 인터뷰 약속을 받아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예컨대, 지금은 무소속인 열린우리당 염동연 의원이 여당 내에서 처음으로 탈당을 시사했다. 모든 프로그램들이 염동연 의원을 향해 레이더를 뻗친다. 첫 번째 인터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경쟁, 아니 전쟁인 셈이다. (사실, 청취자들에게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MBC‘손석희의 시선집중’, SBS‘김신명숙의 SBS 전망대’, KBS‘안녕하십니까 이몽룡입니다’, CBS‘뉴스레이더’(왼쪽부터) 사진 출처 - 뉴스메이커 요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의 관심은 단연 ‘뉴스 생산’이다. 대개 라디오 TV 할 것 없이 방송들은 신문 기사를 재가공해 생산해내는 2차 생산물들이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들엔 순수한 ‘뉴스 생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역전됐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이 신문 기사의 아주 중요한 소스가 된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방송이 시작되기 전, 그 새벽 이른 시각에도 대여섯 곳의 일간지와 인터넷 신문사들로부터 그날그날의 출연자를 묻는 전화들이 걸려온다. 그리고 구미에 맞는 인물이 출연해 뭔가 새로운 내용이라도 언급했다싶으면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사화돼, 당장 그날의 석간부터 다음날 조간신문들까지 모두 그 방송과 방송에서 언급된 새로운 얘기들로 지면을 장식한다. 좀 냉소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동안 TV며 인터넷 환경에서 소외받아왔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존재감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인터뷰를 요청하는 프로그램과 인터뷰를 해주는 사람 사이의 철저한 상부상조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여부를 떠나 라디오는 인터뷰이들에게도 기자들에 의해 분석, 혹은 일정정도 가공되는, 그래서 왜곡될 수도 있는 신문보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하여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뭔가 발언하고 싶거나, 홍보하고 싶은 것들이 있을 때 자신의 육성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어 라디오, 그리고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송사 채널, 시간대까지 고려해가며 기꺼이 활용한다. 이른바 라디오 정치시대가 존재할 수 있게 된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종종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자괴감을 안겨준다. 언제부터인지, 방송 가치의 초점이 온통, 사회적 화두와 문제의식을 담아내는 방송, 일반청취자들이 듣는 방송이 아닌, 어떤 인물과의 인터뷰가 보다 화제가 될 수 있을지, 그 인물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말을 이끌어 내야 기사가 될 수 있을 지에만 맞춰져 있는, 한마디로 그들만의 리그에 스스로 함몰돼 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사 우선주의에 매몰돼 있는 언론 얼마 전 청와대 국내 언론실에서 전화가 왔다. 방송사 시사프로그램 제작자들에게 청와대가 주재하는 정책설명회 겸 오찬을 계획하고 있으니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었다. 오늘 몇몇 PD가 그 모임엘 다녀와서 말들을 전한다. 오프 더 레코드라는 전제하에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이 열린우리당 탈당파 의원들과 여권과 야권의 향후 정계개편 향방에 대해 몇 가지 개인적인 언급들을 하더라고. 왠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동지의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 꽤 허심탄회한 얘기들이더라고. 그런데, 모 방송사의 한 PD가 그것을 열심히 받아 적고 있더라고. 얘기 뒤끝에 우리의 관심사는 당연히 그 PD가 오늘 오찬에서 들은 내용들을 과연 기사화 시킬 것인가 아닌가에 집중됐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얘기라면 언론사들의 관심을 자극할 것임이 분명했고, 오직 오프 더 레코드를 지킬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그 PD의 판단만 남아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후 5시가 조금 지나자 기사가 올라왔다. 이병완 “탈당 의원들은 한나라당 2중대란 얘기냐” 급했던 모양이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뉴스 유통구조는 대개 연합뉴스로부터 출발하는데, 조선일보에 첫 뉴스를 전할 기회를 준 것을 보면. 정치하는 사람들은 농담도 실수도 정치적인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언론에 몸담고 있는 이들의 속성을 모를 리 없는 대통령 비서실장이 알려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발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일면식도 없는 방송사 PD들과의 공식적인 오찬 자리에서 민감한 현안에 대한 얘길 하며 오프 더 레코드를 주문한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이미 갈 데까지 가 불편해진지 오래인 당청관계의 한 단면일 뿐인 탈당 의원들에 대한 언급을 굳이 기사화한 것이나. 씁쓸한 에피소드다. 가치판단이야 기사를 접한 독자와 청취자들 몫이겠지만, 기사 우선주의에 매몰돼 있는 언론이 과연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나부터 우선 반성해볼 일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620 | 추천: 1
“대통령(大統領)은 NO! 호민리(護民理) YES!” - 권위적인 ‘대통령’은 가고 ‘민중의 친구’만 남아라 안진걸/ 희망제작소 사회창안팀장 올해는 대통령을 뽑는 해입니다. 국민들은 어떤 대통령을 원하고 있을까요. 대다수 국민에게 존경받는 대통령은 언제쯤 가능할까요?(이미 존경하는 대통령이 있는 분들께는 죄송) 잊고 지내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전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영화 제목처럼 ‘아, 우리 국민에게도 참 좋은 대통령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문득 ‘대통령(大統領)’이라는 말은 △굉장히 권위적인 표현이고, △군사용어(갑신정변 당시 조선에 진주한 청나라 군대의 우두머리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직위가 바로 이 통령이었다)였다는 사실, △또 일제의 용어(일본에선 통령이라는 용어가 ‘무문(武門)의 통령’, ‘사무라이 무사단의 통령’ 등 ‘사무라이를 통솔하는 우두머리’라는 군사적 용어로 사용되었음)로써 외세에 강점(청나라와 일본)된 치욕의 역사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문제 제기 등이 상기되면서 이참에 용어도 확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용어부터 권위적인 ‘대통령’ 예전 사회주의권 국가에서는 지도자를 비서(秘書)나 서기(書記)로 불렀습니다. 그 호칭은 ‘인민의 심부름꾼’ ‘인민을 지키는 호민관’이라는 뜻의 ‘민중적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베트남 사회주의의 ‘호 아저씨(호지명)’는 그런 분에 가까웠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라는 호칭도, 옛날 로마시대 민중의 보호자였던 호민관처럼 ‘호민리(護民理)’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요? 권력을 민중의 것으로, 체제를 더 나은 민주주의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민중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상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군사독재정권 시절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여지없이 옥살이 감이었던 그 때에 비해 지금은 ‘대통령이 동네 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우리는 좋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국민이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고, ‘탈권위’를 내세운 현 대통령으로 인한 수혜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박정희가 그립다는 분들은, 1월 23일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을 떠올리면서 제발 ‘박정희가 제일 낫다’라는 말만은 말아주십시오.   호지명(호치민) 주석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로인해 억울하게 죽었습니까. 그에 비하면 여러 문제점에 대한 정당한 비판 외에도 그 수없이 많은 모욕과 비난까지의 자유를 허용하는 현 정부와 대통령은 칭찬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국민에겐 정말 좋은 대통령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분단체제 하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 60년이 넘는 분단으로 통일의 꿈마저도 가물가물하다는 우리 국민들, 희망을 이야기할 기력도 없고 살아가기도 벅차기만 하다는 우리 국민들에게 평화와 희망이, 인간다운 삶이 너무나 절실합니다. 우리 국민은 이 꿈을 실현시켜줄 그러한 대통령을 간절히 원합니다. ‘밥은 먹고 잠은 자고 살자!’ 이 얼마나 상식적이고 소박한 말입니까. 경제 대국이라고 하는 한국에서 여전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빈민·서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결식아동, 비정규노동자, 집 없는 서민, 과중 채무자, 신용 불량자, 노숙자들을 합치면 국민의 절반이 넘고, (절대)빈곤층이 천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우리네 서민들은 부자의 삶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제때에 제대로 밥을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주거비나 이사 걱정 없이 편하게 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삶의 질’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삶’이 더 중요합니다. 국민의 삶이 어떤 것보다 우선 바라건대, 우리나라 ‘호민리’께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삶에 대한 진한 애정을 가져 주십시오. 그 애정을 바탕으로 고단한 국민의 삶에 행복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현 정부 들어서 권력층의 부패가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지난 김대중 정부부터 복지를 위해 애쓰고는 있지만 복지국가는 여전히 멀게만 보입니다. 1940년대 이미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 천국을 선포했던 영국이나 서유럽은 복지가 너무 잘 돼 ‘복지병’에 걸렸다고 하는데, 제발 우리나라도 ‘복지병’에 한 번 걸려봤으면 좋겠습니다. 국민이 빈곤의 나락에서 벗어나 ‘제대로 먹고는 살고, 잘 자고는 살게 되면’ 생산이 늘고 소비가 늘어 국가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복지 천국으로 일컫는 스웨덴. 사진은 스웨덴 국회와 궁궐이 모여있는 구시가지.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밥 걱정, 집 걱정, 의료비 걱정, 교육비 걱정까지 우리네 서민들의 걱정은 끝이 없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제안한 ‘무상의료·무상교육’은 정녕 불가능한지 묻고 싶습니다. 서유럽 국가의 대학들은 아예 등록금이 없거나 아주 싸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유학생, 여행객들에게도 양질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된다는데, 복지국가를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우리나라의 무상의료·무상교육도 꿈만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행복과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 이를 위해 불철주야 함께 할 대통령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돈을 낸 만큼만 치료받는 것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는 사회’, 돈을 낸 만큼만 교육받는 것 아니라 ‘공부하고 싶은 만큼 공부하는 사회’가 언제쯤 올까요. 우리 국민에게 또 하나 근심거리가 있다면 한반도 분단입니다.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감상적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평화’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경제문제, 부동산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한반도 평화문제입니다. 전쟁이 나면 순식간에 수백만 명이 죽는다는 한반도. 2006년 북-미 대결구도로 촉발된 북핵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미국에서는 계속 선제 공격론이 흘러나오고(‘페리 프로세스’의 그 페리마저도 폭력론을 주창하다니!), 일본의 군국주의화 및 주변사태 개입 의지도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마저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오로지 믿을 것은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뿐입니다. 무력과 충돌은 절대적으로 반대해야 합니다. 미국에는 ‘WAR 게임’이고 군산복합체와 공화당의 이윤이 극에 달할지 몰라도, 한반도에는 수백만 명의 죽음이고 민족의 파멸입니다. 평화를 위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대통령, 긴장과 대결의 근본적인 원인인 분단 체제를 해소하고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에 묵직하게 앞장서는 대통령이 우리 국민에겐 필요합니다. 혹자는 문제 많은 북한이라고 욕할지라도, 꾸준히 북한과 대화하고 지원하고 협의해서 ‘평화’를 지켜야 합니다. ‘평화로운 한반도’에서, 우리 국민은 ‘잘 먹고 잘 자기’를 원합니다. 나아가 정의로운 사회를 바랍니다. 누구는 땀 흘려 일해도 여전히 가난하고 누구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부자가 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부자가 월급쟁이보다 세금을 덜 낼 수가 있을까요?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보다 특권이나 연줄이 있는 사람이 출세하게 된다면, 누가 성실하게 일하려 할까요? 노무현 대통령이 반칙과 특권을 물리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일까요. 여전히 그 많은 반칙, 탈세, 특권, 병역비리, 부동산 투기 등등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 요인을 없애고 국민이 신명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국민에겐 ‘민중의 친구’가 필요하다 정말이지 국민을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습니다. 또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 같은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에는 동참하지 않는 대통령,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미국에도 ‘아니오’라 말할 수 있는 대통령, 적어도 의식주와 교육․의료만큼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 줄 대통령, 시민사회와 진정으로 소통하는 귀를 가진 마음이 넓은 대통령, 국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겸손하고 성실한 대통령. 정말 그런 ‘호민리(護民理)’를 보고 싶습니다. 물론, 대통령의 몫만은 아닐 것입니다. 시민사회가, 성숙한 국민이 ‘좋은 나라,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데 대통령보다 더 앞장서야겠죠. 너무나 무모한 꿈인가요? 하지만 이 꿈은 온 국민이 함께 꾸는 꿈입니다. 언젠가 분명 현실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군사독재와 가난의 고통을 뚫고 이만큼의 민주주의를 이뤄낸 국민의 저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국민은 그 저력으로 호민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권위적인 지도자’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국민에겐 베트남의 ‘호 아저씨’같은 민중의 친구가 꼭 필요합니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58 | 추천: 0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간사 07년 대선 승리를 향해 2년여를 넘게 준비해 온 고건 전 총리가 갑작스럽게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방송사에서는 벌써부터 최대 수혜자, 수혜 정당 등을 분석하면서 고건 지지자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하긴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만큼, 정치권과 국민들의 관심도가 꽤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높은 관심도 속에서 소외받는 예비 유권자들이 존재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18세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가는 60여 만 명의 청소년, 바로 그들이다. 만족스러울 수는 없겠지만, 06년 지방선거에서는 국내에 오랫동안 거주해온 외국인 중 영주권을 취득한 후 3년이 경과된 그들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 유럽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드문 일이며, 아시아 최초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공이다.’라는 맹목적 구호를 외치면서도 현실적 공간에서는 그들을 주변인으로 묶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한국 사회에서 18세가 갖는 국가적 의무는 꽤 많다. 세금도 내야하고, 노동의 의무도 갖고 있다. 그리고 남자의 경우 20대 청춘 시절 730일을 군대에서 보내야만 한다. 더불어 공무원에 임용될 수도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는 법령 체계를 충족시키는 나이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법령 체계에 순응해 가는 18세 그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로는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가고 조작해가는 구조적이고 모순적인 폭력에 있다. 바로 18세 청소년은 정치적 선택에 따른 합리적 판단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아직 정치 판단력의 미숙아인 청소년들에게 국민, 주민 대표자들을 뽑을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에는 큰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모든 공공기관, 사회 여론에서 청소년을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쉴 새 없이 외쳐대고 있지만, 실제로는 미래라는 가상적 상황 속에 현실이라는 규율, 통제의 방식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은 미래의 주인공이니까 지금은 예쁘게, 착하게, 온실 속의 화초와 같게, 아무 비판의식 없이 잘(?) 자라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폭력인가. 진정으로 청소년들을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긴다면, 지금부터 그들이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기성세대들이 강조했듯이 만약 청소년들이 정치적 선택에 합리적 판단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들을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주요한 미래 구성원으로 판단한다면 수업 교과목, 재량 활동, 특별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정치적 선택과 관련된 시민 행동을 차근차근 배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미래 사회의 주인공 형성은 복권과 같이 저속한 대박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합리적 판단력 부족과 관련, 정치권 및 우리 사회는 2~30대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율도 낮은데 굳이 18세 청소년들까지 투표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그거 알고 있는가? 실제로 06년 5.31 지방선거 때 처음으로 투표권이 부여된 19세 청소년들의 투표율이 약 38%로 20대 전체, 30대 초반 유권자들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선거에 관심이 없어 투표율이 낮을 것 같으므로 18세는 못주겠다는 논리대로 한다면 20대 전체, 30대 초반 유권자들에게도 똑같이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선진국 대열에 끼고자 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여러 사회 현상을 OECD 국가들과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러한 대세에 따라가고자 맹목적으로 쫓아가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을 위한 복지 수준, 인권 신장에는 뒷전에 물러나 있다. 전 세계적으로 18세 청소년 투표권 현황을 살펴보더라도 약 140여 개의 국가에서 18세 이하 청소년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냥 뒷짐만 지고 있다. 05년도에 19세 투표권 하향 조정을 했지만 그것 또한 부족하다.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세계적 추세에 따라 가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결국 많은 것을 잃어가면서도 추진하는 무역 협상 등과 비교해보면 참 모순적이라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8세 청소년 투표권 부여는 바로 인권의 문제이다. 정치적 의사 표출이 자유스럽지 못하고, 마냥 정치 및 사회 판단력 미숙아로 낙인이 찍혀 청소년들은 사회적 행동에 여러 제약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UN의 아동 권리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당사국 아동의 결사의 자유, 평화적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얘기하고 있지만, 한국의 청소년들은 그들의 의견을 표출할 평화적 집회 개최 또한 교육부, 학교의 탄압과 감시를 받아야만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세 청소년 투표권 부여는 바로 청소년 인권 신장과 직결되는 문제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18세 청소년 투표권 현황을 살펴보더라도 약 140여 개의 국가에서 18세 이하 청소년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냥 뒷짐만 지고 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흥사단교육운동본부, 21세기청소년공동체희망, 한국YMCA전국연맹, 대한YWCA연합회 등 40개의 단체가 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531지방선거참여를위한청소년운동본부를 발족하여 활동했었다. 19세 청소년들이 처음 맞이하는 선거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장기적으로 18세 청소년까지 투표권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상임대표로는 17~19세 등의 각 단체의 청소년 회원들이었다. 이러한 참여와 성장의 활동 결과를 통해 청소년운동본부는 현재 청소년 인권, 자치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07년 대선, 08년 총선과 관련, 지속적으로 청소년 선거참여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청소년들의 정치, 사회참여 확대가 미래를 더 밝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소위 기성세대들이 얘기하듯 미래의 주인공들을 잘 길러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청소년들은 사회적 경험이 없으니까 그들이 정치적, 사회적 의견을 보유하지, 표출하지 않고 커주기 만을 바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미래에 독극물을 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청소년들을 미래뿐 만이 아닌, 오늘의 주인공으로도 바라보아야 할 때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40 | 추천: -1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부자인 사람하고 가난한 사람하고 결혼하면 세상에 가난한 사람은 없어질텐데...” 어렸을 때 보았던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인 어린이의 말입니다. 같은 반 친구의 학용품을 허락 없이(?) 빌려 쓰던 달동네의 가난한 초등학생이 선생님에게 내뱉던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저는 당시 21살이던 지금의 정다운님(이름 불러주는 것을 좋아해서 실명을 거론했습니다)을 만나 5년의 열애 끝에 결혼했습니다. 안정된 초등교사로 ‘사’자 들어가는 사위도 볼 수 있는 딸이 무슨 데모하는 단체에서 일하는 5살이나 많은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장인, 장모님께서는 유학이라도 가라며 반대를 하셨지요. 그런데 가끔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오고 해서 그나마 위로를 삼았었는데 이제는 다 망해간다는 농사를 지으니 말씀은 못하셔도 얼마나 답답하고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정다운님은 잘난 거 하나 없는 제가 최고랍니다. 제가 농사지으러 간다고 했을 때 두 말 않고 함께 했으며, 지금도 돈도 못 벌고 명예도 없고, 매일 땀 냄새 풍기며 노동일 하는 제가 최고랍니다. 결혼한 지 만5년 되었으니 한 10년 쯤 되면 그 콩깍지가 벗겨 질려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아내가 교사라고 말하면 의외라는 반응과 함께 ‘돈 걱정은 안 하겠네’하는 식의 표현을 합니다. 아내인 정다운님도 남편이 농부라 말하면 그 얼굴에서 놀람과 안쓰러운 표정을 읽는다고 합니다. 두 경우 다 경제적인 문제를 제일 먼저 떠 올리는 것 같습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굳이 변명을 찾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혹시 ‘벗’(백남룡.1988)이라는 북한 소설을 아십니까? 화려한 인민배우와 공장의 선반공인 두 부부가 신분과 생활의 차이로 인해 겪는 갈등과 사랑 얘기입니다. 요즘 여기 나오는 두 주인공이 우리부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농부인 필자의 차는 트럭... 승용차는 교사인 부인의 차입니다. 농촌으로 들어와 살면서 한해 두해가 갈수록 다툼이 늘어납니다. ‘동료, 친구다가는 대학원 가겠다’ ‘지금은 안 된다’고 다투고, ‘해외 연수라도 한 번 가고 싶다’ ‘안 된다’고 다투고, ‘새 옷 좀 사야겠다’ ‘다음에 사자’고 다투고... 남자와 여자는 생각이 다르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 다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저희 부부는 큰 다툼도 작은 다툼도 관통하는 하나의 맥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과 돈의 씀씀이에 관한 것이지요. 교사인 정다운님은 주위에 선생님들 밖에 없습니다. 친구도 선배도 후배도 거의 다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선생님들은 대학원을 거의 다 다니고 요즘은 외국도 많이들 다니시더군요. 또 부부교사가 많다고 하는데 말은 안 해도 정다운님도 많이 부러워하고 있을 겁니다. 반대로 저는 주위에 농사꾼 밖에 없습니다. 온통 관심은 어려워만 가는 농촌, 농사 얘기뿐입니다. 이런 상황이니 저녁 먹고 나누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어울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려야 되는 것인가요? 교사 부인과 농부 남편은 잘못된 조합인가요? 아닙니다. 지금은 아직 저희가 부족해서 일겁니다. 농부인 제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정다운님은 제게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내입니다. 못난 저를 최고라 생각하는 마음이 고맙고, 정말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가끔 정다운님은 ‘내 남편이 교사가 아니라서 너무 좋아’라고 말합니다. 땀 흘리며 땅을 일구고 생명을 가꾸는 농부인 남편이 믿음직스러워 보이나 봅니다. 교사라서 못 보는 세상을 남편 때문에 보고, 농부라서 못 보는 세상을 아내 때문에 보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모재벌의 가계도가 뉴스에 보도된 것을 보았습니다. 정재계가 다 한 식구인- 마치 누가 일부러 그렇게 정략결혼이라도 시키는 것처럼. 에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꿈꿔 봅니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나오듯 연변 처녀가 재벌가의 며느리가 되는 것이 별일이 아닌 세상을- 달동네의 소년 가장이 말하듯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는 세상을- 그러면 교사 부인과 농부 남편인 저희 부부를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도 없어지겠죠?
2017-07-11 | hrights | 조회: 623 | 추천: 0
김지연/ 방송 작가 그녀는 한때 음악 PD를 꿈꿨다고 했고, 사람들 관리하며 신명나게 놀아보고 싶어 실제 지상파 라디오 PD 지원도 했었지만 떨어지고 말았다고 했다. 가장 감수성 예민하던 십대시절엔 H.O.T에 미쳐 콘서트와 공개방송은 모조리 휩쓸고 다녔다고 했고, 그 시절 통신에 써 제겼던 팬픽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모으기도 했었다고 했다. 공부 말고 하고 싶은 것은 전부 배울 수 있게 해준 엄마 덕에 장구, 단소, 통기타, 컴퓨터, 수영, 피아노 안 놀아 본 것 없이 골고루 다 놀아봤다는 그녀. 그녀는 이제 세상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3년전쯤 한 대중문화평론가가 <젊은 세대 읽기, 새로운 삶의 코드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모 일간지에 기고했던 인터뷰 기사를 통해서만 알고 있던 그녀, 이효인을 처음 대면하게 된 건 석달쯤 전이었다. 제 1회 안티미스코리아 대회 참가를 계기로 힙합과 랩에 심취해 여성 힙합팀을 결성하고, 각종 여성주의 행사며 반전 집회 공연도 도맡아 하고 있었지만, 아직 삶을 관통할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 보였던, 그래서 방송국 PD 시험도 봤지만 떨어지고 난후 다시 또 무엇을 하면 좋을지 짐짓 고민스러워 보이기도 했던 예전 인터뷰 내용과는 달리, 그녀는 이제 무엇을 하며 살면 좋을지, 어떻게 하면 삶에 대한 문제의식들을 굳이 운동이라는 방식이 아니어도, 혹은 의식으로 통제하지 않더라도, 표나지 않게, 유쾌하게, 실천하며 살 수 있을지, 이미 터득한 모습이었다. 몇 번인가 자신의 음악을 교유할 팀을 만들고 해체하는 과정도 겪었고, 그 과정 속에서 홍대 앞 언더 밴드들과 섞여보려고도 했지만, 언더 그룹들만의 권력관계를 뚫고 들어가는 일조차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 인생의 일막을 접고, 드디어 동년배의 친구와 함께 ‘챕터투’라는 이름으로 보다 많은 대중을 향해 삶의 두 번째 막을 재개하고 나선 것이다. 키티 케이(본명 김미영·26)와 효인(본명 이효인·27). 여성 힙합듀오 ‘챕터투’의 멤버들. 사진 출처 - 한겨레 하여, 그녀들은 노래한다. 고시원 한 평에 몸을 구겨 넣어도 싸구려 술 한 잔과 이런 삶을 비웃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고. 그것이 완벽한 인생이라고. 그녀들은 또 노래한다. 계약직으로 착취당하며 인터넷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풀거나 일자리가 없어 술집으로 흘러들어가 빠져 나오고 싶어도 정작 갈 곳 없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인터넷에 흘러 다니는 온갖 루머들에 파묻히는 인생에 대한 반성을. 물론 그녀들 앞에 장애는 무수하기만 하다. 당장, 야심차게 제작한 앨범을 들고 찾아간 방송사들에서 그녀들, 보기 좋게 한방 먹었다. 공중파 방송사 사전심의 생리에 맞을 리 만무한, 독립 레이블판 그녀들의 노래들, 결국 KBS 단 2곡, MBC 3곡, CBS 4곡, SBS 5곡만 이 겨우 심의를 통과하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고 말았던 것이다. 몰랐던 바 아니지만, 앞으로 그녀들이 겪어내고 부대껴야할 대상이 얼마나 저열할지, 그과정이 얼마나 지난할지 보여주는 단적인 대목이다. 부조리 하고 불합리하고 불편한 진실들을 외면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가. 그나마 SBS가 절반에 가까운 5곡을 통과시켜주다니, 상업방송의 파격이 차라리 존경스러울 다름이다. 병주고 약주는 방송과 정부의 엇박자는 더욱 코미디다. 얼마전 그녀들에게 낭보가 날아들었단다. 우리의 문화관광부가 챕터투를 12월의 우수음반으로 선정했다는. (물론, 문광부의 선정이 이들의 대중적 활동을 담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12월 우수 신인 음반으로 선정된 ´챕터 투´ ⓒ 문화관광부   바라건대 부디, 대한민국의 수많은 이효인과 수많은 챕터투들이 이 같은 현실과 잣대에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H.O.T처럼 동방신기처럼 수많은 팬클럽을 거느리지 않더라도, 세상은 온통 핑크빛으로만 가득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에게 세상 이면의 불편한 진실을 전해줄 수 있는, 그리하여 그 불편한 진실을 개선하는데 결정적 순간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저변과 저력을 확대하는데 유의미할 수 있는, 도무지 대체가 불가능한, 그녀들만 할 수 있는 노래를 하는, 일류 마이너 가수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512 | 추천: 2
연규련/ CJB청주방송 노조 상근활동가 “결혼 하셨어요?” [목에 가시] 필진들이 다 같이 만나는 자리였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고, 알고 지내온 얼굴도 있고, 웹진에 올라오는 글을 보며 궁금했던 이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된다니 개인적으론 부끄러웠지만(난 소심한 사람이란 말입니다-_-) 한편으론 쿵짝쿵짝 방정맞을 정도로 가슴이 설레였다. 사무실과 가까운 식당에 둘러앉아 “제가 누구누굽니다” 소개를 하고 “아 그렇군요”, “이름이 그래서 여자분 인줄 알았어요”, “선생님이 일하시는 곳은 언제부터...”같은 말을 하며 안면을 익히던 중, 누군가 옆자리의 사람에게 물었다. “결혼 하셨어요?”, “여자친구 있으세요?” 질문을 받은 어떤 사람, 민주노동당의 무슨무슨 교육을 받았다던 그는 “그런 질문, 동성의 친구를 사귀는 사람들에겐 매우 곤란한 질문이라더군요” 라며 설명을 한다. 사귀는 사람의 성별을 질문하는 쪽에서 먼저 정하고 묻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러고도 그 이후에 몇 번 더, 똑같은 질문이 다른 사람을 통해 반복됐다. “결혼하셨어요?” “남자친구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의 화제를 찾기 위해 또는 순전히 궁금해서라도 이런 저런 개인적인 질문을 한다. 나이, 결혼, 애인, 직장, 하는 일, 사는 곳, 전공을 물어볼 때도 있고, 결혼을 했다면 아이는 몇 명인지 묻기도 한다. 비슷하거나 공통의 관심사를 찾았을 때 어색한 만남은 금새 활기를 찾는다. 각자의 결혼과 직장과 육아문제에 대해 이야길 하며 고민도 나누고 정보도 얻는다. 그러면서 친해진다. 그렇다. 그러기 위해 위와 같은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당연하다, 나도 그런 질문을 매일 하며 산다. 지난 12월 15일 '목에 가시' 필진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것 말곤 도대체 시작할 말이 없는 걸까? 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학번이...” 라거나 “결혼하셨어요?” 또는 “결혼 안하세요?” 라는 말 말고는 그 사람을 알만한 키워드가 정말 없는 걸까? 사람을 알아 가는데 나이와 학번과(나이랑 학번은 다른 경우가 많아서 이걸 설명할 땐 또 한나절 걸리기도 한다) 전공과 애인의 유무와 결혼은 언제 했고, 아이는 몇인지, 아이가 없다면 왜 없는지, 언제 낳을 계획인지...가 정말 중요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런 궁금증은 개인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시작된 것이기도 한데, 버릇이 없고, 예의범절을 모르며, 싸가지를 실종한지 오래된 “나”의 경우(이 얘긴 그런 질문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한 나에게 누군가 너는 그렇다며 해준 말이다) 결혼과 나이, 집안에 대한 모든 질문이 사생활의 영역이라 생각해 질문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결혼한 사람들에게 반대로 “선생님, 이혼은 언제 하실 건가요?” “아이는 왜 낳으셨죠?” “제 나이가 궁금하신 이유는 사적인 겁니까, 공적인 겁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들은 기분나빠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 질문이 위의 것들과 무엇이 다른데?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도 참 지긋지긋하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란 카피가 나오면 실컷 동감하며 흥분하고 떠들어 놓곤 광고가 끝나면 옆 사람에게 바로 눈을 돌려 자기한탄인지 푸념인지, 저주인지 모를 소리를 한다. “그런데 아무개 씨, 올해 몇이지?” 그들에겐 이십대만 청춘인걸까? 서른만 넘겼다하면 그가 누구이든 “벌써 그렇게 됐어? 아무개 씨도 이제 늙었구나” 라며 언제나 시든 꽃 취급을 한다. 호기심과 모험으로 좌충우돌했던 이십대를 지나 세상에 대한 적응력이 생기고, 일에 대한 자신감도 인간관계에 대한 나름의 깨달음도 생기는 삼십대 그리고 갈수록 몸도 마음도 넉넉해지는 사십대야말로 만개한 꽃 같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닐까, 그런데 그런 황금기의 시작을 두고 ‘꺾어진 칠십’ 이런 허튼 소리만 세뇌시키다니 참 우습다. 지난 주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쁘다며 저녁을 먹는 자리에 최근에 사귀었다는 동종업계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선배가 자리를 비운사이 동석한 그와 또 신상에 대한 지겨운 이야기들(-_-)을 나누다가 선배가 자기나이를 뻥 튀겨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혹시 내가 나이를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 자리가 파한 다음 조심스레 물어보니 “이쪽은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전문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이 많은 사람이라야 무시를 당하지 않고 대접을 받는다” 고 “그래서 다섯 살이나 올려붙였다” 는 대답을 들었다. 나이를 속일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떨까? 학교선생님인 친구 N은 학교운영에 대한 것이나, 학생복지와 관련된 예산에 대한 것들로 견해가 다른 선생님들과 부딪힐 때마다 “N선생이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 라거나 “N선생 아직 미혼이지? 결혼을 아직 안했으니 저러지”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 말은 뭘까, 나이도 어리고 결혼도 안했으니 너는 입을 닫고 ‘결혼한, 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길 들어라 라는 말일까? 언제는 너도 늙었구나 라더니 이제는 어리다며, 결혼을 하지 않았다며 차이를 두다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얘긴가? 그리고 학교운영이나 학생복지가 선생의 나이나 결혼과 무슨 상관이 있나? 나이 들어간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다는 것, 나를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이런 여러 경험들을 통해 풍부한 감성과 역량을 지닌 인간이 되는 일은 멋진 것이다. 정말 정말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왜 개인을 판단하는 기준의 첫 번째 항목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남을 비판할 때 쓰이는 무기로 둔갑해야 하는가? 아쉽다, 남들에겐 몰라도 내겐 아쉽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다. 첨언, 그래도 굳이 내게 나이와 결혼과 애인과 우리 부모님과 기타 등등에 대해 묻겠다면 좋다, 묻는 건 당신의 자유니까, 하지만 나는 답해주지 않겠으니 맞춰보시라, 당신의 오지랖으로
2017-07-11 | hrights | 조회: 46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