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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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승/ 건국대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 권력은 경제를 닮아 불안과 강박 상태에 놓여있다. 그런데 권력의 강박적 행태들을 연옥의 한 시절로 마냥 감수해야 할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다. 표현행위를 처벌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권수정이라는 망측한 틀로 우려스러운 역사관을 강요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금지와 강요 사이에 고통 받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처벌하는 틀은 참으로 가지가지다. 타인에 대한 모욕, 명예훼손, 심지어 사자명예훼손, 허위사실유포, 기밀누설, 반국가단체활동의 고무, 찬양, 동조 등이다. 이처럼 표현의 자유를 빈틈없이 틀어막는 법제를 가진 나라가 우리 말고 없을 것이다. 실제로 다른 나라에서도 표현행위와 관련하여 대종은 명예훼손 소송이다. 그러나 자유언론이 보장된 나라는 명예훼손을 둘러싼 소송이 빈발하는 나라를 촌스러운 나라로 취급한다. 특히 자유화이후에 서구사회는 동구권국가에 대하여 명예훼손을 둘러싼 소송에서 표현의 자유를 중시할 것을 여러 차례 촉구하였다. 아직도 표현의 자유, 자유언론을 위하여 사회가 지불해야 할 통행료를 치르지 않는다고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개인의 명예와 연관되지 않는 표현행위는 찾기 어렵다. 특히 웬만한 공공적 중요성을 갖고 있는 사안에서 개인이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와 명예훼손, 공익과 개인의 명예 사이에서는 뭔가 근본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고서는 자유언론은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명예훼손죄나 국가보안법은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고 침해하는 비근한 예들이다. 최근에 사이버공간상의 모욕적인 표현을 더욱 간편하게 제한할 수 있도록 개정하려는 시도, 미네르바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죄의 적용시도도 표현의 자유를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다. 권력이 특정한 성향의 표현행위를 겨냥하면 내용, 성질, 방식, 동기 등 갖가지 요소들에 있어서 약간이라도 유사한 수많은 표현행위들을 무더기로 침묵시키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결과에 이른다. 어느 경우에나 권력에 봉사할지 모른다. 사진 출처 - 뉴시스 표현의 자유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광범위하게 보장되는 미국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의회가 제정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이 헌법에 부합하는 데에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수정 제1조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선동규제법을 제정하여 반정부적인 표현을 제한하였다. 법원도 나쁜 결과를 야기할 경향이 있는 표현행위를 제한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수정헌법 제1조가 명실상부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일련의 반전론자와 사회주의자에 대한 판결에서 정립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의 이론이었다. 이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행위도 표현의 자유에 속하게 되었다. 정치적 사상이나 종교적 교의를 선구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리의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해왔다. 밀튼이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에서 진리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여전히 진리에게만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도 표현의 자유가 진리발견에 봉사한다거나 오류도 진리를 생생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직도 표현의 자유는 진리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진리란 무엇인가? 법정에서 국가가 진리를 규정할 수밖에 없다. 진실을 다투는 재판은 종교재판과 다를 바가 없다. 억압하는 권력도 진리의 이름으로 불편한 진실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의 역사에서 한 차원의 비약이 이루어진다. 진리와 표현의 자유가 충돌할 때 단호하게 표현의 자유를 택해야한다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표현의 자유는 모든 지적 활동의 근원이고, 민주주의의 초석이기 때문에 다른 강제수단을 통해서 억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의견은 자유로운 교환을 통해서, 사상은 사상의 자유 시장을 통해서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홈즈(Holmes)와 브랜다이스(Brandeis) 판사가 이를 정식화하였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의 가장 큰 적은 흐리멍덩한 대중과 거칠 것 없이 설치는 국가권력이다. 지난 1년간 사람들은 미네르바에게 이미 신뢰를 보내고 있는데, 그 신뢰도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사상의 자유 시장을 통해 정화되어야 하는 것은 미네르바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독점욕이다. 미네르바의 혀를 뽑아 국가정책에 대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을까? 표현의 자유의 제물이 되기 위해 국가가 미네르바에게 낚인 것이 아닐까?
2017-07-20 | hrights | 조회: 20 | 추천: 0
이광조/ CBS PD 어제, 그러니까 2009년 1월 20일 화요일 아침, 출근길 자유로를 달리던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를 듣고 하마터면 교통사고를 낼 뻔했다. 용산 재개발지역에서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던 철거민들이 경찰특공대의 진압에 맞서다 건물에 불이 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잠깐 혼돈을 느끼던 나는 이내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좌절과 무기력함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이틀 동안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그리고 사건을 둘러싸고 무수한 말들이 쏟아졌다. 가난한 이웃들의 안타까운 비극을 슬퍼하고 마치 전쟁을 벌이듯 강경한 진압작전을 편 경찰을 탓하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철거민들의 농성이 ‘도심 테러’라는 비난도 들린다. “도심테러적인 성격이 있었다”(한나라당 장윤석 의원), “이 불법 농성을 생존권 투쟁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고의적 방화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화염병 투척자가 죽었는지 살아났는지도 핵심적으로 확인해야 할 사안”(한나라당 신지호 의원), “떼만 쓰면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심리가 깔려있다... 어떻게 이렇게 폭력시위를 할 수 있는지, 국민으로서 반성을 해야 한다... 불법 과격 시위문화가 이번 사건의 원흉”(한나라당 이은재 의원). 국회의원이라는 분들이 쏟아낸 이런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이틀 전 출근길에서 2009년 1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이 참사를 내가 왜 그렇게 짧은 시간에 현실로 받아들였는지 그 이유를 새삼 확인하게 됐다. ‘그렇지, 내가 이런 나라에 살고 있지.’ 그들이 뱉어낸 말에는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그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도 엿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도심테러’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의원은 한나라당 ‘용산 철거 참사 진상조사단’ 단장이며, 유족들의 오열이 잦아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의적 방화’ 운운한 의원은 야당의원이 자신을 부를 때 이름만 불렀다고 시비를 벌였다고 한다. 거 참,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판이다. 그나마 서울시에서는 조합 중심의 현행 재개발 사업의 폐해를 인정하고 철거민 생활안정과 법질서 유지를 모두 고려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지극히 밋밋하고 사무적인 입장표명이지만 맞는 말이다. 분명 서울시는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재개발사업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보다 나은 주거환경을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재개발사업이 얼마나 많은 서민들을 보금자리에서 내쫒고 있는지, 원주민 정착율이 얼마나 낮은지, 재개발사업을 통해 투기세력과 건설사들이 어떻게 배를 불렸는지, 공권력이 철거민들에게는 엄격하고 용역깡패들에게는 얼마나 관대했는지... 그렇다면 서울시가 알고 서울시민이 알고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이런 상식을 한나라당 의원 나리들만 모른다는 말인가. 빈민운동의 대모를 비례대표 1번으로 영입한 정당이 설마 이런 상식적인 일을 모를까. 현실의 허점은 많지만 허점은 점진적으로 보완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도 법은 지켜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70년대부터 근 40년 동안 변하지 않는 도시재개발 현장의 이런 문제를 바로잡지 않은 건 누구의 책임인가. 서민들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 거듭된 배신과 좌절에 누구를 믿고 어떻게 내일을 기다리란 말인가. 겨울에는 철거를 하지 않는다는 오랜 관행도 결국은 이런 현실에서 나온 타협책이었을 것이다. 뿐인가. 철거현장에서 폭력을 휘두른 업체가 제대로 처벌된 게 몇 건이나 있나. 뉴타운 계획도 없는데 선거 승리를 위해 거짓말을 한 정치인들이 처벌되는 거 봤나. 서울시 산하 SH공사가 일용직 노동자들의 노동일수를 올려주지 않아 일용직 노동자들이 고용보험 실업급여를 타지 못한 일은 또 한 두 건인가. 의원나리들이 그렇게 들먹이는 법에는 이렇게 허점이 많다. 뿐인가 서민들을 위해 꼭 필요한 법을 아예 만들지도 않은 책임 방기는 어디서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한단 말인가. 소통이 단절되고 권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사회적 약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집단행동에 의지한다. 경험이 보여주듯 대개의 경우 이런 집단행동은 작은 폭력에 그친다. 하지만 소통을 내팽개친 권력은 거대한 폭력으로 작은 폭력을 집어삼켜 더 큰 폭력을 불러온다. 무식이든 무관심이든 의도적 무시든 국민 대다수가 아는 현실을 무시하고 약자들에게만 엄격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 폭력은 바로 그들의 근엄한 입에서 시작된다. 처참했던 용산 참사 현장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며 지난 해 6월이 떠오르는 건 비약일까. 지난 해 6월 몇 달에 걸친 국민들의 끈질긴 저항 끝에 이명박 대통령은 결국 졸속적으로 추진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 협상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청와대 뒷산에서 시위대의 촛불을 보고 시위대가 부르는 아침이슬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을 회복하지 못했다. 아니 노력하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자녀의 건강을 걱정해 촛불시위에 참가했던 어머니에게 국회의원이 훈계조로 호통을 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연출됐고 대통령의 ‘뼈저린 반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광화문 사거리에 흉물스럽게 놓였던 컨테이너 박스는 치워졌지만 청와대와 국민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장벽이 들어섰을 뿐이다.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 정비’로 이름을 바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을 밀어붙이고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교사들을 학교에서 쫒아내고 ‘입법전쟁’, ‘속도전’ 같은 무시무시한 구호를 앞세워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신과 상처를 심으려는가. 국민과의 소통을 포기한 채 자신의 뜻과 이익만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는 권력 밑에서 충성경쟁이 벌어지고 그 충성경쟁의 와중에 숱한 폭력이 춤을 추고 있다. 먼 훗날 지금이 폭력의 시대, 야만의 시대로 기록되지 않을지 두렵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9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지구촌’이나 ‘세계화’ 같은 상투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외국인과의 만남 혹은 부딪침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도 강의실과 학교식당 등지에서 동아시아에서 온 어학연수자와 한국학을 배우러온 서양학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농촌에 시집온 동아시아 여성들과 중소기업에서 기술 연수차 일하는 외국노동자들을 포함하면 ‘지난 5천년동안 지켜온 단일(배달)민족’의 긍지와 배타성은 그야말로 낡고도 옹졸한 신화가 된 것이다. 이처럼 직장과 강의실, 지하철과 친척모임 등지에서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면, 내가 배워야 할 바람직한 ‘타자관계’는 무엇일까? 내가 최근에 경험했던 두 개의 에피소드를 함께 곱씹어보면서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에피소드는 작년 11월말 베트남에서 개최되었던 국제학술대회에서의 베트남 여성학자(N)와의 충돌(?)이다. N과 함께 동일분과의 공동사회를 맡았던 필자는 앞 섹션이 예정보다 길어져 급한 마음에 N을 소개도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 순서를 진행했다. 그러자 N은 벌떡 일어나 자기를 무시하는데 대해 항의했고, 실수를 깨달았던 나는 그녀에게 사과하고 발표장의 다른 참석자들에게도 진행수정을 공지해야만 했다. 한국정부기관이 이 국제학술대회를 주관하고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잘난 체하며 주인행세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이로 따져도 나보다 젊었던 N이 정색을 하고 따지는 장면에서 나는 그 전날 호지명기념 박물관에서 보았던 내란시절 호지명의 연설에 환호하던 자립적이며 자존심 강한 베트남 여성들의 얼굴을 발견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나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소위 ‘계약직 외국인 교수(M)’와의 오해(?)사건이다. 평소 교내에서 만나면 인사를 주고받고 간혹 ‘원어민’의 도움이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문의하는 그런 관계였다. 그의 영어교정에 대한 답례로 나는 대개 점심대접을 해 주곤 했는데, 얼마 전에도 급한 영문서류가 있어 그에게 언제까지 교정해주면 고맙겠다는 요지의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M은 ‘사전 양해도 없이 일방적으로 부탁하는데 짜증이 난다.’는 요지의 답변을 보내왔다. ‘나는 너와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너는 용건이 있을 때만 연락을 하는 게 섭섭하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가 학교식당에서 혼자 점심/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에 (지나가는 한국식 인사말로) ‘언제 식사나 한 번 하자’고 말하곤 했는데, 그 약속을 한 번도 실행한 적이 없었다는 매서운 지적이었다. 당황한 나는 “영어교정과 식사대접을 교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미안하다.”라는 답변을 보내고 바쁜 연말에 만사를 제치고 그와의 식사(대화)자리를 마련했다.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개인적 일화를 밝히는 까닭은 아마도 누구나 외국인과 관련해서 나와 유사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혹은 근거 없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 외국인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 일하는 조선족 여성들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하다고 우리는 불평하지 않았던가. 동남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한국인처럼 ‘빠릿빠릿하고 근면하지 않다’고 폭언한 적은 없었는가. 또한, ‘우리보다 못사는’―사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도 곰곰이 다시 따져 보아야 한다―동아시아 국가에서 유학 온 대학생들을 예비불법체류노동자로 의심하지는 않았던가. 한국으로 시집 온 외국인 며느리들을 대상으로 ‘김치 잘 만들기 대회’를 열어서 격려하는 것도 좋지만,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그녀 고향마을의 토속음식을 배워서 아내, 며느리의 향수를 달래주는 것은 어떨까. 낯선 외국인·외국문화를 익숙한 우리 기준에 억지로 맞춰 ‘동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들의 문화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배우고 맛보려는 관용과 호기심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의 첫 걸음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사진 출처 - 뉴시스 필자가 주장하려는 요점은 ‘국제협력이나 국가 간 인력교류와 같은 거창한 차원보다는 일상생활 영역에서의 외국인과의 이해와 소통이 더 긴요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대학생들을 인턴, 유학생, 교환학생이란 이름으로 외국유학을 보내더라도 그들이 민족주의적 의무와 자긍심으로 가득 차서 귀국한다면 인류애와 세계평화 향상에 무슨 변화가 있을까? 다문화(가족)간의 소통에 대한 연구프로젝트가 아무리 학문적으로 중요하다 하더라도 직장동료로 와있는 외국인의 소외와 고민을 경청할 배려가 없다면 그 빛나는 연구결과는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외국도시나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어 시장이나 동장이 자매마을을 시찰(관광?)하고 돌아오더라도 그곳에 시집 온 어느 외국인 며느리가 자살하거나 도망간다면 문서상의 혹은 ‘위로부터의’ 국제교류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자만, 21세기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국제교류와 의사소통은 바다를 건너고 비행기를 타고 요란하게 왕래해야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지금 여기’ 내 곁에서 살고 있는 ‘타인’(그가 반드시 외국인이 아닐 수도 있다)과의 새로운 만남과 관계 맺기로 결실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0 | 추천: 0
반복되는 민간인 대량 학살 홍미정/ 건국대 중동 연구소 연구원 필자는 신이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팔레스타인 땅에 평화가 오기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진심으로 기도한다.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야만적인 학살 행위가 계속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10여일이 넘게 가자 지구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고도 테러리스트 하마스를 척결하는 작전이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이스라엘 정치인들, 시몬 페레즈, 에후드 올메르트, 에후드 바라크, 치피 리브니. 동족이 저렇게 학살당하고 있는데도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는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 이스라엘에게 자위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미국 대통령 부시를 비롯한 서구 정치인들. 특히 휴전 중재를 하는 것처럼 쇼를 하고 있는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스 사르코지 등은 극도로 혐오스러운 정치인들이다. 팔레스타인 의료진들에 따르면, 12월 27일부터 1월 6일까지 10일 동안 이번 전쟁으로 살해된 660명의 팔레스타인인들 중에는 어린이 215명과 98명의 여성들이 포함된다.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가 어린이와 여성인 셈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며, 하마스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선전한다. 인구가 밀집된 가자 지구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스라엘의 거짓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워싱턴의 MEPC(Middle East Policy Council, 중동정책협의회)에 따르면, 지난 2008년 1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11개월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432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29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하였다. 지난해 6월 중반부터 6개월 휴전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37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하였고, 팔레스타인 노동자가 예루살렘에서 불도저 공격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인 3명을 살해하였다. 이 휴전 기간 동안에 하마스는 이스라엘인들을 선제공격하지 않았고, 11월 4일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선제공격함으로써 하마스 대원 6명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 직후 이스라엘 군부는 “휴전을 중단시킬 의도는 없다. 이 작전의 목적은 하마스 테러 조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고,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엄청난 휴전 위반에 로켓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이 때 이스라엘 군부는 “하마스가 휴전 유지를 원하는 것 같다”고 주장하면서, 양 측은 휴전 상태로 복귀하였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가자를 완전히 봉쇄함으로써 모든 물품의 반입을 철저하게 통제하여 팔레스타인인들은 극심한 식량난, 의약품과 생활필수품 부족에 시달렸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6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휴전을 위반해 온 셈이다. 이렇게 보면, 공식적인 휴전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가자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생계와 관련된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화력을 동원한 대규모의 공세로 돌입할 것이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몫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한 남성이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부상을 당한 팔레스타인 소년을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사진 출처 - 로이터 사실 필자는 지난 주 초까지도 이스라엘 육군이 가자 지구로 들어가서 내부를 초토화시키며, 시가전을 수행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스라엘인들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자의 잘못된 판단은 이스라엘 건국 과정이 주는 교훈을 망각한 결과였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에 따르면, 이스라엘 대통령 시몬 페레스는 “이번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은 하마스 기반시설 제거 목적을 넘어서서 이스라엘 건국이후 진행된 전쟁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밝혔다. 지난번 전쟁들, 특히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발발한 전쟁들과 이번 전쟁은 일방적인 대량 학살, 파괴, 난민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너무나 닮아 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하가나(Hagna), 이르군(Irgun), 스턴(Stern) 갱단 등 일련의 유대 테러 단체들의 공격과 1948년-1949년 전쟁은 팔레스타인 전체 마을의 50퍼센트가 넘는 531개의 마을을 파괴하였다. 이 때 파괴되거나 몰수된 팔레스타인 재산은 2천9십억 달러로 추산된다. 동시에 팔레스타인 대량 난민이 발생하면서, 1950년에 UNRWA(the 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 for Palestine Refugees in the Near East,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제 사업국)에 등록된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총 91만 4천명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건국과 1948년 전쟁 과정에서 축출된 팔레스타인인들은 전체 토착주민 100만 명 중 90퍼센트에 이른다. 1990년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의 주역이며 총리였고, 199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츠하크 라빈을 비롯해 아리엘 샤론, 레하밤 지비, 도브 호즈, 모세 다얀, 이갈 알론 등의 이스라엘 역대 총리들은 한결같이 하가나 대원들이었다. 하가나, 이르군, 스턴 갱 등은 1948년 4월 9일 데이르 야신(Deir Yassin) 마을을 공격하여 한번에 245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하였고,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마을들을 공격하여 점령해 나갔다. 이스라엘 국가 수립 이전에 메나헴 베긴(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당시 이스라엘 총리)과 이츠하크 샤미르(1991년 마드리드회의 당시 총리)도 이 테러 단체들을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현 대통령 시몬 페레스는 1994년 팔레스타인인들과 오슬로 협정을 체결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전쟁을 주도하는 에후드 바라크 국방장관을 비롯한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비둘기파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팔레스타인인들과 협상을 주도해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정치인들은 가자 지구의 민간인 대량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전쟁광처럼 보인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 분쟁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신에게 기도한다. 반복되는 학살을 멈춰달라고.
2017-07-20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 ‘각론’으로 맞서고, ‘지역’에서 시작하자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혹시, ‘폭동’을 바라고 있나? 이 질문은 이명박 정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고 이에 맞서려는 시민사회운동을 포함한 이른바 ‘진보진영’에게 던지는 것이다. ‘폭동’에 대한 언급은 경제학자 우석훈 씨가 최근 꺼내든 것이다. 이른바 ‘빈곤형 경제빅뱅’을 예견하면서 내놓은 위기감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가 쓴 글은 단지 위기감을 부풀려 표현한 ‘선동’이 아니었다. 그의 진단은 결론적으로 한국경제가 “좋든 싫든 중남미형 경제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 중남미에서 언제 폭동이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됐는지, 내년 연초 경제팀은 그것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처방도 잊지 않고 내놓고 있지만, 한국의 경제빅뱅이 “여의도 증권가와 관청 사무직들의 서류위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버리라는 경고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 지난 15일, 경향신문이 연말을 맞이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보도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응답이 60%를 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는 한 경제학자의 폭동 예견론과 한 언론사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어떤 것부터 생각하게 될까? 당연한 결과? 그러면 그렇지? 대선 이전부터 회자되던 자조적 이야기들, 즉 한나라당 집권 하에서 한 번 제대로 당해봐야 신자유주의의 실체를 알게 될 거라는 식의... 그래서 이것이 암울한 경제상황과 맞물려 ‘폭동’으로 나가길 바래야 하나? ‘폭동’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난 ‘촛불’에서 광범위한 사람들의 운집과 저항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를 두고 학자들 대부분은 ‘주권혁명’, ‘직접민주주의의 시작’과 같은 거대담론 시각에서 다루었다. 물론,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촛불이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공포 같은 구체적인 먹거리의 문제에서 터져 나왔다는 걸 상기하면, 그 거대담론의 와중에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야기한 수입정책 하나도 결국 해결하지 못한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몇 개월 전 만난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촛불은 환상이다. 팩트는 사람들이 분노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즉, 이명박 사람들은 그 ‘팩트’만을 대처하고자 했던 것이다. 분노를 달래거나 혹은 억누르거나. 그리고 우리가 촛불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사이, 광우병 쇠고기 수입은 외양만을 고친 채 이뤄졌고, 미국산 쇠고기는 몇 개월도 안 돼 대형마트 진열대에 올랐다. 만의 하나, 못살겠다고 정말로 ‘폭동’이 일어나도 달라지지 않을 듯하다. 나는 지난 촛불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시민사회운동이 스스로 무기력해진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우리나라 시민사회-진보운동을 대표하는 서울의 단체 활동가들을 마주하거나, 토론회장에 나가보면, 촛불의 의미를 끄집어내기에 바빴고, 그 결과의 하나인지 모르지만 촛불의 위력을 가능케 한 인터넷 등 미디어 배우기에 골몰한 모습에서 아연했었다. 운동의 자리를 대중이 대체하는 시대상황을 고무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체로 시민사회운동의 역할론에 대해 망연자실하거나 무기력감에 빠진 모습 이상이 아니었다. 그 나마의 주장은 촛불을 계승하는 국민적 기구를 만들자 정도였는데, 그 또한 앞이 뻔히 보이는 고루한 제안으로 비쳐졌다. 이런 와중에, 지난 6월 오마이뉴스에 실렸었던 한 영국 유학생의 흥미로운 제안이 떠올랐다. 그는 영국의 사회정의위원회 구성사례를 들며, 촛불을 이어갈 대안으로 ‘독립적·수평적 국민대안위원회’ 구성을 제안하였다. 촛불로 응집된 국민저항과 여망을 모아, 미래를 설계하는 수평적 국민위원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가 사례로 제시한 영국 노동당의 사회정의위원회는 우리의 촛불정국과도 흡사했던 대처정권 말기의 상황에서 대안부재를 돌파할 역량으로, 대처리즘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의 노동당도 아닌 새로운 국가모델 설정과 이에 따른 구체적인 정책들을 2년의 연구기간을 거쳐 내놓았다. 물론, 이 과정은 어느 정치세력이나 학자들만의 그것이 아니었다. 소개되기로, 자문과 자료를 제공한 각종 인사와 단체의 명단은 수백에 이르러 최종 보고서 중 12 페이지를 빼곡히 채운다고 하였고, 그 범위는 학자, 정치인, 사회단체, 이익단체, 연구기관, 기업, 해외 인사, 국제단체 까지 포괄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1997년 신노동당 정권의 전략으로 전폭 수용되었다고 소개하였다. 우리가 촛불국면에서 이를 모색했으면 어땠을까? 비단 어떤 기구를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촛불로 촉발된 생활적 문제의식들을 매개로 미리 예견되고 있었던 MB의 정책과 대조되는 새로운 비전과 정책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으면 말이다. 최근의 ‘민생민주주의 국민회의’라는 것이 뜨긴 했지만, 이 조차도 기존의 시민사회운동의 대책기구의 범주를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 같다. 촛불이 생활을 영위하는 개인들의 집합된 저항이었다면, 적어도 국민이 아닌, 우리시대의 ‘개인’을 대변하고, 또한 참여하는 형태의 수평적이면서, 훨씬 전략적인 모색이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의 운신형태는 훨씬 구체적이고 각론적이어야 한다. 경제학자 한성조는 심상정 진보신당 대표가 펴낸 책에서 평소 자신의 신조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구체적 성공 경험의 축적을 통해 결코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진보를 이룩한다” 나는 10여년 시민운동을 하면서, 구호와 주장이 정작 그 대상이 되는 정책결정과정에 유효하지 못했던 오류들을 많이 접해 왔다. 신자유주의 반대를 거리에서 외치는 동안 관련 법안, 예산이 국회에서 통과돼 버리고, 환경이슈로 비상시국을 선포하고 광화문 거리에서 단식하는 동안 기업도시법과 같은 법들이 국회에서 통과돼 버리는 식이었다. 지난 주 나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예산 삭감을 위해 3일 동안 국회에 상주했다. 제주가 무슨 무슨 특별법하면서 십 수 년 흘러온 지역이라, 이는 나에게 매년 이때 즈음의 연례적인 일이 된다. 올해도 벌써 여섯 번째 이른바 ‘국회로비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국회 풍경 안에서 시민사회운동의 움직임은 찾아보기 어렵다. 싫든 좋든 입법과 예산결정권을 가진 그들 국회의원들을 만나 설득하고, 압박하고, 때로 타협하는 식의 구체적 정책 활동이 아쉽게 느껴졌다. 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집요한 각론적 대응이 절실할 때다.   수도권규제완화철회와 분권, 균형발전 실현 전국연석회의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수도권규제완화 철회와 하천정비사업 중단 요구 기자회견'에 참여해 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이번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은 지역발전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법적 제도적 균형발전을 배제하려는 의도와 지속적으로 수도권규제완화를 추진하려는 의도 부터 철회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한나라당의 날치기로 국회예산이 처리 직후, 민주당 안에서도 지도부 무능론 등 후폭풍이 불고, 언론이나 시민사회도 대운하 예산이니 선심성 예산이니 불을 놓는 형국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차피 기댈 수 없는 민주당만 탓할 일도 아니다. 지금, 이른바 ‘MB 법안 전쟁’이 예고되고 있다. 우리가 이명박 정부의 추락하는 지지도에 기대를 거는 사이,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한 경제학자의 우려 깊은 진단을 매개로 MB정권이 무너지거나 정신 차리길 어쩌면 은근히 기대는 사이, 쟁점법안들은 불과 몇 시간 사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변화를 동반하며 결국 통과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변화 중심에 진보운동의 절박하고도 구체적인 운신이 서 있게 되길 바란다. 한편, 국회 예산처리가 끝나자마자, 이명박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2단계 지역발전 정책’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이 계획과 관련,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가 “전 국토가 거대한 공사장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고 했듯, 국토유린이라 할 만한 토건프로젝트를 경기부양책을 빌미로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둘러싼 형국은 ‘자치단체 환영 - 시민단체 반대’이다. 그런데, 지역의 시민단체들은? 지역의 진보운동은? 필자가 살고 있는 제주의 언론들은 아예 이번 계획에서 제주가 제외되었다며, ‘홀대론’을 펴고 있는 중이다. 민주당도 이 계획에서 진보운동의 편이 아니다. 'MB 법안'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는 얘기다. 이미 민주당은 이 계획을 환영하는 지역의 토호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소속 국회의원들도 자치단체들이 환영하는 이 계획에 대해서 예산따오기 첨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가 ‘삽질경제’니 하는 담론차원 만이 아니라, 수도권 대 비수도권의 접근법이나 ‘사실은 대운하 1단계 사업’이라는 쟁점식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계획이 향후 5년, 그러니까 이명박 정권 만료시점을 목표연도로 하고 있지만, 다행히 그 사이 지방선거가 있다. 때문에 바로 지방선거를 목표로 이 계획의 허구와 문제를 밝히는 ‘지역’차원의 집요한 ‘각론 대응’이 형성되어야 한다. 아니면 전혀 다른 프레임을 갖는 지역의 각광받는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중앙의 노예로 전락한 지방의 현실에서 필경 이 문제들은 지역의 발전담론과 관련해 지방선거의 쟁점이 될 텐데, 더구나 ‘지역’이 실종된 MB 정책은 바로 지역에서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지방선거는 그 매개가 되어야 한다. 외자유치와 규제완화를 둘러싼 지자체 경쟁, 토건경제를 주도하는 토호권력이 바로 국가노선과 맞물려 돌아가는 MB체제하에서 이의 균열을 촉진하는 것은 지역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론적 대응으로 구체적인 성공을 축적하고, 지역에서부터 변화를 시작하자.
2017-07-20 | hrights | 조회: 24 | 추천: 0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중학교 3학년 딸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춘천은 ‘비평준화’지역이다. 그래서 인구 26만 규모의 중소도시에서 명문고와 비명문고를 따지며 아이들을 줄 세우고 사교육비를 쏟아 붓고 있다. 춘천도 한때는 이른바 ‘뺑뺑이’를 돌려 고등학교를 결정 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명문고’ 출신 정책결정권자들의 반란으로 10여년 만에 비평준화로 돌아섰다. 언필칭 시민운동을 한다는 나도, 아이의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여느 아버지처럼 오그라들어 평소 주장하던 커다란 가치와 현실이 맞부딪히는 통에 혼란스럽기도 하다. 뺑뺑이 세대인 나는 운좋겠도, 고등학교 1학년 때 전두환 정권이 서슬 퍼렇게 과외금지·보충수업금지·우열반 금지를 내세우는 바람에 고딩 3년을 자유롭게 다채로운 경험을 하며 보냈다. 대학입시도 요즘처럼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내신과 학력고사 딱 두과정만 거쳤다. 그래서인지 요즘 입시방식은 이해하기 어렵기까지 하다. ‘무능한 386’은 어쩌면 이런 단순한 입시구조에서부터 출발했는지도 모른다. 춘천의 기득권층이 고등학교 뺑뺑이를 무력화 시키며 비평준화를 도입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교육 수준과 학벌은 지배층에게는 기득권 유지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또한 교육제도는 사회 세력 간 역관계의 반영이다. 춘천에서 비평준화가 도입된 뒤 몇 차례에 걸쳐 범시민적으로 평준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교육감 선거 때마다 중요한 선거 공약으로 거론되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대학서열을 고착시키고 사교육비 경쟁에 시민들을 내모는 현실은 교육 받을 권리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등을 두면서 실질적으로 신분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0교시 수업과 우열반 편성 등 교육과학기술부의 자율화 추진 계획에 대해 지난 4월17일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부모로부터 물려받거나 우월한 사회적 지위에 의해 전수된 문화자본이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따라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자본의 크기와 위치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현실이기도 하다. 학교교육을 거부할 배짱은 없고, 다른 방식으로 키우려 해도 조건이 허락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공교육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인 나는 요즘 어느새 아이 교육을 핑계로 사교육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하게 보면 대한민국의 지방 중소도시에서 총력을 기울여 사교육에 쏟아 부어도 서울의 강남을 쫓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한 질주하는 세상에 점점 뒤떨어져만 간다는 두려움에 시지프스의 쓸모없는 노동처럼, 흉내를 내본다. 이렇게 우리 아이와 나는 어느새 교육제도의 볼모가 되어버렸다. 학교가 개인의 상승을 허용하면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에 봉사하는 중립적인 제도라는 환상은 이미 소싯적에 버렸지만 점점 타락해가는 자신을 발견하도록 밀어내는 비루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춘천근교로 귀농한 후배가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폐교를 막기 위해 ‘산촌유학’을 준비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산촌유학’이 한편으로 초등학교 정도에서는 자연과 함께 하는 성장경험이 필요하다는 도시 중산층의 여유로움에서 비롯되었다는 내 생각이 지나친 편견일까? 초등학교 도시유학생을 받아들여야 학교 정원을 지킬 수 있는 현실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춘천의 ‘2류’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에 실패해서 실업계 고교로 발길을 돌리는 아이의, 분노로 축 처진 어깨위에 우리는 무슨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낙오되고, 뒤처진 그 아이들의 좌절된 미래를 향해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몰락해가는 지역의 학교와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지금, 눈높이를 더 낮추고 도전하라고 훈계하고 있지는 않은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28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이 글은 생전의 류낙진 옹을 지켜봤던 기세문·김정길·임종수 선생의 증언을 토대로 쓴 가상의 편지다. 긍께 왜 잠자코 있는 사람을 자꾸 찾아싸. 지금 남원에 있지. 여기가 고향잉께. 집안 선산에 누웠어. 아늑하고 조용한 게 좋구먼. 괜히 사람들이 집적대는 게 싫었어. 벌써 3년이여. 누운 자리 옮긴 거 말이여. 그땐 참 해괴하고 황당하고 거시기했지. 뻘건 페인트를 뿌리더니 해머로 비석을 깨부숴버려야. 기엉코 묘도 파헤쳐불고. 나도 어쩔 줄을 몰랐재. 망측한 백골을 자슥들한테 보여줘부렀응께. 그게 2005년 12월이여. 경기 파주시 보광사였재. 스님들이 만들어준 자리였거든. 우리 같은 장기수들은 세상 떠나도 마땅히 누울 자리도 없응께, 불쌍타고 함께 묻어준 것이재. 그래도 그짝 사람들 보기엔 성가셨나보구만잉. 북쪽에 공작원으로 다녀온 사람들이라재? 천인공노할 짓이라고 남들이 그러드만, 난 암시랑토 안 혀. 암먼, 평생을 그렇게 지냈응게. 손꾸락질 받고 숨죽여 지내고…. 그려도 이참엔 좀 다르재. 누가 우리 외손니한테 ‘골수 빨치산 가문’이라 혔다매. 내가 난리 때 쩌그 산에 들어간 건 맞어. 남로당 남원군당 유격대에 있었재. 아무리 그려도, 할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고 워디 대대손손 빨치산인감?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재. 죄지은 게 있어도 교도소에서 내가 다 갚음 했응게, 정 못 참을 한이 있으면 차라리 내 묏자리 다시 파헤쳐부는 게 낫지, 자슥들 손가락질허진 말어. 금메 그런 꼴 안 당하려고 고향에 누운 것이여. 하먼, 사람들 모르는 데 조용히 있으려고 했재. 젊을 때 산 생활을 여기서 했응께, 맴도 편하고. 이짝에 누워 있자면 옛날 생각 많이 나재. 살았을 적엔 부러 옛날 이야기 많이 안 혔어. 같이 있던 사람들이 가끔 물어봐싸도 암말도 안 혔어. 머씨 좋은 이야기라고 그러겄어. 원체 내가 말수도 적었고 말이시. 남원에서 태어나긴 혔는데 다섯 살 적에 아버지 따라 일본으로 갔네. 하도 헐벗고 굶주리니께 머시라도 먹고 살겠다고 그때는 일본으로 만주로 많이들 갔재. 그랴서 어릴 때 고향 기억은 별로 웂네. 일본서 소학교하고 사범학교까지 마쳤응께. 해방되고 돌아왔재. 국민대 들어가서 고시 공부를 쪼깐 했었어. 그러다 전쟁이 터졌재. 이데올로기는 별로 웂었어. 거시기, 야심이랄까 포부가 있었재. 젊었응께. 외세 때문에 분단돼야선 안 된다고 생각혔지. 무슨 무슨 이념보다는 민족통일이 질로 중한 문제라고 생각혔지. 배고프고 못산 게 다 외세 땀에 그런 거 아닌가 말이어. 지리산 달궁이라고 아시요. 내 시름만큼 산이 깊었재. 골이 원체 깊응께 계곡물도 숨죽이고 흐르던 곳이요. 거기 터를 잡고 유격대 선전부 일을 혔어. ‘인텔리’라고 더러는 동지들이 비판도 혔지. 그때 일을 워떻게 말로 다 허겄소. 52년 봄에 잡혔재. 산에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는데, 고것이 내 젊은 날의 마지막 봄이요. 잡히자마자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재. 민간인 법정으로 옮겼는디 5년으로 감형해주더라고. 고때 죽어부렀으면 식구들 고생하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재.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여. 맴대로 되는 일은 아니재. 57년에 나왔어. 산 생활 할 때 만난 시약시가 있었거든. 비슷한 때 잡혔고, 비슷한 때 나왔재. 까막소에서 나오자마자 결혼혔지. 식구가 생겼으니 워쩌겄어. 돈을 벌어야재. 막일했어. 공사장에서 날품 팔았재. 가족이라고 같이 보낸 게 고런 몇 년이 전부여. 꿈꾸는 것 같았재. 그러나 마나 군인이 대통령 되더니 63년에 또 잡혔부렀어. 혁신계 일을 했다고 시비 삼았재.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긴 혔는디, 71년에 또 잽혀 들어갔재. 통혁당 사건이었어. 신영복 선생도 그때 잽혀 들어왔재. 내가 그래도 사범학교 출신이라고 전남 보성에서 잠깐 선상질 할 적이여. 사형선고를 두 번씩 받아본 사람이 있을랑가. 판사가 사형이라고 하는디 암 생각도 웂었어. 나중에 2심에서 무기징역 받았재. 광주 교도소에 있는디 80년에 또 난리가 났어. 내 동생이 전남도청에 있다가 계엄군 총에 맞아 죽었재. 나중에사 이야길 들었네. 세월이 가면 슬픔은 잊혀져뿌는 것이여. 안 그럼 또 워쩌겄는가. 마음에만 담았재. 잡혀 들어온 학생들이 단식투쟁 하면 내가 타이르기도 혔어. 건강하게 살아남아야 쓴다고, 그래야 좋은 세상 본다고 혔지. 암먼 살아남아야재. 88년에 20년형으로 다시 줄었다가 90년에 가석방됐어. 그때 내가 맘에 안 좋은 일이 있었재. 전향서를 썼소. 그거 쓰는 바람에 작업장에 나가 일도 했재. 안 그러믄 방에만 갇혀 지내거등. 전향서 쓰고 작업장에 가서 아그들 공부하는 책상 만들었네. 취미 삼아 나무에 붓글씨도 새기고…. 할 말이 웂었재. 긍께 고것은 내 맘속에만 담아둔 이야기네. 아무도 그것 때문에 뭐라 한 적은 웂어. 그랴도 철저하게 비전향 장기수로 있었던 동무한텐 거시기, 맘으로 죄스러운 게 있재. 나중에 다시 잽혀왔을 때, 준법서약서를 거부한 적이 있는디, 고걸로 미안한 맴이 조깐 덜어지긴 혔어도…. 바깥에 나가서 몇몇하고만 내왕한 것도 그런 일 때문이여. 94년에 구국전위 사건으로 다시 구속됐네. 나중에는 그게 조작된 거라고 하드마잉. 그러고 다시 6년 있다가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됐어야. 그게 99년이여. 내 나이 일흔하고도 한 살을 더 먹어부렀재. 우리 외손니가 나한테 무슨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디, 일흔이 넘도록 까막소만 왔다갔다 하는, 얼굴도 모르는 늙은이한테 어린 외손니가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겠능가. 아주아주 어릴 적에 부모 손 잡고 내 면회를 온 적은 있재. 그런 것도 하덜 말아야 빨치산 영향을 안 받았다고 하겠능가. 나와서는 그저 소일만 혔어. 책 읽는 걸 좋아했으니께, 읽고 싶은 것도 다 못 읽고 수십 년을 까막소에서만 있었응께, 다 늙어 혼자서 철학이니 역사니 공부를 쪼깐 했재. 갇혀 있을 때 틈틈이 익힌 게 붓글씨니께 그거 써서 친구들한테 선물도 주고 그러믄서 살았재. 몇 안 남은 친구들한테 가끔 자랑은 혔어. 우리 손니 예쁘다고, 착하다고 그렸지. 나중에 보니께 친구들한테 말이 넘어들어와. 무슨 단체에서 홍보대사로 나서달라, 이런 영화를 찍으니 출연해달라, 그런 부탁이여. 민주단체나 역사영화 같은 것이었는디, 갸 엄마가 워낙 민감해하니께 한 다리 건너 나한테꺼정 부탁을 넣는 것이재. 그런 것도 받지 말라고 사람들한테 신신당부를 혔소. 그담부터는 내 방에 있던 손니 사진도 없애부렸재. 날 알아도 손니는 아는 체하지 마라, 그런 뜻이었재. 갸 에미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아마도 그럴 것이네. 긍께 갸한테는 딸이 질로 중하고 중하거든. 빨치산 어쩌고 고 따우 야그하는 사람들이야 얼마 웂겠지만서도, 뉴라이트니 뭣이 워낙 많잖어. 그런 것이 굉장히 신경쓰일 것이네. 민주화됐네 어쩌네 해도 친일 후손들은 조상 땅 찾겠다고 나서고 빨갱이 자슥들은 평생 암말도 못하고 사는 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여. 나 땜시 이런 글 나가는 것도 자슥들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네. 나 죽고 나서는 장기수니 양심수니 하는 내 동무들도 갸 엄마한테 연락 안 하고 산다등마. 하먼, 서로 조심하는 것이재. 이제 와서 내가 먼 할 말이 있겄능가. 죽어 땅에 묻힌 게 벌써 3년허고도 여섯 달이 지났어야. 죽기 전엔 이삼 년만 더 살았으먼 했는디, 숩게 죽진 않겄다고 동무들한테 말도 했는디, 살고 죽는 게 그렇게 허망하드만. 그저 자손들헌테 평생 눈물 바람 맞힌 게 미안헐 뿐이재. 장례식 때 큰아들놈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어야.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걸 용서해달라고. 우는 자식 놈헌티 꼭 말하고 싶었재. 용서는 내가 받아야 하는디, 나 땜에 숨도 못 쉬고 몰래 피눈물 흘린 거 내가 다 안고 가야 하는디, 미안허다, 미안허다…. 나넌 징헌 세상을 모질게 살았어. 그게 옳았는지 워쨌는지는 잘 모르겄어. 그래도 후회는 안 해야. 내 깐에 열심히 산다고 살았응께. 이젠 젊은 사람들이 한 세상 살아내야 허잖어. 긍께 존 일 헌다고 나같이 죽어 누운 사람 찾지 말어. 죽어뿌린 빨치산하고 좋은 일로 번 돈 좋은 일에 쓰는 배우하고 자꾸 한 이바구에 담덜 말어. 빨갱이 자슥, 빨갱이 친구라고 쏴죽여뿔고 반대짝에서 원수 갚는다고 또 죽여뿔고, 그런 생지옥을 젊은 사람들이 또 살 수는 없잖어. 그 낙인을 자슥들한테 물려주는 세상을 다시 만들 수는 없잖어. * 고 류낙진 옹 약력 1928년 8월26일 전북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 출생 1933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감. 히로시마에서 사범학교 졸업 1946년 남원으로 돌아옴 1950년 국민대 입학. 남로당 남원군당 유격대 활동 1952년 체포된 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 이후 민간재판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 1957년 만기 출소. 결혼 1963년 혁신당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집행유예로 석방. 전남 보성군 예당중 교사 생활 시작 1971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 1심 사형선고, 2심 무기징역 선고 1980년 동생 류영선,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에 의해 사망 1990년 전향서 제출 뒤 가석방 19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 1심 무기징역 선고. 2심 징역 8년 선고 1999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 2005년 4월1일 별세 2005년 6월 경기 파주시 보광사 연화공원 묘역으로 이장 2005년 12월 대한민국 HID 특수임무청년동지회에 의해 묘역 훼손. 이후 남원 선산으로 이장 고 류낙진 옹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 이 글은 <한겨레21> 737호 (12월1일자 발간)에 실렸습니다. 인용 및 전제하실 때, 참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40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정책팀장 서울살이는 지금이 두 번째이다. 작은 읍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어찌어찌 서울이란 곳으로 대학을 오고 금쪽같던 젊은 시절 5년을 서울서 보냈다. 그리고 3년여 전부터 다시 서울살이를 하고 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서울은 별로 정이 안 간다. 서울살이를 삭막하게 만드는 이유야 여러 가지이나 그 중 하나는 폭력과 관련한 것들이다. 그 당시 대학은 남성중심문화가 팽배해 있었고, 특히 학보사라는 곳은 야구방망이얼차려는 기본이었다. 그거야 뭐 집단의 역사니, 문화니 하여 참을 만했다 해도, 술자리에서 선배의 성추행에 항의하다 두사부일체를 외치는 추종자에 의해 끌려가 눈에 불똥이 튀도록 맞은 것은 미해결된 분노다. 그리고 3년 전 서울로 이사 온 지 삼일 째 되던 날 이웃과 주차문제로 다툼이 있었고 끝내는 다치게 되고 말았다. 벽 하나를 사이 두고 살아야 하는 관계에서의 그런 상황은 마주칠까 불안하고 두렵기조차 했다. 딸아이는 거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는 했었다. 가해자가 응당한 처벌을 받고 이사를 가 일단락되면서 다행히 잊어가고 있다. 타인에 의한 일회적 폭력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그러나 가족에 의한 폭력은 일상 속에 폭력이 들어와 있다는 점에서 경험의 강도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리라 예상된다. 죽음보다 두려운 경험이 아닐까? 폭력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보다도 하루하루를 죽음의 공포로 살아야 하는 그 과정에서 이미 한 인격에 대한 사망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사람이 인격을 팽개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릴 때, 물건으로 취급받을 때, 고통의 공포가 전신을 지배할 때... 이미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그 상황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차이가 성별권력관계로 둔갑한 모습일 때 침해는 더 깊어진다. 지난 10월 28일에 열린 가정폭력방지법 시행 10주년 기념포럼 사진 출처 - 필자 ‘가정폭력방지법’(‘가정폭력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통상 ‘가정폭력방지법’이라 한다)이 시행된 지 10년이 흘렀다. 법제정 활동을 하던 당시만 해도 가정폭력은 ‘사생활’ 이었고, 법제정은 ‘사생활 침해’였다.-10년이 흐른 지금 ‘가족관계등록법’ 이나 ‘정보통신법’을 통해 ‘사생활 침해’를 넘어 ‘통제’ 하기까지 이르고 있다. 이런 것이 격세지감인가?-아내구타로 인해 여성들이 사망하고, 가해남편에 대한 우발적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그 때서야 법을 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언젠가 말했듯 여성의 인권은 죽어야 관심을 받는다. 11월 25일부터 12월 10일까지는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이다. 이 주간도 도미니카의 세자매가 죽음으로 독재에 항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게 ‘가정폭력방지법’은 수많은 구타여성들의 희생 속에서 만들어져 10년이 지나고 있다. 법 시행 10주년을 맞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가정폭력-정확히 아내구타-의 현실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본회에서 10주년 기념 토론회를 개최하여 법 시행이후 달라진 점과 향후 가정폭력추방운동 및 법 개정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방송과 토론회를 통해서 나타난 가정폭력의 현상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가정폭력 소송 통계로 나타난 것도 감소율이 별반 차이가 없다. 방송프로에서 보여준 폭력의 강도는 변화 없이 잔인함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가해자들의 의식 또한 여전히 ‘맞을 짓을 해서 맞는..’ ‘여자는 때려도 되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가해자치유프로그램의 효과에 대한 회의가 드는 순간이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한다. 그 무엇도 폭력을 정당화 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가정폭력으로 명칭 되는 아내구타/ 아내폭력은 두 가지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물리적 폭력이 허용되는 폭력적 사회문화, 남성과 여성의 성별 권력관계, 위계의 질서에 놓여있는 성차별문화이다. 아내에 대한 폭력이 근절되기 위해서는 폭력에 관대한 문화를 성찰하고 폭력이 얼마나 비인간적인가에 대해 밝혀내고, 폭력을 근절시키기 위한 활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가정 내의 폭력이 사회적 범죄로 처벌됨을 명확히 배우고,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부터 폭력근절을 위한 교육이 정기적으로 실행되어야 한다. 폭력을 포함한 인권교육이 정규과목이 되거나 정기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법의 개정이다. 폭력의 종식이 아니라 가정의 보호와 유지를 우선하는 가정폭력방지법의 목적이 바뀌고, 실효성 있는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치유를 위한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 특히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고 있는 가해자 처벌은 가해자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반복의 위험성 등을 고려한 실질적인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검사에게 집중되어 있는 피해자보호청구권을 경찰이나 피해자가 직접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피해자 보호에 집중하여야 한다. 또한 피해자보호에서 우선 급한 것은 폭력피해여성들의 자활과 자립에 대한 지원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노숙인들 중에 가정폭력피해여성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 세 번째로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일상 속에서 폭력문화를 종식시키고 추방하기 위한 생활운동이 확산되어야 한다. 현재 각 지역에 여성폭력관련 협의체들이 있는데, 지역민-관련단체 및 기관-지자체가 연계되어 피해자를 보호하고 폭력예방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취지를 살려 지역별 협의체를 강화하여 폭력예방에 적극 나서고 그 과정에서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폭력은 경제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 IMF시기 가정폭력이 급증한 경험이 그것이다. 고환율에 고물가에 과연 언제 꺼질지 알 수 없는 현재의 경제 불안은 분명 어디선가 소리 없는 가정폭력을 양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극한은 극한을 부추긴다. 물질만능의 경쟁지상주의 속에서 도태되고 발붙일 곳 없는 이들의 기형적 탈출구로 가정폭력이 존재하게 되는 이상 어떤 법과 제도도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될 때 타인의 고통에 대해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폭력에 대한 성찰의 첫걸음이다. 남을 돌아볼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탕이 될 때 가정폭력추방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사회는 누가 만들 것인가? 아무래도 정부에 대해서는 희망이 없다. 나부터,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그런 사례들을 만들고 확산하고 그래서 모델을 보여줄 때, 가능하다. 오늘부터 나부터 모든 형태의 폭력사용을 금지하기로 마음먹고 실행해보자. 그것만이 대안이다. 가정폭력을 내문제로 인식하는 것.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6 | 추천: 0
홍미정/ 건국대 중동 연구소 연구원 2008년 11월 2일 헤브류대 학생 알리 바하르는 이스라엘 대통령 시몬 페레스와의 악수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감금당하고 신분증을 빼앗겼다. 페레스가 악수를 요청했을 때, 바하르는 “나는 어린아이들을 살인한 자와 악수를 하지 않겠다. 2000년 이후 이스라엘 군인들이 1천 50명의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을 살해하였고, 같은 기간에 팔레스타인 전사들이 이스라엘 어린이 123명을 살해하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 당선자 버락 오바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그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은 태도를 지난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 표명하였다. 지난 6월 미국-이스라엘 공공업무 위원회(AIPAC)의 연설에서, 오바마는 “이스라엘의 안보는 신성불가침이고,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미국-이스라엘 동맹은 공동의 이익과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가치에 근거하며,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다.”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이란이 이스라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가자에서부터 테헤란까지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도록, 미국-이스라엘의 방위 협력이 강화되어야하며, 이를 위하여 대통령으로서 10년 이내에 3백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제공하기 위한 양해각서를 이스라엘과 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동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이스라엘에 3백억 달러를 지원한다는 이 제안의 의미는 미국이 이스라엘의 군국주의화를 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계획은 이스라엘을 군사 요새로 변형시키고, 주변 중동 국가들의 무장화를 급격히 부추기면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 연설 도중 오바마는 시오니스트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제어인 ‘홀로코스트’를 언급하면서, 2차 세계대전에서 외할아버지의 형제들이 6백 만 명을 학살한 악마 나찌와 대결해서 싸웠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아프리카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자신의 생애가 세계 각지를 떠돌았던 유대인들의 그것과 유사하다며, 고향 땅을 회복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시오니스트들의 꿈에 깊은 공감을 표명하였다. 그는 시오니스트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창설한 것은 정당하고, 필수 불가결하였으며, 수십 년 동안 투쟁한 성과라고 평가하였다. 이스라엘 국가 창설 60년이 지난 오늘날 이 투쟁을 완화시킬 수 없으며, 포기할 수도 없고, 대통령으로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안보 문제에 관한한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약하였다. 이러한 오바마의 주장은 이스라엘 국가가 토착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대량학살하고, 90퍼센트의 주민들을 추방함으로써 건설되었고,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만이 핵을 무장한 국가이며,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 국가가 팔레스타인 땅 전역을 군사 점령한 상태이며, 팔레스타인 주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일상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국가 폭력이 하마스가 이스라엘인들을 공격하는 것과는 규모나 빈도수에서 비교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전 세계의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어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오바마가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공정한 분쟁 조정자라면, 이스라엘의 안보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에 대한 권리와 인권 보장을 주장해야할 것이다. 지난 7월 24일(현지 시간)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Western Wall)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의 모습 사진 출처 - 로이터 오바마는 지난 7월 이스라엘 방문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고, 중동에서 유일하게 민주적인 국가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중동 정책의 출발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지지와 연대 의사를 재차 확인하였다. 반면, 그는 압도적인 화력을 사용하면서 매일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 민간인 살상과 팔레스타인인 영토 강탈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팔레스타인인을 언급한 경우는 이스라엘의 안보 논리를 합리화시키는 불가피한 배경으로써 ‘이스라엘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알려진 하마스’뿐이었다. 오바마의 눈에는 하마스 이외에 다른 팔레스타인인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가자 근처의 스데로트 이스라엘 점령촌을 방문하여 하마스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이란, 하마스,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위협론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11월 5일,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미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된 이후 이란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아마디 네자드 대통령은 오바마에게 당선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이것은 이란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마스 최고 지도자 칼리드 마샬은 11월 8일 “미국 행정부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마스와 대화를 해야 하며, 대화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강력하게 대화를 통한 분쟁해결을 제안하였다. 과연 차기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테러리스트들이라고 지목한 이들의 관계 개선과 대화 제안을 요구를 수용할 것인가? 중동 평화로 가는 대화 테이블이 마련되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손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3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가끔 서울에 가게 되는데, 늘 서울 거리의 가로수가 인상에 남는다. 특히 정동길이나 세종로 주변 거리의 큰 나무들은 제주에서 볼 수 없는 거리의 여백을 선사한다. 더욱이 가을 길의 그것은 굳이 여느 산의 정취가 아니더라도 서울 도심의 복잡함과 소란스러움을 충분히 걸러낼 만큼의 여유와 고단한 일상의 어떤 전향(轉向) 같은 것을 촉진한다. 그런데 올 가을, 서울 그 거리, 큰 나무들의 정서는 지금까지와 다르다. 어떤 절박함이다. 분명히 절박함의 색은 진홍빛이 아닐까한다. 단풍(丹楓)의 색이 빚어내는 정서는 화려함보다는 내면으로부터 발산된 분노의 축적, 절망, 좌절감을 총합한 절박함의 표상으로 와 닿고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국회의사당과 광화문 정부 청사를 오가며 제주 해군기지건설사업이 보여주는 문제에 대해 국회의원, 그들 보좌관들, 정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득하려 무던히도 애 좀 썼다. 벌써 몇 년째, 이즈음에 행하는 연례의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제주 해군기지 논란 과정에서 하나의 의문을 품게 되었다. 국책사업은 정당한 주민의 의사 위에 군림해도 되는 걸까? 국가논리가 주민의사와 부딪혔을 때 국가의 태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일까? 비록 그것이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업일지라도 주민들은 반대하면 안 되는 것일까?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국가안보사업이 정말 국가안보에 제대로 기여할 수 있을까? 전가의 보도와 같은 국가안보의 논리는 주민 삶의 논리보다 우선하는 것이 여전한 현실임을 인정하고 말아야 하는가? 국민은 오늘날에도 자발적 개인의 집합체가 아닌 국가체제의 동원대상일 뿐이었나? 국민이 아닌 주민, 혹은 개인은 여전히 존재할 토양조차 없는 것인가? 한 마디로 국가와 국민, 혹은 주민의 관계와 관련한 이런 저런 의문과 생각들이 끝내 올 가을의 절박함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강정마을회, 천주교제주교구평화특위, 군사기지범대위 등 해군기지반대단체들은 4일 합동기자회견을 열고 법절차를 무시한 정부.해군.제주도정의 해군기지 사업추진 강행을 맹렬히 성토했다. 사진 출처 - 제주의소리 정부는 지난 9월 11일 제주 해군기지 사업을 확정 발표하였다. 이후 정부나 군 당국은 물론, 심지어 정치권조차 이제 이 문제는 “끝난 문제”로 여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어느 날 해군기지 후보지가 돼 버린 강정마을 사람들의 끝없는 고통은 찬반 양측의 의사수렴이라는 이른바 균형논리에 의해 깊어지기만 하고 있다. 이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바다 밑의 연산호군락 등의 문화재에 대한 조사와 평가 문제도 그저 사업추진을 위한 ‘보완’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런데 다 제쳐놓더라도, 이것 하나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환경부는 이 곳 자연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부합동으로, 그것도 객관성을 이유로 민관 공동방식에 의해 4개월의 정밀조사를 요청하였다. 문화재청은 최소 내년 6월까지 조사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더욱이 문화재청의 조사과정은 이 사업의 허가여부를 판가름할 매우 중요한 법적 절차이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이 조사가 끝나기 전에 해군기지 사업은 일단 중단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내년 기지건설 예산도 430여억 원이나 국회에 넘어가 있고, 해군은 벌써부터 부지매입과 어업피해 보상에 착수하려는 움직임이다. 공사시행을 위한 입찰공고까지 해놓은 상태이다. 우리가 찾아간 총리실 관계자도 예정된 문화재, 환경조사등에 대해 “사업을 거스를 사안이 아니다”로 딱 잘라 말했다. 부드럽고 정중하게. 심지어 정치권의 모든 관련자들도 환경문제나 주민갈등 문제는 그저 개선해야 할 일이 되고 말 것임을 명백히도 예견해 주었다. 국가가 하는 사업은 결국 '간다(Go)'는 말이다. 주민들의 요구는 매우 단순하다. “주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물어보고 결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 요구를 1년 6개월째 해오고 있다. 심지어는 찬성이 51%만 나와도 그날로 반대 대책위 해산하고 승복하겠다고 까지 여러 번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작년 8월에는 3개월여의 우여곡절 끝에 마을 주민투표를 통해 기지건설 반대 입장을 결정했다. 그러나 국가는 단지 제주도지사를 시켜, 그것도 그저 정책결정 ‘참고용’으로 그 문제점이 결국 확인되고 말았던 여론조사로 강정마을을 불과 며칠 새에 후보지로 결정했을 뿐이다. 국가의 결정과정은 강정이라는 작은 마을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국가가 결정한 사업이니 따르라고 해왔고, 이제 “끝난 문제”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국무총리실에 갔을 때 강정마을의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 곳 까지 찾아오는 동안 연락드리고, 약속시간 잡고, 이 곳 건물에 와서는 신분확인 거치고, 그렇게 절차를 밟아 비로소 여기에 온 겁니다. 하물며, 국가가 사업을 추진하며, 주민들에게 어떤 사전 연락이나 대화를 했습니까? 만일 그렇게 절차상 할 거 다하고 그래도 우리가 반대했다고 우리를 때린다면, 싸대기 한 대 맞아도 덜 기분 나쁠 거 아닙니까?” 눈물겹다. 그리고는, “탱크 다섯 대만 몰고 들어오면 우리를 물리치고 기지건설 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 이 부드럽고 점잖은 정부 사람들한테. 그런 격한 말이라니! 우리도 저렇게 부드러워야 하는데!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다. 지금 나의 절박함은 이 문제 하나에 대한 천착이 빚어낸 그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권력은 부드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일들을 관장하고 통제하고 조율하는 훨씬 크고 중요한 일을 하니까. “여러분 서 있는 발밑이 다 잠수함 밭이에요” 하는 말처럼 밀어붙일 수밖에 없는 훨씬 깊숙하고도 안보상 말 못할 어떤 사연이 있을 수도 있고, 최근 금융위기 문제니 종부세 문제니, 이재오 의원 입국설 등이니 참 대단한 문제들 앞에서 오로지 이 문제만을 얘기해야 하는 우리가 되려 옹졸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원래 옹졸함 앞에서는 그 옹졸함을 탓하기 보다는 어루만져주고 넘기려 하는 법. 그런데 그것이 부드러운 모습의 권력의 억압방식이다. 부드러움이 그 옹졸함과 앞서 탱크 어쩌고 하는 것처럼 결국 터지고 마는 격함을 불러내고 마니까. 그 부드러움은 어디로부터 나올까? 이제 제주 해군기지 문제의 해법은 그 부드러움의 힘으로 우리의 옹졸함과 과격함을 자꾸 불러들여, 점잖게 해결해주는 방식이다. 그 부드러움의 억압을 받치는 진정한 힘. 바로 물량과 물리적 공권력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국민이 아닌(국민으로 쳐주지 않으니까), 한 개인의, 한 주민의 생각으로는 아무리해도 이해할 수 없는 저 국가의 논리, 국책사업의 부드럽지 못한 과격한 행보는 또 다른 절박함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부드러운 권력자들이 미리 헤아려 보는 여백도 있었으면 좋겠다. 서울 그 거리의 단풍에 든 가로수를 마주하고 단 5분만 말이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굽은 듯 한 것이 실은 가장 곧은 것이고, 서툴고 모자란 것이 실은 가장 뛰어난 것이다. 고요함이 조급함을 이기고, 추위가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이 말은 우리의 옹졸함과 격함을 보여주는 옛 성어인데, 분명 부드러운 권력의 모습은 아닐 거라고 본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