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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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언젠가부터 어떠한 정치,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 틀들이 과도하게 단순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떤 용어나 개념, 그리고 논쟁 구도가 등장하면,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도 없이, 마치 요즈음의 유행가들처럼 잠시 들끓다가는 사회에 별다른 실질적 영향도 못 미친 채 사라지는 용어와 논쟁의 싸이클이 너무 자주 반복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순하게 나열되는 듯 한 과정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가령, 지난 대선에서 90%에 육박하는 투표율을 보였던 50대의 투표성향 변화는 분명 매우 중요한 이슈였다. 그러나 50대를 비롯한 투표성향에 있어서 세대 간 차이를 강조하는 학자들과 언론인들의 분석 글들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 하지 않았나 싶다. 주목을 끌었던 50대의 투표 성향 변화의 경우에도, 계급, 지역, 성별 등에 따른 자세한 분석을 하지 않은 채, 통째로 박정희, 전두환 두 독재 정권 치하에서 청년기를 보내며 격렬한 민주화 과정을 온 몸으로 겪었던 세대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크다. 이들이 청년이었던 시절에 당시 대학생들 중 학부 시절 진지하게 운동의 정신을 이어갔던 학생들의 비율은 졸업 후 기득권층으로 적극적으로 편입하려고 하던 이들의 비율에 비해 극소수였다. 대학 시절의 정의감에 입각한 저항의 경험은 졸업 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 이들에게 더 많은 평등 지향적 민주화 요구와 맞닿기 보다는 이를 거부하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학생은 전체 청년들 중 1/4에서 1/3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이러한 주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한 마디로 이러한 주장들은 민주화나 민주주의를 정치적인 측면만으로 보는 데에서 야기되는 매우 전형적인 오류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비극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던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가 낳은 필연적인 비극인 것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서구 중심부 국가들에서와는 달리, 한국을 비롯한 비중심부 국가들에서는 민주화 투쟁, 저항의 주체들이 상대적인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한 후에는 급속하게 과거 독재자들이 구축해 놓은 사회경제적 기득권 구조에 편입되는 현상을 보여 왔다. 따라서 독재에 반대하는 수준에서는 많은 이들이 매우 용맹했지만, 독재 체제의 후퇴 이후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일정정도 쟁취하고 난 뒤에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즉 평등화를 추구하는 복지 사회로 나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이를 거부했다. 따라서 이들은 부동산 투기, 탈세, 학연, 지연, 종교, 성접대, 부패 등이 서로 뒤얽힌 특권 구조와 기득권 질서를 타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구조를 향유, 강화해 왔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50대는 바로 이러한 구조의 주체이자 산물이다. 이는 상당한 수의 서민들이 오히려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현상과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복잡하게 설명하거나 안타까워할 일 없이 한 마디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맛보지 못한 서민들에게는 민주주의란 혼란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누구보다 더 고통 받는 것은 사회적 보호막이 없는 자신들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어디 그 뿐인가? 정치를 떠나 사회를 보자. 예를 들어, 학교 폭력, 군대 폭력, 학벌 사회, 영어 광풍, 고시 열풍, 기러기 아빠, 부동산 투기 광풍, 사교육 광풍, 골프장 왕국, 최고의 자살율, 최고의 노인 빈곤율, OECD 국가 내 최고 수준의 자영업 비율, 최하의 복지 수준, 급증하고 있는 각종 범죄 등등... 특정 정권 들어 악화되었는지 아닌지를 논하기 앞서 이러한 문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조화된 우리 사회의 고유한 문제들이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우리 사회에서만 있는 매우 해괴한 이러한 사회 현상들의 본질은 유사하다. 즉, 사회 복지 시스템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국가에서 거의 모든 국민들이 나락으로 빠지지 않는 길이란 출세해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서로를 짓밟고 속이는 극단적인 경쟁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들인 것이다. 이렇듯, 한국 사회의 매우 특수한 현상들을 보지 못 하고, ‘신자유주의’나 ‘금융 세계화’ 등의 개념으로만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들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50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사회재구조화와 노동 불안정화로 인해 가장 타격을 입은 집단’, ‘명퇴 이후 영세 자영업으로 내몰린 이들’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리가 있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간과하는 주장이다. 이렇듯, 많은 지식인들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굳이 사용해 가며 소위 불안정 노동이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OECD 국가들 중 최고의 비중을 자랑한지 오래인 자영업과 같은 더 주변화된 사회 계층이나 집단들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으로 50대 영세 자영업자들이 급증했고, 따라서 이들이 믿었던 민주화 세력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억압에 분노하여 퇴행적 투표를 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선거 분석을 통해서 세대에 따른 진보와 보수의 비율 차이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20대의 보수화라는 사회적 위기현상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20대의 보수화는 이전의 보수화와는 궤를 달리하기에 매우 위험하다. 즉 이들 20대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 보수집단 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인종주의 등 서구식 극우와도 맞닿아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나 반여성주의, 반공주의까지 마구 뒤섞여 그 어느 극우집단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넷 우익’이 기존의 일본 우익들과 결합하며 실제 세력화되는 것을 일본의 진보 학자들도 예견하지 못 했듯,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과도하게 일시적 현상이거나 가볍게 보는 학자들이 너무 많다. 불안정 노동과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이 만연한 시대에 서민들은 오히려 파시즘을 선택한 역사는 수두룩하다. 게다가 이러한 집단에조차도 속하지 못하는 엄청난 수의 주변화된 반범죄 집단들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고령층이 많아져서 중도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하며, 다시 진지하게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보편적 복지로의 급진적인 변화를 구체적으로 논할 때가 왔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23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나는 경기도 의왕시에 산다. 우리 시의 이름은 품격이 넘친다. 한자를 보라. 義王! 얼마나 멋진가. 조선시대 광주부의 ‘의곡면(義谷面)’의 의(義)자와 ‘왕륜면(王倫面)’의 왕(王)자가 합쳐져 된 이름이니 의로움과 제왕의 윤리가 홈빡 깃든 이름이다. 1914년 일제의 농간으로 義王 대신 ‘거동할 의(儀)’와 ‘왕성할 왕(旺)’의 儀旺으로 표기가 바뀌었다가 2007년에야 비로소 원래의 이름인 義王을 되찾았다. 국내 행정구역중 의왕만큼 멋진 이름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동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천박하다. 우선 우리 동네 국회의원 행실부터 수준 이하다. 우리 동네 일꾼은 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어놓고는 몇 달 되지 않아 그것도 자신을 뽑아준 지역주민들에게 단 한마디 의견도 묻지 않고 말없이 철새처럼 잽싸게 안철수 씨에게 날아간 “묻지마” 개혁정치의 기수 송호창 의원이다. 표 달라고 넙죽 인사하며 인덕원 전철 역 앞에서 명함을 건네던 송의원은 당선된 후 정말 전광석화처럼, 독불장군 독재자처럼 제멋대로 당을 옮겼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안철수씨 편에 선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옮겨가는 과정이 몹시 추하다. 정치 초년생이라 뭘 모르고 한 것이니 용서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는 정치 경력이 아니라 기본적인 정치 도의의 문제다. 배고파 아쉬울 때는 손 벌리고 배가 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거두고 표변하는 사람과 다를 바 무엇인가. 적어도 지역구민들의 의견을 묻거나 양해를 구해야 옳은 것인데, 제 살 길을 찾아 그냥 날아가 버렸다. 뉴스보고 당적변동을 알았으니 말 다한 거다. 고매한 동네 이름인 의왕에 걸맞지 않은 정치 철새다. 개혁정치라는 말이나 안했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에는 철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왕(義王)의 왕(王)자가 연유한 원명인 왕륜(王倫)도 없다. 인덕원에서 판교 쪽으로 한 2분만 가면 왼편 깊숙한 곳에 서울구치소가 있다. 의왕시에 있지만 이름은 서울구치소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힘 있고 돈 있는 분들이 자주 오신다. 노태우, 정몽구, 박지원, 권노갑 등 정재계 거물들이 드나들던 곳이고 현재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의원, 대통령의 사촌처남인 김재홍 KT &G 복지재단 이사장, 신재민 전 문화관광부 차관 등이 수감돼있다. 그런데 유력인사들, 이른바 ‘범털’들이 하도 자주 오길래 ‘구치소’가 아니라 ‘구치텔’이라고 까지 불리는 이곳에서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비리로 구속된 대통령의 측근들이 대통령의 특별사면의 은덕을 받아 줄줄이 구치소를 떠난 것이다. 법과 원칙을 그리도 강조하더니 특별사면에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말이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설 특별사면을 받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 1월 31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제 아무리 감언이설로 특별사면의 정당성을 이야기해보았자 특사의 원칙은 야당의 표현대로 대통령과 친하냐 친하지 않냐로 귀결될 뿐이다. “재임 중 발생한 권력형 비리에 대한 사면은 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입각해 실시”한 특사라고 하지만,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대통령 임기 중인 2009년 세무조사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임천공업으로부터 47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사람이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구급차를 타고 황급히 빠져 나왔을꼬! 분노를 넘어서 애잔하기까지 하다. 대통령 측근으로 무소불위의 방송 권력을 누리다 구속된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은 확정된 징역 2년 6개월 중 9개월만 살다 나왔다. 우리 대통령은 대학생 반값 등록금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미안했나보다. 측근의 징역형을 30%로 깎아주는 것을 보니 말이다. 왕륜(王倫)은 어디 갔나? 있기나 했을까? 철새 의원과 왕륜 없는 대통령. 의왕 우리 동네 이름이 맞지 않는 말들이다. 제발 새해에는 개혁, 법, 원칙을 입으로만 나불대는 정치모리배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우리 국민이 뱀처럼 지혜로워지도록 우리 동네 의왕의 의로운 기운이 더욱 강성해졌으면 좋겠다. 기사년(己巳年) 의로운 왕의 기운이 솟구쳐라! 의왕(義王)을 희구(希求)하며, 의왕만세(義王萬歲)!
2017-08-07 | hrights | 조회: 122 | 추천: 0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국제중학교라는 제도가 초등학생 학부모 사이에선 제법 화젯거리다. 아예 관심 두지 않는 사람이 외려 적어 보이고, 주변에서 아이를 국제중학교에 보냈거나, 보내려 했거나 한 경우도 상당수다. 듣자니 서울 시내에 있는 국제중학교 두 곳은 서류 전형으로 3배수를 뽑은 후 추첨으로 최종 입학 여부를 결정한단다. 서울시 교육청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몇 해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그냥 ‘성적순대로’가 아니라 마지막엔 ‘운에 따라’라니― 새로운 발상이 아닌가? 마침 ‘선거를 보충하는 추첨제’ 제안을 읽은 직후이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의 어느 글에서 부딪힌 대목이었는데, 대표를 뽑아 결정권을 위임하는, 이른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게 대표들에게 엉뚱한 특권의식을 안겨주기 십상이라는 것이 문제의식의 요체였다고 기억한다. 선량(選良)이라는 말대로 뽑힌 사람들은 자신이 잘나서, 능력이 있어서 결정권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기 쉽다. 투표로 뽑히는 각종 의원이며 기관장들이 내멋대로식 질주를 일삼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투표를 통해 2~3배수를 뽑되 최종적인 결정은 추첨으로 해 보는 편이 어떤가. 추첨제라면 능력 있어 대표 됐다는 환상을 부수는 데 적합할 테고, 의원이며 기관장들에게 조금이나마 겸손을 가르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고 보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도 본래 추첨제 민주주의가 아니었던가. 국제중학교 입시를 정치에서의 민주주의와 혼동해 버려선 곤란하겠지만, 어쨌든 ‘추첨’이라는 발상은 흥미로웠다. 중·고등학교 입시가 ‘뺑뺑이’로 바뀌던 무렵에도 비슷한 생각들을 했을까? ‘뺑뺑이’와 달리 요즘 국제중학교 식 추첨은 위계 자체를 해체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 소식을 듣다 보니, 추첨에 대한 반응이 그리 호의적인 건 아닌 것 같다. 3배수에 들었는데 추첨에서 떨어져 버린 학생들은 그 사실을 납득하기 훨씬 힘들어하기도 한단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차라리 수긍하겠는데, 마지막엔 운에 맡기라니, 외려 공정치 못해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어른들이 짊어지고 있는 ‘입시’와 ‘뺑뺑이’ 사이 딜레마를 10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떠맡긴 셈이니, 그걸 다 이해하는 편이 더 이상하겠다 싶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추첨’이라면 주택복권 당첨자 정하던 그 회전판이 먼저 생각난다. 0부터 9까지의 숫자가 빙빙 돌아가는 판에 화살을 쏴 숫자를 정하는 과정은, 어린 마음에도 나무랄 데 없이 공정해 보였다. 아파트 분양권을 얻고 동호수를 정할 때, 중·고등학교를 배정 할 때, 군 복무 근무지를 정할 때, ‘뺑뺑이’는 최상의 해결책이다. 성적대로, 실력대로, 하는 원칙이 미덥지 못할 때, 혹은 그 원칙이 적잖은 폐해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될 때, ‘뺑뺑이’만한 대안이 또 어디 있는가. 허나 한편, ‘뺑뺑이’만으로 질서가 구성되지 못할 것 또한 당연해 보인다. 그러니, ‘실력’과 ‘운’, ‘경쟁’과 ‘뺑뺑이’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평형을 잡기보다 우왕좌왕하기 쉬운 게 통례다. 1976년 경기고에서 중학교 배정 추첨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주간경향 1980년대 초·중반 ‘뺑뺑이’ 한복판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로선 한 반에 온갖 이질적 분자가 공존했던 그 시절이 참 다행스러웠다. 강북의 공립이었던지라 분위기는 산만했고 입시 성적은 형편없었고 뒤 몇 줄은 제법 불량스럽기도 했지만, 그 덕에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을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걸러진’ 혹은 ‘살균된’ 분위기에서 지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막상 경기 북부의 작은 아파트촌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은, 고등학생 시절만큼 확고하게 ‘뺑뺑이’를 지지하기가 힘들다. 소문만인지, 그래도 험악하다는 고개 젓는 집 근처 중학교에 아이를 보내야겠다는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다들 딴 길 찾는 대신 공교육을 탄탄하게 하는 게 정도겠지만, 추락해 버린 ‘뺑뺑이’의 세계를 피해 더 나은, 더 안전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게 비단 나만은 아닌 것 같다. 매춘여성이 국회의원 되고(「대한민국 헌법 제 1조」) 평범한 공무원이 시장 되는(「7급 공무원」) 그런 상상력은 영화 속의 ‘뺑뺑이’에서만 가능한 걸까. 입시와 뺑뺑이 사이, 선거와 추첨 사이 또 어떤 실험이 필요한 것일까.
2017-08-07 | hrights | 조회: 149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의 폭과 깊이는 어느 정도이며, 그리고 감정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이 물음을 던지게 된 것은 새벽 2시에 이르도록 진행된 MBC-TV의 <100분 토론>에서 사형제 존속이냐 아니면 사형제 폐지냐 하는 의제로 토론 하는 것을 보고 난 뒤였다. 한쪽에서는 인간이기를 아예 포기한 흉악무도한 자들은 그야말로 사형을 통해 사회에서부터 아예 제거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형제 존속뿐만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사형수들을 하루속히 사형 집행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또 사형 선고와 집행이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함부로 해하는 범죄를 예방하는 심리적인 효과가 크다고 주장했다. 다른 쪽에서는 국가가 살인을 금하면서 국가가 사형 제도를 통해 살인을 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생명권의 고귀함을 국가가 나서서 숭상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인권 국가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한다고 하고, 또 국가가 피해자 가족의 감정을 헤아려 정의를 실현해야 하지만 그 실현에서의 정의로움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형 제도보다는 절대적인 종신형 제도를 통해 가해자가 끝없이 후회하고 자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론을 시청하는 내내 나 스스로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는 듯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이유가 양쪽 모두의 주장이 분명히 대립되는 데도 전체적으로건 부분적으로건 양쪽 모두 옳은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능성과 잠재성의 방향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대립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서, 도대체 우리 인간이 그와 같이 극단적으로 나뉘는 방향으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삶을 몰아가게 되는 원인에 대해 나 자신의 논리적인 상상력을 비롯한 일체의 합리적인 사유가 무능력한 상태로 빠져 버린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에게서도 경우에 따라 살의가 알게 모르게 꿈틀거리기도 한 적이 있었음을 떠올리면서, 그런데도 내가 당당하게 그 책임을 지겠다는 결의에 의거한 살의가 아니라, 그 살의가 나도 모르게 솟구쳐 올라온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살의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죽고 싶지 않다고 하는 생존에의 근본 욕망이 자연스럽게 발동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전쟁에서의 적국 군인들에 대한 살인이나 국가의 사형 제도에 의한 살인을 흔히 합법적인 살인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기도 하거니와 인류 역사를 통해 점철되어 온 온갖 종류의 전쟁을 통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집단적인 삶이 근원적으로 배타적인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 그 배타성에 강력한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 그 폭력성에 일상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이질적 감각의 폭발성이 그 본질인 양 결합되어 있다는 것, 그 이질적 감각의 폭발의 충동에 몸을 내맡길 때 일체의 합리적인 판별력이 마비되어 파생될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거의 예측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사 어렴풋이 예측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예측되는 결과마저 이질적 감각의 폭발력에 대한 그 괴물적인 향유를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되고 만다는 것, 그런데 그런 집단적 삶의 형태가 개인에게 이관되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도 있는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조직되어 현재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 등을 생각하게 된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대다수의 인간을 생명 내지는 생존 차원에 묶어 둠으로써 유지되는 사회구성체에서는 생명 간의 충돌과 격돌이 불가피하게 된다. 한 개인의 생명이란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대체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들 간의 충돌과 격돌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전개될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절체절명의 배타성을 띤 생명과 생존의 차원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리고 그런 만큼 인간이 인간적인 동물성을 넘어서서 인간만의 이른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수준에 따라 생명과 생존이 제대로 유지되는가에 대한 기준은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다. 아울러 인간 고유의 인간적인 삶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 하는 기준이 달라지는 것 또한 물론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 고유의 인간성은 결코 배타적인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즐기면서 그 즐김의 강도와 밀도가 더욱 강화되는 대상들을 인식하고 개발하고 전승해서 심화 확대함으로써 이른바 전반적인 공향유의 세계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체제는 근본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을 가능한 한 배타적인 생존의 차원에 묶어 둠으로써 유지된다는 데 그 본질적인 특징이 있다. 그 최상 최종의 매개가 바로 돈이다. 대다수의 사람을 돈에 묶어두는 것은 바로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타적인 생존 차원 즉 인간적인 동물성의 차원에 묶어두는 것이다. 이를 넘어서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의 차원마저 인간적인 동물성을 위한 하나의 장식으로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 체제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서, 다소 역설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사형 제도에 의한 국가의 살인은 절체절명의 생명 개념을 대다수의 사람들의 뇌리 속에 심어 넣어 자본주의적인 배타적인 생존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생명 자체의 고귀함을 강조함으로써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절대적인 종신형 제도를 두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절체절명의 생명 개념과 그에 따른 배타적인 생존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왜 인간 생명이 고귀한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답변을 하게 된다. 적어도 사안이 되고 있는 사형 제도에 관련해서 볼 때, 인간 생명이 특별히 고귀한 까닭은 일체의 생명체의 생명이 고귀하기 때문은 분명히 아니다. 인간 생명의 고귀함이 일반 동물 생명의 고귀함에 비해 특별히 탁월한 까닭은 인간적인 동물성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인 생존 자체의 차원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공향유의 세계를 심화 확대해서 심지어 신성의 영역조차 안출하여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 생명이 특별히 고귀한 것은 그런 까닭에 흔히 하는 말 그대로 온 우주를 주고서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하지 않은 채 인간 생명의 맹목적인 고귀함만을 내세우게 되면 그 역시 자본주의적인 배타적인 생존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을 띠고 말 것이다. 이런 등속의 생각을 하면서 다시 묻게 된다. 한 개인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의 폭과 깊이는 어느 정도이며, 그리고 감정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배타적인 소유에 의한 감정 역시 그 폭과 깊이가 다대하고 따라서 그에 따른 감정의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고유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공향유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감정은 그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궁무진하며 그 감정의 종류도 그만큼 무궁무진할 것이다. 갑자기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아직 가보지 않은 천 개의 길이 있고, 천 개의 건강이 있다.” 배타성과 배타성에 내재된 폭력성 그리고 폭력성의 본질인 충동적인 이질적 감각의 잔인성 등으로 향한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인데도 그런 폭력적인 감각에 못지않은 강렬한 건강한 감각의 충만이 충분히 주어질 수 있음을 사회 전체적으로 예사로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51 | 추천: 1
이은규/ 일꾼 사람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퍼렇게 살아도 설워라 할 생명들이 벼랑 끝에 서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세상은 ‘살아라!’‘살아라!’합니다. 지극한 이 위로의 말들이 벼랑 끝에 서있는 생명들에겐 더욱 허기진 말로 들릴 듯합니다. 함께 살자는 ‘윤리’가 나부터 살자는 ‘탐욕’에 짓눌린 현실에서 말입니다. 새해 덕담을 형에게 건네야 할 텐데, 내가 슬픕니다... 달리 뭐라 표현할 길 없는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눈물조차 막아선 슬픔에 온 몸이 무겁고 마음은 끝도 모를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습니다. 울고 싶은데 울음이 터지질 않고 복잡다단한 지금 이 심경을 글로 풀어보자는 마음에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심사대로 토설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 또한 생기기에 전생에 척을 진 원수도 아닐 터인데 형에게 이 짐을 나누자 청합니다.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말로 대충 위로하고 더 이상 회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만히 머물면서 이 깊은 슬픔의 정체를 정면으로 응시하고자 합니다. 내가 나에게 묻습니다. “이 슬픔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존재하기 이전부터, 내가 있기 전부터 있은 아주 오래된 것이라 합니다. 태어남과 삶은 슬픔의 탄생이며 성장인 듯합니다. 그 열매는 마땅히 사랑과 평화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슬픔의 원인을 나를 둘러싼 세상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사랑과 평화는 경쟁과 탐욕에 의해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밀봉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약한 자를 탈락자로 자연 치부해버리기 일쑤이며 심지어 종교까지도 그들을 함부로 세상부적응자로 몰아세웁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소외시키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평화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세상과 사람들은 변할 수 있을까요? 눈을 감았습니다. 고단한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음이 분분히 흩어져 있습니다. 내 마음이 산산조각이 나있습니다. 그 마음들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들과 분별력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습니다. 심판하고 단죄하며 이기고 싶은 욕망에 이리저리 촉수를 뻗고 있습니다. 세상은 둘째 치고 나 자신이 이미 세상입니다. 힘도 용기도 없습니다. 어찌 해볼 요량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세상으로 뻗어있는 촉수들을 바라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그리고 화가 납니다. 인정받고 싶고 이기고 싶고 힘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처럼 희망을 미끼로 사기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쏙 빼닮아가는 것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어린아이가 보입니다. 이제 삼십육개월이 된 내 딸 민서또래의 아이입니다.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는 어린아이. 두 손으로 모래를 한 움큼 퍼 올려도 손가락사이로 모래는 빠져나갑니다. 그 빠져나가는 느낌이 생생합니다. 그 허망함이라니... 그리고 아이는 벽을 바라봅니다. 잠시 후 벽은 거대한 창공으로 변합니다. 끝도 없는 허공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슬픔에 오그라들었던 가슴이 천천히 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아...” 깊은 숨이 터져 나옵니다. 맥이 풀리듯 온몸의 긴장이 풀어집니다. 아이는 혼잣말로 묻습니다. “저 수많은 별들은 무엇일까요?” “사랑...” 어린아이에게 어둠속의 별은 사랑이라 합니다. 볼 수 있어 행복하고 편안한 사랑입니다. 또한 아이는 스스로도 별이라고 여깁니다. 아이가 보는 별들 또한 이 아이를 별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별이 별을 발견하고 별이 별을 인정하고 별이 온 천지의 어둠만큼이나 많다고 합니다. 별들의 공동체에 절로 평안해진 아이는 양팔을 뒤로 젖힌 채 다리를 뻗습니다. 편안한 자세로 마냥 바라봅니다. 하늘의 별들을. 우연스럽게도 오늘은 그리스도교에서 기념하는 주님공현대축일입니다. 별의 인도로 세 명의 동방박사가 세상의 구세주가 탄생되었음을 알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한 일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세 명의 동방박사와 그들을 인도한 별, 아기 예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존재에 대한 신원회복이 동방박사의 아기예수 경배가 아닐까 여겨지는 까닭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응시하며 그 별의 안내에 충실했던 동방박사의 꿋꿋함이 부럽습니다. 가만히 유추해봅니다. 세상의 불완전함이 그들을 하늘의 별에게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슬픔은 별을 잉태합니다. 별은 내안의 세계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 깊은 슬픔은 여인의 자궁입니다. 태초로의 귀환 혹은 최후의 발견과 같습니다. 번뇌는 여래의 종자라 하듯 슬픔은 사랑의 종자입니다. 내안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깊이 들여다보니 훤한 대낮에 별이 보입니다. 그래요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순응하지도 않겠습니다. 선동하지도 않겠습니다. 가만히 일어나는 감정들, 그것이 슬픔이거나 기쁨이거나 분노이거나간에 휩쓸리지 않는 가운데 찬찬히 살피며 한걸음 한걸음 꿋꿋하고 반듯하게 살겠습니다. 내가 사랑이 되고, 온전한 평화가 되어야겠습니다... 이를 양식으로 삼아 남아있는 생을 살겠습니다. 오늘 이 깊은 슬픔의 정체는 자기존재를 망실한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먼별의 초대장입니다. 두서없고 개요 없는 글을 인내심을 발휘해 사유해주시리라 믿으며 형에게도 먼별에서 보내온 초대장을 나눕니다. 인사가 조금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7-08-07 | hrights | 조회: 120 | 추천: 1
홍미정/ 단국대 GCC 국가연구소 연구교수 민주화를 요구하는 ‘아랍의 봄’의 결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에서 세속적 독재 정권이 붕괴되면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온건한 이슬람주의자 정당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걸프 지역 강국들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가 대상 국가에 따라 때로는 함께, 때로는 서로 다르게 이슬람을 내세운 서로 다른 정당들에게 정치 자금을 제공하면서, 수니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에 대한 경쟁이 불붙고 있다. 2012년 10월 카이로에서 출판된 주간 알 아흐람은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서로 다른 파벌들을 후원함으로써,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전환기의 아랍 세계에서 경쟁자가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카타르는 리비아 반란군을 지원했으며, 시리아 내전에서도 반란군을 지원하고, 이집트, 튀니지, 그리고 예멘에서 통치자를 몰아낸 거리 시위를 후원했다. 카타르 국영 알자지라가 국경을 넘어 시위들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독재자를 축출하는데 공헌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우디는 시리아 내전에서는 카타르와 협력하여 반란군을 지원하는 반면, 거리 민주화 시위로 위기에 몰린 요르단 왕국을 돕기 위하여 8억 달러의 기부금을 약속하고, 2012년 11월 28일 우선 2억 5천만 달러를 곧 요르단 중앙은행에 입금하기로 했다. 걸프 뉴스에 따르면, 2012년 1월 카타르 왕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싸니가 이슬람주의 파벌인 알 나흐다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혁명 기념을 축하하기 위하여 튀니지를 방문하였다. 이슬람주의자 알 나흐다당은 카타르에 기반을 둔 유스프 알 까르다위가 이끄는 국제 무슬림 형제단의 후원을 받았고, 카타르는 알 나흐다당이 튀니지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수만 달러를 지원하였다고 알려졌다. 반면, 알 나흐다 당의 라이벌인 알 아리다 차비아당의 지도자인 하치미 알 하미디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받았다. 알 아흐람에 따르면, 카타르의 영향력 확장은 이집트 정권의 붕괴이후 이집트에서도 표면화되었다. 2011년 3월, 카이라트 알 샤터(당시 무슬림 형제단의 대통령 후보)가 앞으로 무슬림 형제단과 카타르 사이의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서 며칠 동안 카타르를 방문했다. 이것은 카타르가 이집트의 민주 선거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카타르 왕 하마드는 무르시의 대통령 취임 이후, 걸프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이집트를 방문하였다. 이 때 그는 악화된 경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20억 달러를 예치하기로 무르시에게 약속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2년 5월, 10억 달러를 이집트 중앙은행에 예치했다. 이것은 이집트가 32억 달러의 IMF 차관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이집트 기획부 장관 파야자 압둘 나가는 사우디는 10억 달러 예치 이외에도, 5억 달러 개발 프로젝트, 2억 5천 달러의 석유 구입 재정 지원, 2억 달러의 중소기업 지원 등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팔레스타인 뉴스에 따르면, 카타르 왕 하마드는 2012년 10월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통치하는 가자를 방문하였다. 그는 “가자가 확고하게 존재하는 것은 전 아랍세계의 자존심이며, 전 아랍 세계와 이슬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강력하게 지지해야한다.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지지하는 이집트에게 감사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2008-2009년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파괴된 주택과 기반시설 건설비용으로 가자에 4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카타르가 적극 지원하는 보수적이고 민주적인 형태의 이슬람주의의 발흥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실패하고, 카타르가 부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웃하고 있는 두 석유 왕국들은 레반트와 북아프리카에서의 정치적 변동기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은 각 왕국의 지정학적인 이익을 증진시키고, 각 왕국의 국민들이 왕정에 대항하는 대중 봉기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카타르는 영내에서 민주적인 이슬람주의 운동을 강화하는데,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훨씬 더 열중하고 있다. 그 결과 사우디-카타르 경쟁이 아랍 지역에서 ‘이슬람 보수주의의 보루’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역할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 독재정권으로 낙인 찍고도 그 정부에 자신들의 상업용 무기를 파는 미국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최근 미국의 정책은 카타르와 무슬림 형제단 편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무 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은 튀니지의 민주주의의 출현을 열망하는 그들의 소망을 공유하며, 최근 튀니지 선거에서 승리한 알 나흐다당과 같이 부상하는 이슬람주의자 단체들과 협력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주요한 무기 판매시장 이다. 2012년 8월 26일 뉴욕 타임즈에 다르면, 2011년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판매한 무기는 아파치와 블랙 혹크 헬리콥터 수십 대를 포함하여 총 334억 달러에 달했고, 미국의 걸프 지역 무기 판매량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미국은 이란의 위협을 앞세워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동맹국들에게 주요한 무기를 판매함으로써 총 판매액이 663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전 세계 무기 시장 총액 853억 달러의 3/4 이상을 차지했고, 2010년의 총 판매액 214억 달러와 비교하여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를 차지하는 러시아의 무기판매는 48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러한 미국-사우디 군사 협력은 아랍 민주화시위로 곤경에 처한 사우디라아비아가 중동 지역 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강화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00 | 추천: 0
신하영옥/ 광명인권센터장 주변은 허탈함, 무기력, 분노가 한 편으로 출렁이고 무반응과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한 편으로 흐른다. 그러나 환희와 열광과 같은 분출은 없다. 내 주변엔...그렇다. 나는...하루한나절 분노했다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적어도 겉으론, 그리고 아직은 그렇다. 이후 어떻게 일상이 침윤 당할지는 모르겠다.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이 잠깐씩 왔다가곤 한다. ‘엄마 5년을 어떻게 기다리지?’ 라고 했던 아이는 벌써 5년이란 기다림의 끝자락에 와있고, 그만큼 커버렸다. 지금 앞으로 5년에 대해 지난번과 같이 묻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앞으로 5년은 자유와 책임이 공존하는 바쁜 5년이 될 터이고, 준비할 것이 많고 기대할 것이 많은 그런 시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선인이 누구인가보다 일상의 변화가 더 크기 때문이다. 내겐 과거는 항상 압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5년은 좀 중요하면서 그래서 어쩌면 더 길 듯하다. 40대를 지나 50대로 접어드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좀 여유롭게 다음 세대들을 위해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 희망이 보이는 기간이길 기대하는데, ‘과연?’ 이란 질문이 따라붙는다. 벌써부터 자기목숨을 던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망감에 코끝이 아리고 당선자를 대변하는 입은 막말이라는 걸레를 물고 있어 답답하다. 그래서 절망하고 어떤 가능성도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엄마가 편찮으셔서 고향엘 갔다. 동생은 개표방송을 보면서, 그 결과를 보면서 너무 분해서 울었다고 한다. 평소에 잘 울지 않는 동생이다. 정치에 그다지 관심도 없다. 엄마는 부러진 팔을 들고서 80대 노구를 이끌고 투표장으로 가셨다고 하신다. 그러나 엄마도 허망해 하신다. 술 한 잔 하면서 국민성과 투표결과에 대해 분노하는 동생에게 해 줄 말은 없었다. 아니 그런 얘기, 실은 하기가 싫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래서 달라질 수 있다면 욕은 서 말 아니라 서른 말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피곤함이 엄습한다. 어느 날 그런 피곤함에 이런 저런 검색을 하다 눈에 띈 글이다. “언제나 말했듯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이나 새로운 법률 및 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낡은 질서의 근절을 이루고 협력하여 평화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한 영웅적 행동에 착수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반복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하워든 진, 2002,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누가 누굴 탓하고 무엇 때문에 절망하는가? 그 화살은 어쩌면 각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할 일이지 않을까? 민주당은 대선패배의 원인을 스스로의 성찰과 반성에 두지 않는 듯하다. 아니, 스스로에게 두되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탓을 돌리고 있다. 그걸 반성이라고 하고 있다. 어느 민주당 인사는 ‘민주주의를 너무 말해서 졌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만 너무 강조해서, 사람들이 식상해서... 그것이 민주당의 패배에 대한 분석 결과인가 보다. 지난 12월 19일 밤 대선 패배를 인정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는 "새 정치, 새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제대로 다 하지 못해 송구스럽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럼 무엇을 말해야 했나? 무엇을 중심전략으로 대선에 임해야 했을까? ‘민생’, ‘먹고사는 문제’...라고 한다. 그것은 인권이 아닌가? 민생과 먹고사는 문제, 돈벌이를 인권의 관점이 아닌 ‘개발’, ‘경제총량’ 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한 해결책은 없다. 더 이상 경제력이 총량에서 발전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자본주의에서 총량의 증가와 그 결과는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1%를 말한다. 나머지 99%는 그러한 이득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민생은 인권의 문제이다. 생존권이라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기본권으로서의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절차를 말한다. 그런데 민생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인권담론이 작동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민주주의와 인권을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강조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그 민주주의를 자기들만이 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자기들만이 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패배가 비롯된 것이다. 좀 더 국민들의 삶을 쪼개고 쪼개어 살폈어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가 국민들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경제적 비민주화가 각 국민들의 삶에서 어떤 질곡으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안들을 내왔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다만 거대담론으로서의 혹은 당위로서의 민주주의를 외쳐대기만 했을 뿐이었다. 국민들의 삶과 동떨어진 구호로 여기게 만들었을 뿐이다. 당위로 권력을 획득,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국민들의 인식은 낙후되지 않았다. 그들만 그걸 모르고 있나보다. 결국 국민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국민이 이미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이틀 전 인권기본계획수립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인권을 한물 간 개뼈다귀쯤으로 여기던 사람들의 인식이 좀 변했음을 느낀다. 기본계획을 잘 내와야 한다는 말도 한다. 인권이 이렇게 폭 넓은 거냐는 얘기도 한다. 그럼에도 민생과 인권은 별개라고 한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더 여유가 생긴다. 결국 버티고 틈새를 확장하고 한 번에 한 가지씩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활동과 사업을 하다보면, 그 틈새가 결국은 공간을 점유하면서도 새롭게 구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대통령이나 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람들이다. 인식의 변화로부터 생활의 변화가 곧 변혁이다. 그 한 사람들이 결국은 한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된다. 절망은 없다. 그저 조금씩 살아내고 그 살아감을 변화시키는 길이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습관, 집단의 습관, 사회의 습관을 바꾸는 길. 대선패배에 대한 분석에 연연하기에 앞서 자신과 자기 집단의 습관을 살펴보는 것이 더 필요하다. 민주당은 절망할 주제도 안 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21 | 추천: 0
이광조/ CBS PD 1986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그 때 대학 2학년이었다. 성북구 보문동의 하숙집으로 어느 날 밤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나를 잡으러 온 건 아니었고 당시 전국적인 학생운동 조직의 위원장이 된 학교 선배의 거처를 캐기 위해 날 찾아온 거였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새파랗게 질렸고 나도 겉으론 태연한 척 했지만 무척 겁먹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 찾아온 사람들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왔다고 했고 그 다음 날 성북서 강력반 형사들이 찾아왔다. 서로 자기들이 잡으면 잘 해주겠다며 협조를 부탁했다. 뭐 말이 좋아 협조지 그들의 눈빛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널 잡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듯했다. 두 팀이 다녀간 뒤 그가 찾아왔다. 이름은 모르지만 그는 안기부에서 왔다고 했다. 앞서 찾아왔던 두 팀 보다는 옷차림도 말쑥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그는 내게 선배와의 관계며 학교생활 등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중에 안기부에 취직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스카웃 제의였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대학등록금 일체와 아파트 한 채, 승용차 한 대, 그리고 만에 하나 세상이 바뀌면 신분 세탁을 확실히 해준다는 거였다. 신분세탁이라, 긴장 속에서도 속으로 웃음이 났다. 자기들도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나보지. 그가 또 오겠다며 돌아간 그날 밤, 나는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리어카를 한 대 빌려 짐을 싣고는 미아리 고개를 넘어 신이문역 근처에 있는 친구 자취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말이 좋아 스카웃 제안이지 그는 내게 학원 프락치 역할을 제안한 거였다. 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파트와 승용차를 줬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게 해서 안기부에 들어가는 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워낙 학생들이 기피하던 직장이라 갖가지 특전을 달아서 학생들에게 구애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졸업을 앞둔 선배 중에 누가 안기부에 간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면 그 선배는 학교에서 얼굴을 제대로 못 들고 다녔다. 그 즈음에 학교 후배 하나가 안기부 조사실에 끌려갔다 나왔다. 이삼일 있다 나온 것 같은데, 난 그 때 그 후배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야생마처럼 혈기가 왕성했던 후배가 흡사 겁먹은 강아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후배가 나중에 들려준 이야기는 사방이 온통 붉은 조사실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왜 안 그랬겠는가. 그들이 아무리 점잖게 대하더라도 안기부 조사실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공포였을 거다. 그곳에 끌려가면 사람대접을 받느냐 짐승취급을 받느냐는 오직 그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들이 완력을 써서라도 뭔가를 캐내야겠다고 판단한다면 몸과 마음이 성한 상태로 나오긴 힘들 것이다. 그 때 그가 내게 취업을 제안하는 대신 날 잡아가 족칠 생각을 했으면 난 어떻게 됐을까.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그 다음 해인 1987년 1월 서울대 박종철 학생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80년대와 90년대, 안기부의 이미지는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에 묘사된 취조실의 이미지와 겹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취조실이 안기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붉은 방’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고 고문과 공포로 결국 사람을 굴복시키고 망가뜨리는 곳, 정당성 없는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음습하게 운영하던 정권안보의 심장과 같은 곳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악명 높던 안기부의 이미지도 많이 변했다. 이름도 국정원으로 바뀌었고 꽤 인기 있는 직장이 됐다고 들었다. 드라마 속에 멋진 국정원 직원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국정원에 다시 옛 안기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민간인 사찰, 국정원장의 정치적 행보 등 각종 논란이 끊이지 않더니 대선을 앞두고는 급기야 국민을 상대로 한 심리전 의혹까지 불거졌다. 국가안보를 지키는 게 아니라 특정 정치권력을 위해 절반에 가까운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심리전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활동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국정원의 존재근거 자체를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대선 결과에 관계없이 반드시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별개로 이런 의혹이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퇴행이다. 더구나 전직 국정원 직원들의 양심선언까지 나오고 있지 않은가.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국정원이 과거의 음습한 이미지를 씻어내고 이 정도의 위상을 누릴 수 있는 건 ‘중앙정보부-안기부’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민주화를 이뤄낸 국민 덕이다. 국정원에서 일하는 게 부끄럽지 않고 신분 세탁이 필요하지 않도록 만들어준 국민들을 배신하고 다시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건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 안기부의 모토는 국민의 불신에 대한 자기 정당화로 들렸던 게 사실이다. 지금 국정원의 모토는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이다. 세상이 좋아지면 신분세탁이 필요한 음습한 조직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거듭 나야 했던 이유를 되새기기 바란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67 | 추천: 0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심지어 기득권을 상징하는 새누리당까지도 소위 ‘좌파’적 수사를 남발할 정도로 넘쳐났던 각종 진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 논의와 논쟁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대선 후보 인물 중심의 보도에 의해 묻히거나 사라져 버렸다. 소위 ‘안철수 현상’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여러 정치·경제 논쟁들 역시 그의 사퇴로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이렇게 논의들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위 ‘정권 교체론’으로 고착화된 데에는 이번 정권 하에서 기초적인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크게 후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의 급진적 좌파들을 제외한다면, 1987년 소위 ‘민주화’ 이후, 많은 사람들은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되었다고 판단하고, 소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점차 서구식 ‘보수 대 진보’로 정치 구도가 바뀔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지난 1997년에는 불완전하게나마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야당으로의 진정한 정권 교체가 일어난 바 있었으며, 10 여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보수 정권으로의 교체가 일어나 마치 민주주의 정치 질서가 확립되어 가는 것으로 착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서구식 모델에 익숙한 식자들의 관념적 논의에 불과하다. 정치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동시에 실천해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서구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 여전히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서구에서와 같은 합리적 보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서구에서조차 보수 세력이란 각종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이지만, 단지 여러 가지 제도로 그러한 탐욕을 조금 제어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같은 비중심부 국가들에서 ‘보수’와 ‘진보’의 선거를 통한 정책 대결에 대해 대중의 검증과정에 의해 권력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는 선거 정치는 많은 부분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당 권력의 교체와 상관없이 유지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기득권 세력들의 권력이다. 즉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 권력은 물론, 그 동안 간과해 왔던 각종 관료 권력, 언론 권력, 사법 권력, 그리고 이들과 학연과 지연 등으로 얽혀있는 수많은 사회 내 기득권 세력, 심지어는 범죄 집단 등 수많은 이 땅의 지배 카르텔은 그 어떤 진보적인 정당으로의 정권 교체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이 땅의 실질적 권력체다. 그러나 비판적인 지식인들조차 이러한 현상에 무관심하다 보니, 정당 중심적 정치 변동 논의에 집중하면서 사회 변동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지배 카르텔은 보수적 정권 하에서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그 결과 지난 5년간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커녕 피로 얻어 낸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크게 후퇴하였다. 이 정권 하에서 도저히 몇 문장으로 정리해서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후퇴와 퇴행, 그리고 파괴가 일어났다. 그리고 누구나 다 소위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외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민영화 계획, 노동과 복지에 대한 공격, 재벌 봐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그나마 비정규직이나 투기자본, 사회 양극화, 재벌 문제 등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시민 사회 내에서 관심도 높아지고 있고, 따라서 해결을 위한 논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이에 비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악화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공격 훨씬 이전부터 구조화되었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몇몇 문제들은 철저하게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제들은 이번 정권을 거치며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종교권력, 언론권력, 사법권력, 사학권력 등 수많은 ‘권력’들이 사회 곳곳의 기득권 세력들과 긴밀하게 맞물려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를 압박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은폐되어 있는 몇 가지 문제를 들어 보자.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때 한 시민이 투표를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먼저, 몇몇 고대 출신들이 일부 고위 공직에 전면으로 배치되면서, 이들에 대한 비판이 집중되면서 정작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 서열 체제, 그리고 이러한 서열에 의한 지배 구조가 철저하게 은폐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모종의 사회안전망 역할까지 하고 있는 학벌 중심 위계질서가 타파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교육 개혁, 사교육 철폐, 학교 폭력 타파, 그리고 나아가 복지 국가 건설도 불가능하다. 또 다른 문제는 지배 엘리트들의 놀라운 수준의 군대 면제율로 인해 하루라도 빨리 타파되어야 할 남성 중심적 군사 문화적 잔재들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군대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나라에 바쳤건만, 그러한 의무를 지지 않은 일부 지배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은 엉뚱하게도 군대를 갔다 와야만 제대로 된 남성, 나아가 발언권 있는 시민의 자격이 있다는 퇴행적인 생각들이 더욱 강화되면서 그러한 의무를 질 수 없는 장애인이나 이주민,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불만으로 변질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이주민·다문화 정책, 그리고 여성정책으로 인해 빈곤과 불평등한 상황에 놓인 대중의 불만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다. 저임금 노동력 이용과 성차별적 고용 정책의 유지는 자본은 물론, 정당 정치 위에 군림하는, 그리고 학벌 등으로 얽혀 있는 보수 지배 세력의 이익을 반영하는 국가의 전략이자 기획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의 결과로 치열해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과 이탈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세계에서도 가장 심각한 수준의 차별과 불평등 지수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이주민들과 여성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은 마치 사회의 전 분야를 다루고 있고, 각각의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민감한 부분들에는 매우 소극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문제들은 서로 얽혀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의 철저한 해결 없이는 그 어떤 거창한 경제민주화 논의도 복지국가건설 논의도 허상일 뿐이다.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의제들, 서구 사회에 기반한 서구식 거대 담론 외에도 한국에서의 특수한 의제에 대해 논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41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생지(生之), 축지(畜之), 생이불유(生而不有). “낳고 기르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요즘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노자의 말이다. 천지는 만물을 낳고 기르지만 소유하지 않는데, 우리네 인간은 자기 힘이 들어간 것은 모두 소유하려고 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은 하되 소유할 수는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내 뜻대로 해주길 바라는 욕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노자의 명언을 애써 되뇌며 마음공부를 한다. 시야를 넓혀 우리나라를 보면 소유욕이 불러온 비극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위정자들이 눈에 띈다. 마치 나라가 자기 것인 양 분탕질을 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에 헌법을 고쳐 제멋대로 권력을 쥐고 흔든 적이 얼마나 많았나. 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국부의 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를 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로 몰락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스스로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는 것으로 민정이양 약속을 지키는 꼼수를 쓰면서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고, 이어 삼선개헌, 유신개헌으로 초절정독재를 구가하였다. 마치 대한민국이 정희민국인 것처럼 말이다. 전두환은 12.12라는 “위대한 구국의 결단”으로 정권을 잡아 군사정권을 연장하였다. 모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일념 아래 국가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디 이들 뿐이랴. 단일화라는 국민의 열망을 뒤로한 채 나아니면 안된다고 고집부리다 김영삼, 김대중은 1987년 정권교체 절호의 기회를 날리고 대권을 노태우에게 넘겼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이번 대선도 어쩌면 야권이 이와 비슷한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단일화를 약속했고 결국 문재인으로 야권후보 단일화가 되긴 했지만, 토론, 여론조사를 둘러 싼 양측의 신경전, 안철수의 출마포기 선언 등 단일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누가 보기에도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서로 양보하기를 바라면서 질질 끌다가 지지자들의 가슴만 졸이고 실망감만 키웠다. 모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당 후보이기에 자신의 거취를 사사로이 결정하지 못한다면서 일방적 양보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당 후보니 당 후보 아닌 안철수가 결단해 달라’는 이야기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말이다. 국민이 원하는 단일화를 한다면서도 단일화를 열망하는 야권지지 국민보다 당과 당원이 먼저다. 안철수의 모습도 보기에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국민 여러분, 이제 단일 후보는 문재인 후보입니다. 그러니 단일화 과정의 모든 불협화음에 대해서 저를 꾸짖어주시고 문 후보께는 성원을 보내주십시오”라는 안철수의 성명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말이 효과를 반감한다. “비록 새 정치의 꿈은 잠시 미루어지겠지만 저 안철수는 진심으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를 갈망합니다.” 몇 번을 곱씹어 보아도 문재인이 새 정치를 못할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렇다고 여권 후보인 박근혜는 더 나을까. 나는 김성주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이 “박 후보는 미혼의 몸으로 국가의 일을 책임졌고 국가와 결혼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 말을 듣고 섬뜩했다. 미혼이라 육아와 같은 기혼자의 삶에 대해 모른다고 한 야당의 공격에 맞서면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박 후보의 부친을 생각하면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이 그냥 애국적인 말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정권유지를 위해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인권탄압을 자행한 아버지로부터 국가관을 배웠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국가 사랑을 넘어서 소유욕을 부릴까 무섭다.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가는 내 것이니까 나만 바라보고 나에게는 좋은 말만 하라고 강요할까 두렵다. 나에게 나쁜 말하는 사람은 반국가적 범죄를 짓는 매국노라고 일방적으로 몰아 부칠까 무섭다. 그래서 국민에게 봉사할 마지막 기회라는 박근혜의 말이 가슴에 잘 와 닿지 않는다. 국민이 국가의 다른 말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헌하자고 할 때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하더니 막상 지금은 개헌하자고 하는 모습과 겹쳐 신뢰하기가 참 아리송하다. 중동의 독재자들도 알고 보면 모두 국가에 대한 사랑이 넘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대단한 애국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비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국가에 대한 공격, 즉 반국가범죄로 간주하였다. 나는 애국심이 넘치는 지도자들이 그래서 무섭다. 그들에게 국가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사는 나라다. 그러니 반대자들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기나 했을까? 그러니 그런 나라에 인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후진적인 중동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르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아니 솔직히 우리나라가 그런 비민주국가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나라라는 말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현실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말을 하면 “꼴통”, “빨갱이”라는 경멸어가 튀어나오는 현실이 두려워 모두들 입을 꾹 다무는 나라가 대한민국 아닌가. 그러다보니 모두 알아서들 심각하게 자기검열을 한다. 그러다보니 다들 알아서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생각은 괄호 안에 꼭꼭 담아 둔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렇게 비판정신이 죽은 나라에서 창의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창의력이 없는 나라는 베끼기는 잘해도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세계를 이끌 수는 없다. 무바라크, 아사드를 보고 비판하기 전에 우리 과거를 먼저 돌아보자. 경제발전이 지도자만의 위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 때문에 그들의 폭압적 인권탄압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용인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보자.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만 있다면 인권 같은 것은 잠시 없어도 좋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라면 지도자들이 국가를 개인소유로 여길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그런 나라가 아니길 바란다. 12월 19일 우리가 뽑을 새로운 대통령은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살 냄새 나는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국가를 사랑하지 않고 국민을 존경하는 사람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데아를 쫓는 스토커는 정말 무서우니까. 그동안 그런 지도자는 많아도 정말 너~~~무 많았으니까! 그리고 존경하는 국민이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이길 바란다. 국민을 빙자해서 사사건건 ‘뻘짓’하는 지도자를 이제는 정말이지 그만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도덕경 10장. 오강남 역, 현암사).
2017-08-07 | hrights | 조회: 23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