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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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지슬’이라는 독립영화가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오랜만에 보는 흑백영화인 지슬은 제주 4·3문제를 다룬 것으로 전쟁이나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는 순박한 제주사람들의 희생을 기리는 신원(伸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어둠 속에 비쳐지는 한라산의 묵직한 모습만큼이나 영화를 본 뒤끝의 가슴이 먹먹하다. 광기어린 국가나 권력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제주도민뿐만이 아니라 그 와중에 스러져간 젊은 군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양측의 원혼과 아픔을 어루만지려 한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거창과 노근리의 양민학살, 여수, 순천에서의 반란진압, 전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사건 등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에 까닭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막대한 민간인의 피해이고, 이들에 대한 국가나 권력을 등에 업은 집단적인 공격이 인류역사에서 가장 크고 반인도적인 범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북한의 핵실험으로 촉발된 한반도의 긴장은 갈수록 높아져 북한은 마침내 지금이 ‘전시상태’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질세라 남쪽에서는 연일 미국의 최첨단 무기가 하늘과 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인다. 북한의 객관적인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이고, 따라서 만에 하나 전쟁을 개시한다면 미국의 이라크 전쟁만큼이나 빠르게 아니면 그보다 더욱 처참하게 북한이 붕괴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라 해도, 이런 식의 군사적 긴장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새로 취임한 교황이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의 첫 대상으로 한반도를 가리켜 지목을 했을까. 분명한 것은 한반도가 핵을 포함한 새로운 군사무기들의 실험장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점이다. 북한의 주민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또다시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전화(戰禍)의 희생물이 될 수는 없다. 북한의 정권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쪽이나 미국의 당국자도 혹여, 털끝만큼이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을 상정한 북한 붕괴의 시나리오를 계획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군부나 권력층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일반 백성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 사진 출처 - 씨네21   4·3의 65주년이 다가온다. 전쟁의 상처는 반세기가 훌쩍 지나도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우리 대통령은 4·3 기념식에도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 반대로 가능한 북한의 어떤 도발에도 즉각적이고 단호한 대처를 군부에 주문했다. 국가안보가 엄청나게 중요한 가치이고, 북한에 양보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이념이나 체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힘들고 깊은 역사적 갈등을 풀 수 있는 힘은 지금 남쪽, 대한민국에 있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국력이 북한의 그것보다 월등히 앞서고 있으며, 경제와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립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나아가 생존하기 위해 핵무장도 마다하지 않는 북한에게 따스한 지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최적의 당사자는 바로 우리, 남한이 아닌가. ‘지슬’에서 기억나는 대사. 일제 강점기도 살아서 버텼다며 산으로 도피할 것을 거부한 한 할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한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어머니도 빨갱이들에게 살해당했어. 나는 빨갱이가 싫어.” 한편, 영화는 마지막에서 동굴에 도피한 임산부가 출산한 새로운 생명의 울음소리를 보여준다. 아마도 삶은 계속되고,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인 듯한데,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원한은 끝내야 한다. 이 당대에 끝내지 못한다면, 적어도 지금의 젊은이들, 어린이들에게 이를 물려주어서는 안된다. 북한이 그렇게 철천지 원수라고, 빨갱이와는 같은 하늘아래 살 수 없다고, 전쟁을 불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들에게는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고 부르짖는 뿌리 깊은 증오심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그 적대감에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증오는 증오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자극하여 결국은 모두가 공멸하는 길로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북한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우리가 원하는 개방을 강요하는 정책이 낳은 결과를 우리는 지난 정권에서 잘 보았다. 북한은 강하게 반발하고, 결국 핵무장으로 나아갔다. 지난 정부와는 다르다며 한반도의 신뢰 프로세스를 들고 나온 새 정부. 신중하고 또 신중한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둘리거나 극우파의 주장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또다시 한반도의 위기, 시간낭비는 물론 아까운 젊은이들의 희생과 대한민국의 북한의 국력쇠퇴라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17 | 추천: 0
위문숙/ 서울DPI 회장 글과 그리 친하게 지내오지도 못한 제게 칼럼에 대한 문의는 참으로 고통스런 고민이었습니다. 전부터 자주 방문하며 공부도 하고 고민거리도 얻어가는 훌륭한 단체(사이트)여서 더 그랬습니다. 그러나, 장애운동이라는 영역이 사회운동 안에서 온전히 함께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교감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의 마음으로 건방을 떨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도 떨리고 무섭습니다. 때로는 말보다도 글이 더 폭력적일수도, 더 무식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장애운동을 접하고 시작한 86년(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은, ‘장애운동’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말하기도 어색한 시절이었습니다. 장애인인 모든 이유가 개인 혹은 가족의 탓으로 규정짓던 때여서 이 모든 것이 ‘사회구조적 모순’때문이라는 작은 울림터의 외침은 획기적이고 두 눈을 부릅뜨게는 만들었지만 부문운동으로 인정받거나 하물며 존중받기에는 많은 상황이 무리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장애’라는 단어 때문이기 보다 운동의 총 깃발이 ‘전 세계 노동자가 단결해야 할 과업을 안고 있었던 ‘노동’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함께 했던 장애계 동지들 중에 노동자는 없었습니다. 장애인의 대학 입학 거부가 만연하고, 노동의 기회조차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의료 관련된 문건을 제외하고 장애인의 삶이나 문제 따위에 대한 논문 한편 없던 척박한 이론의 부재, 존재의 부재였던 시절입니다. 미국의 장애운동은 여성운동과 흑인운동의 영향을 받아 공민권운동으로 발전하고 진행되어 왔고, 일본역시 사회운동의 분위기아래 중증중심의 거친 운동으로 많은 영향과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한국의 경우,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가 노동운동의 이념과 실천의 기둥이었다면, 장애운동의 시발에는 (물론 사회운동의 분위기와 이념이 더욱 우선되게 영향을 미쳤지만) 故김순석 열사의 유서가 장애운동의 처절함을 잘 대변해줍니다.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어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또 우리는 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지나는 행인의 허리춤을 붙잡고 도움을 호소해야만 합니까...” 그리고 이어진 구호는 ‘장애인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였습니다. 이 얼마나 허망한 외침입니까. 장애인은 인간이 아니라니.. 학교가 있어도 다니지 못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못하고, 버스가 다녀도 태워주질 않고, 식당엘 가도 걸인 취급이 일쑤니 보통의 ‘사람’이랄 수가 없기도 없었습니다. 김순석 열사의 자결 소식이 실린 당시 신문. 사진 출처 - 비마이너 현재, 국내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존재하고, UN 장애인권리협약이 시행되고 있다고는 하나 장애인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중의 약자, 무능한 부류의 집단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장애인권리협약이 비준될 당시 유명한 발언이 있습니다. ‘.. 전 인류는 오래토록 외면해 오던 장애인의 인권을 가장 최후에야 결의했다. (중략) 장애인의 인권은 이 인류가 책임져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인류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주제인) 최후의 협약이 될 것이다....’ 비록 주먹구구식이고, 세련된 투쟁도 아니고, 무장된 논리가 부족하다 해도, 장애인운동은 계속됩니다. 장애, 그리고 장애인. 이 존재의 무거움이 또 다른 새로움과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믿고 있는 한...
2017-08-07 | hrights | 조회: 153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지난 대선의 판도를 확실하게 정돈해 버린 사안 중 하나가 50대의 투표율이 82%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중론으로서의 해설은 그들의 삶의 지향에서 생존이야말로 절체절명의 과제였고, 그 과제에 대한 본능이 정치의식으로 표출되어 개혁보다는 안정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이었다. 개혁은 그렇잖아도 먹고 살기 힘든 데 불안정한 요인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고, 기존의 정치사회적인 틀에 가까운 정치세력이 그나마 돌발변수를 줄이는 쪽이 아니겠는가 하는 그들 50대의 판단이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도대체 그럴 수 있느냐? 대학시절 적어도 민주화를 향한 바람으로 여러모로 정의 운운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투쟁을 한 세대가 바로 50대가 아닌가, 그런데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서 한탄의 염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1997년 이른바 IMF 시절 30대 후반 내지는 40대 초반 언저리라 바로 위 세대들이 쫓겨남으로써 오히려 반사이익을 본 세대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지금의 50대가 기회주의적인 속성에 물든 것 아닌가 하는 뜨악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3월 19일자 한겨레신문에 사회진단을 위한 설문 조사의 결과를 바탕으로 “10대 청소년들, 기성세대보다 돈 · 권력 중요시”라는 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만연한 듯 한 학원폭력이 떠오르면서 불길한 예언이 실현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그렇구나! 저런!’ 마음이 솟아올랐다. 어쩌면 그렇거니 하면서 넘길 수도 있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내용이다.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의식을 가진 10대의 세대가 앞으로 이 사회의 주역이 될 때 과연 이 사회는 어떤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은 세상이 될 것인가 하는 예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 지경이 되고만 오늘날 한국 사회라는 삶의 현장이 그야말로 ‘레 미제라블’, 참혹한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 세대 사고 및 행동양식 비교연구(클릭하시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철학자 하버마스는 사회가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생활세계는 이해지향적인 합리성에 의거한 언어적인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바 사회의 바탕이고, 체계는 화폐를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시장과 권력을 소통의 수단으로 삼는 국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코 그렇게 되면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 화폐와 권력을 소통수단으로 하는 체계가 언어를 소통수단으로 사는 생활세계를 볼모로 삼아 이른바 식민화해서 포섭 · 지배한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정의롭지는 못할지라도 가장 순수해야 할 10대의 청소년들이 그 어떤 세대보다 돈과 권력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이러한 통계수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젊은 세대일수록 이웃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설문 통계의 진단을 곁들이고 있는 이 보도를 과연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소 거칠게 뭉뚱그려 말하면, 10대의 청소년들은 50대의 자녀들이다. 대거 투표장에 나타나 대선의 판도를 뒤흔들어 오늘날의 박근혜 정권을 창출한 이들의 자녀들이 바로 이른바 돈과 권력을 선호하는 10대의 청소년들이다. 이를 그저 오비이락의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어른을 보고 배우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얼마 있지 않아 또 투표권을 행사할 것이다. 돈과 권력에 더욱 ‘찌든’ 인간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한다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대다수의 국민들이 정당도 믿지 않고 국회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정당이나 국회 역시 돈과 권력에 찌든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안철수 신드름’으로 드러나는 기묘한 정치적인 현상도 그 기반이 결코 탄탄하지 않다. ‘안철수 세력’이 돈과 권력을 넘어선 근본적인 삶의 가치를 정치적인 대안으로서 정확하게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돈과 권력에 ‘찌든’ 상태의 삶을 옹호하면서도 그러한 삶을 혐오 · 비판하는 분열증적인 정치의식을 지닌 다수의 바람을 충족시킬 것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돈과 권력이라는 삶의 좌표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그에 따른 힘을 ‘정당하게’ 형성 · 발휘하리라는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리라. 사회구조적인 원칙상 돈과 권력을 정당하게 형성 · 발휘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자칫 ‘정당한 돈과 권력’이라는 어구는 오히려 돈과 권력에 대한 알리바이 역할을 하기 십상이다. 레 미제라블, 우리의 삶 자체를 저 깊은 바탕에서부터 아예 도망갈 길이 없을 정도로 결정해버리는 돈과 권력, 암수동체적인 이 위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는 이 참담한 현실을 그 어떤 정치사회 세력이 실효적으로 바꾸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최근 새롭게 들어선 박근혜 정부의 요직을 담당한 인물들에 대한 청문회 내지는 언론의 평가에서 그야말로 상식적인 수준의 기준에서 보아 흠결이 없는 인물을 찾을 수가 없다는 이 참담한 현실을 그 어떤 세력이 철퇴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단단한 덮개 내려치는 망치, 그들도 그러했으리라.” 왜 역사를 되새길 수밖에 없는가? 죽어도 그건 인생이 아니라고, 도대체 인생을 연거푸 다시 산다 해도 결코 그건 아니라는 혁명적인 각오와 실천이 곧 역사의 원동력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통해 현실의 삶을 성찰하면서 돌파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 아닌가. ‘힐링’이라는 용어가 우리 한국사회의 등뼈를 후려치고 있다. 다들 비틀어지고 파열되고 그런데도 주어진 삶을 최대한 기회주의적으로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그 절망, 우리 모두 그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사실이지 정치적인 권력이나 경제적인 부의 위력에서 ‘힐링’의 비책을 기대하는 자는 단 한 사람이라도 없는 것 같다. 정치를 담당한 자들 그리고 사회의 부를 좌지우지하는 배부른 자들이야말로 맨 먼저 ‘힐링’을 필요로 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기실 우리 모두를 ‘힐링’이 필요한 자들로 비틀어 놓은 자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인식이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기분 좋다고 쇠고기 사 먹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몰아 부친 자들은 과연 누구이며, 그 역사적인 출발과 고리는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살기 마련이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은 도대체 그 어떤 다른 사람도 대신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사건이다. 인민들의 인생도 그러하지만 돈과 권력으로 지체 높은 ‘양반들’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어떡할 것인가? 돈과 권력으로 도배질 되어버린 이 땅의 인생의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돈과 권력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기만 하다면 그 인생은 성공적이지 않겠는가 하고서 자위하고자 하는가? 그러면 그 자식들마저 돈과 권력을 그 자식의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기만 하면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가르칠 것인가? 우리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런 것 아니냐고 엉터리없는 핑계를 대고 싶겠지만, 말한 것처럼 각자의 인생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는 절대적인 사건이다. 미치도록 안타까운 것이 바로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긴급하게는 특히 대통령직을 맡은 박근혜 씨가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고, 그녀의 권한에 의해 장관직을 비롯해 여러 공공기관의 수장 직을 맡아 공공의 권한을 담당하게 되는 자들이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고, 저 바탕에서는 대학교육을 비롯한 고등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총장과 교장들이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제발이지 공공적인 직위에 따라 주어진 법적인 권한을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이라고 오인하지 말기 바란다. 덧붙이자면, 세습해서 가진 부 또는 사회구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기회 활용의 능력에 따라 획득하게 된 부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이라고 오인하지 말기 바란다. 당신들이 우리의 순수하기 이를 데 없어야 하는 청소년들을 “돈과 권력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든 장본인들임을 대오각성, 불면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돈과 권력의 위세’가 ‘세계 자살률 1위’라는 진단과 과연 무관하겠는가. 이 절체절명의 진단을 받고서도 어떻게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단 말인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149 | 추천: 0
이은규/ 인권연대 '숨' 일꾼   사랑이 제일 어렵다. 사람의 머리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서지고 부서져 고운 뼛가루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라야 사랑이 맺힐까? 사랑은 사람이 아니고사람은 사랑이 아니다.사람이 사랑을 생각하니 어렵다. 사람이 사랑을 하려니 어렵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그저 사랑이고 싶다. 사랑은 온천지에 가득하나붙잡을 일 아득하다. 사랑이 말한다. 애쓰지 말라고사랑은 절로 이루어진다고... 나는여전히 사람인가보다. 부서질게 한참이나 많은 고약한. 지난겨울을 보내며 이런 저런 생각들로 몸조차 편치 않을 때 쓴 마음의 단상입니다. 당시 제 상황과 심정을 찬찬히 되짚어 보니 사람인 내가 정말 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인지라 관계에서 오는 불협화음에 꽤나 마음이 상해있었습니다. 흔히 이렇게들 표현하고는 합니다만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 그 느낌에 마음이 얼얼했습니다. 더욱이 존중과 배려를 통한 교감과 소통을 이야기하던 사람에게서 느꼈던 감정인지라 꽤나 힘들었습니다. 처음엔 큰 실망감에 화가 났었습니다. 그 사람이 왜 나를 함부로 대하는 지 묻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을 거듭하며 겨우 마음 끝을 붙잡아 퍼 올린 단상이었습니다. 사랑이 참 어렵습니다. 나이 들수록 점점 더 어려워요.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꼭 지켜야 할 새 계명이 되어야 했는지를 상처를 줄 만큼 주고, 받을 만큼 받은 이 나이쯤 돼서야 알 듯 합니다. 자기애를 전제로 한 사랑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애 없는 사랑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귀하겠지요. 존경하는 성인들이 삶을 통해 행한 사랑은 더욱 빛나 보입니다. 성인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네 삶속에서 성인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대접을 받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겠지요. 허나 유행처럼 번지는 말랑말랑한 힐링의 열풍이 너무나 가벼워 일회용 반창고만도 못한 위로가 유통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또한 지울 수 없습니다. 영성도 유통하고 소비하는 사회... 얼마 전 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영화답게 곳곳에 눈물폭탄을 위한 많은 장치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한결 같은 딸 바보 용구는 장애에 가난에 억울한 처지에서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비범한 사랑을 한 주인공입니다. 영화가 주는 감동에 관객들은 깊이 공감한 것 같습니다. 괜히 천만관객이 몰렸을 리 없겠지요.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편했습니다. 장애와 가난에 대한 편견이 주인공을 살인자로 의심 없이 유죄추정하고, 억울한 처지에 대한 ‘자멸적 침묵’, 물론 이 침묵은 딸의 안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만 결국 자신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합니다.(이 영화를 두고 경찰 일부에서 억울한 심정이 든다고 표현했다 합니다. 불편한 지점에서 새로이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판타지인 영화의 속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기대어 우리들을 둘러싼 삶의 처지가 나아질 수 있을까를 두고 생각합니다.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영화의 감동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자판기처럼 돈만 넣으면 나오는 감동과 눈물이 아니기를... 사진 출처 - 씨네21   동정과 연민에 대해 생각합니다. 동정과 연민은 한 끗 차이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동정과 아무나 할 수 없는 연민의 경계에서 우리의 일상은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타인과의 연대는 연민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지요. 기실 타인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사랑은 수줍게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하나인 나와 타인. 다르지만 나는 나가 아니고 너는 너가 아니고 우리. 그래요... 우리가 결국 나임을 느낄 때 동정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동정이 무가치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허나 때때로 동정에 그친 채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자만하는 모습들이 위선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우르르 극장 문을 나서는 각각의 사람들에게서 처연한 소외를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없습니다. 감정의 소비와 생산 그 어디쯤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는 지점입니다. 온전히 나를 해방하여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말씀은 귓등으로 흘려보냅니다. 사랑, 참 어렵습니다. 나를 둘러싼 갖가지 장치들을 스스로 해방하지 않는 이상 머리카락조차 볼 수 없는 사랑. 사랑의 구호가 무한정 생산되고 있는 세상 한 복판에서 사랑타령을 하는 아이러니라니. 나를 아프게 한 나여, 우리여, 그래도 사랑합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31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GCC국가 연구소 연구교수   2013년 3월 1일 사우디 경찰은 사우디아라비아 중앙(나즈드)에 위치한 까심 지역에서 보안 사범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는 시위대 여성 15명을 포함하여 176명을 체포하였다. 까심 지역은 사우디 정치와 종교 영역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가장 보수적인 와하비-살라피들의 보루이며, 2012년에도 이 지역에서 시위가 계속 발생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이후 전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온 시아파가 밀집한 동부 지역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중앙에 있는 나즈드 지역과 걸프 연안에 있는 동부 지역은 지역 간 정치․종교 문화들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나즈드 출신들은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설하는 중추 세력이었고 현재까지 정치를 좌우하는 세력이다. 반면, 사우디 유전 대부분이 위치한 동부 출신들은 사우디왕국 건설과정에서 정복당한 사람들이며, 사우디의 주요 정치 영역에서는 거의 배제된 상태다. 그런데 2011년 2월 이후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들이 정치, 종교적인 상황이 전혀 다른 두 지역에서 동시에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은 변화를 원하는 정부 반대파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를 가늠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인터넷 사용자들은 A-Z까지 모든 사람이 변화를 원한다면, 현재 제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감된 활동가의 사진을 든 사우디 여성들이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이란의 프레스TV 인권 단체들의 주장에 따르면, 수천 명의 사우디 주민들이 ‘안보위협’이라는 이름으로 구금되어 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재판 없이 장기간 투옥되어 있고, 일부 사람들은 단지 정치 변화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있다. 그러나 사우디 당국은 정치범들을 수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수감된 사람들은 모두 이슬람 과격분자들로 의심되는 ‘보안 사범들’이고, 2012년에 5천 명 이상의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구금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미 재판을 받았다고 밝혔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대다수 시위대가 내세우는 슬로건도 개인이나 집단들의 상황을 반영하여 수감자 석방, 바레인 파견 군대 철수, 실업 대책, 여성 운전 허용 등 다양하다. 특히 2011년 11월, 동부 지역에서 강경 진압으로 시위대가 사망한 이후에는 ‘사우드 왕가 타도’라는 반정부 슬로건도 등장했다. 2012년 12월 미국의 권위 있는 연구소인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이 내놓은 보고서는 시위가 사우디정부에 현재 시점에서 직접적인 위험은 아니지만, 이러한 불안정성이 영속할 수 있다고 보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미국의 이익에 잠재적인 위협’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장기간 계속된 불만을 무시하고, 저항세력을 이란이 후원하는 급진주의자들로 취급하는 종파 카드를 활용함으로써, 진정시키기를 원하는 바로 그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사우디 정부의 강경 진압이 대화를 지향하는 온건 개혁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이익에 잠재적인 위협’인 정치적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우디 정부가 저항 세력의 요구사항들을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정치 제도의 개혁을 추진해야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30년간(1977-2006) CIA 정책 분석가였으며, 미국의 중동 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브루킹스 연구소의 브루스 리델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점진적인 개혁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며, 미국은 임박한 혁명에 대비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는 2013년 1월 보고서에서 “미국은 사우디 개혁을 추진하거나 혁명을 막아낼 대안이 없다. ‘아랍 각성’은 사우디 역사상 최초로 혁명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다. 혁명은 오바마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동안에 발발할 수도 있다. 2011년 2월, ‘아랍 각성’이 시작된 이후, 사우디 왕가는 자국 내의 불만 세력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1천 3백억 달러 이상을 소비했다. 사우디 왕가는 여성들에게 권력이 없는 자문회의에 의석을 마련해 주는 무늬만의 개혁을 실행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빨리 준비해야한다.” 2012년 12월 30일, 이란의 프레스 TV 인터뷰에서 알리 알 아흐마드는 “2013년은 사우디아라비아에게 매우 위태로운 한 해가 될 것이다. 사우디 전역으로 시위가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전망하였다. 이와 같이 전문가들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사우디 내에서 어떤 형태로든 변화는 불가피하게 보인다. 과연 절대 권력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 왕가가 시민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민주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혁명적인 변화가 초래되면서, 외부 세력들이 개입하고, 다양한 내부 파벌들이 경합하면서, 외부 세력과 내부 파벌 간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20세기 국가 형성기에 경험했던 커다란 지각 변동이 다시 한 번 초래될까?
2017-08-07 | hrights | 조회: 125 | 추천: 0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지난 25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취임했다. 그와 그의 부친의 생가 주민들은 징이며 꽹과리를 들고 나와 어깨춤을 추고, 많은 시민들이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축하와 덕담, 소망을 전하는 장면들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여성’이니까... 여성주의 진영과 진보지식인들이 ‘여성이다, 아니다.’로 논쟁을 하는 동안 국민들, 많은 수의 여성국민들이 일생의 억압을 일소라도 할 듯, 진정 당당함으로 그/녀를 위해 투표장에 갔고 그/녀를 ‘찍’었다. 소위 여성운동 판에 있던 지인들 몇은 어머니가 자랑스럽고도 감격스런 모습으로 ‘다 너를 위해 찍은 거야.’ 라거나 ‘그동안 니가 주장한 여성대통령이니 얼마나 잘되었냐?’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대다수 멘붕과는 다른 의미의 멘붕을 경험했다. “대체 왜? 여성들이...?”라는 질문, 그리고 “대체 그동안 나는 뭘...?”이라는 자괴와 ‘여성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당혹해해야 했다.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이 섹스와 젠더사이에서 방황할 때, 국민들, 특히 ’여성‘들은 주저 없이 ’여성‘인 그를 진보와 문화적 선진성이라는 자랑스러움- 그 안에는 물론 여성이니까 다를 것이라는 기대, 여성이므로 부정부패하지 않을 것 같고 사적이익추구보다 경제성장에 더 매진할 것 같은 기대를 포함할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 다를 것이라는 것을... 나는 여기서 섹스와 젠더의 차이가 이미 국민들의 생활 속에서는 별 의미가 없음을 본다. 섹스와 젠더는 현실에서는 한 덩어리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섹스와 젠더는 상호의존하고 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섹스는 젠더를 결정하고 젠더는 다시 섹스를 구속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론은, 그리고 여성해방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는 섹스와 젠더가 별개로, 혹은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모르지만, 현실에서 섹스는 딱 그만큼의 현실적 진보와 기대를 반영한 젠더를 기대하게 한다. 그를 찍은 대다수 여성들과 국민들은 만약 그가 여성이어서 선택했다면 ‘여성’이 가지는 남성과 다른 젠더적 특수성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기대와 판단이 옳은가 그른가는 시간이 지나야 알 것이지만. 그러나 여성운동 세력은 그/녀가 생물학적 여성이긴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보통여성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젠더적 여성이 아니라고 그/녀에게서 ‘여성’을 지우기 위해 애써왔다. 진보후보의 당선을 위한 것도 있고, 여성운동의 성과물이 그/녀에게 전유되는 것도 못마땅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새로운 해석과 접근이 필요치 않나 싶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이 지난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개최됐다. 이날 박 대통령은 현충원, 취임식장, 청와대 등 외부 행사에서 다른 복장을 선보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하나는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와 ‘여성도 대통령이 되어봐야 한다.’는 생각에는 섹스와 젠더를 구분 못하는 우매한 대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남성중심의 ‘성정치’에 대한 신물과 낭패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많은 여성들이 ‘여성 해방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대다수 여성들은 전체주의자의 후손, 그리하여 가부장적이고 독재적이고 성장주의적 자본지상주의자인 그를 선택한 우매한 대중인가? 아니면 남성들에 억압되고 소외되고 남성정치에 신물이 나 새로운 정치와 그로인해 새로운 남녀관계의 질서를 기대한 탈가부장제를 원하는 대중인가? 에 대한 명확한 분석이 나와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성정치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경계 허물기를 위한 노력이 오히려 노이로제처럼 공/사 구분 틀에 여성해방세력들을 가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사적인 장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의 경험이 없는 여성은 진정한 의미의 여성이 아니거나, 여성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렇다.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인해 억압당한 양성성을 회복하는 것이 여성주의해방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성역할구분을 해체하기 위해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 남성은 사적인 영역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공적영역에서 남성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던 여성들에게 ‘명예남성’이라 명명해왔다. 그러나 이 말은 여성들을 서로 소외시키는 말일 뿐, 진정 변해야 할 집단인 남성에겐 이로 인한 영향력은 없었다. 남성들은 누가 진짜 남자인지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물론 지난 대통령후보가 ‘진짜 남자’ 구호를 들고 나왔다가 대다수 여성들과 남성들에게 ‘팽’을 당했지만-그들이 인간과 시민을 대표하기에 그렇다. 정상인, 중산층, 남성이 아닌 이들은 인간과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서는 검증절차를 거친다. 그런데 그 검증절차가 우습게도 인간과 시민의 범주에서 소외된 그룹들 내부에서 왜 먼저 발생되는 건지는 살펴봐야 할 일이다. 저 여성이, 장애인이, 성소수자가, 이주민이, 난민이, 청소년이, 빈민이 ‘레알’인가? 아닌가? 라는 검증절차... 다양성, 혼종성의 시대에 무엇을 ‘레알’ 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너무 근본적이고 복잡하다. 이제 질문을 바꾸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준비된 여성’이라면 무엇을 준비했냐고? 그리고 보아하니 무엇이 준비가 덜 된 것 아니냐? 고, 더 잘 준비할 것은 이러저러한 것이 아니냐? 고 말이다. 여성/대통령으로서 취임식 당일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었듯이 정치문화도 새롭게 갈아엎길 기대해본다. 그러나 그/녀와 나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 간의 다름과 간극은 연대에는 틈과 거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가능성이지만 그 틈에 배타성이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위기이기도 하다. 5년 후에 그 위기는 여성전체에 대한 위기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가능성을 고민해본다. ‘국민행복’의 총량을 고려한 ‘경제성장’과 ‘복지’에 대한 가능성을... 국민의 행복이야말로 사람의 근본적 권리임으로.
2017-08-07 | hrights | 조회: 131 | 추천: 0
이광조/ CBS PD 요즘 인터넷에서는 조웅 목사라는 분의 인터뷰 동영상이 큰 화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의 스위스 비자금 계좌와 사생활, 막후 실세에 관한 얘기부터 김정일과의 관계, 그리고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암살사건의 배후에 관한 얘기까지. 워낙 긴 인터뷰라 동영상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에 활자화 되어 떠돌고 있는 몇 가지 증언 내용만 보더라도 황당한 느낌을 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증언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가 스스로의 이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얘기였기 때문이다. 책장을 뒤져 <김형욱 회고록>을 찾아내고는 황태성 간첩 사건 대목을 찾아봤다. 김형욱은 황태성 간첩 사건의 전모가 미군 당국에 전해진 경로와 관련해 당시에 떠돌던 두 가지 설을 언급하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시중에 떠도는 풍문을 들어 알게 되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황태성이 사형수로 수감되어 있던 중, 반혁명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조응이라는 학생을 알게 되어 그를 통해 비밀이 폭로되었다고 한다.” 조웅 목사는 자신이 5.16 쿠데타에 참여했으며 황태성 간첩사건을 알게 되어 이를 미군에 알려주면서 5.16 쿠데타 세력과 갈라서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럼 김형욱이 회고록에서 언급했던 조응 이라는 학생이 조웅 목사인가. 그런데 학생 신분으로 5.16 쿠데타에 참여했다는 게 과연 가능한 얘기일까?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도 조웅 목사의 증언이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단서가 있었다. <김형욱의 회고록>에는 쿠데타 모의 세력이 애초에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4.19 1주년에 맞춰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유도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던 일화가 나온다. 쿠데타 모의에 가담하고 있던 박종규가 기자로 신분을 위장한 채 몇몇 대학 학생회 간부들과 토론 모임을 가지곤 했다는 것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4.19 혁명정신을 배신한’ 장면 정권을 뒤엎는 궐기를 하도록 유도하고 그 혼란을 진압하는 걸 명분으로 거사를 도모하려고 했다는 얘기다. 이 일화는 조갑제 씨가 “5.16 군사혁명 50주년 기념 연재”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5.16 비사에도 나온다. 조응 이라는 사람이 학생신분으로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복역하다 곧 출소했다는 것도 당시 쿠데타 세력 내부의 갈등으로 빚어진 일이 아니면 설명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하지만 설사 조웅 목사가 얘기한 자신의 이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여러 가지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가 아는 상식에서는 그렇다. 그런데도 내가 호기심을 갖고 책을 뒤져보게 된 데는 ‘도대체 조웅 목사라는 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앞서 얘기했던 학생 데모 유도 같은 작업을 흔히 공작정치라고 부른다. 그가 만약 공작의 전모를 알고 계획적으로 거기에 가담했다면, 또 그의 증언처럼 지인으로부터 각종 암살사건의 내막을 전해 들었다면,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에게 세상은 권력자들의 음모로 가득 찬 암흑의 세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진실은, 우리 눈에 보이는 환한 무대 위가 아니라 어두운 장막 뒤에 있는 것이다. 조웅 목사의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걱정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이 허황된 얘기에 너무 쉽게 휘둘린다는 거다. 맞는 얘기다. 내가 봐도 걱정스럽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환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곧이곧대로 진실로 받아들이다가는 바보 되기 꼭 쉬운 게 우리나라다. 대한민국의 치안과 법집행을 책임졌던 전직 경찰청장이 오늘 법정구속 되었고 국정원에서 내부의 불법행위를 외부에 알린 직원이 파면되고 고발되었다는 소식이 오늘 전해졌다. 둘 모두 공권력이 거짓을 조장하고 국민을 기망한 사건이다. 음모론이 없어지겠는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116 | 추천: 0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언젠가부터 어떠한 정치,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 틀들이 과도하게 단순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어떤 용어나 개념, 그리고 논쟁 구도가 등장하면,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도 없이, 마치 요즈음의 유행가들처럼 잠시 들끓다가는 사회에 별다른 실질적 영향도 못 미친 채 사라지는 용어와 논쟁의 싸이클이 너무 자주 반복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순하게 나열되는 듯 한 과정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가령, 지난 대선에서 90%에 육박하는 투표율을 보였던 50대의 투표성향 변화는 분명 매우 중요한 이슈였다. 그러나 50대를 비롯한 투표성향에 있어서 세대 간 차이를 강조하는 학자들과 언론인들의 분석 글들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 하지 않았나 싶다. 주목을 끌었던 50대의 투표 성향 변화의 경우에도, 계급, 지역, 성별 등에 따른 자세한 분석을 하지 않은 채, 통째로 박정희, 전두환 두 독재 정권 치하에서 청년기를 보내며 격렬한 민주화 과정을 온 몸으로 겪었던 세대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크다. 이들이 청년이었던 시절에 당시 대학생들 중 학부 시절 진지하게 운동의 정신을 이어갔던 학생들의 비율은 졸업 후 기득권층으로 적극적으로 편입하려고 하던 이들의 비율에 비해 극소수였다. 대학 시절의 정의감에 입각한 저항의 경험은 졸업 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 이들에게 더 많은 평등 지향적 민주화 요구와 맞닿기 보다는 이를 거부하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학생은 전체 청년들 중 1/4에서 1/3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이러한 주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한 마디로 이러한 주장들은 민주화나 민주주의를 정치적인 측면만으로 보는 데에서 야기되는 매우 전형적인 오류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비극은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던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가 낳은 필연적인 비극인 것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서구 중심부 국가들에서와는 달리, 한국을 비롯한 비중심부 국가들에서는 민주화 투쟁, 저항의 주체들이 상대적인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한 후에는 급속하게 과거 독재자들이 구축해 놓은 사회경제적 기득권 구조에 편입되는 현상을 보여 왔다. 따라서 독재에 반대하는 수준에서는 많은 이들이 매우 용맹했지만, 독재 체제의 후퇴 이후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일정정도 쟁취하고 난 뒤에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즉 평등화를 추구하는 복지 사회로 나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이를 거부했다. 따라서 이들은 부동산 투기, 탈세, 학연, 지연, 종교, 성접대, 부패 등이 서로 뒤얽힌 특권 구조와 기득권 질서를 타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구조를 향유, 강화해 왔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50대는 바로 이러한 구조의 주체이자 산물이다. 이는 상당한 수의 서민들이 오히려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현상과 본질에 있어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복잡하게 설명하거나 안타까워할 일 없이 한 마디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맛보지 못한 서민들에게는 민주주의란 혼란에 불과한 것이며, 이러한 혼란 속에서 누구보다 더 고통 받는 것은 사회적 보호막이 없는 자신들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 어디 그 뿐인가? 정치를 떠나 사회를 보자. 예를 들어, 학교 폭력, 군대 폭력, 학벌 사회, 영어 광풍, 고시 열풍, 기러기 아빠, 부동산 투기 광풍, 사교육 광풍, 골프장 왕국, 최고의 자살율, 최고의 노인 빈곤율, OECD 국가 내 최고 수준의 자영업 비율, 최하의 복지 수준, 급증하고 있는 각종 범죄 등등... 특정 정권 들어 악화되었는지 아닌지를 논하기 앞서 이러한 문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조화된 우리 사회의 고유한 문제들이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우리 사회에서만 있는 매우 해괴한 이러한 사회 현상들의 본질은 유사하다. 즉, 사회 복지 시스템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국가에서 거의 모든 국민들이 나락으로 빠지지 않는 길이란 출세해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서로를 짓밟고 속이는 극단적인 경쟁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들인 것이다. 이렇듯, 한국 사회의 매우 특수한 현상들을 보지 못 하고, ‘신자유주의’나 ‘금융 세계화’ 등의 개념으로만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많은 시도들은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50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사회재구조화와 노동 불안정화로 인해 가장 타격을 입은 집단’, ‘명퇴 이후 영세 자영업으로 내몰린 이들’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일리가 있지만, 그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간과하는 주장이다. 이렇듯, 많은 지식인들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굳이 사용해 가며 소위 불안정 노동이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OECD 국가들 중 최고의 비중을 자랑한지 오래인 자영업과 같은 더 주변화된 사회 계층이나 집단들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으로 50대 영세 자영업자들이 급증했고, 따라서 이들이 믿었던 민주화 세력이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억압에 분노하여 퇴행적 투표를 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선거 분석을 통해서 세대에 따른 진보와 보수의 비율 차이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20대의 보수화라는 사회적 위기현상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20대의 보수화는 이전의 보수화와는 궤를 달리하기에 매우 위험하다. 즉 이들 20대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 보수집단 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 관점에서 인종주의 등 서구식 극우와도 맞닿아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나 반여성주의, 반공주의까지 마구 뒤섞여 그 어느 극우집단보다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의 ‘넷 우익’이 기존의 일본 우익들과 결합하며 실제 세력화되는 것을 일본의 진보 학자들도 예견하지 못 했듯,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과도하게 일시적 현상이거나 가볍게 보는 학자들이 너무 많다. 불안정 노동과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이 만연한 시대에 서민들은 오히려 파시즘을 선택한 역사는 수두룩하다. 게다가 이러한 집단에조차도 속하지 못하는 엄청난 수의 주변화된 반범죄 집단들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고령층이 많아져서 중도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하며, 다시 진지하게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보편적 복지로의 급진적인 변화를 구체적으로 논할 때가 왔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21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나는 경기도 의왕시에 산다. 우리 시의 이름은 품격이 넘친다. 한자를 보라. 義王! 얼마나 멋진가. 조선시대 광주부의 ‘의곡면(義谷面)’의 의(義)자와 ‘왕륜면(王倫面)’의 왕(王)자가 합쳐져 된 이름이니 의로움과 제왕의 윤리가 홈빡 깃든 이름이다. 1914년 일제의 농간으로 義王 대신 ‘거동할 의(儀)’와 ‘왕성할 왕(旺)’의 儀旺으로 표기가 바뀌었다가 2007년에야 비로소 원래의 이름인 義王을 되찾았다. 국내 행정구역중 의왕만큼 멋진 이름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동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천박하다. 우선 우리 동네 국회의원 행실부터 수준 이하다. 우리 동네 일꾼은 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어놓고는 몇 달 되지 않아 그것도 자신을 뽑아준 지역주민들에게 단 한마디 의견도 묻지 않고 말없이 철새처럼 잽싸게 안철수 씨에게 날아간 “묻지마” 개혁정치의 기수 송호창 의원이다. 표 달라고 넙죽 인사하며 인덕원 전철 역 앞에서 명함을 건네던 송의원은 당선된 후 정말 전광석화처럼, 독불장군 독재자처럼 제멋대로 당을 옮겼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안철수씨 편에 선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옮겨가는 과정이 몹시 추하다. 정치 초년생이라 뭘 모르고 한 것이니 용서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는 정치 경력이 아니라 기본적인 정치 도의의 문제다. 배고파 아쉬울 때는 손 벌리고 배가 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거두고 표변하는 사람과 다를 바 무엇인가. 적어도 지역구민들의 의견을 묻거나 양해를 구해야 옳은 것인데, 제 살 길을 찾아 그냥 날아가 버렸다. 뉴스보고 당적변동을 알았으니 말 다한 거다. 고매한 동네 이름인 의왕에 걸맞지 않은 정치 철새다. 개혁정치라는 말이나 안했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우리 동네에는 철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의왕(義王)의 왕(王)자가 연유한 원명인 왕륜(王倫)도 없다. 인덕원에서 판교 쪽으로 한 2분만 가면 왼편 깊숙한 곳에 서울구치소가 있다. 의왕시에 있지만 이름은 서울구치소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힘 있고 돈 있는 분들이 자주 오신다. 노태우, 정몽구, 박지원, 권노갑 등 정재계 거물들이 드나들던 곳이고 현재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의원, 대통령의 사촌처남인 김재홍 KT &G 복지재단 이사장, 신재민 전 문화관광부 차관 등이 수감돼있다. 그런데 유력인사들, 이른바 ‘범털’들이 하도 자주 오길래 ‘구치소’가 아니라 ‘구치텔’이라고 까지 불리는 이곳에서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비리로 구속된 대통령의 측근들이 대통령의 특별사면의 은덕을 받아 줄줄이 구치소를 떠난 것이다. 법과 원칙을 그리도 강조하더니 특별사면에는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말이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설 특별사면을 받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지난 1월 31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제 아무리 감언이설로 특별사면의 정당성을 이야기해보았자 특사의 원칙은 야당의 표현대로 대통령과 친하냐 친하지 않냐로 귀결될 뿐이다. “재임 중 발생한 권력형 비리에 대한 사면은 하지 않겠다는 원칙에 입각해 실시”한 특사라고 하지만,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은 대통령 임기 중인 2009년 세무조사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임천공업으로부터 47억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사람이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구급차를 타고 황급히 빠져 나왔을꼬! 분노를 넘어서 애잔하기까지 하다. 대통령 측근으로 무소불위의 방송 권력을 누리다 구속된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은 확정된 징역 2년 6개월 중 9개월만 살다 나왔다. 우리 대통령은 대학생 반값 등록금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미안했나보다. 측근의 징역형을 30%로 깎아주는 것을 보니 말이다. 왕륜(王倫)은 어디 갔나? 있기나 했을까? 철새 의원과 왕륜 없는 대통령. 의왕 우리 동네 이름이 맞지 않는 말들이다. 제발 새해에는 개혁, 법, 원칙을 입으로만 나불대는 정치모리배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우리 국민이 뱀처럼 지혜로워지도록 우리 동네 의왕의 의로운 기운이 더욱 강성해졌으면 좋겠다. 기사년(己巳年) 의로운 왕의 기운이 솟구쳐라! 의왕(義王)을 희구(希求)하며, 의왕만세(義王萬歲)!
2017-08-07 | hrights | 조회: 120 | 추천: 0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국제중학교라는 제도가 초등학생 학부모 사이에선 제법 화젯거리다. 아예 관심 두지 않는 사람이 외려 적어 보이고, 주변에서 아이를 국제중학교에 보냈거나, 보내려 했거나 한 경우도 상당수다. 듣자니 서울 시내에 있는 국제중학교 두 곳은 서류 전형으로 3배수를 뽑은 후 추첨으로 최종 입학 여부를 결정한단다. 서울시 교육청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몇 해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부쩍 호기심이 동했다. 그냥 ‘성적순대로’가 아니라 마지막엔 ‘운에 따라’라니― 새로운 발상이 아닌가? 마침 ‘선거를 보충하는 추첨제’ 제안을 읽은 직후이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의 어느 글에서 부딪힌 대목이었는데, 대표를 뽑아 결정권을 위임하는, 이른바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게 대표들에게 엉뚱한 특권의식을 안겨주기 십상이라는 것이 문제의식의 요체였다고 기억한다. 선량(選良)이라는 말대로 뽑힌 사람들은 자신이 잘나서, 능력이 있어서 결정권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기 쉽다. 투표로 뽑히는 각종 의원이며 기관장들이 내멋대로식 질주를 일삼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투표를 통해 2~3배수를 뽑되 최종적인 결정은 추첨으로 해 보는 편이 어떤가. 추첨제라면 능력 있어 대표 됐다는 환상을 부수는 데 적합할 테고, 의원이며 기관장들에게 조금이나마 겸손을 가르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고 보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도 본래 추첨제 민주주의가 아니었던가. 국제중학교 입시를 정치에서의 민주주의와 혼동해 버려선 곤란하겠지만, 어쨌든 ‘추첨’이라는 발상은 흥미로웠다. 중·고등학교 입시가 ‘뺑뺑이’로 바뀌던 무렵에도 비슷한 생각들을 했을까? ‘뺑뺑이’와 달리 요즘 국제중학교 식 추첨은 위계 자체를 해체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 소식을 듣다 보니, 추첨에 대한 반응이 그리 호의적인 건 아닌 것 같다. 3배수에 들었는데 추첨에서 떨어져 버린 학생들은 그 사실을 납득하기 훨씬 힘들어하기도 한단다. 실력이 부족하다면 차라리 수긍하겠는데, 마지막엔 운에 맡기라니, 외려 공정치 못해 보이는 모양이다. 하긴, 어른들이 짊어지고 있는 ‘입시’와 ‘뺑뺑이’ 사이 딜레마를 10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떠맡긴 셈이니, 그걸 다 이해하는 편이 더 이상하겠다 싶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추첨’이라면 주택복권 당첨자 정하던 그 회전판이 먼저 생각난다. 0부터 9까지의 숫자가 빙빙 돌아가는 판에 화살을 쏴 숫자를 정하는 과정은, 어린 마음에도 나무랄 데 없이 공정해 보였다. 아파트 분양권을 얻고 동호수를 정할 때, 중·고등학교를 배정 할 때, 군 복무 근무지를 정할 때, ‘뺑뺑이’는 최상의 해결책이다. 성적대로, 실력대로, 하는 원칙이 미덥지 못할 때, 혹은 그 원칙이 적잖은 폐해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될 때, ‘뺑뺑이’만한 대안이 또 어디 있는가. 허나 한편, ‘뺑뺑이’만으로 질서가 구성되지 못할 것 또한 당연해 보인다. 그러니, ‘실력’과 ‘운’, ‘경쟁’과 ‘뺑뺑이’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평형을 잡기보다 우왕좌왕하기 쉬운 게 통례다. 1976년 경기고에서 중학교 배정 추첨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주간경향 1980년대 초·중반 ‘뺑뺑이’ 한복판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로선 한 반에 온갖 이질적 분자가 공존했던 그 시절이 참 다행스러웠다. 강북의 공립이었던지라 분위기는 산만했고 입시 성적은 형편없었고 뒤 몇 줄은 제법 불량스럽기도 했지만, 그 덕에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을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걸러진’ 혹은 ‘살균된’ 분위기에서 지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막상 경기 북부의 작은 아파트촌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지금은, 고등학생 시절만큼 확고하게 ‘뺑뺑이’를 지지하기가 힘들다. 소문만인지, 그래도 험악하다는 고개 젓는 집 근처 중학교에 아이를 보내야겠다는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다들 딴 길 찾는 대신 공교육을 탄탄하게 하는 게 정도겠지만, 추락해 버린 ‘뺑뺑이’의 세계를 피해 더 나은, 더 안전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게 비단 나만은 아닌 것 같다. 매춘여성이 국회의원 되고(「대한민국 헌법 제 1조」) 평범한 공무원이 시장 되는(「7급 공무원」) 그런 상상력은 영화 속의 ‘뺑뺑이’에서만 가능한 걸까. 입시와 뺑뺑이 사이, 선거와 추첨 사이 또 어떤 실험이 필요한 것일까.
2017-08-07 | hrights | 조회: 14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