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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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석미화(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꽃샘추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지난 주말 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지금 다시 기온은 올라갔지만, 여전한 바람 탓으로 쌀쌀한 기운은 그대로다. 시민운동을 시작한 지 만 11년이 다 돼서, 한 달의 '안식'을 얻었다. 혼자 있는 낮 시간이 왠지 낯설고 이러 저러한 일들로 아직 고요하진 않지만, 시간의 규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으니 한결 편하다. 무엇보다 그 동안 밀어두었던 책들을 펼쳐 보게 된다. 지난 2003년, 37년 만에 귀국했다가 10개월 동안 고초만 치르고 돌아간 송두율 교수가 독일 귀환 이후 펴낸 책을 보고 있다. 안식기간에 우리사회를 반추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그가 1심 재판에서 행한 최후 진술이 눈길을 끈다. 그는 당시 최후 진술과정에서 한국사회의 지적풍토에 대해 이를 다섯 마리의 원숭이 우화에 빗대어 비판하였다. 다섯 마리의 원숭이 우화는 다음과 같다. 원숭이 사육사가 매일 아침 나무 꼭대기에 신선한 바나나를 매달고, 그 근처에 전류를 통하게 했다. 첫 번째 원숭이가 바나나를 따 먹으려 나무에 오르다가 강한 전류에 놀라 곧 포기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원숭이도 이와 같았다. 이튿날 새롭게 우리 안에 들어온 다섯 번째 원숭이가 바나나를 따 먹으려 하자, 이미 혼난 경험이 있는 네 마리의 원숭이가 이를 말렸다. 그러나 이 다섯 번째 원숭이는 만류를 뿌리치고 바나나를 따 먹었다. 사육사가 이미 전류를 끊었는데도 네 마리 원숭이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송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보안법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국정원과 공안검찰 및 이른바 거대 언론, 그리고 이에 덧붙여 기존의 선입견을 지식으로 포장하고 확대재생산해 온 이른바 지식인들이 바로 위에서 지적한 네 마리의 원숭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이 사회를 항상 깨어있게 하는 많은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다섯 번째 원숭이는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니, '말 바꾸는 지식인'이라고 저를 매도하는 네 마리의 원숭이가 벌이는 시끄러운 굿판 속에서도 달리 생각하고 행동하였습니다." 송두율 교수 사진 출처 - 후마니타스 아마 당시 1심에서 7년 징역형이라는 중형이 선고된 데는 검찰마저 '멍청한' 원숭이에 빗댄 것에 대한 일종의 '괘씸죄'가 추가된 결과였지 않나 추측해 본다. 송 교수는 지식의 역할이 반드시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 우화를 인용했다고 한다.'잘못된 지식'이 오히려 '조직을 멍청하게' 만들고, 그 결과 사회도 둔감하게 된다.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유명무실해졌다고 믿었던 국가보안법이 39년 만에 돌아온 한 지식인을 매개로 한국사회를 소용돌이로 몰고 갔던 기억은 우리사회가 '충격'이 필요한 사회임을 실감케 했다. 송 교수도 그래서 이 '충격'이 지속적이길 원한다고 최후진술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사회는 언제나 충격적이다. 그래서 웬만한 충격에는 미동의 변화조차 허락하지 않을만큼 둔감하다. 위험사회로 일컬어지는 탈근대의 복잡성에 기인할 수도 있지만, 유독 한국사회가 충격에 둔감한 사회임을 표상하는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 아닌가 싶다. 5.18이라는 정치적 충격으로 민주주의의 열린 국면을 맞이하며 두 번의 민주정권을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지난 참여정부가 보여준 것처럼 여전히 힘의 관계에서의 열세만을 드러냈다. 이와 맞물려 경제적으로는 지난 대선을 통해 IMF라는 경제적 충격을 도래케 했던 개발성장주의의 적자(嫡子)를 새 대통령으로 불러들였다. 우리의 다섯 번째 원숭이들은 새 정권의 출현 앞에서 매우 비통해 하면서도, 다시금 스스로의 존재성을 확인시킬 수 있는 '기회'라며 자위한다. 필자 또한 새 정권의 출범으로 현상하는 개발성장주의의 전면화는 50여 년 동안 한국사회를 관통해왔던 그것과 비로소 단절하기 위한 총체적 평가 기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는 명제처럼 이명박 정권의 탄생은 비정상의 사회가 정상의 사회로 거듭나는 진통의 산물일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섯 번째 원숭이가 바나나를 땄던 그 '예외적인 창출'이 앞선 네 마리의 원숭이보다 늦은 이튿날의 출현으로 인한 무경험으로서가 아닌, '멍청한 지식'에 대한 '다른 생각'의 결과였다면 오늘 날 한국사회 다섯 번째 원숭이들의 새로운 거듭남을 위한 '다른 생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성찰이 앞서야 한다. 최근 제주에서는 난데없는 '내국인 카지노'논쟁이 일고 있다. 이미 10년 전에 혹독한 갈등을 치렀던 사안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정권을 달리해도 정부 불허방침에는 변함이 없고 달라진 것은 없지만, 지금 달라진 것은 카지노 찬성여론이 그 때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것이다. 국내 여느 지역할 것없이 외자유치니 규제완화니 하는 마당에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여기에는 지역의 생존법이라는 위기의식이 작용하고 있지만, 레저산업이니 관광전략이니 하는 세련된 포장이 새롭게 한 몫 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 예전 같으면 다섯 번째 원숭이라 할만한 '양심적' 부류들이 나서서 '너무도 쉽게' 거들고 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를 통해 뚜렷하게 경험했던 것은 이른바 시장주의가 낳은 동일시의 논리이다. 너무도 지배적으로 모든 지역과 사람과 정책들은 '시장'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거의 모든 지자체가 거대한 개발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아우성쳤고, 외자유치에 혈안이 되었고, 규제완화니 개방이니 하는 이른바 대세의 논리를 선점하려 경쟁하였다. 국가는 그 결절점을 한미 FTA의 논리로 장식하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피폐해졌으니, 바로 그런 점에서, IMF 충격에도 또 다시 그것을 가능케 했던 개발성장주의세력을 새 정권으로 불러들인 것은 그 동안의 소위 민주정권이 단지 힘의 열세가 아니라, 이른바 경제개혁을 내세운 시장주의에 스스로 포획된 결과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시대에 우리사회의 이른바 민주개혁 세력의 자기반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굳이 이를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주화 시대의 다섯 번째 원숭이들의 생존 방식을 접하면서 그 성찰의 지평이 매우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시대적인 차원까지 탄탄히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현대는 탈현대의 가치를 추구한다. 탈현대의 가치들은 기본적으로 차이와 공존의 논리인데, 민주주의 정권기를 통해 우리사회는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동일시의 논리만을 재생산하며 그 결과 양극화라는 배제의 사회를 만들고야 말았다. 다섯 번째 원숭이는 송 교수의 표현으로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시대의 다섯 번째 원숭이의 '다른 생각'은 그것이 비록 현대사회에서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거꾸로 현대사회를 구제할 가치로서 다양성과 공존의 논리를 '네 마리의 원숭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들여다보고 꿋꿋이 세워나가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송두율이라는 한 지식인의 10개월의 역경을 통해 상징화된 한국사회의 충격을 이어가는 길이자, 그의 고난을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1 | 추천: 0
이광조/ CBS PD “서울 도심에 웬 수산시장이 있나?” 서울에 온지 몇 년이나 지났을까. 노량진에 수산시장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들었던 의문이다. 바다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도시에 수산시장이라니. 세월이 한 참 지나 서해에서 한강을 거슬러 마포와 노량진까지 커다란 배들이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노량진과 수산시장이 아무런 인연도 없는 건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은 하게 됐지만 지금도 수산시장 주변에 가면 비릿한 생선냄새 외에 바다를 떠올릴만한 건 좀체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말이다. 수산시장 주변으로 널찍한 백사장이 있고 한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면 어떨까. 바다가 보이진 않는다 해도 한강을 통해 서해의 풍경을 바로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갈매기들이라도 날아다닌다면 바다는 서울시민들에게 지금보다는 훨씬 친숙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여름이면 노들강변에 수박 냄새가 흩날리던 시절에는 아마 그랬을 것 같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노량진 일대를 비롯해 한강 곳곳에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는데, 여름이면 숱한 사람들이 수박을 들고 그 백사장에 모여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수박도 쪼개 먹고 수영도 즐겼다는데... 그 많던 한강 백사장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1955년 노들섬 한강 백사장 모습 사진 출처 - 서울시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영등포구 양평동으로 이사 온 뒤로 나는 추운 겨울이나 비가 많이 오는 궂은 날을 빼면 되도록이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환경도 보호하고 묵직한 뱃살도 빼고 일거양득이지만 사실 차들로 가득 찬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봄기운을 느끼자마자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건 8할은 한강 때문이다. 늦은 퇴근 길 안양천에 난 자전거 길을 따라 한강으로 나가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동쪽으로 서쪽으로 자전거를 달린다. 강변을 따라 남북으로 펼쳐진 야경을 감상하면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달리는 기분이란... 특히나 무더운 한여름, 더위가 잠시 식는 밤에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기분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에겐 설명할 재주가 없다. 그래서 난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탈 때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감사하면서 페달을 밟는다. 하지만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휴식을 취하는 반환점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뭐랄까, 늘 내게 쓸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강을 좋아하면 수심이 많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 걸까. 아니면 밤에 검은 강물을 봐서 그런 걸까. 화창한 봄날, 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웃음과 꽃들이 가득한 강변에서도 강물이 여전히 애잔해 보였던 걸 생각하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법 하다. 사람마다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 한강을 바라보며 쓸쓸함을 느끼는 건 아무래도 욕구불만인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손도 잡지 못하는 그런 답답함이랄까. 비스듬한 시멘트 제방을 내려가 억지로 강물에 손을 담글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접촉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 사랑하는 남녀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을 잡듯이 사람이 강에 다가서고 강물이 모래사장에 스며들었다 물러나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발을 적시고, 기분이 내키면 웃통을 벗어던지고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고, 그런 만남이 내가 생각하는 강과 사람의 만남이다. 하지만 내가 자전거를 타며 바라보는 강은 소리도 촉감도 느낄 수 없는 오직 눈으로만 마주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강과 스킨쉽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늘 욕구불만이다. 이런 욕구불만이 나 뿐일까. 요즘 한강이, 아니 사람이 시각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한강과 교감하는 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생명을 품고 길러낸 강이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하고만 교감을 할 수 있다니. 몇 해 전 취재차 프랑스에 갔다가 세느 강변에 모래를 퍼 날라 백사장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름이면 그 백사장에 파리 시민들이 나와 일광욕을 즐긴다고 한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세느 강변에서 말이다. 한강을 바라보며 느끼는 쓸쓸함과 욕구불만 때문인지 나는 강을 찾아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다. 북한강과 남한강, 동강과 섬진강... 강변을 걷다 백사장이 있으면 물과 백사장이 만나는 지점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아 강물에 손을 넣는다. 휘적휘적 몇 번 손을 저을 뿐이지만 그 순간 그 느낌이 참 좋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한강을 인간과 교감하는 강으로 만들기는커녕 전국의 강을 한강처럼 아니 지금의 한강보다 더 인간과 유리된 강으로 만들 수 있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답답하다. 강은 물론 인간도 반쪽이로 만들지는 않을지. 사랑하는 존재를, 그것도 생명이 깃든 존재를 눈으로만 느끼는 건 그 존재를 지배하려는 욕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대상은 물론 스스로를 불구로 만들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건강한 욕구와 권리를 가로막고 박탈하는 행위다. 제방과 아스팔트로 포위된 강변에는 조망권을 앞세운 고가의 아파트들이 들어설 것이다. 걔 중에는 그 박제된 강 위에 요트를 띄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관음증에 빠진 사람처럼 아파트 창밖으로 꽁꽁 포박된 강을 바라보고 생명의 강을 멋진 항해를 위한 도로쯤으로 생각하며 흡족해 하는 사람들, 우리가 그런 반쪽이의 모습을 좇아야겠는가. 수박냄새 흩날리는 노들강이 보고 싶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65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올해의 여성 운동상으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수요시위'를 선정했다. ‘수요시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1992년 1월 8일부터 지금까지 16년간 800회 이상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해 온 시위이다. 수요시위는 한 가지 사안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열리는 세계 최장기 시위로 기네스북에 등재 권유를 받기도 했다. 65세부터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해서 81세가 된 한 여성은 “우리는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법적으로 책임질 때까지 시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진속의 그녀는 아름답고 당당하다. 15세에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참혹한 전쟁터에서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고, 해방이 되어 조국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할 끔직한 과거의 기억과 싸우던 여성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스스로의 상처를 드러내고, 16년 동안 수백 번의 시위에 참여하고, 마침내 여성운동가로 설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그 힘이 고통의 경험을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개인적인 고통의 경험으로부터 보편적인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여성은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국민과 전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여성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여성운동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사 문제만 나오면 머리를 흔들면서 과거사에 발목 잡히지 말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로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이 바로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처음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관계까지 포기할 수 없다”면서 “실용의 자세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형성”하자고 제안했다. 실용을 위해서라면 일제가 저지른 과거의 만행이 어떻든 간에 다 잊어버리고 덮어버리자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실용이란 “경제”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과연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다 덮어주겠다는 말에 감동하여 한국 경제를 위해 무엇을 해 줄지는 의문이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하고, 미리 주는 경우에는 나중에 받을 것에 대한 약속이라도 받아두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거래관행인데, 대통령의 “실용”적인 외교는 보통 사람들의 방식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다.   지난 2월 13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800번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수요시위' 모습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자신은 물론 새로 임명한 장관들까지 과거의 위법. 탈법행위로 인해 연일 망신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대통령으로서는,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일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못마땅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이 겪은 고통을 하루아침에 잊어버리고 덮어둔 채 무작정 미래로 가자고만 하다니 한 국가의 최고지도자라는 사람의 역사의식이 이 정도 수준인가 한심한 생각이 든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이 “네가 나냐. 내 인생을 네가 살아주는 것이냐. 내 부모가 와서 '사죄 받지 않겠다'고 해도 나는 용서하지 못 한다"고 반발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과거에 머무르거나 회귀하기 위함이 아니다. 과거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잘못을 반성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극복할 힘을 얻고 미래로 향하는 올바른 길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를 배우고, 기억하고, 추모하고, 또 현재의 시각에서 다시 분석하는 것이다. 과거를 덮고 잊어버리자는 말은 과거가 부끄러운 자들의 선동에 불과하다. 과거가 발목을 잡고 있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본 히로시마의 평화 기념관에 한번 가 볼 것을 권한다. 그들은 원폭피해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해 처참하게 파괴된 건물을 그대로 두고, 원폭피해 당시 녹아내린 숟가락, 도시락 통, 까맣게 타버리고 피가 묻은 옷가지, 벽돌까지도 박물관에 진열한 채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일제치하에서 우리가 겪은 피해를 이런 방식으로 기록한다면 수십 개의 박물관을 지어도 모자랄 것이다. 그런데도 다 덮고 가자고 하다니 과연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2017-06-22 | hrights | 조회: 87 | 추천: 0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지난 1월 필자는 라말라와 예루살렘을 가르는 분리 장벽 근처에 있는 무슬림이며 비르제이트 대학 사회학 강사인 루바바 사브리(Lubaba Sabri) 집을 방문했다. 그 이웃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인 압도 콥티(Abdo Copty)도 먼 나라 한국에서 온 무신론자인 필자를 만나기 위하여 와 있었다. 루바바 사브리의 가족과 압도 콥티의 가족은 매우 절친한 사이였고, 필자와 이들 사이의 대화에서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루바바는 1960년대에 찍은 자신의 어머니 결혼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은 서양식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었다. 필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매우 신실한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루바바는 “1967년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비롯한 서안과 가자를 완전히 점령하기 이전에는 예루살렘, 라말라 등 도시 여성들은 히잡을 쓰지 않았어요. 도시 여성들은 1970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히잡을 쓰기 시작했지요. 작은 소도시 툴카렘 출신인 나의 어머니 역시 이 때 히잡을 처음 쓰기 시작했답니다.”고 밝혔다. 루바바의 주장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 착용은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에 저항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루바바에게 “아마 당신 조상들이 대대로 팔레스타인에 살아왔다면, 아마도 그들은 유대교도였을 겁니다.”라고 농담을 건네자, 루바바는 진지하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팔레스타인에 거주했던 많은 사람들은 비잔틴 로마 통치하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했을 것이며, 7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 통치자가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 이 지역 주민들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했을 겁니다. 아마 이 과정에서 우리 조상들 역시 무슬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루바바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압도 곱티는 “이집트의 곱트 교도였던 우리 고조할아버지는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기 훨씬 이전에 나자렛 근처로 이주해 왔어요.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우리 할아버지를 ‘곱티’라고 불렀고, 그래서 성이 ‘곱티’가 되었지요. 사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국가 건설’을 내세우면서 이스라엘 국가가 폭력적으로 건설되기 이전에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종교의 차이로 인한 분쟁은 거의 없었습니다.”   발라타 난민촌에서의 필자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무함마드는 “19, 20세기에 있었던 유대인 박해 문제는 유럽의 문제였고, 이 곳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인종, 종교 등이 다름으로 인한 차별이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지는 분쟁은 종교의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가 결코 아니지요. 현재 이스라엘인들의 대부분은 20세기 이후에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고,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아무런 연고가 없던 사람들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실제로,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 세계 주류 유대 공동체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유럽과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들(Ashkenazi Jews)은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어떤 연고권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희박하다. 헝가리 태생이며, 영국 시민이었던 열정적인 시오니스트 아더 코스틀러(Arthur Koestler)에 따르면, 이 유대 공동체들(Ashkenazi Jews)은 8세기 중반에 동유럽 지역 카자르 제국(Khazar Empire)의 통치자가 유대교로 개종하여 국가 종교로 유대교를 채택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이 징기스칸의 침략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면서 서유럽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유럽과 러시아, 아메리카 등지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주류는 동유럽 카자르 제국민들의 후손들이며, 고대 유대인(Israelites)들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이 ‘조상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점적인 주권을 폭력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미디어(http://www.imemc.org)에 따르면, 지난 3달 동안 이스라엘 군대는 2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했다. 2008년 1월부터 2월 15일까지 이스라엘은 300여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납치했다. 이 중 200명 이상은 헤브론을 비롯한 나블루스, 베들레헴, 라말라, 칼킬리야, 예루살렘, 살피트, 제리코, 알비레 등 서안 전역에서 납치되었고, 납치된 이들 대부분 민간인들이다. 나머지 100여명은 라파, 알 제이툰, 베이트 라히아 등 가자에서 납치된 사람들이다. 매일 보도되는 이스라엘의 만행은 어린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살해와 납치, 밤낮 가리지 않는 가택 수색, 가옥 파괴,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한 임산부가 길거리에서 아기 낳는 일 등이다.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끼리 이럴 수가 있는가? 2월 17일 팔레스타인 보건 장관은 이스라엘의 연료 공급 중단으로 가자 지역에서는 구급차 운행조차 중단되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지난 2주 동안 연료를 실은 배가 가자 해안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http://www.haaretz.com)에 따르면, 2월 17일 북아메리카 유대 조직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올메르트는 앞으로도 가자 지역에 대한 연료 공급을 중단하면서 공격을 계속할 것임을 강조하는 한편, 서안과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점령촌 확장사업도 강화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지난 1월 필자가 방문한 예루살렘과 라말라가 인접한 거리는 이스라엘의 분리 장벽 건설로 작년 겨울과 또 달라져 있었다. 골목 안, 대문 안까지 파고드는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하다. 그 분리 장벽 공사를 하는 노동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이다. 이와 같이 돈, 권력, 총구 앞에서 노예가 되는 것 이외에 허기진 배를 움켜진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는 것은 뼈아픈 현실이다.   지난 1월 필자가 방문한 예루살렘의 모습
2017-06-22 | hrights | 조회: 42 | 추천: 0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가끔 육식이 불편해 나는 식성이 좋은 편이다. 채식, 육식 가리지 않지만, 가끔 육식이 불편할 때가 있다. 몇 해 전 잠깐 육류를 자제한 적이 있는데 왠지 입이 허전한데다가 가끔 고기 몇 점 생각도 나곤 해서, 한 달이 채 못 되 짧은 채식생활이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요즘도 종종 고기를 먹다가 불현듯 찜찜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살점이 붙어있는 갈비를 맛있게 뜯다가도 문득 내 뼈와 살이 연상되기도 한다. 살아있는 낙지를 냄비 속에 넣고 부글부글 끓이는 해물탕 같은 음식을 보면 콧등과 미간 사이가 살짝 일그러진다. 마음속에서는 얼굴 전체가 일그러진다. 비록 음식이지만 내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편치 않다. 그러면 먹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정작 조리되고 나면 또 맛있게 잘 먹는다. 맛있게 먹고는 네 덕에 내가 산다며 아전인수적 해석을 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것이 현재 나의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그러면서 “하늘로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씀을 나를 위해 죽어주는 낙지에 대한 변명으로 삼고, 나의 모순을 은근히 합리화한다. 그리고는 가끔 밥상머리 앞에서 종종 생명이란 무엇인가, 누가 왜 무엇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하는 상념을 속으로 슬쩍 떠올리곤 한다. 생명이란 생물학자 로위(G.W.Rowe)에 의하면, 생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첫째 주변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입하여 이를 자체 유지를 위해 사용하고(대사), 둘째, 개체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복제 능력을 가지며(생식), 셋째, 변화하는 환경에 맞서는 세대를 거쳐 가며 변이와 선택을 통한 적응을 해나가야 한다.(진화) 이것은 생명에 대한 유용한 정의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별 생명체에만 적용되는 정의이다. 이런 정의로는 내 음식이 되기 위해 죽어가는 낙지와 그로 인해 일그러지는 내 마음의 ‘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낙지라는 생명을 먹고 나라는 생명이 살아가는 그런 관계성은 이 정의의 안중에 그다지 없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물리학자 장회익은 로위의 정의에 관계성을 보태 새로운 우주적 생명 개념을 만들어낸다. 즉, 생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사’, ‘생식’, ‘진화’ 외에 개체간의 ‘협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체들 간의 긴밀한 협동체계 속에서만 개별 생명체들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협동체계 전체를 ‘온생명’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나타낸다. 그리고 각 개체들, 즉 ‘개체 생명’과 구분한다.(누군가 ‘낱생명’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개체생명 보다는 우리말 어감상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낱생명이라는 표현을 쓰겠다.) 그리고 온생명에서 낱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낱생명의 ‘보생명’이라고 명명한다. 보생명은 이른바 ‘환경’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장회익의 요지는 어떤 생명이든 온생명적 구조 속에서 보생명과의 협동을 통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온생명 안에서 낱생명이 유지되어갈 뿐만 아니라 낱생명은 온생명적 구조를 반영해준다는 것이다. 탁월한 정리가 아닐 수 없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 그런데 이것만으로 끝내기에도 좀 찜찜한 데가 있다. 그것은 짐승과 인간생명의 차이를 어디서 볼 것인가 하는 점 때문이다. 온생명의 논리와 차원에서 보면, 모두가 서로에 대해 보생명이며, 낱생명은 그것이 무엇이든 온생명의 주체이다. 여기서는 원칙적으로 인간과 짐승 간 차이가 전혀 없다. 낱생명들 간의 우열성은 찾을 길이 없다. 심지어 모기 한 마리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일본 철학자 니시타니의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 여름밤에 밖에서 한 마리의 모기가 날아든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하고 환호라도 하듯이 쾌활하고 힘찬 소리를 내면서 달려온다. 그러나 잡혀서 손바닥 안에서 짓눌리는 순간 그 미물은 세찬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비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소리는 분명 개의 비명이나 인간의 비명과는 다르다. 그러나 비명이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같은 소리다. 그와 같은 소리는 모두 공기의 진동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각각 파장이 다를지는 몰라도 우리로서는 그것을 비명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같은 질, 혹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소리에 슬픔을 직접 느낀다. 그것은 바로 감응의 장에서 성립하는 현상이 아닐까. 짐승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에는 적어도 평면적으로 보면, 별 차이가 없다. 모기 한 마리의 비명이나 인간의 비명은 물리학적으로 보면 공기의 울림 정도에서 차이가 날뿐, 개체적 생명의 소멸이라는 점에서는 모기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매일반이다. 원자나 전자 단위로 해체시켜놓고 보면 더욱이나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손가락 하나로 까딱 꺾여 스러지고 마는 코스모스 한 송이를 보면서도 인간에게는 연민이나 안타까움이라는 마음의 파장도 일어난다. 그래서 모기의 비명에서도 자신의 비명을 연상하기도 한다. 아무리 침실을 방해했기로서니 나의 파리채에 맞아 압사당한 파리의 최후를 보는 일도 유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리의 죽음에서조차 크든 작든 나의 죽임을 보기 때문이다.   서대문 형무소에는 사형수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연민과 감응 이런 연민 내지 감응을 경험할 줄 아는 이가 바로 인간이다. 짐승들에게 그런 감응이나 연민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물론 짐승에게도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려는 본능 같은 것은 있지만,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대한 연민까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상적 인간이라면 남의 죽음을, 심지어 미물의 죽음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킬 줄 안다는 것이다. 간혹 그런 연민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 그대로 짐승 같은 희대의 살인마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분명 치유의 대상이다. 연민과 감응의 능력을 최소한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누군가에게 벌어진 억울하고 무참한 희생도 사실은 내가 포함된 보생명과의 관계성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나도 그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 책임을 통감하는 차원에서라도, 살인마에게조차 치유의 기회는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런 희망이 없이 어찌 교육을 하고 종교를 하며 의료를 하겠는가. 몸의 치유든 마음의 치유든, 치유를 통해 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믿기에, 종교도 추구하고 교육도 도모하며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의사들도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 희망을 가질 때 사라져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사형제도이다. 없어져야 할 것, 사형제도 사형은 사적인 살인에 대응하는 공적인 살인이다. 사형의 논리에는 연민도 동정도 없는 인간에게는 똑같이 연민도 동정도 필요 없다는, 고대의 동태복수법적 발상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러한 연민을 무시하고서 어떻게 인간이기를 바라고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억울한 희생을 당한 당사자나 유가족의 분노도 한편에서는 존중해야겠지만, 살인을 살인으로 갚는 것은 결코 연민이라는 인간의 깊은 본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깊은 본성을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어찌 짐승과의 차이를 말할 수 있겠는가. 연민과 감응이 무너지는 곳에서는 인간도 무너진다. 미물의 죽음에서조차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자 짐승과의 차이라면, 하물며 사람의 죽음에서이겠는가. 사형은 인간의 본래적 능력을 억지로 거스르는 행위이다. 사형 선고가 아무리 ‘공식적’ 판결이라 하지만, 그러한 판결이 이루어지고 집행되는 과정 속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연민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이 들어있다.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지만, 그가 기꺼이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사형을 직접 집행하지는 않아도 되는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 공식적 살인이 자신과 상관없이 저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냥 외면해도 될법한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재판장이 직접 사형을 집행까지 해야 한다면, 사형 선고 자체가 없어지거나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 연민의 요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형집행인인들 어찌 마음 편안한 일을 하는 것이겠는가. 사형수를 눈앞에서 보고 죽음을 확인해야 하는 집행인은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직업이라는 일종의 권력 구조 속에 있기에 피치 못하게 사형을 집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민의 목소리는 늘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서 꿈틀댄다. 오랫동안 사형수 담당 교도관으로 일했던 고중열씨가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비로소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다며 과거의 아픈 상처를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이의 고백은 직업이라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연민을 애써 외면하고자 했으나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인간적 본성을 잘 보여준다. 사형제도는 폐지되고, 연민의 마음은 보존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사형이 폐지되고 치료가 확대될 때 사형해야 할 일 자체가 줄어들 것이다. 그것은 설령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신동아>(08년 1월)에 소개된 전직 사형수 담당 교도관 고중열씨의 사연을 읽고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았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45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교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영어공교육프로젝트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막강한 권력이 현직 대통령의 그것을 능가하고 각종의 정책구상이 기정사실화되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앞으로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의 지지자들조차도 놀랄 정책들이 줄을 이을 듯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영어공교육 프로젝트라고 생각된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기본생활이 영어로 가능하도록 하고, 이를 위해 영어교사를 해외에 보내 연수시키고 영어전용교사를 충원할 계획이란다. 영어수업은 영어로 한단다. 필자와 같이 공부를 하면서도 영어를 주로 책을 읽는 데만 사용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영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싶은 갈구는 결코 작지 않으니 영어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인수위의 구상은 현실의 필요에 부응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어 잘 하는 사람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한국에서 어느 누가 영어를 잘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과연 이 정책은 올바른 방향이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충실한 영어교육은 필요하다 영어라는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외국과의 교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서적을 읽어야 하거나 외국회사 또는 기관과 교류를 하여야 하는 경우에 외국어에 대한 필요는 절실하다. 필자도 영어를 30여년 접하고 공부해왔지만 영어를 좀 더 잘했으면 하는 바람은 강하게 가지고 있다. 영어가 서툴러서 아쉬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은 외국에 유학을 한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상당수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영어를 과목으로 두고 가르치는 이상 좀 더 실용적으로 가르치고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을 혁신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수십 년 동안 영어를 배웠어도 영어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걸 보면 그 동안의 영어교육이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좀 더 나은 방법과 내용으로 교육을 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영어교육을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유독 영어교육만 강조되는 이유는? 그러나 교육문제 가운데 왜 영어교육이 정상화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는 의문이다. 교육 가운데 제일 큰 문제는 공교육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아닐까? 대학은 중등학교의 성적 기타 평가를 불신하고 학생과 학부모 역시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에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공교육의 문제를 해결할 구상은 없는가? 우리의 엄청난 교육열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대학 가면 별 쓸모없을 지식을 암기하는 데 그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여한다는 것이다. 진정 효과적이고 유용한 교육을 할 방안은 무엇인가? 전반적인 공교육 정상화 방안이 어려워서 영어교육만이라도 정상화시키겠다는 뜻이라고 하자. 그런다 해도 과연 모든 국민이 영어를 모두 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의 대부분이 외국과의 관련이라고는 주로 여행밖에 없는 경우 과연 일상생활을 영어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공부를 하여야 할 필요는 있는 것일까? 학교교육에서 과목이 많고 수업시간도 많다 하여 과목과 교육시간을 줄이려고 한다면 공교육을 통해 교육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떻게 결정하는 게 합리적일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영어교육을 강화하면 다른 교육이 그만큼 양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중심의 질서가 영원할 것처럼 또한 외국어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해도 외국어 가운데 영어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다. 현재 전 지구적 지배질서가 미국중심으로 되어 있고 이러한 질서가 오래 갈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의외로 일찍 달러의 약화와 함께 미국중심의 질서가 붕괴될 것이라는 예측도 많다. EU나 중국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고 우리도 이들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중국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교류의 내용과 폭도 다양하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외국어 가운데 유독 영어 교육만 이렇게 강조되어야 할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언어는 수요가 결코 적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늘 것으로 보인다. 영어교육의 현실 다른 문제는 영어교육의 현실이다. 영어를 사용하여 교육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그런 수업을 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대학에서도 영어로 수업하는 강의에서 강사가 영어표현에 어려움을 느껴 전달하는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학생 가운데는 외국생활을 오랫동안 한 경우도 많아 이들은 강사의 ‘어설픈’ 영어강의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영어교사를 외국에 보내 연수시키면 이들의 수업능력은 많이 향상될 것으로 생각된다. 매년 3000명을 보낸다니 예산이 뒷받침되면 영어교육능력은 장기적으로는 분명히 향상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정책방향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만큼 국민적 합의를 얻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정책은 대통령선거중에 제시되지도 않았고 지금도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대통령 임기 5년 중에 큰 줄기를 만들겠지만 이러한 정책이 다음 정부에서도 이 정책이 계속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다. 정부가 밀어붙이면 당분간은 계획대로 하겠지만 분명히 영어강의를 할 정도로 역량이 강화될 때까지는 무늬만 영어전용강의를 하게 되어 심각한 비판에 봉착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시행착오나 궤도에 오르기까지의 여러 문제를 감수하고라도 가야 할 전 국민적 합의가 있다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은 그러한 합의가 전혀 없다. 번번히 대학입시정책에서 겪는 시행착오처럼 매년 정책을 수정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지난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대입 3단계 자율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기러기, 펭귄, 독수리 아빠는 왜 생기나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의 문제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인수위 위원장의 말처럼 외국유학의 문제가 영어공교육을 강화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자녀들을 외국에 유학 보내고 혼자 생활하는 걸 감수하는 기러기, 펭귄 아빠들이 애들 영어 공부시키자는 걸 제일 중요한 목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 현실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이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외국생활에서 얻는 중요한 이익이기는 하지만 부수적으로 얻는 것이다. 필자도 연구년을 받아 지금 외국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 겨우 1달이 되었지만, 1달 만에 아이들이 나중에 한국에 안 돌아가면 안 되느냐고 묻는 소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직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아이들이 이곳의 학교에서 무엇을 보고 배운 것일지 궁금하다. 지금 외국의 교육제도를 칭찬하거나 한국의 교육제도가 잘못이라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공교육제도에서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외국에 가서 활기를 찾고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을 받아 만족하는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걸 보면 많은 비용과 가족의 별리를 감수한 외국유학이 영어공부 때문만이 아님을 알 것이다. 단언컨대 지금의 교육제도에서 영어교육을 강화한다고 펭귄, 기러기 아빠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독수리 아빠는 말할 필요도 없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사교육이 없어질 것인가 더구나 우리의 상황은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고는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이나 버젓한 직장을 얻기 어려운 사회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이 제아무리 정상화된다고 하여도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려면 남들보다 더 나은 점수를 얻지 않고는 안 되니 어찌 공교육에 만족할 것인가? 학교는 변별력을 얻기 위하여 더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게 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사교육이 어찌 없어질 것인가? 영어만큼은 과외 없이도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지만 그럴수록 고급영어에 대한 필요가 커지는 법이니 이제 학원과외와 영어공부를 위한 해외연수가 더 많아질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는 데 경쟁이 치열하면 그 자원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자격 이외의 다른 고려요소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대학이 서열화된 우리 사회에서 영어 과외 받지 않고도 대학 갈 수 있게 하겠다는 말은 허망한 얘기다. ‘3년의 고등학교 교육 충실하게 이수한 학생이면 누구나 쉽게 풀 수 있는 쉬운 문제’로 수능을 출제해봐야 새로 출범한 정부의 정책처럼 대학입시 자율화를 하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고 싶은 어느 대학이 그 점수만 가지고 학생을 선발하겠는가? 교육은 백년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 공교육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국가를 만들려고 꿈꾸고 있는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모든 국민이 국제적 활동을 하도록 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하고 있는가? 특히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영원할 것처럼 영어교육 일변도로 나가도 되는 것일까? 전 세계가 중국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고 EU의 비중도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는 왜 세계화를 내세우면 미국중심의 질서만 공고하리라고 보는 것일까? 한국사회의 지배집단이 영어를 통해 입신한 사람들이어서인가? 언어만 해도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전문가가 양성되어야 할 언어는 적지 않다. 영어의 비중을 높일수록 이들 언어에 대한 비중은 그만큼 줄어든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와 더욱 교류가 활발해질 나라는 중국과 일본이다. 이 사람들과도 영어로 얘기할 것인가? 내용이 충실한 교육이 더 중요하다 언어교육은 교육 가운데 하드웨어의 측면이라고 생각된다. 더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가 아닐까? 올바른 삶을 누리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 현대세계에서의 올바른 인간의 삶과 필요한 지식에 대한 교육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영어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이것을 소홀히 하자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한정된 자원을 사용하면서 영어의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다른 부분의 교육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질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어설픈 영어교육보다 충실한 교육내용이 우선이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고 어설픈 영어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생각되므로 모든 과목을 영어로 교육하겠다는 이른바 영어몰입교육이 철회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애꿎은 학생들이 실험대상이 되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47 | 추천: 0
이광조/ CBS PD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는 먹지 말자 낡은 플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 정호승, ‘산낙지를 위하여’ 내가 좋아하는 한 시인은 맛있는 산낙지를 먹다 말고 이런 시를 썼다. 시인의 감수성이라고는 없는데다 먹보인 나로선 상상도 못할 발상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를 보며 나 또한 가슴 속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무엇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낙지며 대합, 홍합, 새조개, 키조개 등의 각종 조개와 싱싱한 물고기들을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가에 대한 분노였다. 참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발상 같기도 하지만 내가 나름대로 정의감을 갖고 분노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생존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것보다는 그들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지켜주면서 먹는 게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뜬금없이 웬 낙지 얘기냐? 태안 앞바다를 기름으로 뒤덮어버린 원유유출 사건에 열을 받았기 때문이다. 뭇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은 아니지만 기름을 온몸에 뒤집어 쓴 채 죽어가는 철새와 물고기들을 보면 코끝이 찡하다. 말 못하는 짐승들이지만 얼마나 고통스럽고 황당했겠는가. 더구나 사고를 내고도 한 달 가까이 사과 한마디 안하고 버틴 사람들을 보면 입에서 욕이 절로 난다. 이런 판국에 한편에선 대통령 직 인수위원회가 새만금에 18홀 골프장을 최대 30개까지 짓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세계 최대란다. 물론 새만금에는 골프장만 짓는 것이 아니다. 대규모 항만과 산업단지, 공항, 물류기지 등을 만든단다. 애초에 부족한 농지를 만들기 위해 여의도 면적의 100배에 이르는 거대한 간척지를 만든다고 하더니 이제 농지는 안중에도 없다. 처음부터 ‘농지를 만든다는 건 거짓말 아니냐’며 그렇게 따졌지만 식량부족, 통일시대 운운하며 농지가 필요하다고 우겼던, 아니 새빨간 거짓말을 했던 사람들은 찔리는 구석도 없는 것처럼 당당하기만 하다. 그 갯벌이 당신들 것인가? 갯벌 근처에 사는 주민들의 것인가? 전북도민들만의 것인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갯벌의 혜택을 많이 누리는 거야 시비를 걸 일이 아니지만 그 갯벌은 전북도민만의 것도 아니고 갯벌 근처에 사는 주민들만의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그 갯벌이 책임이라고는 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갯벌의 풍광과 그 속에서 자연이 베푸는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고 지구를 한 바퀴씩 돌며 잠깐씩 그곳에 들르는 철새들도 갯벌에서 굶주린 배를 채우며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건만 누가 무슨 권리로 모든 생명이 함께 누려야할 갯벌을 망가뜨리고 팔아먹는단 말인가.   태안반도 곳곳에는 폐사된 해산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흥분했다. 낙후된 지역에는 개발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갯벌도 어느 정도는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무식하게 공공의 자산을 함부로 망가뜨리는 사례는 듣지 못했다. 원유사고로 인한 생태계 파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갯벌이라는 생태계의 보고가 아예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세계 5대 갯벌 생태계로 꼽혔던 우리나라의 갯벌은 지난 1985년에 비해 이미 면적 자체가 25퍼센트나 줄어들었고 갯벌의 오염과 파괴 정도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동서남해안 발전 특별법으로 인해 국토의 29퍼센트에 이르는 연안지역에 개발위험에 놓였다고 하니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갯벌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름범벅이 된 태안 연안과 충남의 해안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각종 간척사업과 물막이 공사로 갯벌의 존재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던 곳이다. 여기에 기름 오염까지 덮쳤으니 그 수 많은 생명들의 원성을 누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조개구이며 홍합국물을 즐기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이 먹고 있는 조개와 홍합의 상당수가 이미 중국과 북한에서 수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전북 부안의 채석강에서 우리가 중국산 백합조개를 사먹어야겠는가. 미안한 마음으로 산낙지를 먹건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먹건 낙지들이 살 수 있게 그 터전만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산낙지와 조개들을 생각하면 슬프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89 | 추천: 0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우스갯소리로 "강원도는 운하사업에서도 소외됐어. 동서대운하 파달라고 요구해야 되는거 아냐 ?"라는 말이 떠돌았었다. '강원도 무대접론'을 빌려 대운하 사업에 시비를 거는 말일게다. 그러면서 강원도 사람들은 강원도가 대운하 물길에 비켜서게 된 것에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남한강이 지나가는 원주에 경부운하 터미널이 들어선다는 입소문이 퍼지고 곧 지역 언론이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인심이라지만 권력의 기세가 등등한 정권 이양기 라서 인지 여기저기서 대운하 지지 발언이 터져 나오고 강원발전의 새로운 기회라는 헛물켜는 주장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강원도지사는 봉이 김선달식 물장사 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운하에 큰 배가 지나가면서 환경오염이 되고 식수원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에 운하 찬성론자들은 강바닥 지하수를 뽑아 먹으면 된다고 반론을 했는데 아무래도 강바닥 지하수도 찝찝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니까 수십 억 톤의 저수량을 자랑하는 소양호 물을 수도권 주민에게 팔아서 강원도도 돈좀 벌어보자 라는 물장수 론이 등장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부대운하 덕분에 낙후되고 소외된 강원도가 발전의 기회를 잡는 셈이 되는 것이다. 강원도 사람들이 암하노불(巖下老佛, '바위 밑의 오래된 불상(佛像)'의 뜻으로, '산골의 착하기 만한 사람'을 평한 말)이라는 말처럼 순진 한 건지 아니면 워낙 도세가 약하다 보니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강원도 발전의 기회라는 주장은 백보 양보해도 정신없는 소리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겠다는 교육정책을 보면 강원도사람들은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강원도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기반이 취약하며, 강원도 사람들은 대부분 족집게 학원에 다닐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없고 경제적 조건이 되더라도 그런 학원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그래서 일부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방학기간에 대치동에 원룸을 구해놓고 아이를 족집게 학원에 보내기도 한다. 기업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풀어버리겠다는 수도권 규제는 "당신들은 평생 촌놈으로 살아라"라는 족쇄를 채울 뿐이다. 기업유치를 위해 발로 뛰고 있는 단체장들의 노력도 무색하게 쓸 만한 기업들이 강원도에 올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림 출처 - 강원일보 북한이 핵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지원을 하겠다는 상호주의가 남북 관계를 냉각시키면 강원도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접경지역 개발 사업은 개점 휴업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밀어 닥치는 경쟁력 지상주의, 시장 숭배주의는 강원도처럼 경쟁의 출발선에 설 능력도 안 되는 지역이나 사람들에게는 모멸감과 좌절을 안길뿐이다. 그래도 소양호 물이라도 팔아 '지역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면 그런 방법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쩌랴 ! 소양호 물은 이미 주인이 있다. 한국수자원공사가 소양호 물의 주인인데 강원도가 무슨 수로 소양호 물을 수도권 주민에게 팔아서 이익을 챙길 수 있을까 ? 이래저래 우울한 새해 시작이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53 | 추천: 0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일본에 사나다 요시아키(眞田芳憲)라는 법학자가 계시다. 내가 일본에서 일 년간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도 이리저리 큰 도움을 주고 계신 분이다. 일본의 주오대학(中央大學) 법대(한국으로 치면 고려대 법대)에서 은퇴하신 뒤, 지금은 WCRP평화연구소 소장으로 봉사하고 계신다. 로마법과 이슬람법 권위자시면서, 한국 종교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마치 옛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고대하던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으며, 이제는 나를 한국 종교 선생으로 모시겠다고 진담 섞인 농담을 던지시기도 한다. 한국의 젊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만큼 인격적인 분이시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이를 뛰어넘는 열정도 동시에 느껴지는 분이시다. 나는 요즘 매월 한국종교에 대한 논문을 준비해 그분을 비롯한 몇몇 일본 학자들과 함께 한국 종교 및 종교간 대화론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한 번은 종교의 역기능에 관한 논의 중에 사나다 선생이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평생 바쳐 일 해온 법률학에 대한 절망감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본 법조계 주요 인물의 절반가량이 자신의 제자이지만, 일본 사회는 더욱 실망스러워지고 있으며, 자신이 평생 바쳐 연구하고 가르친 법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개탄스러워하셨다. 본래 정신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법은 사회 정의 내지 인류의 평화와 거리가 멀다는 그분의 짧지만 강렬한 고백 속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한국의 비슷한 상황이 중첩되어 떠올랐다. 이미 좀 알려지기도 했거니와, 나는 기독교계 강남대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치다가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재임용을 거부당했다. 교육부에서 나에 대한 재임용 거부는 객관적 사유에 근거하지 않은 부당한 처사이니 취소하라는 결정을 내리자, 학교는 다시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행정법원에서도 동일한 결론을 내리자 이번에는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물론 학교 내 이런 강경파는 극소수이지만, 사태는 언제나 힘 있는 극소수의 목소리대로 흘러간다. 어쨌든 그로 인해 학교 측 변호사가 작성한, 이른바 항소용 준비서면이라는 것을 올 연말 동경에서 받을 수 있었다.   강남대학교 항소이유와 내용을 표현 그대로 요약하면, 기독교 시간에 기독교를 비판하고 타종교를 찬양하는 사람을 기독교 학교가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교육부, 행정법원을 거치면서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는지, 이제는 내가 아예 기독교를 비판하고 타종교만을 찬양하는 반기독교인처럼 둔갑시키고 있었다. 항소장은 사건의 근본 맥락을 벗어난, 말 그대로 침소봉대 자체였다. 이전 내용보다도 더 유치해진 듯 했다. 동일한 내용과 이유로 연달아 패소했던 탓인지, 거짓에 가까운 자료들도 동원되었다. 어떤 것은 한심하기까지 했다. 몇 년 전인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대학 후배가 자신의 직장 일이라며 원고를 요청하기에 ‘심볼리안’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사이비종교’에 관한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동서양의 신비주의, 신화 등의 자료를 소개하는 사이트였다는 기억만 하고 하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를 구했는지, 항소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비기독교적인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비기독교적인 사람이라는 증거자료라며 내 글과 함께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상세한 소개서를 제출했다. 내가 쓴 글의 내용은 사이비 종교를 비난만 하지 말고 자신의 ‘사이비성’ - 겉으로는 진리와 비슷해 보이지만(似) 속으로는 아닌(非) – 도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비교적 교훈적인 글이었는데, 우스운 것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그 사이트에 글을 싣는 행위 자체가 문제라며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출된 다른 증거자료들도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긴 가만 보면 변호사가 그 내용까지 문제 삼을 능력은 없었던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정도의 글이라면 지금까지 족히 수백 편은 썼을 텐데, 겨우 그 중에 한두 개를, 그것도 내용 핵심도 파악하지 못한 채 결정적인 증거자료나 되는 듯 제시하는 변호사의 수준 때문이었다. 인터넷을 더 뒤져서 내가 신문, 잡지, 인터넷 언론 등 기독교와 관계없는 수많은 곳에 기고하고 올린 글들은 왜 문제 삼지 않았는지 우스웠다. 이런 수준으로 무엇을 어떻게 변호하겠다는 것인지 웃음이 다 나왔다. 변호사가 종교에 문외한이라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항소장의 전체적 수준도 의심스러웠다. 객관적이지 않은 학교 측의 처사를 문제 삼은 교육부와 행정법원의 결정에 대해, 대학에는 자율성이 있어야 하며, 또 그 자율성에 따라 이루어진 재임용 심사에 심사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로 글이 전개되었다. 마치 중학생 수준의 논리와 작문 실력을 보는 느낌이었다. 별 말을 다 끌어내는구나 싶었다. 그 논리는 결국 자가당착에 빠져, 강남대의 결정이 주관적, 자의적이라는 것을 대신 입증해주는 것 같았다. 한숨이 또 나왔다. 그저 즐기며 편안히 대응해야지 싶다가도,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나로서는 또 한 번 이 유치한 논쟁 속에 긴 시간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법이란 무엇인가, 변호사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들도 법학도를 꿈꾸고 법조인을 희망하던 시절에는 정의의 편에서 어려운 이를 돕겠노라는 순수한 열망에 불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률 지식이 그저 하나의 직업이 되고 축재와 출세의 수단이 되는 순간, 변호사라는 직업은 수임료와 실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신숭배자’가 될 가능성이 무엇보다도 커진다.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동일한 진리의 이름으로 쌍방이 싸워야 하는 변호사들은 둘 중 하나는 잘못된 편에 설 수 밖에 없을 테니, 변호사는 태생적으로 진리와 정의를 온전히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자기편 의뢰인에게는 기쁨을 줄 수 있겠지만, 상대방에게는 아픔을 줄 수밖에 없는 잔인한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사건 당사자에게는 인생이 걸리다시피 중요한 문제를 단 며칠 만에 다 파악하고 또 판단할 만한 능력이라도 있는 냥, 남의 인생 전체를 쉽사리 규정하는 직업적 분위기 역시 가당치 않게 느껴졌다. 나의 월권이고 오만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변호사가 이러한 근원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법 본연의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건을 맡을 때 절대로 돈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받지 않아야 할 아픔과 상처를 받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어야 한다. 사건 자체가 사회적 정의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먼저 두루 진지하게 탐색한 뒤, 정의에 부합한다고 판단되면 그 때 양심을 걸고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것이 변호사이다. 그 때 생긴 수임료는 정당하고 떳떳한 대가가 될 것이다. 거꾸로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변호를 맡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정의롭지 않은 일들은 법정에 설 일이 줄어들 테고 결국 자연 도태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변호사는 가난해지거나 적어도 부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풍요로운 가난의 길을 가는 것이 법조인의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고 법 본연의 정신을 사회 속에 ‘구체화’시켜 주지 않겠는가. 나는 변호사도 아니고 법률 공부를 한 적도 없지만, 법원 서류 한 두 번 받아보고는 대번에 느꼈다. 법조인의 현실적인 한계라는 것을……. 수십 년 법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일본 법학계의 권위자 사나다 선생의 절망과 한탄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변호사들에게도 정말 묻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일하느냐고…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론 언제나 정의 편에 서려는 존경스러운 변호사들도 많다는 것을 잘 안다. 가능한 한 불의 편에 서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법조인도 못지않게 많을 것이다. 그래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변호사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법조인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양식을 가진 이라면 알 것이다.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돈과 권력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 편에 서고자 하는 이라야 진짜 법조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한 때 유행하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정말 유치원 시절에 배운 삶의 이치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런 기대와 희망은 품어도 되는 것일까. 하늘의 뜻을 실천하겠다며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들도 어느 순간 직업형, 사업형 목사로 전락하고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거룩한 하늘의 이름을 팔아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상이니, 법률의 세계에선들 무엇이 다르겠으며 무엇을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실종된 정의와 양심을 회복하기는커녕 현실이라는 미명 하에 정의와 인권의 본질을 전도시키는 일도 다반사니 말이다. 철학자 가다머가 자신의 책 <진리와 방법>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방법’이 ‘진리’를 압도하는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의 방조자로 산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될 사람이 음성적으로 더 그렇게 되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법조인과 교회가 그렇게 많아도 사회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법조인과 교회의 숫자는 인간답지 못한 세상의 척도로까지 쓰이기도 한다. 그런들 어쩌랴. 상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정의와 인간의 근본 가치가 회복되기를 희망하며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기독교인의 팔자이기에, 나는 그저 내 식대로 기독교적인 길을 갈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그 말이 다소 거창하다면, 최소한 나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진리는 죽임이 아니라,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생명을 살리는 아주 작고 단순한 데 있다는 사실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70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솔직히 이번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누구 하나 마음에 드는 후보도 없을뿐더러, 그마나 정책대결의 시늉이라도 하던 과거 대선과 달리 후보들의 정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진흙탕 싸움만 구경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우울해서 신문도 보지 않았다. 친 재벌 정책을 옹호하는 후보가 서민경제를 살리겠다고 하고 노동단체가 지지성명을 발표하지 않나, 좌파정부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좌파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좌파정부라는 비난이 근거 없는 오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집권여당의 후보가 세금폭탄 없는 나라(세금폭탄은 부동산 가격이 갑자기 올라서 재산이 엄청 늘어난 사람이나 맞는 폭탄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나 온통 뒤범벅이 되어 도무지 정체성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다보니 내 주변에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후보자 12명 이름 위에 모두 도장을 찍고 나온다는 사람도 있고, 투표하러 가는 대신에 여행이나 가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본래 민주주의란 국민의 참여에 의해 그들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그 핵심이고, 5년에 한번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는 모든 국민이 투표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날이기 때문에 축제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공약이나 정책은 아예 뒷전이고, 어떤 후보가 국민의 의사를 잘 대변할 수 있는가하는 고려도 완전히 무시된 채 선두를 달리는 후보의 범죄혐의와 거짓말을 둘러싼 첨예한 공방만 계속되었고, 그 후보는 당선이 된 이후에도 특검에서 조사를 받고 최악의 경우 당선무효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게 생겼으니, 이런 상황에서 진행되는 선거가 축제일이 될 리 만무하다. 이처럼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하는 선거에서 뽑힌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어차피 국민들은 “그 놈이 그 놈”이고 “어디 깨끗한 놈이 있나”라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반감에 젖어있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준 선거였다.   대선개표현장 사진 출처 - 뉴시스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어찌되든 민주화 세력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런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지 뼈아프게 성찰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구체적인 실천과 대안 없이 열정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상대적으로 도덕적이라는 점만으로 모든 잘못이 용서되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누린 기득권에 취해 자만한 것은 아닌지. 수구 세력들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집결하는 동안 소위 민주화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마음을 얻고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선거의 결과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를 저버린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일 뿐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포기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기대가 더 큰 회의와 실망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한탄하거나 선거결과에 실망할 때가 아니라, 다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시작할 때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 노동시장의 위기, 빈곤층의 문제, 환경위기, 부패한 재벌의 문제 등 경제. 사회적 기득권층과 그 나머지 국민들의 이해가 대립되는 중요한 의제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민주화세력은 이러한 의제들 속에서 누구의 입장을 대변할 것인가를 명확히 정하고 그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10년 동안의 집권 경험은 유익한 자산이 될 것이다. 현 정부가 그런 것처럼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는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주장만 옳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몸을 낮추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일상의 삶을 들여다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거가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에,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지금까지 꽤 먼 길을 걸어 왔는데 실망하거나 포기하고 주저앉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2017-06-22 | hrights | 조회: 3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