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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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광조/ CBS PD 군사용어에 “부수적 피해”라는 말이 있다. 전투행위시 불가피하게 따르는 민간인 피해를 이르는 말이다. “피해”라는 단어는 전쟁의 참상을 중화시키는 효과가 있는 듯 하다. 피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리는 건 교통사고나 태풍 등의 자연재해가 아닐까 싶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부수적 피해”라는 말 속에서 팔,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부수적”이라는 수식어는 더 기가 막히다. “부수적”이라는 말 속에는 ‘군사적 목적을 위한 행동에 따르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라는 뜻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피해가 불가피하다는 뜻도 있지만 ‘고의는 아니다’라는 무책임함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과 이라크 침공,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서 엄청난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다.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사망한 민간인이 수 천 명에 이르고 이라크의 경우에는 최근 민간인 희생자가 65만 여 명에 이른다는 한 미국 대학 연구팀의 조사 결과까지 나왔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서도 이 보다는 적지만 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사람이 18만 여 명인 것을 생각하면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는 전쟁의 참상과 본질을 희석시키는 고약한 말인 듯 하다.     레바논 베이루트의 무슬림 시아파들이 살아가는 남부 지역, 파괴된 건물 더미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 수도 문제지만 공격에 동원된 무기와 공격방식은 더 큰 문제다. 미국에 이어 영국이 이라크에서 ‘백린’을 무기로 사용한 것이 논란이 된 데 이어 최근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하면서 ‘인폭탄’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 사람의 살갗을 태우는 ‘백린’은 ‘과도한 피해와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는 무기로 국제적십자가 사용금지를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이스라엘은 이런 호소를 콧등으로도 안 듣는 듯 하다. 이들 군사강대국들은 민간인이 밀집한 지역에서 ‘인폭탄’과 ‘집속탄(커다란 폭탄 속에 많은 수의 소형 폭발물이 장착돼 있어 소형폭발물이 분산 폭발하면서 살상반경을 넓힌 폭탄)’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고 적군이 있다고 의심되는 지역 전체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도심을 무차별 폭격하고 민간인 거주 지역에 집속탄을 투하하면서 민간인들의 희생을 예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법을 잘 모르지만 형사법적으로 따지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해당될 듯 하다. 2차 대전 이후 지구촌에서 벌어진 전쟁의 대부분은 군사력이 비대칭적인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이 그랬고 최근의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까지. 군사력이 불균등이 심한 상황에서 강대국이 물량 공세를 펼 때 이른바 “부수적 피해”는 커지기 마련이다. 최근의 전쟁에서 “부수적 피해”가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물량공세는 주로 서방 강대국들의 몫이다. 더구나 최근 벌어진 일련의 전쟁들은 이슬람에 대한 문화적 우월의식과 인종주의까지 암암리에 개입됐으니 전쟁의 양상은 더욱 참혹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후세인 같은 독재자는 법정에서 자기주장이라도 하지만 폭탄세례 속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은 이름도 목소리도 없다. 50년 전 이 땅에서도 전쟁으로 끔찍한 “부수적 피해”가 발생했다.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가 남북을 합쳐 수십만에 이른다(전쟁을 시작한 책임은 북한에 있지만 미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조그만 땅덩어리에 2차 세계대전 전 기간동안 사용된 폭탄의 3배 정도가 집중됐고 베트남전의 상징처럼 된 네이팜탄도 3만 2천 톤 이상 사용됐다. 주요 공격 대상은 북쪽의 도시들이었지만 남쪽에서도 강원도 영월, 충북 단양, 경북 예천에서 수 천 명의 민간인들이 네이팜탄의 화염 속에 목숨을 잃었다(더구나 이 네이팜탄들은 일본에서 생산된 것으로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가 펴낸 화염무기에 관한 한 저서에서는 ‘일본 경제 재건의 첫걸음이 한국의 도시를 파괴하는 네이팜탄 생산이었다는 사실은 일종의 역설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아프간과 이라크, 레바논에서 벌어지고 있는 죽음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 전쟁 소식을 보도하는 언론과 전쟁의 참상에 무감각한 우리 자신을 보면서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든다. 불과 반세기 전 ‘부수적 피해’의 희생자였던 우리가 어느 새 가해자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이스라엘의 폭격을 피해 이동하는 모녀의 모습. 전쟁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가중시킨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017-06-09 | hrights | 조회: 54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아이를 데리고 놀이동산에 간 어느 날,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늘어선 줄의 앞에 선 어느 젊은 여인이 내게 묻는다. “예수 믿으세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답이 없으니 그 다음 이어지는 말, “구원의 확신이 있으세요?” 참으로 난처한 질문이다. 초면에, 그것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사이에 단도직입적으로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그런 방식의 전도행위를 권하는 종교단체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는, 참으로 종교적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종교적 심성이 깊은 시민들로 가득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며칠 전 서울외국어고등학교에서는 어느 목사를 초청하여 학생들에게 종교예배 참석을 강요하고 또 그것이 앞으로 그 학교가 미션스쿨로 향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항의하는 글이 홈페이지에 올라오자 학교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을 삭제하였다. 이 문제에 관한 것은 졸업생들이 쓴 짧은 글 두어 편이 보일 뿐이다. 교장이나 이사장이 계획하였을 이런 일이 종교적 열정에 불타는 순수한 신앙심이나 학생들을 바로 기르기 위한 교육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오늘도 죄악에 허덕이는 불쌍한 불신자를 향한 전도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어느 종교인이나 자신이 믿는 신앙을 나누기를 원하고, 참으로 옳고 영원한 진리를 전파하고자 애쓴다.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몇 가지의 사례에서 앞으로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갈등의 요인이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징조를 읽는다. 매우 공격적인 종교적 태도와 선교의 방법이 일상화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기독교의 특정 종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진 출처 - 네이버 그렇다고 기독교만을 비판하자는 것도 기독교가 모두 그렇다고 말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른 종교가 더 낫다고 말하려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다만 잘못된 종교전파의 행태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고 바람직한 선교의 모습을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나 다른 어느 종교도 같은 행태를 보인다면 마찬가지의 비판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앞에서 든 예에 나타난 종교 전파의 방식은 우선 상대방을 존엄과 가치를 가진 인격으로 존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종교적으로 죄인이라고 보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의 생각이 올바르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람은 한 인간으로서 고귀한 존재이며 또 그렇게 대우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이 지나치면 자신이 깊이 믿어마지 않는 신앙을 가지지 않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저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모양이다. 성찰적 자세로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그러한 연민과 구원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결과가 불신지옥이라는 식의 공격적 선교행위로까지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이런 방식은 상대방의 궁박한 처지를 이용하여 종교적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다. 100여 년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는 국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으로 종교적 진리를 널리 펼쳐왔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인은 전 국민의 4분의 1에 달하고 종교단체 또는 종교인들이 수많은 학교를 ‘가지고’ 있고 사회적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학교교육에서 종교학교의 비중은 낮지 않으며, 취학전 교육 단계에서의 종교학교의 비중은 더욱 높아진다. 이와 같은 종교단체의 학교교육과정에서는 학교교육에 종교교육이 덧붙여져 학생의 의사에 반하는 종교교육과 선교가 이뤄지는 예가 많다. 교회 등 종교단체 안에서는 ‘감히’ 가하지 않고 또 가하지도 못할 강제를 학교에서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성적평가에 반영한다. 학생회 활동에 종교에 관한 조건을 붙이기도 한다. 교회와 같은 종교단체보다도 학교는 더욱 강력한 종교교육과 선교의 도구가 된다. 종교단체에서는 생각지도 않는 강제가 학교에서는 오히려 당연히 강제되는 기이한 현상이 교육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학교교육은 법률에 의하여 인정된 교육제도라는 점에서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제도종교가 학교를 통해 종교교육을 강제하는 것은 사실상 국가에 의한 종교교육 방임이라는 점에서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규정한 헌법에 반한다고 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종교적 행태의 뿌리는 멀리 이승만 정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는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자마자 이윤영 의원(목사)에게 개회기도를 부탁하여 국회에서 “하늘에 계신”으로 시작하여 “아멘”으로 끝맺는 전형적인 기독교식의 기도가 행해진다. 이 무렵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 국민의 5% 정도에 불과했음에도 이승만의 종교적 성향에 의하여 특정 종교의 기념일인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지정되고 군대와 교도소에 근무하는 종교성직자가 기독교에 한정된다. 기독교 편향적인 정책에 발맞춰 선거에서 기독교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세속국가에 당연시되는 정교분리에 관한 의식이 극히 미약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은 종교전파의 행태가 오늘날의 공격적 선교행태를 낳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종교인이 종교를 믿고 신앙을 전파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모든 사람이 종교적 차원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면 이 사회는 훨씬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의 전파는 종교적 삶의 거룩함과 감동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이어야지 권력을 이용한 강제적 방법으로 이뤄져서는 안된다. 인간의 깊은 심연에서 우러나는 고백이야말로 종교의 기초이며 그러한 고백은 결코 강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은 단순히 특정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기에 진지한 삶에 대한 고민과 인간의 깊이를 탐구함으로써 실시되어야 하는 것이며, 학생의 진지한 의사에 반하여 강제를 하는 것은 입으로만 종교적 진리를 고백하게 하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는 결국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교육적이지 않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그것이 종교의 자유라는 인권을 침해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올바른 종교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종교의 신자를 만드는 종교교육보다는 종교적 삶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고 특히 자신의 신앙 이외에 다른 종교를 이해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개종하여 자신의 종교적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신앙인의 징표라고 믿는 사람이 다수가 될수록 이 시회에서 종교가 촉발하는 갈등은 깊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원종교사회에서 올바른 종교교육이야말로 단지 필요한 것만 아니라 절박하기까지 한 주제이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57 | 추천: 0
유정배/ 참여와 자치를 위한 춘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지난 9월 24일, 반환 했거나 반환 예정인 29개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실태가 드러났다. 그동안 SOFA의 '환경정보공유 및 접근절차 부속서 A'를 핑계로 완강하게 공개를 거부하던 환경부가 일부 내용을 국회에 보고 한 것이다. 춘천에 있는 반환미군기지인 캠프 페이지(Camp Page)도 560개 토양오염 조사지점 중 185곳이, 지하수 71개 채취지점 중 10곳이 오염기준치를 크게 초과해서 오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언론은 캠프 페이지의 토양 오염정도가 심각해서 공장부지로 활용하기도 힘들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55년부터 존재한 캠프 페이지는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결과 지난 2004년 7월 전국의 14개 미군기지와 함께 우리 정부에 반환하기로 결정되었다. 춘천은 의암호를 비롯해 3개의 커다란 인공호수로 둘러싸인 ‘호반의 도시’로 여성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유명한 도시다. 그런데 춘천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경춘선을 타고 춘천역에 도착하면 먼저 호수가 있는 멋진 풍광을 만나는게 아니라 볼썽사나운 시멘트벽이 둘러친 군사기지와 훈련에 바쁜 아파치 헬기를 마주하게 된다. 20만평이 넘는 캠프 페이지는 춘천의 도심지 한가운데에 있어 도시공간을 기형적으로 왜곡하였고 캠프 페이지 주변지역 주민들의 삶을 파괴했다. 캠프 페이지는 춘천의 심벌인 의암호 가까이에서 시작해서 강원도청, 춘천시청, 겨울 연가 촬영지로 유명해진 ‘춘천명동’ 등 구도심의 중심지역 사이에 있다. 장소로 보면 춘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춘천의 얼굴이 50년 넘게 ‘국가안보’때문에 아파치 헬기와 외국군대의 위용에 자기 모습을 찾지 못한 채 숨죽여 왔다. 2005년 9월 열린우리당 최성의원은 캠프 페이지가 적어도 1987년 까지는 핵 기지 였다고 폭로했다. 주한미군의 핵기능이 ‘주한병기지원분견대(WSD-K)'에 의해 통합 운영되었는데 WSD-K의 사령관은 서울의 용산기지내 핵 계획·작전사단(2462빌딩)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지만 참모 대부분은 캠프 페이지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는 것을 보면, 춘천시민들이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핵무기에 저당 잡히면서도 일그러진 얼굴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기막힌 세월을 보낸 것이다. ▲춘천 캠프 페이지 전경. ⓒ 선대식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2001년 11월 춘천시민연대는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와 함께 캠프 페이지 주변지역인 근화동 주민 60여명의 헬기소음에 대한 청력반응, 스트레스 지수, 정신 심리적 상태 등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근화동 주민들의 건강상태는 다른 지역 주민보다 현저히 나쁜 것으로 드러났고 2003년 3월 근화동 주민 42명은 원고인단을 구성해서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 하여 1심에 승소,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2004년 7월 캠프 페이지 반환 결정 이후 춘천시민들은 캠프 페이지 터에 춘천에 잘 어울리는 얼굴을 복원 하기위해 골몰하고 있다. 지방자치제도 도입 이후 중앙에 예속된 지역이 아니라 지역만의 색깔을 가진 독특한 자립적 발전의 길이 모색되고 있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대안적 삶을 만들어 내는 공간으로 지역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 보아 춘천이 자신의 얼굴을 조각해 가는 과정은 ‘자치’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또 다른 시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군기지 환경오염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지방분권과 국토균형발전을 국정 목표로 삼고 있는 참여정부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지난 7월 14일 끝난 9차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SPI) 결과를 보면 미군이 8개 항목 치유를 끝냈으니 미군은 할 일을 다했고 우리정부는 이를 ‘믿고’ 반환 받는 것을 합의하겠다는 내용이다. SOFA에 규정되어 있고 정부 스스로 늘 주장해온 ‘오염자 부담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미군이 환경정화에 대한 성의를 보이고 있다며 미군의 입장을 수용 하려고만 하는 국방부는 반환미군기지 주민을 분권·분산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국가안보를 위한 영원한 희생자로 밖에 여기지 않는 듯하다. 캠프 페이지는 지난 6월부터 지하수의 기름을 제거하기 위한 정화에 들어갔지만 정화 방법 및 정화업체의 자격, 정화비용 문제 등으로 정화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 확산되는데도 강행되고 있다. 그리고 환경부는 여전히 환경오염 결과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 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고 행자부는 지방자치단체에 미군기지 반환지역의 개발계획을 조기에 완성해서 보고하라며 다그치고 있다. ‘국방·외교’는 중앙정부의 고유권한이므로 참여정부는 ‘중앙정부’의 역할에 충실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빨리 확보하도록 해서 ‘협력적 자주’를 조기에 완성, ‘자주국가’의 위용을 과시하려는 걸까? 어쨌든 중앙정부의 무원칙한 용기에 민주주의의 밑거름인 ‘지방자치’의 싹이 찬바람을 맞게 생긴 것은 분명해 보인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6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