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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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가끔 육식이 불편해 나는 식성이 좋은 편이다. 채식, 육식 가리지 않지만, 가끔 육식이 불편할 때가 있다. 몇 해 전 잠깐 육류를 자제한 적이 있는데 왠지 입이 허전한데다가 가끔 고기 몇 점 생각도 나곤 해서, 한 달이 채 못 되 짧은 채식생활이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요즘도 종종 고기를 먹다가 불현듯 찜찜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살점이 붙어있는 갈비를 맛있게 뜯다가도 문득 내 뼈와 살이 연상되기도 한다. 살아있는 낙지를 냄비 속에 넣고 부글부글 끓이는 해물탕 같은 음식을 보면 콧등과 미간 사이가 살짝 일그러진다. 마음속에서는 얼굴 전체가 일그러진다. 비록 음식이지만 내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편치 않다. 그러면 먹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정작 조리되고 나면 또 맛있게 잘 먹는다. 맛있게 먹고는 네 덕에 내가 산다며 아전인수적 해석을 하는 것으로 끝낸다. 그것이 현재 나의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그러면서 “하늘로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말씀을 나를 위해 죽어주는 낙지에 대한 변명으로 삼고, 나의 모순을 은근히 합리화한다. 그리고는 가끔 밥상머리 앞에서 종종 생명이란 무엇인가, 누가 왜 무엇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하는 상념을 속으로 슬쩍 떠올리곤 한다. 생명이란 생물학자 로위(G.W.Rowe)에 의하면, 생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첫째 주변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입하여 이를 자체 유지를 위해 사용하고(대사), 둘째, 개체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복제 능력을 가지며(생식), 셋째, 변화하는 환경에 맞서는 세대를 거쳐 가며 변이와 선택을 통한 적응을 해나가야 한다.(진화) 이것은 생명에 대한 유용한 정의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별 생명체에만 적용되는 정의이다. 이런 정의로는 내 음식이 되기 위해 죽어가는 낙지와 그로 인해 일그러지는 내 마음의 ‘관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낙지라는 생명을 먹고 나라는 생명이 살아가는 그런 관계성은 이 정의의 안중에 그다지 없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물리학자 장회익은 로위의 정의에 관계성을 보태 새로운 우주적 생명 개념을 만들어낸다. 즉, 생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사’, ‘생식’, ‘진화’ 외에 개체간의 ‘협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체들 간의 긴밀한 협동체계 속에서만 개별 생명체들도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협동체계 전체를 ‘온생명’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나타낸다. 그리고 각 개체들, 즉 ‘개체 생명’과 구분한다.(누군가 ‘낱생명’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개체생명 보다는 우리말 어감상 더 적절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낱생명이라는 표현을 쓰겠다.) 그리고 온생명에서 낱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낱생명의 ‘보생명’이라고 명명한다. 보생명은 이른바 ‘환경’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장회익의 요지는 어떤 생명이든 온생명적 구조 속에서 보생명과의 협동을 통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온생명 안에서 낱생명이 유지되어갈 뿐만 아니라 낱생명은 온생명적 구조를 반영해준다는 것이다. 탁월한 정리가 아닐 수 없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 그런데 이것만으로 끝내기에도 좀 찜찜한 데가 있다. 그것은 짐승과 인간생명의 차이를 어디서 볼 것인가 하는 점 때문이다. 온생명의 논리와 차원에서 보면, 모두가 서로에 대해 보생명이며, 낱생명은 그것이 무엇이든 온생명의 주체이다. 여기서는 원칙적으로 인간과 짐승 간 차이가 전혀 없다. 낱생명들 간의 우열성은 찾을 길이 없다. 심지어 모기 한 마리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일본 철학자 니시타니의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 여름밤에 밖에서 한 마리의 모기가 날아든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하고 환호라도 하듯이 쾌활하고 힘찬 소리를 내면서 달려온다. 그러나 잡혀서 손바닥 안에서 짓눌리는 순간 그 미물은 세찬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비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소리는 분명 개의 비명이나 인간의 비명과는 다르다. 그러나 비명이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같은 소리다. 그와 같은 소리는 모두 공기의 진동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서, 각각 파장이 다를지는 몰라도 우리로서는 그것을 비명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같은 질, 혹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소리에 슬픔을 직접 느낀다. 그것은 바로 감응의 장에서 성립하는 현상이 아닐까. 짐승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에는 적어도 평면적으로 보면, 별 차이가 없다. 모기 한 마리의 비명이나 인간의 비명은 물리학적으로 보면 공기의 울림 정도에서 차이가 날뿐, 개체적 생명의 소멸이라는 점에서는 모기의 죽음과 인간의 죽음은 매일반이다. 원자나 전자 단위로 해체시켜놓고 보면 더욱이나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손가락 하나로 까딱 꺾여 스러지고 마는 코스모스 한 송이를 보면서도 인간에게는 연민이나 안타까움이라는 마음의 파장도 일어난다. 그래서 모기의 비명에서도 자신의 비명을 연상하기도 한다. 아무리 침실을 방해했기로서니 나의 파리채에 맞아 압사당한 파리의 최후를 보는 일도 유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파리의 죽음에서조차 크든 작든 나의 죽임을 보기 때문이다.   서대문 형무소에는 사형수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연민과 감응 이런 연민 내지 감응을 경험할 줄 아는 이가 바로 인간이다. 짐승들에게 그런 감응이나 연민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물론 짐승에게도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려는 본능 같은 것은 있지만,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대한 연민까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상적 인간이라면 남의 죽음을, 심지어 미물의 죽음도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킬 줄 안다는 것이다. 간혹 그런 연민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 그대로 짐승 같은 희대의 살인마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분명 치유의 대상이다. 연민과 감응의 능력을 최소한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누군가에게 벌어진 억울하고 무참한 희생도 사실은 내가 포함된 보생명과의 관계성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나도 그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 책임을 통감하는 차원에서라도, 살인마에게조차 치유의 기회는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런 희망이 없이 어찌 교육을 하고 종교를 하며 의료를 하겠는가. 몸의 치유든 마음의 치유든, 치유를 통해 더 인간다워질 수 있다고 믿기에, 종교도 추구하고 교육도 도모하며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의사들도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런 희망을 가질 때 사라져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사형제도이다. 없어져야 할 것, 사형제도 사형은 사적인 살인에 대응하는 공적인 살인이다. 사형의 논리에는 연민도 동정도 없는 인간에게는 똑같이 연민도 동정도 필요 없다는, 고대의 동태복수법적 발상이 들어있다. 하지만 그러한 연민을 무시하고서 어떻게 인간이기를 바라고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억울한 희생을 당한 당사자나 유가족의 분노도 한편에서는 존중해야겠지만, 살인을 살인으로 갚는 것은 결코 연민이라는 인간의 깊은 본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 깊은 본성을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어찌 짐승과의 차이를 말할 수 있겠는가. 연민과 감응이 무너지는 곳에서는 인간도 무너진다. 미물의 죽음에서조차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자 짐승과의 차이라면, 하물며 사람의 죽음에서이겠는가. 사형은 인간의 본래적 능력을 억지로 거스르는 행위이다. 사형 선고가 아무리 ‘공식적’ 판결이라 하지만, 그러한 판결이 이루어지고 집행되는 과정 속에는 인간의 근본적인 연민에 대한 의도적인 외면이 들어있다.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지만, 그가 기꺼이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사형을 직접 집행하지는 않아도 되는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 공식적 살인이 자신과 상관없이 저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일인 냥 외면해도 될법한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재판장이 직접 사형을 집행까지 해야 한다면, 사형 선고 자체가 없어지거나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 연민의 요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형집행인인들 어찌 마음 편안한 일을 하는 것이겠는가. 사형수를 눈앞에서 보고 죽음을 확인해야 하는 집행인은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직업이라는 일종의 권력 구조 속에 있기에 피치 못하게 사형을 집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민의 목소리는 늘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서 꿈틀댄다. 오랫동안 사형수 담당 교도관으로 일했던 고중열씨가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비로소 다리 뻗고 잘 수 있겠다며 과거의 아픈 상처를 고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이의 고백은 직업이라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연민을 애써 외면하고자 했으나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인간적 본성을 잘 보여준다. 사형제도는 폐지되고, 연민의 마음은 보존하고 키워나가야 한다. 사형이 폐지되고 치료가 확대될 때 사형해야 할 일 자체가 줄어들 것이다. 그것은 설령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신동아>(08년 1월)에 소개된 전직 사형수 담당 교도관 고중열씨의 사연을 읽고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았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30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교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영어공교육프로젝트 정권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막강한 권력이 현직 대통령의 그것을 능가하고 각종의 정책구상이 기정사실화되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앞으로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의 지지자들조차도 놀랄 정책들이 줄을 이을 듯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영어공교육 프로젝트라고 생각된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기본생활이 영어로 가능하도록 하고, 이를 위해 영어교사를 해외에 보내 연수시키고 영어전용교사를 충원할 계획이란다. 영어수업은 영어로 한단다. 필자와 같이 공부를 하면서도 영어를 주로 책을 읽는 데만 사용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영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싶은 갈구는 결코 작지 않으니 영어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인수위의 구상은 현실의 필요에 부응한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어 잘 하는 사람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한국에서 어느 누가 영어를 잘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과연 이 정책은 올바른 방향이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충실한 영어교육은 필요하다 영어라는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외국과의 교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서적을 읽어야 하거나 외국회사 또는 기관과 교류를 하여야 하는 경우에 외국어에 대한 필요는 절실하다. 필자도 영어를 30여년 접하고 공부해왔지만 영어를 좀 더 잘했으면 하는 바람은 강하게 가지고 있다. 영어가 서툴러서 아쉬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은 외국에 유학을 한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상당수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영어를 과목으로 두고 가르치는 이상 좀 더 실용적으로 가르치고 공부할 수 있도록 교육을 혁신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수십 년 동안 영어를 배웠어도 영어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걸 보면 그 동안의 영어교육이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좀 더 나은 방법과 내용으로 교육을 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 영어교육을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는 구상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유독 영어교육만 강조되는 이유는? 그러나 교육문제 가운데 왜 영어교육이 정상화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는 의문이다. 교육 가운데 제일 큰 문제는 공교육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아닐까? 대학은 중등학교의 성적 기타 평가를 불신하고 학생과 학부모 역시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에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공교육의 문제를 해결할 구상은 없는가? 우리의 엄청난 교육열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대학 가면 별 쓸모없을 지식을 암기하는 데 그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여한다는 것이다. 진정 효과적이고 유용한 교육을 할 방안은 무엇인가? 전반적인 공교육 정상화 방안이 어려워서 영어교육만이라도 정상화시키겠다는 뜻이라고 하자. 그런다 해도 과연 모든 국민이 영어를 모두 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국민의 대부분이 외국과의 관련이라고는 주로 여행밖에 없는 경우 과연 일상생활을 영어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공부를 하여야 할 필요는 있는 것일까? 학교교육에서 과목이 많고 수업시간도 많다 하여 과목과 교육시간을 줄이려고 한다면 공교육을 통해 교육하고자 하는 내용을 어떻게 결정하는 게 합리적일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영어교육을 강화하면 다른 교육이 그만큼 양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중심의 질서가 영원할 것처럼 또한 외국어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해도 외국어 가운데 영어만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다. 현재 전 지구적 지배질서가 미국중심으로 되어 있고 이러한 질서가 오래 갈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의외로 일찍 달러의 약화와 함께 미국중심의 질서가 붕괴될 것이라는 예측도 많다. EU나 중국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고 우리도 이들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중국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교류의 내용과 폭도 다양하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외국어 가운데 유독 영어 교육만 이렇게 강조되어야 할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언어는 수요가 결코 적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늘 것으로 보인다. 영어교육의 현실 다른 문제는 영어교육의 현실이다. 영어를 사용하여 교육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그런 수업을 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대학에서도 영어로 수업하는 강의에서 강사가 영어표현에 어려움을 느껴 전달하는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학생 가운데는 외국생활을 오랫동안 한 경우도 많아 이들은 강사의 ‘어설픈’ 영어강의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영어교사를 외국에 보내 연수시키면 이들의 수업능력은 많이 향상될 것으로 생각된다. 매년 3000명을 보낸다니 예산이 뒷받침되면 영어교육능력은 장기적으로는 분명히 향상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정책방향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만큼 국민적 합의를 얻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정책은 대통령선거중에 제시되지도 않았고 지금도 논란이 많은 문제이다. 대통령 임기 5년 중에 큰 줄기를 만들겠지만 이러한 정책이 다음 정부에서도 이 정책이 계속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다. 정부가 밀어붙이면 당분간은 계획대로 하겠지만 분명히 영어강의를 할 정도로 역량이 강화될 때까지는 무늬만 영어전용강의를 하게 되어 심각한 비판에 봉착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시행착오나 궤도에 오르기까지의 여러 문제를 감수하고라도 가야 할 전 국민적 합의가 있다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은 그러한 합의가 전혀 없다. 번번히 대학입시정책에서 겪는 시행착오처럼 매년 정책을 수정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지난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 인수위에서 ‘대입 3단계 자율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기러기, 펭귄, 독수리 아빠는 왜 생기나 기러기 아빠 펭귄 아빠의 문제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인수위 위원장의 말처럼 외국유학의 문제가 영어공교육을 강화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자녀들을 외국에 유학 보내고 혼자 생활하는 걸 감수하는 기러기, 펭귄 아빠들이 애들 영어 공부시키자는 걸 제일 중요한 목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 현실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이다. 영어를 잘하는 것은 외국생활에서 얻는 중요한 이익이기는 하지만 부수적으로 얻는 것이다. 필자도 연구년을 받아 지금 외국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 겨우 1달이 되었지만, 1달 만에 아이들이 나중에 한국에 안 돌아가면 안 되느냐고 묻는 소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직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아이들이 이곳의 학교에서 무엇을 보고 배운 것일지 궁금하다. 지금 외국의 교육제도를 칭찬하거나 한국의 교육제도가 잘못이라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공교육제도에서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외국에 가서 활기를 찾고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을 받아 만족하는 예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걸 보면 많은 비용과 가족의 별리를 감수한 외국유학이 영어공부 때문만이 아님을 알 것이다. 단언컨대 지금의 교육제도에서 영어교육을 강화한다고 펭귄, 기러기 아빠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독수리 아빠는 말할 필요도 없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사교육이 없어질 것인가 더구나 우리의 상황은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고는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이나 버젓한 직장을 얻기 어려운 사회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이 제아무리 정상화된다고 하여도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려면 남들보다 더 나은 점수를 얻지 않고는 안 되니 어찌 공교육에 만족할 것인가? 학교는 변별력을 얻기 위하여 더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게 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사교육이 어찌 없어질 것인가? 영어만큼은 과외 없이도 대학에 갈 수 있게 하겠다지만 그럴수록 고급영어에 대한 필요가 커지는 법이니 이제 학원과외와 영어공부를 위한 해외연수가 더 많아질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는 데 경쟁이 치열하면 그 자원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자격 이외의 다른 고려요소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대학이 서열화된 우리 사회에서 영어 과외 받지 않고도 대학 갈 수 있게 하겠다는 말은 허망한 얘기다. ‘3년의 고등학교 교육 충실하게 이수한 학생이면 누구나 쉽게 풀 수 있는 쉬운 문제’로 수능을 출제해봐야 새로 출범한 정부의 정책처럼 대학입시 자율화를 하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고 싶은 어느 대학이 그 점수만 가지고 학생을 선발하겠는가? 교육은 백년 앞을 내다보고 해야 한다 공교육은 나라의 백년대계를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국가를 만들려고 꿈꾸고 있는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모든 국민이 국제적 활동을 하도록 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하고 있는가? 특히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영원할 것처럼 영어교육 일변도로 나가도 되는 것일까? 전 세계가 중국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고 EU의 비중도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는 왜 세계화를 내세우면 미국중심의 질서만 공고하리라고 보는 것일까? 한국사회의 지배집단이 영어를 통해 입신한 사람들이어서인가? 언어만 해도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 전문가가 양성되어야 할 언어는 적지 않다. 영어의 비중을 높일수록 이들 언어에 대한 비중은 그만큼 줄어든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와 더욱 교류가 활발해질 나라는 중국과 일본이다. 이 사람들과도 영어로 얘기할 것인가? 내용이 충실한 교육이 더 중요하다 언어교육은 교육 가운데 하드웨어의 측면이라고 생각된다. 더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가 아닐까? 올바른 삶을 누리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 현대세계에서의 올바른 인간의 삶과 필요한 지식에 대한 교육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영어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이것을 소홀히 하자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한정된 자원을 사용하면서 영어의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다른 부분의 교육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질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어설픈 영어교육보다 충실한 교육내용이 우선이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고 어설픈 영어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생각되므로 모든 과목을 영어로 교육하겠다는 이른바 영어몰입교육이 철회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애꿎은 학생들이 실험대상이 되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34 | 추천: 0
이광조/ CBS PD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는 먹지 말자 낡은 플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 정호승, ‘산낙지를 위하여’ 내가 좋아하는 한 시인은 맛있는 산낙지를 먹다 말고 이런 시를 썼다. 시인의 감수성이라고는 없는데다 먹보인 나로선 상상도 못할 발상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를 보며 나 또한 가슴 속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무엇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낙지며 대합, 홍합, 새조개, 키조개 등의 각종 조개와 싱싱한 물고기들을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가에 대한 분노였다. 참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발상 같기도 하지만 내가 나름대로 정의감을 갖고 분노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생존 자체를 파괴해버리는 것보다는 그들이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지켜주면서 먹는 게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뜬금없이 웬 낙지 얘기냐? 태안 앞바다를 기름으로 뒤덮어버린 원유유출 사건에 열을 받았기 때문이다. 뭇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은 아니지만 기름을 온몸에 뒤집어 쓴 채 죽어가는 철새와 물고기들을 보면 코끝이 찡하다. 말 못하는 짐승들이지만 얼마나 고통스럽고 황당했겠는가. 더구나 사고를 내고도 한 달 가까이 사과 한마디 안하고 버틴 사람들을 보면 입에서 욕이 절로 난다. 이런 판국에 한편에선 대통령 직 인수위원회가 새만금에 18홀 골프장을 최대 30개까지 짓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세계 최대란다. 물론 새만금에는 골프장만 짓는 것이 아니다. 대규모 항만과 산업단지, 공항, 물류기지 등을 만든단다. 애초에 부족한 농지를 만들기 위해 여의도 면적의 100배에 이르는 거대한 간척지를 만든다고 하더니 이제 농지는 안중에도 없다. 처음부터 ‘농지를 만든다는 건 거짓말 아니냐’며 그렇게 따졌지만 식량부족, 통일시대 운운하며 농지가 필요하다고 우겼던, 아니 새빨간 거짓말을 했던 사람들은 찔리는 구석도 없는 것처럼 당당하기만 하다. 그 갯벌이 당신들 것인가? 갯벌 근처에 사는 주민들의 것인가? 전북도민들만의 것인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갯벌의 혜택을 많이 누리는 거야 시비를 걸 일이 아니지만 그 갯벌은 전북도민만의 것도 아니고 갯벌 근처에 사는 주민들만의 것도 아니다. 더더구나 그 갯벌이 책임이라고는 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갯벌의 풍광과 그 속에서 자연이 베푸는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고 지구를 한 바퀴씩 돌며 잠깐씩 그곳에 들르는 철새들도 갯벌에서 굶주린 배를 채우며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건만 누가 무슨 권리로 모든 생명이 함께 누려야할 갯벌을 망가뜨리고 팔아먹는단 말인가.   태안반도 곳곳에는 폐사된 해산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흥분했다. 낙후된 지역에는 개발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갯벌도 어느 정도는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이렇게 무식하게 공공의 자산을 함부로 망가뜨리는 사례는 듣지 못했다. 원유사고로 인한 생태계 파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갯벌이라는 생태계의 보고가 아예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세계 5대 갯벌 생태계로 꼽혔던 우리나라의 갯벌은 지난 1985년에 비해 이미 면적 자체가 25퍼센트나 줄어들었고 갯벌의 오염과 파괴 정도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동서남해안 발전 특별법으로 인해 국토의 29퍼센트에 이르는 연안지역에 개발위험에 놓였다고 하니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갯벌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름범벅이 된 태안 연안과 충남의 해안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각종 간척사업과 물막이 공사로 갯벌의 존재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던 곳이다. 여기에 기름 오염까지 덮쳤으니 그 수 많은 생명들의 원성을 누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조개구이며 홍합국물을 즐기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이 먹고 있는 조개와 홍합의 상당수가 이미 중국과 북한에서 수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전북 부안의 채석강에서 우리가 중국산 백합조개를 사먹어야겠는가. 미안한 마음으로 산낙지를 먹건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먹건 낙지들이 살 수 있게 그 터전만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산낙지와 조개들을 생각하면 슬프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60 | 추천: 0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에 우스갯소리로 "강원도는 운하사업에서도 소외됐어. 동서대운하 파달라고 요구해야 되는거 아냐 ?"라는 말이 떠돌았었다. '강원도 무대접론'을 빌려 대운하 사업에 시비를 거는 말일게다. 그러면서 강원도 사람들은 강원도가 대운하 물길에 비켜서게 된 것에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남한강이 지나가는 원주에 경부운하 터미널이 들어선다는 입소문이 퍼지고 곧 지역 언론이 그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인심이라지만 권력의 기세가 등등한 정권 이양기 라서 인지 여기저기서 대운하 지지 발언이 터져 나오고 강원발전의 새로운 기회라는 헛물켜는 주장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강원도지사는 봉이 김선달식 물장사 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운하에 큰 배가 지나가면서 환경오염이 되고 식수원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에 운하 찬성론자들은 강바닥 지하수를 뽑아 먹으면 된다고 반론을 했는데 아무래도 강바닥 지하수도 찝찝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니까 수십 억 톤의 저수량을 자랑하는 소양호 물을 수도권 주민에게 팔아서 강원도도 돈좀 벌어보자 라는 물장수 론이 등장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부대운하 덕분에 낙후되고 소외된 강원도가 발전의 기회를 잡는 셈이 되는 것이다. 강원도 사람들이 암하노불(巖下老佛, '바위 밑의 오래된 불상(佛像)'의 뜻으로, '산골의 착하기 만한 사람'을 평한 말)이라는 말처럼 순진 한 건지 아니면 워낙 도세가 약하다 보니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강원도 발전의 기회라는 주장은 백보 양보해도 정신없는 소리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겠다는 교육정책을 보면 강원도사람들은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강원도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기반이 취약하며, 강원도 사람들은 대부분 족집게 학원에 다닐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없고 경제적 조건이 되더라도 그런 학원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그래서 일부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방학기간에 대치동에 원룸을 구해놓고 아이를 족집게 학원에 보내기도 한다. 기업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풀어버리겠다는 수도권 규제는 "당신들은 평생 촌놈으로 살아라"라는 족쇄를 채울 뿐이다. 기업유치를 위해 발로 뛰고 있는 단체장들의 노력도 무색하게 쓸 만한 기업들이 강원도에 올 일이 없는 것이다.   그림 출처 - 강원일보 북한이 핵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지원을 하겠다는 상호주의가 남북 관계를 냉각시키면 강원도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접경지역 개발 사업은 개점 휴업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밀어 닥치는 경쟁력 지상주의, 시장 숭배주의는 강원도처럼 경쟁의 출발선에 설 능력도 안 되는 지역이나 사람들에게는 모멸감과 좌절을 안길뿐이다. 그래도 소양호 물이라도 팔아 '지역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면 그런 방법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쩌랴 ! 소양호 물은 이미 주인이 있다. 한국수자원공사가 소양호 물의 주인인데 강원도가 무슨 수로 소양호 물을 수도권 주민에게 팔아서 이익을 챙길 수 있을까 ? 이래저래 우울한 새해 시작이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37 | 추천: 0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일본에 사나다 요시아키(眞田芳憲)라는 법학자가 계시다. 내가 일본에서 일 년간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일본에 머무는 동안에도 이리저리 큰 도움을 주고 계신 분이다. 일본의 주오대학(中央大學) 법대(한국으로 치면 고려대 법대)에서 은퇴하신 뒤, 지금은 WCRP평화연구소 소장으로 봉사하고 계신다. 로마법과 이슬람법 권위자시면서, 한국 종교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마치 옛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고대하던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으며, 이제는 나를 한국 종교 선생으로 모시겠다고 진담 섞인 농담을 던지시기도 한다. 한국의 젊은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만큼 인격적인 분이시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이를 뛰어넘는 열정도 동시에 느껴지는 분이시다. 나는 요즘 매월 한국종교에 대한 논문을 준비해 그분을 비롯한 몇몇 일본 학자들과 함께 한국 종교 및 종교간 대화론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한 번은 종교의 역기능에 관한 논의 중에 사나다 선생이 상기된 얼굴로 자신이 평생 바쳐 일 해온 법률학에 대한 절망감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본 법조계 주요 인물의 절반가량이 자신의 제자이지만, 일본 사회는 더욱 실망스러워지고 있으며, 자신이 평생 바쳐 연구하고 가르친 법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개탄스러워하셨다. 본래 정신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법은 사회 정의 내지 인류의 평화와 거리가 멀다는 그분의 짧지만 강렬한 고백 속에서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한국의 비슷한 상황이 중첩되어 떠올랐다. 이미 좀 알려지기도 했거니와, 나는 기독교계 강남대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치다가 불상에 절을 했다는 이유로 재임용을 거부당했다. 교육부에서 나에 대한 재임용 거부는 객관적 사유에 근거하지 않은 부당한 처사이니 취소하라는 결정을 내리자, 학교는 다시 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행정법원에서도 동일한 결론을 내리자 이번에는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물론 학교 내 이런 강경파는 극소수이지만, 사태는 언제나 힘 있는 극소수의 목소리대로 흘러간다. 어쨌든 그로 인해 학교 측 변호사가 작성한, 이른바 항소용 준비서면이라는 것을 올 연말 동경에서 받을 수 있었다.   강남대학교 항소이유와 내용을 표현 그대로 요약하면, 기독교 시간에 기독교를 비판하고 타종교를 찬양하는 사람을 기독교 학교가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교육부, 행정법원을 거치면서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는지, 이제는 내가 아예 기독교를 비판하고 타종교만을 찬양하는 반기독교인처럼 둔갑시키고 있었다. 항소장은 사건의 근본 맥락을 벗어난, 말 그대로 침소봉대 자체였다. 이전 내용보다도 더 유치해진 듯 했다. 동일한 내용과 이유로 연달아 패소했던 탓인지, 거짓에 가까운 자료들도 동원되었다. 어떤 것은 한심하기까지 했다. 몇 년 전인지 생각도 나지 않지만, 대학 후배가 자신의 직장 일이라며 원고를 요청하기에 ‘심볼리안’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사이비종교’에 관한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동서양의 신비주의, 신화 등의 자료를 소개하는 사이트였다는 기억만 하고 하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를 구했는지, 항소장에서는 내가 이렇게 비기독교적인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비기독교적인 사람이라는 증거자료라며 내 글과 함께 인터넷 사이트에 대한 상세한 소개서를 제출했다. 내가 쓴 글의 내용은 사이비 종교를 비난만 하지 말고 자신의 ‘사이비성’ - 겉으로는 진리와 비슷해 보이지만(似) 속으로는 아닌(非) – 도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비교적 교훈적인 글이었는데, 우스운 것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그 사이트에 글을 싣는 행위 자체가 문제라며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출된 다른 증거자료들도 그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긴 가만 보면 변호사가 그 내용까지 문제 삼을 능력은 없었던 것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정도의 글이라면 지금까지 족히 수백 편은 썼을 텐데, 겨우 그 중에 한두 개를, 그것도 내용 핵심도 파악하지 못한 채 결정적인 증거자료나 되는 듯 제시하는 변호사의 수준 때문이었다. 인터넷을 더 뒤져서 내가 신문, 잡지, 인터넷 언론 등 기독교와 관계없는 수많은 곳에 기고하고 올린 글들은 왜 문제 삼지 않았는지 우스웠다. 이런 수준으로 무엇을 어떻게 변호하겠다는 것인지 웃음이 다 나왔다. 변호사가 종교에 문외한이라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항소장의 전체적 수준도 의심스러웠다. 객관적이지 않은 학교 측의 처사를 문제 삼은 교육부와 행정법원의 결정에 대해, 대학에는 자율성이 있어야 하며, 또 그 자율성에 따라 이루어진 재임용 심사에 심사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취지로 글이 전개되었다. 마치 중학생 수준의 논리와 작문 실력을 보는 느낌이었다. 별 말을 다 끌어내는구나 싶었다. 그 논리는 결국 자가당착에 빠져, 강남대의 결정이 주관적, 자의적이라는 것을 대신 입증해주는 것 같았다. 한숨이 또 나왔다. 그저 즐기며 편안히 대응해야지 싶다가도,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나로서는 또 한 번 이 유치한 논쟁 속에 긴 시간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도대체 법이란 무엇인가, 변호사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이었다. 그들도 법학도를 꿈꾸고 법조인을 희망하던 시절에는 정의의 편에서 어려운 이를 돕겠노라는 순수한 열망에 불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률 지식이 그저 하나의 직업이 되고 축재와 출세의 수단이 되는 순간, 변호사라는 직업은 수임료와 실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물신숭배자’가 될 가능성이 무엇보다도 커진다. 진리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동일한 진리의 이름으로 쌍방이 싸워야 하는 변호사들은 둘 중 하나는 잘못된 편에 설 수 밖에 없을 테니, 변호사는 태생적으로 진리와 정의를 온전히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자기편 의뢰인에게는 기쁨을 줄 수 있겠지만, 상대방에게는 아픔을 줄 수밖에 없는 잔인한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사건 당사자에게는 인생이 걸리다시피 중요한 문제를 단 며칠 만에 다 파악하고 또 판단할 만한 능력이라도 있는 냥, 남의 인생 전체를 쉽사리 규정하는 직업적 분위기 역시 가당치 않게 느껴졌다. 나의 월권이고 오만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변호사가 이러한 근원적 오류를 범하지 않고 법 본연의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건을 맡을 때 절대로 돈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받지 않아야 할 아픔과 상처를 받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품어야 한다. 사건 자체가 사회적 정의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먼저 두루 진지하게 탐색한 뒤, 정의에 부합한다고 판단되면 그 때 양심을 걸고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한다. 그것이 변호사이다. 그 때 생긴 수임료는 정당하고 떳떳한 대가가 될 것이다. 거꾸로 정의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변호를 맡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정의롭지 않은 일들은 법정에 설 일이 줄어들 테고 결국 자연 도태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변호사는 가난해지거나 적어도 부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풍요로운 가난의 길을 가는 것이 법조인의 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고 법 본연의 정신을 사회 속에 ‘구체화’시켜 주지 않겠는가. 나는 변호사도 아니고 법률 공부를 한 적도 없지만, 법원 서류 한 두 번 받아보고는 대번에 느꼈다. 법조인의 현실적인 한계라는 것을……. 수십 년 법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일본 법학계의 권위자 사나다 선생의 절망과 한탄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변호사들에게도 정말 묻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일하느냐고…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물론 언제나 정의 편에 서려는 존경스러운 변호사들도 많다는 것을 잘 안다. 가능한 한 불의 편에 서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양심을 지닌 법조인도 못지않게 많을 것이다. 그래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변호사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법조인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양식을 가진 이라면 알 것이다.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돈과 권력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 편에 서고자 하는 이라야 진짜 법조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한 때 유행하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정말 유치원 시절에 배운 삶의 이치에 충실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런 기대와 희망은 품어도 되는 것일까. 하늘의 뜻을 실천하겠다며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이들도 어느 순간 직업형, 사업형 목사로 전락하고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거룩한 하늘의 이름을 팔아 이웃의 생명을 위협하는 세상이니, 법률의 세계에선들 무엇이 다르겠으며 무엇을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실종된 정의와 양심을 회복하기는커녕 현실이라는 미명 하에 정의와 인권의 본질을 전도시키는 일도 다반사니 말이다. 철학자 가다머가 자신의 책 <진리와 방법>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방법’이 ‘진리’를 압도하는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의 방조자로 산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될 사람이 음성적으로 더 그렇게 되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니 법조인과 교회가 그렇게 많아도 사회는 별반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아니 법조인과 교회의 숫자는 인간답지 못한 세상의 척도로까지 쓰이기도 한다. 그런들 어쩌랴. 상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정의와 인간의 근본 가치가 회복되기를 희망하며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기독교인의 팔자이기에, 나는 그저 내 식대로 기독교적인 길을 갈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그 말이 다소 거창하다면, 최소한 나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진리는 죽임이 아니라,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생명을 살리는 아주 작고 단순한 데 있다는 사실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36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솔직히 이번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누구 하나 마음에 드는 후보도 없을뿐더러, 그마나 정책대결의 시늉이라도 하던 과거 대선과 달리 후보들의 정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진흙탕 싸움만 구경하고 있으려니 마음이 우울해서 신문도 보지 않았다. 친 재벌 정책을 옹호하는 후보가 서민경제를 살리겠다고 하고 노동단체가 지지성명을 발표하지 않나, 좌파정부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좌파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좌파정부라는 비난이 근거 없는 오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집권여당의 후보가 세금폭탄 없는 나라(세금폭탄은 부동산 가격이 갑자기 올라서 재산이 엄청 늘어난 사람이나 맞는 폭탄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나 온통 뒤범벅이 되어 도무지 정체성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다보니 내 주변에는 대통령이 누가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고, 후보자 12명 이름 위에 모두 도장을 찍고 나온다는 사람도 있고, 투표하러 가는 대신에 여행이나 가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본래 민주주의란 국민의 참여에 의해 그들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이 그 핵심이고, 5년에 한번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는 모든 국민이 투표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는 날이기 때문에 축제일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는 공약이나 정책은 아예 뒷전이고, 어떤 후보가 국민의 의사를 잘 대변할 수 있는가하는 고려도 완전히 무시된 채 선두를 달리는 후보의 범죄혐의와 거짓말을 둘러싼 첨예한 공방만 계속되었고, 그 후보는 당선이 된 이후에도 특검에서 조사를 받고 최악의 경우 당선무효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지게 생겼으니, 이런 상황에서 진행되는 선거가 축제일이 될 리 만무하다. 이처럼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하는 선거에서 뽑힌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어차피 국민들은 “그 놈이 그 놈”이고 “어디 깨끗한 놈이 있나”라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반감에 젖어있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준 선거였다.   대선개표현장 사진 출처 - 뉴시스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어찌되든 민주화 세력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런 위기에 놓이게 되었는지 뼈아프게 성찰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구체적인 실천과 대안 없이 열정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상대적으로 도덕적이라는 점만으로 모든 잘못이 용서되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누린 기득권에 취해 자만한 것은 아닌지. 수구 세력들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집결하는 동안 소위 민주화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마음을 얻고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선거의 결과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를 저버린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일 뿐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포기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민주주의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기대가 더 큰 회의와 실망으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한탄하거나 선거결과에 실망할 때가 아니라, 다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시작할 때이다. 한미자유무역협정, 노동시장의 위기, 빈곤층의 문제, 환경위기, 부패한 재벌의 문제 등 경제. 사회적 기득권층과 그 나머지 국민들의 이해가 대립되는 중요한 의제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민주화세력은 이러한 의제들 속에서 누구의 입장을 대변할 것인가를 명확히 정하고 그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실천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10년 동안의 집권 경험은 유익한 자산이 될 것이다. 현 정부가 그런 것처럼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는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주장만 옳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몸을 낮추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일상의 삶을 들여다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선거가 끝나도 삶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에, 갈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지금까지 꽤 먼 길을 걸어 왔는데 실망하거나 포기하고 주저앉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2017-06-22 | hrights | 조회: 29 | 추천: 0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농산물 수입개방과 한ㆍ미 FTA 협상의 타결로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울상 짓게 만들더니, 이제는 기승을 부리는 도둑들로 인해 잠까지 설치게 만들고 있다. 범행수법도 집 근처를 노리는 ‘토착형 절도’보다는 차량을 이용하여 전국을 무대로 뛰는 ‘여행성 절도’가 많아지고 있다. 이처럼 예전같이 먹고살기가 어려워 먹을 것을 훔치던 생계형 범죄자는 점차 없어져 가고 있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기범이나 농촌의 농산물을 훔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힘들여 재배한 인삼, 쌀, 참깨, 고추 등 농산물을 송두리째 훔쳐 가거나 소, 돼지, 개 등 가축까지도 절취해 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1년에서 길게는 5년 이상 피와 땀을 흘려 가꾼 자식 같은 농산물을 한 순간에 송두리째 도난당한 농부들의 참담한 심정은 삶의 의욕마저 잃게 만들고 있다. 농산물절도는 물론이고 비닐하우스 파이프, 농기구, 구리전선 등 돈이 되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훔쳐가고 있다. 더욱이 농사용 전깃줄 절도는 겨울철 시설하우스의 전력공급 중단을 초래하게 되어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농산물에 냉해까지 발생케 하고 있다. 흔히 범죄자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몇 가지 원칙에 의해서 범죄를 저지른다고 한다. 그 첫 번째는 범죄를 통하여 얻게 되는 이익이 범행 후 체포되어 받게 되는 고통이나 처벌보다 클 때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범죄를 사전 예방하기 위하여 잠재적인 범죄자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 만한 형벌을 부과하는 법률을 두고 있다. 두 번째는 감시가 허술하고 보호능력이 약한 대상을 범죄대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소위 상황적 범죄예방이론으로 범죄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상황을 통제하여 범죄를 예방하려는 것이다. 농촌지역의 절도는 도시에 비해 범죄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쉽게 제공되기 때문에 범죄가 자행되는 면도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죄기회의 제공을 차단해 나갈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기범이나 농촌의 농산물을 훔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그림 출처 - 국민일보   우선 농번기에는 빈집털이가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낯선 사람을 예의 주시하는 게 상책이다. 농촌지역을 돌아다니며 절도행각을 벌이는 절도범들은 빈집처럼 보이는 집에 들어가 인기척을 한 후 반응이 없으면 도둑질을 하고, 누군가 있으면 집을 잘못 찾은 것처럼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상당수의 빈집털이범들은 농촌지역의 대부분 집들이 출입문이 잠기지 않아 도둑질하기가 수월했다고 털어놓고 있다. 아울러 예금통장의 비밀번호도 집 전화번호, 자동차번호 등 쉬운 번호를 쓰거나 통장에 기재해 놓아 쉽게 예금이 인출되는 일도 자주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주의할 일이다. 두 번째는 농촌주민들이 자율방범대를 결성하여 순찰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경찰에서도 농촌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농ㆍ축산물 도난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취약시간과 장소를 선정하여 현장검거 체제를 구축하여 활동하고 있다. 또한 관서별 실정에 맞는 기획수사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관서별 농ㆍ축산물 절도사건 수사 자료의 공유 등 공조수사체제를 구축하여 신속한 검거와 피해품의 회수를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그러나 넓은 농촌의 관할구역 때문에 경찰의 순찰에는 한계가 있어 이를 보완할 수 있도록 자율방범을 활성화하고, 경찰과 합동 순찰을 도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셋째는 지방자치단체에서 CCTV를 설치하는 것도 농촌 절도를 예방하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최근 김장철을 맞아 배추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배추와 무 등 가격이 급등한 채소류를 노린 절도범들도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절도범들은 주로 국도변 등 인적이 드문 소규모 텃밭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곳과 마을 입구나 큰 도로로 이어지는 곳에 CCTV를 설치해 나가는 것이 범죄예방을 위해 서둘러야 할 일이다. 끝으로 범행을 목격하거나 사건이 발생하면 즉시 신고하는 것이 제2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길이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농촌지역 범죄예방대책들을 서둘러 마련하여 농민들을 두 번 울리는 농ㆍ축산물 절도가 뿌리 뽑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26 | 추천: 0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2007년 11월 26일부터 부시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의 아나폴리스에서 시작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은 내년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문제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 중의 하나로 협상 테이블에 올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측은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 문제에 대한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2007년 현재, 1949년 12월 수립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제 사업국(UNRWA)에 등록된 약 450만 명을 포함하여 745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존재한다. 이 중 45만 명은 이스라엘 국내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시민이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난민들이다. 난민은 전 세계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총인구 1천 10만 명 중 약 70퍼센트를 차지한다. 난민들 대부분은 주변 아랍 국가에서 ‘거주 외국인’으로 취급을 받으면서 정치적인 권리는 물론이고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업 선택과 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채, 추방 위협에 시달리면서 불안정하고 열악한 생활을 계속해 오고 있다. 1947년 11월 29일은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땅을 분할하여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을 건설하도록 요구하는 결의를 함으로써 60년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되는 대참사가 시작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건설 과정에서 이스라엘 영역이 될 지역에 거주하던 총 원주민의 90퍼센트에 해당하는 9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고향으로부터 추방되었다. 1967년 전쟁을 유발한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 서안, 가자를 점령하였고, 이 지역 총 원주민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40만 명의 난민이 다시 발생하였다.   지난 11월 2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수천명의 하마스 지지자들이 미국 아나폴리스에서 열리는 중동평화회의를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난민은 2007년 현재에도 이스라엘 군사 점령지와 이스라엘 본토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다. 2006년 여름에 이스라엘 군사 작전으로 가자 지역에서 5천 1백 명의 점령지 내부 난민이 발생했다. 2002년 이후 동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서안 지역에서 분리 장벽 건설과 군사 통치와 관련된 사업으로 주민의 17퍼센트가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고, 요르단 계곡에서 폐쇄와 주택 파괴, 강제 퇴거 등으로 수 천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서안의 다른 지역으로 추방당했다. 2006년 이스라엘 정부는 네게브와 갈릴리에서 유대 공동체의 독점적인 이익을 위한 도시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토착의 팔레스타인 공동체들을 파괴하고 추방하였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주변 아랍 국가들에서도 이 난민들의 2차, 3차에 이르는 대규모 축출은 현재도 계속 발생하고 있다. 2006년 여름(7월 12일, 8월 14일)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으로 레바논 소재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 난민들이 축출되었다. 이 난민 캠프들이 직접적인 목표물은 아니었으나 캠프 근처에 빈번하게 폭탄이 투하되었다. 약 1만 6천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 내 다른 지역과 그 이웃 국가들로 축출되었다. 2003년 이후 2007년까지 미국의 이라크 공격과 점령으로 이라크에 거주하던 약 3만 4천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 중 50퍼센트 이상이 이라크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1994년에 리비아 정부는 오슬로 협상에 불만족하다는 표시로 당시에 리비아에 거주하던 약 3만 5천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 대부분을 추방하였다. 1990년-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당시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이라크와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쿠웨이트와 걸프 아랍 왕국들은 4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대거 추방하였다. 이렇듯 중동에서 발생하는 분쟁 중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휘둘려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연맹 소속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으면서도,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환’을 위한 현실적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을 거류 외국인으로 간주하면서 이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소유한 땅의 2/3를 유대인을 위하여 몰수했다. 1948년 이전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현 이스라엘 국가 영역을 포함하는 팔레스타인 전체 땅의 90퍼센트 가까이 소유했었지만, 오늘날은 오직 10퍼센트의 땅에만 출입이 가능하다. 추방과 몰수가 처음 시작된 1948년 이후 60년이 경과하고 있지만, 주변 아랍 국가들로 추방된 난민들과 이스라엘 국내에서 난민이 된 사람들은 여전히 계속되는 격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2차, 3차 추방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난민들의 대참사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유엔은 총회 결의와 안보리 결의 등을 통해 ‘난민 귀환권’을 되풀이해서 보장하였다. 1948년 12월 11일자, 유엔 총회 결의 194호, 이후 1967년 7월 4일자, 유엔 총회 결의 2252호, 1981년 12월 16일 유엔 총회 결의 36/146호 등과 1967년 6월 14일 유엔 안보리 결의 237호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유엔은 ‘귀환권 보장’이라는 같은 내용의 결의만 되풀이할 뿐, 이 결의를 현실적으로 실행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 이스라엘은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뿌리를 근거로 1948년 난민들이 이스라엘 본토로 귀환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이후 군사 점령 상태에 있는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 지역으로부터 추방된 난민들이 이들 점령지로 귀환하는 것도 역시 가로막고 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와 관련된 유엔 결의와 국제법에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난민의 귀환 문제는 1990년 이후 계속돼 온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의 주제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이 난민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과 이 지역의 평화 정착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28 | 추천: 0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한국인에게 일본은 물가가 비싸다는 선입견이 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특히 여행자에게는 대중교통비가 다소 비싸게 느껴지고, 공부하는 이에게는 책값이 부담스럽다. 일본에서 읽어야 할 책이 많은 내게도 책값은 적잖은 부담이 된다. 그런데 책을 사고 값을 지불하면서도 뿌듯할 때가 있는데, 바로 중고서점에서이다. 남들 손에 머물렀던 것이기는 하지만 거의 새 것이나 다름없는 책을 정가의 십분의 일 이하로 살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에 온 지 두 달여 만에 읽고 싶은 책을 백여 권 남짓 샀다. 일본 책 백여 권이라니, 정상적인 가격대로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인데, 중고책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세히 계산해보지는 않았지만, 전체 금액은 아마도 한국 돈 이십만 원을 한참 밑돌았던 것 같다. 중고서점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곳들은 대학가 근처나 시내에 한국의 옛 청계천변에 있던 소규모 중고서점 같은 곳들이다. 하지만 그런 데서는 아무래도 책 찾기가 여의치 않고 또 규모도 크지 않아 구경만 했지 직접 살 기회는 없었다. 그런 곳과는 달리, 중고서점이지만 제법 많은 서적들을 주제별로 또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전문서점들도 있다. 중형급 서점의 형식을 갖추고서 약간 철지났거나 남들 손에 있던 책 - 물론 보기에 문제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다 - 을 한 권에 105엔(800원 가량) 정도에 파는 곳이 있다. 내가 종종 들르는 Book·Off라는 서점이다. 105엔짜리 책도 팔고, 정가의 절반 가격 되는 책이나 잡지도 팔고, 영화 DVD나 음악 CD도 판다. 잠깐 서서 책만 읽다 가는 사람들도 많다. 중간 중간 50권 이상이면 직접 매입하러 가겠다는 안내문구도 붙여놓았다. 이 서점은 프랜차이즈 형태로 운영되어 일본 전역에서 만날 수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도 자전거로 5-10분 정도면 갈 거리에 세 군데가 있다. 저녁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자전거로 씽씽 이 서점까지 한 바퀴 돌아오는 게 나의 소박한 일상 중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읽고 싶은 책을 거의 헐값에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중고서점이니만큼 원하던 제목의 책을 쏙 뽑아들긴 힘들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책들을 우연히 만나는 기분은 썩 괜찮다. 이곳에서 책을 제일 많이 샀다.   약간 철지났거나 남들 손에 있던 책을 한 권에 105엔(800원 가량) 정도에 파는 Book·Off라는 서점 사진 출처 - 필자 동경에 최근 Book Bank Club이라는 서점이 생겼는데, 깨끗하게 차려놓고 잔잔한 음악도 흘러나온다. 여기서는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책들을 반값 정도에 살 수 있다. 여기서도 대여섯 권정도 샀나 보다. 이와 비슷한 서점은 물론 더 있다. 그리고 약간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내가 머무는 숙소 근처에 구세군교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2시까지 바자회를 연다. 주로 의류, 가전제품, 식기류, 가구류 등 중고 생활용품들이 주종을 이룬다. 물건도 제법 많다. 나도 여기서 방석과 전기장판 등 생필품을 헐값에 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주로 찾는 것은 역시 책이다. 전형적인 중고 책들인데, 그 대신 정가의 십분의 일 이하로 살 수 있다. 전문 서점이 아니라 규모는 작지만, 여기서도 괜찮은 책들을 모두 서른 권 가량 샀다. 내가 이 책들의 새 주인이다 싶어 뿌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른 권 가량 사고도 한국 돈 이만 원 약간 넘는 정도로 해결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교회에서 바자회의 수익금으로는 사회사업을 한다니, 경제적 여유는 별로 없어도, 책을 사면서 생겨나는 마음의 여유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 한가했던 책꽂이가 이렇게 값싸고 좋은 책들로 채워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제목만 보고 다 넘겨보지 않아도 제목 속에서 마치 영화를 감상하는 것 못지않은 상상력도 생겨난다. 그것도 좋은 경험이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한국의 중고서점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매년 쏟아져 나오는 그 엄청난 책들이 사람의 손에 다 들어가는 것도 아닐 테고, 또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쓸모없어지는 책도 부지기수일 텐데, 그 많은 책들이 그냥 폐지가 되고 만단 말인가. 하긴 나도 오래된 책들을 그저 폐지함에 버린 적도 있다. 재활용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도 했지만, 달리 처분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일본 중고서점을 보면서 더 안타까워진다. 책들의 활자가 인쇄되기까지 들어간 모든 자원과 노력들을 생각해보니 제대로 읽히지도 않은 채 쓰레기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한국 책의 소모적인 현실이 안타까웠다. 책한테도 미안했다. 나도 책을 몇 권 썼지만, 내 책도 저렇게 버려질지 모른다 생각하니, 내가 버렸던 책의 저자한테도 미안했다. 지구한테도 몹쓸 짓을 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책한테 미안하지 않고, 저자한테 미안하지 않고, 지구한테 미안하지 않으려면 역시 필요한 여러 사람 손에 책이 오래 머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을 일본 중고서점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돈 없어도 책을 거저, 적어도 싸게라도 사볼 수 있어야 좋은 사회 아닌가. 그만큼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인간에게도 권리가 있지만, 책에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일본 중고서점에서 느꼈다. 여러 사람에게 오랫동안 두루두루 읽힐 권리.
2017-06-22 | hrights | 조회: 26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교수 1. 얼마 전 졸업한 지 30년 만에 중학교 동창들이 모였다. 느지막이 참석한 자리에서 옛일을 돌아보고 웃음꽃을 피웠다.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좋은 일 나쁜 일 가리지 않고 담담히 돌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조금씩 나이의 무게를 느낀다. 물레를 돌려 ‘청(靑)5번’을 뽑고 그날 5시 라디오에 귀 기울여 어느 사립중학교에 배정된 후, 빗물 흐르던 계곡(?)이 뚜렷하고 비 오는 날이면 운동화에 흙이 떡처럼 달라붙던 운동장에서 자갈을 줍고, 건물 증축공사를 할 때 벽돌을 나르던 일, 겨울인데도 깨진 유리창을 한 달이 넘도록 갈아 끼워주지 않던 무심함을 탓하던 마음도 이젠 그저 그렇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공금횡령사건과 교장선생님의 구속... 조회시간에 이 사건을 해명하던 교장선생님은 학생들로부터 야유를 받고 말았던 기억이 스친다. 교실방화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억울하게 당한 친구의 이야기... 그때도 지금도 친구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다 잘 알고 있었다. 횡령은 누가 했으며, 교장선생님만 억울하게 됐다는 것, 불 지른 범인이라던 친구는 진짜 불 지른 아이를 ‘불지 않고’ 매를 맞아낸 참 멋있는 놈이었다는 것 등 그때도 지금처럼 친구들은 이미 성숙해 있었다. 어느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니들이 나이 들면 이 모든 일들이 뭐가 문제였는지를 다 알게 될 거라고... 돌아보면 그 때도 알 건 다 알았다 싶다. 그러고도 학교 잘 졸업하고 공부 열심히 한 게 신통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 모든 것들을 덮을 수 있는 것은 세월의 무게와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쳐주시던 몇 분 선생님들의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2. 김포외고 시험문제를 교사가 밖으로 빼돌려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문제를 빼내 학생들에게 제공한 학원에 다니던 학생들의 합격이 취소되었다. 세세한 사실관계까지 알 수는 없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그 학원에 다니고 있다 또는 다녔다는 사실 때문에 합격이 취소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소송을 제기하면 뻔할 뻔자로 학생들이 승소할 사건으로 보이는데 학교는 합격을 취소하였다. 일반계 고등학교 시험을 보게 하려면 빨리 취소할수록 학생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잘못은 영문도 모르고 문제지 받아서 읽고 우연히 읽은 문제가 나와서 정답을 골랐든, 주는 문제 읽어보니 쉽게 풀 수 있는 것이어서 시험에는 더는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합격하고야 만 수험생들에게 있지 않다. 시험문제를 빼돌린 교사와 문제유출을 막지 못한 학교, 그리고 돈을 주고 문제를 빼낸 학원 말고 이게 학생이 책임을 질 문제인가? 설사 학원에서 나눠준 문제를 보고 도움을 받아 합격했다 손쳐도 이게 합격을 취소할 일인가? 그걸 준 사람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걸 받고 합격한 학생도 평생 동안 그 일은 분명 떳떳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 이상의 비난이나 불이익을 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부인할까? 학교에 다니든 다니지 못하든 이 사건에 얽혀든 학생들은 평생 동안 상처를 안고 살아갈 텐데 어른 아니 선생이란 사람들은 학생들에게 더 큰 상처만 주고 있다. 사건의 본질이 뭔지는 모를 아이들이 아니잖은가? 문제 학원에 다니던 수험생들의 합격을 취소하는 것도 교육자들이 걸을 정도는 결코 아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상처 받지 않고 넉넉하게 잘 이겨내기를 바랄 뿐이다. 선생으로서 참 미안하고 안타깝다.   김포외국어고등학교 사진 출처 - 김포외국어고등학교 홈페이지   3. 로스쿨 광풍이 불고 있다. 말 그대로 미친바람(狂風)이다. 로스쿨 설립인가를 받기 위해서 엄청난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계획에 그럴싸한 실적 만들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 예를 들자면, 로스쿨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에게는 5년 동안 논문 800%가 요구된다. 쉽게 말하자면 학계에서 인정받는 학술지에 논문 한 편을 단독으로 실으면 100% 실적이 인정되니 5년 동안 8편을 쓰면 로스쿨 교원으로 적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하는 것이다. 책 한 권을 출판해도 마찬가지이다. 로스쿨법이 통과된 이후 9월에서 10월중에 법학논문과 서적이 엄청나게 출간되었다. 기존에 나와 있는 책을 나눠서 책을 출간하기도 하고 필요한 양만큼만 찍어내기도 한다. 5년간 논문 한 편 안 쓰던 분이 갑자기 논문과 책을 합하여 800% 요건을 맞춰내니 신기에 가깝다. 어느 출판사직원은 이런 모습을 두고 2007년 9월과 10월중에 출판된 법학 책은 아예 인용을 할 가치조차 없다고까지 독설을 퍼붓는다. 교원이 강의중인 10월 중에 학교를 옮기고 갑자기 시간강사 신분이 되기도 한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또 다른 학교에서 그렇게 교원을 ‘모셔’오기도 한다. 학기 중인데도 주저함이 없다. 로스쿨이 된다 해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보다도 더 세상물정을 알 만큼은 다 아는 법학전문대학원생들에게 정의와 공평을 어떻게 가르칠지 걱정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정신이 몽롱하다. 날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어제 밤도 로스쿨신청서를 만들다가 아침을 맞고야 말았다. 선생 탓을 할 학생이 아니라 선생이 된 지금 나는 이제 이런 꼴을 만드는 제도와 극심한 경쟁만을 탓하여야 할까. 마음이 무겁다.
2017-06-22 | hrights | 조회: 4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