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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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우리 헌법 제69조에 나와 있는 대통령 취임 선서의 내용이다. 내년 2월 25일쯤이 될 것인가, 새로운 대통령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맹세의 표시로 손을 들고 이 선서문을 낭독할 것이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국민들이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말 그대로 ‘엄숙하면서도’ 왠지 ‘비감에 어린’ 분위기에 휩싸일 것이다. 이렇게 엄중하게 대통령 취임 선서문을 낭독하고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년간 이 선서의 내용 대부분을 위반 내지는 아예 무시했다. 평화적 통일 대신 무력 대결의 위기를 고조시켜 놓았다. 국민의 자유를 증진하기는커녕 일방적인 국가공권력을 키워 국민들을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대신 4대강 사업을 통해 수십 조 원의 국민세금을 낭비했다. 민족문화를 창달하기는커녕 특히 언론을 비롯한 문화예술마저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놓았다.   취임 선서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사진 출처 - 뉴시스 이렇게 국민과 국가를 배신하고 실패해버린 이명박 대통령을 앞세워 권력을 ‘호의호식한’ 한나라당과 그 현재의 수장인 박근혜씨는 ‘새누리당’이라는 위장의 이름을 내세워 마치 이명박 정권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인 양 대다수 국민들을 철저히 기만하고 있다. 당 내부에서 패거리를 형성해 ‘친이’와 ‘친박’으로 나뉘고 권력다툼만을 했을 뿐, 이른바 ‘친박’이란 이름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위 반(反)헌법적인 배신행위를 당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제동을 걸고자 한 노력이나 성과가 과연 있었던가. ‘손 놓고 넋 놓고’ 집권의 반사 이익을 한껏 누려놓고서는 이제 와서 ‘친이’의 짓일 뿐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무책임한 정치 행태를 보이는 ‘친박’과 그 수장 박근혜씨는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대통령을 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는가. 요컨대 ‘새누리당’이라는 당 개명만으로도 이들 집단은 향후 5년의 정권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한 뒤 지금까지 박근혜 후보가 이명박 정권의 실패에 대해 자신이나 ‘친박’이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발언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던가. 이는 책임정치라는 말을 아예 쓸데없는 구호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처사다. 그러면서 지난 대선 때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직을 ‘억울하게 놓친’ 분풀이나 하듯이 세종시의 건립을 철회하려는 이명박씨에 대해 원래 계획대로 해야 한다는 한 마디 말을 한 것을 내세워 마치 본인이 타고나면서부터 원칙을 지키는 사람인 양 분식을 해서 국민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 말 그대로 볼만한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이투데이> 11월 2일 자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지낸 최경환씨는 “박 후보는 위기에 아주 강한 분”이라며 “당이 2번이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천막당사의 정신과, 파란색을 빨간색으로 바꾸는 대 변화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천막당사’야말로 정치 쇼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한나라당이 돈이 없어 천막당사에서 일을 보았는가? ‘차떼기 당’으로서 부패의 본질이 드러나자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를 대대적으로 눈속임하고자 한 것이 ‘천막당사’가 아니던가. 이러한 박근혜씨의 기상천외한 발상은 이명박씨가 이른바 ‘명박산성’을 쌓고서 발악을 한 것과 너무나 닮았다. 이러한 박근혜의 ‘쇼맨쉽’을 두고서 만약 그녀의 정치적 역량이 대단한 것으로 평가한다면, 그러한 정치적 역량으로 나라를 통치할 경우 이 나라는 물론이고 국민들 역시 각국으로부터 천박하다고 비난을 받거나 업신여김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국민통합’을 내세우면서 마치 아버지 박정희씨의 치명적인 과오들을 넘어설 것처럼 하는 것 역시 쇼가 아닐 수 없다. 한 발 양보해서 말하면, ‘진정성이 넘치는 쇼’일 뿐이다. 이 말을 약간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쇼’가 아니겠는가. 박근혜씨는 서민복지를 내세우고 무엇보다 국민행복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국민행복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요컨대 어떻게 되는 것이 국민행복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긴장감으로 넘치는 국제정세가 어떠하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그저 돈 벌기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적인 상황을 어떻게 바꾸어 질 높은 진정한 문화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그저 돈 벌기에만 급급한 대학들의 행태를 어떻게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그야말로 돈 벌기에만 급급한 재벌대기업들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 목숨을 걸고서 투쟁하는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사태에 대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그저 이명박 정권과 수사학적인 차이를 내세워 책임정치를 회피하려 할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초법적인 이른바 과거사를 통해 그녀가 누린 정치권력과 경제적인 호의호식을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표를 얻기 위해 어떻게 국민들의 불편한 심사를 다독거려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에 골몰한다. 정수장학회는 무엇이며 영남대학교는 무엇인가?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글 맨 앞에 제시한 대통령 선서는 대통령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법적·정치적 권한을 함축하고 있다. 권한의 행사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대통령 한 사람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대통령을 배출해 낸 당과 당의 수장들 역시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새누리당’이 박근혜씨를 내세워 ‘재집권’을 노린다면, 이명박 정권에 대해 철저히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책임이다. 그 책임을 묻기 위해 국민들이 투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올바른 인식을 흐리기 위한 전략전술로 일관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25 | 추천: 0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10여 년 전 2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단지 근방에 살았던 적이 있다. 산동네와 재개발, 그런 사연이 얽혀 있는 단지였다. 신축 아파트단지가 항용 그러하듯 그 단지에도 조금 안심하고 하여 흥분 곁들여 거들먹거리는 분위기가 물씬했는데, 한 귀퉁이엔 분위기가 영 달라 뵈는 몇 동이 따로 서 있었다. 출입구도 달랐고 도색도 조금 달랐던가 싶다. 그 몇 동이 임대 아파트라는 건 금세 알았다. 아하, 임대…. 근방에 갈 일은 없었지만, 멀리서 임대 아파트를 바라다보면 어쩐지 나도 조금 안심하고 많이 거들먹거려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그래도 내가 얼마나 살 만한지 비교급으로 체험하는 느낌이었을까. 사람이 다 그리 속속들이 속물적일 리 없건만 그 외딴 몇 동에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는 좀 짜릿하기마저 했다. 얼마 전 <한겨레 21>을 들추다 본 임대 아파트의 슬럼화라는 현상은, 내가 느꼈던 안도와 정확히 표리를 이루는 것일 게다. 한국에 임대 아파트가 본격화된 지 20년이 넘었다. 임대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이가 성년에 달할 세월이다. 기사에 따르면 임대 아파트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약대가 되지 못하고, 안전한 삶을 위한 지지대마저 되지 못하며, 내몰린 이들의 막장처럼 점점 슬럼화 되고 있다고 한다. 가보지 않았으므로, 실상은 알지 못한다. 작은아버지 한 분이 10년 넘게 임대 아파트에 사셨지만 한번도 들른 적이 없다. 늘 가까이 있었는데도 임대 아파트로 상징되는 삶을 방문케 되진 않았다. 그곳에 산다는 상상도 거의 해본 적 없다. 가까우면서도 먼, 흔한 현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철조망은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를 가로지른다.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그 철조망을 바라보며 학교에 간다.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의 날카로운 울타리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21 ‘그들끼리.’ 영구 임대 아파트 단지는 복지에의 중요한 한 걸음이었으되 확실히 ‘복지= 시혜’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모델이다. ‘그만큼’. 동냥을 청하면 천 원짜리 한 장쯤 건네고 고아원이며 양로원에 얼마쯤을 기부하지만, 동시에 그 삶이 낮춰 볼 수 있는 한도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나’나 ‘우리’ 안에 들이지 않는 한 불우(不遇)―단어 그대로의 뜻대로라면 만나지 못한. 무엇을? 시대를? 부모를? 이웃을?―는 연민할 만한 존재이나, 경계를 넘어 들어온다면 위험한 존재가 되기 쉽다. 중산층이라 자처하는 대다수는 제 아이 반에 고아원 아이가 있다면 경계할 것이고, 임대 아파트 입주민과 출입구를 나눠 쓰는 것도 꺼릴 것이다. 그 불우가 전염되기라도 할 것처럼. 역으로, 우리는 그만큼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 살고 있다. 사소한 사고나 불운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을 만큼, 그만큼 중산층적 삶의 토대란 허약한 것이다. 영구 임대 아파트를 독립 단지로 배치하는 대신, 같은 아파트, 한 현관 안에 섞어 놓으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저 멀리 다른 출입구로 드나드는 대신, 아침저녁 같은 엘리베이터 속에서 마주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한다. 소심한 아줌마는 겁이 난다. 무례하고 지저분하고 그러면 어쩌지? 술 취하고 소란 피우거나 하진 않을까? 성범죄자 알리미라고 우편이 날아왔을 때 격분하고 ‘주폭’ 운운하는 선동을 비난했던 걸 잊어버릴 지경이다. 지금 내 이웃에도 무례나 불결이나 과음 등이 모두 있겠지만 생각이 거기 미치지 않고, 가난한 삶이 곧 문제적이고 소란스러운 삶일 리 없건만 그것도 헤아리기 싫다. 다만 내 삶이 청결하고 안전했으면 좋겠다. 공부하는―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자세로서― 아줌마가 겁먹은 아줌마를 달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내 안에서 둘이 갈등하는 동안, 아, 그러니 게토란 얼마나 생기기 쉬운가, 복지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다시 생각한다. 더럽고 소란스럽고 위협적인 존재를 분리시켜 버리자는 제안은 늘 솔깃하다. 마치 그들 존재를 유폐시키면 내 삶에서 그런 낌새가 제거되기라도 할 것처럼, 내 삶이 안전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는 나 또한 그런 존재련만. 시혜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분리의 정책을 지지하기란 더더구나 쉬울 것이다. ‘우리’에서 일단 떼어내고, 그런 다음 보살핀다는 기제― 미국에 기부문화가 활성화돼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는 것도 실상 그런 구조다. 분리 후의 관심, 주변화시킨 후의 배려. 그렇듯 분리되고 주변화된 삶은 추락하고 황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라는, 공동의 가능성에서 밀려난 타격이란 그만큼 결정적이다. 사회 곳곳에 게토를 만들려는 정책은, 설사 그것이 복지와 시혜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위험한 것이다. 복지에 대한 사고의 전환, ‘우리’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그런 점에서도 필요할 듯하다. 허나 먼저, 내 안의 겁먹은 아줌마를 잘 달래야 할 텐데.
2017-08-07 | hrights | 조회: 111 | 추천: 1
이은규/ 인권연대'숨' 사무국장 성서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율법교사가 예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는 그에게 묻습니다. 율법에는 어떻게 쓰여 있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었는가 하고. 율법교사는 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에게 말합니다. “옳게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러면 당신이 살 것입니다.”(물론 성서에서는 예수가 하대를 합니다만 글쎄요 제가 아는 예수는 상대방에게 존대를 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다른 새로운 무엇을 얻음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 앎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앎과 삶이 일치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삶이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정치인들 특별히 대통령후보로 나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법대로, 헌법대로 행하십시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이렇습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굳이 여기에 옮겨봅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당신들의 상식에 기대했으면 좋으련만 그 상식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니 할 수 없이 헌법대로 행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로서의 법과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적 가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큰 기대인가요? 18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 대선주자 3인방인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사진 출처 - 뉴시스 율법교사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이야기 합니다. 다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어떤 사람이 길 위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 위에서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당시 레위인들은 종교행사를 관장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이 되자 그는 떠나면서 여관주인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예수는 이야기를 마친 후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율법교사가 대답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는 그에게 말합니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교사는 적잖이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예수의 말에 의하면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이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뭇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특권을 행사하며 살고 있는 사제와 레위인이 아니라 근본도 없는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라니.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몹시도 천박한 족속이라 여겨진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은 종교와 족속을 떠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자비를 행하는 사람, 그들이 이웃이라는 말씀이며 그처럼 행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이웃일까요?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종교와 체제, 지역과 빈부의 차이을 벗어나 자비행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들의 이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이 이와 같은 자비를 행하며 살고 있다면 우리는 참 좋은 이웃일 것입니다. 그래요 시절이 시절인지라 다시 한 번 정치인들, 특별히 대통령후보로 나선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당신들은 어떤 이웃입니까? 길 위에 방치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돌보아 주며 그에 따른 비용을 갚아주는 이웃이 당신들이기를 바랍니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 그들이 당신들이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치가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커서 어쩔 수 없이 기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특히나 여섯 아이를 둔 부모 된 사람의 책임과 의무로서 드리는 말씀이니 제발 귀담아 들으시기를. 그리고 여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묻겠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는 어떤 이웃입니까?” 깊은 연민으로 맺어진 사람과 사람의 연대에 목마른 시절입니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96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GCC 국가연구소 연구교수 ○ 사우디 시위대의 구호는 무엇인가? 2011년 1월 이후 2012년 10월 현재까지 크고 작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2012년 7월 14일 리야드 북부에 위치한 까심 지역에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던 수감자 가족 여성들 10명이 체포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재판 없이 수감된 정치범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들이 7월 23일 까심 지역에서, 25일 리야드에서, 28일 메카에서, 8월에 메카 행정 구역에 속하는 타이프, 동부 지역에 위치한 담맘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개혁을 넘어서 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박탈감, 정치적 억압, 부패는 사우디아라비아에도 모두 존재한다. 시위대가 내세우는 구호는 ‘재판 없이 수감된 정치범 석방, 부정부패 척결, 실업 문제 해소, 종파적인 차별 종식, 바레인에 파견된 군대 철수’ 등이다.   사우디아라비아 행정 구역 놀랍게도 전 세계 석유 수출량의 25퍼센트를 차지하는 석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시민들이 개혁을 주장하며 내세운 구호들이 가난한 공화국들인 튀니지, 이집트, 예멘, 시리아 시민들이 내세웠던 구호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워싱턴 소재 걸프 문제 연구소 소장, 알리 알 아흐마드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부정부패에 따른 시민들의 곤경 상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부패는 최악의 상황이고, 관리들은 시민관련 업무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75년 전부터 지금까지 석유 수익으로 5조 달러 이상 벌었다. 이 금액은 엄청난 것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시민들의 생활양식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았다.” ○ 교사들이 시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년부터 실직 상태의 교사들은 정규직 일자리를 요구하면서 수도인 리야드, 메카 행정 구역에 속하는 사우디 제 2의 도시인 제다와 타이프, 타북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2011년 1월 9일, 250명의 실직한 대학 졸업생들이 수도 리야드에서 시위를 하면서, 정부가 자신들을 위하여 일자리를 창출할 때까지 시위를 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실직한 교사들이다. 우리는 교육부 앞에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시위를 하고 싶지만, 경찰들이 우리를 해산시키고 있다.” 시위자들은 국립 학교에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교육부 관리들에게 요구하였다. 시위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육부 관리들은 곧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시위를 할 것이다. 사립학교 교사들의 월급은 2천 리얄(약 533달러)이다. 반면 국립학교 교사들은 한 달에 8천 리얄을 받는다.” 이러한 사우디 사립학교 교사들의 월급 수준은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하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교사들의 수준보다 낫지 않다. ○ 높은 청년 실업과 저임금 노동자 사우디 시민의 약 70%는 30세 미만인데, 많은 청년들이 실업 상태다. 석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가 10퍼센트(비공식적으로는 30퍼센트)가 넘는 실업문제로 씨름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수치는 이집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 예멘, 시리아에서 혁명은 높은 청년 실업률이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사우디 시민들의 일자리 중 약 90%는 공공 부문이 차지한다. 민간 부문 일자리의 90%는 약 8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외국 노동자들은 고급 기술이 필요한 고임금 일자리나 혹은 사우디 시민들이 천시하는 저임금 일자리를 채우는 경향이 있다. 민간 부문에 근무하는 사우디 시민들은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하고 있다. 이러한 사우디 시민들은 겨우 생계유지가 가능한 수준의 보수를 받는 택시 운전수, 개인 안전 요원 등 저임금 노동자로 내몰린다. 이제 외국인들이 거의 도맡았던 저임금 일자리를 사우디 시민들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 왜 동부 지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발생 하는가 ? 2011년 1월부터 2012년 9월 말까지 시위 도중 18명이 사망하였으며, 사망자들 대부분은 동부 지역에서 시위도중 발생하였다. 동부 지역은 사우디 유전 중 90퍼센트 이상이 위치한 곳으로 사우디 전체 주민의 10-15퍼센트를 차지하는 시아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아파는 1913년 사우디 왕가가 정복전쟁으로 이 지역을 점령하기 훨씬 이전부터 거주해 온 동부 지역 토착민들이다. 그런데 사우디 종교 정책을 주도하는 와하비 성직자들은 시아파를 불신자들로 규정한다. 2012년 7월 8일 시아파 성직자 니므르 니므르가 시위 도중 다리에 총상을 맞고 경찰에 체포된 이후 동부 지역에서의 시위가 격화되었다. 그가 체포되던 날, 시위 도중 보안대가 쏜 총을 맞고 3명의 남성이 사망하였다. 시아 공동체 지도자들은 사망자들의 장례식이 유혈분쟁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주민들과 보안대 양 측에 자제할 것을 호소했다. 현재 니므르 니므르는 고문을 당하면서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 2009년 2월 사우디 정부는 중요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하여 ‘최고 울라마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시아파 대표는 이 위원회에 포함되지 못했다. 또 시아파는 장관, 대사 등 주요 요직에 임명되지 않았으며, 시아파 밀집 지역인 동부 지역 위원회에서도 15명의 위원 중 단 한 명만이 시아파 소속이다. 경찰과 군대에서도 시아파는 거의 배제되고, 공공 부문에서 승진 기회는 거의 없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시아파가 사우디 정부에게 요구하는 개혁 내용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시민으로서 평등권 확보다. ○ 사우디 정부의 개혁 조치와 분파주의 담론은 성공할 것인가? 사우디 정부는 시위 금지법, 경제적 보상, 보안대와 경찰력 강화, 反시아파 담론 등으로 대중 시위를 촉발시키는 동기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시위로 분출되는 시민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경제, 사회, 보건 및 교육 혜택의 패키지를 실행시키고 있다. 이는 주택, 직업, 보건시설, 복지 서비스 부족에 대한 당면한 불만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2011년 12월부터 실업 수당 제도를 도입하여 한 달에 533달러씩 1 백 만 명 이상의 실직자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또 공무원들에게는 2개월 치 봉급을 더 지급하고, 고위 군인들을 승진시키며, 수 천 개의 병원 침대 등을 새로 설치한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5년에 걸쳐 50만 채의 주택과 보안대와 군대에서 6만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군인과 경찰의 막대한 충원과 시위대를 감시하는 보안대에 대한 아낌없는 보수는 사우디 젊은이들을 무장시키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 봉기라는 당면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반시설 건설을 위해서 4천억 달러라는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와하비 종교 지도자들은 석유가 풍부한 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집중적인 시위에 대해서 시아파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경건한 수니 국가에 대항하는 시아파 이란의 음모라고 설명하면서, 통치자를 지지하도록 요구했다. 시아파에 반대하는 와하비 전통은 사우디 내부의 반체제 인사와 외부의 적에게 대항하는 매우 효과적인 정책이다. 시아파 대 수니파의 투쟁이라는 분파주의 담론은 사우디 주민의 다수를 구성하는 수니파 내부의 결속을 다지면서, 시아파의 저항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수니파 대 시아파의 투쟁이라는 널리 퍼진 담론은 현재 진행 중인 시리아 내전 해석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89 | 추천: 0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이곳에 와서 들은, 지역사회 리더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말들이다. 가정폭력 후유증으로 인한 암 투병 중에도 자신의 생계와 가해자 남편의 알코올치료소 병원비까지 벌어야 하는 피해자, 그럼에도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두 발 뻗고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는 여성, 그 여성은 알콜치료보호소에서 잠시 퇴원한 남편에 의해 수술상처부위를 다시 짓밟히고 깨진 병으로 ‘내 손에 죽어라’라는 폭력을 다시 당해야 했다. 다시 알코올치료소로 보내진 남편은 퇴원을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중이라 한다. 남편을 피해 도망갈 처지가 아닌 이 여성은 그저 남편이 치료소에 있기만 바라고 있다. 의처증에 폭력으로 어쩔 수 없이 모아놓은 재산을 남편명의로 돌려주고 나서야 이혼을 통해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난 여성, 그 여성은 몇 년이 지난 지금, 남편이 불납한 증여세를 할증료까지 합쳐 지급하라는 독촉장을 받았다. 그리고 이 여성은 현재 증여세를 납부할 만한 경제적 여건이 안 된다. 새벽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자 대형병원을 찾은 환자, 그는 당장 치료비를 지불하거나, 사후라도 치료비를 보증할 보호자를 내세우지 못하면 응급실 입원은커녕 응급처치도 받을 수 없다는 병원 측의 입장으로 부러진 팔을 들고 여기저기 헤매야 했다. 도시빈민 밀집지역에서 재정지원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빈민의 자녀들을 거두어 아동지원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 이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활동비로 아동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일주일에 수 십 시간의 초과근무를 하지만 그에 합당한 수당을 받지 못하는 국가 및 지방사무 위탁기관의 종사자들도 있다. 혁신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들의 교수방법에 대한 학부모들의 개입은 학교담장을 넘어 교사와 학부모간의 쟁투라는 현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권센터’에 찾아와 해결을 모색한다. 위의 사례들은 이곳에서 ‘인권침해’를 주제로 만난 사람과 사례들이다. 이 사례들은 내용과 성격이 다르지만, ‘인권’이란 관점에서 해결을 위한 도움을 받고자 여길 찾은 사례들이다. 그런데도 인권을 논하고 해결을 위한 실천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부산일보 완성된 인권과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인권침해와 비민주성은 군사독재 시절의 고문과 같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국가폭력과 막걸리반공법처럼 언론을 비롯한 시민적 자유권의 제한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먹고, 일하고, 자는 것 외의 일체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그 통제에 저항했을 때 발생되는 국가의 물리적 압력과 폭력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은 바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완성단계로 보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국가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비롯해서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최소화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에 폭력가해자 남편을 둔 여성은 자신의 현실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있으되 그 자유를 실현하기에 힘들다면 그것은 자유인가? 아닌가? 그녀는 세상을 너무 몰랐다. 알코올중독이라는 말을 1년 전에야 방송에서 알았고, 자신의 현실이 가정폭력이라는 것도 그 후에 알았고, 남편을 알콜치료소로 보내거나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은 최근에 알았다. 이 여성은 남편이 처벌받고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표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몰라서 못했던 것인데 이는 말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 기인한다. 아는 만큼 표현하고 요구할 수 있다. 가정이라는 섬에서 고립된 폭력에 시달려왔음에도 그것이 부당한 줄 몰랐던 이 여성에게 표현의 자유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남편과 이혼하고 떠나고 싶어도 이사 갈 비용도 집을 마련할 형편도 안 되는 현실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법에 보장한다고 실생활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보장되지 않기에 더더욱 법과 제도를 힘주어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강제하기 위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지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업무위탁기관의 종사자들과 공공업무의 직접 담당자인 공무원들 간의 처우에 있어서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 그리고 그런 부당함에도 침묵해야 하는 상황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기보다는 종속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렇듯 조금만 옆을 돌아보아도 우리는 불편함과 비판적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권침해와 불평등에 불편하고 ‘어떤 민주주의를?’ 이라는 비판적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완성되었다는 일부의 인식 속에서, 나는 불편함과 질문이 거세된 삶의 양식을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않는 단선적인 삶의 행보가 느껴진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연일 떠들고 있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민생과 복지, 불공평 해소책들이 왜 언급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음을 생각해본다. 불편이 없고 그로 인한 질문이 없다는 것은 현 체제와 구조로 인한 피해나 차별을 당해보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나아가 체제로부터 이익을 얻거나 옹호하는 입장일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아무래도 이런 이들의 삶의 환경과 내가 만난 피해자들의 삶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서있는 듯하다. 이것도 양극화다. 서울 강남과 강북이 양극화의 지역구조화이듯, 인권과 민주주의의 완성을 말하는 이들과,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이들의 삶은 경제 및 위계의 양극화가 민주주의와 인권담론의 경험과 인식체계로까지 확장된 듯싶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처럼 “뇌 구조 자체가 다른” 것으로 구조화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층적이다. 국가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체제, 사상, 문화, 담론과 개인, 개인과 개인, 자연과 개인의 형태 등 다양한 층위로서 삶에 영향을 미치고 지배하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인권과 민주주의는 이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성찰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단순히 시민적자유권이 보장된다는 문구가 있다고 해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 누구나 ‘00답게’ 혹은 ‘00스럽게’ 살아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에서부터 인권이 시작된다. 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돈이 없어 당장 부러진 팔을 고치지 못한 환자, 제대로 몰라서 그저 당하는 여성, 잘릴까봐 침묵하는 노동자들에게 ‘인간답게’는 희망보다는 도달치 못할 절망의 기제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시도도하기 전에 절망하거나 절망의 구조로 내던져지는 일은 없어야 진정한 선택권이 보장되는 것이 아닐까? 인권의 시작은 선택의 문을 여는 것에서부터 가능하다. 그 선택을 막는 것은 단순한 국가권력뿐만이 아닌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메커니즘, 그것을 적극 수용하는 우리들의 생각과 실천이라는 것을 모두가 아는 것. 그것이 인권의 시작이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로 가는 것이다. 성찰과 통찰의 문화가 절실하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46 | 추천: 0
이광조/ CBS PD 90년대 초반이지 싶다. 제목이 풍기는 야릇한 유혹에 넘어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기대했던(?)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 영화를 통해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라는 발음도 어려운 폴란드 출신의 영화감독을 알게 되었고 곧 그의 팬이 되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주연 배우인 이렌느 야곱의 청순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 영화의 메시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실감하면서부터 영화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남과 북이 분단된 우리의 현실에서는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더욱 강렬했다. 마침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90년대 중반은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으로 허덕일 때였다. 한 날 한 시에 남과 북에서 태어난 닮은꼴의 두 여성. 두 명의 베로니카처럼 이름이 같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출생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두 여성이 걷게 될 운명은 얼마나 다를까. 그 즈음에 영화를 다시 한 번 봤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벌써 15년이나 더 지난 얘기다. 감명 깊게 본 영화지만 갑자기 이 영화가 생각난 건 최근 미국과 스웨덴에서 만났던 여성들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미국과 스웨덴 네 나라 직장인들의 급여수준과 근무조건, 생활수준을 비교하는 특집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지난달에 스톡홀름과 뉴욕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지금 내가 얘기하려는 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만나는 대형할인매장의 계산원 얘기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사진 출처 - 씨네21   대형할인매장의 계산원 하면 모두가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는 중년 여성일 것이다. 우리사회에서는 대표적인 저임금 직종이다. 스톡홀름과 뉴욕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도시에서 30대 후반과 40대 중반의 여성을 만났다. 공교롭게도 두 여성 모두 홀로 딸 하나를 키우는 싱글 맘이었다. 하지만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아이폰과 갤럭시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의 삶의 조건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우선 스웨덴에서 만난 아냐 씨. 39세인 그녀는 스웨덴의 유명 대형할인매장인 이카에서 일한다. 그녀가 받는 시급은 117 크로나. 원화로 환산하면 1만9천 원 정도다. 그녀는 일주일에 35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1만 7천 크로나, 원화로 2백8십만원 정도를 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수준에 비춰보면 많은 액수지만 스톡홀름의 물가를 생각하면 아주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딸과 함께 생활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교육비가 들지 않고 아파도 의료비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졸업 후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때까지 대학진학은 유보한 채 일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계획이다. 그녀에게는 매년 5주의 유급휴가가 주어진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는 지난여름에 태국, 포르투갈, 스코틀랜드, 독일로 여행을 다녀왔다. 뉴욕에서 만난 앤. 그녀는 인터뷰 성사과정부터 아냐 씨와 달랐다. 직장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가 성사됐기에 앤 이라는 이름은 편의적으로 붙였다. 46세인 그녀는 맨하탄의 유명 대형할인매장에서 6년 동안 계산원으로 일했다. 그녀가 받는 시급은 7.25달러. 원화로 1만원 조금 넘는 돈이다. 시급 7.25 달러는 뉴욕 주가 정한 2012년 최저임금이다. 그녀는 하루에 6시간 또는 7시간씩, 주 35 시간 정도 일한다. 하루 8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면 직장에서 보험혜택 등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고용주들이 변칙적으로 일을 시키기 때문이다. 근무 시간도 들쑥날쑥 하고 어쩌다 몸이 좀 안 좋아도 눈치가 보여 ‘Sick Day(병가)’를 요청하지 못할 때가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은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벌이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어 추가로 일을 하고 싶지만 불규칙한 근무시간 때문에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노조를 만든다는 건 생각도 못해봤다. 키에슬롭스키는 유럽의 변방인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현실을 베로니카 라는 인물을 통해 투영했지만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베로니카의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다들 느끼고 짐작하는 대로다. 몇 달 전 한 재벌2세 정치인이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국민들을 행복한 돼지로 보는 거냐’ 며 일갈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백번 옳다. 단순히 돈 좀 더 버는 걸로는 부족하다. 일을 하면 큰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어야 하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아플 때 돈 걱정 안하고 치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가난 때문에 자식이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가난을 대물림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게 돼지가 아닌 사람의 복지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27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지난 해 초부터 불기 시작한 중동의 민주화 바람은 튀니지, 이집트, 예멘, 리비아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와 달리 시리아는 1년 넘게 정부의 강력한 유혈진압 속에 국제사회가 개입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이미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나라들은 새로운 민주 정권을 창출하기 위하여 여러 정치 세력들이 치열한 공방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실로 민주화의 길은 험난하고도 멀다. 회의적인 목소리도 적지 않다. 내부사정만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들 국가를 둘러싼 국제 강국들의 움직임도 만만찮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행여나 반서구 기치를 내세우는 이슬람 정권이 중동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고, 러시아와 중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 기회에 서구의 대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노심초사하고 있다. 석유 자원이 풍부한 중동을 어떻게 해서든지 장악하려는 욕심이 빚어내는 추악한 풍경이다. 격변의 풍랑을 맞고 있는 중동을 보면서 자유롭게 한 표를 던지는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사실 굳이 중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민의를 왜곡하지 않고 반영하는 투표와 결과를 존중하는 민주 정치제도를 확립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부끄럽지만 우리나라도 이 점에서 온전한 민주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민주와 진보를 외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만 엄격할 뿐 스스로에게는 너무나도 관대한 통합진보당을 보면서 소위 시쳇말로 “멘붕”이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굳이 중동의 민주화만 문제 삼을 수 있겠는가. 마침 선배라도 되는 양 중동국가에 민주화 훈수를 두려는 제 자신이 어찌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국가의 민주화 진척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현 중동의 민주화과정이 우리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반성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에 숨 막혔던 사회가 정의와 자유를 찾아 정상적인 삶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그 여정이 고통스러운 지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사진 출처 - 헤럴드경제 대다수의 독재정권이 그러하듯 민주화 시위 물결에 휩쓸려간 중동의 장기집권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이야말로 국가를 선진대국으로 이끄는 적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확신 하에 그들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총칼로 반대자의 입을 봉하고, 손발을 묶었다. 미행, 체포, 구금, 고문은 일상적인 통치 수단이 되었고, 국가안보와 부패비리척결이라는 구호는 정치적 반대자를 깔끔하게 제거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반대가 없는 사회에서 대안세력이 똬리를 틀 공간은 없었다. 통치자는 곳곳에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을 세워 ‘라인’을 만들고 이익을 취하였다. 그들만의 정부가 굳건히 자리내린 것이다. 강력한 이인자는 위험하기에 그런 싹수를 보이는 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였다. 이러다보니 그들만의 정부는 통치자를 위한 기쁨조가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 물론 이러한 일은 통치자가 다 계획한 것이나, 문제가 발생하면 아랫것들이 알아서 한 것으로 통치자는 모르는 일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이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다. 통치자의 개가 된 언론이 주인을 물 일이 만무하니 비판여론이 형성될 공간도 없었고, 비판적인 야당세력이 생기기도 어려웠다. 대안세력의 부재와 아울러 분열은 독재문화의 산물이다. 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한 며느리가 나중에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마따나 독재자 밑에서 자유와 변혁을 꿈꾸던 사람들이 투쟁의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미워하고 욕하던 사람을 닮아 독단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눈앞에 펼쳐진 민주화의 길을 어깨동무하며 함께 가기 어려운 것이다. 최악의 경우 무정부적 혼란보다는 독재자가 더 낫다며 군사 독재자를 다시 전면으로 불러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중동의 혼란상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민주화되었다고 우리도 자랑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힘들게 구축한 자유의 열린 광장을 다시금 우리 손으로 폐쇄할지도 모른다. 말끝마다 민주와 진보를 들먹이면서도 비민주적 구태를 반복하는 민주인사들이 넘치고, 나의 사랑은 로맨스라고 미화하면서도, 남의사랑은 불륜으로 매도하는 이율배반적 태도가 몸에 밴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 곳이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국가의 이익을 나눠먹고 시민들 뒷조사나 하는 부패한 정치인은 중동의 전유물이 아니다. 귀에 따갑도록 들은 영포라인, 민간인 사찰은 모두 국산이다. 벤 알리, 무바라크, 까다피, 살레 등 독재시장에서 1위를 두고 다투던 인물들이 중동 민주화 바람에 사라졌다. 지금 그들이 남긴 추악한 배설물 악취로 중동이 들썩인다. 그런데 그 냄새가 우리에게도 난다. 한국이 중동인지, 중동이 한국인지 모르겠다. 시절이 하수상해서 내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헷갈리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갈피를 못 잡겠다. 솔직히 우리가 중동을, 아니면 중동이 우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지 그 여부조차 잘 모르겠다. 중동이 민주화 되겠냐고 비웃지 말자. 한국은 민주화되었냐고 물을까 두렵다. 중동 민주화, 그 험한 길을 보면서 자꾸 낯 뜨겁고 자괴감이 든다.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멋모르고 까부는 우리들이 다시 한 번 더 차분하게 성찰해야한다. 홀로 방안에 고요히 앉아 하루 동안 한 일을 되돌아보아도 부끄러운 것 하나 없는 삶을 추구했던 유학자를 선조로 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혼란의 중동을 보면서 우리를 반성하자. 민주주의에 비추어 부끄러운 것 하나 없는 나라가 되도록 말이다. 국격(國格)은 그렇게 높이는 거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26 | 추천: 0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러시아에서 유학할 당시의 일이었다. 선정성, 독립성 등에 있어서 악명 높은 러시아 언론 매체들에서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총선에 즈음하여 이와는 차원이 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즉 공산당으로부터 이탈한 민족주의적 분파들이 ‘조국’이라는 독자적인 정당을 창당, 선거에 임하면서 선거 광고가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우리네 상식을 초월하는 인종주의적인 것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러시아의 이슬람계 소수민족들이 거리에 앉아 수박 씨(수박은 소수민족들의 대표적 상품이다)를 바닥에 지저분하게 뱉으면서 지나가는 러시아 여성을 희롱한다. 게다가 이들은 러시아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본 ‘조국’ 당의 당수가 그들에게 다가가 여기는 러시아 땅이니 러시아어로 이야기하라고 하면서 훈계한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리의 쓰레기들을 치우자. 그리고 프랑스 외곽에서의 이민자 폭동을 보여 주면서 이들은 경고한다. 지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도 곧 저런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인종주의적 선거 광고가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어 의회에서 제약이 가해지기 전까지 버젓이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마지못한 의회의 방송 금지 조치가 있었지만, ‘조국’ 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문제의 화면을 그대로 내보내되, 단지 이것은 프랑스의 상황이라며 프랑스어로 더빙하고, 아래에 러시아어 자막이 나오는 버전으로 바꾸어 광고를 계속하는 꼼수를 부렸다. 그리고 이 새로운(?) 버전 속에서 수박을 먹던 소수민족 청년들은 아랍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더빙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체제 전환 선언 이후 벌어졌던 상상을 초월한 끔찍한 사회경제적 붕괴는 거의 모든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스킨헤드로 대변되는 각종 극우민족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등의 부활을 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일련의 스킨헤드들의 인종주의적 행태들이란 반드시 특정 파시스트 집단의 조직원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종주의적이고 타민족배타주의적인 분위기는 일반대중들에게서도 만연되어 있다 보니 인종혐오범죄의 상당수는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여러 여론 조사에 따르면, 방법에 있어서는 이견이 있으나, 러시아인들 중 인종주의적 범죄자들의 주요 주장에 동의하는 경우가 과반수를 넘는 충격적인 결과들을 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반인류적, 반인권적 광고가 버젓이 공중파를 탈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엘리트들 뿐 아니라, 러시아 일반 대중들 또한 비러시아 민족에 대한 혐오감이 극도에 달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상황은 러시아와 과연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에도 독도, 정신대, 욱일승천기 문제 등으로 크게 불거지고 있듯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해서는 늘 비판하고 분노하면서도, 우리가 타민족에 대해 차별과 억압을 자행한 역사 혹은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저들과 다를 바 없는 논리로 자신들의 언행과 행동을 정당화하곤 한다. 특히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될 경우 대중들은 불만을 사회의 약자들에게로 터뜨리곤 하는데, 최근 우리 사회도 이러한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사실상 결혼 이주민 여성들의 동화와 이주 노동자 가족 등 다른 형태의 이주민들의 배제 정책에 다름 아닌 현재의 다문화 정책과 외국인 고용 정책에 대한 불만은 엉뚱하게도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이주민들에게 향하고 있다. 즉 기업들이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 고용을 선호함으로 인해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임금 인상이 저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국인들 더 받아들이자는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특히 경제 위기와 사회 양극화, 사회안전망 부재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하층 집단들에게 커다란 불만을 갖게 하였고, 특히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내국인이 차별받고 있다는 식의 논리는 한국 고유의 순혈주의에 대한 환상과 겹치면서 가히 폭발적인 수준의 적대감으로 돌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필리핀 이주 여성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상징적으로나마 정치권력까지 부여할 기미를 보이자 이러한 불만은 극에 달했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오원춘 사건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증이 현실에서도 조직화되는 단계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공장과 건설 현장, 심지어는 출입국관리소나 단속공무원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차별과 착취, 구타 등 다양한 인종주의적 만행들은 비일비재했지만 이는 창피한 일로 취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7월, 필리핀 이주 여성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자스민 의원이 주최한 다문화정책 토론회에서 외국인 혐오 단체 소속 회원들이 소란을 피웠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가령, 불법 체류자 단속으로 도주하다 사망한 이주노동자들이나 침몰한 중국 어선에서 사망 실종된 선원들에 대해서도 잘 죽었다는 댓글이 쉽게 발견되고, 성범죄 사건 때마다 혐의를 즉각 외국인들에게 돌리며, 전혀 상관없는 과거의 사건들과 연관시켜 인종주의적 모독을 서슴지 않는 댓글이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은 결단코 우리네 현실이 러시아의 그것보다 낫다고 하기 어렵다. 중국동포에 대한 적개심에서 보듯, 향후 본격적으로 특정 이민자 집단의 수가 더 증가하게 되면 갈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사회경제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인 하층 집단들의 불만이 소위 ‘묻지마’ 범죄 등으로 폭발하고 있는 현재, 그 불만이 이주민들에 대한 공격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 이주민들은 다 선하다거나 약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우리 사회 구성원들과 똑같이 다양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이민자, 특히 비서구권 이민자들에 대해 심각한 인권 침해를 방조하여 사실상 용인해 온 것이 사실이다. 욱일승천기를 철십자와 동일시하는 노력의 근본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하여, 과거의 상징이 아닌 현재의 인간에 대한 문제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올림픽 당시 말만으로도 스위스 축구 선수와 그리스 육상 선수가 자국 국가대표를 박탈당한 것을 상기하자.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국제적 수준으로 인종주의와 파시즘 선동에 대해 단호하게 처벌할 수 있는 법제정이 시급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과 제도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낯선 인종주의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관심이 절실하며, 이주 노동자나 이주민 권리 운동은 반드시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 운동과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34 | 추천: 0
고유기/ 민주통합당 제주도당 정책실장 가을 초입의 선선한 바람이 부는 평온한 저녁,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 안에서는 의미 있는 음악회가 열렸다. 퓨전국악과 록밴드, 성악, 자연주의 기악연주 등 다채로운 공연을 무대 위에 올리며 펼쳐진 이 음악회의 목적은 제주 강정마을을 후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년째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강정마을 주민들을 응원하는 내용이었지만, 'from DMZ to JEJU'라는 모토처럼 이 음악회에는 DMZ와 제주의 만남이라는 각별한 의미가 배어 있었다. from DMZ to JEJU 모토로 열린 강정후원 음악회의 제목은 ‘레가토’이다. ‘레가토’는 음이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는 의미의 음악 용어인데, 평화가 DMZ에서부터 제주에까지 이어지길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음악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 3시간 넘게 이어졌다. ⓒ 송복남 DMZ가 강정을 만난 이유 남북을 가르는 경계지대 DMZ와 ‘평화의 섬’ 제주의 만남,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군사적 대립의 장소와 적극적 가치로서의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세계평화의 섬 제주’의 만남은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만남을 매개한 강정마을의 현실을 떠올려 보면 이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 만남에는 그 동안 ‘군사안보’의 다른 이름으로 왜곡돼 온 ‘평화’를 새롭게 쓰자는 염원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군사기지가 밀집해 있는 도시에서 평화는 곧 군사안보를 의미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군사력에 기대지 않는 평화는 그 곳의 오랜 염원이 되었고, 비로소 조금씩 그 싹을 틔워 왔을 것이다. 그 몸부림이 군사기지 건설문제에 고통당하는 강정을 불러냈던 것이다. 그럼에도 DMZ가 군사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을 초대해 이뤄진 만남 그 자체는 오늘 날 매우 불온한 것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다. 분단에 따른 군사적 대치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그것도 그것의 접경지역에서 군사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을 초대해 만나다니. DMZ의 평화는 이제 새로 쓰여져야 한다. ⓒ 페이스북 엄미경 안보와 평화에 대한 근본적 질문, 제주 해군기지 문제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평화’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2007년에 정점을 이뤘던 그 문제의 쟁점은 평화의 섬 제주와 군사기지가 양립 가능하냐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결국 평화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즉, 힘(군사력)이 있어야 평화가 유지되는 것인지, 평화의 유지와 확장은 평화적 수단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인지 하는 물음이 이 논란의 중심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 물음은 과거에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평화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응당 총을 든 군인이나 ‘멸공’ 옆에 비둘기를 그려놓는 식으로 형상화하곤 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총을 들어야 평화도 지켜진다는 믿음이 신념처럼 어린 아이들에게 주입되고 각인되었다. 이런 까닭에 안보, 특히 군사안보에 대한 물음은 그 자체가 금기시 되었고, 국가가 펼치는 안보사업은 성역사업이 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평화는 곧 군사안보만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제 국민들도, ‘안보’, ‘국가기밀’, ‘군사기지’, 이런 것들에 대해 당연히 물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터져 나온 것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문제이다. 따라서 제주 해군기지 문제는 비단, 제주에 이런 군사기지가 적합하냐 하는 문제를 넘어서 금기시되고 성역시 되었던 국가안보사업의 민주화에 대한 요구임은 물론, 나아가 과연 군사안보에 기댄 평화란 오늘 날에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남북을 가르는 DMZ, 미래를 가를지 모르는 제주해군기지 일찍이 DMZ는 남북을 가르는 철책선으로서 만이 아니라,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경계가 되었다. 분단은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생각조차 가능한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의 구분을 금기와 강제로서 형성해 나갔는데, DMZ는 그것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DMZ가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경계의 골을 깊게 하는 동안, 정작 DMZ 안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꽃들이 피어나고, 수많은 종류의 새가 둥지를 틀거나 철따라 이동하는 천연의 정거장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도, 이 곳 DMZ의 녹슨 경계가 왜 지속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철책을 경계로 대립하는 분단의 상황이 더 이상 서로에게 이롭지 못할 뿐 아니라, 굳이 필요치 않다는 또 다른 당위로 새롭게 대체되는 상황이다. 굳이 완성된 통일이 아니어도 남북이 소통하고 교류와 왕래가 필요하다는 것은 시대적 당위가 되고 있는 것이다. DMZ는 오랜 세월, 남북을 가르는 경계의 상징 장소가 되어 왔지만,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자칫하면 평화로 흘러야할 남쪽 바다를 긴장과 갈등의 바다로 가르는 미래의 경계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이럴 때, DMZ와 강정이 만난 것이다. DMZ는 안보와 군사적 논리에 기댄 평화를 새롭게 다시 써야 할 처지에 서 있고, 제주는 해군기지 문제로 인하여 평화의 섬의 논리와 내용을 새롭게 써나가야 하는 처지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불온한’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이제는 'from JEJU to DMZ'로! 지금 대선이 한창이지만, 어떤 세력이 집권하든 차기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문제를 정면으로 다뤄야할 가장 큰 숙제로 끌어안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큰 공감대를 얻고 있다. 바로 이러한 때에 DMZ 평화가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는 염원들이 생겨나고, 바로 이러한 때에 강정이 평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날 평화란 어떤 실체이어야 하며,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한반도의 평화는 어떤 프로세스로 나가야 하는지, 이를 기반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한반도는 어떤 위치와 역할이어야 하는지의 문제에 한 가운데 놓여있는 것이 제주 해군기지 문제이다. 이런 까닭에, 한반도 평화문제의 가장 민감하고 첨예한 장소인 DMZ를 바라보는 일도 제주 강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문제 안에 DMZ도 놓여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만남은, DMZ의 초대로 이뤄졌지만,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제주에서 DMZ를 초청한 만남이 이뤄지길 소망해 본다. 'from JEJU to DMZ' !
2017-07-21 | hrights | 조회: 135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8월 14일 밤, 예루살렘과 서안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권능의 밤(Laylat al-Qadr), 라마단의 신성한 밤을 기리기 위해 성지 예루살렘(동예루살렘-1967년 이스라엘 점령지)에 함께 모였다. 무슬림들은 610년 권능의 밤에 코란의 첫 계시가 예언자 마호메트에게 전달되었다고 믿는다. 2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티카프(하룻밤 동안 모스크에 머무르면서, 코란을 읽는 의식)를 하기 위해 알 아크사 모스크에 모였다. 이티카프는 이른 아침까지 계속된다. 예루살렘의 구 도시(동예루살렘)는 하룻밤 동안 해방된 것처럼 보였다. 군중들이 예루살렘 구도시 중심에 있는 하람 알 샤리프의 매우 상징적인 장소(알 아크사 모스크)에 가기 위해 다마스쿠스 문으로 몰려들면서, 다마스쿠스 문에서 알 아크사 모스크에 이르는 구시가지의 미로와 같은 골목길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예루살렘 구 도시 전체가 사람들로 완전히 뒤 덥혔다. 전례 없이, 이스라엘 정부는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예루살렘 출입 허가권을 발행했다. 이에 따라 40세 이상의 팔레스타인 여성들과 남성들은 이스라엘의 최소한의 보안 감시를 통과해서 예루살렘 출입을 허가를 받았다. 이것은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도시를 점령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서안과 예루살렘을 분할하는 경계가 열리고, 서안과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이 함께 모이면서, 팔레스타인들의 의식으로부터 매일 사라져가는 성지 예루살렘은 다시 한 번 팔레스타인인들의 도시가 되었다. 알 아크사 모스크 주변으로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공간을 찾지 못했던 많은 서안지구 사람들은 이 밤을 서 예루살렘, 자파와 하이파(현재 이스라엘 도시들) 등 방문할 기회로 이용하고, 개인적으로 그리워하던 곳들을 방문했다. 일부 사람들은 살라딘 거리에서 쇼핑하기도하고, 말하와 마밀라에 있는 쇼핑센터들로 향했다. 축제 분위기는 동쪽의 알 아크사 모스크와 팔레스타인들이 전통적으로 거주해왔던 도시 지역에만 갇혀있지 않았다. 서쪽으로, 종교의 경계를 넘어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여름 축제(Chutzot Hayotzer 2012)를 위해 힌놈 계곡(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 경계)에 모였다. 예루살렘 구도시 전경. 오른쪽이 바위돔 모스크(황금돔)이고 반대편 왼쪽의 검은돔이 알 아크사 모스크이다. 알 아크사 모스크는 예루살렘 구도시 중심에 있는 하람 알 샤리프의 매우 상징적인 장소이다 사진 출처 - 홍미정 교수   이스라엘 안보는 예루살렘 주변의 수많은 도로들을 폐쇄하고 주요 지역에 추가적으로 부대를 배치하여 힘의 과시에 중점을 둔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해 보여준 전례 없는 개방은 이스라엘 안보 문제와 팔레스타인인들과의 미래관계 등과 관련한 동시대 이스라엘인들의 생각에 관해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이 사건의 의미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모두에게 미칠 영향을 읽어내기 위해서, 정치, 안보, 미래 전략의 관점에서 그 밤의 사건들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하나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서안 지구에 대한 안보 정책을 급격히 바꾸기 전에 시험하는 하나의 시도라는 낙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과 이스라엘 국가 사이의 경계가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유연한 경계’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문을 열어주고, 예루살렘에서 권능의 밤이 개방과 상호 관용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어쩌면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유대 국가’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만약 이스라엘 공동체와 팔레스타인 공동체가 사고 없이 하룻밤이라도 성지 예루살렘을 공유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 체제라는 생각을 고착시켜야한다는 두려움의 담론은 새로운 현실을 직면함으로써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 그들의 이웃들과 함께일 때 ‘더 안전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아라파트 사망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안에서 이스라엘 점령민들, 군인들, 물자들이 어떤 저항도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100퍼센트의 안보를 누려왔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안보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팔레스타인 저항 단체 구성원들 대부분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감옥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다. 6,0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감옥에 수감되어있다. 좀 더 넓은 그림에서 볼 때, 가자 지역을 감시하는 책임이 이집트의 어깨로 천천히 옮겨감에 따라 가자 또한 이스라엘 안보 문제에서 덜 중요해 지고 있다. 서안지구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은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존재를 결정짓는 현재 진행 중인 정치적 난국이 부가될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확실히 지금 상태에서 많은 안정을 도모하고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이스라엘인들은 ‘이스라엘의 인구학적인 균형을 위협하지 않을 방식으로, 틈새가 많은 경계를 갖는 팔레스타인 자치 독립체가 이스라엘과 공존할 수 있는지’ 등 새로운 정세의 실행가능성을 조사 중이다. 양 측이 직면한 끝없는 도전들 중 하나는 성지 알 아크사 모스크를 분할하려는 이스라엘의 계획이다. 이스라엘 관리들은 이스라엘이 논쟁적인 ‘헤브론 모델(이브라힘 모스크 분할)’에 따라서 알 아크사 모스크를 분할하려고 한다고 밝혀왔다. 헤브론에 존재하는 이브라힘 모스크는 이스라엘 군대가 접근 권리를 통제함에 따라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무력으로 분할’된 곳이다. 팔레스타인들은 헤브론의 이브라힘 모스크 분할 방식이 알 아크사 모스크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논리를 절대 반대한다. 무력으로 이루어진 방식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권능의 밤 동안 수 십 만 명의 팔레스타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지들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재확인하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인들의 독점적인 도시가 아니라고 이스라엘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 영문 원고 번역은 정지혜(청년 칼럼니스트)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3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