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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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유정/ 변호사, 법무법인 자하연 독재권력에 눈 감고 귀 막은 사법부, 뼈저리게 반성해야 - 잘못된 판결 바로잡은 독일의 교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긴급조치 사건 판결을 공개한다고 해서 30여년 전의 일이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에 판결을 작성한 판사들의 실명공개 문제도 거론되고 있다. 판결문 공개 자체를 못마땅하게 보는 시각도 있고, 실정법이었던 긴급조치를 적용하여 판결을 한 것만으로 판사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우려를 표명하는 견해도 있다. 또 역사적인 차원에서 평가하고 사법부 전체가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며, 일부에서는 사법부 인적 청산을 거론하기도 한다. 판결문은 비밀문서도 아니고 일반인들도 정보공개를 요구하여 열람할 수 있는 내용이므로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판결을 한 판사들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인데, 판사는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에 의해 판결을 하는 독립적인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비밀로 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판결문을 공개하는 주체가 사법부였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사법부 스스로 과거의 잘못에 대한 공식적인 반성이나 유감표명조차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진실화해위원회가 먼저 판결문 공개를 한다고 하여 못마땅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법부 스스로 들추기 어려운 과거의 잘못을 드러내고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31일 오후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판에 관여한 판사 실명이 포함된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할 예정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판사 실명 공개,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다만 긴급조치가 실정법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주장에 대하여 상급심인 대법원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수차례 하였던 상황에서, 판사 개인이 긴급조치위반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하지 않았다는 또는 못하였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인적 청산을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판사 개인이 정의와 양심에 반하는 실정법의 적용을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법적 안정성과 정의가 충돌할 때 어느 것을 더 우선하여야 하는가라는 법철학자들의 해묵은 논쟁거리와도 관련이 있으며,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법부의 역사적인 책임마저 덮어주자는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 제1호는 그 내용 자체만 보더라도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헌법개정을 주장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위반하는 경우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심지어 학생이 정당한 이유 없이 시험이나 수업거부, 교내집회를 하는 경우에도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내용이다. 이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영장주의의 원칙, 신체·양심의 자유, 언론·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누가 보더라도 정당하지 못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법원이 여러 차례 긴급조치가 헌법에 반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한 것은, 국민의 인권을 지켜야 할 사법부가 그 소임을 다하기는커녕 독재권력을 정당화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잘못에 대하여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사법부는 지금이라도 독재권력의 불법적인 권력행사에 대하여 눈 감고 귀 막은 과거를 뼈아프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1974년 10월 서울 광화문에서 유신헌법 폐지를 주장하는 한국신학대 학생 50여 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국보도사진연감 부정의한 법률은 정의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독일의 법철학자인 라드부르흐는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이라는 논문에서 “법률의 정의에 대한 위반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면 부정의한 법률은 정의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러한 논리는 나치시대의 실정법을 적용한 판결을 바로잡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일례를 들자면 나치시대에 사법공무원 푸트파르켄이라는 사람이 괴티히라는 상인이 공중화장실에 “히틀러는 학살자이고 전쟁은 그의 책임이다”라는 낙서를 하였다고 신고를 하였다. 괴티히는 이 낙서 이외에 외국방송을 청취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사형판결을 선고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2차 대전 이후 튀링엔 주 검찰총장은 푸트파르켄을 기소하면서 “히틀러 시대에 다른 사람을 밀고한 자는 자신이 피고인을 진실발견과 정당한 판결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합법적인 소송이 아니라, 완전한 자의에 내맡긴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고, 실제로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밀고를 했다”고 하면서 “푸트파르켄은 괴티히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의욕 했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시인했고, 이는 살인의 고의에 해당하며, 법원이 사형을 선고했다면 그는 살인의 간접정범이고, 만약 살인의 책임을 사형을 선고한 법관들에게 돌린다면 그는 살인의 방조범이 된다”는 논고를 하였다. 튀링엔 주의 배심법원은 푸트파르켄에게 살인방조죄의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식견이 부족한 탓에 위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는지 아니면 상급심에서 변경이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전후 나치시대의 실정법을 적용한 수많은 판결에 대해 그 자체가 적법성이 없는 재판이므로 이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독일의 여러 주에서 있었고, 나치시대의 법률은 “법률적인 불법으로서 무효”라는 논리에 근거한 여러 판결들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7 | 추천: 0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우리는 살아가면서 직접적으로 범죄피해를 당하지 않더라도 언론보도를 통해서 범죄 발생 사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살인, 강도, 강간, 절도 등 수없이 많은 종류의 범죄들이 연일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보통 범죄발생을 범죄시계로 표현하기도 한다. 2002년 9월 경찰청이 발표한 범죄시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9시간 30분마다 살인사건 1건, 1시간 30분마다 강도 및 강간사건이 각각 1건씩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보다 인구가 3배정도 많은 일본은 1999년에 살인 6시간 56분, 강도 2시간 4분, 강간 4시간 43분으로 인구수로 보면 한국에 비해 살인, 강도, 강간의 범죄발생빈도가 낮다. 반면에 인구가 5배나 많은 미국은 1999년에 살인 34분, 강도 1분, 강간 6분으로 한국보다 발생빈도가 높아 인구 10만명당 전체 범죄 발생률에서는 서구에 비해 아직은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범죄시계를 통해서 보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전국 곳곳에서 많은 범죄가 발생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많은 범죄학자들이 범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범죄학이론을 개발하여 이를 규명하려 했고, 경찰을 비롯한 형사사법기관에서도 범죄통제를 위하여 힘쓰고 있다. 그런데 연초부터 우리의 뇌리를 자극하는 범죄사건이 보도되었다. 소위 화성에서 발생한 부녀자 연쇄 실종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1986년부터 1991년 사이에 10건이나 발생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망령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닐까 매우 우려하고 있다. “어느 사회든지 일정량의 범죄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뒤르껭(Emile Durkheim)의 범죄정상설의 주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범죄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인간의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설사 요순시대라 할지라도 일정량의 범죄는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만일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평화롭고 살기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범죄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면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겠구나”라고 하며 부질없는 생각도 하곤 한다. 마치 환자가 한 명도 없다면 의사도 전혀 필요 없듯이 말이다. 어차피 범죄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이를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범죄가 발생한 후에 이를 진압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소요될 뿐만 피해의 완전한 원상회복도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범죄예방대책으로는 여러 가지 방안이 고려될 수 있다. 제지이론(deterrence theory)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엄격한 형벌을 부과하고 신속하고 확실하게 형벌을 집행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황적 범죄예방이론(situational crime prevention theory)과 같이 범죄가 발생할 수 있는 기회를 사전에 제거하는 방법에 의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문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만 주의를 한다면 범죄피해의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했으면 한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 각자가 조금씩 욕심을 줄여갔으면 좋겠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를 한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살인사건 피해자의 상당수는 원한관계에 의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이 되게 하고 있다. 둘째는 우발적인 범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과 같이 가장 손쉬운 방법에서부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하여 범죄표적이 되는 일을 삼가는 것 등이 중요하다. 그리고 부엌칼을 비롯하여 과도 등의 칼끝을 둥글게 하는 것도 범죄를 예방하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이는 칼을 제작할 때부터 둥글 때 제작하게 의무화하는 것도 범죄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국처럼 국민들이 총기를 소지할 수 없어서 총기에 의한 살인사건이 거의 없다는 점이나 인도처럼 지참금 문제로 인한 살인사건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는 점 등은 우리 국민이 큰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부녀자 성폭행이나 실종사건 등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우리를 부끄럽고 슬프게 하고 있다. 앞으로는 우리 모두 범죄로부터 보다 안전한 사회를 조성하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탰으면 한다. 그리고 화성에서 실종된 부녀자들이 안전하게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화성 주민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치안대책을 조속히 수립해 주기를 바란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8 | 추천: 0
이광조/ CBS PD 2006년의 막바지에 나는 두 대통령의 죽음을 목격했다.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물론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의 죽음은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영화 속에서 벌어진 가상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죽음은 21세기 지구촌 곳곳을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이고 있는 폭력과 증오의 악순환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가상이긴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죽음을 소재로 삼았다고 해서 미국에서 개봉조차 못했다는 ‘대통령의 죽음’은 한 아랍계 이민 여성의 하소연으로 시작한다. ‘그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방아쇠를 당긴 걸까요, 자신이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걸까요.’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부시 대통령이 시카고를 방문해 한 호텔에서 열리는 경제인 행사에 참석한다. 부시 대통령은 경제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특유의 유머로 연설을 진행하지만 호텔 밖에는 부시의 방문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베트남 전 반대 시위 이후 미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이유는 부시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인 전쟁 때문이다. 시위대는 부시를 전쟁의 화신, 악의 화신으로 여기고 부시에 대해 극단적인 분노와 증오를 표출한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연설을 마치고 호텔을 나서던 부시 대통령이 괴한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고 현장 근처에 있었던 시리아 출신의 한 남성이 용의자로 체포된다. 명백한 물증은 없지만 수사당국은 그를 암살범으로 확신한다. 그는 ‘시리아’라는 깡패국가 출신인데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꾐에 빠져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경험까지 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대통령의 암살범은 이라크 전에서 목숨을 잃은 한 흑인병사의 아버지로 밝혀진다. 그는 군대를 지망하는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차별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군대를 택했고 전쟁에도 참가했다. 그는 미국의 대의를 믿었고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군대를 택한 두 아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 정신이 황폐화됐고 급기야 큰 아들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군대, 세계최강이자 정의로운 그 군대가 이라크라는 곳에서 명분 없는 학살을 자행하고 그 명분 없는 전쟁에서 소중한 아들까지 잃게 되자 이 노병은 자신과 아들의 삶을 망가뜨린 부시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하지만 진범이 밝혀진 뒤에도 암살 용의자로 체포된 시리아 출신 남성은 석방되지 않고 미국은 시리아에 대한 전쟁을 준비한다.   영화 '대통령의 죽음'의 포스터 사진출처 - 대통령의 죽음 홈페이지   ‘그는 자신이 방아쇠를 당길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도 안 해 본 걸까요.’ 영화의 시작부분에 등장하는 아랍계 여인의 눈물 젖은 하소연은 부시를 응징한 흑인 노병에 대한 원망이다. 아들을 잃은 노병의 복수로 애꿎은 그녀의 남편이 암살범으로 체포됐고 아랍계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추방이 이뤄졌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는 진범이 밝혀진 뒤에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시리아에 대한 전쟁을 추진한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진부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명백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영화를 본 다음 날 후세인 전 대통령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 모습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중계됐다. 영화 속 부시 대통령의 죽음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느낌도 들었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후세인의 처형. 시간이 흐른 뒤 미국의 어느 곳에선가 자식을 혹은 남편과 아내, 부모를 잃은 누군가가 후세인을 처형한 사람들을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을 연구한 한 미국인 인류학자는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 발생한 사건과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이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이 쿠데타는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진 군사 쿠데타와 더러운 전쟁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 쿠데타 과정에서도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대통령의 죽음이 있었다.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선 수 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가 발생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걸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는 무고한 죽음에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진출처 - 대통령의 죽음 홈페이지
2017-06-09 | hrights | 조회: 9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노무현 대통령이 느닷없이 개헌 얘기를 꺼냈다. 단순한 화제거리가 아니라, 여론 수렴을 거쳐 헌법개정안을 곧 제안하겠다는 것이다. 개정하고자 하는 내용은 두 가지다.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하고,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4년 임기와 그 개시시점을 일치시키겠다는 것이다. 개헌해야 할 여러 쟁점이 있지만 다른 것은 일단 배제하고 이 두 가지 쟁점에 집중하여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제안된 헌법개정안은 20일 이상 대통령이 공고하고,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국회에서 의결된 후 국민투표에 붙여진다. 국회의결 이후 국민투표까지 30일 이내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개헌안을 제안하여 90일 이내에 헌법개정이 완료되니 대통령 선거에 결정적인 장애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통령의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헌 헌법개정은 그 헌법개정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헌법 제128조 제2항)고 하고, 노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도 바닥이므로 노대통령이 자신의 중임을 위하여 추진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물론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이 이뤄질 경우, 현행 헌법의 이 조항이 새로운 헌법에도 계속 규정되지 않는 이상 임기연장 또는 중임변경 조항이 개정안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 효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개헌구상은 대통령이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규범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임기 이전에 가시적인 정치적 성과를 내고자 하는 의도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노대통령의 말처럼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규범을 만드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1987년 헌법이 담고 있는 가치나 정신이 개헌을 얘기할 만큼 변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초점은 개헌구상의 핵심으로 얘기되는 대통령 4년 중임과 국회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의 일치를 논의하는 것이 어떠한 시대정신의 변화를 반영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적어도 이 두 가지 내용의 개헌과 관련해서는 거창하게 시대정신을 얘기할 문제가 아니라 정치권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1987년 헌법의 정신과 가치에서 몰아내야 할 정신과 가치는 여전한 군사문화의 잔재와 사법특권을 옹호하는 제도이며, 새로이 헌법에 담아야 할 시대정신과 가치는 더욱 강화된 기본적 인권의 보장이 아닌가. 노대통령은 1987년 개헌과정에서 장기집권을 제도적으로 막고자 마련된 5년 단임제는 이제 그 사명을 다했고, 오늘날 오히려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책임정치를 훼손하고, 국정운영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어렵게 한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9일 오전 11시30분 대국민특별담화를 통해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를 4년 연임제로 바꾸는 헌법개정 논의를 제안하면서 추후 이 같은 방향으로의 개헌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옳은 지적이다.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면서 국정수행능력이나 내용을 묻지 않고 임기를 딱 한 번만 수행하게 하는 것보다 잘 하면 더 오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임제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선진국에서 단임제를 택한 경우도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군부독재에서 이뤄진 장기집권의 가능성도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유능한 정치인에게 장기적 국가과제를 설정하고 일관되게 국정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려면 중임을 제한하는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4년 중임제는 5년 단임제보다 객관적으로 나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년 단임제는 역사적 맥락이 1인 장기집권의 가능성을 차단하려 한 의도를 가진 것이지만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재집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소신 있는 국정의 구상과 운영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재선을 위한 선거과정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를 의식하지 않고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책임정치가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전두환, 노태우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책임정치도 또한 가능하다.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인을 선택할 기회도 많아진다. 모든 제도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단임제는 반드시 단점만 가진 제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중임제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근거로 드는 단임제의 단점은 중임제의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두 번째 임기에는 단임제와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또 단임제는 장기적인 국정과제를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데도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정운영이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 늘수록 정책은 정당 차원에서 구상되고 추진되기 때문에 대통령의 단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구상도 문제가 있다. 이런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수시로 치러지는 선거,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국회에서 겪는 대통령의 괴로움을 모를 바 아니다. 사회적 갈등이 일상화되고 선거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와 임기개시시기를 일치시키면 문제는 없는가? 이 경우 대부분 여대야소(與大野小) 정국이 형성될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와 의회의원 선거는 언제나 여대야소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의회다수당을 차지한 여당에 의해 뒷받침을 받은 대통령은 국정을 수행하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대야소의 정국에서 우리는 어떤 경험을 했던가? 이성적 토론이 실종된 국회, 타협에 의한 합리적 방안의 도출은 포기되고 일방적 관철이나 목숨을 걸었다는 ‘결사저지’가 다반사 아니었던가? 우리의 의회는 이제 변하였는가?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만 변했다고 하기엔 아직도 멀었다. 이런 현실에서 여대야소 구도는 여당의원들에 의한 대통령 국정운영의 일방적 지지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사안에 따라 합리적 대안이 제시되고 이성적 토론이 이뤄지기보다는 자기정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반대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결사저지가 나타날 수 있다. 헌법이 권력분립주의를 택한 근본적 이유가 적절한 견제를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보장에 기여하게 하려는 것이라면 이러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2006년 7.26 재보궐선거일인 26일 서울 성북구 월곡4동 한 아파트 단지내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주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수시로 이뤄지는 선거는 주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국민의 의사가 표출되는 과정이며, 국정운영에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선거문화를 바꿔나간다면 사회적 비용의 발생도 굳이 걱정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금권정치가 문제이지, 선거가 자주 있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4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국회의원총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면 그 과열양상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4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미국 연방의 대통령 임기는 4년이지만, 의회 하원의원 임기는 2년, 상원의원은 6년이다. 상원의원은 2년마다 3분의 1씩 개선되어 2년마다 의회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의 정책수행에 대한 중간평가가 이뤄진다. 수시로 이뤄지는 선거를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또 생각할 수는 없을까?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제로 바꾸고, 국회의원과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것은 현재의 제도보다 나은 부분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 장점만 나타나고 단점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제도를 바꾼다고 현재의 제도가 가진 문제점을 불식한다고 할 수도 없다. ‘국민적 합의 수준이 높고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대통령 4년 중임과 국회의원과 대통령 임기의 일치 등 의제에 집중하여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과 의무를 행사하지 않아야 할 뚜렷한 사유가 없는 한,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헌법이 부여한 개헌 발의권을 행사하고자’ 한다고 하니 노대통령은 조만간 개헌을 발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개헌은 단순한 문구의 수정이나 조금 더 나은 제도로 만들고자 하는 단순한 발상에서 이뤄질 것은 아니다. 개헌은 그 대상이 헌법의 중요한 사항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그 내용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요성이 있어야 하며, 그 사항에 대한 국민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개헌을 하는 과정에서는 부수적인 내용의 개헌도 함께 이뤄질 수 있는 것이겠지만, 개헌을 추진하려면 우선은 이러한 중요한 대상과 그 개헌의 필요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 임기와 선거일정의 조정이 다른 것보다 앞서서 개헌을 해야 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의제일까?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를지 모르지만, 국민의 기본권보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민들에게 대통령 임기와 선거일정 조정 등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헌논의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헌법이 가지는 기본권 제약요소를 찾아내고, 국민이 보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군사문화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일반국민에 대한 광범위한 군사재판 권한(제27조 제2항), 평등권을 침해하는 군인·군무원 등의 국가배상청구권 제한(제29조 제2항), 법관의 관료화·서열화를 초래하는 법원구성의 방법인 대법원장의 대법관임명제청권(제104조 제2항), 국민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정당국고보조(제8조 제3항) 등 조항을 폐지 또는 개정하는 것은 몇 가지 예이다. 국민의 기본권보장에 정말 중요한 조문들의 개정이 없이, 그 장점이 나타난다고 장담할 수 없는 내용만을 위한 개헌이라면, 대통령이 그토록 우려하는 사회적 비용을 생각할 때 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5년 단임제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4년 중임제로 바꾸면 5년 단임제가 나타내는 문제점을 없앨 수 있는가? 과연 다른 것을 미루고 그 내용을 바꿀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는가? 좀 더 임기를 계속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할 만한 정치인을 우리는 가졌던가? 단임제가 초래하는 정치왜곡이 그리도 심각한가? 국회와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켜 두 기관을 균질화하는 것이 그리도 필요한가? 오히려 국회의 의정활동의 내용을 바꾸는 게 먼저 필요한 게 아닌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헌법은 여러 문제점들이 있지만, 그래도 잘 손질하고 적절하게 메꾸면 우리 시대의 삶을 담아내는 데 큰 문제는 없다. 헌법을 바꾸면 정치가 바뀔 것이라는 안이한 환상은 금물이다. 일반적으로 헌법의 개정은 정치의 변화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지금 굳이 개헌을 하자면 우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의 보장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정치적 계산은 그 다음이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6 | 추천: 0
유정배/ 참여와 자치를 위한 춘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춘천에도 ‘명동’이 있다. 서울사람들은 춘천에 명동이 있다는 말을 듣고 대개는 피식 웃어버리지만 드라마 ‘겨울연가’덕에 유명해진 그곳은 춘천사람들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다. 소설가 한수산이 78년에 발표한 ‘안개시정거리’라는 작품에도 춘천명동이 언급되어 있듯이 그곳은 춘천의 청춘남녀들에게 사랑과 우정의 성장통을 앓게 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명동어귀에서 한 시간 정도만 서성이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가끔 풋사랑에 가슴 졸이던 그리운 얼굴들과도 조우할 수 있었다. 명동은 춘천에서 제일 큰 ‘중앙시장’이라는 재래시장을 끼고 있어 말 그대로 그곳은 춘천의 ‘중앙’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명동이 주변이 된듯하다. 중앙시장은 장사치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 졌고 명동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은 오가는 인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대형 할인마트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면서 재래시장은 존립이 어려워졌고 노쇠한 상인들만 발길 끊긴 시장통을 쓸쓸히 지키고 있다. 또 도심지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외지자본이 재래시장지역을 재개발하면서 그나마 그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영세소상인들은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강원도와 춘천시가 수십억을 들여 중앙시장 외관을 알록달록하게 꾸미는 등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애를 쓰지만 대형마트로 발길을 돌리는 소비자들을 막기에는 역 부족인 듯하다.   춘천시내 최고의 번화가인 명동 거리의 모습. 사진 출처 - 세계일보   강원도는 1999년부터 전국 최초로 해 마다 농어촌 주민들 가운데 자율적인 마을발전 역량과 의지가 높은 시범마을을 지정하여 사업비 5억원을 인센티브로 지원 하는 ‘새 농어촌건설운동’이라는 시책을 시행하고 있다. ‘내발적 발전론’에 근거한 이 사업은 주민이 마을 혁신의 주체가 되어 지역내부의 산업·기술·문화적 토대에 기반해 지역혁신을 꾀하는 자발적인 노력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참여정부의 ‘신 활력사업’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사업’등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시행과정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업은 중국에도 수출되어 개혁개방 이후 발생한 지역 간 격차를 줄이고 농촌지역을 진흥하기위한 정책수단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만약 한미 FTA가 정부 뜻 데로 체결된다면 춘천 명동과 중앙시장은 어떻게 될까? 강원도가 자랑하는 ‘새 농어촌 건설운동’은 또 어떻게 될까? 춘천시가 중앙시장 현대화 사업을 위해 예산을 세워 집행한다면 월마트가 춘천시를 상대로 직접소송을 제기할 것이고 춘천시는 막대한 소송비용을 들이게 될 것이며 패소한다면 월마트의 손해를 보상해주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 것이다. 아마 강원도가 자랑하는 ‘새 농어촌 건설운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덕분에 예상치 않은 예산절감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가뜩이나 공동화된 농촌지역에 한미 FTA가 밀려오면 ‘어메니티’를 살려 농촌을 일으킬 농민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전에 내국인 대우 조항에 위배된다는 미국의 시비에 ‘새농어촌건설운동’을 알아서 폐기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2005년 기준 강원도내 총생산은 전국의 2.7%를 차지한다. 반면 전국의 수출액 가운데 강원도의 비중은 0.3%다. 강원도는 철저히 내수에 의존한 경제라는 이야기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제조업이나 지식기반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은 수도권은 통상확대의 이익을 입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강원도 같이 제조업이 없으며 도소매업이나 음식숙박업 같은 영세서비스업이나 농업이 산업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은 사실 어떤 대책을 세우기 어려운 일이다. 강원도 기업 중 그나마 산업적 의미가 있고 상대적 경쟁력이 있는 건설업도 지역의무 공동도급제 폐지 등 때문에 더 이상 지방공기업이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에 우선권을 주장하기 어렵게 되는 등 도산 하는 업체가 늘어 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강원도 건설업자들이 투정 부릴 지방 공기업자체가 없어지는 상황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한미 FTA가 체결되면 수도권 규제완화가 지금보다 더 급격히 진행될 수밖에 없다. 2005년 9월, 춘천 명동의 대형 주상복합단지 시공업체가 죽림동 중앙시장 내 도로 포장공사 등을 이유로 중장비와 철거용역 직원을 동원, 점포 일부를 강제 철거하고 나서자 이에 놀란 상인들이 망연자실해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지난 11월 23일 경기발전연구원이 주관한 ‘한미 FTA에 대한 경기도의 대응방향’이라는 토론회에서 참석자 대부분은 FTA의 기본목표에 맞게 수도권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미 수도권 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정책이 무력화 되고 있고 외국자본이 투자하기 좋은 산업기반을 가지고 있어 FTA 체결 뒤 투자 효과는 수도권에 집중 될 것이다. 또 외국자본의 성장에 대해 국내 대자본이 내국인 역차별을 주장하며 수도권 규제철폐를 요구 하면 바야흐로 수도권의 덩치는 누구도 통제하기 어려울 만큼 비대 해질 게 분명하다. 한미 FTA는 국가의 운명과 미래가 걸린 중대한 일이라서 정부의 눈에는 국민경제기여도가 3%도 되지 않고 150만도 채 되지 않는 인구를 가진 강원도민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일지 모른다. 아니, 오히려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키워 세계에 도전하고 시장에서 승부를 거는 글로벌 인간형으로 바뀌어야 생존가능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기지 못한 탓을 톡톡히 치러야 한다고 강변할지도 모른다. 김진선 강원도지사는 새해에 강원도를 ‘경제선진도’와 ‘삶의 질 일등도’로 만들기 위해 기업을 100개 이상유치하고, 17개 재래시장에 186억원의 혁신사업비를 지원하며 농업진흥을 위해 도지사 품질인증제 100개 품목을 새로 지정 하는 등의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만약 정부의 질주에 의해 올 3월 한미 FTA가 체결된다면 도대체 우리 지사님은 강원도를 ‘삶의 질 일등도’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춘천명동과 중앙시장을 잃어버린 춘천사람들은 어디에서 삶의 질의 뿌리가 되는 고향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원래부터 가진 것 없는 강원도는 대체 한미 FTA가 보여주는 휘황한 미래, 어디쯤에 있을 수 있을까?
2017-06-09 | hrights | 조회: 9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법무법인 자하연 지난 12월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결심공판이 있었다. 이날 공판에서 검사는 이례적으로 피고인들에 대한 구형을 하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른 판결을 구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피고인석에 있어야 할 8명의 피고인들이 이미 사형집행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는 비어 있었고, 피고인들을 대신하여 재심을 청구한 유족들이 간단한 최후진술을 하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재판부는 법률에 근거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사의 구형과 피고인의 최후진술이 없는 결심공판은 그 자체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가지는 비극성을 보여준다. 과거 유신독재 정권 하에서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검찰과 법원은 권력의 들러리가 되어 불법을 저지르거나 명백한 불법에 대하여 눈을 감았고, 그로 인하여 민주. 통일운동에 가담한 평범한 사람들이 북한과 연계하여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반국가단체의 수괴로 지목되어 판결 선고 후 18시간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검찰은 구형을 하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른 판결을 구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잘못을 시인하였지만, 불법적인 수사와 재판으로 인해 죽음을 당한 피고인들의 생명을 되돌릴 수는 없다. 피고인들이 법정에 설 수 없는 재판을 마치고 나오면서,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인 유족들의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서른 남짓한 나이에 남편을 잃은 아낙네들이 30년 넘도록 겪었을 고통과 분노를 생각하면서, 국가가 개인의 삶을 이처럼 처절하게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다. 한번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기는 이토록 어렵다. 불법구금과 고문, 중앙정보부의 개입과 유례없이 신속한 사형집행 등 국가의 불법행위가 명백하게 드러났고, 수많은 의혹이 제기된 이러한 사건조차도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기까지 이처럼 오랜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판결을 바로 잡더라도 그로 인하여 왜곡된 개인의 삶은 원상태로 회복될 수 없다. 그래도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길은 올바른 판결을 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법부가 재심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10개가 넘는 과거사 관련 정부위원회가 있고, 진상규명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있다. 아직 초기단계이기는 하지만, 그 중 몇몇 사건은 조작사건이라는 점이 밝혀져 재심을 청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 진상규명이 되는 사건들도 줄지어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을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그러나 형사소송법상 재심개시의 요건은 지나치게 협소한데다가 법원도 이를 엄격하게 해석하는 기존의 입장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렵게 재심을 개시한 이후에도 새롭게 진행되는 재판절차에서 사실상 피고인이 국가의 불법행위를 입증할 책임을 지게 되는데, 시간이 오래되어 기록이 멸실 되거나 사건의 중요한 증인들이 사망한 경우에는 기존의 재판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밝혀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증인들이 법정에 출석하더라도 기억이 흐릿해지고, 관련 증거들이 멸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법원이 증인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지 여부도 의문이다. 만약 법원이 이러한 사건들에 대하여 일반적인 사건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여 증언의 신빙성을 배척하거나, 수사·재판기록에 기재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판단한다면, 수많은 사건들이 재심의 문턱을 넘지도 못한 채 주저앉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판결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가혹한 일이 될 것인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는 법원이 과거 권위주의 독재정권 하에서 벌어진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하여는 정부 과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결과에 대하여 수사기관에 의한 조사결과와 비슷한 정도로 높은 증거능력을 인정하여야 한다. 또한 재심의 요건을 완화하여 해석함으로써, 불법적인 수사관행이나 잘못된 판결로 인하여 고통 받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일은 법적 안정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원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법원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는 만큼 법원의 권위와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높아질 것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사법부의 과거청산 의지를 밝힌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새해에는 법원의 창고 안에 보관된 채 진실이 밝혀지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사건 기록들이 밝은 빛을 보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9 | 추천: 0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개 팔자처럼 편안하게 살자며 출발했던 병술년 한 해도 파릇파릇 새싹이 돋더니 폭염의 여름이 닥치고, 단풍이 드는가 했는데 낙엽이 지더니 벌써 추운 겨울이 되어 저물어 가고 있다.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은 한 해를 돌아보고, 새 해의 꿈과 희망을 설계한다. 그러면서 흔히들 다사다난한 한 해였느니 정신없이 보낸 한 해였느니 한다. 2006년을 돌아보면, 올 해는 부동산 문제, 한·미 FTA 협상,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집회·시위로 몸살을 앓았던 해였던 것 같다. 작년 8·31대책, 올해 3·31 대책, 11·3대책, 11·15대책 등 정부에서 부동산 대책을 연이어 내놓았으나 약효가 제대로 들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는 ‘종합부동산세’ 납부와 관련한 반발이 일고 있다. 작년 시위 현장에서 농민 2명이 사망하여 이에 따른 책임을 지고 경찰청장이 사퇴하는 일로 올해는 폭력 시위가 더 이상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아직까지도 폭력 시위는 해결되지 않은 채 해를 넘기고 있다. 게다가 조류독감의 확산은 농민들의 마음을 애태우고 우리들의 식생활마저 불안하게 하고 있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필자는 학기 단위로 생활을 하게 된다. 돌아보니 강의 시작을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번 학기를 종료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불현듯 ‘삶이란 무엇이며 행복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가 있다. ‘행복’이란 즐거움, 기쁨, 쾌감, 마음의 평화 등 긍정적인 모든 감정 상태를 특징짓는 감정의 상태를 일컫는다. 2006년 7월 영국 신경제재단(NEF)이 발표한 행복지수(HPI)에서 178개국 중 1위를 차지한 국가는 국내총생산(GDP)이 2,900달러에 불과한 남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였다. GDP로만 따지면 233개국에서 207위로 거의 꼴찌에 가까운 가난한 나라다. 반면에 세계경제포럼(WEF)이 매긴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24위를 차지한 대한민국의 행복지수는 102위에 그쳤다고 한다.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 의아했는데, 그 비결이 무욕(無慾)에 있다고 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행복과 물질적 조건이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 소득은 행복감을 갖는 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부자 나라 국민이 끼니를 거를 만큼 매우 가난한 후진국 국민에 비해 더 행복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일정 수준의 생계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이 주는 행복 수준은 비슷해진다고 한다.     바누아투의 원주민 대다수는 뚜렷한 직업이 없고, 사시사철 따뜻한 날씨(평균 23도) 덕에 비를 피할 움막이면 만족해한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나라에 살고 있는 태권도사범 윤○○ 씨는 지금껏 “부자가 되겠다”거나 “남보다 잘 살아야겠다”라는 말을 이들로부터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전체 인구 20만 8,800명(2006년 7월 기준) 중 일자리를 가진 사람은 7%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업’이라는 개념도 없고, 모두가 이웃처럼 잘 아는 까닭에 범죄도 거의 없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나라 국민들 대다수는 비를 피할 집이 있어도 더 크고 좋은 집을 사려고 욕심을 부리고, 평생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부유해도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해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있다. 최근 사회문제가 되었던 ‘바다이야기’와 같은 불법 사행산업의 성행, 당첨금이 줄긴 하였으나 아직 식지 않은 ‘로또’ 열풍, 고액 체납자의 증가와 부동산 투기 문제 등을 보면 우리 사회가 마치 돈을 행복의 척도로 삼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얻는다 하여도 더 큰 욕심으로 인해 또 다시 도박을 하여 가사를 탕진하거나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혼이나 분쟁, 인간관계의 파괴 등의 불행을 겪고 있는 사례는 돈이 결코 행복의 우선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게 한다. 실례로 지난 2월 27일 USA투데이의 보도에 따르면 1985년과 1986년에 두 번이나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이블린 애덤스는 540만 달러(한화 약 52억원)의 당첨금을 도박으로 탕진하여 빈털터리가 되었고, 1997년 텍사스에서 3,100만 달러(한화 약 298억원)의 복권 당첨금을 받은 빌리 밥 하렐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고 한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다가오는 새해에는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우리 모두 희망을 기약하며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자. 행복은 물질보다 긍정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온다고 한다.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대가이며 「완전한 행복」의 저자이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 교수인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은 “웃으십시오, 좋은 일에 빠져드십시오. 의미 있는 삶을 사십시오. 그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먹기 시작하면 행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고 한다. 그리고 바누아투 국민들처럼 느리게 살고 단순한 삶에도 만족할 때 행복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니 새해에는 우리 모두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가고,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고, 단순하고 평범한 삶에도 만족하는 법을 배워 나가자. 올 한 해 업무로 가족에게 소홀하였다면 가족들에게 좀더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치 않는 것은 가족이다. 가족과 함께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우리 모두에게 황금 돼지가 품안으로 굴러 와 희망의 새싹이 트기를 바란다. 또한 정부가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어 국민들이 정부를 믿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 본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12 | 추천: 0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요즈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전해오는 유혈사태는 근래 거의 일상적인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이로 인해서 그 곳에 거주하는 인간의 고통이 엄청나게 쌓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고통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은 언제 어디서든지 방치되거나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통 받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국제 사회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 지난 2006년 11월 29일은 팔레스타인 지역분쟁을 국제화 장기화시킨 유엔 총회 결의안이 통과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 땅을 두 국가, 즉 유대 국가 영역과 아랍 국가 영역으로 분할하는 총회 결의 181호를 통과시켰다.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32개 국가는 이 결의안을 찬성하였고, 아랍권과 이슬람권 국가 등 13개국이 반대하였으며, 중국을 비롯한 10개국은 기권하였다. 이 결의안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26,323㎢)의 56.47%를 유대 국가, 42.88%를 아랍 국가, 예루살렘 국제 지구로 0.65%를 할당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87.5%를 소유하였던 반면 유대인들은 6.6%만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5.9%는 영국 위임 통치청 소유였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불공정한 이 결의안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결의안을 토대로 이주자들인 시오니스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창설하였고, 토착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당연히 이 결의안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당시 유엔은 이 지역 분쟁의 공정한 해결사라기보다는 시오니스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분쟁을 격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47년 분할 결의안이 통과 된지 60년이 지난 2006년 현재 팔레스타인 전역은 불법적이고 가공할만한 이스라엘의 군사통치하에 신음하고 있다. 이 분할 결의안이 아랍 국가 영역으로 할당했던 서안 전역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는 620여개의 검문소, 8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분리 장벽, 관통도로, 수백 개의 이스라엘 점령촌들이 건설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토착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마을과 도시단위로 갇힌 채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 점령민들에 둘러싸여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브라힘 아부 자비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1947년 유엔 분할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 분할안은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상황보다는 훨씬 낫다. 나는 네게브에서 추방당한 베두인 출신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조사 기구인 '이라크 연구그룹'(제임스 베이커 전 미 국무장관과 해밀튼 전의원)이 12월 6일 아침(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나 이라크 주둔 미군의 전투병을 오는 2008년초까지 철수하고 이라크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도록하는 방안을 부시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적극 개입해 중동분쟁 해결에 나서도록 요구하였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006년 12월 7일 이스라엘은 네게브에 위치한 17채의 아랍인 주택을 파괴했다. 이날 이스라엘 내무 장관은 앞으로 불법적인 4만 2천 채의 주택을 더 파괴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주택들이 불법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마을 지역 위원회 회장 파이잘 사왈라는 이 마을 주택들의 대부분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창설 이전에 건축된 것이며, 모든 주택들은 정부가 주택 파괴의 근거로 삼는 1965년 건축법에 앞서 건축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마을 전체를 파괴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조치는 심각한 인권 위반이다. 더구나 이 토지는 국유지가 아니라 사유지이며, 이들 아랍 주민들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로 이스라엘 정부에 세금을 납부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이스라엘은 점령지 전역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면서 수 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체포하여 수감하였다. 2006년 12월 6일 이스라엘 군인들은 가자 지역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하여 2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부상당했다. 또 같은 날 서안 지역 북부 도시 제닌 근처의 카프르 단 마을에 30대 이상의 장갑차를 앞세운 수 백 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침입을 해서 일곱 가족을 포함하여 45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체포해서 수감했다. 체포된 주민들의 대부분은 무장단체인 알아크사 여단, 알 쿠드 여단, 하마스 활동가들의 친척들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군사 공격을 수행하는 팔레스타인 세포조직의 거점이 카프르 단에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이 지역 주민들은 노인들과 학생들을 포함하는 체포된 주민들의 석방을 위해서 인권단체들과 국제기구들이 개입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1월 팔레스타인인들이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하마스 정부를 구성한 이후, 국제사회는 하마스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원조를 중단하고 있다. 현재 원조 중단으로 위기에 직면한 하마스 정부는 국제 사회의 요구 사항들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수의 정당들이 참가하는 팔레스타인 민족 통합 정부 구성을 위한 막바지 협상 중에 있다. 12월 5일 이스마일 하니야 총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와 원칙들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민족 통합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500만 명에 이르는 난민 귀환권,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에 저항할 권리,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완전한 주권을 가진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권리 등을 보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이러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요구사항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군사 점령지에서의 야만적인 이스라엘의 불법행위들을 묵인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을 해체되어야할 테러리스트 단체라고 명명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을 결국은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요구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인종 차별적이고 야만적인 군사 통치를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제 사회가 진정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독립투쟁을 하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해체 요구에 앞서, 불법적인 이스라엘 군사 점령지 전역(팔레스타인 땅의 22%, 즉 동 예루살렘, 서안, 가자)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완전한 철군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확실한 국경을 갖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등을 요구하여야한다.
2017-06-09 | hrights | 조회: 11 | 추천: 0
이광조/ CBS PD ‘언젠가는 떠나야지’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서울생활이 벌써 20년이 넘었다. 대학입학 신체검사를 위해 학교 앞 여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던 날, 처음 보는 양변기 위에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봤던 ‘촌놈’이 이젠 양변기가 아니면 불편해서 볼일을 못 본다. 하지만 그렇게 이 도시에 익숙해진 지금도 나는 여전히 서울을 떠나는 꿈을 꾸고 있다. 20대와 30대를 고스란히 지낸 곳, 최루탄 속에 울고 웃던 추억과 친구들이 있는 이 곳을 나는 왜 늘 떠나고 싶어 하는 걸까. 아무래도 첫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어릴 적 시골생활의 넉넉함과 재미를 만끽했던 내게 서울의 첫인상은 황량하고 단조롭고 더러웠다. 어디 그 뿐인가 대학입학과 함께 시작된 하숙생활은 내겐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다. 낡고 보잘 것 없어도 널찍한 방에 커다란 마당, 여기 저기 널린 공터에 익숙했던 내게 제기동의 하숙촌은 숨 막히는 감옥 그 자체였다. 1985년 2월말 손바닥만한 하숙집에서 맞은 첫날밤, 친구와 함께 ‘뭐 하러 이런 데 왔나’며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로 20여 년 동안 이사를 몇 번이나 했을까. 하숙생, 자취생들이 옮겨 다니는 걸 ‘이사’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내 집 마련의 꿈, 집에 대한 집착은 그때부터 시작된 게 분명하다. 더러는 조금 싼 집, 더러는 혼자 지낼만한 집, 또 더러는 경찰의 눈을 피해 리어카에 짐을 싣고 많이도 돌아다녔다. 30번을 넘게 옮겨 다녔으니. 제기동에서 보문동으로, 보문동에서 월곡동으로, 월곡동에서 회기동, 이문동, 석관동을 거쳐 종암동, 안암동... 정부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환경 정비를 명목으로 상계동 재개발에 들어갔다. 상계동이 철거된지 20년이 지났지만 당시 이곳에서 내몰린 이들은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6년 10월 포크레인을 동원한 철거반원들이 상계동 173번지 가옥을 부수고 있다. 사진 출처 - <상계동 올림픽> 화면 캡처, 오마이뉴스   대학시절 시골 학생들에겐 재래시장이 있는 서민 주거 지역이 단연 인기였다.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5만원 정도면 부엌이 달린 번듯한 방 한 칸을 빌릴 수 있었고 주인만 잘 만나면 반찬도 곧 잘 얻어먹을 수 있었다. 시골 마을에 비하자면 여전히 좁고 답답한 동네에 코딱지만한 방이었지만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울고 웃고 지내는 동안 차츰 서울의 변두리 풍경과 사람들에게 정을 붙였다. 그러면서 내 자취방만한 곳에서 한 가족이 모여 사는 가난한 이웃들도 알게 되었고 재개발 바람에 그 조그만 터전마저 잃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 상계동과 목동의 철거민들도 만나게 되었다. 포크레인과 용역깡패, 화염병과 돌. 80년대 시위 현장은 어디나 살풍경이었지만 철거민들의 투쟁현장은 외면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격전장 그 자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을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한을 품고 세상을 저주했을까.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 그들의 절박함을 그 때는 제대로 느끼지 못했었다. 사람이 있는 집을 포크레인으로 찍어 누르는 땅주인과 건설업체들의 무지막지한 폭력과 그 폭력을 수수방관하고 한 술 더 떠서 거들어주는 경찰을 보며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느꼈을 분노와 절망은 지금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보금자리를 잃고 경인 고속도로 변 허허벌판으로 쫓겨 난 상계동 철거민들은 당국이 판자촌을 때려 부숴버려 땅굴을 파고 지내기도 했으니... 가난한 이웃들이 모여 살던 상계동과 목동, 금호동과 옥수동, 월곡동과 동선동, 난곡과 성남에는 이미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고 가내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성수동은 지금 철거가 한창 진행 중이다. 비좁고 낡은 집들이 없어지고 일년 내내 눅눅한 지하방들이 없어지고 쾌적하고 살기 좋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하지만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높고 번듯한 아파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남과 목동이 천지개벽을 하고 민주화운동, 빈민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통령도 하고 장관도 할 만큼 세월이 변했지만 가난한 이웃을 쫓아내고 격리시키는 폭력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하다.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늦기 전에 나도 아파트 한 채 장만해야지’하는 욕망만이 남았을 뿐.   지난 5월 국방부는 굴착기 2대를 동원해서 대추분교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폭력적인 철거에는 늘 ‘사유재산 보호’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대추리에서는 국익을 앞세워 농민들을 땅에서 쫓아내고 멀쩡하게 잘 사는 마을을 지역개발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갈아 엎고 있다.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대통령은 ‘건설업체도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 아니냐’며 폭력적인 재개발과 건설업체의 폭리에는 눈을 감았고 그 와중에 공익을 앞세운 신도시개발 사업은 사상최대의 합법적인 도박장이 되어 버렸다. 이 도박장에는 물론 돈 없는 사람은 출입금지다. 삶의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 많은 철거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2017-06-09 | hrights | 조회: 11 | 추천: 0
송기춘/ 전북대 법학과 헌법학 교수 자식 잃은 부모들의 통곡소리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자살’하였다는 통지를 받은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참혹하겠는가. 더구나 ‘자살’하였다는 아들의 시신에서 또는 부대 동료들의 증언에서 자살이 아니라고 믿을 만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자살’하였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 군을 대할 때 이들 부모의 아픈 마음을 어디에 비하겠는가. 사고조사를 위한 현장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고 관련 기록마저 제대로 열람할 수도 없는 형편에서 어느 부모의 마음인들 이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허원근 일병 사건과 같이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타살이었음이 밝혀진다면 그 동안의 억울함과 고통은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제대로 납득할 수도 없는 아들의 ‘자살’에 국가에서 주는 것이라고는 사망위로금 500만원이 전부인 이 나라는 과연 무슨 근거로 징병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과연 국방의 의무는 진정 신성한 것인가.   전투력의 손실? 국가유공자법 제2조에서는 ‘자해행위로 인한’ 사상의 경우 국가유공자 등록에서 제외하도록 하고 있다. 어떠한 이유로도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해쳐서는 안 되며 이는 전투력의 저하를 가져온다고 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군인의 지위에 관해서는 선진적이라 할 수 있는 독일 군인지위법 제17조 제4항은 “군인은 건강을 유지 또는 회복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군인이 고의나 중대한 과실로 자신의 건강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하고, 직무능력평가나 임용적격평가 등과 관련되는 경우 신체의 불가침성에 대한 제한을 규정하고 있다. 자신을 해(害)할 권리 또는 죽을 권리가 기본적 권리로 인정된다 해도 군인에게 자살이나 자해는 군기 또는 전투력에 저해요소가 됨은 분명하다. ‘자원’ 또는 ‘병력’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이들에게 군인의 사망은 병력(兵力)의 손실이요,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리라.   무엇이 전투력을 약화시키는가? 군대에서 자살자가 발생하는 것은 군으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전력과 단결을 저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전력을 약화시키고 단결을 해치는 것은 국가가 복무에 대해 베푸는 보상이나 보호가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군대에 가서 죽으면 ‘개죽음’이라는 생각, 군대는 안 갈 수 있으면 어떻게라도 안가는 게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야말로 군의 단결과 사기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던가. 부하를 개인의 편의를 위한 사병(私兵)으로 부리는 일, 가혹행위를 가하는 등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오히려 군기문란의 주범이 아닌가.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입대하였는데 그 환경은 열악하고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길은 막막하고 어쩔 수 없는 고립과 한숨 속에서 자살의 길을 택한 사람은 어쩌면 타인에 대한 공격을 스스로에게 돌린 점에서 가장 적은 피해를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죽음을 단지 자살이라는 형식을 가졌다 하여 보상을 하지 않고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 치부하는 것은 남은 이들에게도 엄청난 상실감과 무력감을 일으킨다. 전투력의 바탕이 자발적인 복종과 국방에의 의지라고 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와 군 복무에 대한 자부심은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복무에 대한 신성한 관념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가장 힘없이 죽어간 이들에 대한 예우가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게 아닐까.     출처 - 한겨레 군에서 자살하였다 해도 국가의 책임은 면제되지 않는다 군에서는 자살하였다고 판단하는 이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며, 법원에서도 자살이 업무와 관련성이 인정되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배상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본인의 과실이 70-80%나 된다고 하니, 사실상 국가책임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자살한 이들도 명예로운 죽음으로 인정하고 보상을 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병(兵)을 중심으로 얘기하자면, 군복무가 의무에 의한 것으로서 개인의 의사에 반해서도 복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원에 의한 경우도 일단 복무하게 되면 그 신분을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에서 병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이 아무리 가지 않으려 해도 소집되면 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군복무이다. 둘째, 오늘날 군대와 관련하여 특별권력관계라는 관념을 부인함으로써 군에서도 기본권이 보장되게 하려 하지만 아직도 군복무는 그 실질이 포괄적인 지배관계라는 점이다. 의식주를 비롯한 사생활까지도 내무생활을 통하여 규제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이 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외부와의 접촉을 거의 차단한 채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지배관계에서 국가는 그 규제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 한다. 셋째,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점이다. 헌법 제10조 후문에서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기본권의 보장은 우선 기본권의 주체인 개인의 자발적 노력과 행동을 통하여 주장하고 이를 보장받도록 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약 모든 기본권의 보장을 위하여 국가가 개입한다면 이는 또 다른 기본권 침해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권 주체의 기본권보장을 위한 행위의 가능성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기본권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는 보다 현실화된다. 스스로 기본권주장이나 구제노력을 하지 못하는 유아나 정신병자의 경우는 국가의 기본권보장의무가 더욱 강하게 인정된다. 교도소와 같은 수용시설에 감금되어 스스로 권리구제를 위한 노력이나 소통을 하기 어려운 경우도 그러한 기본권침해방지와 구제를 위한 국가의 의무와 책임이 보다 강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넷째, 많은 이들이 대체복무를 하고 일부만 군에 입대하라는 명령이 이뤄지는 것이라면, 입대하는 이들은 현역복무적합자라는 판단을 한 것이므로 그 복무관계에서의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가 포괄적인 책임을 시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보험사의 경우도, 일반적으로 가입자에게 보험가입결정여부, 보험금액 결정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하여 판단하고, 일단 가입이 되면 제공한 정보가 허위이거나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부분에 대한 책임을 제외하고는 사고 발생시 보험금을 지급한다. 군복무명령을 한 것은 군복무적합자라는 판단을 한 것이고, 자살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 복무적합판정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사람이 소질상 사회에 있었어도 자살할 가능성이 높았다 해도 이를 간과한 채 복무하도록 하였다면, 이는 현역복무적합 여부에 관한 국가의 중대한 판단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국가는 복무부적응 또는 부적격을 판단하여 결정하여야 하기 때문에 어떠한 사고라도 발생하면 군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더구나 군에 수많은 보직이 있기 때문에 능력에 따른 배치에 만전을 기하고 복무부적응의 경우 배치전환을 하여야 한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군에서의 생활은 대체적으로 군복무와 관련하여 근무 또는 대기상태에 있으며 항상 긴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4시간을 업무와의 관계 속에서 긴장하는 군인들에게 무엇이 업무관련적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며 모든 부분을 군복무관련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마치 정당이 선거를 통하여 국가기관을 구성하는 공적인 부분과 그 밖의 사적인 부분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섯째, 자살은 자유의지의 결과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뤄진다는 점이다. 엄격하게 폐쇄적인 사회에서 문제를 달리 해결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자살이 어떻게 개인의 자유의지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국가가 군복무에 종사하도록 강제하였다면 이들에 대하여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는, 그것이 설사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국가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다만 전투중이나 전우를 구출하기 위해 사망한 경우 등의 경우와는 포상 등 대우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적인 차이”에 불과하고 근본적으로 국가책임이 부정되어야 할 정도의 문제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살자에 대한 처우는 군복무관계에 대한 인식, 자살에 대한 과학적 인식, 예산 등에 의하여 결정되는 문제다. 군대에서 자살하였다 해도 이는 군대에서 사망한 것의 한 유형일 뿐이요, 달리 대우할 사항은 아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는 28일 오후 서울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군내 자살처리자,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란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국립묘지 안장이 그렇게 어려운가? ‘자살’하였다고 하는 이들에 대한 예우문제에는 항상 국립묘지 안장문제가 수반된다. 국립묘지는 명예로운 죽음을 당한 이들이 안장되는 곳이므로 자살자는 그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 강하게 주장된다. 심지어 ‘힘든 군대생활 잘 견디고 제대한 사람도 유공자가 안 되는데, 그것도 못 참고 자살한 ×들이 무슨 유공자이며, 국립묘지냐’고 비난한다. 그러나 국립묘지를 유공자에 대한 관념에 철저하게 만들 것이면 전투 또는 훈련 중 사망한 사람이나 기타 공을 인정할 만한 경우나 국가에 대한 공적이 있는 자에 한정하여야 한다. 단순한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실상은 유공자는 아니다. 그 죽음을 낮게 평가해서가 아니다. 국가유공자 여부는 그 죽음의 실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평가하여 부여한 것이다. 결국 국립묘지 안장 여부는 그 죽음의 실질보다는 국가의 평가에 달려 있다. 국립묘지가 반드시 명예로운 희생자만이 안장되는 곳은 아니고, 명예는 부여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살자에 대한 평가의 변화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 문제도 전향적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물론 국립묘지 안장에 철저하게 ‘유공자’일 것을 요구한다면 임실이나 영천에 있는 호국원에 유족의 원에 따라 안장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단순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왜 유공자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다만 고려할 점은 호국원에 안장되는 이들이 대개 한국전쟁 전후 참전자, 월남전 참전자 등인 것을 고려하면 그곳에 안장된다는 사실 자체가 명예롭지 못한 평가를 수반할 수 있으므로 매우 조심스러운 방안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현재 국립묘지가 그 죽음 자체의 명예 여부가 아니라 국가의 죽음에 대한 평가에 따라 대상이 결정되고 있으므로 자살자에 대해서도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여 안장을 허용하는 것이다. 군에 입대하여 사망한 사람이 죽음의 경위는 다를지언정 어느 목숨인들 소중하지 않을까. 특히 자살자의 유족이 원하는 것이 금전적인 보상보다도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하였다는 평가이고 보면 적극적으로 고려할 부분이다. 사망자에 대한 예우의 문제는 엄격하게 말하면 죽은 자에 대한 예우라기보다는 유족들에 대한 예우가 아닌가.     이들에 대한 예우로 얻는 것 자살한 것으로 처리된 이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예우는 사랑하는 자식과 친구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최소한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하진 않지만 적어도 마음에 위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국민이 가지는 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타파하고, 적극적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꺼이 군복무에 종사하고자 하는 자발적 의무이행에 대한 의지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에 대한 대우가 열악한 것은 예산문제에서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예산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자살자가 1년에 60여명까지 줄어들고 있는 현실(2004년 67명, 2005년 64명)에서 이들을 충분히 보상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군복무에 대한 의지를 고취하는 것만으로도 비용을 지출할 이유는 충분하다. 법은 따뜻한 것이다. 아픈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는 자식 잃고 통곡하는 부모들의 피울음소리를 언제까지 외면하고 있을 것인가.
2017-06-09 | hrights | 조회: 1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