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현직에 있는 레이건 대통령을 후보로 재지명하기 위해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댈러스 시에서,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국제청년당’이라는 좌익집단의 청년들이 국기게양대에 걸린 성조기를 끌어내려 석유를 뿌리고 불태우며 ‘우리는 미국에게 침을 뱉는다’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성조기를 불태운 혐의로 그레고리 존슨이라는 청년을 체포하고 구속 기소했다. 이 사건에서 미 연방대법원은 일반인들이 표현이나 표현성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거나 모욕감을 느낀다고 해서 정부가 표현행위를 제약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의 제시를 통해서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토론할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어야 하며, 이는 미국인들이 성스럽게 느끼는 성조기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조차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브레넌 대법관은 성조기가 상징하는 것은 미국 사회의 유연성이지 경직성이 아니고, 성조기의 신성함을 지키는 방법은 성조기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평화적으로 설득하는 것이며, ‘토론을 통해 오류와 거짓을 밝혀낼 시간이 있다면 이에 대한 대응방법은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더 많은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이 판결은 성조기에 대한 모욕적인 훼손마저 표현의 자유로 인정함으로써 성조기가 미국인들에게 상징하는 의미를 더욱 확고히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래 표현의 자유란 지배하는 다수가 아니라 반대하는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지배하는 다수는 정책과 법률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고, 다수의 목소리는 법에 의해 보호받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하는 소수의 목소리는 법을 위반하고 법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 표현의 자유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는지 여부는 민주주의의 척도이다. 그런데 최근 국회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중대한 제한을 가하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배우 최진실씨 자살 사건 이후에 추진되고 있는 사이버 모욕죄의 신설이다. 유명 연예인들이 악성 댓글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이들과 관련된 기사에 무수하게 달려있는 악성 댓글의 내용은 심각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모욕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국가권력이 인터넷상의 모든 표현을 수사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행위와도 같다. 사이버공간의 특성상 글을 쓴 사람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수사대상은 특정 정치인이나 지배세력을 비난하는 사이트나 블로그에 집중될 것이고, 이는 결국 인터넷상의 여론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 분명하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그 뿐만이 아니다. 집회 참가자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집회에서 복면을 착용하는 행위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는 내용의 집시법 개정안도 추진되고 있다. 도대체 집회 참가자들이 국가기관에게 얼굴을 반드시 보여줄 의무가 있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하다. 내 기억으로는 삼엄하던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이런 방식으로 무식하게 집회.시위의 자유를 침해하는 법률은 없었다. 토론과 설득이 아니라 무조건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방어하려는 정부와 집권여당의 발상이 한심하면서도 우리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고, 한편은 섬뜩하다. 하기야 아이들의 먹거리를 걱정해서 유모차를 끌고 촛불시위에 참가한 젊은 엄마들에게 아동학대죄라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토론과 설득, 민주주의의 가치와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9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정책팀장 달리는 차창 밖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연두색과 노란색으로 얼룩진 들판과 푸른빛 그 안에 색색의 옷으로 단장할 준비를 마친 나무들이며, 강렬히 내리쬐고는 있으나 나른한 햇살은 푸짐한 가을을 느끼게 했다. ‘오늘 하루, 아니 이틀간은 모든 시름과 상실감과 허망함을 내려놓고 사람들 속에서 힘을 얻어 오리라...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고민들을 조금은 해결할 실마리를 얻어 오리라...’ 풀뿌리여성조직가 대회를 가면서 든 기대감이다. 한 곳, 한 가지 일에 오래 천착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행이게도 내가 일하는 단체는 전국에 지부를 두고 있다. 단 며칠이건만 사무실로만 출퇴근할 때 오는 그 권태와 관념을 나는 지부를 돌아다니면서, 지부의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활기와 현장으로 대체할 기회를 갖는다. 때로는 답답하기도 하고, 때로는 울컥 눈물이 날 만큼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활동가들은 연합조직에서 활동하는 내게는 현장이고 풀뿌리이다. 지역여성운동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나의 과제에서 때로는 지부활동가들에게 조언도 하고, 지원도 하지만, 실은 힘을 얻고 배우는 것은 정작 나 자신이다. 지역의 여성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지역의 문제해결을 위한 여성들의 힘을 모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을 보면서, 운동이 관념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실체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름다움-가끔은 사람에 대한 실망도 하지만- 사람의 선함과 선함을 위해 자신을 성찰하고 채찍질하는 모습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곤 한다. 결국 그 안에서 운동의 미래와 대안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정신없이 보수회귀를 위해 휘돌아 치고 있다. 촛불시민들에 대한 표적수사와 구속,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먼지 털기 식 수사와 활동가들의 구속, 심지어는 유모차부대에 대한 협박과 수사까지... 가히 경찰국가라 칭할 만한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정말로 물 만난 고기다. 논리 또한 기가 막히다. 다른 건 몰라도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와 물대포 앞에 분연히 저항했던 여성들에게 ‘아이를 시위의 도구로, 물대포의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아동학대’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반교통방해’, ‘공무집행방해’로 불법행위를 했다고 사전 통보나 영장도 없이 집 앞에 찾아와 협박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서 길러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첫째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힘든 노동인지, 둘째 누구도 자신의 아이를 위험 속으로 던져 넣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데리고 촛불집회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고 물대포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심정을 한 치라도 헤아려 봤다면 그런 얼토당토않은 ‘아동학대’운운은 가당치도 않은 논리다. 당장의 물대포와 소화기보다도 더 두렵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안전하지 않은 먹거리를 먹여야 한다는 불안이고,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등급이 나눠질 수밖에 없는 교육제도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아이의 생물학적, 사회적 생명권에 관한 문제였던 것이다. 국가가 기본적인 생명권 보장이라는 국가책임을 지지 못하면서 국민으로서의 책임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만 있다. 풀뿌리여성조직가대회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포털사이트에서 자신의 논리를 당당히 펴던 시민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암담했다. 그리고 죄송했다.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에 대한 표적수사 소식을 들었을 때, 올 것이 왔구나! 했다. 그리고 유모차 부대에 대한 탄압소식을 들었을 때 ‘이건 전쟁이야,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야’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뭐가 그리 무서워서 젖먹이 애 엄마들까지 ‘적’으로 만들고 위협하는 건지, 경찰이 그리도 한가했던가 하는 생각. 여성폭력문제가 발생했을 때 경찰은 사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력을 들먹이며 수사를 질질 끌고 가해자 수사나 처벌을 미루곤 했었다. 그러데 왜 이리 발 빠르게 움직이는 건가? 민생이나 치안관련해서는 한계를 들먹이더니 공안관련해서는 참 빨라도 너무 빠르고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유치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너무도 잘 알아서 기고’있다. 누구의 경찰인가? 여성단체들은 지난 24일 촛불시민 및 유모차 부대 탄압에 대한 책임을 물어 어청수 경찰청장을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제 제발 그만 떠나시라!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은 단체탄압에 맞서기 위한 기구를 구성할 것과 지속적으로 ‘강부자’편향의 정책에 반대하고 내부적으로는 자정활동을 강화하고, 성찰을 통한 운동프레임을 다시 짜는 것을 결정하였다. 그동안 촛불을 통해 시민들의 활동과 관련한 평가와 분석은 많이 토의되었다. 그리고 한편 시민운동단체들의 향방에 대해서도 논의가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시민사회단체들, 진보세력들이 구축해 놓은 제도나 정책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거나 될 위기에 처해있고, 그 당사자인 단체와 활동가에 대한, 촛불시민에 대한 탄압에 무기력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질문을 하여야 한다. 시민을 보호할 수 없는 시민단체, 시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시민단체, 우리는 어디에 서 있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 개최된 ‘풀뿌리여성조직가대회’는 의미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전국 각지에서 지역의 여성들, 주민들과 가장 밀착되어 활동하는 여성조직가들과 그 아이들까지 200여명이 모인 대회는 처음부터 활기와 기대로 넘쳐났다. 어떻게 하면 지역의 여성들, 주민들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지? 마음을 모아내고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할지? 어떤 과제와 내용으로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그 과정에 지역민들이 주인으로 참여하게 할 방법은 무엇인지? 지역민들의 지속적인 참여와 성장을 위한 전략은 무엇인지? 1박 2일의 빼곡한 일정 속에서 열띠게 논의하고, 또 노고를 서로 위로하고 연대감을 나누었다. 그야말로 싱싱함!’, ‘살아 펄떡거림!’의 현장이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탄식하고 절망하고 답답해하는 서울, 중앙의 운동판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도 정권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고, 문제를 느끼고 있음에도 희망과 에너지가 넘치는 이유가... 그것은 아마도 최 일선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들의 ‘선(善)’에 대한 지향과 실현을 위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그 사람들이 모여서 언젠가는 거대한 흐름으로 거꾸로 된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운동의 새 프레임은 결국 ‘시민 속’으로가 아닐까? 그것도 구체적인 개인들 속으로. 풀뿌리여성조직가대회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그래서 시민들과 시민단체들이 서로 보호해주고 위로받으며 그렇게 이 엄혹한 시절을 견뎌내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만들어내야 한다. 캄캄한 밤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자동차들의 불빛뿐이었다. 낮에 보았던 그 아름답던 들녘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낮에는 주변을 둘러보며 경치에 감탄하고 이런저런 상념도 하던 여유가 페달만 죽도록 밟아대는 초조함으로 변해있었다.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 진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고 초조해 하는 내 마음, 나의 관습과 태도일 뿐. 그저 거기엔 그것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어둠이 걷히면 선명히 드러나는 것들... 어쩌면 지금은 존재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놓치지 않고 믿음을 나누며 어둠이 걷히길 기다리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지각변동은 표면에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그 밑에서 조금씩 느리게 변동이 진행되다가 표면으로 터지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나 풀뿌리운동은 주민들 속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밤이 되니 후각과 청각, 촉각이 예민해졌다. 시각에만 의존하던 인지경로가 다양해지면서 어둠에 둘러싸인 대지와 공간이 다른 각도에서 다가왔다. 시민의 감각으로 세상을 보는 법, 보여줌으로서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닌, 성장을 통한 각성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 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풀뿌리의 방식과 관점이 아닐까? 시민단체는 리더가 아닌 조직가의 자세와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대중/시민/주민 속에서 치열하게 실천하는 여성 활동가들을 보면서, 이 어둠이 너무 길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을 갖는다. 유모차부대는 결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그래서 이런 유치한 탄압에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을 거라는 걸, 앞으로도 계속 제2, 제3의 유모차부대는 변태를 할망정 지속되리라는 것을... 선선한 가을 밤, 허한 가슴을 코끝 찡함으로 채우면서 분발해본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7 | 추천: 0
이찬수/ 전 강남대 교수, 현 종교문화연구원장 기독교 믿어야 잘 산다? 어렸을 때, 기독교를 믿는 나라는 다 잘사니 우리나라에도 기독교인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원로목사님의 설교를 종종 들었었다. 이것은 백여 년 전 한국 개신교 선교 초기에 회자되던 논리였고, 교회 나가야 미국처럼 잘 살것 같은 민중적 욕망과 어울리면서 한국 기독교가 양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해방 후 월남했던 노목사님으로부터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어린 나는 기독교인도 별로 없는 일본은 왜 잘 사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몇 차례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아무에게서도 제대로 된 답을 들은 기억은 없다. 물론 일본이 잘 사는 것과 기독교는 별 상관이 없다. 일본의 경제적 발전은 일본 특유의 집단적 세속주의가 자신의 정신적 전통은 지키면서도 서구의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소화해낸 결과이다. 그 정신은 기독교가 아니고, 도리어 신도(神道)나 불교 등 전통 종교에 가깝다. 오늘날의 일본문명이라는 거대 공장을 굴리는 무수한 톱니바퀴와 같은 것이 신도 내지 불교와 같은 것들인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서구화와 동일시되지 않은 근대화를 이룬 대표적인 나라가 되었다. 한국에서 전근대는 타파되고 근대는 추구되어야 할 것이었다면, 일본에서 전근대는 지켜야 할 질서적인 것이고 근대는 낯설고 무질서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신도나 불교와 같은 ‘전근대적’ 정신을 유지하는 가운데 세계 최고 수준의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여전히 통하는 물량적 논리 현 정부 관료들의 친기독교적, 불교소외적 발언과 행보로 불교계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장경동이라는 유명세 있는 목사가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 ‘석가모니 선생은 불교를 만들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석가의 나라 인도가 지독하게 가난하니) 소들을 확 잡아 고아먹으면 영양실조도 안걸릴텐데...’ 등등의 기독교 우월적, 불교 폄하적 설교를 했다 한다. 개신교 목사들의 그러한 설교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인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문제가 되자 ‘교회 내부적 발언인데 그 정도는 가능한 것 아니냐’는 식의 해명을 했다 하니, 발언만 무지한 것이 아니라 발상도 무지하다. 전 인구 1억2천8백만 명 중에 가톨릭 개신교 합쳐 기독교인은 100만 명 남짓하고, 1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여전히 신도와 불교가 습합된 문화를 소중히 여기며 사는 일본은 어찌해서 잘 산단 말인가. 물론 일본을 설명하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는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른바 종교 지도자들이 인간의 내적이고 초월적인 신앙을 외적이고 물량적으로 재단하고 정당화시키는 행위의 유치함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따라야 할 신앙의 속뜻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물량적 희망과 달콤함만을 신의 이름으로 누리려는 현실이다. 종교의 근본 의미 내지 내면적 가치를 볼 줄 아는 안목은 거의 없이, 권력이나 재물을 신앙의 결과 내지 신의 축복과 동일시하는 유아적 종교관이 근본 문제인 것이다. 시민보다 시장이 더 큰 축복이고, 국민보다 대통령이 더 큰 축복이라는 식의, 과거 수직적 사회를 반영한 물량주의적 논리는, 인간의 권력욕과 소유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부추기고 투사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가 권력을 쟁취해 왕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래서 그 길을 따른다는 말인가.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못산다는 식의 말을 듣노라면, 돈을 소유하려는 인간적 욕망을 종교의 이름으로 포장해온 지난 역사를 살펴보노라면, 지구상에 유일한 기독교인은 예수뿐이 없다는 말이 다소 과장되었기는 하지만 이해는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조계사 앞마당에 장경동 목사의 불교 폄하 발언과 국회의원들의 종교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 걸려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GNP가 하느님인가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못산다거나 기독교를 믿어야 잘 산다는 식의 논리가 유력한 목사들에 의해 여전히 유통되고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대중에 의해 소비되면서 확대되는 현실은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내면적 신앙을 외형적 물질로 환원시키는 이런 류의 사고방식은 그저 과자 하나 내밀면 유괴범도 좋아라 따라가는 어린아이 수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누구든지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좀 더 크면 그 과자 한 봉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지 않는가. 신앙도 그래야 한다. 달콤한 과자 한 봉지의 미래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종교성 내지 신앙의 본질을 물질적 욕망 안에 가둘 수 있는가. 기독교 문화권 국가가 불교 문화권 국가보다 GNP가 높은 경향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GNP를 기독교적 진리로 도치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그 온 세상, 그러니까 우주의 눈으로 바라보면 한 점 먼지만도 못한 지구에서, 결국 먼지처럼 사라질 재물을 움켜쥐는 행위를 우주적 신이 자신의 현존의 증거로 삼는다는 말인가.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을 합리화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좀 더 우주적인 시각에서 보는 훈련을 좀 했으면 좋겠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가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누가 죽이고 누가 살리는가. 신의 축복이라는 그 소유와 재물이 도리어 지구를 죽이고 있지 않은가. 누가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높여 지구 온난화를 가속시키고 지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가. 많이 소유한 자 아니던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이가 지구를 살리는가, 가진 것이 적어서 쓸 것도 없는 이들이 지구를 살리는가.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으려 조심해서 걷는 자이나교 수행자들이 지구를 살리는가, 벤츠를 타고 매연을 내뿜으며 호텔 조찬기도회에 참여하는 이들이 지구를 살리는가. 누군가 많이 소유한다는 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다른 누군가의 소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많이 가지는 자가 있으면 그만큼 적게 가지는 자도 있을 수밖에 없다. 잘 살려면 기독교 믿으라는 식의 말은 소유 쟁탈전을 벌여 더 많이 갖도록 하는 투쟁이 예수의 진리라는 식으로 가르치는 꼴이다. 다른 이로 하여금 적게 가지도록 하는 것이 신의 뜻이란 말인가. 티벳 산골의 수행자가 미국의 대통령보다 소유의 욕망을 제어하고 비움의 실천을 통해 이웃을 살리던 이가 붓다이고 예수 아니었던가. 과자 한 봉지 들고 좋아하는 어린 아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목사든 신자든 나이가 들어도 내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비움이라는 부담스러운 요청에는 슬쩍 눈감고, 소유라는 욕망과 희망을 슬슬 자극해주기를 바란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것이 신의 뜻으로 포장되는 현실이 문제이다. 거기에 종교가 어디 있는가, 그저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붓다나 예수처럼 ‘집도 절도 없이도’ 행복하고, 그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종교라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애당초 돈을 목표로 하는 기업가임을 자처했다면 모를까, 재물욕이나 권력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사라졌으면 좋겠다. 예수 믿기보다는 예수 따르기라는 어려운 요구를 그대로 실천하기는 힘들어도, 제발 기독교 믿으면 잘 산다거나, 불교 들어간 나라는 못산다는 식의 저급한 발상이나 발언은 이제 좀 보지도 듣지도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보기엔 불교가 들어간 나라 티벳 산골의 불교 수행자가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 미국의 현 대통령보다 더 예수적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6 | 추천: 0
홍미정/ 한국외대 연구교수 이번주 수요산책은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이 보내온 기고문을 홍미정 교수가 전해왔습니다. 이 기고문의 번역을 위해 홍미정 교수와 자원활동가이신 손영조씨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예루살렘 문제를 이해하며 표현하는 관점은 관련당사자들마다 제각각 다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루살렘에 관한 협상은 수많은 위기에 봉착해왔다. 첫 번째 위기는 예루살렘 분쟁에 대하여 무엇을 근거로 협상할 것이냐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문제에 대한 논리적이고도 이성적인 협상안은 1947년 유엔 총회 결의 181호의 분할 계획안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유엔총회결의 181호는 예루살렘을 유엔 신탁 통치하의 독립적인 실체이며, 유대국가와 아랍 국가의 중심지이고, 개방된 도시라고 규정한다. 즉 예루살렘은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 양국의 공동 수도로서 국제화되어야하며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인들과 시민권자들을 포용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93년 오슬로(Oslo) 협정이 1967년의 유엔안보리결의 242호를 토대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수립을 의미하는 ‘두 국가 해결안’을 제시하면서 예루살렘 분할안이 등장하였다. 즉 팔레스타인 통치하의 동예루살렘과 이스라엘 통치하의 서예루살렘이 그것이다. 오슬로협상이후 현재까지 팔레스타인의 주요한 협상가로 활약하는 아흐마드 쿠레이(Ahmed Qurei)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오슬로 협상에서 서예루살렘을 포기하는데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위기는 예루살렘 미래의 지위에 대하여 화합할 수 없는 열망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양 측 협상가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유엔 결의문 등을 비롯한 합의된 방식이 아닌 각 개인의 역사, 신앙, 신화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논의를 진행해 왔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팔레스타인 수반은, 동예루살렘이 1967년 이전처럼 아랍국가의 주권아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국가 해결안(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 요구)’의 시대가 거의 지나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아흐마드 쿠레이를 비롯한 다수는 ‘양 민족 한 국가 해결안’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이 안은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 양 민족들이 통합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하나의 국가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협상 당사자는 아니지만, 영향력 있는 하마스(Hamas) 지도자 칼리드 마샬(Khaled Meshaal)은 예루살렘이란 영토적, 지리적, 역사적 그리고 종교적인 유산을 의미하는 것이지, 한갓 서안(West Bank)의 땅 덩어리 이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마샬은, 예루살렘을 결코 이스라엘과 공유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http://www.passia.org/) 이스라엘 측의,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는 성지들과 관련된 사소한 합의들은 존재할 수 있지만, 예루살렘은 결코 분할되거나 공유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고 강조한다. 카디마(Kadima)의 샤울 모파즈(Shaul Mofaz)와 샤스(Shas)당은 총리인 에후드 올메르트(Ehud Olmert)와 외무장관인 리브니(Livni)가 일부 팔레스타인 지구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것을 두고 예루살렘을 분할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리쿠드(Likud)당의 비냐민 네타냐후(Binyamin Netanyahu)가,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조금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여러 차례 표명하였으며, 최근에 이스라엘 국회는 이러한 취지로 두 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세 번째 위기는 실행 가능한 협상을 위한 공정한 중재자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은 결코 믿을만한 중재자가 되지 못했었다. 가장 명백한 예로는 2003년 워싱턴 로드맵이다. 로드맵은 3단계 수행 계획으로 나뉘어 있으며 세부일정, 목표 날짜, 기준 등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 전임 총리 아리엘 샤론(Ariel Sharon)이 제시한 로드맵과 관련된 14개 항의 유보 조건을 전면적으로 수용한 이후 샤론의 일방적 제안을 따라갔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미국 파트너에게 기댈 수 있는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완전히 소외되었다. 아랍 국가들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 국가의 노력들조차도, 특히 2002년의 아랍 평화 발의(Arab peace initiative)는 간단히 묵살되었다. 사실, 이 아랍 평화 발의는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준수한다면, 그 보답으로 이스라엘과 아랍권 전체가 포괄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계속 이스라엘에게 편향된 역할을 할 것이다. 현재 미국 대통령 후보들은 특별히 예루살렘 문제에 대하여서는 공정한 해결 방식으로 약속을 하지 않는다. 네 번째 위기는 신뢰할만한 협상 지도부가 없다는 것이다. 올메르트가 부정부패와 관련하여 카디마의 수장으로서 은퇴를 직면하면서 얼마나 더 이스라엘의 협상을 이끌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동시에, 마흐무드 압바스는 분열된 팔레스타인 사회뿐만 아니라 파타(Fateh)가 분열된 가운데 협상해 왔고, 2009년 1월 "수반 임기 만료"로 불안해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위기들을 해결하거나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면, 장래의 협상은 성공할 가망이 거의 없을 것이다. 요르단 [1994년의 워싱턴 선언(Washington Declaration)에 의해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측의 소망에 반하여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의 보호자가 됨]을 비롯한 아랍 국가를 끌어들이려는 제안은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고, 단지 시간-소모적인 책략으로 간주될 수 있다. 게다가, 인정하고 타협하려는 문화가 여전히 결여되어 있다. 양측의 말은 화해하려는 메시지가 없고,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희망도 유발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든 관계자가 만족할만한 실행 가능한 합의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깊이와 진정성을 가지고 앞날의 대화를 이룰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1.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서귀포 강정마을에 내 친구 훈철이가 있다. 그는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학교 같은과 동기이다. 물론 나와 나이도 같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녔지만 대학졸업 이후 단 한 번도 만나보질 못했다. 그런 그가, 강정마을에 가면 “어이~ 친구!”하고는 이내 “밥은 먹었나?”하면서 반긴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한편에서는 의례나 배려이거니 했다. 안 그러겠는가. 해군기지 문제로 마을 전체가 깨지고 날마다 힘든 일들로 아파하는데, 그래도 어떤 이해관계 없이 찾아와서 함께해주니 미안하기도 고맙기도 했을 거다. 서로 별로 진득한 우정을 나눠본 기억이 내겐 별로 없었던 것도 그렇게 생각했던 연유다. 그런데 이 친구, 내가 강정마을에 갔다가 돌아올 때 마다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다. 언제부터인가는 제주시로 돌아가는 나에게 “다음엔 꼭 술 한잔하자. 꼭 자고 가야돼?”하면서 차까지 따라와 배웅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지난여름 몇 차례 마을주민들과 함께하는 도보순례, 무슨 무슨 문화제 행사나 술자리 등을 통해 서로를 공감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해군기지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마을을 살리겠다고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도청 앞 1인 시위에도 나서고, 5박 6일 동안의 강행군으로 이뤄진 제주도 전역 200km 도보순례에도 앞장섰다. 나 같은 시민활동가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마을에 찾아오면, 앞서서 반기고, 마을의 궂은일들에도 늘 빠지지 않는다. 마을 평화축제 준비가 한창이던 8월 어느 날에 그는 주민들과 어우러지던 한밤의 취흥을 뒤로 하고 몰래 둘이 빠져나올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소주잔 하나 씩 만을 앞에 놓고 질퍼덕 주저앉은 마을회관 마당에서 난 그의 ‘개인’을 접할 수 있었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아파하고 있다. 동시에 지금 자신이 처한 고통을 감내하며, 또한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 했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부터 난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마을회관 바로 옆이 자기 집인데도, 집에도 가지 않고 회관에서 먹고 자질 않나, 예전에 알던 것 보다 부쩍 말이 없어진 모습 등에서 뭔가 사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그에게서 직접 듣고, 나는 그가 그나마의 직장도 때려치우고 해군기지 막는 일에 앞장서는 것은 어쩌면 그 고통과 방황을 의탁하기 위한 자구책이거나 혹은 치유하는 그만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강정마을의 평화박물관 사진 출처 - 필자 2. 얼마 전, 경희대에서 열리는 사회포럼에 갔었다. 지난 몇 달을 들뜨게 했던 ‘촛불’이 어떻게 평가되고, 어떤 의미로 얘기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촛불’과 관련한 이런 저런 글들을 살펴봤지만, 대체로 정치 민주주의 맥락 차원에서 얘기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촛불을 조명하는 첫 날의 대토론회에서 ‘아고라 논객’이라고 소개된 어느 토론자의 말이 쏙 들어왔다. 그는 지난 5월 시작된 촛불을 사실상 처음부터 주도한 ‘개인’으로 보였는데, 확산을 거듭하며 수십, 수백만의 촛불을 일으킨 그 힘은 바로 ‘개인’들의 의사가 결집되었기 때문임을 알렸다. 그런데 그 개인들의 의사란 매우 다양하고 다른 차원의 것들도 많았을 텐데, 이를 의사의 결집, 이른바 ‘의사결정’으로 이끈 것은 바로 토론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그 토론과정을 소화한 사람만을 일컬어 ‘네티즌’이라고 한다고 뼈있는 정의를 내리기도 했는데, 더 의미 있게 다가 온 것은 과연 그것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가능했겠나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여러 인간적 관계로 얽혀 있는 오프라인에서는 이런 개인으로서의 생각 드러내기와 토론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임을 말하였다. 나는 한국사회가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의 길을 걸어 왔다고 하지만, 적어도 사회문화적으로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사회라고 생각한다. 즉, 정치경제적으로는 근대화와 탈근대를 경험해 오면서도, 사회적으로는 1차원적 연고주의와 온갖 집단논리가 주도하는 전근대의 작동논리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개인’, 즉 자신의 의사를 어떤 집단의 존재로서의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합리적 개인’이란 근대화의 당연한 결과여야 함에도 우리사회에 여전히 ‘개인’이란 없다. 누구나 국민 아니면, 도민으로서, 어느 회사에 소속된 과장이나 대리로서, 또는 동창이나 동문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문화영역의 담론이나 행위에서 탈근대의 현상과 양상을 소리 높여 지적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이를 생산하는 담지자들의 영향력은 기본적으로 그들 세계의 전근대적 사회적 관계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되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우리사회에 ‘합리적 개인’들이 출연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종교적 신념의 경계를 넘었고, 학교의 강요된 종교를 당당히 거부하는 어느 고교생의 이야기나 성소수자들의 이른바 ‘커밍아웃’과 같은 현상들에서 나는 줄곧 우리사회의 희망을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사회문제에 관심 없다거나,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도를 넘었다거나, 시장경쟁논리의 지배하에 양산되는 비정규직의 피곤한 삶 등 어디를 둘러봐도 암울하기만 한 우리사회의 자화상 면면의 틈바구니에서 그래도 희망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합리적 개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번 촛불을 암울한 시대 뒤편에서 소수자로서의 삶, 경쟁으로 내몰려 깨어진 일상의 상처, 따뜻한 쉼과 나눔의 표상으로서 가족과 가정의 해체 혹은 유지의 고통, 집단과 ‘틀’이 강요한 억압 따위를 박차고 하나씩 터져 나오던 개인들이 마침내 거대한 집단(권력)에 대항해 일어선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으로 보고 싶다. 사실, 이번 촛불의 기나긴 행진은 비단 광우병 쇠고기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강부자’, ‘고소영’, ‘S라인’ 같은 이 정권의 극에 달한 학벌, 종교, 계급의 집단이기주의가 우리사회의 개인(주체)이고자 하는 국민 혹은 민중들을 자극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끈 것은 탈근대의 시대에 전근대적인 방식의 지배구조에 숨 막혀 하며 하나씩 등장하곤 했던 합리적 개인들이 아닌가 싶다. 미국의 한 교수는 어느 잡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68년 5월, 프랑스 전역에서 풀뿌리 민중으로부터 이중 권력 기관들이 등장하면서 프랑스는 예상치 못하게 유사 혁명 상황 속으로 요동쳤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70년 5월 미국에서, 사백만 명의 학생과 오십만 명의 교수들이 전쟁과 경찰 폭력에 저항하며 전국적인 파업을 선언했다. 비록 이러한 운동 세력들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그로부터 발생한 문화적 전환은 수억 명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 조지 카치아피카스, 미국 웬트워스대 교수, 「5.18 기념재단」 발행 ‘주먹밥’21호 촛불의 와중에 치러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의 투표율과 패배에 나는 매우 실망했었다. 수십, 수백만이 연일 촛불을 들고 모였지만, 그들의 권력은 유지되었고 결과적으로 촛불은 어떤 제도적 힘이나 교체권력에 대한 기약과 상관없는 문화현상일 뿐인가 하는 생각에 무기력해 했었다. 그런데, 이 분명한 ‘문화적 전환’은 적어도 전체주의와 같은 우리사회의 서열과 집단의 작동논리에 큰 균열을 내는 사건일 것이고, 이는 권력유지수단으로서의 집단주의에 대한 획기적인 경종이 될 거라는 새로운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중심에 국민이 아닌 ‘개인’이 서 있게 되고, 이 개인들과 소통하지 않는 권력은 힘을 잃고 말 것이라는 훨씬 큰 기대도 얻게 되었다. 3.난 훈철이와 또래이자 교우였지만, 서로 기억조차 없이 살다가 10여년 만에 만나 비로소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동창으로서, 혹은 동문회를 통해 만나지 않았다. 이 시대를 사는 한 개인으로서 어떤 사건에 대한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만나게 되었고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아무런 이해나 연고관계에 의하지 않는 만남이란 얼마나 될까. ‘보편적 합리주의’ 로 위장된 자본의 논리, ‘글로벌 스탠더드’가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논거로 작동되는 시대에 ‘합리적 개인’이란 그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행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진 경제주체를 일컫는 경제학의 용어가 될 수 없다. 욕망의 정치, 파괴적 성장, 급속한 소용돌이의 비합리적 사회에서 진짜 합리적 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난 가끔 동창회나 동문 모임, 친족 경조사에 얼굴을 내밀지 못한 게 걱정될 때가 있다. 이런 모임들에서 제몫 다하지 못하는 게 이른바 공동체의 미덕에 역행하는 건 아닌가, 좋은 일 한다고들 하지만 나 좋자고 나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혼란도 겪는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친족이나 동문 같은 관계는 아니지만, 나와 함께하는 또 다른 많은 관계들이 나를 지탱한다.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후보지. 요즘 훈철이의 얼굴 같다. 사진 출처 - 필자 그리고 이내, 혼자 둘러댄다. “인생, 뭐 있어? 한 번 사는 거, 생각한대로 마음 가는대로 열심히 살자!” 내 친구 훈철이도 있잖아?
2017-07-20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이광조/ CBS PD 지난 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고 있던 탈레반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세계 최대의 바미얀 석불을 파괴했다. 150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인류의 문화유산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이런 야만적 행동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그 복잡한 심사를 속속들이 알 길은 없지만 상식적으로 추론해 보건데 파괴를 불러온 원동력은 그들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면을 향한 신념이 아니라 권력과 결합돼 외부를 향한 독단적인 신념 말이다. 하지만 어디 탈레반뿐이랴. 따지고 보면 인류 역사에 가장 끔찍한 장면들은 이런 독단적인 신념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중세의 마녀사냥, 십자군전쟁이 그랬고 20세기를 피로 물들인 파시즘과 제국주의, 공산주의가 그랬다. 그리고 잠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유행처럼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세계는 독단적인 신념들의 각축장이 돼 버린 것 같다.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다. 근본주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슬람 근본주의’를 떠올릴 것이다. 탈레반은 말할 것도 없고 여객기를 이용해 세계무역센터를 파괴한 알카에다의 초현실적인 테러를 목격한 마당에 ‘근본주의=이슬람근본주의’라는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세는 차치하고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개명된’ 기독교에도 이런 어두운 역사가 있다. 실은 우리가 ‘근본주의’라고 옮기는 ‘펀더멘털리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19세기 미국 개신교에서 발생한 보수주의 운동, 곧 천년왕국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서를 자구 그대로 해석하고 그 교리의 실천을 주창한 천년왕국 운동은 오늘날까지 미국사회에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을 십자군 전쟁에 비유하는 일부 미국 개신교계의 모습이 그 단적인 사례다. 종교 전문가도 아니고 미국 전문가도 아닌 내가 빤 한 밑천을 드러내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가지 근본주의 흐름 가운데 두 가지가 미국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사회에도 불행을 몰고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두 가지 흐름이란 다름 아닌 기독교 근본주의와 시장주의다(나머지 하나는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다). 근본주의는 자신의 신념체계 외에 다른 것, 즉 타자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의 신념만이 절대적인 진리이자 선이며 다른 것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미신이거나 악마, 무지 또는 탐욕으로 치부된다. 이런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신념과 권력이 결합된다고 생각해 보라. 권력은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와 결합된 권력은 타인의 육체와 노동뿐만이 아니라 신념체계까지도 조종하고 자신과 일체화시키려고 한다. 타자가 그것을 거부할 땐 응징과 폭력 또는 조롱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종교 전쟁의 역사를 보라. 하지만 권력이 인간으로부터 목숨을 빼앗거나 노예로 부릴 수는 있어도 인간의 내면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더구나 하나의 신념체계로 통일된 세계 같은 건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공상에 불과하다. 뿐이랴. 근본주의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현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의 삶과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동질적인 공동체를 꿈꾸는 근본주의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분열을 가져오고 폭력을 확대시킨다. 종교 얘기는 접어두고 요즘 유행하는, 아니 권력이 강제하려고 하는 민영화(사유화) 문제를 보자. 민영화(사유화) 문제를 얘기하면서 장황하게 근본주의를 얘기한 것은 요즘 우리사회의 권력층이 민영화(사유화)의 근거로 내세우는 시장주의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다. 긴 말 할 것 없이 요즘 우리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민영화(사유화) 대상들을 보자. 정부의 말이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상수도, 전기, 병원, 공항, 국책은행, 방송사 등등이 민영화(사유화) 대상에 포함된다. 공기업 또는 공공기관의 형태로 운영해왔던 이들 서비스를 선진화하기 위해 민영화(사유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논리다. 선진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핵심은 결국 주인 없는 회사에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주장에 뒤따르는 의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주인을 찾아주다니? 애초에 주인이 존재했다는 말인가. 물론 몇몇 방송사를 포함해 한 때 주인이 있었던 기관들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얘기하는 민영화(사유화) 대상의 대부분은 사회 전체의 필요 때문에 국민 대다수가 조금씩 주머니를 털어 만들고 정부가 국민의 위임을 받아 운영해 온 기관들이다(비록 내기 싫은 세금으로 만들어지고 오만한 권력이 국민의 의사는 무시한 채 제멋대로 운영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기관에 주인을 찾아주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식민지 지배라는 아픈 역사 때문에 근대적인 제도와 기관들의 뿌리가 일본이고 보면 주인을 찾아주자면 일본인들에게 그 권리를 줘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부는 선진화를 말하고 해당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에 필수적인 공적 서비스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민의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가격에 말이다. 백보 양보해서 인류 역사에서 공기업의 민영화(사유화)라는 것이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미지의 길이라면, 그래서 민영화(사유화)와 경쟁이 보다 저렴한 가격에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까짓것 한번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정부 당국자들의 안이한 계산과는 달리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선진국에서도 민영화(사유화)가 실패한 사례는 너무 많다. 의식주와 교육, 보건 등 국민의 기본적인 욕구가 공공성에 입각해 제대로 제공되지 않을 때 사회 양극화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가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니 상상도 하기 싫지만 시장주의 개혁의 첨단을 달린 중남미 국가들의 사례를 보라. 납치와 범죄가 산업이 되고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사설경비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성장하는 것이 선진화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정부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시장주의는 박제화 된 근본주의와 얼마나 다른가. 방만한 공기업들을 통폐합하고 필요하고 가능한 기관들을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민영화(사유화)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공적 영역=비능률, 그리고 민영화(사유화)의 대상이라는 단순 논리 앞에는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얘기가 길어졌다. 근본주의, 죽음을 불사하는 숭고한 신념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개인의 신념을 뛰어넘어 집단화되고 권력화하면 그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탐욕과 폭력이 자라나기 십상이다. 미국의 역대 정부 가운데 시장주의의 기치를 가장 선명하게 내세운 부시 행정부에서 전쟁과 정경유착이 많이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뿐인가. 시장주의의 전도사로 정부개입을 악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던 월가의 금융기관들이 파산 위기에 직면해서는 경제위기 운운하며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는 이중적인 태도는 시장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독단적인 잣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사회는 미국과 얼마나 다른가. 탈레반은 멀리 있지 않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4 | 추천: 0
이유정/ 변호사, 인하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법은 최소한의 정의라는 말이 있다. 법이 정의 그 자체는 아니지만 최소한의 정의를 보장해 주는 도구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에 의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정의를 보장해 주기는커녕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훼손하고, 권력에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법률도 많다. 나치시대의 법률이 그러했고, 유신시대의 법률이 그러했다. 그 이외에도 우리는 법률이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정의롭고 옳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 전제는 객관성과 형평성이다. 적어도 법은 법전에 적혀있고(객관성),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잣대(형평성)이기 때문에, 법치주의라는 말은 신뢰를 준다. 지난 8월 25일 한국 법률가대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법치를 국정운영의 3대 중심축의 하나로 삼아 흔들림 없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법치를 확립코자 한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좋은 말이다. 제대로 법치주의를 하겠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문제는 현 정부의 법치주의가 형평성과 객관성이라는 두 가지 전제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부는 출범 초기에 부동산 투기 등 각종 탈법을 저지른 인사들을 보란 듯이 청와대와 내각에 임명하더니, 공공기관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위해 기관장들의 임기를 보장한 법률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일괄사표를 강요했다. 공영방송인 KBS의 사장을 쫒아내기 위해 국가기관을 총동원하더니 뚜렷한 비리가 드러나지 않자, 국가에 세금을 많이 납부함으로써 KBS에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를 들어 해임을 강행했다. 그리고는 공영방송의 중립성 보장을 위해 법률에서 정하고 있는 사장 임명절차를 무시한 채 청와대 관계자, 방송통신위원장, KBS이사장이 모여서 후임사장 문제를 논의했다. 그 뿐인가. 경제를 살린다는 막연한 이유를 들어 판결문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경제비리사범들을 대규모 사면했다. 현 정부가 얼마나 법을 무시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5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법률가대회 개막식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반면 정부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에 대하여는 가차 없이 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되는 쇠고기 졸속협상에 대한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촛불집회의 참가자들을, PD수첩의 오역을, 쇠고기 문제를 왜곡 보도한 언론에 대한 광고 중단 운동을 폭력, 명예훼손, 업무방해로 수사하고 구속한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색소 섞은 물대포를 발사하여 옷에 색소가 묻은 사람들을 무차별 연행하고 경찰에 연행된 여성들의 브래지어를 벗기는 것처럼 군사독재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일들도 버젓이 일어난다. 정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법을 어기고 무시하면서, 국민에게는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법치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법의 이름을 빌린 폭력이고 만행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법치를 무력화하려는 행동은 더 이상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 속에는 앞으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을 법의 이름으로 더욱 가혹하게 탄압하겠다는 저의가 묻어나와 섬뜩하기도 하다. 정부의 정책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사표시를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떼를 쓰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탄압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의견을 대화와 토론으로 조정하고 해결해 가는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인가. 대통령의 말처럼 “법치가 없으면 인권도 없고, 자유민주주의도 없다.” 맞는 말이다. 자기편과 상대편에게 서로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의 잣대가 아니라, 형평성과 객관성을 잃지 않는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법치주의 확립이 필요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법률가대회에서 한 약속을 과연 얼마나 잘 지키는지 두고 볼 일이다. 마침 ‘약속은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ta)’는 라틴 격언까지 인용했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 기자 하늘이 깊어 밤이 고즈넉합니다. 가을입니다. “효진이 가슴에 멍울이 생기기 시작했어.” 발그레한 반달이 창문으로 들이치는데, 아내가 말합니다. 벌컥 놀랐습니다. “어, 어떻게 하지?” 열 살인데 당연히 그럴 나이랍니다.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만 하면 된답니다. 정작 딸아이는 어른이 되고 있다며 무척 좋아한답니다. 아내가 마냥 웃습니다. 잠든 딸의 엉덩이에 뽀뽀해주는 일을 이젠 정말 그만둬야 하는 걸까. 늦된 아빠는 괜히 서운합니다. 소녀가 숙녀가 되는 가을, 아내는 소녀의 동생을 낳을 것입니다.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태 안에서 노는 품새가 꽤 괄괄합니다. 세상 구경에 안달이 났습니다. 할머니는 꿈에서 아주 크고 훌륭한 잉어를 보셨답니다. 열 살 터울의 아이를 가졌으니 늦둥이라 해야 하겠지만, 남세스럽기는커녕 가슴이 뜁니다. 10년 전에는 아이도 어리고 아빠도 어려서 좋은 시간을 제대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꼭 육아휴직을 낼 겁니다. 시골 부모님은 손자를 바라는 눈치이지만, 장손인 그 아들은 그런 일에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저를 닮아 나중에 가출 같은 것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푸흡 웃을 뿐입니다. 지난달에는 멍멍이 요리를 지난주에는 미역을 바리바리 싸서 며느리에게 갖다 주셨습니다. 돼지고기도 먹지 못하던 서울깍쟁이는 시집온 뒤부터 그 고기를 아주 좋아하게 됐습니다. 시부모님은 텃밭에서 가꾼 주먹만 한 감자에 고추, 토마토 같은 남새도 한 상자씩 안겨 주셨습니다. 이름 짜르르한 마트에서 많은 돈 주고 사는 유기농 야채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며느리가 추임새를 넣으면, 시골 어른들은 무척 좋아라 하십니다. 주말마다 텃밭에 나가시는 아버지는 올 가을, 환갑이십니다. 그리 높지 않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일평생을 바쳐 공무원 생활을 하셨습니다. 퇴직 때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공부했다면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버지는 큰돈을 들여 맏아들에게 외국 어학연수를 시켜줬습니다. 아들은 고작 중국으로 환갑 여행을 보내 드리려 합니다. 유럽 여행이 어떨까 생각했지만, 지금 다니는 신문사 월급으로는 턱도 없습니다. 입사 이후 겪은 대여섯 명의 신문사 사장들 얼굴이 지나갑니다. 밉습니다. 그러나 사원들이 직접 뽑아 올린 사장이니 딱히 탓할 노릇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결정적일 때 불편합니다. 그걸 감수해야 진짜 민주 시민이라고, 기자인 아들은 매양 글을 써왔습니다. 사돈이 환갑 여행을 하는 동안, 장인 장모는 서울에서 큰일을 치릅니다. 작은 딸이 결혼 합니다. 저한테는 처제입니다. 처제의 부모님은 아주 예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성당에 나가시는 장인과 장모는 조카딸을 작은 딸로 맞으셨습니다. 아무 구분 없이 키웠습니다. 영리하고 총명한 작은 딸은 넉넉하고 성실한 웃음의 남자를 만났습니다. 장인은 요즘 기분이 좋으십니다. 장모는 아주 가끔 눈물을 비치십니다. 저는 아직 ‘동서’라는 말이 입에 붙지 않았습니다. 술잔을 나눠 기울이면 조금 쉬워질 텐데, 큰 사위와 달리 작은 사위는 소주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집니다. 장인과 꼭 닮았습니다. 이래저래 처가에 술친구가 없어서 큰 사위는 조금 서운합니다. 그런 일의 가운데, 부부는 결혼 10주년을 맞습니다. 딸아이의 가슴이 봉긋해지고, 그 동생이 태어나고, 자매가 결혼을 하며, 부모가 환갑을 맞는 일의 사이에 결혼기념일이 있습니다. 결혼 때의 약속을 조금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부부는 10년 뒤에 유럽 미술관 기행을 하자고 베갯머리에서 꿈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10년이 지난 가을, 그보다 더 중한 일들이 많이많이 생겼다는 핑계로 돈과 시간의 부족을 감춥니다. 아내는 학위 논문 제출을 뒤로 미루고, 남편은 담배 끊는 일을 뒤로 미룹니다. 밤의 어둠이 깊으므로, 내일의 하늘이 푸를 것을 압니다. 나이가 들면 왜 보수적으로 변하는지 이제 이해합니다. 자라는 딸과 태어날 생명과 같이 늙어가는 반려자와 노년을 보내는 부모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좀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도 누구의 자식인지, 누구의 부모인지 먼저 생각합니다. ‘개인’을 보지 못하고 ‘씨족’만 생각한다고 누가 타박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한때 사회주의자였으며 아직은 민주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면서도, 어느새 ‘가족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고개 흔들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조계사 촛불 수배자 농성단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다만 가족주의에도 ‘계급성’이 있음을 믿습니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줄 아들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총동원하고, 세상 모든 이를 하나님의 자식과 악마의 자식으로 후려치며, 친미반공을 신념화하는 이들만 형제로 삼는 사람들의 배타적 가족주의와 저의 그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믿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자식과 부모만큼 소중하며 그 신뢰 위에 가족과 다름없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진정한 가족주의라고 믿습니다. 다툼과 언쟁이 없을 수 없지만, 삶의 걸음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염두에 두는 ‘코뮨주의’의 원형이 바로 ‘열린 가족주의’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지난봄과 여름, 피로 맺은 가족의 미래를 생각하며, 동시에 그런 염려를 흉중에 품은 다른 가족을 모두 아우르며 ‘촛불 가족’이 탄생했습니다.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어느덧 세월이 되는 슬픔처럼, 그런 일이 있었나 아련해질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가을, 그들은 각자의 일로 많이 바쁩니다. 직장과 학교와 가정에서 치러야 할 일이 많습니다. 촛불 가족은 서로 나눈 약속을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직장을 구하면, 결혼식이 끝나면,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님 환갑을 챙기고 나면, 그 다음에 만나 안부를 묻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가족이라면 반드시 챙겨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목소리 조금 더 높여 외친 딸, 자랄 때부터 괄괄하여 분을 못 견딘 아들, 퇴근 뒤에도 인터넷을 누비며 바른 이야기 퍼다 나른 남편, 말리는 손도 뿌리치고 아이를 안고 거리로 나섰던 아내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조계사에 있고, 방송국에 있으며, 아직도 거리에 있습니다. 제 가족만 챙겼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용기 있게 치러낸 촛불 가족입니다. 그들은 바로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열린 가족주의’를 인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고초를 치르고 있습니다. 2008년 8월 22일 현재, 모두 1524명이 불법 체포됐습니다. 이 가운데 29명이 구속됐습니다. 10명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보석이나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이들도 있지만, 아직도 20여명이 갇혀 있습니다. 입건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외로움에 떠는 이들이 수백 명입니다. 민변 법률지원단 소속 변호사들이 법률상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짜 기대고 싶은 것은 법이 아니라 촛불 가족입니다. 아내의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자라는 딸의 머리를 매만지며, 늙은 부모의 어깨를 주무르는 그 손길이 필요합니다. 능멸의 눈으로 그들을 잡아 가둔 ‘배타적 가족주의자’들에게 세상 다수의 행복을 꿈꾸는 ‘촛불 가족’이 이번 가을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은 끌려간 이의 아픔을 덜고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코뮨입니다. 촛불 가족은 ‘큰 어른’이 아쉽기도 합니다. 대신 맞고 대신 끌려가며 대신 갇히겠다고 나서는 어른이 없는 듯 하여 마음이 허전합니다. 제자를 끌고 가는 경찰을 막아서는 교수, 감옥 생활에는 이골이 났으니 차라리 나를 잡아가라고 나서는 정치인이 그립습니다. 운동의 위기를 말하지만, 진짜 운동은 ‘대신 죽는 용기’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그 분들이 까맣게 잊어버린 듯 하여 안타깝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리더십의 전형은 이끌고 보살피면서 고난의 순간에 대신 십자가를 지는 예수에게 있음을 그들 모두 망각한 듯 하여 서럽습니다. 지난 10년간 많이 늙으셨겠지만, 그래도 어른 노릇 하여 분탕질을 꾸짖지 못하고 그저 수염만 매만지는 모습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구들방을 박차고 나와 ‘이 놈’하고 호통 치실 것을 믿어 봅니다. 그때까지는 젊은 식구끼리 의지가 되어 지내야 합니다. 가을을 견디고 겨울을 버티면서 촛불 가족의 재회를 준비해야 합니다. 광우병 대책회의에서 촛불 구속자 후원금을 모으고 있답니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아 도움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우리은행 1002-437-404837 (예금주: 천웅소)를 사용하면 됩니다. 입금할 때 ‘촛불 구속자 후원’이라 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지요. 변호사 비용이나 영치금으로 두루 쓰일 것입니다. 그 곳에 들어가는 돈은 법의 허울을 덮어 쓰고 배타적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과 맞대면하는 촛불 가족에게 또 다른 촛불이 될 것입니다. 내일의 하늘이 깊고 푸를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밤의 고즈넉함을 저린 가슴으로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촛불 가족은 진정한 연대의 힘을 믿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8 | 추천: 0
유정배/ 춘천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 2008년, 촛불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잠시 소강상태지만 분명한 사실은 촛불은 민주주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고 또 남길 것이다. 촛불시위는 우리에게 수많은 숙제를 주었지만,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은 뜻밖의 큰 질문을 하나 던지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지역과 촛불의 관계다. 촛불은 서울 청계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청와대로 전진했다. 광장에 ‘아고라’나 ‘82쿡’, ‘레몬 테라스’나 ‘소울드레서’의 깃발은 나부꼈지만 ‘00지역’ 깃발은 자취를 감췄다. ‘집단지성’은 서울광장에만 나타났고 지역은 ‘대책위’의 빈약한 깃발아래 모인 낯익은 얼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역은 ‘대책위’가 서울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며 매일매일 시위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촛불의 의미와 진로를 토론하는 자리에서도 지역은 주제가 되지 못했고 지역에서 나타난 흐름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일상의 정치, 일상의 운동을 이야기 하자면 지역을 뺄 수 없는데 촛불이 생활의제의 정치화라고 선명하게 주장하는 이들은 지역이 왜 일상에 끼지도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지역은 온라인의 저항 없이 오프라인에서 여전히 기동전을 치러야 했다. 지역은 ‘꼰대’가 된 걸까? 사진 출처 - 한겨레 민주주의가 지역에 이르면 풀뿌리 보수주의로 바뀐다는 말처럼, 지역의 골목골목은 여전히 근대를 목표로 달음질치고 있고 가끔 전근대의 그림자가 기웃거리기도 한다. 지역주민은 끼리끼리 무리지어 이권을 찾아다니다가도 ‘지역개발’ 앞에서는 일치단결한다. 온 천지가 공사판인데도 도로를 놓아 달라, 고속철도를 깔아 달라며 머리띠를 묶고 서명을 하며 중앙정부에 몰려간다. 지방정치는 당리당략의 제물이거나 개인의 영달과 정치적 진출을 위한 발판이다. 애석하게도 지역개발과 발전을 위한 중앙정부의 지원이 지역의 역량강화에 기여했다는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지역을 움직이는 원리가 ‘협동과 자치’가 아니라 ‘경쟁과 동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현실이다. 시민사회는 연고에 기반한 위계가 뚜렷하고 저개발 낙후지역일수록 자치단체의 영향력이 막강해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결사체들이 줄을 서지 않으면 존립이 어려울 지경이다. 좋은 의미로는 사회자본이 두터운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사회자본이 연고와 결합하면 누구도 거스르지 못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이런 지역에서 ‘집단지성’을 구현하는 이성적 시민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촛불에서 지역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절망일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속살과 사회운동의 숙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시민운동이 풀뿌리를 외치며 풀뿌리에서 둥지를 트고자 한지 십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튼튼한 집을 지었다고 보기에는 빈약하다. 문제의식은 뚜렷하지만 문제해결 능력은 약하다. 주장은 있지만 주장을 실현할 물질적 토대는 취약하다. 노동운동은 아직 작업장에 머물러 있어 광활한 지역의 삶터로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2008년, 촛불의 또 다른 의미는 그들이 아직은 생소하지만 지역의 광장에서 만났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손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 지역에는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지역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월과 함께 쌓여가고 있다. 지역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제도를 하나 만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과 노고가 필요한 일인 듯하다. 그것은 역사의 무게만큼 버티고 있는 큰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큰 산을 옮기는 것은 무모한 일이겠지만 역사의 무게는 그렇게 쌓였을 것이다. 지역을 새롭게 발견하고 지역에서 귀신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십 수 년을 버티고 있는 골골의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이 부싯돌이 되어 다시 촛불을 살리고 우리 모두를 더욱 한발 나가게 할 것이다. 그렇게 지역은 느리지만 천천히 한발 한발, ‘역사의 토성’을 쌓아가는 중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37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정책팀장 아침에 눈을 뜨고 새로운 뉴스들을 접하면서 요즘 드는 생각은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것과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일까?’ 하는 것이다. 규제 때문에 경제가 힘들다며 기업과 금융에 대한 모든 규제들을 완화하거나 철폐하고, 종합부동산세도 완화하겠다고 한다. 그러는 한편으로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재벌 총수의 비리에는 검찰이 나서서 선처를 구하고, 소위 강남부자들의 단결과 결속력을 잘 보여준 교육감 선거의 당선자는 영어몰입교육과 특목고를 밀어붙이겠다고 일갈한다. 또한, ‘국정 철학이 같은 인물이 공영방송 사장이 되어야 한다’ 는 발언을 철썩 같이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한나라당의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 개정안은 시민사회단체들을 행안부의 지원금에만 의존하는 존재로 평가절하하면서 ‘이명박 정부 비판 시민단체 보조금 회수’ 라는 그야말로 유치찬란한 언행을 보이고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월 100만원 여 정도 받는 ‘나’를 위한 정책은 어디에도 없다. 나날이 느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고 생존 전략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다. 그냥 쉽게 말하면 나날이 ‘우리나라’에 대한 박탈감과 배신감만 키워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주권을 가진 국민인가? 아니면 권력과 자본을 가진 몇몇의 국가를 위한 소모품인가? 휴가를 맞아 유명한 해수욕장을 다녀왔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그곳을 가게된 것은 어떤 종류의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는데, 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동안은 겁 없이 덤볐으나 대회가 다가오면서, 또 대회당일 이틀은 정말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긴장과 스트레스를 느껴야 했다. 그냥 ‘참가’ 하는데 의미를 두자고 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우승’에 대한 집착이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준비과정에서는 나름으로 힘든 훈련을 거쳐야 함에서 오는 다음날의 훈련에 대한 불안으로 시달려야 했다. 어른이 되고 싶은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시험의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는데, 스스로 시험에 들어 그 강박을 또 다시 느껴야 할 이유가 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 든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느끼는데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선택이라면 상황은 더 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학생들과 군인들이 아닐까 싶다. 공부하는 기계로서, 전쟁하는 기계로서 욕망과 욕구를 억압당하거나 거세당해야 하는 집단들. 그러나 아마도 그 강도는 군인들이 더 심한가 보다. 군인으로 지낸 시간에 대한 보상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18대 국회 들어 군가산점 부활법안이 2건(한나라당 김성회, 주성영의원) 발의되었다.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보상’의 하나인가? ‘군가산점제’는 이미 9년 전 차별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17대 국회부터 슬며시 부활법안이 논의되더니 결국 18대 국회에서 발의되고 말았다. 9년 전 위헌소송을 냈던 여성들-여성단체-과 장애인들-장애단체-이 당한 수모가 기억되면서 그 진흙탕 싸움을 또 해야 하는가? 하는 갑갑함이 먼저 들었다. 또 다시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로 문제의 핵심이 흐려질까 우려하면서-벌써 그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대안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안을 왜 여성단체-여성들-가 찾아야 한단 말인가? 아니 왜 여성들과 여성단체들이 그 대안을 만들도록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아래의 사례들은 군인으로서 직접 당사자인 남성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한 남성이 병역법의 몇 조항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청구인은 ‘남자만 병역의무를 지게하고 여성은 지원에 한해 복무하도록 한 점을 들어 평등권, 직업의 자유, 신체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을 침해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의 전쟁이 무기의 현대화 등으로 전통의 개념과 다르며, 넓은 의미의 대체복무형태가 발달한 현대에서는 여성도 병역의 의무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의 병역의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나 남성에게 차별적인 제도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에 국방부장관은 위헌이 아니라고 답했으나 지난 6월 14일 한국젠더법학회와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양현아 교수는 남성에게 차별적인 조항임을 확인하였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고려한 여성에게 ’수혜적 차별‘이라는 말은 결국 여성은 권리와 의무에서 권리는 있으나 의무에서는 배제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남성에게 ’과도한 부담적 차별‘이 된다는 것이다. 촛불집회 폭력 진압 때문에 부대 복귀 거부를 선언했던 이길준 의경이 지난 7월 27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월동성당에서 양심선언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한 전투경찰이 "촛불시위 진압에 나서는 것은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며 육군으로 전환복무를 요청했었고, 또 다른 전경은 촛불진압의 포상휴가를 나왔다가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에서 ‘인간성이 타들어가는’ 상처를 느껴 복귀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단체와 개인이 모여 '전·의경제 폐지를 위한 연대'를 결성하여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안보 행위’를 벌이고 있는 군인으로서의 전․의경제도에 대한 문제제기와 동시에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사자 남성들이 군대내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요소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군대제도가 가진 인권 침해적 요소에 대해 적극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반가운 일이다. 이는 단순히 제대군인에 대해 가산점을 주는 것으로 보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군대제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산점을 통해 이득을 보는 제대군인들이 몇 퍼센트나 되는가? 이는 가산점의 실익이라기보다는 그런 제도를 통한 정신적 위로의 측면이 더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를 잊지 않고 있어...’ 정도?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은 군에서도 통용이 되는 듯싶다. 군대가 아무리 편해도 가기 싫은 곳이라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있긴 하지만, 군에 있는 동안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난 후에 주는 적당한 보상보다는 군에 있을 때 보다 적절한 처우의 개선 여지는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외국의 예처럼 국민의료보험제도나 장학금제도를 통한 실질적인 보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인가? 미국의 방위비 분담요구는 수용하면서 자국민인 건강한 남성들을 위해 투자할 비용은 없는가? 23가지 불온서적을 발표하여 사고와 판단의 자유마저 박탈하고 전쟁도구로 조정, 지배하기 위한 정책 외에 건전하고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넘치는, 배려와 존중이 규율과 같이 공존하는 군대문화를 만들기 위한 고민과 정책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병역의무가 신성하다면 진정으로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 ‘신의 아들’들도 가게 만들 의지는 없는가? ‘군가산점제부활안’은 어느 모로 보나 유치한 논리이다. 눈속임이고, 남성들 간의 계급문제를 여성과 남성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꼼수일 뿐이다. 20:80으로 점점 양극화 되고 있는 사회에서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는 이들은 80에 속해있는 이들의 아들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국가로부터 소외되고 박탈당하는 이들의 자식들이 국가로부터 수익과 혜택을 입는 자들의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도 소모품이 아닐까? 국가가 개인을 보호해주지 못하면서 개인들로 하여금 국가의 보위를 위해 헌신하라고 하는 것은 전체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군대문제는 가산점 하나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 더 깊고 폭넓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만들어가야 하는 문제이다. 거기서 주체로 나설 이들은 남성들이다. 가산점이란 떡밥에 위로받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하지 않는가? 여성에게 분노를 향하기엔 뭔가 수치스럽지 않은가? 위로받고 분노하기에 앞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고민하고 드러내는 용기와 공론화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려는 노력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은가? 군가산점 부활을 들고 나온 한나라당은 미끼와 얄팍한 상술로서 또다시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로 본질을 흐리는 것에 낯부끄럽지 않은가? 진정으로 내 자식 걱정 하듯 진지한 정책을 마련할 의도는 없는가? 아니면 머리가 없는가? 여성단체 활동가들도 편안히 휴가를 즐기고 싶다. 제발 사고 좀 그만 치기를...
2017-07-20 | hrights | 조회: 3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