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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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박현도/ 종교학자 선거철로 들어섰다. 6월 4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언론이 시끄럽고, 동네 주변도 여러 현수막과 홍보성 광고로 어지럽다. 아파트를 드나드는 어귀에는 선거에 나올 사람이 인사를 하고, 휴일에 좀 쉴라치면 생전 울리지 않는 집전화기가 여론조사에 참여해달라고 따르릉거린다. 앞으로 이러한 모습들이 더하면 더하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때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바로 공약이다. 공약을 한자로 쓰면 公約이다.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꼭 지키겠다고 대놓고 공개적으로 하는 약속이다. “뽑아주시면 지금 제가 여러분들께 하는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라는 선거입후보자의 비장한 말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울렸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가! 그러나, 울리기만 했지 제대로 약속을 이행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굳이 통계를 내보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하다. 이수일에게 한 심순애의 약속처럼 당선 만 되면 公約은 空約이 된다. 요즘 공천을 두고 말들이 많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는 지난 대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공약사항이었다. 그런데 결국 지키지 못했고, 여당대표가 대국민사과까지 하였고, 야당은 왜 안 지키냐며 대통령 면담까지 요구하며 압박을 가하고 있는 추세다.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는 우리 정치를 벚꽃에 비유, “선거 때만 되면 마치 벚꽃이 피듯 갖은 공약들이 화려한 색과 향기로 치장되지만 선거가 끝나면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그 약속들도 모두 허공에 스러져버리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새로운 정치를 하자는 이야기인데, 사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축인 민주당 출신 대통령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약 준수율은 18%, 노무현 전 대통령은 8%에 불과하단다. 공천폐지를 두고 약속을 지키라는 야당의 속사정도 복잡하다. 공천폐지하려면 당을 해체하라는 강경반대파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당공천폐지의 요체는 현역 국회의원들이 기초의원들이나 단체장에게 끼치는 막강하고도 아주 못된 영향력을 줄이자는 것인데, 이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은 사라지고 정쟁만 남는 우스운 꼴이 되었다. 사족을 더 붙이자면, 지난 대선 당시 지지율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문재인 후보가 안철수 현 야당 공동대표를 사전 약속 없이 찾아갔다가 문전박대 받은 적이 있고, 그때 안철수 대표 측근은 방송에서 “친구 집에 갈 때도 미리 연락하고 가는 거다. 이렇게 오는 것은 퇴로를 주지 않는 압박이다. 예의가 아니다.”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급한 안 대표가 사전 예고도 없이 대통령을 만나겠다고 찾아가서 면담을 신청하고 특정기한까지 답을 달라고 요청인지, 통보인지 모를 일을 하고 왔다. 모르겠다. 도대체 새정치가 무엇인지. 민주당으로 당선된 사람이 당선되자마자 몇 달도 안 되어 민주당을 구태의 소산으로 밀어붙이며 새(新)정치한다고 떠나 버린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다시 자신이 욕하던 사람들과 정말 새롭게 정치를 한다. 새정치인지, 새(鳥)정치인지, 아리송하다. 아마도 이들은 자기편이 아니면 다 구정치고, 자기편이면 다 새정치로 보는 모양이다. 바야흐로 선거철. 모두들 이래저래 약속을 깨니 公約은 空約이 아니라 攻約인가보다. 봄이라 그런지 초록(草綠)이 동색(同色)이다. 노안 때문만은 아닌듯하니, ‘오호통재(嗚呼痛哉)라!’
2017-08-07 | hrights | 조회: 149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마이 플레이스(My Place). 박문칠 감독이 7년 여 동안 가족들을 인터뷰해 만든 이 영화는 주인공 네 사람이 각자의 자리 -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 혹은 각자가 있고 싶어 하는 자리를 찾아 떠나고 또 다시 만나기도 하면서 가족의 의미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역이민을 온 감독과 여동생은 캐나다와는 너무 다르고 낯선 한국의 정서와 시스템에 혼란을 겪고 상처를 받았다. 자신을 감추기에 능했던 오빠에 비해 그러지 못했던 여동생은 상대적으로 성장과정에서 더 많은 상처를 겪었고, 결국 스무 살 넘어 혼자 캐나다로 떠났다. 그런 여동생이 뱃속 아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평소 정치계로 진출할 꿈을 가진 아버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해서 돌아온 딸을 못마땅해 하지만, 엄마는 그런 딸과 아이를 별 동요 없이 받아들인다. 결국 소울의 출생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각자의 자리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 이 가족은 자신만의 플레이스를 찾아 여전히 이합집산중이다. 이 영화는 여러 층위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사람들에게 던진다. 보는 사람마다 이입되는 주인공이 다르다고들 하는데, 내 경우엔 네 명 모두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식과 조금만 달라도 쉽게 비난하고 배타적으로 구는 한국 사회에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거나 감싸주지 않아 더 힘들고 외로웠다는 여동생은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자신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소울을 키우면서 학교 공부를 하는 그녀의 바쁜 일상은 내 경험과 겹쳐 보였다. 하지만 화면 속의 그녀는 나보다 훨씬 더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감독이 한 말이 가슴 한 구석에 와 박혔는데, 여동생은 정말 원해서 아이를 가졌고 낳았기 때문에 아이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옆에서 봐도 알 수 있다고. 사진 출처 - 씨네21 일류 대학을 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들어갔지만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영화인이 된 오빠. 여전히 그 결정이 맞는지, 자신의 플레이스를 제대로 찾아가는 과정인지에 대해 뚜렷한 확신이 없었던 그는 캐나다에서 소울을 키우면서 자기 자리를 찾은 여동생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다. 그의 결정과 고민을 들여다보면서 또 나를 바라본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하는 자리를 찾은 것인가. 정말 원해서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건 맞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것과 잃거나 놓치게 된 것은 교환가치가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15년 이상 내 적성에도 맞고 하고 싶어 해온 것이라고 생각해온 일이 요즘엔 정말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나만이 아니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을 텐데, 과연 과감하게 새로운 선택을 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겨우 공고를 나와 캐나다에 가서 자리를 잡았지만 아내의 결정을 따라 학벌 따지는 한국에 돌아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던 아빠. 그는 정치계로 진출할 꿈을 접고 새로운 자신의 플레이스를 찾아 몽골로 떠난다. “그런 얘긴 처음 듣는데?”라는 아들의 질문에 “당연하지. 내가 말한 적이 없으니까.”라는 그의 대답은, 나처럼 청년과 장년 시절이 당연히 있었을 내 아빠의 과거와 가족들에게 아직도 말하지 못한 그의 꿈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민주화운동으로 투옥된 아버지와 힘든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등으로 역이민을 결정했던 엄마. 역이민 와서 청소년기에 많은 상처를 입은 딸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그녀의 선택을 사랑으로 받아주는 엄마. 비혼모라는 어려운 결정에 자신이 그녀를 보듬지 않으면, 다시는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엄마. 이렇게 현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 엄마의 마음은 누가 안아주는 건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가장 가깝지만 어쩌면 가장 서로를 모르는 관계. 아니, 가까운지 어떤지는 몰라도 결국엔 무시하지 못하는 이름, 가족. 너무 붙어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 내는 줄 모르는 고슴도치 같다고나 할까. 가능하다면, 이 영화의 가족처럼 적당히 간격을 두고 각자의 자리를 찾고 가끔은 뭉쳐서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이상적인 가족이 아닐까 생각한다. 솔직히 그 가능성을 위해서 사람들이 이 가족 같은 고난의 과정을 기꺼이 치를 용기를 갖긴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가족도 여동생의 임신이라는 계기가 없었다면, 오빠의 끈질긴 질문을 통해 가족들 각자 생각하는 시간을 길게 갖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의 ‘마이 플레이스’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가족들이 마음 한편으로 부럽고 그 용기들에 질투가 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59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재판’, ‘인민위원회’ 등, 해방 후 분단된 한반도 북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 국가를 형성하면서 ‘인민’이라는 말을 선점했다. 그런 반면, 남쪽 사람들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를 형성했다. 내외적인 압력에 의한 분단과 그로 인한 참혹한 전쟁이 수행되면서 냉전의 국제질서 속에서 남북 양쪽은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는 강고한 대립적 대타성(對他性)을 마치 국체를 이루는 주축이자 기초인 양 여겼다. 그런 가운데, 남쪽에서는 북쪽이 선점한 ‘인민’이라는 말이 국가적인 금기어가 되었다. 그런 완전한 대립의 대타적인 관계가 분단을 더욱 고착시켰지만,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면서 국제적으로 냉전 질서가 함께 붕괴되자 사태가 일변한다. 한국 전쟁에 대대적으로 참전함으로써 대표적인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중공’)과 대한민국이 1992년 8월 정식으로 수교를 맺는다. 그러면서 그 전에 이미 미국과 일본이 단교를 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의 ‘차이니즈 대만’과 대한민국 역시 단교를 하게 된다. 그 결과,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 그동안 적대적인 감정을 담아 불리던 ‘중공’이라는 약칭 대신에 중립성이 강한 ‘중국’이라는 약칭을 누구나 쓰기 시작하게 된다. 명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 명에 들어 있는 ‘인민’이라는 말의 용법과 효과를 적어도 외교적인 관계에서 충분히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영어로 ‘People's Republic of China’다. 정치학적인 용어로 ‘인민’은 ‘people’임을 말해 준다. 그러니까 링컨이 1863년에 제시한 민주주의의 3원칙,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 아니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으로 번역되어야 마땅하다. ‘국민’은 국가가 형성되고 인민 각자가 그 국가의 일원이기를 자의에 의해서건 타의에 의해서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동의할 경우에만 성립한다. 그래서 예컨대 국제적으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처한 ‘아시아의 고아’ 대만” 1)의 거주민은 국민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가 쉽진 않지만, 당연히 그들은 인민인 것이다. 서경석 선생이 『디아스포라의 기행』에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조선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자각적으로 북한의 국민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시 조선은 하나’라는 생각을 소중히 간직하려는 사람들, 재일조선인이 형성된 역사의 기록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자발적인 난민으로서 기꺼이 불리한 지위를 택하고자 하는 사람들, 또는 기재변경을 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등 다양한 입장이 뒤섞여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2),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도 아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도 아니고, 일본국의 국민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인민인 것만은 분명하다. 1) 백영서, 『핵심현장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묻다』, 창비, 2013, 181쪽. 1) 2) 서경석, 『디아스포라의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 김혜신 옮김, 돌베개, 2008, 23쪽 지난 1992년 8월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한중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 서명하고 악수하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처럼 ‘인민’은 ‘국민’과 다르고, 또 자발적으로 정치적인 참여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 ‘시민’과도 다르고, 당연히 군주제 하에서의 ‘백성’과도 다르다. 그런가 하면, 개개인의 특수성과 자율성이 삭제된 ‘대중’과도 다르다. 다만, 그동안 ‘people’이 한편으로 ‘민중’으로 번역되어 읽히면서 부당한 주권적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적 ․ 혁명적 지배를 노렸던 점을 감안하면, ‘인민’과 ‘민중’이 일정하게 가장 가까운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주권적인 지배자들 역시 넓게 본 의미의 ‘인민’에 속하는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한 사람의 인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넓은 의미로 볼 경우, ‘인민’이라는 말이 추상화되면서 정치사회적인 함의가 약화되고, 그 활용에 있어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발휘되는 인민의 보편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민이 그저 ‘인간’ 또는 ‘인류’라는 일종의 생물학적인 내지는 진화론적인 종(種) 개념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며, 혈통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민족도 아니다. 그렇다면, 인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인민은 첫째, 그 어떤 형태의 사회정치적인 체제라 할지라도 그러한 체제를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보편적인 바탕이다. 둘째, 각종 다양한 사회정치적인 체제와 그 하위 체제를 구성함으로써 주어지는 특징적인 여러 명칭들은 인민이 특정하게 규정됨으로써 나타나는 인민의 특수한 형태들이다. 셋째, 국가와 시민사회 또는 불특정한 각종 사회적 네트워크 등은 현실적으로는 인민의 삶을 제약하지만, 이념적으로 볼 때, 그것들은 인민의 삶을 널리 최대한 긍정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넷째, 그러므로 주권은 오로지 인민의 삶을 위한 것이며, 만약 주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민주권이고, 이 인민주권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주권이다. 다섯째, 그러므로 인민의 삶은 사회역사의 전반적인 네트워크를 관통하는바, 그 내부에 온갖 특이성과 차이들이 들끓는 절대적인 위력으로서의 공통적인 문화로서 축적 ․ 계승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민을 정의하고 보면, 국가와 국가의 주권이 문제로 등장한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바탕으로서의 인민의 현존과 상대적이고 특수한 국가 및 국가 주권의 현존이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의 문제가 근본적인 사안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 ②항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은 인민주권의 관점으로 환원해서 보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그러한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것으로 된다. 이렇게 바꾸어서 보면, 먼저 국가가 있고 그래서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국가가 구성되기 전의 국민은 당연히 성립되지 않는다), 먼저 인민이 있고 그 인민이 국가를 구성함으로서 제 스스로를 국민으로 자기 규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따라서 당연히 국가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민들 간의 공화(共和)에 의거해서 유지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의 제1조 ①항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선언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헌법 조항 역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을 만든 인민들이 서로의 동의와 합의에 의해 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이다.”라는 것으로 풀어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구성(헌법, constitution)은 다들 알다시피, 대한민국을 구성하고자 한 인민들에 의해 특별하게 예외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구성을 모델로 삼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대의의 위기와 민주주의 형태들의 부패는 전 지구적 조건으로서, 모든 국민국가들에서 즉시 볼 수 있는 사례이며, 여러 인접한 국가들이 이루는 지역 공동체들에서 극복될 수 없는 요소이고, 전지구적 · 제국적 차원에서 폭력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전지구적 위기는 세계의 모든 통치 형태에 영향을 미친다. 끝없는 전 지구적 전쟁상태는 ……”라는 말 3)을 들을 때 지성인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언명이나 이 언명을 인용하는 것이 이러한 왜곡된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고 부정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이에 적응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하는 비관적인 현실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전 지구적’ 운운 하는 경우, 예사로 그 어떤 대안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기가 쉬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민의 존재를 염두에 둘 경우, 적어도 사회정치적인 대안을 모색한다면, 그와 같은 거시적인 보편적 구도를 염두에 두는 것은 필수적이다. 3)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다중,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 조정환 · 정남현 · 서창현 옮김, 세종서적, 2008, 418쪽. 중요한 것은 그런 가운데 인민 각자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또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또는 한 사람의 지역민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반(反)인민적인 일이 국가 또는 국가 주권에 의해, 또는 국가 간 또는 국가 간 주권관계에 의해 자행되는가를 유심히 살펴 실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간첩 조작을 위한 외교 문건의 위조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국정원이 마치 무소불위의 초헌법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제적인 괴물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민에 의한 공권력을 대표하는 검찰총장마저 그 개인의 인민적인 권리인 사생활을 ‘조작하여’(아직 정확하게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찍어내기’를 한 것은 이번 사건에 비하면 약과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주권을 지배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정치적인 개인 내지는 소수 집단이 마음만 먹으면 그 자의에 의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의 현존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민으로서의 현존마저 폭력적으로 아예 짓밟아 처참하게 파괴시킬 수 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국가 간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더욱 심중하게 판단하느라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사건이 여실이 폭로되었는데도 최고의 통치자인 현직 대통령이 장기간 묵언으로 일관하다가 겨우 원칙적이고 일반적인 이야기만을 한 채 정작 해당 기관의 최고 책임자를 전혀 거론조차 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총포로 무장하고서 대대적인 격돌을 해야만 전쟁인 것은 아니다. 개인적이거나 소수 집단이 그들의 자의에 의해, 진정 국가를 구성한 주체에 대해 그 주체로서의 권리를 철저히 유린하는 행위야말로 일종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 말하자면 일종의 내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임시로 국가의 주권을 담당해서 지배하는 자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권한을 권력으로 오인하고, 그럼으로써 국가권력을 사유화해서 진정 본래의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갖는 주권적인 위력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을 ‘반란’이라는 말 외에 어떤 용어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인민주권에 바탕을 둔 국민주권, 국민주권에 바탕을 둔 헌법, 헌법에 바탕을 둔 법률, 바로 그 법률에 따라 한 치 빈틈도 없이 철저히 처벌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가 있기 전에 인민이 있고, 인민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삶의 현존이야말로 국가의 존립 목적임을 분명히 일깨워야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88 | 추천: 0
위문숙/ 장애인인권센터 대표 한국에 장애인 복지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맞아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낸 심신장애자복지법과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제정한 것이었습니다. 80년대 국제 사회에서는 장애인의 인권회복이 장애인과 관련한 문제의 핵심임을 알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정권은 이런 인권적 사고로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제정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국제사회에 대해 불온한 정권의 당위성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고 잠재적 위험 존재인 장애인을 통제하기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복지의 목적은 각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구조적 특성 등으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개인이 누려야할 인간다운 삶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이며 실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권이 배제된 한국의 장애인복지는 시설중심의 장애인복지라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장애인 복지의 서비스가 장애인 개인에게 당도해 인간적인 삶의 회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설, 복지관, 재활기관 등을 통해 전달되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복지전달체계이지 장애인에게 자신의 삶의 통제권은 절대 내주지 않겠다는 시스템입니다. 장애인 개개인이 가진 신체적 부실함을 가능하면 정상적으로 돌리는 것이 장애인복지의 최우선 목표라고 생각하는 재활론자와 생산성이 떨어지는 장애인들은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분리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이 덜 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부의 입장이 잘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8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의 장애인운동은 여러 번의 격동기를 겪었습니다. 80년대 사회변혁의 흐름 속에 나타난 청년장애인들은 스스로를 조직하였고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꾸고 장애인고용촉진법을 만들어냈습니다. 장애인도 인간이라면 누려야하는 권리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2001년 사회기반시설의 미비로 지하철역사에서 장애인이 추락한 사건을 계기로 이동권투쟁은 사회적공감대를 이루어내며 기반시설의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중증장애인도 시설과 집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자기결정권과 선택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은 활동보조서비스지원제도를 만들어 예전과는 다른 사회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동정적 복지서비스와 시설권력자들 사이에서 우리 장애인운동은 많은 것을 이루어 냈습니다. 장애인을 폭행하고 장애수당 일부를 빼내 직원 해외여행비로 사용했다는 의혹을 받는 서울시 한 장애인시설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러나 2014년 현재, 장애인의 삶은 행복한가요? 엊그제도 시설직원의 폭행으로 다리가 부러지고 자신의 국가보조금을 시설에서 횡령당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수용시설처럼 외딴 곳에 있는 시설이 아닙니다. 서울시내에 있는 시설입니다. 염전과 양식장에서 가출·실종인 100여명을 발견하고 이들에게 감금·폭행·임금 체불 등의 불법행위를 저지른 업주들이 조사 중입니다. 100여 명 중 지적장애인등 장애인이 24명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진 몇몇에 의해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장애인들은 여전히 일상생활에서의 인권유린에 노출되어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산책 중인 장애인이 지역주민으로부터 이유 없는 폭언과 폭행을 당한 지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음식점에 들어갈 때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는 이유로,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빨리 음식점을 나가주길 바라는 사장의 푸념을 듣고 있습니다. 지적장애인 동생이 회사 상사로부터 상습적인 구타를 당하고 있는데, 회사를 상대로 하면 해고당할 수 있으니 가해자만 처벌할 수 없냐는 식구들의 상담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치료가 보장된 것도 아니면서 보호의무자 2인의 동의와 정신과 전문의 1인의 의견만 있으면 정신장애인을 6개월간 강제 입원(감금)시킬 수 있는 정신보건법 제24조에 대한 위헌 소송은 7번째로 합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2011년 실시된 전국시설인권실태조사 중 서울에 있는 한 시설에 대한 보고서는 이렇습니다. “폭행의 흔적은 없다. 음식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시설생활자들은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기력해 보인다” 무언가에 의존하게 되는 존재는 무기력해집니다. 나의 의식주를 책임져주고 있는 시설장에 대한, 가족에 대한, 나의 일자리를 쥐고 있는 사장에 대한, 내가 음식을 사 먹고 있는 이 음식점에서, 그리고 나와 한 동네에 사는 이름 모를 지역주민에 대한, 얼마 되지 않는 복지서비스에서 탈락될까, 버림받을까 두려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장애인들의 인권은 지금 누구도 지켜주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장애인운동은 많은 것을 이루어냈습니다. 인권으로의 전환, 당사자의 참여, 지역에서의 자립생활 보장.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시설의 입소자와 지원예산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일상생활에서의 혐오와 동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지서비스를 중계하는 기관들이 새로운 권력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애인들이 손쉽게 인권유린과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보호와 온정’의 정서가 ‘인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인권은 보호하지 않고 장애인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시설과 복지서비스에 의존하는 존재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에게 여전히 어쩌면 더 절실히 인권이 소중한 이유입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72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인도 출신의 아마르티아 센은 「정체성과 폭력」에서 “세계의 무수한 갈등과 만행은 선택이 불가능한 독보적인 정체성이라는 환영을 통해 유지된다. 증오심을 구축하는 기술은 다른 관계들을 압도하는 호전적인 정체성의 형태를 띤다. 정체성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것도 닥치는 대로 죽일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은 현재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협상자들에게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인정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책은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이스라엘 점령지, 서안과 가자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도 폭력적인 추방과 배제 위협으로 작용한다. 지난달 26일자 팔레스타인 신문 알 쿠드스(Al-Quds)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협상자들과의 회동에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의 입장을 완전히 채택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인정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인정하라는 위협에 대답하여, 팔레스타인 알 쿠드스 대학(Al-Quds University)교수는 페이스 북에서 “전략적으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집단적으로 유대교로 개종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특정한 정체성 규정이 폭력과 직결된다.”라는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을 현실적으로 입증한다.   지난 2월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회담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난 달 25일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Haaretz)는 이스라엘 의회가 무슬림들과 기독교 아랍인들을 구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이것은 기독교인들을 이스라엘 사회 안으로 포섭하는 반면, 무슬림들을 배제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도하였다. 비판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것은 종교 정체성을 활용하여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분할 통치하기 위한 이스라엘 전략의 일환이다. 아랍어를 사용하고, 팔레스타인 전통문화를 공유하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중에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무슬림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의회는 종교 정체성을 부각시키면서, 팔레스타인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들을 탈 아랍화함으로써 무슬림들과 분리시키려는 ‘분할통치 정책’을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분할통치 정책은 ‘유대인의 민족고향 회복'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시온주의의 몰역사적인 발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7세기 이전에는 이슬람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조상은 다수가 기독교인이었고, 유대교도였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이 개종을 통해서 형성된 것처럼, 오늘날 팔레스타인 무슬림들뿐만 아니라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들도 개종을 통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시온주의가 내세운 ‘유대인 민족고향 회복'이라는 주장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몰역사적인 발상이다. 이렇게 몰역사적인 발상에 토대를 둔 종교 정체성 조작은 20세기 초 영국제국주의 중동 분할지배정책의 일환이었으며, 오늘날 시온주의자 유대인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시온주의자란 ‘예루살렘(시온)을 포함하는 그 주변 지역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 건설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정의된다. 영국의 분할 통치 전략에는 유대인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아랍 무슬림 시온주의자들이 협력하여 ‘팔레스타인 토착주민들의 자결권을 희생’시키면서 ‘유대 시온주의 국가 건설’에 동의하였다. 그 보답으로 무슬림 시온주의자들 역시 영국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하심 왕국들(요르단, 이라크)과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1919년 당시 영국의 후원을 받던 메카 통치자(하심가문)의 아들이었던 파이잘 후세인 하시미(1921년– 1933년, 이라크 왕)와 시온주의기구 의장이며, 1948년까지 영국 시민권자였던 하임 와이즈만(1949–1952, 이스라엘 초대대통령) 사이에서 ‘파이잘-와이즈만 협정(1919년 1월 3일)’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산파 역할을 하고 통역을 한 인물은 영국군 장교인 T.E 로렌스(일명 아라비아 로렌스는 하심가문을 통솔하여 오스만 제국을 붕괴시키는 아랍반란 주도)였다. 이 협정 서문은 아랍인들과 유대 민족 사이에서 고대부터 내려온 인종적 유대를 밝히고 있다(독보적인 유대민족 정체성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코메디다. 아랍인들 중에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이 있다. 유대인들도 기독교인이나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인종적으로 너무나 다양하다). 이 협정에서 파이잘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민족 고향’을 건설한다는 1917년의 밸푸어 선언을 지지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대규모의 유대 이민과 유대 정착촌 건설에 협력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계 시온주의기구는 파이잘이 열망하는 아랍국가 건설을 후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협정을 통하여 창출된 하심가-시온주의자 동맹은 오스만 제국의 아라비아 반도 영역을 시온주의 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 해체시키기 위한 영국의 전략이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영국은 메카의 통치자 하심가문에게 대 아랍 국가를 건설시켜주겠다는 안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2011년 11월 이란의 Press TV 보도에 따르면, 1920년대 초 사우디아라비아왕국 창설자 압둘 아지즈 이븐사우드는 영국의 메소포타미아 원정 대장 페리 콕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였다. “나는 술탄 압둘 아지즈 이븐사우드다. 나는 가엾은 유대인들이나 비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을 넘겨주는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영국 대표 페리 콕스 경에게 무수히 밝혔다. 나는 결코 영국의 명령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현재 두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수호자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역사다. 위의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의 예에서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건국으로 비롯된 팔레스타인 문제를 주도한 주체는 영국 시온주의자들과 영국인들을 의지해서 국가를 세운 아랍 무슬림 통치자들, 하심가(현 요르단)와 사우드가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4년 현재도 이 통치자들은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안에 따라 이스라엘과 연대한다. 사실, 지난 20여 년 동안 두 국가 해결, ‘이스라엘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안을 놓고, 이스라엘과 협상을 추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통치자들도 이스라엘 점령정책을 추인하는 정도였다.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 혹은 종족 정체성으로 편 가르기보다는 보편적인 인권에 토대를 두고, 모든 주민이 평등권을 누리는 국가-사회 건설을 목표로 새로운 해결 방안을 세울 필요가 있다. 현재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해결 방안을 들고 나오는 탁월한 정치세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94 | 추천: 1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지난 일주일간 태국을 다녀왔다. 도시빈민지역을 방문하고, 스스로 주거문제를 해결해나간 조직가들과 주민들을 만나 뵙고 왔다. 주로 CO(Community Organizer)라 불리는 조직가들은 PO(People Organization)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NGO와는 좀 다른 의미이고, 직접 이슈파이팅을 하기보다는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조직하는 일을 중심으로 한다. 처음 그곳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부터 그들은 왜 우리가 그곳을 방문하려 하는지, 무엇을 보고자하며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왜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세세히 질문하였었다. 어쩌면 무수한 조직이나 모임이 그곳을 방문하지만, 그 이후 뭔가 달라졌다기 보다는 그저 한번 방문하고 말아버리는, 이후에 어떤 활동과도 연결되지 않는 것에 대한 우려가 느껴졌다. 사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였었다. 그들 조직가 및 주민들과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10년 전 필리핀에서 비슷한 주민조직과 조직가들의 활동을 접해본 터였는지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직접 주민들과 조직가들을 만나고부터는 마음이 무거웠다. 진정으로 이들을 통해 나는 무엇을 보고자 왔으며 이 경험이 나의 삶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삶, 실천과 만나지 못하는 경험도 경험이긴 하지만, 이들의 귀중한 시간을 얻어내고, 그들로부터 환대를 받고, 짧은 순간의 만남이었음에도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그분들을 보면서, 한편 감사하지만 한편 죄스런 마음이 든 것도 사실이다.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쉬운 마음으로 갔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정직처분으로 강제휴가 중에 있는데, 처분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새기게 된 듯하다. 까칠해졌고 남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고, 남의 말을 들어주고 있기가 예전에 비해 귀찮다. 한 두 달여간의 짧은 순간에도 나는 사람에게 상처받은 짐승마냥 분노를 표출할 곳을 찾거나 나 자신에게로 그 분노를 돌려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10년 이상을 그 지겨운 주거권의 문제로 정부와 지주와 싸우는 그분들의 얼굴에서 나는 평화로움을 보았다. 그리고 행복하냐는 질문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희망이 있어 행복하다는 답변을 들으면서, 운동이 투쟁이 행복할 수도 있음에 경탄했다. 진정으로 그 분들은 행복해보였다. 그리고 그 분들의 개인적인 희망과 꿈은 공동체와 무관하지 않았고, 공동체의 발전과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안전과 행복이 개인들의 비전과 일치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하게, 그리고 서로 도우며 함께 마을의 비전을 만들고 실현할 수 있는지, 난 내가 얼마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사고와 삶을 살고 있는지 그 순간에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목적 없이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공동체운운하면서도, 나는 나의 개인적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고, 함께 운운하며 나는 ‘따로’를 꿈꾸어왔다. “따로 또 같이”에서 ‘같이’ 보다는 ‘따로’에 더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출처 - 필자 노숙인 쉼터에서, 그리고 방문한 도시빈민공동체에서 그들은 공동의 농작물을 생산하고 있었고, 점차로 공동의 생산물을 늘려갈 계획 중에 있다. 그리고 그 주민들 속에는 공동체마다 CO들이 자리하고 있다. 현지 활동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주장한다. “Learn by Doing", "Creating Culture of helping each other", "Making Alternative plane which is getting benefit for everyone" 더불어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한국은 주민조직가 트레이너 교육을 많이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이 주민들 속으로 들어가 운동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실제로 자기들은 현지 주민들 속에서 운동을 하면서 배운다고 한다. 트레이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 일단 해 보면서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동감이다. 배움이 실천과 연결되지 않으면 몇 년 안에 사장되어버린다. 그리고 배척이 아닌 서로서로 도와주는 문화를 만들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면, 투쟁의 대상이 누가되었든 그것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투쟁하면서 대안보다는 반대를 하지는 않았는가 돌아본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서로서로의 도움과 신뢰와 대안의 비전덕분에 가능하다. 75세의 주민대표인 할머니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 더 나은 공동체 주거대책과 그 곳 아이들의 삶의 질의 발전이다. 사진 출처 - 필자 광명지역도 재개발과 맞물려 주거권의 문제가 심한 곳들이 있다. 올 해 주요사업으로 그곳의 주민조직화를 위한 주민조직가훈련을 세워놓았다. 그러나 그 전에 중요한 것은 그 곳 주민들로부터의 신뢰를 얻는 것과 주민들을 만나는 것이다. 새롭게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다. 복귀 후 재계약의 심사가 있긴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라고 우리 주민들 스스로 자신의 주거관련 문제를 해결해나가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한 번 해보는 거다. 그 속에서 희망을 재발견하면서,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한지 한 번 실험해보는 것이다. 이번에 태국의 주민들로부터 받은 환대와 사랑이 우리의 가슴을 울린 것처럼, 사람에 대한 감동이 만들어지는 그런 지역 활동을 해보고 싶다. 사람이 싫어지고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분노하는 활동이 아니라, 사람들과 해맑게 웃고 행복할 수 있는 운동, 활동의 가능성을 태국에서 보았다. 나아가 헝가리 노숙인들을 격리하려는 정책에 맞서 헝가리 대사관앞에서 그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끝내 대사관 직원들을 만나 정책을 전달하고 만 그 실천력을 보면서, 서로 돕는 문화가 국가를 넘어 관철되고 있음을 보면서 말이 아닌 실천으로서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힘들 때마다 다른 공동체에서 그리고 조직가들이 그들에게 협조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때문에 연대와 협조가 얼마나 서로에게 힘이 되는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국제연대의 실천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연대를 실천하고 있는가 돌아봐야 할 때다. 밀양이, 용산이, 강정이, 쌍용차가 연대하였듯이 운동의 분야와 주제를 넘는 광범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파편화된 개인으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자본축적을 강조하고 모든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전략이라는 점에서도 우리는 연대가 필요하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의 음모를 밝히기 위해서도 그렇다. 미래의 불안이 우리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지키는 것도 결국 연대와 나눔이다. 그걸 확인해준 것이 이번 태국방문이었다. 실천하면서 배우라는 말도 잊지 못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75 | 추천: 0
이광조/ CBS PD ‘유서를 대신 써주며 동료의 죽음을 부추긴 파렴치한.’ 1991년 5월 8일, 재야단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김기설 사회부장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고 죽음을 택했다. 한 달 전 시위도중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경찰에 맞아 사망한 데 대한 항의였다. 이 사건과 관련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총무부장이었던 김기설 씨의 동료 강기훈 씨가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신 써주며 죽음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돼 법의 심판을 받았다.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 강기훈 씨는 3년을 꼬박 감옥에서 보내고 출소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강기훈 씨가 겪었을 절망과 고통을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패륜범’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강기훈 씨의 이후 인생이 어떠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사건 당시부터 조작 논란이 일었던 이 ‘유서대필 사건’에 대한 재심 선고가 내일(2월 13일) 이뤄진다. 사건이 발생한지 23년, 대통령 직속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재심권고 결정을 내린지 7년만의 일이다. 그 사이 20대의 청년은 50대가 되었고 그의 몸은 병마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23년 전 그를 ‘패륜범’으로 몰아가는 데는 김기설 씨의 유서 필적이 강기훈 씨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국과수의 필적감정결과가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필적감정결과는 바로 그 국과수에 의해 뒤집혔다.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기대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다. 판결 결과는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무죄 선고가 나오더라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강기훈 씨가 그동안 겪었을 고통의 시간을 도대체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강기훈 씨를 패륜범으로 몰아 인생을 파괴했던 검찰은 여전히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고 당시 강기훈 씨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들은 출세가도를 달려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지 않은가(담당 검사였던 곽상도 씨는 청와대 민정수석까지 지냈다). 재심 결과 검찰과 재판부의 잘못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다. 반성을 기대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교통사고를 내더라도 사람이 다치면 책임을 지게 돼 있는데,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국가폭력에 앞장섰던 사람들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못하는 현실은 내게 지극히 비정상으로 보인다.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자들에게는 최소한 변호사 자격이라도 박탈할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1991년 당시 고 김기설 씨가 남긴 유서와 강기훈 씨의 자술서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최근 화제가 됐던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됐던 “부림사건” 담당 검사들이 보여주는 태도를 보면 한 때 우리사회에서 진행됐던 ‘과거사 정리’ 작업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그 분들에게 한 마디라도 욕설을 하거나 부당한 처우가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책임지겠다.” ”한 달간 피의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면 경찰이나 검찰청에 신고가 들어왔을 텐데 당시에 전혀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부림 사건이나 유서대필 사건처럼 국가권력의 기만과 폭력이 과거 한 때의 일이라면 답답함과 분노가 조금은 누그러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우리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 청산해야 할 ‘과거사’가 무더기로 쌓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내부 고발자를 소영웅주의에 우쭐한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국정원 대선개입사건 수사와 재판은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아니 진실을 밝혀낼 수나 있을까? 쌍용자동차 노동자 대량해고 사건은 또 어떤가? 최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153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해고 무효 소송 항소심에서 법원이 1심 판결을 뒤집고 해고무효 판결을 내렸지만 그동안 해고노동자와 가족 등 2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인한 후유증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땅에서 정의는 끊임없이 유예되고 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80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국가’, ‘민족’, ‘종교’ 등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한국의 진보 좌파 지식인들의 지식은 실제로는 철저한 서구 중심적 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은 비서구/비중심부 지역들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동에 대해 매우 단선적이고, 일면적인 사변적 분석만을 내놓기 십상이다.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즉 좌파적 성향의 조직들이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거나 저항 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민족주의적이거나 종교에 기반해 있거나 심지어 특정 지배 엘리트를 지지하는 것처럼 외형상 극도로 모순적인 상황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서구/비중심부 지역들에 대한 진단과 분석이 이러할진대, (신)자유주의자들이 좌파들보다 급진적인 의제를 내세워 개혁을 주도하고, 시장주의자들/서구화주의자들이 민주화 운동 혹은 저항 운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등 소위 옛 사회주의 진영 혹은 체제전환국들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한층 더 어려움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당 중심의 서구 정치학 논리에 빠져 선출되지 않은 관료 등에 의한 과두 지배 세력의 지배를 간과하고, 시장 체제를 근본적으로 대체할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신자유주의의 잣대로 설명하려는 비과학적인 경향이 만연해 있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도 그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보도와 해설을 못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설명은 위에서 언급한 거의 모든 요인들이 집약된 매우 복잡한 설명을 요구한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좌/우, 동부/서부(수도 포함), 친서구/친러시아, 민주주의/독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친러시아주의의 문제가 중층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이론과 개념에 근거해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특성이 있다. 먼저, 독자적 민족 국가를 제대로 형성해 본 역사가 거의 없었던 우크라이나는 말 그대로 만들어진 국가이다(그러나 우크라이나 민족과 러시아 민족 간에 차이가 없었다는 일각의 과도한 교조주의적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마치 옛 유고 연방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처럼 지금의 동부 지방은 러시아에, 그리고 서부 지방은 폴란드, 오스트리아 제국 등에 오랫동안 복속되어 온 탓에 양 지역의 문화적 차이는 한국의 동/서 지역 간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극도로 이질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후 소련 시대를 거치면서 한층 더 큰 규모로 이주해 온 러시아인들은 거의 동부 산업 지대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는 한층 더 동부 지역 우크라이나인들의 정체성이 서부와 다르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종교 역시 양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의 차이를 더 크게 하는 요인이었고, 동부 지방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어보다 러시아어를 더 잘 구사하게 되는 등 언어적 요소는 양 지역 간의 차이를 확연하게 만들어 준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 건 바로 소련이라는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문제와 그 붕괴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대안은 곧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체제라고 생각했던 시기, 사회주의는 한편으로는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파괴를 의미했고, 소련은 곧 러시아를 의미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소련에 반대하는 것이란 자유주의와 동시에 민족주의적 과제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탈소련/러시아란 곧 유럽화를 의미했고, 동시에 유럽자본주의의 주변부로의 종속이 차라리 낫다는 논리 속에서 시장경제로의 복귀는 곧 유럽으로의 통합을 위한 적극적 개방을 의미했다. 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로 사망자가 속출한 가운데 지난 1월 24일(현지시간) 수도 키예프 중심부에서 정교회 사제들이 시위대와 경찰 저지선 사이에 서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좌파'적 당이라기보다는 ‘친러시아적인 당’ 혹은 ‘러시아화된 우크라이나인들의 당’, 혹은 아예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당’으로 간주되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도모하던 당시에 '좌'란 지배자 러시아를 의미했으며, 저항 세력은 말 그대로 ‘러시아적인 것’과 ‘현실 사회주의적인 것’에 반대되는 거의 모든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좌'는 양 민족을 막론하고 그 어떤 진보적 의미도 갖지 못 한 채, 그저 ‘새로운 시장체제를 제대로 선도할 수 없는 무능하고 억압적인 옛 지배층’을 의미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체제 전환 이후 동이든 서든, 구 공산당 세력이든 저항세력이든 간에 심각한 경제 위기 속에서 매우 빠르게 구 노멘클라투라 관료집단들의 지배를 용인 혹은 스스로 그 일원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과거 ‘좌’라는 이름으로 지배했던 기간 동안에 이론과는 달리, 실제로는 자유주의 단계에서 쟁취한 성과조차 파괴되었던 이 땅에서 이제 오히려 진보적인 의제들은 (신)자유주의자들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절묘하게도 '자유민주주의 정치 질서와 시장경제'를 지원한다는 서구의 이익과 맞아떨어졌거나 혹은 그 명목 하에 체제를 붕괴시켰고, 약화된 공산당에 이어 러시아의 앞잡이로서 러시아와 구 엘리트들(현재는 동부 지역 산업 올리가르히)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권 세력에 맞서는 세력은 그나마 조금 더 나은 서구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적인 세력이자 서구식 시장경제 개혁을 추구하며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지키는 세력으로 칭송되었다. 이러한 세력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중의 힘을 이용하여 소위 색깔혁명을 일으켜 집권하기도 했다. 당연히 이들의 정책은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었고, 계속된 경제 위기 속에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아 현 친 러시아 세력들에게 정권을 내 주고 만다. 그러다 보니 소위 저항세력에는 반러시아 극우 민족주의 세력에서 아나키스트들,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친서구적 신자유주의 세력까지 함께 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저항 세력에는 서구의 지원을 받는 시민사회단체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일반 시민들,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들, 인권활동가, 반인종주의/반파시스트 사회운동가들, 양심적 언론인, 작가들과 같은 매우 모순적인 집단들이 함께 하고 있다. 게다가 서구와 이해를 같이 하는 올리가르히들도 이들을 후원한다. 중요한 건 반대편인 친 러시아 세력 쪽에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쪽 진영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조직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우크라이나의 현재 상황과 같은 체제전환기 국가들이나 비중심부 지역 국가들에서의 상황을 단순한 선악 구도로 보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민중의 시위가 단순하게 서구의 조종을 받는 것으로 판단해서도 안 되지만, 현재 정권이 권위주의 정권이기 때문에 현재의 민중의 투쟁을 쉽게 민주화 투쟁으로 규정하고 지지해서도 안 되는 매우 복잡한 상황들은 낡은 잣대로 세상을 해석해 온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53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영화 ‘변호인’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나는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경우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주연 배우의 열정적인 연기, 그가 모델로 했던 전 대통령에 대한 추억 혹은 그리움, 80년대 정치, 사회 상황에 대한 아련한 회고 ….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이야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영화가 완전한 허구가 아닌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만큼, 적어도 당시에 이를 직접 경험하거나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을 법도 하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런 것이다. 1980년대 초반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가 부산에서 개업을 한다. 그런데 이 변호사는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게 상고를 졸업한 사람이고, 그래서 보통 법률가들이 하지 않는 (부동산이나 세무와 같은) 새로운 법영역을 개척한다. 여하튼, 이를 통해 작지 않은 부를 얻게 된 이 변호사는 요트를 즐기고 마침내 대기업으로부터 일을 맡아달라는 제안도 받게 된다. 한데, 서울에 이어 때마침 부산에서 터진 학생들에 대한 ‘용공조작’사건에 자신이 아는 청년이 관련되고, 순수한 정의감으로 변호를 시작한 그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고문과 진술의 조작, 사상 탄압과 그 배후의 정치권력을 마주하게 되어, 결국 이를 계기로 인권변호사로, 그리고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30여년이나 지난 일이고, 그래서 20대의 청년들에게는 옛날 한국 사회의 이야기를 생각해보게 하는 의미를 지닌 정도라지만, 정작 처음에 이 영화의 배급사가 가장 꺼려했던 것은 대중의 ‘정치혐오’ 현상이었다고 한다. 정치의식의 각성과정을 그린 영화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사람들이 정치를 싫어하는, 그래서 이런 류의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였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도대체 뭘 보여주려 한 것일까. 마치 게임처럼 긴장감이 흐르는 법정공방, 그 속에서 마침내 승리하는 진실 혹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한계에 굴복하고야 마는 정의. 그런 것인가, 거기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영화 <변호인> 사진 출처 - 씨네21 처음으로 영화를 제작했다는 이 영화의 감독은 말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분노가 며칠, 몇 주 가는 건 쉽다는 것이다. 이 분노가 성찰을 통해 몇 년이 지속됐고 … 신념의 공감과 연대가 이분을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이 끝났어도, 그래서 한국에서도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아니 그럴수록 더욱 더 국민의 정치참여는 중요하다. 너무나 빨리 변하는 세상이고, 다 알 수도 없는 수많은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변화를 결정하는 것은 늘 국민의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정치인이 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프롬(Fromm)이 말하였듯이, 사람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넘어서는 ‘사회적 건강’이라는 것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사회 내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회의 주요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실현여부와 관계없이,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당당한 한 구성원이라는 자존감을 갖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라면 어떠할까. 흔히 말해지듯이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것이고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철도, 의료와 같은 공공사업을 사영화하고 연금과 같은 복지혜택을 축소하며 저임금의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결정을 마구 해대도 말이다. 이런 탓일까. 지금은 고인이 된, 이른바 ‘민주 정부’ 10년의 두 대통령은 서로 매우 비슷한 말을 남겼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행동하는 양심”이 민주주의의 유지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이런 이유로 다음과 같은 말도 가능하다.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핍박받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영화의 변호인, “천만 관객”이라는 변호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49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지난 크리스마스 즈음에 조카가 인사차 찾아왔다. 이 조카는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며 안정된 직장(특급호텔 외식사업부)의 정규직을 그만두고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언니네 부부는 반대했지만 사표는 수리된 뒤였고 조카는 이미 서울에 있는 직장 두 군데서 오퍼를 받은 상태였다. 낯선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에 애가 적응하기 힘들까봐 내게 몇 달 동안 데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20대 중반의 조카는 중학교 때부터 바텐더를 꿈꾸어왔고 국내에서 경력을 쌓아 싱가포르나 대만에서 바텐더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구체적인 꿈을 갖고 키워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대단해 보였고 나는 그 꿈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카는 오후에 출근해서 새벽까지 일하는 힘든 업무를 자신의 꿈과 경력을 생각하며 버텨냈다. 그야말로 버틴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교대근무도 아니라 매일 야간 시간에 일을 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기 때문이다. 야간 근무는 낮과 밤을 구분해서 살아온 신체의 생체리듬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오래한다고 해서 적응이 돼 밤에 일하는 게 덜 힘들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직장생활을 한 지 4개월이 지난 시점에 조카는 어느 날 갑자기 잘렸다. 업소가 무리하게 확장을 한 탓인지 불경기 때문인지 사장이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직원들을 내보낸 것이다. 몇 달 후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부르겠다는 얘기만 남기고. 다른 업소에 취직을 해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던 한 달을 보내고 조카는 다시 그 업소로 돌아가 1년 가까이 일을 했다. 채 일 년이 되기 전에 이미 그 업소에선 가장 고참이 되었다 한다. 하지만 겨울이 다가오자 작년 이맘때 벌어졌던 구조조정 분위기가 다시 조성되었다. 작년 일을 경험한 직원은 조카뿐이었다. 조카는 매해 사장이 경력이 짧은 직원들을 구조 조정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같은 경우를 당하고 싶지 않아 사표를 냈다. 사표를 수리하면서 사측은 ‘우리 회사는 퇴직금을 퇴사 후 2개월이 지난 시점에 준다’고 했단다. 이미 사표를 내기 전에 월급도 밀린 적이 있어서 신용교통카드가 정지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모한테 연락하지 그랬어? 라고 말했지만 중요한 건 당장의 차비 얼마가 아닌 걸 조카도 나도 안다. 그녀가 바텐더로서의 경력을 무사히 국내에서 쌓을 수 있을까? 그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어떤 고난을 겪어야 할까? 꿈을 포기하지 말라며 쉽게 격려할 수 있을까? 조카를 보내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같은 업계의 후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선배들이 아직 위에 많이 있으니 제 또래에는 관리자로서의 비전을 갖기 힘들어요.” 내가 몸담고 있는 업계는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IMF 이후인 것 같은데) 신입보다는 경력자를 주로 고용해오고 있다. 알고 보니 꼭 이 업계만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몇 년 전에 나는 이런 얘기를 했다. 지금 출판사를 안정적으로 꾸리고 있는 대다수 70년대 학번 사장들은 출판이 호황일 때 회사를 차렸고 그나마 대부분 내 나이 때거나 더 젊을 때 사장이 되었는데, 앞으로 후배들이 그렇게 사장으로 기반을 가지거나 사내에서 임원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고. “여러분들도 열심히 하면 이 자리에 올 수 있습니다” 라는 식의 발언은 정말 무책임한 거라고. 나는 안정적인 기반을 다진 50대들을 보고 얘기한 것이었고 30대인 후배는 여전히 회사에서 윗사람인 40대 선배를 두고 한 얘기이다. 조카 얘기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후배 얘기를 들었을 때도 할 말이 없었다. 조카에게 무슨 근거로 노동조건이 그야말로 후진 그 바닥에도 볕 들 날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겠나. 후배에게 그래도 너는 비정규직이 대부분인 20대들보단 나은 처지 아니냐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나이를 불문하고 세대를 불문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처지에 모두들 놓여 있는 것 같다. 둘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사회에서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팍팍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됐다. 개개인이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는 정말이지 혼자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들이 많다. 말이 연대지 불법해고에 맞서 같이 나서자고 하기엔 개인적으로 처해 있는 조건이 너무 다양하다. 어쩌면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뭔가 상식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건일 때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에 아는 분이 회사의 비상식적인 고용조건을 거부하고 퇴사한 뒤에 페이스북에 남긴 말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맞습니다. 배부른 선택입니다. 저는 당분간 사직을 해도 먹고사는 데는 당장 큰 걱정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배고프고 힘들 땐, 원칙적인 선택을 하기 힘듭니다. 아니 더 순종해야 합니다. 최근 국회 청소노동자 한 분이 비정규직에게 노동 3권 보장하면 나라가 어찌되겠냐하면서 노동자 권리를 자근자근 짓이겨버린 새누리당 국회의원에게 고개 숙이는 모습을 봤습니다. 배고파서 원칙 못 지키는 것도 서러운데 그나마 배부른 상태에서조차 원칙을 못 지키면 그 땐, 원칙은 없는 겁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3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