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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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재원/ 서울대 국제대학원 강사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심지어 기득권을 상징하는 새누리당까지도 소위 ‘좌파’적 수사를 남발할 정도로 넘쳐났던 각종 진보적인 사회경제적 정책 논의와 논쟁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대선 후보 인물 중심의 보도에 의해 묻히거나 사라져 버렸다. 소위 ‘안철수 현상’으로 인해 야기되었던 여러 정치·경제 논쟁들 역시 그의 사퇴로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이렇게 논의들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위 ‘정권 교체론’으로 고착화된 데에는 이번 정권 하에서 기초적인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크게 후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수의 급진적 좌파들을 제외한다면, 1987년 소위 ‘민주화’ 이후, 많은 사람들은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달성되었다고 판단하고, 소위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점차 서구식 ‘보수 대 진보’로 정치 구도가 바뀔 것이라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지난 1997년에는 불완전하게나마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야당으로의 진정한 정권 교체가 일어난 바 있었으며, 10 여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보수 정권으로의 교체가 일어나 마치 민주주의 정치 질서가 확립되어 가는 것으로 착각해 왔다. 그러나 이는 서구식 모델에 익숙한 식자들의 관념적 논의에 불과하다. 정치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동시에 실천해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서구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 여전히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서구에서와 같은 합리적 보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서구에서조차 보수 세력이란 각종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이지만, 단지 여러 가지 제도로 그러한 탐욕을 조금 제어할 뿐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과 같은 비중심부 국가들에서 ‘보수’와 ‘진보’의 선거를 통한 정책 대결에 대해 대중의 검증과정에 의해 권력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는 선거 정치는 많은 부분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당 권력의 교체와 상관없이 유지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기득권 세력들의 권력이다. 즉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 권력은 물론, 그 동안 간과해 왔던 각종 관료 권력, 언론 권력, 사법 권력, 그리고 이들과 학연과 지연 등으로 얽혀있는 수많은 사회 내 기득권 세력, 심지어는 범죄 집단 등 수많은 이 땅의 지배 카르텔은 그 어떤 진보적인 정당으로의 정권 교체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이 땅의 실질적 권력체다. 그러나 비판적인 지식인들조차 이러한 현상에 무관심하다 보니, 정당 중심적 정치 변동 논의에 집중하면서 사회 변동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러한 지배 카르텔은 보수적 정권 하에서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 그 결과 지난 5년간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커녕 피로 얻어 낸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크게 후퇴하였다. 이 정권 하에서 도저히 몇 문장으로 정리해서 열거하기도 힘들만큼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후퇴와 퇴행, 그리고 파괴가 일어났다. 그리고 누구나 다 소위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외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민영화 계획, 노동과 복지에 대한 공격, 재벌 봐주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그래도 그나마 비정규직이나 투기자본, 사회 양극화, 재벌 문제 등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시민 사회 내에서 관심도 높아지고 있고, 따라서 해결을 위한 논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이에 비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악화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공격 훨씬 이전부터 구조화되었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몇몇 문제들은 철저하게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제들은 이번 정권을 거치며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종교권력, 언론권력, 사법권력, 사학권력 등 수많은 ‘권력’들이 사회 곳곳의 기득권 세력들과 긴밀하게 맞물려 민주주의와 시민 사회를 압박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은폐되어 있는 몇 가지 문제를 들어 보자.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 때 한 시민이 투표를 하는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먼저, 몇몇 고대 출신들이 일부 고위 공직에 전면으로 배치되면서, 이들에 대한 비판이 집중되면서 정작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 서열 체제, 그리고 이러한 서열에 의한 지배 구조가 철저하게 은폐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모종의 사회안전망 역할까지 하고 있는 학벌 중심 위계질서가 타파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교육 개혁, 사교육 철폐, 학교 폭력 타파, 그리고 나아가 복지 국가 건설도 불가능하다. 또 다른 문제는 지배 엘리트들의 놀라운 수준의 군대 면제율로 인해 하루라도 빨리 타파되어야 할 남성 중심적 군사 문화적 잔재들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군대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나라에 바쳤건만, 그러한 의무를 지지 않은 일부 지배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은 엉뚱하게도 군대를 갔다 와야만 제대로 된 남성, 나아가 발언권 있는 시민의 자격이 있다는 퇴행적인 생각들이 더욱 강화되면서 그러한 의무를 질 수 없는 장애인이나 이주민,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불만으로 변질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이주민·다문화 정책, 그리고 여성정책으로 인해 빈곤과 불평등한 상황에 놓인 대중의 불만은 매우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다. 저임금 노동력 이용과 성차별적 고용 정책의 유지는 자본은 물론, 정당 정치 위에 군림하는, 그리고 학벌 등으로 얽혀 있는 보수 지배 세력의 이익을 반영하는 국가의 전략이자 기획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의 결과로 치열해진 노동시장에서의 경쟁과 이탈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세계에서도 가장 심각한 수준의 차별과 불평등 지수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이주민들과 여성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대통령 후보들의 공약은 마치 사회의 전 분야를 다루고 있고, 각각의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이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민감한 부분들에는 매우 소극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문제들은 서로 얽혀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의 철저한 해결 없이는 그 어떤 거창한 경제민주화 논의도 복지국가건설 논의도 허상일 뿐이다.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의제들, 서구 사회에 기반한 서구식 거대 담론 외에도 한국에서의 특수한 의제에 대해 논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47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생지(生之), 축지(畜之), 생이불유(生而不有). “낳고 기르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요즘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노자의 말이다. 천지는 만물을 낳고 기르지만 소유하지 않는데, 우리네 인간은 자기 힘이 들어간 것은 모두 소유하려고 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랑은 하되 소유할 수는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내 뜻대로 해주길 바라는 욕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노자의 명언을 애써 되뇌며 마음공부를 한다. 시야를 넓혀 우리나라를 보면 소유욕이 불러온 비극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위정자들이 눈에 띈다. 마치 나라가 자기 것인 양 분탕질을 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에 헌법을 고쳐 제멋대로 권력을 쥐고 흔든 적이 얼마나 많았나. 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국부의 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를 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로 몰락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스스로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는 것으로 민정이양 약속을 지키는 꼼수를 쓰면서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고, 이어 삼선개헌, 유신개헌으로 초절정독재를 구가하였다. 마치 대한민국이 정희민국인 것처럼 말이다. 전두환은 12.12라는 “위대한 구국의 결단”으로 정권을 잡아 군사정권을 연장하였다. 모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일념 아래 국가를 자신의 것으로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디 이들 뿐이랴. 단일화라는 국민의 열망을 뒤로한 채 나아니면 안된다고 고집부리다 김영삼, 김대중은 1987년 정권교체 절호의 기회를 날리고 대권을 노태우에게 넘겼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이번 대선도 어쩌면 야권이 이와 비슷한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단일화를 약속했고 결국 문재인으로 야권후보 단일화가 되긴 했지만, 토론, 여론조사를 둘러 싼 양측의 신경전, 안철수의 출마포기 선언 등 단일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누가 보기에도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서로 양보하기를 바라면서 질질 끌다가 지지자들의 가슴만 졸이고 실망감만 키웠다. 모두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당 후보이기에 자신의 거취를 사사로이 결정하지 못한다면서 일방적 양보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당 후보니 당 후보 아닌 안철수가 결단해 달라’는 이야기로밖에는 들리지 않는 말이다. 국민이 원하는 단일화를 한다면서도 단일화를 열망하는 야권지지 국민보다 당과 당원이 먼저다. 안철수의 모습도 보기에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국민 여러분, 이제 단일 후보는 문재인 후보입니다. 그러니 단일화 과정의 모든 불협화음에 대해서 저를 꾸짖어주시고 문 후보께는 성원을 보내주십시오”라는 안철수의 성명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말이 효과를 반감한다. “비록 새 정치의 꿈은 잠시 미루어지겠지만 저 안철수는 진심으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를 갈망합니다.” 몇 번을 곱씹어 보아도 문재인이 새 정치를 못할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렇다고 여권 후보인 박근혜는 더 나을까. 나는 김성주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이 “박 후보는 미혼의 몸으로 국가의 일을 책임졌고 국가와 결혼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 말을 듣고 섬뜩했다. 미혼이라 육아와 같은 기혼자의 삶에 대해 모른다고 한 야당의 공격에 맞서면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박 후보의 부친을 생각하면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이 그냥 애국적인 말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정권유지를 위해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인권탄압을 자행한 아버지로부터 국가관을 배웠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밀려들었다. 국가 사랑을 넘어서 소유욕을 부릴까 무섭다.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국가는 내 것이니까 나만 바라보고 나에게는 좋은 말만 하라고 강요할까 두렵다. 나에게 나쁜 말하는 사람은 반국가적 범죄를 짓는 매국노라고 일방적으로 몰아 부칠까 무섭다. 그래서 국민에게 봉사할 마지막 기회라는 박근혜의 말이 가슴에 잘 와 닿지 않는다. 국민이 국가의 다른 말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헌하자고 할 때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하더니 막상 지금은 개헌하자고 하는 모습과 겹쳐 신뢰하기가 참 아리송하다. 중동의 독재자들도 알고 보면 모두 국가에 대한 사랑이 넘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대단한 애국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비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를 국가에 대한 공격, 즉 반국가범죄로 간주하였다. 나는 애국심이 넘치는 지도자들이 그래서 무섭다. 그들에게 국가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사는 나라다. 그러니 반대자들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기나 했을까? 그러니 그런 나라에 인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후진적인 중동국가와는 질적으로 다르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아니 솔직히 우리나라가 그런 비민주국가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나라라는 말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현실정치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말을 하면 “꼴통”, “빨갱이”라는 경멸어가 튀어나오는 현실이 두려워 모두들 입을 꾹 다무는 나라가 대한민국 아닌가. 그러다보니 모두 알아서들 심각하게 자기검열을 한다. 그러다보니 다들 알아서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생각은 괄호 안에 꼭꼭 담아 둔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렇게 비판정신이 죽은 나라에서 창의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창의력이 없는 나라는 베끼기는 잘해도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세계를 이끌 수는 없다. 무바라크, 아사드를 보고 비판하기 전에 우리 과거를 먼저 돌아보자. 경제발전이 지도자만의 위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 때문에 그들의 폭압적 인권탄압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용인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보자.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만 있다면 인권 같은 것은 잠시 없어도 좋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라면 지도자들이 국가를 개인소유로 여길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그런 나라가 아니길 바란다. 12월 19일 우리가 뽑을 새로운 대통령은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살 냄새 나는 국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국가를 사랑하지 않고 국민을 존경하는 사람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데아를 쫓는 스토커는 정말 무서우니까. 그동안 그런 지도자는 많아도 정말 너~~~무 많았으니까! 그리고 존경하는 국민이 자신을 지지하는 일부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국민이길 바란다. 국민을 빙자해서 사사건건 ‘뻘짓’하는 지도자를 이제는 정말이지 그만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낳고 기르십시오. 낳았으되 가지려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 하지 마십시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도덕경 10장. 오강남 역, 현암사).
2017-08-07 | hrights | 조회: 248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또 터졌다. 스폰서 검사에 이어 그랜저, 벤츠 검사가 나오더니 이번에는 이를 모두 더한 것 같은 종합 비리 검사가 등장하였다. 현직 부장검사인 이 사람은, 이미 초임검사 시절부터 자신이 근무했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비리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던 사기범의 측근으로부터 돈을 받기도 하고, 수사 대상인 기업으로부터 금품과 향응, 주식 정보도 받았다는 의혹도 있더니, 대형 금융사건이었던 저축은행 비리에 대한 축소수사에도 연루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여하튼 이 사람이 수년간 챙겼다는 돈은 이미 확인된 것만 10억 원 가까이에 이른다. 이미 검찰총장까지 나서서 국민에게 사과를 했다지만, 당연히 문제의 해결은 사과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부패하지 않는 권력은 없다’는 말을 예증이라도 하겠다는 듯, 문민정부 이래 강화된 검찰 권력은 계속해서 비리사건을 노출하였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이야기 해 온 검찰의 개혁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검찰총장은 검찰 내부의 자체감찰 강화를 들먹이고 있지만, 이러한 내용은 이미 2년 전 대검 감찰부를 감찰본부로 확대했을 때 써먹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 동안은 검찰의 자체 감찰기능이 약해서 검사의 비리를 막지 못했던 것인가. 하긴 김 부장검사라는 사람이 이렇게 검찰의 비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뇌물을 받아왔던 것을 보면, 자체감찰이란 검사들에게 아무런 위하력도 없었던가 보다.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다. 감찰을 강화하는 것으로 검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내 생각에는, 별로 없을 듯하다.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 측근과 유진그룹 등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김광준 서울고검 검사 사진 출처 - 한겨레21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문제의 핵심은 검찰의 지나친 권력을 분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통제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검찰심사회와 같이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검찰의 감시기구를 만들 수도 있고, 이미 법정화되어 있는 검찰인사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외부인사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그 내용과 형식을 강화할 수도 있다. 나아가, 법무부의 검찰국을 검사들로 채우지 말고 외부인사가 담당하도록 하여 검찰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제도적인 대안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제시되어 온 것이다. 이제는 이를 실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찰권을 지배하는 더 상위의 권력이 바뀌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검찰 스스로도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민주사회에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스스로 감시하며 정화해 가는 권력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잘할 수 있다’ 혹은 ‘우리만이 잘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낮은 자세로 국민의 통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수사권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건을 두고 또다시 경찰과의 갈등이 표출되었거니와, 검찰은 이제 자신의 내부와 관련된 사건이나 일반적인 범죄사건에 대해 수사권을 놓아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검찰은 여전히 중요사건에 대해 수사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 앞으로는 혹 변화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기소에 대해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검찰의 권한이 지금처럼 모든 범죄사건에 미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 중요한 부분은 대체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스스로 수사권을 포기해버린 검찰을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찬사를 보내지는 않을까. 이제 오히려 관심은 수사권을 갖게 된 경찰에게로 쏠리지 않을까. 만약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거나 혹은 그 과정에 여러 비리를 저지른다면 또 어떻게 될까. 수사권은 역시 검찰에게 있어야 한다는 검찰의 수사지휘 필요론이 다시 등장하지 않을까. 검찰은 만능이려고 할 필요가 없다. 중요사건에 대한 수사와 기소, 공소유지라는 자신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실함과 공정함은, 비록 시간이 조금 걸릴 수는 있겠지만, 틀림없이 국민에게 감동과 신뢰를 주게 될 것이다. 검찰개혁이 이야기된 지도 이제 10년이 지나간다. 정부에 사법개혁을 담당하는 위원회가 설치되어 공식적으로 이 의제를 다룬 것부터 시작하면 20년도 다 되어간다. 그러나 실제 검찰의 모습이나 그 권한은 예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다. 그 동안 여러 사건에서 특별검사가 임명되기도 하고, 그런 탓인지 대통령 후보들은 모두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를 신설한다거나 특별검사를 상설화한다는 등의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또 경찰과의 수사권 갈등은 작년에 최고조에 이르러 제도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듯하다가 가까스로 봉합된 형국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권력기관들과의 조정이나 견제 이외에 직접 국민이 참여하는 검찰의 통제나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에 의한 검찰의 감시는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이제 더 이상 검찰의 개혁을 늦출 수 없다고 보이는 지금, 위정자를 자처하는 사람들과 검찰의 수뇌부는 이런 생각을 한 번 쯤 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검찰개혁의 근본적인 방향과 취지는 바로 국민주권의 회복, 그리고 민주주의의 확장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검찰은 2008년 대검 감찰부장직을 2년 임기의 외부 공모직으로 전환하고, 2010년에는 대검 감찰부를 감찰본부로 확대ㆍ개편했다. 한상대 검찰총장이 임명된 후인 지난해에는 감찰 일원화 제도도 도입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33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우리 헌법 제69조에 나와 있는 대통령 취임 선서의 내용이다. 내년 2월 25일쯤이 될 것인가, 새로운 대통령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맹세의 표시로 손을 들고 이 선서문을 낭독할 것이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국민들이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말 그대로 ‘엄숙하면서도’ 왠지 ‘비감에 어린’ 분위기에 휩싸일 것이다. 이렇게 엄중하게 대통령 취임 선서문을 낭독하고서도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년간 이 선서의 내용 대부분을 위반 내지는 아예 무시했다. 평화적 통일 대신 무력 대결의 위기를 고조시켜 놓았다. 국민의 자유를 증진하기는커녕 일방적인 국가공권력을 키워 국민들을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대신 4대강 사업을 통해 수십 조 원의 국민세금을 낭비했다. 민족문화를 창달하기는커녕 특히 언론을 비롯한 문화예술마저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놓았다.   취임 선서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사진 출처 - 뉴시스 이렇게 국민과 국가를 배신하고 실패해버린 이명박 대통령을 앞세워 권력을 ‘호의호식한’ 한나라당과 그 현재의 수장인 박근혜씨는 ‘새누리당’이라는 위장의 이름을 내세워 마치 이명박 정권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인 양 대다수 국민들을 철저히 기만하고 있다. 당 내부에서 패거리를 형성해 ‘친이’와 ‘친박’으로 나뉘고 권력다툼만을 했을 뿐, 이른바 ‘친박’이란 이름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위 반(反)헌법적인 배신행위를 당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제동을 걸고자 한 노력이나 성과가 과연 있었던가. ‘손 놓고 넋 놓고’ 집권의 반사 이익을 한껏 누려놓고서는 이제 와서 ‘친이’의 짓일 뿐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무책임한 정치 행태를 보이는 ‘친박’과 그 수장 박근혜씨는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대통령을 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는가. 요컨대 ‘새누리당’이라는 당 개명만으로도 이들 집단은 향후 5년의 정권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한 뒤 지금까지 박근혜 후보가 이명박 정권의 실패에 대해 자신이나 ‘친박’이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발언을 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던가. 이는 책임정치라는 말을 아예 쓸데없는 구호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처사다. 그러면서 지난 대선 때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직을 ‘억울하게 놓친’ 분풀이나 하듯이 세종시의 건립을 철회하려는 이명박씨에 대해 원래 계획대로 해야 한다는 한 마디 말을 한 것을 내세워 마치 본인이 타고나면서부터 원칙을 지키는 사람인 양 분식을 해서 국민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 말 그대로 볼만한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이투데이> 11월 2일 자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지낸 최경환씨는 “박 후보는 위기에 아주 강한 분”이라며 “당이 2번이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천막당사의 정신과, 파란색을 빨간색으로 바꾸는 대 변화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천막당사’야말로 정치 쇼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한나라당이 돈이 없어 천막당사에서 일을 보았는가? ‘차떼기 당’으로서 부패의 본질이 드러나자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를 대대적으로 눈속임하고자 한 것이 ‘천막당사’가 아니던가. 이러한 박근혜씨의 기상천외한 발상은 이명박씨가 이른바 ‘명박산성’을 쌓고서 발악을 한 것과 너무나 닮았다. 이러한 박근혜의 ‘쇼맨쉽’을 두고서 만약 그녀의 정치적 역량이 대단한 것으로 평가한다면, 그러한 정치적 역량으로 나라를 통치할 경우 이 나라는 물론이고 국민들 역시 각국으로부터 천박하다고 비난을 받거나 업신여김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국민통합’을 내세우면서 마치 아버지 박정희씨의 치명적인 과오들을 넘어설 것처럼 하는 것 역시 쇼가 아닐 수 없다. 한 발 양보해서 말하면, ‘진정성이 넘치는 쇼’일 뿐이다. 이 말을 약간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쇼’가 아니겠는가. 박근혜씨는 서민복지를 내세우고 무엇보다 국민행복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국민행복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요컨대 어떻게 되는 것이 국민행복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긴장감으로 넘치는 국제정세가 어떠하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그저 돈 벌기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적인 상황을 어떻게 바꾸어 질 높은 진정한 문화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그저 돈 벌기에만 급급한 대학들의 행태를 어떻게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국민들의 행복을 위해 그야말로 돈 벌기에만 급급한 재벌대기업들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 목숨을 걸고서 투쟁하는 현대자동차의 비정규직 사태에 대해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그저 이명박 정권과 수사학적인 차이를 내세워 책임정치를 회피하려 할 뿐이다. 말도 안 되는 초법적인 이른바 과거사를 통해 그녀가 누린 정치권력과 경제적인 호의호식을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표를 얻기 위해 어떻게 국민들의 불편한 심사를 다독거려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에 골몰한다. 정수장학회는 무엇이며 영남대학교는 무엇인가?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글 맨 앞에 제시한 대통령 선서는 대통령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법적·정치적 권한을 함축하고 있다. 권한의 행사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대통령 한 사람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대통령을 배출해 낸 당과 당의 수장들 역시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새누리당’이 박근혜씨를 내세워 ‘재집권’을 노린다면, 이명박 정권에 대해 철저히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책임이다. 그 책임을 묻기 위해 국민들이 투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올바른 인식을 흐리기 위한 전략전술로 일관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는 결코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31 | 추천: 0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 10여 년 전 2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아파트단지 근방에 살았던 적이 있다. 산동네와 재개발, 그런 사연이 얽혀 있는 단지였다. 신축 아파트단지가 항용 그러하듯 그 단지에도 조금 안심하고 하여 흥분 곁들여 거들먹거리는 분위기가 물씬했는데, 한 귀퉁이엔 분위기가 영 달라 뵈는 몇 동이 따로 서 있었다. 출입구도 달랐고 도색도 조금 달랐던가 싶다. 그 몇 동이 임대 아파트라는 건 금세 알았다. 아하, 임대…. 근방에 갈 일은 없었지만, 멀리서 임대 아파트를 바라다보면 어쩐지 나도 조금 안심하고 많이 거들먹거려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그래도 내가 얼마나 살 만한지 비교급으로 체험하는 느낌이었을까. 사람이 다 그리 속속들이 속물적일 리 없건만 그 외딴 몇 동에 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는 좀 짜릿하기마저 했다. 얼마 전 <한겨레 21>을 들추다 본 임대 아파트의 슬럼화라는 현상은, 내가 느꼈던 안도와 정확히 표리를 이루는 것일 게다. 한국에 임대 아파트가 본격화된 지 20년이 넘었다. 임대 아파트에서 태어난 아이가 성년에 달할 세월이다. 기사에 따르면 임대 아파트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약대가 되지 못하고, 안전한 삶을 위한 지지대마저 되지 못하며, 내몰린 이들의 막장처럼 점점 슬럼화 되고 있다고 한다. 가보지 않았으므로, 실상은 알지 못한다. 작은아버지 한 분이 10년 넘게 임대 아파트에 사셨지만 한번도 들른 적이 없다. 늘 가까이 있었는데도 임대 아파트로 상징되는 삶을 방문케 되진 않았다. 그곳에 산다는 상상도 거의 해본 적 없다. 가까우면서도 먼, 흔한 현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철조망은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를 가로지른다. 임대아파트 아이들은 그 철조망을 바라보며 학교에 간다.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의 날카로운 울타리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21 ‘그들끼리.’ 영구 임대 아파트 단지는 복지에의 중요한 한 걸음이었으되 확실히 ‘복지= 시혜’라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모델이다. ‘그만큼’. 동냥을 청하면 천 원짜리 한 장쯤 건네고 고아원이며 양로원에 얼마쯤을 기부하지만, 동시에 그 삶이 낮춰 볼 수 있는 한도에 머무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나’나 ‘우리’ 안에 들이지 않는 한 불우(不遇)―단어 그대로의 뜻대로라면 만나지 못한. 무엇을? 시대를? 부모를? 이웃을?―는 연민할 만한 존재이나, 경계를 넘어 들어온다면 위험한 존재가 되기 쉽다. 중산층이라 자처하는 대다수는 제 아이 반에 고아원 아이가 있다면 경계할 것이고, 임대 아파트 입주민과 출입구를 나눠 쓰는 것도 꺼릴 것이다. 그 불우가 전염되기라도 할 것처럼. 역으로, 우리는 그만큼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걱정 속에서 살고 있다. 사소한 사고나 불운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을 만큼, 그만큼 중산층적 삶의 토대란 허약한 것이다. 영구 임대 아파트를 독립 단지로 배치하는 대신, 같은 아파트, 한 현관 안에 섞어 놓으면 어떻겠느냐고 한다. 저 멀리 다른 출입구로 드나드는 대신, 아침저녁 같은 엘리베이터 속에서 마주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한다. 소심한 아줌마는 겁이 난다. 무례하고 지저분하고 그러면 어쩌지? 술 취하고 소란 피우거나 하진 않을까? 성범죄자 알리미라고 우편이 날아왔을 때 격분하고 ‘주폭’ 운운하는 선동을 비난했던 걸 잊어버릴 지경이다. 지금 내 이웃에도 무례나 불결이나 과음 등이 모두 있겠지만 생각이 거기 미치지 않고, 가난한 삶이 곧 문제적이고 소란스러운 삶일 리 없건만 그것도 헤아리기 싫다. 다만 내 삶이 청결하고 안전했으면 좋겠다. 공부하는―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자세로서― 아줌마가 겁먹은 아줌마를 달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내 안에서 둘이 갈등하는 동안, 아, 그러니 게토란 얼마나 생기기 쉬운가, 복지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다시 생각한다. 더럽고 소란스럽고 위협적인 존재를 분리시켜 버리자는 제안은 늘 솔깃하다. 마치 그들 존재를 유폐시키면 내 삶에서 그런 낌새가 제거되기라도 할 것처럼, 내 삶이 안전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는 나 또한 그런 존재련만. 시혜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분리의 정책을 지지하기란 더더구나 쉬울 것이다. ‘우리’에서 일단 떼어내고, 그런 다음 보살핀다는 기제― 미국에 기부문화가 활성화돼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는 것도 실상 그런 구조다. 분리 후의 관심, 주변화시킨 후의 배려. 그렇듯 분리되고 주변화된 삶은 추락하고 황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라는, 공동의 가능성에서 밀려난 타격이란 그만큼 결정적이다. 사회 곳곳에 게토를 만들려는 정책은, 설사 그것이 복지와 시혜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위험한 것이다. 복지에 대한 사고의 전환, ‘우리’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그런 점에서도 필요할 듯하다. 허나 먼저, 내 안의 겁먹은 아줌마를 잘 달래야 할 텐데.
2017-08-07 | hrights | 조회: 120 | 추천: 1
이은규/ 인권연대'숨' 사무국장 성서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율법교사가 예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는 그에게 묻습니다. 율법에는 어떻게 쓰여 있으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읽었는가 하고. 율법교사는 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에게 말합니다. “옳게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그러면 당신이 살 것입니다.”(물론 성서에서는 예수가 하대를 합니다만 글쎄요 제가 아는 예수는 상대방에게 존대를 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다른 새로운 무엇을 얻음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그 앎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앎과 삶이 일치하는 가운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삶이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정치인들 특별히 대통령후보로 나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법대로, 헌법대로 행하십시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이렇습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굳이 여기에 옮겨봅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당신들의 상식에 기대했으면 좋으련만 그 상식이라는 것이 자신의 삶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니 할 수 없이 헌법대로 행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로서의 법과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권과 복지,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적 가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큰 기대인가요? 18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 대선주자 3인방인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후보 사진 출처 - 뉴시스 율법교사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이야기 합니다. 다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어떤 사람이 길 위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 위에서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당시 레위인들은 종교행사를 관장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이 되자 그는 떠나면서 여관주인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예수는 이야기를 마친 후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율법교사가 대답합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는 그에게 말합니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 율법교사는 적잖이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예수의 말에 의하면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사마리아인이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뭇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특권을 행사하며 살고 있는 사제와 레위인이 아니라 근본도 없는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라니.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몹시도 천박한 족속이라 여겨진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말한 이웃은 종교와 족속을 떠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자비를 행하는 사람, 그들이 이웃이라는 말씀이며 그처럼 행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이웃일까요? 예수의 말씀에 의하면 종교와 체제, 지역과 빈부의 차이을 벗어나 자비행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들의 이웃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이 이와 같은 자비를 행하며 살고 있다면 우리는 참 좋은 이웃일 것입니다. 그래요 시절이 시절인지라 다시 한 번 정치인들, 특별히 대통령후보로 나선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당신들은 어떤 이웃입니까? 길 위에 방치된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돌보아 주며 그에 따른 비용을 갚아주는 이웃이 당신들이기를 바랍니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 그들이 당신들이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정치가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커서 어쩔 수 없이 기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특히나 여섯 아이를 둔 부모 된 사람의 책임과 의무로서 드리는 말씀이니 제발 귀담아 들으시기를. 그리고 여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묻겠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는 어떤 이웃입니까?” 깊은 연민으로 맺어진 사람과 사람의 연대에 목마른 시절입니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01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GCC 국가연구소 연구교수 ○ 사우디 시위대의 구호는 무엇인가? 2011년 1월 이후 2012년 10월 현재까지 크고 작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2012년 7월 14일 리야드 북부에 위치한 까심 지역에서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던 수감자 가족 여성들 10명이 체포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재판 없이 수감된 정치범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들이 7월 23일 까심 지역에서, 25일 리야드에서, 28일 메카에서, 8월에 메카 행정 구역에 속하는 타이프, 동부 지역에 위치한 담맘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개혁을 넘어서 혁명을 촉발시킬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박탈감, 정치적 억압, 부패는 사우디아라비아에도 모두 존재한다. 시위대가 내세우는 구호는 ‘재판 없이 수감된 정치범 석방, 부정부패 척결, 실업 문제 해소, 종파적인 차별 종식, 바레인에 파견된 군대 철수’ 등이다.   사우디아라비아 행정 구역 놀랍게도 전 세계 석유 수출량의 25퍼센트를 차지하는 석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시민들이 개혁을 주장하며 내세운 구호들이 가난한 공화국들인 튀니지, 이집트, 예멘, 시리아 시민들이 내세웠던 구호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워싱턴 소재 걸프 문제 연구소 소장, 알리 알 아흐마드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부정부패에 따른 시민들의 곤경 상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부패는 최악의 상황이고, 관리들은 시민관련 업무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75년 전부터 지금까지 석유 수익으로 5조 달러 이상 벌었다. 이 금액은 엄청난 것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시민들의 생활양식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았다.” ○ 교사들이 시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년부터 실직 상태의 교사들은 정규직 일자리를 요구하면서 수도인 리야드, 메카 행정 구역에 속하는 사우디 제 2의 도시인 제다와 타이프, 타북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2011년 1월 9일, 250명의 실직한 대학 졸업생들이 수도 리야드에서 시위를 하면서, 정부가 자신들을 위하여 일자리를 창출할 때까지 시위를 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실직한 교사들이다. 우리는 교육부 앞에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시위를 하고 싶지만, 경찰들이 우리를 해산시키고 있다.” 시위자들은 국립 학교에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교육부 관리들에게 요구하였다. 시위대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교육부 관리들은 곧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시위를 할 것이다. 사립학교 교사들의 월급은 2천 리얄(약 533달러)이다. 반면 국립학교 교사들은 한 달에 8천 리얄을 받는다.” 이러한 사우디 사립학교 교사들의 월급 수준은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하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교사들의 수준보다 낫지 않다. ○ 높은 청년 실업과 저임금 노동자 사우디 시민의 약 70%는 30세 미만인데, 많은 청년들이 실업 상태다. 석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가 10퍼센트(비공식적으로는 30퍼센트)가 넘는 실업문제로 씨름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수치는 이집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 예멘, 시리아에서 혁명은 높은 청년 실업률이 가장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사우디 시민들의 일자리 중 약 90%는 공공 부문이 차지한다. 민간 부문 일자리의 90%는 약 8백만 명의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외국 노동자들은 고급 기술이 필요한 고임금 일자리나 혹은 사우디 시민들이 천시하는 저임금 일자리를 채우는 경향이 있다. 민간 부문에 근무하는 사우디 시민들은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하고 있다. 이러한 사우디 시민들은 겨우 생계유지가 가능한 수준의 보수를 받는 택시 운전수, 개인 안전 요원 등 저임금 노동자로 내몰린다. 이제 외국인들이 거의 도맡았던 저임금 일자리를 사우디 시민들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 왜 동부 지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발생 하는가 ? 2011년 1월부터 2012년 9월 말까지 시위 도중 18명이 사망하였으며, 사망자들 대부분은 동부 지역에서 시위도중 발생하였다. 동부 지역은 사우디 유전 중 90퍼센트 이상이 위치한 곳으로 사우디 전체 주민의 10-15퍼센트를 차지하는 시아파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아파는 1913년 사우디 왕가가 정복전쟁으로 이 지역을 점령하기 훨씬 이전부터 거주해 온 동부 지역 토착민들이다. 그런데 사우디 종교 정책을 주도하는 와하비 성직자들은 시아파를 불신자들로 규정한다. 2012년 7월 8일 시아파 성직자 니므르 니므르가 시위 도중 다리에 총상을 맞고 경찰에 체포된 이후 동부 지역에서의 시위가 격화되었다. 그가 체포되던 날, 시위 도중 보안대가 쏜 총을 맞고 3명의 남성이 사망하였다. 시아 공동체 지도자들은 사망자들의 장례식이 유혈분쟁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주민들과 보안대 양 측에 자제할 것을 호소했다. 현재 니므르 니므르는 고문을 당하면서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 2009년 2월 사우디 정부는 중요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하여 ‘최고 울라마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시아파 대표는 이 위원회에 포함되지 못했다. 또 시아파는 장관, 대사 등 주요 요직에 임명되지 않았으며, 시아파 밀집 지역인 동부 지역 위원회에서도 15명의 위원 중 단 한 명만이 시아파 소속이다. 경찰과 군대에서도 시아파는 거의 배제되고, 공공 부문에서 승진 기회는 거의 없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시아파가 사우디 정부에게 요구하는 개혁 내용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시민으로서 평등권 확보다. ○ 사우디 정부의 개혁 조치와 분파주의 담론은 성공할 것인가? 사우디 정부는 시위 금지법, 경제적 보상, 보안대와 경찰력 강화, 反시아파 담론 등으로 대중 시위를 촉발시키는 동기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시위로 분출되는 시민들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경제, 사회, 보건 및 교육 혜택의 패키지를 실행시키고 있다. 이는 주택, 직업, 보건시설, 복지 서비스 부족에 대한 당면한 불만을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2011년 12월부터 실업 수당 제도를 도입하여 한 달에 533달러씩 1 백 만 명 이상의 실직자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또 공무원들에게는 2개월 치 봉급을 더 지급하고, 고위 군인들을 승진시키며, 수 천 개의 병원 침대 등을 새로 설치한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5년에 걸쳐 50만 채의 주택과 보안대와 군대에서 6만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약속하였다. 군인과 경찰의 막대한 충원과 시위대를 감시하는 보안대에 대한 아낌없는 보수는 사우디 젊은이들을 무장시키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 봉기라는 당면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반시설 건설을 위해서 4천억 달러라는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와하비 종교 지도자들은 석유가 풍부한 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집중적인 시위에 대해서 시아파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경건한 수니 국가에 대항하는 시아파 이란의 음모라고 설명하면서, 통치자를 지지하도록 요구했다. 시아파에 반대하는 와하비 전통은 사우디 내부의 반체제 인사와 외부의 적에게 대항하는 매우 효과적인 정책이다. 시아파 대 수니파의 투쟁이라는 분파주의 담론은 사우디 주민의 다수를 구성하는 수니파 내부의 결속을 다지면서, 시아파의 저항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수니파 대 시아파의 투쟁이라는 널리 퍼진 담론은 현재 진행 중인 시리아 내전 해석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295 | 추천: 0
신하영옥/ 광명시민인권센터장 이곳에 와서 들은, 지역사회 리더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말들이다. 가정폭력 후유증으로 인한 암 투병 중에도 자신의 생계와 가해자 남편의 알코올치료소 병원비까지 벌어야 하는 피해자, 그럼에도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두 발 뻗고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는 여성, 그 여성은 알콜치료보호소에서 잠시 퇴원한 남편에 의해 수술상처부위를 다시 짓밟히고 깨진 병으로 ‘내 손에 죽어라’라는 폭력을 다시 당해야 했다. 다시 알코올치료소로 보내진 남편은 퇴원을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중이라 한다. 남편을 피해 도망갈 처지가 아닌 이 여성은 그저 남편이 치료소에 있기만 바라고 있다. 의처증에 폭력으로 어쩔 수 없이 모아놓은 재산을 남편명의로 돌려주고 나서야 이혼을 통해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난 여성, 그 여성은 몇 년이 지난 지금, 남편이 불납한 증여세를 할증료까지 합쳐 지급하라는 독촉장을 받았다. 그리고 이 여성은 현재 증여세를 납부할 만한 경제적 여건이 안 된다. 새벽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자 대형병원을 찾은 환자, 그는 당장 치료비를 지불하거나, 사후라도 치료비를 보증할 보호자를 내세우지 못하면 응급실 입원은커녕 응급처치도 받을 수 없다는 병원 측의 입장으로 부러진 팔을 들고 여기저기 헤매야 했다. 도시빈민 밀집지역에서 재정지원도 제대로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빈민의 자녀들을 거두어 아동지원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 이들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활동비로 아동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일주일에 수 십 시간의 초과근무를 하지만 그에 합당한 수당을 받지 못하는 국가 및 지방사무 위탁기관의 종사자들도 있다. 혁신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선생님들의 교수방법에 대한 학부모들의 개입은 학교담장을 넘어 교사와 학부모간의 쟁투라는 현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권센터’에 찾아와 해결을 모색한다. 위의 사례들은 이곳에서 ‘인권침해’를 주제로 만난 사람과 사례들이다. 이 사례들은 내용과 성격이 다르지만, ‘인권’이란 관점에서 해결을 위한 도움을 받고자 여길 찾은 사례들이다. 그런데도 인권을 논하고 해결을 위한 실천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부산일보 완성된 인권과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인권침해와 비민주성은 군사독재 시절의 고문과 같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국가폭력과 막걸리반공법처럼 언론을 비롯한 시민적 자유권의 제한에만 국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먹고, 일하고, 자는 것 외의 일체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그 통제에 저항했을 때 발생되는 국가의 물리적 압력과 폭력에서 자유로워진 지금은 바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완성단계로 보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국가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비롯해서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최소화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알코올중독에 폭력가해자 남편을 둔 여성은 자신의 현실을 표현하는 데 서툴다.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있으되 그 자유를 실현하기에 힘들다면 그것은 자유인가? 아닌가? 그녀는 세상을 너무 몰랐다. 알코올중독이라는 말을 1년 전에야 방송에서 알았고, 자신의 현실이 가정폭력이라는 것도 그 후에 알았고, 남편을 알콜치료소로 보내거나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은 최근에 알았다. 이 여성은 남편이 처벌받고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런 표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몰라서 못했던 것인데 이는 말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 기인한다. 아는 만큼 표현하고 요구할 수 있다. 가정이라는 섬에서 고립된 폭력에 시달려왔음에도 그것이 부당한 줄 몰랐던 이 여성에게 표현의 자유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남편과 이혼하고 떠나고 싶어도 이사 갈 비용도 집을 마련할 형편도 안 되는 현실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주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법에 보장한다고 실생활에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보장되지 않기에 더더욱 법과 제도를 힘주어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강제하기 위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지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업무위탁기관의 종사자들과 공공업무의 직접 담당자인 공무원들 간의 처우에 있어서 차이는 왜 발생하는가? 그리고 그런 부당함에도 침묵해야 하는 상황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기보다는 종속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렇듯 조금만 옆을 돌아보아도 우리는 불편함과 비판적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권침해와 불평등에 불편하고 ‘어떤 민주주의를?’ 이라는 비판적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완성되었다는 일부의 인식 속에서, 나는 불편함과 질문이 거세된 삶의 양식을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않는 단선적인 삶의 행보가 느껴진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연일 떠들고 있는, 대통령 선거와 관련한 민생과 복지, 불공평 해소책들이 왜 언급되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음을 생각해본다. 불편이 없고 그로 인한 질문이 없다는 것은 현 체제와 구조로 인한 피해나 차별을 당해보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나아가 체제로부터 이익을 얻거나 옹호하는 입장일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아무래도 이런 이들의 삶의 환경과 내가 만난 피해자들의 삶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서있는 듯하다. 이것도 양극화다. 서울 강남과 강북이 양극화의 지역구조화이듯, 인권과 민주주의의 완성을 말하는 이들과,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이들의 삶은 경제 및 위계의 양극화가 민주주의와 인권담론의 경험과 인식체계로까지 확장된 듯싶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처럼 “뇌 구조 자체가 다른” 것으로 구조화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층적이다. 국가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체제, 사상, 문화, 담론과 개인, 개인과 개인, 자연과 개인의 형태 등 다양한 층위로서 삶에 영향을 미치고 지배하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인권과 민주주의는 이렇게 다양한 층위에서 성찰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단순히 시민적자유권이 보장된다는 문구가 있다고 해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 누구나 ‘00답게’ 혹은 ‘00스럽게’ 살아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에서부터 인권이 시작된다. 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돈이 없어 당장 부러진 팔을 고치지 못한 환자, 제대로 몰라서 그저 당하는 여성, 잘릴까봐 침묵하는 노동자들에게 ‘인간답게’는 희망보다는 도달치 못할 절망의 기제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시도도하기 전에 절망하거나 절망의 구조로 내던져지는 일은 없어야 진정한 선택권이 보장되는 것이 아닐까? 인권의 시작은 선택의 문을 여는 것에서부터 가능하다. 그 선택을 막는 것은 단순한 국가권력뿐만이 아닌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메커니즘, 그것을 적극 수용하는 우리들의 생각과 실천이라는 것을 모두가 아는 것. 그것이 인권의 시작이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로 가는 것이다. 성찰과 통찰의 문화가 절실하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50 | 추천: 0
이광조/ CBS PD 90년대 초반이지 싶다. 제목이 풍기는 야릇한 유혹에 넘어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기대했던(?)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 영화를 통해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라는 발음도 어려운 폴란드 출신의 영화감독을 알게 되었고 곧 그의 팬이 되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주연 배우인 이렌느 야곱의 청순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 영화의 메시지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을 어슴푸레하게나마 실감하면서부터 영화가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구나 남과 북이 분단된 우리의 현실에서는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더욱 강렬했다. 마침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90년대 중반은 북한이 심각한 식량난으로 허덕일 때였다. 한 날 한 시에 남과 북에서 태어난 닮은꼴의 두 여성. 두 명의 베로니카처럼 이름이 같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출생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두 여성이 걷게 될 운명은 얼마나 다를까. 그 즈음에 영화를 다시 한 번 봤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벌써 15년이나 더 지난 얘기다. 감명 깊게 본 영화지만 갑자기 이 영화가 생각난 건 최근 미국과 스웨덴에서 만났던 여성들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미국과 스웨덴 네 나라 직장인들의 급여수준과 근무조건, 생활수준을 비교하는 특집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지난달에 스톡홀름과 뉴욕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지금 내가 얘기하려는 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만나는 대형할인매장의 계산원 얘기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사진 출처 - 씨네21   대형할인매장의 계산원 하면 모두가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는 중년 여성일 것이다. 우리사회에서는 대표적인 저임금 직종이다. 스톡홀름과 뉴욕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도시에서 30대 후반과 40대 중반의 여성을 만났다. 공교롭게도 두 여성 모두 홀로 딸 하나를 키우는 싱글 맘이었다. 하지만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아이폰과 갤럭시폰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의 삶의 조건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우선 스웨덴에서 만난 아냐 씨. 39세인 그녀는 스웨덴의 유명 대형할인매장인 이카에서 일한다. 그녀가 받는 시급은 117 크로나. 원화로 환산하면 1만9천 원 정도다. 그녀는 일주일에 35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1만 7천 크로나, 원화로 2백8십만원 정도를 번다.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수준에 비춰보면 많은 액수지만 스톡홀름의 물가를 생각하면 아주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딸과 함께 생활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교육비가 들지 않고 아파도 의료비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졸업 후 자신의 진로를 결정할 때까지 대학진학은 유보한 채 일을 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계획이다. 그녀에게는 매년 5주의 유급휴가가 주어진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는 지난여름에 태국, 포르투갈, 스코틀랜드, 독일로 여행을 다녀왔다. 뉴욕에서 만난 앤. 그녀는 인터뷰 성사과정부터 아냐 씨와 달랐다. 직장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가 성사됐기에 앤 이라는 이름은 편의적으로 붙였다. 46세인 그녀는 맨하탄의 유명 대형할인매장에서 6년 동안 계산원으로 일했다. 그녀가 받는 시급은 7.25달러. 원화로 1만원 조금 넘는 돈이다. 시급 7.25 달러는 뉴욕 주가 정한 2012년 최저임금이다. 그녀는 하루에 6시간 또는 7시간씩, 주 35 시간 정도 일한다. 하루 8시간 풀타임으로 일하면 직장에서 보험혜택 등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고용주들이 변칙적으로 일을 시키기 때문이다. 근무 시간도 들쑥날쑥 하고 어쩌다 몸이 좀 안 좋아도 눈치가 보여 ‘Sick Day(병가)’를 요청하지 못할 때가 많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은 본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벌이만으로는 생활이 힘들어 추가로 일을 하고 싶지만 불규칙한 근무시간 때문에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노조를 만든다는 건 생각도 못해봤다. 키에슬롭스키는 유럽의 변방인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현실을 베로니카 라는 인물을 통해 투영했지만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베로니카의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다들 느끼고 짐작하는 대로다. 몇 달 전 한 재벌2세 정치인이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국민들을 행복한 돼지로 보는 거냐’ 며 일갈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백번 옳다. 단순히 돈 좀 더 버는 걸로는 부족하다. 일을 하면 큰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어야 하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아플 때 돈 걱정 안하고 치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가난 때문에 자식이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가난을 대물림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게 돼지가 아닌 사람의 복지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32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지난 해 초부터 불기 시작한 중동의 민주화 바람은 튀니지, 이집트, 예멘, 리비아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와 달리 시리아는 1년 넘게 정부의 강력한 유혈진압 속에 국제사회가 개입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이미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나라들은 새로운 민주 정권을 창출하기 위하여 여러 정치 세력들이 치열한 공방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실로 민주화의 길은 험난하고도 멀다. 회의적인 목소리도 적지 않다. 내부사정만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들 국가를 둘러싼 국제 강국들의 움직임도 만만찮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은 행여나 반서구 기치를 내세우는 이슬람 정권이 중동을 장악하여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고, 러시아와 중국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 기회에 서구의 대중동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노심초사하고 있다. 석유 자원이 풍부한 중동을 어떻게 해서든지 장악하려는 욕심이 빚어내는 추악한 풍경이다. 격변의 풍랑을 맞고 있는 중동을 보면서 자유롭게 한 표를 던지는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사실 굳이 중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민의를 왜곡하지 않고 반영하는 투표와 결과를 존중하는 민주 정치제도를 확립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부끄럽지만 우리나라도 이 점에서 온전한 민주국가라고 보기 어렵다. 민주와 진보를 외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만 엄격할 뿐 스스로에게는 너무나도 관대한 통합진보당을 보면서 소위 시쳇말로 “멘붕”이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어찌 굳이 중동의 민주화만 문제 삼을 수 있겠는가. 마침 선배라도 되는 양 중동국가에 민주화 훈수를 두려는 제 자신이 어찌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국가의 민주화 진척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현 중동의 민주화과정이 우리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반성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에 숨 막혔던 사회가 정의와 자유를 찾아 정상적인 삶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그 여정이 고통스러운 지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 리비아의 카다피,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 사진 출처 - 헤럴드경제 대다수의 독재정권이 그러하듯 민주화 시위 물결에 휩쓸려간 중동의 장기집권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이야말로 국가를 선진대국으로 이끄는 적임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러한 확신 하에 그들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총칼로 반대자의 입을 봉하고, 손발을 묶었다. 미행, 체포, 구금, 고문은 일상적인 통치 수단이 되었고, 국가안보와 부패비리척결이라는 구호는 정치적 반대자를 깔끔하게 제거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반대가 없는 사회에서 대안세력이 똬리를 틀 공간은 없었다. 통치자는 곳곳에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을 세워 ‘라인’을 만들고 이익을 취하였다. 그들만의 정부가 굳건히 자리내린 것이다. 강력한 이인자는 위험하기에 그런 싹수를 보이는 이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였다. 이러다보니 그들만의 정부는 통치자를 위한 기쁨조가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 물론 이러한 일은 통치자가 다 계획한 것이나, 문제가 발생하면 아랫것들이 알아서 한 것으로 통치자는 모르는 일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이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다. 통치자의 개가 된 언론이 주인을 물 일이 만무하니 비판여론이 형성될 공간도 없었고, 비판적인 야당세력이 생기기도 어려웠다. 대안세력의 부재와 아울러 분열은 독재문화의 산물이다. 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한 며느리가 나중에 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마따나 독재자 밑에서 자유와 변혁을 꿈꾸던 사람들이 투쟁의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미워하고 욕하던 사람을 닮아 독단적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눈앞에 펼쳐진 민주화의 길을 어깨동무하며 함께 가기 어려운 것이다. 최악의 경우 무정부적 혼란보다는 독재자가 더 낫다며 군사 독재자를 다시 전면으로 불러낼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러한 중동의 혼란상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민주화되었다고 우리도 자랑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힘들게 구축한 자유의 열린 광장을 다시금 우리 손으로 폐쇄할지도 모른다. 말끝마다 민주와 진보를 들먹이면서도 비민주적 구태를 반복하는 민주인사들이 넘치고, 나의 사랑은 로맨스라고 미화하면서도, 남의사랑은 불륜으로 매도하는 이율배반적 태도가 몸에 밴 정치인들이 적지 않은 곳이 우리나라이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국가의 이익을 나눠먹고 시민들 뒷조사나 하는 부패한 정치인은 중동의 전유물이 아니다. 귀에 따갑도록 들은 영포라인, 민간인 사찰은 모두 국산이다. 벤 알리, 무바라크, 까다피, 살레 등 독재시장에서 1위를 두고 다투던 인물들이 중동 민주화 바람에 사라졌다. 지금 그들이 남긴 추악한 배설물 악취로 중동이 들썩인다. 그런데 그 냄새가 우리에게도 난다. 한국이 중동인지, 중동이 한국인지 모르겠다. 시절이 하수상해서 내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헷갈리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갈피를 못 잡겠다. 솔직히 우리가 중동을, 아니면 중동이 우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지 그 여부조차 잘 모르겠다. 중동이 민주화 되겠냐고 비웃지 말자. 한국은 민주화되었냐고 물을까 두렵다. 중동 민주화, 그 험한 길을 보면서 자꾸 낯 뜨겁고 자괴감이 든다.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멋모르고 까부는 우리들이 다시 한 번 더 차분하게 성찰해야한다. 홀로 방안에 고요히 앉아 하루 동안 한 일을 되돌아보아도 부끄러운 것 하나 없는 삶을 추구했던 유학자를 선조로 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혼란의 중동을 보면서 우리를 반성하자. 민주주의에 비추어 부끄러운 것 하나 없는 나라가 되도록 말이다. 국격(國格)은 그렇게 높이는 거다.
2017-07-21 | hrights | 조회: 12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