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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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광조/ CBS PD 기분 좋은 뉴스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요즘 같은 상황에서 ‘나라가 운이 좋다’는 말은 참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욕먹기 딱 좋은 얘기다. 하지만 나는 요즘 우리나라가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나라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비꼬는 게 아니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요즘 시중에서 유행어가 된 이른바 ‘4자방 비리’에 관한 것이다. 4대강 사업, 자원외교, 방위산업 비리. 22조 원이 투입된 4대강 사업은 보수 ㆍ 유지비용으로 해마다 7천억 원대가 넘는 세금이 투입되고 있다고 한다. 4대강 사업으로 해마다 녹조가 생겨나고 수질오염이 악화되고 있는 것도 분통이 터질 노릇인데, 앞으로 돈이 얼마나 더 들어갈지 모른단다. 자원외교와 관련해서는 ‘VIP 자원외교’에만 양해각서 45건에 1조 4천억 원이 넘는 돈이 투자됐는데,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계약서 서명, 수정에 대한 대가로 상대방에게 수천억 원을 건넸다고 한다. 자원외교에 동원된 공기업들의 부채가 늘어나면서 부채에 딸린 이자 비용만 한 해에 1조 5천억 원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해외자원개발 전체를 보면 대통령이 직접 챙기거나 인척과 측근들이 자원외교 특사로 나서서 41조 원을 투자했고 이중 5조 원만을 회수하고 나머지는 사라졌다고 한다. 방위산업 비리는 또 어떤가? 1만 원짜리 USB를 95만 원에 사들인 건 애교에 가깝다.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구조함이 제 역할을 못한 데 대한 뼈저린 반성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건조한 통영함이 거대한 부실덩어리로 밝혀졌다. 2억 원짜리 음파탐지기를 41억 원에 구매했단다. 그나마 고기잡이용 어군탐지기라 군함에서는 못쓴단다. 중고 엔진과 불량 부품이 사용된 해군고속단정은 훈련 중 수시로 불이 나 장병들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뜨렸다고 한다. 굵직한 것 몇 가지만 꼽더라도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비리의 사슬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지 짐작이 간다. 이른바 ‘4자방’ 비리로 인해 낭비된 세금이 100조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이 정치공세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이렇게 거대한 부정부패가 저질러지고 그 속에서 천문학적인 세금이 낭비됐지만, 아직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고 그런 대로 굴러가고 있다. 기적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거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국민안전처가 공룡부처로 출범했다는 뉴스를 보면 정부가 어디에 화수분이라도 숨겨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대한민국의 기가 막힌 운을 보여주는 사례는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어쩌면 앞서 얘기한 사례들보다 훨씬 더 운이 좋은 경우다. 그건 바로 캐도 캐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원전비리와 부실한 관리 문제다. 우선 최근에 밝혀진 몇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자. 지난 10월 국감자료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현재 가동 중인 23기의 원전과 건설 중인 5기의 원전에서 사용하는 부품 중 시험성적서와 기기검증서가 위조됐거나 진위 여부를 판명할 수 없는 부품이 모두 3,812건이나 됐다고 한다. 불량부품이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여기에 협력업체 직원들이 한수원 직원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해 방사성폐기물을 직접 반출하는 일이 관행처럼 이뤄졌는가 하면, 사용 후 핵연료 저장 시설에 발생한 화재를 화재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1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발견해 진화한 아찔한 사건도 있었다.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원전비리로 인한 피해액만 2조 원 정도로 추정된다는데, 그 2조 원으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는 위험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방사능이 대규모로 유출되는 대형 사고는 없었다. 이 얼마나 운이 좋은 경우인가. 이 끝내주는 운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좋으련만 우리의 경험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걸 일깨운다. 철근을 빼먹은 아파트와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두 동강이 난 믿기지 않는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지 않았는가. 설계수명이 다한 노후 원전의 수명을 연장해 계속 가동하겠다는 배짱에 겁이 덜컥 난다. 수십조를 퍼부어 아름다운 강들을 망가뜨린 4대강 사업, 제대로 된 타당성 조사도 없이 수십조를 날려버린 자원외교, 제대로 작동하는 무기가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의 방위산업 비리, 여기에 원전비리까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 억세게 좋은 운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2017-08-07 | hrights | 조회: 358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과 IS의 주장 2014년 10월 13일(월)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이스탄불대학 연설에서 “역내의 모든 갈등은 100년 전(제1차 세계대전)에 이미 기획되었다. 이 갈등을 종식시키는 것이 나의 의무다. 서구인들은 자유언론, 독립전쟁, 지하드 뒤에 숨어서 사이크스-피코(1916) 협정을 다시 만들고 있다. 현재 터키에서 활동하는 변장한 21세기의 아라비아 로렌스(T.E. 로렌스)들이 있다. 그들은 저널리스트, 종교인, 저술가, 테러리스트들이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에르도안의 주장은 IS(이슬람국가, 2014.06.29-현재)의 주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IS는 2014년 6월 29일 ‘칼리파 국가’를 선언하면서,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종식, The End of Sykes-Picot’을 창설목표로 내세웠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저널리스트들을 참수하였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란?: 국가 정체성 위기와 재설정되는 국경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란 제1차 세계대전과정에서 오스만제국 영역을 해체하여 영국 통치영역과 프랑스 통치영역으로 나누어 분할통치 하기 위한 안이었다. 1916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다음 지도에서 보듯이 오스만제국이 통치하던 레반트와 아라비아반도 일부지역을 영국 통치영역과 프랑스 통치영역으로 분할하면서, 팔레스타인지역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공동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림 출처 - http://www.passia.org/ 1920년 국제연맹은 이 지역에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거의 일치하는 영국과 프랑스 위임통치를 부과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 위임통치가 종결되었고, 독립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이 독립국가를 통치하는 자들은 대부분 영국과 프랑스 위임통치 당국과 동맹을 맺고 협력하던 세력들이었다. 독립 국가를 건설한 세력들 중 획정된 경계 안에서 새로 건설된 중동국가들은 새로운 통치방식을 채택하고 독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유럽열강들이 정한 한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유럽열강들은 중동국가 간 경계를 획정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서로 경쟁관계이긴 했지만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중동 역내 문제에 깊이 개입해왔다. 그런데 2011년 아랍 봉기 이후 내전과 쿠데타 등을 거치면서 IS와 같은 초국가적인 단체가 등장하고, 이슬람 세력들이 국경을 넘어 활동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 간의 경계뿐만 아니라, 각 국가 내부에서도 종파, 지역, 사회 집단 간의 경계들이 새롭게 형성되면서 기존의 국가 정체성이 위기 상황에 직면하였다. □ 오늘날 아라비아 로렌스는 누구인가?: ‘칼리파 국가’ 약속, 결과는 모자이크 공국 영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영국과 프랑스 통치)’과 충돌하는 ‘아랍인이 통치하는 칼리파 국가 건설’을 하심가의 후세인에게 이미 제안하였다. 1915년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이 오스만제국의 지방정부로서 메카와 메디나를 통치하던 하심가(아랍인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알려짐)의 후세인에게 ‘영국정부는 아랍인들이 칼리파직을 수행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맥마흔은 후세인에게 다음 지도에서 보이는 지역을 ‘아랍인이 통치하는 칼리파국가 영역’으로 후세인에게 약속하였다. 그림 출처 - http://www.passia.org/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현장에서 직접 하심가를 이끌어 오스만제국(투르크인 칼리파)에 대항하는 아랍인들의 전쟁(아랍반란)을 주도한 로렌스 대령은 1916년 1월 정보용 메모에서 다음과 같은 계획을 밝혔다. 아랍반란은 우리(영국)의 당면 목표와 부합하고 이슬람 블록의 붕괴와 오스만제국의 패배와 붕괴로 이끌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익이다. 오스만제국을 여러 아랍 국가들로 분할하는 것은 우리에게 해롭지 않다. 아랍인들은 투르크인들보다 훨씬 덜 안정적이다. 적당히 다루어진다면, 그들은 정치적인 분열 상태, 결집할 수 없는 서로 분쟁하는 매우 작은 모자이크 공국들의 집합체로 남을 것이다. 전쟁 결과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한 약속 ‘아랍인이 통치하는 칼리파 국가 건설안’은 사라지고, 로렌스의 메모 내용대로 ‘작은 모자이크 공국들의 집합체’가 실현되었다. 맥마흔이 하심가의 후세인에게 약속했던 칼리파국가 영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와 간접통치를 거친 이후, 이스라엘,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예멘, 카타르, 바레인, UAE, 오만으로 분할되었다. 맥마흔의 ‘칼리파국가 건설’ 약속을 믿은 하심가는 로렌스가 이끄는 오스만제국 해체 작전에 열정적으로 참가했으나, 결국 후세인의 하심가는 영국 통치 아래 하위협력 토후로서 요르단과 이라크 통치자로 만족해야만 했다. 영국은 오스만제국을 해체시키기 위해서 하심가를 활용하기 위한 유용한 명분으로 ‘칼리파국가 창설’을 제안하고, 아랍반란을 주도하였고, 오스만제국 영역을 여러 국가들로 분할 해체시킴으로써 결국 그 목표를 성취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아라비아 로렌스는 누구이며, 그의 협력자는 누구인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886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4대강 공사의 담합이 또 적발됐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09~2010년 사이 수자원공사가 발주한 4대강 2차 턴키공사의 6개 공구 중에서 낙동강 17공구, 금강 1공구, 한강 17공구 등 3개 입찰에서 7개 건설사들이 사전에 투찰가격과 들러리 참여 등을 담합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이 건설사들에 모두 152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4대강 공사의 담합 적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지난 2012년 6월에 공정거래위원회는 4대강 1차 턴키공사 입찰담합 조사 결과에서, 상위 6개 건설사가 담합을 주도했으며 19개 건설업자가 공동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 때에도 공정위는 마찬가지로 이들 건설사에 모두 1천115억 원의 과징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그런데, 담합사실 자체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 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묵인 내지는 조장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데 있다. 즉, 1차 담합 적발로 인해 과징금을 부과 받은 삼성물산은 정부를 상대로 그 취소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이 재판과정에서 “(정부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내에 4대강 공사를 마칠 수 있도록 다수 공구를 동시 발주하면서 건설사들이 공동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거나 묵인했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후에 삼성물산은 이러한 주장은 자신들이 직접 한 것이 아니며, 소송을 대리한 법무법인 측에서 정부자료를 인용하여 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또 다른 건설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사실 4대강 사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부의 묵인과 방조가 아니라 강요에 의해 참여한 측면이 있다. 실제로 이익을 내지도 못했다”면서, “공정거래위원회가 과징금까지 때렸으니 속이 터질 것 같다”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SBS 사실 4대강 공사에서 건설사들의 담합, 그리고 정부의 묵인의혹은 이미 공사초기에서부터 의심이 제기된 대목이다. 즉, 사업이 시작될 무렵인 2009년 11월 당시 민주통합당은 4대강 사업 구간 중 낙동강 공구에 참여한 중소기업의 20%가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동지상고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또 정호열 당시 공정거래위원장도 공개적으로 4대강 사업 턴키공사의 담합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그런데 이와 같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입장은 불과 1달여 이후 업체들의 자진신고나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조사에 진척이 없다는 것으로 바뀌고 만다). 이러한 정부의 방조는 결국 후에 사실로 밝혀지는데, 감사원이 2013년 4대강 사업 담합 의혹과 입찰 부조리를 집중 점검한 이후 “건설사들의 호텔 회동 등 담합 정황이 포착됐는데도 국토부는 별다른 제재 없이 2011년 말까지 준공하기 위해 사업비 4조 1,000억 원 규모의 1차 턴키공사를 한꺼번에 발주해 담합을 사실상 방조했다”고 밝히기에 이른 것이다. 이쯤 되면 4대강 담합은 사기업체들의 비리 수준을 넘어 국가범죄의 차원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미 이번에 적발된 담합으로 인한 국가 예산의 손실규모가 1,400억 원에 달한다는 분석이 나왔거니와, (이를 과징금과 비교할 때, 그 제재액이 지나치게 낮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공정위는 이에 대해 과징금 액수는 건설사들의 경영난(!)을 고려한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예산낭비가 어디 이뿐인가. 잘 알려진 대로, 4대강 사업의 총사업비는 22조 2,269억 원이다. 또 공사 이후의 유지관리비는 정부 추산 매년 2,500억 원이다. 사업의 일부를 담당했던 수자원공사는 여기에 투자한 8조 원 때문에 4년 동안 이자 비용만 6천 7백억 원을 물어야 한다. 정부는 이 가운데 지난 2010년부터 2011년까지 3천 250억 원을, 2012년에는 3천 558억 원의 빚을 대신 부담해 주었다. 이런 막대한 예산투여에도 불구하고, 생태계 혼란을 비롯한 엄청난 환경침해와 수질악화, 홍수피해 등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2천억 원을 들여 모든 보를 해체하고 4대강을 공사 이전으로 되돌리는 편이 낫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최근 정부는 지자체 예산의 부담을 이유로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무상급식의 축소를 옹호한 바 있다. 불요불급한 예산의 쓰임새가 어디 이뿐일까. 노인복지, 비정규직 지원 등 긴급하고 절실한 사회적 필요는 도처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한 푼의 예산이라도 아껴서 꼭 필요한 곳에 지원해야 한다는 원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22조원 이상이 들어간 4대강 사업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지난 정부의 일이었다고, 정책 판단에 착오가 있었다고 어물쩍 넘어가도 되는 일인가. 이제라도 이명박 전 대통령을 포함한 예산 낭비의 책임자들을 국정조사의 증언대에, 아니 법정에 세워야 한다. 그 진실을 밝혀야 하고, 책임을 지워야 한다. 이것은 정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46 | 추천: 0
정지영/ 서울DPI 회장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되어 그 후로 휠체어를 사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되기 전 비장애인이었던 학창 시절에 유독 달리기에 재능이 없어 운동회라는 것에 별로 좋은 기억은 없습니다. 가을운동회. 축제. 그런 단어는 저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달리기대회에서 일등부터 삼등까지 찍어주던 도장 때문입니다. 달리기에서는 늘 꼴등이었던 저는 운동회하면 꼴등에게는 찍어주지 않는 도장만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은 팔뚝이 부끄러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긴팔을 입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깟 달리기 하나로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구나,라고 생각하실 수 도 있겠지만 달리기를 잘하지 못하는 것 하나로 운동회 전체에 대한 기억이 나빠진 것은, 아마도 개인에게 찍어주던 ‘도장’으로 상징되는 분리와 낙인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장을 받은 아이와 못 받은 아이 사이에서 저는 항상 도장을 못 받은 아이였지만, 비장애인었던 저는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일등이 될 수 있는 기회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한 초등학교에서 늘 꼴등만 하는 친구를 위해 학생들이 손을 잡고 똑같이 결승선에 들어와 모두가 일등이었다는 기사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접하고 제 마음만큼은 훈훈해지지 않았습니다. 달리기를 못하던 삐쩍 마르고, 힘없는 아이였던 저의 초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 그 입장이 되어봤습니다.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고마웠겠지만, 누구의 양보와 배려 없이는 행복할 수 없는 인생을 예감하며 슬펐을지도 모릅니다. 장애인부모가 아이를 가질 때, 내 아이가 장애아이면 어떻게 될까라는 두려움이 더 큽니다. 양수검사에서 장애아일 확률이 높을 경우에 낙태를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장애인도 많습니다. 장애인으로 살아왔던 인생에서 차별받고, 소외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몇 십 배의 노력이 필요했던 경험을 자식이 똑같이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일 것입니다. 사진 출처 - 미디어스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장애인이어도 괜찮아. 내가 너를 이해해줄게.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장애인이어도 괜찮아’라는 말이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면 긍정적으로 세상을 개척할 수 있다’라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회에서 장애는 긍정적이지 않은데 ‘장애는 개성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다’라는 주장은 사회의 불평등을 편견 없는 태도로만 해결하겠다는 위선일 뿐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할 몫을 했습니다. 장애를 가진 친구의 상황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일등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기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약자를 배려하고 그 마음을 몸소 보여준 아이들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이제는 어른들의 몫이 남아있습니다. 어른들은 왜 운동회를 모두가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남기지 못하게 하는지. 어른들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종목을 만들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1등만을 기억하는 사회의 룰을, 1등이 아니어도 행복할 권리를 사회의 룰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의 선함이 어른이 되어서는 ‘약자에 대한 우월한 태도’에서 나오는 ‘시혜’로 만들고, 배려심을 동정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기 때문이고, 인권은 가진 자가 조금 양보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25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활동가 기억이 뇌의 어딘가 저장되어 필요할 때 끄집어 쓸 수 있다는 것이 의학적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기억이 뇌라는 저장매체에 응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왜 같은 경험을 한 집단에서도 어떤 이는 사건의 이러한 면을, 다른 어떤 이는 사건의 또 다른 면을 기억하게 되는 걸까? 아마도 이것은 사건이나 경험이 각각의 사람이 처해있는 특수한 맥락과 상황 속에서 다르게 해석되어지거나,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 재구성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이렇게 기억이 구성 내지 재구성되어지는 것이라면, 집단으로서의 기억은 그 자체로 권력쟁투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이 불리한 집단은 그 기억을 통째로 지우거나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각색하려 할 것이다. 반대로 그 기억이 진실로 인정받고 역사 속에 존속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집단은 그 기억을 보존하고 나아가 각인되길 바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간은 자신(들)의 입장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기억을 둘러싼 보존이냐 물타기냐를 두고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역사를 둘러싼 해석 및 재해석은 이러한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 역시 마찬가지이고, 박정희 시절에 대한 평가와 해석도 결국 경험 그대로의 날 것이 아니라 해석과 분석이 덧칠해진 과거의 기억에 대한 투쟁으로 볼 수 있다. 현재에 와서는 대표적으로 세월호 사건이 있다. ‘대형교통사고...’, ‘항공사고와의 비교발언’, ‘보상금정치’, ‘이제는 다시 생활로 돌아갈 때...’라는 세월호사건을 둘러싼 담론들은 대표적으로 ‘세월호’의 기억을 지우려고 시도하거나 각색을 통해 물을 흐리고 싶은 대표적인 현상들이다. 그래서 ‘집합적 기억’을 둘러싼 투쟁은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고, 진실을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다. 기억이란 오감을 통한 경험에서 출발해서 감정을 거쳐 이성의 단계라는 과정을 통해 걸러지고 정화되어 미래에 대한 대안이 되기도 하지만, 감정이나 오감의 단계에 머물러 버리기도 한다. 미래의 대안으로서의 기억은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삶의 힘과 활력, 성찰의 토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 혹은 나아가 오감의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기억은 가볍게 잊혀 지거나, 증폭된 감정으로 잔류할 수 있다. 그것이 희극이 아니라 비극일 경우 증폭의 폭은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고 이는 희망이거나 대안이거나 성찰이기보다 슬픔 그 자체, 상처로 남게 된다. 상처 입은 개인의 삶이 개인과 그를 둘러싼 이들까지 왜곡되게 만드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상처가 분노로, 분노가 폭력으로 돌연변이 하는 것도 보게 된다. 현재 발생된 군대폭력은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억압당한 며느리 시절을 보낸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그 억압을 고스란히 물려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처는 제대로 치료되기 전에 봉합되면 안 된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감정을 충분히 나누고 공감하라는 말일 것이다. 누구와? 이웃과, 공동체와 나아가 사회와. 개인의 경험도 이렇듯 주변과의 충분한 공감과 교감을 통해 확장할 것은 확장하고 축소할 것은 축소하라는 지혜가 있는데, 하물며 집단적 경험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지금 어떠한가?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대형 안전사고는 어느 순간엔가 ‘피해자 책임론’으로 화살이 되어 날아오고 있다. 책임의 주체를 확장해도, 우리의 안전을 책임지라 지불한 세금으로 존재하는 집단인 정부, 그를 감시할 국회나 지방의회 등에 대한 책임은 직접적이 아니라고 비껴내고 있다. 그리하여 대통령이하 여당대표 앞에서 바닥에 무릎 꿇은 피해자 가족의 호소-이미 벌어진 일을 책임지라는 것도 아니고 향후 발생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달라는-를 버젓이 자가용 안에 앉아서 일별하고 외면해버리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법과 질서는 진실과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건만, 진실과 사실을 호도하고 덮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 기억을 진단하고 미래를 처방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이제 기억을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로 넘어온 듯하다. 그것은 개인의 상처와 경험으로부터 이 집단적 상처에 공감하고 이를 나누고 진단함으로써 처방전을 내오고자 하는 권력이 없는 개인들, 시민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 또한 기억의 왜곡과 삭제를 주장하는 편으로 기울고 있다. 어쩌면 당연하다. 권력은 많은 자원들을 보유하고 또한 이를 기억과의 투쟁에 동원함으로써 막대한 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우리는 맞설 수 있을 것인가? 기억을 재생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 기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집단적 의례나 제도, 상징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의 모든 프로필을 노란리본으로 다시 바꾼다. 상징으로서. 그리고 인천의 모 여성단체는 개인의 이름으로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노란리본 현수막을 거리에 달았다. 상징이자 집단적인 의례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잊지 않는 모임’을 지인들과 만들었다고 한다. 모임과정이 의례의 과정이 된다. 집회에 가면 우리는 그 집회의 성격에 맞는 역사적 사실과 그 역사적 사실을 살아간 분들을 위해 묵념의 시간을 갖는다. 이 역시도 기억을 위한 의례의 과정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아픈 과거는 되도록 잊어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자, 지나간 것은 버리고 새것을 탐닉하는 것이 미덕이 된 시대에 “잊지 않기!”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잊어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국가가 지정해줘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그 개인들의 집단의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는 나의 기억마저 조종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 기억을 기억하게 하라!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과제이자 투쟁의 방향이기도 하다. 각자 선 자리에서 기억을 위해 투쟁할 방안을 마련하고, 기억이 왜곡되지 않도록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활동을 통해 자신을 정립, 재정립해가는 존재이다. 생각도 활동이고 그 생각을 실천하는 것도 활동이라고 한다면, 슬픔과 분노와 비난을 넘어 기억할 동지들을 확장할 방안부터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2017-08-07 | hrights | 조회: 368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무슬림 무장 단체인 소위 자칭 ‘이슬람국가’가 자신들이 이교도라고 정의내린 타종교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이슬람법, 즉 샤리아에 부합한 바른 행동이라고 정당화하고 있다. 공식 온라인 잡지 ‘다비끄(Dabiq)’ 4호에서 이들은 ‘그 시간이 오기 전 노예제의 부활’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이교도인 야지디인을 노예로 간주하여 매매하였고, 여성은 첩으로 삼아 전사들에게 분배했다고 밝혔다. 영국의 인권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에 따르면 ‘이슬람국가’ 전사들이 인신매매한 야지디인 여성이 무려 300명에 육박한다. 이가 갈리고 피가 솟구치는 천인공노할 범죄다. 지난 9월 19일 전 세계 무슬림 지도층 지식인 126인은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전통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이슬람국가’의 행위가 왜 이슬람적이 아닌지 구구절절 날카롭게 지적하며 ‘이슬람국가’ 괴수 알-바그다디에게 A4용지로 무려 15장에 이르는 장문의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무슬림 지식인들은 자격을 갖춘 법학자가 법해석을 하여 판결문을 내놓아야하고, 꾸란과 예언자의 전승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꾸란을 해석해서는 안 되며, 무장전사들이 죽이고 노예로 삼은 야지디인은 이교도가 아니라고 밝혔다. 또 노예제는 모두의 동의하에 폐지된 것으로 재도입을 금지하는 것이 전 세계 무슬림들의 합의사항임을 강조하였다. 한마디로 자칭 ‘이슬람국가’ 무장전사들은 진정한 무슬림이 아니라 이슬람을 빙자해서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과격분자로, 이슬람도, 국가도 아닌 ‘이슬람국가’의 살인마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비무슬림인 내가 굳이 ‘이슬람국가’가 왜 비정상적인 종교 집단임을 구구절절 밝힐 필요조차 없이 공개서한은 조목조목 이들의 야만성, 비인간성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금수와 같은 이들은 꾸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역사적 문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 해석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컨텍스트(context)는 완전히 도외시하고 숭배하듯 텍스트(text)만 떠받드니 인간이 할 수 없는 만행을 저리도 쉽게 저지르는 것이다. 불가의 지혜를 빌자면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느라 정신을 놓은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경전에 적힌 말씀이 발화된 상황을 일체 고려하지 않은 채, 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기록된 말씀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왔다면 아마도 오늘날 인류는 멸종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성서, 특히 구약성서라고 부르는 히브리성서만 보더라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는 구절이 얼마나 많은가! 야훼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그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와 그의 온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부쳤다.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 왕 시혼을 해치웠듯이 그도 해치워라.” (신명기 3:3)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넘겨주는 민족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을 가엾게 보지 말고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마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가미가 되리라. (신명기 7:16) 지금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누구도 위에 인용한 성서 말씀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듬어 온 역사해석의 힘이다. 우리는 이를 두고 계몽된 신앙이라고 부른다. 잔인의 극치를 달리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면 오늘날 유럽인이 과연 제대로 남아있을까? 마찬가지로 꾸란에도 역시 불신자에 대한 공격을 승인하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꾸란을 제대로 읽는 사람들은 말씀의 역사적 문맥을 제대로 짚어 해석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무슬림 문화권에 이슬람 외에도 다른 신앙인들이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이 나온 문맥을 이해하는 힘이 왜 중요한지, 손가락보다 달이 왜 중요한지, 무슬림 지식인들이 자의적인 꾸란 해석을 하지 말라고 ‘이슬람국가’ 전사들에게 왜 가르쳤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계몽된 신앙! 미치광이 ‘이슬람국가’ 전사들의 믿음과는 달리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은 종교간 대화를 가르친다. “사람들이여, 너희를 남자와 여자, 민족과 부족으로 만들었나니, 서로 서로를 알도록 하라.”(49:13) 서로가 서로를 알려면 대화와 친교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 나와 신앙이 다른 이교도라고 무조건 죽이고 보는 극단주의자의 잔악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꾸란은 신이 사람들 모두에게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가르쳐주었다고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파-스타비꿀 카이라트! (5:48 바른 일을 하도록 서로서로 노력하라!) 전 세계 깨어 있는 무슬림들이 이슬람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라고 한 자칭 ‘이슬람국가’ 살인마들이여, 보편적 인권의 이름으로, 진정한 무슬림들이 보여주는 관용의 이름으로, 다채로운 삶과 선행에 대해 가르치는 꾸란 구절을 들려주니 총을 들기 전에 곱씹어보라. 신이 주신 징표 중 하나는 천지창조와 다양한 언어와 색. 보라, 그 속에 배운 이들을 위한 가르침이 담겨 있으니. (30:22) 파-스타비꿀 카이라트! (5:48 바른 일을 하도록 서로서로 노력하라!)
2017-08-07 | hrights | 조회: 409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하지 말란 말이야!” “저리 가!” “저리 치워!” 딸아이의 목소리가 한껏 고조된다. 근래 부쩍 엄마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는 일이 많아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두어 달 전부터 그런 것 같다. 얘가 어린이집에서 소리 지르는 것만 배워왔나. 일부러 목소리가 갈라질 때까지 악을 쓰면서 소리를 지른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린이집에서 배워온 것보다는 엄마에게 들은 소리를 다시 되돌려주고 있는 것 같다. 엄마가 자신에게 화내고 혼낼 때, 억울하고 무서웠던 감정을 고스란히 내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시간. 밤에 같이 누워서 잠들 때까지 아이를 토닥거리며 포근한 엄마 노릇을 해낼 수 있는 최대의 시간. 1시간을 넘기면 토닥거리느라 아픈 손목과 옆으로 어정쩡하게 누워 있는 불편한 자세에 속이 부글거리고 화가 난다. 아이는 잠이 잘 들지 않는지 계속 딴소리다. “엄마, 배 아파.” “엄마, 물마시고 싶어.” “엄마, 여기가 간지러워” 등등. 이럴 때 나는 “네가 자지 않으니까 엄마가 너무 힘들다”고 애를 협박하면서 네가 잘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아이가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아이는 집에서 돌봐주시는 할머니와 식사를 할 때는 무난히 밥을 먹는다. 휴일이 돼 엄마와 같이 밥을 먹을 때는 몇 배는 더 엄마를 힘들게 한다. 잘 먹지도 않고 (내가 볼 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밥상머리를 정신없이 만든다. 물론 할머니가 엄마보다 몇 배 아이를 잘 구슬리기도 한다. 돼지꼬리만큼 짧은 나의 인내심은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한두 번 구슬려도 밥을 먹지 않으면 즉시 불같이 화를 내버린다. 밥을 먹지 않을 거면 굶으라며 거칠게 식판을 치우면서 소리를 질러댄다. 나는 왜 아이가 징징거리면서 터무니없는 생떼를 쓰거나 요구를 하면 화가 나는 것인가. 아이는 바빠서 자신과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한 엄마에게 어리광을 피우고 있다고 짐작된다(40개월쯤 되는 아이들이 보이는 평범한 행동일 수도 있지만). 그럼 난 왜 이렇게 아이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못하는 걸까. 외동인 아이가 어리광쟁이가 되지 않도록 엄하게 키우려고 하다 보니 그렇다기엔 아이를 너무 받아주지도 견디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엄마가 어린 나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남 5녀 중 막내인 내가 기억하는 어릴 때의 엄마는 ‘엄격한 엄마’이다. 어리광을 받아줘야 할 때는 마음껏 품어줘야 엄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충족감을 가질 텐데, 내가 정한 시간과 규칙대로 애가 따라오지 않는다고 다그치기만 하니 아이의 욕구불만은 커지고 스트레스는 더 심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맘&앙팡 안다고 행동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작년 봄 재취업을 하면서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건 단지 직장에 나가서 아이와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의 화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고 주변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를 맘대로 제압하려는 나를 봤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계속 참는 것일까. 마치 금연이 담배를 끊는 게 아니라 피는 것을 계속 참는 것이라는 말처럼. 분명 무언가 깨달아서 행동을 바꿨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어떤 교육적인 학습 내용을 주입한 것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막상 작년보다 아이가 말을 잘하게 되고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다고 판단한 순간, 이제는 엄마의 요구를 당연히 이해하고 따를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아이를 제대로 모르니까 터무니없는 기대를 한 것이고, 엄마에겐 더없이 달콤한 기대는 수행하기 어려운 학습효과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다. 늦게 아이를 낳은 데다 맞벌이를 하면서 떨어진 체력이 바닥 근처에서 올라오질 않으니 인간적으로 자제력을 발휘하기 싶지 않다. 최근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보낸 면담설문지에 이런 질문이 있었다. “자녀의 바람직한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나름대로 답을 달아서 제출하긴 했다. 내 아이가 이런저런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솔직히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의 양육을 그렇게까지 목적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 아이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꼭 말하고 싶다. 엄마도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아. 네가 성장하면서 생기는 변화들을 너도 엄마도 겪어나가면서 알게 되면, 좀 더 나은 관계가 되지 않겠니. 안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니라 해도.
2017-08-07 | hrights | 조회: 386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철학을 향한 변 철학을 업으로 삼다보면 인생 전체를 싸잡아 크게 묻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왜 이런 걸 묻게 되는 것일까? 물음을 던지는 사람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고, 인간으로서의 삶 즉 인생을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 인생을 가능하면 의미 있게 살아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때면, 질문을 받은 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지어 강박이라 할 수도 있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불특정한 누군가가 던진 물음에 대해 대답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특정한 익명의 사람들이 나의 두뇌를 붙들고서 한 시도 놓아주지 않는다. 이때 나 역시 여기 이 불특정한 익명의 사람들 속으로 녹아들어가 한통속이 된다. 그런데도 ‘조광제’라는 고유명사의 명패를 내려놓지 못한다. 다들 그러할 것이다. 익명과 기명의 결합과 교환, 어디에서부터 그 경계를 그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네트워크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런 가운데 그 네트워크를 재형성한다. 방금 쓴 글에서처럼 철학은 추상적인 대규모의 사유를 예사로 자행한다. ‘익명과 기명의 결합과 교환의 네트워크’라는 말은 이른 새벽 일일 노동시장에 나가 과연 가능할지조차 함부로 기약할 수 없는 하루벌이 일을 얻기 위해 단칸방 월세의 집 문을 나서는 어느 가장의 무거운 발걸음과 애타는 심경에 비하면 얼마나 추상적이며 또 얼마나 큰 이야기인가. 이렇듯 관념의 허기진 구조물 속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기를 서슴지 않는 철학자의 심경 역시 그 성격은 다르지만 한껏 시리다. 그러나 현실을 관념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풍토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관념에서부터 현실에 대한 방향이 나오고, 현실에 대한 방향에서부터 현실을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 나오고, 그 방법에서부터 힘을 끌어 모아 현실을 바꾸어낼 수 있는 실천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관념 속에 파묻혀 살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관념은 현실의 수단일 뿐이다. 설사 관념이 현실을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가 된다고 할지라도, 관념 그 자체는 파생적인 현실에 불과하다. 문제는 의식되지 않고 성찰되지 않는 관념이 삶의 현실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때 관념은 욕망과 뒤범벅이 된 이른바 은폐된 관념이다. 성찰되어 의식된 관념을 함부로 무시하는 자는 이런 은폐된 관념에 휘둘리고 있기 십상이다. 은폐된 관념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철학은 은폐된 관념들을 끄집어내어 함께 성찰해서 그 좋고 나쁨을 가려내고 나쁜 은폐된 관념은 버리고 좋은 은폐된 관념을 부추겨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한 또 하나의 관념이다. 근원에 있어서 욕망은 감정을 이끌고 사유를 낳으며 의지를 일으켜 행동으로 이어진다. 현실은 다름 아니라 행동의 연속이요 복합이다. 이에 철학이 현실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변혁하는 데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은폐된 공동의 관념, 약속 글을 읽다보면, 특히 목숨을 걸고서 자신의 사상을 피력해마지 않는 인물의 글을 읽다보면 크게 배우게 된다. 히틀러의 파시즘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이른바 공산독재에 대해 비판적 사유의 날을 세웠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발터 벤야민 전집 5』,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를 읽다가 크게 깨닫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는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위 책, 331-2쪽, 강조는 인용자가.) “은밀한 약속”, 이 말에 눈이 번쩍 뜨이면서 크게 고무된다. 순간적으로 추상적이지만 결코 스쳐 지나가서는 안 되는 긴요한 인간관계의 원리를 포착하게 된다. 과거 사람들과 우리 세대 사이에만 은밀한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 서로 은밀한 약속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모든 일들은 약속으로 점철되어 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만남 자체가 곧 약속이다. 그 눈빛과 표정에, 설사 흘깃 쳐다보고 지날 뿐인 행인들 서로간의 눈빛과 표정에도 이미 늘 약속이 서려 있다. 함부로 얕잡아 보거나 노려보아서는 안 된다는 약속, 서로의 불행에 대해 안타까운 나머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약속, 누가 어떻게 약속을 어기는지에 대해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는 약속, 자칫 약속을 어길 경우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는 약속, 누구나 단 한 번 살다가 죽어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운명적인 인생을 사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약속, 어쩌다 욕망과 행동이 서로 대립되면 상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약속, 그렇듯 모든 삶의 여정이 이미 늘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이행하고 약속을 이행하는 것 자체가 생의 의미와 가치가 된다는 것이다. “은밀한 약속”, 그것은 인간이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약속의 얼개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일컫는다. 인간의 욕망과 행동 자체에 이미 늘 은폐된 관념인 약속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약속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아무도 약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은 더욱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서 우리의 생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설혹 어쩌다가 하나의 약속을 어긴다 할지라도 그렇게 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은 더 크고 중요한 다른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저쪽에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경우에건 근본적으로 약속을 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어느 쪽이 폭 좁은 아둔한 약속을 믿고서 행동하는가를 놓고서 모든 대립과 분쟁이 일어난다. 배타적인 약속은 약속이 아니다.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약속을 하는 척 해 놓고서 상대방이 그 약속을 믿고서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그를 통해 그저 나 혼자만 이득을 보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 사기다. 모든 대립과 분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배타적인 사기에 의한 대립과 분쟁이야말로 잘못된 것이다. 자신은 제대로 약속을 한다고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사기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은 제대로 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립과 분쟁에 목숨을 걸기까지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사기에 연루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욕망과 행동에 은폐된 관념으로서 작동하는 약속을 끊임없이 가능한 한 더 큰 공공의 장을 바탕으로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말은 약속이다. 은폐된 관념이었던 약속은 말을 통해 공공의 장에 명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공공의 장을 책임지는 자는 그만큼 약속의 규범에 엄격해야 한다. 한 나라의 통치를 책임진 자는 그 나라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약속들에 민감해야 한다. 약속은 곧 생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임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생의 의미와 가치를 향한 약속이 결집될 때, 생을 기약할 수 있고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옛 선인(先人)들이 왜 한 마디 말이 천금처럼 무겁다는 것을 강조했겠는가. 하물며 통치자의 말은 오죽하겠는가. 인간성은 약속을 통해 이루어진다. 약속이 깨지면 관계가 깨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관계가 깨지면 공동의 삶이 깨진다. 공동의 삶이 깨지면 각자 한 마리의 짐승처럼 발버둥 치면서 기약 없는 발가벗은 존재로 전락한다.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인권은 바로 서로 약속을 할 수 있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고, 약속을 어기는 일에 대해 힘껏 추궁할 수 있는 권리에 다름 아니다. 인권은 약속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이고, 그에 따라 남은 생을 기약할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당연하지만 약속은 일방의 것이 아니다. 쌍방을 전제로 한 것이 약속이다. 철학자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는 타인의 얼굴 자체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새겨져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타인은 곧 약속을 통해 성립하는 나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근본 조건인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여러 다양한 처지에 놓인 타인들이다. 그들은 이미 늘 나에게 그렇게 다양한 만큼 여러 다른 약속들을 맺은 것이고, 그 약속들을 이행할 것을 나에게 요청한다. 나의 존재는 내가 얼마나 많은 다른 종류의 약속들을 염두에 둘 수 있고, 또 그 약속들을 얼마나 어떻게 다채롭게 이행할 수 있는가에 따라 열리기도 하고 또 닫히기도 한다. 여러 약속과 이행을 향해 열린 나의 존재는 그만큼 남은 생의 의미와 가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은 항상 미래를 향해 있다. 그러나 또한 약속은 항상 과거에 맺은 것이다. 약속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 두툼하게 축적된 과거를 지니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미래가 한없이 얇아진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민족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약속은 결코 무한정하게 연기될 수 없다. 약속 불이행은 더 크고 알찬 새로운 약속을 위한 것이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더 두툼하고 심중한 과거를 새로운 약속의 밑돌로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약속 불이행은 그 자체로 악일 뿐이다. 악이란 근본적으로 약속을 어기는 데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법은 국가적인 공공의 약속이다. 만약 약속 아닌 약속, 특별히 배타적인 약속, 사기로서의 약속에 입각한 현행법이 있다면, 그 법은 이미 법이 아니다. 하물며 함부로 약속을 해서 국가의 통치권을 획득하고, 그 약속을 예사로 어기고도 한 점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통치자를 선택한 국민들은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국가는 그야말로 공공의 열린 약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계이다. 약속을 역용하고 무시하는 통치자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그 국가에서 생을 영위해야 하는 국민들은 더 이상 생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함으로 인해 비참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약속 어기기를 밥 먹듯이 하는 통치자는 곧 국가적인 악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신용은 약속 이행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러고 보면, 신용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서 내가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과거와 미래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다함께 남은 생을 기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신용 자체를 화폐로 바꾸어 약속 아닌 약속, 사기인 배타적인 약속으로 전락시키는 금융자본주의는 얼마나 그 자체로 악인가. 더욱이 이런 금융자본주의에 국가 통치자마저 편승해 있다면, 악에 악을 더한 현실을 형성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심사가 현실 전체에 편만하게 되면, 그것으로 공동의 생은 끝이다. 공동의 생이 끝나면, 내 개인의 남은 생을 전혀 기약할 수 없다. 남은 생을 기약한다는 것은 곧 약속과 이행의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고, 약속이란 이미 늘 타인들과의 공동의 생을 위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공화국이라는 명패를 높이 치켜 든 오늘날 대한민국은 얼마나 어떻게 계속 새로운 약속을 하고 이행해 가며, 그럼으로써 과연 얼마나 어떻게 각인들이 자신의 남을 생을 기약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과연 우리들의 약속은 어디에, 어떻게, 어디로 사라지고 만 것인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388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최악의 인도주의 위기 유엔은 시리아 위기를 우리시대의 최대 인도주의 비상사태로 규정했다. 2011년 3월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이후 2014년 8월 말까지 20만 명 가까이 사망하고, 시리아 전체 인구의 절반인 9백 5십 만 명 정도가 고향에서 축출되어 난민이 되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6백 5십만 명 정도는 시리아 내부에서 난민이 되었고, 3백 만 명 이상이 외국에서 난민이 되었다. 이들은 레바논에 1백19만 명. 터키에 84만 7천명, 요르단에 61만 8천명, 이라크 21만 4천 명, 이집트에 14만 명이 난민 캠프 등에서 생활한다. 이 엄청난 재앙을 일으킨 주요한 세력이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IS)’라는 증거는 아직 없다. 시리아 위기를 설명하면서, 대부분의 세계 주류 미디어들은 전통적인 중동분쟁 설명방식인 종교 또는 종파, 인종간의 분쟁 담론을 채용하거나 특히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의 활동을 강조한다. 이러한 널리 퍼진 진부한 전쟁담론은 이 전쟁이 시리아 영토분할을 통하여 이익을 취하고자하는 ‘외국세력의 개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과,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통한 이란과 카타르 사이의 ‘가스판매망 확보투쟁’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 통합세력으로 부상하는 ‘이슬람국가’를 공격하는 미국 2014년 9월 23일 미국은 이슬람극단주의자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IS)’를 해체시킨다는 명분으로 전격적으로 시리아 공습을 시작하였다. 미국의 ‘이슬람국가’ 공격에는 사우디, 카타르,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 걸프 주변 아랍왕국들이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반정부군을 간접 후원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이슬람국가’를 직접 공격하면서, 이 지역 분쟁에서 가장 주요한 군사적 행위자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2014년 9월 현재 ‘아사드 정부’는 시리아 영토의 30% 정도를 통치하고 있으며, 나머지 70%는 ‘이슬람국가’, ‘쿠르드자치정부’, 소수 반군파벌들이 분할통치하고 있다. 2014년 6월 29일 ‘이라크와 레반트 지역의 이슬람국가(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ISIL)’가 ‘이슬람국가’를 선언하면서 급속도로 그 지배 영역을 확장하였다. 게다가 2014년 8월경, ‘이슬람국가’는 ‘국민연합’을 비롯한 자유 시리아군과 알 누스라 등 지난 3년 동안 미국과 사우디와 카타르 등 걸프왕국들이 후원해온 경쟁적인 반군파벌들 대부분을 흡수 통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국민연합’은 2013년 3월 ‘시리아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아랍연맹 회의에서 아사드 정부를 대체하는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014년 7월 22일 ‘국민연합’은 자체 투표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해체’함으로써 현재 제대로 된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시리아 내부에 ‘이슬람국가’와 겨룰만한 반군파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전쟁: 카타르-사우디-요르단 VS 이란-이라크-시리아 2011년 3월 이후 시리아에서 진행되는 최악의 인도주의적인 위기의 중심에는 세계 최대의 가스 유전으로 알려진 이란의 남부 파르스 유전(South Pars)과 카타르 북부 유전(North Dome)지대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판매망 확보 경쟁이 있다. 그 판매망의 중심지에 시리아가 위치한다. 카타르가 2011년 이후 시리아 반군을 적극 후원하면서 시리아분쟁에 깊이 개입해 온 주요한 이유는 바로 천연 가스 판매망 확보를 위한 투쟁이다. 2009년 카타르는 천연가스 판매를 위해서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에게 [카타르-사우디-요르단-시리아-터키]를 통과하여 유럽으로 가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사드 대통령은 이러한 카타르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대신에 아사드는 2010년 이란과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2011년 7월 25일 시리아, 이라크, 이란 석유장관들이 이란에서 회의를 갖고, 100억 달러의 건설비용으로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지중해]를 통과하여 유럽으로 가는 가스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한 예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상과정에서 이라크는 하루 당 2천 5백만㎥, 시리아는 하루 당 2천만-2천 5백만㎥의 이란 가스를 구입하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이 가스 파이프라인은 이란 해역의 남부 파르스로부터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지중해를 가로질러 유럽의 고객들에게 남부 파르스에서 생산되는 가스를 공급하기로 되어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길이가 3,480 마일(5,600 km)이고 직경이 56인치(142㎝)이며,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정제소와 관련 기반시설을 건설하기로 예정되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이란은 2015년부터 유럽에 가스를 공급할 것이다. 그런데 2012년 11월 미국무부 대변인 빅토리아 눌랜드는 이란-이라크-시리아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묵살하면서, 이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이 결코 실현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워싱턴은 이란-이라크-시리아 파이프라인 건설에 관한 유사한 보고들을, 6번, 7번 혹은 10번, 15번 받은 적이 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이란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과 운영을 통하여 이란-이라크-시리아가 하나의 협력체가 되는 것을 결코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이 이란의 파이프라인 건설 사업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시리아 영토통합을 저지하고, 영토분할을 통하여 경쟁적인 파벌들이 시리아를 분할 통치하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시리아 분쟁이 계속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39 | 추천: 0
이광조/ CBS PD 얼마 전 강원도 원주의 한 골프장에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골프장 경기보조원으로 일하던 여성이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하면서 사건이 언론에 알려졌는데,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사건을 무마하려고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손녀 같고 딸 같아서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한 것”이라며, “손가락 끝으로 가슴 한번 툭 찔렀는데 그걸 어떻게 만졌다고 표현하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해자의 설명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피해자는 “홀을 돌 때마다 계속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고, 성적 수치심을 느낄 정도의 신체접촉이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예전부터 행실이 좋지 않아 캐디들 사이에 기피 고객으로 소문이 났다는 주변의 주장까지 나왔다. 외신에까지 보도된 이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는 모두 아는 대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성추행이 제대로 처벌되는 걸 보지 못한 터라 이번 사건이 어떻게 처리될지 관심이 크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의 관심을 끄는 건 이 분의 생존비법이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아래서 검사로 승승장구하다 1988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 어떻게 그 오랜 세월동안 국회와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지금까지 무대 위에 남아 있을 수 있었는가는 하는 점이다. 인터넷에서 이 분의 프로필을 검색해 보면 1938년 생으로 1966년에 검사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검찰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고 1988년 민정당 소속으로 13대 국회의원이 된 뒤 17대까지 내리 5선을 했고 2008년에 공천을 받지 못했지만 2009년 양산 재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6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법무부 장관, 2003년 한나라당 대표, 2007년 국회 부의장을 지냈고 같은 해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경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이명박 정부의 1등 공신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차례의 당대표와 국회의장까지. 대단한 이력 아닌가. 그런데 이 화려한 이력과 함께 따라 나오는 것이 미국 유학 시절 낳은 딸의 이중국적을 유지하다 국내대학의 외국인 자녀 특례입학 혜택을 받기 위해 1991년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외국인 자격으로 편법입학한 일과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를 뿌린 일이다. 딸의 특례입학 문제는 1993년 법무부 장관 임명 이후 논란이 불거지면서 장관직 사퇴로 이어졌고 돈봉투 살포와 관련해서는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나고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전과가 있는 정치인이 한 둘도 아니고 온갖 엽기적인 일이 다 일어나는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과오는 별 것 아닌 걸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분에게 따라 다니는 과오는 쉽게 보아 넘기기 어렵다. 두 경우 모두 그가 맡은 공직의 직업윤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유신독재와 전두환 독재에 복무한 전력이야 흠도 되지 않는 세월이니 얘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고 자녀의 이중국적과 편법입학 정도는 소위 이 땅의 ‘지도층’ 사이에는 워낙 흔한 일이라 접어두는 게 좋겠다. 하지만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돈으로 표를 사려했던 행위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 아닌가. 더구나 이 문제가 불거진 시점에 그는 의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장이었으니 대한민국 국회의 명예에 제대로 먹칠을 한 셈이다. 그는 이 일로 인해 국회의장에서 물러나고 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쯤 되면 정치무대에서 물러나 여생을 조용히 보내는 게 상식일 텐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을 받고 박근혜 정부 들어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으로 추대 되었다. 그리고 골프장을 드나들며 ‘딸 같은 캐디들을 손으로 격려하다’가 성추행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젊었을 때 그는 아마 고향에서 ‘천재’라는 소리 꽤나 들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우등생이었을 거다. 검사생활을 하면서는 ‘영감님’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 뒤로는 ‘의원님’, ‘장관님’, ‘대표님’, ‘의장님’으로 불리며 평생을 대접받고 살았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그는 권력을 가진 패거리들에게만 잘하면, 그들에게만 인정을 받으면 사고를 쳐도 얼마든지 후일이 보장된다는 걸 몸으로 체득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렇게 권력게임을 즐기는 동안 유권자들은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재가 중앙정치무대에서 승승장구하는 걸 보면서 박수치고 대리만족을 얻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닐까. 전국에서 모인 ‘우리 지역’의 우등생들은 중앙정치무대에서 누가 서로 잘났는지를 겨루며 점점 더 ‘일그러진 영웅’으로 변해간다. 그들에게 유권자란, 국민이란 어떤 존재일까? 골프장 캐디는?
2017-08-07 | hrights | 조회: 37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