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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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도재형(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온 나라가 메르스로 술렁이고 있다. 5월 20일 첫 확진환자가 나온 이후 6월 10일 현재, 사망자 9명, 확진자 108명, 의심환자로 격리된 사람이 거의 3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중동發 코로나바이러스(MERS-CoV)에 의한 신종 호흡기증후군인 메르스는 특히 만성질환자, 면역저하자, 노약자에게 폐렴이나 급성신부전 등 중증 합병증을 일으켜 위험하다. 아직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은데다, 사스나 신종플루와 달리 30-40%에 달하는 사망률로 인해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바이러스만큼이나 무서운 속도로 한국 사회에 퍼져나가고 있다. 바이러스와 공포의 확산은 양 방향에서 우리 일상의 기반을 잠식하며 파괴한다. 메르스 사태의 국내 진원지라 알려진 경기 평택시는 인구 45만의 터전인 도시 전체가 거의 마비된 상태고, 현재 전국 유치원과 초중고교, 대학교의 10.5%인 2,199개 기관이 휴교에 들어갔으며, 전북 최초로 메르스 양성 환자가 발생한 순창의 한 마을은 마을 전체가 통째로 격리 조치되었다. 불안한 시민들은 모임과 회식, 여행을 취소하고 각자의 집으로 숨어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마스크가 차단하고, 멸균 손 세정제가 타인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낸다. 만남과 접촉이 위험시되고, 단절과 고립이 장려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메르스가 초래한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며 ‘소통’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는 한편으로는 지구화의 패러독스라 불리는 글로벌한 차원과, 다른 한편으로는 박근혜 정권의 ‘불통’으로 대표되는 국내적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최근의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등 전염병의 세계적 확산은 지구화의 환경과 무관할 수 없다. 중동의 메르스가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이렇게 맹위를 떨치는 것은 교통 등 소통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 이를 통해 접촉이 국경을 넘어 전면화된 지구화의 조건과 직결된다. 하지만 지구화는 이러한 ‘소통의 극대화’가 ‘단절의 극단화’와 공존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며, 흔히 거론되는 지구화의 패러독스란 이를 지칭한다. 가장 쉽게는 소통의 상징인 스마트폰의 역설을 떠올리면 된다. 각자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아무런 대화도 없이 밥을 먹는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멀리 떨어진 사람, 낯선 사람을 언제 어디서나 나와 연결해주는 스마트폰은 정작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가장 가까운 이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기도 하다. 소통의 얼굴 뒤에 극단의 불통을 숨기고 있는 것, 나아가 불통을 소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스마트폰의 역설이 상징하는 지구화의 패러독스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를 치료한 경기도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바이러스는 접촉을 통해 확산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접촉선을 따라 공포와 불안과 불신이 함께 흐른다. 공포와 불안, 불신의 무차별적 소통은 극단의 불통과 고립이 완성될 때만 진정될 수 있다. 그 완성은 ‘불가촉’의 전선(戰線)을 사방에 그어대는 것. 환자를 돌봐준 사람들의 잇따른 감염 소식은 이 불가촉의 전선이 누구보다 먼저 아내와 남편 사이,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 그어질 것을 요청한다. 메르스가 불러일으킨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 즉 접촉이 고립을 초래하고, 소통이 극대화될수록 단절이 극단화되며, 불통의 호소가 소통의 유일한 내용이 되는 현상 속에서 지구화와의 유비를 떠올리는 것은 그저 엉뚱한 생각일까. 한편 메르스의 급속한 전파와 그것만큼이나 불길한 공포의 확산은 박근혜 정권의 ‘불통’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불통’은 박근혜 정권의 출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실정(失政)의 핵심을 함축하는 단어다. 연이은 인사 참패나 세월호로 인한 사회분열 등은 기본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스런 불통의 산물들이다. 메르스에 대한 대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확진환자 발생 거의 2주 후에나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대통령의 때늦은 대처에 메르스 사태가 골든타임을 놓친 제2의 세월호가 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현재 인터넷에 난무하는 흉흉한 소문과 근거 없는 처방들 역시 기본적으로 정부의 뒤늦은 대응과 정보통제에 기인한다. 메르스의 위험에 먼저 반응한 여론과 소통해 초반부터 기민하게 대응하고 정확한 정보와 행동수칙을 제공했더라면 바이러스의 전파도, 공포의 확산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월호부터 메르스에 이르기까지 이번 정부는 유독 유언비어와 괴담에 민감하고 엄격하다. 바이러스를 잡기 전에 유언비어 유포자부터 잡으려 한다. 하지만 정상적이고 건강한 소통이 가능할 때 사람들은 유언비어와 루머에 집착하지 않는다. 유언비어와 괴담 자체가 정부의 불통과 무능의 결과이다. 메르스가 정상적이고 건강한 면역체계를 갖춘 사람에게는 그저 독한 감기 정도로 지나갈 수 있는 것처럼, 유언비어와 괴담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소통시스템 속에서는 한갓 지나가는 이야기로 금새 사라진다. 이 정권이 소통의 얼굴 뒤에 숨긴 자신의 불통을 철저히 성찰하지 않는 한, 바이러스보다 먼저 공포와 불신이 우리를 감염시키고 무너뜨릴 것이다. 울리히 벡이 말했듯이, 각종 전염병이나 자연재해, 테러 같은 재난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재난의 상상적 효과’, 즉 공포와 불신의 확산과 그로 인한 진정한 소통과 신뢰의 붕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15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좀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여야가 합의하여 개정하기로 한 법률안에 대해서 대통령이 못마땅해 하며 거부권 행사까지 언급했는데, 여당 내부에서 다시 재의결 가능성이 거론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여당이 대통령에 맞서기로 결심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잘 알다시피, 사안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에 관한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는 아직도 그 활동을 개시조차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기구의 장관급인 위원장이 길거리에서 농성을 한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정부는 자신의 의지가 관철된 시행령을 그대로 제정하였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타개를 시도한 야당이 이참에 아예 정부의 과도한 행정입법 관행을 제어할 수 있는 국회법 개정안을 마련하여 여당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치적 꼼수가 있기는 했다. 청와대와 여당으로서는 다급한 공무원 연금 개혁법안에 합의해 주는 대신 앞으로 법률의 취지에 맞지 않는 행정입법에 대해서는 국회가 수정요구를 할 수 있다는 반대급부를 얻어낸 셈인데, 그러나 사안의 본질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법률에서는 ‘법정주의(法定主義)’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형식적 법률, 그러니까 국회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서만 이를 규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하는데, 이를 반대로 보면 행정부의 시행령이나 시행규칙과 같은 행정입법을 통해서는 이를 다룰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죄형법정주의’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는데, 범죄와 형벌은 국민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는 중요한 사안이므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논의를 통해서만 만들어지거나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 집행부의 의사가 개입하는 것은 권력의 남용이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설령 법률에서 범죄규정의 구체적인 내용을 명령에 위임했다 하더라도 그 범위를 넘어서는 하위입법의 규정은 죄형법정주의 위반으로 위헌무효가 된다. 또 굳이 법정주의까지 이르지 않는 경우라도 일반적인 위임입법의 한계, 즉 상위법의 위임을 받은 하위법은 그 모법의 취지와 목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원칙이 당연히 작동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번 국회법 개정안은 이미 당연한 내용을 다만 국회의 권한을 좀 더 분명히 하는 형태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즉 현재의 국회법이 제98조의2 제3항에서 “상임위원회는 위원회 또는 상설소위원회를 정기적으로 개회하여 그 소관중앙행정기관이 제출한 대통령령·총리령 및 부령에 대하여 법률에의 위반여부 등을 검토하여 당해 대통령령 등이 법률의 취지 또는 내용에 합치되지 아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소관중앙행정기관의 장에게 그 내용을 통보할 수 있다. 이 경우 중앙행정기관의 장은 통보받은 내용에 대한 처리 계획과 그 결과를 지체 없이 소관 상임위원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것을 대통령령 등이 위법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관련 상임위원회가 그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고 개정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처럼, 입법권은 국회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행정부의 막대한 권력을 견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이 요청하는 권력분립의 원칙이다. 아무리 현대사회에서 정부가 법률을 직접 제안하는 정부입법이 그 양과 질 면에서 점점 중요해지고 있고, 특히 거의 언제나 여소야대라는 일방적 정치지형의 지원을 받아 견제받지 않은 권력을 행사해온 우리 행정부라 하더라도, 국회가 나름대로 합의해 제정한 법률의 내용을 시행령의 명목으로 왜곡하려는 발상 또는 그러한 관행은 그야말로 초법적, 위헌적인 것이다. 국회가 대표하고 있는 국민 또는 인민은 다양한 정치세력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집단이다. 따라서 이들이 일정한 합의에 이르려면 서로를 설득하려는 부단한 노력과 이를 위한 얼마간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사회개혁 정책만이 옳고, 왜 국회는 이러한 합리적인 정책을 입법적 지원을 통해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주지 않느냐는 식의 대통령의 인식은 그래서 위험해 보인다. 일부의 국민이 대통령과 청와대의 개혁방향을 지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상당수의 국민은 이를 우려섞인 눈으로 혹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논의를, 대통령은 귀찮아 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마음으로 새겨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국회를 통한 국민의 주권행사이며, 제대로 된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48 | 추천: 1
정지영/ 전) 서울DPI 회장 지난 4월 20일 제35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보건복지부는 바른 표현 사용 캠페인 선포식을 함께하며 “장애우·장애자 대신 장애인이 올바른 표현입니다”라는 캠페인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 집단을 이르는 용어는 그 집단의 사회적·정치적 위치를 내포하고 있기에 억압받는 집단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저항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은 예로부터 불구자, 장애자 등 비하의 뜻을 담고 있는 용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고,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바꾸어 내며 비로소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을 뜻하는 말로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장애우’라는 단어는 딱히 장애인을 비하하기 위하여 쓰인 말은 아닙니다. 장애인 스스로가 사용할 수 없어 장애인을 ‘비주체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쓰지 말 것을 이 사회에 주문하였지만, 여전히 장애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온정적이고 시혜적인 이유로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장애우전용주차장’, ‘엘리베이터는 장애우에게 양보합시다’ 등등. 그런데 이번에는 보건복지부까지 나서 장애우를 장애인으로 바꿔 쓰자고 하니, 어쩌면 장애인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일입니다(그러나 여전히 단체명에 ‘장애우’라는 말을 쓰고 있는 보건복지부 소관 사단법인에 대해서, 보건복지부가 어떻게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35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의 장애 인식 개선 캠페인 슬로건 사진 출처 - 뉴스1 그런데, 이렇게 장애인당사자들의 요구로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장애우라는 말까지 퇴출된 것만으로 장애인의 권익이 보호될 수 있는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조금 모자라거나 부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병신’, ‘쪼다’, ‘바보’라고 부르던 욕을 이젠 ‘이 장애인아!’라고 대체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장애인에게는 용어의 혁명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집단’의 사회적 위치를 끌어 올리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 돈이 많아지면 사람들이 이렇게 무시하지 않을까요? 제 주변의 부자 장애인도 여전히 가끔 지하철에서 용돈을 받는 것을 보면(아무 이유 없이 쯧쯧하며 열심히 살라고 천 원, 오천 원씩 준다네요...) 그것도 딱히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장애인의 학력이 높아지거나 좋은 직장에 다니면 해결될 까요? 제 주변의 박사 장애인도 사람들 많은 곳에선 동정의 시각을 받는 것을 보면 사회적 위치를 끌어 올리는 것도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여성을 비하하고, 흑인보다 백인을 선호하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며 장애를 욕으로 사용합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인권 의식이 절박한 시절이 아닌가 합니다. KBS에서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프로듀사’의 시청소감을 보니, 주인공 김수현이 말하는 것이 ‘언어장애자’가 아니면 일반인이 누가 저렇게 말을 더듬느냐며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웹툰에 게이커플의 일상다반사를 연재하는 ‘지지’ 님은 게이입니다. 가장 최근 연재분에 웹툰작가파티에 참석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작가파티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커밍아웃이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남들은 하지 않을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 부당하게 느껴져 참석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편견 없이 대해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워낙 극중 김수현처럼 말하는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아무생각 없이 보게 되었고, 게이인지지 님의 일상을 미리 보았으니 게이라는 편견 없이 즐겨보는 웹툰의 작가라는 생각만 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여전히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이나 집안에 꼭꼭 숨겨있습니다. 사회활동을 하는 장애인도 사람들의 편견과 환경의 제약으로 여행이나 사교활동을 많이 하지 않기도 합니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도 누군가에게 부탁하게 되고, 투표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재자투표가 가능하기도 합니다. 정책의 변화, 차별의 철폐도 중요하지만, 장애인과 살아본 적 없어 본의 아니게 차별하게 되는 비장애인들에게 우리 지역에 장애인인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엄청나게 큰 장애인운동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장애인단체가 있던 건물에는 3cm 정도의 턱이 있었습니다. 피자가게 앞은 더 높이 경사로가 있었는데, 이번에 구청에서 보도블록 공사를 다시하면서 3cm의 턱은 사라지고 피자가게 앞의 경사로는 더 완만해졌습니다. 경사로를 손 본 것이 아니라 보도블록을 조금 높게 쌓은 결과입니다. 동네 편의점에 오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 동네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는 시각장애인, 영화관, 술집, 식당, 공원, 도서관, 은행, 부동산, 시장, 극장, 콘서트홀, 야구장 등등을 하나하나 내 삶의 공간으로 장악해 나가는 것, 매일 매일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을 장애인도 함께 이용하며, 동네에서 마주치며 불편한 게 있다면 개선하고 살아가는 것이 말뿐인 장애복지가 아닌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만드는 밑거름입니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부지런히 일상의 공간에 등장하는 것, 그렇게 생활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권운동입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35 | 추천: 0
-서울 노마드, 아파트 탈출을 꿈꾸다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이사를 앞두고 문득 서울에 살면서 몇 번이나 이사를 했나 세 보았다. 서울에 산 지 25년. 그간 13번 이사를 했다. 평균으로 나누면 한 곳에서 산 기간이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2년 이상 산 집은 세 곳이고 나머지는 1년 6개월도 채 살지 못했다. 누군가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산에서 산 기간보다 서울에서 산 기간이 더 길어졌으니, 이젠 서울이 더 익숙하지 않느냐고 한다. 익숙한 건 맞는데, 스스로를 서울사람이라고 말하면 뭔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차피 21세기는 노마드의 시대라고들 하니, 나도 서울에 사는 동안은 이리저리 필요와 형편에 따라 움직이는 노마드처럼 산다 생각하자. 유목민으로 살아오지 않은 이상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갖지 못하는 노마드의 생활은 한 집에서 20년을 살았던 시기보다 내게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결혼하고 살게 된 아파트라는 평면적이고 공중에 떠 있는 폐쇄적인 공간은, 편리하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조차 평면적이고 폐쇄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자연과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그런 공간. 아이를 나고부터 아파트가 아닌,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내 집 마당이 있는 집을 더욱 욕망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파트가 가진 편리한 장점도 많지만, 불편한 점도 많다. 아파트 마당에 한번 나가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엘리베이터도 기다려야 하고,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에게 서로 쓰지 않아도 되는 신경도 써야 한다. 비가 와서 비를 잠시 맞으러 나가는 것도, 잠깐 바람 쐬는 것도, 눈을 맞으러 나가는 것도 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관문만 열면 집 마당이라 바로 바깥이긴 하지만, 공공장소는 아니라서 편안한 차림으로 잠깐 나갔다 들어올 수 있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다면, 태어나서 계속 아파트라는 환경에서만 살아왔다면, 그런 것들이 번거롭다거나 굳이 그러려고 1층까지 내려갈 이유가 있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런 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욱 아파트가 아닌 ‘집’에서 아이와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아이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자연에 대한 상상력을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하다는 걸 나는 이론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터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울 송파구 잠실 주공 5단지 아파트 단지 사진 출처 - 한겨레 부동산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집도 다 운때가 맞아야 얻는 거라고. 단독주택이 아니라면 빌라도 괜찮으니 아파트는 별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단독은 물론이고 빌라는 주차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이 많으니 별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서울에 단독주택이 많은 동네는 제대로 정비가 안 된 지역이 많아 아파트보다 지저분하다며 서울에서 단독주택에 살 꿈을 꾸는 내게 찬물을 끼얹곤 했다. 그러던 우리에게도 그 운과 때가 왔다. 아이가 올 3월부터 다니게 된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새터산 아래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있는 조용한 언덕 동네에 있다. 지금 사는 아파트 단지에선 걸어갈 수가 없어 아침마다 차로 데려다 주고 저녁에 차로 데리고 와야 하는데, 맞벌이 부부에겐 시간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피곤한 동선이다. 올 연말이 전세 계약만료라 어차피 집을 알아보긴 해야 하니 어린이집 근처로 집을 옮겨야 하나 생각하던 어느 날, 우연히 <옹동스>라는 만화책을 읽게 되었다. 작가가 키우는 고양이 이야기인데, 병에 걸려 죽을 뻔 한 고양이의 행복을 위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감행했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것은 내게 무슨 암시처럼 여겨졌다. 책을 읽은 그날, 퇴근 후 바로 어린이집이 있는 동네에 집을 알아보러 갔다. 단독주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간 것은 아니었다. 정말 우연히도 그날, 그 부동산에 간 덕에 단독주택에 대한 회의를 품은 남편마저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게 한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지은 지 38년이나 된 집이지만 넓은 마당이 있는 집. 바로 옆은 야트막한 산이고 집 앞은 탁 트여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는 집. 어린이집 아이들이 새터산으로 나들이 갈 때 대문 앞 계단에서 잠깐 쉬어간다는 집. 물론 이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기까지는 아직도 꽤 먼 여정이 남아 있다. 오래된 집이라 리모델링을 하는 동안 세 식구는 몇 달을 오피스텔에서 지내야 한다. 집을 고쳐본 적도, 지어본 적도 없는 내게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리모델링에 앞서 집의 공간들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 건지에 대한 고민. 아파트와는 달리 1, 2층에 다락방, 지하실, 마당, 창고까지 다양한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집의 공간을 어떻게 규정하고 나누고 구성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나와 가족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었다. - 2편으로 계속
2017-08-07 | hrights | 조회: 399 | 추천: 0
박현도/ 종교학자 논문 2편을 표절해서 징계를 받은 교수가 대학총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도 아니고 스님입니다. 지난 5월 2일 동국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거국적, 거족적인 경사입니다. ‘표절 총장’은 표절의 격을 한껏 올린 금세기 최고의 인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간 일반 교수들이 글쓰기로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해서 보살도를 발휘하시어 스님이 직접 사바의 재활용 세계로 친림하셨으니 황공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실로 표절은 한국 대학의 자랑이요, 우리 민족의 쓰레기 재활용 정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민족문화의 정수입니다. 속없는 사람들이 하릴없이 상아탑이라고 불러대는 대학에서 스님 총장까지 나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시니 어린 잡것들은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불도를 깨우치시기 전 여러 사람들이 도 닦는 것을 보고 배우셨으니 표절은 불가의 오랜 전통일 수도 있는데, 우리 민족 불교가 정말 훌륭하게 계승하였습니다. 진실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입니다. 스님까지 나서주셔서 이젠 잡인 교수들도 마음 편하게 표절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니 표절을 넘어서 창조적인 논문 생산이 가능합니다. 대학의 논문 생산은 타 산업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른지 오랩니다. 대표적 신공 중 하나가 아는 사람 논문에 이름 얹기입니다. 요즘은 융합이 대세라 전공이 완전히 달라도 문제없습니다. 수학 논문에 문학전공 교수의 이름이 버젓이 들어가도 융합이라고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입니다. 현대화되면서 사라진 전통적인 미풍양속이 아직도 대학에서는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얹히고 얹어주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진 출처 - 뉴스1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솟습니다. 표절 총장이 나왔는데, 이젠 이름 얹는 신공으로 논문 무임승차 총장을 배출해야 하겠습니다. 생각해보면 표절보다 더 멋진 것이 논문 무임승차입니다. 표절은 마우스로 긁는 수고라도 하지만 이름 얹기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해도 됩니다. 진정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이번 표절의 미학은 불가에서 큰일을 하셨으니 앞으로 무임승차는 기독가나 유가에서 보여준다면 종교간 화합 정신까지 덤으로 고양될 것입니다. 물론 일반 잡인 교수들이 하면 더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표절을 해도, 남의 논문에 그냥 편히 이름 얹어도 승진의 조건을 다 채우기가 어렵다는 불평이 많은데, 표절 없이 논문 잘 쓰는 이상한 품종의 교수들을 많이 채용하여 싼값에 부리고 난 후 피자에 토핑을 얹듯 이들 잉여교수들이 쓴 논문에 이름만 얹게 한다면 우리 민족의 피자 제조식 논문 생산이 강력한 국제경쟁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성취력을 고양한 잡인 교수를 총장으로 선출한다면 실로 금상첨화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대는 융합의 시대이니 남의 논문에 이름을 얹을 때는 전공을 다르게 해야 합니다. 통섭과 융합이라는 시대정신을 빛나게 해야 하니까요. 자, 지금 표절하면 안 된다고 교정에서 시위하는 정신 나간 교수들은 빨리 전공 다른 교수를 찾아 이름을 얹어야 합니다.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시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표절보다 더 빨리 생산력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남의 논문에 이름 얹는 것밖에 없습니다. 저도 협조자를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이렇게 한가롭게 글 쓰고 있다가 망하기 십상입니다. 논문 제대로 쓰면 멍청한 겁니다. 패가망신의 지름길입니다. 급합니다. 남의 논문에 이름 얹으러 나갑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08-07 | hrights | 조회: 764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흔히 우리 인간은, 우리가 다른 동식물들과 다른 탁월한 생명적 가치를 지녔다고 여긴다. 탁월성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 생각을 인정할 수도 있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생각이 다른 동식물들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력을 탁월성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라면, 특히 생태주의자들은 이러한 생각은 그 전제부터 틀렸다고 할 것이다. 배타적인 지배력은 약육강식의 자연적 생명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개체로서의 나 자신 또는 종으로서의 집단의 유지와 강화를 위해서 다른 개체 또는 다른 종의 집단을 어떻게 파괴해서 활용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자연적 생명의 세계다. 우리 인간들 역시 자연에 속한 존재로서, 이러한 자연적 생명의 원리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적 생명은 다른 동식물들이 지닌 자연적 생명과 달리, 도구를 활용하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도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으로 생산 ·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도구에 들어 있는 사회성을 바탕으로 해서 각자의 자연적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성은 기본적으로 바로 도구의 필연성과 도구의 사회성에서 기인한다. 이에 인간의 자연적 생명은 사회 속에서의 자연적 생명으로 전환된다. 또한 도구는 기본적으로 자연을 대상으로 해서 생산 · 활용된다. 그래서 도구는 크게 인간 이외의 자연을 향한 도구와 자연인 인간을 향한 도구로 나뉜다. 각종 기계기술들은 주로 전자에 해당되지만, 법과 제도 및 그에 따른 각종 기구들은 후자에 해당된다. 중요한 것은 사회 현실 속에서 누가 더 많이 도구를 소유하고 활용하는가에 따라 자신 및 자기 가족의 자연적 생명을 더 잘 유지 강화할 수 있고, 그래서 이를 둘러싸고서 치열한 경쟁적 투쟁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이 투쟁을 통해 인간의 자연적 생명은 사회적 생명의 형태를 띠게 된다. 사회적 생명이 자연적 생명과 다른 근본 특징은 대타적(對他的)인 가치의 우월성,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더욱 우월한 가치를 지녔음을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심지어 자신의 자연적인 생명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회적 생명은 자연적 생명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때 추구하는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임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사회적 생명 역시 자연적 생명과 마찬가지로 배타적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생명은 자연적 생명에 비해 더욱 더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가치의 총량은 사회적으로 결정되기에 그 양이 일정하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가치의 상대적 우월성은 정확하게 제로섬의 구도를 지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누리는 만큼 다른 사람이 누릴 수 없고,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만큼 내가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사회적 생명인 것이다. 사회적 생명이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권력이다. 오늘날 예외가 없을 정도로 세계 전체를 포섭하는 전 보편화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까닭도 알고 보면 사회적 생명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인간 생명을 끝없이 질곡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를 위한 이윤을 둘러싸고서 모든 투쟁이 벌어지는 것 같지만, 실제 그 투쟁은 사회적 생명 즉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다. 이윤을 통한 자본의 확충은 곧 나 자신의 사회적 생명의 확충, 즉 권력의 배타적이고 대타적인 확충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배타적인 상대적인 가치의 우월성, 즉 자신의 사회적 생명에 입각한 권력에 집중하는 한, 그 사회는 갈수록 극단적인 위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특히 오늘날처럼 온갖 공적인 매체가 최첨단으로 발달된 상황에서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누구든지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자신의 상대적인 가치의 열등함을 확인하게 되고, 그 반대급부로 어디에서건 어떤 방법으로건 자신보다 더욱 열등한 자들을 물색해서 자신의 상대적인 가치의 우월함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되고, 그러한 과정이 악한 긍정적 피드백의 과정을 거쳐 점점 더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서로 가치의 살과 피를 파먹고 흡입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조차 할 수 없는 처참한 삶이 의식/무의식의 통로들을 거쳐 각자의 존재를 근본에서부터 공격하는 이 대대적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지성적인 촉수를 세워 인간 존재의 위기를 염려하는 자라면 이 문제를 이미 늘 머릿속에 무슨 무거운 쇳덩이처럼 이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는가? 개인들 간의 관계도 문제거니와 집단들 간의 관계가 더욱 문제다. 크고 작은 온갖 형태의 집단들, 그 집단들 자체가 마치 사회적인 가치인 양 위세를 떨면서 작동하게 되면 그 위험성은 크게 높아진다. 집단에의 소속 자체를 둘러싸고서 각종 배제의 논리가 작동하면서 예사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든 민족이든 인종이든 계급이든 당파든 간에 배타적인 강력한 감정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서 전선을 형성하면서 폭력적인 공격 수단들을 총동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는 개개 집단들이 자기들만이, 자기들이야말로 인류 보편의 궁극적인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또 실천하고자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 속에 다양성과 특수성들을 충분히 담보해 내지 못한 상태에서 보편을 주장할 때 그 보편 자체가 이미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폭력을 확대 · 재생산해 낸다는 사실이다. 특히 동물세계의 배타적인 자연적 생명의 형태를 모델로 삼아 약육강식이야말로 생명 보편의 원리임을 강조하는 저급한 보편성은 가장 위험한 폭력성을 수반한다. 무엇을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을 것인가? 이 물음이야말로 최고도의 지성을 가장 긴급하게 요구하는 현실의 근본 물음이다. 개인 간이든 집단 간이든 제로섬 게임의 구도를 띨 수밖에 없는 배타적인 소유와 향유를 통한 가치를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는 한, 결코 대대적인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함께 향유함으로써, 함께 향유하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가치가 높아지는 이른바 질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최고도의 공향유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해서 성립하는 가치를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 베토벤이 독일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시인 김혜경이 일제 강점기 조선 식민지의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배타적인 민족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 민족 감정을 가치로 삼아 향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의한 일방적인 가치 구도를 혁파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공향유의 사회적 가치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혁명가들이 인류 공영의 평화를 외쳤는가. 그것은 인류 모두가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가치를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는 세상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었다. 최대한의 공향유를 필수 조건으로 하는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삼을 때, 배타적인 사회적 생명의 차원에서 문화적 생명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간 생명이 왜 다른 동식물의 생명보다 탁월한가? 자연적 생명에서 비롯된 배타성을 극도로 추구하는 사회적 생명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배제를 최대한 거부하는 최고도의 공향유를 필수 조건으로 하는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삼아,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가장 격렬하게 불태우고자 하는 문화적 생명의 발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으로 최근에 필자가 어느 잡지에 기고한 시 한 편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 손을 놓아라> 너희들 우리, 괴물이여 그 손을 놓아라 움켜쥘 줄밖에 모르는 그 손을 남의 목을 힘껏 죄는 그래서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그 손을 놓아라 유령인 그 손 네가 쥐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유령, 돈이 아니다 또 하나의 유령, 권력이 아니다 너는 단 한 번밖에 없는 생명을 쥐고 있다 살 속 깊이 심장에 박혀버린 그 손을 거두어가라 흥건한 피비린내 한여름 홍수로도 씻어낼 수 없는 부패한 오염 위태롭게 걸린 인간, 아예 파괴되어야만 그 손을 놓을 것인가 마침내 흠뻑 혁명의 양잿물을 마시고서야 그 손을 놓을 것인가 애초에 그 손은 춤추는 손이거늘 아름다움을 약속하는 손이거늘 애무하는 손이거늘
2017-08-07 | hrights | 조회: 464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2015년 4월 15일, 미국 정보 분석가 로버트 패리가 내 놓은 정보에 따르면, 사우디인들은 이스라엘에게 적어도 지난 2년 6개월 동안 160억 달러를 제공했다. 이 자금은 제 3의 아랍 국가를 통해서 이스라엘 개발기금구좌로 들어갔으며,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는 등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을 박탈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이스라엘-사우디 협력정책 명분은 공동의 적인 이란 핵프로그램에 대한 반대정책이다. 오늘날 사우디 역내정책은 왕가의 국내외 패권을 유지ㆍ강화시키기 위하여 아랍대의ㆍ종교ㆍ종파ㆍ정치이념을 초월하여 동맹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사우디역내정책의 기본구조가 석유생산 초기인 1950-1960년에 형성되었다고 판단한다. 다음의 1950-1960년대 이집트/사우디 패권경쟁 분석은 오늘날 사우디 역내정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 역내 공화국 창설 도미노: 나세르와 사우디의 패권경쟁 1952년 이집트 가말 압둘 나세르는 ‘자유 장교단’ 쿠데타를 주도하여 왕정을 붕괴시킨 뒤 ‘이집트공화국’을 창설하고, 영향력을 역내로 급속히 확장하면서, 1958년 2월 시리아와 연합하여 ‘아랍연합 공화국’을 창설하였다. 사우디의 사우드왕(재위:1953-1964)은 시리아 정보부장 압델 하미드 알 사라지에게 190만 파운드의 뇌물을 제공하면서, ‘아랍연합 공화국’의 창설 축하를 위해 시리아를 방문 중인 나세르 암살을 시도하였다. 이 사건이 실패하면서, 아랍세계에서 나세르의 명성은 더욱 고양되었다. 그런데 3년 후, 1961년 9월 사우드왕이 후원한 시리아 군부쿠데타가 성공하게 되자, 시리아는 ‘아랍연합 공화국’에서 탈퇴하였다. 다른 한편 나세르 역내 영향력 강화에 맞서서, 역내경쟁자였던 사우디왕가/하심왕가(이라크와 요르단 통치)가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우드왕은 1957년 처음으로 바그다드로 이라크 왕 파이잘 2세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다음해 1958년 7월 이라크 하심왕가가 군부쿠데타로 전복되고, ‘이라크공화국’이 창건됨으로써, 사우디왕가와 하심 왕가 사이의 관계 개선시도가 중단되었다. 4년 후인 1962년 이집트가 예멘해방운동을 후원하자, 사우드왕과 요르단 후세인왕은 같은 해 8월 30일 알 타이프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이집트에 대항하는 사우디-하심가 협력체제를 창출하였다. 소련이 후원하는 나세르 통치하의 이집트는 비동맹운동과 범 아랍주의를 대표하게 되었고, 세속주의와 공화주의를 대변하였다. 대조적으로 사우디는 절대왕정과 이슬람 신정국가 체제를 유지하면서, 영국, 미국 정부와 전반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왼쪽부터) 인도의 네루 총리,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과 회담 중인 나세르. 집권 당시 나세르는 제3세계 지도자들과 돈독한 유대 관계를 과시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 사우디왕가 내 입헌군주제 개혁요구 역내 분위기에 편승하여 사우디왕가 내부에서도 나세르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958년 나세르의 범 아랍주의에 영향을 받아 사우디아라비아 창건자인 이븐사우드의 20번째 아들인 탈랄왕자(사우디 대부호 왈리드 왕자의 아버지)는 ‘자유 왕자단’을 조직하고, 입헌군주제, 노예제폐지, 교육제도개혁, 노동법 도입을 포함한 광범위한 정치개혁을 제안했다. 탈랄왕자는 1960년 8-9월 입헌군주제 개혁초안을 사우드왕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사우드왕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탈랄왕자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62년 10월 23일 탈랄왕자는 나세르를 지지하면서 ‘아랍해방전선’을 조직하고 민주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유 왕자단’/울라마들과 합세한 ‘보수적인 왕자’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발생하였다. 이 때 그랜드 무프티 무함마드 알 셰이크가 ‘자유 왕자단’의 개혁요구를 반대하는 파트와를 내놓았다. 결국 1964년 2월 탈랄왕자는 사우디 국내외정책에 대한 비난을 철회하고, ‘자유 왕자단’을 해체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우디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나세르의 역내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입증한다. ◇ 예멘 내전과 사우디 위기: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 사우디 구원 나세르는 1962년 1월부터 예멘 해방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62년 9월 나세르가 지원한 ‘반-왕당파 장교단’ 쿠데타가 성공함으로써 ‘예멘 아랍공화국’이 창설되었다. 이후 나세르가 후원하는 공화파정부군과 사우디-요르단이 후원하는 왕당파 반정부군 사이에 예멘내전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나세르는 아덴 및 남부예멘에서 영국을 축출하고, 사우디왕국 혁명을 통해 우호적인 정권을 창출함으로써, 석유 자원의 보고인 걸프지역에서 서방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이집트의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나세르가 예멘 파견 이집트군대는 점차 증가하여 1967년경에는 7만 명 정도가 예멘에서 작전 중이었다. 이제 예멘내전 판도를 결정할 정도의 군대를 보유한 이집트는 북예멘을 넘어서 사우디에 일격을 가할 태세였다. 이 때 사우디왕가는 1818년 제 1사우디왕국이 이집트 이브라힘파샤 군대에게 공격을 받아 완전히 붕괴되었고, 마지막 왕 압둘라 빈 사우드가 처형당한 악몽을 상기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갑자기 이집트를 공격하고, 이집트가 대패하면서, 사우디는 이집트점령이라는 무시무시한 악몽에서 극적으로 벗어났다. 결국 이스라엘의 이집트공격 7일 후 6월 12일, 이집트는 예멘으로부터 군대를 대거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8월 31일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과 사우디 파이잘 왕은 카르툼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담에서 예멘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역내에 왕국을 대체하는 공화국창설이라는 돌풍을 몰고 왔던 나세르의 역내 영향력은 극적으로 소진된 듯이 보였다. 실제로 1967년 이스라엘의 이집트공격은 역내 정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이 사건 이후 아랍대의를 내걸고 역내 정치변동을 이끌던 나세르가 몰락하고, 대신에 막대한 석유자원을 보유한 보수적인 사우디왕가가 역내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796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탈감정사회>의 저자 스테판 메스트로비치는 다양한 개인의 감정이 브라운관을 거치며 진정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현대 사회 구조를 지적한다. 개인들이 사적인 상실에 대해 반응하자마자 곧바로 슬픔과 분노와 같은 감정들이 자주 생방송으로, 그리고 현장에서 전 세계로 방송되지만 진심으로 우러나와 털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진정성은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이렇게 잃어버리는 것들 중의 일부가 바로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사회 곳곳에 많은 동정심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빗나간 동정심은 문화산업이 대량으로 생산한, 알맹이가 없는 대체된 동정심이라고 지적하고, 동정심은 이제 구매한 물건에 싫증이 나는 현상과 유사한 ‘동정심 피로’로 귀착되는 소비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저작은 세월호 사건에 대해 ‘지겹다’거나 ‘짜증난다’는 여론이 상당한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느끼고 있다시피, 진심 어린 공감이 사라져 버린 우리 사회에서 일시적 동정심으로 치솟았던 슬픔과 분노의 감정은 그리 오래지 않아 깊은 무기력과 피로감, 그리고 의도적 무관심으로 전환되었다. 메스트로비치의 주장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이후의 이러한 한국 사회의 감정의 기복은 공동체적 연대가 무너진 데에서 기인한다. 게다가 피로감과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기복 중에 혐오와 모멸의 감정이 덧붙여져 증폭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열등한 집단을 범주화하고 멸시하는 한국 사회의 통념이나 문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서울 강남이 아닌 경기도의 안산, 이렇다 할 고학력, 고위층 가족도 아닌 별로 잘나지 못한 세월호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이 ‘감히’ 정부에 맞서서 자신들의 주장을 조직적으로 요구하는 모습은 이 사회의 상당수 집단들에게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현대 사회의 객관적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정치’에 의해 악의적으로 조종, 통제되거나 왜곡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그 ‘정치’는 한 국가 사회 내 지배 엘리트들의 이해와 이익을 위해 작동된다. 비록 희생자 숫자가 많고, 그 대부분이 학생들이며, 방송기술의 발달로 미숙한 구조작업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보도되어 초기에는 분노와 슬픔의 파고에 어쩔 수 없었지만, 우리네 위정자들은 반전의 변곡점에 다다를 때를 기다려 왔다. 그러나 곧바로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이를 이용하여 친정부 인사들의 포섭과 보상금 등으로 타협파를 다수로 만들어 사태를 일단락 지으려는 위정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세월호 유가족들은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조직적이었고, 합리적이었으며,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당황한 위정자들은 국민들의 감정을 피로하게 만들기 위해 말로 다 표현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각도와 수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유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년이 지난 현재 아무 것도 밝혀지지 못 하거나 의도적으로 은폐된 상황에서 괴이하게도 유가족들이 ‘죄인’이 되어 버렸다. 메스트로비치의 주장의 전제와는 달리, 우리 사회는 이미 공동체가 붕괴된 지 오래다. 따라서 연대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인간들 간의 경쟁은 극대화되어 있으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와 복지 수준이 최악인 상황에서 피로감의 내용이나 진전 속도, 깊이도 서구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부로 ‘우등’과 ‘열등’을 나누는 데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다른 집단에 대해 단순한 차별을 넘어 혐오와 모멸을 가하는 행위도 서구에서의 그것과 질적인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앞에서도 강조했다시피 그러한 차별과 모멸과 혐오를 ‘국가’ 혹은 ‘국가’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받는 ‘지배 엘리트들’이 조장하거나 조종한다는 점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세월호특별법 정부시행령 폐기를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안타깝게도 이러한 위정자들의 기도에 맞서 싸워야 할 노동대중, 시민들, 그리고 지식인들 역시 잘못된 통념과 편견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피착취자나 피해자로서의 권리에는 민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행하고 있는 착취자, 가해자로서의 모습에는 매우 둔감하거나 아예 궤변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데 능하다. 극단적인 경쟁이 미화되고 복지 수준이 낮은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배태되어진 자기방어본능이라고 하기에는 그 도가 지나치다.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여론 변화 역시 감정의 기복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더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일반 시민은 물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관점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이들조차 일베로 상징되는 사회부적응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인종주의와 타민족혐오주의에 휩싸여 이주민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와 모멸의 감정을 쏟아내는 여론을 만들어낸다. 재미교포, 재일교포 등 부유한 국가에 거주하는 해외 교민들이 당하는 차별과 인종주의적 공격에는 비난에 열을 올리면서도, 열등하다고 마음대로 규정한 중국교포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정을 쏟아낸다. 살인을 저지른 이민자는 ‘개인 범죄자’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국적이나 민족의 이름으로 전체가 범법 민족이 되고 만다. 타 민족에 대한 의식 수준은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민족, 국민들 내에서도 집단에 따른 뿌리 깊은 구별 짓기와 차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데, 전통적인 전라도 혐오와 차별 외에도 여성에 대한 혐오와 조롱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소위 여성 일반에 대한 비하나 ‘잘 난 여성’에 대한 모멸과 혐오도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신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성산업이라는 사회의 가장 착취적 공간에서 나락에 빠져 신음하는 여성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다. 성매매는 거의 대부분 남성이 일방적으로 여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여성을 선택하는 형태로 ‘성적 자기 결정권’이 박탈된 인간의 매매이고, 무엇보다도 1대 1의 자유로운 거래가 아닌 중간 알선 범죄 조직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범죄행위이라는 것을 억지로 무시한다. 여성의 상당수가 가정의 문제 등으로 10대에 성매매를 시작하며, 수많은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걸릴 수밖에 없으며, 여러 이유로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가 힘들어 평생을 주변화된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줄 알면서 성적 자유와 성매매가 같은 것인 양 호도하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녀들의 생존권을 갑자기 걱정해 준다. 합법화된 국가에서 얼마나 비합법 영역에서의 성적 착취가 만연하고 있는지, 일상에서의 성차별과 성폭력이 증가하고 있는지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법을 집행하고 사회정의에 앞장 서야 마땅한 정치관료, 검경, 언론 등이 오히려 성접대 문화의 수혜자인 상황에서 이를 눈감고 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양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부인하거나 정당화하는 작태가 또 재현되는 것을 보았다. 소수 엘리트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국가가 상황을 왜곡하고 진실 추구를 방해한다면, 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직접행동이네 뭐네 하더라도 소수의 시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만의 선도적인 운동만으로는 한계가 너무 크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적, 비판적이지만 미시적, 사적 영역에서는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 억압자, 착취자, 그리고 가해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성찰해야 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00 | 추천: 0
이광조/ CBS PD 1970년대 중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실 뒷벽에는 1980년대의 장밋빛 미래를 그린 홍보물이 붙어 있었다. 잔디가 깔린 정원에서 활짝 웃고 있는 단란한 가족 옆에 자동차가 서 있는 포스터였던 것 같다. 몇 년 만 있으면 ‘마이카 시대’가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자동차라고는 마을 근처에 있는 군부대를 드나드는 지프차밖에 못 봤던 터라 현실감은 없었지만 그래도 포스터 속 이미지는 정말 근사했다. 하지만 농번기가 되면 집안일 돕느라 며칠씩 결석하는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포스터 속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장밋빛 환상일 뿐이었다. 어른들이 월사금이라고 말하던 수업료를 제 때 못내 선생님께 혼나고 땅콩잼이 든 식빵과 비닐에 든 우유를 주던 급식을 먹지 못해 기가 죽던 아이들에게 마이카 시대라는 게 현실감이 있었겠는가. 그래서인지 그 포스터에 대해 선생님도 특별하게 뭘 설명해준 것 같지 않다. 세월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포스터에 담긴 가족의 모습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의 이미지였다. 잘 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초등학교 뒷벽에 붙어 있던 그 포스터는 당시 우리사회를 지배하던 권력의 논리가 그대로 반영된 선전물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나라가 잘 살게 되고 난 뒤에나 누릴 수 있는 것이고 지금은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만 해라,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저렇게 잘 살 수 있다.’ 아마 이런 논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포스터가 말한 대로 1980년대가 되어도 마이카 시대는 오지 않았고 그 때문이었는지 자유와 민주주의는 여전히 유예되었다. 그러다가 모두가 알다시피 87년 6월 민주항쟁이 벌어졌고, 뒤를 이어 7, 8, 9월에는 노동자 대투쟁이라 불린 파업사태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 결과, 개헌을 통해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되었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결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도 두둑한 월급봉투도 국민들이 직접 싸워서야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87년 7월부터 시작되었던 노동자 대투쟁이 없었던들 90년대 이후 본격화된 대중소비 시대, 마이카 시대가 가능했을까 싶다. 독재자들의 말을 믿고 묵묵히 일을 했더라도 시간의 문제일 뿐 마이카 시대도 오고 이제 먹고 살만해졌으니 독재자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선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40년 전 초등학교 뒷벽의 포스터가 생각난 건 최근 일고 있는 학교급식을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경상남도에서는 도지사가 ‘학교는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라며 무상급식을 중단했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교감이 급식비를 내지 않은 학생들의 식당 출입을 통제하면서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돈 있는 집안 아이들까지 공짜로 밥을 먹이는 건 낭비라는 주장이 나오는 다른 한편에서 돈이 없어 급식비를 제 때 내지 못한 아이들이 식당에서 쫓겨나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에는 의무교육의 ‘의무’가 부모의 ‘의무’를 말하는 건 줄 알았다. 그래서 수업료를 제 때 못 내거나 급식비를 내지 못해 빵과 우유를 못 먹을 땐 가끔씩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의무교육의 ‘의무’가 국가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최근 몇 년 사이 우리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정책으로 실현된 무상급식, 보육 지원 등을 보면서 ‘드디어 우리사회도 조금씩 변하는구나’ 하는 희망을 품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불거진 급식논란을 지켜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우리사회가 그동안 도대체 변하기는 한 걸까 하는 회의 때문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밥 먹으러 오는 곳이 아니다.’ 교육을 입신출세의 수단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보다 잘 살고 못 살고를 떠나서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학교급식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지역의 농업과 환경, 생태를 교육하고 공동체 정신을 함양한다. 이게 교육이 아니라는 건가? 더구나 친환경 급식은 아이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농업의 건강한 발전과 환경을 보호하는 중요한 공적인 기능도 담당하고 있지 않은가. 개인주의가 뿌리 깊은 미국에서조차 친환경급식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무상급식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지금도 ‘아직은 우리가 그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좀 더 잘 살게 되면 그 때 가서 하자는 얘기다. 우리는 언제쯤 아무런 논란 없이 아이들 밥 먹일 정도로 잘 살게 될까? 재벌가들의 자산이 지금보다 한 백배쯤 늘어나고 세계 백대 부호 명단에 한국인이 한 50명 정도 들어가면 그 때가 무상급식을 할 수 있을 때일까? 글쎄, 각자 지나온 역사를 한 번 돌이켜 보시라.
2017-08-07 | hrights | 조회: 371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에 대한 형사재판이 진행 중이다. 혐의는 공직선거법상의 ‘허위사실공표죄’이다. 이미 언론에 몇 차례 보도된 만큼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대강의 사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2014년 5월 교육감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당시 조희연 후보는 고승덕 후보에 대해 후보 본인 및 그의 두 자녀가 미국 시민권 혹은 영주권자인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러한 의혹제기는 공영 방송사 출신의 한 유명기자의 문제제기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후 고 후보 측의 반론과 조 후보의 재반론이 이어졌지만, 결국 고 후보 자신의 미국 영주권 보유여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선거가 끝나고 만다(그의 두 자녀는 미국 시민권자임이 밝혀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사실 고승덕 후보의 영주권 보유 여부는 아직까지도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미 대사관 측에서 이에 대한 확인을 거부하고 있는 탓인데, 앞으로 재판과정에서라도 이 점이 분명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재판대상인 범죄의 핵심사실이 ‘허위사실’을 공표한 것이니만큼, 문제된 사안이 허위사실이라는 점은 재판의 당연한 전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검찰의 공소권 남용 여하튼 검찰은 조 후보의 이러한 의혹제기에 대해서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앞두고 전격적으로 기소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 사안은 본래 당시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후보 쌍방에 대한 주의경고조치로 마무리된 것이었다. 짐작할 수 있다시피, 당시 선거과정에서 후보들 서로 간에 대한 다소 무리한 의혹제기가 계속되었고(예컨대, 고 후보는 조 후보가 통진당과 연루되어 있다거나 또 그의 아들이 병역특혜를 받았다거나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쌍방의 고발을 접수한 선관위는 지나친 선거과열을 이유로 양자 모두에게 경고조치를 하였으며, 이후 후보들이 서로 화해함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선거가 끝난지 4개월여 지난 시점에서 한 보수단체가 조 후보를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다시 문제되었지만, 경찰은 이를 이미 선관위 단계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보고 “혐의 없음” 결정을 하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검찰이 이 결정을 번복하여 이를 다시 기소한 것이다. 이쯤 되면 검찰의 의도가 적이 의심스러워진다. 시효 하루 전까지 망설였다는 것은 검찰 수뇌부가 이 사안의 득실을 여러 차례 계산했음을 드러내 준다. 요컨대, 진상은 단순한 것이다. 선거과정에서 흔히 있어왔던 상대후보에 대한 의혹제기, 설령 과장이나 확대된 허위의 사실이 다소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큰 문제없이 이해되어 오던 정치적 표현을, 새삼스럽게 ‘진보교육감’을 상대로 범죄로 낙인찍는 것이다. 죄판결이 나오면 당연히 개가를 올리는 것일 테고, 무죄판결이 된다 하더라도 큰 손해는 없을 것이다. 검찰이 정치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진보교육감은 어느 정도 상처를 입을 테니 말이다. 피디수첩 사건에서도, 미네르바의 부엉이 사건에서도 그랬다. 목표는 정당한 처벌을 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을 겁먹게 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당사자, 그리고 많은 일반 시민의 의사자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검찰이 혹은 권력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생각과 표현말이다. 허위사실공표죄의 취지 그러나, 혹자는 조 교육감의 행위가 공직선거법 제250조가 규정하는 허위사실공표죄에 해당하는 것은 사실이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선거법이 규정하는 선거범죄 전체, 그리고 해당 조항의 의미를 찬찬히 되새겨 보아야 한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란 가장 많은 정치적 자유, 특히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고 실현되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선거법이란 이와 같은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후보자에 대한 가능한 모든 정보를 알게 하고, 이로부터 충분한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선거법이 지나치게 많은 규제를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헌법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때에 규제가 필요한 것일까. 선거 공간에서 허용된 정치적 자유가 일방에 과도하게, 즉 공정하게 행사되지 않아 유권자의 올바른 선택을 방해했을 때이다. 즉, 선거법의 규제는, 더욱이 선거범죄는 해당 행위가 선거의 공정성을 침해했을 때에만 성립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선거의 자유와 국민의 정치적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선거법의 취지에 부합하는 해석이다. 구체적으로 허위사실공표죄는 어떨까. 사실 이 범죄에 대해서는 폐지론을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상대후보의 악의적 공격에 대해 당시 미국 대통령 후보였던 오바마는 자신의 출생증명서를 공개하며 웃어넘기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처럼 사실과 허위사실의 구분, 그리고 이를 통한 정치적 득실은 다만 유권자가 판단할 몫일 뿐, 굳이 이를 법으로 규제할 필요는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이 바람직한 정치문화, 선거문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묘하게 계산된 허위사실공표의 경우이다. 선거를 하루 앞둔 날 저녁, 상대후보에 대한 비방과 함께 그의 검증되지 않은 전력이 기재된 전단지가 살포되는 경험을 우리는 잊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특정한 주장에 대해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일방적인 공격과 비난을 당한 상태로 선거운동을 마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이야 좀 덜한다고 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당한 제한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정치적 지형에서 이런 흑색선전은 선거막판에 흔히 이용되던 단골메뉴였다. 이런 탓으로 우리 선거법에서 허위사실공표죄를 없애기는 어렵다고 하지만, 이 조항이 적용되어야 하는 때는 바로 이런 경우로 한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에게 반론의 기회를 주지 않는, 그리하여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거국면을 이끌어 가는, 간단히 말해 위에서 보았듯이 선거의 공정성을 침해하는 때에만 이 범죄가 성립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상대방에게 충분한 반박의 기회를 보장하는 (허위)사실의 공표는 후보를 검증하기 위한 정당한 정치적 표현의 하나로서 유권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바람직한 기능을 하는 탓이다. 사진 출처 - 뉴스1 해석의 문제 이런 관점에서 이 사건을 판단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아무리 보아도 조 교육감의 행위가 선거의 공정을 해할 정도로 심각하게 부당한 허위사실의 공표로는 보이지 않는다. 상대후보는 자신의 주장을 충분히 개진했고, 모든 과정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사안에 대해 경고 정도로 마무리를 지었고, 경찰 또한 별다른 혐의가 없다는 결정을 한 것일 터이다. 요컨대, 이 사건의 행위는 허위사실공표라기 보다는 상대후보에 대한 정치적 의혹제기에 가깝다. 혹 그러한 표현 가운데, 허위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반론과 재반론, 검증과 토론의 과정에서 진실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엄격하게 증명될 수 있는 사실만 정치적 표현의 대상으로 허용한다면, 선거과정에서 필요한 충분한 정보의 제공이나 후보의 자질에 대한 문제제기, 광범위한 토론의 기회 등은 상당부분 봉쇄되고 말 것이다. 이 밖에도 이 조항과 관련해서는 이른바 ‘미필적 고의’의 문제가 있다. 고의란 범죄의 구성요건을 인식하고 결과의 발생을 원하는 것인데, 이 때 미필적 고의는 그 인식이나 결과의욕의 정도가 약한 경우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이 범죄에서는 ‘허위사실’의 인식여부가 문제로 된다. 즉, 어떤 사실을 공표하거나 의혹을 제기할 때 그 사실이 진실인지 허위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때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를 이 조항의 처벌범위에 포함시키기 위해 미필적 고의라는 수단이 동원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 조항의 처벌범위를 넓히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정치적 표현자유 보장이라는 이 법률의 취지와는 배치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같은 사실관계를 내용으로 하는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소송에서 우리 대법원이 취하고 있는 이른바 ‘현실적 악의의 법리’와도 비교된다. 현실적 악의의 법리란 공인, 특히 공직자나 정치인에 대해서는 그 공공적․사회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들에 대한 비판이 넓게 허용되어야 하고, 따라서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은 ‘뚜렷한 악의나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공격이 아닌 한’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말한다. 통상 민사소송의 경우보다 형사소송이 더욱 엄격하게 범죄 성립의 요건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대법원의 입장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물론 문제되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진실인지 아닌지 불분명할 경우가 많을 것이고 이러한 때에 행위자로서는 대부분 ‘몰랐다’고 변명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처벌의 공백을 피하려 하는 법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처벌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역시 이 조항의 목적이나 취지를 생각하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미필적 고의를 보완하는 추가적인 요건을 요구하는 방법, 예컨대 ‘비방의 목적’을 포함시키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법률이 바뀌지 않는 한, 현재의 조항에 대한 해석으로는 무리가 있다. 나는 오히려 위에서 살펴본 ‘선거의 공정성 침해’를 기준으로 하는 제한으로 많은 경우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행위자가 허위사실 여부를 알았든 몰랐든 선거의 공정성을 침해하지 않은 때에는 굳이 처벌할 이유가 없고, 반대로 공정성이 침해되었을 때에는 행위자에게 사실의 허위여부를 잘 알아보아야 할 높은 의무가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조희연 교육감에 대한 재판은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시민들의 건전한 법감정이 이 사건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지 자못 기대도 되지만, 그러나 우리의 시민배심원들의 평결은 아직 법관에 대한 구속력이 없고, 또 재판을 진행하고 법리를 설명하는 재판부의 영향력은 배심원에 대해서도 결코 작지 않다. 이런 이유로 일반 국민들은 물론 법관을 포함한 법률가들의 이 조항에 대한 관심을 바라마지 않는다. 선거범죄, 특히 허위사실공표죄는 이제 그 범위를 좀 더 좁혀 해석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흑색선전과 색깔 비방이 난무하던 선거문화도 이제 좀 달라졌다고 봐도 될 것 같으니 말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63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