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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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길주희(인권연대 간사),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라영(문화평론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사진. 팔레스타인 인권단체에서 찍은 벽화 “To exist is to Resist”, 출처: 사단법인 아디 지난 8월 10일 새벽,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 북부 가자 시티의 알 타비인(al-Tabin) 초등학교를 공습하여, 최소 100명이 사망했다. 이 학교는 가자 지구 내 다른 학교들처럼 전쟁이후 피란민들의 대피소로 사용하고 있다. 현지 언론사인 알 자지라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학교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이스라엘 군이 이 일대 물 공급을 차단해 피해를 더욱 키웠고, 희생자의 다수는 여성과 아동, 노인들이라고 전했다.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지만 이스라엘군은 공식발표를 통해 “이 학교는 하마스의 지휘본부로 사용되었으며 (이스라엘군은)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8월에만 벌써 다섯 번째이다. 8월 1일 가자 시티의 다랄 알 마그라비(Dalal al-Maghrabi) 학교를 이스라엘은 공습하여 팔레스타인인 15명이 사망했고 29명이 부상당했다. 3일에는 하마마와 알 후다 (Hamama and al-Huda) 학교가 피격되어 17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당했다. 4일과 8일에는 나세르와 핫산 살레메(Nasser and Hassan Salameh) 학교와 아둘 파타 하무다와 아즈 자흐라(Abdul Fattah Hamouda and az-Zahra) 학교를 이스라엘군이 공습하여 각각 30명의 사망자와 19명의 부상자 그리고 17명의 사망자와 16명의 실종,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은 공격받은 학교들이 하마스와 연관되었기에 폭격했다고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내놓지 않고 있다. 국제사회에는 전쟁 중에도 지켜야할 원칙이 있고 법이 있다. 학교와 병원을 공격하는 것은 이 원칙과 법에 어긋난다. 특히 피난민이 거주하는 피난시설을 공격하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이고 집단학살이다. 이미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이 집단학살에 해당될 수 있음을 지적했고, 국제형사재판소(ICC) 역시 이스라엘의 총리를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군은 여전히 200만 명의 가자 지구 주민들 대상으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폭격을 할 것이고 하마스 때문이라며 학살을 정당화 할 것이다. 2024년 7월 중순, 가자 지구에서 여성인권활동을 20년째 하고 있는 여성활동가 파티마는 아디와의 온라인 회의에서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이야기했다. “작년 10월 13일 이스라엘의 강제대피령으로 뿔뿔이 흩어진 활동가들을 여기(가자 지구 칸 유니스 지역)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사무실을 다시 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사무실 임대료도 엄청 비싸다. 이스라엘은 여기도 폭격 받을 수 있지만 (그녀들의 이전 사무실은 작년 10월에 폭격 받아 파괴됐음)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기쁘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팔레스타인)여성과 아이들이 너무 많다. 일단 그들을 위해 심리지원 활동부터 시작하려 한다.”  파티마는 벌써 3번에 걸쳐 강제이주를 당했고, 현장의 여성 활동가들 역시 이스라엘의 강제대피령에 따라 가자 지구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이스라엘의 폭탄 때문에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지내고 있지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자 사무실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챙긴다.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글귀가 있다. “존재하는 것이 저항하는 것이다!(To exit is to resist!)“ 그들은 존재 자체로 저항하고 있으며 76년간의 이스라엘의 점령기간 중 가장 심각한 폭력상황인 지금에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이 존재하는 이상 이스라엘의 전쟁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2024-08-16 | hrights | 조회: 370 | 추천: 5
신종환 / 공무원 인권연대에 글을 기고할 기간이 다가오는데 글감이 생각나지 않으면 대단히 복잡한 기분들이 날 둘러싼다. 더군다나 나의 글쓰기는 직장생활과 서울이 아닌 변방에 산다는 이유를 든든한 핑계삼아 공부를 미루기는 오래되었고 어중간한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섞인 기분에 단편적인 일상의 감흥을 얼기설기 엮어 동네 회사인의 생각 파편들에서 근거 없는 어떤 사회적 징후를 캐내서 의견으로 만드는 일의 변주가 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이런 글을 계속 써나가는 건 이런 자잘한 생각 조각을 굳이 글로 쓰는 사람이 인권연대에는 별로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옳은 길의 당위를 체화한 사람들의 글은 체화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닿지 않고, 옳은 길로 가야할 까닭은 잊은 사람들은 체화된 사람들의 글을 배척함을 당당하게 전시하므로. 사실 인권연대에 올라오는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옳은 길에 대한 물음을 내려놓은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래도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감흥들을 계속 엮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글은 써야 하고, 없는 생각을 만드는 것보다 쉬운 것은 전에 있던 생각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것이기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생각들을 다시 꺼내보는 차원에서 최근의 부정적인 현황들을 되짚거나 10년 전 즈음 썼던 글들을 다시 훑어보곤 하는데, 오늘은 그 글들의 구체적인 의견이 아니라 그간 예전의 나를 살폈던 과정을 엮었다. 예전을 읽다보면 한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몸적 특징과 그 사람을 둘러싼 것들의 집합체라는 걸 강하게 느낀다. 스스로에게 맞는 방향을 찾고자 했지만 그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나날들에서 오는 방황, 그래도 그 나날들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글귀가 쌓여서 만든 어떤 무게감들을 품은 나는 과거에서 애써 쌓아온 의식적 관성이 사그라든 지금의 나와는 다른 타인이었다. 타인이 된 나와 지금을 비교하면서 길을 걷는 것과 길을 생각하는 것의 낙차를 조금은 짚어볼 수 있었다. 신체적 체감과 생각의 연관성 등에 대해 현대 학자들의 과학적으로 접근한 것과 과거의 학자들, 그리고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로마노 과르디니의 맥락이 상통하는 건 역시 행위로 투신한다는 행위가 주는 공통적 영향을 각자의 형태로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생각들은 대부분 부유하기 마련이고 나아가 어느 것이 내가 기워낸 생각인지 외부로부터 여과되지 않고 유입된 의견인지, 그로 인한 생각의 외피를 쓴 감정인지 구분하기가 어렵고, 그런 불안한 부유에서는 작은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의미를 찾지 못해 더욱 커지게 되어 실제로 더욱 고통받게 된다. 돌이켜보면 내가 공황약을 먹게 된 시점도 내적으로 품고 있던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하고 새롭게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타인과 함께 한다는 관념을 어떤 식으로든 행동으로 옮겨 스스로의 일상에 그만큼 공간을 내어주면, 타인이라는 창이 내게 스며서 새롭게 의미를 떠올릴 풍경을 보여준다. 이는 관념적 실천과 신체적 실천에서 비슷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예순즈음에 회의감에 젖어있던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순례길에서 느낀 신체적 각성을 비행청소년들에게도 전달하려고 했고, 노동가수 박준이 그의 노래 ‘옆을 쳐다봐’에서 옆에 타인이 있다는 걸 인지하면(물론 옆의 존재가 한사람의 인격적 대우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인지하기 까지는 여러 지적⦁정서적 작업이 필요하지만)대자적 각성을 할거라고 예측하는 점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길의 목적지까지 있는 현실적인 제약과는 별개로 길에 서있을 때 보이는 풍경과 거기서 비롯되는 실감을 통해 개인적 한계과 동시에 작은 변화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로마노 과르디니가 말한 건강한 성년이라고 이해되고, 김준산 작가가 강조한 몸의 정화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러지 못할 수는 있지만 내일은 어제아는 달리 미뤄둔 공부를 하고 하지 않았던 일들을 다시 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오늘의 다독임을 받을 내일의 내가 우연히도 스스로를 가꾸고, 마음에 다시금 타인을 들일 공간을 만들어낼지도 모르니까. 세상의 추이와는 별개로, 세상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있고, 길은 우리에게 언제나 힘을 준다고 서로에게 상기하는 일은 늘 필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2024-08-07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2
이원영 /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뜨거워지는 지구에 미안하다. 에어컨 없이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참을성이 점점 줄어드는 탓인지, 이젠 매일 매일 에어컨을 튼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골목길을 걷다 보면 에어컨 실외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엄청나게 건물 밖으로 쏟아져나온다. 도시만 그런 게 아니다. 에어컨이 필요 없었던 시골집에 나이든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은 값비싼 에어컨을 설치했고 그늘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느낄 수 있었던 시골 산바람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지 오래되었다. 올해 여름은 폭우와 불볕더위가 번갈아 오가는 것도 모자라서 동시에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건 전 지구적인 현상이란다. 지구가 뜨거워지면 기후 이변은 점점 더 심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우리의 습관과 자본주의 속 상품 생산과 소비 방식은 뜨거운 지구를 점점 더 뜨겁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어떤 정치세력들은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 기후위기 현상조차도 과장과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구 환경, 생명이고 뭐고 이윤 추구라는 가치 앞에서는 애써 외면해야 할 현실이니 그렇다. 정치는 뜨거워지는 지구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을까?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기후위기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 부각되지 않는 정말 이상한 나라이다. 방송이나 신문 지면에서 기후위기 특집 방송 보도가 연이어도 정치인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별로 애를 쓰지 않는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용산만 해도 마찬가지이다. 용산구 의원들이 몽골에 환경문제에 대한 해외연수를 간다길래 뭔가 좀 배워 오려나 기대를 했는데 외유성 연수였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구청이 관리하는 공공기관 건물 옥상에 태양광 발전소를 설치하려는 노력은 애당초 하지도 않는다. 문제를 정치(인)에 돌리는 일은 역시 쉬운 일이다. 남 탓하는 일에 우리는 익숙하다. 남 탓하는 행동은 나의 책임을 회피하는데 최고다. 그 사회의 수준은 공동체 구성원의 수준에 달렸다. 최근에 용산시민연대 회원들과 김누리 교수의 새 책 <경쟁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책으로 모임을 하고 있다. 또, 하승우, 이상석 인터뷰 책 <내가 낸 세금,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책도 함께 읽으면서 의정 참여 활동을 고민하고 있다.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우리 사회의 무기력한 시민들의 모습, 경쟁주의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학생들의 절망감이 매우 슬프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시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사회가 어떻게 가능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피부로 겪는 문제들이 극복하기 매우 어렵다는 사실에 머물러 있다. 저출생 사회, 자살 공화국, 입시 지옥, 비정규직 차별 등등. 그런데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이런 문제들에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우리가 내는 세금이 우리를 위해 온전히 쓰이고, 우리가 뽑은 정치인들이 유권자, 시민들의 호민관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하는 일에는 많이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문제가 또 다른 문제를 낳고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는 악순환이 좀처럼 깨지지 않는 것이다. 결국, 기후위기의 피해자가 나서야 바뀐다. 기후위기 문제만 해도 자본주의 문제나 기후 깡패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일을 뛰어넘어야 한다. 기후위기 속에서도 부자들은 에너지를 엄청 많이 소비하지만, 자신들의 문제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피해는 가난 나라, 가난한 시민들, 미래세대들이 뒤집어쓴다. 노동자들과 청소년들이 앞장서서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싸우고 정의로운 전환을 외쳐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나라 교육문제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에게 기대하지 말자. 그들은 관심도 없고 의지도 별로 없다. 결국,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시민들과 함께 경쟁교육을 없애고 과감하게 교육 혁명을 해야 한다고 꿋꿋하게 주장하고 행동해야 할 때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모여있는 소통 방에 두 가지 중요한 일정이 공지되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9월 7일 기후정의행진과 10월 19일 교육혁명행진이다. 꿈같은 일을 이루려면 시민들의 행진이 있어야 한다. ”인류역사는 어쩌면 몽상의 역사입니다. 인류가 성취한 모든 위대한 이상은 한때 누군가의 몽상이었습니다. 노예해방, 보통선거, 흑인해방, 민주주의, 공교육, 사회복지, 무상급식 등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누리는 거의 모든 이념과 제도는 한때 이상주의자들이 꿈꾸던 비현실적 몽상이었지요. 우리 아이들을 끝없는 경쟁으로 내모는 ‘경쟁교육’을 넘어 우리아이들이 자신의 존엄을 자각하고 타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존엄 교육’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아닙니다.“ (경쟁교육은 야만이다. 16-17쪽) 기후위기 해결과 교육 혁명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함께 행동해야 한다. 뜨거운 여름에 이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뜨거워진다.
2024-07-31 | hrights | 조회: 413 | 추천: 4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얼마 전 큰 물이 들 때 저기 한려수도 한 귀퉁이 경남 사천으로 인권교육을 가야 했다. 학교와 교장들이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하는 대면교육으로 몇 달 전부터 그곳 특수교육지원센터가 무척 많이 애쓴, 지역의 통합 교육을 위해 중요한 행사였다. 바로 앞까지 어떻게 갈지 나는 결정하지 못했다. 혼자 운전하면 왕복 12시간이었다. 자칫 가는 길에 수해라도 나면 제때 도착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일정을 맞추더라도 정작 강의할 체력이 남아 있을지, 무사히 다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어 고속 버스도 위험했다. 기차는 없었다. 다행인지 사천 공항은 가까웠다. 김포 공항에서 뜨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진에어 항공사라는데 그곳까지 장애인 승객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경험과 정보가 없다. 더구나 대한항공의 자회사 임에도 진에어는 과거에 나와 같은 목발을 사용하는 장애인 승객을 차별하여 간부임원이 직접 당사자의 집에까지 찾아가 사한 사례도 있었다. 김포공항에도 억수와 같은 비가 쏟아지니, 목발로 가면서 애써 입은 양복과 셔츠를 어떻게 뽀송하게 지킬지도 알 수 없다. 일단 휠체어 서비스를 요청하고 비행기 출발 시간 오후 4시 20분 보다 3시간 먼저 김포공항 진에어 데스크 앞에 도착해야 한다. 비장애인 손님은 한시간이면 넘쳐나게 충분한 시간인데 나 혼자 가려면 남들보다 3시간의 시간을 더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어떤 웃지못할 차별과 사건들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3시간 전에 가려면 항공사 접수처에 도착하려면 그 1시간 전까지는 박터지는 김포공항 1주차장 장애인주차구역에 도착 해야 한다. 자칫하면 주차하는데만 2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폼나는 노트북은 언감생심이다. 2kg도 넘지 않는 노트북 가방도 두 손을 모두 목발질에 써야 하는 나로서는 20kg 캐리어 보다 더 무겁고 번거롭다. 또한 공항의 휠체어 서비스는 주차구역에서는 불가하기 때문에 비상 체력은 남겨둬야 한다. 시설에 살지 않고 혼자서 직업 활동을 하는 뇌병변장애인의 삶은 늘 시간과의 양자적 전쟁이다. 그래서 동트기도 전인 새벽 4시에 잠을 깼다. 이제 샤워하고 옷을 챙겨 입고 짐을 챙겨 두어야 한다. 내 장애가 만드는 경직은 내 시간에게 작용하는 중력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내 작업은 남들보다 2~3배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비행기 뜨는 5시간 전까지 깨어 있을까 하다가 비행기에 오를 때 이동 계단에 구르는 아찔한 일은 벌어지면 안되기에 내 순발력을 위해서 잠시 눈을 붙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일어나다 침대에서 떨어지면 아니된다. 잠시 고민했다. 내가 국가 급여를 거부하고 개인적으로 찾아서 고용한 시급 2만원 + 특별 수당을 주기로 한 대학생 활동지원사를 호출할지. 옷을 다 갖춰입고 출발 준비를 하더라도 정장에 맞는 양말을 신으려면 현관문 신발장 앞에서 10분 넘게 걸릴 지도 모른다. 주차지역에서 공항 지붕이 있는 횡단보도 30미터를 가는 동안 이 양복도 홀딱 젖어 버릴지 모른다. 나같이 양쪽 어깨 목발로 넓게 휘저으며 오랫동안 보행한 뇌병변장애인에게 비가 오는데 무작정 긴 장대우산을 내미는 사람들, 무게를 덜기위해 엉덩이허리가방만 메고 공항 주차장 횡단보도 잎에서 신호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빈카트 이용하라면서 내 앞으로 가져오는 사람들의 당황스러운 마음들은 어찌 멋지고 매너있게 거절할 것인가? 최근에 서울시가 장애인의 탈시설지원조례를 폐지하고 공공돌봄을 책임지던 서울사회서비스원도 문을 닫겠다 했다. 그러면서 오세훈 시장은 점진적으로 장애인 활동지원 중개기관은 활동지원서비스 이용자 주말 서비스 이용을 하지 못하도록 할 방침을 공지 내렸다. 내가 국가의 장애인 활동지원 급여를 거부한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의 인권과 생존을 정치인 입맛에  따라, 전문가의 탁상 공론에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당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줬다 뺏는 그 폭력성 때문이었다. 장애인의 손발과 지역사회활동을 사회적으로 구체적으로 책임져서 비장애인과 동등한 시민권과 사회권을 보장하겠다고 해놓고서, 주말에는 먹지도 씻지도 돌아다니지도 말라는 뜻인가? 이제 중증 장애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이 받아 주는 시설로 강제 이주라도 하라는 말인가? 서울시에 따로 장애인 보호구역이라도 만들려는 것인가? 내가 1박 2일 강의를 하면서 버는 돈은 고작 버는 돈은 70만원이 채 안된다. 그러나 그 70만원을 벌기 위해 내가 지역 사회와 국가를 향해 쓰는 돈은 숙박비, 교통비 30만원에 개인 활동지원사 인건비 16시간 32만원에 숙박 수당, 야간 특별 수당까지 붙이면 40~50만원이 넘어갈 것이다.  즉 통화 회전율에 따른 경제 효과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내 적자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아무리 장애인 시설 앞에 안전을 내세워도 그건 시설 관리자에 따른 구속 영장도 없는 감금이며 아무리 장애인 시설 앞에 인권을 붙여도 시설 설립자와 운영자들은 장애인과 함께 시설에 들어와서 살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장애인들을 이윤으로 보지 않는다 말해도 장애인 거주자에게 시설 재산권에 대한 지분이나 결정권을 내어주지 않는다. 장애인들은 서울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시민, 특히 원주민이 될 수 없다.
2024-07-12 | hrights | 조회: 337 | 추천: 0
정한별 / 사회복지사  2020년 2월 19일, 청도대남병원 정신과 폐쇄병동에서 코로나19 국내 첫 사망자가 나왔다. 그 후 입원환자 103명 중 101명이 감염자로 확진되었고, 첫 확진 이후 엿새 만에 7명이 사망했다. 첫 사망자의 몸무게는 고작 42kg 밖에 되지 않았다. 4년 전,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었고, 아무나 잘 지키고 있었던 사회적 거리두기는 정신병원, 장애인거주시설, 노인요양시설에서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2022년 8월, 전국에는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특히 서울은 관측 역사상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기록적인 폭우는 사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 않았다. 2022년 8월 9일 밤,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집에서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40대 여성과 그 여동생, 그리고 여동생의 딸이 숨진 채로 발견됐다. 여동생은 사고 전날 집으로 빗물이 들어오자, 지인에게 침수 신고를 해 달라고 했고, 지인의 신고로 배수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가족은 아무도 돌아올 수 없었다. 여동생의 언니는 발달장애가 있었다. 사진: 이모작뉴스  전염병 상황 하에도, 수해에도, 화재에도,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대개 돈이 많고, 전문직에 종사하며,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뉴스를 본 일이 없다. 정신장애가 있는 가난한 사람, 반지하에 사는 발달장애인, 열악한 환경에서 불안정한 일자리를 구할 수 밖에 없는 이주노동자까지. 사회가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 대개는 사회에서 쉽게 배제되다가 이런 뉴스가 있을 때나 비로소 대중에게 드러나게 된다.  2024년 6월 24일, 경기 화성시의 한 리튬배터리 공장의 화재로 23명이 사망했다. 한국의 배터리 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피해자의 대다수는 이주노동자였다. 언론의 발표에 따르면 부상자는 8명, 사망자는 중국인 17명, 한국인 5명, 라오스인 1명 등이었다. 이주노동자 100만명 시대, 국내 체류 외국인은 200만명이 넘는 시대라고 하지만, 국내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피해자의 대다수가 이주노동자라는 사실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 사진: BBC  문득,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 중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안산과 화성을 다녔던 2019년이 떠올랐다.  장애가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모으는 일을 했다.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 중 장애가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외국인으로서 겪는 차별과 장애인으로서 겪는 차별을 함께 경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질문을 했고 다양한 답변을 들었다. 그 중 아직도 기억나는 답변이 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노동자로 한국에 입국하는 일은 어렵다. 일을 하다가 산업재해를 당하고 장애를 갖게 되었다면 한국에서 일을 할 수가 없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한국을 떠나게 된다. 한국에서 장애를 갖게 되면 두 가지 방법으로 한국을 떠나게 된다. 첫 번째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 두 번째는 자신 스스로 죽어서 떠나는 일.  장애 때문에 차별을 겪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먼저 외국인이어서 차별을 겪는 일이 많다. 아, 외국인도 백인은 다르다. 그런데, 장애를 갖게 되면 한국에서 살 수조차 없으니, 그런 의미에서 차별을 겪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출입국관리법 제11조는 입국의 금지와 관련된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제1항 제5호에는 “사리분별력이 없고 국내에서 체류활동을 보조할 사람이 없는 정신장애인, 국내체류비용을 부담할 능력이 없는 사람, 그 밖에 구호(救護)가 필요한 사람”은 입국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물론 해당 규정이 모든 장애인의 입국을 금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들 생각하는 완전성을 갖주치 않은 몸들에게 한국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 일을 하다가 장애를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장애인등록이 가능할까? 사실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등록을 한 외국인은 소위 선택받은 자들이다. 외국인의 장애인등록은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에 따라, 재외동포(F-4), 영주권(F-5), 결혼이민자(F-6), 난민(F-2-4)비자를 가진 자만 제한적으로 가능하다.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재외동포 및 외국인의 장애인 등록) ① 재외동포 및 외국인 중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제32조에 따라 장애인 등록을 할 수 있다.   1.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제6조에 따라 국내거소신고를 한 사람   2. 「주민등록법」 제6조에 따라 재외국민으로 주민등록을 한 사람   3. 「출입국관리법」 제31조에 따라 외국인등록을 한 사람으로서 같은 법 제10조제1항에 따른 체류자격 중 대한민국에 영주할 수 있는 체류자격을 가진 사람   4. 「재한외국인 처우 기본법」 제2조제3호에 따른 결혼이민자   5. 「난민법」 제2조제2호에 따른 난민인정자  장애인등록이 되면, 외국인이 내국인에 비해 차별없이 장애인복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한국의 장애인복지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장애인 등록을 전제로 해서 제공되고 있다. 이에 장애인 등록 후, 장애의 특성과 정도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중증의 발달장애인에게는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지급되는 장애연금과 발달장애를 이유로 제공되는 발달장애 관련 서비스들이 제공되는 것이다.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는 외국인이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장애인 등록을 한다면, 장애연금과 활동지원서비스 등 장애의 특성과 정도를 고려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유는 바로,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 제2항에 있다.  “장애인복지법 제32조의2 ②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제1항에 따라 등록한 장애인에 대하여는 예산 등을 고려하여 장애인복지사업의 지원을 제한할 수 있다.”  악은 디테일에 있다고 했나, 국가는 이렇게 세심하고 꼼꼼하게 외국인의 국적과 장애를 이유로 이중차별을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2024년 장애인복지사업안내 제2권에 따르면, 장애인복지서비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장애인연금(중증장애인에게 지급), 장애수당(경증장애인에게 지급), 장애아동수당, 활동지원서비스, 발달재활서비스 등은 난민인정자 등에 한해서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장애인 자동차 표지 발급”처럼 등록 장애외국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가 있기는 하다.  이에,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제2·3차 병합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2022)”를 통해, 한국의 장애외국인에 대한 차별에 우려를 표명하며, 국적과 체류자격에 상관없이 필요에 따라 서비스를 보장할 것을 권고하였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자국 장애인에 대한 지원에도 따가운 눈총과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사회에서 국내에 체류하는 장애가 있는 외국인까지 고려하는 일은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니냐는 인식도 있다. 여성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자고 주장할 때도,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도, 다수의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비난하곤 했다. 사회변화의 출발은 다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때, 정말 아닌게 맞나 하고 의문을 던지는 소수의 웅성거림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권리 보장은 국적을 불문하고 보편적인 인권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2024-07-03 | hrights | 조회: 360 | 추천: 4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8개월 동안 지속되고 있다. 계절은 가을을 지나 겨울과 봄을 거쳐, 한국도 팔레스타인도 무척이나 더운 여름이 됐다. 37번째의 주말을 지났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서의 전쟁범죄는 멈추질 않고 있고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초창기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언론을 뒤덮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련 뉴스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고 사람들의 관심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나블루스 라는 도시에서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 프로젝트 모니터링을 하고 있던 필자는 당일의 현지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날은 현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수십 년간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철옹성과 같은 이스라엘의 장벽이 무너지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강탈당한 빼앗긴 자신들의 땅에 조금이나마 도달한 순간이었기에 그들은 기뻐했고 환호했다. 하지만 전 세계의 시선은 당일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의 폭력성에 사로잡혔다. 언론과 권력에 의해 반복적으로 노출된 이스라엘의 피해는 참혹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2023년 10월 10일 (사진: 알 자지라) 이스라엘은 곧바로 하마스 박멸을 선언하며 인구 230만명의 전세계적인 인구밀집지역에 수백, 수천 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초창기 3달 동안에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핵폭탄 2개 수준이라고 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의 사망보다는 아이와 여성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병원과 구급차가 공격당하고 학교와 종교시설, 난민보호시설이 파괴됐다. 전쟁을 보도하는 기자는 취재 중 자신 가족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보도해야 했다. 10월 7일이후 짧은 6일간의 휴전기간을 빼고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늘어갔다. 사망자와 부상자, 실종자를 합친 숫자는 십만명을 훌쩍 넘어섰고 이제는 구호물품을 받으러 오는 이들까지 공격하고 있다. 계속되는 민간인 학살에 전세계의 비판이 높아지고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도 휴전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오늘도 이스라엘의 폭격과 군사 공격은 멈추질 않는다.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격퇴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지만 소수의 지도부를 제외하고는 하마스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스라엘 주장에 따르면 전체 사망자 중 1만 5천명이 하마스라고 하는데, 이들이 하마스 전투원인지 민간인 인지 구분하는 최소한의 정보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전쟁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의무가 있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지키지 않고 있다. 유엔도 미국도 그 어떤 나라도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와 학살을 막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박멸을 목표로 하지만 하마스와 너무도 무관한 이들이 계속 살해되고 있고,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최악의 현실은 나날이 갱신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전쟁의 참상을 치유하고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엔이라는 기구를 창설하고 각종 국제조약과 법령을 만들었다. 특히 제노사이드 협약은 나치의 유대인학살을 반복시키지 않기 위해 만들어 졌지만 그 제노사이드 협약으로 이스라엘은 제소되었고 가해자임을 판정 받았다. 세계대전을 막지 못해 큰 참화를 겪었던 인류는 이스라엘의 지독한 점령을 70년 이상 견디며 지내는 이들의 처절한 현실을 어찌 바라봐야 할까? 우리 일이 아니라고 무심한 듯 지나쳤던 시간들이 쌓여 누군가에게 이토록 절망적인 현실을 발생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2024-06-27 | hrights | 조회: 364 | 추천: 6
신종환 / 공무원 시청 주변에는 내가 자주 보는 동물 친구들이 몇 있다. 시청 직원 주차장 뒤쪽에는 해조류 도매업을 하는 노부부의 창고 겸 작업장이 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창고 앞에는 2m 조금 안되는 줄에 고양이가 묶여 있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 슬쩍 물어보니 갑자기 죽었다고 했다. 나처럼 오가며 고양이를 이뻐하던 집배원 아저씨는 아마 안 묶인 채 살다가 어느날부터 묶여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죽었을 거라고 했다. 또 어느 날인가부터는 내 손바닥만한 바둑이 새끼 고양이가 창고 앞에 나타났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창고 쥐 잡는 용으로 얻어왔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왜 병원에 안데려가나 욕하면서도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아 허락을 구하고 병원에 데려가 주사를 맞히고 약을 타서 하루에 세 번 귀에 발라주고 안약은 하루에 두 번 넣어주라고 했다. 틈틈이 가보니 점점 건강해지는 것 같았던 고양이는 다음 예방접종을 맞히기로 한 전날 내 앞에서 차에 깔려 죽고 주인 아저씨와 삽으로 시청 주차장 앞에 고양이 간식과 묻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노랑 고양이가 다시 생겼고 나는 무심코 아주머니한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했다. 정도 붙이기 전 고양이는 얼마 되지 않아 비오는 날 창고 문앞에서 죽어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이제 저집이랑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하던 어느날 또 고양이가 나타났다. 또또 속으로 온갖 욕을 했지만 이번 친구는 제법 오래 살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트럭에 꼬리가 찝힌 친구를 내가 병원에 데려가고 수술 시키고 있었다. 미역집 아줌마는 지금도 이름없이 야옹이라고 얘를 부르고 나는 병원 데려가던 날부터 얘 이름을 맘속으로 또또라고 지었고 또또는 아직 잘 지낸다. 시청 뒤편 인근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골목에는 1m 안되는 줄에 매인 콜리 믹스로 보이는 강아지가 있었다. 똘똘이 자유롭지 못한 개 특유의 발랄함에 마음이 안좋아서 출퇴근 때마다 간식을 주고는 했는데 어느날 마주친 주인이 얘 이름은 똘똘이라며 마음에 들면 데려가 키우라고 했다. 아저씨의 태도에 속으로 ‘음 주인이 시발놈이군.’ 하고 좀더 자주 가서 놀아주던 어느날인가 똘똘이는 혈뇨를 보더니 배가 부풀어 올랐다. 딴에는 챙겨준다는 생각인지 집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사료 대신 잔반을 주길래 그러지 말라고 하고는 내가 곧 병원에 데려간다고 했다. 다음 날 똘똘이는 보이지 않았고 짐작대로 죽었다. 그러고 일주일 즈음 뒤에 누가 봐도 믹스인 강아지가 똘똘이 주인 아저씨 옆에서 발랑 거리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개를 또 데려 오셨어요?” 라고 묻고 아저씨는 모르는 개인데 자기 따라온다고 데려고 키우라고 했다. 더운 날이고 열심히 내게 달려들어 냄새 맡고 핥아내는 친구에게 물이랑 먹을 거라도 주려고 잠시 차로 간 사이 이친구는 없어졌다. 한시간 내내 보이는 사람마다 물어보니 여길 갔다 저길 갔다 제보가 있어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나는 혹시 주인이 있을까봐 올릴 수 있는 곳에 전부 그 친구의 사진과 발견장소 등을 적었지만 연락은 오지 않고 그 날 저녁 속초시 동물보호소 사이트에서 그 친구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마주친 시간은 아주 잠시였지만 마음이 무거워 저녁도 넘어가지 않아 이런 부분에는 마음이 너그러운 엄마를 부엌으로 불러 사진을 보여주며 입양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엄마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집에 어르신 견(각각 12세, 11세) 둘이 있어 안되는 걸 알지 않느냐고 했고 나도 알고는 있어서 조금 질질 짜고는 이내 포기했다. 지금도 다른 친구들의 사진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은데 그 아이의 사진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뭉개지는 느낌이 든다. 뭉개지는 마음을 느끼면서도 왜 이전에 떠난 친구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아마 난 그때 그 아이가 내게 전적으로 스스로를 기대고 있고 세상에서 그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걸 있어서였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몰랐지만 그 아이에겐 내가 전부였던 셈이다. 다른 친구들도 나에게 기댔지만 그때는 ‘내가 주인도 아닌데’라는 핑계로 도망갈 구석이 있었다. 돌돌이(유기동물 보호센터) 속초시 유기동물 센터는 안락사를 하지 않아 아마도 아직 거기 그대로 있을 그 친구를 생각하면 비슷한 처지에 있고 또 있을 것이고 있다가 죽었을 것들을 생각하다가 그런 친구들이 전국에 있고 또 전세계에 있을 것이고 그보다 못한 애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줄을 이어 잠시 질식하는 느낌에 둘러쌓이다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그대로 산다. 하지만 마음에 흔적은 남고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결국 익히 듣게 되는 한국의 비극과 세상을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학생 시절 언론과 인터넷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른다. 북유럽 몇몇 국가에서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고양이를 기르게 했고 이후 수감자들의 폭력성과 스트레스가 유의미하게 감소했다는 내용. 사회인이 되기 전 나는 그런 글들을 읽으며 사랑은 각자의 삶에 의도치 않게 어떤 존재가 비집고 들어와 비중을 차지하고 그 존재에게 자기를 비추게 되면서 자연히 스스로와 타자를 연결지을 줄 알고 그 범위를 확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 자체는 그래서 순간이 주는 강렬한 열감보다는 고통에 의미있는 이름을 붙일 줄 알게 되는 감각적인 자각이라고 생각했고 몇몇 의미있는 경험과 배움이 더해지면 그게 다른 존재들에게까지 확장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일부분은 맞아떨어져서 사람 말고 말 못하는 친구들에 대한 관심은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아졌고 처우도 나아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평등을 정당성의 근거삼아 스스로의 조롱을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이들, 나아가 전장연의 시위에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사람들이 의견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도 뭉개지고 있을 사람들, 사람 아닌 것들을 생각하면 짙은 염세가 마음에 드리우고 세상은 결국 망할 것이고 그래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로마노 과르디니가 그래서 본인의 책 ‘삶과 나이’에 올바른 성년은 의미를 무력화하는 붕괴 과정의 한가운데서 의미를 지탱하려고 노력한다고 썼구나 싶다. 피 없이는 현실이 움직이지 않고, 한편으로는 피로 인해 변한 곳에서는 사랑이 싹틀 여지가 마련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요원한 긍정적 내일에의 길에 사람들이 그래서 기꺼이 피나는 발로 발자국을 겹쳤으려니 해서, 같이 가지는 못해도 그 궤적의 의미를 생각하고 잊이 않아보려 한다.
2024-06-18 | hrights | 조회: 337 | 추천: 1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1. 아플 때의 풍경. 본인은 2년 전에 은평구로 전입신고한 장애인 중년 남성 1인 가구이다. 서대문구에서 20년을 넘게 살다가 은평구 노후 안착을 고민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의료접근성이었다. 연희동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 나는 대상포진을 발견했다. 그 이전부터 통증은 있었으나 뇌병변장애의 일상적인 경직이 주는 통증과 구별하기가 어려워서 발견이 늦었다. 얼른 병원을 가야했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피부과와 가정의학과, 내과 등은 모두 계단을 올라야 하고 혼자서 진료침대에 오르는 건 고역이며 무엇보다 진료를 받으러 간 내 질환보다 내 장애를 직관하고 더 당황스러워 하는 의료진 앞에서 내 장애로 불안해 하지 말라고 되레 내가 설득해야 하는 문제를 겪는다. 그래서 은평구로 이사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의료협동조합(살림병원)에 가입하여 조합원 인사를 하는 김에 '내 장애가 여기 있소' 미리 공개하고 장애인 주치의 제도를 신청한 것이다. 그러나 덜컥 갑자기 한밤중에 코로나 확진으로 열이 오르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밤중에 몸을 움직여 갈 수 있는 응급실이 있는지, 장애인 주치의는 이한밤 중에 요청할 수 있는지, 아니면 119를 불러야 하는지, 정작 심히 아프니 아무 생각도, 아무런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섣불리 움직였다가 낙상 사고가 나지 않을지 그게 더 두려웠다. 가까스로 병원을 가더라도 의료진들이 내 장애에 대해 익숙할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아플 때 심야에 활동지원을 요청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제도지만 일상같이 병원을 진료를 본다고 해도, 서울시 병원 안심 동행 서비스 이용은 가능한지도 알 수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안전을 안심할 수 없으니 결국 부정확한 자체 진단을 내리고 불안한 자가 치료를 할 수 밖에 없다. 2. 병원 갔을 때의 풍경. 그렇게 겨우 코로나로부터 회복하고 나니 이번에는 발들이 문제였다. 왼쪽 발목은 걷기가 힘들었고 오른쪽 발가락은 알 수 없는 통증이 심했다. 파스와 연고로 버티다 버티다 드디어 병원을 갔다. 인권적인 진료로 유명하고 기본적인 장애인편의시설은 잘 갖추었지만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장애인주차구역은 딱 한 곳이라 서둘러야 한다. 간 김에 건강검진이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마침내 혼자 소변검사를 위한 샘플을 만들었다. 아무리 인권활동을 하더라도 진자처럼 목발을 휘저으며 온몸을 땅바닥으로 쏟아질 듯 병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늘 익숙하지 않은 긴장을 만든다. 보통 목발이 딱딱 들어서는 순간 병원 접수처는 일순간 침묵이 흐르고 오만가지 대답을 준비해야 하는 시선들이 내 몸에 꽂혀 든다. 난 휴지를 팔지 않고도, 보호자 없이도, 당신들의 특별한 도움이 없어도 의사 앞에서 꼬꾸라지지 않고 또박 또박 아픈 증상을 진술할 수 있음을 최선을 다해 증명해야 한다. 일상적인 아픔은 병원을 잘 가지 않는다. 코로나에 걸려도, 정기 건강검진을 받아야 함에도 병원을 잘 가지 않는 장애인들이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려서도 내원하지 않은 후유증으로 관절염과 욕창을 얻고 나서야 집 밖을 나서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굳이 장애인 주치의 제도를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정확한 치료를 하려면 어치피 다시 병원을 가야할 번거로움이 있고, 장애인 주치의를 부른다고 바로 통증 완화과 질병을 위해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간을 조율해야 하며, 무엇보다 외부 사람을 위해 내 집안을 완전히 개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필요할 때, 급할 때 가서 기다리더라도 30분 거리 안에 1차 진료를 마음 편히 받는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할 권리를 위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병원 문을 여는 것은 경직된 일이지만 장애인 주치의가 우리집을 방문한 지 1년만에 찾아간 병원에서 아무도 내가 접수처에 도착할 때까지 신경쓰지 않았고 웃음띤 수다를 멈추지 않으셨다. 이제 진료실까지 넘어지지 않고 의사 선생님과 눈인사를 하며 등받이 없는 진료 의자에 무사히 안착하는 것이 남았다. 작년 정기검진을 놓친 이후 몸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다. 무리한 강의로 말미암아 발목 관절염과 코로나 후유증 면역 저하로 치유가 쉽지 않은 발가락 욕창을 진단하셨다. 그리고는 한마디에 덧붙이셨다. “휠체어는 아직 타기 싫으시죠?” 솔직히 당황스럽기 보다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보통의 의사들은 이제는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다소 단정적으로 진단 내리거나 내 장애로 인한 2차적인 질병을 잘 모를 때가 많다. 덧붙인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는 적어도 장애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공감이 묻어남을 신뢰할 수 있다. 사실 의사 선생님은 내 장애보다도 내가 진료가 용이하게 신고 간 벗기 쉬운 신발에 더 관심을 가지셨다. 더구나 머리조명까지 이마에 차고서 맨손으로 내 발가락을 꼼꼼히 소독하신다. 진료용 라텍스가 끼기가 귀찮아서일까? 아니면 감각에 민감한 내 장애의 경직을 이해하기 때문일까?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약국까지 가기 어려운 사정을 헤아려서인지 일주일 분의 소독재료까지 챙겨 주신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보았다. ‘건강검진도 미리 받을 수 있을까요’ 혼자 사는 장애인에게 정기검진은 위 대장 내시경을 제외하더라도 너무나도 큰 일이다. 그 중에서 자기 소변을 검사용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곤란할 것이다. 공식적인 활동지원사 옆이라도 민망하고 간호사 선생님이 직접 지원을 해도 부끄럽기 그지 없을 뿐 아니라 다들 혼자 뭐라도 하겠다 하면 그 불안 가득한 눈빛 때문에 더 긴장하여 검사를 위한 샘플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동네 의료조합은 장애에 대하여 자연스럽고 화장실도 신식은 아니더라도 장애인 위한 필수적인 환경은 갖추었으니 드디어 자력으로 성공해 냈다. 혼자서 소변 샘플을 안전하게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많이 이동하며 검사하는 사람마다 내 장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무엇보다 안심이다. X-레이도 혼자 찍고 심지어 키를 재는 기계에도 스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쉬운 하나는 키를 잴 때 장애로 굽어진 무릎을 누군가 눈치껏 꾹 눌러 주었다면 내 키가 오센티는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장애인의 온당한 권리는 다른 것에 있지 않다. 다른 사람처럼 본인 동네에서 일상을 누리며 필요한 지원을 민망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것에서 받을 수 있음에 있다. 매년 오는 장애인의 날은 바로 당신 옆에서, 당신의 일터에서 이를 존중하고 고민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호들갑스러운 감동이나 위선이 아니라. 지역 사회 어디서나 어느 진료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장애인이든 우리 병원의 환자이며 내 환자이며 내 지역 주민이라서 정중히 거절할 수도 피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다는 의료인과 의료 기관의 책임의식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의료 종사자들의 의무적인 장애인 인권교육을 실증있게 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 책임 의식이 장애인에 대한 익숙함을 숙지하고 그 익숙함이 장애인에 대한 의료전문성을 높일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의료전문성이 높다는 것은 장애인을 존중하고 의료기관을 깊이 신뢰해서 어떤 물리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쉬이 병원을 올 수 있게 하여야 장애로 인한 차별과 2차 질환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물리적인 접근성이 떨어지더라도 당장 의사소통이 어렵더라도 지금 당장 장애인들이 병원 앞에 올 수 있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본 쪽글은 지난 5월 중순 은평구에서 열린  제2회 장애인 건강권 세미나 - 장애인의료접근성 향상을 위한 지역사회 변화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토론문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2024-05-28 | hrights | 조회: 583 | 추천: 3
정한별 / 사회복지사  오는 6월부터 장애의 정도가 극히 심한 발달장애인에게 일상생활 훈련, 취미활동, 긴급돌봄, 자립생활 등을 전문적·통합적으로 지원하는 통합돌봄서비스가 시작된다. 정부의 아이돌봄사업 예산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노인장기요양보험·노인맞춤돌봄 서비스 예산 역시 점점 증가하고 있다. 바야흐로 돌봄의 시대이다.   “대체로 무엇이 엄청나게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엄청나게 위협받고 무시당해왔다는 반증일 때가 많다”* 스웨덴과 한국의 차이: 사회적 인식   제도는 점점 발전하고 있는데, 돌봄 현실은 녹록지 않다고 느껴지는 일은 왜일까.스웨덴의 아동보육 제도는 단순히 공공보육의 확대가 아닌, 아동이 적절하고 건강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즉, 정책의 핵심이 시설, 기반의 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돌봄을 통한 아동의 건강한 성장, 가족의 건강한 유지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런 방향성에 기초해, 보통의 주 양육자인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최대한 잘 돌볼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한다. 자녀를 돌볼 수 있는 육아휴직을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어린이집과 시간제 근무를 부모 모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돌봄은 엄마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같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 아이가 건강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자리 잡혀 있다.   반면에 한국의 아동보육 제도는 부모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보다 신경을 쓴다. 부모를 대신하는 다양한 보육 제도를 늘리고, 보육기관에서 보육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 보육 비용을 지원하는 식인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육아휴직, 탄력근로 모두 제도로서 규정되어 있다. 다만, 제도가 있는 것과 제도를 쓸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최근 한 언론에는 직장인 대다수가 10년도 넘은 가족돌봄휴가 제도를 쓰는 일이 어렵다는 기사가 실렸다.**  돌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구성원들의 인식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이는 단순히 복지(제도)의 확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클레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수용소)의 이야기를 전한다. 소설의 주인공 펄롱은 석탄, 목재상이다. 윌슨이라는 미망인이 미혼모인 펄롱의 어머니와 펄롱을 진심으로 돌본 덕에 펄롱은 딸 다섯과 아내와 함께 나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자라났다. 펄롱은 딸들을 도시의 유명한 여학교에 보내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느날 우연히, 펄롱은 석탄 배달을 간 수녀원에서 헐벗은 채 청소를 하는 소녀들을 보게 된다. 당시, 수녀원은 어린 미혼모 등을 세탁소에서 일을 시키고 그의 아기들은 해외에 판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곳이 었다. 펄롱은 세탁소에서 목격한 일들로 내적 갈등을 겪지만, 펄롱의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아내마저도 ‘다들 그렇게 모른 채 하고 살아간다. 우리랑은 아무런 상관 없는 일 아니냐’ 며 펄롱에게 세탁소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고 책망한다. 하지만, 펄롱은 윌슨부인이 아무런 관련도 없던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을 돌봐 줬던 것처럼, 수녀원 석탄 광에 갇힌 소녀를 돕게 된다.   펄롱은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 자신과는 상관 없다며 침묵으로 동조하던 일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그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결코 사회가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엘리너 루즈벨트의 세계인권선언 10주년 연설문과도 맥이 닿아 있다.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인권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입니다.” 돌봄은 때론 사소하다고 치부된다. 이에, 돌봄노동의 의미는 격하되고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자의 존엄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전복적 사고: 취약성 인식과 돌봄사회로의 전환   김영옥·류은숙은 인간의 취약성이 존재론적, 보편적 특성이라고 설명한다. 인간 존재 자체가 취약하고, 모든 인간은 취약한 존재로 태어나 취약한 존재로 사멸한다는 공통점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돌봄에 대한 논의, 돌봄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부모가 되었든 부모가 아닌 타인이 되었든 누군가에 대한 의존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게 된 인간이, 제 스스로 자라나 제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은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으며, 자신 스스로가 생각의 주체로서 삶을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사유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생각, 돌봄은 가족이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 생산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돌봄노동(재생산노동)은 가치가 낮다는 생각, 돌봄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 이 모든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했던 생각들이 사실은 사유와 공부의 끝에 갖게 된 생각이 아니라, 무비판적·무지성적 수용으로 습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뇌리에 박혀 태도가 되어버린 생각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의 부재와 인권의 상실로 가득 찬 소멸사회를 돌봄사회로 바꾸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권에는 유보가 없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하는 것이다.”****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중에서     **한국일보, “아픈부모·아이는 어쩌나...가족돌봄휴가, 직장인 60%엔 그림의 떡” (2024. 5. 12.)   ***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 참고 ****홍세화, 「미안함에 대하여」 중에서
2024-05-14 | hrights | 조회: 533 | 추천: 6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코로나19로  한동안 미얀마에 갈 수 없다가 드디어 지난 3월 말, 10일간의 미얀마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미얀마 중부지역에서 7년간 진행하고 있는 아디의 평화 도서관 사업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이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2번째 방문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미얀마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출장 때가 되면,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얹은 것마냥 답답하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번 출장에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무섭게 치솟은 기름값과 현지 화폐의 환율폭락이었습니다. 방문 시 미얀마의 기름값(휘발유 기준)은 리터랑 2600~2900짯(MMK, 현지화)이었습니다. 한화로 계산하면 리터당 천 원 정도인 셈이죠. 이 가격은 쿠데타 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3배(기존 800~1000짯)가 뛴 금액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미얀마 화폐 가치의 폭락입니다. 쿠데타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 환율은 한화와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한화보다 높았으나, 현재는 1짯에 0.35원, 즉 1원에 2.8짯으로 극심한 폭락 현상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현지 초등학교 교사 급여는 대략 30만짯으로, 쿠테타 전에는 한화 30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쿠테타 이후, 환율로만 따졌을 때 대략 19만원이 떨어진 11만 원 정도 수준입니다. 여기에 기름값을 포함한 현지 물가까지 2-3배로 뛰면서, 현지 교사의 월급은 체감상 4~5만 원 정도의 가치뿐이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올해 2월 1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미얀마 시민저항 3주년 행사사진 이번 출장에서 눈여겨봤던 또 하나의 사실은 여전히 시민불복종운동(CDM, Civil Disobedience Movement)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민불복종운동은 2021년 2월 군부 쿠데타 발발 직후 미얀마 전역에서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학생과 교사, 의사와 은행원 등 많은 이들이 등교와 출석, 출근을 거부하며 군부에 항거하는 자발적 시민운동을 벌였는데요. 물론 군부에 저항하는 반대 시위나 집회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시민불복종 운동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아디의 도서관만 하더라도 도서관 이용자였던 대학생들의 등교 거부가 이어지며 제적 상태에 처한 경우가 대다수이고, 기존 초, 중등 교사들 또한 출근 거부가 지속되며 강제로 해고되거나 군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조차 부모에 의해 등교를 거부하기도 하였는데요. 물론 군부는 이러한 아이들을 학교에서 모두 퇴학 처리시켰습니다. 아디가 평화도서관 창립하던 때 많은 도움을 줬던 현지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군부의 수배를 피해 미얀마 국경 지역으로 피신했거나 일부는 붙잡혀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시민불복종 운동은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이들 중 일부는 도서관에서 교육 봉사를 자처하며, 퇴학당한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못다 한 공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미얀마 군부는 소수민족군대와 미얀마 시민방위군(PDF, People’s Defence Force) 사이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돌연 강제 징집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강제 징집으로 끌려간 현지인들은 쿠데타 세력에 맞서 싸우는 시민방위군과 쿠데타 군부 사이의 총알받이가 될 거라며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지만, 강제 징집을 거부할 시 징집대상자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처벌한다는 군부의 경고에 불안에 떨며 살고 있습니다. 아디가 함께하는 평화도서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교사와 사서, 자원활동가들이 징집 대상이며, 실제 도서관 활동가 중 일부에게는 징집의 사전단계인 등록부 조사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회피 방법은 많지 않아, 대개 외국으로의 피신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쿠데타 발발 초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대한 규탄과 제재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외교적으로 단절될 거 같던 미얀마 군부는 중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미얀마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정부는 미얀마 군부가 임명한 미얀마 대사를 무기 홍보 행사에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세상의 관심은 더 이상 미얀마 군부 통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모두의 관심이 사그라들수록 미얀마 군부는 더욱 활개를 치며 자국민을 탄압합니다. 그럼에도 미얀마에서 만났던 수많은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미얀마 군부를 거부하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출장 내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되묻는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갑갑하고 야속한 현실만 안고 돌아온 듯합니다.
2024-05-14 | hrights | 조회: 519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