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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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길주희(인권연대 연구원),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라영(문화평론가), 이승은(행정사), 이원영(전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신종환/ 공무원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의 단편소설 「외투」·「코」의 주인공이 근속 승진의 하나로 직급이 오름을 오히려 두려워했듯, 언제나 저연차·저직급으로 머물길 바랐지만, 어느새 시간은 흘러 전보다 약간 큰 권리와 더욱 큰 책임을 맡게 되었고, 주변인들도 어느새인가 중책을 맡게 되었다. 세금이 많이 소요되는 사업, 공사나 건축은 지역 위정자의 홍보 간판의 역할을 수반하게 된다, 아니 수반해야만 한다.   지금도 무척 존경하는 당시 동 주민센터 사무장님은 임용 초 우리에게 애성을 지녀야 한다고 종종 말씀하셨다. 공직에 들어와 처음 듣는 애성이란 말은 지역 공직사회에서 시민, 그리고 나아가 시민을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마음가짐을 칭할 때 주로 사용하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일선 공무원일 때는 시민을 마주하고 위하는 일이 가깝고 직관적이라서 내가 애성을 갖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제는 각자의 업무와 그 결과물이 애성을 반증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가시지 않을 때가 잦다. 나아가 지금처럼 선거를 코앞에 두고서는 본격적인 선거에 돌입하기 전 하나의 간판이라도 더 늘려야 하고, 간판은 화려하게 위정자를 비춰야 하기에 담당 공무원들은 마른오징어에서 물을 짜내듯 생기와 시간을 차출당하며 예산 조각들을 기워 큰 홍보 거리를 만들고 기한 내 사업을 준공하도록 종용한다. 위정자의 소신과 지향점이 명확하면 사업 전반의 일관성과 철학이 담지 되지만, 아니면 세금은 그저 어딘가로 맹렬히 흐르다가 의미 대신 특정인들만을 위한 스펙터클만을 남긴 채 사라진다. 해수욕장이 있고, 해수욕장은 아니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해변이 있음에도 여름이 되면 아동용 물놀이터 운영을 위해 수도세만 매달 3천여만 원에 기타 부수비용까지 하면 훨씬 큰 비용이 소요되는 사업을 수년간 진행한 것이 그렇다, 누적된 방문객을 이리저리 붙여 1년에 몇만 명이 방문했다는 대외 보도자료에 실린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 외에 사업의 효용성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한강버스 진수식에 참석한 오세훈 서울시장(저자 제공)   관광 유행에 출렁다리가 있었다면, 건강 시설의 유행에는 맨발걷기길이 있어서 3~4년부터 열심히 세상에 맨발로 흙길을 걷자고 홍보하던 국제맨발걷기협회의 노력이 세금을 만나, 지자체마다 각종 맨발걷기길과 그 부수시설이 뿌리를 내렸다. 이런 부류의 시설은 출렁다리와는 달리 적당한 습기 등과 길의 평탄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황토볼장의 황토볼을 집으로 가져가시려는 시민들로부터 황토볼을 지키기 위해 관리인이 필요하고, 공무원이 수시로 현장을 점검해야 하는데 그 노고가 실질적으로 시민들의 건강 증진에 이바지했다는 의미 있는 추적연구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준공식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위정자들과 협회 관계자들, 그리고 그 주변을 안개꽃처럼 둘러싼 해당 동의 통장들과 각종 위원의 사진을 여러 번 보았을 따름이다. 그 이후에도 큰 세금은 큰 업적으로 남아야 하기에 우리는 사업 기간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생략되거나 빠진 절차로 인한 처벌을 러시안룰렛처럼 떨며 기다려야 했고, 이후 의정감사 등에서는 떠도는 수치들을 모아 어떤 의미처럼 치장해야 한다.   이런 목적 모를 사업과 지출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지자체가 일단은 쇠락보다는 어느 정도의 발전을 이루고 있는 걸 보면, 손민석 씨가 쓴 『우리는 왜 대통령만을 바라보았는가』에서 그가 한 “어떤 제도에서 위정자의 선택은 그 자체의 효용성보다는 제도 자체를 작동시키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지자체가 지역 협회에 보조금을 주고 개최하는 체육대회의 물품 구입처가 마침 협회장 지인의 스포츠 가게이고, 대략 2박 3일 간의 대회가 종료되고 난 후 정산서에 찍힌 물품들의 이후 용처는 불분명하더라도 이런 행사의 영향으로 지역에 스포츠 동호회들이 어느 정도 활성화 되기는 하니까. 그렇다면 올바른 곳에 그 돈이 일관적으로 쓰인다면 그 발전은 어떠할 것이고, 우리 공무원들의 자기 효능감은 또 어떨 것인가.   선관위의 물품들에는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적혀 있지만,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다른 색깔 옷을 입고 신상품 야바위처럼 뒤섞어 있거나 그 각설이가 물어온 또 다른 각설이가 새롭다는 구호를 지겹고 구태의연하게 읊어대는 걸 구경하다 덜 나쁜 한 놈을 고르는 것이 지방자치의 꽃이라면, 그리고 그 각설이가 또 비슷한 일을 다른 말로 꾸며 우리를 부릴 것을 생각하면 이 꽃이 마냥 달갑지는 않다. 다만 언젠가 여러 사람과 그 사람들이 만든 의견들이 밀집되어 유의미하게 위정자에게 어떤 올바른 방향을 반복적으로 요구하여 시민의 목적을 관철해서 유의미하게 행정력이 발휘되도록 하는 목소리가 변방에도 늘어난다면, 그게 먼 훗날 피어날 언감생심 같은 민주주의의 꽃이 될 것이다. 철마는 힘차게 달릴 능력이 있고, 공무원은 행정에 대한 수요를 지탱할 능력이 있다. 이번 지방선거가 하나의 끝이 아니라, 성취감과 불만과 자극이 되어 시민이 우리를 올바르게 휘두를 문화를 발아케 할 심적 계기가 되길 바란다.  
2026-04-15 | hrights | 조회: 63 | 추천: 2
김태형/ 프리랜서 방송작가   AI는 이제 더는 먼 미래의 기술도, 스마트폰 속 편리한 도구도 아니다. 이미 우리가 매일 쓰는 앱 곳곳에 들어와 일상을 움직이고 있고, 생성형 AI는 신기한 장난감처럼 질문을 던져보는 단계를 넘어 기획안 작성, 자료 조사, 초안 구성, 자막 문구 정리 같은 전문 업무의 영역까지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다시 말해 AI는 도구에서 하나의 직업을 대체할 수준까지 발전했다. 노동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대체 인력이 되고 있다. 방송 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방송작가로 생성형 AI를 어디까지나 보조 도구 정도로 여겼다. 아이템의 얼개를 잡거나, 인터뷰 질문의 방향을 넓혀보거나, 흩어진 자료를 빠르게 정리하는 데에는 분명 유용했지만, 결국 프로그램의 색깔을 읽고, 출연자의 말투와 감정을 살리고, 현장의 공기와 흐름을 원고에 담아내는 일만큼은 사람의 몫이라고 믿었다. 방송 원고는 단순히 문장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라, 회의실에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맞추고, 섭외의 맥락을 읽고, 인터뷰의 결을 조율하고, 한 줄의 멘트에도 청취자와 시청자의 호흡을 계산해 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성형 AI가 방송작가라는 직업 자체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등장하는 새로운 버전의 생성형 AI를 접하면서 그 믿음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자료를 찾는 속도는 훨씬 빨라졌고, 신뢰도도 높아졌다. 문장은 더 자연스러워졌으며, 기획의 의도까지 읽어낸 듯한 결과물을 내놓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AI는 단순히 일을 돕는 수준을 넘어 사람의 일자리 가까이에 걸어 들어오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노동시장에 등장한 AI…. 기술의 발전이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쌓인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25년 발표에서 전 세계 일자리의 25%가 생성형 AI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ILO는 여기서 중요한 점을 함께 짚었다. 더 가능성이 큰 시나리오는 단순한 대량 소멸이 아니라, 직무가 쪼개지고 재구성되는 “변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변형도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직무가 바뀐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새 기술을 익히고,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고, 때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역할로 이동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제 AI 안전 보고서도 AI 확산 속도와 기업 채택 속도, 제도 대응 수준에 따라 노동시장 충격이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기술이 일자리를 한순간에 없애지 않더라도, 기술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실제 방송가에서는 신규 인력을 뽑을 때 AI 활용 능력을 평가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AI 활용을 유행 정도로 봤다면 이제는 업무의 필수 능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정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AI를 활용해야 한다. 치킨게임을 하듯이 AI와의 일자리 경쟁은 의미가 없다. 더는 ‘내 직업이 사라질까, 안 사라질까’라는 질문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 일의 어떤 부분이 AI로 대체되고, 어떤 부분은 오히려 더 중요해질까’이다. 반복적이고 규칙 기반인 업무, 자료 정리와 초안 작성 같은 영역은 이미 AI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반대로 맥락을 읽고, 사람을 설득하고, 책임 있는 결정을 내리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능력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 있다. 세계경제포럼은 2030년까지 노동자 100명 가운데 59명이 재교육이나 직무전환 훈련이 필요할 것이라고 봤고, 이 가운데 11명은 필요한 훈련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AI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AI를 이해하고 활용하면서도 인간적 판단력을 유지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챗GPT를 활용해서 만든 이미지(저자 제공)   하지만 AI로 인한 일자리 소멸 위기감을 단순히 개인의 자기 계발 문제로만 돌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실제로 OECD는 2025년 보고서에서 AI가 노동시장에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지만, 현재 교육·훈련 공급은 그 변화 속도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금 제공되는 훈련의 상당수는 고급 AI 전문기술에 치우쳐 있고, 일반 노동자에게 필요한 기초적 AI 문해력 교육은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모두가 개발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거의 모든 노동자가 AI를 이해하고 자기 일에 활용할 최소한의 역량은 가져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평생직장을 지키는 방법은 AI를 막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AI와 함께 일하는 법을 가능한 한 빨리 배우는 데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AI 산업 육성과 별개로 안전 규제와 책임 원칙을 더 분명히 세워야 한다. AI 전문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듯, 강력한 AI는 기업의 자율적 선의에만 맡길 수 없는 영역이 되고 있다. 독립적인 평가, 위험 기준, 감사 체계, 고위험 시스템에 대한 제한 원칙이 필요하다. 둘째, 노동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한 재교육 체계를 국가 차원에서 촘촘하게 설계해야 한다. 특히 중장년층, 사무·행정직, 플랫폼 노동자처럼 변화에 먼저 노출되는 집단에게는 ‘나중에 실업이 생기면 지원한다’라는 방식이 아니라, 변화가 오기 전에 미리 훈련과 전환 기회를 제공하는 선제 대응이 필요하다. 셋째, 사회안전망도 더 두터워져야 한다. AI가 생산성을 높여 사회 전체의 이익을 키운다면, 그 전환 비용 역시 사회가 함께 부담해야 공정하다. 결국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질문은 ‘AI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AI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과정에서 사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포에 머무는 것도, 무조건 낙관하는 것도 아니다. 철학자는 목표와 통제의 문제를 경고하고, 과학자는 안전 연구의 필요성을 말하고, 국제기구는 노동과 교육의 재설계를 주문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사회의 선택이다. 개인은 배움을 멈추지 말아야 하고, 기업은 전환의 책임을 나눠야 하며, 정부는 성장과 보호를 동시에 설계해야 한다. AI를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AI 시대에 사람이 밀려나지 않게 만드는 질서는 지금부터라도 서둘러 세워야 한다.    
2026-04-07 | hrights | 조회: 355 | 추천: 3
이원영/ 전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소수정당 후보로 용산구의원 4번 출마? 용산 지역에서 20년 넘게 살면서 시민운동을 쭉 했고 풀뿌리 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기초의원 선거에 4번을 도전했다. 매번 10% 넘게 득표했고 3등으로 낙선을 했다. 선거운동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듣기 싫었던 소리도 있었다. 특히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아니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떨어지는데 왜 나왔냐?”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아는 주민들은 가능하면 큰 당으로 가라고 조언했다. 2026년 3월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소속이 아닌 소수정당 기초의원은 서울에 총 427석 중 1명밖에 없다. 기가 찰 일이다. 과거 이재명 성남시장 시절, “1·2당 공천받으면 살인자도 당선이고, 공천 못 받으면 공자님도 낙선”이라며, 기초의원 선거구제 개혁을 강조했던 이야기가 다시금 회자하고 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네 번을 선거에서 떨어져 본 경험자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초의원들의 활동을 보면 정말 한심할 때가 많다. 정말 선거제도의 변화가 절실하다. 이에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개혁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경직된 정치, 혐오로 치닫는 민주주의 뻔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정치는 살아 있는 유기체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정치는 화석처럼 굳어져 시민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다. 최근에 조국혁신당, 진보당, 사회민주당, 기본소득당 등 작은 정당이 지방선거 전 조속한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농성을 시작했다. 정치개혁은 민주주의 확장을 통해 대표되지 못하는 민심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과거 노무현, 이재명 대통령도 여러 차례 성토했듯이 지금의 정치제도는 민심을 반영하기보다 왜곡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거대 양당에 기득권을 주는 정치구조는 혐오와 대결을 난무하게 했다. 정치 뉴스를 보는 국민은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 기초의원 2인 선거구 중심 구조 역시 문제의 핵심이다. 3~4인 이상 선거구제로 바꿔야 한다. 조국 대표가 지적하듯, 이 제도는 다양한 정치세력의 진입을 봉쇄하고 양당 독점을 강화한다. 기초의원 무투표 당선이 전국에 수백 군데에 이른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시민의 선택지는 줄어들고, 정치는 승자가 뻔히 예견된 점점 닫힌 게임이 된다.   사진 출처 결선투표제 도입도 꼭 필요하다. 결선투표제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다. 그것은 ‘과반의 동의’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회복하는 일이다. 한국 정치의 위기는 “소수 지지로 권력을 독점하는 선거구조”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30~40%의 지지로 당선된 권력이 전체를 대표하는 순간, 정치는 이미 정당성을 상실한다. 결선투표제는 이런 민심의 왜곡과 기만을 바로잡는 최소한의 장치다. 왜 다른 여러 나라가 오래전부터 자치단체장, 대통령 선거 등에서 결선투표제를 도입했겠는가.   정치개혁을 거부하는 두 기득권 정당의 침묵 개혁정당을 표방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침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공고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고질적인 태도이고 이는 무책임함에서 기인한다. 결과적으로는 국민의힘과 같은 극우 정치 집단을 우리 정치의 양대 축으로 남아 있게 한다. 즉, 정치개혁 거부는 역사적 죄악을 저지르는 일이다. 이제 더불어민주당은 보수정당이 있어야 할 오른쪽을 차지하고, 왼쪽에 진보정당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다. 이런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도 잘 알고 있고 내부에서 그런 목소리가 작지만 쉼 없이 메아리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득권 정치세력이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어 시민들의 요구, 역사적 당위성에도 정치개혁은 매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는 반드시 해야 할 민주주의 발전 과정이다. 정치개혁 외면하는 두 기득권 정당,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각성하라!  
2026-03-31 | hrights | 조회: 358 | 추천: 2
윤요왕/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시설’이라는 이름의 유배, 우리는 어디서 늙어갈 것인가 지방 소멸과 초고령화라는 단어가 일상이 된 시대다. 농촌의 풍경은 적막해졌고, 그 적막함을 채우는 것은 마을 어귀의 요양원 간판들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돌봄은 ‘효율’의 논리에 갇혀 있는 게 현실이다. 나이가 들고 몸이 불편해지면 평생 살아온 집과 이웃을 떠나 낯선 시설로 보내지는 게 당연한 차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묻고 싶다. 사랑하는 이들과 단절된 채 표준화된 매뉴얼에 따라 관리되는 삶을 과연 ‘존엄한 노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권의 관점에서 ‘돌봄’은 단순히 밥을 먹여주고 씻겨주는 서비스가 아니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아는 이들의 얼굴을 보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계속 살아갈 권리다.   마을에서 찾은 교육, 복지, 세대의 경계 허물기 시작은 2005년이었다. 아이들이 방치되는 농촌의 현실을 바꾸고 싶어 학부모들이 모여 ‘마을공부방’을 열었다. 그때의 절박함은 2007년 농촌자연 캠프로, 다시 2010년 ‘농촌유학’으로 이어졌고, 폐교 위기의 학교를 살리기 위해 도시 아이들을 불러 모았고, 마을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다시 활기를 찾았다. 단순히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2014년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법인화하며 우리는 ‘공공성’이라는 옷을 입게 되었다. 이제 돌봄의 대상은 아동을 넘어 마을의 어르신들로 확장되었고, ‘우리마을 119’라는 이름 아래 주민들이 직접 ‘이웃복지사’가 되었다. 반찬을 나누고, 고장 난 전등을 갈아 끼우고, 병원 행차를 돕는 일상적인 행위들이 모여 거대한 안전망이 되었다. 이는 관행적인 행정 시스템이 채우지 못하는 ‘관계의 빈틈’을 메우는 작업이었다.   춘천별빛 모델의 핵심은 공급자와 수요자의 이분법을 깨는 데 있다. 우리는 마을 주민을 ‘돌봄을 받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 농촌유학은 단순히 작은 학교에 학생 수를 늘리거나 한때 추억을 만들어주는 교육 서비스가 아니다. 마을의 미래 자산을 확보하고, 외지인들이 마을의 구성원으로 녹아들게 하는 강력한 연결 고리였다. 그리고 주민 주도형 돌봄 ‘우리마을 119’는 전문가의 영역을 주민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중요한 시발점이었다. 약 처방전을 함께 읽고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이웃복지사는 공적 서비스가 닿지 않는 삶의 미세한 결까지 보듬게 되었다. 이러한 돌봄과 교육의 기반에는 세대 간의 유기적 결합이 있었다. 명절이면 아이들이 어르신들께 세배드리고, 어르신들은 아이들에게 농사 기술과 절기 음식을 가르친다. 도시의 자녀들과 소통하고, 졸업한 유학생 가족들까지 마을의 ‘관계 주민’으로 묶어내는 확장된 돌봄은 고립을 예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커뮤니티 갈무리 ‘춘천휘게소’와 관계 주민의 탄생 이제 우리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노후된 마을체험관을 리모델링해서 ‘춘천휘게소_고탄’이라는 마을호텔을 만들었다. 이곳은 도시 청년들에게는 쉼과 환대의 공간이 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을 잇는 이 공간을 통해 우리는 ‘관계 주민’이라는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 굳이 이주하지 않더라도 마을의 가치에 공감하고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연대하는 이들이 늘어날 때, 농촌은 소멸의 위협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도시쥐 정거장’, ‘농사펀드’ 등 외부 전문기관과의 협업은 이러한 실험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   ‘국가적 격’은 약자를 대하는 방식에 있다 한 국가의 격(格)은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다. 춘천별빛은 우리 로컬의 특수한 사례를 넘어, 대한민국 돌봄 위기에 대한 보편적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속 가능한 돌봄의 미래를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정책 전환을 제안한다.   첫째, ‘앵커 조직(풀뿌리 플랫폼)’을 육성해야 한다. 행정과 주민 사이에서 실질적인 돌봄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민간 거점 조직에 힘을 실어주어야 구체적 실천이 될 것이다. 둘째, 예산의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마을마다 수요와 상황이 다르다. 정해진 비목에만 돈을 쓰라는 경직된 행정은 현장의 순발력 있는 대응을 가로막고 있다. 셋째, 평가 체계를 정상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몇 명에게 밥을 먹였느냐는 숫자보다, 그 주민의 삶의 만족도가 얼마나 높아졌고, 이웃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측정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마을로 가는 길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마을로 가는 길이 되고 싶다"라는 우리의 비전은 이제 전 지구적 돌봄 위기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설에 가두는 돌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돌봄. 고립시키는 행정이 아니라, 연결하는 공동체. 돌봄이 더는 ‘부담’이 아닌 서로를 지탱하는 ‘설레는 이야기’가 되기를 꿈꾼다. 오늘 우리 곁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웃으며 함께 차 한잔을 나눌 수 있는 환경, 그것이 공동체 돌봄의 숭고한 가치일 것이다.  
2026-03-25 | hrights | 조회: 184 | 추천: 3
길주희/ 인권연대 연구원   간단하고 당연한 명제다. 청년을 위한 정책과 행정은 청년 당사자의 의견과 경험이 꼭 필요하고, 초중고등학교 교육 정책과 행정에는 유초중고등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교사 당사자의 의견과 경험이 반드시 녹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정책을 만들거나 관련 실무에 착수할 때, 이 당사자들은 얼마나 참여하고 있을까. 그 단면을 지난 2월 6일, ‘국무총리 주재 제1차 청년 정책 관계 장관 회의’ 라이브를 통해 확인했다. 부처 간 흩어진 청년 정책을 하나로 모으는 출발점이자, 일자리, 주거, 참여(정부위원회 청년 참여)를 3대 핵심과제로 두고 이야기하는 장이었다. 여야 청년위원장이 함께 참석한 회의에서 오창석 청년재단 이사장은 “그냥 듣고 가려고 했는데, 한마디해야겠다”라며 발언을 시작했다. 회의 시작 후 약 1시간 11분이 지난 후였다. 참석자들의 현실 모르고 떠드는 탁상공론에 지켜 갈 때쯤 ‘아,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특히 “혼인 신고하면 바보라는 말이 온라인에서 조금만 찾아보면 많이 나온다”라고 말하며 답답해한 장면은 이미 크게 화제가 되었으니 여기서 자세히 다루진 않겠다. 사실 막 ‘청년’에서 중년에 접어든 입장에선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었는데, 적어도 현장에 참여한 이들은 잘 모르는 정보인 듯했다. 오 이사장은 <사장 남천동>에서 가져온 재미있는 이미지는 유지하면서도 온오프라인에서 체험한 ‘진짜 정보’를 내었다. 청년이었던(그 역시 나이로는 중년에 막 접어들었다) 당사자이기에 너무도 익숙한 내용을, 청년에게 꼭 필요한 정책을 만들 수 있도록 이야기한 거다. 교육 정책과 행정도 그렇다. 우리 교육을 책임질 수장을 볼 때 중요한 건, 누가 학교 현장의 언어를 이해하고, 현장의 언어로 소통하는가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진짜 장소는 문서와 토론장 위가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과 선생님의 교육 철학이 깊게 스며든 교실 안이다. 그러나 직선제 교육감 시대가 열리고 15여 년이 흐르는 동안, 대학교수의 연구실이나 관료의 집무실을 거쳐 온 이들이 교육의 수장이 되는 풍경은 너무도 익숙해져 버렸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진짜 학교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2010년 직선제 이후 당선된 전국 교육감 중, 초중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한 교육감들은 총 12명(각 교육청과 선거 정보 등 노출된 정보에서 추렸으므로 오차가 있을 수 있다)이 있었다. 전체 당선자의 약 20.7%에 불과한 이들이 보여준 변화는, 단순한 수치로만 설명할 수 없다.   충청북도 교육청   몇 가지 사례를 보자. 강원도의 민병희 교육감은 교사 시절, 점심시간에 ‘가난의 증명서’를 내미는 아이들의 상처를 보며 전국 최초의 무상급식을 시행했다. 이는 단순한 복지 정책이 아니라, 모든 아이가 평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임을 교실에서부터 확인시켜 준 일종의 사건이었다. 경남의 박종훈 교육감은 교사들을 괴롭히던 ‘공문의 늪’에 주목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상담해야 할 시간에 수십 통의 공문을 처리하느라 바쁜 교사들의 비애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교무행정 업무를 전담하는 팀을 꾸려 교사를 행정의 도구가 아닌 교육의 주체로 되돌려 놓는 일에 착수했다. ‘선생님을 오롯이 아이들 곁으로’라는 그의 공약은 행정 전문가가 아닌, 수업의 가치를 아는 교사 출신이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 울산의 고(故) 노옥희 교육감과 그 뜻을 잇는 천창수 교육감의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공업도시 울산의 학교 현장에서 노동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았다. 이에 직업계고 학생들을 위해 취업 지원을 강화하고, 학교 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교육의 동반자로 대우하며 처우를 개선하는 일들을 수행했다. 이는 교육 현장에서 직접 배우고 느낀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충북의 김병우 교육감이 추진한 학교 공간 혁신도 그렇다. 학교는 감옥 같은 사각형 건물이 아니라 아이들의 감성이 자라나는 집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딱딱한 복도 끝에 아이들이 쉴 수 있는 소파를 놓고, 교실 숲을 가꾼 것은 아이들의 행동 양식을 관찰해 온 교사의 세심함이 빚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2026년 현재도 많은 석학이 우리 교육의 수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초중고 교사 출신들이 보여준 ‘현장 밀착형’ 행정은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들은 교육부의 지침이 학교 현장에서 왜 겉도는지를 경험으로 알고 있으며, 교사들이 새로운 일을 주저할 때 무엇이 그들의 발목을 잡는지 짚어낼 수 있다. 교육은 이론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삶 그 자체다.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보다 중요한 건, 아이들의 하루를 함께 살아본 사람이다. 20% 남짓한 이들이 일궈낸 혁신의 씨앗은 이제 대한민국 교육의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더 많은 교사 출신 교육감을 기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학교의 진짜 주인인 학생과 교사의 마음을 가장 깊이 헤아리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미래를 교실에서부터 다시 설계할 수 있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2026-03-17 | hrights | 조회: 170 | 추천: 6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내가 사는 은평구 구산동의 아파트는 22년 2월 3일 사용 승인이 난 나름 5년 차밖에 되지 않은 단독 2단지 146세대 새 아파트다. 나는 재건축 허가 조건의 장애인 특별 공급 당첨으로 –이 제도는 무주택 세대 구성원인 등록 장애인에게 일정 규모 이하의 분양·임대 아파트를 우선 공급하는 제도이다. 배점 기준에 따라 추천받으며, 평생 1회 제한이 있다.- 21년부터 은평구 주민이 되었다. 20년 넘게 기다린 아파트 입주는 행운이었으나 500세대 이상 대단지가 아니라서 생애 첫 주택 대출이 되지 않아 주택구입 자금 마련에 많은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서울 서쪽 끝 은평구 구산동에 살기로 한 것은 아파트 재건축한 주민들이 다들 구산동에서 사신 분들이고 은평구 전체나 구산동 자체가 장애인 거주민의 비율이 높아, 관련 종사자들도 많아서 이제껏 당한 장애인 차별이 이 동네에서는 없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승강기가 1대밖에 없어서 승강기 고장이나 교체할 때 과연 아파트 관리위원회가 대체 수단을 마련할지 걱정되고 주차장도 많이 적어서 갈등이 염려되었다(인권위는 2026년 공동주택 승강기 공사 시 장애인 불편 최소화해야 한다는 권고를 내린 바 있다. 사건 24진정0849000 아파트 승강기 공사 과정에서의 장애인에 대한 장애 차별). 여전히 나는 아파트에서 서로 만나면 인사하는 최초 입주자이다. 그러나 나는 서오릉 고개 너머로 가는 큰길로 바로 나가는 아파트 정문을 이용할 수 없다. 오토바이 출입을 막고 입구 놀이터 안전을 이유로 큰 화분으로 좁은 틈만 있다. 전동 스쿠터나 휠체어는 물론 목발 사용자도 출입이 어렵다. 나는 다른 입주자와는 달리 수국사 쪽 아파트 후문을 100미터 이상 돌아 나와야 외출할 수 있다. 아파트 후문은 자동차가 드나드는 길이지, 걷는 사람을 위한 주 출입구는 분명 아니다. 입주자의 법적 권리와 편의를 침해하는 사항을 넘어 기본적인 안전의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아파트 관리 측에 이제껏 딱히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큰길가에 오토바이의 출입을 제한한 이유가 되는 어린이와 보행자의 안전을 먼저 배려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파트의 장애인 주차구역은 1층에만 설치되어 있다. 영하 10도의 눈보라가 치고 태풍이 와도 장애인 주차 구역을 이용하려면 목발 사용자인 나는 고스란히 눈비를 다 맞아야 한다. 먼지를 뒤집어 써야 한다. 또 장애인 주차구역이 소방도로와 근접해, 별도로 사다리 설치를 방해하는 지붕을 설치할 수 없다. 그래서 엄연한 불법이지만 이삿짐 차량이 오면 이사하는 새 이웃을 위해 굳이 힘들게 목발을 짚고 내려가 차를 일반 구역으로 옮겨 주어야 한다. 장애인 특별공급을 전제로 재건축을 허가받은 아파트가 모든 입주자가 이용할 수 있는 지하 1층 주차장에는 장애인 주차 구역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주차비 건설 설치비를 분담한 입주자로서 명백한 재산권 침해이자 장애인 차별금지법 위반이다. 이미 2020년 인권위는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을 지상 또는 지하 주차장 한쪽에만 설치하는 것은 장애인 차별”이라 권고한 바가 있다(사건 19진정0137700 보행 장애인에 대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 이용 차별).     그래도 나는 한 번도 문제 삼지 않았다. 세대수에 비해서 전체 주차가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하에 자리가 남아도 날씨가 많이 궂지 않으면 늘 비어 있는 장애인 주차 구역에 주차했다. 모든 이의 편하고 적게 걷고 싶은 욕망은 인정해야 한다. 내 주차 이용이 침묵을 깬 것은 지난 전기차 화재 사건이 처음이었다. 우리 아파트 관리 측은 공개적으로 지하에 장애인 차량을 주차하면 어떤 처벌을 하겠다고 공지했다. 나는 아파트 주민 단체방에서 아주 정중하게 철회를 요청했다. 그런 공지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조용히 사라졌지만, 이번 겨울 혹한에는 거의 지하에 주차하지 못했다. 이번 3월이 되어야 겨우 지하 주차장의 주 출입문과 거리가 먼 곳에 겨우 자리가 생겨 미세먼지라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파트 관리소장 측이 나에게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장애인 주차 구역에만 ‘꼭’ 주차해 달라고 요구했다. 장애인 관리소장의 무지하고 무식한 명령은 나처럼 아파트에서 특정하기 쉬운 소수의 장애인 입주자에게는 -우리 아파트에는 장애인 특별 공급세대는 딱 2세대뿐이다.- 결국 협박이자 강요였다. 장애인 주차 가능 표지를 부착한 차량에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에만 주차하도록 강요하는 행위는 시설물의 소유·관리자는 장애인이 해당 시설물을 이용할 때 장애인을 제한·배제·거부하거나 부당한 조건을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18조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직접차별이다. 슬픈 건 내가 다른 사람의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활동가이자 국가인권위원회의 장애인 차별 분과 전문 위원이지만, 관리소장이라는 위치 권력자 앞에서는 한낱 민원 넣겠다는 정도밖에 말하지 못하는 소수의 약자라는 것이다.   민원 넣겠다고 화를 낸들 정작 이런 문제는 은평구청 중 어디에, 은평구에 있는 그 많은 장애인 단체, 복지 단체 중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런 당연하고 사소한 권리조차 자연스럽게 누리지 못하고 이런 서글픈 차별과 격리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어떤 사람이라도 움츠리고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장애인 주차구역은 장애인의 이동 편의를 위해 '우선적'으로 제공되는 권리이지, 일반 주차구역 이용을 제한하는 '격리' 공간이 아니다. 장애인이 일반 구역에 주차하는 것은 자유이며, 이를 제지할 법적 근거는 없다. 은평구, 우리 동네에서 장애인에게 자유롭게 주차할 권리를 달라 요구할 줄은 미처 몰랐다. 차별은 그런 것이었다. 반백년을 경험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본 원고는 <은평 시민의 신문>에 올린 칼럼을 수정·추가 보완하였습니다.  
2026-03-17 | hrights | 조회: 111 | 추천: 2
이승은/ 행정사   1. 수화기 너머로 쏟아진 통곡 제복을 벗고 학교폭력 전문 행정사로 첫발을 내딛던 날들, 저는 학폭 상담 오픈채팅방에서 한 아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폐스펙트럼이라는 얇고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세상과 마주하던 피해 학생, 정연이(가명). 채팅창 너머로 조심스레 고민을 꺼내던 아이와 처음 전화가 연결된 순간. 수화기를 타고 넘어온 것은 말이 아니라, 거친 숨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통곡이었습니다. “너무 억울해요.” 그 말과 함께 터져 나온 울음은 한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잦아드는 울음 끝에 걸린 한마디. “도와주세요, 제가 행정심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 말이 저를 이 사건의 한가운데로 이끌었습니다.   2. '혼잣말'이라는 이름의 방패 정연이가 직접 정보공개청구해서 받아 낸 학폭위 회의록에서 마주한 것은 우리 학폭 행정의 차가운 민낯이었습니다. 가해 관련 학생 박주영(가명)은 수행평가 시간, 정연이의 귀에 대고 “장애인 새끼”, “죽어”라는 말을 수차례 내뱉었습니다. 그런데 심의위원회에서 가해 학생이 꺼내 든 방패는 ‘혼잣말’이라는 변명이었습니다. 학원 친구 때문에 짜증이 나서 혼자 중얼거린 것뿐이라고. 정연이에게 한 말이 아니라고. 더 참담한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가해자가 패닉 상태라 독백했을 것”이라며 심의위원들이 그 변명에 동조했습니다. 정연이가 용기를 내어 켠 휴대폰 녹음기, 그 증거는 오히려 “가해자를 몰아붙인 행위”로 뒤집혔습니다. 피해자의 용기가 외면받는 순간, 저는 그 자리를 기억해 두기로 했습니다.   생성 이미지 3. '성장'이라는 이름의 사과문 학폭위 심의 결과는 제1호 서면사과였습니다. 가해자가 제출한 사과문을 펼쳤습니다. 정연이에 대한 미안함은 단 한 줄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런 문장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통해 성장을 했어요.” 타인의 영혼을 짓밟은 대가가 가해자의 ‘성장’이라니. 이보다 잔인한 역설이 있을까요. 끝이 아니었습니다. 법으로 금지된 즉시분리조치 기간, 가해자는 정연이에게 접근해 스스로 해명을 늘어놓았습니다. 2차 가해였습니다. 그런데 교육청은 이를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기록했습니다. 불법이 노력으로 둔갑하는 것. 그것이 제가 마주한 학폭 행정의 현실이었습니다.   4. 다시 펜을 잡는 이유 심리검사 결과지에는 ‘정서적 위기’라는 건조한 단어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밤마다 잠 못 들며 자살 관념에 시달리는 열일곱 살 아이의 울음이 숨어 있었습니다. 경찰 시절, 선후배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남들 하는 만큼만 해라. 안 해도 되는 건 하지 마라.” 들을 때마다 묘하게 부끄러웠습니다. 열심히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원칙대로 하려고 노력했을 뿐. 그 말이 경찰 조직 안에서만 들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연이의 회의록을 읽으며 알았습니다. 원칙은 선택적이었습니다. 피해자를 위해서는 안 해도 되는 건 하지 않았고, 가해자를 위해서는 안 해도 되는 걸 기꺼이 했습니다. ‘패닉 상태의 독백’이라는 해석도, 불법 접근을 ‘화해 노력’으로 기록한 것도, 누군가 공을 들인 결과였습니다. 제복을 벗고 나서야 자리가 생겼습니다.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자리. 이 글도 그 자리에서 씁니다. 눈치 보지 않고.   정연이의 울음은 ‘혼잣말’이라는 이름으로 묻혔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기로 한 것처럼. 그래서 씁니다. 묻힌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는 들었다는 것을. 이 기록이 정연이의 억울함에 이름을 돌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6-03-10 | hrights | 조회: 183 | 추천: 6
이라영/ 문화평론가   안희정이 지난 2월 7일 공식 석상에 등장했다. 2018년 비서에 의해 처음 그의 성폭력이 폭로된 이후 8년 만이다. 박정현 부여군수 출판기념회에 등장했고, 현장에 있던 의원들이 크게 환호했다고 알려졌다. 지방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곳곳에서 이어지는 중이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가 ‘출판’이 아닌 정치를 위한 자리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8년만’이라고는 하지만 지난 8년간 안희정은 꾸준히 정치적인 몸이었다. 그의 수감 생활 중 모친상과 부친상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정치권에서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인간적으로 조문할 수는 있지만, 사회적 참사 희생자들이 정치에 휘말려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사건들을 떠올리면 성폭력 가해자 안희정을 둘러싼 이 ‘조문 정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직접 공식석상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형을 다 살았으니 그래도 괜찮을까. 비서를 성적으로 착취한 사람이 실형을 살고 난 후에 정치에서 다시 호명된다면 이 사회가 성착취를 사소하게 취급하는 신호라고 봐도 무방하다. 안희정의 등장을 비판하는 이유는 단순히 전과자의 사회 복귀를 막자는 게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가해자로서 그가 끼친 악영향이 크다. 안희정은 2018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2019년 2심에서 유죄가 되어 3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1심에서는 도지사의 지위가 위력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2심에서는 위력 행사가 인정되었다. 이 판결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서 그 ‘위력’의 개념과 범주를 구체적으로 인정한 중요한 사건이다.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이 권력에 의한 성폭력에 취약한 상황임을 공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런 당사자가 사과와 반성도 없이 지지받으며 등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난 8년의 세월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미투’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데 현실 정치는 이에 부응하지 못한 채 인권의 시계를 계속 거꾸로 돌리고 있다.   JTBC 뉴스 영상 갈무리   안희정의 등장보다 문제가 있는 모습은 그의 등장에 환호하는 목소리다. 나아가 안희정의 정치 복귀를 비판하는 입장을 비난하는 목소리이다. 이들은 8년이나 시간이 지났고, 이미 수감생활까지 다 마쳤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일시적 해프닝일 수 있지만 결코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이는 위험한 전조증상이다. 민주당 출신 지자체장’들’의 비서 성폭력 역사를 복기하기 바란다. 폭력은 단 한 사람의 가해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방관하는 주변인과 주제넘게 용서를 말하는 제삼자들의 담합으로 폭력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안희정이 8년 만에 공식석상에 등장해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의 ‘위력’이 여전히 공고함을 방증한다. 법적 처벌을 받으면 죗값을 치렀다는 착각이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다. 이 생각이 왜 위험한가. 법은 언제나 최소한의 도덕이다. 도덕이 위태롭게 유지될 때 법적 책임도 아슬아슬하게 지켜질 것이다. 정치적 책임 따위는 실종된 토양에서 자라나는 정치는 큰 우려를 자아낸다. 윤리적 책임이 파탄 난 사회에서 법적 책임은 잘 지켜질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법적 책임에 함몰된 사회는 법적 책임조차 온전히 묻지 못한다. 법적 책임이 모든 책임을 다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안희정의 폭력을 안희정 개인의 문제로 급격하게 좁히기를 원한다. 오직 안희정이라는 특수한 인물이 어쩌다가 저지른 잘못이기에 그의 수감생활로 죄를 씻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안희정’들’을 방관한다. 사실상 ‘법적으로는 문제 없다’라는 말은 사회의 윤리 체계를 파괴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양심의 실종이다. 양심이 없어도 될 권리를 주장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간절하게 필요한 책임은 정치적, 윤리적 책임이다. ‘정의를 위한 정치적 책임’(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필요하다. 법적 책임은 처벌받는 개인에게 책임의 범주를 좁힌다. 반면 윤리적, 정치적 책임은 법적 책임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에게 구조적 책임을 묻는다. 다시 말해, 법적인 처벌을 다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안희정에게만 책임을 물을 뿐, 안희정들의 증식을 외면한다는 뜻이다. 개인적 책임에서 정치적 책임으로 나아갈 때 사회의 부정의한 구조를 바꿀 수 있다. 안희정들의 난립을 막고 싶다면 안희정의 정치 복귀를 단호하게 반대하자. 법적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다했는지 질문해야 한다.  
2026-02-24 | hrights | 조회: 323 | 추천: 8
정한별/ 사회복지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026년 1월 24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년 만이었다. 93년을 살아내신 할아버지였기에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실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2025년 11월의 마지막 월요일 아침. 큰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전화가 울릴 일이 없는데, 불안한 마음에 평소였으면 받지 않았을 전화를 급하게 받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고모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슬픔을 눌러 담는 느낌이 들었다. 자세한 것은 묻지 않고, 알겠다고 답을 한 뒤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할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돌아가신 건 아니란다. 수로에 떨어졌는데 의식은 있단다. 일단 상황을 보고 다시 연락할게.”   할아버지는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 뇌출혈과 저체온증이 있어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급하게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가 계신 경상북도 문경시로 향했다. 의식은 있었으나, 할아버지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른 얼굴에 눈빛만은 형형했던 할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병상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에 아버지의 모습이 겹쳤다.   같은 해 봄. 할아버지는 감나무에서 떨어졌다. 두 달에 한 번꼴로 문경에 가곤 했던 토요일 낮. 할아버지 집 근처 골목에서 얼굴에 피떡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절뚝이며 걷고 있던 할아버지를 만났다. 깜짝 놀라 할아버지를 모시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미라처럼 얼굴에 붕대를 친친 감은 할아버지가 ‘자신은 멀쩡하고 밭에 할 일이 많아, 바로 퇴원하겠다’라며 몽니를 부리는 통에 하루만 입원해서 상태를 보자고 설득하는 데 애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만큼 건강했던 할아버지였건만 이번만은 불안했다. 자꾸 할아버지의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로 보였다.   며칠 뒤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 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불렀고, 차를 가져왔냐며 집에 가자고 자신의 휴대전화를 달라고 다그칠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할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날 기억한 날은. 정신은 온전치 않았으나 기력은 있었던 할아버지는 입원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폐렴에 걸렸다. 병원에선 다른 환자에게 폐렴을 옮길 위험이 크니, 1인실에 가야 한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다인실로 올라와 병실 생활을 하던 할아버지가 1인실로 가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병원비도 커졌지만 돌봄에 대한 부담이 달라졌다. 다인실에서 공동간병을 받을 때는 고모들과 함께 병원비와 간병비를 감당할 수 있겠다는 묘한 안도감이 있었지만, 1인실에서 생활하면서부터는 상황이 180도 변했다. 간병비의 규모가 너무 달라졌다. 90대의 할아버지를 70대의 할머니가 간병했는데, 간병비만 한 달에 500만 원 이상 필요했다. 할아버지의 섬망증세와 과격한 행동이 반복되자 병원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며 할아버지의 손과 발을 묶었다. 묶인 손과 발은 피가 통하지 않아 부어올랐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가족들은 묶인 손발을 풀고 주무르기에 바빴다. 사실을 알면서도 보통의 일상을 잠시 중단하고 할아버지를 직접 간병할 수 있는 가족은 그 누구도 없었다. 대신 간병비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의 대화만이 오고 갔다.   병원에서 더는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며, 요양병원으로의 전원을 제안했고, 요양병원으로 간 할아버지는 다음날 돌아가셨다. 고작 2달 동안의 일이었다. 10년이 넘게 투병했던 아버지에 비하면, 돌봄의 무게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가족들이 여러 명이 있었고, 간병 기간이 매우 짧았다. 그럼에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가족 간 대화의 가장 큰 주제는 돌봄 부담이었다. 자신이 하던 일을 중단하면서 할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간병비가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족도 없었던 우리에게 돌봄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사진 출처   긴 시간 가족들을 돌봤고, 돌아가시기 전 5년간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묘도 돌봤던 할아버지는 그렇게 남은 자식들에게 가벼운 돌봄의 무게라는 선물까지 안겨주고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할아버지를 그렇게 좋아했고,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했던 가족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짧은 투병 생활 끝에 생을 마감한 할아버지를 그리며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지는 않았을까.   2023년 기준 우리나라의 간병비는 한 달 평균 370만 원 수준이며, 이는 65세 이상 가구 중위소득의 1.7배에 달하는 액수라고 한다. 간병에 지쳐 환자를 살해하는 간병살인은 2006년 3건에서 2019년 26건까지 늘었다. 간병살인 가해자의 대다수는 가족이며, 가해자의 94%가 피해자와 같이 살면서 범행을 저질렀고, 74%는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돌봄의 끝에서…“간병살인은 사회적 타살”, KBS, 2025.10.16.).   과연 사랑의 무게는 간병의 무게보다 클 수 있을까. 간병의 무게가 죄책감의 무게로 바뀌지 않게 사회적 차원의 개입이 필요하다.  
2026-02-10 | hrights | 조회: 310 | 추천: 7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지난 2주간(1월 14일~27일) 가자지구 관련 뉴스에서 가장 많이 다뤄진 소식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한 ‘평화위원회’ 출범과 이스라엘 인질의 시신 수습이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가자지구에서는 혹한 속에서 땔감을 줍던 소년들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총 215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들은 휴전 발표 이후, 주요 뉴스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트럼프가 주도하는 이 ‘평화위원회’는 가자지구 재건과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약 60개국을 초대했고, 현재까지 19개국과 코소보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한국 역시 초대받았으며, 외교부는 이를 검토 중이라고 공식 논평했다. 그러나 이 명단에 이스라엘은 있어도, 가장 큰 피해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은 없다. 평화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팔레스타인이 배제된다는 사실은 이 논의가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가자지구 임시 난민캠프에서 추위에 불을 쬐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 (출처: 가자지구 사진사 Hosny Salah)   국제사회의 최고 사법기관인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미 가자지구 상황과 관련해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개연성을 인정하고 잠정조치를 명령했다. 이는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국제법적 판단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휴전 이후에도 공습과 군사작전을 멈추지 않았고, 민간인 사망은 계속 보고되고 있다. 국제인도법은 민간인 보호, 비례성 원칙, 집단 처벌 금지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만, 가자지구에서는 이 원칙들이 반복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늘 예외로 취급받아 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평화위원회’가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의 책임을 흐리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임을 묻지 않는 평화와 가해자를 중심에 둔 협상은 정의를 삭제한 채 폭력을 관리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것이 오늘날 국제질서의 민낯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이 배제된 평화위원회에 참가하는 것은 결코 중립적인 선택이 아니다. 이는 국제법 위반과 집단학살 의혹이 제기된 사안을 ‘관리 가능한 분쟁’으로 축소하고, 책임을 묻지 않는 평화 프레임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를 인권과 국제규범을 중시하는 국가로 규정해 온 한국이, 피해 당사자가 배제된 협상에 참여하는 일은 그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우리가 가자지구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가자지구의 참상은 단지 중동 지역의 비극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질서가 어떤 생명은 보호하고 어떤 생명은 쉽게 포기하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국제법은 늘 조건부였고, 인권은 유보되었으며, 평화는 언제나 타인의 언어로 결정되어 왔다. 가자지구에 대한 이야기는 동정이 아니라 저항의 방식이다. 이름 없는 숫자로 지워지지 않게 하는 일, “이미 끝난 일”로 봉인되지 않게 하는 일은 집단학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평화는 위로부터 선언되지 않는다. 가해자의 면죄부 위에 세워진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진정한 평화는 아래로부터의 기억, 책임을 묻는 목소리, 그리고 자결권을 부정당해 온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가자지구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스라엘에 의한 집단학살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국제사회의 이중적인 인권 담론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더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가자지구에서 집단학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침묵 역시 정당화할 수 없다.  
2026-02-02 | hrights | 조회: 256 | 추천: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