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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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은수미/ 사회학 우리가 세계화 시대의 위력을 깨달은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가 1997년 IMF 위기 일 것이다. 난생 처음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하여 국민들은 너도 나도 금모으기에 동참하였고 막대한 공적 자금을 쏟아 대기업을 살리는데 동의했다. 온갖 희생도 감내했다. 정리해고제나 파견법이 도입된 것도 바로 그 때이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가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되로 받으면 말로 주고”,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으며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소박한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디면 좋은 시기도 “함께” 나눌 것이라는. 물론 그런 믿음은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며 공공연한 약속도 아니다. 따라서 긴박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근거로 일상적으로 정리해고(그것을 명예퇴직이든 희망퇴직이든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하지 않겠다)를 하거나 이윤이 남아 주주에게 막대한 배당을 하면서도 정리해고를 서두르는 대기업에게 사회적으로 그럴 법한 일인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국민세금이, 공적 자금이 투여되었는가를 되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지 모른다. 또한 그때 기업에 투자된 돈은 단지 돈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믿음과 신뢰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겠다. 사실 사회도 바뀌었다. “자기, 나 사랑해?”라고 물으면 “일일이 말해야 아느냐” 거나 “남부끄럽게 ‘자기’가 뭐냐”면서 퉁명스럽게 입을 닫아버리는 것은 이제 과거의 사랑이나 믿음의 방식이다. 지금은 하루에 수십 번 메시지를 보내고 리플을 달며 모닝콜을 하고 시시 때때로 꽃을 안겨야 사랑하는가 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시대에 확인해본 적도 없는 믿음이나 신뢰에 기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사랑이나 믿음도 끝이 난다. 새봄은 오지만 그 봄날은 간다. 때문에 우리가 십여 년 전 나라를 살리고 기업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했는데, “너 나에게 이럴 수 있어”라고 소리칠 필요는 없겠다. 또한 기업은 이윤만 내면 그만이라지 않는가. 한진중공업이 영도 조선소를 그대로 두고 수빅 조선소로 옮기는 것이나 모 공기업 근로자의 87.5%가 비정규직인 것이,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를 불법 파견 받는 것이나 월 100만원 받는 청소 노동자를 비싸다고 80만 원짜리로 갈아 치우는 것이, 다 이윤 때문이라는데 그것 모르고 기업 살리기를 했다면 그런 행위를 한 사람만 손가락질 받기 십상이다. 필자는 당시 금이 없어서 금모으기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나라 살리고 기업 살리기 위한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에 동의했다. 때문에 앞으로 똑바로 살아가려면 스스로에게 좀 따지고 생각해볼 것이 있다. 게다가 “혹시 좌우명이 있어요?”라고 누가 물을 때 마다 고민 고민하며 내놓는 답이 “‘두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거요” 이다. 그래서 두 번 실수 하지 않으려고 최근의 고민을 하나 던진다. 기업이 해외에 나가거나 정리해고를 하거나 비정규직을 쓰는 것은 모두 경영상의 자유이며 시장 경쟁의 원리라고 한다. 사회의 한 구성 부문인 기업과 시장이 자신의 규칙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기업과 시장만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금모으기에 동참한 대한민국 일반 국민이 사실 사회의 지배적 다수이다. 때문에 이들로 구성된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경쟁과 자유를 넘어서는 가치와 규칙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이 정의와 연대일 것이다. 금모으기를 한 것이나 태안반도의 기름유출 사고 당시 60만이 넘는 인간띠가 이어진 것은 정의와 연대의 가치 때문이다. 지난달 7월 31일 새벽 부산 영도구 청학성당 인근 도로에서 '3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하늘로 풍등을 띄우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래서 헌법이나 노동법에서는 사회적 정의와 연대의 정신에 초점을 맞추며, 사회의 한 구성 부문으로서 기업이나 시장도 경쟁과 자유 이상으로 정의와 연대를 고려해야 한다. 경영상의 자유는 무제한이 아니며 그것이 사회적 정의 혹은 사회권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진 중공업의 정리해고는 정리해고의 정당성에서부터 사내하청의 활용이나 고용불안정에 따른 비용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 상당한 문제가 있다. 또한 세계화 시대에는 경영상의 자유가 전 지구적인 것 만큼이나 사회적 정의 역시 전 지구적이다. 따라서 정당성 없는 정리해고나 값싼 노동력 착취는 사회적 정의를 전 지구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이다. 기업과 시장, 즉 자유와 경쟁이라는 좁은 눈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 공동체, 즉 정의와 연대라는 넓은 눈에서 보면 한진 중공업 사례는 세계화 시대의 가치와 규칙을 되묻게 한다. 하지만 한 국가에서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세계적인 시야에서 정의와 연대를 세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업에게 경영의 자유가 있다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당한 노동과 인간다운 삶을 살 권리가 있다. 그리고 세계 인권선언이나 한국의 헌법에서 강조하는 것은 후자이며 그것이 기업이나 시장을 넘어선 사회의 구성 원리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전에 세계화 시대에 맞게 사회적 정의를 재조직하고, 사회권을 망가뜨리는 괴물에게 백신을 투여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제 수다를 떨어볼 때가 되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66 | 추천: 0
최정학/ 방송대 법학과 교수 잊어버리고 싶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학생 시절 ‘운동’이라는 것을 하던 사람들 곁을 얼쩡거리며 어설프게나마 알게 되었던 고단한 노동자의 삶들. 언제나 정해진 것 같은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밤새워 해야했던 토론이나 세미나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 같고, 그 이후로도 그럴 것 같았다. 지치기도 하고, 나 자신의 앞날이 걱정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대학원에 갔다.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이론에서 구해보려 했다. 깔끔하고 명쾌한 논리로, 정곡을 꿰뚫는 서술로 대안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싶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지금은 그러한 열정이 다 식어버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젠 나의 한계를 인정할 줄도 안다. 나름대로 성실히 살아오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세상과 타협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 능력이 내가 꿈꾸었던 삶을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겸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나는 잊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그들’, 한때는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던, 언제나 내 주위에서 아픈 삶을 살아내고 있었던 노동자들을 말이다. 김진숙, 부끄럽게도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아마도 몇 번쯤은 신문에서 보았음직 한데, 심지어 어떤 노동자가 한진 중공업의 구조조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크레인에 올라갔다는 기사를 읽으면서도 그 이름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또 누군가가 고달픈 싸움을 하는구나, 힘들겠구나, 어떻게 되겠지, 이런 따위의 생각만이 내 뇌리에 남겨졌을 뿐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변화, 좀 더 정확히는 한국 정치의 변화가 내 이런 망각에 한 몫을 담당했을런지도 모른다. 운 좋게도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김대중, 노무현 두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 뭔가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해도 괜찮았고, 상대적으로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한때 내가 당원이기도 했던 민주노동당의 1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에게 한국사회의 문제를 맡겨 놓아도 되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그가 묻는다. 기륭전자나 KTX의 여승무원들, 이랜드나 쌍용자동차,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 그 밖에 또 기억할 수 없는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못 본채 지나치던 내 가슴에, ‘비정규직’이라는 고통스러운 직함이 한국 사회에 700만, 800만을 넘어서는 동안에도 그저 무덤덤하게 ‘어, 이거 어떡하지’ 정도로, 나의 일로 여길줄 모르던 내게 묻는다. 전태일이 너의 가슴에 살아있느냐고, 이 땅의 노동자가 너의 가슴에 살아있느냐고, 그들이 너와 함께 살고 있느냐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누구든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름대로 힘들었던 20대와 30대 초반을 보상받고 싶었다. 역시 운 좋게도 나는 취직을 했고 (그것도 물경 ‘교수’라는 직업을 얻었다), 결혼을 하고 예쁜 딸도 갖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모가 돼본 사람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나의 아이는 내 삶의 새로운 의미가 되었고, 저녁마다 보는 아이의 새로운 모습은 나를 ‘행복한 바보’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보았다. 몇 년 전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했다는 한진 중공업 김주익이라는 분의 딸이 “일자리를 구해 줄테니, 아빠, 그만 돌아오면 안돼”냐고 쓴 일기를 말이다. 그들에게는 행복해질 권리가 없는 것일까. 얼마 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님이 하셨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보았다. “이 시대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도둑, 아니면 바보”라는 것인데, 오랫동안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지금 내 가슴이 조금은 아픈 것을 보면 나는 바보 보다는 도둑에 가까운가 보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도둑, 남이 애써 만들어 놓은 것을 그에 합당한 고된 노동도 하지 않고 훔쳐가는 도둑, 그들의 고통과 눈물로 만들어진 단물을 맛있게도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도둑. 그에 가까운 삶을 적어도 지난 몇 년간 살았음을 나는 비로소 참회한다. 이런 나약한 반성문을 김진숙씨가 보아주기를 나는 바라지 않는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다섯 달이 넘도록 그가 매일 연습했다던가. “부디 무사히 내려와 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이 부정의한 세상에는 아직도 그가 할 일이 너무 많고,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있다. ‘희망의 버스’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소금꽃나무’에서 그가 그렇게 강조하던 희망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던 희망을 모아 이에 화답하고 있다. 심지어 이렇게 게으르고 무기력한 나도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부디 희망을 버리지 말고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74 | 추천: 2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 소장 (Dr. Mahdi Abdul Hadi, PASSIA) http://www.passia.org 다음은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이 보내온 "2011년 9월 유엔 총회"에서 논의될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승인과 관련한 내용으로 홍미정 교수가 전해왔습니다. 번역을 위해 홍미정 교수와 자원활동가이신 김현수씨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요시 알퍼(Yossi Alpher)가 제안한 "팔레스타인 건국 수용하기"(뉴욕 타임즈, 2011년 6월 24일)는 다음과 같은 부질없는 전제들을 기반으로 한다. 1) 팔레스타인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는 임무를 성취한 것으로 간주하고 사임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권을 행사하면서 협상을 계속 진행할 것이다. 2) "압바스 수반의 심복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어떤 선거에서도 살아남고, 협상은 “과거와 다름없이” 지속될 것이다! 3) 팔레스타인 사회는 파타와 하마스로 분할되어 유지되며, 하마스는 그 입장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 4) 팔레스타인 국가는 예루살렘에 관하여 타협하지 않고, 난민 귀환권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유엔 결의안 194호(1948년)를 적용하지 않고 건국될 수 있다. 5)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 국가"라는 용어를 수락하고 영토 교환에 대해 동의할 것이지만, 유엔 분할 결의 181호(1947년)를 완전하게 실행하도록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 181호는 전 팔레스타인 영역의 56.47%에 이스라엘 국가, 42.88%에 아랍 국가, 약 0.65%를 국제 통치 영역으로 규정한다.) 5)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44년 동안 이스라엘 점령 통치하에서 창출된 "감옥의 문화" 아래에서 계속 지낼 것이며, 파타와 하마스의 화해에도 불구하고, 하마스의 붕괴를 포함하여 가자지구로 “이스라엘 행정권”을 조건부로 확장시키려는 이스라엘의 지침을 수행할 것이다. 6) 팔레스타인 국가 내에서 이스라엘의 “안보 상황”은 오늘날과 비슷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안보 필요성이 무시되고, 새로운 국가가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보호도 무시될 것이다. 7) 2002년 아랍 평화안(The Arab Peace Initiative)은 이스라엘이 거부하고 보류한지 10여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협상 테이블에 있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9월 유엔 회의”에서 이스라엘이 “각성”하라는 조언을 충분히 수용해서 네타냐후 총리와 그러한 부류 정치인들의 허세로부터 벗어나길 바란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1967년 경계를 국경으로 획정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계획 승인을 위한 제안서를 7월 20일경에 유엔 총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결정은 1993년에 PLO-이스라엘이 상호 인정한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이러한 결정을 이끈 다음의 A. 내부적, B. 지역적, C. 국제적 요인들은 위의 요시 알퍼의 전제들이 잘못되었음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http://www.passia.org/) A. 팔레스타인 내부적 요인: 유엔 투표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1) 세계무대에서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을 통합하고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의 화해가 활력을 얻을 것이다. 2) 무익한 협상 때문에 발생한 정치적 공백을 채울 것이다. 3) PLO와 PA를 외부 행위자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분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활동의 장을 열 것이다. 4)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비폭력 운동을 발달시키고, 아랍의 봄 문화의 일부가 될 것이다. 5) 모든 삶의 측면(교육, 건강, 경제, 관광 등)에 영향을 끼치는 “감옥의 문화”를 종결시킬 것이다. 6)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한 문을 열어 디아스포라(난민)에서 무조건적인 귀향으로 이끌 것이다. 7) 가자지구의 포위, 폐쇄 그리고 분리를 끝낼 것이다. B. 지역적 요인: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중요하다. 1) 아랍의 봄은 시민 국가, 민주주의, 법치주의, 아랍의 존엄성의 탄생에 대한 열망과 함께 전염성 자스민 열풍을 확산시켜 왔다. 팔레스타인도 예외가 아니다. 2) 새로운 아랍 연맹 사무총장 나빌 알 아라비(Nabil al-Arabi)는 협상 과정이 끝난 것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포스트 빈라덴 시대에서 중동 평화를 위한 4자 위원회(UN,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2003년 로드맵 협상 때 구성됨) 상황은 과거가 되었고, 오바마 대통령은 그의 재선 운동 기간 동안 행동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유럽 연합 27개 국가들이 전원 합의에 이르지 않을 것이고, 현재 아랍의 통치자들은 정치, 외교, 재정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원하기는 하지만, 2002 아랍 평화안을 고수하지도 않고, 미국과 직접 연루되거나 충돌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 아라비는 유엔이 후원하는 국제회의를 선호하고, 그러한 방향에서 “9월의 유엔 회의”를 “시험대”로 간주한다. 3) 아랍 연맹과 새로운 이집트는 “9월 유엔 회의”를 완전히 지원하고 있으며, 터키는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안을 여러 번에 걸쳐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C. 국제적 요인: 유엔 총회에서 분쟁의 국제화는 다음으로 이끌 것이다. 1) 유엔 총회에서 토론을 위하여, 지난 60여 년 간 실행되지 않은 유엔 결의안을 포함한 모든 팔레스타인 관련 문서들을 공개할 것이다. 2) 예루살렘에 관한 토론을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즉 독점적인 이스라엘의 도시가 아니라 개방되고, 공유되는 도시라는 인식으로 국제 관리하의 예루살렘(베들레헴 포함)에 관하여 토론할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점령을 종식시키는 것과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을 반대하여 미국과 다른 몇몇 국가들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던 것이 드러날 것이다. 4) 유엔 192회원국들 중 대략 2/3 또는 그 이상의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명확하게 지지하고 승인할 것이다. 5) 팔레스타인이 국제 사법 재판소를 포함한 모든 국제기구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6) 팔레스타인에 국제군에 의한 보호를 요청할 기회가 열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식민화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국제적인 노력이나 논쟁이 역할을 할 것이다. 7) 초안 협상, 모호한 협상,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체제(PA)라는 오슬로 문화를 끝내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하나의 국가로 바뀌는 것을 도울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5 | 추천: 0
홍미정/ 건국대학교 중동 연구소 연구교수 요즈음 팔레스타인인들은 오는 9월에 유엔 총회로부터 1967년 6월 경계 내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승인받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우선 팔레스타인인들은 2011년 7월 15일에 유엔 사무총장에게 호소문을 보낼 예정이다. 그런데 중동 평화를 위한 4자 위원회(UN,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2003년 로드맵 협상 때 구성됨)는 2011년 7월 11일 워싱턴에서 새로운 중동 평화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수뇌 회담을 개최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이 새로운 평화안이 2011년 5월 19일 버락 오바마의 워싱턴 연설에 토대를 둔 것이며,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엔차원에서 국가 건설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워싱턴 연설에서 오바마는 “팔레스타인인들이 9월에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승인받으려는 행위는 이스라엘 국가의 합법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창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동시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안보에 헌신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소외시키려는 국제 사회의 토론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오바바의 연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중단시키고, 팔레스타인인들과 그 영토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에 묶어두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 연설에서 오바마는 두 국가 해결안(Two-State Solution), 즉 유대 국가로서의 특별한 정체성을 갖는 이스라엘과 비무장 팔레스타인 국가 계획안을 제시하였다. 이 해결안은 튀니지와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지역에서 진행되는 민주화 요구가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 상태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로 인하여 잠재적인 혁명 세력인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 군사 점령상태가 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분석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인종 차별주의적인 점령 정책을 실행시키는 이스라엘도 권위주의적인 아랍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동 전역에서 진행되는 민주화 열풍을 피해가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19일 워싱턴 연설에서의 오바마 대통령의 모습 사진 출처 - AP연합 유대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오바마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역을 구체화시키면서, “생존 가능하고, 비무장한 팔레스타인 국가는 1967년 경계에 토대를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 측이 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오바마의 워싱턴 연설은 조지 W. 부시가 중재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직접 협상의 결과물인 2003년 로드맵(Road Map)에 토대를 둔 것이다. 로드맵은 2003년 조지 W. 부시가 중재하여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과 팔레스타인 총리 마흐무드 압바스가 서명했으며, 현재까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서 성취된 최종 협정이다. 로드맵 전문은 “양 측이 협의한 해결안은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의 출현으로 이끌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로드맵 협상에는 중동 평화를 위한 4자 위원회(UN, 미국, 유럽 연합, 러시아)가 참관하였다. 4자 위원회는 미국의 계획을 추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제안했던 2003년 로드맵은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게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무장 정치 단체 해체를 요구함으로써 내전을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이것이 로드맵의 최우선 목표였다. 오바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련 연설들에서, 하마스 테러리스트라는 주제는 거의 매번 강조된 반면,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이스라엘 군대와 점령민들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잔혹한 테러 행위는 언급된 적이 거의 없다. 하마스의 테러 행위와 이스라엘의 테러 행위는 그 규모나 빈도수에서 비교상대가 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오바마의 시각은 절대적으로 이스라엘 편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워싱턴 연설에서도 오바마는 파타와 하마스의 통합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며 현재 직면한 난제라고 지적하면서, 이스라엘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하며, 중동 평화를 위한 4자 위원회와 아랍 국가들은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3일 카이로에서 파타와 하마스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13개 파벌 사이에서 통합 협정이 이루어졌고, 파타와 하마스는 1년 이내에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오바마와 이스라엘은 하마스 테러리스트를 주장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통합 정부 구성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결국, 2003년 로드맵과 2011년 오바마의 연설에서 구상한 팔레스타인 국가는 유대 국가로서 정체성을 갖는 이스라엘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잠재적인 혁명 세력인 팔레스타인인들을 손쉽게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구상으로 출현한 팔레스타인 국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생각하는 최상의 대안은 이스라엘 군사 점령지와 이스라엘 국가 영역을 한 국가로 완전히 통합하면서, 보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한 국가 안(One State Solution)이다. 이 해결안은 혈통이나 종교 같은 배타적인 정체성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인종차별주의에 토대를 둔 유대 국가의 특성을 버리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할 것이다. 이 대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노력을 경주해야한다. 20세기 초 국제 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민족 고향(Jewish National Home) 건설을 내세우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윤곽을 세웠고, 유엔(UN)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 국가 영역과 아랍 국가 영역으로 분할(UN Resolution 181)하면서 이 문제를 격화시켰으며, 현재 공정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내세우는 미국은 극단적으로 이스라엘 편향이다. 계속되는 유혈 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혈통과 종교를 넘어서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에 토대를 두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책임감을 가지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한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55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씩 헷갈리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가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에 속한다. 최근 ‘반값 대학 등록금’에 관한 논의에서도 이 문제가 중요한 사안인 것처럼 대두되고 있다. 예컨대 7월 3일 일요일 아침 KBS의 토론에 나온 어떤 인사가 “대학 등록금을 아예 전체적으로 반으로 낮추는 것은 등록금을 충분히 낼 수 있는 부자의 자녀들에게도 혜택을 주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했다. 이 주장을 한 그 인물은 분명 보수 진영에 속한 인물이었다. 나는 이 주장을 듣는 순간 묘한 상념에 빠졌다. 갑자기 이 주장이 “동일한 혜택을 받더라도 수혜자들의 재정적인 능력에 따라 그 수혜에 다른 비용을 달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그 순간 바로 이어서, “부모의 재산과 소득을 철저히 조사해서 그 정도에 따라 대학 등록금을 각자 아예 다르게 내도록 해야 한다.”라는 주장으로 바뀌어 들렸기 때문이다. 이는 빈부의 격차가 개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의거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깔고 있고, 따라서 빈부의 격차를 사회구조적인 차원 즉 정치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른바 선별 복지를 제시한 그 보수 논객의 주장이야말로 진보 진영의 정치가나 논객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주장으로 탈바꿈된다. 다만, 그 함의를 잘 따져 그 속에 담겨 있는 ‘갸륵한’ 뜻을 더욱 심도 깊게 변환해야 할 것이다. 사회구조적인 연관을 염두에 둘 때, 부와 가난이 결코 각자의 능력이나 성실성에 의거해 결정되어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하루에 잠을 네 시간 이상 자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회역사적으로 구축된 제도와 장치를 비롯해 그동안 축적된 사회 전체적인 역량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부를 쌓을 수 있을 것인가. 그 사회적인 제도와 장치에는 가난하게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충분히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와 가난이 결정되는 변수들 중 대부분은 사회구조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00만 명의 대학생들 중에는 거금의 대학 등록금을 아예 ‘껌 값’ 정도로 생각하는 부모를 가진 학생으로부터 말 그대로 등록금을 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를 가진 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빈부 격차의 스펙트럼은 다양할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슈퍼에 가서 다 같은 값을 주고 탄산음료를 사먹듯이, 똑같은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니는 것이다.(물론 가난한 학생들에게 일정하게 장학금을 준다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립대학이 80-90% 이상을 상회하는 가운데 대학교육이 완전히 상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대학에서의 교육은 일종의 상품이다. 상품의 가격이 소비자의 뜻과 맞지 않으면 사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동일한 상품은 동일한 가격에 구매해야 옳다.”라는 현실을 반영한 주장이 예사로 제기되기도 한다. 대학교육을 상품이라고 할 때, 정확하게 말하면 그 상품은 교육내용이 아니라 대학졸업장이 되고 만다. 대학교육을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처럼 보게 되면, 언젠가 부가가치세를 매겨 마땅하다는 험악한 주장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6월 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조건없는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국민촛불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런데 고맙게도 보수 진영의 논객이 사회구조적인 측면을 충분히 감안해서 부의 정도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그의 주장을 좀 더 밀고 나가면, 사회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온갖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빈부의 격차에 따라 대금 지불을 차등으로 해야 한다는 엄청난 주장으로 연결된다. 십 분 양보해서 전체 교육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그 보수 논객의 주장은 모든 학교 교육(폭을 확대하면 심지어 사교육과 사회적인 평생교육을 다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다.)에 있어서 빈부의 격차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를 한 단계만 더 밀고 나가면,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학부모가 아닌 국민들이 거의 없을 것이니까, 아예 등록금을 없애고 ‘상당한 차등 비율의 누진세 제도에 입각한 교육 특별세’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야말로 진보 진영에서 염원해 마지않는 보편 복지로의 길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선별 복지와 보편 복지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없다. 사실 조금만 달리 생각해서 사회 전체적인 비용을 중심으로 해서 보면, 어차피 전체 국민들이 교육비 전체를 담당해 온 것 아닌가. 물론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누가 왜 무슨 이유로 어느 정도로 그 교육비를 담당해야 하는가이다. 교육받는 사람들이 교육비를 내고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는가를 개인별로 일일이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사회구조적인 구도를 바탕으로 포괄적으로 계산할 수는 있다. 결국 교육에 의해 부유한 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이득을 얻은 것이고, 가난한 자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다. 그 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있어서는 선별 복지건 보편 복지건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하고 말을 맺고자 한다. 국방과 교육을 비교해 보자는 것이다. 국방비를 아예 국가에서 총책임지고 지불하듯이, 교육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다. 교육이야말로 모든 국민들의 삶의 질을 방어해 내는 ‘실질적인 국방’이라 할 수 있다. 튼튼한 국방이 필요한 것은 바로 교육에 의한 실질적인 국방의 내용을 안정되게 유지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교육이 목적이라면, 국방은 수단이다. 국방을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 등의 이익을 위해 활용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렇게 활용하기 위해 국방의 내실을 상품화해서 완전히 시장 논리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하면, 아예 매국노로 찍혀 입을 여는 순간 매장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국방의 목적인 교육은 왜 상품이라고 함부로 떠들고 실제로 교육을 상품화하여 매점매석을 일삼으려 하고 어떻게 하면 시장 논리에 편입시킬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 안달하는 것이 용납되는가. 물론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서 대학을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들에 재정 지원을 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마저 법인화하여 상품 중심의 교육으로 치달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다든지,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는 자들로 판명이 난 인물들이 대학의 운영권을 갖도록 한다든지, 편의를 명목으로 대학 내에 온갖 상점들을 끌어들여 대학 환경을 시장화 하는 쪽으로 치닫는다든지 하는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한 것은 관련 책임자들이 교육을 얼마나 시장 논리에 입각해서 활용하고자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반값 대학 등록금’이라고 하는 현안이 그 속에 얼마나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의 본질과 정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서 완전히 잘못 가고 있는 교육 체제 자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것이다. 보수 진영조차 알게 모르게 이미 그 강력한 자장에 깊게 발을 들여놓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물러서지 말고 이참에 이 현안을 활용하여 대다수의 시민들에게 교육을 통한 진정한 삶이 어떤 것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 입안자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 사유의 물꼬를 전연 창조적인 방향으로 틀어나가야 할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14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몇 년 전부터 동문회니 동기회니 하는 모임들이 하나 둘 씩 늘어가고 있다. 아마도 나이 40줄에 들어서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얌전하고 적극적이지 않던 친구들이 동창회를 주도하기도 하고, 괄괄한 성격에 많은 일들을 주도해서 모임도 주도할 것이라 여겼던 친구들은 오히려 모임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명확한 주제가 없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에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남성들이 많은 집단이 주는 위계적인 문화에 그런 모임들이 벅차기도 하다. 이것도 병이지 싶어 가급적 모임이 있으면 참여를 하는 편이다. 모임참여의 우선 목적은 ‘운동권’이란 테두리 안에 갇혀 지내는 나를 성찰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동물이기에 조금 어색해도 자꾸 어울려야 한다는 자기최면을 걸기도 한다.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만남, 소위 언어가 통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이란 것이 끼리 끼리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주만나야 교류와 소통이 형성되고 그럴 때 다른 생각들이 만나고, 사람들이 상호변화를 통해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을 굳이 육체적인 것과 사회정치적인 것으로 나누는 것은 아마도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성장시키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리라. 나는 육체적인 생명 외에 사회정치적으로 ‘여성주의자로서의 생명’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무엇이 여성주의인가? 라는 질문은 나를 곤혹스럽게도 하지만 무엇이 여성주의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제법 답을 내어놓을 수 있다. 물질만능, 위계, 폭력, 차별, 억압, 전쟁, 경쟁, 이기주의, 자연파괴 등. 여성운동이란 남녀관계의 위계적인 권력질서를 해체하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모든 활동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대결로 몰아가는 식으로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을 해석하는 것은 반대한다. 여성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여성운동은 가깝게는 남성의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결국은 사회정치적인 질서와 문화를 새롭게 재편하는 것에 있다. 그동안 남성 중심으로 구성되고 유지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대한 재구성과 재조직을 목표로 하는 어쩌면 지난한 대안을 만드는 작업과정이다. 이는 현재의 사회정치문화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 생활패턴을 전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쩌면 여성주의, 여성운동은 기존질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도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여성주의는 아주 편협한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되고 여성운동을 하는, 그리고 여성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에 대해 모난 척, 잘난 척, 남성 적대적이라는 혹평이 붙고 그리하여 때로는 공공의 적이 되기도 한다. 항상 날을 세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여성주의를 지향하면서 살고자 할 때는 스스로에 의해서보다는 남에 의해 날이 세워지는 경우들이 생긴다. 나는 전교생이 280여명이던 좀 작은 시골초등학교를 다녔다. 전교생이 얼마 되지 않아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이름과 얼굴을 다 욀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초등학교도 매년 총동문회를 개최하고 체육대회를 진행한다. 올해도 이번 달에 총동문회가 열렸고 매년 참석권유를 받기만 하고 참석치 못했던지라 연휴에 고향 어머니도 뵐 겸 동문체육대회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체육대회라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인삼각경기도 하고 단체 줄넘기도 하면서 즐거운 한나절을 보내며 흥겹게 그 시간을 즐겼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흡연문제로 남자동창이 시비를 걸고 물건을 던지고, 언쟁이 오가고 급기야 몸싸움까지 날 뻔하다 수습되기까지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로인해 즐겁던 모임은 순식간에 찬물 끼얹은 듯 냉랭해지고 나는 분노와 억울함에 치를 떨면서 그 뒤 며칠을 엉망인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80년대 겪었던 흡연문제를 이 나이에 다시 겪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과 그 동창 놈과 주변에서 사태가 위기로 진전될 때까지 구경만 하던 친구들에 대한 분노가 좀체 가시지 않아 마침 고향집에 온 동생들과 언니들에게 고자질을 해대면서 분노를 표출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쫓아가 똑같이 복수를 하고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내 편이 되어 함께 그 원수 놈을 욕해주길 바랐던 내 기대와 달리 언니는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언니가 경남의 시골마을 버스를 탔는데 할아버지 두 분이 타시면서 한 분이 다른 한 분에게 젊은 여자가 옆자리에 탈 수도 있으니 떨어져 안자고 하셨단다. 그러나 그 할아버지 옆 자리에는 불행히도 지팡이를 짚으신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께서 앉게 되셨다. 그러자 할아버지 왈 “늙은 호박꽃도 꽃인가?”라고 비꼬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흘기는 사이 할머니께서 응수하시기를 “늙은 호박이 더 단거 모리나?” 하시더란다. 버스안의 승객들이 같이 할아버지에 대한 고소함과 할머니의 재치에 감탄하여 웃었다고 한다. 앞에서 여성주의란 기존질서와 가치에 대한 전복이자 대안을 형성해내는 과정이라고 장황히 언급하였다. 언니의 일화를 듣는 순간은 ‘할머니 참 재치 있으시다.’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그 친구가 전화와 문자로 사과를 하였으나 받아들일 맘이 나질 않았다. 오로지 복수 외에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대응 방식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버스안의 할머니는 충분히 화를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농담으로 할아버지를 무안함으로 한방에 제압하고 승객들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그 힘은 어디서 왔을까를 고민하면서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폭력을 이기는 것이 비폭력저항이고 전쟁을 이기는 것은 평화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보복중심의 갈등해결방식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폭력성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음을 본다. 무슨무슨 주의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과정이 그러한 주의를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노력할 때 설득력이 생긴다. 더불어 안과 밖이 일체가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입 따로, 몸 따로 갈 때 그의 말은 설득력을 잃고 허공에 흩어지게 된다. 나는 얼마나 여성주의자라는 사회정치적인 생명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이 순간에도 나는 내 삶의 과정에서 겪어왔던 날선 갈등과 상처의 자국에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가끔 비열하게도 약한 고리를 찾게 되면 폭발한다. 이런 한계와 모순덩어리가 나다. 다만 다행인 것은 그것이 나의 한계라는 점을 안다. 알게 되면 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아니 매순간 시작해왔는지 모른다. 사람은 고정불변한 존재가 아니지만 변화가 그리 쉬운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한계를 고백하는 순간에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왜 남자들은 자기가 모든 여자들의 남편이나, 오빠,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것도 꽤나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진정한 남편이자 오빠, 아버지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현 한다고 하면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1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 탐사보도팀장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득바득 살림을 일구던 부모님은 아들을 유치원에 보낼 여력까진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소꿉놀이를 했다. 나에게도 소꿉친구가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했다. 우리는 뒷산에 올라 진달래를 따먹었다. 여자 아이는 풀잎 뒤에 매달린 달팽이를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배시시 웃었다. 여자 아이가 하자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자”고 여자 아이가 말했다. 교회에 가면 돈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유치원이 있다고 했다. 지방 도시의 교회에는 널찍한 강당이 있었다. 코흘리개들은 마룻바닥에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점심 무렵이 되면, ‘뽀빠이’를 나눠 줬다. 라면을 구워 만든 과자였다. 과자 봉지 안에는 작은 ‘별사탕’도 있었다. 그저 입에서 스스르 녹는 별사탕은 별천지였다. 별사탕을 먼저 먹을지, 나중에 먹을지 항상 고민이 심했다. 뽀빠이가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별사탕이 있기 때문이다. 뽀빠이 때문에 그 아이와 멀어지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100여명의 코흘리개들이 오직 뽀빠이만 쳐다보고 교회에 나오는데, 교회 어른들이 나눠주는 뽀빠이는 항상 부족했다. 뽀빠이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 있었다. 날이 갈수록 쟁탈전이 치열해졌다. 아이들은 줄을 서지 않고 우르르 몰려 들어 어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센 아이들은 꼭 뽀빠이(그리고 별사탕)를 차지했고, 숫기 없는 아이들은 뒤로 밀렸다. 어떤 아이는 울었다. 어른들이 말했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내일은 꼭 (뽀빠이를) 받을 거야.” 그건 옳지 않았다. 힘이 약한 아이들도 과자를 받을 수 있도록 줄을 세우고 차례를 정하면 부족하나마 공평하게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교회 어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성들여 기도하고 또다시 뽀빠이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나는 보았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뽀빠이를 매일 받아먹을 자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교회를 드문드문 나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말쑥한 아이는 그런 나를 타박했고, ‘뽀빠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 아이에게 나는 서운했다. 우리는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헤어졌다. 그 아이가 이사를 갔다. 이사 가던 날, 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콧물 흘리는 지저분한 사내 놈들과 구슬치기를 시작했다. 사내 녀석들은 진달래 대신 솔방울을 모아 전쟁놀이를 했다. 뽀빠이의 기억이 도드라지는 때가 있다. 해외 취재 때, 현지 한인 교회에 나간 적이 있다. 취재에 도움을 준 교민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뽀빠이 문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지 30여년만에 교회에 나간 셈인데, 또 한번 놀랐다. 목사의 설교는 “요즘 한국 교회에서 이단 종파가 ‘잠입’해 장로와 집사 자리를 차지한 뒤, 목사를 몰아내는 사태”에 대한 개탄과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한 험담과 “그런 일이 우리 교회에선 없을 것으로 믿는다”는 당부 섞인 경고가 주를 이뤘다. 나는 예배가 편치 않았다. 사랑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증오의 언사만 귀에 담은 듯 했다. 뽀빠이의 기억은 정화되지 못했다. 나는 믿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믿기보다 의심하는 일을 주로 한다. 다만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 사상·양심의 자유의 맥락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고, 그것은 각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침의 영역이다. 나의 사상·양심·종교를 잣대로 타인의 사상·양심·종교를 타박하면 안 된다. 믿음의 개별성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다양하고도 고유한 형태를 존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과 명절 차례를 거부하는 개신교와 식사 때마다 기도하는 가톨릭의 금기와 습속을 나는 진심으로 존중한다. 다만 (모든 믿음을 존중함에도) 모든 믿음을 좋아하진 않는다. 예컨대 교회의 붉은 십자가 전광판은 ‘싫다’. 밤거리를 헤매는 노숙자에게 화장실을 개방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면, 부족한 전기를 쏟아 부어 홍등가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주택가 곳곳에 밝혀야할 이유가 없다. 밤마다 문을 걸어 잠그는 교회에 왜 유혹의 네온사인이 필요하겠는가. 예컨대 대통령의 기도는 ‘싫다’. 대통령이라면 공개석상에서 반복적이고 노골적으로 특정 종교의 기도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교분리 원칙이 엄연한 헌정국가의 수반은 헌법의 경계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일삼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종류의 중층적 시선을 느끼며 살아가는데, 유독 대통령은 오직 목사의 시선만 의식하며 사는 것 같아 ‘싫다’. 낮은 곳에 임하여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목사·장로·집사·신도가 있는 것을 안다. 비종교인인 내가 종교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조건 없는 헌신과 사랑을 실천할 때다. 그러나 헌신과 사랑이 아닌 것을 향하여 기도할 때, 나는 그 종교에 정나미가 떨어진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종교는 인격으로 현현한다. 어느 종교건 믿음을 가진 자들이 믿음을 바탕으로 사람의 힘을 입증할 때, 그 믿음이 빛난다고 나는 믿는다. 선량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기독교도와 불교도와 무슬림을 나는 존중한다. 그러나 코란을 끼고 인질을 참수하는 무슬림은 싫다. 신도 머릿수대로 가격을 매겨 교회 매매 광고를 내는 목사는 싫다. 신도들의 돈을 받아 외제차를 몰고 산사를 드나드는 스님은 싫다. 이런 일반론에 입각해 두루 평균적으로 봐주려 해도, 자꾸 목사들이 더 자주 더 많이 눈에 밟힌다. 다른 종교보다 월등한 ‘사회적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결코 조용하지 않다. 코흘리개들에게 뽀빠이를 먹을 수 있다는 당근과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를 던져놓고 기도를 익히게 하려했던 장로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박애와 봉사의 말씀 대신에 다른 종파에 대한 증오와 공격의 언사를 늘어놓는 목사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여론을 통한 성찰과 회개는 내팽개치고 하나님의 용서만 구하는 대통령의 무능과 무감이 나는 싫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할리 없다고 나는 믿는다. 올해 초, 일본 지진에 대해 “일본 국민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무신론·물질주의로 나간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했던 조용기 목사가 다시 기사에 등장했다. 교회 사유화 논란 끝에 물러나기로 했으나 사실은 순복음교회의 실권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인류의 재앙에 하나님의 경고를 들이대고, 신자들의 공동체여야 마땅한 교회를 집안 재산으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습속이다. 그런 목사들이 가장 힘 있고 돈많은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한다면, 나는 그들이 믿는 신이 ‘싫다’. 그들까지 보듬어 안는다면 참 졸렬한 하나님 아닌가. ※ 웹진 <단비뉴스>에 실린 칼럼을 첨삭·보완한 글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8 | 추천: 0
이광조/ CBS PD 한 미국인의 양심선언으로 대한민국이 고엽제 공포에 휩싸였다. 지난 1978년 경북 칠곡군에 있는 주한미군 기지 캠프 캐럴에서 독성물질인 고엽제를 매몰했다는 증언이 나온 뒤 비슷한 증언이 잇따를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엽제를 매립한 곳이 낙동강과 불과 1km도 안된다고 하지 않는가. 미군부대 인근 마을에서 암으로 인한 사망자가 많았다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불안은 더욱 커지는 듯하다. 사안의 폭발성이 워낙 큰 탓에 우리 정부도 민관합동조사단을 꾸리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보수 여당 안에서 소파(SOFA)를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당연히 제대로 진상을 밝히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또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소파도 개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충격과 분노, 불안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그 시절에 미군이 고엽제의 위험을 알고 그랬겠느냐’는 동정론도 나오고 있다. 1960년대 말 우리나라에서도 비무장지대 남쪽 일대에 고엽제를 살포했고 사용하다 남은 고엽제를 민통선 인근 농민들이 농약으로 사용했으니 그런 생각을 할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환경부 장관 후보자가 국회 청문회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는 건 경우가 좀 다른 것 같다. 뭐 환경부 장관 후보자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전에는 발언에 좀 신중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 나 역시 고엽제에 대해 뭘 잘 아는 건 아니다. 그저 책(<몬산토,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 마리-모니크 로뱅 저, 이선혜 역)을 통해 고엽제라는 몹쓸 화학무기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 어떤 위험을 지니고 있는지를 어설프게 알게 됐을 뿐이다. '고엽제 매립 사건'과 관련된 캠프 캐럴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고엽제는 제조방식에 따라 에이전트 로즈, 에이전트 바이올렛, 에이전트 오렌지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 중에서 독성이 가장 강한 것이 에이전트 오렌지이며, 베트남전쟁에 주로 살포된 것도 이 에이전트 오렌지였다. 에이전트 오렌지는 독성이 강한 제초제인 2,4-D와 2,4,5-T를 반반씩 섞은 것으로 두 제초제의 개발단계에서부터 인체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었다. 1949년 제초제 2,4,5-T를 생산하던 버지니아 주 몬산토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사고현장에 있던 작업자들과 청소를 위해 나중에 동원된 직원들이 당시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피부질환 증세를 포함해 구토, 두통, 호흡기와 중앙신경계 장애, 간 조직 손상, 성기능 장애 등의 증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도래와 함께 화학무기로 개발된 것이 바로 고엽제다. 고엽제 중에 가장 독성이 강한 에이전트 오렌지는 1959년 베트남 남부 지방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됐고 1962년 1월 13일부터는 ‘렌치 핸드’라는 작전명으로 약 330만 헥타르의 밀림과 토양에 8천만 리터(이 중 약 60퍼센트가 에인전트 오렌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고엽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양은 다이옥신 400킬로그램과 맞먹는 양이다. 2003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80그램의 다이옥신을 식수에 희석하는 것만으로 80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다이옥신이 베트남에 뿌려진 건가. 문제는 고엽제 제조회사들과 미국 정부가 고엽제의 독성을 언제 인지했는가 하는 점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대표적인 고엽제 생산기업인 몬산토는 1940년대 말에 이미 고엽제의 독성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몬산토를 비롯한 고엽제 생산업체들은 내부 실험을 통해 고엽제의 위험성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 예로 1965년 다우케미컬스 임원회의에서는 다이옥신에 노출된 토끼가 간 손상을 일으킨 연구 결과와 관련해 그 사실을 정부에 보고해야할지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보고되는 고엽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1969년 말에는 미 국립건강연구소의 의뢰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결과는 에이전트 오렌지의 원료인 2,4,5-T에 노출된 쥐가 기형의 태아를 임신하거나 사산했던 것. 이런 실험결과를 토대로 1970년 4월 15일에는 미국 정부가 2,4,5-T가 함유된 제초제의 사용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2,4,5-T가 인체에 미치는 위험성을 감안해 호수와 연못, 유원지, 주택, 식용작물을 재배하는 경작지에서는 그 사용을 금지한다.” 미국인 스티브 하우스가 캠프 캐럴에서 고엽제 매몰을 목격한 것은 1978년, 미국 정부가 고엽제 사용을 금지한지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당시 캠프 캐럴에서 근무했던 미군들이 고엽제의 독성을 제대로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 국방부를 포함한 미국 정부가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에이전트 오렌지 살포용 탱크를 설계한 제임스 클래리 박사가 고엽제 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된 뒤 톰 대슐 상원의원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제초제 살포 작전을 위해 일하던 1960년대에, 우리는 다이옥신 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용’ 제초제는 ‘민간용’ 제초제보다 많은 양의 다이옥신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적은 비용을 들여 단기간에 생산을 하다 보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적’을 상대로 사용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군인이 제초제에 중독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4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4월의 마지막 주말에 “4·3트라우마, 그 치유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학술대회참석을 위해 제주도를 다녀왔다. 나는 <상흔의 역사에서 치유의 역사학으로〉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었던 과거청산과 화해를 위한 사례들을 참고삼아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애도하고 치유하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내용이었다. 역사학자, 심리학자, 정신과의사, 민속인류학자 등이 각각 다른 시각에서 과거 상흔(傷痕)의 생채기들을 어떻게 보듬고 포옹할 것인가를 학문적으로 진단해 보려는 것이 오전순서의 주요 내용이었다. 오후에는 일본식민시대의 ‘위안부’,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대구 10월 항쟁’ 피해자, ‘여순사건’ 피해자 등의 증언에 이어 관련 활동가들의 현황보고가 있었다. 다음 날에는 제주4·3평화공원과 평화기념관, 너븐숭이 4·3위령성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등 기억의 터전을 답사했다. 제주4·3평화재단이 주최하고 제주4·3연구소가 주관한 1박 2일 동안의 모임을 통해 필자가 배우고 느낀 몇 가지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이 땅의 산하에는 억울하게 목숨을 앗긴 혼령들의 흔적과 목소리가 곳곳에 묻혀있다. 할아버지-아버지 세대를 포함한 우리는 식민시대와 제국주의, 냉전(분단)체제와 독재정권이라는 ‘극단적인 20세기'의 광기가 잉태한 시대적 폭풍우를 온 몸으로 견뎠다. 해방이후에는 근대화, 통일조국, 한국적 민주주의 건설이라는 구호에 맞춰 불법감금과 집단학살, 야만적인 고문과 성폭력 등이 공권력의 이름으로 실행되었다. 아직까지도 올바른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과 ‘사태들’의 희생자/생존자/유족들은 국가권력의 오남용과 이데올로기적 칼날에 베여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시키고 참여정부가 계승했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불행했던 과거를 둘러싼 진상규명과 망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고도 아득하다. 과거가 해소되지 않은 분노와 트라우마로 가득하다면, 역사가는 잠들지 못하는 영혼을 초혼가로 달래며 씻김굿을 춤춰야 하는가?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 할까봐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나는 소똥말똥으로만 살았습니다.” 책으로만 읽었던 사건의 생존자가 토해내는 기억(증언)의 실타래가 만드는 무늬를 바라보면서 나는 ‘역사가의 이상한 운명’을 숙고해 본다. 과거에 진정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따져 기록함으로써 ‘과거의 대변인이자 미래의 안내자’를 자임했던 옛날 역사가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역사가가 최근에 출현(출몰?)하고 있다. “그는 선배들과는 달리 자신의 주제와 자신이 맺고 있는 밀접하고 친숙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 관계를 심화시킴으로써 낯선 과거를 더 잘 이해하는 지렛대로 삼았다.” (피에르 노라,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기억의 장소》1권. 필자가 편집인용.) 말하자면, 객관적인 관찰이나 가치중립적인 거리 두기로 과거를 차갑게 분석하고 설명하는데 머물지 말고 감정이입적인 감성으로 무장하여 “역사가 그저 [죽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막아내”고자 애쓰는 것이 새로운 역사가의 숙명이라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과거에 정녕 무슨 일이 제주도에서, 여수에서, 대구에서, 그리고 광화문에서 (왜) 발생했는지를 따지는 이쪽과 저쪽의 해석이 충돌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증언이 모순되며 국가권력의 부침에 따라 그 기념연설이 변주(變奏)된다면, 누가 감히 역사적 진실을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판결할 것인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희생자/생존자/유족들이 넋두리처럼 읊조리는 파편적인 신음과 외마디에는 실증적인 잣대로는 측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또 다른 무거운 진실이 실려 있다. 치유되지 못하고 방치된 아픈 기억들이 정상화, 과거와의 화해, 혹은 국론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희석, 표준화, 그리고 화석화 되려는 오늘, 역사가들이 직면한 과제는 억압된 목소리에 예민하게 주파수를 맞춰 그 메시지를 공감적으로 접수하여 경청하는 것이다. 제주4·3 평화기념관에는 백비(白碑)―묘비명이 적혀있지 않은 맨 묘비―가 전시되어 있다. 60여 년 전에 발생해 대략 3만 명이 희생되었던 사건에 대한 진실공방은 ‘4·3반란’, ‘4·3사태’ 혹은 ‘4·3민중항쟁’이라는 명칭들이 반영하는 논쟁과 갈등보다도 더 오래 계속되리라. 쓰여 지지 않는 역사 혹은 단정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공백 남기기는 과거사실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나 탐구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백비야말로 과거가 남긴 희미한 흔적들과 경쟁적인 목소리들을 반죽하여 제멋대로 ‘만들어지는 역사’를 향해 죽은 자들이 던지는 소리 없는 웃음이 아닐까. 묘비명 없이 누워있는 창백한 묘비를 바라보며 나는 ‘불안한 과거’를 색칠하는 당파적인 역사서술의 어리석음과 ‘위험한 현재’의 비탈길에 서서 ‘오지 않을 미래’를 마중해야 하는 역사가의 한계와 겸손함을 동시에 배운다. 실증주의적 국가 만들기의 신화를 깨고 그 틈바구니로 얼굴을 내미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가들이 자기 고백적인 윤리적 전환을 모색해야 할 순간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54 | 추천: 0
- 제주4.3과 해군기지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1. 이른 아침, 딸아이의 등교를 챙기고 잠깐 누웠다는 것이 또 다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문득 창문으로 비치는 아침 햇살의 기운에 깨어나긴 했지만, 어느 덧 시간은 늦은 아침이다. 그래도 얼른 털고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비단 아침햇살의 따사로움이 준 안락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지나간 일들의 단상들이 번갈아가며 내 몸의 무게중심을 자꾸만 바닥으로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 봄은 떨어지지 않는 감기와 더불어 그늘처럼 드리워진 상념으로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줄도 몰랐다. 해마다 4.3 시기가 돌아오면, 육지로부터 이런 저런 단체와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다. 제주 4.3의 역사를 배우고, 그 흔적들을 살펴보기 위함일 것이다. 4.3 63주년을 맞는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런 현상은 이어졌다. 그 중 어느 한 단체에서 나보고 제주4.3에 대해 말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해군기지 문제도 언급해 달란다. 4.3과 해군기지... 이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은 나에게 고통이었다. 무엇보다 6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살육의 장면을 상상하고 죽음의 이미지에 나를 밀어 넣는 일은 괴로운 것이었다. 해마다 4.3이 도래하지만, 고백하건데 이 시기에 열리곤 하는 각종 4.3 관련행사로부터 난 의도적이지는 않지만 좀 떨어져 있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유족은 아니지만, 4.3시기마다 재연되는 비극의 기억에 동참하는 일이 나에게는 무언가 버거운 ‘의무’ 같은 것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현실의 해군기지 문제까지 얹어 누군가에게 들려줘야 하는 일이었다. 2005년으로 기억한다. 4.3 57주년 위령제가 봉행되는 평화공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4.3영령 분노한다. 해군기지 철회하라”, “평화의 섬 역행하는 해군기지 반대한다”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미 4.3진상보고서가 채택되고, 4.3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사과가 있은지 2년이 다 된 시기에 열리는 위령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4.3유족 일부가 “이런 데까지 와서 시위냐!”며 격렬한 항의와 심지어 발길질까지 해대는 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심한 자괴감에 흔들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국가’폭력에 의해 크나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4.3문제가 어렵사리 ‘국가’차원에서 해결 되어가는 마당에, 또다시 해군기지 문제로 ‘국가’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것이 일부 유족에게는 부담이자 훼방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 사건은 4.3문제의 해결이 지향하는 상생과 화해, 평화의 논리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 이전에, 유족은 물론 어쩌면 제주의 주민 누구에게나 그것이 피해의식이든 어떤 식으로든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4.3과 해군기지 문제는 현실에서 같이 가고 있었다. 강정 바다는 해군기지 건설로 매립될 예정이다. 공사장비가 바다까지 나가 있다. 사진 출처 - 조성봉 2. 해군기지 문제를 언급할 때 마다 나는 이 문제가 제주의 숙명과도 같은 일임을 강조하곤 한다. 그것은 제주가 처한 ‘위치’ 때문이다. 이는 해군기지 문제를 염려하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이다. 지난 1937년 일제가 제주에 군비행장을 건설한 이래로 매 15년마다 주기적으로 되풀이돼 온 군사기지의 시도는 이를 증명한다. 그만큼 제주는 지리적 위치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인 것이다. 비단 군사기지 문제가 아니더라도 유사 이래 제주는 늘 제주를 둘러싼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세력 확장을 위한 교두보, 혹은 전진기지로 위치지어져 왔다. 그 때마다 제주민들은 외부세력에 의해 때로는 침탈에 따른 가혹한 학대로, 때로는 동원된 강제노역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유린당해 왔다. 그런 제주가 오랜 고난의 역사를 뒤로 하고 근대에 들어 섬의 척박함이 오히려 천혜의 자원으로 재발견되면서 국민관광지로 각광받게 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계의 섬’으로 인정되는 등 ‘기회의 역사’로 나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 때,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있다. 설득력도 없고 명분도 취약한 해군기지 건설이 군사요충지와 평화의 섬이라는 긴장관계 속에서 수십 년 버텨온 제주의 미래를 허망하게도 한순간에 군사적 갈등의 지대로 편향지어버리는 것이다. 많은 도민들은 해군기지가 건설되면, 곧이어 공군기지도 들어오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 공감한다. ... 20세기 동북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제주는 오히려 그 지정학적 위험성을 더욱 강하게 경험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대전 말기에 일본군이 대규모로 제주에 주둔하게 되면서 제주는 일본 본토 수호를 위한 대규모 전쟁터가 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그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20세기 제주 역사의 최대 비극이었던 4 ․3의 경험도 제주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일정한 연관이 없다고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 만일에 한국, 중국, 일본, 동북아3국이 상호존중, 공동번영의 정신을 버리고 권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태도로 나아가게 된다면 제주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오히려 지정학적 중요성은 다시 위험성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만일 일단의 팽창주의적 움직임 속에서 제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게 된다면 제주의 운명은 어떻게 될는지 상상해 보아야합니다. 그것이 다른 나라의 팽창주의적 압박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제주는 국제적 위험성 앞에 노출되고 말 것입니다. ... 2001년 제1회 평화포럼에서 행해졌던 제주도지사의 개막 연설문 중 일부이다. 당시 위 연설의 주인공은 현직 우근민 지사이다. 그런 우근민 지사가 왜 이제 와서 "단 한 번도 해군기지를 반대해본 적이 없다”면서, 어찌 그리 당당히도 해군기지 공식 수용입장을 서둘러 밝혔는지 더 이상 묻고 싶지 않다. 다만, 그게 누구였든 이제 와서 매년 연례행사로 확대 개최하겠다는 그 평화포럼의 제1회 도지사 연설문 내용의 핵심이 바로 위의 그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내용은 ‘가능성과 위험’ 이라는 논제로 제주의 위상과 미래를 매우 확고하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제주의 대표가 10년 전 국제사회 앞에서 공식 천명한 바로 그 제주의 ‘가능성과 위험’이 이미 지금 첨예하게 현실로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제주도민 모두가 똑바로 봐야 한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본격적인 공사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사진 출처 - 조성봉 연설문의 내용에도 언급된 바와 같이, 제주 4.3 역시 지리적 위치로 인한 제주의 운명을 배경으로 벌어진 사건이었다. 비록 제주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므로 이를 확보하기 위해 강경진압작전을 폈다는 식의 구체적인 근거는 없지만, 해방이후 벌어진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 양진영이 벌이는 냉전대결에 있어서 한반도는 매우 민감한 위치에 있었고, 여기에 제주도에서 벌어진 5.10 단선반대운동은 당시 미군정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억제’되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미 국무부와 군부 사이에 벌어진 주한미군 철수 논란에도 불구하고 4.3 당시 대량 학살을 가능케 했던 초토화 작전이 실질적인 미국의 군사 통제권 하에서 비롯되었고, 궁극적으로 이는 전후 냉전체제에 대응한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 정부가 채택한 4.3진상보고서상의 내용인 것이다. 3. 국가로 인해 제주의 주민들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은 4.3이 과거의 역사가 아닌 진행형이라는 생각을 강화시킨다. 나는 4.3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해군기지건설이 2002년 안덕면 화순을 근거지로 추진된 이후, 남원읍 위미 2리, 위미 1리, 그리고 지금의 강정마을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은 더욱 첨예해졌다. 심지어 강정마을의 한 주민은 "4.3때도 이와 같지는 않았다"고 할 정도로, 제주 해군기지 건설문제 따른 주민 갈등 문제는 4.3 이후 최대의 사건이라는 지적이다. 기지건설 문제로 인한 갈등양상은 마을 공동체내에서 그 동안 쌓아왔던 친척, 이웃 간 관계의 미덕과 한 마을의 공동체성마저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식의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국가폭력이라는 관점에서도 다르지 않다. 해군기지 건설후보지로 강정마을이 정해지면서, 많은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을 치르고 있다. 40여명의 주민들이 각종 사건으로 고소. 고발돼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업무방해, 집시법 위반 등 현행범 신분으로 주민들을 체포해 물린 벌금만 5,000만원을 넘기고 있다. 지난 2009년 9월, 서귀포신문이 전문의에게 의뢰해 강정마을 주민들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에서, 조사대상 주민의 40%이상이 ‘죽고 싶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해군기지 문제로 주민들에게 생겨난 단절, 증오, 상처와 같은 것들은 분명 어떤 폭력의 산물인데, 그것이 명백히 국가사업을 매개로 이뤄진 점을 반영하면, 해군기지를 밀어붙이는 당국의 모습은 또 다른 국가폭력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행정 절차'라는 형식논리에만 의존한 채 기지건설이 추진되어지는 과정은, 해당 주민에게 있어서는 명백한 '폭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련의 기지건설 과정에서 드러난 구체적인 국가의 모습은 동원과 회유, 고소, 조작 등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것은 주민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넘어 깊은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동원된 포크레인이 이제 바다앞까지 다다랐다. 마치 바다를 건져올릴 태세다. 사진 출처 - 조성봉 4월, 동백이 지는 시절, 강정마을이 쓰러지고 있다. 연일, 포크레인을 앞세워 기지건설을 위해 박차를 가하는 군 당국의 모습은 마치 원래부터 이 곳은 전쟁을 위한 요새임을 하루라도 빨리 낙인찍으려는 듯 보인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기지가 지키고자 하는 국가안보는 도대체 어느 국민을 위한 것인가?. 주민의 희생을 대가로 국민위에 올라서는 기지가 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그 평화는 누구의 평화인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133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