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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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만 스물넷의 꽃다운 나이에 결혼하여 꽃다웠던 모든 것을 두 딸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꽃처럼 어여뻤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마누라의 충격적 증언에 따르면, 나는 했던 질문을 금세 또 한다. “… 그래서 저녁은 맛있게 먹었어?” 밥 먹었냐, 애들은 뭐했냐 등을 빼면 화제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부부의 밤늦은 대화 가운데 마누라는 종종 눈을 찢는다. “또 저런다 또. 방금 물어봤고 방금 말했잖아. 오빠, 정말 왜 그래?” 같은 질문을 금세 물었다는, 5분 전도, 10분 전도 아니고, 바로 직전 대화에서 물었다는, 나로서는 절대로 인정할 마음이 없는 사태가 또 벌어진 것이다. “우리, 말 편안하게 하기로 해요. 선배는 싫고…. 그냥 오빠라 부르면 어때.” 15년 전, 대학 캠퍼스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손발 오그라드는 존댓말로 상대 진영을 탐색했고, 1년 뒤에는 서로 반말하며 안전핀을 뽑았으며, 다시 반년 뒤 결혼이라는 폭탄의 시건장치를 함께 터뜨려 버린 것인데, “여보”라는 호칭을 나중에 쓰기로 합의한 것까진 괜찮았으나 세월 흐르는 줄 모르고 지금까지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아내 덕분에 나는 여전히 20대인 줄 알고 지내다가 오직 문제의 건망증이 도질 때만 뇌세포에 새겨진 생물학적 나이를 비감한다. 아, 이젠 ‘오빠’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가 된 것이다. ‘오빠’는 이 분야와 관련해 더 충격적인 사태를 지난해 가을에 겪었다. 어느 날 아침, 오빠는 신문사 맞은편 식당 앞에 차를 세워뒀다. 신문사에서 오전 내내 일하다 차를 세워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인터뷰가 있었다. 차를 향해 걸으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자동차 열쇠가 없다. 가방 안에도 없다. 사무실에 돌아와 서랍을 뒤졌으나 역시 없다. 잠시 고민했으나 인터뷰에 늦을까봐 택시를 잡아탔다. 해질녘 사무실로 돌아와 찬찬히 하나씩 뒤졌는데 아무래도 없다. 서비스 요원을 불러 차문을 연다 쳐도 열쇠조차 없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하며 무력한 마음으로 어두컴컴한 주차장 한 켠 자동차 앞으로 걸어간 오빠는, 울어버릴 뻔 했다. 자동차 열쇠는 시동 걸린 자동차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바로 옆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오던 점심을 거쳐, 수많은 사람이 곁을 오간 오후와 저녁 내내, 누가 문을 열고 액셀레이터만 밟으면 바로 출발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오빠의 차는 10여 시간을 그르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는 이런 일을 저지른 자신이 무서워졌다. 나중에 오빠는 10여시간의 ‘공회전’에 혹사당한 자동차의 부품 정비에 많은 돈을 바쳐야 했는데, 그 돈으로 공포의 건망증을 고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자동차 열쇠를 꼬옥 쥐며 생각했던 것이다. 뚜껑을 열어 직접 살펴본 바 없으므로 단정할 수 없으나, 아직은 전두엽 피질에 윤기가 좌르르 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10년 전, 그러니까 ‘오빠’라는 호칭도 제법 그럴듯하게 어울렸던 시절, 어느 시민단체가 발행하는 월간지에 나는 이런 글을 기고했다. “세상을 향한 대책 없는 분노를 `꽃병‘이라 불리던 원시적인 무기에 담아 하늘로 날렸던 게 10년 전이다. 그때 나는 서른이면, 치열함으로 꽉꽉 채워 보낸 나이 서른이면 삶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역사책들은 서른 즈음에 세상을 뒤흔든 수많은 혁명가의 이야기를 품고 오늘도 서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기자들이 제 몫을 못하고, 젊은 세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미래는 없다. … 젊은 기자들이 꿈꾸고 음모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난 세월은 한없이 가슴 아플 뿐이다. 수많은 `나이 서른’의 세대에게 한국의 언론은, 역사는 지금 무엇을 말하는가.” ‘나이 서른에 우리’라는 제목이 달린 이 글을 2000년 무렵에 썼다. <한겨레>는 조선·중앙·동아일보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대형 기획 기사를 썼고, 정부는 이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독재 정권과 특혜를 주고받은 과거와 마땅히 납부해야할 세금에 대한 현재를 따져묻는 일에 그들 언론사는 온 몸으로 뻗댔다. 이들은 프레임 설정에 탁월한 바가 있는데 자칭 ‘야당지’ ‘저항지’를 불러대며 민주정부에 칼날을 세웠다. 당시 나는 각 언론사에 있는 동년배 ‘서른 살의 기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고 살면 행복하냐. 만족스럽냐. 그렇지 않다면 도모해라. 힘들면 같이 하자. 그게 우리 나이에 걸맞은 일이다…. 그런 구상의 밑바탕에는 ‘단독자 기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기자는 조직원이 아니다. 부속품은 더군다나 아니다. 샐러리맨이라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 기자는 오직 단독자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고 쓴다. 그 책임도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 마땅하다. 판사, 교수, 의사를 샐러리맨이라 부르는 경우는 없다. 그들은 조직에서 주는 월급을 받지만 그 역할은 ‘자기 완결적’인 동시에 ‘독립적’이다. 개인이 조직을 표상하는 동시에 조직은 개인을 보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억울한 이가 판사라는 개인을, 배우려는 이가 교수라는 개인을, 아픈 이가 의사라는 개인을 신뢰할 이유가 없다. 조직의 최고결정권자인 법원장, 총장, 병원장에게 문의하고 따지고 길을 구해야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원래 검사도 이들과 비슷한 독립체로 꼽아야겠지만, 요즘 상황으로 보아 그들은 오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월급장이가 맞는 것 같다) 기자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선 시민사회를 대변한다. 다만 선출된 대표가 아니므로 ‘추상’으로서의 시민사회를 염두에 두고 권력과 긴장한다. 무엇을 취재하고 쓰고 말할지 자신의 상식과 합리에 비춰 판단한다. 다만 개인인 기자는 하나의 직업적 공동체를 이뤄 오류와 편견을 최소화하려 애쓰는데, 그 시공간이 바로 뉴스룸이다. 뉴스룸은 직업적 편의를 위해 데스크·취재기자 등으로 노동과정을 구분하지만, 원론적으로 뉴스룸 안에서 모든 사람은 (편집국장·부장·평기자가 아니라) 오직 기자다. 기자의 정당성은 위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상식과 합리에 기초한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기자는 편집국장 또는 대표이사의 수족일 뿐이고, 모든 기사는 편집국장 또는 대표이사의 발언일 뿐이다. 친일 부역한 언론, 독재정권에 아부한 언론, 사주의 이익에 충성하는 언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마음 편한 기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 모든 과오는 그 기자의 잘못이 아니다. 이런저런 인생의 우연이 더해져 어쩌다 그 언론사에 몸을 담았으나 기자가 되려했던 최초의 마음이 밤마다 되살아나 양심선언문과 대자보와 사표를 썼다 찢기를 반복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결심이란 게 구차한 생계에 발목 잡히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곡절이므로 아직 그런 덜미 잡힐 일이 적은 ‘서른 살의 우리’가 나서면 어떻겠는가. 조직을 대변하여 마음에도 없는 적대의 언어를 필설로 옮기지 말고, “진짜 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깊은 곳의 단심을 끄집어 내어, 각자 속한 언론사를 욕하고 흉보면서 자유로운 개인인 기자로서 다함께 뭉쳐보면 어떻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조중동 기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내가 아직 나이 서른일 때였다. 200여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지난 1월 18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조선·중앙·동아 종합편성채널 선정’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방통위의 추가 특혜 지원 움직임을 비판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조중동매연’으로 표상되는 보수언론사들이 종합편성·보도전문 채널에 진출하게 됐다. 이 사건의 본질은 아주 간단하다. 이명박 정부가 ‘조중동매연’에게 일용할 양식을 퍼다주었다. 이 밥그릇으로 언제까지 먹고 살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혹자는 신문시장에서 방송시장으로 전환한 조중동매연이 천년 왕국을 마침내 건설할 것이라 전망하고, 혹자는 가공할 자본투입의 부담으로 조중동매연이 오히려 자폭할 것이라 내다본다. 나는 어느 쪽이 됐건 별 상관하지 않는다. 방금 전의 일도 잊어버리는 마흔 살의 나로선 적어도 5년은 흘러야 판가름날 언론 시장의 아귀다툼을 벌써부터 예측할 능력이 없다. 오직 분명한 사실이 있다. 모든 기자는 이제 샐러리맨이 될 것이다. 공중파 방송은 기왕의 시장을 뚝 떼어 조중동매연에 억지로 내주었다. 80년 언론사 통폐합의 정반대 방식이지만 그 본질은 거의 똑같은 ‘강압적 언론 시장 조정’이다. 그 결과 공중파 방송의 모든 기자와 피디는 상업적 실적에 목을 매달게 됐다. 새로 뛰어든 조중동매연은 연간 수천억 원의 자본을 투자한 성과를 조기에 이뤄내야 한다. 신규 시장을 개척하는 일은 언제나 버거운 일이고, 실적에 따라 고용조건은 널뛰듯 할 것이므로 조중동매연 기자들은 사주가 주는 월급 받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역 신문과 케이블 방송의 언론인들은 매체 자체가 통폐합될 위기에 항상 공포스러울 것이고, 운이 좋아 더 좋은 조건에 스카웃된다 하여도 가공할 경쟁 구조 속에서 하루하루 피를 말릴 것이다. 남겨진 신문·인터넷 매체는 부실의 거품을 안고 날로 치열해지는 시장경쟁에 어떻든 적응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다른 방식의 경쟁에 돌입할 것이다. 예컨대 <한겨레>는 고비용 방송이 아닌 저비용이자 미래 산업인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발판삼는 어떤 전망을 궁리해볼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당장 이익을 남기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허물어야 한다. 진보언론의 존망을 다툰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긴 하지만, 눈을 돌려 ‘기자 개인’을 보면 어느 쪽이건 반가운 일은 아니다. 할 일이 더 많아진다는 불평이 아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시장적 판단’이 언론인 일생에서 갈수록 중대해진다는 뜻이다. 그 시장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 좌우한다는 시장주의자의 말에 따른다 해도 미래는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이 실은 가장 돈을 많이 가진 소수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회주의자의 말에 따른다 해도 미래는 다수와 별 상관없이 전개된다. 북금곰은 얼음이 녹으면 사냥할 땅을 잃어버려 마침내 멸종한다. 지금 기자의 처지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립적이고 자기 완결적으로 사실에 기초하여 상식과 합리의 판단을 내려 시민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발바닥 밑으로 꺼지고 있다. 설이 되면 나도 마흔이다. 조중동매연에 있는 나이 마흔 살의 기자들이 어찌 움직이는지 이런저런 통로로 전해 듣는다. 외부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출입처에서 닦아 놓은 인맥으로 정재계 인사들과 열심히 만났다고 한다. 종편·보도채널에 선정되기 위해 고급 취재원을 만나 고급 정보를 구했다고 한다. 그들이 지난 1년여 동안 이룬 일의 대강은 오직 조직을 위한 것이었다. 그 방식으로 열심히 일한 기자만이 장차 좋은 자리를 차지해 ‘데스크’가 될 것이다. 그들이 오늘의 일을 밑천삼아 장차 언론사의 최고 결정권자가 되어 제대로 된 언론을 구현하겠다는 포부까지 갖추고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오직 사주의 몫인 것을 마흔 살의 기자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이 마흔에 우리는 샐러리맨이 되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리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난다. 이 대목에서 건망증은 홀연 사라진다. “세월의 강위로 띄워 보낸 / 내 슬픈 사랑의 작은 종이배 하나”가 생긴다고 가수 양희은은 마흔 살을 노래했다. 마흔살의 나는 조중동매연에서 총대메고 뛰고있는 또래 기자에 대한 한줄기 연민을 세월의 강위로 띄워 보낸다. 자유기자가 되어 시민사회의 광장에서 찧고 까불며 호쾌한 언론을 만들자던 서른살의 제안과 맹세도 함께 떠내려간다. 마흔 살에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 이 글은 <단비뉴스>(http://www.danbinews.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0
홍미정/ 건국대학교 중동 연구소 연구교수 2010년 12월 3일 브라질이 1967년 6월 4일 경계를 국경으로 갖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인한 이후, 2011년 1월 17일까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에콰도르, 칠레, 가이아나 등 라틴 아메리카에 위치한 7개 국가가 연쇄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인하였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2000년대 중반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인하였고, 파라과이와 페루도 곧 이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인하는 도미노 현상은 기타 지역의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이스라엘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공인 움직임에 대하여 미국이 제동을 걸었다. 2010년 12월 15일 미국 의회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국제 사회로부터 공인받으려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노력을 비난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자 협상을 통한 분쟁 해결 요청’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인하려는 유엔안보리의 어떤 움직임도 거부’한다고 결의하였다. 이 결의는 미국 의회 외교위원회 의장인, 하워드 베르만(Howard Berman)이 발의하고 53명의 의원들이 공동 제안하여 통과되었으며,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1967년 경계를 국경으로 갖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인한 것을 언급하면서,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인하려는 유엔 안보리의 어떤 움직임도 거부한다고 명시하였다. 최근의 서로 다른 이러한 국제 사회의 움직임은 2009년 8월 살람 파야드(Salam Fayyad) 팔레스타인 총리가 팔레스타인국가 수립계획인 ‘Ending the Occupation, Establishing the State’를 발표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 계획은 1967년에 점령당한 영토인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서안, 가자에 2년 내에 ‘독립적이며, 주권이 있고, 생존 가능한’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설하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조지 W. 부시가 중재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직접 협상의 결과물인 2003년 로드맵에 토대를 둔 것이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노력을 지지하면서, 2010년 2월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18개월 이내에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공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의 베르나르 쿠슈네르(Bernard Kouchner) 외무장관은 팔레스타인 국경이 확정되기 이전이라도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쿠슈네르 장관은 “2011년 중반까지 정치협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점령한 서안 및 가자지구에 대한) 점령 상태가 종식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점령을 포기하도록 압박할 팔레스타인 국가 기반과 제도를 인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쿠슈네르 장관과 EU의 순번 의장국인 스페인의 미겔 앙헬 모라티노스(Miguel Moratinos) 장관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영구 공존을 위한 평화협상이 마무리되기 전이라도 18개월 이내에 EU가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2010년 12월 EU는 팔레스타인 국가 공인에 대해서 한 걸음 물러서면서, “적당한 시기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공인하겠다.” 밝혔다. 이러한 EU의 태도 변화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공인 움직임에 대하여 제동을 건 미국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 2010년 2월 22일 프랑스를 방문 한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최고수반과의 실무 오찬회동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바라고 있으며, 성공가능한 국가를 원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러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 국가 선언’과 이러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노력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응답은 이전에도 있었다. 1988년 11월 15일 PLO의 입법 기구인 팔레스타인 민족회의(the Palestinian National Council)가 알제리에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국가의 창설’을 명시하는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을 채택하였다. 1948년 아랍 고등 위원회가 가자에서 독립선언을 한 이후, 이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두 번째 독립 선언인 셈이다. 두 번째 독립 선언 이후,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였고, 1988년 11월 15일의 팔레스타인 독립 선언을 인정하는 유엔 총회 결의가 12월 15일에 채택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유엔 총회는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Palestine'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이 결의에 대하여 104개 국가가 찬성 투표하였고, 44개 국가가 기권하였으며, 오직 미국과 이스라엘만 반대투표를 하였다. 12월 중순까지 75개 국가가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였고, 1989년 2월까지 대부분 개발 도상국가들을 구성된 93개 국가가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였다. 1988년 11월 UN 총회 결의문에서 팔레스타인은 이미 국가로서의 지위를 명시적으로 확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영토 내에서 유효한 팔레스타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팔레스타인 국가 공인을 포함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유럽 국가들과 러시아(소련 포함)는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는 미국과 입장을 공유했다.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팔레스타인 국가 공인이라는 연쇄반응에 더하여,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 등이 이 분쟁을 해결하도록 미국을 압박할 수 있을까?
2017-07-20 | hrights | 조회: 166 | 추천: 0
이광조/ CBS PD 지난 해 6월 22세의 한 청년이 의무경찰 복무 중 급성 혈액암, 곧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로부터 6개월이 흐른 지난 해 12월 31일 이 청년의 어머니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아들이 의무경찰로 복무하면서 고참들로부터 상습적으로 구타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고참들에게 인사를 잘못했다고 2시간에 걸쳐 구타를 당하고 경찰 버스 안에서 발길질을 당하고 시위 진압용 방패로 이마를 맞고 보일러실에 하루 종일 감금당하고... 생떼 같은 자식을 잃은 이 어머니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번민과 고통에 시달렸을까? 이 어머니의 하소연에 인터넷에는 누리꾼들의 분노와 함께 전·의경 출신들의 체험담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작고 딱딱한 치약뚜껑에 머리 박기, 손깍지 끼고 머리 박기, 울대 때리기, 기동대 버스 안에서 명치 걷어차기 등등. 파문이 확산되자 경찰은 상습적으로 폭행을 행사한 관련자들을 형사 처벌하기로 하고 가혹행위를 묵인, 방조한 경찰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와 함께 조현오 경찰청장은 부대 안에서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물론 이를 묵인, 방치하는 지휘자도 형사 처벌할 것이며, 구타와 가혹행위 근절에 공이 있는 지휘자나 관리자를 경감까지 특진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채찍과 당근을 모두 사용해 부대 내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강력한 뜻을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의 이런 입장표명을 전하는 언론보도에는 ‘현장의 분위기가 회의적’이라는 분석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왜 그럴까? 조현오 경찰청장의 가혹행위 근절 대책을 접하면서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당신은 전·의경 부대 안에서 가혹행위가 상습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정말 모르고 있었습니까?” 하는 물음이었다. 너무 잔인한 질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정말 몰랐다고 하면 경찰총수로서의 자질에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고 알고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방치했다면 직무유기다. 이러나저러나 책임을 피할 길이 없다. 물론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악습이 몇몇 개인의 책임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조현오 경찰청장에게 이 사건의 직접적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전·의경 부대 안의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경찰총장의 의지가 정말 굳건하다면 지금보다는 덜 야만적인 내무반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닐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진 출처 - 뉴시스 벌하고 상주겠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우선 경찰총장을 비롯한 경찰수뇌부가 일선 경찰서를 순회하며 전·의경들에게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의지를 직접 전달하라. 일선 경찰에게 모든 것을 떠넘겨 놓을 경우 경찰 수뇌부의 얘기는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폭력 근절의 의지에 진정성을 담아 가까이에서 직접 소통하고 수시로 지켜보는 것, 그것이 바로 전·의경 부대 안의 폭력을 줄이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이는 전·의경 부대를 관리하는 일선 경찰서의 지휘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도 효과가 미미하면 폭력근절의 임무를 맡은 경찰관들이 전·의경들과 함께 생활이라도 하라. 교대로 같이 먹고 같이 자라. 너무 지나친 요구인가? 그렇게라도 국민들에게 폭력을 없애겠다는 진정성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군사독재 정권 시절 경찰의 모습을 방치하려는가? 또 있다. 전·의경 부대 안에서 폭력을 근절하려면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적으로 보는 경찰수뇌부, 일선 경찰 지휘부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폭력적인 충돌이 생기면 상황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동료가 얻어맞으면 흥분하는 게 당연하고 맞으면 때리고 싶을 거다. 우리보다 잘살고 시위문화가 성숙돼 있다는 선진국에서도 가끔 시위현장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진다. 하지만 시민들의 정당한 의사표현조차 경찰 수뇌부가 특정한 정치적 판단에 근거해 적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진압방침을 표명하고 나면 폭력의 과잉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 폭력은 시위대만이 아니라 경찰수뇌부의 정치적 판단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보이는 전·의경들에게도 향할 것이다. 폭력의 기저에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없애버리려는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찰수뇌부의 이 같은 부적절한 언행을 이미 여러 차례 목도했다. 한 겨울 갑작스런 철거에 저항하며 농성을 벌이던 세입자들을 두고 “미국 같으면 발포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한다거나 시위진압 경찰을 격려하기 위해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에게 모욕을 줬던 행위가 대표적인 사례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어느 조직보다 규율과 기강이 요구되는 곳이 전·의경 부대라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늘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우발적인 상황이 수시로 벌어지는 시위현장에서 그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경찰수뇌부와 일선 지휘부는 불가피한 충돌과 폭력을 최대한 예방하고 줄이려 노력해야 한다. 이런 구체적인 노력과 태도 변화가 없다면 조현오 경찰청장의 이번 폭력근절 대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선 경찰과 전·의경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질 것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27 | 추천: 0
정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새로 재개된 연평도 사격훈련이 무사히(?) 지나가 천만 다행이다. 북한이 다짐했던 ‘응징’은 없었다. 북한이 대응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보도된 북한의 성명 가운데 “계획했던 사격수역과 탄착점까지 변경시키고”라는 구절이 있다(연합뉴스, 2010-12-20 19:48 송고). 그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이는 사태의 본질과 관계된 중요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영해를 지키기 위한 군사훈련이고, 우리 영해에서의 통상적인 사격훈련일 뿐이라고 한다.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은 북한의 생트집일 뿐이며, 북한은 정말 깡패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영해란 통상적으로 해안선을 둘러싼 연안수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범위는 국제해양법상 12해리(약 22km)까지 가능하다. 그러면 지금 사격훈련을 하고 있는 지역은 어떤가? 물론 연평도에서는 당연히 12해리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문제는 그 구역이 북한의 육지, 즉 황해도 해안에서도 12해리 안에 들어간다는 점이다(아래 그림 1 및 그림 2 참조). 그리고 국제해양법상으로 섬은 육지에 비하여 큰 비중을 주장하기 어렵다. * 위키백과(미국 판)에서 소개된 미국 정부의 지도이다. 이를 보면 북한 해안으로부터의 12해리 선은 NLL을 넘어 그 이남까지 많이 내려오며, 남과 북의 등거리 선(섬을 무시한 상태에서 그은)도 NLL보다 한참 아래쪽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1 출처 -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Northern_Limit_Line) * 북한 측이 주장하는 영해선(2006년 4차 장성급회담에서 북쪽 제안)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우리 서해 5도 섬들과 북한 육지 사이에서는 기존의 NLL에 근사하게 그어져 있으나, 소청도와 연평도 사이의 바다에서는 NLL 이남으로 훨씬 내려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의할 것은 북한이 ‘영해 경계선’과 ‘해상군사분계선’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리적으로 ‘영해경계선’과 ‘군사분계선’을 구분하는 것이 옳다. 영해는 국제해양법에 따라 자국의 육지를 둘러싸는 구역인 것이고, 군사분계선은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하여 군사역량을 상호 후퇴시키는 기준선이다. 그리고 우리 정전협정상 군사분계선은 육지의 휴전선뿐이며, 한강하구나 서해 바다에는 군사분계선을 두지 않았음을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NLL이나 북한이 얘기하는 해상군사분계선이나 모두 정전협정에 근거가 없는 것이다. 다만, 영해는 정전협정에 관계없이 남이나 북이나 모두 고유한 범위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접경수역의 경우 그 경계선에 남북이 협의하고 합의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하여 우리는 NLL, 즉 해상군사분계선을 우리 영해의 경계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북한은 그 둘을 구분하고 우리의 NLL이 자신들의 영해를 침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림 2 출처 - 한겨레신문, 2009.05.28 (http://photo.media.daum.net/politics/view.html?cateid=1002&newsid=20090528201019499) 그렇다면, 우리의 영해를 지키고, 우리 영해 안에서 포격훈련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도리어 북한 영해에 대고 포격을 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아래 그림 3 참조).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물론 북한의 영해를 어디까지 볼 것인지는 다툼이 있지만), 북한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물론 우리는 바다에 쏘았는데, 북한은 바로 군 진지에 그리고 민간시설에 쏘았으니 북한이 죄를 진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먼저 도발한 책임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번 군사훈련이 NLL 이남에서 실시되었지만, 그 지점이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 선을 넘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림 3 출처 - 코리아 타임즈,(http://www.koreatimes.co.kr/www/news/nation/2010/12/116_78317.html) 문제는 NLL이다. 사람들에게 NLL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영해의 경계이다. 우리 포사격 훈련이 NLL 남쪽에서 수행되었는데, 무엇이 문제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NLL이 북한이 주장하는 12해리 영해선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선이라는 점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즉 북한 입장에서는 NLL 자체가 자신들의 영해를 침탈하는 선이라는 점에 대한 인식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목소리를 높일지 모른다. NLL을 의심하다니! 휴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군대가 지켜 온 수역이 우리 영해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NLL은 북한 황해도를 빙 돌아가며 포위하듯 되어 있다. 그것이 남북의 경계선으로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국제해양법적으로 보면 NLL은 우리의 영해선보다 북한의 영해선에 훨씬 가깝다. 사실 NLL의 진실은 거기에 있다. NLL은 휴전 이후 유엔군사령부(유엔사, 즉 미군)가 내부적으로 설정한 선이다. NLL은 원래 우리 영해의 선으로 그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측 배나 비행기가 더 이상 북쪽으로 올라가서는 안 되는 선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래서 명칭도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이다. NLL은 우리 남한이 설정한 것도 아니고, 미군이 설정한 것이며, 그것도 남북을 가르는 해상의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우리 군이 북한 연안수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내부통제용으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국제적으로 공포될 것도 아니었고, 북한에 통보될 일도 없는 것이다. 우리 군은 북한에 통보하였다고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으며, 유엔사도 그에 대하여 아무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또 이렇게 항변할지 모른다. 어떻게 설정되었든, 우리가 사실적으로 수십 년간 지배해 왔으니, 우리 영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소위 ‘실효적 지배’ 이론이다. 그러나 이쪽 입장에서의 실효적 지배란 저쪽 입장에서는 강탈과 침략에 다름 아닐 수 있다. 가상의 예를 들어 보자. 대마도 이외에 포항 앞 바다, 그리고 마산 앞 바다에 조그만 일본 섬들이 또 있다고 해 보자. 그리고 일본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강력하여 그 섬들과 한국 해안의 등거리 선을 그어 놓고, 그 선 아래, 그러나 우리 육지에 가까운 연안 수역을 수십 년간 지배하여 왔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것이 일본 영해가 된다고 해야 하나? 그러한 전형적인 강권적 침략의 논리를 법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 예는 경우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남한과 북한은 휴전상태, 즉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며, 휴전상태의 전쟁법에서는 그러한 사실상이 지배가 오히려 당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전협정에 해상 경계선에 대한 규정이 없고, 또 휴전체제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해상의 경계가 필요하다고 할 때, 휴전상태에서는 결국 무력적 지배밖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아니 전문가들도 잘 모른다. 우리 정전협정은 서해 해상에 아무런 경계선을 두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대측 육지의 인접해면, 즉 연안수역을 존중할 것을 명하고 있다(정전협정 제2조 제15항). 남과 북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임의로 일정한 선을 설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측의 인접해면을 침범하게 되면 그것은 정전협정 위반이다. 그리고 그것을 군사적으로 강제한다면, 이는 무력적 적대행위 혹은 침략행위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북한의 공격에 대하여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우리가 NLL을 군사적으로 강제하고 그 부근에서 포사격훈련을 하는 것이 먼저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전협정이 얘기하는 북한의 ‘인접해면’이 어디까지인지는 다툼이 있으며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휴전 협상 당시 북한은 12해리, 유엔사는 3해리를 주장하였고, 양측은 그에 대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이후 국제해양법은 최대 12해리까지 영해를 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양측의 접경수역에서 그대로 관철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남북 양측이 모두 상대 육지(섬 포함)의 ‘인접해면’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점은 부인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NLL은 우리의 ‘인접해면’을 지키는 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서 얘기한대로 NLL은 원래 북한의 인접해면을 침범하지 말도록 설정된 선인 것이다. 따라서 NLL을 우리의 ‘인접해면’ 혹은 ‘영해’의 경계라고 말하는 것은 정전협정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국제해양법상의 법리에도 맞지 않음은 물론이다. 더욱이 NLL은 다툼이 있지만, 북한의 ‘인접해면’ 혹은 ‘북한의 영해’를 침범하는 선일 수도 있다. 물론 서해 5도와 북한 육지 사이의 수역에 있어서는 NLL이 양측의 ‘인접해면’의 경계로 유효할 수 있다. 하지만, 소청도와 연평도 사이의 너른 바다에 북한 육지에 바짝 붙여서 그은 NLL 부분은 특히 의심스럽다. 1999년부터의 수차례의 서해교전, 그리고 이번에 연평도 사태도 바로 그 부근에서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NLL을 우리의 영해선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것이 군사적 애국주의와 대중적 분노의 원천이 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여 NLL은 정전협정에 근거도 없으며, 오히려 정전협정에 반할 수 있는, 그리고 국제해양법상으로도 온당치 않은 선을 우리가 그저 군사적으로 강제하고 압박하고 있는 선이다. 도리어 북한의 영해를 위협할 수도 있는 선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휴전체제에서의 사실상의 지배로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정전협정의 정신, 적대행위를 방지하고, 평화를 회복하려는 우리 휴전체제의 근본(정전협정 제2조 제12항)을 뒤흔드는 공격적 행태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런 군사적 위험을 고조시키고 있는가? 어리석은 일이다. 이번 연평도 사태는 일회적이고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고, 길게는 NLL을 둘러싼 휴전 이후의 분쟁에서부터 가깝게는 천안함 침몰 이후 우리 측의 강화된 서해 훈련 그리고 그에 대한 북한의 대응이 상호 에스컬레이트 되어 벌어진 일이다. 우리 측의 사격훈련에 대응하여 북한도 이미 지난 1월과 8월에 해상포격훈련을 하였고, 처음에는 NLL 이북에서 실시되었으나, 이후에는 NLL 이남까지 포탄을 쏘았으며, 이번에 마침내 연평도까지 포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상호 ‘영해’를 지키기 위한 기싸움이 결국 남북 모두를 공멸에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우리 군이 정말 사격 지점을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하여 우리 군이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를 넘지 않는 선에서 포격훈련을 하였다면, 우리 혹은 미국 측의 자제력을 높이 평가해 줄 부분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북한이 군사행동에 나서지 않는 명분으로 짐짓 말하는 것이라면, 확전을 피하기 위한 북한의 대화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말, 어찌 보면 세부적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저 너른 바다에 선이 어떻게 그어져 있는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선을 가지고, 우리는 ‘영해’라는 추상적인 관념으로 싸우고 있다. ‘영해 절대사수’라는 명분에 분노하며 우리는 서로를 살상하고 있다. ‘영해’의 경계선을 엄밀하게 확인하자고 하면 끝없는 다툼과 자존심 싸움을 피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리하여 나온 해법이 바로 ‘공동어로구역’, ‘서해평화협력지대’였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제2차 정상회담, 10.4 선언에서 합의된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이명박 정부 들어서 그 합의는 폐기처분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현재 한반도 전쟁위기의 책임을 누가 져야하나? 우리 정부는 영해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본 바와 같이 NLL은 영해의 경계라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미흡하다. 만약에 국제사법재판소(ICJ)에라도 간다면, 우리가 승소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현재 NLL은 우리 영해를 지키는 방어적 의미보다 오히려 북한을 압박하는 공격적인 요소가 강하다.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는 서해 5도 수역의 평화적 관리에 나서주길 바란다. 또 그를 위하여 NLL에 대한 진실과 합리적 토론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와 군부 그리고 정치적 보수 언론이 NLL에 대한 일방적 관점을 주입하고, 또 그렇게 형성된 국민들의 ‘순진한 분노’를 다시 활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기득권을 강화하는 이런 어리석고도 서글픈 악순환은 이제 끝나야 한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31 | 추천: 0
유정배/ 사단법인 강원살림 상임이사 1939년 개설된 경춘선이 오는 12월 21일, 복선전철로 개통된다. 경춘선 복선 전철은 춘천시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정치인, 지역 언론 등 춘천의 유지들은 경춘선 복선전철 개통과 동시에 새로운 춘천이 시작된다고 역설했다. 경춘선 복선전철 로 ‘수도권 시대’가 열리고 춘천발전이 새롭게 다가온다며 부풀었다. 예전에는 변두리였던 남춘천역 주변이 중심지로 급부상하였고 39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서며 700억 짜리 환승센터가 역사 옆에 신설되는 등, 변방 춘천의 변모가 마치 강남을 따라가는 듯 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부 언론은 인구가 늘고 미분양 아파트가 줄어들고 있으며 ‘전세대란’ 이 일어나는 등 수도권 개발지역에서나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 ‘낭만도시’ 춘천이 ‘거품도시’로 바뀌고 있는 걸까 ?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착시는 지역 정치인과 땅 부자, 그리고 외지 개발업자들의 집요한 마케팅이 먹혀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구가 크게 늘어난 것이 아니고 미분양 아파트가 일부 해소 된 것은 경춘선 복선전철 개통 등의 기대효과를 노린 가수요 일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도권과 공간적 거리가 수도권의 다른 도시들과 차별성을 가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춘선 복선 전철 개통은 오히려 춘천 고유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될 수 없듯이 춘천은 ‘강원도’ 춘천이지 ‘수도권’ 춘천 일수 없는데, ‘수도권 시대’ 운운 하는 것은 춘천을 이도 저도 아닌 도시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춘천의 도시 정체성이 외지인, 특히 칠팔십 년대에 수도권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의 눈으로는 아련한 첫사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낭만도시’ 이겠지만 춘천사람들에게는 외부인의 시각 일수 있다. ‘낭만도시’ 춘천은 춘천시가 외지인을 향한 장소 마케팅을 위해 발굴한 소재이지 춘천의 역사와 장소적 소재에 기반 하거나, 춘천사람들의 정체성 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달리 보면 춘천은 ‘군사도시’일수도 있고, ‘문화예술도시’의 면모가 있기도 하며 ‘교육도시’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춘천사람들이 긍정하고 있는 정체성의 실체가 애매하거나 아직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보면 ‘낭만도시’ 춘천은 ‘수도권 시대론’과 연결되어 있다. ‘수도권 시대론’의 문제는 춘천이 외부에 의존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는 점이다. 거대한 수도권에 빌붙어야 춘천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춘천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솔직히 말해 수도권 시대를 살아갈 춘천에게 수도권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관측자의 주관적인 이해나 욕망에 따라 달리 보인다. 시험운행중인 경춘선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른바 ‘빨대효과’가 있을지 ‘적하효과’가 더 클지는 두고 봐야 아는 일이다. 다만 다른 지역 사례를 보면 득보다는 실이 많으며 잘해봐야 수도권 변방이 된다는 것이 경험적인 사실이다. 역사적인 경험은 크고 센 놈한테 빌붙는 것이 모든 약자에게 이롭지 않고 오히려 진짜 약자들에게는 고역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교통망이 좋아지면 외부세계와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그것을 통해 상호발전이 이루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고립된 세계가 풍요를 누릴 수 없다는 점도 진리이다. 따라서 무엇을 가지고 교류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교류가 동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위해서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고유의 어떤 것을 공감해야 발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수도권에 모든 자원과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우리 현실에서 ‘수도권 시대’가 온 것은 춘천이 어이없는 도시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강력한 신호이다. 따라서 수도권 시대 춘천시민들은 우선 정신 바싹 차리고 정체성 세우기에 들어서야 할 일이다. 서울사람들이 춘천에 와서 춘천고유의 무엇에 감동하고 공감하도록 자신을 가꾸어 가는 일, 그것이 ‘수도권 시대’ 춘천의 생존법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1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70, 67, 45 위는 여성의전화가 각종 보도 자료를 이용해 통계를 잡아 본 숫자다. 앞의 두 숫자는 2009년도, 2010년 10월까지 한 해에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이다. 마지막 45는 간신히 살아남은 여성의 숫자를 의미한다. 지난 1년 동안 남편의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총 368만 명이고, 이중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여성은 104만 명. 목을 조이거나 혁대, 칼 등으로 위협당하거나 맞는 등의 심각한 가해를 당한 여성도 50만 명에 달한다(출처- “칼 휘두르는 제 남편, 처벌해 주세요-오마이뉴스”) ‘맨손이나 둔기로 때리기’ ‘젓가락이나 칼로 찌르기’ ‘불 지르기’ ‘공기총으로 쏘기’ ‘한겨울에 알몸으로 바깥에 내쫒기’ ‘2층 이상 난간에 매달리게 한 뒤 떨어트린다고 위협하기’...... 가정폭력, 정확히는 아내에게 행사하는 구타 및 폭력이다. 이러한 구타로 인해 아내들이 겪는 증상은 멍에서 정신질환 자살과 사망까지 다양하다. 아내구타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여성운동진영에서 사회화와 법·제도를 만드는 것 외에 아내구타피해자 지원을 위한 체계까지 마련하고 있다. 문제는 아내구타가 ‘가정폭력방지법’으로 환원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법이 제정됨으로 인해 아내구타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여기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기본권을 가진다는 헌법조문이 일상 속에서의 기본권을 다 보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폭력방지법이 현실에서의 아내구타를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법 앞의 평등이 아내구타 피해자와 가해자를 법정 내에서 법조문의 해석 앞에서의 평등으로 협소화 하고 있을 뿐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 그 달콤한 거짓말 2010년 10월 진도대교에서는 수년 간 지속된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딸아이를 가슴에 품고 다리에서 뛰어내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적 착취, 언어·신체적 폭력은 물론이고 아이들에게까지 구타를 서슴지 않고 심지어 내다버리려는 남편을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물론 그 전에 구타로 인한 상해로 기소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고발’이 가해자 남편을 집행 예로 풀려나게 하는 것으로 귀착됐다. 사유는 23장의 유서에 절절히 적혀있는 폭력과 학대 때문이 아니라 2년 전 전치3주의 상해를 증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가정폭력의 질적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판결이다. 법치국가에서 인권은 법으로 보장된다. 최소이자, 최후의 수단으로서 이다. 최대의 수단과 장치는 사회적인 문화나 생활양식, 국가의 다양한 보장·보호 장치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치들에서 소외된 자들이 기댈 곳은 법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인권의 관점과 원칙을 우선 지켜야 한다. 원칙들은 약자 우선, 충분한 조사와 진단, 여타 다른 장치들과의 상호연계성 고려 등이 있을 것이다. 특히 각각의 인권사안이 가지는 특성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함도 물론이다. 가정폭력은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가해자의 은폐의도에 따라 드러나기가 쉽지 않다. ‘가정’이라는 고립되고 은폐된 영역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에 가하는 폭력으로 성에 기반한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위법, 인권침해 행위인 것이다. 인권이 약자우선을 하는 배경에는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권력행사의 대상인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인권은 권력의 존재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권력을 가진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을 법조문, 증거, 객관성을 들이대는 ‘평등’으로 대할 것은 애초부터 아닌 것이다. 상황참작은 이런 때 적용되어야 한다. 법의 객관성을 의심하라 그러나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의 실체를 모르고, 그 힘이 남용될 수 있음을 모른다. 그 결과가 진도대교 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객관성이란 이름은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 지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담론일 뿐이다. 그 객관성 안에는 이미 지배층남성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 법의 객관성이란 지배층의 지배담론을 유지하고 강제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포장일 뿐이다. 누가 법을 말하는가? 누가 만들고 누가 판단하는가? 그리고 누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공개적이기 힘들다. 발생하는 장소에서도 그렇고 바라보는 관점, 발생하는 관계에서도 그렇다. 이렇게 남성들의 인권문제가 발생하는 것과 다른 배경에서 진행되는 여성폭력을 일반화의 시각에서 처리하는 것은 남성의 입장에서 처리하는 것과 같다. 그 일반화는 남성의 입장인 것이다. 그것도 전체가 아닌 극히 일부의 남성들일 뿐이다. 애초에 인권담론이 백인, 중산층, 남성의 담론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10년에만 아내폭력으로 67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사진은 제4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2010년 살해된 아내폭력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진행했던 '멈춘 그녀의 신발' 부대행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상황과 처지를 고려한 객관성이어야 여성운동의 ABC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는 구호는 인권담론에 성(性)의 관점을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획득되어야 할 권리가 아니라 천부적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인권의 지평을 넓힐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장애인의 권리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시민권을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적영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상을 사적영역에서 보내고 있는 여성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안전할 권리, 의사결정을 할 권리, 말할 권리, 자율권-등은 지속적으로 침해받고 있다. 때문에 인권과 그 부분으로서의 시민권 개념은 영역이 더 넓어져야 한다. 아내에 대한 폭력이 가정문제로 치부되면서 사생활 침해라는 비난을 사고 성폭력이 순결하지 못한 여성개인의 문제로 치환됨으로서 피해자가 비난을 샀던 것이 이제는 공공영역으로 이동하면서 공적인 처벌을 받는 문제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법이라는 공공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과 관점의 문제이다. 공공성에 익숙한 남성들과 똑같은 방식과 관점으로 여성(사적인 성격이 강한)의 문제를 풀어낼 때 공공성이 요구하는 틀에 맞추기 위해 피해자인 여성이 그 성격을 규명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남성 위주의 객관성에 맞게 풀어내야 하는 고통과 책임을 지는 것이다. 대다수 여성들은 그 과정이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기도 한다. 결국 다른 영역과 다른 성격을 갖는 사안은 그 다름의 입장에서 풀어내어야 한다. 그 다름의 영역을 전면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객관성이다. 특성이 반영되지 않는 객관성이란 위험한 일반화이자 전체주의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문화정책도 빠진 오류 다문화정책에 들어가는 예산은 여성 예산에서 볼 때 엄청난 비율이다. 그러나 이주여성들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4~5%에 불과하다. 왜 이 얘기를 하는가하면 ‘다문화’주의가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름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함을 말하기 위해서다.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엄청난 성찰과 맥락이 요구된다. 소위 ‘차이의 정치학’으로 언설되는 다양성, 다문화는 실제로 경계 짓기에 다름 아니다. 다름이 만나기 위한 방법, 다름이 드러나되 상호 수용되기 위한 인식체계는 다양성의 공존이나 인정이 아닌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다문화정책’은 다름의 인정이 아니라 통합성과 동화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얼마나 천박한 인식체계이며 실천현상인가. 실제로 다양성은 개인 안에도 나타난다. 나만해도 여성, 활동가, 엄마, 며느리, 딸, 친구, 이성애기혼자라는 정체성이 혼종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 때문에 다양성 보다는 혼종성으로 인식되어야 하고 이 혼종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열려있어야 한다. 포용, 포괄, 포함해야 한다. 객관성도 상황과 처지에 따른 맥락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혼종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일 터이겠지만 ‘다문화’가 사회적으로 재현될 때 그것은 ‘통합성’과 ‘동화’로 나타나는 천박함이나마 극복해봤으면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사회담론과 인식을 구현하는 방식이자 수단이라면 법은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은 여전히 한 성(남성)만을, 비장애인을, 인간 이기주의를, 자국민 우선주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법과 제도의 순환에 참여하고 결정권을 행사하는 이들의 성찰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들이야말로 다양화, 다변화, 혼종성의 강화라도 하는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변화를 따라잡고 때로는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가? 공공성과 내 삶이 만나는 지점에 진정한 주체가 여성주의는 ‘민주주의’이다. 성별에 기반을 둔 차별과 불평등 해소라는 입장에서 그렇다. 차이가 차별로 나타나지 않는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모든 운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지만 여성운동은 성에 기반을 둔 권력관계의 해체라는 점에서 ‘성민주화’를 지향한다. 정치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말하는 정치는 제도정치로 편협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일상, 언설과 행위들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성별로 분리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제정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생활영역 전반의 문화를 바꾸는 지난한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 시민운동과 차별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정치의제로 만드는 과정이 동반한다. 이러한 과정은 성찰성을 자산으로 하며 성찰적인 개인들의 말이 여론화되는 과정, 즉 공론화의 과정과 공론장의 확장이 필요하다. 또한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 자기 자신, 타인, 다른 존재들과의 전면적인 만남과 응시를 필요로 한다.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이자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 공존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를 인간의 얼굴로 만드는 과정이다. 공공성이 생활이나 일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진도대교 사건을 ‘가정폭력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활자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내 삶과 연결된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이 진정한 주체성의 발현이다. 이 과정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무한경쟁과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타인과 나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대안공동체를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 참여할 것인가는 주체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를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과정이다. 가정폭력으로 숨진 여성들, 여전히 진행 중인 폭력상황에 노출된 여성들과 아이들의 절규와 고통, 절망에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것, 그것은 법에게 책임을 떠넘겨 외면하는 행위나, 객관이란 이름으로 법이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의 입장에서 집행이 되는 것이다. 당장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 것인가? 나는, 당신은 자신의 삶과 이 사회의 주체인가? 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2017-07-20 | hrights | 조회: 148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최근 필자의 귀에 포착된 낯설고 수상한 유행어가 ‘국가의 품격’이다. 궁금하여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봤다. 제공된 잡다한 정보들을 대충 맞춰보니, 2005년 일본에서 출간된 같은 제목의 베스트셀러가 대통령 선거를 앞 둔 2007년 무렵 한국에 번역되었고, 그 후 ‘깜도 안 되는 좌파 정권’과 대비된 품위 있는(?) 보수주의적 지도력을 은근히 지지하는 논리로 뒷받침 되다가, 요즘에는 주로 이명박 정권의 국내외정책에 맞장구치는 추임새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시사용어임을 알게 되었다. “G20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의 국가의 품격”이라는 신문제목이 이런 최신 용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국가의 품격’이라는 용어가 필자의 귀에 거슬렸던 가장 큰 이유는 ‘국가주의 망령’의 부활과 그것이 동반할 폭력성과 시대착오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으리라. 천황주의·군국주의적 전통이 깊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개념이라는 점도 꺼림칙하지만, ‘국가’라는 추상단어가 ‘품격’이라는 도덕적 개념과 조합하여 만든 의인화된 이미지가 겨냥하는 권력효과를 더 경계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국가’라는 무거운 단어에 개인과 나를 포함한 하찮은 이웃들이 짓밟히고, ‘품격’이라는 고귀한 가치에 빵과 일자리라는 통속적이지만 중요한 현안이 묻혀버릴 것을 염려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의 품격’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참을성을 요구하는 속임수로 오용됨에 유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이겠다고 맹세하기를 우격다짐했던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의 망령이 21세기 벽두에 더 흉한 꼴로 되살아났다고 나는 걱정한다.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앞장세우며 지배 권력층이 착하고 근면한 국민들을 꾀고, 꾸짖으며, 훈육하려고 했던 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사수를 철석같이 약속하면서 한강철교를 파괴하고 멀리 부산까지 줄행랑을 쳤던 이 땅의 초대 대통령에 대한 나쁜 기억이 아련하다면, 아이들의 안전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를 원망하며 국가대표 운동선수로서 받았던 훈장을 반납하고 외국으로 이민을 떠난 어머니의 분노와 눈물을 잊을 수 없다. 지난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롯데백화점 인근에서 G20 공식 포스터에 쥐 형상을 그려넣었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던 대학강사 박씨가 작업한 G20 홍보 포스터 그라피티. 경찰과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그의 예술행위가 우리나라의 국격(국가의품격)을 실추시켰다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정부 중요 행사의 포스터를 감히 훼손시켰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이명박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안보적 해이함과 정치경제적 무능력을 ‘국가의 품격’이라는 슬로건으로 감추고 그 뒤에 숨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의 이런 판단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위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졸지에 사랑하는 아들/삼촌/손자를 잃은 가족들이 “동물처럼 울부짖어” 선진국으로 향하는 국가를 망신시켰다는 현 경찰총장의 어처구니없는 발언은 돌발사태가 아니라, 집권층이 공유하는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정확하고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그리고 ‘강부자 정권’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에 오죽하면 중소 기업인들마저도 국가로부터 수여받은 수출 공로훈장들을 청와대 앞에 반납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을까. 이런 관점에서 관찰하면, 천박한 시장만능주의와 허울 좋은 세계화 사이에서 좌표를 잃고 좌초된 정권의 ‘생얼’을 숨기기 위한 화장술(레토릭)이 ‘국가의 품격’인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용어가 국민의 기본권을 방해하는 퇴행적인 논리로 악용될 위험도 있다. 아름다운 상부상조의 전통을 해치는 노동자와 사용자의 갈등을 원천봉쇄하고, 동방예의지국에 어긋나는 야간시위도 불법화하며,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흩트리는 여성권의 도전을 억압하는 무기로 변신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국민들이 마땅히 향유해야 할 자유를 간섭하고 침해하는 익명의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제한된 임기를 가진 실명의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명찰을 부착한 정부 관료와 검찰과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애써 지켜야 할 것은 ‘품격’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이며 국민들의 행복할 권리이다. 우리가 힘들게 노동하여 납부한 세금으로 부양되는 공복(公僕)들이 ‘국가의 품격’을 보호한다는 궤변으로 나의 일상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행위는 주제넘고도 어처구니없는 불법임을 세상천하가 다 알고 있다. 오호라, 오늘날 국가란 나에게 도대체 무엇인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180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집행위원장 나의 10대. 중학교 시절만 해도 난 가족의 총애와 기대를 한껏 받았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했고, 대학 또한 마찬 가지였다. 그것은 곧 나에게 희미하게나마 싹터가던 목표나 인생의 진로 같은 것으로부터 어긋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교 진학 순간부터 난, 삶의 앞날에 대한 꿈 같은 것은 접어버렸던듯 하다. 당시에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일상의 영위, 학업에 대한 소극적 태도 같은 것들이 어떤 ‘방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성인이 된 이후 가끔 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유일한 위안은 방문 걸어 잠가 놓고 팝음악에 심취하기, 이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불러들인 감상에 젖기, 먼 산을 바라보며 역경의 유학길에 오른 형을 그리워하는 일 따위였다. 설레는 꿈은 고사하고 대학진학이나 학습목표같은 것은 빈방에 아무렇게나 걸어놓은 채 눈길도 주지 않았던 10대의 그 시절, 나의 허한 심정을 채워준 그것들이 그나마 나의 방황을 조금이나마 줄여줬다. 지금도 고교시절은 반추하고 싶지 않은 과거일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선생님들의 시선에서 난 늘 ‘예외’였고, 그 ‘밖’에서 난 좌절하고 있었던것 같다. 대학 진학경쟁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이라 그나마 별 노력없이, 대학에 진학했고, 그 ‘방황’이 연장될 무렵, 80년대 끝자락의 사회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다행히 적극적인 삶의 태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되면서 학교와 교육, 아이들 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제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딸아이를 보면서 나의 10대 시절을 간혹 떠올리곤 한다. 그러던 중 어느 우연한 자리에서 제주의 10대 중 상당수가 이미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고 학교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이후, 10대들의 삶에 조금씩 다가가게 되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인구 50만 남짓 제주의 청소년 가운데 매년 3백 명에서 5백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교육청에서 청소년 복지를 담당하는 한 후배는 제주도내 어느 전문계고의 경우, 학생 스무 명 중 다섯 명만이 학교에 남는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전한다. 실상이 궁금해 인터넷을 뒤져봤다. 2005년 한국청소년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가정해체, 학업중단, 가출, 폭력, 성폭력, 범죄, 자살의 문제를 가진 이른바 ‘高 위기군 청소년’이 42만 명에 달하고 있다. 그나마 그대로 내버려 둘 경우 이런식으로 갈 수 있는 아이들이 126만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청소년 다섯 명 중 한 명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2008년 한 해 동안 신고된 가출 청소년만 1만 5천여 명, 그나마도 해마다 3천명이 증가하고 있다. 학교로부터 벗어난 아이들만 3만명이 넘고, 정부 통계에 잡힌 ‘학교 밖 청소년’은 7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삶에 의미를 어떻게 부여잡고 있을까? 거리의 사람들은 그 아이들과 어떤 시선으로 마주할까? 학교는 언제까지 그 아이들을 내버려 둘 참인가? 도대체 학교나 사회의 어떤 문제가 그들을 ‘낙오자’로 몰고 갔을까? 지난 10월 5일 KBS 2TV '시사기획 KBS10' 방영된 '가출청소년 버려진 미래'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우리사회의 양극화 수준은 첨예해질 때로 첨예해졌다. 아이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대리운전 ‘투잡’까지 마다치 않는 삶의 모습은 차라리 평범한 축에 속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거리에서 좌절하는 10대의 아이들이 있다. 그나마 학교에 남아 있는 이들 중에도 관심 ‘밖’의 자신을 방치한 채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며 좌절하는 친구들이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가장 첨예한 칼끝에 선 이들은 바로 그 아이들이 아닐까? 10대야말로 가장 빛나는 시기이어야 하지만, 어느덧 우리사회 10대의 상당수는 이미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고 좌절의 삶을 겨우 지탱해가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우리사회의 10대는 꿈을 키우고 설계하는 시기가 아닌, 일찍이 스스로의 삶을 너무도 극명하게 결정해내야 하는 아픈 시기가 아닌가. ‘청소년 문제’는 단지 교육이나 학교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의 문제이고 우리사회 미래와 연결된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학교 밖, 혹은 안에서 좌절을 겪는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지금 이 시간에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견디고 있을 지부터 제대로 생각해봐야 할 의무가 우리 앞에 있다. 내 10대의 방황이란 그래도 조건이나 환경에 지배받는 것은 못되었다. 앞서 방황의 이유로 삼은 내 선택의 속박은 요즘 아이들처럼 ‘알바는 필수’와 같은 차갑고 치열한 모순된 처지에 비해 관용할 수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조건이나 환경보다 스스로의 관념이 우위에 선 방황이란 성인이 된 지금 오히려 삶의 자양이 되었다는 ‘유리한 해석’을 끌어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나 지향과 상관없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의 지배로서 다가오는 방황이라면,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거리를 헤매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회의 문제이고 우리 모두의 엄중한 책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회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일부터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청소년 단체나 학교교육이나 교육복지의 일이 아니다. 한 삶의 모습, 한 인간의 생애로서 지금 좌절하는 10대의 삶에 동행할 우리의 생각들은 어느 곳에 묻어두었을까?
2017-07-20 | hrights | 조회: 145 | 추천: 0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얼마 전 일본 대학으로부터 한국의 비정규직에 대한 발표를 부탁받았다. 이런 요청이 최근 들어 꽤 잦아졌다. 비정규직 비율이 35%인 일본의 현실이 한국에 대한 관심을 키운 탓이다. 바닥을 향해 질주하는 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를 곁눈질 하는 형국인데, 어쨌든 이것도 일종의 ‘한류’인가하여 조금 씁쓸하다. 물론 두 나라 비정규직 문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2008년 경제위기(이것을 일본에서는 리먼 쇼크라고 부른다) 직후부터 일본 정부의 정책은 ‘규제완화’에서 ‘규제강화’로 선회하였고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20년’을 만회하기 위한 일본의 규제완화가 워낙 급격했던 탓에 생채기가 크다. 또 하나의 차이를 꼽으라면 1919년 2월 9일 창립한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일 것이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산하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는 기업가 오오하라의 이름을 딴 연구소로 이미 100년 가까이 되었다. 홈페이지 http://oohara.mt.tama.hosei.ac.jp에 들어가면 연구소에 대한 소사를 읽어볼 수 있다. 앞부분만을 요약하면 이렇다. “오오하라는 쿠라시키 방적 등의 사업을 하면서 오오하라 미술관, 쿠라시키 노동 과학 연구소 등을 설립한 이색의 실업가이다. 그는 빈곤아동을 대상으로 한 야간학교를 경영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헌신하였지만 자선사업의 결과에 실망하였다. 그리고 사회 문제의 해결에는 근본적인 조사·연구가 필요하다면서 연구소를 만들었다. 오오하라 사회 문제 연구소의 초대 소장은 당시 도쿄 제국대학(현 도교대학) 교수 다카노 이와사부로였다. 그 아래 일본의 뛰어난 연구자가 모여, 노동·사회 문제, 마르크스 경제학 등 미개척의 분야에서 수많은 선구적 연구업적을 쌓았다...(중략)”.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산하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는 기업가 오오하라의 이름을 딴 연구소이다 사진 출처 - 오오하라 사회문제연구소 홈페이지 물론 그 이후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지만 오오하라의 이름을 딴 일본의 가장 오래된 사회과학연구소이자 노동관련 연구소는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활발한 성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업가가 노동관련 연구소를 만들다니. 한국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일일까? 일본의 요청에 따라 발표문을 쓰면서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의 저항과 이에 대한 기업이나 정부의 대응이 매년, 반복적으로 유사한 패턴을 띠고 계속된다. 그러다 보니 필자가 쓰는 글도 작년, 올해가 유사하다. “기륭전자 파견노동자들은 6년째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회사 앞에서 시위 중이다. 현행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에 대한 파견근로를 금지하지만 기륭전자는 파견노동자로 생산라인을 운영하다가 지난 2005년 7월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지만 바뀐 것이 없다.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차 그룹 본사 앞에는 기아차 ‘모닝’을 생산하는 동희오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해고자 복직, 노조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기아차 모닝은 기아차가 생산하지 않는다. 기아차내의 생산라인을 전혀 다른 업체인 동희오토로 이전하고 여기서도 정규직이 아닌 12개 사내하청 업체 노동자에 의해 기아차가 만들어진다. 사내하청 활용 방식의 가장 최근 버전(version)이다.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는 특수고용직인 학습지 교사들이 1천일 넘게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다. 본사가 학습지 교사의 임금이나 마찬가지인 회원관리 수수료를 20만원에서 100만원까지 삭감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10월 13일 특수고용직인 레미콘 노동자 한 사람이 분신자살했다. 건설현장에서 비일비재한 임금체불이 원인이다.” 내년도 비슷할까, 날이 추워지면 시린 손에 피켓을 든 비정규직 노동자들 소식을 알려야 하고 날이 더워져도 어딘가에서 발생한 고공농성 소식을 접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기업가가 노동연구소를 만든 일본도 비정규직 문제는 별반 다르지는 않다. 다만 대응방식에서는 차이가 있다. 적어도 일본에서는 더 이상의 규제 완화는 멈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필자는 일본으로부터의 초대가 반갑지 않다.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이 각각 자국의 비정규직과 근로빈곤의 현실을 소개하고 나아진 것이 없다, 는 결론을 내리는 자리가 반가울 수는 없다. 그래도 내년에는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꿈이라도 꾸어야하지 않겠는가, 또다시 겨울이 다가오는데.
2017-07-20 | hrights | 조회: 135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책장마다 불꽃이 튀었다. 80년대의 마지막 해, <봄우뢰>를 읽었다. 나는 아직 어렸다. 정의를 믿었다. 정의의 원형질을 탐했다. 그것은 현실에는 없었다. 군인이 대통령이었다. 군인은 총칼로 시민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들은 침묵했다. 때로 칭송했다. 나중에 커서, 출세해서, 세상을 바꿔보라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어음이 아니다. 어린 내가 믿었던 정의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지불되어야 하는 청구서였다. 그러나 정의를 흔쾌히 결제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그 시절은 “온건한 사회운동까지 전면 봉쇄하여 가장 극단적 운동이념을 가장 호소력 있게 만든” 때였다. 군사정권은 소련·중국·북한에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했다. 그것이 표지석이었다. 군사정권이 한사코 덮으려는 이론에 군사정권을 기어코 뒤엎을 무기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시절,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전두환·노태우의 반대말이었다. 그러다 <봄우뢰>를 읽었다. 그것은 김일성의 전기였다. 용기를 얻고자 했으나, 책을 읽는 것부터 용기가 필요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이제 그 불꽃만 남았다. 내용은 아련하고 희미하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김일성이 조선인 마을에 직접 잠입했다. 항일운동에 비협조적이었던 주민들은 김일성을 만나 감화 받고 스스로 무장투쟁의 응원군이 된다. 무력이 아닌 감동으로 역사를 바꾼다는, 민중이 스스로 각성할 때까지 지도자는 무한히 인내하며 지도한다는 그 책의 대강은 내가 찾던 정의였다. 무릇 정의로운 정치는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했다. 숨죽여 읽던 그 책을 언제부터 외면했는지 기억에 없다. 나이가 들면서 정의가 아닌 과학에 끌렸다. 정의는 곧잘 패배하였으므로, 정의를 구현하려면 지혜가 필요했다. 분석하고 판단하는 힘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레닌과 마르크스와 헤겔과 칸트로 이어지는 지루한 책에 빠졌다. 주체사상을 폐기했다기보다 잊어버렸다. 그것은 정의를 설명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일성과 마르크스 사이를 오가는 거대한 진자운동을 하며, 20대를 보냈다. 20대가 끝날 무렵, 나는 두 혁명가 모두와 멀어졌다. 그 이별을 누구처럼 대외적으로 선포한 일은 없다. 사상·이념은 금연하듯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급진 이론의 니코틴은 줄어들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호수의 물결과 같다. 최초의 충격은 사라져도, 잔잔한 파동은 언제까지고 계속 된다. 그래서 나는 전향을 믿지 않는다. 전향했다는 자들의 선언을 믿지 않는다. 차라리 자기 연민의 힘을 믿는다. ‘전향 주사파’는 군중의 주목 없인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자기 연민에 가득한 과대망상가일 뿐이다. 1998년 봄, <한겨레> 대담 자리에 나온 황장엽을 만났다. 서울 남산 근처 안기부 안가에서 그를 보았다. <봄우뢰>의 잔잔한 파동을 오랜만에 느꼈다. 늙은 망명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는 전향 주사파가 아니었다. 그는 깐깐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난 김일성의 이론서기로 7년 이상 일했어. 현 단계에서 자본주의 이념을 지지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유물론자요.” 그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한국에 온 것은 아닌 듯 했다. 그의 망명은 확실히 ‘이념적’이었다. 그는 여전히 정의를 믿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정의를 구현하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다만 늙은 몸뚱아리가 그의 행동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정의에 대한 그의 관념은 안기부 안가의 담장을 넘지 못했다. 그에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0여년에 걸친 기자 생활 동안,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전·현직 운동가들도 만났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를 ‘주사파’라 한다면, 나는 지금껏 딱 한 명의 주사파를 만났다. 황장엽이다. 주사파의 혐의를 받는 한국의 운동가 중에 진짜 주사파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저 정의라는 관념에 남들보다 강하게 끌리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계급 모순보다 민족 모순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현실의 부정의를 해소하려는 노력 끝에 이런저런 사상과 이념을 얄팍하게 접해보았을 뿐이다. 황장엽은 달랐다. 그가 한국에 온 목적은 주체사상을 ‘구현’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념을 중심에 두고 현실을 바꿔내려는 사상가였다. 한국에서 주체사상가·주체운동가를 본 적이 없으므로, 나는 황장엽을 통해 주체사상의 실체를 짐작한다. 그가 믿었던 것은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선한 인간의 무한한 에너지를 황장엽은 ‘천리마 운동’에서 보았다. ‘천리마 운동’은 생산력 증대를 노동자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실현하려는 시도였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건설을 시작하고, 중-소 분쟁 과정에서 자주노선을 지키면서, 1960년대의 북한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가장 큰 걸림돌이 관료주의였는데, 이를 해결하려고 김일성이 현지에 내려가 한 달씩 머물며 노동자들과 직접 대화했다. 어느 탈북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천리마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는 사람들이 대문을 모두 열어 놓고 살았다. 서로 도와주고 협조하며 한 가족처럼 살았다. 옆집 사람이 아프면 동네 사람들이 다투어 병문안을 갔고, 먹을 것이 있으면 아끼지 않고 주었다. 1960년대 북한은 사람이 살 만한 나라였다.”(<주체사상과 인간중심철학>에서 재인용) 황장엽은 그 경험을 이념으로 표현했다. 주체사상이다. 지도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생산력 증대에 성공한 60년대의 경험은 ‘무오류의 수령-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성-인민의 창발성’으로 연결되는 주체사상으로 탄생했다. 한국 망명 이후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초가 된 ‘사람 중심 사상’을 ‘인간 중심 철학’으로 바꿔 이름 붙이고, 이를 한국 사회에 적극 소개했다. 한국의 보수파들도 반기는 그 내용의 핵심은 “인간이 실천적 활동의 주체가 되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되, 전체 사회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나의 이익이라는 통찰”에 있다. 논리 구성은 주체사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을 수용하는 한국 우파야말로 어느 면에서는 ‘주사파’인 셈이다. 황장엽의 인간 중심 철학에는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예컨대 “민주주의를 정치 분야의 원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경제 분야에서도 인민 대중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그는 한국의 기업 운영 방식을 비판하면서 일종의 ‘집산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인민에게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 헌신 분투하는 사람은 일부 절차를 어기는 경우가 있더라도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자”라고 말할 때, 그는 독재자를 옹호하는 논리로 빠져든다. 이를 조금 더 확대하면 ‘무오류의 수령론’에 가닿을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주체사상은 종교와도 만난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설파한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설교한다. 그런 개인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공동체의 번성과 평화를 약속한다. 다만 절대로 민주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민주적인 종교는 없다. 특출한 개인을 숭배하는 것이 종교다. 숭배의 과정까지 소수의 지도자가 지배한다. 종교 지도자는 무오류이며 그 자체로 신성불가침이다. 지도자에 대한 반대는 곧 공동체에 대한 반역이다. 황장엽은 계급 독재가 아니라 (사회주의라는) 종교에 감동 감화된 신도들이 스스로 충성하며 평화로운 집산 공동체를 이뤄가길 꿈꾸었다. 1960년대의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 북한의 현실과 관련해 황장엽이 불화한 것은 오직 김정일이었다. 황장엽은 김일성을 수령으로 인정했으나, 김정일에 대해선 그렇지 않았다. 김정일은 교황의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김정일이 한사코 덮으려는 것에서 김정일을 쳐낼 무기를 발견했다. 미국과 한국이었다. 한국 우파가 귀하게 여긴 것도 국가주의·사회주의·인본주의가 묘한 긴장을 이룬 황장엽의 추상적 이론이 아니었다. 황장엽은 인간중심철학의 방향으로 북한을 개조하려면 “한국이 미국에 의거하여 북한의 독재체제를 붕괴시키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유일하게 옳은 길”이라고 주장했다. 황장엽이 ‘인간 중심 세상’을 북한에 만드는 꿈을 꾸는 동안, 한국 우파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을 비판하는 도구로 그를 앞세웠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 사유가 북한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남한 반공주의의 선전 도구가 되는 기묘한 일에는 역사적 뿌리가 있다. 박정희 시대의 철학자 박종홍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며 ‘반공 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그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드높인다”는 국민교육헌장의 논리구조는 주체사상과 거의 똑같다. 주체사상탑은 북한 평양 도심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 170m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국가적 부의 증대를 최고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천리마운동’과 ‘새마을운동’은 닮았다. 동원할 자원이 마땅치 않으므로, 인민(국민)이 스스로 생산력 증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적 세뇌의 과정 또한 닮았다. 이 과정에서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복종이 필수적이라는 믿음도 닮았고, 그 결과 민주주의를 유보해도 좋다는 정치론도 닮았다. 황장엽은 북에서 남으로 망명한 것이 아니다. 그의 등장은 한국에서 암약해온 ‘70년대식 국가주의자’의 재림이었다. 황장엽은 자신이 기초한 주체사상에서 국가주의의 요소를 거세하고 인본중심철학만 추출하려 했으나, 한국의 우파는 이를 오히려 국가(체제)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차용했다. ‘뉴라이트’로 불리는 전향 주사파들이 박정희는 물론 이승만까지 찬양하고, 결국 이명박의 충실한 우군이 된 것도 주체사상의 국가주의적 성향에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한동안 김일성·김정일의 독재를 수긍했다. 북한 체제의 유지·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논리였다. 김일성·김정일의 자리에 박정희 또는 이명박을 대체했을 뿐, 그들은 절대로 전향한 것이 아니다. 사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군중의 ‘창발적 충성’을 토대로 탁월한 엘리트의 지도에 따라 공동체 전체가 부강해지는 것을 꿈꾼다. 그리하여 주체사상의 프로젝트는 거듭 실패했다. 황장엽의 죽음이 뜻하는 바는 여기에 있다. 그의 사유는 북에서 변질되었고, 남에서 악용됐다. 주체사상의 논리구조는 국가주의·체제이데올로기와 반드시 만난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에서 (자신이 입론한) 철학과 (김정일이 변질시켰다 믿는) 정치이론을 분리하려고 애썼지만, 그의 철학 안에 이미 ‘반 민주주의’의 독소가 포함돼 있다는 것은 몰랐다. 국부의 증대가 곧 시민 개인의 행복이라는 믿음이 횡행했던 1960~70년대에 그의 사상은 이미 진화를 멈췄다. 그걸 21세기에 끄집어내면 어떤 사탕을 발라도 국가주의·독재이념일 뿐이다. 민주주의와 결정적으로 충돌하는 주체사상의 논리구조에 대하여,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한국의 국가주의 우파는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엘리트의 독재를 마음 깊이 갈구한다. 미국과 같은 강성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들의 이념이 주체사상과 다른 게 무엇인가. 한국의 민족주의 좌파는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을 추구한다. 그들은 엘리트의 독재를 마음 깊이 거부한다. 강대국의 억압에서 벗어나 민주시민들이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국가 공동체를 희망한다. 그들의 이념은 주체사상을 용인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침묵하는가.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 자,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자, 민주주의의 폭넓은 적용을 꺼리는 자, 이들 모두 솔직해져야 한다. 당신이 내건 민주주의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1998년 5월의 봄날, <한겨레> 대담 자리에 나온 황장엽은 남산 안기부 안가의 소파에 앉아 말했다. “그저 집안에 앉아서 죽지는 않을 것이오.” 2010년 10월의 가을날, 황장엽은 서울 논현동 국정원 안가의 욕실에 앉아 세상을 떴다. 황장엽이 살아있을 때, 남과 북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의 말과 글을 빌려 제 이익을 취했다. 국가를 내세워 특권집단의 이익을 지켰다. 사람중심사상으로 득을 본 인민은 남과 북에도 없다. 이명박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 이 글은 필자가 쓴 <한겨레21> 832호 ‘영원한 금기, 주체사상을 말하다’ 기사를 발췌·재구성한 것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6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