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은수미/ 사회학 저는 말로 사는 사람이고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말로 소통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정의”, “민주”, “자유”, “인권”, “존엄”, “사랑”, “평화”... 제게 소중한 단어가 입안에만 맴돌며 문득 말을 막는 날이 있습니다. 여의도에 꽃비가 내리던 며칠 전의 아침도 그러했습니다. 혼자 외롭게 목숨을 끊었을 젊은이, 작업장에서 얻은 백혈병으로 아파하고 절규하며 눈을 감았을 노동자... 그 숱한 이름이 벚꽃놀이가 끝난 윤중로, 무수한 발길이 사그라진 길 위로 꽃비와 함께 흩날렸습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은 제가 좋아하는 시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 시들은 2년 전 이맘때 쯤 제가 그림과 함께 프린트하여 연구실에 붙여두었던 것들입니다. 첫 번째 시는 백무산의 [인간의 시간] 중 일부입니다. 잠든 씨 알갱이들과 언 땅 뿌리들을 불러내는 것은 봄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밀어올리는 것 생명의 풀무질을 충만하게 가두고 안으로 눈뜬 초미의 주의력을 늦추지 않는 것 시간과 봄은 생명력의 배경일 뿐 역사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단절의 꿈이 역사를 밀어간다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강릉 교도소에 있을 때였으며 간혹 다시 읽어보는 시 중의 하나입니다. 두 번째는 나희덕의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입니다. 덩굴이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벌들이 꽃에게로 접근하고 있다 아무도 이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억하라,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도, 우리조차 우리가 살아있음을 알지 못했으나 덩굴이 나무를 정복하듯이 꽃이 열매를 맺듯이 마침내 이루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의 숨은 눈을 통하여 마침내 붉은 열매가 우리를 넘어서 날아오를 때까지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사진 출처 - 솔숲닷컴 저는 나희덕의 작품을 즐겨 읽습니다. 소장과 대장, 약 50센티 정도를 자르고 교도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투병하고 있을 때 나희덕의 [빨래는 얼면서 마루고 있다]를 읽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작품을 다 읽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시 역시 나희덕의 [고통에게 2]입니다. 절망의 꽃잎 돋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겨드랑이에서 무릎에서 어디서 눈이 하나씩 열리는가 돋아나는 잎들 숨가쁘게 완성되는 꽃 그러나 완성되는 절망이란 없다 그만 지고 싶다는 생각 늙고 싶다는 생각 삶이 내 손을 그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어제 2009년 9월 해고된 동료가 대법원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복직판결을 받았다는데도 아직 축하 전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기 때문에 기뻐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늘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말을 해야겠습니다. 동료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60 | 추천: 0
유정배/ 사단법인 강원살림 이사 때론 형 같고 친구 같기도 했던 여섯 살 터울 막내 외삼촌을 이른 봄, 아직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좁은 두 평 땅에 묻고 내려오는 길에는 아득한 고갯길이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그가 무시로 드나들던 ‘강원랜드’도 길목부터 가파르게 쳐든 포장길을 올라야 출입할 수 있다. 1989년, 석탄 캐 먹고 살던 탄광지역에 ‘폐광’이라는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지나다니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던 이 지역에는 하나 둘 탄광이 사라졌고 지역경제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광산에서 탄 캐먹던 사람들도 또, 그들을 캐먹고 살던 사람들도 남부여대 보따리를 싸들고 일자리를 찾아 원주로, 안산으로, 울산으로 떠나갔다. 44만에 이르던 고한, 사북, 황지, 장성 지역 인구가 15만 명으로 반쪽 나버렸다. 인기척 하나 없이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 쓴 채 다닥다닥 붙어있는 탄광촌 사택의 을씨년스러움만큼이나, 남아있는 이들은 위기의식에 몸서리쳤고 두말 필요 없이 ‘지역 살리기 투쟁’에 나서도록 했다. 밥집 사장, 주유소 사장, 술집 사장 들은 물론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던 ‘위장취업자’들까지 ‘공동투쟁위원회’에 참가했다. 그들은 정부에 핵 폐기장, 교도소 유치, 폐광지역 특별법 등을 요구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내국인 전용 카지노’ 유치가 결정 되고 폐광지역 사람들은 이제 위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2000년 카지노 개장 뒤, 정선군의 총부가가치가 2007년까지 120% 성장했고, 같은 기간 정선군의 연 평균 경제성장률이 12.2%이니 상전벽해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놓고 이르는 것 이다. 카지노가 들어선 뒤, 고한 사북지역의 일자리 창출 지표 (1999년 대비, 사업체 종사자 수 39.6% 증가)나 관광객 수 (2000년 대비, 65.4% 증가)를 들여다보면 폐광 지역 살리기 투쟁에 나섰던 이 지역 사람들의 꿈은 실현 된 것이나 다름없다. 때 국 줄줄 흐르던 중심지역은 검은 탄가루 옷을 벗어던지고 울긋불긋한 네온으로 갈아입었다. 카지노 가는 길은 금빛 ‘전당사’들로 가득 찼다. 늘 검뎅이로 질척이던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되었다. 하루 꼬박 걸리던 서울 길도 이제는 세 시간이면 당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폐광지역 주민들의 ‘지역 살리기 투쟁’은 몰락해 가는 지역을 살린 모범 사례로 알려졌다. 이제, 검은 막장의 땅은 행복 넘치는 낙원으로 탈출 한 걸까 ? 강원랜드가 위치해 있는 정선군 사북읍내가 환하게 불을 밝힌 전당포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하지만 강원랜드 매출이 뛸수록, 카지노 가는 길가에 ‘전당사’가 즐비 해 질수록, 고급 여관과 술집이 가득 할수록 자살하는 이는 늘어나고 땅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살기는 한결 팍팍해져 갔다. 석탄가루 마시면서 귀에 딱지 앉도록 듣던 ‘죽음의 땅’이라는 이름은 에너지 산업을 책임지고 있다는 자부심이었지만, ‘잭팟’을 노리며 꾸역꾸역 모여드는 이들이 모진 목숨 버리는 죽음의 도시라는 오명은 오히려 멍울이 되었다. ‘갑을병’ 3교대로 막장 드나들던 때는, 힘들고 삭막하긴 했지만 정 붙이며 사는 고향이기도 했다. 산뜻한 카지노가 들어선 뒤, 껍데기는 번쩍거리지만 알맹이는 시나브로 비어가는 듯 한 허전함에 이것이 ‘지역발전’인가 하는 상심을 떨치기 쉽지 않다. 폐광지역특별법을 몇 년 연장하긴 했으나 유일한 내국인 전용 카지노가 언제까지 존속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불안한 미래를 일치단결해서 이겨내자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강원랜드만 바라보며 각축 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모두 대박신화를 믿고 배팅하는 승부사가 된 걸까 ? 지금, 카지노 가는 길목 길목에는 겨우내 언 땅을 뚫고 올라온 어린 야생화 들이 몸을 펼치고 있다. 죽음의 길이 돼버린 고갯길 좌우, 빽빽하게 ‘전당사’들이 이어져 있는 산허리 곳곳에 바람꽃, 복수초, 노루귀, 진달래 들이 지천이다. 언 땅 녹인 야생초들이 카지노가 은거한 산을 뒤덮듯이, 초고속 성장의 그늘을 비집고 이제 막 움 트기 시작한 협동과 호혜의 경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지역을 살리기 위해 카지노라는 극단의 선택을 한 이들이, 다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돕고 일어서는 협동의 지역경제를 보듬어 가고 있다. 얼마나 많은 걸음이 쌓여야 죽음의 카지노 고개를 넘을지 모르지만, 막내 외삼촌의 허망한 죽음도 씻김굿 받은 망자의 혼처럼 씻겨 내려 갈 게다. 그들이 한 땀 한 땀 일궈 가는 새로운 길에서.
2017-07-20 | hrights | 조회: 142 | 추천: 0
홍미정/ 건국대학교 중동 연구소 연구교수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대학 (Bethlehem University) 사회학 강사인 루바바 사브리(Lubaba Sabri)는 현재 요르단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일반적인 측면에서, 요르단의 상황은 다른 아랍 국가들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거의 모든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왕이나 대통령을 신뢰하지 못하고,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거리에서 혁명을 원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이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랍 각 국내에서 대안은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아랍 국가들은 각각 서로 다른 특성이 있지만, 이제 혁명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각 아랍 국가를 구분 짓던 특성들이 사라졌다. 이제 아랍인들이 자유와 존엄성을 성취해야할 시점이다. 현재 진행 중인 아랍 혁명은 아랍인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루바바 사브리 나는 요르단을 미국과 이스라엘이 후원하는 특별한 왕국으로 생각했으나, 이제 요르단 왕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았다. 이러한 일은 아랍 왕과 대통령, 어떤 통치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제 왕과 대통령 사이에 존재하던 차이는 사라졌다. 요르단 왕 압달라는 튀니지 전임 대통령 벤 알리, 이집트 전임 대통령 무바라크 등과 같은 운명에 처해있다. 현재 리비아, 예멘, 바레인, 알제리, 수단, 모로코, 시리아 등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 언제 극적인 순간이 올 것인가 단지 그 시기만 다를 뿐이다. 3월 25일 요르단 수도 암만 중앙 광장에서, 요르단 최대 야당인 무슬림 형제단 소속 정당, 이슬람 행동전선(Islamic Action Front)과 좌파 연합 구성원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발발하였다. 경찰이 평화적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공격하면서, 26세의 청년 카이리 자밀(Khairi Jamil)이 살해되고 100명 이상의 시민들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 이후, 이슬람 행동전선 사무총장인 함자 만수르(Hamza Mansour)는 “총리와 내각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암만 거리 시위대는 총리 선거, 의회 해산, 보안대 해체를 요구하면서, 이와 같은 행동들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1월 14일 튀니지 혁명이 성공한 이후, 요르단에서도 정치 제도 개혁을 위한 시위가 매주 금요 예배 이후 조직되고 있다. 2011년 3월 4일, 금요 예배이후 4천 명 이상의 요르단인들이 하원해산과 진정한 정치 개혁을 촉구하면서 거리 시위에 나섰다. 철통같은 보안 경계 태세 속에, 암만 중심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슬람 행동전선과 좌파인 대중 통합당, 노동조합 구성원들이 참가하였다. 시위자들은 “국민들은 정치 제도의 개혁을 원하며, 선거를 통한 정부 구성과 하원 해산을 원한다.”고 외쳤다. 이와 관련하여 팔레스타인 알 나자 대학교, 사타르 카셈(Sattar Kassem)교수는 “시위대는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 확립, 영국 총리제도와 같은 완전한 권위를 행사하는 총리 선출 제도를 확립, 인구 비례에 기초한 의회제도 확립을 위해서 선거법 개정을 원한다.”고 밝혔다. 지난 25일 (현지시간) 요르단 수도 암만 중심가인 시청사 앞에서 정부 개혁을 촉구하며 시위중인 반정부 시위대와 친(親)국왕 시위대가 이틀째 충돌했다. 이날 시위는 의회 해산과 총리 해임을 요구하며 시위중인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친국왕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습격해 수십 명이 부상했다. 사진은 무폭력으로 시위하는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돌을 던지는 친국왕 시위대.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요르단은 공식적으로 1952년 1월 8일에 공포된 헌법에 토대를 둔 입헌군주국이다. 요르단 정치의 핵심은 군주제와 의회제도다. 왕이 임명한 총리가 정부를 대표하며, 1992년 정당 자유화 조치 이후, 다 당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요르단 왕, 압달라는 사실상 행정, 사법, 입법부를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오직 왕만이 총리와 내각 장관들을 독단적으로 지명하고 면직시키고, 의회를 해산시키고 국가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왕이 총리를 포함하는 정부 고위 관리들을 임명하는 것은 의회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왕은 헌법 조항에 따라 장관들을 통해서 행정권을 행사한다. 실제로 1944년 총리제도 도입 이후 2011년까지, 왕은 총리를 29개 가문 출신들로 62번 교체하였다. 이 과정에서 1년 이하의 총리직을 유지한 사람이 41명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정 가문 출신의 총리가 국정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하고 실행할 시간적인 여유가 현실적으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요르단 왕가가 얼마나 독단적으로 국정 운영을 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또 전국을 12 지역으로 구분하여 모든 지방 행정관들을 왕이 임명함으로써 지방 행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도 갖는다. 헌법에 따르면 사법부는 독립되어 있지만, 왕이 판사를 임명하고 승진, 해임시키는 고등 사법 위원회의 모든 위원들을 임명함으로써 사법부를 완전히 장악한다. 2010년 11월 선거로 구성된 의회는 왕이 지명한 55명의 상원과 국민이 선출한 120명의 하원으로 구성되었다. 의회는 헌법에 의해서 권력이 부여되고 내각이 제안한 법률을 승인, 거부 또는 수정하지만, 의회의 반대에 부딪힐 수 있는 법률 수정과 제정은 의회가 회기 중이 아닐 때 이루어진다. 이 사안은 다음 회기에 의회에 제출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의회의 승인과 관계없이 실행된다. 때문에 현재 요르단에서는 제도적으로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권과 시위대가 요구하는 개혁 대상의 핵심에는 선거 제도가 자리 잡고 있다. 계속되는 거리 시위에 응답하여 압달라 요르단 왕은 2011년 2월 1일에 동안 부족 출신의 안보 전문가인 마루프 바키트(Marouf Bakhit)로 교체시켰다. 이슬람 행동전선의 함자 만수르는 총리 교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과정, 즉 선거를 원한다.”고 밝혔다. 바키트는 1964년부터 1999년까지 군인으로 근무하였고, 국가 보안대장, 이스라엘 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2005년 11월 암만 호텔 테러 사건 직후 총리에 임용되어 2007년 11월까지 테러에 대항하는 요르단의 안보 정책을 강조해 온 인물이다. 바키트 총리 임용은 시위대의 개혁 요구를 국가 안보와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시위대의 개혁 요구를 수용할 의지가 없음을 명백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압달라는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의 뒤를 따를 것인가? 현재 개혁이든, 혁명이든 변화는 불가피해 보인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42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 교육조직국장  그 날은 지역에 교육이 있어 출장을 갔었다. 교육을 마치고 해당 기관의 관계자들과 담소를 나누던 중 한 명의 얼굴색이 갑자기 변하여 일본으로 여행 간 가족의 행방을 추적하였다. 그런 과정에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그 가족은 지진발생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확인되어 안심했지만, 실시간 인터넷 검색을 통해 본 일본지진의 참사는 상상을 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러한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현재까지 연일 방송과 언론은 일본의 재앙을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고, 방송을 통해 보여 지는 광경들은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형성하고 있다. 지인들과는 ‘앞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므로 ‘계획된 삶, 준비된 삶의 소용성’에 대해,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였으나 결론은 ‘하루하루를 즐겁고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마무리하였다. 그렇다. 결국 하루하루,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즐겁고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 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하루하루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매달려 보내고 있다는 것이고 그 불안함은 인간들 스스로 부추기고 있기도 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질적 풍요와 편안함에 대한 경쟁적인 추구는 일본이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자연적인 피해뿐만 아니라 인간문명의 결과인 원전폭발이라는 위험이 더해진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일본의 참사로 인한 피해자들과 생존자들, 원전폭발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분들에 대해 애도와 위로, 존경심과 안타까움을 보내드리며 한편, 이로 인해 원전에 대한 세계적인 경각심과 환경, 자연에 경외감과 존중감, 상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길 바래본다. 그럼으로 매일매일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고 불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매일 충만함이 가득하고 덜 풍요하더라도 현실과 미래의 생존에 대해 불안함이 없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게 되길 기대한다. 일상이 불안으로 흔들리는 것은 고통이다. 일본 피해지원금 모금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생존자들이 일상의 불안함에서 빨리 극복되길 바라는 마음들의 표현이라고 본다. 이심전심 때문이다.    일본의 지진피해가 발생한 지 일주일 남짓 후, ‘장자연씨 추모’를 위한 여성단체의 행사가 있었다. 경찰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대뜸 막아서고, 광화문 일대에서 합법적인 일인시위로 진행되려던 추모제는 경찰들의 저지로 인해 졸지에 ‘불법적인 집회’가 되어버렸다. 흩어지기 전에 경찰이 우리들의 행위를 저지한 탓이다.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강행하면서 일본대지진으로 희생된 분들에 대한 애도와 추모, 모금활동들이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고 장자연씨의 죽음에 대한 반응과 교차했다. 그 규모나 과정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목숨은 똑같이 소중한 것인데, 그 결과는 사뭇 다른 것에 답답해졌다. 고 장자연씨가 지인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내용과 댓글들을 검색해보았다. 얼마 전 국과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 탓인지 국과수의 필적감정결과에 대한 불신의 글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무엇보다도 편지의 내용은 고인의 일상이 두려움과 공포, 수치심과 분노 속에서 절망으로 얼룩져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고인이 느꼈을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반복되어 발생하는 성적 폭력과 유린으로 인한 공포와 좌절의 일상화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예측 가능하고 대처할 수 있는 불행은 인간의 의지와 행위가 주체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좌절감과 무기력에 덜 노출된다. 그러나 일상에서 언제 끝날지 예측 불가능한 불행은 그 대상을 불행의 노예로 만든다. 불행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음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무기력과 좌절감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무력함과 좌절감은 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세상에 대해 분노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연결되곤 한다. 스스로 불행을 종식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의 그 심정은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의 심정과 어떻게 다를까 생각해본다. 아니 무엇이 다를까를...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역에 140년 간 유래 없는 지진과 쓰나미가 불어 닥쳤다. 대재앙이 할퀸 열도는 처참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자신을 성적으로 유린한 가해자를 일상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 성폭력범죄자와 함께 일상을 보내는 것, 자신에게 모멸감과 분노, 수치심을 야기한 인간들을 수시로 접해야 한다는 것은 그 일상이 곧 지옥이고 고통이며 공포임에 다름 아님을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고 장자연씨 사건에는 이 사회의 많은 얼룩들이 묻어있다. 구조화된 연예계 비리, 여성연예인들에 대한 성적 착취, 남성들 간 권력교환에서 도구화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문제가 함께 결합되어 발생되는 추악함이다. 남성들 간의 권력의 거래에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제물처럼 제공되고 있다. 한 때 스폰서 검사들로 떠들썩했을 때도 여성의 성은 제물이었고 모든 검은 거래에는 여성의 몸과 성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래의 대상이자 도구였던 여성의 몸과 성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한 거래의 대상으로 물화되기를 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가난과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그 길에, 돈도 빽도 없다는 이유로 권력에 함부로 휘둘려지고 만 것뿐이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자신의 몸과 재능만을 가지고 신분상승을 하기엔 자본과 권력의 벽이 너무 강한 것이 우리사회가 아니던가?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혹은 덜 가진 자 사이의 위계는 낮은 권력의 남성들이 권력의 폭력성, 통제를 수용하도록 만든다. 다만 그 방식이 여성들과 다른 점은 몸과 성을 통해 작동하기보다는 노동력이거나 돈이거나 언어적 모욕이거나 신체적 폭력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폭력성, 통제성은 남성들에게도 일상을 불안과 공포로 느끼도록 만들며 이러한 일상의 불안과 공포가 다시 권력에 순응하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작용한다.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는 남성들은 가장 만만한 상대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지고 이는 결국 여성에 대한 성폭력 및 아내폭력, 아동에 대한 성폭력과 폭력으로 드러나게 된다. 통제와 지배, 복종이라는 폭력성을 내재한 권력이 갖는 악순환이다.     어느 죽음은 귀하고 어느 죽음은 천하지 않다. 생에 귀천이 없다면 죽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러나 일본의 재앙으로 희생당한 분들과 고 장자연씨의 죽음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애도해야하는 죽음과 그렇지 않은 죽음이 그것이다. 누가 그것을 결정하였나? 죽음으로 진실을 알리고 싶어 했던 고 장자연씨지만 진실을 밝혀야 할 집단에 의해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고 장자연씨의 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방송, 언론, 기업체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현재 이들은 경쟁적으로 일본대재앙 모금운동을 펼치는 주역들이지만 고 장자연씨의 죽음에는 싸늘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너무도 견고한 성 같은 권력을 방패막이로 하여. 그리하여 경찰은 수사를 진행하기보다 국과수의 등에 숨어버렸다. 모 방송사에서는 다른 필적감정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찰의 태도는 얼마나 많은 권력의 핵심들이 연예인 성 상납과 연루되어 있는지 상상력을 증폭시킬 뿐이다. 경찰 자신들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재앙은 당장은 두려움이지만 종국에는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임을 시사 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복과 통제, 지배의 욕심을 벗어나 자연과 문명,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정복과 통제, 지배가 곧 권력의 특징이라면 권력을 버리거나, 재 정의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어른이 아이를, 고용주가 고용인을, 선생이 학생을, 상사가 하급직원을, 부자가 가난한 자를,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다수가 소수를 억압, 통제, 지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가진 힘과 지혜를 좀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 장자연씨의 비통한 죽음을 권력의 이름으로 덮을 것이 아니라 진실을 규명하는데 권력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고 장자연씨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대자연 앞에 무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포자기가 아니라 한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아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고 장자연씨의 죽음을 애도하고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나아가 더 이상의 장자연이 없기를 간절히 희망할 뿐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7 | 추천: 0
이광조/ CBS PD 일본 교토부 마에즈루. 마에즈루는 일본 해상 자위대 기지가 있는 군사항구도시다. 이곳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중국대륙에 주둔하고 있던 관동군이 귀국선을 타고 들어온 항구로 일본인들에게는 패전의 쓰라린 기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마에즈루 항의 작은 만을 따라 난 도로를 달리다 보면 길옆으로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안고 길을 나선 여인의 형상을 한 이 동상은 1945년 8월 22일, 마에즈루 항에서 침몰한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당시 우키사마호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연행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해군시설 등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 3735명(일본정부 발표, 민간단체 추정으로 약 5천에서 6천명)이 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의 의도적인 폭파로 추정되는 이 사고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었다(일본정부의 공식집계로는 조선인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명. 민간단체 추정으로는 조선인 약 5천명). 부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 추모동상 옆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가 함께 서있다. 이 추모동상과 기념비는 마에즈루에 살던 평범한 일본인 교사들과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만들었다. 일본 우익들의 방해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뜻있는 재일동포들도 하나 둘 힘을 보태 지금은 매년 8월 22일, 이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마에즈루 항에서 침몰한 우키시마호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상 사진 출처 - 필자 지난 2005년 이곳에서 추모동상 건립을 주도했던 미술교사 요헤 가쓰히코씨와 관동군으로 전쟁을 체험했고 귀국한 뒤에는 마에즈루시 공무원으로 일하며 동상건립에 앞장섰던 스나가씨를 만났었다. 두 사람과의 인터뷰에서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껏 내 마음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건 우키시마호 폭침 당시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구했던 마을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다. 남자들은 죄다 전쟁터에 끌려가고 여성들만 남은 어촌. 패전 후의 팍팍한 살림살이에 날마다 작은 어선을 타고 바다 일을 나갔던 여성들이 우키시마호의 침몰을 목격하고 바다에 빠진 생존자들을 구출했다고 한다. 사고 뒤 현장에 찾아온 신문기자가 ‘조선인인 줄 알고 구출했냐’는 질문을 던지자 ‘죽어가는 사람 살리는 데 그 사람이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그게 무슨 문제냐’고 야단을 쳐서 쫒아냈다는 여성들.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의 원인과 배경에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무거운 역사가 도사리고 있지만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우려는 건 어쩌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3월 11일 일본 동북지역 해안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었다. 안타깝게도 피해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목숨을 잃을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는 일본국민들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예배와 미사, 법회가 열리고 각국 정부와 국민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다. 그런 와중에 우리사회 일각에서 일본의 재난을 ‘징벌’에 비유하는 발언들이 나와 논란을 일으켰다. 일부 소수의 편협한 생각이라 자위해 보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까지 든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 어떤 자연재해보다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많이 앗아갔다. 피로 물든 그 살육의 역사는 대부분 국가와 민족, 인종,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고 타인을 나 또는 우리와 일체화하려는 시도는 많은 경우 폭력을 동반했고 전체주의로 흘렀다. 그 무시무시한 역사를 벌써 잊었나. 나와 너, 우리는 국가, 민족, 인종, 신앙에 앞서 사람이 아닌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119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세계화시대를 주도하는 시장 경제적 성취주의 열풍에 대학도 몸살을 앓고 있다. 표준화·계량화·상대화의 잣대로 강의·연구·봉사업적을 평가함으로써 교수들을 ‘점수의 노예’로 내모는 작금의 대학개혁을 자조적으로 꼬집는 비명들(예를 들면, 박홍규 “‘낙제교수’의 항변”, 경향신문 2011. 2.10.)이 넘친다. ‘대학교수’라는 명함을 소지한 소위 제도권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이 땅에서 향유했던 분에 넘치는 명예와 권력을 생각하면, 그들의 엄살스러운 시련(?)은 마땅하거나 고소한 쌤통이리라. 아내마저 ‘10년 뒤에 사라질 직종’의 우선순위에 교수직이 포함된다는 뉴스기사를 들이대며 나를 윽박지른다. 각종 포털 사이트 검색기구가 홍수처럼 토해내는 지식의 무게가 내가 소유한 좁고도 얕은 밑천을 압도한다. 정말/만약 지식인의 사망 혹은 소멸이 시대적 운명이라면[《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후마니타스, 2008 참조)], 이 땅에서의 삶과 앎의 관계는 어떻게 재정립될 것인가? 새로운 지식의 배움과 나눔은 가능할까? 일찍이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역설했다. 자연과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나 운행방식에 대한 경험적이며 실용적인 지식의 습득은 종교적 관습과 정치적 권위의 사슬로부터 우리들을 자유롭게 해준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 철학자들이 ‘백과사전’ 편찬에 열중한 이유도 지식의 보급과 확산은 진보와 해방을 약속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지식(습득)이 보장하는 이와 같은 긍정적인(플러스) 혜택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그 억압적(마이너스) 속성을 고발한 대표적인 사상가 중의 한 명이 미셸 푸코(1926-1984)이다. 그의 주장은 “아는 것은 너의 힘이며 동시에 나(타인)를 훈육하고 속박하는 권력의 원천이다”라고 요약된다. 쉽게 말하자면, 학교 선생님들이 교단 높은 곳에서 관찰하여 기록하는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는 ‘품행 방자한 학생’을 단속하는 회초리이며, 병원이나 공공기관에 분류, 보관된 건강진단서와 신용등급표는 나의 육체와 일상생활을 옥조이는 미세권력의 눈이라는 뜻이다. 푸코의 주장처럼, “지식이 나의 힘”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개인의 일상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권력의 무기로 작동한다면 우리가 직면한 과제는 그런 종류의 지식을 해체하는 일이다. 우리의 양도할 수 없는 기본인권을 제한하고 “국민의 동의 없이 국민의 이름으로” 강행되는 국가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담론(지식권력)에 침을 뱉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전문지식과 실무경험을 겸비한 소위 ‘내부 고발자’의 출현과 대항지식의 생산을 기다린다. 예를 들면, 판검사-변호사-브로커의 먹이사슬을 내부자적 시각으로 비판한 《불멸의 신성가족: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창비, 2009)과 같은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되어 어떻게 전문지식의 독점과 오남용이 사회적 정의를 좀먹는 병균으로 작동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언론인들의 직업관행과 취재원사용법(?)을 기록한 기자의 매뉴얼, 비정상적인 교육열에 편승해 부패한 교육-사업가의 치부일지 등과 같은 전문업계의 축적된 노하우를 자기 성찰적으로 고발, 폭로하는 책들이 계속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전문지식과 실무경험을 겸비한 소위 ‘내부 고발자’의 출현과 대항지식의 생산을 기다린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다시 강조하건대, 논쟁되지 않고 관습적으로 독점되는 전문지식은 그 소유자(집단)의 힘과 이익으로 순전히 환원된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면, 그들이 움켜지고 공유하는 권력지식의 이기주의를 문제시함으로써 착한 고객이나 하인 같은 유권자로 남기를 거부해야 한다. 전관예우, 학벌공화국, 국가전능주의, 도제식 전문교육 등등 다양하고 그럴듯한 명분으로 진행되고 용인되어 왔던 ‘지식=권력=부와 명예’의 등식을 깨쳐버려야 하는 것이다. 공익성이 결여된 전문지식은 파괴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시각으로 곰곰이 따져보면, 공공 이익과 공적 자유의 확장을 위해 자기희생이라는 좁은 문을 선택한 용기 있는 이들에게 ‘내부 고발자’라는 부정적인 함의를 가진 명칭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들이야말로 ‘나를 따르라’고 호령했던 전통적인 (죽은) 지식인을 대체해야 할 포스터모던 시대의 새로운 지식인이다. 죽은 지식인의 무덤 위에 피어야 할 새싹은 내부 고발적인 실천하는 양심인 것이다. 누가 ‘위키리크스(WikiLeaks)’를 두려워하랴.
2017-07-20 | hrights | 조회: 153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집행위원장 어린 시절, 고향의 겨울도 눈이 많이 내렸었다. 하지만 한기(寒氣)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작년, 그리고 올해의 겨울은 유달리 한기가 크게 다가온다. 몇 십 년만의 추위니, 폭설이니 하는 뉴스는 올 겨울, 남달리 느껴지는 한기가 느낌이 아니라 실재임을 일깨운다. 추위의 정도를 떠나 겨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시기이다. TV에서는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의 풍경을 소개하고 있다. 한 할머니가 남이 태우다 만 500원짜리 연탄을 정성스레 등바구니에 지고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탈만큼 타서 재가 되다시피 한 연탄의 한 쪽 귀퉁이가 타지 않고 남았다고, 쓸만하다며 멋쩍은 웃음을 보이신다. 이 달동네의 겨울은 외풍을 가리기 위한 비닐과 얼어붙은 골목계단, 무덤과 같은 밤풍경으로 묘사됐다. 며칠 걸러 많은 눈이 내리고 길이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가장 곤란함을 겪는 이들은 누구일까 생각해봤다. 하루하루 벌어야 살림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이들이 우선 떠오른다. 그 중에도 작업장 인부들, 대리운전 기사, 택시 기사들과 같은 이들은 쌓인 눈과 얼어붙은 거리에서 유년 시절의 추억같은 것은 떠올릴 새 없이 연일 이어지는 한파에 노심초사, 원망을 앞세우고 있겠다 싶다. 그들에게 단지 이번 추위로 인한 벌이의 공백이 한 때의 ‘허탕’으로만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펑크’난 한 철 벌이로 ‘까먹은’ 날들이 밀리고 쌓여 어쩌면 일 년 내내 곤란을 겪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겨울 추위 앞에서 가장 큰 곤란을 겪는 이들은 아무래도 거리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노숙인들일 것이다. 지난 달, 어느 언론은 서울역에 머무는 100여명의 노숙인들이 새벽거리로 내쫓겨야만 하는 사연을 소개한 바 있다. 유일하게 열차 왕래가 없는 시간대인 새벽 1시 반부터 2시까지 이뤄지는 역사(驛舍) 청소로 그들은 이 겨울 내내 매일같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새벽 거리에 서야 하는 것이다. 며칠 전 제주도내 일간지에는 추위로 동사(凍死)한 한 노숙인에 관한 이야기가 게재되었다. 어느 과수원 판잣집에서 머물던 한 60대 노숙인이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은 그 노숙인이 거처했던 판잣집을 보여주고 있는데, 말이 판자집이지 아예 엉성한 ‘나무 궤짝’ 정도가 맞아 보인다. 기사를 쓴 기자도 그 노숙인의 거처를 찾는 과정에서 눈앞에 보이는 ‘물건’이 그이가 살던 ‘집’인줄 몰랐다고 쓰고 있다. 최근 60대 노숙인이 거처하던 과수원 내 판자집 사진 출처 - 제민일보 바로 다음날 제주시 부시장은 노숙인 관리에 철저를 기할 것을 주문했다는 소식도 실렸는데, 동시에 나는 몇 년 전, 제주시의 노숙인 실태와 관련해 시 당국과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시 당국은 제주시에는 노숙인이 ‘단 한명도 없다’고 주장했었다. 법적 기준이 뭐라고, 그 기준에 따르면 ‘부랑자’는 있을 지언정 노숙인은 없다는 논리였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노숙인이란 ‘일정한 주거 없이 상당 기간 거리에서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노숙인의 쉼터에 입소한 사람’ 정도로 정의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사회적 합의 기준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노숙인이 한 명도 없다는 논리에는 법적 기준의 문제보다는, ‘한 명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광제주의 관문인 제주시에 노숙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관광지 이미지를 흐린다는 이유 때문에 이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만큼 노숙인의 존재 자체는 있어도 모른척 ‘외면하고 싶은 대상’이다. 이런 경향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작년 말 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한 도의원은 “민간단체에서 파악하는 노숙인은 100여명인데, 공식통계는 3명에 불과하다”며 노숙인들의 건강관리가 필요한데 기초적인 통계조차 없다며 이를 지적한 바 있다. 이 보다 앞서 작년 8월에는 제주시가 ‘노숙인 근절을 위한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개최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는 노숙인들의 존재가 시민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며 예방순찰 강화, 관련 피해 예방 대응, 노숙인 지도활동 강화 등을 주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근절’을 위한 ‘대책회의’ 라는 회의 타이틀만큼이나 ‘순찰’, ‘대응’, ‘지도’ 등이 여전히 행정이 보여줄 수 있는 노숙인들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드러낸 사례였다. 아직까지도 노숙인은 돌봄이나 재활을 위한 대상이기 보다는 단속하고 지도해야할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다양한 노숙인 재활프로그램을 발굴 추진하고 있다는 제주시 관계자의 언급도 싣고 있었지만, 이번의 노숙인 사망사실만으로도 여전히 근본적인 대책은 오리무중인 셈이다. 더 이상 노숙인의 죽음이 혹한의 겨울을 표상하는 반복적 사건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사회 노숙인들에 대해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벌어져야 한다. 노숙인이라 이름 지어진 그들이 아이들과 더불어 단란한 한 때를 영위했던 우리와 똑같은 어느 가정의 일원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들은 한 때, 꿈을 위해 성실히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에 헌신했던 사회 구성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숙인은 대체로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거나 ‘위험한 정신질환자, 혹은 알콜 중독자’라는 편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노숙인들중 70%는 안정적인 주거나 일자리, 재활프로그램만 제대로 거쳐도 곧바로 가정과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노숙이라는 한계 상황으로 몰린 원인은 무척이나 다양하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지적이고 보면, 명백히 ‘개인의 탓’은 아니다. 우리사회에서 노숙인의 삶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이 1997년 IMF 이후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설명되어지고 있다. 불안정한 고용과 장기실업, 교육비와 생계비 부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사회보장제도와 주거비 부담등이 노숙의 가능성을 키우고, 누구든지 예비 노숙인으로 위치짓게 만드는 사회의 구조, 그것이 노숙인의 다른 이름이다. 노숙인의 존재양식은 한 마디로, 어려운 시대, 험난한 우리사회의 자화상이라 할 만하다. 노숙인은 어느 사회에서나 인권침해의 표상이 되는 대표적인 소수집단이다. 이들은 최소한의 사회서비스에서도 ‘예외’인 존재들인 셈이다. 존재하되 인정되지 않는 존재, 가난과 사회적 배제, 극단적인 편견의 대상이 바로 노숙인들이다. 이들의 삶이 지금 어떻게 유지되고, 재기의 기회가 얼마나 보장되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지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산재한 노숙인들의 삶에 눈감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 그들이 치유 받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오히려 관광제주, 평화의 섬 제주가 스스로 그려가야 할 자화상이 아닌가 한다. 올 겨울은 어쩐지 더욱 삭막하게 느껴진다. 예의 그 ‘사랑의 온도계’도 자취를 감추었고, 구세군의 종소리도 그 울림이 커 보이지 않았다. 실제 구세군을 통해 모여진 성금은 작년보다 20%나 줄었다고 한다. 겨울 추위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도 얼어버린걸까? 아니면 갈수록 팍팍해지는 우리네 살림살이 탓인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지났다. 국민생활 최저선 확보를 목표로 만들어진 이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인구의 8%, 약 400여만명이 ‘사각지대의 가난’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똑같은 가난, 구조적 빈곤에 처했는데도 이런 저런 이유로 최소한의 사회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만 1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더욱 추운 것은 시대의 겨울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0 | 추천: 0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1944년 ILO 26차 총회가 열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프랭크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국의 노동, 기업, 정부 대표가 모여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모든 관행, 예를 들어 사내하도급이나 근로자공급과 같은 시장거래나 경제적 계약관계를 근로 계약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이 선언은 근대적 노동법의 기초이자 자본주의적 근대노동의 기본원리이다. 근대적 노동은 노동자를 고용한 자(고용주)와 노동을 사용하여 이익을 얻는 자(사용주)가 같다는 점에서 ‘직접고용’이며, 사용주(=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근로계약관계’에 기반 한다. 사용자는 근로자를 함부로 해고해서는 안 되며 적절한 임금 및 근로조건을 보장해야 하고 단체교섭의 당사자로서 성실교섭의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인간의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전근대적 관행, 즉 사내하도급이 주요 대기업의 핵심 경쟁력이다. 부르는 명칭도 사내하청, 용역, 위탁, 외주화로 다양하다. 사내하도급이 왜 근대적 노동원리에 반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노동자를 고용한 자(고용주)와 그 노동을 사용하여 이익을 얻는 자(사용주)가 같지 않다. 예컨대 2010년 11월 15일부터 파업을 했던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고용주는 사내하청 업체이다. 하지만 그 노동을 사용하여 이익을 얻은 사용주는 현대자동차이다. 때문에 적절한 임금 및 근로조건을 보장하고 단체교섭의 당사자로 나서야할 사용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숨바꼭질이 벌어진다. 2010년 10월 6일부터 11월 5일까지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정규직화 이행을 위한 단체교섭을 현대자동차에 요구하였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듯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실질적인 사용자를 사용자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항변한다. 반면 현대자동차 사용자는 교섭당사자가 아니라며 단체교섭을 거부했다. 길동의 아버지가 길동을 부정하였듯이 나는 너의 사용자가 아니라고 응답한 것이다. 그런데 해년을 거듭하여 진짜 사용자찾기를 하다 해고되거나 분신하는 것은 언제나 노동자들이다. 홍길동처럼 다른 세상을 꿈꾸지도 못한다.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2010년11월 30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다음으로 근로계약관계가 아닌 시장거래관계이다. 원하도급 업체 간의 도급계약을 해지하면 근로계약도 자연스럽게 없어진다는 점에서 항상 해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급계약이 3개월, 6개월 수준으로 이루어져 경기가 나빠지면 언제나 인원을 줄일 수 있다. 사용자측은 이것을 시장수요 혹은 경기변동에 따른 고용 유연화의 필요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라델피아 선언의 핵심은 인간의 노동은 상품인 자동차와 달라서 시장수요나 경기변동에 따라 줄이고 늘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고무줄도 아닌데 어떻게 줄였다 늘였다를 마음대로 하겠는가. 근로계약관계가 어떤 형태로든 고용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경제적 계약관계는 고용을 자동차와 같은 상품으로 바라보아도 좋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내하도급이 한국에서는 너무 많다. 2008년 300인 이상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노동부 전수 조사에 따르면 총 1,764개 사업체 중 사내하도급 활용 업체는 963개로 전체 기업의 54.6%이며, 사내하도급 근로자는 368,590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18.8%에 해당한다. 또한 활용 사업체의 사내하도급 근로자 비중은 28%이다. 대기업일수록 사내하도급 활용 비중이 높고 민간부문보다는 공공부문에서의 활용 비중이 더 높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1970, 80년대에는 정부가 중공업 육성정책의 일환으로 사내하도급을 권장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대기업이 경쟁 및 효율성을 내걸고 사내하도급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 지구적 경쟁격화를 근거로 1997년 이후 대기업의 사내하도급 활용 비중은 2배 이상 늘었다. 업종별로 사내하도급 활용의 표준모델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대기업이고 대기업 따라 하기는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간혹은 따라 하기가 아니라 일종의 강요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기업의 단가인하 압력은 사내하도급과 비정규직 활용을 협력업체의 선택지로 만들기 때문이다. 사내하도급은 근대적 노동형태도 아닐 뿐만 아니라 시장 논리도 아닌 것이다.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1990년대 이후 민간기업보다 공기업에서 사내하도급을 더 많이 사용할까. 공기업은 지구적 경쟁은커녕 국내 시장 경쟁도 하지 않으며 효율성이 반드시 사내하도급 활용일 이유도 없다. 공기업 선진화에 관심을 가진 어떤 학자는 필자에게 공기업 전체의 인건비가 비용의 5%에도 못 미친다고 토로한다. 그런데 공기업 경영평가 결과 1, 2위를 다투었던 모 기업은 2003년 3,500여명이던 사내하도급(정규직은 700여명)이 2010년 5,300여명(정규직 800여명)으로 바뀌었다. 사업의 확장이 곧바로 사내하도급 활용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경영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요인이다. 시장 논리가 아닌 정책논리가 사내하도급을 키우고 있다는 단적인 사례이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혹자는 사내하도급을 소작제로 비유한다. 지주의 자리에 원청을, 하청의 자리에 마름을 놓아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고용 문제에 관한 한 근대적인 것이 낫다. 한국의 대기업이 지주가 아니라면 사내하도급을 직접고용으로 바꾸어야 한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80 | 추천: 1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만 스물넷의 꽃다운 나이에 결혼하여 꽃다웠던 모든 것을 두 딸에게 물려주고 지금은 꽃처럼 어여뻤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마누라의 충격적 증언에 따르면, 나는 했던 질문을 금세 또 한다. “… 그래서 저녁은 맛있게 먹었어?” 밥 먹었냐, 애들은 뭐했냐 등을 빼면 화제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부부의 밤늦은 대화 가운데 마누라는 종종 눈을 찢는다. “또 저런다 또. 방금 물어봤고 방금 말했잖아. 오빠, 정말 왜 그래?” 같은 질문을 금세 물었다는, 5분 전도, 10분 전도 아니고, 바로 직전 대화에서 물었다는, 나로서는 절대로 인정할 마음이 없는 사태가 또 벌어진 것이다. “우리, 말 편안하게 하기로 해요. 선배는 싫고…. 그냥 오빠라 부르면 어때.” 15년 전, 대학 캠퍼스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손발 오그라드는 존댓말로 상대 진영을 탐색했고, 1년 뒤에는 서로 반말하며 안전핀을 뽑았으며, 다시 반년 뒤 결혼이라는 폭탄의 시건장치를 함께 터뜨려 버린 것인데, “여보”라는 호칭을 나중에 쓰기로 합의한 것까진 괜찮았으나 세월 흐르는 줄 모르고 지금까지 남편을 오빠라 부르는 아내 덕분에 나는 여전히 20대인 줄 알고 지내다가 오직 문제의 건망증이 도질 때만 뇌세포에 새겨진 생물학적 나이를 비감한다. 아, 이젠 ‘오빠’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가 된 것이다. ‘오빠’는 이 분야와 관련해 더 충격적인 사태를 지난해 가을에 겪었다. 어느 날 아침, 오빠는 신문사 맞은편 식당 앞에 차를 세워뒀다. 신문사에서 오전 내내 일하다 차를 세워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인터뷰가 있었다. 차를 향해 걸으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자동차 열쇠가 없다. 가방 안에도 없다. 사무실에 돌아와 서랍을 뒤졌으나 역시 없다. 잠시 고민했으나 인터뷰에 늦을까봐 택시를 잡아탔다. 해질녘 사무실로 돌아와 찬찬히 하나씩 뒤졌는데 아무래도 없다. 서비스 요원을 불러 차문을 연다 쳐도 열쇠조차 없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해 하며 무력한 마음으로 어두컴컴한 주차장 한 켠 자동차 앞으로 걸어간 오빠는, 울어버릴 뻔 했다. 자동차 열쇠는 시동 걸린 자동차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바로 옆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오던 점심을 거쳐, 수많은 사람이 곁을 오간 오후와 저녁 내내, 누가 문을 열고 액셀레이터만 밟으면 바로 출발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로 오빠의 차는 10여 시간을 그르렁대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는 이런 일을 저지른 자신이 무서워졌다. 나중에 오빠는 10여시간의 ‘공회전’에 혹사당한 자동차의 부품 정비에 많은 돈을 바쳐야 했는데, 그 돈으로 공포의 건망증을 고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자동차 열쇠를 꼬옥 쥐며 생각했던 것이다. 뚜껑을 열어 직접 살펴본 바 없으므로 단정할 수 없으나, 아직은 전두엽 피질에 윤기가 좌르르 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10년 전, 그러니까 ‘오빠’라는 호칭도 제법 그럴듯하게 어울렸던 시절, 어느 시민단체가 발행하는 월간지에 나는 이런 글을 기고했다. “세상을 향한 대책 없는 분노를 `꽃병‘이라 불리던 원시적인 무기에 담아 하늘로 날렸던 게 10년 전이다. 그때 나는 서른이면, 치열함으로 꽉꽉 채워 보낸 나이 서른이면 삶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 역사책들은 서른 즈음에 세상을 뒤흔든 수많은 혁명가의 이야기를 품고 오늘도 서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기자들이 제 몫을 못하고, 젊은 세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미래는 없다. … 젊은 기자들이 꿈꾸고 음모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난 세월은 한없이 가슴 아플 뿐이다. 수많은 `나이 서른’의 세대에게 한국의 언론은, 역사는 지금 무엇을 말하는가.” ‘나이 서른에 우리’라는 제목이 달린 이 글을 2000년 무렵에 썼다. <한겨레>는 조선·중앙·동아일보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대형 기획 기사를 썼고, 정부는 이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독재 정권과 특혜를 주고받은 과거와 마땅히 납부해야할 세금에 대한 현재를 따져묻는 일에 그들 언론사는 온 몸으로 뻗댔다. 이들은 프레임 설정에 탁월한 바가 있는데 자칭 ‘야당지’ ‘저항지’를 불러대며 민주정부에 칼날을 세웠다. 당시 나는 각 언론사에 있는 동년배 ‘서른 살의 기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러고 살면 행복하냐. 만족스럽냐. 그렇지 않다면 도모해라. 힘들면 같이 하자. 그게 우리 나이에 걸맞은 일이다…. 그런 구상의 밑바탕에는 ‘단독자 기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기자는 조직원이 아니다. 부속품은 더군다나 아니다. 샐러리맨이라 부르는 것도 옳지 않다. 기자는 오직 단독자다.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고 쓴다. 그 책임도 자신이 오롯이 감당해야 마땅하다. 판사, 교수, 의사를 샐러리맨이라 부르는 경우는 없다. 그들은 조직에서 주는 월급을 받지만 그 역할은 ‘자기 완결적’인 동시에 ‘독립적’이다. 개인이 조직을 표상하는 동시에 조직은 개인을 보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억울한 이가 판사라는 개인을, 배우려는 이가 교수라는 개인을, 아픈 이가 의사라는 개인을 신뢰할 이유가 없다. 조직의 최고결정권자인 법원장, 총장, 병원장에게 문의하고 따지고 길을 구해야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원래 검사도 이들과 비슷한 독립체로 꼽아야겠지만, 요즘 상황으로 보아 그들은 오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월급장이가 맞는 것 같다) 기자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선 시민사회를 대변한다. 다만 선출된 대표가 아니므로 ‘추상’으로서의 시민사회를 염두에 두고 권력과 긴장한다. 무엇을 취재하고 쓰고 말할지 자신의 상식과 합리에 비춰 판단한다. 다만 개인인 기자는 하나의 직업적 공동체를 이뤄 오류와 편견을 최소화하려 애쓰는데, 그 시공간이 바로 뉴스룸이다. 뉴스룸은 직업적 편의를 위해 데스크·취재기자 등으로 노동과정을 구분하지만, 원론적으로 뉴스룸 안에서 모든 사람은 (편집국장·부장·평기자가 아니라) 오직 기자다. 기자의 정당성은 위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상식과 합리에 기초한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기자는 편집국장 또는 대표이사의 수족일 뿐이고, 모든 기사는 편집국장 또는 대표이사의 발언일 뿐이다. 친일 부역한 언론, 독재정권에 아부한 언론, 사주의 이익에 충성하는 언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마음 편한 기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 모든 과오는 그 기자의 잘못이 아니다. 이런저런 인생의 우연이 더해져 어쩌다 그 언론사에 몸을 담았으나 기자가 되려했던 최초의 마음이 밤마다 되살아나 양심선언문과 대자보와 사표를 썼다 찢기를 반복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결심이란 게 구차한 생계에 발목 잡히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곡절이므로 아직 그런 덜미 잡힐 일이 적은 ‘서른 살의 우리’가 나서면 어떻겠는가. 조직을 대변하여 마음에도 없는 적대의 언어를 필설로 옮기지 말고, “진짜 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깊은 곳의 단심을 끄집어 내어, 각자 속한 언론사를 욕하고 흉보면서 자유로운 개인인 기자로서 다함께 뭉쳐보면 어떻겠는가…. 그런 이야기를 조중동 기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내가 아직 나이 서른일 때였다. 200여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지난 1월 18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조선·중앙·동아 종합편성채널 선정’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방통위의 추가 특혜 지원 움직임을 비판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조중동매연’으로 표상되는 보수언론사들이 종합편성·보도전문 채널에 진출하게 됐다. 이 사건의 본질은 아주 간단하다. 이명박 정부가 ‘조중동매연’에게 일용할 양식을 퍼다주었다. 이 밥그릇으로 언제까지 먹고 살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혹자는 신문시장에서 방송시장으로 전환한 조중동매연이 천년 왕국을 마침내 건설할 것이라 전망하고, 혹자는 가공할 자본투입의 부담으로 조중동매연이 오히려 자폭할 것이라 내다본다. 나는 어느 쪽이 됐건 별 상관하지 않는다. 방금 전의 일도 잊어버리는 마흔 살의 나로선 적어도 5년은 흘러야 판가름날 언론 시장의 아귀다툼을 벌써부터 예측할 능력이 없다. 오직 분명한 사실이 있다. 모든 기자는 이제 샐러리맨이 될 것이다. 공중파 방송은 기왕의 시장을 뚝 떼어 조중동매연에 억지로 내주었다. 80년 언론사 통폐합의 정반대 방식이지만 그 본질은 거의 똑같은 ‘강압적 언론 시장 조정’이다. 그 결과 공중파 방송의 모든 기자와 피디는 상업적 실적에 목을 매달게 됐다. 새로 뛰어든 조중동매연은 연간 수천억 원의 자본을 투자한 성과를 조기에 이뤄내야 한다. 신규 시장을 개척하는 일은 언제나 버거운 일이고, 실적에 따라 고용조건은 널뛰듯 할 것이므로 조중동매연 기자들은 사주가 주는 월급 받는 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역 신문과 케이블 방송의 언론인들은 매체 자체가 통폐합될 위기에 항상 공포스러울 것이고, 운이 좋아 더 좋은 조건에 스카웃된다 하여도 가공할 경쟁 구조 속에서 하루하루 피를 말릴 것이다. 남겨진 신문·인터넷 매체는 부실의 거품을 안고 날로 치열해지는 시장경쟁에 어떻든 적응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다른 방식의 경쟁에 돌입할 것이다. 예컨대 <한겨레>는 고비용 방송이 아닌 저비용이자 미래 산업인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발판삼는 어떤 전망을 궁리해볼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당장 이익을 남기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허물어야 한다. 진보언론의 존망을 다툰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긴 하지만, 눈을 돌려 ‘기자 개인’을 보면 어느 쪽이건 반가운 일은 아니다. 할 일이 더 많아진다는 불평이 아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시장적 판단’이 언론인 일생에서 갈수록 중대해진다는 뜻이다. 그 시장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는 손’이 좌우한다는 시장주의자의 말에 따른다 해도 미래는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이 실은 가장 돈을 많이 가진 소수의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회주의자의 말에 따른다 해도 미래는 다수와 별 상관없이 전개된다. 북금곰은 얼음이 녹으면 사냥할 땅을 잃어버려 마침내 멸종한다. 지금 기자의 처지가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립적이고 자기 완결적으로 사실에 기초하여 상식과 합리의 판단을 내려 시민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발바닥 밑으로 꺼지고 있다. 설이 되면 나도 마흔이다. 조중동매연에 있는 나이 마흔 살의 기자들이 어찌 움직이는지 이런저런 통로로 전해 듣는다. 외부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출입처에서 닦아 놓은 인맥으로 정재계 인사들과 열심히 만났다고 한다. 종편·보도채널에 선정되기 위해 고급 취재원을 만나 고급 정보를 구했다고 한다. 그들이 지난 1년여 동안 이룬 일의 대강은 오직 조직을 위한 것이었다. 그 방식으로 열심히 일한 기자만이 장차 좋은 자리를 차지해 ‘데스크’가 될 것이다. 그들이 오늘의 일을 밑천삼아 장차 언론사의 최고 결정권자가 되어 제대로 된 언론을 구현하겠다는 포부까지 갖추고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은 오직 사주의 몫인 것을 마흔 살의 기자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나이 마흔에 우리는 샐러리맨이 되었다.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어버리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난다. 이 대목에서 건망증은 홀연 사라진다. “세월의 강위로 띄워 보낸 / 내 슬픈 사랑의 작은 종이배 하나”가 생긴다고 가수 양희은은 마흔 살을 노래했다. 마흔살의 나는 조중동매연에서 총대메고 뛰고있는 또래 기자에 대한 한줄기 연민을 세월의 강위로 띄워 보낸다. 자유기자가 되어 시민사회의 광장에서 찧고 까불며 호쾌한 언론을 만들자던 서른살의 제안과 맹세도 함께 떠내려간다. 마흔 살에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 이 글은 <단비뉴스>(http://www.danbinews.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