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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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유정/ 변호사 장관의 딸이 아버지의 회사(?)에 특채로 합격한 일 때문에 아버지까지 장관직을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 부처를 자기 회사로 알고 딸을 취직시키겠다는 발상을 한 아버지도 문제지만,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올바른 조언 한마디 하지 못한 외교부 관료들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청년실업자가 수십만이 넘는 상황에서 이러한 행태가 수많은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국민들을 무시했거나 아니면 그 같은 특혜가 워낙 일상화되어 문제라고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둔감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부동산과 교육문제라고 한다. 특히 출신대학에 따라 평생의 몸값이 정해지는 학벌주의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대학입시는 무엇보다도 ‘공정’해야 하기에, 대학입시가 있는 날은 전 국민이 출근시간을 한 시간 늦추고 비행기의 이륙시간을 조정하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진풍경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평등’과 ‘공정’을 확인하는 절차로서 대학입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요즘은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직장을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이다 보니, 같은 대학을 졸업해도 어떤 부모를 만났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관 아버지를 둔 덕분에 외교부에 특채로 합격한 딸 이야기는 전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딸의 외교통상부 특별채용 특혜 의혹과 관련해 사의를 표명한 유명환 장관이 지난 6일 서울 도렴동 외교통상부에서 열린 실·국장회의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면, 장관의 딸이 외교부에 특채로 합격한 것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심하게 불공정하고 염치없는 일들이 이 땅에서는 엄청나게 자주 일어난다. 청문회에 나오는 장관 후보자들마다 어찌나 교육열이 높은지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장전입을 하고, 하나같이 재테크에 재주 있는 부인들을 만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동산 투기로 재산이 늘어나고, 십중팔구 군대를 면제받는 체력조건을 타고 나는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재벌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어릴 때부터 기업오너로서의 수업을 받으면서, 일정 시기가 되면 재벌기업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하다보면 과연 ‘공정함’과 ‘정의로움’의 기준이 무엇인가 무척 혼란스럽다. 자조적인 말이지만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기업을 경영하는 세상에서 외교부 장관이 딸을 그 회사에 특채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까지 비난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보다 더 큰 부정의와 불공정에 대해서는 둔감하면서 왜 우리는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배운 성경이야기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포도원의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 모았는데, 아침에 와서 온종일 일한 사람이나 점심에 와서 반나절을 일한 사람이나 저녁 무렵에 와서 잠깐 일한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품삯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주인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공정함’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던 모양이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이야기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느님의 정의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정함과는 다른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공정함’과 ‘정의로움’의 기준을 판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외교부 장관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날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 또래 몇 명은 전 국민 과외금지를 시켜 공정하게 사교육도 없었고, 전국 고등학생이 똑같은 시험 한번 치르고 점수 순서대로 공정하게 대학가고, 공정하게 고시 합격해서 출세하던 그런 시절이 지금보다 차라리 공정했다고 자조하면서 술을 마셨다. 전두환의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현실에 분노하면서...
2017-07-20 | hrights | 조회: 789 | 추천: 0
신하영옥/ 한국여성의전화연합 교육조직국장 여주 이포보 공사현장을 다녀왔다. 7월에 한 번, 8월에 한 번. 아니 정확히 말하면 4대강 반대를 위해 보 위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에 대한 지지와 격려, 4대강에 대한 공사를 중단하라는 요구와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집회에 다녀왔다. 7월 집회에도 많이 더웠고, 거름냄새가 역겨웠었다. 나는 그 거름이 장승공원의 나무들을 위해 뿌린 것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아직 열흘을 넘기지 않은 농성 덕에 보 위에서 농성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음성을 듣고 망원경으로나마 그들의 모습을 접하자 찡! 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그들이 저 보를 오를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지금은 저렇게 웃고는 있으나 또 어떤 심경들일지. 아니 자꾸만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고 몰려갈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먹먹하게 다가 왔다. 언제쯤이나 이런 극한의 상황들이 사라질 것인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극한의 투쟁들이 언제쯤 사라질 것인가? 농성 일주일 후부터 생활용품 반입을 제한하고 있다고 했다. 그날도 활동가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생활용품과 먹거리는 반입을 못하고 말았다. 찜통더위에 식량은커녕 먹을 물조차 반입을 기피하는 것은 뭐하자는 것이냐며 집회에 참석한 이들의 비난과 원망이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렇게 그 날은 돌아왔다. 더위에 지친 몸을 시원한 에어컨으로 달래가며... 잠시 동안의 더위에도 지치고 힘들어 차량에어컨을 들들볶아대었는데, 종일을 높은 보 위에서 텐트조각으로 햇빛을 가리는 그들의 더위와 갈증에 미안해야 했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장난질을 하는 현 정부와 공사업체의 잔혹함이라니. 그리고, 8월에 한 번 더 방문했다. 그 때는 거름냄새가 지난번보다 더 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상황실의 애기를 들어보니 마을 이장단에서 상황실 철수와 지지방문 방해를 목적으로 일부러 뿌린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와서. 현장에는 4대강공사 찬성현수막이 줄줄이 널려있다. 비슷비슷한 문구들, 개발에 대한 염원을 담은 문구들... 언뜻 봐도 같은 사람이 만든 것 같은 현수막들이 여주 주민의 이름으로 걸려있고 그 사이에 하나, 4대강 반대의 현수막이 또한 여주 주민의 이름으로 걸려있다. 적든 많든 부동산과 토지를 소유하는 있는 이들이 찬성 측이라고 한다. 그 날은 찬성하는 주민들의 집회도 있었다. 그리고 현장방문에는 대학생들도 50여명 와서 현장을 둘러보고 자기들끼리 집담회를 하고 있었다. 찬성집회는 어느 순간 대학생들에 대한 공격과 욕설로 얼룩져 버렸고, 상황실을 공격할 기세로 인해 경찰들이 상황실을 보호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살아생전 전투경찰의 보호를 받기는 처음’이라며 웃음을 주고받기는 했으나 마음한편은 찜찜했다. 자식뻘인 대학생들을 향한 욕설과 흥분은 결코 당당하거나 정당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사업이 중단될까 두려워하는 모습, 안절부절하는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내몰고 있는 걸까? 환경 운동가들이 고공 농성 중인 경기도 여주군 4대강 이포보 공사현장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언제부턴가 이 사회에서는 ‘개발은 돈’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 그것은 부동산이 재산증식의 주요한 수단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개발이 곧 돈이 되는 것은 그 개발과 관련한 부동산이 있을 때 확실한 보증수표가 된다. 개발예정지에 외지인들이 부동산을 사들이는 것이 그런 이유이자 증거가 아닐까? 여주 이포보의 갈등도, 찬성 측의 대부분도 부동산을 소유한 이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다수 주민들은 구체적인 이익에 대한 정보보다는 정보와 권력을 점유한 찬성 측의 입장을 전달받을 뿐이라고 한다. 군수와 이장들이 전부 개입되어 있으니 일반주민들이 섣불리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긴 힘들 것이라고 한다. 진실은 결국 권력과 부를 가진 몇몇에 이득이 돌아갈 것이라는 게 아닐까? 지역출장을 위해 오랜 시간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보면 보이는 곳곳이 헤집어져 있음을 본다. 산이 통째로 뭉개지고, 강이 파이고, 시뻘겋게 드러난 맨 땅위에 철과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세워지는 모습... 그것이 개발이란 미명하에 진행되고 있는 모습이다. 벼로 출렁이던 들과 나무로 싱싱하던 산과 말갛게 흐르던 강물이나 냇물이 그런 모습으로 대체되고 있다. 나의 고향집 앞산도 통째로 뭉개져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는 회색건물들이 고향집에서 보는 시야의 전부가 된다. 여주 남한강의 공사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시뻘건 피를 토하듯 드러난 흙이 푸른 강나루를 대신하고 있다. 강이 주는 평화란 찾아볼 수 없다. 전쟁하듯이 강을 뒤집고 점령하듯이 강나루를 짓이기고 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정복, 폭력, 전쟁 같은, 잔혹한 단어들이 떠올랐고 분노가 올라왔다. 파괴된 자연에 대한 숙연함과 더불어 마치 내 몸을 유린당한 것 같은 분노. 강의 야생성이 주는 편안함과 평화는 이제 더 이상 못 본다는 것에 대한 분노. 현장 방문한 이들이 적어놓은 지지와 격려의 글 중에 ‘그냥 흐르게 두라’는 글귀가 있었다. 그렇다 왜 ‘그냥’ ‘흐르도록’ 두지 못하는 것인가? 왜 사물이 본래의 모습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도록 그냥 두지 못하는 것인가? 여성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으로 재단해서 깎고 자르고 통제하듯이 자본과 결탁한 가부장제는 자연마저 자본의 도구로 통제하려고 하고 있다. 여성의 미를 규격화 하듯이 자연의 아름다움마저 규격화를 시도하고 있다. 시멘트로 덧입혀진 인공 강나루가 수풀로 우거진 강나루에 비해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배경, 잘 흐르는 강물을 막더니 그 자리에 인공호수를 만들려는 발상의 배경은 아름다움조차도 가공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름 아니다. 제발 그냥 두라!! 천박한 심미안과 욕심을 지금이라도 거두라!! 그냥 이대로, 지금 그대로 두어라!! 자연이 파괴된다면 그 다음은 인간의 파괴라는 것을 모르는가? 몸이 없이 생각이 없듯이 자연이 없이 인간의 문명과 문화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도 다 아는 상식을 그들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개발과 성장의 의미를 다시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 이 시각, 비가 온다. 이 비로 인해 더위는 한풀 꺾이겠지만, 비로인한 또 다른 불편들을 생각하니 편하지만은 않다. 벌써 한 달을 넘긴 농성에 활동가들의 몸은 지치고 이러저러한 병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쉽게 농성을 접을 수 없는 활동가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길은 4대강 사업의 문제에 대한 침묵을 걷어낸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일 것이다. 아니 활동가들의 고충을 떠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안식을 찾고 찜통더위와 이상한파로 나타나는 이상기후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도 참여해야 한다. 결국 인간 스스로의 멸망을 막기 위해 나서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주의 찬성하는 주민들을 직접 만나 묻고 싶었다. “진정 찬성하세요?”, “건설로 인한 이득과 자식들의 미래를 바꾸고 싶으신가요?” 그러나 실제 이 작업은 국가가 해야 한다.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행위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44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지난 7월 하순에 한국에서 방문한 동료교수들과 합류하여 프랑스혁명기행을 열흘 동안 다녀왔다. 천리 길(4천 킬로미터)을 넘게 달리는 강행군이었지만 세계를 흔들었던 대사건의 주요현장과 기억의 터를 돌아보며 그 역사적 유산과 그 현재적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보는 좋은 기회였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혁명'이라는 용어가 동반하는 너무 심각하고 거창한 무게와 찬란함을 싫어하지만, 기행을 통해 얻은 몇 가지 개인적인 단상들을 '프랑스혁명과 인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프랑스혁명은 과연〈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천명했던 압제에 대한 저항권,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 부당하게 공권력에 의해 구금·체포되지 않은 권리 등을 현재까지 얼 만큼 실현했을까? 프랑스혁명의 의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혁명은 출생에 의한 특권을 재산에 의한 특권으로 대체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야유한다. 성직자-귀족-평민이라는 신분제도가 법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사유재산의 신성불가침을 보장함으로써 (많이) 가진 자와 (적게) 못 가진 자 사이의 차별은 더욱 심해졌다는 주장이다. 혁명기간 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 직전까지 갇혀 있던 센 강 옆의 콩시에르쥬리에 재현된 당시 감옥이 수감자의 빈부차이에 따라 크기와 내부시설이 달랐다는 것을 관찰해 보면 일리 있는 불평이었다. 우리가 프랑스혁명이 잉태한 폭력과 공포의 상징처럼 흔히 알고 있는 기요틴은 사실은 '죽음의 평등'을 위해 특별고안된 것이다. 루이 16세를 포함한 지배계층, 혁명의 과격파와 온건파, 일반시민과 노동자가 동등하게 기요틴 앞에 목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혁명의 궁극적인 승리자는 누구였을까? 지난 200년 동안 축적된 연구결과를 다소 거칠게 요약하면, '재산을 가진 백인남자'가 정답에 가장 가깝다. 권리선언이 보장한 각종 시민권들은 남자에게만 한정되었다는 깨달음이 올랭프 드 구즈라는 여성이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을 별도로 발표하게 된 배경이다. "기요틴에 올라갈 동등한 권리가 있듯이 여성에게도 연설할 권리(=시민으로서의 공민권)를 보장하라"고 외쳤던 구즈 역시 기요틴에 목숨을 빼앗겼다. 무려 150여년 뒤인 1940년대가 되어서야 프랑스여성에게 처음으로 참정권이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여성들에게는 프랑스혁명이 없었다"라는 한탄이 근거 없는 억지는 아닌 셈이다. 프랑스혁명이 백인 중심적이었다는 해석은 논쟁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에서 크게 비켜나지 않는다. 비록 혁명정부가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도의 철폐를 선언했지만 유색인종을 조건 없이 자유, 평등, 우애의 품으로 포옹하지는 않았다. 프랑스혁명에서 용기를 얻은 아이티 흑인들이 식민지배에 반발하여 최초의 흑인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투쟁할 때, 나폴레옹은 그들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체포하여 머나 먼 프랑스 산골짜기 감옥(Fort-de-Joux)에서 사망하도록 방치했다. 여성과 마찬가지로 유색인도 혁명의 괄호 바깥에서 부당하게 신음했던 것이다. 아이티의 영웅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가 사망한 프랑스 산골짜기 감옥(Fort-de-Joux) 사진 출처 - 필자 주지하듯이, 이데올로기적 좌표의 기준으로 통용되는 사용되는 '좌파(Left)'와 '우파(Right)'라는 용어는 프랑스 혁명의회의 우연한 좌석배치에서 연유했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왼쪽 편을 차지했고 입헌군주정을 선호하던 보수온건파들은 오른쪽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퀼로트(노동자계층)의 전폭적인 정치적 후원을 받으며 '공포정치'를 주도했던 좌파의 우두머리격인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후대 프랑스인들의 기억과 선호는 어떤 빛깔일까? 답사단의 한 사람이 "프랑스에서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혁명좌파가 너무 심한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푸념할 정도로 이들은 냉담한 대접을 받았다. 혁명의 진원지이며 핵심무대였던 파리에는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거리는 물론이고 그 흔한 기념동상이 단 한 개도 없었다. 우리가 찾은 그의 고향(아라스, Arras)에서조차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행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프랑스판 혁명기행안내책자에도 기록되지 않은) 그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를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 사진 출처 - 필자 한가롭게 '남의 나라' 혁명의 흔적과 발자취를 찾아 헤맸던 필자가 느낀 전반적인 인상은 혁명의 주변인 혹은 이단자에 대한 역사기억 만들기가 (의도적으로?) 축소되거나 억압되었다는 점이다. 선구적 페미니스트 구즈가 거주했던 파리소재 집은 조그만 명패로만 남아있었고, 혁명발발 전 신분의회의원에 선출되어 베르사유에 머물었던 로베스피에르의 숙소는 찾을 길이 없었으며, 진보정당의 전신이었던 자코뱅 클럽이 있던 장소는 현대식 쇼핑센터가 삼켜 버렸다. '베허 버려야 할 왕의 모가지'가 사라진 오늘 날, 혁명의 날카로운 추억은 체 게바라의 캐리커처를 그린 티셔츠로만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김수영은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나에게 물었다. 내가 젊은 그대에게 다시 묻노니, 지금 당신은 무슨 냄새를 더듬으며 쓸쓸히 거리를 헤매는가.
2017-07-20 | hrights | 조회: 222 | 추천: 0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제주에 최상돈이란 가수가 있다. 노래를 참 잘한다. 곡도 잘 만들어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 4.3 현장을 찾아다니며 연출되지 않는 공연도 한다. 군사기지 싸움 현장에도 달려와 늘 주민들과 함께 선다. 주민들과 막걸리 잔이라도 기울일라 치면, 곧 그의 ‘목포의 눈물’ 요청이 쇄도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조용필이나 한영애의 그것보다 최상돈의 ‘목포의 눈물’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그는 정작 자기 노래를 담은 음반 한 장 아직 못냈다. 수십 년 동안 노래에 온 삶을 바치며 장가도 못간 그가 제대로 된 음반 하나 갖고 있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올봄 즈음에는 ‘상도니 노래 날개 달아주기’ 모임이 시작되었다. 뜻맞는 사람들끼리 십시일반 모아서 최상돈을 ‘데뷔’시키자는 것이다. 말이 ‘데뷔’지, 그의 노래, 아니 그의 삶을 오롯이 한 장의 음반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평생 현장에 헌신해 온 그에게 최소한의 보답이라도 하자는 취지도 덧붙여진다. 그의 음반에는 그의 노래가 좋아서 후원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도 빼곡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음반이 만들어지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국 투어에도 나서기로 했다. 제주와 같은 아픔을 겪었던 지역들, 예를 들어 평택이나, 부안 등지를 다니면서 현장의 가수끼리 만남을 엮고 비슷한 처지의 지역끼리 서로 보듬고 교류하자는 것이다. 서울 대학로의 공연장에서도 제주 가수의 노래를 통해 ‘제주’를 들려주면 좋겠다. 제주의 소외된 현장에서 늘 함께 하는 가수 최상돈, 최근 그의 음반을 내기 위한 노력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비단 제주의 가수 최상돈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정작 최상돈은 머쓱해하며, 그럴 필요 없다 말리기도 하고, 자신 때문에 모여서 걱정하고 때로 옥신각신 하는거 보면서 상처도 받았다고 하지만, 이번 일은 최상돈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난 6월, 박원순 변호사 블로그를 보니까 광주의 행복발전소라는 곳에서 ‘광주전남 가수 키우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벌이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었다. 참 좋아 보인다. 지역에서 거리문화, 현장예술을 끌고 가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란 녹녹치 않다. 그런데 문제는 지역에서조차 그 사람들을 무슨 무슨 행사를 벌일 때 ‘써 먹을줄’만 알았지 키우려는 생각은 잘 안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프로젝트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삶과 현장문화를 지키기 위해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제주 속담에 ‘동네 심방 안 알아준다(동네 무당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실력이나 재능은 있지만, 오로지 언제든지 찾으면 볼 수 있는 동네(지역)사람이라고 도무지 키워줄 생각 안한다. 그래서 무슨 무슨 집회나 현장 행사에는 노래 불러달라고, 공연해달라고 하면서 그들의 삶이야 어떻든 술 한 잔 같이하면 그만이라는 현상을 빗대어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를 좀 더 확장하게 되면, 언제까지 서울과 제도가 주도하는 문화 권력에 의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물론, 서울에도 여전히 거리의 문화는 마이너이다. 한편, 아직 지역의 문화는 서울로 상징되는 문화 권력에 예속된다. 민중문화니, 독립문화니 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때문에 지역에 좋은 가수, 좋은 예술가가 있어도 큰 행사나 기획을 준비하게 되면 무대에 누구를 초청할까 하면서 서울의 리스트부터 뒤지게 된다. 모든 텍스트는 서울에서 온다. 우리 사회에 대한 시각, 이런 저런 이야기, 시대 담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의 문화와 자연에 대한 이야기조차 서울에서 나온다. 제주만 하더라도, 최근 한창 각광을 받고 있는 ‘올레’와 관련된 책은 서울에서 나온다. 물론 올레를 걸었던 경험과 이야기는 누구든지 풀어낼 수 있겠지만, 누구보다 제주의 생태와 문화를 잘 이해하고, 어릴 때부터 살아온 터전이기도 한 고향의 이야기가 서울에서 전해지다니, 반성할 일이다. 우리 안에서부터 ‘책 내는 버릇’이 바이러스 처럼 퍼졌으면 좋겠다. 그것은 제주를 남기는 기록이고, 제주를 알리는 홍보이자, 제주를 키우는 문화재생산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제주의 삶과 문화를, 자연을 누구보다도 잘 엮은 책으로, 음반으로, 영화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안 곳곳에 있음을 본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란 작정하고 제도에 얹혀 가거나, 혹은 서울권력과 매칭되는 방식이 아니면 힘겹기 마련이다. 그리고 필히 그것은 주류질서 내에서 스스로 변질될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최상돈처럼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으로 인한 삶의 힘겨움이야 견뎌내겠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예술은 서울이나 주류의 그것과 견줄 수 없는 값진 산물일진데, 너무 아깝지 않은가! 제도가 아닌,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주류질서 밖 이 곳에서 우리 스스로 창조하는 문화의 질서란 다름 아닌, 지역 공동체에 혼을 일으키는 일이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문화다양성을 열어가는 길이다. 수년 전, 서울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출장일을 마치고 혼자 어스름한 저녁의 인적도 드문 서울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디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보니 건너 편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모퉁이에서 한 여성이 기타를 치며 마이크까지 세우고 매우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내내 놓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람이라곤 드문 어두운 겨울 거리의 저녁, 삭막한 공간에 퍼지는 그 노래 덕에 나의 무겁던 발걸음도 행복해졌지만, 그녀의 노래는 앞으로 어떻게 이어져 갈까 하는 의문도 더해졌다. 지역의 가수를 키우자. 상업적 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는 지역의 대학로를 메시지가 생산되는 예술장소로 만들어가자. 주류적 생산체제에 쫓겨 촌(村)으로 들어가 자신 만의 예술을 갈구하는 사람들, 16mm 카메라 둘러매고 이곳저곳 사람과 시대를 담으려 애쓰는 예술가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문화게릴라들을 ‘데뷔’시켜내야 한다. 공감과 연대를 통한 비주류의 방식으로 말이다. * 제주의 가수 최상돈에 관한 이야기는 http://cafe.daum.net/sdXove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203 | 추천: 1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6월 25일 일본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파견노동조합 사무실에서 2008년 경제위기로 해고된 세 명의 일본인 노동자를 만났다. 47세의 다나카씨(가명)는 27년간 계속 일을 하였지만 지난 2009년 생활보호(한국의 기초생활보장제도) 대상자가 되어 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0세까지는 정사원으로 일했습니다. 처음에 배송회사의 트럭운전사였고 그 다음에는 닛산자동차, 자동판매기 회사, 와인창고관리를 하다가 43세부터 이쓰즈 자동차회사에서 파견노동자로 일했습니다. 리먼 쇼크로 2009년 1월말에 해고를 당했지요.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도중에 그만두라 하더군요. 부당하다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어떤 보상을 받은 적도 없구요. 그저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찾을까, 그것만 고민했습니다. 살고 있던 회사의 료(일종의 기숙사)도 비워줘야 했기 때문에 당장 잠자리도 막막했습니다. 다행히 파견노조의 도움을 받아 생활보호 대상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 36세의 야마타씨(가명)도 비슷한 처지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 전문학교를 다닌 야마타씨는 전기공사자격증을 취득하고 공장을 전전하다 2002년부터 닛산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파견노동자로 일했다. 일본에서는 2003년부터 제조업 파견이 허용되었고 3년 이상 파견을 지속할 경우 직접고용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2002년부터 5년간이나 파견근로로 야마타씨를 고용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 “해고당하기 약 1년 6개월 전에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회사에 직접채용을 요구했으나 지금 회사가 상당히 어려워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들었지요. 그리고는 계약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2008년 11월말에 해고당했습니다. 당연히 료에서도 쫓겨났구요” 30살인 스즈키씨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다. 2008년 경제위기 때문에 해고당한 뒤 일자리를 못 찾아 생활보호 대상자로 살고 있다. “이쓰즈 자동차에 파견노동자로 일하면서 10킬로 20킬로 되는 부품을 대(다이) 위에 나르는 작업을 하다 허리를 다쳤어요. 같은 일을 해도 직접 고용된 사람은 저보다 10만 엔(한화 약 130만원) 정도를 더 받더라구요. 게다가 파견회사의 료에 살면 월 4만5천 엔의 임대료뿐만 아니라 가구나 전자레인지 등의 전자기기도 빌리는 것이라서 돈을 내야 해요. 그러다보면 실제 손에 쥐는 것은 얼마 안 되지요” 가격을 대폭 내린 식당 앞에 줄서 있는 일본 시민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2008년 11월 비정규직과 근로빈곤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이래 올해로 다섯 번째이다.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충격이 너무 컸다. 일본은 종신고용과 숙련노동자, 품질중시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 명품 브랜드로 도배를 한 긴자의 휘황찬란한 거리에는 7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맥주집이 있다. 100년 전통의 음식점에는 자리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그런 일본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쉽게 무너진 것을 어떻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나치게 비관적인 일본 학자나 노동조합만을 만난 것은 아닌지를 의심했지만 후생노동성과 지역 노동국을 방문하고 히비야 공원의 파견촌을 찾아 간 후 신자유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를 인정해야 했다. 54년만의 정권교체를 지켜보면서 평생 일을 해도 근로빈곤의 덫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일본의 현실임을 납득해야 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이분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도쿄 도청의 유명한 전망대에 한 번도 올라가본 적이 없다 하여 그곳에도 함께 갔다. 도쿄의 아름다운 야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는 일본이 바로 한국의 미래가 아닐까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본을 방문하기 전 필자는 한국에서 임금 근로자의 43%가 일하고 있는 5인미만 영세사업체의 고용주와 노동자를 인터뷰 했다. 98년 IMF 경제위기 당시 대기업에서 희망퇴직을 하고 두 번에 걸쳐 창업을 했던 정남길씨(가명, 48세)는 지금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다. 그가 정규직에서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10여 년 동안 그와 그의 가족을 보호해주는 사회안전망은 아무것도 없었다. 월 79만원을 받으며 모 청소업체에서 일하는 그에게는 아직 학생인 두 아이들이 있다. “제 탓이지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어뜨리던 정남길씨는 그래도 아쉬운 듯 이렇게 말했다. “너무 급여가 작아요. 1주 5일, 하루 8시간 꼬박 일하는데 퇴직금도 없고, 9개월 계약직이거든요. 그래도 정부가 지원하는 사업인데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게 아쉬워요. 사회보험은 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난 직장은 5개월짜리였기 때문에 두 달 실직동안 실업급여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3년간 일본과 한국은 자살률이 전 세계 1, 2위를 다툰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마저 없는 사회, 혹시 일본과 한국이 그렇게 닮아가는 것은 아닐지, 일본에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47 | 추천: 0
이광조/ CBS PD 가끔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에 편의점에 들를 때가 있다. 동네건 회사 근처건 새벽 시간엔 보통 10대 또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이 편의점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건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서 그네들을 마주할 때면 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어쩌다 술에 취해 함부로 반말 하고 행패를 부리는 손님을 보면 그런 불편한 마음이 더하다. 하지만 편의점에 들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가장 큰 이유는 10대, 2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 계산대 앞에 서서 일하며 얼마나 받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내년에 적용될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5.1 퍼센트 인상된 시급 4,320원으로 결정됐다. 해마다 그렇듯이 노사, 공익위원 3자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지루한 논쟁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시급 4,320원이면 하루 8시간씩 한 달에 하루도 안 쉬고 꼬박 일할 경우 1,036,800원에 해당되는 액수다. 사람이 쉬지 않고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 현실적으로는 한 달 꼬박 일해도 100만원이 안 되는 돈이라는 얘기다. 지난해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인상률을 봤을 땐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와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 인상률에도 못 미친다. 노동착취를 방지하기 위해 임금의 하한선을 법적으로 정하는 최저임금. 최저임금은 애초부터 노동인구 중에서도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층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제도다. 그리고 우리사회에서는 이 최저임금의 가장 중요한 적용대상이 10대,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생들이다. 편의점, 주유소, 각종 패스트푸드 체인점 등 우리 주변에는 법정 최저임금을 받는 우리의 아들, 딸, 동생들이 도처에 널렸다. 80년대 중반 대학 주변의 아르바이트 시급이 1천원에서 많이 주는 곳은 1,500원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25년 사이에 기껏 세배 정도 오른 건가. 그에 비해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이 60만원 정도였던 걸 생각하면 대학등록금은 적게는 5배에서 많게는 8배까지 오른 셈이다. 국민소득도 늘어나고 민주화도 되고 선진국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데, 최저임금은 왜 이리 안 오르는 걸까.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적은 최저임금 기준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최근 노동부의 통계를 보면 지난 해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은 1만 4,869개로 이는 2007년에 비해 3배나 늘어난 수치라고 한다. 점검 업체 2만5,505개 중 거의 60퍼센트에 이르는 업체들이 최저임금을 위반한 것이다. 이 통계 속에 얼마나 많은 우리 청소년들의 눈물과 한숨, 분노가 섞여있을까. 더구나 영세한 자영업자가 아니라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들이 운영하는 편의점조차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면 할 말을 잊게 된다. 청년권익단체인 청년 유니온이 지난 5월 전국 6개 지역 427개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44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65.8퍼센트가 2010년 기준 최저임금인 4,110원 미만의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으며, 편의점별로는 훼미리마트의 73.3퍼센트, GS25의 62.9퍼센트가 최저임금을 위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편의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외가 아니었다.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임금이 그 밑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는 하한선을 법으로 정해놓은 것이지 딱 그만큼을 주라는 게 아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10대, 20대 초반의 청소년들이고 밤낮 없이 아무 때고 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실제 임금은 그보다 훨씬 높아야 하는 게 상식에 맞을 것이다. 선진국 치고 우리처럼 하루 24시간 어딜 가든 편의점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라는 없지만 그나마 우리와 비슷한 일본의 경우 최저임금 수준이 우리의 2배가 넘고 심야시간에는 더 많은 임금을 가산해 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청소년들의 최저임금 문제는 보수를 자처하는 분들이 앞장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다. 가족의 소중함, 공동체의 가치, 어른의 책무를 강조하는 보수라면 부모세대와 우리사회가 보호해야할 청소년들을 이렇게 착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돈만 벌면 된다는 장사치가 아니라면 훼미리마트나 GS25 같은 재벌그룹 편의점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 편의점은 최저임금을 지킨다는 윤리강령부터 마련하고 편의점마다 이를 지킨다는 서약을 받고 인증마크라도 붙여라. 그런 다음 10대, 20대 청소년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될 수 있도록 시급을 현실화하라. 최저임금은 아무리 어려워도 그 정도는 줘야 된다는 사회적 합의이고 이런 합의는 영세업체에나 해당되지 재벌그룹들이 운영하는 편의점체인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편의점 출입구 옆에는 커다란 모니터에서 하루 종일 광고영상이 나온다. 카라, 소녀시대, FT 아일랜드, 빅뱅... 화려하게 차려 입은 10대 아이돌 그룹들과 창백한 얼굴의 10대 아르바이트생. 무심코 지나치지만 그 극명한 대비에 가끔 쓴웃음이 난다. 자식세대, 청소년들을 이렇게 착취하고 소비하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 자식들을 잡아먹었다는 그리스 신화 속의 크로노스가 머릿속을 맴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2 | 추천: 0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변명은 옹색하고 비겁하기 마련이다. 지금부터 한겨레에 대한 옹색하고 비겁한 글을 쓰려고 한다. ‘놈현 관장사’ 운운하여 파문을 일으킨 <한겨레> ‘직설’ 코너(이하 ‘관장사 직설’)가 나로 하여금 한겨레를 변명하게 만들었다. 변명을 하려면, 사과부터 해야 한다. 사과 없는 변명은 적반하장이 될 터인데, 나는 도리어 매를 드는 도둑이 되어볼 용기까진 없다. 언론은 ‘언어 정치’를 한다. ‘언어 상품’을 판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한겨레>의 ‘관장사 직설’은 순진한 생각에 기초한 잘못된 언어 정치였고, 소비자의 수준을 낮춰본 실패한 언어 상품이었다. 한국의 시민 또는 소비자는 마땅히 이를 비판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있다. 심지어 불매(절독)를 다른 이에게 종용할 수도 있다. 그것이 시민·소비자 민주주의다. 그 앞에서 <한겨레>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 소비자·시민 앞에 생산자·언론이 할 도리가 그것 말고는 별로 없다. 1997년 가을, 한겨레신문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내 마음은 완전히 푸근했다. 당시 대표이사부터 편집국장, 사회부장, 사회부차장, 경찰팀장에 이르는 ‘위계상 상급자’ 모두 넓은 의미에서 운동권 출신이었다. 도도한 면면들은 70년대 민청학련부터 90년대 학생운동 정파까지 두루 포괄하고 있었다. 알고 보면 모두 ‘왕년에 한 자락씩 한’ 인물이었다. “이 정도면 인생 맡겨도 되겠다” 생각했다. 한겨레가 운동권 집합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언론사와 달리 ‘운동권 출신도’ 많이 들어와 있다. 운동권의 폐해가 적지 않다. 운동권 출신 가운데 사회에 해악을 끼친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일신의 안위가 아니라 세계와 사회를 고민하며 명분과 가치를 추구했던 작풍·태도·관점은 매우 소중하다. 그렇게 살아온 이는 그렇지 않았던 이와 삶이 다르다. 그렇게 각자의 청춘을 보내며 당대를 살아낸 쟁쟁한 선배들이 있어 나는 기분이 좋았다. 푸근한 마음을 더욱 혹하게 만든 두 번째는 민주주의였다. 1989년 창간이래, 한겨레는 대표이사와 편집국장을 선거로 뽑아왔다. 구체적인 선거제도는 변화를 거듭했지만, 주주·사원·기자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관철시키려는 최초의 구상은 큰 흔들림이 없었다. 선거를 하면 여러 후보들이 나선다.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구상한다. 유권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며 개입한다. 2년 또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그런 선거 과정에서 한겨레는 ‘집단적인 허물벗기’를 한다. 예컨대 다음 대표이사·편집국장 선거 때는 이번의 ‘관장사 직설’ 파문이 반드시 도마에 오를 것이다. 주주·사원·기자들은 이번 사태를 분석하고 논쟁하면서 새 리더에게 이리저리 요구할 것이다. 선거가 있으면 일상적 민주주의도 작동하기 마련이다. 한겨레는 사내 여러 매체를 통해 이런저런 분란이 항상 많다. 늘 말이 많아 소란스럽다. 이번 일도 한겨레의 일상적 민주주의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거추장스럽고 소모적이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방안’을 내놓는데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그러나 ‘최악의 오류’를 피하는데는 반드시 필요하다. 한겨레는 민주주의를 통해 최악을 피해 왔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장사’를 해왔다. 한겨레가 한국 최초의 사회적 기업이자 거의 유일한 ‘민주주의 기업’이라고 나는 믿는다. 기업은 생존과 확장을 목표 삼는다. 생존과 확장의 방식을 민주적으로 결정하면서 그 결과 민주주의에 기여하자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세우고 한겨레는 22년을 지냈다. 그러나 최초의 놀라움과 환희를 빼고 나면, 입사 이후 10여년은 크고 작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실망의 대부분은 나를 환호하게 했던 바로 그 두 가지에서 비롯했다. 한겨레 사람들은 저마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잘못을 좀체 인정하지 않는다. 귀가 두껍다. 한겨레는 민주주의 조직이다. 그래서 오류조차 민주적 동의를 얻어 관성화된다. 안 변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겨레에 몸과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오류를 극복할 만큼 치열하다는 믿음, 그리고 민주주의는 오류조차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믿음이다. 믿음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질 것이다. 창간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한겨레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었던 논쟁은 ‘DJ 문제’였다. 이제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아련하겠지만, 90년대 후반까지 한겨레는 ‘DJ 편향’ 문제로 늘 시끄러웠다. 실제로 한겨레 사람들 가운데는 88년, 92년,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의 당선이 유일하고도 가장 현실적인 ‘민주적 진전’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가슴 속의 신념이야 양심의 문제지만, 그런 믿음을 기사에 관철시키면 공론의 문제가 된다. 한겨레는 공론장에 가끔 그런 믿음을 드러냈다. 이를 비판했던 이들은 “언론은 공정·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논지를 주로 펼쳤다. 나는 ‘DJ 편향’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언론이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도 반대한다. 언론도 편을 들 수 있다. 편을 들어야 옳은 경우도 있다. 다만 언론은 ‘언어 정치’를 하는 기관이므로 입장과 관점을 표현할 때, 정교하고 현명해야 한다. 언론의 정치적 입장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 한국에선 발달돼 있지 않다. 한겨레 역시 이 방면에서 무능했다. 한겨레의 민주주의는 내부의 입장을 모을 만큼 진화하지 못했고, 이를 드러내는 언어는 정제되지 않고 어설펐다. 김대중의 정계복귀 직후인 1995년 7월, 어느 논설위원이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열흘 뒤,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칼럼이 다른 논설위원의 이름으로 실렸다. 그 시절 기사와 칼럼을 보면 매양 ‘내부 충돌’의 형국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진보정당 문제가 한겨레를 흔들었다. 2002년 가을, 몇몇 기자들이 진보정당 후원비를 내고 있다 하여 논란이 됐다.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사규를 위반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무려 6개월 동안 게시판·노보 등에서 토론이 이어지다가 2003년 1월 오직 이 문제를 판가름 지으려고 사원총회까지 열었다. 당시 투표율이 75%였다. 한겨레에선 ‘대단히 낮은’ 투표율인데, 이 문제를 투표에 붙여 ‘강제’하려는 것 자체를 비판한 젊은 사원들이 사원총회를 ‘보이콧’한 결과였다. 당시 논쟁에선 기자들이 정치권에 몸담는 일,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차이, 시민단체 후원 문제 등까지 두루 등장했다. 결국 지난 20년에 걸쳐 한겨레는 ‘잠정 합의’ 같은 것을 형성했다. 어느 정치세력과도 개인 또는 집단의 차원에서 밀착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한겨레 사람들은 어떤 정치세력도 신뢰하지 않는다. 한겨레도 조직인지라 ‘조직 논리’가 있다. 시장·국가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는 동안 그들 정치세력이 한겨레에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 정치세력에 가담하는 ‘개인으로서의 시민’들은 본원적으로 한겨레의 바탕이 됐다. 이 기묘한 딜레마가 한겨레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한겨레는 세력이 아니라 시민이 만들었는데, 그 시민들은 저마다 다른 정치세력에 긴박되어 한겨레를 소비하고, 한겨레는 그 세력들을 불신하거나 적어도 거리를 둔다. 이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공교롭게도 노무현 정부의 출범 시기는 한겨레의 ‘입장’이 나름의 진일보를 형성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특정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런 신념을 가진 개인이야 지금도 있지만, 적어도 공론의 차원에서는 이를 드러내지 않게 됐다. 이를 통해 한겨레는 민주 정부조차 맹렬히 비판할 수 있는 내부 동력을 얻었다. 김대중 정부 시기의 혼란을 거친 한겨레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거리두기와 비판하기’에 있어 별 거리낌이 없었다. 당선 직후 노무현 대통령이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했을 때, 다수의 (특히 젊은) 기자들은 그를 돌려보내지 않은 간부진에게 크게 항의했다. 오겠다는 정치인을 돌려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도 한겨레의 ‘정치적 감성’은 그걸 마뜩치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의 민주주의는 ‘최선’을 마련하진 못했다. 거리를 두고 비판하는 것 말고, 일관된 맥락과 입장을 정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바로 그것이 노무현 정부 시기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겨레에 대한 독자·시민의 실망과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한겨레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었나. 그렇다고 답하는 이도, 아니라고 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한겨레 안에서도 그 물음은 복잡하게 가지를 친다. 왜 비판적이었나. 무엇을 근거로 어떤 경우에 어떻게 비판했나. 이라크 파병은 대통령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나. 한미FTA 체결을 반대하는 것은 근본주의적 몽상에 불과한 것인가.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거대 언론사 총수를 주미 대사에 임명하는 것은 또 다른 권언유착이 아닌가. 사회 안정망이 붕괴한 것은 정책 방향의 잘못이었나, 보수 세력의 저항 때문이었나. 한겨레는 정책을 비판했어야 했나, 보수 세력을 비판했어야 했나. 정책 비판이 우선인가, 보수 세력 비판이 우선인가. 이런 물음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한국의 언론, 특히 신문은 대단히 ‘정치적인 상품’이 돼버렸다.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중앙일보>를 제치고 <조선일보>가 여전히 ‘비교 우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조선일보>가 ‘더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한국 신문은 근대 이후 끊임없이 정치 구조, 특히 엘리트 권력 구조에 개입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 운동’ 역시 그 시도 가운데 하나이며, 한겨레 역시 정치 구조에 대한 (계몽적) 개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정치 (시장) 구조에 밀착한 상품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예민하고도 정확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비자가 선택하는 상품이라면 그 상품의 기능 역시 정치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한겨레>의 입장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한겨레>가 발 딛고 선 시장이 바로 정치적 시장이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정치가 작동할 때 흥하고, 정치가 사라진 곳에서 쇠락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계속 ‘관성화’된다면 그렇다. 사소한 정치적 실수가 매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이 지긋지긋하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치적 논쟁에 매체의 미래를 맡기는 게 신물 난다면, 그 시장을 바꾸면 된다. 정치 구조에 작동하는 대신 시민사회에 소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면 된다. 권력에 대한 개입과 조정의 소명의식을 조금 줄이고, 시민사회의 저변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옮겨가면 된다. 그런데 한겨레의 민주주의는 그 진화에 속도를 붙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주의가 온전히 작동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다. 민주적 소양을 갖춘 구성원도 줄어들고 있다. 한겨레의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고비용 저효율’의 방식이 아닌지 의구심도 확산되고 있다. 그 과도기에서 여러 기자들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만들어진 <한겨레>의 ‘직설’은 권력지향적인 정치구조의 맥을 시민사회의 언어로 짚어보려는 시도였다. 그 담당 편집자는 과거 <한겨레21>에서 ‘쾌도난담’ 란을 만들어 사회 주요 쟁점에 대한 거리낌 없는 도발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아마도 <한겨레>의 쾌도난담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언어 전략’에 문제가 있나. 아니다. 감히 말하자면 이런 시도가 계속 되어야 한다. ‘저들만의 리그’로 변해가고 있는 정치·정책의 언어를 평범한 시민들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저잣거리의 담론으로 바꿔야, 한겨레도 살고 한국 시민사회도 산다. 기왕 정치 상품을 만들 것이라면, 국회의원만 읽는 기사 말고 시민들이 기꺼이 읽는 기사를 써야 한다. 정치담론의 민주화야말로 ‘시민 민주주의’의 고갱이다. 적어도 이 점에 관한한 정치인 노무현의 구상과 ‘직설’ 편집자의 구상은 일치한다. ‘관장사 직설’ 파문은 어떤 면에서 한겨레의 인과응보다. 의도가 아닌 결과를 두고 정치권력을 비판했던 한겨레는 마찬가지의 논리로 비판당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런데 이번에는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지나치게 폄훼하고 까불었다. 적어도 그렇게 비쳤다. 언어는 생산자의 의도가 아니라, 청취자의 이해가 더 중요하다. 그것까지 고려하여 ‘발화’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글을 쓰는 자는 전체 텍스트의 맥락을 이해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글을 읽는 이는 그 파편만 떼어 내어 전체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놈현 관장사’를 뽑아내어 전체를 읽으라고 유혹했다. 잘못된 언어 전략이었다. 그것은 시민의 언어가 아니라 천민의 언어였다. 그러니 잘못이고, 그게 싫으므로 더 이상 한겨레를 소비하지 않겠다고 해도 별로 할 말이 없다. 결함 있는 상품을 만들었으면 사과하고 리콜하는 게 상도의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노무현 정부를 넘어서자는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가능하면 더 현명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은 정치인의 ‘의도’를 모두 배려하고 이해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정치권력은 정책, 그리고 그 정책을 설명하는 언어로 평가받아야 한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결코 이명박 대통령의 성실한 일상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이명박 정부는 그 정책의 수준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통령의 사망 이후 그의 의도와 심중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긴 했지만, 그걸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하여 언론의 비판에 결함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 적힌 구차한 변명을 모두 이해한 다음에야 한겨레를 절독할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관장사 직설’ 파문은 어떤 면에서 한겨레의 인과응보다. 의도가 아닌 결과를 두고 정치권력을 비판했던 한겨레는 마찬가지의 논리로 비판당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한겨레를 둘러싼 범 진보진영이 ‘공동체적 연대’에서 ‘합리적 비판과 견제’의 시기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그것을 가슴 아프게 인정한다. 이제 한겨레는 더 이상 의도와 취지를 내세워 이 신문을 구독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는 국면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연대의 정신이 사라진 땅 위에서 우리 모두 과연 무사할까. 과정이 아닌 결과를 평가하는 언어로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그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하여 이제와 돌이킬 수는 없다. 이 게임을 한겨레가 먼저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분명히 있다. 남는 문제가 있다. 좋은 언론을 기대하고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언론은 무엇인가. 좋은 언론은 ‘우리끼리’ 모여 또 하나 만들면 생겨나는 것인가. 언론이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고자 할 때, 무엇에 대해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정치적 상품에 대한 정치적 항의를 하는 정치적 소비자가 그에 대한 답도 함께 제기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겨레에 남겨진 화두는 더욱 중대하다. 스스로 좋은 언론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핍박받으며 외롭게 지냈으며 스스로 성취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다시 오는 와중에도 줄기차게 이 자리를 지켰다는 자기 연민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거 혹시, 오만함 아닌가. 20여년의 역정을 충분히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피해의식은 아닌가. 그래도 좋을 만큼 충분히 현명한가. 그렇게 내놓는 상품은 충분히 지혜로운가. 어정쩡하게 정치에 발을 걸치고, 정치적 언어를 쏟아내면서, 정치적 비판은 그저 귀찮기만 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종류의 정치는 도대체 어디다 써먹을 작정인가. 진정한 자기정립없이 극좌로부터 극우에 이르는 저 정치적 독자들에게 이 신문을 봐야 하는 이유를 뭐라 설명할 것인가. 그런 정치 시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또 그 대안은 충분히 마련했는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면, ‘관장사 직설’에 대한 한겨레의 1면 사과문은 좀 더 멋있었을 것이다. 내가 꿈꾸는 한겨레는 노무현 정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사회·경제구조를 저잣거리 필부들의 언어로 말하는 언론이다. ’관장사 직설’ 파문은 그 필요성을 더 절절히 깨닫게 했다. 정말이지 민주당·국참당·진보정당에 속박당하지 않고, 시비 잡힐 멍청한 짓 하지 않고, 권력·정당·시장으로부터 판판이 배신당하는 시민들에게 꼬박꼬박 읽혀 그 삶에 행복이 되는 그런 언론이 필요하다. 내 책상 옆에는 ‘근조’라고 적힌 검정 리본이 2년째 매달려 있다. 이승만·박정희·김대중·노무현·김일성·김정일에 이르기까지 거리낌 없는 정치언어를 열정적이면서도 유쾌하고 친근하게 시민들과 나누는 언론을 만들자고, 2년 전 추모 대열에 줄지어 서있을 때 결심했다. 그는 나의 꿈에 박수를 쳐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추모하는 방식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25 | 추천: 1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 소장 (Dr. Mahdi Abdul Hadi, PASSIA) http://www.passia.org 이번주 수요산책은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이 보내온 기고문을 홍미정 교수가 전해왔습니다. 이 기고문의 번역을 위해 홍미정 교수와 자원활동가이신 양경진씨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간접 협상(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직접 협상이 아닌, 미국을 중개자로 한 미국과 팔레스타인, 미국과 이스라엘 간의 협상)이 5월 하순에 시작되었다. 이 협상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세력들의 내 외부의 정치적 역학관계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 한쪽은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이고 다른 한쪽은 미국과 유럽 연합, 그리고 아랍 국가들이다. 먼저 미국의 현 정책은 세 개의 층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을 하나의 중동 국가로서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이스라엘의 안보를 유지하고자 하는 미국과 유럽의 확고부동한 노력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에게 공식적으로 합법성을 부여하고 승인하는 것은 평화 과정을 살리는 길이다. 두 번째 층위는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가 주도하는 비종교적 운동인 파타(Fateh)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흐무드 압바스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대표하여 협정을 체결하거나 협상을 하도록 공식적으로 지정된 인물이다. 마지막 층위는 워싱턴 의사일정에 관계된 것으로 이는 “이스라엘을 바꿀 수 없다면 네타냐후(Netanyahu)를 바꾸겠다”는 목표에 따라,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의 우파 연합 정부를 흔들기 위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궁극적 해결을 위한 전략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네타냐후의 자만과 오만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권력에 대한 네타냐후의 비현실적 착각은 미국 내 유대인 압력 단체의 후원, 이스라엘 군사력 형성에 관여하는 유대인 장교수의 증가, 웨스트 뱅크(West Bank)에 있는 50만 명의 이스라엘 점령민, 이스라엘 국회 내 야당 세력(카디마와 노동당 모두에 해당)의 약화 등에 의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석유 확보나 알카에다, 탈레반 테러 대항이라는 측면에서, 중동 내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미국은 이슬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미해결 상태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기회로 삼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 해당 지역에서 복무 중인 미 장교들은 미국이 시리아, 레바논, 이란과의 공식 외교를 통해서 개입해야 하며, 이 간접 회담에서 유대교 압력단체 및 이란을 공격하려는 네타냐후의 욕망, 그리고 아랍 정권의 안정 및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점 간에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 분쟁에 개입하는 두 번째 세력은 마흐무드 압바스의 주도하에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다. 이들은 간접 협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수확이 있으며 첫째,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수인 하마스(Hamas)를 고립시키는 것이다. 둘째, 이 간접 협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리적, 사상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한 마흐무드 압바스의 권력이 가질 정당성과 발언권을 유지시켜줄 것이다. 셋째, 팔레스타인인들은 1967년 경계 내에서 두 국가 해결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총리 살람 파야드(Salam Fayyad)의 의사일정을 지지하는 유럽 후원자들을 계속 확보함으로써, 교육기관을 짓고 웨스트 뱅크의 정치적 경제적 진공상태를 메우려는 파야드의 의사일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간접 협상의 세 번째 주요 세력은 이스라엘로, 총리 네타냐후가 자신의 강경 정책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며 워싱턴의 의사일정에 정면 대항을 불사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하다. 네타냐후가 내건 강경 정책은 다음과 같다. a. ‘통합된 예루살렘’ 내 건설 중지를 반대한다. b. 웨스트 뱅크에 점령촌 확장 중지를 반대한다. c. 1967 경계로 철수, 특히 요르단 계곡으로부터의 철수에 반대한다. d. 가자 지구 포위 제거를 반대한다. 그러나 미국 특사 조지 미첼(George Mitchell)은 정치적 영향력과 압력을 사용하여 네타냐후를 설득하려 계속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이스라엘 여론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정치 영역에서 일부 온건파에게 영향력을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간접 협상은 영토 교환, 웨스트 뱅크의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 분리를 위한 나토 병력의 배치, 이집트 주도하에 있는 아랍 군대를 가자로 투입해서 팔레스타인 안보 개혁과 파타와 하마스간 화해를 감독하는 방안 등 전환기 국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위와 같은 협상의 목적은 무엇인가? 팔레스타인 측은 이 첫 번째 협상은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첫째는 1967 경계선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이후의 안보에 대한 것이다.   Mahdi Abdul Hadi (PSSIA 소장, 팔레스타인 국제문제 연구소장, http://www.passia.org/) 국경 문제에 관련해 미국, 유럽연합, 아랍 국가들과 팔레스타인(Fateh와 Hamas 모두) 측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의견 조정을 위한 궁극적 방안은 1967의 전쟁 전 경계선, 즉 1949 휴전선에 기초한 ‘두 국가 해결’이라는 점이다. 반면, 네타냐후 정부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분리장벽을 국경으로 한 유대 국가 이스라엘을 승인하도록 선전한다. 이것은 미래의 팔레스타인 국가로부터 요르단 계곡(웨스트 뱅크의 26%에 해당)과 50만 명의 이스라엘 점령민들이 거주하는 점령촌을 제외시킬 것이다.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과 유럽 연합이 공통적으로 팔레스타인(웨스트 뱅크) 보안대 교육, 훈련, 재건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재원이 가자 지구의 안보 개혁과 화해를 진전시킬 수 있는지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관련된 다른 중요한 문제들은 이스라엘의 군사 점령을 종결시키고 이스라엘 점령촌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네타냐후가 팔레스타인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점령촌의 자연적 성장을 용인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협상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은 채로 단지 “경제적 평화(economic peace)”를 위해서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압바스 수반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점령촌 건설 사업과 군대를 통한 잔학 행위 (주민들의 체포 및 살인과 주거지 파괴)를 언급하며, 조지 미첼에게 현 상황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협상은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네타냐후는 미첼에게 자신은 미국에게 어느 것도 약속한 적이 없고, 어떤 문제에도 확신이나 보장을 한 적이 없으며 직접적인 협상이 없는 한, 그의 입장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함으로써 정치적 생존과 전략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다시 말해, 확실한 변화를 고대하는 팔레스타인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반면, 이 지역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미국 외교 및 정치적 군사적 존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 간접 협상은 해당 지역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즉 다마스쿠스와 텔아비브간의 언쟁,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군사 조치, 프랑스와 독일 외무장관이 헤즈볼라에 대한 시리아의 지지를 저지하려는 시도들, 폭발하기 전에 사전 예방 차원에서 행해지는 이집트 정보부장 오마르 술래이만(Omar Sulaiman)의 텔아비브 왕복 외교 등이 그것들이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과 인근 지역 문제에 대한 현 상황은 분쟁 해결이라기보다 위기 대처라고 표현할 수 있으나, 결국엔 피할 수 없는 것을 시기적으로 미루고 있을 뿐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346 | 추천: -1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역을 누군가 해야 한다면 이를 계층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부담할 때 우리는 정의롭다고 말한다. 이 일을 시민의 일부만이 부담해야 한다면 그들에게 보다 높은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고역의 대표가 군복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군복무 이행실태를 보면 평등하게 부담하지도 않고, 보수도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군대와 관련한 대중들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따라서 지난 10년간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권문제로서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복무에 관한 부정적인 밑바닥정서가 문제해결의 장애물이 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병역거부 지지자들은 모병제가 시행되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문제가 저절로 해소될 수 있다고 간단히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와 군대를 고려한다면 모병제는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모병제의 군대는 이른바 저소득층의 집단적인 작업장으로 전락하고, 모병제가 자칫 동의와 금전보수를 매개로 인권 침해적 군대관행을 정상화할 것이고, 때로는 모험주의세력의 도발적 사병집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군대에 혈육을 보낸 일반국민들의 집중적인 비판과 감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징병제가 군인의 인권보장이나 민주적 통제에 유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군인의 인권 보장, 군대에 대한 정치의 우위 즉, 민주적 통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널리 확산된 헌법적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가 한국사회에서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군인인권교육, 군과거사정리, 군의문사진상규명, 병영문화개선 작업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은 그 후 종적이 묘연해졌다. 최근까지 신자유주의적 경제 살리기에 앞장서는 빵굽는 군인, 인권과 담을 쌓는 불온도서반입금지와 새로운 이성교제규칙, 남북적대를 공식화하는 주적 개념 등을 통해 군대가 어수선함과 몽매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국가안보, 국익, 전쟁, 전쟁위협 앞에서는 이성이 아주 곧잘 멈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이다. 정부수립 이래로 박정희는 미국이 부당하게 시작한 월남전에 한국의 청년을 파병하였고, 최근에 노무현 정부도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기어코 파병하였다. 우리가 얻을 국익(달러수입, 경제적 지원, 복구사업기회, 석유, 동맹관계강화)이 침략전쟁에 가담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이라크 전쟁의 참여는 노무현 정부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남북 간의 적대적 분위기를 정치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천박함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5월 24일 오전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천안함 관련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6.2 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의 역풍을 맞았다'는 분석, '천안함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 나아가 '지난 김영삼 정부의 막바지처럼 대북 적대정책들이 임기의 종료일까지 발목을 잡을 것이다'는 예측이 신문지상에 도배되었다. 전쟁도 불사한다던 대통령은 금세 전쟁이 없을 것이라며 해외자본을 다독이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대체로 영리한 통상정책을 통해 적대국과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이를 '상업의 정신'이라고 표현하였다--이 우파정책의 진수라고 한다면, 남북화해의 물꼬를 튼 노태우 정부, 햇볕정책을 시행한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만이 진실로 한반도에서 우파정부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정부는 성격이 무엇일까? 무엇이든지 정치의 판돈으로 삼으려는 세력은 정치집단이 아니다. 보통의 국민들에게는 국민 개인의 전존재--그 안에는 자신과 가족, 군대 간 자식의 생명, 자신의 직장과 재산, 주식, 그리고 아름다운 아파트가 포함되어 있다--을 밑천 삼아 한판 뜨겠다고 겁박하는 모험주의 집단의 안보 착란증에 편승하여 얻을 이익은 더 이상 없다. 지난번에 아파트 값 올려주겠다는 것까지는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모험주의 세력들은 안보와 전쟁을 10억원치, 100억원치, 1조 원어치 식으로 펀드처럼 관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지난 9.11테러 이후 미국의 이라크 전쟁, 천안함 사태 이후 무모한 전쟁불사론을 보면서 전쟁의 정치를 다시 생각해보았다. 대의정치는 본질적으로 부와 권력, 석유와 표를 위하여 무엇이든 불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은 외부의 적들이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군대가 불가피한 제도라고 하더라도, 상비군제도를 폐지하고 민병제를 확립하자는 생각이다. 단순히 누구나 전쟁 앞에서 공평하게 죽을 기회를 제공하자는 물귀신 작전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쟁과 평화의 결정을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말단의 병들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전쟁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관철시키자는 것이다. 서울광장은 넓고, 지하철망은 잘 발달되어 있다. 전쟁을 통해 죽을 일이 별로 없는 정치인들, 전쟁지휘관들, 전쟁에서 돌아온 호전적인 잔소리꾼들, 심지어 군대도 안간 아저씨들이 계속 전쟁을 운운하고 결정하는 정치(대의제도)가 지속되는 한 세상의 민중들은 끝없이 전쟁노동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민병제는 남의 아들의 목숨을 대가로, 전쟁 위기를 판돈으로 삼는 엘리트 적대정치를 직접적으로 근절하는 방법이다. 상비군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영구평화의 첩경이라는 철학자 칸트나 민병대를 주창한 버지니아 권리선언이 요즘처럼 분명하게 이해된 때가 없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96 | 추천: 0
육영수/ 중앙대 역사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 이번 학기에는 벨기에 루뱅(Leuven) 대학으로 매주 한 차례 출장강의를 다니는 것 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필자가 체류하는 네덜란드를 떠나 다른 나라들을 여행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유럽공동체(EU)에 속한 나라 국민들은 마치 이웃집 방문하듯이 서로 자유롭게 왕래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도버 해협 해저터널로 영국을 오가는 경우 등), 국경지점의 길을 막고 출입국 검사와 패스포트에 확인도장을 찍는 귀찮고 권위적인 절차 없이 '딴 나라'를 왕래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는 분명히 낯설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젊은 세대들은 당연히 알고 있는 상식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떤다고 흉볼지도 모르겠지만, 필자가 느끼는 놀라움과 부러움에는 나름의 까닭이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이 여권을 발급받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특권은 공무원과 유학생 등의 일부에게만 허용이 되었었다. 나라 바깥나들이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나들기는 또 얼마나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어려운가. 캐나다에 놀러갔다가 미국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는 미국 유학생 이야기, 딴 나라 국경선 너머로 무심코(?) 한 걸음 내 딛었다가 억류되어 국제뉴스거리가 된 철없는 모험가들, 목숨 걸고 멕시코 국경과 카리브 해를 건너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위험한 일상은 현재진행형이다. EU 국가들 사이의 자유통행에 관한 필자의 유난스런 과잉반응은, 아마도, 내가 '분단시대'가 잉태했던 망탈리테(mentalité, 집단적 정신자세)의 포로였다는 부끄러운 고백에 다름이 아니리라. 주지하듯이, 베를린장벽 붕괴이후 공산권을 지칭했던 철/죽/의 장막 같은 냉전개념들은 이제는 낡은 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남북한은 비무장지대(DMZ)라는 국경선 아닌 국경선 혹은 '비 경계선(non-border)'을 사이에 두고 오늘도 첨예하게 대처하고 있다. 한반도의 허리를 날카로운 경계선 삼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시장경제와 사회통제, 냉전과 세계화라는 대조적인 가치관과 이데올로기가 갈등, 경쟁,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단순히 정치지리상으로만 분리된 남북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강요 혹은 동반하는 편협한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적 올바름에 갇혀버린 '장기적 분단시대'의 산물이자 증인이다. 이미 반세기가 넘게 지속되는 분단시대가 나를 포함한 동시대인들에게 주입하여 숙성시킨 대표적인 시대정신 중의 하나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경계를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경구로 요약된다. '동백림 사건',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미(비)전향 장기수, 탈북자/새터민 등으로 표상되는 일련의 사건과 이슈들은 금지된 국경선과 사상적 틈바구니를 넘나드는 것은 자기 파괴적이며 동시에 반국가·반민족적인 행위라고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경고하고 훈육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쉽게 말하자면, "분단시대가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전문용어로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심어놓은 '내 마음 속의 국경선'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화려한 깃발에 발맞춰 지구촌의 구석구석을 관광, 시찰, 방랑하고 있는 선후배님과 동료 그리고 젊은이들이여. 몸은 국경바깥의 이국적인 골목을 헤매지만 그대가 지참한 세상읽기의 렌즈는 분단시대의 흑백논리로 혹시 때 묻고 얼룩지지 않았는가. (증명)사진에 포착되는 멋진 건물과 맛있는 음식, 다른 피부색깔의 남녀를 우리 편과 나쁜 편, 문명적 서양과 야만적 동양,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호전적인 이슬람과 사랑의 기독교, 혹은 도회적 청결함과 시골적인 남루함 등이라는 (교육된!) 엉터리 이중 잣대를 적용하여 평가하고 감상하지 않으시길.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정녕 붕괴시켜야 할 경계선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지리적인 국경(선)만이 아니다. 특정한 정치문화적인 색깔과 세계관으로 오염된 내 마음 속의 국경선이야말로 진정한 소통과 상호이해를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건방진 학문용어를 빌려 다시 강조하자면, 이런 성격을 갖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국경선 즉 '메타-경계선'(meta-border, Michel Foucher/2007)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질서와 평화의 도래를 위해 우리가 힘써 허물어야할 공동의 장벽인 것이다. 메타국경 혹은 내 마음 속의 국경선을 과감하게 뛰어넘지 못한다면 역사는 (희극적으로?) 되풀이 된다는 점을 결론삼아 덧붙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마음속에 그어진 국경선을 발판삼아 고전적인 '냉전의 추억'과 폭력적인 흑백논리가 과거로부터 부활하여 회귀(回歸)하는 것이다. 오호라, 시대착오적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지난 1-2년 사이 한반도라는 이름의 메타-경계선 내부에서 전개되는 시대상황에 대한 필자의 관찰과 우려가 삼류 역사가의 괜한 헛발질로 마감되길 바랄 뿐이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5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