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강좌

이원삼/ 선문대 신학부 교수 우리가 이슬람을 이야기 할 때 제일 먼저 화두가 되는 것은 ‘일부다처제’나 ‘히잡’으로 대변되는 여성 억압의 문화이다. 오늘은 이슬람의 여성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는 이슬람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을 상징하는 제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부다처제가 우리에게 인식된 것만큼 부조리한 제도라면, 과연 그 제도가 현재까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일부다처제가 존재하는 일부 아랍권에서 여성이 국가의 수상까지 역임 하는 등 활발한 사회진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과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가 이슬람 사회에 대해 가진 시각과 실제 이슬람권 국가의 현실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간을 통해 이슬람의 여성과 제도에 대해 편견으로 점철된 우리의 시각을 탈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성에 대한 이슬람의 관점 이슬람법(샤리아)은 여성의 문제에 대해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첫 번째 시각은 동등론이다.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사회이고, 실정법의 개념에 도덕과 예절론의 개념까지 포함된 ‘샤리아(이슬람법)’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다시 말해 이슬람의 법은 종교적 이념의 형태로 생활 관습화되어 무슬림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유교가 한국인의 사상을 규정짓는 행동규범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샤리아가 지배하는 이슬람에서는 남녀평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남자는 여자의 옷이고 여자는 남자의 옷이다”라는 꾸란의 구절이 증명하듯, 이슬람은 여성과 남성을 상호보완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슬람의 모든 면에서 남자와 여자는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예를 들면 상속권의 인정이 그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상속권이 인정된 것은 불과 10년 밖에 되지 않지만, 이슬람에서는 1,400년 전에 이미 제도적으로 여성에게 재산 상속권이 주어진다. 상속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경제력의 독립’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 남녀평등을 위한 제도적 밑받침이 이룩되었음을 상징한다. 서구의 경우에도 19세기에야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으므로, 이슬람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보려는 노력이 비교적 일찍 이루어졌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이슬람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는 이원삼 교수 두 번째 시각은 유별론이다. 이슬람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엄연한 신체적 차이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서로 같다고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본다. 모든 면에서 남녀가 평등하기는 하지만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하여 이슬람 율법에서는 여성에 대한 배려를 명문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생리기간 중에는 종교적 의무가 면제되며, 남녀가 상속권을 가진다는 측면에서는 동등하지만 상속액에서는 차이가 있다. 남자가 상속분의 ‘1’을 받는다면 여자는‘1/2’을 받는 것이 그것인데, 이는 어떻게 보면 여성에게 매우 불평등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자가 받는 ‘1’에는 남자가 지닌 가족 부양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고(남성은 이를 어길시 처벌을 받는다), 부양의 의무가 없는 여자는 ‘1/2’ 전부를 여자의 몫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유별론에 근거한 평등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예배를 볼 때 남자가 앞에, 여자는 뒤에 오게 되는데 이 역시 신체적 크기에서 차이가 나는 남성과 여성을 고려하여 예배시의 편리함과 윤리성을 얻으려는 합리적인 제도이다. 결국 이슬람의 많은 제도들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에 근거하여 여성에 대해 충분히 배려하는 제도들인 것이다. 세 번째 시각은 보호론이다. 이슬람의 보호론이란 여성이 남성에게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보호론을 대변하는 제도가 바로 ‘일부다처제’이다. 일부다처제가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을 옹호한다는 서구의 시각과는 달리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보장책에 속한다. 원래의 이슬람교는 1부 1처제였으나, 특별한 상황에서는 능력이 있는 남성에 한해 4명의 부인까지 얻을 수 있게 하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한다. 그 특별한 상황이란 다음과 같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일부다처제 먼저 전쟁 시에 일부다처제가 허용된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족 부양의 의무가 있는 많은 젊은 남성들이 죽임을 당한다. 그로 인해 수많은 과부들과 전쟁고아들이 생겨나고 그 여성들은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 이 때, 여성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은 결혼을 통해 능력 있는 남성의 새 부인이 되는 것이다. 능력 있는 남성들이 과부와 그 아이들을 거두어 부양의 의무를 지는 것이다. 새로 들어 온 부인은 우리나라의 ‘첩’의 개념이 아니라, 그 전 부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꾸란에 규정되어 있다. 즉, 전쟁이라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로서 일부다처제가 시행되는 것이다. 일부다처제의 두 번째 기능은 성범죄의 방지이다. 이슬람 사회에서는 유일신 사상을 훼손하는 죄와 성범죄에 대해 가장 큰 처벌을 내리고 있다.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목이 잘리는 등의 극형에 처해진다.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성매매나 성폭력 등의 성범죄로 여성이 받게 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슬람 사회는 꾸란에서 규정한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 제2, 제3의 성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다.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이 있는 가정의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부부끼리 화목하게 사는 것이나 자신의 혈육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존중하여 일부다처제의 제도를 통해 후손을 이어갈 수 있다. 이슬람은 그 역사에 비해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확산의 속도를 가진 종교이다. 이러한 빠른 확산의 밑바탕에도 일부다처제가 있었다. 이슬람 남성이 다처(多妻)를 거느리고 무슬림이 아닌 여성들과 그 후손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킴에 따라 이슬람교가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부다처에 대한 욕망은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다. 남성들이 일부다처제를 통해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측면은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남성들이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라는 제도가 부각되면서 서구에 의해 여성을 억압하는 제도로 인식된 것이다. 아울러 최근에는 시대상황이 변한만큼 일부다처제를 없애려는 이슬람권의 노력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터키와 튀니지, 모로코 등지에서는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있으며,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아랍권에서도 꾸란에서 규정한 최대 인원인 4명 보다는 3명을, 3명 보다는 2명, 2명 보다는 1명을 장려한다. 이슬람법으로 일부다처제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샤리아로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면 일부다처제를 거의 금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개혁의 주체로 등장한 이슬람의 여성들 이렇듯 시대적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이슬람법에도 현대적 해석이 이루어져, 점차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쪽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쿠웨이트에서는 여성 장관이 선출되었고, 카타르에서는 왕비가 히잡을 벗고 대중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있기도 했다. 여성의 입지가 점차 변화함에 따라 이슬람권 전체의 문화도 여성의 권익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아랍권의 이혼율 급증 현상은 이슬람 여성들의 강화된 입지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이슬람 여성이 두르는 ‘히잡’ 또한 모래 바람이 강한 아랍의 기후적 환경에 의한 방어적 복장에 불과할 뿐 이슬람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는 불합리한 전통은 될 수 없다. 히잡을 억압의 기제로 바라보기 보다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전통 의상의 하나로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것이다. 이렇듯 이슬람의 다양한 제도들은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측면을 많이 보이고 있으며, 나아가 이슬람권에서 여성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혁의 주체로 등장하는 밑받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동안 이슬람과 이슬람 여성에 대해 지녔던 시각들은 이슬람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편협한 사고의 결과였다. 실제 이슬람의 여성들은 왜곡된 모습으로 비춰진 것과는 달리, 이슬람 세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개혁의 주체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정리 - 장미은(인권연대 인턴 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285 | 추천: 0
  신양섭 / 이슬람 문화연구소 부소장 과연 이슬람에도 예술이 존재하는가? 이슬람의 예술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이는 우리가 이슬람 문화를 가까이서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슬람의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오늘은 이슬람 예술의 특징과 그 형성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슬람 예술의 전파 무함마드는 630년에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100년도 채 되지 않아 안달루시아 지방의 스페인까지 점령하며 이슬람의 위세를 떨친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있는 알 함브라 궁전은 과거 번성했던 이슬람 왕국 영광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슬람군은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며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하게 되고, 역시 실크로드를 차지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당나라와 충돌한다. 이 전투가 바로 팔라스 전쟁(751)이다. 팔라스전쟁은 세계사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지만, 이슬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이다. 팔라스 전쟁 이전에는 중앙아시아가 중국의 영향 아래에 있었지만, 이 전쟁에서 이슬람군이 승리한 후에는 중앙아시아가 이슬람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당나라군의 상당수가 이슬람군의 포로로 잡혀 바그다드로 끌려가게 된다. 이 포로들 중의 대다수가 제지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로 인해 중동 아랍 지역에 종이가 전파된다. 제지술이 전파되기 전 중동 지방에서는 양피지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종이가 전파됨으로써 아랍인들은 마음껏 학문 활동을 하고 후대에 엄청난 과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9세기부터 13세기의 바그다드는 '이슬람의 황금시대(golden age of Islam)'라고 불리며 예술적, 과학적으로 엄청난 문화적 번성을 이룩한다. 아랍인들은 몇 백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제지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 또한 놀라운 문명사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서구 문명에 의해 이슬람의 문명사를 잘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원류는 이슬람 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당수의 과학 용어(알콜, 알칼리... 등)는 아랍어에서 기원한 것이고 위대한 수학자 Al-kharazme는 'algorism'과 'algebra'의 어원이 되었다. 또한 그는 수 체계에서 ‘0(zero)’을 처음으로 밝혀내, 수의 세계를 무한히 확장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문화들 중에서도 이슬람과 연관된 것들이 많은데 과학의 분야에서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이슬람에서는 역법(천문학)이 발달했는데, 음력을 사용하는 이슬람의 회력(혹은 회력법)을 중국 명나라에서 발전시켜서 ‘대명력’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대명력을 그대로 사용해오다가, 세종대왕 때 조금 수정을 가해 ‘칠정산내법’을 만들어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슬람의 문화는 아시아와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순히 영향을 끼친 정도가 아니라, 타 문화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될 초석을 만든 문화적 원류인 것이다. 이는 이슬람 문화가 중동 아랍 지방에만 한정된 것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깨는 것이다. 이슬람 예술의 다양성과 보편성 이제 이슬람 예술의 특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슬람 예술은 다양성과 보편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슬람 예술은 아랍 민족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아랍족(중동 및 북아프리카), 이란족(이란 및 중앙아시아), 투르크족(터키 및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주변 민족을 포섭하면서 다양성을 지니게 된다. 특히 이란족은 대단히 예술적인 민족으로 아랍 문화를 꽃피우고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바로 이란족이다. 이란족이 이룩해 놓은 화려한 아랍문화를 무력으로 보호하고 지켜준 것은 바로 투르크족이다. 이렇듯 중동의 주변 국가들은 그들의 독특한 민족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당당히 이슬람권의 한 민족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로써 이슬람문화가 다양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 문화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역 어느 민족에게서나 발견되는 전체적인 보편성도 존재한다. 먼저 이슬람 교리의 규범성은 어느 민족이나 할 것 없이 모든 무슬림들의 생활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 발생의 근원지인 중동지역은 모든 지역의 문화가 교차되는 지점으로, 문화의 확산에 매우 유리하다. 또 대부분 유목 생활을 하던 아랍인들은 그 특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이슬람의 문화를 타 지역으로 손쉽게 전파시켰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이슬람 문화가 보편성을 띠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다시 말해 이슬람의 문화는 이집트, 로마, 그리스, 기독교적 요소가 혼재된 비잔틴의 문화와 불교, 힌두교의 문화가 혼재된 인도 문화, 마지막으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조로아스터교의 문화가 혼재된 페르시아의 문화 등 세 문화권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이에 덧붙여 중국 문화의 영향까지 받아, 그야말로 이슬람 문화는 주변 문화에 대한 포용성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실용예술 중심의 이슬람 예술 이제 이슬람 예술의 몇 가지 특징적인 부분을 살펴보겠다. 이슬람에서는 회화 예술이 취약하다. 왜냐하면 인물화나 동물 그림 그리는 것을 우상 숭배로 간주해 금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에서는 건축이나 장식과 같은 실용 예술이 발달하였다. 실용 예술적인 측면에서 이슬람 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모스크(mosque)와 카펫이 있다. 모스크(mosque)는 “꿇어 엎드려 경배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아랍어 ‘마스지드(masjid)’가 영어로 변형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슬람 신자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장소가 바로 모스크이다. 모스크의 큰 특징은 돔(dome)과 첨탑(minaret)이다. 돔은 모스크 중앙의 둥근 지붕을 말하는 것으로 ‘평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흔히 돔의 끝은 초생달로 장식하는데, 이는 무함마드가 계시를 받을 때 초생달이 떠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초생달은 ‘진리의 시작’을 의미한다. 미나렛이란 모스크 외부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을 말한다. 미나렛은 예배를 알리는 소리인 ‘아잔(Adhan)'을 외치기 위한 것이자 이방인들로 하여금 모스크의 위치를 알기 쉽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 미나렛의 양식은 역사적으로 조금씩 다른데, 원뿔형, 원통형, 나선형, 사각형 등의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고, 모스크에 딸린 미나렛의 개수도 각각의 시기에 따라 1~6개 까지 다양하다. 돔과 미나렛 등이 있는 화려한 외부와는 달리 모스크의 내부는 단순한 편이다. 내부에는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으며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다. 하지만 내부에도 공통된 구조물들이 있는데 미흐랍(mihrab)과 민바르(minbar)가 그것이다. 미흐랍은 모스크 내부 사방의 벽면 중 한 벽면을 아치형으로 움푹 파놓은 것으로, 이 아치는 사우디의 메카(이슬람 신자들이 예배드리는 방향)를 가리킨다. 민바르란 미흐랍의 바로 옆에 있는 계단 형식의 설교대이다. 또한 이슬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예배 보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고 있는데, 대체로 1층과 2층으로 구분되거나, 예배당 한켠에 막을 쳐놓고 여성들이 예배보는 공간으로 삼는다. 앞서 말했듯이 이슬람에서는 인물이나 동물의 그림을 금지하기 때문에 예배당 내부 어디에서도 그림을 발견할 수 없다. 대신 꾸란의 구절을 아랍어로 장식하거나, 벽면을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데, 이것이 바로 아라베스크(arabesque)이다. 이러한 아라베스크 형식의 기하학적인 무늬는 아랍의 특산물로 여겨지는 ‘카펫’에서도 나타난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은 그들이 기르는 양의 털을 주요 재료로 하여, 수많은 기하학적인 무늬로 장식된 작은 카펫들을 제작했다. 그들에게 카펫은 단지 장식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쉽게 짐을 꾸리고 이동하기에 편리하도록 고안된 실용품이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유목민들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카펫의 직조기술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동 아랍지역을 비롯한 유럽에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유럽 사람들에게 카펫은 그 독특한 무늬로 인해 동양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한 예술품으로 각광 받았다. 그 중에서도 페르시아산 카펫과 터키의 카펫이 특히 유명하였고, 그 두 지역은 카펫의 무늬도 각기 달랐다.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에서는 꽃무늬가 많이 나타나고, 터키 및 중앙아시아산 카펫에서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많이 나타난다. 카펫은 무슬림들에게 있어 이슬람의 교리에 충실한 실용품이자 예술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실용성 속에서 예술성을 추구하려는 이슬람의 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리 - 장미은(인권연대 인턴 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272 | 추천: 0
손주영/ 한국외대 아랍어과 교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권’에 대해 서양에서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인본주의 사상에 기초해 인권을 사람의 권리,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시민의 권리로 보고 있다. 반면, 이슬람에서는 신본주의 사상에 입각해 사람을 하느님한테 봉사하는 존재로 본다. 그러므로 통치자나 시민이나 다 똑같은 하느님의 대리인으로 보고, 꾸란의 계시를 통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있다. 정교가 일치된 사회, 이슬람 기독교는 정교가 분리되어 있는 반면에 이슬람은 정교가 일치되어 있는 사회다. 다시 말해, 이슬람 세계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따로 구별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앙과 실천이 함께 하는 세계라고도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정신과 육체를 따로 나누어 보기 때문에 정신(sin)의 위반에 대해서는 현실의 법으로 벌하지 않는다. 대신, 육체(crime)의 위반은 법으로 엄중히 다스리는 편이다. –영미계에서 범죄를 의미하는 단어인 crime 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정신도 육체와 똑같이 중요시 하기 때문에 정신세계에도 현실의 법이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상숭배를 하지 말아라’ ‘예배를 잘 하라’ 등 정신적인 것까지도 지켜야 할 중요한 의무이고, 현실법의 적용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법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종교에 대한 신앙심과 일치한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법을 인위법(人爲法)으로 보고,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합리적 추구를 지향한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법이란 하늘에서 내린 계시로서 절대적인 천계법(天啓法)으로 여긴다. 종교적 가르침이 곧 현실의 법 이슬람에서 인권문제가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이슬람 종교의 가르침을 현실의 법에 적용하면서 생겨난 문제들이다. 따라서 이슬람에서의 인권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슬람의 법체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슬람 법의 법원은 크게 4개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첫 번째가 꾸란이다. 따라서 꾸란 속에 명시된 계율 중에서 ‘~하지 말라’ 형식으로 씌어진 문언은 일차적인 법원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다. 두 번째로는, 순나를 들 수 있는데 이는 관행과 관습이 수 천년을 거치면서 굳어진 것으로 전통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더불어, 예언자 모하메드가 말하고 행동했던 기록을 하디스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모범 삼아 행동해오고 있고, 그리하여 이제는 관습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적 합의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법원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 꼭 해야만 하는 의무(와집) ∆ 금지하는 것(하람) ∆ 금지된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 되도록 하기를 권장한다. ∆ 기타(자이즈) 이렇게 5가지로 나누어 유추해석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법원을 근거로 이슬람의 법은 가장 개방적 법체계인 하나피, 말라키, ‘하디스만이 순니’라고 믿는 샤피아, 그리고 가장 경직된 한발리 등 여러 학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발리 학파로 갈수록 법 적용에 있어 경직된 태도를 보인다. 예외를 일반화하는 잘못 말아야 우리가 이슬람에서의 인권을 이야기 할 때 주로 거론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법은 그 중에서도 꾸란에 써진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가장 경직된 법이다. 한 예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술을 나르는 것도 죄가 된다. 그러나 이는 일부 제한된 지역에서 행하여지는 것일 뿐, 모든 이슬람 지역에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코란에서 ‘강도죄를 범하는 자는 손을 잘라야 한다.’ 고 나와 있다고 하여 현실에서 진짜로 손을 자르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이를 ‘절도죄는 이성으로 중히 다스려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적용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의 형법과 비슷한 꾸란의 후두드 법을 보면, ‘간통을 하는 자, 태형 100대’를 받도록 씌어있다. 이에 대해 서구에서는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비판을 하는데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단 이슬람에서 간통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입증해 줄 증인을 4명이나 세워야 하고, 만약 그 사건이 무죄 판결이 나면 증인들은 무고죄로 중히 다스려지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쉽게 간통죄가 성립되기는 힘들다. 따라서 간통죄로 인해 태형 100대를 맞는 경우는 실제로 거의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가장 엄격한 법을 가졌다는 일부 지역, 즉 사우디아라비아나 탈레반에서만 어쩌다 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눈에 비춰지는 이슬람 세계란 것이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나 탈레반의 경우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사우디아라비아가 모든 이슬람 세계를 대변하는 것 같지만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더욱이 미국의 언론 및 모든 권력을 잡고 있는 유대인들이 이슬람 세계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우리 또한 이러한 시선을 통해 이슬람 세계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현재 이슬람 세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이슬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정치, 통치체제의 문제란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정리 - 정유진(인권연대 인턴 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153 | 추천: 0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 일본의 한국역사 왜곡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다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겸허한 존중과 이해야말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중요한 덕목이요 보편가치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미화하여 관계당사자들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진정한 교류와 선린을 막아 버린다면 그 민족은 후퇴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나타난 진실왜곡과 일본의 일부 우파 지성인들의 역사인식을 문제 삼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우리의 요구가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자신도 다른 역사와 문화에 대해 어떤 편견과 왜곡된 지식에 사로잡혀 있지나 않은지 면밀히 검토해 고쳐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평생 동안 그들의 사고와 가치체계의 절대적 판단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교과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중학교 1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중학교 사회 1』 교과서는 우리 아이들이 처음으로 외국 문화에 역사에 대해 접하는 귀중한 시기이다. 이 때 체득한 지식은 평생 동안 그들의 인식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과서를 제대로 기술하고, 우리의 입장에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작업은 결국 글로벌 시대에 국제경쟁력을 높이고, 우리 민족의 역량을 배가시키는 기초 작업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학교 사회 1』 4종과 고등학교 『세계사』 7종을 분석해보았다. 『중학교 사회 1』에서는 한국의 지리와 세계지리, 그리고 근세이전 세계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다. 고등학교 『세계사』는 세계역사를 시대와 지역별로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중학교 사회는 종래 교육개발원 주관으로 전문가 그룹에 의해 집필된 것을 교육부에서 발행했으나, 2001년부터 모든 개인이 집필하여 교육부의 검인을 받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한국 교과서에 나타난 이슬람 왜곡은 오히려 7차 교육과정에 들어서면서 더 심해졌다. 분석한 교과서는 다음과 같다. 『중학교 사회 1』 6종 고등학교『세계사』 7종 1) 도서출판 디딤돌 2) 지학사 3) 중앙교육진흥연구소 4) 동화사 5) 금성출판사 6) 고려출판 1)교학사 2)금성출판사 3)성지문화사 4)보진재 5)천재교육 6)지학사 7)노벨문화사   온통 왜곡 투성이 새로 개편된 중학교 사회 1은 우선 그 편집과 판형, 구성 등에서 놀라운 변화를 주었다. 칼라와 다양한 학습기법, 아기자기한 학습동기부여 등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적어도 외관과 구성에 있어서는 그렇다. 그럼에도 질적인 측면과 내용면에서 같은 평가를 내리기에는 주저하게 된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사회 교과서와 세계사의 경우, 이슬람과 이슬람 세계묘사에 있어서 적지 않은 오류와 왜곡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미 바르게 고쳐져서 그 개념이 확연히 정착된 용어조차 과거로 회기한듯한 인상을 준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면, 먼저 ‘알라신’이라는 표기의 문제다. 유일신, 즉 하나님의 아랍어 표기에 불과한 알라(Allah)가 중학교 교과서에 다시 알라신으로 둔갑하여 등장하였다. 이 용어는 이미 5차 교과서 개편(1989년)으로 유일신 알라, 또는 일부 교과서에서 하나님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이슬람문화에 대한 무지의 극을 보여주는 ‘알라신’이라는 용어가 신교과서 일부 내용에서 일제히 재등장하였다. 이는 알라를 ‘신신’이라고 표기하는 것과 같다. 물론 ‘알라신’ 이라는 표현은 1995년도 판을 사용하고 있는 고등학교 세계사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다음으로 새로 개편된 2종 중학교 사회에서 무함마드(마호메트)의 사진이 일제히 재등장한 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이슬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기 때문에 인물화나 동물화를 그리지 않는다. 특히 예언자인 무함마드(마호메트)의 얼굴을 그리는 것을 최대의 신성모독으로 여긴다. 그런데도 일부 중학교 사회1 신교과서에서 칼라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는 무함마드의 모습을 실었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는 이미 1995년부터 설교하는 무함마드란 제목으로 이란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실려 있었지만, 중학교 교과서에는 6차 교과서 집필(1995년 교과서)과정에서 충분한 논의가 있었고, 외교적 관례와 이슬람에 대한 신성모독을 의미하는 사진을 굳이 교과서에 실을 필요성이 없다는 이유로 전면 삭제되었던 바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나, 특별한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집필자의 무지와 비전문가적 소양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이슬람권이 모르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진 않지만 자칫 외교마찰을 야기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또 ‘페르시아만’이란 표기도 잘못 됐다. 페르시아만이라는 명칭은 과거 페르시아제국을 이룩한 이란만 사용하고 있을 뿐 아랍연맹에 가입해 있는 22개국은 모두 ‘아랍만’이라고 사용한다. 미국조차 1991년부터 중도적 의미로 걸프해라고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가 페르시아만을 고집하는 것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다를 바 없다. 독도문제, 동북공정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우리부터 되돌아볼 문제다. 이는 이슬람 지리와 역사 용어의 불일치도 마찬가지 문제다. 그 외에도 지엽적인 오류와 왜곡이 수없이 발견된다. 가령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설립년도를 1960년이 아닌 1957년으로 기술한 점, 이스라엘의 독립일을 1948년이 아닌 1984년으로, 캠프 데이비드 중동 평화회담을 1979년이 아닌 1976년으로 본 점 등이다. 특히 이슬람 종교의례와 문화를 설명하는 부분은 현지 경험의 부족과 의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기술하는 과정에서 상식적이고 초보적인 사실조차 이해하기 어렵게 모호하게 묘사되거나 본질과 다른 설명을 붙이고 있다. 예배를 하루 다섯 번 반드시 모스크에 가서 보아야 한다든지, 예배할 때 엎드려 손을 위로 높이 치켜드는 사진을 실었다든지, 부정확한 성지순례의 묘사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부터 교과서의 왜곡 바로 잡아야 교과서에 나타난 이슬람에 대한 소개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 천편일률적으로 동원되던 이슬람의 호전성과 ‘한 손에 칼, 한 손의 코란’이라는 개념은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이슬람의 평화적인 전파와 공납감면을 통한 종교세력의 확대, 타문화와 타종교에 대한 관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아직도 기성세대와 일부 언론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는 회교, 회회교, 회교도란 용어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는 이슬람교, 이슬람교도 등으로 바뀌어 통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많이 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우선 집필자가 과거에 익숙한 표현과 지식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고 범한 것으로 보이는 오류가 많아 보이는데, 이는 해당분양의 전문가가 배제됨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교과서 검증에 철저한 전문가 그룹의 검증과 사전 참여가 요망된다. 또 즉시 교과서에 대한 엄밀한 분석 작업과 수정작업이 진행되어 한다. 무엇보다도 최소인원일지라도 각 지역 역사와 문화전문가 및 일선교사가 포함된 검수위원회를 통해 잘못된 내용을 분석하고, 가장 바람직한 서술 초안까지를 제안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곳으로 남아 있는 인도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분야까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교과서의 타문화 왜곡과 오류에 대한 수정 및 재집필 작업에 착수함으로써 앞으로 예상되는 이슬람권에서의 수정요구나 외교적 항의에 대한 충분한 명분을 가질 수 있고, 일본과 중국 등 한국역사 왜곡에 대해 지금보다 떳떳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정리 - 허창영(인권연대 간사)
2017-08-08 | hrights | 조회: 229 | 추천: -1
  황병하/ 조선대 아랍어과 연구교수 이슬람은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동한 이후 대외 정복 활동을 통해 약 10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만약 이슬람이 무력으로 타 세계를 정복하고 강제력으로 종교를 포교했다면, 현재 이슬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나라에 여전히 이슬람교(이슬람 문화)가 남아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흔히 ‘평등의 종교’라고 일컬어지는 이슬람이 과연 정말 평등한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이슬람 사회의 구성 과거 이슬람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네 가지 계급이었다.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원래의 아랍인 무슬림, 이슬람의 정복지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아랍인 무슬림, 그리고 이슬람의 정복지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세금을 지불하며 이슬람의 보호를 받는 비무슬림 피보호민, 마지막으로 이슬람의 영토 확장으로 인한 경제적 효용성을 꾀하기 위해 데려온 흑인과 백인 노예가 그것이다. 노예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유민에 속한다. 혹자는 자유, 남자, 무슬림이 이슬람에서 가장 기득권을 누린다고 말하는데, 이처럼 이슬람 사회에서도 공인된 3가지의 불평등 관계가 존재한다. 주인과 노예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 중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는 종교적 선택에 달린 것으로 개인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극복 가능하다. 여기에서 이슬람이 가진 종교의 자유성을 살펴볼 수 있다.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고찰 해보자. 과거로부터 이어온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는 각각의 시기별로 관용과 불관용의 정신이 혼재 된 채 이어져 왔다. 또한 이슬람은 다민족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형성된 다문화권으로,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유대인, 레반트인, 유럽인 등 민족적으로 소수 집단을 가진다. 그리고 기독교인, 유대교인, 조로아스터교인, 콥트교인 등 종교적 소수집단도 있고, 시아파, 두르즈파, 알라위파, 바하이, 아흐마디야 등 종파적으로도 소수집단을 가진다. 이슬람은 이슬람의 보호를 받는 ‘평화의 지역(Dar al-Islam)’과 이슬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전쟁의 지역(Dar al-Harb)’을 구분한다.(여기서 전쟁의 지역이란 종교적으로 비이슬람권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분을 초월해서, 이슬람은 철저히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사실이다. “la ikraha fi-d-din(종교에 강요란 있을 수 없다 2:256 )”과 “akum dinukum wa liyya dini (너희에겐 너희의 종교가 나에겐 나의 종교가 있다)”라는 코란의 구절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또한 비이슬람권에서 이슬람 지역을 일시적으로 방문한 사람(musta'min)들 역시 이슬람에 의해 보호 받는다. 이제 이슬람의 소수민족 보호정책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딤미와 밀레트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슬람이 타종교에 대해 가진 관용성을 살펴보겠다. 이슬람의 소수민족 보호정책 - 딤미 딤미는 이슬람의 4계급 중 비무슬림 피보호민에 속하는 사람들로 이슬람의 보호아래 자신들의 종교적, 문화적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대체로 기독교인, 유대교인, 조로아스터교인 등이 이에 속하고, 딤미들은 이슬람의 보호를 받는 대신 지즈야(jizya)라는 인두세와 카라즈(kharaz)라는 토지세를 납부한다. 이들은 세금 납부의 대가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이슬람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다. 딤미는 Ahl al-Dhimma(계약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나왔으며,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인만큼 일정 부분 계급적 한계를 가진다. 먼저 딤미들은 이슬람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이슬람종교 의례와 관습을 존중해야 하며 모스크보다 큰 교회를 건설해서는 안 된다. 또한 대중적 종교의식이 금지되고 기독교인의 유대교 개종이 금지되며, 유대교인의 기독교 개종 금지와 함께 울라마(종교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종교적 한계를 갖는다. 정치적으로는 고위직을 얻는 것이 금지되고 공직에서 배제된다. 사회적으로는 의복과 모자에 특별한 표식을 해야 하고 노란 뱃지를 착용해야 하며 무슬림 여성과의 결혼도 금지된다.(하지만 무슬림 남성은 딤미 여성과 결혼이 가능하다.) 또한 직업선택의 자유가 제한되고 노예 소유가 제한되며, 무슬림이 지나갈 때는 몸을 낮추어야 한다. 경제적으로는 유산상속이 금지되고, 인두세를 납부하여야 하는 등의 한계가 있다. 무슬림들은 이러한 딤미들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코란은 기독교인에게 호감을 표시하는가 하면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는 유대인에 대해 미움과 증오를 표시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은 메디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무슬림과 직접적인 의견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유대교인은 역사적으로 무슬림과의 접촉이 잦아 많은 충돌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13세기 이후에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도 악화되어 유대인을 원숭이로, 기독교를 돼지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대체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들은 이슬람 종파들 중 시아파(비교적 강한 율법을 따르는 종파)의 관습이지 이슬람 전체의 관습은 아니다. 18세기 이후부터 딤미들의 위상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서구의 영향으로 딤미들의 경제적인 영향력이 확대되었으며 법적, 사회적으로 평등권이 부여되어 오스만 터키 말기에는 인두세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딤미에 대한 동등권과 평등권이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치적인 특권은 제한받는다. 딤미제도에 대한 연속선상에서, 19세기 이후 중동의 터키, 이집트, 레반트, 이란 등지에서 무슬림 대중과 서구 유럽 자본가 및 이슬람 정부 사이의 중간 역할을 담당했던 비무슬림들이 있는데 이들을 ‘밀레트’라고 한다. 이슬람의 소수민족 보호정책 - 밀레트 밀레트는 무역상인, 금융업자, 중계인, 유럽수입업자와 아랍지역 생산업자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였고 자유전문직 종사자, 의사, 역사가, 기술자, 건축가, 변호사, 주식 중계인 등의 직업을 가진다.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대인, 러시아인, 터키인 레반트인, 기독교인 등을 밀레트라고 할 수 있는데, 밀레트는 씨족 중심의 단결력을 바탕으로 경제를 활성화 시키고, 같은 종교 소유자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통해 종교적 협력을 이룬다. 즉, 동일 인종이나 종교를 가진 외부 세력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밀레트들은 무역 이득으로 부동산 구입 및 은행업을 도맡아 이슬람 지역의 경제권을 장악하였고 종교적, 문화적으로 자유를 누렸으며, 이들은 18세기 19세기를 거쳐 터키와 이집트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밀레트의 경제적 역할이 확대된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군대, 종교, 정치 부분으로의 진출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연히 무역, 사업, 전문직으로 밀레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소수 민족으로서 그들이 가진 부족 중심의 단결력 또한 밀레트 상호간의 경제적 협력을 가능케 하였다. 높은 교육수준을 발판으로 밀레트들은 전문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또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내륙 산업의 쇠퇴에 따라 항구 중심의 무역이 발달하게 되자, 밀레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역업에 집중하여 경제적 역할의 확대를 이룬 것이다. 밀레트가 이슬람 세계에서 과도한 경제적 이득과 성공을 쟁취하고 그들이 이슬람의 전통적 가치관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자, 무슬림들의 견제와 질시가 이어졌고 이에 따라 밀레트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교육의 광범위한 확대와 계몽주의가 확산됨에 따라 밀레트들이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전문직이 일반 무슬림들에게도 개방되었다. 1948년에는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4차례의 아랍-이스라엘 및 중동 전쟁이 발생했고, 국가 산업의 국유화 조치가 확산됨에 따라 밀레트들은 경제적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레바논의 경우에는 무슬림과 밀레트간의 내전이 확산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딤미와 밀레트의 변화는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상황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딤미와 밀레트 제도는 이슬람 문화가 가지는 관용성과 포용성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비록 정치적 제약이 가해지긴 했지만 딤미와 밀레트들은 종교적, 경제적, 문화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자치가 허용되는 등 공존과 자유, 화합을 추구하는 이슬람 문화의 특성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 - 장미은(인권연대 인턴 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264 | 추천: 0
  "한국=개고기 먹는 나라로 정의하면 좋겠어요?"(프레시안, 06.1.11) "지난해 10월 EBS에서 알라를 하나님으로 번역한 〈이슬람 문화 기행〉 다큐를 방송하자 모 기독교 단체에서의전화가 왔습니다. 하나님이란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시청자들이 대혼란에 빠진다며 '알라신'이라고 표시하지 않으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겠다더군요. 알라가 신이라는 뜻이니 알라신이라고 하면 '신신'이 되는데… 이건 결국 알라가 마치 아랍의 지역신인 양 여기는 서구적 시각이었죠." 10일 서울 동소문동 인권연대 교육센터에서는 40여 명 청중의 눈이 반짝이는 가운데 〈이슬람 세계의 이해〉라는 강좌의 강사로 나선 이희수 이슬람문화연구소장이 이야기 보따리를 펼치고 있었다. "알라신이라고 부르는 건 '신신'이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이 소장은 "기독교 단체의 흥분은 제가 '서울 양재동의 성경박물관에 가보시라. 세계 유수의 성서들이 모두 아랍 번역판에서 하나님(God)을 알라로 번역하고 있다'고 하자 겨우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슬람의 호전성을 상징하는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라는 말이 나온 배경도 설명했다. 이슬람이 등장한 시기는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이 300여 년 넘게 전쟁을 벌이던 6세기경으로, 당시 마호메트는 한창 횡행하던 약탈경제에서 정치적 질서를 회복해 가는 과정이었다는 것. 바로 그같은 과정을 가리켜 이 말이 나왔지만, 당시 마호메트가 제일 먼저 내세운 조세정책은 양민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다. 주민세(Jizya)와 토지세(Khara)를 합쳐봐야 수입의 20~25% 정도여서 무자비하게 약탈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슬람을 믿으면 세금감면의 '옵션'까지 주어졌는데, 당시 사람들이 어찌나 이를 선호했는지 이슬람이 세력을 한창 뻗어나갈 즈음엔 '조세수입 감소'를 우려해 '개종 금지' 정책까지 폈을 정도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한번 이슬람화된 지역은 지배세력이 바뀌어도 다 이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이 '인종청소'를 단행한 이베리아 반도만 제외하구요. 무력적인 전파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팔레스타인이 계속 버틸 수 있는 이유 이슬람 사회의 '부에 대한 인식'도 나왔다. 아랍인들의 부 관념은 "무한히 벌되, 네 가족의 몫을 제외하고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아랍 국가의 와까프(宗敎省)는 국민들이 내는 종교세(전체 수입의 2.5%)를 쓰는 부처로 대부분의 아랍 국가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처라고 한다. 이 돈으로 정부가 복지사업을 펼치는데, 이는 이슬람의 경제적 관습을 국가가 흡수한 것이다. "근대화로 이러한 관념이 좀 약화됐지만 이슬람에서는 여전히 '부(富)는 공동체가 만들어준 것'이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상부상조의 근거이기도 하죠. '마을에 한 톨의 양식이 남아 있는데 그 마을에 굶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을 주민 전체가 지옥으로 직행하리라'는 꾸란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공동체 전통입니다." 이 소장에 따르면, 분리장벽 설치 등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고립화 정책에 고통받으면서도 팔레스타인이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랍 국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흘러들어가는 보이지 않는 막대한 돈이 작용하고 있다. "공동체의식의 음지, 명예살인" 이슬람 사회의 '야만적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명예살인, 손목절단형, 간통죄 투석형, 참수형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소장은 '공동체의식의 역기능'이 바로 명예살인이라고 설명했다. 이슬람의 특징이라기보다 요르단, 터키 등 일부 유목민족의 관습인데, 명예살인이란 아버지 혹은 형제가 간통을 저지른 (혹은 그렇게 추정되는) 아내나 딸, 혹은 누이를 죽이는 것이다. "간통 혹은 성폭행이 벌어지면 '우리 공동체'에 흠집이 생겼다고 보는 인식 때문입니다. 그 흠결을 제거하고 그게 또 복수의 이유로 성립하는 건데 가문 간의 악순환이 벌이지죠. 그러나 요르단에서도 최근 '명예살인'을 치상죄가 아닌 살인죄로 재정의하는 등 인식이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태형이나 참수형은 여전히 사우디 등 일부 아랍지역에 남아 있지만 손목 절단형, 투석형 등은 근대화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이날 강의에 나선 이슬람 강사들은 특히 일부 부족, 권위적인 정부의 문제인 인권 문제를 결코 전체 이슬람의 문제로 보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가 '한국은 개고기 먹는 나라, 끝' 이렇게 정의되고 말면 개고기에 대한 찬성 여부와 상관없이 얼마나 불쾌하겠습니까?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쉽죠."
2017-08-08 | hrights | 조회: 132 | 추천: 0
  황병하/ 조선대 아랍어과 연구교수 57개국 14억의 인구가 속해 있는 이슬람은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다문화, 다인종, 다양성을 포용하는 종교•문화적인 개념이다. 이렇게 아랍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중동, 북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적 요소 등 다양한 문화를 한꺼번에 녹여서 이루어진 이슬람은 공존, 융화, 평화의 종교이다. 또한, ‘이슬람’이라는 단어 자체가 신에 대한 복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슬람역사 이전의 시기: 자힐리야 이슬람 역사 이전의 시기는 ‘자힐리야’, 즉 ‘무지의 시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이슬람이 곧 진리, 참이기 때문에 이슬람 이전의 상태를 무지한 상태라 보는 것이다. 이슬람이 등장하기 이전에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교리로 인해 로마세력과 갈등을 빚으며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로부터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이 등장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사상은 이슬람이 신에 대한 사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나타남에 따라 무질서하고 혼란의 상태에 있던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하였고, 그 후 메디나에서 공동체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문제들이 논쟁되었다. 이슬람의 역사의 번영: 칼리파 시대에서부터 압바스 제국까지 이슬람 사회는 부족들이 모여 정치하는 대의제이다. 크게 수니파와 시아파 두 파로 나뉘는데 수니파가 약 85%에 이르러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무함마드가 죽으면서 후계자를 따로 지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장인이었던 아부 바크르가 제 1대 칼리파에 추앙되었다. 그 후, 제 2대 칼리파 오마르는 주로 이슬람의 영토확장에 힘썼고 제 3대 칼리파 오스만 때에 이르러서는 꾸란이 집대성 되었다. 제 4대 칼리파 알리를 마지막으로 정통 칼리파 시대는 막을 내리고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중심지로 한 우마이야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마이야 시대에는 아랍인을 중심으로 771년 스페인 땅으로 전격 진출하여 스페인을 점령하였고 프랑스 남부까지 쳐들어가는 등 유럽을 이슬람화 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이슬람의 전성시대였다. 이 때 지어진 스페인 그라나다 지방의 알함브라 궁전은 약 8세기 동안 이어진 이슬람에 의한 스페인 지배의 역사(711-1492)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패배한 이후, 1492년에는 결국 스페인 제국에서도 후퇴하였다. 우마이야 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압바스 제국이 세워졌다. 압바스 제국은 활발한 무역로 개척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도입하였고, 그 결과 고도로 발달된 문화인 사라센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다. 우리가 ‘아랍’ 하면 쉽게 떠올리는 아라비안 나이트도 이 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토 정벌에 나선 칭기스칸의 후예들에 의해 압바스 제국도 결국 몰락하였고, 한때 찬란한 번영을 누리던 이슬람 제국은 압바스 제국을 끝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슬람의 쓰라린 역사 1096년에 발발한 십자군 전쟁에서 결과적으로는 기독교가 패배하였으나, 1099년에 이슬람의 성지 예루살렘이 십자군에게 점령당했다. 그 후, ‘종교를 올바르게 행하는 자’ 라는 뜻의 살라딘(살라훗딘)이 세운 아유브 왕조가 이슬람을 지배하였고 마침내 1187년에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초반에는 이슬람의 정치적 지도자인 칼리파를 선거를 통해서 선출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세습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칼리파의 정치적 세력이 확대되고 나중에는 군사력까지 장악하게 된다. 그리하여 생긴 왕조가 마므루크 왕조(1250-1516)이다. 마므루크 왕조, 이란의 사파비 왕조를 거쳐 인도의 무굴제국이 이슬람을 지배하게 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도의 타지마할이 바로 이 무굴제국 시대의 유적이다. 1516년, 터키를 중심으로 한 오스만제국은 동유럽에 이슬람을 전파하는데 있어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나 유럽 전체에까지 이슬람을 확장시키지는 못하였다. 그 후, 1258년 몽골에 의한 바그다드 점령을 시작으로 1830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1917년 영국의 바그다드와 예루살렘 점령,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아랍이슬람세계의 쓰라린 역사가 계속되었다. 파키스탄 카라치의 이슬람학교에서 16일(현지시간) 학생들이 이슬람 경전 '꾸란'을 공부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로이터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구 기독교 사회에 이슬람에 대한 경각심, 경이감을 불어 넣어주었고, 그 때 각인되었던 시각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서구에서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인들이 단시간에 이룬 정복사업의 강제성과 호전성을 설명하는데 실제로 이것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오해에 불과하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은 십자군 전쟁에서 서구 기독교의 패배의식과 갈수록 빠르게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여진다. 이슬람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피정복민들에게 ‘종교에의 강제 또는 강요는 없다.’ 라는 꾸란에서의 가르침처럼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점령지의 피정복민들에게 대해 무력으로 개종시키지 않았으며 일종의 계약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였다. 단지, 그 대신 이슬람이 보호하고 있다는 명목아래 ‘딤미’라 불리는 인두세만을 부과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납마저도 액수의 부담이 이전의 비잔틴 제국이나 페르시아 시대에 비하면 줄어든 것이어서 당시 기독교와 유대교도들은 상당한 종교의 자유를 향유하였다. 이렇게 주변 지역과의 화해와 공존을 바탕으로 한 유대감을 통해 이슬람은 점차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우디아라비아 국기에 그려진 칼은 아랍이슬람 국가의 호전성과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의 교리와 부합하는 정의와 진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서구에서 말하는 이슬람의 세계와 실제 이슬람의 세계와는 큰 괴리가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하여 우리의 능동적인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리 - 정유진(인권연대 인턴 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183 | 추천: 0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 나는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이슬람에 대한 편견에 저항감이 들어서 도전적인 자세로 접근해보고자 이슬람을 공부하게 되었다. 터키에서 유학할 당시, 외국에서 온 귀한 손님에게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모자를 선물하고자 큰 정성을 쏟는 사람들에게 감동한 나는 이슬람에 더욱 애정을 갖게 되었다. 관용적이며 페미니스트적인 사회, 이슬람. 세계 4대 고대문명권의 3개(이집트-메소포타미아, 인더스)가 속해 있고, 세계 최대의 종교인구를 갖고 있는 세계, 이슬람. 이러한 이슬람 세계에 대해 우리는 미국과 협력관계 하에서 무관심했고, 그 동안 배척해왔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 문화적 무지 상태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지구촌 공동체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대체적으로 이슬람은 관용적, 포용적, 다중문화의 모습을 보인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극단화된 이슬람의 모습은 이슬람 국가 중에서도 부정적이고 왜곡된 이슬람 정신의 표상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모습을 서구의 눈으로 바라본 결과이다. 지금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의 운전면허증 허용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 이유는, 부녀자 혼자서는 외출도 할 수 없고 다른 남자와 이야기는 물론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엄격한 사회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남자 교통경찰과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극히 일부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일 뿐, 실제로 파키스탄에서는 민선 여성수상이 2번이나 당선되었고 이란에서는 여자 부통령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이란에서는 우리나라의 약 2.5배에 이르는 여성들이 국회에서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터키에서는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처럼 결혼해서도 자기 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산을 상속받을 때도 여자, 남자 구별없이 50대 50으로 받는다. 현재 ‘남편도 아내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자’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터키의 야당당수, 탄수 칠레르(Tansu Ciller)의 “나는 이슬람의 딸이다. 나의 존재가치는 이슬람이다. 꾸란 속에 이를 금하는 조항이 있어 유권해석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법 조항을 포기하겠다.” 이러한 발언에 이슬람의 율법학자들이 꾸란을 샅샅이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해 포기하였다. 이처럼 이슬람 문명이 여성을 억압한다는 편견은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서구 이데올로기에서 바라본 여성억압이라는 문제도 이슬람 이데올로기에서의 실체적 진실과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터키에서 이슬람의 이름으로 여성을 억압한다는 것은 이슬람의 진정한 이데올로기에 벗어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보다 더 페미니스트적인 사회일 수도 있다. 인식의 전환을 통한 이슬람의 접근을 강조한 이희수 교수 ‘아랍=이슬람’ 이란 공식이 과연 옳은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랍=이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랍이 이슬람을 대표한다는 생각은 초보적인 상식의 오류이다. 인도와 인도네시아도 대표적인 이슬람 국가이며 태국, 중국을 포함하여 아시아의 약 12억의 인구가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슬람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용어를 설명하자면, 첫째로 아랍이라는 것은 문화적인 개념으로 아랍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으며 흑인, 동양인 피부색 구별 없이 자기 스스로 아랍인으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모두를 포함한다. 둘째, 중동은 동쪽을 극동, 중동, 근동으로 나눈 지정학적 개념으로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지배하기 편하도록 정한 정치적 용어로서 군사전략적 개념이다. 셋째, 서아시아는 중앙아시아, 동아시아와 더불어 역사학계에서 쓰는 역사적 개념이고, 서남아시아는 지리학계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종교문화적 개념으로 이슬람을 말한다면 14억 57개국이 포함되고 지리적 개념으로 보아 아랍어를 쓰는 중동에만 국한시킨다면 리비아, 모로코를 포함하여 22개국이 해당한다.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야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슬람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두 단어, 성실과 근면으로 압축하여 볼 수 있다. 우리가 중동에서 건설 붐을 일으킬 당시, 낮에는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 없어 중동 사람들이 ‘시에스따(낮잠)’를 잘 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였던 그 모습이 아직도 중동사람들 뇌리에 박혀있다. 이러한 한국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한국을, 한국 사람을, 한국문화를, 한국상품을,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선호하고 요즘 한류열풍을 불게 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 예로, 지금 카이로를 포함한 중동지역에서는 한국 드라마 열풍이 불고 있다. 이렇게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반(反)서구에 대한 가치를 바탕으로 한국에 대한 유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이슬람과 적대적 이해관계에 있는 미국과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언론을 통해서만 이슬람을 들여다 보았다. 그 때문에 이슬람과 이슬람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적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단지 9.11 테러에서 나타난 3%에 지나지 않는 극소수의 급진 테러조직을 이슬람 전체 조직으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지금까지는 이슬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우호적인 태도로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슬람은 단순히 종교를 넘어서서 그들의 삶의 한 부분인 문화다. 세계의 약 1/4을 차지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해 지금처럼 적대적인 시선을 계속 유지한다면 세계 사회에서 점차 생존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역동적이고 능동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진정한 지구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식을 전환하여 보다 유연한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이슬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정리 - 정유진(인권연대 인턴 활동가)
2017-08-08 | hrights | 조회: 141 | 추천: 0
  장미은/ 인권연대 인턴 활동가 이번 이슬람 성원 탐방은 지난 4일 동안에 걸쳐 진행된 ‘이슬람 세계의 이해 Ⅱ’의 현장학습의 의미로 진행되었으며, 이론으로 배웠던 이슬람의 문화를 더욱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길 수 있는 기회였다.   서울에서 느낀 이국의 향기   우리가 방문한 이슬람 성원은 이태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문화적 특성을 간직한 독특한 건축 양식의 성원은 주변의 풍경과 매우 잘 어우러지는 듯 했고, 이는 다른 문화와의 융합을 잘 이루어내는 이슬람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슬람 성원 안에는 예배를 보기 위해 찾아 온 무슬림들이 꽤 많았는데, 이로 인해 마치 진짜 이슬람의 어느 한 나라에 있는 성원에 간 것 같은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무슬림들이 한국말에 너무 능숙해서 놀랐지만 말이다. 이슬람 성원을 구체적으로 둘러보기 전에, 성원 1층에 있는 대회의실에서 이슬람문화연구소 부소장이신 신양섭 박사님의 강의로 과거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와 이슬람이 얼마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어왔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신라 시대부터 이미 우리 선조들과 교류가 있었던 아랍 사람들은 고려 시대 어느 한 역사서에 ‘하산(핫산)’과 ‘열라자(알-라지)’라는 이름을 남겨 놓기도 했고, 그 후로도 한국 전쟁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이슬람은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한국 전쟁 때, 무려 만 5천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지원군을 보낸 터키와는 지금까지도 정서적으로 ‘혈맹의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무슬림 한 분이 직접 나오셔서 꾸란을 읽는 시범이 이어졌다. 이슬람에서 특정한 음률에 맞추어 꾸란을 읽는다는 것은 강좌를 통해 이미 배웠었지만, 실제로 노래를 부르듯 차분하게 꾸란을 읽어나가는 무슬림의 모습과 그 음률 속에서 나는 무슬림들의 신에 대한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다 꾸란의 낭송이 끝나고 이어진 이슬람 성원의 예배당 견학. 예배당의 풍경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이슬람에서는 인물이나 동물의 그림을 우상 숭배로 여기기 때문에 예배당 안에서는 인물화나 동물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타일들로 세밀하게 짜 맞추어진 벽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신비롭게 느껴졌고, 꾸란의 구절을 절묘한 모양으로 새겨놓은 것도 나에게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무슬림들이 직접 예배드리는 것을 가까이서 바라본 것도 처음이었는데, 마치 신에게 자신을 바치듯 무릎을 꿇고 온 몸을 엎드려 예배드리는 모습에서 무슬림들이 신에 대해 가지는 경건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었다. 이슬람 성원 견학을 모두 마친 후, 이제 터키식의 저녁 식사를 할 차례였다.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기회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른 나라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터키 음식은 독특한 향 때문에 처음 먹기에는 약간 부담이 있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내 입에 맞았고, 나중에는 어떤 요리가 나올까하는 기대까지 생겼다. 터키의 음식이 그렇듯이 우리가 이슬람의 문화를 접할 때도 처음에는 약간의 거부감과 부담감을 가진 채 받아들이지만, 어느 순간 이슬람만이 가지는 고유의 향에 취하고 진정으로 이슬람 문화를 즐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 문화가 전혀 낯선 땅인 한국에 와서도 50년 동안이나 그 명맥을 유지하고 꾸준히 발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이슬람 성원 방문과 음식문화 체험은 실제 이슬람 문화가 우리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게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의미 있고 좋은 기회였다.
2017-08-08 | hrights | 조회: 135 | 추천: 0
허창영/ 인권연대 간사 미국 중심의 서구적 시각이 아닌 우리의 시각으로만 보는 이슬람은 어떻게 다를까? 9.11 테러 이후 각인되고 있는 ‘테러’라는 이미지 말고, 우리는 이슬람 본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슬람문화연구소와 인권연대가 1월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공동주최한 ‘이슬람 세계의 이해 Ⅱ’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이번 강좌는 지난해 상반기에 진행된 이슬람 강좌의 심화강좌 형식으로 주제를 이슬람 종교, 정치, 사회 외에도 문학, 예술, 인권, 문명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적으로 다뤘다. 서구가 만든 시각 벗어야 전 강좌와 개별 수강자를 포함해 모두 50여명이 참여한 이번 강좌에서 강사들이 가장 강조한 것은 바로 “미국 중심의 시각을 벗고, 우리가 알고 느낀대로의 이슬람을 이해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슬람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한양대 이희수 교수는 아랍지역이 최대의 원유 의존지역이고, 이란이 제3대 교역국임을 설명하며 이슬람에 대한 이해는 “관심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런데도 한국은 이슬람을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 ‘테러’ 등 서구가 전해준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평화’를 지향하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 없이 그저 호전적이고 미개한 지역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 교수는 한국 교과서의 이슬람 왜곡에 대해서도 “외교 분쟁의 소지”가 있다며 시정할 것을 촉구했다. 이 교수는 “이슬람에서는 사람과 동물에 대한 그림을 우상으로 여겨 초상화도 그리지 않는데 교과서에서는 무함마드 그림을 버젓이 사용하고 있다”라며, “이는 최대의 신성모독죄”라고 지적했다. 또 하나님의 아랍어 표기인 ‘알라(神)’를 ‘알라신’으로 써 ‘신신’이라는 기본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나열하기 힘들만큼 많은 왜곡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참수형, 손목절단형, 간통죄 투석형: 이슬람 인권과 현실적 적용’이라는 제목으로 강좌 전부터 관심을 모았던 한국외대 손주영 교수는 “이슬람 인권의 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이 극히 보수적인 일부 아랍국가의 문제일 뿐인데 서구에서는 마치 모든 이슬람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공격한다”라고 밝혔다. 손 교수는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사회라 이슬람의 가르침이 곧 법이 된다”라며, “이슬람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학파가 다양한데 이슬람 인권으로 거론되고 있는 문제는 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탈레반 등 극도로 보수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국가와 조직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즉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극형들과 명예살인 등은 현실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슬람에서는 ‘무고죄’를 엄하게 다스리고 있고, 간통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증인이 4명이나 필요해 실제로도 적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문학, 예술 등 내용도 다양 이번 강좌에서는 이슬람의 문학과 예술, 소수민족 보호정책, 여성문제 등 그동안 쉽게 접하지 못했던 주제들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비롯한 이슬람 문학의 역사와 특징, 카펫과 아라베스크 등 실용적인 예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슬람 예술의 배경에 대한 강의 내용에 참가자들의 관심이 높았다. 아울러 강사들은 찬란했던 이슬람 문명이 유럽의 르네상스의 바탕이 되었고, 지리학, 천문학, 수학 등 현대학문의 기초를 이루었던 점 등만 미루어 보더라도 ‘미개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인식의 미개함’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종교와 문화로써의 이슬람과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 지역적 의미인 중동을 같은 의미로 오해하는 것, 정치권력의 문제를 이슬람 종교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한편 14일(토) 이슬람 성원 현장답사로 막을 내린 이번 강좌에 대해 참가자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없애는 좋은 계기였다는데 입을 모았다.
2017-08-08 | hrights | 조회: 13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