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강좌

  “예배당을 넘어서 인간과 세계를 보라” - 이찬수 교수의 '종교적 다양성을 소화해 낸 신학' 강의 최철규/인권연대 간사  (보편적인) ‘신’을 마주 대하는 신학은 모든 신앙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서로 종교적 주소를 달리하는 신앙인들에게도 큰 반감 없이 설명되고 받아들여져야 학문으로서의 위상도 세워진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이론을 넘어서기 마련. 다양한 종교 현상 앞에 보편적 신학의 기틀을 세우기는 좀처럼 쉽지 않으며, 예외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대표적이다.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제6강을 진행한 이찬수 교수는 신학계에 종교다원주의 논쟁을 던져준 캐나다 출신의 미국 종교사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와 독일의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를 통해 현대 신학의 역할과 과제를 설명했다. 종교는 사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   그리스도교 신학, 불교 신학, 이슬람교 신학 등의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전통 신학은 종교 생활을 저마다의 교리 체계에 근거한 상호 배타적인 집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종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통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념은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속에서 종교의 흔적을 더듬어 종교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고찰한 스미스는 그의 주저 '종교의 의미와 목적'(1991)에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상호 대립적인 실체들로서의 종교개념은 그 어떤 고대 종교적 문헌에도 들어있지 않을 뿐더러, 서구에서 지난 200여 년 동안 전 세계로 수출한 근세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인류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자리잡은 종교적 현상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끝없이 변화하며 쉬지 않고 생성되는 것이어서, 특정한 인간집단이나 개별적인 교리 체계안에 묶어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태초에 신이 있었고,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라는 신의 창조성으로부터 신앙의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선험적 추론을 거부한 스미스는 진정한 신학자의 모습을 종교 역사가에서 찾고,  일차적 탐구 대상을 ‘축적적 전통’이란 이름으로 제시했다. ‘축적적 전통’은 신앙이 외적으로 표현된 다양한 문화유산 전체를 뜻하며, 경전이나 제도, 종교 의례나 교리체계, 관습과 법률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축적적 전통’은 탐구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 그 자체를 만들어낸 또는 전통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근원인 ‘신앙’으로 인도하는 표시들이며, 상징의 역할을 한다. 이찬수 교수는 “신앙이란 종교 생활의 내면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초월적인 세계에 응답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능력 그리고 자신, 이웃, 우주에 대한 인격적 정향”이라고 설명했다. 종교가 있는 곳은 바로 이 ‘신앙’이지, 결코 교리체계나 의례와 같은 상징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종교인들은 객관적인 형상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상징의 홍수 속에서 종교를 찾고 있을 뿐 그 종교적 삶을 사는 사람의 마음, 즉 신앙을 보지는 않는다. 내면을 보지 않고 형식화된 종교성만 바라보는 결과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상숭배’ 논쟁이다.  이 교수는 “나무와 돌을 통해 초월적 실재를 느끼는 그 신앙인의 신앙을 떠난 관찰자에게는 그저 나무와 돌만 있을 뿐”이라고 지적하며, “상징이나 성현을 통해 궁극적 실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닌 삶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종교 그 자체가 하나의 인격체이며, 그러한 종교에 대한 접근도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인 신앙인의 관계, 그리고 관찰대상에 대한 인격적 접근의 여부는 종교에 대한 서양의 접근을 구별하는데 도움을 준다. 스미스는 서양의 전통적 접근이 냉철한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른 이들의 종교를 하나의 사물인 ‘그것(it)’으로 본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인격화가 이뤄진 최근에는 다른 이들의 종교를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인격 주체인 ‘그들(they)’로 드러낸다. 그러나 여전히 관찰자는 단순한 타자에 불과한데, ‘그들’에 관찰자의 존재가 더해지는 순간 그 대상은 ‘나’를 포함한 ‘우리(we)’가 된다. 그 다음 단계는 우리가 ‘너(you)’에게 말하는 대화의 단계다. “이런 발전의 최종적인 것은 우리 모두 (we all)가 서로 우리 자신(us)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특정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신학은 더 이상 설 곳이 없으며, 세계 종교사적 관점을 아우르는 ‘세계 신학(World Theology)’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 신학’은 보편적인 인간의 신앙을 연구함으로써 세계 모든 신앙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이므로, 기독교 안에서만 통하던 교리 신학과는 양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기존에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한 것이라면, 세계 신학적 관점에서는,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필요충분조건은 ‘사랑’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유명한 라너는 스미스처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서 종교의 흔적을 더듬지 않으면서도, 결국 종교적 다양성을 긍정하는 신학적 이론 체계를 이끌어 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한 카톨릭교의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구원’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어가며 종교성의 핵심을 규정하는 중요한 명제로 간주된다. 그래서 흔히 ‘구원’은 선교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또는 교회에 나가야만 구원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기독교적 구원론은 지극히 협소할 뿐이며, 오히려 반(反)신론적인 접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하느님의 은총이 오직 예배당 안에만 갇힐 정도로 왜소하거나 초라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라너는 인간을 ‘차별 없는 은총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어떠한 조건 없이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이미’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다고 보듯이, 모든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가든 그렇지 않든 다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다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이찬수 교수는 이를 “그리스도적이긴 하되,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복음 선포를 듣지 못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에도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자기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고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이웃에 대한 철저한 자기 내어줌의 사랑은 그러한 실천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여기저기에 퍼져 있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감안한다면, 교회가 단순히 협소한 공간이 될 수도 없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구체화되는 모든 곳’, 즉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 선의의 양심을 갖고 온 힘을 다해 객관적인 실천 규범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도덕 상황을 지향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고 말한다. 만약 현재의 예배당들이 그런 ‘교회’ 공동체라면, 그곳에 속해야 구원된다는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거꾸로 “인간이 구원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이러한 라너의 신학에 대해 한스 큉(Hans Küng)은 ‘교회의 역사성을 무시한 신학적 기만’이라고 불쾌감을 나타냈고, 존 힉(John Hick)이나 니터(Paul Knitter)등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다른 종교를 평가하려 한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러한 비판들이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를 확립”하려 했던 라너의 목적을 무시한 오해라고 말했다.    또한 이 교수는 라너가 교회의 역사적 역할과 그 중요성을 무시한 것도 아님을 강조했다. 오히려 “타종교인들을 가시적인 교회의 틀 안으로 몰아넣는 것이 교회의 과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본래적 구원을 이웃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게 진정한 교회의 과제”라는 것이다. 신학의 보편성은 신앙의 보편성에서 나와야  모든 사람들을 ‘익명’이라는 전제로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는 라너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라너가 이미 익명이라는 언어가 지니는 한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라너 스스로도 그 용어를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체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佛者)’라는 낱말에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신실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생생하게 살려내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익명의 불교인’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승인해야 하는 어떠한 의무도 없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한국의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이 이른바 타종교의 연구를 보다 더 열심히 연구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대방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의 이면에 깔려 있는 유사한 종교적 지향과 믿음의 순수성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종교를 더욱더 잘 이해하고 종교간 평화로운 공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조금만 알고 나면 타 종교의 신학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인간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라너의 신학은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侍天主)’- 하늘의 주인을 내안에 모신다 - 와 일맥상통합니다.”  신앙의 보편성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종교간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세우는 한국 신학계의 폐쇄성과 획일화에 던지는 따끔한 일침이다.  이찬수 교수의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의 강의록은 개별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 문의: 인권연대 02-3672-9443
2017-11-09 | hrights | 조회: 318 | 추천: 0
  “예수와 지장보살은 서로 닮았다” ‘이찬수 강좌’ 5강…‘구원의 종교’라는 공통점을 가진 불교와 기독교 이연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 지옥)에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1벧3;19)라는 전승이 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지난 30일(화) 저녁 7시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다섯 번째 시간에 이찬수 교수의 ‘다르면서 같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주제의 강의가 열렸다. 이번 시간은 불교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이 얘기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불교적 언어와 기독교적 언어는 서로 다르며 지향하는 세계관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 교수는 ‘동서철학의 만남’을 지은 김하태씨의 말을 인용해 “동양을 대표하는 불교는 직관적이고, 서양을 대표하는 기독교는 지성적인 경향이 있다”는 설명으로 불교와 기독교에 차이가 있음을 전제했다. 신과 인간 사이를 보는 다른 시각  기독교는 세계의 기원과 근거를 인격적 유일신에게서 보고, 불교는 존재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면서 일체의 기원적 존재, 인격적 신을 거부한다. 또한 기독교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신의 주도권을 부여하고 신과 인간 간의 불가역성을 말하지만, 불교는 주도권을 쥔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일적이고 우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극적 실재와 인간 사이의 가역성을 전제한다.  이 교수는 “기독교에서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 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반면, 불교에서는 원천적으로 인간과 부처의 동일성에 대해 말한다”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분명히 갈라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종교간 신앙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닮은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철저하게 신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였을 뿐 스스로를 신의 차원까지 높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이 예수 선포의 확실성을 위해 예수자신까지 신의 차원으로 높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깊은 수행과 명상 속에서 인생의 원리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았던 고타마 싯달타는 ‘법이 나의  스승’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여 제자들에게 깨달은 이, 즉 ‘붓다’로 불리게 되었다. 붓다 역시 자신은 스스로 신격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존중과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예수와 붓다는 역사 내적 존재이지만 제자들은 예수와 붓다를 그들이 전하고 실천한 하느님의 말씀 혹은 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역사적 예수와 붓다가 하느님 말씀의 구체화와 영원한 법의 구체화로 고양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영원한 하느님 말씀과 그 구체화된 육화 도식으로 하느님과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불교에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신과 그 구체화된 색신 도식으로 법과 붓다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붓다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을 보는 시각이 닮아 있다   이 교수는 불교에서 몸을 물리적 혹은 생물학적 몸과 본질 혹은 주요 부분, 두 가지로 본다고 했다. 중생은 흔히 생물학적 몸을 불변하는 실체처럼 여기고 그 욕구에 집착하지만, 이것은 극복과 타파의 대상이라고 했다. 몸에 대한 집착을 이겨낼 때 진여를 보게 되는데, 그 진여를 제대로 본 근원적인 주체가 바로 법신이며, 붓다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난 법이 바로 법신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붓다 그 본래 모습은 역사적 존재 혹은 생물학적인 몸이 아닌 붓다의 지혜(반야)인 것이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타마 붓다에 대한 강조로부터 역사적 구체성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로서의 법신에 대한 강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점이, 성서에서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초기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다가 점차 초형상적 그리스도로 전이했던 것과 유사하다.    예수나 붓다는 모두 괴로운 육체를 지니고 살았지만, 그리스도나 보신불의 몸은 그러한 근원적 괴로움의 초월자 차원에서 재조명된 몸이라는 점에서 양쪽 다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중생이 구원을 얻으려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과 ‘아들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준다’(요한14;13-14)는 하느님의 외아들 혹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구조도 서로 통한다”고 덧붙였다.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 지옥)에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1벧3;19)라는 전승이 있다. 여기서 ‘갇혀 있는 영혼’이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1벧3;20)로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간주되는 이들이다.  알려진 바와 달리 예수는 그들을 영원한 죄인으로 남기려 하지도 않았고, 지옥에 남겨두지 도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곧바로 ‘하늘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갇혀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향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1벧4;6)는 성경구절을 통해 “예수의 모습이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밝혔다. ‘지옥으로 간 예수’와 ‘지장보살’ 신앙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보신불이라는 양쪽 신앙구조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 비슷한 깊이를 지닌다.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미와 불자들에게 아미타불, 지장보살 등 다양한 구원자들이 지니는 의미는 깊이의 차원에서 대립되기는커녕 상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표현 형식은 모순과 우열 차원에서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저마다 신앙 체험의 근거가 되는 각 전통의 깊이 혹은 그 전통 안에서 발생한 신앙체험의 깊이에 서로 물리칠 수 없을 유사성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교수는 신학자 존 캅이 “기독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가 아미타에서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불교 신자들도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아미타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 말에 동의했다.  또 “산의 등정로는 다르지만 호연지기는 비슷하다. 구원에 대한 이론과 개념 설명이 설혹 종교마다 다양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태도에는 상통하는 점이 있다”라고 한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마다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 내지는 근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체험은 세계관과 그 표현 방식 상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물리칠 수 없는 비슷한 깊이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고타마 붓다에서 보신불로, 구체적 몸에서 정신적․영적 몸의 차원으로 전개되어 나간 두 종교 전통의 역사는 인간 종교 심성의 구조적 유사성과 함께 무엇보다 신앙적 깊이의 상통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에서 쓰는 용어들은 다르지만 신앙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세계로, 불자는 불성의 세계로 받아들이면서 세계 해석의 기초로 삼는다”고 했다.  아울러 “표현에서는 문화적 다양성과 차별성이 드러나고 교의적 표현 내지는 세계관에서는 상반되는 듯 보이는 기독교와 불교지만, 인간 구원의 차원에서는 저마다 비슷한 깊이를 지닌 동서양의 대표적 종교전통이다”라고 정리했다.  2월 6일(화)에는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2월 8일(목)에는 이찬수 교수가 ‘성서적 타종교관’을 주제로 마무리 강의를 한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로 하면 된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369 | 추천: 0
“너희도 내 애인을 사랑하라” 강요 말아야 - 윤영해 동국대 교수 ‘이찬수 강좌’ 4강 강연…종교다원주의 배격하면 기독교 패배할 것 이연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불교 신자들은 기독교를 ‘애증’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윤영해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한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윤 교수는 지난 25일 ‘강남대 이찬수 교수 대책위’ 주최로 열리고 있는 ‘종교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네 번째 강연자로 나서 불교 신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을 ‘선망의 대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도 본다고 밝혔다.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실패한 종교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은 20억 중에 불과 8천여만명만이 기독교 신자이고, 인도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이슬람교이거나 불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유독 한국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25%에 이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윤 교수는 교회조직과 운영, 선교방법, 봉사활동 등 전반적 체제에서 구태의연한 불교에 비해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 등 역사 속에서 사회적 참여와 실천에 적극적”이었던 점을 성공의 요인으로 꼽았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의 적극적인 ‘선교’를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자 ‘선망의 이유’로 지목했다. 윤 교수는 “기독교 신자들은 입교하면 해야 하는 게 선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심지어 지하철에서 승복을 입은 스님에게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기독교 신자들을 보면서 “불교 신자들은 이런 모습에 질겁하면서도 불교에는 왜 저런 열정이 없나하고 선망의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요즘 불교계의 찬불가, 일요가족법회, 가족탐방법회, 조계종의 포교원, 복지시설이나 학교설립 등도 기독교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배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 불교 신자들에게 기독교는 이해하기 힘든 종교다. 불교는 흔히 상식, 이성, 합리, 성찰 등 설명을 통해 이해를 구한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이해보다는 창조, 부활, 전지전능 등에 대한 믿음, 즉 초월적 신앙을 요구한다. 때문에 불교 신자들이 기독교를 이해하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윤 교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고, 겉옷을 달라하거든 속옷까지 주라’는 성경구절을 예로 들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면서 단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기독교를 이해하기 힘든 종교”라고 말했다. 선행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되고 불신에 대한 처벌은 너무 가혹하기만 한 것에 대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신앙은 주관적이고 각자의 선택적 결단인데 기독교의 이런 면이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악의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불교에서 ‘절’은 ‘신앙고백’ 의미 없다   우리는 90년대 말에 있었던 기독교의 불교에 대한 온갖 비방과 노스님에 대한 폭행치사, 파괴행위, 동국대 법당 본관 앞에 ‘만’자로 조경해 놓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간 일과 불상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를 새겨 놓은 일 등 기독교 배타주의에서 비롯된 참혹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윤 교수는 이찬수 교수의 해직사건에 대해서 “절에 가서 절해서 절단 난 절절한 사연”이라고 말했다. 불교에서 절하는 행위는 인사와 존경의 표현이고, 그 다음이 수행의 의미다. 흔히 기독교 신자들이 하는 ‘신앙고백’의 의미는 없다. 그런데도 기독교에서는 이 교수가 불상에 절한 것을 ‘인사’나 ‘존경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신앙고백’으로만 보았다. 윤 교수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배타성은 '신앙고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이라고 우기고 믿어야 만족하는 자족적 무지에서 자라난 측면이 강하다.  불교 신자들은 신앙을 연애감정과 비유하기도 한다. 신앙과 연애 모두 주관성, 비합리적 감성, 절대적 충성요구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연애 감정에 몰입한 연인이라도 내 애인이 최고니까 ‘너희도 내 애인을 사랑해라’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종교 때문에 행복하고 좋다면, 다른 사람도 그가 가진 종교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 애인이 예쁘면, 다른 사람의 애인은 그 사람의 눈에 충분히 예쁜 것이다”  내 종교가 절대적이고 진리라고 믿는다면 다른 종교도 그렇다고 (최소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타종교란 평행하게 뻗은 철길처럼 절대 만나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길게 뻗은 한쪽의 그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에 윤 교수는 “내 팔 내가 흔들고 네 팔 네가 흔들어라”고 일갈했다.  '인정'의 바탕위에 대화가 생겨난다. 특히 종교는 서로 간 대화의 필요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서로 같은 진리일 가능성을 가설로나마 남겨두는 다원주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결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윤 교수의 “다른 종교로부터 배우려고 기독교 공부를 시작했는데, 기독교 공부를 하니 불교가 훨씬 풍성하고 훨씬 다양하게 보인다. 불교가 나를 성숙시키는 만큼 기독교가 나를 성숙하고 충만하게 만든다”는 얘기는 그런 면에서 대화의 중요성을 방증하고 있다. 이찬수 교수 역시 "불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더 깊은 신앙의 신비를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말도 이와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윤 교수는 “인간은 비교를 통해 모든 것을 인식한다. 나를 보고 ‘빡빡이’라 인식하는 건 머리를 기른 사람들과 비교해서이고, ‘이번 강의 되게 재미 없네’라는 생각도 지난 강의와 비교해서 나오는 말이다”면서 자기 신앙을 올바르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선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독교, 배타주의만 고집하면 패배할 것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독교는 사회적 현안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며 존경을 받았고, 신자들의 수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폭발적인 성장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멈췄다. 윤 교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회의 현안에 헌신하는 노력을 버리고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충족에 주력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기독교가 근대화시기에 우리사회에 전해지면서 시민의식을 형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지만, 일정 수준 근대화를 이룬 현재의 상황에서는 배타적이기만 한 기독교의 교의가 근대적 시민의식과 함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교를 가진 다종교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한국적 상황을 무시하고 기독교의 구원론만을 고집한다면 기독교는 갈수록 고립될 수밖에 없다. 다종교 사회에서 배타성은 종교가 갖는 전형적 기능인 사회통합의 기능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윤 교수는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희생’과 ‘사랑’이라는 기독교 본래의 메시지를 회복하길 바란다”라며, 기독교 신자가 자기신앙에 성실하다면 다른 종교에 대한 몰지각한 행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윤 교수는 기독교와 불교의 공동의 적은 바로 ‘세속주의’라고 지적했다. 신앙이 가진 본래의 의미보다는 대형화, 상업화에만 몰두하고 종파 간 세력다툼에만 관심이 있는 것에 대한 따가운 질책이다. 윤 교수는 “기독교가 그와 똑같은 메시지를 지닌 불교와 손잡고 세속주의를 향한 공동승리로 나아가야 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여전히 배타주의만을 앞세워 다른 종교를 공격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패배할 것이다”라고 강의를 마무리했다.  2월 1일(목)에는 ‘종교적 다양성을 소화해낸 신학 - 스미스, 힉, 라너의 신학’을 주제로 이찬수 교수가, 2월 6일(화)에는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의 강의가 이어진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로 하면 된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323 | 추천: 0
- 의문 1 만약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든지 “자업자득”,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이단일까 아닐까. 폐쇄적인 개신교회에서는 이단 판정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 불교 용어이며, 불교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 의문 2 한국 대형 교회에서의 대규모 부흥회나 통성기도는 기독교적일까, 반기독교적일까. 그리고 한국 기독교에서 유달리 많이 볼 수 있는 새벽기도회나 새벽미사는 과연 얼마만큼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신앙 실천의 모습에서 기독교보다는 무속 신앙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전자는 흔히 말하는 ‘굿판’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새벽 시간의 종교 의식 역시 무교적 분위기 내지는 새벽 예불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문화는 별개이면서도 별개가 아니다  지난 23일(화), ‘文으로 化 하다-한국종교문화론’이라는 주제로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진행된 이찬수 교수의 종교 강좌 3번째 강의에서는 현대 종교의 복잡한 현상을 짚어보았다. 많은 종교인, 비종교인들이 종교 그 자체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을 한다. 고민의 근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하나인 듯 하면서도 다양하고, 다양하지만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 같은 현상 즉,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진리를 부정하지 않되, 다양한 ‘진리 현상’에 대한 이해와 관용적 태도를 통해 진리의 참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진행된 지난 강의에 이어 이 교수는 ‘문화’라는 개념어 이해를 통해 종교를 이야기하였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문화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substance)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Form)이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종교가 문화 ‘안’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문화가 종교의 형식’이며, 종교가 문화를 규제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종교는 문화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이러한 명제는 하나의 문화와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종교간 관계에서만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에 다양한 문화 그리고 다양한 종교가 동시에 공존하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다양한 종교 현상이 공존하고 있는 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교수는 “종교가 다양하면 그만큼 다양한 문화적 형식이 있는데, 한국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면서도 한국적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포괄적인 틀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종교들의 존재 이면에 통일적이고 심층적인 근거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면면에 스며있는 ‘초월적인 종교 문화’, 혹은 ‘종교 이전의 문화’이다. 文化는 진행형의 동사  ‘문화(文化)’는 순우리말이 아닌 ‘Culture’란 외래어를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이다. 이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일종의 명사형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문화는 매우 역동적인 의미에서의 진행형의 동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문화를 고정된 의미의 명사로 보는가 또는 변화의 의미에 중점을 두는 동사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이 교수는 “문화란 인간 활동의 가시적인 소산의 총체다라는 정의가 문화를 명사로 이해하여 문화를 마치 고정불변의 외적 대상물로 제한하는 한계를 갖는다”라고 지적하며, “문화를 대상화하는 인식 행위 자체가 이미 문화의 소산이며, 현대 사회 문화의 일부 특성”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인간은 세계 내 존재(Being-In the-World)’라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을 빌려, “인간은 문화 내 존재(Being-In the-Culture)”라고 표현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인간은 문화를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100여 년 전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당시 조선인의 종교 상황에 대해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에 처했을 때는 무속신앙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이 교수는 이것을 종교가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것일 수 없다는 증거로 제시했다.  “한국의 도교, 유교, 무교, 불교, 기독교 등이 서로 공존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배타적인 종교들인 듯하지만, 만약 이들이 진정 차별적이라면 현재와 같은 공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종교들은 공존하고 있는데, 각 종교들의 이면에 보편성, 공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현상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 운동이나 개신교의 타종교 비판과 같은 종교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 교수 자신도 강남대로부터 종교적 이유로 배척을 당했다. ‘나와 너’ 그리고 관계  “일반적으로 문화와 종교는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에 있으며, 문화가 종교이고 종교가 문화인 상즉(相卽)적인 관계입니다. 각각의 개별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이전의 문화를 고려해야만 한다.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유입될 당시, 이미 한국 사회에는 그 이전부터 불교, 유교, 도교, 무교 등의 다양한 종교가 만들어 낸 사회 문화 또는 종교 문화가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선교사들의 ‘God’은 ‘천주(天主)’가 되었다. 물론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신(神)’을 하늘의 주인으로 풀이하는 곳은 없다. ‘천주’라는 개념은 중국인들이 이미 3천여 년 전부터 사용해 왔던 ‘상제(上帝)’ 개념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God’을 이해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사람들은 ‘천주’를 순 우리말로 가다듬어 ‘하느님’, ‘하나님’으로 받아 들였다. 물론, 서양 언어 ‘God’에는 ‘하늘’이란 뜻도, ‘님’이란 뜻도 들어 있지 않다. ‘하늘의 주인’ 또는 ‘하늘에 계신 님’이라는 한국 고유의 문화 의식이 개입된 것이다.  “마틴 루버가 말한 ‘나와 너’란 명제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나 ‘너’가 아니며 ‘와’입니다. 나와 너는 서로의 관계(‘와’)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 이전에 도교, 불교, 유교 등의 혼합적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한국적인 기독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종교와 종교 문화에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이 교수는 종교를 자신 안에 가두는 차별적인 종교관은 신을 가두는 것이라고 못 박으며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끊임없는 상호소통이 진정한 종교적 실천”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실천의 중요한 계기는 상호 교감이다.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착한 이유는 단지 그가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못 본채 지나친 제사장과 달리, 그 사마리아인은 원수와도 같은 유대인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구해줬기 때문이다. 그는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 섞인 호소와 교감하였다.  예수는 그러한 교감에 따른 실천을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실천이라 하였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타종교를 배척하는 일부 종파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1월 25일(목)에는 동국대 불교학과 윤영해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를 주제로 특강을 진행한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으로 하면 된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489 | 추천: 0
"기독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는 이슬람"  '이찬수 대책위'의 두 번째 강연... 테러는 종교가 아니라 패권주의의 산물   [caption id="" align="aligncenter" width="300"] 지난 18일, '이찬수 대책위'로 열린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두 번째 강의에서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강의하고 있다.[/caption]   지난 18일 저녁 7시, '강남대 이찬수 교수 부당해직 사태 해결을 위한 대책위'(아래 대책위) 주최로 인권실천시민연대 교육장에서 '이슬람의 이해와 종교간 대화 : 칼과 코란의 왜곡된 방정식'이란 주제로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강의가 진행됐다. 16일 열린 이찬수 교수의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 1강에 이어 두 번째. 이 교수는 "신학전공자는 아니지만 지구상에서 기독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를 고르라면 이슬람을 들겠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보다 더욱 가까운 종교다"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종교적으로 이슬람은 앞선 일신교(하느님을 받드는 종교)들의 기본적인 교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코란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혁명적 변화를 가져다줌으로써 기존의 교회와 교의를 압도했다"고 말했다. 이슬람은 예수 이전의 예언자들 즉 아브라함부터 모세, 다윗 등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을 수용할뿐 아니라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 또한 예언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차이가 있다면, 기독교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반면, 이슬람은 예수의 신성을 거두고 그를 완전한 인격체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또 하나의 예언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 교수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맞서 언덕을 옮기기보다 언덕 앞으로 자신이 직접 걸어갔다는 무함마드의 기적에 대한 유명한 일화를 예를 들면서 "이슬람교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예언자로 추앙하는 무함마드도 신격화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무함마드는 절대자의 권능을 부여받은 신격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적 인간형'의 예언자이다. 평화와 상생 존중하는 이슬람  이 교수는 "인류 역사상 종교의 이름으로 가장 추악한 짓을 벌였던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정복방식엔 큰 차이가 있다"라고 설명한다. 1099년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들은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러나 1187년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도, 자신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기독교인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은 자는 재산을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해줬으며, 정착하는 사람은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했다. 또한 그네들 종교의 성소마저도 훼손치 않고 보존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예루살렘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그곳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운 1948년까지 상생과 평화의 상징으로 보존됐다. 이슬람 세계는 복잡하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용어로 정의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문화권에 비해 유독 잔인하다거나 종교적 강제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소수민족 간 문제는 실타래처럼 복잡한, 역사적인 원한관계로 얽혀 있다. 팔레스타인, 쿠르드족, 체첸, 발칸 지역의 코소보, 아프가니스탄의 소수민족 등 분쟁 유형은 너무도 다양하다. 다양한 분쟁의 근본 원인은 대부분 냉전체제가 끝난 뒤 지배민족에 맞서 싸운 소수민족의 독립 투쟁, 또는 반대로 소수민족에 대한 지배민족의 박해에서 찾을 수 있다. 허나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는 영토와 석유라는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참여하는 강대국들은 개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란 용어를 내세우며, 이슬람 문화가 아직 미숙하며 개도되고 선도해야 할 문화라고 부당하게 강조한다. 이와 관련, 이 교수는 "나는 아직 인류를 위해 만들어지거나 계시가 내려진 어떤 종교에서도 폭력을 조장하거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도록 내버려두는 종교적 가르침을 보지 못했다"며 "많은 경우 갈등의 원인과 배경은 주로 침략자나 강자의 논리에 따라 조작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여서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경우 진실을 들여다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 오해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칼과 코란'이란 명제와 함께 따라붙는, 테러리스트라는 꼬리표다. 이 교수는 인류학자로서 25년간 중동을 다녔는데도, 단 한 번도 테러의 위협이나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생각하며 공포에 떠는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 등 강대국들이 언론을 통해 만들어낸 일방적인 정보를 수용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일반 시민들도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많은 언론들은 이슬람 관련 소식을 전할 때 알 카에다, 하마스, 지하드, 헤즈볼라 등의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폭력으로 얼룩진 테러라는 대명제에 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 중에서 실제 테러 단체라고 할 수 있는 단체는 오직 '알 카에다' 하나뿐이다. 헤즈볼라는 국민의 동의와 선거를 거친 레바논의 합법 정당이며,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집권당이다. 지하드는 말 그대로 어떤 특정의 조직이 아니라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표현에 불과하다. 이 교수는 "이스라엘과 미국에 반대한다고 해서 이들을 테러조직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실 왜곡이자 지식에 대한 도전"이라며, 테러를 조장하는 현지의 세력 관계를 엄밀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네가 하면 테러, 내가 하면 자위권 행사? [caption id="" align="aligncenter" width="500"] 이 교수는 기독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가 이슬람이라고 말했다.[/caption]   이 교수는 "테러란 무장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향한 모든 폭력"이라고 정의한 뒤, 언론에서 '이슬람 국가들에서 테러 행위가 벌어진다'고 보도된 행위가 명백히 '테러'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들의 테러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성이나 정당성이 있다고 말했다. 언론에서는 대부분 침묵하고 있지만, 중동 자살폭탄 테러범들의 대부분은 대학 졸업 이상의 고학력자라고 한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하루가 멀다 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미사일이 자신의 이웃과 가족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현실에서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기 위한 절망적인 행위라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도 국제법상 무장할 수 없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직접 제조한 조악한 폭탄을 자신의 몸에 감고 죽어가는 것뿐이다. 많은 남성 대학생들이 희생해 이제는 많은 여성 대학생들이 죽음의 길로 스스로 걸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 교수는 "국가 권력이 '니가 하면 테러, 내가 하면 자위권 행사'라는 말도 안 되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며 테러 근절을 위해서는 두 가지 테러, 즉 국가 테러와 자살폭탄테러를 동시에 비난하고 근절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동안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정보와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미국의 부당한 공격과 불공정한 이중 잣대, 그리고 자원의 약탈과 문명의 파괴에 맞서 저항하는 이슬람을 폭력적이고 잔인한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것에 자신도 모르는 새 동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교수는 "이슬람의 오늘은 '코란과 칼'이라는 위협의 시대라기보다 오히려 '미국이냐 칼이냐'를 강요받는 시대"라고 잘라 말했다. 이어 "국제법을 어기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질서를 송두리째 짓밟으며 자행되는 미국의 횡포를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방관해야 하는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며 현재 이슬람이 겪는 분쟁의 대부분 미국의 대중동전략이란 큰 흐름 속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해와 관용으로 이슬람에 다가가야 할 때 이슬람 문화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족적, 종교적 박해와 탄압을 단순히 이슬람교의 책임으로 매도할 수도, 이슬람만의 과제로 방치할 수도 없다.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주변 정세에 대한 통찰 없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끝으로 이 교수는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 문화로 바라봐야 할 것"이라며 "종교는 삶의 순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문화로서 의미를 지녀야 하며, 서로 다름을 이유로 탄압과 박해를 정당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지금은 상대적 강자의 입장에 있는 서구 기독교 문화권 국가들이 이해와 관용으로 이슬람에 다가가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23일 세 번째 시간에는 한국종교의 문화를 탐색하는 이찬수 교수가 '文으로 化하다'라는 주제로 강의한다. 25일에는 윤영해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를 주제로, 2월 6일에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특강한다. 모든 강의의 개별 수강 신청도 가능하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262 | 추천: 0
  1월 16일(화) 저녁 7시.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강남대이찬수교수부당해직사태해결을위한대책위’(이하, 대책위) 주최로 이찬수 교수의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 1강이 시작됐다.  지난 해, ‘대책위’는 이찬수 교수에 대한 강남대의 부당한 해직을 규탄하고, 시민사회에서의 올바른 기독교 이해를 위해 ‘기독교와 현대사회’ 강좌를 개최한 바 있다. ‘기독교와 현대사회’는 이찬수 교수가 강남대에서 6년이 넘게 진행한 교양강좌 제목이다. 마찬가지로 일반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이번 강좌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종교 현상을 둘러보고, 이를 통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 일반에 대한 참된 이해를 고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양성, 진리에 이르는 지름길’ 이라는 주제로 열린 1강은, 전체 강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으로, 진리를 부정하지 않되, 다양한 ‘진리 현상’에 대한 이해와 관용적 태도를 통해 진리의 참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종교적 진리도 마찬가지다.  사회의 많은 분야중에서도 특히 종교는 ‘진리’에 민감하다. 종교적 사고와 생활 그 모두의 밑바탕에 ‘신’이라는 우주적 진리에 대한 규정과 지향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인들은 그 ‘신’을 ‘자명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다양한 종교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종교적 인식의 함정이 있다.  현상을 인식하는 주체의 주관성을 강조한 칸트의 지적처럼, ‘자명한 대상’이란 단지 또 하나의 회의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살아 온 환경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관심사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온갖 감각 기관을 통해 접하는 외부 세계의 모습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과 평가, 선택과 집중의 원칙이라는 그물망을 통해 걸러진 것들이다.  이처럼, 주로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이뤄지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획일적이며 맹목적인 사유의 틀을 벗어나 보다 깊은 진리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 현대 사상이나 철학, 문학, 예술 등의 공통적인 흐름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흐름을 외면하고, 왜곡하며, 배제하는 유일한 영역이, 바로 종교다.  이찬수 교수는 “종교가 우주에 통하는 보편적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그런 진리도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수용되고 표현되는 순간,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달을 보라고 가리키면, 사람들은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보고 있습니다. 지극히 제한된 언어의 함정에 빠져, 언어를 넘어서는 참된 우주적 진리, 보편적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찬수 교수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개신교, 천주교, 유교, 불교, 이슬람 등의 언어가 사실은 종교에 대한 참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각기 다른 듯이 보이는 종교를 하나의 이름으로 명사화하여 표현하는 것은, 그 내면에 각각의 종교가 그 이름만큼이나 서로 다른 종교이며, 결코 공통적인 부분을 갖지 않는다거나 서로 소통할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도 합니다. 각각의 종교들이 오직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존재할 뿐, 서로 융합하기는커녕 대화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명사와 명사 사이에는 오직 차이를 강조하는 두터운 벽이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차이의 벽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종교간 차별을 정당화시키고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한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종교 영역에서 차이에 대한 맹목적인 강조와 차별하기 관행이 유독 심하다. 개신교면 개신교, 천주교면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각각의 이름에‘만’ 절대적인 전우주적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찬수 교수는 “종교를 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의 ‘이름’으로 최종 규정하고 구분하는 순간 종교 본연의 세계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오직 기독교의 진리, 이슬람의 진리, 불교의 진리만이 서로 떨어져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 자체가 반종교적이며, 반진리적이다. “종교를 명사로만 이해하면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이라는 ‘신’의 속성이 각각의 ‘명사’로 국한돼 제한적이며 편협한 ‘신’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종교는 자신들의 신이 ‘무소부재’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모순이며, 인식의 왜곡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 신·진리에 대한 이와 같은 편협하며 제한된 이해를 벗어나기 위해 이찬수 교수는 명사가 아닌 ‘형용사적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이슬람 등이라고 잘라 말하기 보다는, ‘개신교적’, ‘천주교적’, ‘불교적’, ‘이슬람교적’이라는 표현이 종교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 오히려 종교 본연의 모습을 더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서로 이질적인 개신교와 천주교라는 소통불가능한 집단이 있다고 한다면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 개신교‘적’ 접근과 천주교‘적’ 접근이 있는 것이라면, 그 둘은 서로 배타적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이찬수 교수의 표현을 쓰자면 “종교간 벽이 무너지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존경할 만한 종교인들이 대부분 ‘기독교적인 불자’, ‘불교적인 기독교인’인 점을 본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누구든지 유무형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타자에게 강요한다면, 그 사람은 폭력적이며 제국주의적이라는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 조화와 관용을 최대 덕목으로 내세우는 종교는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짓을 ‘당연한 종교 행위’로 거꾸로 내세우고 있다. 안타깝지만 현대 종교, 특히 한국 종교 문화의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이찬수 교수는 “다양한 종교 문화가 혼재하는 한국 사회야말로 현대적 의미의 올바른 신학을 고민하고 이뤄나가기에 적당한 토양”이라고 지적하고, 3강부터 한국 종교 문화와 다양한 종교 등을 좀더 깊이 살펴보기로 하였다.  다음 강의는 “이슬람의 이해와 종교간 대화”를 주제로 한양대 이희수 교수의 특강으로 진행된다. 국내에서 이슬람 바로 알기에 앞장서고, 유익하고 즐거운 강의로 유명한 이희수 교수는 다문화 시대에 기독교 지상주의가 갖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기독교를 포함한 타종교와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이슬람교의 포용성을 이야기 할 것이다. 강의는 목요일(18일) 저녁 7시에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진행된다.  이찬수 교수의 기본 강의 외에 25일(목)에는 윤영해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를 주제로 특강을 하며, 2월 6일(화)에는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특강을 한다. 모든 강의에는 개별 수강신청이 가능하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219 | 추천: 0
'역사의 길, 생각의 힘' - 최인훈의 사유지평에 포착된 역사 여행  현대사회는 경제적 유용성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돈으로 쉬 환산되지 않으면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고 말지요. 특히 생각은 쓸모도 쓸데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일쑤입니다. 해야 할 일을 방해하는 ‘괜한’, ‘허튼’, ‘엉뚱한’ 훼방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생각은 인간의 특질입니다. 인간의 학명(學名)은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인간에서 생각을 빼면 로봇이 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진법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는 기계가 됩니다.  우리가 계산기계가 아니라 슬기인간임을 새롭게 -혹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 인간이 걸어온 역사의 길을 돌아보려 합니다. 언제부터? 인류의 시원에서부터. 언제까지? 21세기 ‘지금 여기’까지. 어떻게? 최인훈의 사유지평에 현상된 역사적 순간들을 인화해서! 왜, 최인훈? 최인훈이란 ‘개체’는 인류의 ‘계통’발생의 전 과정을 반복적으로 상상적 사고실험 했고, 그 전 과정을 알아볼 수 있게끔 꾸준히 기록해온 ‘생각의 거인 중의 거인’이므로, 그의 어깨에 올라서면(무례를 용서하소서!) 슬기의 본연(本然)을 잘 보고(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강좌는 ‘인류문명에 대한 사색’이라는 부제가 붙은 최인훈의 「바다의 편지」를 나침판으로 삼아서 자연 속의 인간이 자연의 길에서 벗어나 문명의 길을 내고, 근대라는 이정표를 세우고, 대한한국을 세운 역사로의 기억여행인 셈입니다. 여가를 이용해서 슬기(인간)의 힘을 찾아 나선 여행이 자칫 강행군이 되진 않을까라는 염려는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금번 여행의 가이드는 “즐겁게 살지 못하면 지혜롭거나 바르게도 살 수 없다”는 에피쿠로스님의 말씀을 신봉한다고 합니다.   강사 소개 오인영 - 19세기 자유주의 연구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고려대 최우수 강의상인 <석탑강의상>을 10회 넘게 수상했으며, 논문으로는 「헤이든 화이트의 역사적 상상력」, 「자유주의의 진화과정에서 본 신자유주의」, 「어느 역사학자의 자기반성」 등이 있고, 「과거의 힘」,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등을 번역했다.  <안내> * 일시 : 10월 17일(금) ~ 11월 7일(금) 저녁 7시30분~9시30분, 매주 금요일 4주간 진행 * 장소 :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4층 아트컬리지 2 (지하철 1호선 대방역 3번출구 이용) * 수강료 : 50,000원 (회원, 학생, 활동가 40,000원), (개별수강 15,000원) 입금 계좌번호 (국민은행 491001-01-183310)                 환불규정 : 개강 1주일전 - 전액 환불, 개강 3일전 - 50% 환불, 개강 당일 환불 불가 * 강의는 최인훈의 「화두 1, 2」(문학과지성사, 2008)와 「바다의 편지」(삼인, 2012)를 교재로 삼아 진행될 예정입니다.  「화두 1, 2」와 『바다의 편지』를 미리 읽고 강의를 들으시기를 권합니다. <강의일정> 순 서 일 자 강   의 1강 10/17 * 인류사의 위대한 순간들 - 역사의 길이 열리려면 - 인간의 '이중진화(dual evolution)' 2강 10/24 * 근대사의 중요한 순간들 - 서양이 열어놓은 근대의 길 - 근대적 사유 : 합리성과 ‘급진적 계몽의 몰락’ 3강 10/31 *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들 -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 4강 11/ 7 * 사실과 상상의 길트기 - 인물로 보는 20세기 현대사 - 기억과 꿈의 서사 속에서 ‘완전한 개인’되어보기
2017-08-09 | hrights | 조회: 173 | 추천: 0
[기획강좌] 영화로 보는 인문학  2014년 6월, 영화감독 박흥식과 함께 하는 <영화로 보는 인문학> 강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는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에 인문학 곧 문학, 역사, 철학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박흥식 감독의 안내를 받으며 4편의 영화 이야기를 통해 인문학과 만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관심있는 여러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강사 소개 박흥식(영화감독) -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다.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과 중앙대, 고려대 문예창작학과대학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단편영화 <하루>가 토리노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국제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다. 2005년 첫 장편<역전의 명수>를 만들었고, 두 번째 장편인 <경의선>으로 25회 토리노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과 남우주연상(김강우)을, 피렌체한국영화제에서는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안내> * 일시 : 6월 3일(화) ~ 6월 24일(화) 저녁 7시30분~9시30분, 매주 화요일 4주간 진행 * 장소 :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4층 아트컬리지 2 (지하철 1호선 대방역 3번출구 이용) * 수강료 : 50,000원 (회원, 학생, 활동가 40,000원), (개별수강 15,000원) 입금 계좌번호 (국민은행 491001-01-183310)                 환불규정 : 개강 1주일전 - 전액 환불, 개강 3일전 - 50% 환불, 개강 당일 환불 불가 <강의일정> 순 서 일 자 강   의 1강 6/ 3 1. 영화와 역사철학 -  <베를린 천사의 시> 2강 6/10 2. 영화와 문학 - <안나 카레니나> 3강 6/17 3. 영화와 신학 - <가을 소나타> 4강 6/24 4. 영화와 서사학 - <경의선>, <하루>  * 수강자에 한하여 강좌에서 살펴볼 영화 파일(동영상)과 글을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영화와 글을 미리 읽고 강좌를 들으시기를 권합니다. 수 강 신 청 하 기~(클릭) ◎ 강의 소개 1강 - 영화와 역사철학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1987)는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이 정교하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죄 가운데 하나를 저지른 독일은, 오늘날 가장 바람직한 국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을 이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독일인들의 역사인식을 통해서 가늠해 본다. 영화<베를린 천사의 시>와 이 영화에 대해 박흥식 감독이 쓴 해설이 교재다. 이 해설은 다음 인터넷 주소에 실려 있다. (http://www.aporia.co.kr/bbs/board.php?bo_ table=otiumsanctum&wr_id=75) 2강 - 영화와 문학  그 분량 때문에라도 다가가기 쉽지 않은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을 영화로 만난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쓴 후 문예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여 구도자가 되어 농민들과 함께 초기 기독교적인 삶을 실천한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2013)와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2009)를 통해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을 일별하고자 한다. 3강 - 영화와 신학  영화 철학자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가을 소나타>(1978)를 신학적으로 접근해 본다. 이 작품은 모녀의 갈등과 화해, 상처와 치유에 관한 영화이다. 또한 베리만이 초기 영화들에서 문제 삼았던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왜 침묵하는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주제를 <가을 소나타>와 베리만의 초기 영화, 소위 ‘침묵 3부작’을 통해 살펴보고, 이에 대해 특별히 신학자 정경일 님을 모시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 신학자 정경일  정경일은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에서 종교간 대화와 조직신학을 연구했고, 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을 비교 연구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한국 그리스도교의 창조적인 두 신학운동인 '민중신학'과 '종교신학'의 상호 변혁적 만남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현재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평신도 신학자로서 민중신학회, 대화문화아카데미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4강 - 영화와 서사학  우리는 생각도 말도 이야기로 한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서사이다. 서사를 연구하는 학문은 매체의 변화에 따라 시학, 문예학, 서사학으로 진화해 왔다.  박흥식 감독의 장편 <경의선>(2006)과 단편 <하루>, 그리고 「이야기학의 정립을 위하여」라는 소논문을 바탕으로 이야기 전반, 곧 인문학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240 | 추천: 0
「인권강사 양성과정」  인권연대가 새로운 개념의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인권교육 강사 양성 과정입니다. 인권교육의 필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인권교육의 수요도 갈수록 늘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인권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강사들은 많지 않은 상황이고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인권연대는 인권교육을 회원 여러분들과 함께 진행하고 싶은 마음에 ‘인권강사 양성과정’을 마련했습니다. 인권의 여러 분야를 살펴보는 한편, 인권교육 방법론 등의 강의를 통해 인권교육으로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 안내 ○ 일시 : 2014년 2월 17일 ~ 4월 8일(매주 월,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 반까지) ○ 장소 : 서울시 동작구 대방동 345-1 서울여성플라자 2층 NGO센터 열린마당 (지하철 1호선 대방역 3번출구 이용) ○ 주최 : 인권연대 교육센터 ○ 진행 : 8주간 총 40시수 ○ 대상 : 인권교육에 관심 있는 누구나 ○ 모집인원 : 선착순 25명(신청 마감) ○ 수강료 : 25만원 입금 계좌번호 (국민은행 491001-01-183310 예금주: 인권연대) ○ 접수 및 문의 : 전화) 02-749-9004/ rights1999@naver.com*환불 규정 안내 - 개강 1주일전 : 전액 환불/ 개강 3일전 : 50% 환불/ 개강 당일날 취소시 환불 불가 [프로그램] 주 차 일 자 시 간 강  의 강  사 1주 2/17(월) 19:00 - 21:30 유엔의 인권레짐 박경서/ 前 대한민국 인권대사 2/18(화) 문화와 인권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2주 2/24(월) 현대사회와 인권교육/ 독일사례 연구 정범구/ 정치학 박사, 前 국회의원 2/25(화) 역사와 인권 오인영/ 고려대 교수 3주 3/3(월) 인권담론의 허와 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3/4(화) 노동과 인권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4주 3/10(월) 현대사회와 인권교육/ 프랑스사례 연구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3/11(화) 언론과 인권 안수찬/ 한겨레 기자 5주 3/17(월) 녹색과 인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3/18(화) 세계인권선언의 한계와 과제 장은주/ 영산대 교수 6주 3/24(월) 지역과 인권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3/25(화) 형사사법과 인권 김희수/ 변호사, 前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7주 3/31(월) 종교와 인권 이찬수/ 서울대 교수 4/1(화) 인권교육방법론Ⅰ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8주 4/7(월) 인권교육방법론Ⅱ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4/8(화) 문화와 인권 이지상/ 가수 겸 작곡가
2017-08-09 | hrights | 조회: 276 | 추천: 0
<역사의 뜰을 거닐다 시즌3>  - 인간다움의 시원(始原)을 되돌아보다!  눈앞의 현실세계는 참으로 막막합니다. 몰상식이 상식을 내치고, 거짓이 진실을 질타합니다. 사사로운 욕심이 사회적 신뢰를 파괴하고, 자유를 옥죄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만행이 역사적 위업으로 둔갑합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가치전도(顚倒)의 현상이 만연하게 된 것일까요? 어쩌면 잘못은 몰상식, 거짓말, 탐욕, 후안무치에게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파렴치한 것은 철면피(鐵面皮) 인간이지 쇠가죽이 아닐 테니까요. 칼은 언제, 누구 손에 있느냐에 따라 흉기도 되고, 이로운 도구도 됩니다.  우리가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에 거하려면, 인간의 민낯을 직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짐승처럼 생존하는 게 아니라 인간답게 생활하려면, 철면을 쓰기 전후의 ‘생얼’까지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의 근원적 존재조건과 다양한 면모를 궁리하다보면, 눈앞의 현실세계도 장구한 인간역사의 한 단면으로 객관화하여 상대할 힘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뜰 시즌3>에서는 역사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인간의 존재조건과 인간다움에 대해 돌아보려 합니다. 현실의 인간은 변하기 쉽고 추상의 인간은 실감이 덜한 지라, 강의는 역사적 인물들을 사례로 진행됩니다. 옛날 옛적의 먼 동네(고전고대 서양) 사람들이 모델이니만큼, ‘색깔 편향이나 낙인찍기’ 따위의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제가 진지하다고강의도 진중하게 진행되리라는 예단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고려대학교 석탑강의상을 10회 수상한 오인영 교수가 여러분을 ‘인간다움의 시원’으로 경쾌하게 안내할 것입니다.    <안내> * 일시 : 11월 15일(금) ~ 12월 6일(금) 저녁 7시30분~9시30분, 매주 금요일 4주간 진행 * 장소 : 가톨릭 청년회관 3층 바실리오홀 모임방 13 (2호선 홍대입구역 2번 출구 인근) * 수강료 : 50,000원 (회원, 학생, 활동가 40,000원), (개별수강 15,000원) 입금 계좌번호 (우리은행 1005-801-523022)                 환불규정 : 개강 1주일전 - 전액 환불, 개강 3일전 - 50% 환불, 개강 당일 환불 불가 <강의일정> 순 서 일 자 강   의 1강 11/15 ○ 인간의 원형(原形), 오이디푸스  1차시 미스터리 추리물로 꾸며진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 2차시 오이디푸스에 관한 세 개의 해석 - 인간의 존재조건 2강 11/22   ○ 철인의 시조(始祖), 소크라테스 1차시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는 당대 아테네인의 시선 2차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인간다운 삶’ 3강 11/29   ○ 대왕의 전형(典型), 알렉산드로스  1차시 알렉산드로스의 라이프 스토리와 콤플렉스 2차시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 - ‘좋은 삶’ 4강 12/ 6   ○ 권력의 화신(化身), 카이사르  1차시 카이사르의 라이프(/러브) 스토리 2차시 ‘하는 일’과 ‘아는 일’ - ‘역사적 삶’
2017-08-09 | hrights | 조회: 13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