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강좌

  ‘맥콘도’를 아시나요? … 꿈틀거리는 중남미의 일상을 읽다 - 인권연대 중남미 강좌 종료 사람소리 편집부 34개국 약 5억 명의 인구. 기존의 원주민어 이외에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 불어, 네덜란드어가 혼합된 언어 공동체. 인디오, 유럽계 백인, 흑인, 메스티소, 물라토, 삼보로 구성된 다양한 인종. 그리고 권위주의부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까지….  간단히 ‘중남미’ 혹은 ‘라틴아메리카’로 말하는 지역의 간단하지만은 않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남미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카스트로나 차베스로 대표되는 ‘반미적’ 정치 실험과 중남미의 풍부한 관광자원만이 호기심의 전부가 되곤 한다. 중남미엔 차베스만 있나?  지난 4월 3일부터 매주 화·목 저녁에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진행된 기획강좌 ‘중남미 세계의 이해’는 중남미 지역 사회 전반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집중적으로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이번 강좌의 주요 대상은 중남미에 관심을 갖는 비전공자들이다. 사실, 대학을 벗어나 일반 시민들이 중남미 세계를 구석구석 훑어 볼 기회는 많지 않다. 대학도 크게 다르진 않다. 중남미 학과가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대학은 거의 드물다. 대부분 스페인어나 스페인문학과에서 부분적으로 다뤄지고 있을 뿐이다. 형식적인 여행안내서 외에 쉽고 친근하게 중남미를 접할 수 있는 전문 도서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8강으로 구성된 이번 강좌에서는 고대 문명에서부터 해방 공간과 쿠바 혁명, 차베스의 자원민족주의와 지역 경제통합 운동,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과거청산 등을 다루며 중남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정치, 경제, 사회를 골고루 다뤘다. 또한 스페인 바로크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중남미 문학의 큰 틀을 읽어가며 지역민들의 생생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로 교사와 대학생들로 구성된 40여명의 수강생들은 단편적인 정보와 선입견만으로 이해하던 중남미 지역을 전문가와 함께 구체적으로 나눌 수 있었던 자리라고 평가했다. 한 수강생은 “‘차베스 대 미국’을 강조하는 언론의 보도가 다분히 서구적 관점에서 ‘반미’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에 기댄 것임을 알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차베스의 정치적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과 대외 정치경제적 맥락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중남미 국가들은 19세기 초에 4백여 년에 이르는 유럽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고, 세계 대공황을 계기로 수입대체산업화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1959년의 쿠바 혁명은 ‘중남미란 무엇인가’ 라는 모호한 물음을 역사적으로 구체화한 사건이었으나, 1980년대의 외채위기와 이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라는 대혼란의 흐름 속에서 중남미의 정체성은 다시 한번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계속되는 중남미의 정체성 탐구  특히, 수강생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세계화의 벽을 마주하고 있는 중남미의 미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시민운동을 하는 한 수강생은 “‘마꼰도’와 ‘맥콘도’의 비유가 특히 인상에 남았다”라고 말했다. ‘마꼰도’는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백년간의 고독’에서 창조해낸 마을로 중남미 역사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반면, ‘맥콘도’는 ‘맥도날드, 맥킨토시, 콘도미늄’으로 구성된 세계화된 마을로, 국가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짐을 벗어버리고 미국의 영향과 세계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돌입하려는 문화적 흐름을 가리킨다.  다른 수강생은 “최초의 중남미 문학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의 항해일지라는 문학 강의를 듣고, 중남미의 정체성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라고 말했다. 중남미 지역의 문화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부산물로 여겨지는 이면에서, 원주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다.  이번 강좌는 총8강에 그쳐 보다 세세한 중남미의 모습을 살펴보지 못한 한계도 있다. 시간적으로 수 천 년 혹은 수 백 년의 역사를 읽어내야 하는 문명이나 문학 강의는 주어진 시간이 짧아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중남미 지역의 전체 흐름을 개괄적으로 확인하다 보니, 종교 문제를 비롯하여 소수 인종들의 구체적인 삶과 문화를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어려웠다.  ‘이슬람 세계의 이해’에 이어 지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강좌를 진행한 인권연대는 앞으로 보다 많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좀 더 심화된 중남미 강좌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중남미 강좌의 강의록은 별도로 구입할 수 있다. 관련 문의: 인권연대(02-3672-9443)
2017-11-09 | hrights | 조회: 214 | 추천: 0
  <중남미 세계의 이해>  한국 사회에서 중남미는 오로지 ‘좌파 정권’과 ‘개척 시장’이라는 두개의 창으로만 들여다보이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중남미는 미국의 뒷마당일 뿐, 중남미인들의 전체적인 삶과 철학은 21세기형 콜럼버스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좌파 vs 시장’에 국한된 관심이 그간의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서구식 발전이데올로기의 산물은 아닐까요.  인권연대가 국내 전문가들과 함께 중남미 지역을 세계사 무대의 주연으로 내세우는 강좌를 만들었습니다. 인디오부터 체 게바라, 카스트로, 룰라, 차베스 그리고 파울로 코엘료까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경제의 큰 틀을 동원해 중남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바랍니다.              - 강좌 신청이 마감되었습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주 최 : 인권연대 교육센터 * 일 정 : 2007년 4월 3일(화) ~ 26일(목). 매주 화, 목 저녁 7시. * 장 소 : 인권연대 교육장(4호선 한성대입구역 7번 출구에서 2분 거리) - 엘리베이터가 없어 휠체어 이용 장애인에게 불편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찾아오시는 길(☜ 클릭) * 수강료 : 전체강좌 4만원(인권연대 CMS 회원, 단체활동가, 학생 20% 할인) * 입금계좌 : 국민은행 003-21-0712-089(예금주 오창익) * 모 집 : 선착순 40명(입금순으로 마감합니다) * 신청 및 문의 : 인권연대 교육센터(02-3672-9443) hrights@chol.com, www.hrights.or.kr   일 정 강    의 강 사 4/3 (화) 왜 중남미인가 곽재성/경희대 국제대학원 현재 중남미에 대한 한국 사회 일반의 인식 수준을 점검하고, 하나의 지역 공동체로서의 ‘중남미’에 대한 지리적, 역사적, 정치경제적, 문화적 특성 등을 간략하게 짚어봅니다. 또한 왜 중남미 지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지를 함께 고민해 봅니다. 4/5 (목) ‘아포칼립토’, 새로운 시작인가 쇠퇴인가 이종득/덕성여대 스페인어과 고대 마야·잉카·아즈텍 문명의 인류사적 의의와 서구 문명간의 혼합의 역사를 통해 중남미 지역의 독특한 역사적 특징을 살펴보고, 현대 중남미 지역에 남아 있는 문화적 특성과 영향들을 살펴봅니다. 4/10 (화) 포퓰리즘인가 민주주의인가: 해방 공간과 군부 쿠데타 차경미/경희대 스페인어과 유럽의 중남미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의 특성을 알아보고, 해방 이후, 민족국가 수립과정에서의 군부의 역할과 중남미 ‘권위주의 정부’의 한계와 의의를 살펴봅니다. 4/12(목) 쿠바 혁명, 그 이후...! 김기현/선문대 중남미학과 쿠바 혁명의 역사적 배경이 된 지정학적 요인과 국내 정치적 요인, 혁명을 통해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국제정치경제적 위상 등을 알아보고 카스트로 이후 쿠바의 모습을 전망해 봅니다. 4/17 (화) 볼리바리안 혁명 - 차베스: ‘신사회주의’는 가능한가 김달관/단국대 스페인어과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권의 집권을 둘러싼 국내외 정치경제적 배경을 알아보고, ‘볼리바리안 혁명’으로 불리며 진행돼 온 베네수엘라의 급진적 개혁이 본격적인 ‘신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할 수 있는지를 전망해 봅니다. 4/19(목) 영원한 뒷마당은 없다: 중남미 경제 통합 운동 개괄 문남권/한국외대 중남미연구소 라틴아메리카 자유무역지역(LAFTA)부터 중미공동시장(CACM), 안데스 공동시장(ANCOM)을 거쳐 남미공동시장(MERCOSUR)과 안데스 협정의 재건에 이르는 중남미 지역 경제 통합의 전개와 특징을 개괄하고, 새로운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와의 관계를 알아봅니다. 4/24 (화)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과거청산 곽재성/경희대 국제대학원 과거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의 민중학살의 규모와 양상을 알아보고, 현재 진행중인 과거청산 작업을 둘러싼 국민적 정서와 사회 각 부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청산 작업의 장애 등을 들어 봅니다. 4/26 (목) ‘돈키호테’부터 ‘연금술사’까지: 중남미 문학을 읽는다 신정환/한국외대 스페인어과 중남미 문학의 역사적 시원을 이루는 스페인의 ‘돈키호테’에서부터 근현대의 중남미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파블로 네루다, 루이스 세풀베다 등의 주요 작품을 통해 중남미의 독특한 문학적 특징과 사회문화적 정서를 알아봅니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163 | 추천: 0
“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거야…” 이찬수 교수의 시민종교강좌 종강 최철규/ 인권연대 간사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깨끗하고 엄격한 선민을 자처하는 유대인 베드로가, 신앙에는 충실하지만 불결한 이방인쯤으로 여기던 고르넬리오라는 백인대장의 초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만남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사도행전 10:34-35)  ‘성서적 타종교관’을 주제로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마지막 강의를 진행한 이찬수 교수는 베드로의 고백이 “관례에 따라 이방인을 금기시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그 동안의 태도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비로소 알게 된 중요한 고백”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은 민족중심의 유대교가 현재와 같이 보편적인 그리스도교로 전환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교를 보편종교로 만든 베드로의 고백  1세기 그리스도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는 우상숭배 논쟁이었다.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공동체와 신의 재통합을 위한 의례로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는 관행이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신이나 우상이라고 생각되던 것에 제물로 드렸던 것을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느냐를 고민했다.  바울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상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또 하느님은 한 분밖에 안계십니다. 남들은 하느님도 많고 주님도 많아서 소위 신이라는 것이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고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 분을 위해서 있습니다.”(고린도전서 8:4b-6a)  이 교수는 이방인이나 우상숭배 등에 대해 성서가 알려주는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하느님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중요한 책이지만,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문자를 통해 신앙을 드러낸 사람들의 상황과 생각을 유추하며 맥락을 읽어가는 행간 읽기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십계명의 일부인 우상숭배 금지 조항은 구체적인 형상 안에서 신을 찾는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몰이해에 대한 사제들의 신학적 경고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는 구체적인 형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우상숭배 금지 규정은 없으며, 음행이나 탐욕 등 세상일에 마음 쓰는 행동을 비유적으로 우상숭배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우상에 대한 성경의 속뜻보다는 고대 유대교의 율법적 정의에만 얽매어 어떤 형상에 절하기만 하면 무조건 단죄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바울로가 말한 것처럼, 천지의 창조주이고 주재자인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신에 대한 상대성의 오류와 유일신에 대한 몰이해에 빠져 있다.  “신이 있다, 없다라는 논쟁은 그 자체가 신을 있거나 없거나 하는 상대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는 커다란 오류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다’ 또는 ‘나는 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야훼’(I am that I am)라는 말 자체가 다른 그 무엇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인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마치 여러 신들 중의 최고신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표현도 신에 대한 부정이며 성서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많은 목사들도 다른 신을 경쟁자로 생각하며 최고신적 관점에서 하느님을 이해하는 신앙을 갖는데, 그러면서도 유일신을 강조합니다. 말 자체가 모순이며 유치한 발상에 불과합니다. 유일신이 갖는 속뜻은 ‘하나는 전체’라는 것이므로, 결국 여러 신들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그 모든 것 안에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이 교수는 한국의 개신교가 ‘문자 속에 신을 가두고 죽이는 성서 절대주의의 오류’에서 빠져나와 성서의 행간에 스며있는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신을 제대로 이해해야 예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고, 이를 토대로 다른 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자이며 유일자인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서는 하느님이 성서안에도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성서를 넘어서는 그 어떤 곳에도 존재하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성서를 성서답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문자에 갇히지 않는다’  마지막 강의를 마치며 이 교수는 “나누고 싶은 얘기는 많은데 시간이 항상 부족해서 참 안타깝다”라며 강좌를 끝내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또한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지 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갖으면 좋겠다”라는 바람도 전했다.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강좌는 이슬람, 불교, 똘레랑스를 주제로 이희수 한양대 교수와 윤영해 동국대 교수,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특강을 하였으며, 이찬수 교수가 5강을 진행했다.  “다양한 종교들을 통해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였으나,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했던 이야기들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그렇게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귀한 존재이니까요….”  
2017-11-09 | hrights | 조회: 168 | 추천: 0
  “한국사회는 몰상식, 종교도 마찬가지” 이찬수 강좌 7강…“종교적 차별 아직 덜 부각됐을 뿐” 박용석/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한국사회는 몰상식한 사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아닌 외부의 논리에 지배당하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합니다. 종교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제가 종교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한국 사회 전체에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극단적인 모습으로 들어서 있기 때문에, 현재 제기되는 억압적이며 배타적인 한국 종교 문화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지금까지 커다란 쟁점이 됐던 사상과 지역 차별 문제에 가려 종교적 차별이 그나마 덜 부각되었을 뿐입니다.”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지난 6일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에서 특강을 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은 이찬수 교수의 부당해직을 통해 드러난 종교 사학의 억압과 차별, 배제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을 이같이 지적했다. ‘관용’이 아닌 ‘용인’과 ‘화이부동’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고 규정지으며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홍 위원은 “인간이 ‘합리적’인 동물이라면 자신의 오류가 드러났을 때 자신을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오류에 대한 수정을 해야 하는데, 인간은 오히려 자신의 오류를 ‘합리화’ 시키는 동물인지도 모른다”며, 인간을 합리적인 동물로 만드는 요소로써 이성적 자기비판과 통찰의 과정인 ‘똘레랑스’를 제시했다.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이를 통해 자기 성찰의 길로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똘레랑스’는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나와 다르지 않은 남’을 인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홍 위원은 “‘똘레랑스’는 ‘관용’이 아니라 ‘용인(容忍)’이며 더 정확히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라고 말한다.  관용이란 말엔 남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를 용서한다는 자기 우월적인 뉘앙스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에, ‘똘레랑스’를 ‘관용’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를 ‘틀리다’로 보는 것만큼이나 옳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남의 차이를 구분 짓기 위해 자신의 의식과 논리에 우월성을 찾으려 하고, 이런 맥락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차별, 억압, 배제하는 것을 묵인하며 자신을 합리화 한다”며 인간은 ‘합리적(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 하는 동물’임을 재차 강조했다.  합리화의 근거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바로 우성과 열성이며, 옳고 그름, 또는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 기준이다. 자기반성 없는 이성이 얼마만큼 위험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타율적인 이성 지배의 심각성  17세기의 인문학자 스피노자는 ‘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 ‘고집’이 과연 자신이 의식적으로 접한 정보를 통해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인가의 문제인데, 홍 위원은 “한국 사회에 팽배한 고집은 자신이 경험하거나 성찰하지도 않은 의식에 대한 고집”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정보의 원천이 많지 않았던 과거에는 최소한 자신이 성찰하지 못한 지식에 대해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유식’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보가 일상의 곳곳에 넘실대는 현대에는 주워들은 파편적인 정보, 나아가 왜곡되고 과장된 허위 정보를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착각하는 ‘무지’가 넘쳐난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의식이라 믿고 있는 그 의식이 과연 어떤 식으로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무감각이다. “이런 의식 수준으로 ‘남과 다른 나’를 구분 지으며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인간의 행태가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라는 홍 위원의 일갈은 이번 강의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똘레랑스’ ‘자발적 복종’ 등의 개념으로 한국사회의 문제를 일관되게 비판하던 것과도 다르지 않다.  아울러 절에서 불상에 절을 한 이 교수의 행위에 대해 ‘우상숭배’ ‘이단’이라고 낙인찍어 내몬 강남대나 보수교단의 가르침에 따라 이 교수의 행동에 대해 무작정 비판만 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이기도 했다.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은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은 공공성이며, 공공성은 ‘똘레랑스’라는 타자 이해와 상호존중의 원칙이 지켜질 때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너 전라도 사람이지?’  강의 중 홍 위원은 ‘너 전라도 사람이지’와 ‘너 경상도 사람이지’란 물음이 같은 의미인지를 물었다. 단순히 출생지역을 묻는 질문임에도 여전히 같은 질문일 수 없는 한국사회의 미숙함을 돌아보게 하는 물음이다. ‘너 빨갱이지’와 같은 말은 한국 근현대사의 암울한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예이며, 아직도 한국 사회의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한국의 근대화가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국가, 민족, 경제, 사회, 인권 등 근대성을 나타내는 많은 말들이 대부분 외국에서 빌려온 개념이며, 그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앞서 말한 ‘너 전라도 사람이지’ ‘너 빨갱이지’와 같은 지역, 사상에 의한 차별은 물론이거니와 이찬수 교수의 부당해직 사태와 같은 종교에 의한 차별, 그리고 장애, 성 정체성, 학력, 출신지역(이주노동자)을 근거로 한 차별이 극명하게 존재하는 사회다.  유태인 대학살과 2차 대전의 참극을 경험한 유럽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교훈을 통해 사회적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홍 위원은 “프랑스에서는 ‘너 유태인이지’ ‘너 노랑(황인종, 유색인종)이지’라는 말은 법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언어로 규정돼 있으며, 그에 따라 처벌을 받기도 한다.”는 예를 들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에 대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생략한 채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만을 수용해 이러한 안전장치를 만들지 못했다. ‘너 전라도 사람이지’와 ‘너 유태인이지’란 말에 대한 문화권의 서로 다른 태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미숙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억압과 차별을 넘어  홍 위원의 강의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다름의 차이를 ‘악’ 또는 ‘틀린 것’으로 규정하는 자기의 주장과 의식을 합리화하는, 20의 인간이 지배하고 80의 인간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자발적 복종’의 사회에 살고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홍 위원은 이런 모순된 사회를 극복할 가장 중요한 기제로 ‘공공성’과 ‘똘레랑스’를 강조했다.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은 공공성이며, 공공성은 ‘똘레랑스’라는 타자 이해와 상호존중의 원칙이 지켜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지켜질 때 다름은 더 이상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나와 타자와의 비교로 우월성을 유지하는 저급한 자기의식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성숙한 자기의식과 성찰이 가능해야 할 것”이라는 홍 위원의 말은 이찬수 교수 문제를 비롯한 우리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실천의식으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161 | 추천: 0
  “예배당을 넘어서 인간과 세계를 보라” - 이찬수 교수의 '종교적 다양성을 소화해 낸 신학' 강의 최철규/인권연대 간사  (보편적인) ‘신’을 마주 대하는 신학은 모든 신앙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서로 종교적 주소를 달리하는 신앙인들에게도 큰 반감 없이 설명되고 받아들여져야 학문으로서의 위상도 세워진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이론을 넘어서기 마련. 다양한 종교 현상 앞에 보편적 신학의 기틀을 세우기는 좀처럼 쉽지 않으며, 예외를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대표적이다.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제6강을 진행한 이찬수 교수는 신학계에 종교다원주의 논쟁을 던져준 캐나다 출신의 미국 종교사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와 독일의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를 통해 현대 신학의 역할과 과제를 설명했다. 종교는 사물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   그리스도교 신학, 불교 신학, 이슬람교 신학 등의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전통 신학은 종교 생활을 저마다의 교리 체계에 근거한 상호 배타적인 집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해 있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종교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통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통념은 과연 역사적 사실일까. 역사속에서 종교의 흔적을 더듬어 종교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고찰한 스미스는 그의 주저 '종교의 의미와 목적'(1991)에서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상호 대립적인 실체들로서의 종교개념은 그 어떤 고대 종교적 문헌에도 들어있지 않을 뿐더러, 서구에서 지난 200여 년 동안 전 세계로 수출한 근세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인류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자리잡은 종교적 현상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끝없이 변화하며 쉬지 않고 생성되는 것이어서, 특정한 인간집단이나 개별적인 교리 체계안에 묶어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태초에 신이 있었고, 신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라는 신의 창조성으로부터 신앙의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선험적 추론을 거부한 스미스는 진정한 신학자의 모습을 종교 역사가에서 찾고,  일차적 탐구 대상을 ‘축적적 전통’이란 이름으로 제시했다. ‘축적적 전통’은 신앙이 외적으로 표현된 다양한 문화유산 전체를 뜻하며, 경전이나 제도, 종교 의례나 교리체계, 관습과 법률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축적적 전통’은 탐구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 그 자체를 만들어낸 또는 전통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근원인 ‘신앙’으로 인도하는 표시들이며, 상징의 역할을 한다. 이찬수 교수는 “신앙이란 종교 생활의 내면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말이며, 초월적인 세계에 응답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능력 그리고 자신, 이웃, 우주에 대한 인격적 정향”이라고 설명했다. 종교가 있는 곳은 바로 이 ‘신앙’이지, 결코 교리체계나 의례와 같은 상징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종교인들은 객관적인 형상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상징의 홍수 속에서 종교를 찾고 있을 뿐 그 종교적 삶을 사는 사람의 마음, 즉 신앙을 보지는 않는다. 내면을 보지 않고 형식화된 종교성만 바라보는 결과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상숭배’ 논쟁이다.  이 교수는 “나무와 돌을 통해 초월적 실재를 느끼는 그 신앙인의 신앙을 떠난 관찰자에게는 그저 나무와 돌만 있을 뿐”이라고 지적하며, “상징이나 성현을 통해 궁극적 실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닌 삶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종교 그 자체가 하나의 인격체이며, 그러한 종교에 대한 접근도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인 신앙인의 관계, 그리고 관찰대상에 대한 인격적 접근의 여부는 종교에 대한 서양의 접근을 구별하는데 도움을 준다. 스미스는 서양의 전통적 접근이 냉철한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른 이들의 종교를 하나의 사물인 ‘그것(it)’으로 본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인격화가 이뤄진 최근에는 다른 이들의 종교를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인격 주체인 ‘그들(they)’로 드러낸다. 그러나 여전히 관찰자는 단순한 타자에 불과한데, ‘그들’에 관찰자의 존재가 더해지는 순간 그 대상은 ‘나’를 포함한 ‘우리(we)’가 된다. 그 다음 단계는 우리가 ‘너(you)’에게 말하는 대화의 단계다. “이런 발전의 최종적인 것은 우리 모두 (we all)가 서로 우리 자신(us)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특정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신학은 더 이상 설 곳이 없으며, 세계 종교사적 관점을 아우르는 ‘세계 신학(World Theology)’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계 신학’은 보편적인 인간의 신앙을 연구함으로써 세계 모든 신앙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이므로, 기독교 안에서만 통하던 교리 신학과는 양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기존에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한 것이라면, 세계 신학적 관점에서는,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필요충분조건은 ‘사랑’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유명한 라너는 스미스처럼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서 종교의 흔적을 더듬지 않으면서도, 결국 종교적 다양성을 긍정하는 신학적 이론 체계를 이끌어 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한 카톨릭교의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구원’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어가며 종교성의 핵심을 규정하는 중요한 명제로 간주된다. 그래서 흔히 ‘구원’은 선교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구원론을 ‘예수 천국, 불신 지옥’, 또는 교회에 나가야만 구원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기독교적 구원론은 지극히 협소할 뿐이며, 오히려 반(反)신론적인 접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하느님의 은총이 오직 예배당 안에만 갇힐 정도로 왜소하거나 초라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라너는 인간을 ‘차별 없는 은총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어떠한 조건 없이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이미’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성이 있다고 보듯이, 모든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가든 그렇지 않든 다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다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이찬수 교수는 이를 “그리스도적이긴 하되,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복음 선포를 듣지 못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의 상태”라고 설명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에도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자기의 양심을 따라 행동하고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이웃에 대한 철저한 자기 내어줌의 사랑은 그러한 실천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여기저기에 퍼져 있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을 감안한다면, 교회가 단순히 협소한 공간이 될 수도 없다. 라너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구체화되는 모든 곳’, 즉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 선의의 양심을 갖고 온 힘을 다해 객관적인 실천 규범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도덕 상황을 지향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고 말한다. 만약 현재의 예배당들이 그런 ‘교회’ 공동체라면, 그곳에 속해야 구원된다는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거꾸로 “인간이 구원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이러한 라너의 신학에 대해 한스 큉(Hans Küng)은 ‘교회의 역사성을 무시한 신학적 기만’이라고 불쾌감을 나타냈고, 존 힉(John Hick)이나 니터(Paul Knitter)등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다른 종교를 평가하려 한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러한 비판들이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를 확립”하려 했던 라너의 목적을 무시한 오해라고 말했다.    또한 이 교수는 라너가 교회의 역사적 역할과 그 중요성을 무시한 것도 아님을 강조했다. 오히려 “타종교인들을 가시적인 교회의 틀 안으로 몰아넣는 것이 교회의 과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본래적 구원을 이웃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게 진정한 교회의 과제”라는 것이다. 신학의 보편성은 신앙의 보편성에서 나와야  모든 사람들을 ‘익명’이라는 전제로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는 라너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라너가 이미 익명이라는 언어가 지니는 한계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라너 스스로도 그 용어를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체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佛者)’라는 낱말에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신실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생생하게 살려내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익명의 불교인’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을 승인해야 하는 어떠한 의무도 없다.  마지막으로, 이 교수는 한국의 종교학자나 신학자들이 이른바 타종교의 연구를 보다 더 열심히 연구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대방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의 이면에 깔려 있는 유사한 종교적 지향과 믿음의 순수성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종교를 더욱더 잘 이해하고 종교간 평화로운 공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사실 조금만 알고 나면 타 종교의 신학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인간들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라너의 신학은 천도교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侍天主)’- 하늘의 주인을 내안에 모신다 - 와 일맥상통합니다.”  신앙의 보편성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종교간 넘어설 수 없는 벽을 세우는 한국 신학계의 폐쇄성과 획일화에 던지는 따끔한 일침이다.  이찬수 교수의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의 강의록은 개별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 문의: 인권연대 02-3672-9443
2017-11-09 | hrights | 조회: 154 | 추천: 0
  “예수와 지장보살은 서로 닮았다” ‘이찬수 강좌’ 5강…‘구원의 종교’라는 공통점을 가진 불교와 기독교 이연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 지옥)에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1벧3;19)라는 전승이 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이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지난 30일(화) 저녁 7시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다섯 번째 시간에 이찬수 교수의 ‘다르면서 같은 불교와 기독교’라는 주제의 강의가 열렸다. 이번 시간은 불교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이 얘기되고 있는데 실제로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불교적 언어와 기독교적 언어는 서로 다르며 지향하는 세계관도 많은 차이가 있다. 이 교수는 ‘동서철학의 만남’을 지은 김하태씨의 말을 인용해 “동양을 대표하는 불교는 직관적이고, 서양을 대표하는 기독교는 지성적인 경향이 있다”는 설명으로 불교와 기독교에 차이가 있음을 전제했다. 신과 인간 사이를 보는 다른 시각  기독교는 세계의 기원과 근거를 인격적 유일신에게서 보고, 불교는 존재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면서 일체의 기원적 존재, 인격적 신을 거부한다. 또한 기독교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신의 주도권을 부여하고 신과 인간 간의 불가역성을 말하지만, 불교는 주도권을 쥔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일적이고 우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극적 실재와 인간 사이의 가역성을 전제한다.  이 교수는 “기독교에서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 신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반면, 불교에서는 원천적으로 인간과 부처의 동일성에 대해 말한다”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분명히 갈라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종교간 신앙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닮은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 예수는 철저하게 신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였을 뿐 스스로를 신의 차원까지 높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이 예수 선포의 확실성을 위해 예수자신까지 신의 차원으로 높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깊은 수행과 명상 속에서 인생의 원리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았던 고타마 싯달타는 ‘법이 나의  스승’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고 하여 제자들에게 깨달은 이, 즉 ‘붓다’로 불리게 되었다. 붓다 역시 자신은 스스로 신격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존중과 숭배를 받게 된 것이다.  예수와 붓다는 역사 내적 존재이지만 제자들은 예수와 붓다를 그들이 전하고 실천한 하느님의 말씀 혹은 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역사적 예수와 붓다가 하느님 말씀의 구체화와 영원한 법의 구체화로 고양된 것이다. 기독교에서 영원한 하느님 말씀과 그 구체화된 육화 도식으로 하느님과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불교에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신과 그 구체화된 색신 도식으로 법과 붓다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붓다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을 보는 시각이 닮아 있다   이 교수는 불교에서 몸을 물리적 혹은 생물학적 몸과 본질 혹은 주요 부분, 두 가지로 본다고 했다. 중생은 흔히 생물학적 몸을 불변하는 실체처럼 여기고 그 욕구에 집착하지만, 이것은 극복과 타파의 대상이라고 했다. 몸에 대한 집착을 이겨낼 때 진여를 보게 되는데, 그 진여를 제대로 본 근원적인 주체가 바로 법신이며, 붓다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난 법이 바로 법신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붓다 그 본래 모습은 역사적 존재 혹은 생물학적인 몸이 아닌 붓다의 지혜(반야)인 것이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타마 붓다에 대한 강조로부터 역사적 구체성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로서의 법신에 대한 강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점이, 성서에서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초기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다가 점차 초형상적 그리스도로 전이했던 것과 유사하다.    예수나 붓다는 모두 괴로운 육체를 지니고 살았지만, 그리스도나 보신불의 몸은 그러한 근원적 괴로움의 초월자 차원에서 재조명된 몸이라는 점에서 양쪽 다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중생이 구원을 얻으려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과 ‘아들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준다’(요한14;13-14)는 하느님의 외아들 혹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는 신앙구조도 서로 통한다”고 덧붙였다.  기독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 지옥)에 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1벧3;19)라는 전승이 있다. 여기서 ‘갇혀 있는 영혼’이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1벧3;20)로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간주되는 이들이다.  알려진 바와 달리 예수는 그들을 영원한 죄인으로 남기려 하지도 않았고, 지옥에 남겨두지 도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곧바로 ‘하늘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갇혀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향했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1벧4;6)는 성경구절을 통해 “예수의 모습이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밝혔다. ‘지옥으로 간 예수’와 ‘지장보살’ 신앙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보신불이라는 양쪽 신앙구조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 비슷한 깊이를 지닌다. 기독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미와 불자들에게 아미타불, 지장보살 등 다양한 구원자들이 지니는 의미는 깊이의 차원에서 대립되기는커녕 상통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표현 형식은 모순과 우열 차원에서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저마다 신앙 체험의 근거가 되는 각 전통의 깊이 혹은 그 전통 안에서 발생한 신앙체험의 깊이에 서로 물리칠 수 없을 유사성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교수는 신학자 존 캅이 “기독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가 아미타에서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불교 신자들도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아미타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 말에 동의했다.  또 “산의 등정로는 다르지만 호연지기는 비슷하다. 구원에 대한 이론과 개념 설명이 설혹 종교마다 다양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태도에는 상통하는 점이 있다”라고 한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저마다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 내지는 근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체험은 세계관과 그 표현 방식 상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물리칠 수 없는 비슷한 깊이를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고타마 붓다에서 보신불로, 구체적 몸에서 정신적․영적 몸의 차원으로 전개되어 나간 두 종교 전통의 역사는 인간 종교 심성의 구조적 유사성과 함께 무엇보다 신앙적 깊이의 상통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에서 쓰는 용어들은 다르지만 신앙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며,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세계로, 불자는 불성의 세계로 받아들이면서 세계 해석의 기초로 삼는다”고 했다.  아울러 “표현에서는 문화적 다양성과 차별성이 드러나고 교의적 표현 내지는 세계관에서는 상반되는 듯 보이는 기독교와 불교지만, 인간 구원의 차원에서는 저마다 비슷한 깊이를 지닌 동서양의 대표적 종교전통이다”라고 정리했다.  2월 6일(화)에는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이, 2월 8일(목)에는 이찬수 교수가 ‘성서적 타종교관’을 주제로 마무리 강의를 한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로 하면 된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173 | 추천: 0
“너희도 내 애인을 사랑하라” 강요 말아야 - 윤영해 동국대 교수 ‘이찬수 강좌’ 4강 강연…종교다원주의 배격하면 기독교 패배할 것 이연옥/ 인권연대 인턴활동가  “불교 신자들은 기독교를 ‘애증’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윤영해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한 것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윤 교수는 지난 25일 ‘강남대 이찬수 교수 대책위’ 주최로 열리고 있는 ‘종교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네 번째 강연자로 나서 불교 신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을 ‘선망의 대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도 본다고 밝혔다.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실패한 종교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은 20억 중에 불과 8천여만명만이 기독교 신자이고, 인도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이슬람교이거나 불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유독 한국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인구의 25%에 이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윤 교수는 교회조직과 운영, 선교방법, 봉사활동 등 전반적 체제에서 구태의연한 불교에 비해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 등 역사 속에서 사회적 참여와 실천에 적극적”이었던 점을 성공의 요인으로 꼽았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의 적극적인 ‘선교’를 성공의 중요한 요인이자 ‘선망의 이유’로 지목했다. 윤 교수는 “기독교 신자들은 입교하면 해야 하는 게 선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심지어 지하철에서 승복을 입은 스님에게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기독교 신자들을 보면서 “불교 신자들은 이런 모습에 질겁하면서도 불교에는 왜 저런 열정이 없나하고 선망의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요즘 불교계의 찬불가, 일요가족법회, 가족탐방법회, 조계종의 포교원, 복지시설이나 학교설립 등도 기독교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배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렇지만 다른 면에서 불교 신자들에게 기독교는 이해하기 힘든 종교다. 불교는 흔히 상식, 이성, 합리, 성찰 등 설명을 통해 이해를 구한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이해보다는 창조, 부활, 전지전능 등에 대한 믿음, 즉 초월적 신앙을 요구한다. 때문에 불교 신자들이 기독교를 이해하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윤 교수는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고, 겉옷을 달라하거든 속옷까지 주라’는 성경구절을 예로 들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면서 단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기독교를 이해하기 힘든 종교”라고 말했다. 선행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되고 불신에 대한 처벌은 너무 가혹하기만 한 것에 대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신앙은 주관적이고 각자의 선택적 결단인데 기독교의 이런 면이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고 악의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불교에서 ‘절’은 ‘신앙고백’ 의미 없다   우리는 90년대 말에 있었던 기독교의 불교에 대한 온갖 비방과 노스님에 대한 폭행치사, 파괴행위, 동국대 법당 본관 앞에 ‘만’자로 조경해 놓은 나무를 뿌리째 뽑아간 일과 불상에 붉은 페인트로 십자가를 새겨 놓은 일 등 기독교 배타주의에서 비롯된 참혹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윤 교수는 이찬수 교수의 해직사건에 대해서 “절에 가서 절해서 절단 난 절절한 사연”이라고 말했다. 불교에서 절하는 행위는 인사와 존경의 표현이고, 그 다음이 수행의 의미다. 흔히 기독교 신자들이 하는 ‘신앙고백’의 의미는 없다. 그런데도 기독교에서는 이 교수가 불상에 절한 것을 ‘인사’나 ‘존경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신앙고백’으로만 보았다. 윤 교수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기독교가 가진 배타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 배타성은 '신앙고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이라고 우기고 믿어야 만족하는 자족적 무지에서 자라난 측면이 강하다.  불교 신자들은 신앙을 연애감정과 비유하기도 한다. 신앙과 연애 모두 주관성, 비합리적 감성, 절대적 충성요구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연애 감정에 몰입한 연인이라도 내 애인이 최고니까 ‘너희도 내 애인을 사랑해라’라고 강요하진 않는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종교 때문에 행복하고 좋다면, 다른 사람도 그가 가진 종교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 애인이 예쁘면, 다른 사람의 애인은 그 사람의 눈에 충분히 예쁜 것이다”  내 종교가 절대적이고 진리라고 믿는다면 다른 종교도 그렇다고 (최소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타종교란 평행하게 뻗은 철길처럼 절대 만나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길게 뻗은 한쪽의 그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이에 윤 교수는 “내 팔 내가 흔들고 네 팔 네가 흔들어라”고 일갈했다.  '인정'의 바탕위에 대화가 생겨난다. 특히 종교는 서로 간 대화의 필요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서로 같은 진리일 가능성을 가설로나마 남겨두는 다원주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결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윤 교수의 “다른 종교로부터 배우려고 기독교 공부를 시작했는데, 기독교 공부를 하니 불교가 훨씬 풍성하고 훨씬 다양하게 보인다. 불교가 나를 성숙시키는 만큼 기독교가 나를 성숙하고 충만하게 만든다”는 얘기는 그런 면에서 대화의 중요성을 방증하고 있다. 이찬수 교수 역시 "불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더 깊은 신앙의 신비를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라는 말도 이와 같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윤 교수는 “인간은 비교를 통해 모든 것을 인식한다. 나를 보고 ‘빡빡이’라 인식하는 건 머리를 기른 사람들과 비교해서이고, ‘이번 강의 되게 재미 없네’라는 생각도 지난 강의와 비교해서 나오는 말이다”면서 자기 신앙을 올바르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선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독교, 배타주의만 고집하면 패배할 것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독교는 사회적 현안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며 존경을 받았고, 신자들의 수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폭발적인 성장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멈췄다. 윤 교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회의 현안에 헌신하는 노력을 버리고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충족에 주력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기독교가 근대화시기에 우리사회에 전해지면서 시민의식을 형성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지만, 일정 수준 근대화를 이룬 현재의 상황에서는 배타적이기만 한 기독교의 교의가 근대적 시민의식과 함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교를 가진 다종교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한국적 상황을 무시하고 기독교의 구원론만을 고집한다면 기독교는 갈수록 고립될 수밖에 없다. 다종교 사회에서 배타성은 종교가 갖는 전형적 기능인 사회통합의 기능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윤 교수는 “기독교 신자들이 ‘자기희생’과 ‘사랑’이라는 기독교 본래의 메시지를 회복하길 바란다”라며, 기독교 신자가 자기신앙에 성실하다면 다른 종교에 대한 몰지각한 행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윤 교수는 기독교와 불교의 공동의 적은 바로 ‘세속주의’라고 지적했다. 신앙이 가진 본래의 의미보다는 대형화, 상업화에만 몰두하고 종파 간 세력다툼에만 관심이 있는 것에 대한 따가운 질책이다. 윤 교수는 “기독교가 그와 똑같은 메시지를 지닌 불교와 손잡고 세속주의를 향한 공동승리로 나아가야 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여전히 배타주의만을 앞세워 다른 종교를 공격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패배할 것이다”라고 강의를 마무리했다.  2월 1일(목)에는 ‘종교적 다양성을 소화해낸 신학 - 스미스, 힉, 라너의 신학’을 주제로 이찬수 교수가, 2월 6일(화)에는 ‘똘레랑스의 의의와 종교적 관용’을 주제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의 강의가 이어진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로 하면 된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191 | 추천: 0
- 의문 1 만약 열렬한 개신교 신자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든지 “자업자득”,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이단일까 아닐까. 폐쇄적인 개신교회에서는 이단 판정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표현들은 모두 불교 용어이며, 불교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 의문 2 한국 대형 교회에서의 대규모 부흥회나 통성기도는 기독교적일까, 반기독교적일까. 그리고 한국 기독교에서 유달리 많이 볼 수 있는 새벽기도회나 새벽미사는 과연 얼마만큼 기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신앙 실천의 모습에서 기독교보다는 무속 신앙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전자는 흔히 말하는 ‘굿판’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새벽 시간의 종교 의식 역시 무교적 분위기 내지는 새벽 예불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문화는 별개이면서도 별개가 아니다  지난 23일(화), ‘文으로 化 하다-한국종교문화론’이라는 주제로 인권연대 교육장에서 진행된 이찬수 교수의 종교 강좌 3번째 강의에서는 현대 종교의 복잡한 현상을 짚어보았다. 많은 종교인, 비종교인들이 종교 그 자체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을 한다. 고민의 근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하나인 듯 하면서도 다양하고, 다양하지만 일관된 흐름이 있는 것 같은 현상 즉,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물음일 것이다. “진리를 부정하지 않되, 다양한 ‘진리 현상’에 대한 이해와 관용적 태도를 통해 진리의 참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진행된 지난 강의에 이어 이 교수는 ‘문화’라는 개념어 이해를 통해 종교를 이야기하였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문화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substance)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Form)이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종교가 문화 ‘안’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문화가 종교의 형식’이며, 종교가 문화를 규제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종교는 문화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이러한 명제는 하나의 문화와 그에 상응하는 하나의 종교간 관계에서만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회에 다양한 문화 그리고 다양한 종교가 동시에 공존하는 복잡한 사회에서는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다양한 종교 현상이 공존하고 있는 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교수는 “종교가 다양하면 그만큼 다양한 문화적 형식이 있는데, 한국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면서도 한국적 형식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포괄적인 틀이 존재합니다. 다양한 종교들의 존재 이면에 통일적이고 심층적인 근거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면면에 스며있는 ‘초월적인 종교 문화’, 혹은 ‘종교 이전의 문화’이다. 文化는 진행형의 동사  ‘문화(文化)’는 순우리말이 아닌 ‘Culture’란 외래어를 일본에서 번역한 한자어이다. 이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문화를 일종의 명사형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문화는 매우 역동적인 의미에서의 진행형의 동사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문화를 고정된 의미의 명사로 보는가 또는 변화의 의미에 중점을 두는 동사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에 대한 정의가 달라진다. 이 교수는 “문화란 인간 활동의 가시적인 소산의 총체다라는 정의가 문화를 명사로 이해하여 문화를 마치 고정불변의 외적 대상물로 제한하는 한계를 갖는다”라고 지적하며, “문화를 대상화하는 인식 행위 자체가 이미 문화의 소산이며, 현대 사회 문화의 일부 특성”이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인간은 세계 내 존재(Being-In the-World)’라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을 빌려, “인간은 문화 내 존재(Being-In the-Culture)”라고 표현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인간은 문화를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100여 년 전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는 당시 조선인의 종교 상황에 대해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에 처했을 때는 무속신앙에 의지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이 교수는 이것을 종교가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것일 수 없다는 증거로 제시했다.  “한국의 도교, 유교, 무교, 불교, 기독교 등이 서로 공존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배타적인 종교들인 듯하지만, 만약 이들이 진정 차별적이라면 현재와 같은 공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종교들은 공존하고 있는데, 각 종교들의 이면에 보편성, 공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현상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 운동이나 개신교의 타종교 비판과 같은 종교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이 교수 자신도 강남대로부터 종교적 이유로 배척을 당했다. ‘나와 너’ 그리고 관계  “일반적으로 문화와 종교는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에 있으며, 문화가 종교이고 종교가 문화인 상즉(相卽)적인 관계입니다. 각각의 개별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이전의 문화를 고려해야만 한다.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유입될 당시, 이미 한국 사회에는 그 이전부터 불교, 유교, 도교, 무교 등의 다양한 종교가 만들어 낸 사회 문화 또는 종교 문화가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국에 처음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선교사들의 ‘God’은 ‘천주(天主)’가 되었다. 물론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신(神)’을 하늘의 주인으로 풀이하는 곳은 없다. ‘천주’라는 개념은 중국인들이 이미 3천여 년 전부터 사용해 왔던 ‘상제(上帝)’ 개념을 기반으로 기독교의 ‘God’을 이해한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사람들은 ‘천주’를 순 우리말로 가다듬어 ‘하느님’, ‘하나님’으로 받아 들였다. 물론, 서양 언어 ‘God’에는 ‘하늘’이란 뜻도, ‘님’이란 뜻도 들어 있지 않다. ‘하늘의 주인’ 또는 ‘하늘에 계신 님’이라는 한국 고유의 문화 의식이 개입된 것이다.  “마틴 루버가 말한 ‘나와 너’란 명제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나 ‘너’가 아니며 ‘와’입니다. 나와 너는 서로의 관계(‘와’)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 이전에 도교, 불교, 유교 등의 혼합적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한국적인 기독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의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종교와 종교 문화에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이 교수는 종교를 자신 안에 가두는 차별적인 종교관은 신을 가두는 것이라고 못 박으며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끊임없는 상호소통이 진정한 종교적 실천”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실천의 중요한 계기는 상호 교감이다.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착한 이유는 단지 그가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못 본채 지나친 제사장과 달리, 그 사마리아인은 원수와도 같은 유대인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구해줬기 때문이다. 그는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 섞인 호소와 교감하였다.  예수는 그러한 교감에 따른 실천을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실천이라 하였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타종교를 배척하는 일부 종파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1월 25일(목)에는 동국대 불교학과 윤영해 교수가 ‘불자는 기독교를 어떻게 보는가’를 주제로 특강을 진행한다. 개별 강의를 수강할 수 있으며, 신청 문의는 인권연대(02-3672-9443)으로 하면 된다.  
2017-11-09 | hrights | 조회: 18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