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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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현진, 박선영, 임영훈, 정석완, 조소연, 주만, 주윤아, 최우식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박선영/ 회원 칼럼니스트  <감기 걸린 물고기>라는 동화책에는 배고픈 아귀와 알록달록하고 조그마한 물고기 떼가 등장한다. 아귀는 물고기 떼를 잡아먹고 싶어 하지만, 물고기 떼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똘똘 뭉쳐서 아귀보다도 훨씬 커다란 무리로 헤엄쳐 다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던 아귀는 물풀 사이에 숨어 조그만 목소리로 소문을 낸다. “얘들아, 빨간 물고기가 감기에 걸렸대!” 물고기 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아귀는 포기하지 않는다. 빨간 물고기는 열이 나서 빨개진 거라고 그럴듯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소문은 조심스럽게 무리 속을 파고든다. 그 뒤로는 물고기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부풀려지고, 확신을 불러오는 단계까지 이른다. 결국 무리에서 쫓겨난 빨간 물고기들은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던 아귀에 잡아먹힌다. 빨간 물고기를 먹어치운 아귀는 또 다시 소문을 흘린다. “얘들아, 노란 물고기도 감기에 걸렸대. 그새 옮았다는 구나!” 이제 물고기 떼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의심한다. 다른 색깔의 물고기들도 차례로 쫓겨난다.  성소수자는 아프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빨간 물고기’다. 반동성애 진영은 동성애가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전염’되기도 하고, ‘치료’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편견과 배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팀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성소수자 자살예방프로젝트 마음연결’과 함께 진행한 연구(만 19세 이상 한국의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2,341명 대상)에서 성소수자가 비성소수자에 비해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한 비율이 10배에 가까운 것으로 집계됐다. 성소수자의 우울증상 역시, 비성소수자에 비해 약 다섯 배나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주류 문화 구성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란 두려움도 성소수자의 자살 충동 증가로 이어졌다. ‘고용주는 성소수자를 뽑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소수자들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등 일반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을 배제할 것이라고 예상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자살 생각을 두 배 가까이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승섭 교수는 “결국 동성애자여서 아픈 게 아니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에도 아귀가 있다. 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률은 비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률보다 5배나 높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를 보면 학교 내 성소수자 응답자의 80%가 교사로부터 혐오표현을 들었고, 54.4%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험은 스트레스, 학업의욕 저하,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이런 현실에서 학교와 교사는 무엇을 했을까?  ‘동성애반대 교사연합’이라는 이름의 교사들은 세계 에이즈의 날(12월 1일)에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는 내용의 계기교육(공식적인 교육과정과 상관없이 사회적인 이슈나 사건을 가르치는 수업)을 했다. 동성끼리의 성관계는 불결한 성관계이기 때문에 동성애로부터 학생들을 지켜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남성 동성애자의 감염률이 높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HIV 감염 역학은 국가마다 다르다. 바이러스가 성별이나 정체성을 가려서 감염시키지는 않기 때문에 남성 동성애자가 감염의 원인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 UNAIDS(유엔에이즈)는 ‘누구도 빠짐없이 인권과 성평등이 보장되는 사회적 조건이 되어야 에이즈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에이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세계 에이즈의 날, 어느 학교의 학생들은 ‘감기 걸린 물고기’에 대한 소문이 진실이라고 배웠다. 사진 출처 - 필자  지난 7월 14일 서울광장에서 19번째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내가 활동하는 전교조 여성위원회에서 처음으로 부스를 운영했다. 뜨거웠던 그 날, 참가자들은 뙤약볕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학교, 페미니스트 교사를 응원하는 글귀를 멋진 그림을 곁들여 써주었다.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에 오히려 우리가 더 감동을 받았다. 동시에 부끄럽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성소수자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 존재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그들이 차별에 맞서는 방식이다. 축제 참가자들은 매년 늘어나 올해는 10만에 육박했다. 이 축제 시기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과 인권교육을 위한 교사모임 샘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만나는 교사들을 위한 가이드북 <학교에서 무지개길 찾기>를 발간했다. 가이드북 소개를 하는 인터뷰에 교사들이 익명으로 참여했다. 기사에는 천 건이 넘는 악플이 달렸다. 몇몇 교사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이들의 노력은 그저 ‘용기’있는 행동정도로 치부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다. 사진 출처 - 필자  성소수자여서 아픈 게 아니다. 사회의 낙인과 차별이 그들을 아프게 만든다. <감기 걸린 물고기>의 아귀는 물고기 떼들의 연대를 깨뜨리기 위해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두려움은 진실을 가렸고, 물고기 사회는 산산조각이 났다. 앞서 소개한 가이드북 <학교에서 무지개길 찾기>에서는 청소년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당장 혐오를 멈춰 달라’고 했다. 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학교는 누구를 위한 곳인가? 우리 사회가 아무리 아귀의 소문에 휘둘려 특정 집단을 배제시키고 있어도 학교는 모두에게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 학교의 존재 이유는 어느 누군가가 아니라 ‘모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소수자가 ‘안전한’, ‘차별받지 않는’ 학교는 너무 소극적인 목표이다. 학교는 배움의 권리를 가진 모두에게 즐거운 배움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색깔은 병이 아니고, 죄가 아니다. 일부 교사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교는 이제 아프지 않은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혐오에 휘둘리지 않는 곳으로. 아무도 아프지 않은 곳으로.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
2018-08-06 | hrights | 조회: 143 | 추천: 5
최우식/ 회원 칼럼니스트  자원재활용법이 시행되었다. 법에 따르면 카페 매장은 물론 테라스에서도 플라스틱 일회용 컵 사용이 불가능하다. 오직 카페 밖으로 음료를 들고 나갈 때만 플라스틱 컵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위반하면 사업장에 5만 원에서 200만 원 상당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아직 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자주 찾는 카페는 여전히 내게 묻지도 않고 플라스틱 컵에 음료를 준다. 이러면 안 된다고 따져 묻자니 괜한 참견인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는 텀블러에 담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이 문제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내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환경부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입이 아프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다. 음료가 따뜻한 음료인지 시원한 음료인지, 휘핑크림을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 할인 카드가 있는지, 적립이나 쿠폰을 찍어 갈 것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현금으로 계산하면 현금영수증도 잊으면 안 된다. 성질 급한 손님들은 이쯤 되면 슬슬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고지할 것이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이다.  ‘매장 안에서 드시면 머그잔이나 유리컵에 드셔야 해요. 법이 바뀌었거든요. 얼마 전에 재활용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렇게 됐어요.’ 여기까지 말하면 열에 아홉은 넘어간다. 문제는 열에 하나다. ‘아니 얼마 전에 내가 다른 카페에서 마실 때는 일회용 컵에 마셨는데? 그런 법 있는 거 맞아요?’ 불신하는 눈초리로 바로 옆집 카페 이름을 대며 말한다. 이런 경우는 내가 설명을 해줘도 별 효과가 없다. 그렇다고 손님에게 법을 찾아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 한 손님은 주문을 멈추고 일행에게 가서 성토를 하더니 다시 돌아와서 주문을 했다.  그렇다고 손님의 무지를 탓할 수는 없다. 사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모든 카페가 동시에 법을 따랐으면 손님들의 혼선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어떤 카페는 법을 지키고 어떤 카페는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다. 환경부는 정책 홍보에 실패했고 언론은 이를 충분히 보도하지 않았다.  플라스틱은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미세 먼지처럼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위협한다. 시중에 유통되는 국내 생수 10개 제품을 분석한 결과 4개 제품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 바다에서는 미국, 중국, 일본에 비해 10배나 많은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일반 시장에서 유통되는 조개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나노 크기의 미세먼지는 몸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이미 미세 플라스틱이 침투해 있고 식탁 위에 매일같이 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플라스틱이 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어 지적 장애나 자폐증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의 1인당 플라스틱 사용량은 세계 1위이다. 세계는 플라스틱 사용량 감축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모든 매장에서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플라스틱 빨대는 종이 빨대로 대체된다. 또한 영국 스타벅스는 26일부터 일회용컵에 ‘5펜스’(74원) 정도의 부과금을 매기고 머그잔이나 텀블러를 사용하는 손님에게는 ‘25펜스’(370원)를 할인해주는 ‘라떼 부과금’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매장에서 일회용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법은 효과적이다. 나는 마감 시간에 일을 하기 때문에 매일 배출되는 쓰레기양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매장에서 플라스틱 사용량은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사진 출처 - 필자 사실 카페 아르바이트생들은 이 법을 싫어할 것이다. 플라스틱 컵은 계량도 쉽고 처리도 간단하다. 하지만 머그잔이나 유리컵은 일일이 설거지를 해야 하고 말려야 한다. 또한 부피도 크고 깨질까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바쁠 때는 법도 해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니 이중으로 일이 쌓인다. 그래도 괜찮다. 홀쭉해진 재활용봉투를 들 때는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제 곧 8월이 다가온다. 환경부는 계도기간을 끝내고 과태료를 물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카페 사업자가 이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언론과 환경부의 홍보가 절실한 시점이다. 일반 시민에게도 나쁠 것 없다. 사실 유리컵이나 머그잔이 사진도 더 예쁘게 찍힌다. 문제는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법을 설명하는 일도 설거지도 모두 그들의 몫이니까. 하지만 법을 설명하는 일이라도 줄어든다면 그것도 큰 도움이 될 테다. 최우식 : 사람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피디 지망생
2018-07-31 | hrights | 조회: 175 | 추천: 18
김현진/ 회원 칼럼니스트  2015년 9월, 세계인을 부끄럽게, 놀라게, 아니 어떠한 단어로도 적절한 표현이 없어서 ‘쓸쓸함’이란 단어가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만 3세였던 시리아의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 사진이었다.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 자그마한 몸은 역설적이게도 위험천만한 고무 보트에, 막연하게 살 수만 있다면 이라는 절박함으로 몸을 아니, 목숨을 싣는 난민들의 실상을 우리 사회가 알게 했다는 면에선 긍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아일란 쿠르디가 숨진 채 발견된 터키 보드룸 해안가에 조화가 놓여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한국 사회에 과연 난민이 있을까? 있다면 유럽의 여러 나라처럼 난민으로 인정 받는 것이 가능할까? 에 대한 놀라운 현실을 보여주는 책이 바로 ‘우리 곁의 난민 – 한국의 난민 여성 이야기’ 이다. 저자 문경란은 난민으로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 난민 7인의 삶을 책으로 풀어냈다. 여성 난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고, 한국의 난민 관련 제도에 대하여 쉽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게 잔상이 남도록 이야기를 풀어간다.  보통 어느 사회나 국가에서든 여성은 ‘상대적’ 약자이다(이 부분에 대한 이견은 차치하고) 게다가 여성이면서 난민이라면 가장 약한 자들일 것이다. 7인의 여성 난민은 누구도 자신이 난민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모두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에 의해 난민이 되었고 난민으로 인정 받기 가장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나름의 삶을 힘겹고 위태롭게 버텨가고 있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데에 가장 어려운 점은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김현경, 2015, <사람,장소,환대>)’인데 난민은 타국에서 특히 한국에서 자기 자리를 얻는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자기 자리가 없기에 삶 자체가 삶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곧 삶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난민 심사 결과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 삶은 더욱 힘겹다. 영원히 떠도는 부평초처럼 살아야 한다. 휩쓸리는 존재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사회 안에 자기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난민은 사회 바깥의 존재요 추방된 존재다.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할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박탈된 존재다. 패터 비에리는 ‘권리란 전횡에 의한 종속에 맞서는 성벽과 같다’(비에리, 2014, <삶의 격: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고 했다”  난민 혹은 존엄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리’를 잃었기 때문에 모멸감에 빠지고, 자기 삶이 파괴되는 경험을 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필요한 건 ‘자기 자리를 인정 받는 것’이 아닐까 하며 책을 덮는다.    자기 자리라는 것은 무엇일까? 법적인 문제로 들어온다면 ‘시민권’일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국제 난민 협약] 등 법적인 장치들은 이미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자기 자리는,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이전에 이미 여기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우리가 내어줄  마음의 자리가 아닐까 싶다. 그가 흑인이건 이슬람이건 이주여성이건 소수자이건 간에 최소한의 삶을 이어가게끔 하는 데에는 시민권 이전에 우리가 내어줄 마음의 자리일 것이다. 그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시민권을 부여한다 해도 그들이 투명인간 취급당할 위험이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한창 예맨 난민 문제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접해본 그리고 겪어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범, 스마트폰을 쓰는데 난민 신청한 이상한 사람, 예비 강간범 등의 이미지를 덮어 씌우며 투명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겪어 보지 못한 타인의 자기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혐오가 아닐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삶을 파괴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언제쯤이면 예맨 난민에게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타자에게 마음의 자리를 자연스럽게 내어주는 환대를 우리는 베풀 수 있을까? 김현진 : 18년 간 국어교사로 살다가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직업을 바꾼 철들기 싫은 어른
2018-07-16 | hrights | 조회: 76 | 추천: 4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제주도 불법 난민 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신청허가 폐지/개헌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청원이 약 60만 3천 명의 동의를 얻어 몇 주째 진행 중 청원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난민 수용 이슈에 관해 첨예한 대립이 있는 것은 단순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도 난민 수용 입장과 자국민보호 입장의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 스크린샷  이번 제주도 사태에서 예멘 출신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거는 경제적 부담과 치안 우려이다.  먼저 난민을 수용 할 경우 우리나라 정부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부담이 더해지는지 통계자료를 통해 살펴보자. 유엔난민기구가 19일 발표한 ‘글로벌 동향보고서’를 보면, 1994년 4월 이후 한국의 난민 인정률이 4.1%이다. 난민신청자 전원에게 생계비가 지원되는 것은 아니고 여러 심사를 거쳐야 한다, 지원금 액수는 1인당 최대 매월 43만 원으로 최대 6개월간만 지원금이 지급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난민신청자의 규모와 난민 인정률로 보아.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난민수용을 반대하기에는 지원금 액수가 적은 상황이다.    다음으로 치안과 관련하여 테러범죄와 각종 성범죄 위험에 관한 우려가 크다. 난민 수용 이후 유럽의 사례를 살펴보자. 독일은 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난민에게 관대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제시한 독일 연방 범죄수사국(BKA) 통계자료를 보면 난민을 포함한 이민자 범죄율이 독일인 범죄율보다 낮다. 물론 유럽 내 쾰른 집단 성범죄 사건 등 이민자 들이 주도한 범죄가 여러 번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사건들만을 근거로 북아프리카와 아랍 출신의 난민이나 이민이 특별히 더 위험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만일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근거로 미국 정부가 한국 출신이민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분류하고 한국인 이민신청을 금지한다면,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까? 반대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개별 사건을 이유로 특정 국적, 인종, 종교를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수인지 알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낯선 것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경계하게 된다. 이러한 두려움과 경계는 잘못된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동물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본능적 반응이다. 그러나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달한 본능이 지금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태원 지역은 과거에 ‘양키’들이 많다는 이유로 위험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요즘의 이태원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인기지역으로 변했다. 외국인들과 직접 교류할 기회가 전보다 많아지고 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생활이나 생각을 자주 접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가 되어 우리 사회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중동 출신 난민들도 사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도 불과 50년 전 6.25전쟁을 전후로 미국, 중국으로 전쟁난민과 정치난민을 배출하던 국가였다. 중동 출신 난민들과 처음 대면할 때는 당연히 그들의 인종과 종교부터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본능적인 두려움을 잠시 제쳐두고 그들의 어린 시절, 가족, 일상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보면,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제주도 난민 기사를 읽을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피부가 검은 낯선 이들이 제주도를 위협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그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겪은 6.25전쟁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정치난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식당 설거지부터 시작해 새로운 삶을 꾸려나간 재미교포들을, 해외에서 인종차별을 받았던 억울한 순간들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2018-07-05 | hrights | 조회: 108 | 추천: 6
주윤아/ 회원 칼럼니스트  기간제 교사를 십 여 년 넘게 한 끝에, 올해 신규 임용되어 기적을 보여준 친구가 몹시 분개한 목소리로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첫 발령 학교에 처음 출근한 그녀가 받은 업무희망원에는 출신대학과 전공 등의 기본 정보 외에 혼인여부, 임신과 자녀계획 등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정보를 기재하게 되어 있더란다. 그뿐 아니라 교무실 한 가운데서 개인정보를 공개적으로 묻고 심지어 부동산까지 연결해 주며 학교 근처로 이사 오라고 종용하는 등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언사를 했다는 것이다. 친구의 난색을 눈치 챈 교무부장 교사는 학교에 기숙사가 있어 시간 외 혹은 야간 근무 등의 업무 배정에 필요하다고 얼버무리더란다. 늦깎이 신규이기에 심호흡 한번으로 인내심을 발휘하던 친구는 교무부장 교사의 그 다음 지시(?) 사항을 듣고는 더는 할 말을 잃었다. 3월에 있을 전입 신규교사 환영행사에서 신규교사 장기자랑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학생들 표현대로 ‘헐 대박~’이다! 비슷한 사례는 올해 학교를 옮긴 또 다른 친구에게서도 확인되었다. 그곳도 혼인이나 자녀계획 등에 대한 정보를 공개적으로 수집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보충수업이나 야간 자율학습감독 등의 업무 배정 때문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학교가 교사들의 사적 정보를 수집하여 이를 업무 배정에 공정하게 참고한 경우를 별로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학교조차 가장 사적인 정보를 집요하게 수집하며 개입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친구의 학기 초 이야기를 듣고, 분노와 황당함에 국가인권위원회에 민원을 접수해야 하나 의논을 하다가 이내 이미 우리들의 개인정보가 교육청과 학교에 집적되어 관리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되었다. 교육기관 등에서 업무편의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 NEIS(나이스,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의 교사 인적사항에 이미 방대한 내용들이 수집되어 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 항목을 열어보지 않아 잊고 있었을 뿐, 교사로 임용되던 첫해에 키, 몸무게 등 체격사항(도대체 이것을 왜 수집하는가?)을 비롯하여 가족관계(부모, 배우자, 자녀 등)라는 가장 사적인 정보를 아무런 의구심도 없이 제출하여 지금까지 관리되어 왔다. 과연 교육청과 학교가 교직원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여 관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2003년 한 해를 뜨겁게 달구었던 NEIS 철폐투쟁은 학생의 개인정보를 정부가 전자적으로 집적해 관리하는 방식을 반대하고 개인정보의 불법유통을 막아내려는 노력이었다. NEIS는 모든 교직원들이 입력에 대한 개별 권한을 인증 받고, 자신의 노동실적은 물론 학생들과 보호자들의 인적사항을 기본으로 성적, 행동과 신체발달상황, 처벌기록까지 수백여 가지의 정보를 입력하는 시스템이다. 초등부터 고교까지 축적된 자료는 수년간 보관되며, 교육부는 이들의 자료를 열람하고 통계를 낼 권한을 갖고 있다. 이것이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대면도 소통도 하지 않고 일제히 컴퓨터 앞에 앉아 매일의 노동과정을 입력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업무희망원  2018년의 ‘빅 브라더(Big Brother)’는 국민들의 초· 중· 고 시절의 개인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교사들의 노동과정을 전자통제할 수 있다. NEIS 철폐투쟁을 통해 정보인권의 중요성을 알고 개인의 자기정보통제권을 강화하는 실질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사들은 교육공무원이라는 신분을 구실로 정치기본권 등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정보인권의 주체의 범주에서도 배제되었다.  다시 학교 안으로 시야를 좁혀 보자. 학기 초 업무희망원을 통해 교사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관리자들이 사전정보를 파악하여 이들의 근무 환경을 개선하고 잡무를 줄여주려는 목적일까? 오히려 평교사들을 공적 업무의 영역이 아니라 사생활의 정보를 악용하여 유사시 비난하고 견제하며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미 비혼이나 자녀가 없는 교사에게 각종 잡무나 기피 업무를 배정하는 경우도 많지만, 기혼이며 자녀가 있는 교사(특히 여교사)들 역시 별 근거도 없이 가사나 자녀양육 때문에 업무를 소홀히 한다고 앞뒤에서 비난하거나 주요 보직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여초집단인 교직사회에서 여교사들의 관리자 진출의 수가 현저하게 적은 것도 일반 기업의 ‘유리천장’과 상황이 다르지 않다. 정보인권 문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직장에서 나의 개인정보를 약점으로 이용하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교육 당국에게 이미 수집한 나의 정보를 폐기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공무원의 연가 사유 항목이 삭제되었음에도 학교는 올해도 교사들에게 ‘감사시 지적 사항’이라며 외출과 조퇴 사유를 구체적으로 기재할 것을 강요하며 근태상황을 전자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교사들의 개인 연락처가 공개되고, 교사들의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이미 신뢰와 소통의 기능을 벗어나 ‘24시간 상담소’가 된 지 오래다. 이는 단순히 학생과 그 보호자들의 사이버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돌봄 책무를 학교에 전가하고 있는 사회구조에서 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학생들 역시 입시라는 블랙홀 때문에 불명확한 예단과 평가를 받으면서도 저항하지 못하고 있고, NEIS 철폐투쟁의 기억은 어느덧 사라지고 학생생활기록부에 집적되는 개인정보의 양은 해마다 알게 모르게 늘고 있다. 학생들의 정보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그 사안의 심각성이 오래전부터 중차대하게 논의되고 있으므로 여기서 거론하지는 않겠다.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학생인권과 교권이 대립 관계가 아니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이해할 때만이 비로소 소통과 존중의 교육공동체가 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사는 교사이면서 동시에 개인으로서 시민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정부와 관리자에게 통제받는 교사가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실질적 평등과 민주시민 교육을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교육청은 집적한 개인들의 사적 정보를 폐기해야 한다. 동시에 교사들은 학교에서 ‘내 마음에 걸리는’ 바로 그 순간을 외면하지 말고 그 불편의 이유를 자문해 보고, 나아가 교직원협의회에서 용감하게 일어나 이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주윤아: 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2018-06-26 | hrights | 조회: 133 | 추천: 7
주만/ 회원 칼럼니스트  <리처드 3세>라는 작품의 주인공인 리처드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비열한 모략을 세우는 왕족이다. 그는 늘 단검을 지니고 다니는데, 살인 도구라기보다는 권력에 대한 그의 욕망을 표현하는 오브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의 한 장면에서 리처드가 단검과 성경책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내 가슴에 다음 대사를 찔러 넣었다.  “내가 이 검으로 죄 없는 가슴을 찔러대며 죽여도, 다른 손에 든 성경 한 구절만 읊어대면 모두가 나를 선한 사람으로 여기지.”  리처드의 이중성과 당시 사람들이 종교를 맹목적으로 받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성경을 내세운 리처드를 향한 선과 악의 판단을 거둬버리는 것을 보니 말이다.  이것이 비단 셰익스피어 시대의 현상일 뿐일까.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나는, 이것이 당시의 상황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 내 민주주의의 물결이 거세지며, 주권이 국가와 권력층에서 국민으로 넘어오는 단계에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흐름은 다른 것 같다.  얼마 전, 대법원장 임명을 두고, 동성애를 합법화시키려 한다며 교단 주도하에 임명반대 서명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 구약의 “동성애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그를 반성경적인 사람으로 공표했고, 성도들은 그 말에 찬동하여 임명반대 서명을 한 것이다.  본래 성경의 기본 정신은 ‘공평과 정의로운 사회’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이웃사랑’인데, 그런 기독교가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이웃을 차별해도 된다고 공식적으로 표명했다. 사진 출처 - 아트앤스터디, 슬픔의 철학  기독교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돌발행동이 아니다. 기독교는 현재 위태로워진 보수정권에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힘을 실어줘 왔다.  초대 한국기독교의 일부는 미국기독교 장로회 교단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미국장로회는 자본주의 기독교 중에서도 복음주의(성경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사회적 부패 행동을 숨기고 포장하기 위해 교회와 성경을 이용했다. 사회에서 자본과 권력으로 반인권적인 행동들을 저지르곤, 성경에 있는 금식기도와 회개를 하며 거룩한 척 잘못을 숨겼던 것이다. 한국에도 이런 미국장로회 기독교가 들어와, 소위 ‘가진 자’들의 부패를 숨겨주며 사회적으로는 청렴한 이미지를 가질 수 있도록 돕고 도왔다.  3.1절 광화문 집회 때에도, 한국기독교총회와 한국기독교연합회 등 기독교 대표 단체들이 직접 참가신청을 받기도 하며 주최 측으로서 모습을 보였다. 약 100년 전, 선조들이 나라를 위해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식민지 지배에 저항했던 그날, 성조기와 이스라엘기, 심지어 일장기까지 흔들며 광장으로 나온 것이다.  기독교 단체가 대법원장 임명을 반대했던 진짜 속내를 여기에서 추론할 수 있다. 현 정권이 국가기관의 장을 임명하는 것에 반하고자 했던 이유다.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쓰며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을 잊은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정치적 이권을 차지하고자 성경의 구절을 인용해 진정한 의도를 숨긴 기독교와, 왕좌를 향한 욕망을 숨기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읊어댔던 리처드의 모습이 큰 차이가 있을까. 결국은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한 속내였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현존하는 모든 기독교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나 단체의 이익을 얻기 위해 진짜 속내를 숨기고 성경을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하려는 기독교가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 성경 안의 근본적인 내용과 기독교의 정통 교리는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에 적합하다. 우리는 대부분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와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인권을 말하는 우리도 이러한 부분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혹여라도, 인권존중이라는 선한 신념을 자신과 단체의 이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면 리처드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인권존중이 사회에서 공기처럼 작용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누군가 인권이라는 간판 뒤에 숨어 다른 이익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늘 경계해야 한다. 주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작가 지망생
2018-06-20 | hrights | 조회: 165 | 추천: 16
박선영/ 회원 칼럼니스트  얼마 전에 중3 아들과 중1 딸의 엄마인 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잘 도와주고, 마음도 잘 이해해주는 딸이 너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의 온 신경이 아들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는 일, 늦은 밤과 이른 아침에 식사를 챙기는 일, 전화로 계속 아들의 스케줄과 상태를 확인하는 일, 심지어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아들의 짜증을 받아주는 일까지 그는 기꺼이 해내고 있었다. 딸도 오빠보다 자신이 소홀히 여겨지는 것에 대해 매번 서운함을 토로한다고 했다. 그래도 딸은 엄마를 배려하고 기다려주니까, 이것저것 요구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아들이 더 눈에 밟히는 것이다.   딸의 역할은 교실에서도 이어지는 듯하다. 타인을 잘 배려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는 교사들의 대화에서 매년 되풀이 된다. 교사의 일을 잘 도와주고 무슨 일이든 시키면 똑 부러지게 해내는 여자 아이들. 관심 없는 남자 아이들과는 달리, 지치고 힘든 교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아는 여자 아이들. 이런 사례들이 매년 쌓이고 쌓여서 ‘여자 아이는 관계 지향적’이라는 교사의 믿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런데 여자 아이들이 관계 지향적이어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자 아이들은 고학년쯤 되면 친한 친구끼리만 무리지어 다니고, 교실에는 그 무리가 서로 견제하는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여자 아이들 간의 관계 지형도는 시시각각 변하기도 해서 교사가 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3년 간 6학년을 맡으면서 여자 아이들 간의 관계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특히 교사 앞에서는 한없이 착한 여자 아이들이 SNS 같이 교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들은 너무 낯설고 충격적이다. 여자 아이들 간의 이러한 ‘관계 갈등’은 복잡하고 애매해서 교사를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교사는 또다시 ‘여자는 관계적 동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얼마 전에 어느 교대의 실습 교재 일부를 보게 되었다. 아동 발달에 있어 놀이의 중요성을 서술한 부분이었는데 여기에서도 여자 아이의 관계 지향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숙련된 기능이 필요하고, 규칙이 있는 경쟁적인 놀이를 통해 독립심과 집단 활동에 필요한 조직력 등을 배움으로써 직업 세계에서의 성공을 준비한다’, ‘반면 여아는 인간관계가 발달하며 이는 미래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양육자 역할과 가정의 사적 생활을 위한 준비를 돕는다’, ‘결국 놀이에서 남아는 경쟁을 중시하고, 여아는 관계를 중시하는 데 따라 세상을 보고 사는 것도 달라진다.’ 2018년의 예비 교사들도 여자에게는 관계를 민감하게 돌보는 능력이 있으며, 이에 따라 여자와 남자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배운다.  이쯤 되면 ‘관계 지향성’은 여성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여남의 생물학적 ‘성차’에서 비롯된 것이고, 여성의 타고난 특성인 것일까? 아직도 이러한 논리가 통하나 싶다. 성평등 교육이 의무화 되어 있고, ‘성 역할 고정관념’, ‘젠더’ 등의 말이 흔히 통용되는 시대에 말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굳어진 이 생각은 우리에게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여성이 관계 지향적’이라는 결론을 귀납적으로 도출하기 위한 사례와 경험들을 모아보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고도 놓치는 혹은 무시하는 반례들 또한 너무 많다. 다양한 개인은 예외가 되어 지워지고, ‘확증 편향’을 통해 여성이 관계 지향적이라는 믿음은 더욱 강화된다. 사진 출처 - 텀블벅  성 역할의 ‘역할’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여성 또는 남성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고 있다. 1990년에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을 출간하면서 ‘젠더 수행성’이라는 개념을 창시했다. 젠더 수행성은 젠더가 고정된 본질적 정체성이 아니라, 규범에 따르는 행위와 습관의 반복 그 자체임을 뜻하는 개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사회는 아주 오랫동안 여성이 관계에 복무하도록 만들어 왔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결국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앞서 언급했던 어느 교대의 실습 교재에서 찾을 수 있다. ‘미래의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양육자 역할과 가정의 사적 생활’, 바로 이것이 여성에게 주어지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성, 어린 여자 아이를 기르고 교육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여자는 딸로서 어머니를 도우며 돌봄과 집안 살림 등의 역할을 보조해야 한다.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며 관계를 챙겨야 한다. 이러한 여자의 행동 특성은 결혼 상대를 찾는 남자에게 사랑받는 조건이 된다. 그렇게 결혼한 여자는 또다시 가족 구성원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관계를 잘 보살피지 않거나 자기 것을 잘 챙기는 여성,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이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이 가족 관계나 연애 관계, 혼인 관계 등에서 ‘실패’하는 것을 두렵게 만든다. 여전히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다양한 장벽들이 존재하며, 여성의 노동에는 남성의 노동과는 다른 가치가 매겨진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관계일지라도 그로부터 벗어나 자립하기 어렵다. 이는 모두 여성을 사적 영역으로 몰아넣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은 관계에 종속된다. 여성이 이와 같은 삶을 살 때 이익을 보는 자는 누구일까?  모든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관계맺음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호 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만 노력이 강요될 때, 관계의 평등은 깨진다. 어떤 특정 인간 집단이 관계에서 희생해야 하는 구조가 있다면 그것이 ‘차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여남의 성차 문제로 환원하려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람이 각자 갖고 있는 차이가 이러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이 모든 관계를 끊고 살아야 한다거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이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게 친절하지 않아도,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웃지 않아도, 아이보다 내 삶을 더 중시해도, 엄마 같은 누나가 아니어도, 가족에게 양보하지 않아도, 친구의 부탁을 거절해도 괜찮다. 여성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는 관계가 많아질수록 성평등한 사회는 가까워진다.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
2018-06-07 | hrights | 조회: 467 | 추천: 34
임영훈/ 회원 칼럼니스트  한성 백제, 송파구에 산다면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어릴 적부터 올림픽 공원 근처 둔촌동에 살았기에 풍납, 몽촌토성은 익숙했지만, 한성 백제라는 단어는 쉽게 들을 수 없었다. 지금은 ‘강동, 송파 일대의 토성과 유적들이 백제의 한강 도읍인 한성에서 유래되었다’가 정설이다. 몽촌토성을 품은 올림픽 공원으로 초등학교 졸업 사진을 찍으러 갈 때는 몰랐던 말, 심지어 20대 시절까지도 공원을 자주 갔지만 한성 백제는 기억에 없다.  기억은 십여 년 전부터 서울시가 ‘한성 백제’ 타이틀을 강조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게, 번듯한 한성 백제 박물관이 공원 내에 건립된 지도 이제는 꽤 지났다. 올림픽 공원과 현재 사는 동네인 풍납동의 크고 작은 공원에서는 ‘한성 백제’ 타이틀로 연간 여러 차례의 축제와 전시, 행사를 개최한다.  이런 변화가 사실 ‘나’라는 한 명의 송파구민, 풍납동민에게 그리 영향은 없었다. 집 앞뒤로 유적지란 이름으로 개발이 보류된 공원들이 있어 집을 나설 때면 상쾌한 내음과 함께 비둘기들이 퍼덕대는 정도가 차이다. 말하자면 공원 그 자체는 나의 인권인 쾌적한 생활환경과 더불어, 집주인의 관심사인 집값에도 긍정적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서울시가 한성 백제 사업에 열을 올리면서, 풍납동 일대에 일체의 재개발과 재건축이 사실상 금지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알고 보면 말이 집 앞뒤로 공원이지, 이 두 권역이 유적지라면 그 사이에 위치한 열 몇 채의 집들, 특히나 내가 사는 곳에도 무언가 파묻혀 있을 확률이 높다. 이런 연유로 우리 앞 동만 세 채가 헐려 나갔고, 동네로는 수백 채의 집들이 그대로 공터가 되었다. 서울 시내에 이렇게 공터가 많은 곳은 어디에도 찾기 힘들 것이다.  십 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서울시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기 어렵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곳의 재건축을 금지할 뿐 아니라, 기존의 집들도 궁극적으로 모두 매입해 동네 전체를 ‘한성 백제’로 복원 내지 박물관화 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무도한 전체주의 사회가 아닌 이상 이것은 당장은 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재개발이 금지된 집주인들이 시에 (시세보다 비싸게) 사달라고 의뢰한 주택들조차 몇 년은 기다려야 매입이 이루어진다. 현실은 자금 부족, 원대한 이상인 한성 백제의 복원은 느리고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다.  글을 쓰면서 복원 사업의 구체적인 보상 방법과 계획을 알아보았으나, 간단한 검색으로는 알기 힘들었다. 대부분 풍납동에 사는 분들이 최근에 집들이 많이 헐린다고 사진을 몇 장 찍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올린 포스팅이었고, 이런 글들의 정보는 서울시의 토성 복원 계획과 보상 방안에 대해 한 다리 건너서 들은 수준이었다. 다만 알아보다 보니 우리 집 근처의 구역에서 헐리는 곳들은 왕궁 추정지로 보였고, 조금은 거리가 있는 토성이 길게 이어진 지역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토성의 완전 복원을 추진하고 있었다. 풍납 토성은 비교적 보존이 잘 돼 있지만, 현재 일부는 주택과 도로 등으로 중간중간 끊겨 있다.  과연 한성 백제의 복원이란 것이 가능한지, 또 가능하더라도 한성 백제로 추정되기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해온 원주민들이 점진적으로 ‘소개’되는 것이 정당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마치 소말리아 소개 작전처럼 이곳의 주민들은 아주 느린 속도로, 소개되고 있다. 재건축이 없고 소멸되는 집들은 늘어나므로, 주민은 감소한다. 역사 유물의 보존이라는 지고의 가치 아래서, 일부 주민들은 재산권 제한을 넘어 아예 살던 집에서 떠나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나야 집 없는 전세민으로, 공터에 걸린 ‘재산권 보장하라!’는 플래카드에는 여전히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있던 집이 헐리고 블록 깔린 주차장, 우레탄 깔린 공터로 바뀌는 것이 수년간 반복되니 이제는 혼란스럽다. 공사 전(위), 후(아래)의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정말로 동네 전체가 궁극적으로 없어지는 것일까? 이것이 낭설일지라도, 좀 과장한다면 천 년도 이전에 거주했던 백제인들의 삶의 흔적이, 같은 땅에 거주하는 그 후예들의 생활권에 우선하는 것일까?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재산권을 넘어 실거주권마저 포기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  아직 우리 집이 헐리지 않았기에, 주차장과 공터, 공원이 늘어나니 나에게는 여전히 좋은 현상이다. 그럼에도 철 지난 ‘전 국토의 산업화’란 구호처럼, ‘전 풍납동의 한성 백제화’라는 구호는 뭔가 섬뜩하다. 이곳의 집이 모두 없어지고 한성 백제 시절의 도성, 그날의 이곳을 완성하는 때가 실제로 올 것인지, 그것이 가야할 방향인지는 물음표가 달린다. 동 주민으로서 드는 실질적, 생활적 의문이기에, 인권을 중요시 하는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해석될 지도 궁금하다.  <인권의 발명>이란 책에서는 인권이 필요에 따라 발명된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유물이나 역사에 대한 보존이라는 가치도 시대에 따라 그 경중과 우선이 변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21세기에 들어, 훼손되고 잃어버린 20세기까지도 보상해야 할 것 같은 당위성 아래 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사는 풍납동에서는 그래 보인다.  집과 땅의 가치를 뒤로 두는 동네 공터화, 평탄화는 요즘 같은 부동산 시대에, 사실 신선하다. 그럼에도 한성 백제 복원의 화살이 나에게,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올 때가 머지않았다는 우려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유물을 보존하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언가 희생해야 할 사람은 집 주인인 너뿐 아니라 거주민인 나 자신도 곧 포함될 것이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올량이면 이렇게 외치고 싶다. ‘거주권이 우선이다!’ 임영훈: 미국에 실을 팔고 있습니다. 가끔 천도 팔지만 어떻게 해야 팔리는지는 모릅니다.
2018-05-30 | hrights | 조회: 460 | 추천: 12
김현진/ 회원 칼럼니스트  ‘인권’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지 4년째 되는 나는 그야말로 인권꿈나무이다. 그런데 인권을 알게 되면 피곤하고 고급지게 영생할 수 있다는 조효제 교수님의 말처럼, 나도 그 길에 들어선 듯하다. 어떤 현상을 봐도 그 기준을 ‘인권’으로 삼는 나 자신을 보면 참 놀랍기도, 때로는 피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참 매력적이라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덕분에 학교의 풍경들을 인권을 기준으로 바라보고 학생들을 대하는 말과 행동을 인권친화적으로 바꾸고 참 행복한 교사로 살 수 있었다.  나는 2016년도에 강원도교육청의 의뢰로 실시한 학교인권실태조사를 위해 인터뷰어로 참여하였고, 특성화고의 인권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모 특성화고교에 가서 학생과 보호자들을 만났다. 예전에 출퇴근하며 또는 업무차 방문했을 때 보았던 그 학교의 모습(어두컴컴하고, 덩치가 산만한 남학생들이 1300여명이 다니는 학교)을 떠올리며 방문했는데, 실제로 내가 만난 학생들은 생각보다는 밝은 표정이었다(어쩌면 이것도 내 안의 또 다른 편견일 수 있다). 인터뷰에 참가한 학생들은 그 학교 전공과목 중, 상위 성적의 전공과 학생들이었으며 그 과는 일종의 특례가 적용되는 과였다. 특례의 내용은 그 과를 졸업하고 하사관으로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2016학년도에 그 제도가 처음 실시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매우 높은 성적의 지원자가 몰렸고, 100명 이상이 불합격했다고 전해 들었다. 사진 출처 - 경기교육  고교 입학 성적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이 친구들은 일반계고에 지원해도 별 ‘문제없는’ 학생들이다. 그런데 면접에 참여한 학생 모두에게 ‘왜 이 학교에 진학했냐?’고 물으니 취업난을 고려해서 지원했다고 답했다. 부모님과 의논 끝에 대학에 가서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공부를 하느니 취업을 빨리 하고 돈을 버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 지원했다는 매우 세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학교 밖에서 A고를 다닌다고 하면 뭐라고 하느냐?’란 질문(특성화고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을 학생들이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알기 위해 질문했다)에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음……. 뭐라고 특별히 말을 하진 않는데요, 그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어떤 의미에요?”  “음……. 특성화고 다닌다고 하면 바라보는 그 시선이 있어요.”  “네?”  “제가 다니는 교회에 우리 학교에 합격했다고 했더니, 어른들이나 선배들이 저를 되게 안쓰럽게 바라보더라고요.”  그러자 다른 친구가 밝은 목소리로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취직하기 어려운데 참 대견하다고 해요.” 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특성화고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성화고 학생들은 3학년 1학기가 끝나면 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이것도 전망이 좋은 과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부터 순서대로 나간다. 전망이 좋은 과 소속이라고 해도, 자기 전공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실습을 하게 되면 다행이다. 그러나 몇 년 전 모 특성화고 인터넷 비즈니스과 전공학생이 대형 패밀리 레스토랑 주방에 취업했다가 그 곳의 폭력적 분위기와 구타 그리고 강도 높은 노동을 견디지 못한 끝에 자살한 사건(거의 묻혀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을 보면 비단 좋은 전공학과라고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적이 우수하다고 원하는 곳에 실습을 나간다고도 볼 수 없다. 그렇게 죽은 학생에게 ‘그렇게 의지가 약해서 밥은 먹고 살겠니?’라는 댓글만 달리지 않아도 꽤 괜찮은 사회이다.  모 특성화고의 보호자들을 면접할 때 들은 어느 보호자의 건의사항이 떠오른다. 애들이 실습 나가기 전에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보호자의 얘기에, “노동인권교육을 말씀하시는 것이죠?” 했더니.  ‘네, 그게 그거 맞죠? 실습 나가서 죽었다는 애들 기사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요.’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너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비슷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 말고, 그들이 만날 노동현장의 현실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교와 사회는 언제쯤 만들어질까? 마이스터고에 진학한 친구들은, 정말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는지 궁금하다. 마이스터고를 밀어붙인 그 권력자가 마이스터의 의미는 알고 그랬는지는 의심이 되지만.  김현진 : 18년 간 국어교사로 살다가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직업을 바꾼 철들기 싫은 어른
2018-05-23 | hrights | 조회: 261 | 추천: 9
김시형/ 회원 칼럼니스트  “고객님, 택배가 두 개 있는데요?”  처음엔 무슨 소린가 싶었다. 최근에 무인택배함을 이용하면서 발송자가 내 연락처를 잘못 기재하는 바람에, 나는 무인택배함 비밀번호 알람 메시지를 못 받는 중이었다. 6개월 전에 택배 하나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왜 택배가 안 오지 싶으면 바로 택배사 홈페이지를 검색한다. 배송 추적을 확인해보니, 분명히 무인택배함에 도착해 있었다. 6개월이 흘러간 사이에 무인택배실은 리모델링 되었고, 무인택배함도 모두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새로운 무인택배함에는 고객센터 전화번호가 큼직하게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전화를 걸어보니, 이번에 배달 된 택배뿐만 아니라 예전에 잃어버린 택배도 고스란히 무인택배함에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약 6개월 만에 다시 찾은 택배 사진 출처 - 필자  고객센터에서 원격으로 조종해서 무인택배함 문을 열어주었다. 열어보니, 정말 내 택배가 있었다. 택배 아저씨께서 바닥에 두고 가셨다는 택배가 리모델링한 새무인택배함에서 발견된 것도 이상하다. 사실 황당하기도 해서 발견한 상태로 고스란히 기숙사 방으로 가져와 사진으로 남겼다. 택배 봉투가 왜 이렇게 심하게 손상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누가 건드린 것일까?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한다. 그래도 찾았다는 데에 의의를 두자며, 원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접는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난 뜬금 없게도 세월호를 떠올렸다. 찾은 시기는 올해 4월 초이다. 난 택배 봉투가 심하게 손상된 모습을 보면서 4월하면 연상되는 세월호가 떠올랐다. 어쩌면 얼마 전에 본 영화인 「공동의 기억: 트라우마」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내용 중에 목포에 거치되어 있는 세월호를 보면서, 세월호를 건져 올린 것으로 끝이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참에 생존자의 인터뷰도 참고할 만하다.  “생존학생들은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구조된 게 아니라 탈출했다고 말해요. 왜 사고가 아니라 사건인지, 구조가 아니라 탈출인지 한 번쯤 모두가 의문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그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의문을 풀고 싶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생길 테고 그 한 명이 우리와 함께할 거라고 믿어요” (세월호 생존자 김도연 양의 말, 한국일보, 2017년 4월 16일자)  택배 한 두 개 정도야 잃어버릴 수도 있고, 피해가 경미하다보니 그 원인들을 파헤치는 일도 대충 접어도 된다. 하지만 세월호는 다르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마치 일개 사고로 취급하고 원인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제2의 세월호 참사’, ‘제3의 세월호 참사’가 기다릴 수 있다. 세월호 참사는 사건이다. 그것도 국가가 국민의 보호 의무를 저버렸을 때 얼마나 비참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대형 참사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활동하게 될 2기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게 갈채를 보낸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김시형 : 윤리를 지식이 아닌 ‘삶’으로 이해하는 대학원생
2018-04-26 | hrights | 조회: 255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