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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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창용, 김치열, 이현종, 이희수, 정진이, 홍세화, 황은성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홍세화/ 회원 칼럼니스트  내가 다니는 상명대학교의 언덕은 높다. 높은 것도 보통 높은 것이 아니다. 학교 수업을 듣기 위해 언덕을 오를 때면 내가 지금 등굣길에 오른 것인지, 등산길에 오른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내가 서울에서 사는 곳은 연립주택의 반지하이다. 반지하 중에서도 매우 허름한 반지하이다. 해가 중천에 떠도 낮과 밤이 분간이 되지 않는, 밤이면 길고양이도 우리 집을 내려다보는, 우리 집은 그런 곳에 자리하고 있다.  최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화제가 된 영화 ‘기생충’에서는 내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일상을 대한민국 빈부격차에 따른 ‘계급의 수직구조’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영화에서는 시시각각 영상의 구도를 한없이 내려가거나 한없이 올라가는 식으로 극대화하여 촬영해 등장인물들 사이의 수직구조를 보여준다.  한 번은 동기들과 함께 학교 근처에 위치한 평창동과 부암동, 흔히들 ‘부촌’이라 불리는 곳의 집들은 왜 그렇게 높은 곳에 집을 지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화 끝에 우리는 “그들은 그렇게 살아도 불편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들은 집 앞까지 모셔다 주는 운전기사가 있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장을 봐주는 가정부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언덕’은 일상생활에 있어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부를 과시할 수 있는 상징으로까지 작용할 수 있다. 출처 - <기생충> 스틸컷 (다음 영화)  반면, 같은 산비탈에 살지만 앞의 사례와는 정반대로 고단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달동네’라고 알려진 불량 주택 밀집 지역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집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게 높은 산비탈을 오르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다.  기생충에서는 이러한 계급의 간극을 다양한 요소를 통해 표현한다. 부자인 박 사장네 가족은 어린 아들이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도 마당에 미제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채 즐겁게 놀지만, 가난한 서민인 기택네 가족은 폭우 아래 빗물과 오물에 집이 모두 잠겨버리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교차하며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 예시이다.  2015년경 대한민국에는 ‘수저 계급론’이라는 신조어가 떠올랐다. 날 때부터 금수저 혹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은 성장 이후에도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따위보다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는 대한민국 현실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이다. 기생충에서 기택은 이러한 한국 사회를 꼬집기라도 하듯 “무계획이 계획이다.”라는 말을 되뇐다. 그들이 어떠한 노력을 바탕으로 계획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더라도 결국 그들의 계급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저 계급론 열풍,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떠할까. 영화 기생충의 끝맺음은 기택의 아들인 기우가 아버지께 쓰는 편지로 끝이 난다. 멀끔한 차림새를 하고 어머니와 함께 자신이 꿈에 그리던 박사장네 저택을 구입한 기우가 아버지 기택과 재회하는 장면을 보며 나는 뻔한 해피엔딩에 ‘역시 영화는 영화로 끝이 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기우의 상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을 때는 씁쓸함과 함께 너무나도 현실적인 영화 내용에 찝찝한 기분마저 남았다.  빈부격차 문제는 비단 대한민국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세계인들의 공감을 샀기 때문에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빈부격차는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은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을 놓으려 하지 않고, 이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는 심화되었으며 중산층은 몰락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 더욱 심화된다면 언젠가 모든 서민들이 몰락하여 기득권층에 ‘기생’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홍세화 : 한창 놀고싶은 대학교 3학년 홍세화입니다.
2019-06-24 | hrights | 조회: 99 | 추천: 5
이희수/ 회원 칼럼니스트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소유하려는 일이 익숙한 세상이다.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건강, 명예, 재물 따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것들까지 가지려 한다. 행복한 순간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다며 곳곳에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방대한 정보를 '담아'두기 위한 외장하드나 웹하드 역시 흔히 쓰인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돌아보게 된다. 사진은 기억을 불러올 뿐 기억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나부터가 종종 사진을 남겨두는 것이 기억해야 할 어떤 순간을 대체한다고 여겨버린다.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저장해 둔 파일과 읽지도 못하고 책장에 채워놓은 책. 거기 담긴 지식이 내 것이 된 양 느끼기도 하지만 그 역시 실제와는 다르다.  내 것이 아닌데도 마치 내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진리'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을, 나는 으레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생각해버리곤 한다. 다름을 인정하자,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교과서 속 문구에 고개를 끄덕이긴 쉽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건이나 누군가의 행동을 평가하는 기준은 전혀 별개로 작동한다. 그것이 주관적인 틀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당연한 것인 양 확고하게 말이다. 내가 그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은 진리가 되고, 나는 진리를 가진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나의 관점과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나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나에게 있어 종종 '모자란 사람', '이상한 사람', 나아가 '사람도 아닌 자'가 되기도 한다. 사진 출처 - 필자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라 탐구자일 뿐이다. 내가 지금 진리로 여기는 것은 최종적으로 진리라고 판명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도중에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에 불과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평생을 공부한 지식인이나 많은 이들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사람이라고 자기 생각의 완전무결한 무오를 주장할 수 있으랴마는, 피상적인 지식을 접해도 가장 먼저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게 되는 나로서는 더더욱 그렇다. 심정적으로 너무나 진리임에 틀림없다고 여기게 되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정치, 종교적 신념이나 삶의 방향처럼 내 가치관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조차 옳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명한 사실을 일상에 적용하려 들면 새로운 어려움을 겪는다. 진리를 가진 게 아니라, 찾고 있을 뿐인 상태를 자각할수록 입을 열기가 망설여진다. 거칠게 말하면, 뭣도 모르고 떠들었다가 부끄러워질까봐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낫겠다 싶은 거다. 그래서 이미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생각들로 나도 모르게 성급한 결론을 내리려고 할 때, 또 그런 결론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저어하게 될 때마다 생각하려고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들을 더 많이 접한 뒤에 후회를 최소화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이 무엇일지.  많은 사람들이 자기 편에 서주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려 애쓰기. 가질 수 없는 진리를 구하는 나의 오늘자 임시 결론이다. 이 생각을 곱씹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열심을 다해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노력의 일환으로 이 열린 인터넷 공간에 주절주절 글을 적게 되었다. 끄적여 둔 꼴을 되돌아보며 가까운 미래에 머리를 쥐어뜯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올리는 건 현재 나의 지향이 보편타당함을 확신해서가 아니라, 본성을 거슬러 노력하는 과정들이 모여 더 진리에 가까워져 가는 삶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희수 회원은 현재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2019-06-17 | hrights | 조회: 157 | 추천: 7
이현종/ 회원 칼럼니스트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문구를 정말 지겹게 많이 들었다. 지금은 후반부가 바뀌었다. 현재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이다. 물론 어떤 조국이든 상관없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전체주의 혹은 군국주의 색채는 약해졌다. 현재의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유롭고 정의롭지 않을 때 충성을 하지 않아도 되고, 여차하면 그걸 뜯어고치도록 모두가 나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올해가 임시정부 100주년이라서 온 나라와 정부가 나서서 100주년임을 강조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가운데 누구도 이에 대한 반론과 의심을 제기하지도 않고, 허용하지도 않는 분위기 때문이다. 애국이 강조되면서 거리에서는 어렵지 않게 나부끼는 태극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태극기는 때때로 자유를 짓누르고, 정의 구현을 가로막는 국가의 상징으로 활용돼왔다. 늘 자랑스럽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출처 - 뉴스1 이렇듯 때때로 자랑스럽지 않았던 태극기를 훼손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 형법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형법 제105조(국기, 국장의 모독)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5.12.29.>’ 하지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첫째, 국가가 모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현행법과 법원의 명예훼손에 관한 해석을 보면 개인이 아닌 단체 혹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모욕은 모욕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례도 있다. 대한민국을 모욕한다고 하면 단체 혹은 불특정 다수인데 이것을 과연 모욕의 죄로 처벌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둘째, 그 자랑스러운 국기 또는 국장이 오욕 내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국가의 상징으로 전락했기에 이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면 그것을 과연 죄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헌법이 정한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아야 할 행위가 아닌가. 셋째, 또 지금까지 이 죄의 책임을 물어 누군가를 처벌한 경우가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이들이 평등과 정의를 목청껏 외치는 울분과 한이 맺힌 사람들을 가둬두기 위한 꼬투리를 잡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2014년 4월 세월호 집회 때 침몰 책임을 물으며 집회 도중 20대 청년이 태극기에 불을 붙여 태웠을 때, 경찰은 그를 잡아 조사했지만 2017년 탄핵 반대 집회에서 태극기가 관리부실로 훼손이 됐을 때 당사자를 잡아다 조사했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앞서 미국에서도 ‘국기 훼손이 죄인가’에 대해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토론 도중 한 명이 “우리는 저 국기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하니 미국의 코미디언 빌 힉스가 이렇게 답했다. “너희 아버지는 깃발을 위해 죽은 게 아냐. 천조각을 위해 죽는 사람은 없어. 너희 아버지는 국기가 나타내는 가치를 위해 죽은 거지. 그리고 그 가치에는 국기를 불태울 수 있는 자유도 포함돼” 우리의 국가가 불평등과 부조리의 근원이 되고, 국가의 상징인 국기가 탄압의 도구로 이용될 경우 우리는 그 때도 그것을 존중하고 충성해야할까. 아니면 본래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싸워서 뜯어고쳐야 할까. 그런 점에서 볼 때 국기 모욕죄는 과연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어긋난 것은 아닐까. 이현종 회원은 현재 금형분야에 재직중입니다.
2019-06-10 | hrights | 조회: 150 | 추천: 3
김치열/ 회원 칼럼니스트  많은 사람들은 조현병 환자에 의한 각종 사건 사고를 보고 불안하게 생각한다. 만일 가까운 곳에 조현병 환자가 거주하고 있다면 더욱 무섭게 느낄 것이다. 우리가 조현병 환자를 왜 두려워하며 과연 조현병 환자에 의해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을 해결할 대책이 있기나 한 것인가? 손자병법에 “지피지기 불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란 명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이다. 우리가 조현병에 대하여 올바로 알고 대처한다면 조현병으로 인한 위험성에 보다 더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조현병(調絃炳) 환자는 과거에는 정신분열병 환자라 불리었다. 이에 관계당국과 학계에서는 2011년 이 병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조현병으로 변경하였다. 조현병은 영어로 ‘Schizophrenia’로 불린다. 본래 조현은 ‘현을 고르는 것’으로써, 그 현이 어그러진 상태로서 기타연주로 비유하면 정신의 불협화음이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의 증상은 잘못된 믿음(망상), 실재 존재하지 않는 자극을 느끼는 것(환각/환청), 알아들을 수 없는 엉뚱한 말(와해된 언어), 기이하고 움직임 없는 특정 자세의 장시간 유지(와해된 혹은 긴장소환), 대인관계 회피, 삶에 대한 의욕 상실 등의 증상이다. 우리는 증상을 보고 이들 환자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조현병 환자들이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오해다. 다만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강서구 PC방 사건의 경우는 꾸준하게 약물을 통한 치료를 거부했거나 주변 사람들이 이 사람들에 대해서 치료가 필요하다고 인식은 하고 있었으나 제도상의 한계로 직접 치료까지 연결하지 못해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출처 - KBS 추적60분  조현병 환자에 의한 강력 범죄는 사회적 위해가 크다고 생각한다. 음주상태에서 범죄행동은 일반적인 폭력사건이나 강력사건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 마약을 복용한 상태에서 벌어진 범죄 또한 사회를 불안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술이나 마약은 대체적으로 본인이 자발적으로 과다하게 복용하여 문제가 되고 유발 물질을 끊으면 문제가 해결 된다. 그러나 조현병 환자에 의한 사건 사고는 본인 의지로 되는 문제가 아닌 뇌의 이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정신보건센터나 정신과 병원의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조현병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여기 소개하는 사람은 조현병 환자들에게는 드문 사례가 아니다.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법대 교수 엘린 삭스(Elyn Sacks)는 젊은 시절에 망각, 환각, 와해된 인지로 인하여 의사에게 회복가능성이 낮은 조현병 환자로 진단받았으나 꾸준한 치료와 주위 사람들의 돌봄을 통하여 회복되어 학교에서 형법과 심리학을 전공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은 자신과 같은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연구하고 있다.  어떤 조현병 환자는 장기간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사람에 대한 공격성이 커져서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먼저 조현병 환자 처리에 대하여 고민하여야 한다. 이들에게 치료를 위한 격리를 할 것인가 아니면 촘촘하게 짜여진 사회망을 통하여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사회적응 프로그램이 있듯이 치료를 끝마친 환자든지 치료중인 환자든지 사회적응 프로그램이 지금 보다 훨씬 많아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사회구성원간의 경쟁은 격화 되고 일부는 경쟁에서 패배하여 도태되기도 한다. 조현병 환자와 같이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어떤 면에서는 약자인 이들을 공동체가 품고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며 국가가 나서서 일반인들을 여러 방법으로 계몽하여 이런 환자들과도 서로 거리낌 없이 어우러져 살도록 나서야 한다. 김치열 회원은 현재 교도관으로 재직중입니다.
2019-06-03 | hrights | 조회: 126 | 추천: 6
김창용/ 회원칼럼니스트  3명의 20대 여성이 비키니만 입고 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운동을 통해 다져진 몸을 관객을 향해 뽐내듯 포즈를 잡는다. 피트니스 대회 얘기는 아니고 지난해 있었던 ‘비키니 위문공연’ 얘기다. 같은 형식으로 진행된 또 다른 군 위문공연에서 카메라는 당연하다는 듯 여성 모델들의 특정 신체부위를 클로즈업 해서 화면에 띄웠다. 참석자들은 환호했고 모델은 당황했다.  상위부대인 육군 수도방위사령부가 입장문을 내고 사과를 했음에도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과는 차치하더라도 문제는 지속됐다. 올해 다녀온 예비군 훈련에서 있었던 일이다. 늘 있는 안보교육에는 무슨 상관인지 도저히 가늠 할 수 없는 걸그룹의 ‘위문’ 영상이 등장했다. 헐벗은 여가수가 ‘예비군 오빠들 화이팅하세요!’ 따위의 말을 하는 영상이었다. 도대체 이게 대한민국 안보와 무슨 상관일까 곰곰이 생각도 해봤지만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비판이 일었고,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위문공연을 폐지해 달라는 글이 올라왔다. 나는 흔히 하는 말로 ‘터질 게 터졌다’고 생각했다. 으레 남자들끼리만 모여 나누는 대화 중 유난히 이성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듣기 불편하다. ‘20대 남성들이 여자와 성에 대해 대화하는 게 뭐가 문제냐’, 혹은 ‘남성은 원래 이렇다 저렇다’라는 말들을 억지로 수용해 ‘그렇다더라’ 하고 이해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얘기들이 늘 오간다.  ‘누가 예쁘다’, ‘누구는 어떻다’ 따위의 평가는 기본이다. 심지어 서로 아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몸매가 좋다’, ‘누구랑 잠자리를 했다.’ 등 적나라한 얘기가 끊임없이 오간다. 심지어 그 말들은 훈장이 되고 많은 여성을 만난 남자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2012)에서도 언급했듯 너도나도 ‘호모 소셜(동성 사회, 남성 연대)’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남성성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은 객관화, 타자화되어 일종의 수집품이자 전리품이 된다. 대화에 동조하지 못하거나 불편함을 드러내면 ‘고자’ 혹은 ‘게이’가 되기 십상이다.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여성혐오적 발언에 대한 문제제기가 또 다른 여성혐오로 번지는 식이다. 호모 소셜 속에서 ‘진짜 남자’가 되려면 여성을 타자화해야 한다.  군대 밖에서도 이런데 안은 오죽할까. 군 생활 중 남성만 나오는 TV프로그램은 시청 금지였고 아침에는 인기 있는 걸그룹의 뮤직비디오를 항상 틀어둬야 했으며 여군에 대한 끊임없는 루머(주로 성적인)는 끝도 없이 생겨났다. 휴가를 나가서 여성을 만나지 않으면 욕을 먹었고, 만나지 않았다면 성매매라도 했어야 했다. 그래야 ‘고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SNS 상 여성 친구들은 ‘누구 친구가 예쁘다’ 식으로 리스트화되어 선임병들에게 전해졌다. 본인들의 마음에 드는 여성 지인이 있으면 A급 병사가 되었고, 그런 지인이 없다면 소위 폐급 병사가 됐다.  뜻하지 않게 ‘고자’가 된 사람으로서 보기에, 남성들의 여성혐오적 시각은 호모 소셜 속에서 소외되기를 두려워하며 발현되기에 그 뿌리가 깊다. 그리고 이는 곧 서로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수단이 된다. 남자들끼리 “진한 우정을 나누자”며 가진 술자리에서는 앉자마자 주변 여성 손님들이 앉은 테이블을 둘러보고 서로 평가를 한다. 그리고는 맘에 드는 상대에게 말을 건다. 그런 행동이 불편해 가겠다고 하면 ‘갈 거면 폭탄(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 치우고 가라. 의리 없이 가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등의 대답이 돌아온다.  상황이 이러하니 위문공연을 폐지해 달라는 의견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뻔했다. 남성들이 주를 이루는 카페나 커뮤니티에서는 ‘위문공연 없으면 (군대 안에서) 뭘 보고 사냐’ 등 반대의견이 넘쳐났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의 반발은 더 커서, ‘남자들끼리 갇혀있는데 성적인 시선으로 보는 게 뭐가 문제냐’, ‘추행만 안하면 됐지’, ‘너희 같은 애들은 부르지도 않는다’ 등 성 상품화나 성적 대상화 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말들을 해댔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갈무리  여성 인권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에도 여성들은 여전히 타인의, 특히 남성의 필요에 따라 규정되고 있다. 힘을 가진 남성들이 스스로는 오롯이 성적 주체이고자 하고, 객체가 되기 두려워하기에 그렇다. 치즈코는 “군대는 매우 중요한 호모 소셜이다. 한국 남성들은 군대에서 살생과 폭력을 배운다. 문제는 이런 작동원리를 적극적으로 배운 남성들은 평화적 생물로 존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에 더해 군대는 살생과 폭력을 갖추기 위해 다른 것들은 통제하면서, 성적인 해소는 독려한다. 성욕의 노예로 여긴다는 의미다.  비키니를 입고 자신의 몸을 수많은 남자들 앞에서 드러내는 동생뻘 모델들을 대하는 태도는 환호가 아닌 좌절이고 반성이었어야 한다. 위문 공연을 유지하자는 주장은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해침은 물론 두려움 많은 겁쟁이이자 성욕의 노예임을 자백하는 모양이기에 더욱 그렇다. 스스로 겁쟁이나 노예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지는 말자. 김창용: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열심히 공부하고자 노력만 하고 있습니다.
2019-05-29 | hrights | 조회: 108 | 추천: 10
임영훈/ 회원 칼럼니스트  어렵고 포괄적인 글은 쓰지 말자면서도 주제를 찾다 보면 가끔 삼천포로 빠진다. 일상에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통시적으로 파악하고픈 욕심이다. 통찰은 언감생심, 결국 미로에 빠져 헤매고 만다.  결국 경험적, 미시적으로 가깝게 볼 수 있는 일상사를 찾다가, 그만 인간 관계에서 시작한 글이 자아와 사회라는 거시 경제학(?)이 된다.  사람 사이란 뜻의 인간이 그대로 사람이란 뜻으로 쓰일 정도로 사람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 ‘인간 관계’란 익숙한 말에는 인간에 관계가 마치 한 단어처럼 따라붙는다. 그만큼, 관계는 선택 같은 필수다.  태어나면 관계의 연속이다. 부모 이외의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초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몇몇 기억들이 떠오른다. 열 살도 되지 않았던 저학년 때에도 반장을 맡을 리더 어린이가 있었고, 점점 서로의 외모 등을 인식하면서 잘 생기고 예쁜 친구가 누구인지, 공부나 운동은 누가 잘 하는지 구별해갔다. 고학년인 10대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이런 구분과 등급은 점점 명확해지고 부러움과 더불어 시기, 질투 등도 커지기 시작한다. 남학생과 여학생 간 미묘한 분위기도 싹트고, 한 쪽만 마음이 있는 짝사랑 같은 사랑의 짝대기가 생겨난다. 공부를 잘하거나, 패션 감각이 있거나, 주도적이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잘 놀거나 등 내세울 게 있는 아이들은 이성에게 인기를 끌고, 그룹을 만들어 어울리는 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내성적이거나, 자신감이 없다면 무리 짓거나 그룹을 형성하기 쉽지 않다. 결국 ‘inner circle’에 안착하기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자신이 어딘가 ‘하나의 인간으로서’ 결핍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열 살 전후로 느꼈던 ‘inner circle’의 진입 장벽은 일종의 인간관계의 고비였다.  나는 쉽게 다수에 섞여 어울리는 체질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졸업 문집을 아직도 갖고 있는데, 각자 짧게 자기소개를 하는 란이 있고 몇몇은 그림이나 글재주를 자랑하기도 했다. 모두에게 공통되는 짧은 소개 글에는 공통 질문이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6학년이래봤자 만 12세의 어린이였는데, 많이 나온 답은 이랬다. ‘돈, 여자, 남자, 직업, 가족, 건강, 성적’ 등등. ‘꿈, 희망’ 같은 이상적 단어도 있었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건 없었다. 너무 옛날이라 일일이 기억하긴 어렵지만. 무엇보다 아직 어린이였는데도 대부분의 답들이 상당히 (내가 보기엔) 속물적이었다.  나는 ‘아내, 종교, 음악’ 이라고 썼다. 어린이가 적었다니 어색한 감이 있지만, 담임선생님은 입이 닳도록 칭찬하셨다. ‘여자’라고 적은 다른 답들과 ‘아내’라고 적은 것은 다르다면서 그 부분을 강조하시기도 했고, 나머지 둘도 그런 것을 쓴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청년 성가대를 10년 넘게 한 걸 보면 별 것 같지 않던 문집이 타고난 성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나침반이었다.)  동시에 선생님은 내가 현실 감각이 없다며 걱정을 하기도 하셨다. 수업 시간에 앞으로 뭘 하고 싶냐는 주제가 나와서 다들 이런저런 장래 희망을 말하고 있는데, 내 차례가 오자 문득 낡은 건물들에 페인트칠을 해주고 돌아다니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당시 어린 눈에 비친 서울의 건물들이 전부 낡거나 우중충하고, 지금처럼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건물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게 무슨 미래에 실제 갖게 될 수 있는 직업을 얘기한 것도, 현실적 답도 아니었기에 선생님은 나의 몽환적 답변을 타박하셨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저기서 실소인지 한숨인지 황당해 하는 반응도 있었다. (아직도 동창 모임에 나오는 여자 동창이 그 중 한 명이었다. 뒤를 돌아다보기까지 했었기에 기억이 난다.)  이런 나만의 색깔과 가치관, 주관 덕분인지 친구가 쉽게 생기지 않았다. 더하여 TV를 사회악으로 여기는 집에서 자라 연예인들 신상으로 이어지는 또래들의 수다에 대화 주제가 없다시피 했다. 여러 면에서 어딘가 특이한 애로 인식되었고, 성적이 나오는 편이었지만 온통 성적에 목을 매는 상위권과도 그렇게 통하지는 않았다.  내 안에는 점수에 목을 매는 교육 환경과 더불어, 점수에 목을 매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까지 똑같은 괴물로 그려져 있었다. 비판 정신을 뱃속부터 타고났는지, 교육 현실을 비난하는데 열을 내곤 했다. 입시 교육이 시작되는 중학교에 올라가자 학교가 즐겁지 않았고, 배우고 익힌다는 본연의 공부에는 뜻이 없고 온통 시험 점수에 목을 매는 학교에 호감이 가지 않았다. (실제로는 물론 나 또한 점수가 중요했지만) 결국 나는 어디에도 섞이기 힘든, 회색분자와 같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환경의 평범한 학생, 나 또한 입시결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음에도, 스스로를 떼어내어 거대한 실패작인 한국의 교실에서 자신을 분리시켰다.  십대 시절 형성된, 관계의 단절이 가져오는 외톨이의 삶은 그 후의 시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질만능주의와 성적 지상주의를 생각 없이 받아들여봐도, 이미 형성된 ‘나’는 그렇게 쉽게 속물로의 카멜레온과 같은 변색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와 주변의 색은 매번 어딘가 달랐으며, 그럴듯하게 섞여서 숨어 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보란 듯이 드러나서 뭐라도 문제를 일으키고는 했다.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 그게 가족이든 친구든, 아니면 이익 사회의 영역이든, 다수의 사고는 다수가 맞음을 강변하면서 소수를 돌연변이 취급하고 사사건건 억누르게 마련이다. 그게 다수의 생존 방식이다.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봐’라던지, ‘거봐, 니가 틀렸지’라며 다수결을 강요하게 된다. 그렇게 다수는 다수가 지배하는 체계를 공고히 유지하려 한다. 다양한 생각이 공존하게 된다면 다수가 가지는 우월성은 근거 없이 흔들릴 위험에 처한다. 이것은 또한 관계에 중점을 두는 인간 사회, 특히 동아시아 사회를 이루는 축이 되므로 일종의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마치 순환 출자와 같이 돌고 도는 자체 순환의 고리가 꽤나 튼튼하게 엮여 있는데, 한 쪽이 끊어져도 결국은 이어져서 계속 돌게 되는 아주 강한 매듭의 반복이다.  내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고만 해도 우군이 필요한데, 대부분이 특정한 생각을 갖고 살아가기에 그게 정답이고 정상이며, 내 편은 없었다. 예를 들어, ‘입을 옷이 있는데 왜 옷을 또 사?’와 같은 질문을 하면 모자란 취급을 받게 된다. 어느 사회이건 기존에 형성된 사고틀이 굳어 있기 때문에, 어떤 질문이던 간에 질문 그 자체로 평가되기 이전에 사회의 관습으로 먼저 재단된다. 공고한 선입견이 그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강한 틀이고, 구성원들은 그 안에서 적절히 따르고 즐기고, 적절히 진보적인 척 반항도 하다가, 대체로는 인정받으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적어주는 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뭐든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맨날 헤헤 웃으며 맞춰주는 사람이 아닌 자는 이렇게 매사가 힘들고 삶 자체가 버겁게 된다. 좌파 시민단체에 참석해도 주장에 동의가 안 되면 자기 할 말을 하게 되고, 우파 기업인들과의 업무 미팅에서도 자기 색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스폰지가 되기는 힘들다. 반대로 스스로를 버리고, 다수에 맞춰가는 이는 관계의 달인이 될 수는 있다. 문제는 정작 그 자신의 정체성인데, 따지고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꿋꿋이 다수의 횡포에 항거하면 자아를 지키지만 관계의 구성에 걸림돌이 있는 것과 대비된다.  여기에 고민이 싹튼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인지, 아니면 여기선 이러고 저기선 저러는 카멜레온처럼 살아갈 것인지, 생존의 본능은 무조건 관계를 택해서 후자로 갈아타라고 권한다. 인간을 포함해 모든 무리짓기를 하는 동물들의 본능이다. 생물학적으로 무리에서 소외되는 것은 곧 생존 자체가 어려워지는 죽음을 의미하기에, 무리를 이루는 동물들에게서 개체를 소외시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고 한다. 실제로 무리 동물 중 무리에서 어떤 이유로든 떨어져 나간 개체는 혼자서 생존하기보다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서 무리에 껴주지 않고 왕따를 시키는 것은 그의 영혼의 심장을 떼어내어 길거리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경제적으로는 살 수 있어도 상당수가 자살을 택한다.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된 경우,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 관계망이 소실되어, ‘사회적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  그래도,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는 안창호 선생의 말처럼, 나의 신념을 믿고 부러지더라도 혼자 가는 게 옳은 일일까. 나도 사람이기에, 생각에 오류가 있을 것이고, 그것만 고집하는 것은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외부의 생각들에 내가 오염된다고 여길지, 아니면 그런 여러 자극들에 의해서 외골수의 생각이 다듬어진다고 판단할 지는 여전히 너무나 어려운 문제다. 그만큼 답을 구하기가 쉽지 않고, 복잡의 끝을 달려가는 세상에서 단순히 자신의 입장을 취하는 것조차 갈수록 어려워진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다양한 뉴스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난해한 퀴즈를 매일 풀며 하루하루 넘어가는 줄타기와 같다. 사진 출처 - 티스토리 블로그  그래도 스스로에게 개인의 신념과, 자기 자신의 사고의 완결성을 믿으라고 하고 싶다. 이 말은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주입되는 일련의 지침들을 무작정 따르지 않고, 어떤 분위기를 타고 휩쓸리는 열풍 등에 무심코 올라타지 않기를 바람이다. 내가 맞다고 믿는다면,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도 꺼내어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바람이 불어 다수가 특정 사안에 휘말려 혈안이 된다 해도 자신은 부러 그 바깥으로 나와 침착하거나 외려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냄비 끓듯 분위기에 휩쓸리는 사회 현상들을 보면 못내 씁쓸하다. 중국, 일본과 더불어 인간 사회에서도 가장 관계를 중시하는 동아시아 사회여서 그런지, 낡은 동아시아 관념을 타파하려는 이들조차도 실제로는 동아시아적 행동 패턴을 보인다.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개인의 구체적 동의를 구하기보다는, 진영 논리로 세를 모아 반대편을 박살내는데 열을 올리거나, 힘 대 힘으로 밀어붙여서 상대방을 밟고 승리를 쟁취하는데 혈안이 돼있다. 이젠 이게 대세다, 이젠 우리가 다수다, 이젠 우리가 주류다, 이렇게 외치면서 기존의 주류를 비주류로 몰아 힘으로 억누르려고 한다. 모두가 같은 의견인양 세의 확장이 중요하기 때문에 각 개인의 다양성은 무시 되며, 강성이 아닌 회색분자와 같은 온건파들은 공격 일변도의 전선에 도움이 안 되므로 내부의 적으로 취급된다.  사용자 없는 노동자가 없듯, 남성이 없다면 여성이 없다. 그렇지만 현실의 주장들은 한쪽을 끊임없이 공격해 힘을 못 쓰게 만들어버리면 자신들이 살아날 것처럼 자극한다. 과격한 단체일수록 내부의 이견을 틀어막아 그 순수성?을 유지하겠지만, 다수의 힘을 빌어 관계를 담보로 결집을 유도하는 건 자신들의 비판의 대상과 닮아 있다. 결국은 왜곡된 구조를 바꾸겠다는 이상은 구호에 그치고, 실상은 그 자리를 내가 차지하겠다는 권력 투쟁으로 흘러간다.  물론 맨날 얼굴을 봐야하는 나의 소속 단체 안에서 부딪히지 않고, 순종적으로 인정받는 관계만 고민하는 게 현실적으로 개인에게 무조건 이득이다. 언제 볼지 모르는 외부인이나 전체 사회를 걱정해줄 필요가 없고, 하다못해 외부와 치열하게 부딪히고 싸우면 내부에서 나에 대한 지지와 환호는 늘어간다. 나의 행동반경이 당연하게도 내가 속한 계급과 계층에 한정되기에 이런 맹점이 나온다. 마치 전체 사회를, 인류를, 지구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나와 내 이익집단의 이익을 강변하고, 작은 관계가 큰 관계를 집어삼키는 일들을 반복하다 보면 개인과 사회는 새로운 사고와 물결에 힘을 얻기보다는 병들어 갈 것이다. 세계와 미국을 고치겠다던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로 세계와 자국을 외려 병들게 하듯이, 집단 이기주의는 내 집단에도 결국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 우리 정당과 우리 단체, 우리 가족,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의 이익만을 극도로 추구하게 될 때 파국의 결과는 과거의 당파싸움과 현재의 국회 등을 보면 답이 나온다.  그래서 가급적 많은 이의 자아가 깨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이었으면 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면서도 타인과 소통이 되는 것, 어려운 일이다.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복잡성이 극한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에서 서로 간에 총성 없는 전쟁이 아닌 공존이 되기 위해서는 독립된 자아와 유연한 소통이라는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함을 느낀다.  거대한 사회악이라고 낙인찍은 기득권의 축들, 1등 신문, 만년 여당, 막강한 경제력의 기업 집단, 역사를 독점해왔다는 남성들, 구체적으로 얘기해보면 ‘사기’ 탄핵을 당했다는 전 대통령과 감옥 뒷바라지까지 하며 추종하는 이들, 셀 수 없이 많은 가상의 적들과 기득권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임의로 비정상들을 선정하고 차례로 제거한다고 내가 정상이 되고 사회가 정상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바로 내가 정상이고 네가 비정상이라는 단순한 전제이다. 상대방이 볼 때는 그대로 거꾸로 국면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머리를 열고 고쳐주겠다며 마주 보고 확성기를 튼 채 일장 연설을 하니 적절한 선의 이해라는 건 가능하지 않고, 타도의 대상으로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세상은 복잡하다. 내가 ‘안티 조선’ 모임에 가입해 있더라도, 조선일보에 다니는 친구가 있을 수 있다. ‘안티 조선’ 모임 안에서도, 생각이 다를 때는 이 건은 그렇게 몰아갈 수는 없다고 조선일보를 변호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집단에 소속돼 있더라도 독립된 꿋꿋한 자아, 당파성이 제외된 바로 그 ‘개인’이 갈수록 아쉽다. 이런 유연함이 자아를 지키면서도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담보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노자의 ‘상선약수’, 유가의 나라에서 물처럼 쉽게 버려져 온 그 한 마디가 절실하다. 위로 올라가 지배하려는 사람만 보일 뿐, 아래로 흘러 바탕이 되려는 사람, 그런 단단하고 우직한 개인의 가치가 갈수록 중요하다고 느낀다.
2019-05-14 | hrights | 조회: 234 | 추천: 15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서울의 한 로스쿨에 다니는 김진영씨(26)는 최근 학교수업과제를 위해 법무부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변호사시험 자 료를 찾다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일부 기출문제자료가 한글파일(.hwp 파일형식)이 아닌 사진파일(.jpg 파일형식)으로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전맹 시각장애인인 김진영씨는 평소 시각장애인용 보조기기를 이용하여 공부한다. 공부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긴 문서파일을 보조소프트웨어를 통해 음성으로 듣는 방식이다. 이 보조소프트웨어는 문서파일(.txt, hwp, doc 등)에서 문자를 인식해서 다시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방법으로 시각장애인의 학업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문자를 음성으로 변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사진파일은 음성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김진영씨는 변호사시험 자료를 제공하는 법무부에 전화로 문의하여 사정을 설명한 뒤 한글파일을 요청했으나 담당 공무원은 “저희가 (김진영씨가) 시각장애인인지 어떻게 확인하죠?”라며 터무니없는 반응을 보였다. 김진영씨가 복지카드로 증명할 수 있다고 대응하자 이번엔 사진파일만 제공받는 비장애인과 형평성이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었다. "공식홈페이지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올리면 되지 않냐."고 물었지만 담당 공무원은 말꼬리를 흐린채 전화를 끊었다. 며칠 뒤 담당 공무원은 김진영씨에게 전화를 걸어 원본파일을 지워서 제공할 수가 없다는 요상한 변명을 했다. 국가시험 원본파일이 없는 게 말이 되냐고 반문하자, 갑자기 말을 바꾸어 파일을 지우진 않았지만 찾는데 오래 걸리니 기다리라고 답했다. 결국 언제까지 한글파일을 줄 수 있다는 확답은 없었다.  법무부는 그 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①문제 내용에 개인식별정보가 포함되어 정부 보안 정책상 홈페이지 업로드가 불가능하다, ②수험용으로 가공, 재생산하여 고시학원화할 우려 때문에 한글파일을 업로드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한 향후계획으로 “법무부 방문 시 한글 파일 열람 후 현장에서 보조기기를 통한 녹음 등 원하는 방법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진출처 - 법률신문  물론 법무부가 한글파일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아예 변호사시험 자료를 공부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김진영씨는 여태까지 대학교 및 대학원 수업자료의 문서파일 제공을 거절당하는 경우, 장애학생지원센터 또는 시각장애인복지관 등에 문서화 작업을 맡기곤 했는데, 이 작업은 최소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까지도 걸린다. 봉사자가 자료를 보며 일일이 타이핑해서 전자문서로 옮기는 고생스러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겐 다운로드 클릭 한 번이면 볼 수 있는 자료. 시각장애인에겐 복지센터에 문의, 봉사자들의 노동, 그리고 최대 6개월간의 기다림 후에야 비로소 사용 가능한 자료가 된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0조 1항은 “공공기관은 장애인이 전자정보를 이용하고 접근함에 있어서 장애를 이유로 차별행위를 하여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의 차별행위에는 형식적으로는 동일하게 대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장애인에게 불리한 경우도 포함된다. 하지만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 등이 있는 경우는 면책될 수 있다.  법무부 측이 주장하는 보안 및 수험용 가공화의 우려가 ‘과도한 부담이나 현저히 곤란한 사정’에 해당할까? 변호사시험 문제에 있는 개인식별정보는 익명화(별표처리)를 거쳐서 업로드하면 그만이고, 안타깝게도 현재 법무부가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 파일들에는 이미 수많은 주소, 연락처, 주민번호, 사건번호가 무방비하게 노출되어있다. 수험가공화가 우려된다면 워터마크를 삽입하거나 수정금지용 문서파일을 제공하면 된다. 둘 다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작업이다. 아무리 ‘슈퍼갑’이라지만 잠시만 고민해보면 해결책이 참 많은데, 공무원시험 경쟁률이 40대 1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자료가 필요하면 현장에 방문하라는 법무부의 공식 해결책을 들은 김진영씨는 “법무부가 무슨 독서실도 아니고..”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법무부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3조에 따라 차별행위를 하는 자에게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차별 시정도 좋지만 “너나 잘하라”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새로운 차별행위나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2019-05-08 | hrights | 조회: 213 | 추천: 6
박선영 / 회원칼럼니스트   ‘인스타충’을 ‘蟲(벌레 충)’이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던데 그렇다면 나도 인스타충이다. 2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이하 인스타)을 시작해서 요즘 한창 충실하게 즐기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사생활을 드러내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최근에는 내가 교사임을 알 수 있는 사진도 올리고 있다. 인스타에 충실해지니까 인스타에 자주 들어가고 사진을 자주 올리는 것뿐만 아니라 검색까지 인스타를 통해 하기 시작했다. 인스타에 '#◯◯◯'을 검색하면 내가 알고 싶은 정보에 관한 방대한 사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요즘 핫한 맛집, 감성 충만한 카페, 유행하는 패션 아이템,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댕댕이짤(멍멍이+움짤)까지 모두 인스타를 통해 찾아본다.   특히 인스타는 나의 관심사를 찰떡같이 알고 그와 관련된 사진을 계속 제공해준다. 이미 검색창이 내가 좋아할 사진들로 가득 차있고 새로 고치면 또 다른 사진들로 채워진다. 2000년대에 싸이월드에서 파도를 탔던 것처럼 인스타에서 사진을 타고 타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개미지옥이 따로 없다. 어김없이 인스타를 탐험하던 어느 날, 우연히 ‘#쌤스타그램(선생님+인스타그램)’의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나와 같은 교사들이 아이들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거의 예술과 같은 판서와 칠판 그림, 매일매일 공개 수업을 하나 싶을 정도로 완성도 높은 학습 자료 등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 새 나는 인스타 검색창에 ‘#쌤스타그램’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쌤스타그램’을 검색한 인스타 화면은 교사들의 ‘셀카’ 사진으로 가득 차있었다. 대부분 여성 교사들의,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몸매를 강조한 사진들이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같은 인물 사진이라도 보는 사람은 그 의도를 구분할 수 있다. 교실을 배경으로, 화장을 진하게 하고,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여성성’을 드러내는 포즈를 취한 ‘교실 셀카’가 한 ‘여성 교사’의 인스타 피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보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물론 인스타는 사진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이다. 사진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을 한 명의 ‘인스타충’으로서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교사라면, 획일화된 미의 기준에 맞춘 외모를 전시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생들의 성장 과정에서 미디어가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교사라면 말이다.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갈무리   최근 몇 년 동안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여성에게 획일화된 미의 기준을 강요하는 대중매체의 해악이 얼마나 심각한지가 사회적으로 다시금 환기되었다. 예를 들어, TV에서 재연되는 십대 여성 청소년의 이미지는 청순하냐, 섹시하냐, 아니면 둘 다냐의 차이만 있을 뿐 단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당신이 지금 떠올리는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과 하얗고 극단적으로 마른 몸’이 바로 그것이다. 그에 비해 남자 연예인의 외모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다양하다. 여성 청소년들은 이러한 여성의 이미지를 기준으로 자신의 몸을 조각조각 나누어 끊임없이 평가한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 청소년들이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자아상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미용과 성형은 아주 큰 돈이 되는 산업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여성의 꾸밈을 조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꾸미는 자유’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의문이 든다.   특히 요즘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이전의 전통적인 미디어보다 유튜브와 SNS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시대이다. 초등학생이 화장을 가르쳐주는 뷰티 유튜버를 자처하고, 어린이에게 화장을 시키며 어린이 화장품을 소개하는 컨텐츠가 비판을 받는 와중에 일반 SNS 유저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SNS가 비공개 계정이 아니고서는 비밀 일기장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계정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것은 나의 일상, 취향, 생각 등을 알리고 공유하겠다는 의미이다. 특히 인스타는 ‘#(해시태그)’ 기능을 통해 사진을 범주화하면서 사진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준다. 그래서 자신의 사진이 많이 노출되기 바라는 유저들은 자신의 사진과 관련된 수많은 해시태그를 게시물에 달아놓는다. 예를 들어 #쌤스타그램#출근룩#dailylook#일상#피곤#월요병 이런 식이다. 누군가는 ‘좋아요’를 많이 받고 팔로워를 유입할 목적으로 사진과 관계없어 보이지만 접근성이 높은 해시태그를 몇 줄씩 달아놓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개인의 적극적인 SNS 활동이 미디어 컨텐츠 생산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교사들에게 탈코를 강요하며 얼굴 사진을 SNS에 일체 올리지 말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쌤스타그램’을 달고, 프로필에 교사임을 밝혀놓고 게시물을 올리거나 컨텐츠를 만드는 교사라면 그것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사는 쉽게 학생들의 역할 모델이 된다. 그래서 나는 다양한 외모, 체형, 라이프스타일, 취미, 재능 등을 가진 교사의 존재만으로도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SNS나 미디어 창작 플랫폼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학생들이 다양한 삶을 상상하는 데에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 교사로서 내가 만나는 학생들에게 ‘가장 나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그리고 너무 이쪽만을 봐왔을 학생들에게 ‘저쪽’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선택했다.   내가 학교에서 매고 있는 출입증에는 3년 전 나의 사진이 붙어있다. 머리가 길고 화장을 한 내가 사진 속에서 예쁘게 웃고 있다. 그때 당시에는 ‘선생님 예쁘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 ‘예쁘다’라는 말에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여성이 인정받는 방식이고, 여학생 스스로도 그것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의 모습이 은연중에 여성에 대한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출입증 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학생들이 깜짝 놀란다. 나는 3년 전과 같은 모습을 유지할 때보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나에 가깝고 훨씬 자유롭다고 느낀다. 짧은 머리에 화장을 안 하고, 통바지와 긴 치마를 주로 입으며 축구나 스쿼시 같은 격렬한 운동을 좋아하는 나로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이런 유형의 여성 어른을 만나는 경험은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모든 여교사들이 나처럼 하고 다닐 필요가, 굳이 축구를 좋아할 필요가 있겠는가. 화장한 나의 얼굴을 예쁘다고 하는 학생들에게 고맙다고 하기보다는 외모 칭찬도 평가가 될 수 있으니 하지 말자고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화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함께 토론해보는 것은 어떨까. 교사의 외모보다 다양한 취향과 재능을 드러내보는 것은 어떨까. ‘#댕댕이’를 검색한 인스타 화면에 종종 음식 사진과 셀카가 끼어있듯이 ‘#페미니스트’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인생을 살게 된 나도 내 말이나 행동이 혹시 페미니스트답지 않은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신한다. 교사로서 나는 더 이상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사회의 가치를 되물림하는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페미니스트’를 달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나와 나를 만나는 학생들에게 더 큰 자유를 줄 거라는 것을.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
2019-04-25 | hrights | 조회: 338 | 추천: 19
주윤아/ 회원 칼럼니스트  화창한 봄날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한반도를 덮친 초미세먼지는 2015년 측정을 시작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하며 7일 연속 비상저감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침마다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등 대한민국의 봄 풍경이 달라졌다. 올해는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정부는 이를 대한민국 100주년으로 선언하면서 독립유공자 전수 조사 및 신규 유공자 발굴 사업도 대대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행 교과서 등에 여성독립운동가나 여성 위인을 찾아보면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다. 유관순 열사 등 7명이 수감됐던 여옥사 8호 감방이나 이윤옥씨가 발행한 <여성독립운동가 300인 인물사전> 등을 일례로 볼 때 수많은 여성 위인들이 시대의 억압 속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아직도 어둠 속에 묻혀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라도 청소년들에게 여성 위인이 없었던 게 아니라 우리가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부디 대한민국 100주년의 경축과 동시에 여성 위인 발굴의 원년이 되길 바란다.  스포츠계의 미투는 언제든 터질 일이 터졌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만큼 성폭력은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작년 12월 빙상계에서 시작되어 유도, 태권도 등 다른 종목까지 연이어 성폭력이 폭로되면서 오래전부터 루머나 의혹으로 떠돌던 대한민국 체육계의, 특히 청소년 선수들에 대한 성인권 유린 실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체육·시민단체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코치와 감독, 외부 시선에서 차단된 폐쇄적인 합숙소와 훈련장, 사고가 났을 때 묵인, 방조, 심지어 공조하는 침묵의 카르텔까지 이런 사건에 최적화한 체육계 관행과 성문화가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러므로 빙산의 일각일 뿐인 가해자 몇 명에 대한 보여주기식 처벌이 아니라 이번 사건들의 진상규명과 성폭력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만들어지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개입이 절실하다.  최근 연예계에서는 상상 속에나 있을법한 영화 같은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클럽 버닝썬 폭행 사건으로 시작해 거대한 나비효과가 일어나면서 연예계와 고위층의 온갖 추악한 범죄가 그 민낯을 드러냈다. 일명 ‘버닝썬 게이트’로 불릴 만큼 뇌물, 탈세, 마약 유통, 성상납, 디지털 성범죄, 권력층과의 유착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범죄들이 고구마 줄기 캐듯 줄줄이 달려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의혹만으로는 진실의 뿌리를 찾기 어렵지만 우리는 그 실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엄숙주의로 무장한 채 뒤에선 온갖 성범죄를 일삼고 ‘친목도모’를 명목으로 이를 공유하는 대한민국의 이중적 성문화와 일명 VIP로 불리는 고위층과 공권력의 불법 유착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게다가 선정성만 부각하여 몇 연예인의 성범죄로만 프레임을 변질시키는 언론도 결국 공범이 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어느 순간부터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적절한 처벌에 주목하기보다는 이 사건의 (불특정 다수) 여성 피해자들 찾기 놀이를 하는 무분별하고 어긋난 호기심이다. 이것은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를 당하는 이른바 ‘2차 가해’의 명백한 범죄 행위다. 피해자를 추측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 모든 행위는 지금 당장 멈춰야만 한다.  학교 안팎에도 4월의 봄꽃이 형형색색 피었다. 그러나 학교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 살갗을 에는 한겨울 북풍 한파 같은 스쿨 미투는 끝나지 않았다. 수원의 00여고에서 이 학교 교사는 담요를 두른 학생에게 ‘여기가 수원역 집창촌이냐’고 희롱했고, 화장을 하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창녀 같다’고 말하는 등 수년 간 학생들을 상대로 성희롱성 발언을 일삼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청 신고가 이뤄지는 등 여러 차례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학교는 해당 교사에게 언행을 조심하고 주의하라는 ‘구두 경고’ 정도로 안일하게 대처했음이 드러났다. 학교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스쿨 미투가 이어진 지 1년이 됐지만,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폭로가 계속되고 있다. 교육계에 따르면 지난해 스쿨 미투 운동이 벌어진 학교는 전국적으로 70여 곳이라고 한다. 이 중 실제 교육청 감사를 받은 건 6건 정도이며 징계 현황은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는 스쿨 미투 집회 현장에 걸린 피켓처럼 학교 역시 안전하고 성평등한 공간이 아니다. 이제 지난 1년 동안 쉽지 않은 상황에서 용기 내어 준 스쿨 미투 고발 학생들의 목소리에 어른들이 즉각 응답할 때다. 출처 - 세월호도봉모임  그리고 4·16……5주기가 되었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납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완수하여 보다 안전한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촛불시민들과 현 촛불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한민국에도, 학교에도 2014년 4월 16일 이전보다 분명 안전하고, 스쿨 미투 이후에는 진정 성평등한 진짜 ‘봄’이 오기를 소망한다. 주윤아: 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2019-04-18 | hrights | 조회: 202 | 추천: 6
주만/ 회원 칼럼니스트  100년 전 어느 날. 일본 유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이 고국 땅을 밟았다. 칠흑같은 바다를 헤치고 조선에 도착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모자를 벗는 것이었다. 모자 속에는 일제의 심장에서 유학생들이 준비하고 있던 독립선언서 초안이 숨겨져 있었다. 독립을 향한 의지가 또렷이 박힌 선언서. 청년들의 결의에 조선의 어른들은 부끄러워했고, 그것이 결국 우리의 위대한 역사 ‘3.1 운동’으로 피어났다. 공의에 대한 열의로 가득 찬 학생. 그런 청년을 보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며 부끄러움을 느낀 어른. 그들이 하나가 되어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던 그 날. 우리는 이토록 아름다웠다.  독립운동부터 그 숭고함을 이은 민주화운동까지, 대한민국의 주요 사회운동은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이야기의 주인공, 송계백 선생님의 당시 나이 24세였다. 미국과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전달하고, 3.1 운동에도 큰 역할을 한 독립운동 단체 신한청년당의 창당 발기인 6명의 나이는 평균 29세였다. 민주화운동에서 목숨을 잃어가며 활동했던 열사들도 모두 창창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겪으며, 누군가 ‘청년 정신’의 힘을 무서워하게 된 것 같다. 그는 청년이 청년답게 행동할 수 없는 사회를 만들려 했고, 결과는 성공적인 듯 보인다. 100년 전 그들과 오늘날 우리 모습의 차이를 보면 말이다.  20대로서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생각해보자면, 내가 자라온 환경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문적인 가르침에 있어서라면, 어쩌면 그 시절 젊은이들보다 더 양질의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 환경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학생이 공부하는 이유는 ‘성공자’라는 간판 혹은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 되어버렸다. 그러기 위해서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에, 주입되는 지식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고, 옆에 앉아 있는 학우를 있는 힘껏 딛고 올라서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경쟁은 끝이 없다. 성인이 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빠른 시일 내에 빠져 나오지 못하면 잉여인간,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나의 이야기이자, 현 시대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민족정신과 같은 공의가 우습게 되어버린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민족이니 공의니 거창한 말을 썼지만, 핵심은 우리가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마땅하다 여기는 ‘인간성’이다. 무한경쟁의 사회 속에서 시민의식 같은 인간성이 자리 잡을 리 없다.  하지만 현실을 대하는 청년들의 태도 또한 참담하다. “취업하기 힘들다”, “살기 힘들다” 어쩐다 하다가도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으면 입을 싹 씻는 게, 나를 포함한 우리의 현주소 아닌가. 젊은이들은 생각해야 한다. 현실이 이러하다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외쳐야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주화 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청년이라면 청년답게. 정의를 위해 죽어간 이들의 무덤을 발판삼아 딛고 있는 우리는 당장의 안락함에 기대어, 현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 거기로부터 오는 고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회의 어른들에게도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사실 앞서 말한 환경은 어른들이 만들었고,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건 물론, 지금도 계속 부추기고 있다. 내가 어른들을 겪으며 느낀 문제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을 은근히 무시한다는 점이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정당한 권리 요구는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된다.  이와 반면, 한때 한가닥 하셨거나 현재도 한가닥 하시는 어른들은 뭘 하던 쉬이 높게 치켜세워진다. 때문에, 높으신 분들이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는 모습은 여느 회사나 단체의 행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나름의 업적이 있으시지만, 대부분 지나치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 가치관만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런 행동들은 멈추시고, 3.1 운동과 민주화운동 속 젊은이의 열의를 인정해주었던, 그 시대 깨어있는 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야 젊은이가 어른을 이해해줘야 하는 세상이 아닌, 존중할 줄 아는 세상이 온다. 사회에 나와 있는 우리가, 성공을 위해서든 생계를 위해서든 부당한 것에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그 대가는 다음 세대가 치르게 된다. 어른이 희생하지 않으면, 아이가 희생당한다. 만약 지금껏 공의와 정의를 위해 살아오신 분이시라면,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젊은이건 어른이건 상관없이, 당신의 노력과 희생이 세상을 밝게 만들고 있음을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3.1 운동 100주년을 기리며, 광화문 광장에 당시 쓰였던 태극기들이 걸렸다. 건, 곤, 감, 리는 물론 태극 모양까지도 가지각색인 태극기들을 보며 “태극기가 왜 저렇지?”하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현대인들. 하지만, 그때 그분들이 제각각 그린 태극기들은 하나 되어 세상을 바꿨다.  그렇게 바뀐 세상에 우리가 서 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금. 자신만을 위한, 자신에 의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공의를 위한 태극기를 가슴 속에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작고 서툴러도 상관없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태극기는 이렇게 그려야 한다는 규칙이나 지식을 따지는 것보다, 민족을 위한 정신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처럼. 주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작가 지망생
2019-03-28 | hrights | 조회: 329 | 추천: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