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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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변호사를 그만 두고 학교에서 일한지 6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변호사 시절에 있었던 일들이나 그와 관련한 느낌들이 기억나곤 한다. 변호사 업무 중 힘든 것 중 하나는 사건 진행을 위해 법정에 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변호사 초기에는 책을 읽는 등 소일거리를 찾으려 시도한 적이 있으나 집중하기 어려워 모두 포기하고, 그냥 다른 사건의 진행 과정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사건 기록을 뒤적거리는 정도에서 만족하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도 형사법정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다른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진행되던 사건은 어떤 지역의 조직 폭력배들이 공갈죄 등으로 기소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변명 내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즉, 자신들과 동네 상인들은 모두 선후배이거나 친한 사이이고 자신들은 돈을 상인들로부터 강취한 적이 없고 빌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다만 사정이 어려워 갚지는 못했다고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결국 자신들은 경찰의 실적 위주의 잘못된 수사에 의해 범죄자로 낙인찍혔다는 취지였다. 관련 진술이 매우 진지하긴 했지만, 마음속에서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루하루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상인들이 차용증이나 변제의 확신 없이 돈을 빌려 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최근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근로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나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한국에는 파견근로자를 보호하는 법인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파견법”)이 있다. 파견법에 따르면, 기업이 하청업체 소속의 근로자를 지휘·감독하며 사용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2년 이상 사용할 경우에는 그 근로자를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제조업 등 일정 분야에서는 파견근로자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제조업 기업들은 이런 법적 의무를 회피하기 위하여 일견 도급의 겉모습을 띤 계약을 하청업체와 체결한 후 이들을 사실상 파견근로자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참고) 도급 관계의 경우 일반적으로 도급인이 하청(수급)업체 근로자들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에 파견근로로 보지 않고 따라서 이들에게는 파견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근로자들의 사용자는 원칙적으로 하청업체이므로 도급인과 근로자들 사이에는, 단체교섭과 같은 집단적 노사관계와 관련된 문제나 특별법을 별론으로 한다면, 권리의무 관계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결국 비정규 근로자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법률적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 방법으로 도급 계약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1월 30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는 불법이지만, 정부는 이를 사실상 방치하였다. 결국 기업 입장에서는 노무비를 절약하고 노무관리 등의 부담을 더는 손쉬운 방법으로서 탈법적인 도급 방식을 유지하였다. 그 결과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 규모는 확대되고 노동권은 보호받지 못했다. 올해 7월 대법원은 이러한 방식에 의해 근로자를 사용할 경우에도 파견법이 적용되고, 현대자동차가 하청업체 근로자들을 이렇게 2년 이상 사용한 이상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판결하였다. 즉 파견법을 어긴 기업도 파견법의 의무를 지워야 한다고 본 것이다. 법을 어긴 사람이 법을 지킨 사람보다 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치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판결이 최선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판결은 결국 불법을 저지른 기업에게 합법적인 기업과 동일한 책임을 지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불법을 저지른 자에게는 법을 지킨 자보다 더 큰 불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함에도, 대법원 판결이 그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후 현대자동차의 대응이 너무 이상하였다. 대법원 판결 이후 진행된 파기환송심에서 현대자동차는 계속 자신의 책임 없음을 다투고, 관련 사건에서는 파견법이 재산권과 경영권 등을 침해하는 위헌 법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한 하청업체와의 도급 계약을 해지함으로써(아마도 현대자동차는 노동조합 때문에 자신들이 이런 판결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청업체에 소속된 비정규 근로자들이 오히려 일자리를 잃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정규직으로 고용될 것을 기대하던 근로자들이 이에 항의하자, 현대자동차의 용역들은 항의하는 근로자들을 폭행하였고, 이들이 공장에 모이자 회사는 불법 파업이라고 주장하며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폭력배에 돈을 뺏긴 상인들이 폭력배의 사무실에 찾아가 법원 판결에 따라 돈을 달라고 요구하니깐 자신은 아무 책임이 없으니 돈을 직접 갈취한 부하에게 받으라고 하고, 오히려 주거침입을 했다면서 상인들을 때리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과 같다. 그리고 돈을 갈취한 행위를 처벌하는 법 규정이 자신들의 헌법상 기본권인 재산권을 침해하는 위헌 법률이라고 주장하는 격이다. 이러한 사태의 진행 과정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한국 자본주의의 경박함에 대한 지적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어떻게 이런 주장이 공공연하게 행해질 수 있는지, 이제 한국의 노사 현장에서 법률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만 할 따름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비정규 근로자들이나 노동조합의 요구가 지나치고 현대자동차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기업의 경쟁력 측면에서 현대자동차의 염려나 우려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기업이란 조직도 한국의 법 제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고, 사법에 대한 존중은 그런 기업의 의무 중 하나이다. 따라서 마땅히 현대자동차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여 그 뜻에 따라 하청업체 근로자들을 대우해야 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관련 문제들은 또 다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노사 현장의 분쟁이 힘의 논리에 의해서만 해결되는 국면이 되어 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는 지난 7월의 대법원 판결이 불법을 저지른 기업에게 합법적인 기업과 동일한 책임을 부과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로서는 판결에 따라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보다는 일단 버티고 저항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롭고 이를 사회가 용인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노사 현장에서 법원의 판결마저 힘을 잃게 될 때 과연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과 소수자들은 누가 보호할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하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16 | 추천: 1
인간에 대한 예의 - 삶을 생각하며, 운동을 생각하며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반추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욕하거나 타박할 때나 쓰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란 말은 식자들 사이에서나 가까운 지인들 가운데서는 꽤나 파급력이 있는 말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나 또한 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적지 않다. 대체로 이런 기억들은 이제는 뇌리 속에서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옅어져버린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지금은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학생운동’이 살아(?) 있던 시절, 많은 이들이 그랬듯 나 또한 정의와 진리를 위해 기꺼이 투신하고 당연히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나는 이 시절 지금도 유일하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만든 선배 한 명을 만났다. 당시 한창 몸담고 있던 조직도, 한껏 기대를 받고 있던 그룹의 일원도 아니었던 그 선배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두 동생의 앞길마저 책임져야 하는, 누구 못지않게 어깨가 무거운 가장의 위치에 있었다. 과외에 아르바이트에, 이른바 돈 되는 일이라면 몸 안 사리고 닥치는 대로 일을 쫓아다니던 그 선배는 시위나 집회가 있는 날이면 언제 나타났는지 늘 군중들 맨 앞에 있었다. 지금 떠올려도 참 기이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 선배를 좋아하고 존경하게까지 된 것은 그의 정의감이나 성실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그의 두세 평 남짓한 자취방은 시위꾼들의 뒤풀이 장소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 또한 그가 자처한 일이었다. 술집을 전전하며 울분을 토로하다 주머니까지 톡톡 털어낸 날이면 그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끌었다. 한 아름에 들어오는 조그만 냉장고 속까지 다 털어내고 나면 우리는 그대로 쓰러져 얼마 후면 닥칠 내일이 오길 기다렸다. 한 번은 후배들과 세미나를 마치고 몇 번이나 차수를 바꿔가며 술자리를 전전한 끝에 갈 곳이 없어 다시 선배의 자취방을 찾은 적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이미 알고 있던 비밀번호로 열고 들어가 또 냉장고 속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던 선배는 기어이 냉장고가 완전히 드러난 새벽녘이 다 돼서야 들어왔다. 나였다면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주인행세를 한 녀석들 혼꾸멍을 내줬을 법한데 선배는 오히려 방이 좁다며 미안해하며 그 추운 새벽,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먹었다. 나는 그 후로도 선배가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시위를 나갔다 온 날이면 술자리에서 눈물짓는 그를 간간이 보았을 뿐이다. 이런 선배가 있었는가 하면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합의와 투표로 결정된 결과마저 없었던 일로 돌려버린 선배가 있었다. 그 일로 많은 동료들이 자신이 품어왔던 이상에, 걸어왔던 삶에 회의를 느끼고 투신해오던 장을 떠나갔다. 그 가운데는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던 이들도 있었다. 또 한 번 눈물 날 일이었다. 이제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지켜온 가치, 자신의 삶은 고귀하며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은 값어치가 덜하거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요즘 들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그런 이들은 대체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비인간적이란 사실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디까지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다. 그런 생각조차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지도층입네 하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다는 것이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이다. 나아가 스스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는 친한 사이일 때나 지켜야 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서글픈 일이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가까운 이웃이, 이상을 함께 나눠왔던 동료가, 사랑하는 이들이 자기로 인해 상처를 입고 함께 나눠온 가치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상대가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에 꼭 필요한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나눔, 진보, 발전, 생명, 믿음, 희망, 사랑…. 훌륭한 가치를 지닌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인간에 대한 예의가 들어 있지 않다면, 그래서 그토록 갈구하던 인간의 존엄성에 발길질을 해댄다면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의 삶 또한 허무해지리란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지금 나는 깨닫고 있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받고 싶은 대로 먼저 해주려 했던 선배의 마음, 그 마음과 실천을 닮아가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는 길임을, 그래서 참다운 운동성을 되살려나가는 길임을….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11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인사가 공정하고 원칙적으로 이루어져야만 그 조직이 시행하려는 모든 일에 대하여 조직원들의 신뢰가 쌓이고 원칙이 바로 서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서울시 교육청 소속의 교사들 또한 매년 이맘때 전격적인 인사가 이루어진다. 중등도 그렇지만 초등의 경우, 현재 진행되는 인사제도에 심각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이 문제들이 학교의 민주적 운영을 저해하고 있고 인사와 관련해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간의 각종 비리를 양산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공립학교 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정기 전보와 비정기 전보라는 형태로 근무지를 옮긴다. 정기 전보는 근무하던 학교에서 만 5년을 근무하면 학교를 옮겨 근무지를 바꾸는 형태이고 비정기 전보는 교사의 개인적 사정에 따라 만 1년이 지나면 근무지를 옮기도록 신청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와는 별도로 초빙, 전입요청, 전보유예라는 제도가 있어 교장의 판단과 희망하는 교사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인사 제도가 있다. 우선 초빙교사제도는 학교장이 각 학교에 필요한 유능한 우수교사를 확보하기 위하여 교사를 초빙하는 제도로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행된다. 표면적으로 나타난 도입 취지는 공교육 정상화와 학원자율화를 꾀하여 학교간 경쟁을 유도한다는 것이었고 1996년 6월 교육공무원법에 의거하여 신설, 1996년 9월부터 초빙교장제와 함께 실시되기 시작한 제도이다. 두 번째로 전입요청제도는 정기 전보 대상자 중 해당 학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분야의 자격증 소지자 또는 지도·연수·연구 실적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교사나 체육특기자, 상담, 특수학급담당교사 등을 학교로 전입 요청하는 제도이다. 이 또한 전보 대상자의 30% 이내에서 요청이 가능하며, 30%를 초과하더라도 학교당 최소 2인까지는 가능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전보유예제도는 정기 전보 대상자 중 근무하던 학교에 더 근무하고 싶은 교사들이 전보를 미루는 제도로 객관적으로 유예를 인정할만한 사유가 있어야하고 학교장과의 논의를 통한 후 학교 인사자문위원회의 회의를 거쳐 대상자를 결정하는 제도이다. 문제는 학교장이 이 제도들을 활용하여 교사 정원의 30%(자율학교는 50%까지 교사를 초빙할 수 있음)까지 확보할 수 있어, 일반 교사들의 수에 비하여 너무 높은 비율로 인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실제로 본인이 근무하는 강동·송파지역 학교의 경우 10년을 근무하면 거주지 밖으로 반드시 나가야하는 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총 442명의 전보대상 교사 중 36%인 158명이 이 방법으로 강동·송파지역에 계속 근무하게 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지역에 근무하기를 희망하는 교사들이 결과적으로 근무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난 8월 서울시 교육청에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강연을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는 서울지역 고등학교 교장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또한 학교장이 모집 교사수를 정하므로 전횡을 일삼을 우려가 있고, 실제로 학교현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근무하는 교사들을 학교의 중간 관리나 학교의 중요 직책을 맡겨 학교장의 정책이나 운영방침을 일선 교사들에게 주입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학교 운영과 관련해 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든지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 등은 그 내용이 사장되거나 동료교사들로부터 오히려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결국 열정적이고 능동적인 교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일에 대하여 의견을 내고 적극적으로 책임을 지려하기보다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하게 되고 책임을 회피하는 분위가 팽배하게 된다.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 학습을 강조하는 현 교육 방침에서 이런 식의 비민주적 학교운영은 많은 교사들을 좌절하게 만들고 교육에 대한 희망의 빛을 사라지게 만든다. 또한 학교운영위원회나 인사자문위원회가 학교장의 휘하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학교의 경우 이러한 제도는 도입 취지를 유실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교사 개인적으로 원하는 학교로 전출가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심지어 원하는 학교로 전보되기 위해서 강남권은 400만원, 비강남권은 200만원이라는 공공연한 소문도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문제점은 검증되지 않은 실력 없는 교사가 초빙되기도 하고 교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업무를 들어서 전입 요청을 하거나 실제와는 다른 업무를 보는 사례, 또 구체적이지 않은 불분명한 이유를 들어 요청을 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어 정기전보를 하는 수많은 교사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고 학교 내에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2월 12일 서울시교육청(교육감권한대행 김경회)에서 발표한 공립 중등교사에 대한 3월 정기전보 결과를 보면 2010년 인사의 가장 큰 특징으로 전입요청·유예·초빙교사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이를 구체적 수치로 살펴보면 전입요청 교사는 전년도 422명에서 560명으로, 전보유예 교사는 794명에서 838명으로 늘었다. 특히 초빙교사는 93명에서 566명으로 크게 늘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따라 전체 전보교사 가운데 전입요청·유예·초빙교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년도 34.0%(1,309명)에서 50.0%(1,964명)로 늘어났다고 하였다. 이제는 인사에 대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줄서지 않고 정상적으로 인사 이동하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경로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기까지 한다니 이 제도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진보 교육감시대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60 | 추천: 1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쓰빠씨~빠 시비르 (고마워요 시베리아) 어디서든 소리 없이 따라오는 자작나무 숲의 빛깔을 어둠에 묻고 쿠페라 부르는 4인용침대칸에서 일행과 함께 비운 보드카 한 병의 바닥이 보일 때 쯤 잠이 든다. 눈 뜨면 광야. 밤새도록 쉬지 않고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TSR)를 따라 어김없이 자작나무는 가녀린 흰 바탕의 군락이 되어 다시 나타나고 백야(白夜)의 태양은 광활한 대륙을 넘나들기 시작한다. 하루의 시작. 취기가 덜 빠진 감각 없는 손으로 컵라면을 데우고 누군가 건네주는 해장 술 한잔이 잠자는 땅 시베리아에서의 아침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일거라고 생각한다. 전날 마셨던 보드카의 경로를 따라 내장을 훑는 진저리 치는 술의 독성이야말로 그토록 갈망했던 시베리아 횡단의 꿈을 이루고 있는 여행객의 객고를 위로하기엔 제격이다. 충혈된 눈을 씻으려 창밖을 본다. 지평선을 넘으니 다시 지평선. 끝도 모를 지평선의 대지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실핏줄 같은 강줄기들. 시베리아의 태양을 반사시킨 강물에 내 흐린 시선을 몇 번이나 씻은 뒤에야 기차는 피곤한 달음질을 잠시 멈추고 사람이 사는 마을의 입구에서 새 손님을 맞는다. 군데군데 마을을 품고 흐르는 강줄기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끈질기게 따라왔다. 아니면 열차가 강줄기를 따라 끊임없이 달렸다. 강줄기가 잠시 마을로 가는 길을 잃으면 열차가 앞서 길을 찾았고 열차가 사람의 온기를 잃으면 강줄기가 열차를 이끌어 마을로 안내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시작된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시베리아의 속살을 곁눈질하며 바이칼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베리아는 바다였다 모든 것들을 다 받아주는. 낯선 이방인들은 그곳을 게으른 땅이라 불렀다. 어떤 이방인들은 그곳을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베리아는 제 속살을 죄다 내 놓고도 이방인들의 버릇없는 비아냥거림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애초 그곳을 게으른 땅이라 명명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사람의 길, 마을과 마을의 소통이었던 강줄기를 꼭꼭 틀어막아 댐을 쌓고 주위를 온통 콘크리트로 도배질 한 후 개발의 완성을 자축하며 키득대는 문명의 게걸스러움에 한 치의 마음도 빼앗길 이유가 없었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하다던 비아냥거림에도 역시 동의할 수 없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간이라도 내어줄듯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외쳐대는 친절함을 가장한 비굴함과 거기에 얹혀사는 이들을 비참하게 무릎 꿇리는 자본의 비정함이 조용한 땅 시베리아까지 스며드는 것이 두려웠다. 시베리아는 자존(自尊) 땅이었다. 아마존과 더불어 세계 양대 허파라고 불리는 대 자연이 있고 인류의 산업을 적어도 수 백년 동안 지탱 시킬 수 있는 막대한 자원을 땅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자본의 위대함을 앞세워 요기(妖氣)어린 손짓을 보내는 탐욕의 떨거지들에게 시베리아는 조용히 훈계하고 있었다. “시베리아는 자연을 사는 모든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는 있으나 탐욕스런 너희들의 욕망을 채워줄 수는 없다”고. 바이칼의 언덕에 누워 별을 헤아린다. 팔을 벌리면 왼쪽 손끝에서 오른쪽까지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오직 별 뿐이다. 별들은 스스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서로를 빛내고 있다. 밤사이 형형색색의 조명을 틀어대고 경쾌한 뽕짝을 울리며 관광객들을 취하게 하는 유람 이 몇 척 정도는 있어야 상식에 맞는 나라에서 온 나는 변변한 숙소하나 없이 별빛 하나만으로도 2500만년을 살아온 거대한 자연의 나라 바이칼에서 자존과 공존(共存)의 하늘을 보며 감격해 하고 있다. 바다 같은 호수 한가운데 떠있는 알혼섬의 끝자락 어디쯤에서 손톱 같은 달이 떠오른다. 나의 생살 보다 더 붉은 달빛 사이로 소금을 흩뿌리듯 별똥별이 떨어진다. 달빛은 흠칫 놀라며 점점 더 가까이 내게로 오고 나는 수평선이 되어 달빛을 한참동안이나 올려다 본다. 고마워요 시베리아. 저녁 열시반 그제서야 알혼섬의 태양이 저물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 - 필자 고마워요 두리반. 두리반의 겨울나기는 연탄을 들여놓는 것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전기가 끊긴지 100일쯤 되는 10월의 저녁, 지하로 통하는 계단에 촛불을 몇 개 켜놓고 그 아래부터 차곡차곡 연탄 천장을 쌓았다. 3공 9구짜리 연탄난로도 장만했다. 두리반을 지키는 평화 활동가 한 친구가 자전거를 타고 마포 일대 철물점을 다 뒤졌고 민노당 마포 위원장은 트럭을 몰았다. 난로가 들어오던 날. 위원장은 그 위에 고구마를 구우면 참 맛나겠다고 했고 나는 소뼈를 우려 사골을 내면 좋겠다고 했다. 두리반 바깥주인은 계급의 차이가 연탄난로위의 음식까지 다르게 한다고 껄껄 웃었다. 사실 내가 입이 고급이라 사골국물을 생각한건 아니었다. 다만 어렸을적 하도 많이 먹었던 고구마가 싫었을 뿐이다. 난로를 설치하고 이어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단풍잎이 채 붉게 물들기도 전에 닥친 기습한파에 연탄난로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은 고구마를 구울 정도의 불은 피우지도 못하고 자주 꺼트렸다. 난로가 꺼진 원인을 두고는 주인장 부부가 자주 설전을 벌이고는 했는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안주인이 “난로 구멍은 조절 했느냐 시간은 잘 맞추었느냐” 등등을 물으면 바깥주인은 “아~참 이사람 다 맞추었다니까. 중국놈 빤쓰를 겹으로 껴입었나 그리 의심이 많아. 의심이 많으면 철학을 해야지...” 바깥주인의 기상천외한 반격에 안주인도 웃고 난로주위에 모여든 두리반 사람들도 다들 킥킥대는 형국 이었다. 바깥 날씨가 영하를 가리키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연탄 난로의 화력도 점차 강해졌고 두리반을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난로 주변에 모여 들었다. 2009년 12월 24일 성탄 이브를 축하하며 세상이 흥청거리던 그날. 두리반은 들썩 거렸다. 생살 같은 피붙이를 앗아간다 해도 분노가 이만할까. 멀쩡했던 가게의 집기가 들려나오고 깨지고 부서지고 주인부부는 평생 가도 다 못들을 쌍욕을 들으며 울부짖었다. “이곳은 나의 우물, 이 척박한 사막의 땅에서 물 한 모금 길어내기 위해 손톱 끝에 피 맺히는줄도 모르고 맨손으로 파낸 나의 땅. 철거되어야 할 놈들은 너희 G.S건설, 그 하수인 남전 디앤씨, 그리고 깡패 새끼들. 그것도 뒷골목이나 어슬렁거리며 제 손목에 담배 빵 이나 붙이다가 돈 몇푼 쥐어준다 하니 좋다고 소주 값 벌러 온 쌈마이 중의 쌈마이. 깡패라는 말 조차도 거룩한 칭호인 인생 하빠리들. 철거 용역. 진정 철거되어야 할 놈들은 너희들이다” 안주인은 머리채를 휘어 잡혔고 바깥주인은 멱살을 내어주었다. 그 추웠던 한날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 합니다”라는 대형건물의 광고판 아래에서 두리반은 그렇게 내동댕이쳐졌다 연탄난로에 올려놓은 주전자가 뚜껑을 들썩이며 끓는다. 지난여름 35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전기가 끊어졌다. 에어컨. 선풍기는 고사하고 조그만 냉장고 하나 돌리기 어려웠던 날에는 손님들 커피 끓이는 가스의 열기에도 등줄기가 땀에 절었다. 난로에 둘러앉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커피를 훌훌 거리며 슬러시가 된 맥주 얘기를 한다. 창문이 깨질 듯 얼어 붙은 혹한의 밤과 무작시럽게 내렸던 눈발을 전기장판 하나로 견뎌야 했던 일 년 전 겨울 머리맡에 놓아둔 페트병 맥주가 얼어 슬러시가 되었다. 난로의 온기 옆에 있는 지금 그 기억은 아릿한 추억이 되고 있다. 두리반 철거에 맞서 부부가 농성을 시작한지 일 년. 많은 이들이 두리반에 다녀갔다. 스스로 상근을 자처해 어려운 날을 함께 사는 대학생, 아침마다 출근길에 꽁꽁 얼린 물병으로 더운 여름을 식혀주던 직장인.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의 탈출구를 만들기 위해 두리반에서 목청껏 소리 지르는 젊은 예술인. 두리반은 낙엽 이었다. 나무의 본체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은 날, 스스로 떨켜를 닫고 조용히 눈감는 은행잎이었다. 그리곤 애초에 타고난 빛깔, 깊게 깊은 노랑으로 물들어 햇살 밝은 거리를 짙게 물들이는 사랑 이었다. 탐욕스런 세상으로부터 철거를 통보받지 않은 두리반은 몇몇의 단골들이 들락거리는 괜찮은 칼국수 집이었으나 용역 깡패들이 들이닥쳐 문을 부수고 사방을 철판으로 막아 두리반 이라는 이름조차 없애려고 했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색깔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이 한 겨울 두리반에서 희망을 보기로 한다. 희망이란 새날의 기약보다 현재의 극복에 더 가깝다는 것을 두리반 부부의 낙관적인 웃음에서 찾기로 한다. 황홀한 일몰에 어깨위에 내리는 통증을 기대며 길 없는 길을 날아 새 길을 만드는 어린 새의 날개 짓이 두리반에 있다. 두리반이 내게 속삭인다, “길이 끊어졌다고 행장을 꾸리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의 죄요”. 몇 평 되지 않는 두리반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베리아의 자존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건물앞에 걸어놓은 현수막과 대자보를 읽다가 쑥스러움을 감추고 두리반의 문을 여는 순간 그때부터 당신은 두리반이다. 고마워요 두리반. - 이글은 계간 리얼리스트에 송고한 글입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12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요즈음 학교는 반사회적 품행으로 여타 학생의 신체·정서적 안정을 파괴하고, 학습방해로 학급 구성원을 고통스럽게 하는 학생들이 많이 나타나면서 모든 학생들이 교육받을 권리인 학습권이 침해되는 등 학생과 교사에게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학년인 노민이(가명)는 수업시간에 자주 교실을 돌아다닐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 장난을 쳐서 참다못한 교사가 주의를 주면 “뭘 어쩌라구요 에이...”하고 소리 지르면서 수업을 방해 하고 교실 문을 걷어차면서 뛰쳐나가는 행동을 했다. 그런데 방학 후에는 머리를 삭발하고 귀와 눈 주위에 멍이 있는 상태로 등교를 해서 담임교사를 또다시 놀라게 했다. 평소에 몇몇의 학생들에게 맞고 돈을 빼앗긴 일들과 수업시간에 이상한 언행으로 교사들로부터 많은 말이 오르내리던 아이라서, 담임교사가 힘들게 밝혀낸 결과는 방학 때 학교근처의 공원에서 몇몇 학생들의 장난으로 면도칼로 머리를 밀고 구타당했던 것이다. 1학기를 지나는 동안 노민이 얼굴은 멍자국이 항상 있었고 귀도 심한 타박상으로 병원을 여러 차례 다녔다. 그런데 노민이는 자기를 구타하거나 머리를 깍은 학생들을 거의 언급한 적이 없었다. 다른 학생들이 노민이를 때렸다는 이야기가 있어야만 겨우 인정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맞고 보복을 당하다 보니 누구도 믿지 못한 탓도 있지만, 정신질환(공상허언증:거짓말을 지어내 떠벌리면서 자신도 믿는것, 정신분열증)이 있는 어머니와 살면서 양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보았던 노민이에게는 정신질환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노민이가 오히려 1학년 학생들을 구타하고 금품갈취를 하며 괴롭히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오랜 교육경력의 담임교사도 노민이의 증상을 대할 때마다 곤혹스러웠지만 지속적인 상담과 관찰을 하면서 노민이를 괴롭히는 20여명의 학생들에게 중학교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징계인 10일간의 등교정지를 하였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지내는 노민이는 학교의 노력에도 변화되는 모습이 없고 가정으로 돌아가면 증상이 반복되는 일이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학생들을 정당하게 통제하고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호할 대안이 교사들에게는 절실한 상황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학생 상호간의 폭력도 문제지만 최근에는 자기방어조차 힘겨운 교사들의 문제도 많이 나타난다. 인근의 교사(중학교)들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욕설과 폭력으로 병원에 입원 하거나 병가를 냈다는 이야기들은 이젠 주변의 학교들이 겪고 있는 흔한 이야기다. 더욱이 어떤 교사는 수업시간에 교사에게 욕설을 하고 때린 학생을 경찰에 고소하면서 학교와 교육청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방법밖에 없다는 비장한(?) 결심을 이야기할 때 너무도 놀라울 뿐이다. 학교라는 환경에 오랫동안 있다 보면 학생들에게서 많은 위로도 받지만, 일부학생들에 받은 피해로 고통을 겪으면서 상처만 들여다보고 괴로움을 호소하는 교사들을 종종 본다. 이럴 때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바꾸어서 바라보면 어떨까. 20여년이 지나서야 교직생활 속에서 학생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이 나에게 있다. 학생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사의 눈만 갖고 살아왔는데 학생의 시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지사지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노민이 같은 친구들을 더 보호할 수 있는 대안을 시급히 마련하지 못하는 것, 자신의 방어조차 당당히 요구할 수 없는 현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직생활을 했지만 해마다 달라지는 학생들의 모습에 대한 혼란스러움 역시 우리가 감당해 내야 할 몫이다. “학생은 학생입니다. 교사인 우리가 감싸주고 그들에게 더욱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최신유행가요프로를 보고, 개그프로 등 여러 가지 학생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서 노력을 합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내는 나의 학생들을 끝까지 보듬어야 하는 것이 교사입니다”라는 정년을 앞둔 선배교사들의 말이 가슴속에 울림이 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09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야기 한 토막: 아주 오랜 옛날 하느님과 인간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이 얘기를 꺼냈습니다. “뭐 재미있는 놀이 없을까?” “숨바꼭질 놀이 어때요? 하느님이 숨으시면 저희가 찾는 놀이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찾아내기 전에 숨은 데서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래 좋다. 내가 숨으마.” 하느님은 사람들이 찾기 힘든 곳에 몸을 숨겼고, 그렇게 해서 인간의 하느님 찾기 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하느님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높은 산위에도, 골짜기에도, 바다에도, 숲 속에도 다 가보았는데 하느님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고 끝나지 않는 놀이는 무의미해!” “하느님이 다른 곳으로 떠난 것이 아닐까?” “숨바꼭질 때문에 하느님이 사라졌으니 숨바꼭질 자체를 아예 그만두자.” 그리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느님! 저희는 숨바꼭질 그만 하겠습니다!” 그런 뒤 더 이상 하느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서 생겨난 것이 전쟁이었습니다. 군대가 생기고, 무기 장사가 생기고, 자꾸만 전쟁이 생겼습니다. 세상이 혼란하니 법이 생기고, 법이 생기니 도적이 생기고, 도적이 생기니 자꾸 세상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지금이라도 당장 숨은 데서 나와 자기들 맘대로 놀이를 끝낸 인간들을 혼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몇몇 바보들이 아직 있어서 이리저리 하느님을 찾아 숨바꼭질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칸트는 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이성이 기울이는 관심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그러면서 (1)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형이상학(철학), (2)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도덕’, (3)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종교’라고 정의했다. 그가 종교의 영역을 ‘희망’에서 찾은 것은 굉장한 통찰이다. 안다는 것, 행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쉽게 얻어질 수도 있지만, 희망(希望)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끝없는 바람이며, 끝없는 과제의 영역이다. 희망은 말 그대로 희망이지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현실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이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상이기에 현실에서의 경험과 언제나 모순된다. 그래서 희망으로는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되고, 저러고 싶지 않은데 저렇게 된다. 돈을 벌어 베풀며 살고 싶은데 벌리지 않고, 걱정 없이 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정치 현실도 경제 구조도 희망대로 이상대로 되었던 적이 별로 없다. 현실은 늘 희망과 달리 나타난다. 그런데도 희망하는 만큼 현실은 달라진다 믿고, 그런 이상을 현실에서 이루어보려는 이들도 있다. 그 ‘모순’을 살아내려는 이들이 이 시대의 진짜 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은 희망이되, 현실 변혁적 힘이기도 하다. 희망하는 만큼 몸도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희망을 가지는 순간 그것은 삶의 한 복판에 들어와 삶을 변혁한다. 희망은 구름 너머에 있지도, 미래적 사건이기만 하지도 않다. 그것은 현재를 혁신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상을 꿈꾸고 희망을 가지는 만큼 현실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과 희망으로 현실을 이기게 해주는 것이 종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희망이 신앙이다’. 그리고 ‘절망이 죄’이다. 평화인문학 수료식 모습 인권연대가 주관하는 최고의 교육프로그램, “평화인문학”이 지금 진행 중이다. 올해는 안양교도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벌써 8기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초점은 재소자의 인간적 자존감을 높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종교 강의를 한다. 물론 선교적인 차원이나 교리 강의 차원이 전혀 아닌, 종교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능한 한 일상적인 언어로 솔직하게 나누고자 한다. 강의실 분위기가 밝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어둡지도 않다. 어떤 이의 표정은 깨끗하고 어떤 이의 눈은 빛나며 어떤 이는 그 와중에도 딴 짓을 한다. 팔짱을 끼고 줄곧 시비조의 표정을 짓는 이도 있다. 여느 강의실에서 보여주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강의가 기독교 교리와 어긋난다 싶으면 이내 질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러면 종교는 교리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깊이를 성찰해보고 거기서 울려나는 양심의 소리대로 살려 애쓰는 곳에 있다며 답을 하곤 한다. 언젠가 강의 후 줄지어서 나가던 재소자 중 한 사람이 급히 내 손을 부여잡으며 정말 감사하다는 짧은 말을 내뱉었다. 그 억양과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져 뿌듯했다. 나는 그이들이 현실을 변혁하는 이상적 희망과 인간적 자존감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교도소 안에서 도리어 진정한 ‘종(宗)-교(敎)’를 터득하게 되기를 바랐다. 희망을 갖는 일은 종교의 핵심이다. 암울할 것 같은 현실이 암울함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은 희망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포기한 하느님과의 숨바꼭질 놀이에 첫 약속을 믿고 지궁스럽게 하느님을 찾는 술래들이 있기 때문이다. 진리라고 해도 상관없다. 정의나 사랑이라 한다면 더 좋겠다. 그것은 한 번도 이루어본 적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루어지지 않은 적도 없다. 정의의 그림자를 드러내려 애쓰는 이들에 의해 실제로 정의는 이루어져 간다. 남의 일에서 자신을 보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돌아간다. 지궁스럽게 신을 묻고 찾되, 인간 안에서 그렇게 하는 이들의 희망과 이상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간다. 하느님과의 숨바꼭질 놀이는 재미있는 일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196 | 추천: 0
허윤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금은 없어도 조금 불편은 하겠지만, 맑은 공기가 없다면 심각한 사태가 초래될 것입니다. 이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음에도 ‘너무 흔한’ 공기에 익숙해져 그 소중함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보통 희소성이 있는 것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소중하게 여기지만, 흔한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흔하기에 익숙해져서 그 존재의 중요함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자연 안에서 지나치게 흔한 것일수록 생명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 물과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은 상식임에도, 별 노력 없이도 거의 저절로 얻어질 만큼 흔하기에 평가절하 되어버렸습니다. 요즘 들어서 오염된 공기에 숨이 좀 가빠지고 깨끗한 물을 사먹게 되는 불편함이 생기니 겨우 신경을 좀 쓰고 있는 형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좀 불편해져야 자연의 소중함을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맑은 공기도 사고파는 거래품의 목록에 올랐습니다. 물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습니다. 어버이 같은 자연은 ‘흔하다’는 우리의 폄하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인간 생명이 고루 나누어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풍부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독점하여 소유하라는 것이 아니라 거의 공짜로 모든 이가 함께 쓸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흔한 것일수록 더욱 귀중한 것임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연의 넓은 마음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보다는 물과 공기도 상거래의 도구로 여기고 모든 것을 이윤창출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자연에 가치를 매깁니다. 인간의 욕심은 자연도 개발하여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고 거만을 떱니다. 개발해서 보다 많은 이들의 윤택한 생활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실상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욕심과 독점의 몰상식을 포장하는 검은 속내일 뿐입니다. '두물머리를 지키는 십자가' 물머리에서 생명평회미사를 위해 죽은 나무가지로 십자가모양으로 꽃았는데, 죽은 나무에서 잎이 돋고 나무가지가 새로 나왔습니다. 자연의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사진 출처 - 필자 특히 우리나라는 산지가 국토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예로부터 물도 맑고 많은 금수강산이라는 자연의 혜택을 누려왔습니다. 하지만 푸름이 너무 많다보니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정도는 우습게 생각합니다. 마구 헤집고 깎아내는 통해 자연의 비명이 들리는 듯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저 편리한데로 마구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연의 고마움을 잊고 삽니다. 그러면서 계절의 변화에 따라 보여주는 자연의 오묘한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는 이중성을 보입니다. 감탄하면서도 함부로 하는 우리의 이중성에도 자연은 묵묵히 견디어 내는 것을 보면 자연의 인간에 대한 인내가 참으로 고맙습니다. 자연은 거의 공짜로 사람들에게 생명 유지를 위한 혜택을 주지만, 인간은 그것에 고마워하기보다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만물의 영장’이라며 자연 앞에 우쭐거립니다. 인간의 모습이 참으로 무례해 보입니다. 인간의 호된 무시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상이변’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자연은 인간의 해악에도 불구하고 자가 치료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자연재해요 재난이라 불리는 많은 자연현상들도 따지고 보면 자연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어느 학자는 태풍이 불고 파도가 치지 않으면 자연 안의 생물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도 말합니다. 우월감과 욕심에 생각 없이 짓밟았던 자연의 작은 생명들에 대해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강을 살리려는 마음들의 기도' 매일 오후3시에 두물머리에서 생명평화미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강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마음이 모이는 곳입니다. 사진 출처 - 필자 이제 와서 인간이 자연에 가한 폐해를 들먹이며 오두방정을 떠는 인간의 모습을 과연 자연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까요? 자연은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려 애씁니다. 수백, 수천, 수만 년의 자연의 질서를 하루아침에 망가트렸기에 자연 역시 그것을 되돌리려 무한한 노력을 감행합니다. 그 자연의 살고자하는 몸부림이 우리에게 자연재해라고 호들갑을 떨 일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자연이 인간행위에 대한 보복과 원망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에게 돌려주고자하는 자연 질서의 회복 활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자연 앞에 겸손해집시다. 정말 ‘강을 살린다.’는 표어가 진심어린 살리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발로 변질되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을까에 혈안이 되어 눈이 뻘게진 모습을 자연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은혜를 모르는 파렴치한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을 지키려 애쓰는 많은 이들의 활동에 격려와 응원을 보냅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68 | 추천: 0
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80년대 중반 10월의 어느 멋진 날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무렵 어디에선가 애국가가 흘러나옵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현 위치에서 태극기를 향해 차렷 자세로 경례를 하고 운전을 하는 사람은 차를 세우고 앉은 채 차렷자세를 취합니다. 80년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던 국기강하식 장면입니다. 국기에 관한 규정에 의하면 국기강하시간에 국기 강하식을 볼 수 있거나 애국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모든 옥외의 주민은 현 위치에서 국기를 향해 차렷 자세로 경례를 하고 국기강하식을 볼 수 없는 옥내의 주민들은 차렷자세만을 취하되 옥내에 국기가 있는 경우엔 국기를 향하고 없는 경우에는 애국가가 연주되는 방향을 향하도록 했습니다. 운전하고 있던 사람은 차를 멈추고 앉은 채 차렷자세를 취해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잘 지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을 개탄한 시민은 “외국인들의 출입이 점점 많아지고 86, 88 국제행사가 있는데 국기강하식 때마다 온 국민이 어디를 가나 걸음을 멈추고 1분 동안 경건한 마음으로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면 우리국민의 단결된 애국심을 보는 외국인들의 마음가짐도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습니다(경향신문 1985. 6. 17.자 독자 의견). 2010년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80년대 인기가 높았던 “믿거나 말거나”라는 미국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미국인의 관점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프로그램에서 우리나라에 관한 내용을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시아에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밤늦게까지 고등학교에 불이 켜져 있는데 학생들이 늦은 시간까지 공부할리는 없고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아침 7시 정도까지 학생들이 등교한다는 것이다. 한국 고등학생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지난 5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청명고등학교 교내에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가운데)과 청명고 학생 대표들이 전국 처음으로 ‘체벌 금지, 강제 야간자율학습·보충수업 금지’ 등을 담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국기강하식은 폐지되었지만 우리 학생들의 현실은 80년대보다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달 5일 경기도 교육청은 전국 최초로 학교 내 체벌금지, 강제 야간자율학습ㆍ보충수업 금지, 두발 복장의 개성 존중 및 두발길이 규제 금지 등 학생 인권 보호를 위한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하였습니다. 우리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바른 원칙을 세우는 첫 걸음입니다. 벌써부터 반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교사의 인권은 어떻게 할 것인지? 와 같은 문제제기들입니다. 이런 문제제기들은 여전히 학생을 교육의 객체로만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강압으로 은폐되어 있는 교육 현장의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고 학생과 교사의 건강한 관계를 정립해야만 우리 교육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이번 학생인권조례가 교육현장에 굳건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학생인권조례에 규정되어 있는 체벌금지, 강제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금지 등의 내용을 보고 이처럼 상식적인 내용을 굳이 학생인권조례로 공포했던 지금의 상황을 “믿거나 말거나”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29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학에서 가르치는 필자는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의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음을 본다. 본인의 꿈이나 적성과 부모의 기대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에 필자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와 자녀 스스로의 인권이 부딪히는 경우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부모님으로부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는 말씀을 듣는 경우가 자녀로서는 가장 힘들고 슬픈 상황일 것이다. 실제의 경우를 참조하여 각색해 본 다음과 같은 상황들이 아마 지금도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A양은 외국에서 공부하다가 오랜만에 추석에 맞춰 귀국하여 지방에 계시는 부모님을 뵈러 갔다. 결혼을 생각하며 사귀고 있는 멋진 친구와 함께 집에 가겠다고 미리 전화를 드렸었기에 부모의 기대는 컸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부모님께서 반갑게 달려 나와 문을 여셨는데 딸의 남자친구가 금발의 미국인 리처드(Richard)였고 게다가 서툰 한국말로 “장인어른, 장모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까지 한다. 고집이 센 아버지께서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 딸이 국제결혼 하는 꼴을 이 애비는 눈뜨곤 못 본다!”며 반대하신다. 이를 어쩌나. B군은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의 반대와 외아들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예술 쪽으로 진학을 못하고 법대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러 유학을 떠났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의 인생이 그쪽으로 방향 지워지는 것에 대해 자주 괴로워하다가 그는 학교의 상담실을 찾아가 몇 가지 적성검사를 해 본 후, 예술 쪽으로의 적성이 뛰어남을 과학적 자료를 통해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와 상담을 했던 상담교수는 “미국의 경우에, 예를 들어, 2대, 3대째 대대로 예일(Yale)대 법대를 나온 집안의 외아들이 정작 본인은 다른 대학에 가서 천문학을 공부하거나 영화를 전공하고 싶다며 갈등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결과는 대부분 자녀가 원하는 것을 하는 걸로 끝이 난다. 한국의 경우는 안 그런가? 참 재미있는 나라인 것 같다.”라고 의견을 피력한다. 그 후 B군은 방학을 맞아 귀국하여 아버지를 뵙자마자 이제라도 예술 쪽으로 길을 바꾸고 싶다고 어렵게 용기를 내어 말씀드리자, 예술가이신 아버지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외아들이 또 그 힘든 예술의 길을 걷는 걸 난 눈뜨곤 못 본다!”며 계속 반대하신다. 착한 아들 B군은 어째야 할까. C양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가톨릭계 대학교를 다녔는데 좋은 남자를 만난 후엔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 깊이 지녔었던 수녀가 되는 꿈을 버리고 결혼을 작정한다. 그런데, 그 남자를 따라 처음으로 시부모님이 되실 분들을 뵈러 간 자리에서 그 어르신들은 입을 모아 “왜 하필이면 천주교냐. 우리 집안은 대대로 장로교 집안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목사이시고 나도 권사인데 말이다.”라고 하시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장로교 며느리 말고는 절대로 안 된다!”라고 하신다. 목사 아들인 그 남자친구는 C양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는 말은 자녀의 여린 가슴에 대못을 박는 폭력일 수 있다. 유교문화권에 있는 경우엔 부모에게의 복종이 곧 효도라는 식의 인식이 있기에 그것을 거스르는 자녀들은 죄책감으로 일생 동안 마음 고생을 할 수도 있다. 반대로, 부모의 뜻에 순종만하며 살다가 부모가 떠나게 되면 자녀는 이미 궤도 수정이 불가능해진 본인의 삶에 대해서 깊은 후회와 회한을 지닐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이라는 말은 설득력도 떨어진다. 부모의 여생보다는 길겠지만 자녀 역시도 삶이 단 한번뿐이며 마찬가지로 늙어가다가 언젠가는 눈에 흙이 들어갈 것 아닌가. 유교문화권에 있는 경우엔 부모에게의 복종이 곧 효도라는 식의 인식이 있기에 그것을 거스르는 자녀들은 죄책감으로 일생 동안 마음 고생을 할 수도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렇다면, 자녀는 어떻게 하면 설득력 있고 정당하게 부모에게 대응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인권’이 좋은 방안일 것이다.「세계인권선언」제15조(모든 인간은 국적을 가질 권리와 바꿀 권리를 갖는다), 제16조(성년에 이른 남녀는 인종, 국적 또는 종교를 이유로 한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결혼할 권리를 갖는다), 제18조(모든 인간은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가 있다), 이러한 조항들은 자녀와 부모는 똑같이 일인분씩의 피조물이며, 자녀는 보호의 객체가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서 부모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한다. 그와 동시에, 부모는 “부모가 자녀의 인권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니? 네 행복은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네 행복이 곧 부모의 행복이란다.”라고 말해야 맞다. 혹은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에게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 그는 그 유명한 책「예언자」중의 ‘아이들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을.”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마저 줄 순 없다. 왜?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들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가 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들 아이들과 같이 되려 애쓰되 아이들을 그대들과 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왜? 삶이란 결코 뒤로 되돌아가진 않으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는 것이므로.” 그렇다, 인권의 발달사 역시도 거꾸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자녀들 역시도 부모에게 “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꼭 이렇게 해야만 해요. 부디 이해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시대 아닌가 싶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삶을 살고 말거야!”라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이 있을까? 자녀는 부모를 떠나게 마련이다. 지브란은 부모와 자녀와 신을 함께 얘기한다. “그대들은 활, 그대들의 아이들은 마치 살아 있는 화살처럼 그대들로부터 앞으로 쏘아져 나아간다. 그리하여 사수이신 신은 무한의 길 위에 한 표적을 겨누고 그 분의 온 힘으로 그대들을 구부리는 것이다. 그분의 화살이 보다 빨리, 보다 멀리 날아가도록.” 그러면서 지브란은 부모에게도 위안의 말을 잊지 않는다. “그대들 사수이신 신의 손길로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왜? 그분은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시는 만큼, 또한 흔들리지 않는 활도 사랑하시므로.”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79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부터 휘청거렸던 세계적 경제위기는 극복된 것일까. 우리 경제 역시 위기 상황을 벗어나 회복된 것일까.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새로운 금융위기의 재발과 경기침체를 방지할 처방전이 나올 수 있을지 관심거리다. 서울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우리가 선진일류국으로 진입할 수 있을지도 흥미롭다. 지금의 세계적 경제 상황을 보노라면 각국의 재정지출 확장으로 인한 일시적 경기회복 국면에 지나지 않고 새로운 경기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때가 많다. 한국의 경제상황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수출 중심의 대기업 성장에 기반을 둔 개방화된 금융 중심의 한국의 경제구조에 비추어 새로운 국제적 금융위기 또는 경기침체를 맞아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일상화된 민중들의 생활고는 위기 탈출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IMF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도입된 정리해고와 노동자 파견제는 실업자와 비정규직 양산으로 이어졌다. 이득은 주식과 부동산 투기, 투기자본의 몫이다. 노숙자들이 곳곳에 늘어가고 있고, 고용의 불안과 가계부채의 증가로 가정경제는 신음하고 있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은 되레 나날이 민생고를 가중시켰을 뿐, 비정규직의 양산과 차별을 없애는 데 필요한 해법은 반겨지지 않는다. 20 대 80의 사회에서 80의 불만을 달래는 화려한 수사어구들이 만개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반기 국정방향은 친서민, 공정사회라고 한다. 복지사회의 모토는 차기 대권을 겨루는 유력 정치인들의 유행어가 되고 있기도 하다. 친서민의 공정사회, 복지사회는 민중들의 불만과 생활고를 잠재울 수 있을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말에 서민들은 믿음을 보낼 수 있을까.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잠시 기대에 젖어 있을 수는 있다. 왼쪽부터 김태호(48) 국무총리 후보자와 신재민(52) 문화체육관광부·이재훈(55)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 지난 8월 29일 세 명의 후보자가 잇따라 사퇴했다. 친서민을 표방한 소장수 아들의 총리 낙마는 친서민과 공정사회의 기획, 연출가에 대한 민심의 엄중한 경고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장관 후보자의 국회 청문 과정을 거치는 순간 이명박 정부의 국정방향은 순식간에 그 운명을 다했다. 친서민, 공정사회의 훌륭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20의 부자들을 대변할 인물을 등용하였다. 친서민을 표방한 소장수 아들의 총리 낙마는 친서민과 공정사회의 기획, 연출가에 대한 민심의 엄중한 경고다. 친서민, 공정사회와 함께 제안한 것은 부자증세가 아니라 통일세다. 느닷없는 통일세 제안에서 통일의지도 친서민 정책도 읽혀지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 협력과 교류의 물꼬를 제대로 열어놓고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남아도는 쌀과 보관비를 걱정할 이유도 없고 쌀값 안정을 위한 추가적 재정 지출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통일세 걱정은 버리고 하루 빨리 대북 쌀 지원을 통해 쌀값 하락에 고통받는 농민들의 씨름을 덜어주는 것이 친서민 정책이다.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2년으로 제한한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대하여도 이를 반대하며 비정규직 실업대란을 선동한 정권에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차별받는 구조가 지속되고 이를 조장하는 사회가 공정사회가 될 수는 없다. 대기업이 사내 하청을 통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현실을 개선하지 않은 채 대통령이 떡볶이를 먹는 친서민 행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고 친서민 공정사회가 될 수는 없다. 민생고를 해결할 재원은 도처에 넘쳐나고 있다. 여러 계층에 대한 생활의 고통을 헤쳐 나갈 대안도 부지기수다. 친서민 공정사회의 빈수레를 요란스럽게 끌지도 말 것이며, 친서민 공정사회의 좌절을 재원과 예산 부족 탓으로 돌리지 말라. 민생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에 4대강 사업 예산을 늘리는 정권이 부르짖는 4대강 사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은 서민 기만이다. 외교만 잘해도 민생 예산은 마련된다. 전시작전통제권을 3년 더 미국의 감독 아래 두기 위해 날려 버릴 돈만 아껴도 서민을 챙길 수 있다. 적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연기하면서 추가적으로 지출할 비용목록들이 민생고를 해결할 재원들이다. 대북방어 명분으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를 위해 추가적으로 소요되는 첨단무기 예산, 수많은 한미합동훈련, 다국적 훈련 예산을 지출하는 대신에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대화와 협상을 개시하는 한편 정치적, 군사적 신뢰를 확대함으로써 국방예산을 줄이고 이를 민생 예산으로 전용하는 것이다. 미군이 주둔하는 현실에서 미군 기지로 공여된 땅값만 제대로 받아도, 미군기지로 인한 환경오염 치유 비용, 소음피해 비용에 대하여 우리 정부가 미국에 제대로 배상책임을 구상만 해도, 방위비분담금으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만 하지 않아도 생돈을 아낄 수 있다. 전략적 유연성 아래 전 세계를 무대로 군사활동을 벌이는 미군기지를 우리 예산으로 건설하면서 민생 예산 부족을 탓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국방비 지출로 민중에게 돌아올 몫은 허구의 안보 외에는 없다. 분단논리에 취하지 않고 평화논리를 꿈꾸는 것이 민생을 해결하는 것이다. 복잡한 셈법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이 가는 민생 예산을 마련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이를 회피하는 갖가지 위선들이야말로 분단의 논리에 사로잡힌 민생고의 원인이 된다. 취업을 포기하는 청년실업자가 속출하는 현실에서, 언제 다시 경기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세계경제 위기의 국면에서 민생의 개선을 위한 몫은 결국 민중 자신에게 있다. 개선되지 않는 일상화된 민생고의 현실에 견디지 못한 민중들은 허구의 기대를 깨고 민생고를 해결을 위한 대안을 직접 찾아나갈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