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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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모처럼 정신적 부담이 크지 않은 선거였다.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 ‘사표(死票)’ 논란 때문에 평소 소신을 접고 ‘거악(巨惡)’의 출현을 막는데 나 역시 일조해야 하는지 고민했었는데 이번은 그렇지 않았다. 일찌감치 현역 시장은 저 멀리 달아났고, 후발 주자가 따라 잡는 것은 역부족인 것처럼 보였다. 국내 대표적인 방송, 신문, 여론조사기관들은 입을 모아 20% 가까운 차이가 난다며 사실상 게임종료를 선언했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를 찍더라도 별다른 부담감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오후 6시가 되어 방송3사 공동 출구조사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한 대 얻어맞은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오차 범위 내 접전으로 조사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실제 개표결과는 더욱 드라마틱했다. 처음에는 현역 시장이 앞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표결과는 역전되었고, 박빙의 우세가 새벽 4시 20분 가까운 시간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다시 역전되었고 현역시장은 힘겹게 승리했다. 6·2 지방선거 KBS 개표방송 화면 사진 출처 - 이데일리 3.3%의 지지율을 얻은 후보의 책임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논란은 촛불집회와 용산참사에서 느꼈던 생각과 겹치면서 나를 우울하게 했다. 국민 대다수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낸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와 관련된 촛불시위와 달리 용산참사는 극소수의 경제적 약자에 국한하는 문제인 것처럼 오인되었다. 하지만 용산참사 문제처럼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가 결국은 그 사회의 보편적인 권리 보장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다. 3.3%의 득표를 사표라고 간주하는 생각 속에는 용산참사에 대한 국민 다수의 소극적 입장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김은혜 대변인은 “이번 지방선거 결과에 나타난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더욱 국정에 매진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는 청와대의 입장을 발표했다.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말 보다는 “국정에 매진하겠다”는 말에 무게가 느껴진다. 지금 방식대로 계속 국정에 매진할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이제 곧 월드컵이다. 정부는 조금 마음 놓고 있을지 모르겠다. 뜨거웠던 촛불의 위력이 어느 순간 잦아들었듯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함성 속에 선거에서 표출된 성난 민심이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월드컵 때마다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 중 하나가 복잡한 16강 진출 방정식이다. 자력으로 진출하기 힘들 때마다 누가 누구를 이겨주거나 비겨주어야 한다는 등의 계산이 횡행한다. 선거에서의 사표 논란 역시 일정 부분 16강 진출 방정식과 닮은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수파 후보의 책임을 거론하기 보다는 소수파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긴 소망을 끌어내 자신을 지지해 준 국민들의 기대에 더욱 부응하는 것이 보다 확실한 승리방정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지방선거 후의 상황이 어느 순간 잠잠해진 촛불 후(後)의 리바이벌이 되지 않으려면 3.3%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06 | 추천: 0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에서 대북정책의 전면적인 전환을 선언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이 한반도의 평화를 두 동강 내버렸다"면서 "북한은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완결편이 벌써 나온 셈이다. 지난 10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추진해온 햇볕정책은 폐기되었고, 그동안 남북간 합의들도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전면적인 대결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북한도 조평통 성명을 통해 남한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이명박 대통령 임기동안에는 당국간 대화와 접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북선무방송, 주적개념, 팀스피리트 훈련 등 잊혀졌던 단어들이 속속 다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잊혀졌던 단어가 또 하나 떠오른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던... 잘 살펴보면, 아니 그냥 대충만 살펴봐도 한반도는 과거의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94년인가 1차 핵 위기 때도 한반도는 전쟁 발발직전 상태까지 갔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폭격계획을 세웠었고, 북한에선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다. 이러다간 버르장머리고 뭐고 한반도가 잿더미가 될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햇볕정책 아닌가? -햇볕정책도 북한이 좋아서 친북이라서 나왔던 정책은 아닌 거 같은데... 햇볕이란 단어만 나오면 왜 친북좌파가 따라붙는지 난 이해가 안 된다- 아무튼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고 해도 다독여가면서 같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 햇볕이었다. 이러다간 둘 다 가는 수가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햇볕을 폐기하고 대북정책의 전면재검토를 선언한 현 정부의 선택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명박 대통령은 ‘궁극적인 목표는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니며, 이 위기를 극복해 잘잘못을 가려놓고 바른 길로 가야 한다, 우리에겐 그만한 힘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기대대로 한반도 상황이 전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26일 조선중앙통신은 대북 심리전 방송을 재개할 경우 서해지구 북남관리구역에서 남측 인원, 차량에 대한 전면 차단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이는 사실상 개성공단을 폐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사진은 이날 판문점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햇볕정책을 택하든, 전면적인 대결정책을 택하든 그거야 정책수행자의 몫이고 판단이니까 긴 얘긴 해봤자 입만 아프다. 그리고 이건 지난 10년 동안 주주장장 논쟁을 벌였던 문제이기도 하다. 근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있어서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정권 초기에는 서로의 기싸움도 필요하고 하니 선핵포기니, 상생이니 하는 대북정책을 밀어붙이고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는 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대북정책을 확고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핸들링 하는 능력이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이다. 상당한 유연성과 전략적 판단이 중요한 대목이다. 근데,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나 이후 여러 고비에서 보여준 정부의 태도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위태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대통령이 더 강경한 발언을 하고 더 강력한 대북제재 조치를 취하더라도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부가 이 상황을 대처하고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 수단이 햇볕이냐 채찍이냐 하는 문제는 이차적이다. 지난 햇볕정책 시기에도 서해교전과 같은 사태가 있었지만 상황에 대처하고 위기를 관리하는 능력은 지금과 달랐다. 이명박 정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겠지만, 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상황만 계속 악화시켜왔다. 여기서 사태를 악화시킨 책임이 북한에 전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정부의 책임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182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엉겨서 살지 말자고 다짐할 때가 있다. 주변에 엉겨서 너무 힘든 나머지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자주 봐 왔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런들 저런들 엉겨서 살자고 해 보았건만, 정몽주는 목숨 걸고 독야청청해 버렸다. 엉기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엉겨 붙어 헤매다 넋이 빠지기 십상이다. 엉겨 독배를 마시게 되는 운명은 가련하다. 사법시험 합격 후 연수원 시절, 그 시절처럼 엉겨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내게 대학 시절의 엉김은 뜻을 모아 실천하는 보람과 자기수양의 시간이라도 있었다. 도제식 교육에 편입되기 시작한 젊은 법조인들의 삶은 순식간에 빛이 바랬다. 길들여져 가는 과정에 거부도, 저항도 사라져갔다. 순응하지 아니하는 자는 왕따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편입되어 순응하는 삶에 적응되는 순간 자기수양은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비판과 모욕만은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성을 쌓기에 몰두하였다. 꿈과 비판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엉겨 붙은 기능인들의 일탈과 허세 부리기였다. 넋이 빠져들 독배를 마셨다. 스폰서 검사의 운명은 거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엉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이해관계에서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엉겨 붙어 판단을 그르친 사람들은 자주 주변을 탓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낯선 곳에서, 횡포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는 경우 불의에 맞서 저항하지 않고, 두려움에, 거기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유혹에 빠지면, 그 누구와도 타협하고 굴복하게 된다. 속절없이 엉기는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시국사건 변론에서 접견을 가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엉기지 말고 거부할 것을. 단 한마디의 진술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상대의 따뜻한 말 한마디, 담배 한 가치, 전화 한 통화의 유혹도 뿌리칠 것을. 구속과 중형 처벌 운운의 공격에는 겁 내지 말고 담대할 것을. 두려움과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엉기지 않고 실천한 이들이 정말 부럽고 존경스럽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엉겨서 살자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고 순탄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장래를 위한 차선책으로써 타협과 굴복도 선택할 수도 있다. 독야청청 살아갈 것 같으면 모난 돌이 정에 맞고 깨끗한 물에 고기가 없듯 왕따가 되기 때문이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자기 합리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결국 침묵과 굴종에는 주저함이 없는 반면, 삶의 진리에 대한 열정은 간데없고 진리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게 된다. 실용을 위해 진리를 포기한 넋이 빠진 머저리들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는커녕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는 불가사의한 현실이다. 식민과 독재가 근대화를 이루고 경제를 발전시켰다고 환호성을 지른다. 사대 의존병에 걸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망설임 없이 상전을 위해 독배를 마신다. 엉기는 것이 많기에 엉겨야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바로 이 시대의 대학을 거부하는 외침이 들린다. 취업에 저당 잡힌 대학의 현실이 숨 가빴으리라. 대학다움을 찾고자 눈물을 흘렸으리라. 동지와 진리를 찾았으나 역부족이었으리라. 대학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에도 힘들었으리라. 편입되어 갈 뿐 저항하지 않는 대학인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으리라. 취업 간판을 단 대학에서 꿈과 진리를 포기한 채 엉겨 살아가는 젊은 대학인들의 삶이 죽기보다도 더 싫었던 것이 틀림없다. 진리의 상아탑이기를 포기한 채 취업, 고시 준비에 갇혀 터져 버릴 것 같은 대학의 분위기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는 외침이 주객전도의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미래의 희망으로 다가온다. 지난 3월 11일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14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필자는 ‘소신’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며, ‘소신 있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연함‘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나 행동 역시도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조각가 로댕의 비서였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쓴『로댕 어록』속의 로댕의 어떤 말이 가슴에 와 닿아 적어서 오랜 동안 벽에 붙여 두고 지냈었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깊고 의연하고 성실하십시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발표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깊은 진실인 것은 모두에게도 진실이기 때문입니다.”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소신’은 참 아름답다고 생각되며 로댕의 이러한 격려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한편, 2010년 3월 24일자 어느 주요 일간지 1면에서 필자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헤드라인이 하나 있었다. 워낙 ‘소신’ 없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혹은 ‘소신’을 들먹이기엔 자신감들이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쉽게 신문에서 접하지 못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소신’이라고 믿던 터에, 그 단어가 들어간 헤드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나 싶다. “李대통령 ‘4대江 사업은 내 소신’,” “생태계를 복원하는 생명 살리기…반대하는 사람들 설득해야”가 그것이었다. 그 기사를 일부 인용하자면, 이명박 대통령은 3월 23일 국무회의에서 “생명을 살리고 죽어가는 생태계를 복원하며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것이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목표이자 내 소신”이라며, 최근 천주교 주교회의의 반대 성명 등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해 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4대강 사업은 1995년 국회에서부터 이야기해온 나의 소신”이며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도 정치적으로 반대가 많았다.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과 버스전용차로도 상대 당이 시장 사퇴하라고 공격하곤 했다. 서울시 공무원들도 내게 와서 원상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결국은 반대하던 사람들을 설득시켰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치적 목적으로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도 우리의 소중한 국민이다. 생각을 바꾸든 안 바꾸든 성실하게 설명하고 알려야 할 책임이 정부에는 있다”고 했다. 그 후 4월 27일자 다른 일간지에는 “전국 하천 ‘4대강 방식’ 개발 추진,” “청와대 이미 승인” 등의 헤드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한편, 4월 26일에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 연대’(천주교연대)는 4대강 살리기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첫 생명·평화미사를 열었다. 천주교연대의 집행위원장인 사제는 미사에서 “우리는 정치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라 정의 때문에 왔다”고 말씀을 시작하였고, 미사에 앞서 천주교연대 상임대표 사제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명동성당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공간으로 국민 모두에게 의미가 있다”며 “생태와 환경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교회의 염원을 담아 명동성당에서 기도회를 열기로 한 것”이라 했고, “정부는 (최근 여론 악화의 원인이) 홍보 부족 때문이라고 여기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정부가 대화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5월 10일에 1만 명이 참가하는 대형 미사가 예정되어 있는 명동성당은 이제 4대강 반대운동의 중심이 될 것이며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적인 서명 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생명·평화 미사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반대 운동은 천주교뿐 아니라 불교계, 더 나아가, 개신교계 내에서도 퍼져 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계는 4월 17일에 ‘4대강 생명살림 수륙대재’를 개최했고 개신교 목회자 800명은 이미 4월초에 ‘생명과 평화를 위한 2010년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발표하고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한 바 있다. 범종교계의 이런 흐름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4대강 사업은 살아 흐르는 강물을 막고 강과 함께 살아가는 뭇 생명의 터전인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사업이기에, 생명의 가치를 중시하는 종교계로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투신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다. ‘4대강 사업 저지를 위한 천주교연대’ 소속 사제와 신도들이 황사가 섞인 비가 내린 지난 4월 26일 저녁 서울 중구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우산을 쓴 채 생명평화 미사를 올리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아울러, 세계적 권위의 과학전문지『사이언스』최근호도 국제적인 전문가들의 의견을 인용하며 “토목공사를 밀어붙여 불도저란 별명을 얻은 건설회사 시이오(CEO) 출신인 이 대통령의 청계천 살리기 사업이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고 소개하며 “4대강 사업은 유역관리 방법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다”고 비판했다. 작년 11월 유엔환경계획이 마련한 한국의 녹색성장에 관한 검토보고서 초안에서도 “4대강 사업은 논쟁적이며, 습지에 끼치는 영향 평가와 영향을 줄일 조처를 촉구하고 있다”고『사이언스』는 전하고 있다. 세계적인 과학전문지가 ‘4대강 사업’을 특집기사로 다룰 만큼 이 사업은 이제 세계 과학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이 대통령의 ‘불도저’ 식의 ‘소신’이 과연 옳았는지 무모했는지, 그 결말 역시도 이젠 국제적인 관심사이리라. 2년 전인 2008년 6월 30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촉발되었던 촛불집회 한가운데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개최한 시국미사의 강론 제목을 필자는 지금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다. “대통령의 힘과 교만을 탄식함”이 그것이다. 그 강론의 마지막 부분은 대통령이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겸허히 인정할 것,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듣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설 것, 그리고 쇠고기 문제를 정치적, 이념적인 갈등으로 몰아가지 말 것 등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그 후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겸허한 자기성찰 없이, 마냥 승리했다고만 믿는 교만한 권력에게도 교훈이 있었을까. 그것이 없었다면 또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 해도 이상할 게 있을까. 다시 서두의 로댕에게로 돌아가 보자. “깊고 의연하고 성실하십시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생각이 남들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발표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그들은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깊은 진실인 것은 모두에게도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소신은 언제, 그리고 누구에게, 가능한 것일까. 이렇듯, ‘소신’은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 무모한 것일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속도전식으로 몰아붙인 ‘위업’이라 스스로 자평하는 70년대, 80년대 경제개발과 중동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거대한 어항을 만든 것인 청계천 사업의 치적을 강조하며, 이번에도 자기가 옳을 것이다, 나중에 모든 책임은 자기가 지겠다는 그 소신... CEO가 아니라 분명히 대통령인데... 아! 그 소신, 참으로 괴롭고, 무섭다. 제발 비극적이지 않기를...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11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냈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 이문재 <내 마음의 지도>   #섬진강 지난해 가을 섬진강변을 따라 사흘을 걸었다. 광양제철소 근처, 섬진강이 바다로 몸을 푸는 지점에서 출발한 나는 시속 4㎞의 속도로 서서히 북상했다. 망둥이가 뛰어오르는 섬진강 하류는 아름다웠지만, 이내 한 무더기의 공사현장과 맞닥뜨렸다. 남해고속도로와 19번 국도를 잇는 지름길을 새로 놓으려는 공사 같았다. 모든 공사현장이 그러하듯, 벌겋게 파헤쳐진 국토는 슬퍼 보였다. 강 하구 쪽에 보가 설치되는 바람에 재첩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무렵이었다. 국산 재첩이라고 써놓은 것들은 죄다 거짓말이며, 이제 재첩도 거의 중국산이라는 육성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걸으면서 나는 강가에는 길이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강을 따라가려는 여행자는 국도 위의 아스팔트를 걸어야 했다. 어느 운 좋은 마을이나, 이따금 만나는 공원에서는 강을 발치에 둘 수 있었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물결은 멀고 차량은 가까웠다. 발은 쉬이 피로해졌다. 그러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강변을 걸어봤던 것일까?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강변에 접근하기 쉽도록 자전거 도로를 만들겠다는 것일까? 강바닥의 모래를 퍼내어 수심을 깊게 하고 유람선을 띄우겠다는 것일까? 국도가 아닌 강변을 걷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4대강 사업을 자초한 것은 아닐까? 지리산의 구례 쪽 정상에서 바라본 섬진강의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청계천 복개한 도로 밑의 청계천에 가스가 차서 언젠가 청계천 일대가 폭발할 것이라는 괴소문마저 돌았던 청계천 복개도로와 그 위에 위태롭게 걸쳐져있던 고가도로를 뜯어내고 청계천을 복원하자는 제안을 처음 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된 박경리 선생이었다. 한겨레신문은 2002년 1월 1일 신년기획 특집으로 박경리 선생 인터뷰를 싣고, 청계천 복원 시리즈를 통해 이 동화 같은 상상에 시민권을 부여했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교통 혼잡과 천문학적인 비용 등을 들어 반대했다.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론을 선거 공약으로 받았고, 김민석 민주당 후보는 미적거리다 반대했다. 결국 이명박이 당선됐고, 청계천은 불구의 몸으로 복원됐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흐르는 살아있는 하천이 아니라 수돗물을 역류시켜 거꾸로 흐르게 하는 죽은 하천이었다. 하천 바닥을 시멘트로 쳐바른 청계천 복원 사업은 토건족 이명박의 절묘한 변용이었다. 개발 시대를 반성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개발의 진화였다. #한강 여의도 63빌딩 아래 샛강과 만나는 수문 근처에는 자그마한 모래톱이 있었다. 둔치 공사 이후, 한강 하류에는 모래가 쌓일 공간이 없었지만, 이곳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모래톱이었다. 김소월의 <강변살자>는 노래가 절로 나오는 정다운 곳이었는데, 오세훈 서울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공사로 싹없어지고 말았다. 모래를 치우고 시멘트를 발라버렸다. 오 시장은 참 대단한 따라쟁이다. 환경연합 회원이었다는 분이 어찌 그렇게 환경감수성이 무딘지 새삼 놀랄 따름이다. 친구와 그곳을 거닐며, 세월이 조금만 더 흐르면 둔치의 시멘트를 모두 걷어내고 자연하천을 살리자는 운동이 시작될 거라는 얘기를 하며 꿈에 부풀었던 내가 한심스러웠다. 한강의 다른 구역은 어떤가. 공터라고는 거의 남기지 않고 꼼꼼히 시멘트를 발라놓은 성실성이 놀라울 정도다. 지금의 한강 둔치는 숨 막히는 잿빛 그 자체다.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염형철 서울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이 한강르네상스 사업으로 조성된 돌 축대를 가리키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경부고속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한강의 그 잿빛 구조물 위에서 즐겁게 논다. 사진도 찍고 자전거도 탄다. 인공어항이라고 비판받는 청계천을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즐기는 것처럼. 여름이면 발까지 담그며 즐거워한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대강 사업이 완공되면 시민들은 자전거를 타고 지금은 갈 수 없는 한강의 북쪽과 낙동강, 금강, 영산강을 달릴 것이다. 유람선을 타고 경치를 즐길 것이다. 없는 것보다 낫지 않냐고. 이명박 대통령은 완공 이후의 편익이 과정의 모든 논란을 덮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그랬듯이. #기우뚱한 균형 분명히 말하건대, 섬진강의 모래밭은 멀리서 더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흉물스럽게 바닥을 드러냈다고, 모래를 퍼내어 물이 가득 흘러야 비로소 강다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런 쪽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강을 해치지 않으면서 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싶었다. 모래톱을 해치지 않으면서 가벼운 산책길을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개발과 환경이라는 두 가지 가치 사이에서 철학자 김진석처럼 ‘기우뚱한 균형’을 잡아보고 싶었다. #광기 그러나 이 정권의 4대강 사업은 그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기우뚱한 균형을 말할 공간이 없다. 일체의 여론 수렴과정과 형식 절차를 생략한 채 밀어붙이는 이 독재적 만행 앞에 모든 이견과 상상은 설 자리를 잃는다. 가장 두려운 건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광기다. 대통령 한 사람이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국민의 절반 이상이 반대해도 강행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불구가 되었다. #두려움 버스전용차선을 포함한 교통체계 개편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자신의 취임식 날인 7월 1일에 맞춰 모든 작업이 끝나도록 독려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버스카드 단말기는 고장 나기 일쑤였고, 버스전용차선에 깔아놓은 빨간 아스팔트는 빗줄기에 파헤쳐졌다. 시민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충분히 준비하고 좀 천천히 하면 안 되나.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안에 4대강 사업을 완료하기 위한 속도전이 다시 한 번 진행되고 있다. 서울의 교통체계야 약간의 시행착오 뒤 금세 진정되었지만, 4대강 사업이 가져올 후폭풍은 재앙에 가까우리라. 나는 다가올 여름이 두렵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07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린 나이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주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우주는 무한한 것이라고 하는데 나이 어린 나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주가 무한하다고 하면서 빅뱅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빅뱅이 한 점(Spot)이 폭발하여 현재의 우주가 되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얼마나 큰 점이길래 무한하다고 하는 건지, 그 한 점(Spot)이 무한하다면 그 한 점(Spot)의 밖에는 무엇이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한 점의 밖은 무(無)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無)라는 개념 역시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분자가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했던 것이 불과 몇 세기 전인데, 이제 인간은 분자보다 작은 원자, 원자에서 더 나아가 전자, 핵, 양성자, 중성자는 기본이고, 300여종의 소립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의 인식의 한계는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계속 확장되고 있다. 물론 과학의 수준이 현재 상태에서 파악할 수 있는 한도까지만 인간은 인식한다. 그러나 인식 범위의 확장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 모든 것이 의심에서 출발하고, 궁금증에서 유발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 인식 범위의 확장가능성은 열려있는가? 천안함이 침몰한지 벌써 20여일이 훨씬 더 지났다. 연일 TV, 신문, 인터넷 등을 통해 천안함과 관련된 속보가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천안함과 관련된 그 어떠한 의혹도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뢰 공격이 있었다면 왜 화상을 입은 승조원이 없을까, 군이 보유하고 있는 Tod 영상은 왜 중간이 뭉텅이로 없을까, 군 통신망을 놔두고 왜 국제상선망으로 통신을 했을까, 해경과 해군 사이에는 왜 진술이 일치하지 않을까 등등 천안함 침몰에 관한 국방부의 발표와 관련하여 의문과 궁금증은 갈수록 증폭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당시 천안함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과학의 발전은 과학적 발견과 그 발견을 위한 노력을 통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경우에 따라서는 후퇴라는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회 발전의 밑바탕은 정확한 사실의 발견 내지 이를 위한 노력이고, 밑바탕이 마련된 후(내지 밑바탕을 마련하려는 노력과 동시에) 더 나은 사회를 구상하고 실천하는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1200t급 초계함 천안함의 선수 부분이 수면위로 보이고 있는 가운데 해경 함선이 주변을 지나고 있다. 사진 출처 - 옹진군청 그런데 천안함을 둘러싼 여러 정황은 전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정보를 소지하고 있는 기관이 스스로 침묵하거나 정보를 알고 있는 자에게 침묵하도록 강요하거나 거짓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발표하는 등의 행위를 하고 있다. 각개 분야의 전문가들이 여러 의견과 의문을 쏟아내는 형국임에도 정작 천안함의 침몰 과정에 대해 모든 자료를 보유하고 있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침몰했던 천안함의 선체를 직접 확인하고 있는 군 당국의 신뢰할 수 없는 발표로 인하여 정확한 사실 관계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군 당국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로써 천안함 사건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여러 계기들이 사장되고 있다. 게다가 천안함 사건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이처럼 온 국민을 슬픔으로 눈물짓게 하고, 전군의 사기를 땅바닥까지 떨어뜨린 중대한 사안에 대해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이 없는 현재와 같은 상황은 이전 정권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천안함이 왜 침몰했는가를 파악하는 문제는 우주가 끝이 없는 것인지, 전자, 양성자, 중성자, 핵보다 더 작은 물질이 있는지 파악하는 문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후자는 인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우연한 발견과 그러한 발견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충분할 수도 있지만, 전자는 이미 인식 가능한 사실이 존재하고 있고, 그 사실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그 사실을 바탕으로 발생가능한 동종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개선점도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적어도 장래에 비슷한 사고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고,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여 더 나은 해군을 만들 수 있으며, 무엇보다 징병제가 유지되는 한 줄도 없고, 빽도 없고, 힘도 없어 군에 자녀를 빼앗길 부모들이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안함 희생자 분들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198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들은..... 얼마 전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 강서교육청 소재의 학교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학업성취도 평가에 대한 연수를 실시하였다. 업무가 많아 바쁜 학기 초에 평가에 대한 연수를 받아야하는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평가에 대한 명쾌한 내용을 기대하였으나 평가와 상관없는 교장선생님께서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대한 홍보성 얘기를 길게 들어야 해서 교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강사가 평가에 대한 명쾌한 내용을 이야기하기 힘든 이유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평가로는 교육적인 논리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교육과정상의 평가는 다양성과 자율성, 창의성을 중요하게 여겨 가르친 교사가 수행평가 방식으로 평가하도록 권유하고 있으나 현재 시행되는 평가는 그 수행평가에다가 획일적인 일제고사식 평가를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실시토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횟수도 학기당 1회(연2회)에서 2회(연4회)로 늘어나는 추세여서 당연히 시험에 대한 압박감은 아이들이나 교사, 학부모에게 모두 클 수밖에 없다. 현재 중학생들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형태로 치루고 있는 이 시험은 사실 학원연합회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공정택 전 교육감이 학교에 강압적으로 실시하게 한 시험이다. 아이들에게 부담만 안겨주고 성적에 들어가지도 않는 일제고사 형태의 시험은 교육청에 시험의 실시여부와 참여도를 보고해야하는 교감과 시험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한 교사들 간의 충돌을 야기했고 문제제기를 한 많은 교사들은 시험이 이루어지지 않는 저학년을 담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인사의 자율권이나 민주적 인사는 허울만 있을 뿐 강제적으로 시행되는 정책 앞에서 제도 자체가 무력해 질 수 밖에 없다. 공 전 교육감은 리틀 이명박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으로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가장 잘 따른 사람이다. 그가 교육계 비리의 몸통으로 불려지며 교육 관료들의 승진이나 인사에 깊숙이 개입하여 권한을 남용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재임기간동안 펼친 정책들을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이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일제고사 형태의 학력평가를 강제적으로 치르게 한 이후 시험지 회사의 주가가 치솟았고 사교육기관들은 어려운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크게 성행하였다. 공 교육감이 새롭게 도입하여 시행한 고교선택제나 국제중 설립 또한 사교육을 활성화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문제가 있어 고교선택제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고 국제중 또한 마찬가지이다. 6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사용하여 교육대통령이라 여겨지던 서울시 교육감이 가져야하는 교육에 대한 관점과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면서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인식과 선택을 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교사들은..... 교사들은 평가를 하는 주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이제는 평가를 받아야하는 존재가 되었다. 모두 평가를 받고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독 교사만 평가를 거부하는 모양이 억지처럼 보이지만 지금 학교에서 이루어지려 하는 교원평가는 결코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없는 제도이다. 아니 오히려 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없으면서 교사가 가지고 있는 교육적 소신이나 신념마저 저버리게 만드는 심히 우려되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일 년에 4번 하는 공개수업이 동료평가의 유일한 잣대이며 학부모나 학생평가는 인기투표로 전락할 공산이 매우 크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교사가 교육적 소신을 가지고 바른 가르침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교사가 가진 소신은 어떤 한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가르침이라는 것은 지난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하는 행위이다. 이것을 단지 1년이라는 기간에 평가받아야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질 높은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환경에 대하여 투자하고 여건을 조성하여 좋은 교사가 되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교원평가는 『서울학생 7560+운동』처럼 정말 사회적 정서에 편승하는 허울뿐인 제도이다. 얼마 전 서울지역 학생들이 체격은 크지만 체력은 허약한 것으로 나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개인적으로 누군가 투자안하고 시행되는 정책 하나 만들겠구나 생각했는데 결국은 내 예상이 정확하게 맞았다. 1주일 중 5일을 60분씩 운동하자는 이 운동은 정부에서 하는 것은 하나 없이 관련 유인물을 만들어 학생들이나 학부모가 매일 확인하고 체크하여 학교에 제출하라는 것이다. 현재 시행되려는 교원평가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20여 년 전 일 년에 몇 차례 시행되는 공개수업만 잘하면 되었던 그 시절... 매일 진행되는 수업은 신경 쓰지 않고 남들이 보는 수업만 신경 쓰며 수차례 연습까지 해가며 공개하던 그 수업.... 그 전철을 다시 되밟자고 하는 이 시점에서 교원평가는 다시 재고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반 수업은 네 차례씩이나 빼먹고 아이들은 방치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나 교사한테 이런 평가가 성행하는 학교라는 곳은 어때야 옳은 것일까? 교사가 가르치면 아이들이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그 방식은 다양해야하고 획일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평가가 단순히 시험문제 풀이식으로만 진행되어서는 곤란하다. 강가에 있는 각양각색의 돌처럼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을 시험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서열화시키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과 다양성을 말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교라는 곳은 각기 다른 능력과 개성을 지닌 아이들이 각자가 원하는 다양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전폭적이고 막대한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 수영장 없이 수영교육을 필수로 받으라고 하는 현재의 교육과정은 학교의 현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교사들은 어떠한가? 교사로서의 자질과 수준이 높은 교사가 되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학급당 학생 수를 줄여서 교사가 아이들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만들고 가르치는 일 외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잡무를 없애 오로지 아이들과 교육내용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사 스스로 자기 발전을 하도록 지원해야하고 교사의 발전이 상시적으로 학생들에게 피드백 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한다. 창의적 사고를 지닌 민주적이고 자율적 인간 육성은 단순한 평가 방식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이제 교육의 다양성과 공공성에 기반을 둔 학교교육에 대한 폭넓은 인식과 기대를 새롭게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00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느 날 이지상이 찾아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기타를 옆에 세워 둔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이지상의 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건물의 모양새로 보아 성공회대학교 교정 어디쯤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표지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결코 밝지 않은, 다소 눅눅해 보이는 그늘진 자리, 담쟁이는 겨우내 메말라 있던 자취를 채 떨어내지 못한 채 이제 막 조금씩 파란 이파리를 내놓으면서 위로 뻗을 채비를 하고 있다. 의자에 앉은 이지상은 웃는 듯 마는 듯 겸손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그 엷은 미소가 강인한 입매와 눈빛을 숨기지는 못한다. 이 사진에서 가장 밝은 부분은 그의 분신인 기타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정면을 향해 있는 기타의 둥근 몸이 뿜어내는 강한 빛의 여운이 그 사선 위에 자리한 이지상의 눈빛과 연결되며 강한 악센트를 만들어낸다. 내가 사진을 잘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이지상이라는 인간의 아우라를 이처럼 절묘하게 드러낸 사진은 또 없지 않을까 싶다. 이지상은 지난 20년 동안 노래를 만들고 불러온 싱어송라이터다. 그는 통기타 하나만을 들고 세상의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그늘 속 삶과 사람들을 노래해 왔다. 그의 모든 노래의 주제어는 사람이다. 크고 위대하고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작고 낮고 여린 사람들, 모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할퀴고 찢기고 유린당하면서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가 만드는 노래의 주인공들이다. 화려하고 강한 것들만 조명되고 기억되는 천박한 세상에서 그의 노래가 이른바 비주류의 울타리를 넘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을 다 껴안으려는 듯 쉼 없이 노래를 쓰고 불러왔다. 이 책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는 그가 노래를 쓰고 부르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들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잔잔한 기록이다. 이지상은 그가 맡고 있는 성공회대학교 강의 <노래로 보는 한국사회> 수업에서 ‘노래 듣고 울어보기’라는 과제를 준다. 노래를 ‘듣기’ 보다는 몸으로 느끼고 춤을 추는 데 더 익숙 사람을 노래하다 책 표지 사진 출처 - 삼인출판사 한 세대에게 이 과제는 아마도 조금은 생뚱맞고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그렇기에 ‘노래 듣고 울어보기’는 새로운 세대가 노래라는 예술을 진정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뜻 깊은 경험이 아닐 수 없을 테다. 노래를 들으며 울 수 있다는 것은 그 노래 속의 삶과 현실에 깊이 공감하며 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느낀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그 노래가 담고 있는 세계를 낯설게 들여다보면서 그 속에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에 담긴 많은 노래와 그 노래 속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바로 그렇게 노래를 듣고, 노래 속의 세상을 읽고, 그 세상 속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새삼 낯설게 우리들 자신을 확인한다. 우리의 눈물은 그런 의미에서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각성의 눈물이며 그 각성에서 비롯하는 희망의 눈물이다. 이지상이 운영하는 누리집 ‘사람이 사는 마을’은 www.poemsong.pe.kr이란 주소를 갖고 있다. poemsong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그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시의 모습으로 그에게 포착되어 한 편의 노래로 완성된다. 그의 노래를 듣는 일은 언제나 노래와 함께 한편의 시를 읽는 감동을 선사한다. 이 책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를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낮은 목소리로 세상과 역사의 모진 틈바구니에서 결코 스러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시를 읽게 된다. 이지상의 글도 그의 노래를 닮았다. 잔잔한 경어체로 나지막이 속삭이듯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역사의 핵심을 꿰뚫고 삶의 진정성을 들여다보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그의 책은 그래서 삶의 낮은 자리에서 몸으로 겪어온 가난한 사람들의 역사이고 현대사의 고비 고비를 수놓은 사건과 사람을 시인과 가객의 눈으로 길어 올린 시집이며 잔잔한 목소리로 삶의 결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는 격조 높은 에세이집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함께 읽고 함께 눈물 흘리며 새로운 각성과 희망의 언어를 확인하게 되기를 바란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96 | 추천: 0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맹자(孟子)는 사이비(似而非)가 위험한 이유를, 비난을 하려 해도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을 하려 해도 공격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이비라 하더라도 그 태도는 충실하고 신의가 있는 것 같으며 행동은 청렴하고 결백한 것 같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그 자신도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지만, 사이비와는 함께 참다운 성현의 길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맹자의 말처럼 사이비가 위험한 것은 그것이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게 하고, 옳은 사람을 옳지 않은 사람으로 오해받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이비가 존재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영역은, 종교를 제외한다면, 학문의 세계일 것이다. 어떤 학자가 올바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지를 일반인들이 쉽게 알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이비 학자나 연구자가 득세할 때, 학자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사라지고, 단지 특정 학자의 견해가 어느 쪽에 유리한지 여부로 편을 분류할 따름이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다. 학자들이 정책에 대해 고민한 바를 얘기해도 정치적 집단이나 언론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나 선호에 따라 비난하거나 받아들일 따름이다. 이렇듯 좋은 학자와 연구자들이 비난 속에 움츠린 사이, 공론의 장은 사이비 학자와 연구자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한 국책연구기관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사이비 학자로 인한 폐해를 잘 드러내는 예이다. 국가 정책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연구자들은 정치적 성향을 띤 자로 간주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이 오히려 학자적 양심을 운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가 얘기했듯이 사이비 학자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양심을 들먹이며 자기 얘기가 옳다고 떠든다. 그들은 자신이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행동으로 인하여 그들은 혜택을 얻고 자리를 보장받는다. 사이비란 원래 그런 자라고 여기며 개인적으로 조심하면 그만이긴 하지만, 사이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닥칠지를 생각하면 이런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형식상 선거를 통해 구성되었다 하여 민주정부라고 부를 수 없다. 참다운 민주정부는 헌법이 목적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사회적 연대, 복지국가 등을 실현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형성된 공론에 따라 정책을 수립하며,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진실해야 한다는 것은 공론을 형성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헌법의 이념과 국민의 참여를 도외시하는 정부는 사이비 민주정부일 따름이다. 정부가 헌법과 법률을 따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면, 시민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공론 형성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시민의 관심이 사라질 때 민주주의는 위험하게 된다. 결국 사이비 민주정부는 단지 특정 기간 동안 시민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민주 체제를 위협하는 단초가 된다. 청년유니온은 지난 24일 오전 11시 과천 노동부청사 앞에서 노동조합설립신고 반려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부를 비판했다. 사진 출처 - 문화저널 21 노동부가 공무원 노조나 청년 유니온의 설립 신고서를 반려한 것이나 검찰이 법률에 따라 공무원의 징계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교육감을 기소한 것을 볼 때, 맹자의 사이비에 관한 얘기가 생각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가 법률을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을 돕지 않고 오히려 이들의 행동을 범죄로 취급하는 것은 그 사회의 다른 사람들에게 법률을 지킬 필요가 없고 특정 정치 세력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심게 된다. 그런 사회가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혹시 정부가 일단 자기 뜻대로 국민의 기본권 행사를 거부하고 수사하고 기소하고선, 몇 년 후 재판 결과가 나오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요즈음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이라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누가 마음에 들지 않다거나 어떤 세력을 빨리 몰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후에도 우리나라가 민주적 체제 하에서 법에 의해 운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360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보는 것도 좋아하고 뛰는 것도 좋아한다. 어릴 적 동네마당에서 깡통 차는 것으로 시작했으니 나의 축구인생도 꽤 오래 지속되는 셈이다. 축구를 하다보면 다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과욕을 부려 다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대개는 공을 잘 못 차는 사람이 다친다. 다치게 하는 사람도 있다. 승부에 집착하여 상대의 몸쯤은 거실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툭툭 걷어차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대개 공을 잘 찬다. 이쯤 되니 대충은 알겠다. “힘을 가진다는 건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을. 내가 아는 한 이 땅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힘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손이 천개 달린 부처님은 그 많은 손을 사바세계에 뻗쳐 중생의 고통을 덜어낸다. 천수관음의 손엔 눈이 달렸기 때문. 그러나 극심한 경쟁의 전리품으로 힘을 챙긴 대다수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눈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힘을 가진 자기들끼리도 밤새는 줄 모르고 싸우기만 한다.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샤를 페펭은 프랑스 공교육의 목표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자유로운 개인. 둘째 양식 있는 시민 그리고 셋째로 자격 있는 일꾼. 여기에 우리가 안고 있는 공교육의 현실을 대입하면 쪼끔 불행해 진다. 아마 이쯤 되지 않을까. 첫째 집단에 속한 개인 둘째 복종하는 시민 그리고 나서 자격 있는 일꾼. 프랑스 교육이 스스로 주인 되는 삶을 지도하는 반면 우리의 교육은 철저히 노비의 삶을 지향하니 그렇게 쌓아온 이성 없는 권력은 누구의 가슴에 큰 상처를 입힐 것인가.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 어떤 마을 (도 종환 시/ 한 보리 작곡) 이런 동네를 찾고 있다. 물이 너무 맑아 새소리와 별 그림자까지 둥둥 떠다니는 그 물에 밥을 짓고 너나없이 둘러앉아 조근조근 삶을 나누는 풍성한 저녁식탁. 그 사람들 위에 한없이 따스한 별 무리가 봄볕처럼 스며드는 그런 마을. 힘없는 사람을 제일로 치고 힘 있는 사람은 조심해서 있는 듯 마는 듯 그 힘을 쓰고 힘 많은 사람은 그 힘을 부끄럽게 여겨 이집 저집 나눠주기에 골몰하는 마을을 살고 싶다. 누구에게나 굽신대지 않고 당당하며 주인 된 권리를 누리되 이웃의 지친 발걸음을 위해 자신의 어깨를 내어 주는 착하고 순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마을을 만들고 싶다. 그러나 참 어렵다 도종환의 어떤 마을에 나오는 풍경도 사람도. 소리 없이 여린 소녀의 머릿결을 보듬고 가는 바람도 내가 사는 마을엔 없다. 사진 출처 - 필자 참 좋은 강변을 거닐면 몇 달 후 4대강 공사로 난장판이 될 흙탕물이 떠오르고 참 좋은 사람을 만나면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봉은사 대웅전의 부처님 얼굴처럼 자비롭게 해대는 정당 원내대표의 불편한 미소를 얘기하며 참 좋은 바람을 만날 땐 교육계 3대 비리 척결을 외치는 권력자의 용트림을 기상청도 속여 가며 찾아든 황사 막 듯 입막음해야 한다. 부처님 손바닥의 눈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공동체적 이성도 갖추지 못한 힘 많은 놈들의 뉴스를 훑으며 꼭 한마디씩 읊조리는 “이런 뻥쟁이눔의 시끼들” 같은 자조 섞인 욕설도 이젠 지겨울 때가 되었는데도 그칠 수 없다. 요즘엔 씨앤 블루라는 자칭 인디밴드가 불렀다는 외톨이야의 후렴구만 귀에 쏙 들어온다. “외톨이야 외톨이야 다리다리다랏 두우” . 최근에 나는 그 부분을 “뻥쟁이야 뻥쟁이야 다리다리다랏 두우~~”로 듣는다. 진짜 인디밴드의 노래를 표절했다는 사실을 법정에서 가린다는 뉴스를 듣고 난 다음부터다. 그냥저냥 나부터 변해야 한다 같은 짜증나게 당연한 어구를 주문처럼 외워도 도대체 나를 변화시킬 구석도 찾기 어렵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니체 선생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속이 꼬여 있으니 스스로의 정화 위해 다시 어떤 마을을 읽으며 내가 찾는 마을을 꿈꾼다. 그리고 기도한다 사랑을 사랑이라 이름하면 사랑이 아니라 했으니 뻥을 뻥이라 이름 하면 뻥으로 들리지 않는 이순(耳順)의 공력을 내게 허락 하소서... - 이글은 아침독서신문에 송고한 “노래로 듣는 시”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3 | hrights | 조회: 24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