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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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4대강 공사를 위해 설치한 낙동강 구미취수장의 임시보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경북 구미시와 일대 50여 만의 식수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라는 소식이 바로 며칠 전인 5월 8일 밤 9시 MBC 뉴스 데스크에서 보도된 바 있다. 공영방송 9시 뉴스에서도 이젠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이 보도되나 싶었다. 정부가 애초에 제시한 청사진은 물 부족 해결, 홍수 예방, 수질 개선, 그리고 과도한 개발로 황폐화된 하천 생태계를 복원하고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다. 16개의 보 건설과 준설로 인해 4대강 본류의 수질은 악화되었고 침수지역은 지천까지 넓혀졌으며, 생물종은 절반으로 줄었고, 4대강 사업이 올려놓은 땅값이익은 그 대부분이 외지인에게 돌아갔다. 허나, 법조인들은 이런 문제를 소송을 통해 바로잡겠다고 하고 정치권은 선거를 통해서 바로잡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고만 있는 국민은 어떡해야 하는가, 어떡해야 했는가. 강변에서 농사짓던 농민들은 생존 기반을 잃었고, 보도조차 통제된 채, 4대강 공사 노동자들은 쌓이는 피로와 허술한 안전조치로 인해 조용히 죽어나갔다. ‘사람을 잡는 개발’이자 ‘죽음의 행렬’이다. 4대강 공사가 시작된 2009년 11월 이래로 지금까지 4대강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와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30명이다. 2012년 정권 재창출을 위해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채근하는 대통령 때문에 안전관리는 뒷전인 채, 달리는 공사차량에 운전자가 치여 죽고, 준설중인 굴착기와 준설선에서는 노동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나흘간 4명의 노동자가 공사현장에서 목숨을 빼앗겼는데도 정부는 4대강 사업 중단은커녕 친수구역개발사업으로 규모와 영역을 오히려 훨씬 키웠다(정의구현사제단 소식지,「빛두레」, 2011년 5월 1일자 참조). 사업목적과는 너무 다른 이런 삽질, 그 무모하고 무식한 ‘속도전’, 그야말로 누구를 향해 분노하고 통곡해야하는지 묻고 싶으면서도, 참으로 ‘가관’이다. 정부와 대통령은 왜 애도의 말 한마디 없이 쉬쉬하는가? 어찌 이리도 잔인할까? 작년 2010년 7월 7일은 경부고속도로 개통 40주년 된 날이었다. 한국경제발전사, 아니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을 그 미친 ‘쾌거’ 역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요구했다. 총 428km의 고속도로를 불과 2년 5개월(1968년 2월 1일 착공, 1970년 7월 7일 개통)에 완성했는데, 토목기술의 부족을 머릿수로 메우는 식으로 공정을 밀어붙였기에 연인원 850만 명이 도로 건설에 동원되었고, 가장 위험한 공사였던 터널공사도 인력으로 기술부족을 메우다 보니, 경부고속도로 건설 도중 총 77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터널공사 낙반사고로 인한 사망이었다고 한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당제터널 구간 근처인 금강휴게소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위령탑을 세워 개통식 날에 직접 제막을 했다고 하며, 이은상은 추모글에서 이들을 “조국근대화를 위한 민족행진의 전사”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순직 노동자 유가족들은 정부로부터 보상금 한 푼 못 받았고, 다만 소속 건설사에서 유가족에게 50만원(현재가치로 약 500만 원가량) 정도의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알려졌을 뿐, 이들은 너무나 억울하게, 너무나 빨리 잊혀졌다. 겨우 도로공사 측에서 매년 위령제를 열어 왔다는 사실에서나 위안을 찾아야 할까.(「조선일보」, 2010년 7월 7일,「동아일보」, 1970년 7월 7일 참조). 비슷한 논리인 이명박 정부는 4대강 개발 순직 노동자들에 대해 어떻게 나올까. 아니, 그때 어떻게 대해준들, 글쎄, 그게 다르랴. 2009년 11월 이래로 지금까지 4대강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와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30명이다. 노동자들의 안전을 외면한 '속도전' 공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필자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중의 하나가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성서 구절은 이와 관련하여 흔히 인용되거나 상기되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일부를 인용해보자.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구약성서 시편 8:3-8)(강조 추가) 곧,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담겨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모질게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저 하늘과 달과 별들을 선물로 받은 존재이자,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며,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이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곧 하느님이 담겨 있고 우주가 담겨 있다. 올해 내 4대강 사업이 다 완공되면 국민들이 비로소 자기의 뜻을 알아줄 거라는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그것에 공사 기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맞추라는 상부의 지시와 독촉, 시공사들 간의 경쟁에 떠밀리며, 삽질은 앞으로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리고, “과연 누가 센지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라는 식으로 기나긴 장마와 홍수의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시키셨는데, 삼백 몇 십만 마리 가축들이 졸지에 매장되어도 가축들에게는 커녕 국민들에게도 변명 말고는 한마디 사과조차 없던 정부이다. (생매장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미 돼지는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물렸다는 언론보도가 생각난다. 그게 신기했나?) 벌써 30명을 넘고 있는 ‘물길’ 순직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희생에 대해 철저히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정부에게 묻고 싶다, “아니, 도대체 사람을 무엇으로 여기는데, 그리고 그 삽질이 도대체 무엇인데?”라고.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186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 빠져 사는 사람이 좋다. 취미, 운동, 드라마, 쇼핑, 게임, 일 무엇이든지 빠지면 흥겹다. 열정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인생은 어떠한가. 열정을 갖고 재미와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을 능동적 삶이라 불러본다. 삶은 수동에 빠지기 쉽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한결같이 힘들기 때문이다. 입에 풀칠 할 일이 힘들다. 지겨워도 일해야 산다. 짤리면 끝장이다. 항시 불안하다. 인생에 재미와 열정을 더하기보다 세상에 더 많이 지배당한다. 재미, 열정, 삶의 애착이 사라진다. 머리가 텅텅 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노동자의 삶이 그렇고 공부하는 대학생의 삶이 그렇다. 수동에 빠져 살아가는 삶은 누가 보든지 흥겹지 않다. 일자리 걱정, 취업 걱정에 한치 앞도 볼 수 없다. 재미와 열정을 더하는 삶을 살아갈 마음의 여유가 없다. 살아남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에, 청년실업에 자존감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끝내 자살한다. 능동적 삶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을 위협하는 위기의 한국사회에서 비명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는다. 수동에 빠져 숨죽여 살아가는 삶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 전까지는 우리 사회의 위기를 남의 집 불구경 하듯 한다. 위기에 응전하여 함께 술렁거리지 않는다. 나약해진다. 배짱이 없기에 맞서지 않는다. 생계 걱정에 혼자 끙끙 앓으며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민감해진다. 생사여탈권을 자본권력에 넘겨주고 자본의 이윤논리, 경쟁논리에 복종한다. 자본에 아부하고 자본의 논리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피도 눈물도 상식도 없는 세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삶을 길들이는 지배 권력에 복종하여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살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경쟁의 낙오자가 되어 솎아지게 된다. 솎아내기에 걸려서도 뭇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체면을 따지다 대들지 못한다. 인생의 위기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 자포자기하고 만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구조조정의 위기상황에서 노동자는 능동적 삶을 복원해야 한다. 제121주년 세계 노동절인 지난 5월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대학생들이 등록금 인하와 임금 인상등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배짱은 가장 튼실한 유도책이다. 눈치보고 체면을 따지고 더욱 움츠려들어 자본에 사정을 해서야 자본의 솎아내기를 당할 수 없다. 자본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잃어버렸던 배짱을 회복해야 한다. 경쟁을 위해 이윤을 좇아 노동자를 솎아 노동자를 갈라놓는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유능치 못해 솎아진 것으로 자책하면 아무 것도 할 게 없다.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노동 전체의 이해관계에 민감해져야 한다. 실리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투쟁과 협상에서 자본권력의 기망과 회유, 탄압을 극복하기 위해 꼭 지녀야 하는 태도이다. 그것이 순응하는 삶에 빠져 상처받은 자존감을 살려내는 길이다. 노동자의 능동적 삶은 노동이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한국사회를 이루기 위한 대안이다. 노동자가 위기의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한 일에 열정을 갖고 대안사회의 상을 좇아 지혜를 닦고 힘을 길러야 한다. 능동적 삶은 인간의 본성에 꼭 맞다. 배짱과 열정, 대의와 지혜를 가진 우리들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수동적 삶을 거부하고 능동적 삶의 실현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장애물을 곳곳에서 제거할 것이다. 치솟는 등록금, 청년실업에 신음하는 청년학생들의 능동적 삶은 누가 복원해 줄 것인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생의 위기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어 자살하는 수많은 한국인들을 위해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따뜻하게 감싸 줄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과 함께 배짱 갖고 세상에 맞서고 싶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06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선가 헤겔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들은 말하자면 두 번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에게는 클리셰나 다름없는 마르크스의 아포리즘이 요즘 부쩍 자주 눈에 띈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가리타니 고진 같은 이름난 사상가들의 글을 통해서. 이런 현상은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자본론>이 다시 유행한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세기를 들끓게 했던 현실 사회주의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은 뒤 세계를 제패한 듯 기고만장하던 신자유주의가 허망한 실체를 드러내자,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는 원전으로서 마르크스가 다시 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인용한 이유는 나폴레옹 1세와 3세가 노정한 역사적 아이러니의 반복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민중들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되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848년 혁명이 나폴레옹 가문의 전제정치로 귀결되고만 아이러니 말이다. 마르크스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당통 대신에 코시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이, 1793~1795년까지의 산악당(몽타뉴파) 대신에 1848~1851년까지의 산악당이, 삼촌 대신에 조카가.” 여기서 삼촌은 나폴레옹 1세, 조카는 나폴레옹 3세를 말한다. 나폴레옹 3세, 그러니까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1832년 사촌인 라이히슈타트 공작(나폴레옹 1세의 외아들)이 죽자 보나파르트 가문에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라고 생각하고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1848년 혁명 뒤 수립된 공화정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데뷔한다. 이어 대통령 선거에 나서 옛 황제의 조카라는 혈통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각계각층의 국민들에게 그들의 이익을 모두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에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헌법을 바꿔 스스로 황제가 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뒤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1세의 반복이었다. 가리타니 고진은 <역사의 반복>에서 황제로서 보나파르트의 정책은 그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찬 것이었다고 단정한다. 보나파르트는 본질적으로는 보호주의자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생시몽주의자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모든 계급의 이익을 모두 만족시킬 것처럼 선전했다. 중간계급과 농민들에게는 질서와 번영을, 빈곤층에게는 복지를 약속했다. 빵값을 낮게 유지했고 위생적인 노동자주택을 건설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 쓴 소책자 가운데 <빈곤의 퇴치>(1844년)는 좌파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1930년대에 독일이나 일본에서 파시즘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보나파르트주의의 한 양상으로 보는 게 좋다. 우에서 좌까지 모든 당파, 계급, 민족의 지지를 모은 루즈벨트 대통령은 보나파르트주의자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2대 정당이라는 구조를 파괴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경제를 희생시키는 시장자유화인가 그것에 대한 보호인가 하는 대립은 눈앞에 놓인 최대의 정치적 쟁점 중 하나였다. 그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처럼 행동하는 정치가는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해도 좋다. 물론 그것이 항상 파시스트인 것은 아니다.”(가리타니 고진 <역사의 반복>) 파시즘을 보나파르티즘의 한 갈래로 보는 시각이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의 집권 과정과 통치 스타일은 히틀러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먼저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국민투표를 거쳐 합법적인 독재자가 된 점이 그러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왕을 추방하고, 좌익혁명이 유산된 후에 생긴 바이마르공화국의 대표제 속에서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국민투표를 통해 총통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루이 보나파르트가 황제가 되었던 과정과 상동 적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며,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때로 그것을 조작하기도 하는 것이 파시즘과 보나파르티즘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보나파르트가 삼촌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가리타니 고진은 파시즘이라는 개념의 재정립 필요성을 제기한다. “일반적으로 전제적인 정치형태를 파시즘이라” 부르고 있는데 “그와 같은 용법은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유해하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이렇게 왜소화시키면 “파시즘이 가지고 있는 어떤 매력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중략)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시즘은 러시아혁명(사회주의)의 침투에 대한 대항혁명(counter-revolution)이다. 그것은 반혁명(anti-revolution)과는 다르다. 파시즘은 그 자체가 혁명적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흡인력이 있는 것이다.”(같은 책) 설명이 장황했지만, 누가 떠오르지 않으시는지. 보나파르트가 삼촌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던 것처럼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를 시작했다.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1세 시절의 영광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콘이었듯이, 박근혜는 박정희 시대의 고성장과 번영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향수의 아이콘이다. 보나파르트가 자신을 모든 계급의 대변자, 갈등의 중재자인 것처럼 포장했듯이, 박근혜는 신뢰와 복지를 내세우며 만인의 연인 같은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박근혜는 노련하다. DJ와 YS이후 사라진 ‘정치9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유일한 현역 정치인이다. 최대한 말을 자제하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의 정치를 통해 어눌한 캐릭터의 단점을 극복할 만큼 영리하며, 진보진영의 독점 테마였던 복지 이슈를 선점할 만큼 과감하다. 복지 이슈에서 여전히 방어적인 조중동과 경제 관료들, 전경련 등이 무안해 할 정도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결정적 순간에 일침을 놓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극대화한다. 누군가는 박근혜 주변 인사들이야말로 정통 TK(대구경북)들이어서 이명박 정부보다 훨씬 더 말 안 되는 사람이 많다고 전한다. 박근혜가 집권하면 이명박 정부보다 문제가 많은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걱정이다. 돌이켜보면,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으로 계승된 대한민국 수구정당의 역사가 YS의 민주계를 수혈한 신한국당부터는 족보가 꼬이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이재오나 김문수, 박형준 같은 변절한 운동권들이 주류를 차지한 이명박 정권은 더욱 이질적인 집단이 되었다. 이른바 친박이 친이와 쉽게 동화되지 않는 이유는 박근혜라는 아이콘과 더불어 자신들이 정통 티케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정통 티케이가 보기에 영포라인은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이른바 정통 티케이가 정권을 놓친 지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간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들은 오래 굶었다. 지금 우리는 박근혜라는 한국의 보나파르트를 통해 역사의 반복을 목도하고 있다. 박정희라는 비극에 이어 박근혜라는 희극을.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34 | 추천: 1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승만 대통령의 유족들이 51년 만에 4.19희생자들에게 사죄를 드린다며 성명을 발표하더니, 4월 19일에는 묘소에 참배를 시도하다가 4.19유족들에게 제지당했다고 한다. 민주정신의 총체적 결손을 절감하는 이 시대에 이승만의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뜬금없이 이렇게 한 연유가 궁금해졌다. 오래도록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사죄의 감정을 때가 되어 표현하였다고는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4.19 희생자들의 혼령을 필요하게 되었을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유족들은 “제주 4.3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선포한 계엄령이 불법적”이라고 보도한 <제민일보>가 대통령과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송을 제기하였다. 실제로 당시 대한민국 헌법은 계엄령을 법률에 따라 선포하도록 하였는데도 계엄법을 제정하지 않는 가운데 계엄령을 선포했기 때문에 제민일보의 보도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제 이승만의 유족과 관련단체들이 사죄하기 전에 제주에서 민간인학살, 한국전쟁 중 민간인학살, 사사오입개헌, 조봉암 등 정적에 대한 사법살해, 부정선거와 4.19혁명 등에 대하여 공적으로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물론 유족들과 관련단체의 견해가 어찌되었든 간에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이고 공적인 평가가 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유족들의 사죄와 참배가 사망한 정치인의 오명을 털고 뭔가를 시도하기 위한 사과정치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정치인으로서 행적으로 충분한 것이지, 유족들의 소급적 참회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정치인으로서 참다운 명예와 평판은 어디에서 올까? 미국의 대통령 워싱턴(G. Washington)이나 로마 공화정의 정치인 킨키나투스(Cincinatus)의 예를 통해 분명해진다. 나아감과 물러섬의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를 이론적으로 풀어냈다. 그에 따르면 행복한 삶이란 정치적 삶(bios politikos)과 관조적 삶(bios theoretikos)의 조화이다. 정치적 삶이란 공동체 속에서 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최고로 발휘하는 실천적 생애를 말하고, 관조적 삶은 이러한 실천적 삶으로부터 제때에 물러나와 삶을 원리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좋은 삶이라는 이러한 두 측면의 조화로운 결합이다. 세상에 나가는 것과 물러나 안빈낙도하는 것, 끝내는 신선(神仙)이 된다는 동양의 철학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공과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고향으로 복귀하는 워싱턴이나 킨키나투스는 좋은 삶에 대한 귀감이 된 것이다. 4·19혁명 51돌을 맞은 지난 19일 오전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 유영봉안소 사진 출처 - 한겨레 존경과 명예는 억지로 얻을 수 없다. 물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권력을 영원히 보유하기 위해 그는 정상에서 하산하는 일을 잊고 ‘공그리’를 치다가 마침내 전제자로 전락했다. 그는 단지 대통령을 오래하다 퇴진의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다.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갖은 헌정파괴와 인권침해를 저질렀으며, 그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도 없다. 그가 시작한 나쁜 통치는 한국현대사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쿠데타와 폭정의 길잡이가 되었다. 오래되었다고 해서, 처음이라고 해서 적당히 기념할 수는 없다. 사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상호성을 의미한다. 물론 희생자가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가해자 측은 사죄를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사죄의 진정성이다. 진정성이 담긴 사죄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향한 공적인 동조를 지속적으로 표방한다면 완강한 피해자들조차 사죄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정황을 보면 진정한 사죄라기보다는 가해자의 명예를 위한 조건부 사죄와 같다. 유족들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사죄를 기대해본다. 그러면 4.19유족이 사죄의 뜻에 공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승만 유족과 4.19유족간의 사죄와 용서는 다분히 사적인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이 문제를 국민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차원에서 공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민주적 헌정을 유린한 독재자에 대한 미움은 단지 관련자들의 관련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증오가 아니라 공화국의 정신적 토대로서 애국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객관적 미움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들은 바로 공화국의 주춧돌을 뽑아버리는 것과 같다. 이 땅에 헌정유린자들의 동상을 세우고 기념하는 일은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객관적 미움을 보존하는 방책을 세워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24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프랑스의 사상가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명저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경쟁’이다. 경쟁은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고 사람들이 어떤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모여 즐기던 가위바위보 게임에서부터 엄청난 수익이 오고가는 프로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경쟁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놀이는 거의 없다. 경쟁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두 팀 간의 우열을 가리는 단순한 청백전식 경쟁도 있고 퀴즈처럼 여러 명 가운데 한 사람의 승자를 가리는 경쟁도 있다. 최근 들어 가장 각광받는 경쟁의 유형은 서바이벌이라는 것이다. TV는 온통 서바이벌 경쟁을 내건 오락물로 넘쳐난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가릴 것 없이 조금만 채널을 돌리다 보면 노래, 패션, 요리, 심지어 다이어트까지 서바이벌 경쟁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공중파 채널은 아예 신입사원을 뽑는 과정을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들어 내보내고 있다. 서바이벌은 글자 그대로 생존을 건 경쟁이다. 그 판에서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는 것, 그러니까 매 회 탈락자가 되지 않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다. 서바이벌 경쟁 게임은 한국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현실적 생존 방식과 너무나 유사하다. 우리는 하루하루 서바이벌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어려서는 좋은 성적을 얻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취업을 위해, 취업한 후에는 승진하고 살아남기 위해 경쟁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서바이벌 경쟁은 더욱 치열하고 무자비해졌다. 웬만큼 좋은 대학을 가도, 웬만큼 좋은 직장을 얻어도 끝까지 생존하리라 예측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삶이 불확실해질수록 서바이벌은 어려워지고 경쟁은 뜨거워진다. 그럴수록 사회는 벌거벗은 욕망들이 적나라하게 사투를 벌이는 정글로 변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정글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벗어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따라서 어떡하든 생존하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TV는 온통 서바이벌 경쟁을 내건 프로그램들로 넘쳐나고 있다. 현재 방송되고 있거나 준비 중인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TV의 서바이벌 게임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광은 바로 그런 이중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대한 열광 속에는, 경쟁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어떡하든 그 게임에서 이겨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이 모순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TV를 통해 보는 서바이벌 게임은 시청자들에게 가상의 게임일 뿐이다. TV밖에서 그것을 보는 우리는 그 잔인한 서바이벌의 룰로부터 벗어나 있다. 우리는 그저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 벌이는 무자비한 서바이벌 게임을 관전할 뿐이다. 누군가가 거기서 탈락하고 패배한다고 해도 그게 나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그건 게임일 뿐이고 나는 그로부터 벗어나 그걸 안전하게 지켜볼 수 있다. 내 문제가 아닌 한 서바이벌 게임도 재밌는 볼거리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게임 속의 현실은 나의 현실과 닮아 있다. 거기서 벌어지는 탈락은 언젠가 나의 현실에서도 재현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TV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 속에서 현실과 유사한 공포를 느끼고 거기서 탈락한 패배자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이 TV의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공정한 룰이 적용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모든 게임은 공정한 룰을 전제로 하지만 현실의 게임에서 공정한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의 불확실성은 그런 룰이 언제 어떻게 불공정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TV의 서바이벌 게임이라면 당연히 정확하고 공정한 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현실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게임의 룰이 적어도 TV 쇼에서만큼은 정확히 작동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깨어질 때 시청자들은 분노하게 된다. <나는 가수다>에서 첫 번째 탈락자인 김건모를 탈락시키지 않고 재도전의 기회를 준다고 했을 때 엄청난 비난이 쏟아진 건 그 때문이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는 TV 서바이벌 게임에서 룰이 깨진 것이다. <나는 가수다>에 쏟아진 시청자들의 비난에는 공정한 게임의 룰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분노가 투영되어 있다. 탈법과 비리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대기업, 국민과의 약속 따위는 우습게 여기며 부자와 강자만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정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는 사법부 등 현실에서 공정한 게임의 룰이 훼손되는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그런 불공정 게임의 장이 되고 보니 그에 대한 분노는 대상도 불분명하고 구체적이지도 않으며 공허한 느낌을 준다. 그렇게 무정형적으로 쌓인 분노가 <나는 가수다>라는 아주 구체적인 대상을 향해 폭발한 것이다. <나는 가수다>에 비난이 쏟아질 때, 공정 사회를 유린하는 권력집단에는 분노하지 않고 한갓 예능 프로그램에만 분노를 터뜨린다는 힐난도 있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지만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비난하고 비판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TV 속의 가상현실에서라도 공정성이 실현되는 걸 보고 싶었던 거다. 어쨌거나 숨 막히는 서바이벌 경쟁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이 TV 속의 서바이벌 게임에 열광하는 풍경은 어쩐지 씁쓸하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25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깔려서, 이어 닥친 쓰나미에 쓸려가 죽었다. 곧이어 원자력 발전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많은 사람이 방사능에 피폭되고, 인근 주민들은 생활터전을 버려두고 대피했다. 방사능 물질에 대한 걱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빠져나갔다. 한국도 위험하다며 한국을 떠나는 외국인도 있다. 한국 상공으로는 날아들지 않을 것이라던 방사능 물질들이 전국에서 검출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직접적인 방사능 위험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도 이래나 저래나 한국에서 떠나기 어렵다. 한국의 원전은 지금도 계속 건설 중이고, 해외로도 수출하고 있다. 구제역으로 전국에서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살처분을 받았고, 산채로 땅에 매장됐다. 버스에서는 구제역 종식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구제역은 인체에 무해하므로 육류 소비에 안심해도 된다는 광고가 흐른다. 침출수는 언제 누출될지 모르고 우리가 먹는 식수와 지하수에 언제 침출수가 흘러 들어갈지 모르며 돈을 내고 받아든 생수병의 물이 과연 안전한지 걱정한다. 오래 전 조류인플루엔자가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았듯 지금 구제역도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과 조류가 같은 공간에 있다 보면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을 것 같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옮겨지기도 하는 것처럼, 구제역은 정말 사람에게 옮겨지지 않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처분 된 가축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기간만 더 길 뿐 실은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육류를 위해 도살되는 가축과 살처분 된 가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나.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실태 조사보고에 의하면 응답자의 80%가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을, 52.3%가 외상후 스트레스성장애를 겪고 있다고 했다. 전체인력의 36%인 2,646명을 감원하겠다는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 계획에 반대하며 시작한 파업 과정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경찰의 폭압적인 진압으로 피를 흘리고, 파업이 끝난 지 1년 8개월이 지난 현재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노동자와 가족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 한겨레신문 ‘쌍용차 해고 노동자 짙어진 죽음의 그늘’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지난 2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청 앞뜰. 또래와 함께 뛰어놀던 6살배기 아이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 자원봉사자가 “위험해. 어서 내려와”라고 외치자 아이가 말했다. “싫어. 자살할거야.”, 라고 쌍용자동차 노동자 가족들의 모습을 전했다. 민주노총 전국금속산업노조 쌍용차지부 한 조합원이 지난 5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서’ 발표회 도중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얼마 전 대법원은 합법적인 파업이라도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사용자의 사업운영에 심대한 혼란 내지 막대한 손해를 초래하는 경우에는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합법적인 파업에 대해서는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해선 안 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로써 무력화됐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도 천정부지로 뛰어 오른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든 학생들, 학비 대출을 받아 어렵게 손에 졸업장을 받아들어도 자신을 받아줄 직장이 없는 현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는 언제 현실이 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위험. 치솟는 물가, 늘어가는 빚,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조용하고 말이 없다.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못 하지만 몸과 마음에 체화되어 있다. 고통이 내게 현실이 되는 때, 내가 저항하기 힘든 상황이 눈앞에 닥쳤을 때 비로소 공포는 육체를 얻는다. 가장 무서운 공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대하는 영화다. 주위의 사람들이 사라지고 언제 어떤 방식일지는 몰라도 나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부지불식간에 자신도 옆 사람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절망으로 바뀌고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구제역과 침출수의 공포, 방사능 공포,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미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로부터 내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공포다. 너무 익숙해서, 항상 그래왔으니까, 나만 아니면 어떻든지... 이미 제한되고 제한된 파업이지만, 그나마 제한된 절차에 따라 인간답게 살자며 시작하는 파업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엄혹한 현실. 하지만 모른다. 나만 아니면 되고, 우리 사회는 항상 그 정도였고, 법원이 자본의 편인 것은 너무 익숙하니까. 꽃이 피는 봄이 왔는데, 나무에 핀 꽃을 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자살을 떠올리며 나무를 오르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09 | 추천: 0
도재형/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3월 17일 대법원은 파업권에 관한 중요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하였다(대법원 2011. 3. 17 선고 2007도482 판결).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근로자는 기본권으로서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그러므로 파업이 언제나 업무방해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사용자의 사업운영에 심대한 혼란 내지 막대한 손해를 초래하는 등으로 사용자의 사업 계속에 관한 자유의사가 제압·혼란될 수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경우에 비로소 그 집단적 노무제공의 거부가 위력에 해당하여 업무방해죄가 성립한다’고 판시하였다. 위 내용만으로는 대법원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 판결로 인해 폐기된 종전 판례를 살펴보면 파업에 대한 법원의 입장이 어떻게 변경되었는지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래 법원은 단순 파업과 같이 단지 근로자들이 집단적으로 노무 제공을 거부한 행위도 위력(威力)에 해당하므로, 원칙적으로 형법상 업무방해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보았다(대법원 1996. 5. 10. 선고 96도419 판결). 위와 같은 판례 법리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인 1991년경부터 대법원은, 근로자들이 아무런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순히 노무 제공을 집단적으로 거부한 행위 그 자체가 업무방해죄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개발하고선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활발해진 노동조합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것은 또한 파업을 사회적으로 유해한 현상으로 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법원이 단순 파업도 원칙적으로 형법상 범죄로 취급한다는 것은 파업을 마치 절도나 강도 등의 행위와 동등하게 취급하겠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종전 판례는 18세기 혹은 19세기 유럽의 단결 금지 법리와 다름없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리고 이 판결에서 대법원이 폐기시킨 법리는 바로 ‘단순 파업도 범죄다’라는 그 단결 금지 법리의 기초 중 일부이다. 종전 판례 법리와 이론상 대칭점에 설 수 있는 것은 ‘단순 파업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법리일 것이다. 이 판결은 “근로자는 […] 원칙적으로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으로서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헌법 제33조 제1항).”고 전제하며 이 점을 분명히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판결문에 헌법 제33조 제1항이 인용된 것을 보고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파업과 관련된 종전의 대법원 판결문에서는 헌법 제33조 제1항은 거의 인용되지 않았고, 인용된 경우에도 그것은 쟁의행위 금지 규정에 대한 위헌 주장을 기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법이 파업권을 보장한 나라의 법률가가, 법원이 근로자의 파업권을 인정하는 근거로서 헌법 조항을 든 것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근로자들이 헌법상 기본권인 파업권을 집단적으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범죄자로 취급되었다는 점(이는 마치 근로자들이 집단적으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고 범죄자로 취급받는 것과 동일하다)을 감안한다면, 이런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4일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린 '업무방해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긴급 토론회 모습 이 판결이 선고된 이후, 일각에서는 그로 인해 노사관계의 리스크가 커졌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011. 3. 18.자 문화일보 사설). 그러나 이것은 판결의 취지를 오해한 것이다. 이 판결은 기업에게 더 이상 단순 파업을 핑계 삼아 형사법을 이용해 근로자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시그널을 준 것이다. 만약 단순 파업에 대해 형벌 조항을 적용하려고 한다면, 그 위험 부담은 이를 주장하는 자가 져야 한다는 점을 천명한 것이다. 이는 형사법의 일반 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부합한다. 만약 잘못된 관행이나 판례를 수정하는 것이 리스크를 키우고 부정의(不正義)하다는 논리라면, 그것은 법원의 역할이나 기능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판결의 반대의견 및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법리적으로 볼 때 이 판결에 대해 종전 단결 금지의 판례 법리를 완전히 벗어났다거나 법 원칙에 부합한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이 한국의 노사 현실이 19세기 단결 금지 법리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판결을 계기로 대법원은 ‘파업이 사회적으로 유해한 현상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21세기 한국의 대법원이, 늦었지만, 19세기적 시민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을 뗀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판결이 노사관계에서도 일반 법 원리(죄형법정주의)가 적용되는 기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사 현실에서 파업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좋은 것일 때도 있고, 나쁜 것일 때도 있다. 이는 마치 좋은 사용자와 함께 나쁜 사용자가 있고, 좋은 노동조합과 함께 나쁜 노동조합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상사가 모든 그런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한 나라의 법률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그 국가는 불행해진다. 법률이 좋은 것을 좋게 평가하고, 그것이 시장에서 온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만 그 국가 역시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 오늘날까지 한국 법원은 노사관계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단지 기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기업도 노사관계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고, 단지 노동조합의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근로자의 노동 기본권은 박탈당했다. 이로 인해 노사관계에서는 좋은 기업과 노동조합이 바보로 취급되는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판결은 노사관계에도 위와 같은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최초로 천명한 것이다. 즉 ‘파업이므로 폭력적이고 나쁜 사회적 현상인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나쁜 파업이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 우리가 법과대학에서 배우던 헌법과 형법의 여러 기본 원칙(사실상 굳이 배우지 않더라도 이미 시민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지키는 것이다)들이 노사관계에 적용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한편,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강고해 보이는 판례 법리 하에서 개별 변호사가 그에 반대되는 논리를 재판에서 변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때때로 비관적인 피고인을 설득해야 하고, 때로는 법관이나 검사의 냉소적 자세를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자신이 들이는 시간과 노력 등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노동 사건에서 단순 파업에 참가한 근로자들의 무죄를 주장했던 여러 변호사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참고) - 이 글은 2011. 3. 24. 민주노총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공동 개최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긴급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70 | 추천: 0
김대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느덧 1년여 시간이 지난 일본생활, 지진도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지난 3월 11일 금요일 오후 2시 반경, 70 넘은 어르신들도 처음이라는 정도의 강진을 직접 겪었다. 100여년 된 낡은 목조건물 2층인 사무실에서 경험한 ‘동일본대지진’은 공포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똑바로 서있기조차 힘든 흔들림에 어찌 대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일단 배운대로 책상 밑으로 들어갔으나, 책장의 책과 천정 내장재가 떨어지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무작정 뛰쳐나왔다. 어찌나 놀랐는지 팔다리가 떨렸다. 진도 9.0, 최고 높이 23.6m의 쓰나미. 진앙지에서 가장 가까웠던 동북지역의 피해상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한동안 복구는커녕 피해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동경은 피해지역으로부터 24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진도 5.0이상의 여진만도 그날 이후 열흘 동안에 300회 이상 발생했다고 한다. 지금도 잠시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 위험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무엇 하나 어찌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쓰나미의 여파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까지 발생.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1-4호기가 폭발하고 도쿄 수돗물에서 기준치 이상의 방사능물질이 검출되었다. 이에 대한 공포로 많은 외국인들이 귀국했으며, 대부분의 학교는 여진에 대한 우려와 전력난에 따라 일시 휴업뒤 졸업식 및 입학식을 포함한 모든 공식행사를 취소하고 신학기 수업개시를 1개월 연기하는 등 정상화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듯하다. 지금 일본 텔레비전에서는 ‘하나가 되자. 일본’이라는 광고가 수시로 나오고 있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발표한 적 없고, 그저 이미 드러난 사실들에 대해서 해명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정부가 뒤늦게나마 언제 터질지 모를 국민들의 불만을 애국심에 호소하는 뻔 한 의도인데, 어이없는 것은 누구도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가 지진이나 쓰나미 때문이 아니라, 인간문명의 이기인 원전 때문이며, 더구나 자본의 손익계산으로 초기대응의 실패로 위험이 더욱 커졌음이 자명한데도 어디에서도 분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후쿠시마 제1원전은 일본이 지진대비에 완벽할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와 달리 설계단계부터 대지진과 쓰나미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철저히 무시되었다고 한다. 가동기한 역시 무시된 채 연장가동 중이었으며, 정상 보관량의 3배 이상의 폐연료봉을 차폐용기 없이 수조에 보관해 위험을 더 키웠다고도 한다. 또한 사고 이후 초기대응 과정에서도 원자로를 계속 사용하고자 하는 전력회사 측의 욕심 때문에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었다고 한다. 원자로 건물이 폭발하여 철골이 앙상한 상황 앞에서도, 자위대까지 동원하여 헬기와 소방차로 바닷물을 퍼부으면서도, 원전근무 직원들 대부분이 대피한 상황에서도, 바닷물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었다고 보도하면서도, 원전 인근지역 재배 야채출하를 금지시키면서도, 동경 수돗물에서 기준치 이상의 요오드가 검출된 지경에 이르러서도, 일본정부는 인체에 직접적인 피해가 있을 정도는 아니라며 외국 매스컴의 호들갑을 원망했다. 최첨단 시설인 원자로의 열을 낮추기 위한 방법이 기껏 헬기와 소방차를 이용해 바닷물 퍼붓기라니... 도무지 난 우스워 죽겠는데 매스컴은 너무도 태연하고 진지하게 보도한다. 아프리카 사막 한 가운데도 아니고 세계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사고 열흘이 지나서야 외부에서 전선을 끌어 전력을 복구했다며 만세를 부르는 데에는 아연실색하여 웃지도 못했다. 모든 시민이 2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사기 위해 수퍼 앞에 줄을 서 있는데, 동경 시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수돗물을 마시는 보도를 보고는 구토를 억눌러야 했을 정도다. 정말 수돗물이었을까 의심하면서. 우리는 지금 큰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핵의 평화적인 사용?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사고만 나지 않으면 안전하다? 사고가 나면? 기존 원전에 대한 관리도 의문투성이인데 원전을 폐쇄한 뒤에는? 몇 년을 보관해야 안전해지는지 모를 핵폐기물은? 사람보다 돈을 우선하는 기업에 우리 생명을 저당잡힌채 신뢰 운운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이다. 지금까지 원전관련 사고는 다른 나라도 아닌 과학과 기술이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소련에서 일어났다. 지금도 원전이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미 신화는 거짓임이 드러났는데, 그래도 우리만은 안전할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으로 살아가도 괜찮은 것일까? 나는 지금 자본주의 대국 일본에서, 사기업화 되어버린 전력회사의 이익추구 앞에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자본과 몰염치한 권력 앞에서, 대자연의 재앙보다 더 큰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실은 인류사회 전체가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해 온 결과이기에 그들만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것도 아닌 미래를 이렇게 저당잡힌채 탕진할 수만은 없는 일. 더 늦기 전에 덜 풍요하더라도 이런 공포와 불안을 안은 채 살아가지 않아도 될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 성서에는 예수를 만나 눈을 뜨게 되는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애초 눈을 뜨리라는 희망은 가져본 적도 없이 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고 있던 그가, 예수를 만나 눈을 뜨고 세상을 바로 보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바로 눈을 뜨고 있는 시각장애인이 아닐까? 눈앞에 놓인 현실을 보지 못하고,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고, 드러난 것까지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무력함을 처절하게 깨닫게 해 준 자연의 재앙이지만, 바로 이 재앙이 우리에게 눈 뜰 것을 요구한다.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타산지석 운운하며 안전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당장의 편안한 삶을 위해 후손들의 목숨을 저당 잡은 채 살아서는 안 될 일이다. 김대원 위원은 성공회 신부로 일본 릿교대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30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서울에 소재한 각 학교에서는 교과부에서 하달한 공문에 의해 성과급 지급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여 며칠 전에 그 결과를 교사 개인에게 틍보하였다. 교사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는 이유는 근무성적, 업무실적 등이 우수한 사람에게 성과상여금을 지급함으로써 교사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교사간의 경쟁을 유도하여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과급 지급이 교과부가 도모하고자한 목적을 달성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결과나 과정이 민주적이지도 않으며 공문의 절차대로 시행하되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과연 성과급이 교육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제도로 이는 교육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송파구 소재 P초등학교의 사례를 빌어 학교 현장에서 이 제도가 어떤 식으로 시행이 되는 지 말하고자 한다. P초등학교는 공립학교이고 공립학교 소속 교사들은 5년마다 학교를 옮겨 근무하는데 P교는 이에 따라 내게 전근무교가 되었다. 그러나 성과급은 지난해 성과에 대한 것이 되므로 그 대상은 전년도에 근무한 교사들이고 성과급 지급을 위한 절차는 부득이하게 전에 근무한 학교에서 절차를 밟아 진행한다. 그 절차를 살펴보면 전체 교사회의를 개최하여 성과급 지급에 대한 연수를 실시하고 심사위원회를 그 자리에서 구성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전체 교사회의는 개최되지도 않았고 공문에서 제시한 절차는 이행되지 않았다. 결국 2차 회의까지 진행되어 모든 원칙이 결정된 후 메일로만 그 결과가 고지되었다.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였고 요구에 의해 전체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사전에 어떠한 관련 연수도 진행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도 다수의 부장들과 의견을 표명하기 어려운 1~2명의 교사들로 구성한 후 부장들에게 유리하도록 지급 원칙을 정해버렸다. 지급원칙 또한 가관이었다. 기존에 없던 교장이 줄 수 있는 점수를 10% 부여하였고 일반교사와 부장교사와의 점수 차를 두어서 부장교사에 대한 점수의 치우침을 심화시켰다. 다른 항목에서 주는 점수차가 작은데 부장교사들에게 이 두 가지 점수를 부여함으로써 부장들은 최고 등급을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원칙결정 의견 수렴과정에서도 일반 교사들은 배제되어 성과급 지급절차는 객관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게 진행되어 버렸다. 이 책임은 절차를 공정하게 진행해야하는 교장과 교감, 그리고 심사기준을 만든 심의위원들일 것이다. 그러나 절차를 어겨가며 진행한 것에 대하여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은 없이 그 잘못을 저지른 심사위원들을 그대로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는 모습을 보고 사전에 관련 대책회의를 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교사들 또한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되어 학교의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2월 10일 2011년 교육공무원 성과상여금 지급 방안을 확정해 발표하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P초등학교의 성과급 지급사례와 같이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학교사회를 얼마나 무기력하고 비민주적이며 억압적 학교문화를 만들어 내는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교장은 부장에게 자신의 뜻을 받들도록 요구하고 부장들은 교장의 요구를 충실하게 수행하며 대신 성과급에서처럼 그 대가를 받는 구조! 교사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자유로운 의견개진을 통제하는 문화가 지배적인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에게 창의적이고 민주적인 교육을 기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특히 올해부터는 성과급을 ‘개인 성과급’과 ‘학교 성과급’으로 이원화하여 지급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 또한 문제가 많다. 애초에 학교에 입학할 때 학구에 의해 자동 배정되도록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고려 없이 초등의 경우 그저 눈에 보이는 방과 후 참여율과 돌봄 교실 이용율 등을 반영하여 결정하도록 하고 있고 중고교의 경우 학업성취도 평가점수 등에 의하여 결정하도록 되어 있어 교육부가 학교 교육을 어떤 방향으로 몰아가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의견에 대하여 단순히 배정을 하는데 어떤 기준을 따로 마련하자는 말이 나올까 염려되지만, 교육의 질은 단순하게 성과급 지급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교육의 질은 우수한 교사의 확보와 교육의 콘텐츠(내용), 그리고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환경과 시스템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수한 교사의 확보는 교육의 성과를 가늠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나마 원칙대로 진행되지도 않는 차등성과급의 지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사의 끊임없는 교육에 대한 고민을 통해 질 좋은 연수를 받아 그 내용이 학생들에게 피드백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이제라도 가치와 철학을 담은 교육의 특성을 알고 학교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여 정책을 이행하기를 바란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28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분명히 길은 외통수였다. 궁(漢)이 피 할 곳은 없었으며 사(士)는 오히려 궁의 길을 막아 멀찍이 장기판의 중앙부에 건재한 상(象)이 성큼 건너뛰어 장군을 치면 게임 끝나는 판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청계천 고가 밑에서 웅성거리던 구경꾼들은 죄다 “내가 돈만 있으면 한번 질러버리고 말지”하는 눈치였고 막수 장기판(판을 마무리 짓는 듯한 막판수를 놓고 손님을 유혹하는 야바위의 일종)을 벌려놓은 눈 째지고 이빨 빠진, 한눈에도 꽤나 성질 더러울 것 같은 장기꾼은 입에 가득한 침 튀기며 “자~자. 돈 놓고 돈 먹기. 돈 놓고 돈 먹기. 이기실분 돈 걸어. 딱 열 배 열 배 드립니다”를 외쳐댔다. 내 옆에서 누군가가 “워미~저거 저 뻔헌거~”라며 귓속말을 흘렸을 때 이미 나는 헌책방을 뒤져 찜해주었던 대입 참고서 살돈을 그야말로 지르고 있었다. 막판 한수에 실패하고 꼬깃한 재수생의 천금 만원이 그치의 돈 통에 들어가는 순간 “이런 야바위꾼~”을 외치려는 내 허리께로 금속성의 섬뜩한 무언가가 닿았고 잘 훈련된 병사 같은 구경꾼들은 순식간에 나를 일행으로부터 서너발 쯤의 거리로 내 몰았다. 그때 처음으로 든 생각은 “저 새끼가 내 돈을 빼앗았다”였다. 그 뒤로 한 몇 달 나는 빼앗기는 꿈을 자주 꾸었다. 실제로는 가진 게 별게 없었으나 꿈에서의 나는 꽤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어있었는데 털리는 꿈을 꾸는 새벽엔 제법 헛소리까지 하곤 했던 모양이다. ‘책은 뺏지마. 책은 뺏지마...“ 몇 년 전 내가 사는 집 옆의 교회가 이사를 가고 그 터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지반 정리가 끝나고 교회 첨탑을 허무는 공사를 진행 하던 중 굴삭기가 넘어져 인부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당시 9시뉴스에도 보도가 되었으니 꽤 큰 사고였던 셈이다. 그날 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밤새도록 악에 받쳐 울어대는 한 여인의 통곡소리를 들었다. 잠에 뒤척이며 귀도 막아봤지만 그 여인의 가슴을 치는 통곡이 나의 두근대는 심장에 송곳으로 전이(轉移) 되어 한번 씩 심장이 뛸 때 마다 쿡쿡 온몸이 쑤셔왔다. 천문학적인 액수를 챙기고 다른 곳에 터를 잡은 교회는 이전보다 몇 배의 성도를 자랑하는 대형교회가 되었고 안전하게 분양을 끝낸 건설사는 안전하게 이익금을 챙겨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입주한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한 노동자의 죽음을 깔고 살게 되었는데 아무도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내게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다. 누군가 기를 쓰고 돈 모아서 겨우 아파트 한 채 장만했다고 하면 축하한다는 말보다 먼저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등짐지고 떠난 가난의 기행을 생각하고 그럴듯한 고깃집 옆자리에서 아파트 몇 번 튀겼더니 몇 억쯤 생기더라는 모르는 아저씨의 주둥이를 엿들었을 때는 450만원 이주비 받고 철거반에 얻어터지며 쫒겨난 난곡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해병대 간 현빈이 좋다고 선전하는 3D입체 TV광고를 보고 있으면 저 물건 만들기 위해 목숨 바친 박지연이 생각나고 49제도 제대로 못치른 김주현이 떠올라 맘 아프다. 고 황유미씨의 4주기 기일인 지난 3월 6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이 날 추모문화제는 황씨 뿐 아니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사망한 46명의 노동자들을 함께 추모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내게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다. 제로섬(zero-sum)게임. 승패의 합계가 항상 일정한 일정합 게임(constant sum game)의 저열한 경쟁사회에서 나는 늘 경쟁의 뒤편에 있다. 내가 아는 사람과 내가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거의 패자에 속한다. 이 사람들은 외통수의 삶을 살고 있다. 겨우 하루를 살기위해 폐지를 줍거나 헤픈 청춘을 팔거나 죽음의 기운이 깃든 공장에 웃으면서 출근한다. 그것 말고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 이들의 가난은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에 차곡차곡 쌓여 거대한 부를 만들어 낸다. 빼앗긴 게 맞다. 이 시대 패자라 불리는 이들은 야바위꾼의 현란한 거짓말솜씨도 없고 거칠고 극악스런 표정도 짓지 못한다. 구경꾼을 가장한 같은 패거리의 완력도 없고 남의 것 빼앗고도 눈 하나 꿈쩍 하지 않는 인두껍도 없다. 한때 민중과 함께. 민중을 위해 살겠다던 치들조차 대부분은 거나한 자리에서 거들먹거릴 만큼의 승리를 누리며 살지만 민중이 되어 살겠다던 이들은 여전히 빼앗기는 다수가 되어 산다. 이 제로섬 게임의 사회에서 “저 새끼가 내 돈을 뺏아간다”고 외치며 산다. 봄꽃이 피는 이유는 언 땅이 녹았기 때문이고 바다가 푸른 이유는 갯벌의 수고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난한 이유는 누군가에게 부를 건넸기 때문이지만 내가 부자인 이유는 누군가의 부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조세희 선생의 일갈에 다시 모골이 송연해 지는 밤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이다. 바보 아니면 도둑”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11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