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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서상덕 위원)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4 10:06
조회
214

인간에 대한 예의
- 삶을 생각하며, 운동을 생각하며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반추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욕하거나 타박할 때나 쓰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란 말은 식자들 사이에서나 가까운 지인들 가운데서는 꽤나 파급력이 있는 말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나 또한 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적지 않다. 대체로 이런 기억들은 이제는 뇌리 속에서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옅어져버린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지금은 진부하게까지 들리는 ‘학생운동’이 살아(?) 있던 시절, 많은 이들이 그랬듯 나 또한 정의와 진리를 위해 기꺼이 투신하고 당연히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나는 이 시절 지금도 유일하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만든 선배 한 명을 만났다. 당시 한창 몸담고 있던 조직도, 한껏 기대를 받고 있던 그룹의 일원도 아니었던 그 선배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두 동생의 앞길마저 책임져야 하는, 누구 못지않게 어깨가 무거운 가장의 위치에 있었다. 과외에 아르바이트에, 이른바 돈 되는 일이라면 몸 안 사리고 닥치는 대로 일을 쫓아다니던 그 선배는 시위나 집회가 있는 날이면 언제 나타났는지 늘 군중들 맨 앞에 있었다. 지금 떠올려도 참 기이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 선배를 좋아하고 존경하게까지 된 것은 그의 정의감이나 성실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집회가 있는 날이면 그의 두세 평 남짓한 자취방은 시위꾼들의 뒤풀이 장소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 또한 그가 자처한 일이었다. 술집을 전전하며 울분을 토로하다 주머니까지 톡톡 털어낸 날이면 그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끌었다. 한 아름에 들어오는 조그만 냉장고 속까지 다 털어내고 나면 우리는 그대로 쓰러져 얼마 후면 닥칠 내일이 오길 기다렸다.

한 번은 후배들과 세미나를 마치고 몇 번이나 차수를 바꿔가며 술자리를 전전한 끝에 갈 곳이 없어 다시 선배의 자취방을 찾은 적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지만 이미 알고 있던 비밀번호로 열고 들어가 또 냉장고 속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던 선배는 기어이 냉장고가 완전히 드러난 새벽녘이 다 돼서야 들어왔다. 나였다면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 주인행세를 한 녀석들 혼꾸멍을 내줬을 법한데 선배는 오히려 방이 좁다며 미안해하며 그 추운 새벽, 자리를 피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먹었다. 나는 그 후로도 선배가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시위를 나갔다 온 날이면 술자리에서 눈물짓는 그를 간간이 보았을 뿐이다.

이런 선배가 있었는가 하면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합의와 투표로 결정된 결과마저 없었던 일로 돌려버린 선배가 있었다. 그 일로 많은 동료들이 자신이 품어왔던 이상에, 걸어왔던 삶에 회의를 느끼고 투신해오던 장을 떠나갔다. 그 가운데는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던 이들도 있었다. 또 한 번 눈물 날 일이었다.

이제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지켜온 가치, 자신의 삶은 고귀하며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은 값어치가 덜하거나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요즘 들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그런 이들은 대체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비인간적이란 사실을 모른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디까지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문제다. 그런 생각조차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지도층입네 하는 이들 가운데 적지 않다는 것이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병이다. 나아가 스스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는 친한 사이일 때나 지켜야 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서글픈 일이다.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가까운 이웃이, 이상을 함께 나눠왔던 동료가, 사랑하는 이들이 자기로 인해 상처를 입고 함께 나눠온 가치에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상대가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에 꼭 필요한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나눔, 진보, 발전, 생명, 믿음, 희망, 사랑…. 훌륭한 가치를 지닌 이 모든 것들 가운데 인간에 대한 예의가 들어 있지 않다면, 그래서 그토록 갈구하던 인간의 존엄성에 발길질을 해댄다면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의 삶 또한 허무해지리란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지금 나는 깨닫고 있다.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받고 싶은 대로 먼저 해주려 했던 선배의 마음, 그 마음과 실천을 닮아가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회복하는 길임을, 그래서 참다운 운동성을 되살려나가는 길임을….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