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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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윤다정/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5일, MBC의 장수 유아프로그램 ‘뽀뽀뽀’의 갑작스러운 폐지 소식을 전해 듣고 한쪽에 묻어 두었던 해묵은 기억들을 떠올렸다. ‘뽀뽀뽀’의 폐지를 아쉬워하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아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었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손을 흔드는 인형들은 고무줄이나 공깃돌 대신 연습장과 색연필을 벗 삼아 혼자 놀던 소심한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아침에는 밥숟갈을 입에 대충 밀어 넣으며 '뽀뽀뽀'나 'TV유치원 하나 둘 셋'에 넋을 빼 놓다가,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모면할 때가 되어서야 허겁지겁 책가방과 신주머니를 들고 집을 나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혼자서도 잘해요’나 ‘딩동댕 유치원’을 보았다. 전국적인 유행을 불러일으킨 ‘꼬꼬마 텔레토비’도 빼놓을 수 없다. 낮잠을 자다가 방송 시간을 놓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자, 알록달록한 차림을 한 채 춤추고 노래하던 TV 속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헤어져야만 했다. 이후 ‘뽀뽀뽀’나 ‘하나 둘 셋’이 자극적인 아침방송에 자리를 내어 주고, 어린이들 누구도 찾지 않을 만한 오후 시간대에 편성되면서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한다는 이야기가 간간이 전해져 왔다. 최근 MBC가 폐지는 결정한 '뽀뽀뽀 아이조아' 사진 출처 - 미디어스 이때까지는 그나마 숨은 붙어 있었기에,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MBC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자사의 대표 프로그램을 과감하게 ‘폐지’한다는 소식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 시청률 때문인 걸까. 김재철 사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이후 MBC가 자사의 인기 프로그램에 저질렀던 갖가지 만행을 곱씹자 입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문득 후속 프로그램을 소개한 기사의 한 구절에 시선이 머물렀다. ‘똑?똑! 키즈스쿨’이라는 제목이 절로 실소를 자아냈다. 이 프로그램이 주 시청자들인 아이들에게 즐거운 놀이 대신 공부를 권하리라는 것은 ‘TV를 통해 누구나 균등하게 영재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취지로 기획된 영•유아 영재 교육 프로그램’이라는 설명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서울YMCA 시청자시민운동본부 또한 6일 성명을 통해 “‘뽀뽀뽀’ 폐지를 통해 드러난 작금의 유아•어린이 프로그램에 대한 지상파 방송사의 인식은 개탄스러운 지경”이라며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엄마 아빠와 인사하고 친구들과 인사로 만나는 ‘뽀뽀뽀’의 사회적 맥락이 시류를 따라 영재교육으로 가게 된 것”이며, “가만 놔둬도 온 사회가 유아기부터 영재교육이 지나쳐 문제인데, 공영방송까지 ‘뽀뽀뽀’를 포기하고 영재교육에 나서겠다는 꼴”이라는 것이다. ‘영재교육 프로그램’의 주 시청자 층으로 설정된 ‘요즘 아이들’은 이와 같은 유아프로그램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정다운 친구’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하교 후 몇 군데나 되는 학원을 돌며 TV 앞에 앉을 시간조차 허락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은, 그나마 브라운관 너머에서 묵묵히 어린이 시청자들을 기다려 주던 ‘뽀뽀뽀 친구’마저 빼앗기게 됐다. 조악한 비유이지만, MBC의 이번 방침은 오랜 놀이친구를 못마땅해 하던 부모님이 똘똘한 옆집 아이를 소개하며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를 배우라고 다그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윤다정 위원은 현재 미디어스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68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여러해 전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가 투신자살하자 교육부는 ‘정부합동 학교폭력근절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학교폭력 가해·피해 학생을 자연스럽게 선별하기 위해 5월초부터 전국 초등학교 1·4학년, 중 1·고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정서·행동발달특성검사”를 했다. 이 검사는 학생들의 성향과 심리적 불안 등을 진단해 필요하면 치료까지 권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 하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을 결과에 따라 학교(Wee 클래스 등), 전문기관(Wee 센터, 정신건강증진센터 등), 병·의원 등 학교 내·외의 기관 등에서 상담·치유 등 필요한 지원을 받게 하고 특히 자살 생각 등 긴급한 조치가 필요한 학생들은 발견 즉시 병·의원 치료 지원 등 집중적으로 관리되도록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필요성과 차별성을 고려하지 않은 대량적이고 일괄적인 검사, 단편적인 검사 문항 등의 실효성문제들과, 검사 이후 2차 선별검사 대상이 된 학생들이 받게 될 정신적 부담이 우려되는 등 문제가 많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고모와 함께 살고 있는 가희(가명)는 학급 학생들에게 일부러 몸을 부딪쳐 아파하는 아이들에게 웃으며 관심을 표하고는 장애학생을 대할 때는 더럽다며 옷에 침을 뱉는 등과 같은 심한 감정변화를 가졌지만 검사결과 정상으로 분류되었고, 수업시간에 학급 학생들과의 감정대립으로 죽이겠다고 샤프로 위협하고, 이를 말리는 교사를 향해 욕설을 하며 빗자루를 휘둘러 폭행하고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고성을 지르며 울부짖으며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는 은율(가명)이 또한 정상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또한 이 검사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학생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게 되고, 비정상으로 판명된 학생에게 학교가 상담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검사의 목적이라지만, 검사의 행정을 담당한 전국 보건교사 배치율은 64.6%에 불과하고, 전문상담교사는 883명뿐이다. “우리 학교(××지역)의 경우 관심학생군은 시 정신보건센터에 전화 예약 후 방문해 2차 검사를 받도록 안내하는 것으로 가정통신문이 나가는데 그쳤습니다. 또 별도로 담임교사가 상담 후 심층상담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상담부로 넘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을 걸로 생각합니다. 학교에 전문 상담교사도 없는데 진로상담부에서 관심 학생군 300명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하는 다른 교사의 이야기에서 보여 지듯이 검사를 통해 관심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여러 교사와 학부모들은 학생 정서·행동발달검사가 의학적이고 전문적인 분야이므로 학교가 아닌 전문 기관에 의뢰해 검사를 실시·관리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교과부 매뉴얼에 있는 학생정신검사 체계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교육부는 학생들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자살문제 여부를 잘 관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자살을 했다면, 그건 학생을 관리 못한 학교, 교사, 가정과 그 학생의 탓이라고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학생들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경쟁 위주의 교육과 폭력적인 학교문화 등에 원인이 있고 더 큰 문제로는 가족 구성원 간의 대화가 단절된 채 생활하는 가정불화가 늘어나는 것도 또 다른 원인이다. 정서(情緖)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혹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를 일컫는 말이다. 정서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감정이다. 교사와 학부모들의 관심과 사랑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 가족 간의 바람직한 의사소통 십계명 1. 긴 설교와 훈계는 금물, 열 단어 이내로 말한다. 2.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하나’ 등 부정적인 말 대신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한다. 3. ‘좀 더 노력해’, ‘알아서 해’ 등의 모호한 표현 대신 구체적으로 말한다. 4.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추측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5. 이야기하는 동안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침묵하지 말고, 눈 맞춤을 통해 적극적으로 듣는다. 6. 다른 사람의 말을 막지 않고 끝까지 듣는다. 7. 말과 행동을 일치시킨다. 8. ‘넌 쓸모없는 아이야’, ‘너 때문에 골치가 아파’ 등 쌀쌀맞거나 위협적인 말투 대신 ‘그 문제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 볼까?’ 등 건설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9. 고함을 지르고 소리치지 말고 중립적이고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10. 지나간 일을 들추지 말고 현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 제2834호 가톨릭신문 -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02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늘은 정치(인) 얘기를 하려고 한다. 20년 가까이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정치부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은(혹은 못한) 자가 단도직입으로 정치(인) 얘기를 하려는 이유는...절박해서다. 달을 가리키는 데 달을 쳐다보기는커녕, 그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집단이 앞으로도 별 문제없이 제 1당을 차지하는 기괴한 현상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을 동원한 총체적 부정선거를 저질러 놓고도, 국면 전환을 위해 불법으로 불법을 덮어놓고도, 이 땅의 민주주의를 궤멸적 나락으로 몰아넣고서도, 뻔뻔하게 권력을 유지하는 몰상식한 집단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능력도 방향감각도 상실한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버린 진보정의당, 국민과의 소통을 포기해버린 듯 한 통합진보당, 여전히 사상 투쟁에 몰두하는 이론가 집단으로 비치는 진보신당, 그리고 문제적 인물, 안철수에 이르기까지. 할 말이 많지만 오늘은 일단 안철수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안철수 의원에게 처음 실망한 것은, 지난 대선과정에서 그가 국회의원 정수 축소 공약을 정치개혁 프로그램으로 내놓은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가 좋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야권연대의 구심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누가 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둘 다 부족하지만 최악만 피하면 된다는 심정이었다) 조중동의 정치냉소 프로젝트에 오염된 안철수식 정치개혁 구상의 유치함에 대해서는 워낙 많은 비판이 이뤄졌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두 번째 실망은, 야권연대 선언 이후 공동 선거운동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하는 것 같기도 할 때였다. 나의 마음속에는 이때 벌써 18대 대선의 조종이 울렸다. 안철수는 특유의 ‘같기도’ 신공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이게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줄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때 알아챘을 것이다. 세 번째 실망은 지난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그의 선택이었다. 삼성 엑스파일 사건을 폭로한 죄(!)로 노회찬이 의원직을 잃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회찬의 지역구를 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회찬을, 자력으로 지역구에서 의원 배지를 달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보정치인 노회찬이 오랫동안 공들여온 그 지역구를, 이 땅의 거악에 맞서 싸우다 억울하게 의원직을 앗긴 노회찬의 자리를 노리는 후각은 차라리 정글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노회찬의 사전 양해를 둘러싼 잡음은 양념에 불과했다. 이 때 처음으로 안철수가 미워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많은 필자들이 분노를 표한 바 있으니,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네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대목은, 지역주의(지역감정)를 대하는 그와 그의 참모들의 태도였다. 애꿎은 진보정의당 의석을 빼앗지 말고 부산 영도로 내려가라는 여론에, 그들은 그건 노무현의 길이지 안철수의 길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무현의 아류가 되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독자적 아이덴티티가 중요한 정치인이니까 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정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당선 이후였다. 그는 마치 민주당이 경쟁자인양 행동하고 있다. 광주에 공을 들이고 어쩌고 하는 기사가 줄을 이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의원 빼가기 논란까지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정치적 동진(경상도 공략)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이 나라 정치에서 지역주의가 갖는 함의에 대해서 기초적인 문제의식조차 부족한 정치인이군, 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야당의 텃밭인 광주를 넘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민주당이 헤매는 틈을 타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겠다는 심보 아닌가. 노원을에 이어 광주까지, ‘손 안대고 코푸는 정치’가 안철수의 새정치인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안철수는 군자의 도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잠깐 덧붙이자면, 나는 지역주의가 갖는 정치적 함의에 대해 다른 기회를 통해 의견을 비친 바 있다. 안철수는 호남이 자신을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정말 모를까. 비슷한 컨셉의 정치인인 문국현이 대선이 지나고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그가 서울 태생이기 때문이다. 그에 견줘 안철수의 인기가 여전히 어느 정도 유지되는 건 그의 고향이 가진 정치적 자산 때문이다. 그 정치적 자산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데 써달라는 민심의 바람을 모른다면 아둔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지역주의는 이토록 강력하게 살아 움직이는 괴물이다. 안철수는 중도와 상식, 합리(의 이미지)를 표방한다. 지역주의의 피해자로서 수십 년간 단련된 호남은 정치의식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고 합리적이다. 이념에 관계없이 새누리당의 횡포를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을 지지해왔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힘이 여기 있다. 화투로 치면 굳은자인 셈이다. 안철수가 호남을 노리는 건, 스펙 좋은 둘째 아들이 밖에 나가서 돈 벌어올 생각은 하지 않고 갑자기 낙향하더니, 첫째가 농사짓던 땅을 빼앗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첫째가 가진 땅으로는 식구들을 먹여살릴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안철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간철수’라고 부른다. 아마도 ‘간을 본다’는 비아냥이 포함된 뜻이 아닐까 싶다. 자기 생각을 명확히 말하지 않고 애매하게 넘어가는 화법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시점에서 그가 보여준 눈치보기 행보 때문에 이런 불명예스런 별명이 생긴 것 아닌가 싶다. 안철수는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게 아니라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 국정원의 정치개입 사건만 해도 그렇다. 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6개월이 지난 요즘에야 그는 비로소(!)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그동안 뭔가 불분명하다고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진보와 보수 모두로부터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도 강박증’ 때문일까. 국정원 사건처럼 명백한 국기 문란 사건에 대해서조차 발언을 아끼는 것이 중도인가. 중도의 깃발을 내걸려면 그 깃발을 선명하게 높이 들어 올려야지,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눈치를 보며 그 중간 정도만 올리겠다는 전략이 과연 중도인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치에 대하여 발언하지 않는 정치가 상식의 정치라고 할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한겨레 안철수는 늘 너무 늦게 최소한의 정답만을 말하려 한다. 먼저 이야기하고 사람들을 끌어가려 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적당한 지점에서 수습한다. 자기주장을 앞세우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뭐가 나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지도자로서는 결격사유다. 비교적 명백하게 사회적으로 의견이 갈려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남의 의견이 이미 거의 다 나와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명백한 의견을 밝히길 주저한다. 정치적으로 자기 확신이 부족하거나(국회의원 정수 축소 공약으로 한번 크게 데었기 때문일까), 혹은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나는 이걸 범생이 정치라고 부른다. 누구로부터도 욕먹기 싫은 공부 잘하는 범생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정치와는 맞지 않는다. 이런 부류의 범생이들은 여의도에 차고 넘친다. 정치는 자기 생각을 이야기 하고 그 생각을 중심으로 사람을 모으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이미지 정치다. 안철수는 (자신의 좋은) 이미지 정치에 안주하고 있다. 안철수처럼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고 욕먹지 않는 방식으로 그걸 주워담는 데 능했던 사람이 또 있다. 그 역시 이미지 정치의 대가다. 너무 늦게 최소한의 정답만을 말하는 사술로 대통령이 된 사람은 그 사람 하나로 충분하다. 대통령이 되고나면 최소한의 정답조차 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그런데 안철수는 왜 정치를 하려고 할까. 안철수 같이 바른 사람이 정치를 하면 거꾸로 선 이 나라 정치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부추긴 사람이 주변에 많았을 것이다. 전국적으로 인기가 있어서 출마도 하기 전에 지지율이 고공 행진했으니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실제로 여론도 그러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전, 여의도 밖의 정치가 만개하던 시점이었다. 나도 여의도 밖의 정치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안철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도 그런 기대를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안철수 주변 사람들에 대해 미안한 감정이 든다.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열심히 올라갔더니 이 산이 아닌데.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정치가 좌우로 편을 갈라 싸워왔다며 그 틀을 뛰어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법륜(스님)의 화두를 붙들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안철수 새정치의 요체다. 추가된 게 있다면 ‘지역 대신 계층’을 중시하겠다는 것 정도? 특별한 이념이나 강령이 있다기보다는 기존 정치와는 다른 길을 갈 것이고, 그것은 내가 안철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묵시록에 가까운 영역에, 안철수의 새정치가 존재한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해방공간 말고, 이 나라 정치가 좌우로 편을 갈라 싸운 적이 과연 있었나. 자유주의조차도 좌파라고 공격받는 전근대적인 풍토에서 좌우 구분이 무슨 소용 있나. 철지난 이념싸움 하지 말라며 먼저 이념싸움을 거는 세력은 새누리당이다. 엔엘엘(NLL) 논란을 보라. 종북이라는 매카시즘적 선동으로 모든 이슈를 덮어버리는 우파의 고전적 수법 아닌가.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 정치는, 굳이 말하면,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 지리적으로는 좌도와 우도의 싸움이었다. 허나, 백두대간을 타고 형성된 우도의 산세가 너무 높아 제대로 한번 붙어보지도 못한 싸움이었다. 더구나 둘이 같이 싸우면 항상 좌도가 욕을 먹는 구도다. 대다수의 언론이 우도 편이기 때문이다. 혹은 싸잡아 욕을 하는 것으로 정치냉소를 부추기고 실리는 우도가 챙기는 구도라고 할 수 있다. 안철수식 정치관이 이 나라의 정치모순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오류는 여기서 발생한다. 싸잡아 욕하는 순간 기득권의 편에 서게 되는 마법. 이것이 앞서 말한 조중동의 정치냉소 프로젝트다. 국회의원 정수 축소와 중앙당 폐지라는 대중추수적 공약이 나왔던 배경도, 이 싸잡아 욕하기 프레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어렵게 모신 최장집 교수가 노동 중심 정당을 이야기하니 차마 입을 막지는 못하겠고, 노동이 전부는 아니다, 많은 것 중의 하나일 뿐이다, 라고 애써 축소하기 바쁘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안철수식 새정치에 대한 관전평이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후 유일한 업적은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직을 양보한 것밖에 없다고 하면 심한 말일까. 써놓고 보니 거칠다. 앞이 보이지 않는 한국 정치에 절망한 40대 아저씨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고 치부해 주시길. 너무나 답답해서 이민을 가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그냥 이 땅에 비비고 살아야 하는 평범한 서민이 울분을 토해냈다고 여겨 주시길.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대안 세력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건전한 토론이 이 공간에서 이어진다면 말석이라도 채울 의향은 있다. 아직은 이민 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이 나라를 고쳐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74 | 추천: 0
육영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작년 연말에 개봉된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은 올 봄까지 약 600백 만 명의 관중을 동원하는 선풍을 일으켰다. 빅토르 위고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뮤지컬의 영화 버전인 이 외화는 상영시기가 제18대 대통령선거 전후와 겹치면서 일상 화제의 중심에 선 문화적 사건이 되었다. 영화 열풍에 맞장구치며 원작소설도 불티나듯 팔렸고 전국 투어 중인 같은 제목의 뮤지컬도 인기를 끌고 있다. 150년 전 서양의 옛날이야기가 2012-13년 한국에서 이렇게 왕성하게 소비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레미제라블’의 성공비결은 선거결과에 상심한 많은 유권자들이 자기 치유(힐링)를 위해 극장으로 몰렸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소위 3(4)86 세대로 불리는 ‘왕년의 운동선수들’이 자신들이 저항했던 ‘독재자’의 딸이 권좌로 되돌아온 사태에 쇼크 받아 “왕을 죽였지만 우리는 또 다른 왕을 섬겨야”하는 영화내용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투표율이 저조했던 (백수)청년들이 자신이 삼킨 슬픔을 공적인 분노로 승화시키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다시 그 자리”(Turning)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분석도 곁들여진다. 말하자면, 영화-뮤지컬-원작소설 ‘레미제라블’의 인기몰이는 ‘배반당한 혁명’에 대한 일종의 한풀이와 ‘역사를 걱정하는’ 마음이 뒤섞인 특기할 대중문화현상이라는 것이다. ‘레미제라블 신드롬’에 빗대 ‘박근혜 정부’의 성격과 앞날을 걱정하는 일은 정치(평론)가들에게 맡기고, 나는 영화와 관련된 얕은 역사지식을 독자들과 나눌 수도 있으리라. 예를 들면, ‘레미제라블’의 배경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아니라 왕정복고기(1814-1848년)이며, 클라이맥스인 바리케이드 전투는 1830년 7월 혁명이나 1848년 혁명이 아니라 1832년에 발생했던 사소한 반정부항쟁들 중에 하나였으며, 바리케이드는 프랑스혁명 훨씬 이전인 1588년 프랑스 종교전쟁의 발명품이었다는 등등. 그리고 바리케이드에서 산화했던 젊은 혁명가들이 싸웠던 대상은 1830년 시민혁명 덕분에 ‘시민 왕’이란 애칭을 얻었던 루이-필리프이었고, 그의 달콤한 개혁 약속은 도망갔던 망명귀족과 성직자로 대변되는 ‘상속된 특권’의 부활로 거짓 공약(空約)이었음이 폭로되었으며, 부르봉왕가의 복귀와 루이-필리프 정부는 1789년 혁명과 1848년 혁명 사이에 낀 ‘불순물 정권’ 혹은 역사진보를 방해했던 ‘잃어버린 한 세대’였다고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로 다시 읽는 서양사강의’를 계속하는 대신, 나는 ‘레미제라블’에 숨어있는 ‘돈의 힘’에 주목하고자 한다. 19년의 감옥살이에서 풀려난 장발장은 무슨 재주와 행운으로 3년 만에 공장 사장님으로 변신할 수 있었을까? 얼마큼 많은 부를 축적했으면 그는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자선사업가로 인심을 얻어 존경받는 시장님으로 신분상승 했고, 나중에는 의붓딸 코제트와 함께 파리 이곳저곳에 ‘안전가옥’을 확보하며 자선사업가로 위장할 수 있었을까? 사실 장발장은 유리 세공품을 만드는 획기적인 기술을 발명한 벤처사업가이며 벼락부자(nouveau riche)이다. 그는 성실과 정직이라는 노동윤리를 준수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과 일자리는 물론 복지까지 제공했다. “노동하며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싸우면서 죽자”는 구호와 함께 최초의 근대적 노동쟁의가 1831년에 리용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신흥부자 장발장은 너그러운 부르주아 주인나리이며 동시에 자기 지갑을 털어 지역사회 복지를 위해 봉사하는 공직자였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와 그의 동료들이 바리케이드에서 프랑스 국기를 흔들면서 혁명가를 부르며 정부군과 맞서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사랑과 용서가 아니라 돈이 ‘레미제라블’ 스토리와 등장인물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는 나의 가설은 젊은이들의 관계에서도 입증된다. 악당 여인숙 주인(떠나르디에)의 학대로부터 장발장이 ‘돈으로’ 구출(입양)했던 코제트는 뜨내기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딸 에포린느가 목숨 걸고 짝사랑했던 마리우스와 결혼에 골인한다. 새 신랑 마리우스는 또 누구인가? 그는 가난한 군인 아버지(퐁메르 대령)가 유산상속을 담보삼아 장인(질노르망 후작)에게 친권을 양도했던 아들이며 외손자였다. 마리우스는 또한 장발장으로부터 결혼지참금으로 58만4천 프랑을 선물 받은 젊은 부자이기도 하다. 당시 노동자 임금이 월평균 30-50 프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1천2백22년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을 현금 일시불로 상속받은 것이다. (역사학자가 천박하게 돈만 밝힌다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요약하자면, ‘레미제라블’은 벼락부자 덕분에 고아에서 신데렐라로 신분 세탁한 예쁜 처녀와 장인어른과 귀족출신 외할아버지의 보호(‘빽’) 덕분에 바리케이드에서 혼자 살아남은 법과대학생 청년의 해피엔딩 러브스토리에 다름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 세상에서 돈이 전부이며 최고”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왕정복고로 되돌아온 왕과 함께 부활한 것은 부와 신분이 결합된 ‘상속된 특권’이었으며 장발장과 그 주변 인물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검은 숲’(세금 피난처?)에 감춰놓은 돈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어두운 과거를 지우고 정상적인 호적(아이덴티티)을 위조하는 작업을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실천했다는 측면에서만 보면 장발장이야말로 왕정복고와 초기산업사회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전형적인 부르주아였다. 뿐만 아니라, 공화주의 혁명군인(퐁메르), 왕당파 극우주의자(질노르망), 속물적 계몽철학자(떠나르디에), 경건한 청교도주의자(장발장) 등 주요 인물 모두는 각자가 간직한 이데올로기적 색깔에 관계없이 화폐의 무게가 보증하는 현재의 안전과 미래의 행복에 굴복해 무릎을 꿇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지금 이 땅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레미제라블)’에게 돈의 힘은 더 폭력적이며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배은망덕한 도둑놈에서 은촛대를 내어주는 믿음의 성직자(미리엘 주교)도, 자기 공장에서 해고된 싱글 맘의 딸을 끝까지 지켜주는 ‘가족 같은 주인’(장발장)도, 자기신념과 원리원칙에 투철한 공직자(자베르)도, 소중한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내주었던 사랑의 천사(에포린느)도―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이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매우 부족하거나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왕의 딸’의 복귀와 함께 잡초처럼 무성하고 뻔뻔스럽게 고개를 내밀 황금과 권력의 야합을 쳐부술 또 다른 바리케이드를 세워야하리라. 역설적으로 결론짓자면, 2013년 지금 여기야말로 우리가 다시 기도하고 사랑하며, 노동하고 연대하며, 분노하며 투쟁하기에 가장 좋은 지옥이며 천국이다. 육영수 위원은 현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70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하철로 퇴근하다가 서울메트로 직원이 할머니를 내쫓는 갑(甲)의 삽질을 보았다. 지하철 역 바닥에 좌판을 깔고 1,000원 짜리 떡을 파는 늙으신 할머니는 을(乙)이었다. 나는 망연자실 쳐다보는 것 이외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일도 그런 일은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멍해졌다. 갑과 을 사이에서의 갑의 삽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과거 신분사회였던 왕조 국가 사회는 거론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공화국 체제에서도 왕조 사회에서의 갑의 삽질과 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박정희와 정치군인들이 총과 칼로 민주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고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김재규의 총에 쓰러질 때까지 18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것도 힘을 갖고 있던 갑의 삽질이었다. 을의 분노는 곧 죽음이나 감옥이었을 뿐이다. 긴급조치로 무수한 사람들이 감옥에 갇힌 것도 그 중의 한 사례에 불과하다. 전두환, 노태우 도당이 박정희 선배님으로부터 배운 수법을 전수받아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을의 분노는 5·18 광주민주화항쟁으로 나타났으나, 역시 죽음과 감옥이 남겨져 있었을 뿐이다. 최근 극우 언론 권력이 가세하여 5·18 광주민주화항쟁은 북한군이 개입한 것이라는 삽질까지 보태지는 세상이다. 가깝게는 이명박 정부 초기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도 갑의 횡포에 대한 을의 분노였다. 검찰은 1,500명이 넘는 을을 체포하여 처벌하면서 갑의 삽질을 정당화 하였다. 권력으로 상징되는 국가와 정부에서 자행되는 갑의 삽질을 가장 먼저 지켜보고 잘 아는 사람들은 공무원이다. 그래서 고급 공무원은 하위직 공무원을 을로 다루고, 하위직 공무원은 수직적 위계질서에 가려 숨도 재대로 쉬지 못한다. 하위직 공무원조차 힘없는 시민들에 대해서는 갑으로서 행세하고 군림한다. 공무원 비정규직의 호소와 피울음은 또 다른 갑의 삽질에 질식되어 버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갑의 삽질은 자본주의의 유능한 도구로 활용된다. 납품 단가를 후려치고, 중소기업이 개발해 놓은 기술이나 유능한 중소기업 직원을 빼앗아 가고, 어음으로 몇 개월 뒤에 결재하여 이자 상당의 차액을 도둑질하고, 불법적인 페널티를 부과하고, 골목길 영세 상인의 장사하는 꼴도 눈뜨고 못 보는 악행을 일삼는다. 그런데 피해자 관계에 있던 중소기업이 더 열악한 영세기업과 거래 할 때는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똑같이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는 횡포를 반복하며 갑의 삽질로 돌아간다. 남양유업의 대리점에 대한 밀어 내기 횡포 역시 갑의 삽질의 한 사례일 뿐이다. 대기업, 중소기업 노동 현장에서 한해에 산업재해로 2,000명씩의 노동자가 죽어 나가도 검찰과 법원은 벌금형으로 ‘땡 처리’ 함으로써 갑의 삽질에 힘을 더해준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먹이 사슬의 맨 하위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또다시 누구에겐가 삽질할 대상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 갑의 삽질은 멈출 줄 모르고 끊임없이 더 약한 사람들을 향해 유전병처럼 밑으로 또다시 밑으로 흐르고 있다. 갑의 삽질이 구조적이고 체화된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권력에 눈이 멀어 시민과 민주주의 공화국을 능멸하고 조롱하는 권력의 화신들, 이미 중증 사이코패스가 되어 버린 자본주의 맹신자들 사회에서 갑의 삽질이라는 이 더러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릴 시원한 방법을 제시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갑의 삽질에서 정의는 실종되어 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권력과 돈(자본) 앞에 서면 ‘법 앞의 평등’은 구호로만 남아 있고, 법이 정의를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기업들이 계약서에서 갑과 을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 뉴스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코웃음 칠 수밖에 없었다. 갑들이 보신책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거리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지하철에서 1,000원 짜리 떡을 파는 할머니를 내 쫓지 않고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가. 지하철에서 임차료를 지불한 사람들에게만 장사하도록 하는 것만이 반드시 옳은 방법인가. 임대료를 지불할 능력도 없고,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시설도 필요 없이 교통에 방해되지 않게 장사를 허용하면 잘못된 것인가. 시민의 세금과 돈으로 운영하는 공공 기관에서 이 정도 배려와 상생의 방법도 실천하지 못하는가. 질서를 외치면서 계속되는 갑의 삽질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48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분단 트라우마의 정체는 죽음에 대한 공포 1) (김태형, ‘트라우마 한국 사회’, 2013, 서해문집, 253쪽 이하에서 인용) 한국인들에게 특유한 분단 트라우마는 한반도의 분단과 불안정한 정전 상태로 인해 생겨난 집단적 정신병으로, 그 내용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심과 그것에서 기인하는 병적인 사회심리를 말하는 레드 콤플렉스,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는 별다른 공포나 증오를 느끼지 않지만 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공포심, 혐오감, 증오심 등을 품는 북 콤플렉스, 한국의 극우보수세력에 대한 한국인들의 공포심과 피해의식을 말하는 극우세력 콤플렉스로 정리할 수 있고, 남북 간의 화해가 추진되면서 레드 콤플렉스와 북 콤플렉스는 지속적으로 약화된 반면 극우세력 콤플렉스는 여전히 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따라서 탈냉전의 21세기를 맞이한 현 시점에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분단트라우마의 기본 내용은 ‘극우세력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분단 트라우마의 본질은 아주 극단적인 공포증으로, 분단 트라우마에 의한 공포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공포 중에서 가장 거대한 공포인 ‘죽음에 대한 공포’ 혹은 ‘사회적 생매장에 대한 공포’를 야기하는데, 공포증들의 경우 공포를 야기하는 대상과 조우하지 않으면 공포를 어느 정도까지는 줄이거나 피할 수 있지만 분단 트라우마는 공포의 대상이 ‘사회주의’, ‘북’, ‘극우보수세력’인 만큼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그 대상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므로, 만성적으로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는 점에서 훨씬 치명적이다. 공포가 극심해지면 사고기능이 와해되어 피해망상 증세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분단트라우마는 가장 거대한 공포를 강제하므로 필연적으로 과도한 피해의식과 피해망상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에 분단 트라우마란 합리적인 사고에 기초해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것도, 정상적인 반공주의도 아닌, 말 그대로 모든 한국인들이 앓고 있는 가장 극심한 집단 정신병이다. 우리 모두가 전쟁·분단의 포비아 환자입니다 2) (유코리아 뉴스 김성원 기자, 2013년 5월 13일, “우리 모두가 전쟁·분단의 포비아 환자입니다” 제하 기사에서 인용) 남한 사회, 아니 모든 코리안들은 분명 이 포비아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북한, 전쟁에 대한 포비아, 그것은 가히 발작적이고(남한이나 미국에 대한 북한의 포비아도 마찬가지다), 모든 코리안들을 죽음, 기아, 상처로 내몰았던 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 남북한은 상대에 대한 불신, 적개심을 끊임없이 확대, 강화해 온 것이 우리 현대사이고, 정치사이기에 코리안들이 앓고 있는 전쟁과 분단의 포비아는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DSD) 증세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국정원 탈북 화교남매 간첩조작 사건’ 진행과정을 지켜보면서 국정원이나 공안 검찰의 눈에 모든 탈북자가 잠재적 간첩으로만 보이고, 그들에게 북한이 하는 모든 행동,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은 의심,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국정원, 공안 검찰, 그들은 전쟁과 분단이 만들어낸 포비아의 희생양이고, ‘보위부 간첩’이란 검사의 공소사실에 대해, 재판을 공개함으로써 사게 될지도 모를 ‘이념 공격’(소위 ‘종북좌파’라고 하는)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공개로 재판을 진행한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된’ 판사 역시도 이 포비아에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없었고. 공안사건 변론을 맡는 이상 국정원과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는 변호사들도 국정원이나 검찰이 ‘간첩’으로 규정한 자를 변호함으로써 보수 여론에 의해 ‘친북좌파 변호사’로 몰리는 그들은 이념 공격에 대한 공포, 신변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상시적으로 달고 살아가며 포비아에 사로잡혀 있었고, 정의와 진실 앞에 용감할 것 같은 기자들도 포비아에 떨기는 매한가지로 감히 ‘간첩 사건’을 파헤칠 용기가 없는, 포비아의 희생자라고 하겠다. 일반 사람들은 어떤가. 북한의 3차 핵실험, 국제 제재, 한미 연합 군사훈련, 개성공단 중단 등 지난 3개월간의 한반도 상황은 ‘준전시 상태’에 다름 아니었다. 남한 사회는 물론 북한 주민들도 상대로부터 촉발될지도 모를 전쟁 포비아에 사로잡혀야 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공포 혹은 ‘비정상적인 두려움’, 즉 ‘전쟁(분단) 포비아’를 앓고 있는 것이다. 코리안,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분단 트라우마의 치유를 방해하는 극우보수세력과 현재 분단 트라우마의 치유를 철저히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 (김태형, ‘트라우마 한국 사회’, 2013, 서해문집, 260쪽 이하에서 인용) 친일파가 해방 이후 한국의 지배층으로,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음에 따라 분단 트라우마 역시 날로 심각해지고 악화되었고, 친일파의 직계후손인 한국의 극우보수세력은 본인들이 진정으로 옳다고 확신하기에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진짜 반공주의자가 아니라, 오로지 반공주의를 악용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사이비 반공주의자였는데 이들은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거나 민중의 반항을 진압하는 도구로 반공주의를 악용함으로써 ‘극우세력 콤플렉스’, 즉 사회주의자로 몰려서 생매장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가 누구이더라도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그의 인생은 곧바로 막장에 다다르게 되므로 한국 사회에는 자기의 목숨과 인생, 나아가 가족의 목숨과 인생(극우보수세력은 빨갱이의 가족까지 빨갱이로 간주한다)을 걸면서까지 빨갱이를 도와 나설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극우보수언론들은 분단 트라우마를 조장하는 선봉장 역할을 수행하며 ‘일단 터뜨려놓고, 나 몰라라’하는 식의 왜곡, 편파보도 등을 일삼으면서 북에 대한 증오심, 혐오감, 공포감 등을 확산시킴으로써 남북 간의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려고 날뛰며 객관적인 대북 보도가 아닌, 소설 쓰기에 오랜 기간 습관이 된 유치하고 파렴치한 집단으로, 이들은 한국의 민주세력을 친북이나 종북으로 몰아가는 짓을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해댔고 김대중과 노무현 같은 전직 대통령까지 친북으로 몰아갈 정도였으니, 북을 적대시해 타도하려 하지 않고 북과의 화해와 통일을 지지하는 한국인은 모두 친북 혹은 종북세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극우보수세력의 일부로서 극우보수언론은 분단 트라우마라는 ‘요술방망이’의 상업적 가치를 잘 아는 악덕 기업가이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왜곡과 과장, 때론 날조마저 서슴지 않는 적극성으로 한국인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기사와 논평으로 이른바 ‘국가안보 상업주의’를 실천했다. 분단 트라우마는 절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끔직한 악몽이지만 한국의 극우보수세력과 언론에게는 그야말로 더없는 축복이고 구원이었으니 이들은 지금까지 분단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그런 짓을 하면서 생존을 도모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시대착오적이고 반민중적이며 반민주적인 악법이지만 진작 역사의 퇴물이 되었어야 할 한국의 극우보수세력에게는 가히 ‘절대 무기’나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극우세력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국가보안법이 이들의 생명줄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분단 트라우마, 어떻게 치유할까 (김태형, ‘트라우마 한국 사회’, 2013, 서해문집, 315쪽 이하에서 인용) ‘레드 콤플렉스’, 특히 ‘극우세력 콤플렉스’를 치유하려면 극우보수세력을 정치권에서 퇴장시키고, 그들의 절대 무기인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 특히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데 한국사회가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한국의 극우보수세력이란 국가보안법에 기생해 잔명을 유지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분단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 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 색깔 공세라는 절대 무기를 더 이상 휘두르지 못하게 된다면, 분단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국인들의 아픈 상처를 마구 후벼 팜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극우보수세력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이들은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정치권은 분단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운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정치세력에 의해 재편될 것이고, 한국 사회 역시 분단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희망찬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정치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사회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와 미래를 좀먹는 가장 치명적인 악성 종양인 분단 정신병, 분단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포비아 극복 (유코리아 뉴스 김성원 기자, 2013년 5월 13일, “우리 모두가 전쟁·분단의 포비아 환자입니다” 제하 기사에서 인용) 정신의학에서 제시하는 포비아에 대한 치료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포비아를 직면하는 것이다. 포비아를 피하지 않고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허상(포비아는 실제보다 대상이나 상황을 지나치게 비합리적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발생한다)을 경험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포비아의 대상에 다르게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대상이나 상황을 접하도록 함으로써 두려움이나 공포를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포비아는 불치병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평생 포비아를 안고 사는 환자는 10%에 불과했다. 90%는 완치를 경험했다는 뜻이다. 이번 ‘탈북자 출신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혹은 ‘국정원 탈북 화교 남매 간첩 조작 사건’은 한 개인의 유무죄로 볼 일이 아니다. 한 개인 혹은 남매의 비극을 통해 분단이라는 거대한 비정상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탈북 화교 남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포비아 환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포비아 극복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남북 화해, 통일의 길도 거기서부터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지난 4월 27일 오전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증거를 국가정보원이 조작했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국가보안법 피해자는 누구? (장경욱, “국가보안법 피해자는 누구?”, 2012년 6월 5일 인권연대 ‘발자국 통신’ 칼럼에서 인용) 흔히 국가보안법은 사문화 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과거 수많은 고문에 의한 간첩 조작 사건과 같은 무소불위의 국가보안법 오·남용 사례는 오늘 날에는 사라져 가고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참여정부 시절 ‘하마터면’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뻔 했다는 전혀 근거 없는 루머가 횡행한 적이 있다. 국가보안법이 수호하고자 하는 체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제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어둠의 장막이 이내 곧 걷힐 것처럼 거짓 소문을 온 동네에 퍼뜨린 탓이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어둠의 장막 속에 갇혀 그 곳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용기 없는 자들의 꿈에는 지금도 도깨비 요술방망이 같은 요행수를 쫓아 탈출의 신기루가 자주 보인다. 국가보안법 피해자는 누구인가? 우리 모두가 국가보안법 피해자다. 국가보안법이 쳐놓은 장벽과 장막의 함정 안에 놓인 자신의 처지를 정상적 상태로 간주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국가보안법 피해 환자이다. 국가보안법을 탓하지 않고 그 체제에서 불편함 없이 일상을 살아가며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분단냉전체제에 무관심한 채 어느새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도전의식을 상실해 버린 우리 모두가 국가보안법 피해 환자이다. 국가보안법 피해 환자로서 병에 걸린 줄도 모른다면 치유될 수 없다. 국가보안법 피해 환자로서 그 피해를 자각하면서도 용기가 없어 이를 고치기 위해 병원에 들려 진단하고 치료하기를 회피한다면 역시 치유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당신은 국가보안법 피해자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 모두가 손을 들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분명한 현실을 인정하고 함께 힘을 모아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여 싸울 수 있을 때에야 국가보안법은 폐지될 수 있다. 국가보안법에 억눌린 피해자로서 우리 모두의 단합된 힘만이 국가보안법의 장벽을 부수고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우리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1) 모든 한국인들이 앓고 있는 가장 극심한 집단 정신병, ‘분단 트라우마’에 대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기반으로 한 한국 사회 최대의 장애물로 분석한 후 ‘분단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극우보수세력의 절대 무기인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데 한국사회가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내용의 ‘트라우마 한국 사회’(김태형, 2013, 서해문집)의 출판을 축하하고, 모든 한국인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마음을 담아 그 내용을 인용 소개한다. 2) 탈북 화교 남매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하여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모든 탈북자들을 잠재적 간첩으로 내모는 문제이고 또한 통일과 직결된 문제로 보고, 사건 초기부터 집중 취재 보도한 ‘탈북자를 통일의 주역으로 세우는 유코리아 뉴스’의 김성원 기자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모든 한국인들이 전쟁, 분단의 포비아 환자이며, 포비아 극복은 우리 모두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포비아 환자임을 깨달아 나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내용의 기사내용을 인용 소개한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450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배부른 소리나 한번 해보자는 얘기다. “비와서 오늘 공쳤어요” 넋두리 하는 옥외 노동자의 푸념을 듣다가, 또 비 오는 날 송전탑에 목매고 5년이나 싸우고 있는 노인들의 울분을 듣다가, 싸움의 세월이라면 거기에 뒤 질수 없다는 구럼비 지킴이들의 통곡을 듣다가, 인턴을 좋아하고 그 보다는 인턴의 엉덩이를 더 좋아하는 윤 뭐시기의 근황이 궁금하다가 그 윤 뭐시기 보다 더 인턴을 좋아해서 시간제 노동도 좋은 일자리라고 말씀하시는 박 뭐시기의 뇌 구조가 또 궁금하다가 시절이 이렇게 하 수상 한데도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입 싸악 씻고 각자 호주머니 잇속만 차려대는 의원 나리들의 하루일과가 도대체 궁금하다가 에라 이렇게 애 끓다가는 내 속이 먼저 망가지겠다 싶어 셀프 멘붕을 자초하며 잠시, 물만 먹어도 배부르고 눈만 뜨고 있어도 포만감에 젖어드는 동네 바이칼 호수의 지난여름을 기억해 보자는 것이다. 한번 입수하면 10년이 젊어진다는 그 맑은 호수에 하루 종일 들락거리고도 젊어지기는커녕 살갗만 잔뜩 태웠던 그 여름. 나는 400루블 (우리 돈 8000원 정도)를 주고 빌려 탄 자전거로 바이칼의 22개 섬 중 가장 큰 알혼의 언덕을 달렸었다. 모든 게 다 좋았고 사소한 모든 게 용서 되었다. 러시아의 여인들은 거개다 상냥해서 어쩌다 눈이 마주 치면 싱끗 웃어주었는데 거기다가 카메라 렌즈를 돌리면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언덕배기를 오르는 페달 질이 힘들어 잠시 쉬어갈 때는 미리 싸온 “발치카7”이라는 러시아산 캔 맥주를 들이키다가 한갓진 나무그늘아래 한 뼘의 그늘을 빌려 눕기도 했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호수의 빛깔이 새겨져 있고 호수를 보고 있으면 하늘이 그 안에 담겨있다. 날씨는 몹시 무더웠다. 영상 30도 “뭔 놈의 날씨가 이리 덥다냐 명색이 시베리아의 한복판인데” 싶다가도 금세 이마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에 흘렀던 땀 방울이 쏘옥 들어가는 신기함, 하늘을 담은 호수의 끝은 지도에서조차 가늠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하다. 하늘을 닮은 호수의 깊이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다. 1637미터라고는 했으나 바이칼 호변의 백사장위에서 홀딱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여인네의 자유 정도로 알아먹으면 그만이다. 나도 그 여인네의 자유를 흉내 내며 호수 안으로 들어간다. 서두르지는 않는다. 딱히 내 인생 최초의 바이칼 입수에 관해 설레 이거나 혹은 경건해 지는 마음 따위는 없다. 그저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 정도로 여긴다. 발목에서 무릎 그리고 허리춤까지 몸을 담그다가 무슨 숫컷들의 영역 표시 같은 것처럼 눈으로는 하늘을 보는 척 쉬이~ 실례를 시작하는데 아뿔사, 허리아래 관절이라는 관절은 죄다 저려올 정도로 물이 차다. 실례가 완성되는 그 짧은 시간을 참기 어려울 정도다. 영상 4도쯤 된다니 보통의 냉장실 온도와 맞먹는 한기가 온몸을 감싼다. 몸 전체를 채 담구기도 전에 퍼어래진 입술을 덜덜 떨며 도망쳐 나오면 한여름의 태양에 뜨끈하게 몸 달아있는 백사장이다. 3분을 버티기 힘든 차가운 물을 러시아 청년들은 쉼 없이 자맥질 하고 나는 멀지감치에서 누워 햇살의 포근함을 만끽하는 러시아 여인의 자유를 힐끗 거리다가 살짝 잠이 든다. 모스크바는 또 어떠한가. 아르바트 거리의 젊은것들은 아무대서나 거리낌 없이 입맞춤을 해대고 거리의 악사는 마치 십 수 년 간 같은 곡만 연주한 듯 능숙하게 파가니니를 읊어댄다. 빅 밴드 스타일의 재즈 연주곡이 흘러 나오는 카페 앞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누군가 건넨 “맥주한잔 합시다” 라는 말에 솔깃해지면 “아~ 세월 간다 좋다” 이만한 시간이라면 내 삶의 몇 부분정도는 포기해도 괜찮겠다 싶다. 왜 하필 밤에 도착했는지는 모르지만 바실리 성당. 한때 넋 놓고 두드렸던 게임 테트리스의 배경이 된 이 성당의 야경을 보면 이 나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떠올리거나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해 하거나 여기 물건 값이 우리에 비해 얼마나 싸거나 같은 단순하고도 참 치사한 일상의 꺼리들을 떠들다가도 문득 저 건물의 귀퉁이에서라도 무릎 꿇고 기도하고 싶어진다. 바이칼 호수 사진 출처 - 필자 "솔직히 한국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바쁜 나라에서 시베리아 오는 사람들은 다 또라이 아냐?" 모스크바를 출발해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맞다 또라이들 하며 킥킥대고 웃었지만 그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눈 질끈 감고 큰 결심해야 가는 곳은 맞다. 단순히 비용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단 한 번도 편히 쉬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자본의 구조 속에서 과감한 일탈을 꿈꾼다는 게 수월치는 않다. 허나 거기에 나는 남과 북을 묻었다. 같은 지향을 찾기보다는 나와 다른 무엇을 찾아 갈라서기에만 급급한 진보라는 이름의 옹색함도 묻었고 정작 돈 버는 일을 포기하고 “쉼”을 찾아 먼 여행길에 나선 내가 또라이가 아니라 이런 일 한번 벌이지 못하고 사소한 이익 앞에 늘 흔들리는 분단된 섬나라의 내가 더 또라이라는 사실도 묻었다. 내 주변은 늘 싸움 투성이다. 이명박 시대에도 그렇고 박근혜 시대에는 더 그렇다. 돈 나고 사람 난 세상(資本主義)이 아니라 사람 나고 돈 난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 콩 한쪽 나눠 먹는 세상, 배곯아 아픈 이 없이 돈 때문에 길바닥에 내 처지는 인생 없이 그냥 사는 대로 사는 알콩 달콩한 세상을 희망하는 사람들. 전쟁 없는 세상을 사모 하고 폭력 없는 세상을 갈망 하는 사람들 틈에 있으니 이 풍진 세상 싸우는 것 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다. 그래도 어찌 허구한 날 싸움만 할 것인가 말이다. 공자님께서 이인위미(里仁爲美)라고 말씀하셨다. 싸움을 위한 마을보다는 넉넉한 품과 여유가 있는 마을이 더 아름답다는 의미겠다. 어차피 배부른 소리나 해대는 멘붕의 날이니 이런 얘기를 해도 이해해 주시겠지. “좀 쉬자, 쉼 앞에는 어떤 구분도 없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84 | 추천: 0
위대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오늘 아침 신문은 알몸, 노팬티, 성추행, 엉덩이 등 자극적인 단어로 구성된 기사가 온통 도배를 하고 있네요. 선정적일 수 있는 이런 기사가 벌써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지요. 그것도 머리기사로요. 신문 가판대는 머리기사만 보이고, 아이들도 볼 수 있는데… 뭐 일반인의 행위였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대통령의 대변인이라는 자의 행위인지라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지만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까지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게다가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고 가고 친노종북으로 매도하며 신상 털기에 나서는 등 제2의 가해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자들까지 있어 대한민국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실감하게 하네요. 덕분에 많은 일들이 기억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느낌입니다. 강정마을에서의 강제철거,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쌍용차 고공농성, 대한문 강제철거, 남양유업 제품 밀어내기, MBC 사장 교체, 건설업자의 고위층 성접대, 밀양 송전탑, 불산 등 유해화학물질 누출, 원전 가동, 어린이집 원생 폭행, 초․중․고․대․직장인․노인의 자살․투신 … 최근 한 달 동안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사건을 한 장의 사진으로 담은 패러디물 사진 출처 - 오늘의 유머 손에 손 잡고 아 ~ 대한민국을 부르며 대한민국을 사랑하도록 그토록 주입받은 세대인데도, 도무지 정이 가지 않네요. 정이 가기는커녕 대한민국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모른 척하고 살아가기에는 이미 내가 한 발쯤 걸쳐 있는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너무도 심각하기만 합니다.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모든 것에 무관심하게 살려고 해도 언제 내가 피해자가 될지 알 수 없으니 그렇게만 살아가는 것도 힘들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요즘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정말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는 문제의식은 내 아이 앞에서 정지하고,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를 지적하는 문제의식은 나의 직장 앞에서 정지하고, 환경 파괴의 문제를 지적하는 문제의식은 내 집 앞에서 정지하고, 언론의 불공정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연예․스포츠 면 앞에서 정지하지요. 사실 SNS라는 것들을 통해 확인되는 많은 일들은 그저 일부의 관심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말들만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요. 말로만 위로를 받지요. 말로만 … 파편화 된 개인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정보는 날로 차고 넘치고, 그 정보 중 내가 관심 있게 따라가야 할 정보를 취사․선택해야 하고, 또 선택한 정보 중에 실제 행동으로 참여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일상을 저울질해야 하고, 하지만 나 하나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잘 해주는 것 같고, 또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 오늘을 이겨낼 힘이 없어요.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하루를 견뎌내야 할 뿐이지요. 어차피 어려운 일들은 저 위정자들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테니 믿고 맡겨 둬야겠지요. 그러려고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시장도, 도지사도 뽑는 것이니까요. 속았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정치에 대해, 경제에 대해, 사회에 대해 배웠던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였을 뿐입니다. 대한민국은 국민에게서 모든 권력이 나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모든 국민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모든 권력은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관료와 국회의원과 돈에서 나오고, 돈이 없으면 행복할 수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도 없는 나라이지요. 이것이 리얼 대한민국이지요. 어떤 때는 이런 구조를 바꿔 보려고 노력하는 타인의 모습들조차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기만 합니다. 영화 같아요. 다큐멘터리 같은… 그 속에 나는 없으니까요.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그렇다면 오늘도 무언가를 빼앗기거나 의무 없는 일을 하지 않고 하루를 견뎌내셨군요. 그런데 과연 오늘도 안녕하셨을까요?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16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식년 후반을 보내기 위해 독일 베를린에 온지 한 달이 되었다. 지난 가을에 3개월 간 체류한 경험이 있어 아주 낯설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한국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회 분위기나 관습 때문에 불편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소비자로서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웬만한 서비스는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한국에서 살던 입장에서 보면, 독일에서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급한 성질을 다스리고 굳은 인내심과 느긋한 여유를 키워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식당에 가도 우선 주문하는 일부터 인내를 필요로 한다. 한 참을 기다려야 종업원이 다가온다. 처음에는 손을 흔들기도 하고 큰 소리로 부르기도 했는데, 주변을 보면 독일 사람들 가운데 나처럼 종업원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들 가만히 앉아서 종업원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물론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시간도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더욱 황당한 건 돈을 내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역시 처음에는 손짓을 하거나 부르거나 했는데 주변의 독일 사람들이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다음에는 그저 조용히 앉아서 종업원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린다. 다른 모든 서비스에서 이런 경험은 반복된다. 나는 다행히 인터넷이 설치되어 있는 집으로 가게 되어 불편함이 없었지만 새로 인터넷을 설치해야 하는 경우, 그 과정은 가히 고행과 다름이 없다. 일단 신청을 하고 설치 날짜가 통보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설치 작업자가 오기로 한 날 마침 집을 잠시 비우거나 벨 소리를 못 듣기라도 하면 다시 날짜가 통보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러다 보면 한 달 정도는 후딱 지나게 마련이다. 어떤 분은 2개월, 어떤 분은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행정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한국 교수 한 분은 4개월 체류를 위해 비자 신청을 했는데 출국 몇 주 전에 비자 인터뷰가 잡혔다. 비자 받고 나면 바로 귀국하게 된 셈이다. 처음에는 도무지 고객 대접을 해주지 않는 느려터진 서비스 문화에 분통을 터뜨리곤 했는데 조금씩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독일 사회 곳곳에서 느끼는 이런 식의 ‘느림’은 단지 이 사람들의 삶의 속도와 여유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소비자 권리 못지않게 어쩌면 더 중요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가 깔려 있다. 사진 출처 - 국가인권위 여성감정노동자 인권가이드 삽화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나의 삶은 대체로 소비자의 삶이고 소비자로서의 편리만이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소비자 권리가 있으면 그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 권리도 있는 것인데 그 부분은 거의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흔히 한국은 서비스의 천국이라 말한다. 뭐든 전화 한통이면 바로 해결된다. 아무리 늦어봐야 하루 이틀 걸릴까? 한밤중에도 전화 한통이면 짜장면 배달을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대단히 편한 사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게 소비자의 편리가 충족되는 동안 노동자가 편안한 일상과 휴식을 즐길 권리는 사라진다. 한국이 노동자의 권리보다 소비자의 권리를 우선하는 사회라면 독일은 그 반대인 셈이다. 사실 대부분의 노동자는 곧 소비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기 할 일만 정확히 시간 맞추어하는(그래서 우리 눈에는 늑장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들은 다른 공간에서 소비자로 살 때 바로 그런 불편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뭐든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바로바로 서비스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로서는 복장 터져 못살겠다 싶은 대목에서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이 별다른 불만 없이 불편을 감수하며 사는 것은 결국 서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우리는 편하고 즉각적인 서비스에 너무 길들여져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우리들 자신이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 보면 그렇게 즉각적인 서비스에 길들여진 삶이 결과적으로 노동자로서 우리 자신의 권리와 인격을 침해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노동자로서 충분한 권리와 인격, 여유를 즐기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인 서비스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권리를 통해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구호는 곧 ‘노동자는 종’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소비자이며 동시에 노동자라는 걸 생각하면 왕처럼 누리는 소비자의 권리가 결코 맘 편할 수만은 없다. 소비자만이 아니라 노동자도 그만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다 함께 조금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조금은 느리게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11 | 추천: 0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의 뜨거운 관심 속에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생한 가운데 ‘교황’을 소재로 한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신앙과 인간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돌아보게 한다. 제64회 칸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호평을 받은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교황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지닌 자리를 거부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한 추기경의 모습을 유쾌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교황이 된 미셸 피콜리 추기경이 추기경단의 축하를 받으며 성 베드로 광장에 나서 연설을 하려는 장면이나 우울증에 걸린 교황을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신치료사의 활약 등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눈길을 잡기에 충분할 듯하다. 메가폰을 잡은 난니 모레티 감독은 우울증에 걸린 교황 이야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일까. 영화 속 교황만큼이나 현실 속 교황의 이야기도 그 어느 때보다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는 모습이다.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은 영화 이상으로 신선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로 불린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새 교황은 선출 직후부터 파격의 연속이었다. 방탄 기능이 있는 교황 전용 대형 세단이 아닌 일반 차량을 이용하는가 하면,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 회의인 콘클라베 기간 동안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묵었던 호텔에 들러 직접 자신의 짐을 챙기고 숙박비를 계산하기도 했다. 새로 탄생한 교황을 위해 별도로 제작한 새 십자가도 거부하고, 주교 시절부터 사용해오던 것을 그대로 착용하기도 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뉴스거리가 되면서 연일 외신을 통해 접하게 되는 교황의 '변모(?)'는 모처럼 가슴 콩닥거리게 하는 기분 좋은 상상에 빠지게 하는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교황의 파격보다는 그의 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걸을 수도 있고 많은 것을 지을 수도 있지만, 신앙 없이는 인심 좋은 비정부기구(NGO)에 불과할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를 앞세운다면 우리는 교황·추기경·주교·사제일 수는 있지만, 예수의 제자는 아니게 됩니다." "세속적 가치로 어떤 일을 이루려 한다면 어린 아이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교황의 말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이러한 가치나 삶들과 멀어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출처 - EPA=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을 뽑은 콘클라베가 열리기 전 추기경단 전체 회의에서 가톨릭교회가 ‘신학적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루카복음에서 예수가 안식일에 여인의 병을 고쳐주는 구절을 인용하며 “교회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교회 밖으로 나오지 않을 때, 자기지시에 빠지게 되고 병들게 된다”고 말했다. 복음에서 회당장은 예수가 안식일에 일을 한 것을 두고 분개하지만 예수는 그를 ‘위선자’라며 비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밖으로 나와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와 “자기 안에서, 자신을 위해, 자신의 것으로 살아가는 세속적인 교회”로 교회를 구분하고 “교회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변화와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회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걸음걸음을 보며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웬일일까. 이제야 우리에게 교황이 있는 듯하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43 | 추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