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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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남북경색의 국면에서도 자신의 정치색을 우렁차게 내뿜는 남녘의 정치인이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진주의료원과 관련하여 자신의 정치적 방향성에서 중요한 일보를 내딛었다. 경영악화를 내세우고 진주의료원의 폐업을 천명하더니 그 책임을 병원노조(강성노조, 귀족노조)에 전가하였다. 폐업을 내걸고 정부에서 운영자금을 더 지원받을 구상인지 아니면 엉뚱한 정책을 관철시켜 거국적인 인물이 되고자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공공의료는 원래 수지를 맞추려는 사업이 아니므로 폐업의 이유는 전체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경영실태나 부채사유는 신문지상에 자세하게 보도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공공의료는 박정희의 좌파정책이라는 홍 지사의 발언에만 주목해보겠다. 그의 발언의도가 궁금하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하여 마치 박정희를 부활이라도 시키려는 시대에 박정희가 펼친 좌파정책을 털어냄으로써 박정희를 순수화하자는 것인가! 공공의료 정책이 박정희다운 정책이 아니니까 이제 찍어내야 한다는 것인가! 뉴라이트 역사인식에서 만연한 근본주의적인 난독증을 또다시 만나게 된다. 박정희의 역사에서 제거하고 극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쿠데타, 유신, 긴급조치, 조작사건, 사법살인, 노동탄압, 인권침해이지 의료보험이 아니다. 스스로 생각해보시라. 박정희의 업적에서 공공의료를 제거하자고 주장한다면 사실상 박정희 추종자들을 위압적인 극우파로 전락시키는 것 아닌가! 지난 16일 보건의료노조와 진주의료원 직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역에서 진주의료원 정상화와 홍준표 경남도지사 규탄을 요구하는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오늘날 우리는 노동자의 단체행동, 적정수준의 일자리, 교육, 의료혜택, 주거시설, 수입 등을 사회적 권리라고 부른다. 이러한 권리가 인권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사회권의 발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급진파들의 논리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우파들의 사회연대사상이나 가톨릭교회의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1891)과 같은 사회교리가 큰 기여를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회권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사회정의의 기준으로, 혹은 산업평화나 사회방어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이는 정치색에 관계없이 사회권이 모두에게, 모두의 정치적 목표에 유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늘날 정치적 논쟁도 사회권이 권리인지 아닌지에 있지 않고 그 보장의 범위를 둘러싸고 벌어질 뿐이다. 결국 사회권을 와해시킨다면 사회평화도 가능하지 않다. 박정희의 공공의료를 논하는데 독일에서의 사회권의 역사를 언급할만하다. 독일에서 사회권의 탄생은 조금 과장하면 보수정치가인 비스마르크의 작품으로 축약된다. 비스마르크는 1875년에 출범한 독일사회민주당(좌파정당)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악명 높은 이중정책(채찍과 당근)을 구사했다. 독일의회는 1878년 사회주의자금압법이라는 체제보호법를 제정하여 사회민주주의자나 좌익혁명가들을 처벌하였다. 1890년 폐지할 때까지 대략 1,500명의 사회민주당원과 노동자들을 이 법으로 감옥에 보냈다. 동시에 비스마르크는 노동자의료보험법(1883), 산재보험법(1884), 폐질노령보험법(1889) 등 일련의 사회법을 도입하였다. 물론 이러한 법들에 대해 사회보험으로서 노동자의 부담이 과중하다는 비난이 따라다녔지만 보수적인 비스마르크가 보험법을 주도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법의 제정과정에서 보여준 정파들의 태도는 흥미롭다. 공제조합을 추진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이윤의 감소를 우려한 기업가들은 당연히 이 법에 반대하였고, 가톨릭 중앙당은 사회보험이 이웃사랑이라는 자발적 의무를 침해한다며 반대했고(이점은 오늘날 미국보수기독교들의 시각과 유사하다), 사회민주당은 내부적으로 격렬하게 토론했지만 공개적으로는 이 법에 반대했다. 이 법을 지지한 것은 이른바 강단사회주의자들과 약자에 대한 국가의 가부장적 배려책임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다. 독일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그룹이 사회보험을 지지하였다는 점이 놀랍다. 즉 공공의료는 우파의 정책이었다. 좋게 말하면 비스마르크는 개별자본가의 이해관계도, 기독교의 자발적 사랑논리도 극복하고 총자본을 대변했다. 1970년대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노동운동을 탄압하기는 했지만 그의 의료보험은 비스마르크의 의도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개인의 주관적인 정치적 의도보다는 객관적인 시대정신이 중요하다. 보수정치가도 좌파정책이 없으면 하루도 버틸 수 없다. 공공의료는 이와 같이 원래 우파의 정책이었다.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이라면 좋은 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킴으로 비판적인 진영까지도 품을 생각을 해야 한다. 몇 주째 계속되고 있는 도지사의 공공의료에 대한 도전과 파괴는 오히려 박정희와 정치를 재야만화(再野蠻化)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시대의 유산이다. 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발전시킬 것인지 합리적으로 계산하자. 모든 정책을 좌우로 나누고 마침내 박정희 삶까지도 좌우로 나누어 찍어내고자 한다면 얻을 것이 무엇인가!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301 | 추천: 0
윤다정/ 인권연대 운영위원 살을 에일 듯 한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한겨울이었다. 용산참사 이후 4년 간 옥고를 치러야만 했던 철거민들이 지난 1월 31일 전국 곳곳에 흩어진 교도소에서 출소해 가족들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철거민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과 함께 ‘끼워 팔기’ 식으로 사면되었음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일단은 철거민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억울하게 신변까지 구속당하는 상황이 일단락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축하해야 마땅했다. 출소 철거민 환영 문화제는 출소일 당일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 옆에서 열렸다. 구속 철거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하던 친지들은 문화제 시작 전부터 철거민들을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불청객이나 된 것 같은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카메라를 들이대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이윽고 이들의 감정에 완벽히 공명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문화제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느라 야단을 피웠다. 철거민과 가족, 동료들은 각자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그 순간을 담아내기 위해 뷰파인더에 얼굴을 가져가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안타까움과 즐거움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지난한 앞날이 철거민과 가족들을 기다리지만, 철거민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모든 이들이 그간의 고충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잠시 잊고 한껏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미디어스 용산 남일당 건물 터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용산 한복판에 덩그마니 주차장으로 남은 남일당 터는 6명이나 되는 아까운 목숨을 잡아먹고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그을음이나 잿더미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하게 단장한 채, 4년 전 겨울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반문하는 듯하다. 용산참사를 상기시킬 만한 것들을 모두 들어내고 텅 빈 남일당 터와 같이, 용산참사 책임자로 지목된 이들 중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책임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뻔뻔스럽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실정이다. 용산 강제 진압을 주도했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19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김 전 청장은 당시 “공천 탈락의 원인이 용산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돼 보수정당인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의 정체성 및 국가관에 문제를 제기한다”며 “국가와 국민을 지킨 본인을 공천 탈락 시킨 것에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불만을 표한 바 있다. 김 전 청장에게서 무리한 진압이 어떤 슬픔을 불러일으켰는지를 고민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더해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은 지난달 12일 59억 원에 달하는 이자를 갚지 못해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다. 이후 사업이 정상적으로 재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석이 중론이다. 용산 개발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입안한 허준영 전 코레일 사장은 자신에게 용산 사업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것은 ‘음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허준영 전 사장은 지난 2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미국·유럽 금융위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게 국가 경제에 엄청나게 소중하고 서부 이촌동 2300세대 1만여 명의 생존이 걸린 사안이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살려보려고 최선을 다했고 많은 분들이 찬사를 보냈다”고 항변했다. “어디까지나 현 경영진이 잘 끌고 나가야 할 일”이라고 책임을 돌리기도 했다. 허 전 사장은 오는 4·24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서울 노원병 지역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한다. 온갖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되었던 용산 개발 사업의 정체가 신기루로 판명된 이 때, 환상을 조장한 이가 ‘나는 잘못이 없다’며 큰소리를 치는 이 때, 남일당 터에서 죽어간 6명의 목숨은 누가 보상할까. 평생을 가꾼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헤매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가 어루만질 수 있을까. 남일당 터는 대답하지 않는다. 남일당 터에 신기루를 심어 놓은 사람들도 도통 말이 없다. 윤다정 위원은 현재 미디어스 기자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81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작년 이맘 때 발간되었어야하는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에 대한 백서의 발간이 지금에서야 가시화 되어가고 있다. 2008년 12월 사건 발생 후 5년간 진행되었던 지난한 과정과 여러 입장이 반영되어 오고 갔던 말들을 뒤로 하고, 사건의 피해생존자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 단행본 형태로 발간된다. 총선과 대선으로 들떠있던 2012년은 사건의 해결을 어렵게 만든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선정으로 계획하였던 백서 발간이 미루어졌다. 백서 작업을 마무리하던 2월에 느닷없이 들려온 그 소식은 피해생존자를 더욱 분노케 하였고, 곧장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의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선정 반대 및 철회 촉구 운동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100분 토론에서의 일방적 발언은 피해생존자의 생각이나 사실 확인 없이 방영되어 다시 한 번 피해생존자의 가슴에 상처를 주었다. 지지모임 활동가들이 총선 관련하여 벌인 활동은 지지모임활동가들이 가진 역량을 소진시킨데다 활동의 결과도 미진하여 무력감에 빠지게 하였고, 또한번 백서발간이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후 다시 힘을 모으기까지 일년이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지난 20일 있었던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백서발간에 대한 홍보를 하는데 혹자가 한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는다. “부끄러운 일을.... 자랑도 아니고.... 그런 일에 대해 무슨 책까지 내요~~” 이런 정서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드러내서 올바른 방법으로 고쳐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 해결해 왔기 때문에 더욱 드러내야한다고 본다. 드러내야만 공론화 할 수 있고 그래야만 문제의 올바른 해결법을 도출해 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사건의 발생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이리라. ‘성폭력 사건 피해생존자들의 말하기 대회’라는 것이 있다. 관련여성단체에서 주최하는 이 행사에서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여러 방법으로 지난날에 경험한 성폭력의 상처와 분노를 표현하고 가슴속에 쌓아둔 감정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방법은 모두 아는 노래를 자신이 겪은 사건과 심정을 담은 가사로 개사하여, 아니면 새로운 곡을 작곡하여 부르기도 하고, 담담하게 옆 사람에게 이야기하듯이 발표하기도 하며 몸짓을 이용하여 자신의 상처와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아는 친척에게 당했던 성폭력도 몇 십 년이지나 나이가 지긋하게 되었어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결국 여러 경로를 거쳐 그 아픔을 토해내는 사람들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처럼 이 대회를 관람하러 온 방청객들이 대회가 진행되는 것을 보며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우리 주변에 수많은 피해생존자들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성폭력 사건 피해생존자들의 말하기 대회 모습 사진 출처 - 한국성폭력상담소 그러면 피해생존자들은 왜 자신의 상처를 말하고 싶은 걸까? 그리고 그 상처를 말하고 나면 어느 정도 치유가 되는 걸까? 사안마다 다르겠지만 민주노총 김** 성폭력 사건의 피해생존자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말하려 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거치면서 왜곡되어버린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자신의 글을 읽은 사람들이 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인정해주며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길 바라고 있다. 지난 5년 동안의 왜곡된 소문과 말들에 대하여 깊은 상처를 입어 그런 것이 아닌가한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생존자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기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성폭력사건에 대하여 조사할 경우, 사건에 대한 진술을 동영상으로 찍어 사건 조사에 활용하는 게 아닌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쓸 때 느꼈을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간의 과정에 대하여 긴 글을 썼다.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싶다. 또한, 백서가 발간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걱정이다. 행여, 피해생존자의 글에서 거론된 관련자들이 글의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게 되지는 않을지.... 사실 확인에 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되는 건 아닌지.... 또한 이런 과정이 피해생존자에게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갈지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그러나 이 모든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서 말하고 싶은 피해생존자의 의지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누리기 위한 그 소망이 희망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34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루소의 『고백』, 그 두꺼운 페이지가 다해 갈 무렵 해서 그런 몇 마디가 있었다. 진작 유명인사가 되고 불화와 추문을 겪은 후 생 피에르 섬에 은둔하고 있던 50대의 루소, 그가 어느 하루를 묘사하면서 쓴 대목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하는 데 골몰하기를 좋아하며, 생각나는 대로 왔다갔다 하고, 시시각각이 계획을 변경하기를, 파리의 온갖 동정을 살펴보기를,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바위를 들어 올리려고 하거나, 10년 걸릴 일을 열정적으로 계획하여 10분 후에는 아쉬움 없이 포기하기를, 요컨대 하루 종일을 순서도 맥락도 없이 허송세월하기를, 모든 일에 있어서 오직 그 때의 변덕만을 좇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 구절과 마주쳤을 때의 해방감이라니. 루소처럼 위대한 인물, 그렇듯 대단한 생산력을 자랑했던 사람도 때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곤 했구나. “10년 걸릴 일을 열정적으로 계획하여 10분 후에는 아쉬움 없이 포기”했다는 말을 이렇듯 떳떳하게 할 수도 있구나. 『고백』 전체가 루소의 ‘낭비’에 대한 증언이건만 왜 새삼 그렇듯 큰 해방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루소 스스로 또렷한 어조로 남긴 ‘낭비’의 기록이어서 그런지, 혹은 그 목을 만날 즈음 특별히 ‘계획’과 ‘유용성’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는지.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라는 책이 한때 꽤 읽혔다. 옛 소련의 과학자였던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세프의 실화라는데, 쳬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류와 더불어 떠오르는 걸 보면 내겐 왠지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상상한 소설처럼 각인됐던 것 같다. 제목을 보고는 SF 형식일까, 기대하며 책을 펼쳤는데, 실제로는 류비세프의 실제 삶을 조명한 내용이었다. 20대 때부터 시간을 한 톨 남김없이 알뜰히 써, 무려 7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는 과학자. 그러면서도 하루 열 시간씩 숙면했고, 손주들과 즐거이 놀아 주었으며, 저녁이면 음악회 관람을 즐겼다는 여유 있는 신사. 과연 그것은 시간을 지배한, 그것도 신경증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능수능란하게 지배한 자의 초상이었다. 1916년인가 세상을 떠났다니 ‘공산주의적 인간형’의 선전과는 거리가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는 프랭클린 플래너나 각종 자기 계발서에 대응하는 사회주의적 판본처럼 느껴졌다. 다 읽고 나니 좀 아득했다. 사진 출처 - 예스24 어디서나 초 단위까지 계산하면서 열심히 살라고 하는구나, 손주들과 놀고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까지 ‘열심히’의 자투리 속에 들어가야 하는구나, 아아, 이렇게 게으르게 멋대로, 널뛰는 마음에 휘둘리면서 살면 안 되는 거구나. 류비세프의 삶은 확실히 경탄스러웠지만, 1분 전까지 곤충학 원고를 쓰다가 돌아앉아 손주들과 놀고, 조금 있다 “자, 이제 너희끼리 놀아보렴.” 하곤 음악회 갈 준비를 하는, 정말이지 빠르고도 매끄럽게 모드를 전환하는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를 읽고 20년쯤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 생활은 ‘시간의 지배’와는 거리가 멀다. 하기 싫어 하기 싫어… 아 어디로 도망이나 갔으면 좋겠다, 그러다 막바지에 무리해서 일을 해치우고, 당연한 결과로 뻗어버리고, 뻗은 사이 일이 쌓이고, 또 하기 싫어 하기 싫어가 반복되고. 가까운 관계에서 감정의 소모를 줄이는 법도 좀체 체득하지 못해서, 뻔 한 레퍼토리로 가족과 신경전을 벌이고 동료들 사이에서 우울해하고 그러다 또 아무 일도 못한 채 대책 없이 시간만 보내곤 한다.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의 무지무지한 낭비다. 고쳐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렇듯 무대책한 나를 그럭저럭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 끝끝내 시간을 지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고, 그들의 삶 또한 삶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 그 정도인 것 같다. 굿바이 미스터 프랭클린, 굿바이 미스터 스마일즈, 그런 심경이랄까. 자기 계발서의 시조 격인 『자조론』을 쓴 스마일즈는 벵자맹 콩스탕 같은 사람, 대단한 천분을 타고 났으나 태반을 낭비해 버리고 만 존재에 대한 경멸을 책 곳곳에 뿌려둔 바 있다. 그야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낭비에는 마땅히 정신적 결함이 작동하고 있을 테고, 불안이나 불만과 통할 심태를 찬양하긴 어려울 테니까 말이다. 다만 낭비는, 불안과 불만은 분명히 현실의 한 양태다. 아마 유토피아에서도 다 소멸될 수 없을. 스마일즈는 『자조론』에서 상황을 탓하지 말고 자기 처지로써 변명하지 말고 꿋꿋하게 ‘스스로를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계속 타이른다. 옳은 말이다. 『고백』을 보면서 느꼈던 해방감이나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를 읽은 후 경험한 현기증 같은 것은 다 자기합리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 쓰려는 강박 없이도 언젠가 시간과 더불어, 나 자신과 더불어 조화롭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언젠가 류비세프 식 삶에 성공하더라도 낭비의 시절 또한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어쩌면 지배와 통제뿐 아니라 낭비도 인간을 구성하는 실물일지니.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45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세상은 자연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인간이든 생물이든 자연법칙에 따라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법칙을 지적으로 ‘대상화’할 줄 안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들어있다. 가령 고대인이 돌을 쪼개거나 날카롭게 갈면 좋은 무기나 사냥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또는 마른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았을 때, 그 고대인은 돌이 날카로워지고 불이 붙는 자연의 법칙을 ‘대상화하며’ 아는 것이다. 법칙을 대상화할 줄 아는 인간은 그 법칙을 하나의 ‘방법’으로 정리해 다른 이에게 전수한다. 이렇게 전수되는 자연법칙이 ‘기술’이다. 불을 피우는 기술 안에는 자연법칙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기술은 단순히 자연법칙이 드러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통제’되고 ‘조작’된 것이다. 번개에 의해 불이 나든, 인간이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든, 모두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이고, 그 자연법칙의 생생한 구체화이다. 그렇지만 벼락을 맞아 산불이 일어나는 경우보다 인간이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킬 때, 자연법칙은 인간 안에 한층 더 분명하게 스스로를 드러낸다. 자연 법칙이 인간 안에 하나의 지식으로 갇히는 것이다. 인간은 지식이 된 자연법칙, 전수된 자연법칙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통제한다. 불도 인간의 목적에 맞추어진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피우고, 집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불을 일으킨다. 인간이 자연법칙을 하나의 대상으로 삼아 자신의 목적에 어울리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물론 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붙든, 인간이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든, 그것은 자연법칙의 반영이다. 인간이 땅 위를 걷는 단순한 행동 속에도 자연법칙이 들어있다. 그럴 때의 자연법칙은 나무 안에, 인간 안에 그만큼 내면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별도로 떼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 인간은 자연법칙과 철저하게 하나 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만든 불은 인간에 의해 객체화되어 이용당한 불이다. 인간은 불을 이용하면서, 자신이 일으킨 불의 힘을 더 강하게 느끼고, 스스로를 자연의 통제자나 조절자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이런 방법과 기술의 산물이다.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과 기술을 체득할 때 인간은 자연법칙에 따르면서 동시에 그 법칙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연법칙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객체화한 자연법칙에 따를 때에만 그 자연의 효용성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찾아내고 만든 자연법칙이 다시 인간에게 자신의 법칙에 따르라며 요구하는 셈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통제 방법과 관리 기술의 주체로 스스로를 간주하는 사이 어느 틈에, 자신도 모르게 그 방법과 기술에 종속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칙에 의해 인간이 다시 대상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물질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연법칙을 추상화해서 기술과 기계를 만들어냈으나, 이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과 기계에 따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기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기계 법칙에 맞출 것을 강요한다.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기계를 만들었지만, 물건을 생산하려면 그 기계 법칙에 따라야 한다. 인간에 의해 조작되고 탄생되었으면서도 인간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추상화한 자연법칙’ 앞에서 인간이 다시 객체화되는 것이다. 그 법칙 자체가 주체가 되어서 인간에게 자신의 법칙에 따르라며 요구한다. 지배하는 자가 지배되는 상황으로 역전된 것이다. 2013년 3월 11일, 일본 대다수의 언론에서는 정확히 2년 전에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과 그에 따른 후쿠시마 원전(原電) 폭발 사고의 아픔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송과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대지진과 그에 따른 쓰나미는 어디까지나 자연 재난이었던 데 비해, 그로 인한 원전 폭발 사고는 인위적인 재난이었다는 데에 두 재앙의 근본적인 차이와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대상화하면서 핵분열에 따른 에너지 발생 방식도 통제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핵분열 원리에 따라 만든 원자력 발전도 인간이 그 핵분열의 수준과 원리에 맞출 때에만 예상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문명사적으로 보건대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문명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문명의 법칙에 종속될 때에만 문명은 인간에게 효용성을 내어줄 뿐이다. 문명은 인간의 편의대로 생겨난 것 같지만, 인간이 그 법칙에 맞출 때에만 문명은 인간 편을 든다. 원전 역시 인간이 핵분열에 의한 열에너지의 발생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인간에게 유용한 에너지가 된다. 그렇다면 원전 관련 산업이 인간에 의한 완벽한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을 낼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은 원전 기술이 인간에 의해 통제된 자연법칙 치고는 그 법칙의 농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을 급격하게 객체화시킬수록 인간의 통제 기술에도 한계가 커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원전 기술이 모든 이의 손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 전문 기술자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점도 걱정스럽다. 인류의 미래가 달린 일을 과연 극소수에게 전문가의 손에 맡겨두어도 되는 것일까. 원자력발전은 급증하는 에너지 수요에 대응하면서 화력발전이나 수력발전보다 경제성이 높다고 보았기에 시작된 산업이다. 하지만 원전 산업은 인간이 자연을 객체화하는 수준과 농도가 지나치게 높은 만큼 인간이 다시 자연에 의해 급격히 객체화될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위험하다. 그리고 반자연적이다. 자연법칙에 대한 완벽한 조절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아무리 해도 인간의 힘보다 자연의 힘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연법칙을 지배하다가 그 극한에 이르러 자연법칙이 다시 인간의 목을 죄어오고 있는 지경에 처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문제의식이 크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이명박 정부가 원자력을 수출한다면서 자랑스러워하던 모습을 보면서 어찌 저렇게 근시안적일까 하는 우려로 속을 태웠었다. 상업적 논리에 따라 단기적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연을 억지로 통제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원전의 안전을 강화하면서 유지하겠다’며 두루뭉수리로 슬쩍 지나려는 느낌이다. 하지만 자연법칙을 통제하며 인위적으로 가두는 방식이 지나치게 위험한 만큼, 원자력 분야 산업은 연착륙시키며 폐기해야 한다. 물론 2012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쓰는 에너지의 31.2% 가량을 원전에서 충당하고 있는 데다, 많은 사람이 원전 분야 산업을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원전을 내일 당장 폐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비용에 비해 원자력 발전의 경제적 효율성이 높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그렇더라도 자연법칙을 급격히 통제해가며 얻은 효용성은 당대는 아닐지언정 어떤 형식으로든 그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이른바 원전의 경제적 효용성에는 이러한 후대 비용은 계산되지 않았을 것이 뻔하다. 지난 9일 도쿄에서 열린 원전반대 집회(AFP.연합뉴스)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첫줄 가운데) 등이 시위에 참가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2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사망 내지 실종된 이가 20,852명고, 이재민이 31만5천명이 넘는다. 그것 자체는 자연 재해라 하더라도,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 폭발로 누출된 방사능은 일본은 물론 주변국, 나아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 중에 789명 정도가 원전 폭발로 인한 사망자로 확인되고 있다. 전 세계 모든 원전에서 이런 정도의 위험성은 상존하고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투자되는 비용까지 포함한다면, 정말 원전이 경제적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불과 이 년 여 만에 원전의 위험성, 반자연성에 대해 둔감해져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원자력은 효율성만으로 수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원자력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 지나치게 급격하고 농도도 짙어서 재앙의 가능성이 잠복해 있는 분야이다.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면, 더 유지해서는 안 될 분야이다. 자연을 통제하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안전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겠지만, 논리적으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일부이다. 인간은 애당초 자연 안에 속해 있는 존재이지, 자연 너머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자연을 완벽히 통제하는 주체가 결코 되지 못한다. 자연을 객체화하면 할수록 위험한 것은 자연 자체보다도 도리어 자연에 의해 다시 객체화되는 인간이다. 박근혜 정부는 머뭇거리지 말고 설계수명이 다한 원전은 점차 폐기하되, 비용이 더 들더라도 신재생에너지, 자연친화적 에너지 확보에 힘을 쏟아야 한다. 한시바삐 원자력 폐기를 위한 로드맵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전 국민이 에너지를 줄이는 일에 동참하도록 요청할 도리밖에 없다. 앤서니 기든스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 개발과 국제적 공조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듯이, 원전 폐기를 위한 국제적 공조에 한국이 나설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이 결국 인류가 사는 길이겠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 정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2013년 3월 11일, 일본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추모 행사를 동경에서 보고 들으면서 원전 폐기가 그저 희망만은 아니길 바라며 소회를 적어보았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에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06 | 추천: 1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하기 얼마 전, 그에 대한 제보가 신문사로 접수됐다. 주로 밤 생활이 문란하다는 내용이었다. 특파원을 통해 미국에 사는 제보자와 접촉했다. 그런데 제보자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취재는 하더라도 자신의 허락 없이는 기사를 싣지 못한다는 둥 자신이 참전용사 출신인 점을 강조하며,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보복하겠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했다. 제보자를 통한 취재를 포기하고 다른 루트를 찾아보려고 노력하던 중 김 후보자가 사퇴했다. 알고 보니 우리에게 접수된 제보와 비슷한 내용이 한 재미교포의 블로그에 떠 있었고, 트위터를 통해 이 글이 퍼지고 있었다. 김 후보자가 사퇴한 진짜 이유가 이중국적이나 미 중앙정보국(CIA)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 아니며, 부동산 때문도 아닌, 바로 이 글 때문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글을 올린 재미교포는 자신을 박근혜 지지자라고 소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은 장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용기를 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종훈이 자신을 고소해서 미국 법정에서 진실이 가려지길 바란다고도 썼다. 그런데 김종훈 씨는 장관 후보자직을 사퇴하면서 야당을 비난하고 한국을 저주했을 뿐, 이 사람을 제소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퇴를 발표한 지 하루 만에 미국으로 떠났다.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며 미국 국적을 포기하겠다던 사람이 부리나케 미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장관 자리를 주지 않는 나라는 조국이 아니란 말인가. 그의 진짜 조국은 어디란 말인가. 김종훈은 미 해군이 발행하는 잡지 <프로시딩(Proceedings)> 2011년 12월호에 ‘군 복무는 완전한 미국인이 되는 통과의례였다’는 제목의 자필 기고문을 실었다. “내가 해군에 들어간 21살 때만 해도 미국 시민권도 있고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미진한 감이 있었다. 군 복무를 통해 나는 모두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곳이 진정 나의 조국이며, 나는 정말로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게 됐다. 이것이야말로 군 복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적었다. 대한민국 장관으로 내정되기 불과 1년여 전, 자신의 진정한 조국은 미국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사진 출처 - 한겨레 이에 앞서 1998년 미 일간지 <볼티모어 선>과의 인터뷰에서는 한국을 비하하는 듯 한 발언을 했다. 한국에 대해 “닳아버린(frayed-신경을 소모시키는 이라는 뜻도 있다) 국가, 온통 가난만 지배하던 국가라는 기억만 갖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가난했지만 나를 낳아준 고마운 나라다, 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1998년은 마침 한국이 외환위기라는 초 의 사태를 맞아 부동산과 주식 값이 5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하고 실업자가 쏟아지던 준전시 상황이었다. 미국 시민권자 김종훈은 이때 강남 부동산을 집중적으로 사들인다. 한국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지만, 투자하면 돈이 될만한 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여론은 그닥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그는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룡 부처 장관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이 상황이 참으로 괴이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이돌그룹 2PM의 멤버였던 박재범이 한국을 비하했을 때 한국인들이 보였던 히스테리컬한 반응과 김종훈에 대한 반응의 격차가 너무 커서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 비하 발언 당시 18살에 불과했던 교포 3세 박재범과 38살의 교포 1.5세 김종훈 가운데 누가 더 비난받아야 할까, 라고 물을 생각은 없다. 대신 이렇게 물을 수는 있겠다. 둘 중에 애국심이 더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더구나 김종훈은 CIA와의 특수 관계가 의심되는 사람이었다. 정보통신과 과학기술 등 우리나라의 미래가 걸린 첨단산업을 총괄하는 부처의 장관이 국가관이 불분명한 사람이라면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될까. 미국과 한국의 국익이 엇갈리는 미묘한 상황에서 김종훈은 어느 조국을 선택할 것인가. 김씨가 사퇴해버리면서 이런 질문들이 충분히 제기되지 않았고, 토론되지 않은 채 묻혀버렸다. 이런 사람을 무슨 대단한 인재인양 삼고초려를 했다는 박근혜 대통령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탈세범과 부동산 투기꾼, 공금 횡령범 등 온갖 잡범들을 고위 공직자로 추천한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다만,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가 친일파인 점을 고려하면 박 대통령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본이 조국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 아닌가. 대한민국의 보수는 지금 그들을 변호하기에 급급하다. 먹고 살려다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티브이 토론회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에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고 애국가도 부르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대통령으로 출마할 자격이 있는지 물었다. 너희 조국은 어디냐를 물은 것이다. 내가 알기로,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엔엘 진영 운동가들은 누구보다 태극기를 사랑하고 애국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1980년대 후반 태극기를 온몸에 휘감고 휴전선을 넘으려 했던 게 바로 이들이다. 이들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어 국수주의적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국가관에 관한 질문은 오히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이 땅의 보수라는 사람들에게 돌려야 한다. 당신들의 조국은 미국인가, 일본인가, 한국인가. 주한미군 범죄에 대해선 쉬쉬하면서 미국의 이익이 곧 한국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당신들의 조국은 어디인가. 일본이 극우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고립화를 재촉하는 한일군사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덕분에 경제가 발전했다고 주장하는 당신들의 조국은 어디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16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노회찬 ‘안기부 X - 파일’ 사건 판결을 접하면서 법은 정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해야 했다. 순수한 법 논리로도 도저히 수긍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XX - 판결’이다. 노회찬 의원은 재벌가 두 사람의 여야 대선 후보 자금지원과 검찰 간부들에 대한 떡값 전달 대화 내용이 들어 있는 속칭 ‘안기부 X- 파일’을 공개하였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떡값 검사의 실명을 공개하였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선고하였고, 결국 노회찬은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어느 언론의 지적처럼 통신비밀보호법이 아니라 뇌물검사보호법으로 둔갑하였다. 뇌물을 전달하며 권력부패의 중심에 서있던 삼성 재벌가 사람들은 면죄부를 받았고, 오히려 정의를 부르짖은 노회찬은 범죄자가 되었다. 며칠 후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MB정권은 ‘떼법’이라는 듣보잡의 해괴한 용어를 창출해냈다. 그들이 말하는 떼법이란 ‘법이 있으면 지켜야지 떼를 쓰면 되느냐’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고상틱하게 말하자면 법치주의를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MB정권 5년 동안 법치주의는 줄곧 후퇴를 거듭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대다수 법률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나마 미네르바 사건, PD 수첩 사건, KBS 정연주 사장 사건 등에서 보는 것처럼 법원이 나름대로 중심을 잡아 주면서 그래도 법치주의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법원은 통신비밀보호법을 법의 취지 및 정의와는 동떨어지게 MB정권의 떼법처럼 해석 적용하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법이 정의를 지켜주지 않으며, 법이 정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례는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이승만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자행한 사사오입 개헌사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세력이 엄연히 존재하던 민주정부와 헌법을 뒤집어엎고, 자기들끼리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비상조치법을 만들어 공포 시행하고, 헌법을 개정한 일, 박정희 대통령 3선을 위한 헌법 개정과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만든 일,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을 위해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한 일 등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다. 유신헌법 국민투표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된 1972년 11월21일 박정희 전 대통령과 딸 박근혜 당선인, 육영수 여사(오른쪽부터)가 투표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다시 말해 우리의 헌정사 자체가 법이란 정의가 아니라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독재자의 만능키로서 작동하였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경우 법은 법이라는 형식만 뒤집어 쓴 것이고, 실제로는 폭력과 전혀 다름없는 것에 불과하다. 법의 두 얼굴이고, 폭력과 법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대법원 판결 역시 법치가 아닌 정의를 저주하는 폭력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 MB정권에서도 법률을 개악하는 일은 수없이 자행되었다. 한편으로는 검찰을 비롯한 법률기능공들을 이용하여 자의적인 법률 해석을 일삼고, 자기 입맛에 맞게 편파적으로 법률을 적용하며 법치주의를 후퇴시켰다. 그리고 MB는 대통령 임기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편에 서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을 용감하게 사면시켜 주면서 법치주의를 무력화시켰다. 이제 향후 5년간은 박근혜 정권이 지배 권력을 행사할 것이다. 박근혜가 말하는 법치주의 모습은 어떨까. 떼법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을 것 같다. 용어 자체가 너무 천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법이 있으면 지켜야지요. 법을 어기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할 것입니다.” 즉 실질적으로 떼법 논리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정의를 위하여 법률이 만들어지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해야 할 법이 정의를 짓밟는 악마의 성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역사의 경험칙이다. 형식적으로는 법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법이라고 말할 수 없고, 법의 지배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과거와 현재의 법치주의 모습이다. 그래서 법치주의에는 정의를 지키는 일에 시민의 참여와 힘이 필요하다. 특히 정치(政治)가 법치(法治)와 만났을 때 법치는 정치의 희생양으로 바뀌었고, 법치는 왜곡되었다. 박근혜 정권에서는 정의의 파수꾼으로서 법치주의가 실행되기를 어렵겠지만 기대해본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12 | 추천: 0
육영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2013년 설 연휴를 가족과 함께 즐겁고 평화롭게 잘 보내셨는지요? 명절과 국경일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오늘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 할 일상생활입니다. 말하자면, 개인이 하루하루 노동하고 생각하며 욕망하는 하찮은 삶들이 연대하여 또 다른 중요한 역사적인 기념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2013년 계사년을 맞아 우리가 뱀같이 차갑고도 매끄럽게 일상생활정치의 숲을 헤쳐 갈 몇 가지 말씀을 새해인사 삼아 모아보았습니다. Ⅰ 모든 혁명은 하나의 지배집단을 다른 지배집단으로 대치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모든 혁명은 목표를 넘어서는 힘, 지배와 착취의 근절(根絶)을 향하여 노력하는 힘을 풀어 놓았다. 그러한 힘들이 쉽사리 패배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설명을 요구한다. 권력의 상태도, 생산력의 미숙성도, 계급의식의 부재도 적절한 해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모든 혁명에는 지배에 대한 투쟁이 승리할 만한 역사적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계기는 언제나 헛되이 지나가 버렸다. 세력의 미숙이나 불균형이라는 이유의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자기패배의 요소가 혁명의 역할 속에 포함되어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혁명은 배반당한 혁명이다. - 마르쿠제 1968년 혁명의 아이콘이며 신좌파의 대표 사상가였던 허버트 마르쿠제는 모든 혁명은 본질적으로 ‘배반당한 혁명’이라고 설명합니다. 혁명이 숙명적으로 실패하는 것은 계급(계층)의식의 미성숙이나 지배집단의 억압 때문이 아니라, 민중 혹은 다중(多衆)이 자발적으로 지배층의 세계관을 수용·모방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보통사람들은 교사, 기업주, 정치선동가가 외치는 “하면 [입학, 승진, 선진국] 된다!”는 ‘수행원칙’(performance principle)의 구호를 묻고 따지지도 않으며 합창합니다. 또한, 사용할 물건이 아니라 신분의 상징물인 외제가방이나 첨단전자제품 구입에 목을 매는 ‘과잉 욕구’(surplus desire)의 포로로 전락합니다. 마르쿠제의 분석에 따르면, 열심히 하면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는 자유경쟁적인 시대정신과 내가 소비하는 것은 ‘침대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탈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등 떠밀려 우리는 혁명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배반합니다. ‘지배에 대한 투쟁이 승리할 만한 역사적 계기’가 바람처럼 날아갔습니다. 프랑스 68혁명 당시 구호. "금지하는 것은 금지된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II 망각이란 천박한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그렇게 단속한 타성력(vis inertiae)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원자료들이나 사료들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자료나 사료들은 단순히 존재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다양한 종류와 정도로 언급되기도 하고 침묵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총포의 소음장치가 총소리를 침묵시키듯이 사람은 어떤 사실이나 한 개인을 ‘침묵시킨다.’ - 미셸 롤프-트루요 ‘배반당한 혁명’은 과거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망각의 바다에서도 싹을 틉니다. 불편한 진실에 대한 과거 기억을 강제적으로 삭제하거나, 권력의 희생자들을 사탕과 채찍으로 침묵시키면서, 이긴 자들의 역사교과서에서 혁명은 늘 지연되고 실패합니다. 4.19와 5.16의 다른 기억들, 장준하가 베었던 돌베개의 고행과 구로공장에서의 각혈하는 노동의 새벽에 대한 기억은 근대화의 불쏘시기로 산화하였습니까? 국가권력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방해로 증언과 저항의 기억들이 탈색되지 않도록, 승자들의 달뜬 아우성에 우리들의 낮은 목소리가 침묵당하지 않도록, 역사의 기억투쟁은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III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 이 헛소리처럼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 이다 …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가고 다시 오지 않을지라도, 그 거리에서 함께 부르던 노래와 연대감은 오롯이 남습니다. 안 되는 혁명에 쫓겨 낯선 방에 갇힌 나는 또 다시 녹슨 펜에 침을 묻혀 자유와 평등의 이름을 낙서합니다. 나의 ‘역사를 걱정하는’ 마음이 어리석은 농담처럼 경박할지라도, 우리가 맞이하는 새해는 촛불처럼 밝고 풍성합니다. 너와 내가 간직한 저항의 기억과 혁명의 추억은 봄날처럼 다시 꽃피고 지저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혁명은 고독해야 하는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까마득한 망루에 올라 허공 속을 걷는 당신의 고독과 그 아래에서 마중하며 숨찬 나의 고독은 만나서 악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혁명은 배반당하거나 승패가 있는 경주가 아니라, 일상적인 저항의 가벼움으로 비누거품처럼 번지고 서로 포옹하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 육영수 위원은 현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15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개 부족한 것이 귀합니다. 귀한 것이 부족한건 아니구요. 부족 하다는 것은 자연의 객관적 실체이고 귀하다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가치기준일 뿐입니다. 하여 미리부터 귀한 존재는 없는 것이지요. 내 부모 내 아이가 귀한 이유는 핏줄 이라는 것 때문 이겠는데 세종대왕 이도는 부인이 여섯에 자식이 스물 둘입니다. 그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부인이 무려 열둘에 자식이 스물아홉. 이 양반들도 핏줄이라는 것 때문에 가족들이 귀했을까요? 가장 많이 살 부비고 가장 많이 입 맞추고 가장 많이 혼나고 또 가장 많이 역정 내며 살았던 세월의 흔적 그것만이 가족을 귀하게 만듭니다. “천 번이고 다시 태어난대도 그런 사람 또 없는”이유는 한 인간의 삶에서 가족과 같은 존재는 다시없기 때문, 즉 부족하기 때문 아닌가요? 금쪽같다고 그러기도 하고 금보다 귀하다고 그러기도 하던데 만약 금보다 흑연이 현재의 비율과 반대로 부족했다면 아마 인종차별이라는 말은 없었을 거라고 상상해 봐요. 금은 녹여서 지붕의 철판으로 쓰거나 자동차 바퀴의 휠 정도로 쓰일 것이지만 세상의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흑연으로 도배가 되었을 테니까요. 화폐의 가치도 흑연 본위로 매겨졌을지도 모르고 흑연과 닮은 검은색이 화려함의 기준이 되어서 무색인종에게 가장 각광받는 화장품도 검은색이었을 수도 있지요. 수도가 없었던 시절 한 마을에서 가장 귀한 것이 우물 이었습니다. 당연히 물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몽골 초원에서나 사막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 오아시스입니다. 그 물로 나그네는 목을 축이고 짐승들도 갈증을 해소 합니다.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지요. 자연의 것 중에서 부족한 것은 모두 귀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귀한 것은 독점하지 않습니다. 그게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방식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이와는 좀 다릅니다. 스스로에게는 “부족한 사람” 이라고 낮추며 겸손을 떨지만 자기보다 부족한 타인을 대할 땐 “부족함” 대신에 “모자라다”라는 표현을 더 많이 씁니다. 지능이 부족하거나 학벌이 부족하거나 벌이가 부족하거나 죄다 모자란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모자람”은 차별의 기준이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모자란 사람은 점점 더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 “모자란 사람”의 노동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넉넉해진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부족한 것을 모자라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모자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혹독하기만 합니다. 하여 모자란 사람들은 한강대교의 난간 위를 오르기도 하고 칼바람 부는 송전탑위에서 농성을 하기도 하고 군사기지 반대를 외치며 5년 넘게 거리에서 싸우기도 합니다. 교육기업 재능교육의 해고자 여민희(39), 오수영(38)씨가 6일 오전 8시30분께 재능교육 본사 앞에 있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의 약 15m 높이의 종탑에 올라가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부족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자연의 방식이 그리운 날입니다. 그대로 적용을 한다면 신체적 자유가 부족한 장애인이 귀해지고 배움이 부족한 막노동꾼이 귀해지고 생존의 위기에 처한 노동자들이 귀해지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분단이라는 것도 귀해지고 분단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귀해 집니다. 오늘도 혜화동 성당의 15미터 첨탑위에 해고 노동자 두 분이 올라갔습니다. 그런 사람 또 없이 귀한 분들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55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 나이를 먹는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으로 가는 인생의 여정이 보인다. 나이가 심하게 나를 흔드는 것을 보니 갱년기인가 보다. 당뇨에도 흔들리지 않고 술과 인정에 취해 휩쓸렸건만 세월에 장사가 없다더니 허리 병의 고통에 지친 몸이 지난날의 객기를 통탄하누나. 젊은 시절부터 허리 병이 도져도 조금만 각성하고 몸을 관리하면 금세 원기회복이 되기를 수십년. 구부정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걷는 폼이 노인이 따로 없다. 채 몇 초를 걷지 못해 주저앉고 누워서 꼼짝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내 입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의 한숨과 함께 저절로 터져 나온 맹세가 있다. ‘남은 여생, 다시는 제 육신을 괴롭히고 학대하지 않겠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간혹 나이를 의식하게 된 계기들이 있다. 스물 여섯 살에 늦깎이 방위로 용산의 군 복지시설에서 웨이터를 했었다. 당시 나이어린 고참들이 ‘나이값 못한다’고 얼마나 갈구 던지... 양식당 웨이터 고참들이 제일 무서웠다. 그때까지 가난하게 자라고 연애 한 번 못해 양식을 먹어봤어야 양식 세팅이 수월했거늘 - 와, 양식에는 숟가락, 나이프, 포크, 빵에 바르는 것 등 가짓수도 많고 수프, 야채, 빵, 주메뉴 등 차례대로 격식을 차려 내놓고 주메뉴는 커다란 쟁반에 들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양손에 희안하게 껴서 서빙하라는 것이다. 정말 외우기도 어려웠다. 야채 나갈 때 빵 나갔다고 구르고, 수프를 너무 많이 떠서 줬다고 야단치고 주 메뉴는 격식대로 제대로 들고 나가지 못한다고 원산폭격 당하곤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나이값 하고 상관이 있겠는가, 이 어린 고참 녀석들은 항상 학력과 나이값 타령하며 심하게 갈궜다. 모욕적이었다. 암기에 능한 범생이로 자라나 개인 과외 외에는 사회적 경험도 고생도 전혀 몰랐던 자신을 돌아보며 자책도 하고 다짐도 했었다. ‘나이값’하며 살자고. 고참들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양식당 웨이터에서 영원히 배제된 후 한식당에서 만큼은 된장찌개, 설렁탕 등 부지런히 서빙을 하는 가운데 국방의 소임을 무난히 완수했다. 다시 ‘나이값’에 대해 새삼 실감하게 되는 갱년기가 찾아왔다. 신체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하지 못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며 인생의 중반전을 훌쩍 넘긴 줄도 몰랐던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의 적신호 하나로 육신과 정신의 변증법적 통일을 지향해 나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거울로 자신을 찬찬히 훑어보는 귀중한 경험의 시간을 가졌다. 왜 이리 나이 먹어 가는 줄을 몰랐을까 하는 회한이 든다. 골병이 들 때까지 제 때 추스르지 못하고 ‘인생은 짧고 굵게’라는 객기로 세월을 거역하며 내 인생에 큰 불경죄를 저질렀다. 건강하게 살며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삶의 여정이다. 그 가운데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도 있겠지만 불혹을 넘겨 지천명으로 가는 내 인생의 여정은 솔직히 너무 멀리 왔다는 대오각성이 일었다. 육신의 쇠퇴를 경험하는 순간, 스스로의 경험과 학습의 부족을 느끼고 내 인생의 수많은 빈 구석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쳇바퀴 돌 듯 바쁜 직업의 일상에 안주하며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신도 쇠잔해져 가고 있었다. 초심은 과거일 뿐이고 현재를 채찍질하는 초심이 없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제 몸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그 모습 그대로 인생을 허투루이 소비만 하였을 뿐 채워 나가지를 못하고 있다. 일상이 스트레스로만 느껴졌기에 술과 함께 일상의 탈출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정신과 육체에 작은 것 하나라도 생산적으로 채워나가는 그 소중함을 망각하였던 것이 아닐까, 무엇 하나 제대로 채워 넣은 것 없는데 무엇에 안주하여 불혹을 넘어 지천명으로 가는 길을 이토록 방치하였단 말인가. 지천명이 다가오는 소리가 저만치 들린다. 이제 회한을 거두고 초심을 다시 만들어 ‘여생’에 대한 알찬 설계도를 그리자. 허리 병을 앓는 새해의 참회록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3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