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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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육영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프랑스혁명이 연상시키는 공포의 상징물인 기요틴은 사실 평등하고도 인도주의적인 죽음을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혁명이전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에서는 출생과 사회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형식의 사법적인 죽음이 선고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목을 베는 참수형은 귀족에게만 허용된 특권적 죽음이었고, 제3신분으로 분류되었던 평민 범죄자들은 목을 매는 교수형으로, 이단이나 마법과 수간(獸姦) 같은 도덕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몸을 형틀에 묶은 뒤 뼈를 체계적으로 부러뜨려 목숨을 빼앗았다. 사지를 찢어 죽이는 가장 야만적인 능지처참 형벌은 왕에 대한 반역죄를 감히 도모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프랑스혁명 덕분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과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죄인들은 공평하게 고통 없는 찰나적인 참수형을 맞이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끔직한 ‘죽음의 평등’ 외에도 프랑스혁명은 근대적인 인권개념의 탄생지라는 평가에 걸맞는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개혁을 실천했다. 고문과 노예제와 같은 비인간적인 제도가 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배우(!)와 유대인 및 사형집행인과 같은 직업적·인종적·종교적 소수자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인간의 여러 권리들에 대한 무지, 망각(소홀), 또는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를 낳은 유일한 원인”이라고 천명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1789년)는 지난 200여 년 동안 인권의 중요성을 계몽하는 좌표가 되었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안전과 압제에 대한 저항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이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들의 하나”라는 조항들은 근대 인권이 지향·성취해야 할 기본목표를 명시했다. 유감스럽게도, 근대적 인권의 탄생이 인간성의 자동적인 성장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역사는 일직선으로 행진하지 못하고 때로는 소용돌이에 휘감기며 때로는 위험한 여울목에서 실종되거나 익사한다. 예를 들면, 1792년의 자유로운 이혼법은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가부장권의 손아귀에서 옥죄였다가 왕정복고와 함께 1816년에 취소되었다. 아이티혁명의 흑인영웅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로 잡혀와 외딴 감옥에서 1804년 사망했고, 1830년부터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이슬람교도) 남성들은 뒤늦은 1947년에야 공민권을 획득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가 보편적인 원칙으로서 인권의 청사진을 제공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성―계급―인종의 편견과 차별에서 유래하는 인권의 억압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되씹어보면, 남녀평등, 성소수자의 권리, 노동과 복지의 권리, 휴식과 사생활의 권리, 이주외국인의 국적획득과 귀화의 권리 등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혁명적 과제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민족/제국주의 시대라고 알려진 19세기 후반부에서 냉전시대로 특징되는 20세기는 역설적으로 인권의 중세(암흑)시대였다. 민족‘자결’주의라는 배타적인 신념은 다른 언어적·종교적·인종적 소수민족들을 증오하도록 선동하는 나팔소리로 전락했고, 좌파/우파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무한경쟁의 수레바퀴 밑에서 인권은 산산이 조각나고 깜깜하게 감금당했다. 1944년에 영국과 소련은 곧 출범할 유엔헌장에 인권 항목을 포함시키자는 다른 나라들의 제안에 반대했고, 미국은 모든 인종의 평등에 관한 구절을 포함시키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바야흐로 인권은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통제하고 배급해야 할 권력으로 변질했으며, 동시에 특정 이데올로기적 올바름을 후원하고 확장시키는 무기로 작용했다. 이런 세계사적 위기 속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서〉의 기본정신을 계승·발전시킨 〈세계인권선언문〉이 1948년 유엔의 주도하에 발표되었다.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150년 후에야 인권은 비로소 재 정렬된 기준선에 서서 힘찬 달음박질의 호각소리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 인권선언문 사진 출처 - 네이버 우연히(?) 〈세계인권선언문〉이 공표된 1948년에 독립국가로 출범한 우리나라가 지난 반세기 동안 경험한 인권의 역사는 어떤 무늬와 빛깔일까? 제1공화국 이승만 독재시절→박정희 제3공화국과 유신정권→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이명박 정부를 거치는 동안 이 땅에서의 인권은 어떻게 부침하고 왜 후퇴했는가? 독재자를 하와이로 내쫓았던 4·19 학생혁명의 값진 희생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촛불축제로 부활하는가? 공기관의 민간인 불법사찰, 쥐(G)20정상회담 포스터 농담사건, 창공의 크레인에 위태롭게 고립된 노동권 등 시대착오적인 인권침해의 ‘배후’에는 누가 비겁하게 숨어 있는가?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심각하게 성찰하는 시간이야말로 이 땅에서 ‘인권적 인간형’이 단련되고 숙성되는 위대한 순간이다. 강조하건대, 누구의 이름을 ‘대한민국 인권탄압 실명사전’에 기록해야 하는지 우리는 (장마더위보다 더 짜증스러울 정도로) 물어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좋은 질문은 틀린 대답을 늘 이기기 때문이다. 육영수 위원은 현재 중앙대학교 역사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44 | 추천: 0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거의 신경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TV드라마를 싫어한다. 거기다 눈물까지 짜내는 멜로까지 합세하면 거의 혐오(?)하는 수준에 이른다. 어릴 때도 온가족이 한데 모여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어머니가 인기드라마를 방영하는 채널로 돌리면 열이면 열 투덜대며 딴 놀이거리를 찾곤 했다. 개연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주제나 산으로 가는 스토리, 억지스런 내용까지는 어떻게 근근이 견뎌본다 해도 부조리와 불의를 ‘영웅’이나 ‘성공’이란 단어와 대치시켜버리는 앞에서는, 어떤 유별난 정의감이 있는 게 아닌데도 보기조차 힘겨워질 때가 많았다. 그런 드라마에, 주인공의 부침에 따라 박수를 치기도 하고 혀를 차는 어머니 모습에 짜증을 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요즘 한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하는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가 인기인 모양이다. 드라마에 알레르기가 있다시피 한 나로서는 일부러 찾아 ‘본방사수’를 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지만 재미있다는 주위 얘기에 끌려 식당이나 터미널 등에서 사람들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넘겨다본 적이 있다. 이 드라마는 호텔을 배경으로, 화려한 성공과 실패 속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담아낸 전통 멜로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은 돈도, 학벌도, 운도 없는, 그래서 부당한 일을 당해도 도망치거나 참는 것으로밖에 세상에 응전할 방법이 없는 낯익은 우리 이웃의 딸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우연히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우습게도 단순한 거짓말 한마디에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던 문들이 활짝 활짝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주인공이 발견한 현실은 굳게 믿었던 도덕교과서의 내용과는 전혀 딴판으로 속는 사람이 바보고 속이는 사람이 웃는 승리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드라마 '미스 리플리' 사진 출처 - MBC 그런데 이런 드라마가 왜 인기를 끄는 걸까. 아마 지금 당장은 거짓말쟁이가 더 신뢰를 얻고 나쁜 사람들이 더 많은 걸 누리는 부조리한 현실을 눈앞에서 까발리고 끝내는 그런 삶이 파탄을 맞을 것이라는 기대심리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드라마에서 사회는 여전히 거짓말을 권하는 부조리투성이 세상처럼 보인다. ‘성공’이라는 목표 앞에 거짓말은 성공의 계단쯤으로 치부되며 세상살이에 있어 훌륭한 도구로까지 포장된다. 이 드라마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리플리’는 누구나 한 번쯤을 들어보았을 전설적인 미남배우 알랭 들롱이 주연한 프랑스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에서 주인공의 극중 배역인 톰 리플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가난한 청년 리플리는 부잣집 친구를 죽이고 그의 대역을 하는데 그의 이름은 친구를 모사, 복제(replication)하는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이름을 딴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진짜로 믿고, 현실을 부정하여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정신병리 현상을 말한다. 리플리 증후군에 빠진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신분 상승 욕구에 사로잡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다 결국은 자기 자신마저 속이고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살게 되는 인격 장애를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한 거짓말마저 사실로 믿기 때문에 스스로 거짓말을 인식하지 못한다. 당연히 자신이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때문에 결국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이란 성에 갇혀 스스로를 질식시켜 죽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미스 리플리, 미스터 리플리들이 넘쳐나고 있다. 왜 그럴까. 답은 단순하다.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줄 아는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많은 ‘리플리’들이 일취월장, 승자의 권리를 향유하는 동안에도 도무지 거짓의 꺼풀이 벗겨지지 않을 듯한 우리 사회의 흐름. 이런 숨 쉬기조차 힘들게 느껴지는 공기가 대중들로 하여금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리플리 대열에 끼지 못하면 억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또 다른 거짓을 가공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드라마‘미스 리플리’는 거짓말로 만들어지는 달콤한 세상이 곧 악마가 안겨주는 독배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드라마보다 강한 현실의 성에 갇혀 스스로를 질식시켜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53 | 추천: 0
황미선/ 인권연대 운영위원 7월 12일...... 그 날이 다가온다. 3년이 지났어도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그 시험을 봐야하는 아이들은 몸에 밴 오랜 습관처럼 문제풀이로써 대비하고 있다. 이 시험을 시행한 자들은 학력성취도평가라고 명명하나 일제고사로 더욱 알려진 그것.... 그것이 바로 다가오는 7월 12일, 문제 많다는 일제고사의 형태로 치러진다. 일제고사의 문제점은 교직단체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 시험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다는 이유로 해직된 교사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교과부와 해직교사 사이에 진행된 법적 다툼에서 해직교사가 승소함으로써 교과부의 판단착오와 과도한 직권 남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교과부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일제고사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시험을 시행한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고도 볼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의 경우 국어, 영어, 수학은 전집(모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전체 조사로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듬)의 형태로 보고, 사회와 과학은 표집(모집단의 특성을 잘 반영할 수 있는 표본을 추출하는 방법으로, 확률적으로 모집단을 대신할 수 있는 일부의 대상을 선발하여 조사하는 것)의 형태로 본다고 한다. 교육을 행한 자가 교육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집으로 이루어질 경우 나타나는 문제, 예를 들어 시험결과에 따른 전국 소재 학교의 서열화, 그에 따른 지역, 학생, 학부모 교사들의 서열화, 그리고 그에 따른 사교육 시장의 부정적 활성화 등의 문제점을 고려하여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교과부는 표집으로 보면 사라질 여러 가지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경쟁으로만 치닫는 교육이 우리 청소년들의 자살률을 세계 1위로 만든다든가 인성교육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일제고사는 교과부가 주장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교육의 내용면에서 볼 때 일제고사의 획일적 시험내용은 학생들의 학력 신장도 가져올 수 없고.... 지역마다 다른 스펙트럼을 가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치른 시험의 결과를 가지고 학교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그렇다면 교과부가 이런 지침을 내려보낸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일제고사 실시 후 발생할 문제점들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교육단체가 비판하고 있는 사교육의 활성화를 위해서 인가? 아니면 그냥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무리들(?)에 대한 교과부의 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 만약 교과부가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다면 이는 교과부가 매우 심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3월 8일 대전 중구 태평동 유평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교과학습 진단평가 시험을 보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일제고사의 문제점을 알면서 교과부에서 지침을 내렸으니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인가? 교사들에게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는 아이로 교육하라면서 교사들이 소신을 가지고 자기 생각을 가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 교과부의 태도는 올바른 것인가? 아이들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자라도록 교육하라면서 교사들은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20년이 넘는 교직경력에서 올해 네 번째로 6학년 담임을 새로 개교한 혁신학교에서 맡게 되었다. 3월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에서 6년의 교육을 받아온 아이들은 행복한 학교생활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며 즐거운 표정으로 등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어온다. 시험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계속 문제풀이를 해야 하냐고....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다. 아이들을 중심에 두라며 우리 교육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없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0
홍승권/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평소 신경을 집중하면 얼굴이 잘 달아오르는 체질이어서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면을 자주 하는 편이다. 화장실에 수건이 있으면 고맙고 수건이 없으면 화장지를 조금 뜯어 수건 대용으로 삼는다.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서 웬만한 공중화장실에는 늘 화장지가 칸마다 잘 비치되어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일부 화장실은 입구에서 자판기에다 동전을 넣고 화장지를 뽑아 쓰거나 밖에 설치된 덕용화장지를 각자 쓸 만큼 뜯어다가 쓰곤 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화장실은 엄청 깨끗해지고 편리해졌다. 얼마 전 학교운영위원으로 활동할 때의 일이다. 회의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서 얼굴에 찬물을 묻히고서 수건을 찾으니 없었고 변기 칸에서 화장지를 찾으니 아예 없었다. 결국 대충 바람에 말릴 수밖에 없었는데, 행정실장님께 왜 화장지가 없느냐고 여쭈었더니 아이들이 화장지를 물에 묻혀 벽이나 천정에 붙이는 장난을 하기 때문에 없앴노라고 한다. 그러면 교직원용, 학생용을 구별하지 말고 화장실을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함께 쓰면 아이들이 함부로 장난을 못 치지 않겠냐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긴 한데..’ 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으신다. 사진 출처 - 참세상 아마도 대부분의 학교가 이와 같은 실상이리라 생각된다. 아이들이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교실에서부터 화장지를 챙겨야 하다니... 아이들이 거의 매일 교육적 효과와는 무관한 일로 익숙하지 않은 힘든 상황을 겪어야 하는 셈이다. 특히나 저학년 아이들은 이에 적응하는데 엄청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야 할 것이다. 화장지를 좀 아끼려고 이렇게까지 아이들에게 불편을 감수하도록 해야 할까? 이참에 학생화장실과 교사용 화장실을 통합하면 좋지 않을까? 아이들이 선생님 보는 앞에서 함부로 종이를 낭비하며 장난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학교에서 화장실을 통합하게 되면 중고등학교의 흡연지도도 한층 나아지리라 생각된다. 학생과 선생님이 함께 쓰는 화장실에서 감히 담배를 아무렇지도 않게 피워대지는 않을 테니까...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42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은 혼자서 사는 개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다.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지 못하는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하다는 걸 가르쳐 주는 건 부모가 가르쳐야 할 몫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가시 돋친 말로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동. 나의 행동으로 상대방이 고통을 당하건 말건 상관없다는 아이들의 태도. 공부만 잘하면 그런 건 대수롭지 않다고 키우는 부모는 부모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석이는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지만 학급의 학생들은 석이를 “문제 메이커”로 부른다. 얼마 전 교실서 신체의 질병으로 힘들게 생활하는 학생을 “무뇌아, 쓰레기” 등으로 수업시간에 옆의 학생과 쪽지로 비웃다가 그 학생과 싸움으로 번져 석이의 부모가 담임교사를 만났었다. 석이 부모는 “그 학생에게 직접적으로 욕을 안했으니 문제가 없지 않느냐?, 또 한 대 맞았으니까 죄가 없어진 것 아니냐”며 소리를 높이고 담임교사가 석이만 미워한다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일주일이 지난 다음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석이는 무릎으로 상대편학생 어깨를 차는 바람에 쇄골이 골절되었다. 석이는 다친 학생을 보건실로 부축하지도 않고 바라만 보고 미안이라고 사과만 하고 집으로 갔다. 이일을 석이는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았었고 나중에 담임교사로부터 내용을 전해 들었던 부모 또한 다친 학생의 부모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목요일 석이는 교실서 야구공을 던지는 놀이를 하다 다른 학생의 눈을 정면으로 맞추어서 실명의 위기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석이는 공을 던져서 다치게 한 학생의 염려보다는 공을 던지기는 했지만 공을 가져온 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라 급급했다. 다친 학생의 치료를 무사히 끝내고 돌아온 담임교사에게 석이 부모는 석이의 주장과 같이 야구공을 가져온 학생의 처벌을 주장했고, 또 그 학생 부모에게 전화로 항의를 하고, 다시 교장실에 전화를 걸어서 석이만 처벌하면 안 된다고 하고 다음날 교장실을 방문해서는 담임교사가 자신의 아이만 미워하고 처벌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들만 늘어놓았다.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올바른 부모 역할에 대한 강의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교육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이다. 학교만 하는 게 아니라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교육다운 교육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어른이 되지 못한 미완성품’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고 스스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주적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길러 주어야 한다.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에게 자격증을 주듯 ‘부모 자격증’ 이런 걸주면 어떨까? 가슴 따뜻한 사람.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사람답게 키우는 것도 또한 부모의 몫이다. 서프라이즈라는 인터넷 사이트에 ‘시골훈장’이라는 분이 쓴 ‘자녀를 망치는 열 가지 방법’이라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들을 올려놓았다. 『 잘못된 품행을 야단치지 않고 스스로 잘 할 것이라고 내버려 두고 훈계나 훈련이나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무식해서 용감한 독불장군이 되어 사회로부터 격리 될 것입니다. 또래들과 다투거나 입장이 다를 때 언제나 아이편이 되면, 장차 이웃과 사회가 모두 그 아이의 적이 될 것입니다. 훈계하는 스승을 헐뜯는 자녀의 꾀에 넘어가면 장차 부모를 속이고 늙으면 업신여기며 불효를 당할 것입니다. 아이가 나쁜 말을 사용할 때, 그냥 웃어넘기면 재치를 키워 장차 더욱 나쁜 말로 이웃에게 상처 줄 것입니다. 』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한번쯤 새겨 들어야할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는 것은 완벽하지 못해도 가슴 따뜻한 사람. 대화로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쫒아 허겁지급 살지 않는 사람 그런 여유로 힘겨운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키울 수는 없을까? 김영미 위원은 현재 신연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189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1. 한 세대 전만 해도 교육은 근대 문화로의 변화를 선도하는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다. 개인과 집안의 신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했고, 산업 현장과 연결되면서 한국 경제발전의 기초를 담당하기도 했다. 교육이라는 보이지 않는 투자를 통해 격변하는 시대를 경험하며 헤쳐 온 기성세대는, 교육으로 성공한 이든 교육의 기회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이든, 한결같이 교육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 정점에 대학이라는 것이 있다. 온 사회가 ‘올인’하다시피 하는 대학이란 무엇이며, 오늘의 우리의 대학은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 것일까. 2. 대학은 본래 교수 또는 학습자들의 모임 또는 조직이었으나, 일제 때 ‘사립학교령’을 설치해 일정 수준의 재산이 있어야 학교 설립이 가능하도록 한 뒤에는 설립자가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하는 흐름이 생겼다. ‘불온한’ 이들의 대학 설립을 제한하려는 전략적 의도에서였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사립대학은 그 뒤 시설로서의 물적 요소와 단체로서의 인적 요소를 함께 가지게 되었다. 3. 국공립 대학(국가나 지자체 같은 공법인이 설립자가 되어 시설을 설치, 운영한다)과는 달리, 사립대학은 재산을 근거로 구성된 재단법인이 시설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주체로 부각된다. 법인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학교의 운영 주체이자 소유자로 자리매김해가면서 교수를 고용하고 학생을 선발해 교육 사업을 벌이는 흐름이 커져간 것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법인 이사 내지는 경영자가 교수나 학생에 대해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대학생, 시민, 야당인사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반값등록금 실현을 위한 국민촛불대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4. 하지만 대학은 그 의미와 속성상 ‘시설’만이 아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조직’이기도 하다. 대학은 교사와 학습자의 만남을 위한 조직적 중개자로서의 측면도 크다. ‘조직’이란 개별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을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결합시켜 능률과 합리화를 도모하는 활동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분명히 하나의 ‘조직’이다. 당연히 조직 구성원 전체가 대학의 주체이기도 하다. 시설 투자를 한 설립자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학문의 보급자인 전체 교수가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시설 운영의 근간인 등록금을 내는 학생이 주인 의식을 가지는 것도 다 정당하다. 5. 때론 이 세 주체들이 충돌하곤 한다. 그러나 충돌이 있다는 것은 도리어 학교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영자, 교수, 학생이 어떻든 주체의식,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대학 교수들은 자신을 단순 피고용자로 여겨 자신을 선발한 경영자의 경영 방식이나 평가 기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때로는 비리도 눈감아주며 스스로 그에 종속되고 마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월급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냉소적인 회피가 주류를 이룬다. 학생도 별 주체의식 없이 졸업장이라는 자격증만 따면 그만이라는 식의 소극적 처신에 머문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특별히 사립대학의 온갖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주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사립대학의 문제는 대학 구성원이 자기 주장을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도피해 개인의 안일만을 보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대학의 주체들이 교육의 공공성에 눈감으면서 소유 의식이 강한 설립자나 경영자의 욕망의 크기에 비례해 문제도 그만큼 커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이찬수 위원은 현재 한국종교교육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196 | 추천: 0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큰 지진이 있었네요. 2011년 3월 11일. 토호쿠(東北)지역. 진도 9.0. 후쿠시마 원전 파괴 방사능 유출. 희생자와 이재민은 얼마나 되는지 모름. 쓰나미가 휩쓸고 간 폐허의 땅. 우리에겐 무척 익숙한 단어들입니다. 각 기관마다 마치 이 땅에서 일어난 재해처럼 들고 일어나 나눔을 강조했고 전파를 쏜다는 방송이면 죄다 ARS 걸어놓고 누가 많이 모으나 경연을 했지요. 이웃나라의 아픔에 연대의 마음을 전하는 것처럼 살갑고 정다운 일이 없으니 무척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일본의 피해상황만 보도가 될 뿐 그 안에 살고 있는 재일 동포에 대한 뉴스는 한줄 찾기가 어렵더라는 말입니다. 걱정이 되었지요. 도쿄조선 중고급 학교는 강당이 무너졌고 센다이의 토호쿠 초 중급학교는 건물자체가 기울었다는데, 그래서 졸업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데 후쿠시마는 제2의 체르노빌이 되어 방사능 천지가 되었다는데. 그곳에도 조선학교가 버젓이 있는데 이미 4년 전 극우인사인 이시하라의 도쿄도에 빼앗길 뻔 했던 에다가와(枝川)조선학교를 되찾는 모금운동에 참여했던 내가 걱정이 없었다면 말이 안되지요. 이웃나라의 재해복구 성금이 600억원이나 모였지만 그 이웃으로 인해 차별받고 고통 받았던 또 다른 나에게는 단 한푼도 지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는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요 “거기에 조선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우리의 아이들이 있는데..” 그때도 지진이 있었습니다. 1923년 9월1일 관동 대 지진입니다. 약 15분 동안의 지진 만으로 도쿄의 3/4이 폐허가 되었고 약 14만2천명이 사망할 지경이었으니 당연히 정부의 기능은 마비되었고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요. 그때 터져 나온 민심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일본 내무성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조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트려 약 6000-9000명의 조선인들이 일본인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던 일은 잘 기억 하실 겁니다. 그날이후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어머니의 말 모국어를 잊게 됩니다. “생사를 넘나들던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날 이후 말문을 닫았습니다. 젖 먹던 시절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도, 고향땅 밟으며 재잘거렸던 수많은 조선말에 대한 기억도 다 지워야 했습니다. 고향집 주변에 사시사철 피었던 꽃의 이름과 이웃들의 정겨운 말투도 다 잊어야 했습니다. 조선말을 한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한 그들에게 맘 놓고 조국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란 잠들기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는 가족의 안부 몇 마디가 전부였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모국어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렇게 20여 년을 더 살아 해방을 맞았고 그해 12월에만 일본 전역에 약 560여개소의 국어 강습소가 세워졌습니다.” -졸저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중 - 정체성 이라는 게 그런 거지요. 나의 생활이 진창이 될 때면 술 한 병 들고가 잔 올리며 꺼이꺼이 울고 싶은 어머니의 무덤 같은 것. 일본인이 되어 넋 놓고 살아도 생에 단 한번이라도 꿈속에서나 만나는 고향의 바람에 살 부비고 싶은 것. 뼈와 살은 바꿀 수 있으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몸속에 흐르는 조선인 이라는 피 때문에 그들은 학교를 세웠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모국어를 가보로 여기며 지난 60여년을 한결같이 교육 시켰습니다. 지난 3월 10미터가 넘는 대형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고 이어 방사능 경보로 온 마을이 텅텅 빈 그때도 후쿠시마 조선학교의 교사와 학생 15명은 학교를 지켰습니다. 학교마저 비우면 언제 학교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당장은 죽지 않는 방사능의 공포보다 우선한 것입니다. 결국 이 학교는 폐쇄되고 인근 니이가타로 이전해야 합니다. 센다이의 토호쿠 조선학교는 무너진 강당 대신에 좁은 식당에서 졸업식을 진행했습니다. 갓 입학한 어린 초급학교생 들은 갈라진 벽을 임시로 메운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지진이 나고 나서 나보다 더한 조바심을 가졌던 김명준 (영화 “우리학교” 감독)이 전화를 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우리 이대로 있지 맙시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 여럿이 모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지진피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몽땅연필” 뜨거운 청년 배우 권해효와 꽃보다 아름다운가수 안치환. 그리고 늘 부족한 내가 공동대표를 맡고 진달래 냄새 가득한 김명준이 집행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몽당연필”의 목표액은 기둥뿌리 두개. 조선학교가 다시 세워지는 그날 건물의 수많은 기둥 중에 두 개쯤은 아이들의 고향 남쪽이 전해주는 두 손의 온기로 세웠으면 하는 것이지요. 지진으로 갈라진 토호쿠 조선학교의 벽에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적은 글귀가 마음을 흔듭니다. “대지는 흔들어도 웃으며 가자!” 그 글귀에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지난날 그때 만약 이곳 한국에 있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다면 우리의 아버지가 무서운 총칼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 했다면 우리도 이역의 땅에서 핍박받는 조선의 아들, 지척의 갈라진 조국을 어머니로 여기며 오직 “통일” 두 글자만을 그리워하는 조선의 딸. 사랑하는 아이들아 고통은 극복 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으나 그렇단다 고통은 견뎌 내는 것. 그것도 웃으며 견뎌 내는 것 그러니 이제 함께 견디자. 그리고 함께 지키자. 지진과 해일로 방사능 피해로 무너진 너희의 어깨를 아직은 튼튼한 우리의 어깨에 걸고 “대지는 흔들어도 함께 가자, 손잡고 가자 웃으며 당당하게 가자”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22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자유, 평등, 박애를 이념으로 하였던 미완의 프랑스 혁명도 본질은 빵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요구였다. 튀니지를 시작으로 북아프리카 및 지중해 일대에 위치한 국가에서 발생하여 현재도 진행 중인 속칭 ‘재스민 혁명’도 결국 빵과 자유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진행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4·19 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등도 모두 동일한 주제였다. 현재의 우리 화두 역시 빵과 자유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푸른 기와집에서 사시는 지존께서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하여 “원전을 포기하는 것은 인류가 기술면에서 후퇴하는 것이라면서 더 안전한 원전을 만들어 내야지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씀 하셨단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두 달 간 방사능 물질 누출량만 따져도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발 당시 40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결국 일본 총리는 원전 증설 백지화를 선언하였다. 그런데도 지존께서는 시민의 생명·건강권을 얼마나 존중하고 계시는지 위 발언으로 또다시 충분하게 보여 주셨다. 이전에도 그분은 ‘광우병 소 수입’으로 촉발된 촛불 시위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국민의 건강권을 엄청 챙기신 나머지 청와대 뒷동산에서 눈물까지 흘리신 분이라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시민의 자유를 엄청 존중하시는 법치주의 그 자체인 그분의 태도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이다. 미네르바, PD 수첩, KBS 사장 사건 등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례를 짧은 시간 안에 축적 시킨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신 분이다. 좀스럽게 G20 정상회의 때 낙서한 사람까지 처벌하면서도 ‘낙서금지법’은 왜 안 만드시는지도 궁금하다. 시민의 자유를 넘어서 시민의 생명과 건강까지 지극 정성 보다 듬는 그분한테 존경심으로부터 눈을 떼기 힘들다. 채용게시판을살펴보고 있는 구직자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존께서는 청년 실업 등의 일자리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우리의 청년 실업률이 8∼9%인데 미국, 영국, 프랑스 보다 좋은 성적”이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분이 누구신가. 그분은 747공약. 7%의 경제성장에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 건설을 약속하고 지존으로 등극하신 분이 아닌가. 그런데 무능과 거짓이 성적표로 곧 나타났다. 그러자 그분은 “임기 내 한번이라도 7% 성장하면 된다.”고 까지 말씀을 하셨단다. 이 정도면 지존은 지도자의 지존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희극을 연출하신 연극계의 지존임이 분명해 보인다. 왜 ‘나는 가수다.’처럼 ‘나는 연극인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지 않은지도 궁금하다. 빼어난 연출과 연극으로 권력을 꿰어 찬 후 심각한 청년 실업 문제에 대하여 좋은 성적이라고 하였다. 되뇌어 볼수록 기쁨이 넘치지 않는가. 일자리 좋은 성적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포만감. 빵과 자유에 대한 궁핍증은 힘없는 시민이나 사회적 약자와 아픔을 함께하고,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자칭 ‘기업(재벌) 프렌들리 대통령’을 뽑은 국민의 선택에 의한 ‘위대한 탄생’의 결과다.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위대한 탄생이어서 불량품이더라도 리콜도 할 수 없다. 깜깜한 밤하늘에 쏟아져 내려오는 별빛 같은 희망과 탄생도 우리에게는 선택 사항일 뿐이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175 | 추천: 0
정 원/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렸을 때 주말 백화점을 갈 때면 가족들 모두 민망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쇼핑을 마치고 백화점 주차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에 집결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붉은 조명 아래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는 그녀들을 보았을 때 소설에서 읽었던 ‘몸 파는 여자’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부모님댁에 갔다가 예전의 그 백화점을 가보니 백화점, 영화관 등이 들어선 대형복합쇼핑센터로 화려하게 변신해 있었습니다. 집결지는 달라진 주변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흉물이었습니다. 경찰은 올 3월말까지 집결지를 폐쇄하겠다고 통보하였고 전면 단속에 들어갔습니다. 폐쇄 방침의 배후에 백화점이 있다고 생각한 성매매 여성들은 백화점 매장에 들어가 동전으로 계산을 하겠다며 점거 시위도 하고 보디페인팅을 하며 분신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성매매는 불법입니다. 불법영업장을 폐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당국이 집결지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집결지 주변이 낙후되어 있을 때는 묵인되다가 개발이 진행되면 대책 없이 내 쫓긴다는 것입니다. 집결지 여성들이 지난 5월 17일 성매매 특별법 폐지 등을 주장하며 영등포 일대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는 우리 개발사(開發史)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입니다. 1966년 존슨대통령이 방한하여 시청 앞 광장에서 환영행사를 할 때 전세계 TV에 시청 주변의 슬럼지대가 방영되었습니다. 주로 중국 화교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국가적 망신이라고 생각한 정부는 소공지구 재개발을 서둘렀고 지금 그 자리에는 프라자호텔 등이 서 있습니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총회를 1985년 서울 개최로 유치하였습니다. 당시 그 정도 규모의 국제행사를 치를 수 있을 정도의 연회장을 갖춘 호텔은 힐튼호텔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힐튼호텔 주변인 양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성매매, 소매치기, 앵벌이, 넝마의 소굴이었습니다. 힐튼호텔 객실에서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이 양동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토지개발공사가 나서 재개발사업을 시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성매매여성 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은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성매매여성의 경우 이들이 다른 생계의 수단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성매매과정에서 입은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묵인해 오다가 개발 사업으로 인하여 주변의 환경과 집결지가 더 이상 어울릴 수 없는 시점이 되면 대책 없이 쫓기는 것입니다. 성매매를 막기 위해 집결지가 폐쇄되는 것이 아니라 집결지로 인하여 저평가되어 있는 주변 건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폐쇄된다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강남에 건축된 오피스텔 빌딩에서 성매매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뉴스보도를 접하고 보니 집결지 폐쇄의 본질은 성매매가 아니라 집결지의 낙후된 외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이것도 디자인 서울의 그늘진 모습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정 원 위원은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218 | 추천: 0
김 녕/ 인권연대 운영위원 “4대강 공사를 위해 설치한 낙동강 구미취수장의 임시보가 무너졌습니다. 이 사고로 경북 구미시와 일대 50여 만의 식수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라는 소식이 바로 며칠 전인 5월 8일 밤 9시 MBC 뉴스 데스크에서 보도된 바 있다. 공영방송 9시 뉴스에서도 이젠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이 보도되나 싶었다. 정부가 애초에 제시한 청사진은 물 부족 해결, 홍수 예방, 수질 개선, 그리고 과도한 개발로 황폐화된 하천 생태계를 복원하고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비참하다. 16개의 보 건설과 준설로 인해 4대강 본류의 수질은 악화되었고 침수지역은 지천까지 넓혀졌으며, 생물종은 절반으로 줄었고, 4대강 사업이 올려놓은 땅값이익은 그 대부분이 외지인에게 돌아갔다. 허나, 법조인들은 이런 문제를 소송을 통해 바로잡겠다고 하고 정치권은 선거를 통해서 바로잡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고만 있는 국민은 어떡해야 하는가, 어떡해야 했는가. 강변에서 농사짓던 농민들은 생존 기반을 잃었고, 보도조차 통제된 채, 4대강 공사 노동자들은 쌓이는 피로와 허술한 안전조치로 인해 조용히 죽어나갔다. ‘사람을 잡는 개발’이자 ‘죽음의 행렬’이다. 4대강 공사가 시작된 2009년 11월 이래로 지금까지 4대강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와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30명이다. 2012년 정권 재창출을 위해 올해 말 완공을 목표로 공사를 채근하는 대통령 때문에 안전관리는 뒷전인 채, 달리는 공사차량에 운전자가 치여 죽고, 준설중인 굴착기와 준설선에서는 노동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 나흘간 4명의 노동자가 공사현장에서 목숨을 빼앗겼는데도 정부는 4대강 사업 중단은커녕 친수구역개발사업으로 규모와 영역을 오히려 훨씬 키웠다(정의구현사제단 소식지,「빛두레」, 2011년 5월 1일자 참조). 사업목적과는 너무 다른 이런 삽질, 그 무모하고 무식한 ‘속도전’, 그야말로 누구를 향해 분노하고 통곡해야하는지 묻고 싶으면서도, 참으로 ‘가관’이다. 정부와 대통령은 왜 애도의 말 한마디 없이 쉬쉬하는가? 어찌 이리도 잔인할까? 작년 2010년 7월 7일은 경부고속도로 개통 40주년 된 날이었다. 한국경제발전사, 아니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을 그 미친 ‘쾌거’ 역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요구했다. 총 428km의 고속도로를 불과 2년 5개월(1968년 2월 1일 착공, 1970년 7월 7일 개통)에 완성했는데, 토목기술의 부족을 머릿수로 메우는 식으로 공정을 밀어붙였기에 연인원 850만 명이 도로 건설에 동원되었고, 가장 위험한 공사였던 터널공사도 인력으로 기술부족을 메우다 보니, 경부고속도로 건설 도중 총 77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터널공사 낙반사고로 인한 사망이었다고 한다.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당제터널 구간 근처인 금강휴게소에다 박정희 대통령은 위령탑을 세워 개통식 날에 직접 제막을 했다고 하며, 이은상은 추모글에서 이들을 “조국근대화를 위한 민족행진의 전사”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순직 노동자 유가족들은 정부로부터 보상금 한 푼 못 받았고, 다만 소속 건설사에서 유가족에게 50만원(현재가치로 약 500만 원가량) 정도의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알려졌을 뿐, 이들은 너무나 억울하게, 너무나 빨리 잊혀졌다. 겨우 도로공사 측에서 매년 위령제를 열어 왔다는 사실에서나 위안을 찾아야 할까.(「조선일보」, 2010년 7월 7일,「동아일보」, 1970년 7월 7일 참조). 비슷한 논리인 이명박 정부는 4대강 개발 순직 노동자들에 대해 어떻게 나올까. 아니, 그때 어떻게 대해준들, 글쎄, 그게 다르랴. 2009년 11월 이래로 지금까지 4대강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와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목숨을 잃은 국민은 모두 30명이다. 노동자들의 안전을 외면한 '속도전' 공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필자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중의 하나가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라는 성서 구절은 이와 관련하여 흔히 인용되거나 상기되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다. 일부를 인용해보자.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구약성서 시편 8:3-8)(강조 추가) 곧,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담겨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모질게 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모질게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저 하늘과 달과 별들을 선물로 받은 존재이자,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며,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이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곧 하느님이 담겨 있고 우주가 담겨 있다. 올해 내 4대강 사업이 다 완공되면 국민들이 비로소 자기의 뜻을 알아줄 거라는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그것에 공사 기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맞추라는 상부의 지시와 독촉, 시공사들 간의 경쟁에 떠밀리며, 삽질은 앞으로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리고, “과연 누가 센지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라는 식으로 기나긴 장마와 홍수의 계절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시키셨는데, 삼백 몇 십만 마리 가축들이 졸지에 매장되어도 가축들에게는 커녕 국민들에게도 변명 말고는 한마디 사과조차 없던 정부이다. (생매장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미 돼지는 새끼 돼지들에게 젖을 물렸다는 언론보도가 생각난다. 그게 신기했나?) 벌써 30명을 넘고 있는 ‘물길’ 순직 노동자들과 국민들의 희생에 대해 철저히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정부에게 묻고 싶다, “아니, 도대체 사람을 무엇으로 여기는데, 그리고 그 삽질이 도대체 무엇인데?”라고.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14 | hrights | 조회: 183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