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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자 배부른 소리인건 알지만...” (이지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4 11:49
조회
287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배부른 소리나 한번 해보자는 얘기다. “비와서 오늘 공쳤어요” 넋두리 하는 옥외 노동자의 푸념을 듣다가, 또 비 오는 날 송전탑에 목매고 5년이나 싸우고 있는 노인들의 울분을 듣다가, 싸움의 세월이라면 거기에 뒤 질수 없다는 구럼비 지킴이들의 통곡을 듣다가, 인턴을 좋아하고 그 보다는 인턴의 엉덩이를 더 좋아하는 윤 뭐시기의 근황이 궁금하다가 그 윤 뭐시기 보다 더 인턴을 좋아해서 시간제 노동도 좋은 일자리라고 말씀하시는 박 뭐시기의 뇌 구조가 또 궁금하다가 시절이 이렇게 하 수상 한데도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입 싸악 씻고 각자 호주머니 잇속만 차려대는 의원 나리들의 하루일과가 도대체 궁금하다가 에라 이렇게 애 끓다가는 내 속이 먼저 망가지겠다 싶어 셀프 멘붕을 자초하며 잠시, 물만 먹어도 배부르고 눈만 뜨고 있어도 포만감에 젖어드는 동네 바이칼 호수의 지난여름을 기억해 보자는 것이다.

한번 입수하면 10년이 젊어진다는 그 맑은 호수에 하루 종일 들락거리고도 젊어지기는커녕 살갗만 잔뜩 태웠던 그 여름. 나는 400루블 (우리 돈 8000원 정도)를 주고 빌려 탄 자전거로 바이칼의 22개 섬 중 가장 큰 알혼의 언덕을 달렸었다. 모든 게 다 좋았고 사소한 모든 게 용서 되었다. 러시아의 여인들은 거개다 상냥해서 어쩌다 눈이 마주 치면 싱끗 웃어주었는데 거기다가 카메라 렌즈를 돌리면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언덕배기를 오르는 페달 질이 힘들어 잠시 쉬어갈 때는 미리 싸온 “발치카7”이라는 러시아산 캔 맥주를 들이키다가 한갓진 나무그늘아래 한 뼘의 그늘을 빌려 눕기도 했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호수의 빛깔이 새겨져 있고 호수를 보고 있으면 하늘이 그 안에 담겨있다. 날씨는 몹시 무더웠다. 영상 30도 “뭔 놈의 날씨가 이리 덥다냐 명색이 시베리아의 한복판인데” 싶다가도 금세 이마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 한줄기에 흘렀던 땀 방울이 쏘옥 들어가는 신기함, 하늘을 담은 호수의 끝은 지도에서조차 가늠 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하다. 하늘을 닮은 호수의 깊이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다. 1637미터라고는 했으나 바이칼 호변의 백사장위에서 홀딱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여인네의 자유 정도로 알아먹으면 그만이다. 나도 그 여인네의 자유를 흉내 내며 호수 안으로 들어간다. 서두르지는 않는다. 딱히 내 인생 최초의 바이칼 입수에 관해 설레 이거나 혹은 경건해 지는 마음 따위는 없다. 그저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 정도로 여긴다. 발목에서 무릎 그리고 허리춤까지 몸을 담그다가 무슨 숫컷들의 영역 표시 같은 것처럼 눈으로는 하늘을 보는 척 쉬이~ 실례를 시작하는데 아뿔사, 허리아래 관절이라는 관절은 죄다 저려올 정도로 물이 차다. 실례가 완성되는 그 짧은 시간을 참기 어려울 정도다. 영상 4도쯤 된다니 보통의 냉장실 온도와 맞먹는 한기가 온몸을 감싼다. 몸 전체를 채 담구기도 전에 퍼어래진 입술을 덜덜 떨며 도망쳐 나오면 한여름의 태양에 뜨끈하게 몸 달아있는 백사장이다. 3분을 버티기 힘든 차가운 물을 러시아 청년들은 쉼 없이 자맥질 하고 나는 멀지감치에서 누워 햇살의 포근함을 만끽하는 러시아 여인의 자유를 힐끗 거리다가 살짝 잠이 든다. 모스크바는 또 어떠한가. 아르바트 거리의 젊은것들은 아무대서나 거리낌 없이 입맞춤을 해대고 거리의 악사는 마치 십 수 년 간 같은 곡만 연주한 듯 능숙하게 파가니니를 읊어댄다. 빅 밴드 스타일의 재즈 연주곡이 흘러 나오는 카페 앞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다가 누군가 건넨 “맥주한잔 합시다” 라는 말에 솔깃해지면 “아~ 세월 간다 좋다” 이만한 시간이라면 내 삶의 몇 부분정도는 포기해도 괜찮겠다 싶다. 왜 하필 밤에 도착했는지는 모르지만 바실리 성당. 한때 넋 놓고 두드렸던 게임 테트리스의 배경이 된 이 성당의 야경을 보면 이 나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떠올리거나 뭘 먹고 사는지 궁금해 하거나 여기 물건 값이 우리에 비해 얼마나 싸거나 같은 단순하고도 참 치사한 일상의 꺼리들을 떠들다가도 문득 저 건물의 귀퉁이에서라도 무릎 꿇고 기도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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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
사진 출처 - 필자


"솔직히 한국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바쁜 나라에서 시베리아 오는 사람들은 다 또라이 아냐?" 모스크바를 출발해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맞다 또라이들 하며 킥킥대고 웃었지만 그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눈 질끈 감고 큰 결심해야 가는 곳은 맞다. 단순히 비용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단 한 번도 편히 쉬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자본의 구조 속에서 과감한 일탈을 꿈꾼다는 게 수월치는 않다. 허나 거기에 나는 남과 북을 묻었다. 같은 지향을 찾기보다는 나와 다른 무엇을 찾아 갈라서기에만 급급한 진보라는 이름의 옹색함도 묻었고 정작 돈 버는 일을 포기하고 “쉼”을 찾아 먼 여행길에 나선 내가 또라이가 아니라 이런 일 한번 벌이지 못하고 사소한 이익 앞에 늘 흔들리는 분단된 섬나라의 내가 더 또라이라는 사실도 묻었다.

내 주변은 늘 싸움 투성이다. 이명박 시대에도 그렇고 박근혜 시대에는 더 그렇다.

돈 나고 사람 난 세상(資本主義)이 아니라 사람 나고 돈 난 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 콩 한쪽 나눠 먹는 세상, 배곯아 아픈 이 없이 돈 때문에 길바닥에 내 처지는 인생 없이 그냥 사는 대로 사는 알콩 달콩한 세상을 희망하는 사람들. 전쟁 없는 세상을 사모 하고 폭력 없는 세상을 갈망 하는 사람들 틈에 있으니 이 풍진 세상 싸우는 것 말고는 달리 대안이 없다. 그래도 어찌 허구한 날 싸움만 할 것인가 말이다. 공자님께서 이인위미(里仁爲美)라고 말씀하셨다. 싸움을 위한 마을보다는 넉넉한 품과 여유가 있는 마을이 더 아름답다는 의미겠다. 어차피 배부른 소리나 해대는 멘붕의 날이니 이런 얘기를 해도 이해해 주시겠지.

“좀 쉬자, 쉼 앞에는 어떤 구분도 없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