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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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 이제 노숙자 신세가 된 정씨가 지하철 역 바닥에서 맞이하는 차가운 새벽은 언제나 악몽으로 끝난다. 악몽 속의 그는 시민을 학살한 특전사 3공수특전여단 11대대 4지역대 하사다.” 2001년 5월18일 <한겨레> 사회면 머리기사다. 내가 썼다. 광주항쟁을 기리는 날의 대표 기사를 장식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비장하고도 애잔하게 쓰겠노라, 딴에는 작정하고 달려들었던 기사에 이런 대목도 있다. “…정씨가 방아쇠를 당기자 2명이 쓰러지고 1명은 달아났다. 내려가 확인한 '폭도'들은 무장하지 않은 와이셔츠 차림의 시민이었다. … 정씨는 피 묻은 손을 숨기고 새 출발을 준비했다. 82년 5월 전역해 그해 10월 9급 공무원 시험에도 합격했다. … 그러나 부인이 정씨 몰래 빌려 쓴 1억여 원의 빚이 그를 다시 좌절로 몰아넣었다. 빚 독촉에 쫓긴 정씨는 서울 을지로역, 시청역 등에서 노숙생활을 하고 있다. …” ‘노숙자 정씨’가 신문사를 찾아온 것은 그해, 5월 초였다. 언론사에는 수많은 종류의 ‘기인’들이 찾아와 “내 귀에 도청장치 있다”는 식의 제보를 한다. 처음에 나는 그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다소 건성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대단한 특종까진 아니어도 괜찮은 기사가 충분히 될 듯 했다. 그를 데리고 직접 광주로 내려갔다. 현장을 둘러보며 확신했다. 정씨는 예전의 건물과 거리를 정확히 기억했다. 여러 사실관계들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의 극적인 인생행로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벌을 받느라 노숙자 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이제라도 양심선언을 하고 고인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폭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 5 ·18 문화재단    “… 21년 만에 광주 5.18 묘지를 찾은 정씨는 끝내 통곡을 참지 못했다. 눈물은 80년 5월21일 사망한 광주 시민 임은택씨의 묘비 위로 떨어졌다. 죽은 자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의 숭고한 뜻은 커다란 사랑으로 남아 바른 삶의 지표가 됐습니다. 못다 이룬 한을 훌훌 털고 가소서.'” 모처럼 뿌듯한 기사를 썼다며 제법 자위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정씨였다. “기사 나왔다면서요.” “예, 아직 못 보셨습니까.” “아니, 그러면 미리 말을 해야지.” “18일에 쓰겠다고 제가 말씀 드렸었는데.” “그게 아니라, 돈을 줘얄 것 아뇨.” “저희는 인터뷰 대가로 돈을 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일보>는 안 그러던데.” “예?” 순간 머리속이 하얘졌다. 5년차 사회부 경찰기자는 그제야 뭔가 일이 잘못 됐음을 느꼈다. 옛 기사들을 찾아봤다. 그 전 해, 그리고 그 전전 해의 5월, 어느 중앙일간지와 시사주간지에 ‘노숙자 정씨’의 기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연례행사처럼 ‘양심선언’을 반복했던 것이다. 지난 9년 동안 부실하게 양산한 수많은 기사 가운데서도 이 기사는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다. 가장 부끄러운 기사다. 일반적인 뉴스가치의 잣대로 보자면 정씨의 이야기를 다시 다루는 것은 기자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내가 쓴 기사의 틀은 광주사태의 한복판에서 시민을 학살한 군인이 ‘처음으로’ 그 사실을 고해한다는 데 초점이 있었다. 그를 절대로 미워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인간적으로는 더 애잔해지긴 했지만, 나는 독자들에게 일종의 거짓말을 한 셈이 돼버렸다. 그 악업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이젠 해마다 ‘그날이 오면’ 광주 대신 정씨를 떠올린다. 광주를 생각하건 정씨를 기억하건, 옷깃을 여미며 “똑바로 정신 차리고 살자”는 결심을 하는 것은 매 한가지다. 그 때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취재원(news source)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데 있었다. 첫 순간, 행색만 보고 상대를 의심했던 것도 잘못이었지만, 그걸 극복한답시고 전폭적인 믿음을 걸고 모든 기사를 그에게 내맡긴 것이 더 큰 잘못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취재원을 의심하고 뒤집어보는 일을 생략한 것이다. 이른바 ‘불량기사’의 상당 부분은 기자-취재원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어떤 취재원을 얼마나 만나, 무엇을 물어보고, 그 대답을 제한된 텍스트에 어떻게 담을 지가 기사의 내용을 결정한다. 앞으로는 언론 환경과 취재 관행이 나아지긴 하겠지만, 여전히 기자 노동은 ‘시간 싸움’이다. 5분 안에 기사를 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30분 안에 기사를 다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 한 시간 안에 취재를 마쳐야 하는 식이다. 그렇게 반나절을 씨름하고 다시 다음 반나절을 준비하는 ‘하루살이’가 기자들이 미쳐 돌아가는 이 바닥의 대강이다. 어떻게 하면,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취재원을 가급적 최소한(최대한이 아니라) 만나 기사가 갖춰야할 그럴듯한 모양새를 꾸며 제 시간에 마감할 수 있을지가 기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한국 언론이 양산하는 기사의 대부분은 그래서 ‘패스트푸드-저널리즘’에 비유할 수 있겠다. 준비된 재료만 들어간다. 모든 재료는 순식간에 요리되거나, 이미 요리돼있다. 그래도 몸에 좋고 맛도 좋다고 선전한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그런 음식들을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먹는다. 그래서 또다시 ‘준비된 재료’를 다시 챙겨 내알 장사를 준비한다. 가끔 그 음식에 파리 날개, 쥐꼬리, 바퀴벌레 더듬이 등이 들어가 항의를 받기도 하지만, 어찌됐건 사람들은 계속 이 식당을 찾을 테고, 나는 계속 음식을 팔아 해치울 것이다…. 최근 ‘피디 저널리즘’이 각광을 받고 있는데, 이 역시 한정된 취재원에 대한 무비판적 의존이라는 기자들의 관행과 관련이 있다. 바쁘기로 따지자면 피디 역시 기자 못지않겠지만, 여하튼 그들은 작가 등 스텝을 동원해 다각도로 취재할 인력을 갖추고, 적어도 일주일 이상의 호흡을 갖고 프로그램을 만든다. 자연스럽게 여러 취재원을 두루 만나 복잡한 사실관계의 풍부한 이면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기자는 ‘사실’에 목숨을 건다. 이 말은 백번 천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다만 전제가 필요하다. 그 사실이 ‘진실’을 드러낸다는 조건 하에서만 사실은 존귀하다. 사실은 취재원으로부터 나오는데, 이 취재원의 성격과 숫자에 따라 진실은 다른 모습을 띤다. 때로는 ‘명백한 사실’이 ‘진실’을 가리기도 한다.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사건 과정에서 <문화방송> ‘피디수첩’의 취재 내용이 취재윤리 위반을 넘어 진실로 드러나면서 ‘피디 저널리즘’은 언론 보도의 한 정점을 보여준 탐사 저널리즘의 또다른 이름이 됐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사회부 경찰기자 시절, 종로경찰서를 출입했다. 시위와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귀찮을 정도로 많았다. 써야할 기사는 쌓여 있는데,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집회를 모두 추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자들은 이럴 때, 경찰을 활용한다. “얼마나 와 있어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 몇 명 안 되죠? 근데 언제까지 한대요? 뭐, 굳이 해산시키고 그런 일은 없겠죠? 하하. 그럼요. 경비과장님 고생하시는 거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근데 주로 어떤 구호를 외치던가요? 그 단체 대표 이름이 뭐였더라. 과장님은 알고 계시죠?” 어지간한 경우라면, 현장에 나간 경찰의 정보는 ‘사실’이다. 여기에 중대한 거짓은 없다. 잘못 꾸며 말했다가 기자들에게 괴롭힘 당하고 싶은 경찰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이 제공하는 사실에 의존하는 한 그 집회의 ‘진실’은 온전히 밝혀지지 않는다. 경찰서 기자실에 앉아 취재한 집회는 귀찮고 시끄럽고 가망 없는 짓거리일 뿐이다. 평일 오후, 지역 주민들이 몰려와 청와대를 항의방문 하겠다고 기를 쓰는 일은 이제 기사 속에서 ‘도심 소음 공해의 하나’로 취급된다. 만일 그 기사의 취재원에 집회 참가자가 추가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알고 보니, 미군 사격 훈련 때문에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지역 농민들의 시위다. 마감에 쫓기느라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나가면, 그게 불량기사가 된다. 사회의 악성 콜레스테롤을 높이는 패스트푸드-저널리즘이다. 이는 다시 출입처 관행과 연결돼 있다. 피디들이 만드는 프로그램에는 유난히 ‘현장의 목소리’가 많다. 반면 기자들의 보도에는 ‘고위 관계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기자는 힘 있는 기관의 내부자로부터 정보를 구한다. 분명히 출입처는 내부자와 친밀해질 수 있는 강력한 발판이다. 외부적으로 폐쇄적인 권력기관을 감시하기 위해 한국 언론이 부여잡고 있는 코뚜레다. 그러나 이 ‘내부자에 대한 유혹’이 기자들을 망가뜨리는 주범이기도 하다. 기자들은 틈만 나면 고위 관계자, 유력자, 명망가, 권력자들과 친분을 쌓으려 애를 쓴다. 바로 그들이 특종을 건네줄 취재원이기 때문이다. 자꾸 만나면 정든다. 검찰 출입 기자는 검사의 관점에서, 정당 출입 기자는 국회의원의 관점에서, 청와대 출입 기자는 대통령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자신의 뿌리는 시민사회에 있고, 그 구실은 권력기관의 숲에 보내진 감시견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때로는 주인인 시민사회를 향해 외려 사납게 짖기도 한다. 제가 검사고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인줄 안다. ‘권력자의 언어’로 소통하는 기자들에게 익숙해진 권력기관의 내부자들은 뜨내기 같은 피디들을 좀체 만나주지 않는다. 출입기자들의 높은 벽에 가로막힌 피디들은 하는 수 없이 ‘현장’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오히려 그 과정이 피디 저널리즘을 건강하게 살찌우고 있다. 피디 저널리즘에는 넥타이 멘 익명의 관계자 대신, 생생하게 살아 분노하는 실명의 시민들이 있다. 피디 저널리즘에 등장하는 고위 관계자는 시민의 분노 앞에 제대로 변명도 못하는 무능력자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다. 취재원이 기사의 내용과 방향을 결정하는 동시에, 어느 지점에 이르게 되면 기사의 방향이 어떤 취재원을 선택할지를 결정한다는 점이다. 수습기자 시절, 모든 기자는 ‘도제식 교육’을 받는다. 화재, 살인, 성폭행, 재난현장, 시위현장 등을 취재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한’ 방식을 전수받는다. 좋게 말하면, 이는 미숙한 사회초년생이 기자노동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과정은 패기만만한 초년기자가 기성의 매체가 쌓아올린 거대한 ‘도그마’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를 통해 매체는 또 하나의 부속품을 복제한다. 기자가 바뀌어도 특정 매체가 생산하는 기사는 모두 닮은꼴이다. 종업원은 바뀌어도 그 식당에서 내놓는 음식은 매양 패스트푸드다. 농민 시위가 일어났다. 사회부 초년 기자는 능숙하고도 당연하게 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취재한다. 몇 명이 어디에 모였는지, 어디로 행진하는지, 전경들은 몇 명이나 동원했는지, 폭력시위는 없었는지, 성명서에선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를 기계적으로, 그러나 빠르게 취재해 원고지 5장의 단신 기사로 쓴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 보다 많은 취재 시간을 허락한다 해도 불량기사가 눈에 띠게 줄어들 것이라고 쉽게 예상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층 취재를 위한 시간적, 물질적 환경을 바꾸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진전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기자 각자에게 내면화돼 있는 취재 관행, 특히 취재원의 취사선택에 대한 메카니즘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인사이더’에게 의존해 권력관계의 치부를 폭로하는 특종기사가 아니라, ‘아웃사이더’에 눈길을 돌려 소외된 이들의 평범한 이야기로부터 사회의 혈맥을 찾아가는 심층보도는 하나의 대안이다. 이때 아웃사이더의 대부분은 평범한 시민들이다. 정권을 비판하고 친일파를 저주하고 미국을 고깝게 여기며 가난한 부모를 탓하면서 강남 아파트에 군침 흘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없다. 단정적으로 확실하게 말하는 인사이더들에 비하자면, 아웃사이더는 귀찮고 짜증나는 취재원이다. 아웃사이더를 수없이 만나고 난 다음에야 하나의 흐름을 잡아 기사를 쓸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취재를 위해 기자는 술잔을 기울이는 대신, 책을 펼쳐들고 자료를 찾고 전문가를 만나야 한다. 북핵 사태와 관련해 여러 ‘인사이더’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넘쳐나고 있다. 실명 또는 익명의 ‘관계자’들이 북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다. 일부는 한국 정부 관료이고 일부는 미국, 중국, 일본 등의 관료이며, 일부는 한국의 대학 교수이고 일부는 미국, 중국, 일본의 대학 교수다. 그들에 따르면, 지금 한국은 세계사적 위기의 진앙지다. 내가 보기에 그 말에 거짓은 없다. 대부분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예컨대 세계사적 위기의 한복판에 서있는 한국인들은 왜 여전히 일상을 반복하고 있는 걸까. 그들을 태연하게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어떤 ‘인사이더’들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북핵과 관련해 지금 한국 언론에 더 많이 등장해야 할 것은 ‘아웃사이더’인 시민이다. 본래적 의미에서 이번 사태의 진정한 인사이더가 바로 그들이기도 하다. 전쟁이 나면 그들이 죽을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져도 그들이 먼저 굶을 것이다. 아마도 관료와 교수들은 포화를 피해 다닐 것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어서 뭐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북핵 사태의 진실의 상당 부분은 ‘암시랑도 않는’ 시민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귀 기울이는 방법에 대해 한국의 기자들이 낯설어 할 뿐이다. 내가 쓴 ‘노숙자 정씨’의 기사는 불량기사일까. 그렇다. 단수의 취재원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괜찮은 기사를 쓰려면 취재원의 숫자가 많아야 하고, 그들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게 기본이다. 그러나 ‘노숙자 정씨’의 기사가 치명적으로 악질적인 기사는 아니었다고 감히 변명해 본다. 어떤 면에서 나는 ‘아웃사이더’인 필부들의 이야기를 보다 중요하게 다루고 싶었던 것이다. 시행착오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미숙한 사회부 기자는 노숙자 정씨로부터 한 수 배웠다. 다만 세상의 더 많은 ‘정씨’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무능이 여전히 부끄러울 뿐이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473 | 추천: 0
지난 23일,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2차전이 열렸다. 2차 핵실험의 징후가 포착되었다는 뉴스가 소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 생활은 의외로 차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한반도 남쪽 사람들의 신경이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북한의 도발적인 행태에 그만큼 면역이 되었다는 뜻일까.... 여러 여론매체에서는, ‘이제는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거나 ‘그동안 햇볕정책, 포용정책을 하면서 북한에 퍼다준 돈이 북한 인민에게 가지 못하고 핵개발을 앞당기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실패한 대북 포용정책을 이제는 포기해야 한다’ 라는 의견을 퍼뜨리고 있다. 하루하루 환자들과 마주하면 좁은 진료실에서 살아가는 치과의사가 복잡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아는 것이 뭐 있겠느냐고, 혹 다른 사람들이 북한의 핵실험을 화제로 꺼내더라도 입을 닫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북한 정권을 응징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에서 무언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낀다.   2004년 9월 체첸 반군 테러범에 의해 인질극이 벌어졌던 러시아 남부 북오세티야 지역 제1소학교에 러시아 특수부대 요원들이 진입해 1천여명의 대규모 사상자를 내고 종결되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북한 핵실험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생각한 바는 이렇다. 몇 해 전에 러시아에서 체첸 반군들이 한 학교에 침입하여 학생들을 인질로 삼은 일이 있었다. 러시아 당국은 처음에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은 군대를 투입하여 인질극을 종료했다. 물론 체첸 반군과 인질, 러시아 군인들의 상당한 희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체첸 반군의 인질극과 북한의 현 상황은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죄없는 러시아 학생들과 죄없는 북한 주민들이 인질처럼 잡혀 있는 것이 비슷하다. 북한은 확실하게 개발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핵무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미국과의 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해외 계좌를 틀어막아 북한을 궁지에 몰아넣은 대가로 더욱더 어려운 상황을 이끌어 내었다. 리영희 선생의 말씀대로, 북핵사태는 본질적으로 미국의 제네바 협약위반 사태를 오도하는 패러다임이라고 본다. 이라크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그렇듯이, 어쩌면 북한과 한반도의 미래도 사실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느냐, 핵실험을 하느냐 보다는 미국이 북한을 어떻게 요리하고자 하느냐에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오직 대화와 협상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정의를 앞세운 강력한 대응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길을 돌아가야 한다. 국내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답답하더라도 돌아 돌아가는 길을 목청껏 외치는 사람들이, 어째서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단도직입적인 시원한 해결책을 선호하는 것일까. 국내 문제에는 기득권이 달려있지만, 북한은 그냥 몰아부치기만 해도 상당수 기성세대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타깝다. 정치도, 외교도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일 텐데, 작게는 한반도, 크게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추구하는 일을 반대하며 무작정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 현실이.   위성에 바라본 북한 영변 핵 시설단지. 사진 출처 - 2003 몬테레리 연구소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99 | 추천: 0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사형수가 수감 8년 만에 지병으로 숨졌으며,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통하지 않고 자연사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보도가 신문 한 구석에 보이더니, 사형수 23명의 삶 마감전 행동이 미국 AP 통신의 정보공개로 입수된 내용이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통화 “엄마 ---”라는 제목으로 신문 한 자락에 소개되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가 잔잔한 파문을 이으며 사형 제도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보도에 이어, 10월 10일은 ‘세계 사형 폐지의 날’ 행사를 갖는다는 단신 보도로 이어졌으나, 북핵 사태에 휩쓸려 주목도 받지 못한 체 쓸쓸이 뒷전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형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깊다고 이야기된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도 그렇고, 고조선 8조금법에도 나오는 사형, 중세의 암울한 마녀재판과 화형 시대를 지나, 이성과 계몽의 시대라는 근대에 들어와서도 우리가 어쩌면 눈에 익히 알고 있는 근대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칸트 등도 모조리 사형 제도를 지지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사형 제도의 견고함을 볼 수 있고, 칸트의 ‘국가를 해체하더라도 감옥에 있는 사형수를 먼저 처단해야 한다’는 말에서는 전율까지 느끼게 만들며, 아직도 국민 여론 조사를 하면 사형제도 존치 의견이 많다는 보도에서는 벽을 느끼지만 이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 분명해 보인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도 물론 사형 제도에 대하여 정당한 것이고,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당당히 밝힌 지 오래 되었다. 헌법재판소분들의 의견은 이렇다. ‘사형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심과 범죄에 대한 응보 욕구가 서로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으로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것으로 헌법상 비례의 원칙에 반하지 않고, 헌법이 스스로 예상하고 있는 형벌의 종류이기도 하므로 헌법 질서에 반하지 않으며, 우리의 문화수준이나 사회 현실에 비추어 완전히 무효화 시키는 것이 타당치 않다’고 설시하면서 친절하게 뒤에서 부기하기를 ‘--- 비록 법정형으로서 사형이 적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선고함에 있어서는 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충고하신다.     물론 이런 견해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분들 중 극히 일부가 ‘사형제도는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고, 형벌의 목적인 범죄의 예방, 응보, 범죄인 개선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 달성에 필요한 한도를 넘어서므로 비례원칙에 반한다’고 반대 의견을 펴시는 분들도 있다. 문제는 헌법이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사형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은 사형은 기본권의 본질적 침해가 아니라고 하고,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사형이 기본권의 본질적인 침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법을 모르는 사람도, 법을 좀 아는 사람도 참으로 헷갈리게 생겼다. 그런데 법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하게 보인다. 왜 그럴까. 그래야 법률가들이 법을 가지고 밥을 먹고 살 것이며, 모든 법령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에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 신체, 자유가 天賦不可讓權利(하늘이 내려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가르치고 배우는데,  불가양의 권리라고 떠들다가도 사형 제도에 들어가면 위 말이 쑥 들어가 버린다. 결론은 그렇다. 생명은 누구에게 양도할 수 없고, 양도 될 성질의 것도 아니고, 생명과 생명을 비교하는 것은 물건과 물건을 이익형량 비교하듯이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동의한다면, 사형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데 이론이 생길 수 없는 것인데 현실은 아득하다. 국회의원들은 16대에 이어 17대에도 사형폐지법안을 과반수 이상 의원들로부터 동의 받아 법안 발의를 해 놓은 채, 여기 저기 눈치만 보고 정치적 제스처만 취하는 선량(?)들에게 이를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어 보인다. 결국은 프랑스 미테랑 같은 지도자가 나와서 헌법적 결단으로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는가 보다며, 미래의 지도자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 그런데, 요즘처럼 흉흉한 세상에, 곧 한반도가 전쟁에 휩쓸리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태평스레 웬 사형제도 운운하냐고 ? 그것은, 전쟁의 위협과 가능성이 커질수록 우리는 목이 터지도록 평화를 외쳐야 하고, 폭정과 억압이 심할수록 자유의 깃발을 높이 쳐들어야 하는 것처럼, 너무도 절박한 생명의 이야기가 주목을 받지 못할수록 더욱 생명을 외쳐야 하지 않겠냐고 ---   김희수 위원은 현재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412 | 추천: 0
어제 네가 보여준 미소가 눈에 선하다. 집합 장소로 들어가다가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더구나. “걱정 마세요. 잘 할 테니까.” 그 순간 이 녀석이 그새 어른이 되었구나... 싶었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남들 다 가는 군대 가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싶었는데 막상 네가 군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 한 것이 착잡한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아들 둔 이 땅의 부모들이 모두 한번씩은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되겠지.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얼마 전부터 그럴 수도 있겠다 어느 정도는 예상도 했던 일이건만 하필이면 아들 군대 보낸 날 그런 뉴스를 듣게 되니 이래저래 기분이 더 착잡해 지더구나. 문득 20년 전 네 첫 돌잔치 때 광경이 떠올랐다. 엄마 아빠의 친구들이 모여 축하를 해 주고 함께 술잔을 나누었지. 너도 대강 알겠지만 그 당시는 너희 세대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던 살벌한 시기였다. 멀쩡한 젊은이가 군대에 끌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대학생이 경찰에 고문을 당해 죽기도 하던 그런 때였다. 그날 아빠와 우리 친구들은 네 돌잔치를 핑계로 오래 만에 마음껏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때 아빠 친구 하나가 마치 약속이라도 하는 듯이 너를 보며 이야기 했었다. “그래, 네가 이 담에 어른이 됐을 때는 더 이상 전쟁도 없고 강제로 군대 끌려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필요도 없는 세상이 와 있을 거다. 꼭 그렇게 만들어 주마.”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는 돌배기 어린 아기에게 자못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 친구를 보고 모두 웃었지만 적어도 그 약속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다.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사진 출처 - 2006 육군훈련소 국방화보 그로부터 정말 눈 깜짝할 새에 20년이 흘렀다. 그 사이 넌 대학생이 되었고 우리 사회도, 나 자신도, 아빠의 친구들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우리가 네게 약속했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구나. 전쟁의 위협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까이 있고 여전히 젊은이들은 원하건 원치 않건 군대를 가야만 한다. 대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죽어가고 운동이냐 취업이냐를 놓고 고민하던 시대는 지나간 것으로 보이지만 그게 ‘더 이상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왔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민주주의를 외치며 지금도 길거리에서 싸우고 있고 여전히 젊은이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한다. 도대체 지난 20년간 우리는 무엇을 이루어 놓은 걸까. 새삼 이런 질문이 아프게 고개를 내민다. 그래, 우리가 네 돌잔치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는 못한 것 같다. 미안하구나. 어쩌면 다시 너와 네 친구들이 너희의 아들들에게 똑 같은 약속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꼭 그래주길 바란다. 어쨌든 세상은 그런 약속들로 인해 조금씩 좋아지지 않겠니? 너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심정이라고 했지만, 난 네가 좀 다르게 생각하면 좋겠다. 내가 늘 하던 이야기 있지 않니?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겁게 하자.’ 이거 말이다. 생각해 보면 군대 생활은 네가 밖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여러 가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군대가 아니라면 만나기 어려웠을 사람들을 만나 서로를 겪어내는 것도 어쩌면 너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2년 남짓의 기간 동안 졸병에서 고참까지를 압축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도 군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나중에라도 네 인생의 그 2년이 결코 헛된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 같구나. 너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니 네가 보낸 이메일이 와 있더구나. 어제 밤 잠들기 전에 보내 놓은 모양이지? 걱정 말라는 이야기, 내 건강 걱정, 그리고 맨 마지막에 써 있는 한 마디, ‘사랑합니다. 아버지.’ 순간 울컥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단다. 이 녀석이 이제 다 컸구나. 자식,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킬 줄도 아네... 그래. 나도 사랑한다. 너도 잘 지내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자꾸나. 아빠가.(넌 이제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난 여전히 아빠란 호칭이 좋단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572 | 추천: 0
‘인권 감수성’이란 말을 우리는 종종 접하며 인권 감수성의 개발은 인권교육의 기본이자 목표로 여겨진다. 일반적으로 “자극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서 흥분하기 쉬운 상태 또는 성질”을 ‘감수성’ 혹은 ‘민감성’이라 할 때, ‘인권 감수성’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다양한 자극이나 사건에 대하여 매우 작은 요소에서도 인권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적용하면서, 인권을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부연하자면, ‘인권 감수성’이란 “인권문제가 재개되어 있는 특정상황에서 그 상황을 인권관련 상황으로 지각하고 해석하며, 그 상황에서 가능한 행동이 다른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를 알며,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식하는 심리과정,” 즉, “상황을 인권관련 상황으로 지각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며, 이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인권을 옹호하는 행동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과정”이기 때문이다.(국가인권위원회 사이버인권배움터 참조). 대학에서 인권교육을 하는 필자 역시 학생들에게 ‘인권 감수성’을 일깨워주고 키워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어떠한 것을 예로 들면 좋을지를 늘 생각하는데, 다음의  세 가지를 자주 원용하곤 한다. 첫째는, 주부 내지 어머니의 인권이다. 세계인권선언 제24조에서 언급되듯, “모든 인간은 합리적인 노동시간의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를 갖는다.” 주부습진과 함께 유달리 우리나라의 주부들에게 많은 병이 울화병이라 한다. 백과사전을 보면,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은 장년의 여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정신 질환이며, 화를 참는 일이 반복되어 스트레스성 장애를 일으키는데, 가슴이 답답하며, 불면증, 거식증, 성기능 장애 등의 증상을 동반한다. 아울러, 화병은 한국인만의 독특한 질환이다. 미국 정신과 협회에는 1996년에 화병을 문화관련 증후군의 하나로 등록했는데, 이 질환을 영어로 'hwa-byung'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한국의 주부들은 곧 아내이자 어머니이다. 이들에게도 행복추구권과 휴식의 권리가 있음은 당연하다. 아마도, “나도 주말엔 쉬고 싶다. 친구들과 영화 한편이라도 보고 싶고, 책방에도 가보고 싶고, 부엌도 한주에 한번이라도 휴업하고 싶다. 방 한 칸을 따로 갖진 못한다면 마음속에라도 방 한 칸 갖고 싶다. 주부이기 전에 나도 인권이 있는 한 명의 존엄한 인간이다”라고 아주 조용하게라도 때로는 절규하고 싶진 않을까? 둘째는, 정신지체장애를 포함한 모든 장애인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성(性)에 대한 권리이다. 강의 시간에 “그들의 사랑할 권리--정신지체인의 성(性)과 결혼”이라는 다큐스페셜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때, 필자는 학생들의 얼굴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가 가져다주는 미소와 함께 인권 의식이 생겨남을 읽는다. 그 TV 프로는, 그에 대한 소개 기사대로, “흔히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상인도 잘 살기 힘든 세상에, 정신지체인 끼리 결혼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한다. 일반이 장애인에 지니는 편견과 무관심이 그들의 삶을 얼마나 황폐하게 했는지 살펴본다. 행복하게 사는 정신지체 부부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사랑과 인간답게 살 권리를 생각한다.” “성년에 이른 남녀는 인종, 국적 또는 종교를 이유로 한 그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룰 권리를 갖는다”(세계인권선언 제16조 1항)는 것은 이들에게도 당연히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의 그러한 인권은 혹여 금기시 되거나 논외로 여겨지지는 않는가?     장애인의 성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핑크팰리스’ 사진 출처 - 네이버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인권도 비슷한 같은 맥락 아닐까? 이들 역시도 행복추구권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 의해 홀대 당하거나 방치되기 일쑤이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욕구는 일생을 간다 한다. 사랑을 느끼는 마지막 순간은 병상에서 접하는 위로와 미소, 더 나아가 임종의 순간에 눈을 감겨주는 손끝까지 아닐까? 외로운 노년, 특히 홀로 남은 노인들의 경우 그들이 얼마나 사랑받고 싶고 더 나아가 사랑하고 싶은지 우리는 헤아려 보았는가? 홀로 남겨진 노인들은 홀로 살다가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이러한 인권은 시효가 이미 지났는가? 셋째로, 몇 년 전에 TV에서 ‘태조 왕건’을 보면서 철원에서 나주로 왔다 갔다 하는 왕건을 보면서, 더욱이 말을 탄 왕건이 발이 불편할 군화와 녹슨 창 하나 들고 마라톤을 해야 하는 수많은 보병들을 이끌고 가면서 “빨리 가자”고 외치며 말을 달릴 때, 필자는 그 보병들에게 눈을 돌리곤 했다. 그들에게 과연 그 전쟁은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을까? 곧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나온 고향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배 굶으며 죽음의 공포에도 사로잡힌 채 왕건을 위해 목숨 바치겠다며 달리는 가엾은 그 병사들도 왕건과 똑같이 존엄한 인간들 아닌가? 칼과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무명의 병사들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그 약속과 기다림과 절망도 우리는 드라마 속에서 함께 읽어야하진 않을까? 이렇게 본다면, TV 드라마는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텍스트라 하겠다. 주인공에게만 주목하는 우리들은 이젠 장군이나 미남, 미녀가 아닌 주변의 등장인물의 처지에서 드라마를 거꾸로 읽을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수많은 영화와 아이들의 동화 역시도 속속들이 인권교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주와 왕자가 아닌, 임금과 장군이 아닌, 게다가 선남선녀가 아닌 이들까지 모두가 전 인류에 보편적인 인권의 주인공들이다. 이렇듯, 인권 감수성은 중심에서 주변으로의 여행,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의 여행, 그리고,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을 가능케 한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변과 낮은 곳에 눈을 돌리는 데 익숙하지 않다. 감수성이 있는 이들은 남들이 ‘작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에서 자주 슬퍼하고 자주 기뻐한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인권 감수성’이라는 기차는 우리를 기다린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거리이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은 못해보는 여행인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 우리를 초대한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계절인 가을에 이런 기차여행은 어떨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866 | 추천: 0
1.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개월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따라 외국에서의 6개월을 보내고 얼마 전 돌아왔다. 30년 넘게 살던 땅이지만 공항을 나서는 순간 나는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다. 후텁지근한 공기,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숨이 막히는 매캐한 먼지, 거칠게 질주하는 차들 그리고 무엇보다 무표정한 얼굴들. 6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내게는 너무나 익숙했던 일상과 풍경들이 너무나 낯설었다. 6개월 동안의 떠남이 아니었으면 그저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일상이었을 것이 갑자기 낯선 현실로 다가오는 바로 그 순간이란….(인간의 마음은 이리도 간사한 것이었을까?)   2. 낯선 또는 낯설어진 현실에 직면한 인간이 대처하는 방식은 두 가지인 것 같다. 도망치거나 혹은 다시 적응하거나. 나도 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 다시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픈 충동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럴 수 없는 것이 또 현실이니 적응하는 수밖에…. 하긴 가만 생각해보면 이 현실에 다시 적응하는 것이 그리 고역은 아니었다.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에 매몰되고 나니 지난 6개월은 한 이틀 휴가정도의 기억으로 압축되어버렸다.(아 나의 우둔함이여, 나란 놈은 애당초 생겨먹길 이것밖에 안되나니. 난 역시 쳇바퀴 체질이야!)   3.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자전거를 사는 일이었다. 외국으로 나갈 때 차를 폐차시켰기 때문에 뭔가 이동수단이 필요했다. 회사야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면 되지만 어정쩡한 거리에 있는 할인매장에 다닐 때나 동네 가까운데 일보러 다닐 때가 제일 애매했다. 당장은 차를 살 형편도 안 되고 요즘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다고 하니 나도 운동 삼아서 자전거를 타 볼 요량이었다.(운동도 되고 환경도 생각하고 좋지 뭐. 아! 친환경 친생태적인 내 삶의 자세여…. 역쉬!)   4. 발품을 팔아 동네 자전거포 네 다섯 곳을 돌고 인터넷도 여기저기 기웃거려 요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00모델로 최종결정했다. 한 인터넷 공동구매 사이트에서 이 모델을 제일 싼 값에 팔고 있었고, 며칠씩 배송을 기다릴 필요 없이 직접 매장에 들러서 바로 제품을 수령할 수도 있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해서 내친 김에 바로 매장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00자전거 주세요.” 그런데 직원 왈, “아, 그거요. 괜찮은 자전거죠, 많이 팔리구요. 근데 요런 점은 좀 안 좋고 저런 점도 좀 안 좋아요. 나쁘다는 건 아녜요. 그런대로 탈만해요.(도대체 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근데 옆에 있는 요 모델은 조금 비싸긴 한데, 뭐도 좋고 뭐도 좋고 다~좋아요.”(오호! 이놈을 사라는 얘기군) “그래요? 그럼 그거 주세요.” (아, 나의 여린 귀여, 얇아진 지갑이여!)     사진 출처 - ⓒ2006 김대홍 오마이뉴스   5. 그렇게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바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맘에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차들이야 피해서 조심해서 다니면 되고, 운전자들도 알아서 피해주니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지만 배기가스는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광합성을 하는 식물도 아닌데 그 이산화탄소, 일산화탄소, 질산화물에 미세먼지까지 다 들이마시면서 어떻게 살아남기를 바란단 말인가. 자전거가 유산소 운동이라고? 운동은 무슨 개뿔! 이러다간 제 명에 못살지. 이렇게 사서 고생하느니 예전처럼 차를 타고 창문 꼭꼭 닫고 에어콘 빵빵하게 틀고 쌩쌩 달리는 게 제 맛이지.(그래서 다음날 바로 자동차 대리점으로 달려가 신차 카달로그를 받았다. 오~ 멋진데…. 근데 차 값은 왜 이리 비싼겨! 젠장)   6. 여전히 고역이긴 해도 자동차 배기가스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요즘은 일주일에 서 너 번씩 자전거를 탄다. 그럴 때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문득 낯설어졌던, 그리고 그 이후 점점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문득 문득 되살리려고 애쓴다. 무감각해져가는 코와 귀와 눈을 깨워 그때 그 매캐한 냄새와 눈을 따끔거리게 하던 뿌연 하늘과 귀에 거슬리던 자동차들의 소음을 더 또렷이 기억하고 싶다. 사실 덜덜거리며 배기가스를 내뿜는 그 수많은 차들 가운데엔 귀찮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별 생각 없이 살아가던 나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차는 언제 사지?)   사진 출처 - ⓒ2006 김대홍 오마이뉴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98 | 추천: 0
2005년 9월 11일 노사정 대표자들은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의 핵심 쟁점인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을 3년간 유예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진 후 민주노총은 이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진행하겠다고 하고, 참여연대는 “국제노동기준과 노동기본권 외면한 노·사·정 상층부의 담합”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노사문제에 관심이 없는 시민들로서는 민주노총이나 참여연대가 반발하는 이유나 복수노조 허용에 관한 3년 유예의 심각성에 관하여 잘 모를 수 있을 것이다. 약간의 설명을 해 보겠다. 한국 노동법은 원칙적으로 1개의 기업에 1개 노동조합의 설립만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기업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있다면, 그 이후 다른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은 금지된다. 이를 ‘복수노조금지제도’라고 줄여 말한다. 이 정도의 설명만 들으면, 이 제도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다고 느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근로자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설립되어 있는 노동조합이 특정 근로자들만의 이익을 중시하고 있다면, 이 복수노조금지제도는 심각한 폐해를 낳게 된다. 복수노조금지제도로 인하여 노조에서 소외된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복수노조금지제도는 근로자들의 단결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인식되고 있다. ILO 역시 수차례 그 폐지를 권고하였다. 결국 1997년 노사정은 5년간의 유예기간을 둔 후 이를 폐지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 준비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유예기간을 5년 더 연장하였고, 9월 11일 이를 다시 3년간 유예한 것이다.  노사관계 법ㆍ제도 선진화 방안(로드맵) 협상 타결과 관련, 9월 12일 오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민노총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동부, 경총, 한국노총의 야합'이라며 로드맵 입법 중단과 복수노조 즉각 시행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 제도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근로자들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노동조합은 정규직·생산직 남성 근로자들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정규직 근로자들 중심으로 조직된 노동조합에서 배제되어 왔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자신의 조직범위로 포함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방법을 택하는 정규직 노동조합은 흔하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정규직 노동조합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하는 조치들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이란 제도의 임무가 근로자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좋은 방법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정규직 노조와는 별도로, 스스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권리를 지킬 의사를 가진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어 그 이익을 지킬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는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헌법이 기본권으로 확인하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복수노조금지제도는 이와 같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기본권 행사를 원천적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높은 임금을 받도록 하거나 부당하게 직장으로부터 축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솔직하게 얘기한다면,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무시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을 법제도 내로 포섭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전체 근로자 중 60%에 해당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무시하고선 한국 사회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흔히 우리는 내수 경기의 불황과 ‘바다이야기’와 같은 사행산업의 활황, 그리고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증가 현상을 분리하여 바라본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들은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공무원들의 급여 수준은 민간기업의 근로자들에 비하여 낮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은행은 공무원들의 대출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우대조치를 취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저임금의 공무원이 되려고 몇 년 동안 준비를 한다. 그 이유는 공무원의 신분이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은 자신의 10년 후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고, 거기에 맞춰 저축을 하고 소비를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1년 후의 미래를 알 수 없다. 내일 이 직장에 나올 수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자신의 성실함이나 능력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성실한 비정규직이라면 당연히 미래의 불확실성을 대비하기 위하여 저축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실망한 비정규직이라면, 조금 허망해 보이기는 하지만, ‘바다이야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 지나친 저축과 요행심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에서 건전한 내수 시장이 활성화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진 출처 - 쿠키뉴스  민주주의와 관련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 헌법은 모든 근로자들에게 단결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의 근로자들 중 60%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단결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일자리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하기 위하여, 법의 보호를 기대하지 아니한 채, 초조하게 일을 하고 있거나 어느 성인오락실 구석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이런 처지에 있는 그들에게 한국 사회의 미래나 민주주의에 대하여 고민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단결권과 근로권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국가가 그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요청하고 민주주의체제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닐까? 9월 11일 정부와 경영계는, 전체 근로자들 중 채 10%도 되지 않는 근로자들을 대표하는, 한국노총과 합의를 하고 이를 노사정 합의라고 얘기한다. 나는 궁금하다. 9월 11일 노사정 대표자들은 나머지 90%의 근로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10년 한국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고민하였을까?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444 | 추천: 0
평소에 경제면은 읽지도 않던 내가 경제부로 발령 난 것은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1997년 10월이었다. 나라가 거덜 난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지역등권론과 수평적 정권교체를 앞세운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텔레비전 개그프로부터 시작해 밥집에 이르기까지 특정 지역의 사투리가 부쩍 많이 들리던 때였다. 경제부에 가서 처음 맡게 된 분야가 부동산이었다. 담당부처인 건설교통부도 함께 출입하게 됐다. 건설교통부 차관을 지낸 ㄱ씨는 당시 공보관이었다. 공보관 자리는 막 국장으로 승진한 사람이 맡는 관행 같은 게 있었는데, 그도 그런 케이스였다. 첫 눈에 그는 엘리트 공무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매사가 똑 부러졌고, 호방한 성격이었다. 기자들에게도 할 말을 다 하면서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특유의 화법을 구사했다. 동기 중에 가장 승진이 빠른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술만 먹으면 입바른 소리를 곧잘 했고, 기자들과 말싸움을 하기도 했다. 공무원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렇게 그는 당당했다. 어느 날 그가 저녁을 함께 하자고 했다. 청계산 기슭의 한 고기 집이었는데, 매우 고급스런 느낌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중년의 남자 두 명이 앉아있었다. 특정 지역의 사투리를 많이 쓰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평소에 존경하는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명함을 받아보니 건교부 산하 기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태도가 특이했다. 산하 기관보다는 본부가 힘이 세니(당시만 해도 본부에서 산하기관 예산편성권을 쥐고 있었다) 머리를 조아리는 게 옳을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오히려 상전이라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말로만 듣던 낙하산이었던 것이다. 사람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그가 정치권에서 내려온 낙하산들을 접대하는 자리에 나를 끼워 넣은 것이었다. 그는 그 뒤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중책을 맡았다. 그는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그런 자리에 오를 만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평소의 사람 관리, 정치권과의 관계와도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아주 나중에 그는 정권의 핵심이라고 거론되는 사람들이 연루된 어떤 프로젝트의 몸통처럼 돼서 공무원을 그만 두게 됐다. 개인비리가 드러난 것이 아니었는데도 구속까지 당했다. 나는 그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추진해서는 안 되는 사업이었는데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치권의 압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또 한명의 공무원이 있다. 바로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이다. 그 역시 매사에 똑 부러지는, 소신 있고 당당한 공무원이었다. ㄱ씨처럼 기자들에게 할 말을 다 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특유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도 공무원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와 저녁 식사 한 번 해본 적이 없어서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런 그의 발언을 그가 공무원으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차관이 된 지 6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는 청와대의 인사 청탁을 거부해서 경질됐다고 주장했다. 경질 사유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은 시시각각 변해 왔다. 처음엔 신문유통원 업무를 해태한 것이 이유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부적절한 발언이 결정적인 사유라고 말을 바꿨다. 공무원이 자신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청와대의 협조 부탁 혹은 명령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유 전 차관은 그렇게 했고, 결국 경질됐다.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 사진 출처- 한겨레    그의 해명은 이렇다. 아리랑티브이 부사장으로 청와대가 추천한 정치권 인사가 아리랑티브이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먼저 만나자고 했단다. 부사장으로 가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를 만나본 아리랑티브이 사장은 “정말 깜이 아니다”라며 문화관광부가 제발 좀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이 유 전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의 정치권 인사를 추천한 것은 그 다음이다. 유 전 차관은 이 수석에게 그 사람이 그 자리에 꼭 앉아야 하는 이유를 3가지만 말해보라고 했는데, 이 수석은 대답하지 못했고, 그래서 설득이 됐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도 채 안 돼 청와대에서 공직기강 조사를 나왔고, 인사 청탁 거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직기강 조사를 나온 청와대 사람에게 “인사 청탁을 하는 게 공직기강에 어긋나는 겁니까, 그걸 거부한 게 공직기강에 어긋나는 겁니까” 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서 청와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앞으로 이런 일(인사 청탁)을 그만 두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내 생각엔 그런 말이 청와대에 보고 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인사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한 것으로 와전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청와대가 말하는 ‘부적절한 발언’이었던 것 같다. 낙하산 인사들을 접대했던 ㄱ씨와 아예 낙하산 인사를 거부했던 유 전 차관을 비교한 것은 누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 시절에는 낙하산 인사라는 게 그만큼 비일비재했다. 언론에서 낙하산 인사를 비판하는 기사가 나와도 그냥 일회성으로 지나가곤 했다. 사실 낙하산 인사의 양으로 치면 현 정권이 기존 정권들보다 훨씬 덜 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현 정권 들어 낙하산 인사가 유독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른바 조중동의 집요한 물어뜯기가 큰 공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회성이 아니라 날마다 문제를 제기하니 그것이 여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청와대의 도덕성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구언론과의 싸움을 자처했다면 꼬투리 잡힐 일을 애초에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임기가 끝나기 전에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애를 쓰는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이 결국 레임덕을 부추기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정책을 펴려면 코드 인사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아리랑티브이 부사장이 코드 인사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자리인가? 그렇게 자잘한 인사까지 챙기다보니 보은인사니 뭐니 하는 비아냥을 듣게 되고, 총리나 장관 같은 중요한 인사도 마음대로 못하게 되는 것이다. 현 정권의 인사 난맥상은 스스로 만들어낸 무덤인 셈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445 | 추천: 0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함경남도 홍원에서 나신 분들이다. 8.15 전 해에 결혼하셨고 일본의 패망 직후 남한으로 월남하셨다. 유년 시절, 두 분의 정치적 경향을 알기는 어려웠으나 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씨를 찍었던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중학교 무렵 오랜 동아일보 독자로서 70년대의 광고탄압(백지 광고 사태) 때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셨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대학생일 무렵에는 어느날 아버님과의 대화 중에 일제시대(당신이 청년이셨을 때) 일본의 어느 사회주의 사상가(이름은 기억 못하셨지만)의 책을 감명 깊게 읽으셨던 기억을 언급하셨던 적도 있었다. 특별히 정치적 성향이 두드러지신 것도 아니었고 그저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상식에 기초한 평범한 ‘국민’이셨던 두 분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다가 어느 무렵부턴가 가끔씩 집안의 식탁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87년 대선 때는 그저 YS냐 DJ냐로 지지 대상이 갈리는 정도로 알았었다. 92년 대선 때부터는 소박한 서민의 집안에서 정치적 격론이 벌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다. 총선, 지방자치선거, 대선... 선거 때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강도 높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 마땅한 일이 되었다. 요즘은 아버님께서 연로하셔서 어머님과 예의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어머님께서는 뭘 모르는 자식이라고 답답해하시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양순하신 분들이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그 자신들이 가난한 서민이면서도 한나라당 의원 못지않고 조선, 동아일보 기자 못지않은 투사가 되신다. 고집불통도 이만저만 아니시다. 소위 ‘빨갱이’나 이북 문제, 심지어 DJ에 대해서까지도 거의 진저리를 치거나 뿌리 깊은 증오심을 숨기지 않으신다. 적어도 부모님과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내게는, 무언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았던 어떤 기제가 있어 보인다. 혹독한 군사독재 시절, 대부분이 숨죽여 가며 살 무렵, 이승만과 박정희의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아셨던 두 분이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지금 이 마당에는, 박정희를 두둔하고 그 딸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도대체 이유가 무얼까? 무엇이 나의 부모님에게 이런 변화를 불러온 것일까? 나는 나름의 답을 구해 보았다. 크게는 언론의 몰 역사적이고 무책임한 보도 탓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두 분께 분단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기회가 없었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상처가 깊어져만 갔다는 결론이다. 80년 전두환의 등장 이후 ‘땡전뉴스’를 비롯하여 군부독재 집단을 찬양해 마지않았던 언론의 오랜 보도를 접했던 두 분은 정치적 문제에서만큼은 서서히 합리적 이성이 마비되어 가셨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분단구조를 최대한 활용해 선정적으로 대북 적개심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켜 왔던 언론의 폐해는 우리 부모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더해 준 셈이다. 몇 해 전, 주간지 한겨레21에서 베트남에 구수정 특파원을 파견하여 기획특집을 엮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기사를 보면서 나는 꽤 충격을 받았었다. 베트남전 당시의 격전지였던 한 마을을 방문했는데 그 마을의 어떤 할머니(전쟁 때문에 한 눈을 실명하셨고 한 다리도 부상으로 불구가 된)의 말씀이 ‘지난 일은 다 잊었어, 와서 사과하면 다 용서할 수 있어’라는 요지의 이야기였다. 오랜 전쟁으로 국토가 온통 쑥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가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명이 숨져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도 가해자를 아무 조건 없이 다 용서할 수 있는 그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올까 하는 생각이 좀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에 나는 그 ‘힘’의 원천이 불교적 심성(베트남은 거의 전 국민이 불교도인 국가)에서 비롯되기도 하겠지만  ‘통일’이 가져다 준 자연스러운 치유의 기능에서 비롯한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실정은 분단된 구조로 계속 살아야 했고 이 상황을 이용하는 세력들에 의해서 ‘화해와 치유’를 사회적, 국가적 의제로 삼아 보지도 못하고 대결과 반목만을 거듭하면서 살아와야 했다. 사람이 ‘사랑’이나 ‘평화’라는 좋은 생각을 갖고 사는 것과, ‘대결’이나 ‘저주’, ‘증오’ 따위를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데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론을 비롯한 소위 기득권층들은 사람들에게 ‘저주’와 ‘증오’를 몸에 지니고 살라고 매일 주술을 불어넣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적어도 우리 사회의 대부분 언론은 언론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도 감당할 역량이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몇 해 전 남북통일이 될 경우 북한의 토지소유권 문제가 언론에 불거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월남할 때 가지고 온 땅문서를 아직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둥 이런저런 보도가 있었는데 당시 나의 아버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대노하시면서 지금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쩌라고 저런 생각들을 하느냐며 혀를 끌끌 차셨다. 할아버지께서 꽤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셨던, 소위 지주 출신이셨던 아버님의 입에서 예상 외의 말씀이 나왔던 것이다. 그처럼 합리적인 생각을 하시기도 하는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언제나 이 뿌리 깊은 상처로부터 치유될 날이 올 수 있을는지, 얼마나 더 손꼽아 기다려야 할까나.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69 | 추천: 0
이제 방학이 며칠 남지 않았다. 개학을 하면 다시 아이들과의 생기 넘치는 교류(?)가 시작될 것이다. 기대이상 커져있을 아이들의 까무잡잡한 모습이 떠오르며 다가올 만남의 시간이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동시에 방학식날의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떠올리며 2학기에는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기대 반 걱정 반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본다. 다른 학교는 지난달 21일이 방학이었으나 본인이 소속된 학교(초등학교임)는 하루 앞당겨 20일에 방학을 시작했다. 이유는 개교기념일이 휴일과 겹쳐서 미리 부여된 휴일 중 하루가 남아 방학을 하루 앞당기게 된 것이다. 하루라는 시간은 사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남들보다 하루 일찍 시작된다는 것에 아이들도 괜스레 들뜬 분위기였고, 교사들은 그만큼의 업무를 서둘러 마쳐야하는 바쁜 시간이었다. 방학에 대한 안내와 성적표 배부, 담임교사가 어린이 하나하나에게 부여하는 특화된 과제 등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가지의 업무로 교실 안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북적대었다. 그러던 중 잠깐 모이라는 부장교사의 지시로 동학년 교사들끼리 모였다. 모인 자리에서의 이야기인즉, 수재민들을 위한 모금을 서울시 전체 교원, 학생들이 하는데 다른 학교는 내일이 방학이어서 오늘 예고하고 내일 모금하면 되는데 우리학교는 오늘이 방학이라 예고는 어려우니 그냥 현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모금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반부터 시작해 마지막반까지 아이들을 줄을 세워 방송실로 내려오도록 해 모금운동에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 평창군 진부면 일대 가오교. 끊어진 다리가 복구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2006 생태지평 오마이뉴스  어려움에 처한 수재민을 돕는다는 좋은 취지에는 당연히 공감했다. 그렇지만 방식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였다. 우선, 이것은 그동안 행한 교육의 일관성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학생들이 돈을 가지고 다니게 되면 간혹 발생하는 금품갈취 사건의 표적이 되기도 하고, 불량식품이나 사행성 게임에 사용하기 때문에 교사들은 평소에 학생들에게 돈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꾸준히 지도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모금을 하겠다는 것은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학생들만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어서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모금하는 장면을 학교 방송을 통해 내보내는 것은 모금을 많이 하도록 독촉하는 것이고, 또 모금에 동참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학교의 여건상 어렵다면 비록 교육청의 협조 공문이 있다 하여도 학교장이 자율적 판단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를 들어 교감선생님께 문제제기를 하였고, 더불어 좋은 취지를 살려 방학 중 학생들에게 수재민 돕기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하는 선에서 마치자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우리반은 이런 모금방식은 잘못된 것이라며 방송실에 내려가지 않았고 많은 교사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행하였다는 후문을 들을 수 있었다. 학생들을 집으로 보내고 열린 교무회의에서 교장선생님의 발언은 다시 한 번 내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앞서 행해진 모금운동은 서울시 교육청에서 보낸 수재민 돕기 협조공문에 의한 것이고, 하루 앞당겨 방학에 들어가는 우리 학교로서는 비록 60여만 원의 성금을 내게 되었지만 모금운동 참여명단에 빠지지 않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1,200여개의 초중등학교의 학생들이 이 공문에 따라 움직였을 것이다. 물론 수재민을 돕기 위한 운동은 매우 훌륭한 것이고 될 수 있으면 모든 시민들이 함께 동참해야 할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의 기본은 자발성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어거지로 이행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원칙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자칫 누군가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웃지 못 할 코미디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날, 거의 모든 학교들이 방학에 들어간 21일 저녁 뉴스 시간에 확인되었다. “수재의연금을 내주신 분들입니다. …… 000 서울시 교육감과 교사, 학생 1억원. (000 교육감의 커다란 사진과 이름, 또 모금액. 그에 반해 아주 작은 글씨의 교사, 학생이라는 글씨) …… 성금을 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아! 어제의 그것은 바로 오늘의 이것을 위한 해프닝이었구나!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8 | hrights | 조회: 39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