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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생명을 거세시킬 권리가 있는가! (김희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8 17:47
조회
417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던 사형수가 수감 8년 만에 지병으로 숨졌으며,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통하지 않고 자연사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보도가 신문 한 구석에 보이더니, 사형수 23명의 삶 마감전 행동이 미국 AP 통신의 정보공개로 입수된 내용이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통화 “엄마 ---”라는 제목으로 신문 한 자락에 소개되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가 잔잔한 파문을 이으며 사형 제도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보도에 이어, 10월 10일은 ‘세계 사형 폐지의 날’ 행사를 갖는다는 단신 보도로 이어졌으나, 북핵 사태에 휩쓸려 주목도 받지 못한 체 쓸쓸이 뒷전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형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깊다고 이야기된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도 그렇고, 고조선 8조금법에도 나오는 사형, 중세의 암울한 마녀재판과 화형 시대를 지나, 이성과 계몽의 시대라는 근대에 들어와서도 우리가 어쩌면 눈에 익히 알고 있는 근대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칸트 등도 모조리 사형 제도를 지지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사형 제도의 견고함을 볼 수 있고, 칸트의 ‘국가를 해체하더라도 감옥에 있는 사형수를 먼저 처단해야 한다’는 말에서는 전율까지 느끼게 만들며, 아직도 국민 여론 조사를 하면 사형제도 존치 의견이 많다는 보도에서는 벽을 느끼지만 이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현실이 분명해 보인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도 물론 사형 제도에 대하여 정당한 것이고,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당당히 밝힌 지 오래 되었다.
헌법재판소분들의 의견은 이렇다. ‘사형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심과 범죄에 대한 응보 욕구가 서로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으로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것으로 헌법상 비례의 원칙에 반하지 않고, 헌법이 스스로 예상하고 있는 형벌의 종류이기도 하므로 헌법 질서에 반하지 않으며, 우리의 문화수준이나 사회 현실에 비추어 완전히 무효화 시키는 것이 타당치 않다’고 설시하면서 친절하게 뒤에서 부기하기를 ‘--- 비록 법정형으로서 사형이 적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선고함에 있어서는 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충고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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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견해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분들 중 극히 일부가 ‘사형제도는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고, 형벌의 목적인 범죄의 예방, 응보, 범죄인 개선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 달성에 필요한 한도를 넘어서므로 비례원칙에 반한다’고 반대 의견을 펴시는 분들도 있다.

문제는 헌법이다. 헌법 제37조 제2항에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침해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사형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은 사형은 기본권의 본질적 침해가 아니라고 하고,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사형이 기본권의 본질적인 침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법을 모르는 사람도, 법을 좀 아는 사람도 참으로 헷갈리게 생겼다.
그런데 법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하게 보인다.
왜 그럴까. 그래야 법률가들이 법을 가지고 밥을 먹고 살 것이며, 모든 법령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에 너무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 신체, 자유가 天賦不可讓權利(하늘이 내려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가르치고 배우는데,  불가양의 권리라고 떠들다가도 사형 제도에 들어가면 위 말이 쑥 들어가 버린다.

결론은 그렇다. 생명은 누구에게 양도할 수 없고, 양도 될 성질의 것도 아니고, 생명과 생명을 비교하는 것은 물건과 물건을 이익형량 비교하듯이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동의한다면, 사형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는데 이론이 생길 수 없는 것인데 현실은 아득하다.
국회의원들은 16대에 이어 17대에도 사형폐지법안을 과반수 이상 의원들로부터 동의 받아 법안 발의를 해 놓은 채, 여기 저기 눈치만 보고 정치적 제스처만 취하는 선량(?)들에게 이를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어 보인다.
결국은 프랑스 미테랑 같은 지도자가 나와서 헌법적 결단으로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는가 보다며, 미래의 지도자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

그런데, 요즘처럼 흉흉한 세상에, 곧 한반도가 전쟁에 휩쓸리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태평스레 웬 사형제도 운운하냐고 ?
그것은, 전쟁의 위협과 가능성이 커질수록 우리는 목이 터지도록 평화를 외쳐야 하고, 폭정과 억압이 심할수록 자유의 깃발을 높이 쳐들어야 하는 것처럼, 너무도 절박한 생명의 이야기가 주목을 받지 못할수록 더욱 생명을 외쳐야 하지 않겠냐고 ---

 

김희수 위원은 현재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