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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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안식년을 구실로 한국 사회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한가한 소리 좀 해볼까 한다. 영국에 살면서 내가 요즘 가장 몰두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만화영화 ‘The Simpsons 심슨가족’을 보는 일이다. 한국의 TV에서도 가끔 방송하던 이 만화영화는 의외로 한국에선 그리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적지 않은 마니아들이 있는 것으로 알지만 그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거나 대중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마 만화영화는 아이들이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아직 보편화되어 있는 까닭에 ‘심슨가족’의 재미를 이해할만한 연령층은 이 작품을 그리 즐겨 보지 않았던 것 같고, 디즈니식의 깔끔하게 다듬어진 만화영화나 일본의 자극적인 만화영화에 길들여진 어린이들에게 심슨가족의 투박한 선과 울퉁불퉁한 캐릭터, 그리고 짙은 블랙유머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였을 수 있을 게다.     영국의 위성 채널에서는 ‘심슨가족’을 매일 적어도 세편 이상 볼 수 있다. 나로서는 단조로운 외국의 일상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만난 셈이다. 나는 이 만화영화를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꼭 함께 본다. 아들의 영어 듣기 능력이 나보다 훨씬 나은 까닭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대단히 큰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양식있는 세계인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클린턴과 대결했던 선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심슨 가족이 아니라 월튼네 가족이 필요합니다.” 월튼네 가족. 아마 중년 이상의 세대라면 어린 시절 흑백 화면을 통해 보았던 월튼 가족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인자한 부모와 착한 자식들, 훈훈한 이웃들이 등장하는 도덕교과서 같은 드라마 The Waltons의 마지막 장면은 늘 똑 같았다. 창문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면서 가족들이 서로 ‘굿나잇’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늘 포근하고 애틋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아마도 조지 부시는 월튼가족이 보여주는 가족상이 미국 공화당과 보수 세력이 내세우는 보수적인 가족주의와 부합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월튼네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이 항상 똑같았던 것과 달리 ‘심슨가족’의 경우에는 시작을 알리는 타이틀 장면이 매일 조금씩 바뀐다. 직장과 학교에서 서둘러 돌아온 심슨 가족 다섯명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장면이 이 타이틀백의 마지막 장면인데 이 마지막 컷에 늘 기상천외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 소파에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구멍이 뚫리면서 밑으로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목이 뭉텅 잘리면서 가족들의 얼굴과 몸이 바뀌는 엽기적(?)인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월튼 가족의 교과서적인 가족상을 좋아하는 조지 부시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그 타이틀 장면만 보고도 기절초풍을 하고 채널을 돌려버렸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심슨가족을 제대로 본 적이 없음이 분명하다.     ‘심슨가족’은 여러모로 TV만화영화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벗어나 있다. 그것은 우선 등장인물들의 생김새, 즉 아이콘에서부터 드러난다. 주인공 심슨 가족을 비롯해 이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도무지 예쁘다거나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왕방울같은 눈과 뾰족한 머리모양, 툭 튀어나온 입 등을 보면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예쁜 공주와 잘생긴 왕자의 유형을 벗어나지 않는 일본의 만화영화나 귀엽고 앙증맞은 디즈니식 만화영화에 익숙한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심슨가족의 아이콘은 차라리 위악적이다. 이는 이들의 성격에서도 나타난다. 심슨가족은 흔히 보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무작정 선하거나 무작정 악하지 않다. 이들은 때로 매우 이기적인 심성을 드러내기도 하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 가족 자신은 물론이고 이들이 사는 스프링필드에는 늘 크고 작은 말썽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건과 말썽에는 오늘날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이 만화라는 포장 속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코믹함으로 버무려져 있음은 물론이다. 이 만화 속에도 돈 많고 사악한 사장이 등장하고 어리석은 권력자가 등장하지만 이들도 인간적 약점을 드러내고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무엇보다도 심슨가족은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에 관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보여준다. 예컨대 심슨가족은 동성애자들의 인권 보호에 절대적인 찬성 입장을 보여주고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이다. 최근에 본 한 에피소드에는 이 만화영화의 정치적 입장을 은근히 드러내는 대목도 등장한다. 심슨가족이 처음 유럽 여행을 떠나는데 심슨의 딸 리사가 자기 짐 가방에 캐나다 국기 표시를 붙인다. 바트가 왜 캐나다 국기를 붙이냐고 묻자 리사는, ‘최근 미국인들이 잘못된 선택을 많이 한 탓에 유럽인들이 미국 사람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심슨가족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도 저런 만화영화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만화영화를 만든다면 우선 소재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심슨가족 식의 위악적인 블랙 유머의 소재가 될 만한 일들이 거의 하루도 안 빼놓고 일어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화가라면 당장 한편의 기막힌 블랙코미디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소재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재벌 회장이 정치인에게 뇌물을 건네고 그 장면은 공안 기관에 의해 도청 테이프에 담긴다. 다시 그 테이프는 정리 해고된 기관원에 의해 거래 대상이 되다가 세상에 폭로된다. 정부와 언론, 기업들까지 나서서 영웅으로 떠받들던 과학자가 하루 아침에 논문을 조작한 사기꾼으로 전락하고, 그래도 그 과학자를 구국의 영웅으로 믿는 사람들은 시위를 벌이고 강연을 방해하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한다. 별 새로운 내용도 없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단지 자기들이 믿는 신에 대해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교회들이 들고 일어나 영화상영 반대운동을 펼치고 그 덕분에 톡톡히 홍보 효과를 본 영화관 앞은 장사진을 이룬다. 그것  뿐일까. 굳이 만화가들의 풍자적 상상력이 아니더라도 사건 자체가 코미디인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게 한국 사회 아닌가 말이다. 하긴 그렇게 현실이 더 코미디이니까 그런 만화영화가 나오기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508 | 추천: 0
지난 2월 말 가족과 함께 1년 예정으로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생활도 이제 석 달이 다 되어갑니다. 낯설고 물선 이국 생활도 이제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미국생활에서 가장 불편했던 건 영어나 낯선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동차였습니다. 말이 안통하면 손짓 발짓으로 어찌해볼 수 있지만, 차가 없으니 장보러 다니는 일이 정말 난감하더군요. 미국사람들에게 자동차는 신발이라는 얘기도 있는데요. 진짜 신발이 없으니 답답하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중고차를 샀습니다. 좀 오래된 차입니다만,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으로부터 거저 얻다시피 했습니다. 3000 CC 6기통짜리인데 지금까지 몰았던 차 중에 제일 배기량이 큰 차입니다. 제 발에는 큰, 미국사람 표준 사이즈 신발인 셈이죠. 한국에서였다면 휘발유값이 1천6백 원이 넘는 이 때에 공짜로 준다고 해도 엄두를 못 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긴 한국의 절반밖에 안되는 기름값 덕분에 그냥 끌고 다니기로 했습니다. 미국 기름값이 싸다고 합니다만 여기도 요즘은 기름값 때문에 난리입니다. 주유소의 가격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고 있고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연일 고유가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서 솔직히 ‘기름값이 올랐다고 해도 싸기만 한데 왜들 호들갑이지? 도대체 얼마나 더 싸게 쓰겠다는 심보인거야?’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기야 본래 없이 살던 사람들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차 없이 못사는 사람들이고 한 집에 서너 대씩 차를 굴리는 미국사람들에겐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이 정말 충격 내지는 거의 패닉 상황일 것 같습니다. 여기선 3천 씨씨 차는 기본이고 4천 씨씨 5천 씨씨 차들도 숱하게 굴러다닙니다. 오히려 소형차를 찾아보기가 어렵죠. 하여튼 여기 와서 놀란 것 중에 하나는 ‘왜 저렇게 덩치 크고 배기량이 큰 차들이 이리도 많을까’ 하는 거였습니다. 이들에게 자동차의 연비는 우선적인 고려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이렇게 연비가 나쁜 차의 대명사가 미군 군용트럭의 민수용 버전인 허머 H1입니다. 이 차는 미국 환경시민단체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었고 얼마 전 GM은 이 차의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 아무리 기름값이 싸기로서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막강한 성능을 자랑하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대명사로 통하던 ‘허머(사진)’의 대표 모델 사진 출처- 세계일보 이렇게 길바닥에 바가지로 기름을 퍼부으면서 달리려고 이라크의 석유가 필요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구요. 이렇게 가다간 도대체 어디서 또 석유를 끌어오는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지도 궁금했습니다. 하여간 한국에선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피부로 팍팍 와 닿더군요. 그러다 보니 미국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들도 조금씩 나오는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이 차를 타고 다닐 권리는 있지만 이렇게 기름 많이 먹는 차를 굴릴 권리까지 있는가" 하는 얘기도 들립니다. 그동안 석유를 너무 흥청망청 써댔다는 자성의 목소리들 말입니다. 요즘 하이브리드 자동차 광고가 많이 보입니다. 기름값 때문인지 이런 차들의 판매량도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차들은 거의가 일제 차입니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은 덩치만 크고 연비 나쁜 차들만 만들다가 일본차에 밀려나더니 이제는 하이브리드카 시장마저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있다는 비난도 듣고 있습니다. 사실 자동차 휘발유뿐만 아니라 난방 등 민간부문의 에너지 소비량도 엄청납니다. 시카고, 보스톤, 뉴욕, 워싱턴에 이르는 미국북동부 지역은 미국 전체 난방에너지의 80%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이 지역의 겨울이 길고 추운 탓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들이 단열처리를 하지 않았고 또 가장 값비싸고 비효율적인 전기에 의한 난방방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솟는 기름값은 '미국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석유가 없어서 미국 주요 인구밀집 지역인 동북부에 난방이 안 된다?? 이건 진짜 국가비상사태죠. 이런 고유가 행진이 계속된다면 - 당연한 수순이지만 - 얼마 안 있어 미국에서도 에너지 절약 운동이 펼쳐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석유를 더 확보하는 문제는 아무리 미국의 패권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이라크 전쟁처럼- 맘대로 되지도 않고 비용도 엄청나게 들죠. 국내적으론 기름값에 걷는 세금을 깎아 줄거냐 말거냐는 논쟁도 있습니다만 이런 세금정책이 석유를 더 생산해내는 것도 아니죠.   사진 출처- 쿠키뉴스, AFP 오늘 라디오에서 한 전문가는 이런 애길 하더군요. '이제 미국이 석유를 더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석유 없이 살 수도 없다. 문제는 미국인들이 지금까지의 석유 소비행태를 바꾸는 것이다'라구요. 지금까지처럼 흥청망청 쓰지 말고 아껴 쓰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죠. '아껴 쓴다'... 그것도 '석유를' 아껴 쓴다... 미국사람들에겐 참 생소한 단어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의 에너지 정책은 석유를 싼값에 확보하는데 있지 절약하는데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미국은 전 세계 석유소비량의 4분의 1이나 되는 일일 2천만배럴의 석유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에너지는 41%정도(단순하게 계산해도 약 8백만 배럴-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1일 산유량에 버금가는 양이네요. 이 정도면 이라크에서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지 않나요?)가 된다고 합니다. 이는 전 세계 인구 3분의 2가 소비하는 양과 맞먹는 양이라고 합니다.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방 재정적자보다 두 배나 되고, 국방예산보다도 많다고 합니다. 다시 말한다면 더 많은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보다 국내에서 에너지 절약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것이 오히려 남는 장사라는 거죠. 전쟁을 안 해도 되고 그 돈을 경제에 투자하면 경기도 살리고 환경도 지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아니 이게 당연한 일의 순서죠. 그래서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어떤 전문가가 방송에 나와서 ‘석유를 아껴쓰자’고 한다면 '하나마나 한 말씀 캄사합니다'하고 흘려버렸을 텐데 여기 미국에선 이런 하나마나한 말씀이 정~말 '지당하신 말씀'으로 들리더군요.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457 | 추천: 0
시인들은 타고난 감수성과 직관으로 세상 만물의 이치를 느끼고 꿰뚫으며 그들이 발견한 것을 우리에게 가슴에 와 닿는 언어로 전해주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담론이나 복잡한 방정식을 빨리 풀어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혹은 세상사 어느 하나도 쉽지 않고 더욱이 사람들이 모여 하는 일이면 그 취지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꼭 어려움이 동반된다며 푸념하거나 체념하는 우리들에게 시인들은 매우 단순한 것 안에 담겨 있는 자연의 이치를 눈 여겨 보라고 한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에서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권리를 찾자며 배부한 유인물에서 나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그 시 안에서 나는 인권운동에 대한 생각, 특히 실천과 연대에 대한 하나의 답을 발견한다. 시의 단락을 편의상 둘로 나누는 우를 범하면서 인용해본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우선, 인권운동은 ‘벽’을 넘는 투쟁이며, 연대를 통한 것이다. 한국에는 꽤 많은 인권단체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를 들면, 종합적인 인권단체(인권실천시민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다산인권센터, 평화인권연대, 새사회연대 등), 종교권 인권단체(천주교인권위원회, KNCC 인권위(한국교회인권센터), 불교인권위원회, 원불교인권위원회 등), 전문가 인권단체(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등), 피해자 인권단체(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등), 장애인 인권단체(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장애인이동권연대 등), 성소수자 인권단체(동성애자인권연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등), 과거청산 관련 인권단체(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등), 이주노동자 인권단체(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이주노동자인권연대 등), 지역 인권단체(수원 다산인권센터, 안산노동인권센터, 광주인권운동센터, 부산인권센터, 울산인권운동연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등), 사회권 중심 단체(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 정보인권 중심 단체(진보네트워크센터, 지문날인반대연대 등), 기타(국제민주연대, 사회진보연대 등)가 있다. 이 단체명만 보더라도 한국 사회의 인권운동이 넘어야 할 벽들이 첩첩으로 싸여있음을 금방 알게 된다. 각 인권들이 서로 상호의존적이고 불가분리이듯이, 이러한 운동들도 상호의존적이고 불가분리하다. 이 모든 인권들이 총체적으로 동시에 실현되어야 하듯이, 인권운동단체들의 연대는 전략이자 행동원리이며 존립의 기반이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인권운동은 결국 절망의 벽을 넘는다. 인권운동진영은 그동안 사회보호법 폐지, 준법서약서제도 폐지, 호주제 폐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입법화 등을 성취했다. 아울러, 지속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사회복지시설 생활인의 인권 확보 운동, 사법개혁 운동, 장애인 교육권 및 차별금지와 권리구제 운동,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실현 운동, 비정규권리입법 쟁취 투쟁, 이주노동자 인권운동, 다양한 과거청산운동, 팔레스타인 연대운동, 정보인권운동, 국가인권위원회 감시운동 등과 국제연대운동, 인권교육운동 등을 하고 있다. 이 나라가 인권의 푸른 잎으로 덮일 때까지 인권운동은 결코 고개를 떨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결국은 그 벽을 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인권운동은 어떤 성찰이 필요할까. 인권운동은 큰 목소리로 벌여야하지만 그 운동의 뒷심은 말없이 꾸준히 행하는 실천에서 온다는 점, 담쟁이가 벽을 파랗게 덮을 때까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점, 인권단체들끼리 꼭 여럿이 손을 잡아야 한다는 점, 인권단체 안에서 작은 담쟁이 떡잎들을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 아닐까. 아울러, 우리는 담쟁이 잎들이 넝쿨을 이루면서도 잎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도 탄탄한 잎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각 인권단체의 전문성을 토대로 하여 연대를 맺는 조직적 대응을 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분산적인 대응만으로는 총체적으로 요구되는 인권적 과제들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조직적 대응이 필요하며, 동시에 각 단체들은 저마다의 분명한 전문 영역을 확보하고 의제별로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인권단체들과 시민들과의 연대가 활성화 되어야하고, 시민사회 안에서도 인권의 꿈과 의지를 가진 작은 담쟁이 떡잎들이 계속 자라나야 할 것이다. 사람 다니지 않는 산이라도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 오솔길이 생기듯, 희망을 계속 지니게 되면 언젠가는 현실이 되며, 혼자 꾸는 꿈은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믿고 인권의식과 감수성을 터득해가는 시민들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들이 인권단체들을 찾고 동참하며 그들의 뒷심이 되어줄 때, 마치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는 말처럼 인권단체 잎 하나하나는 각기 수천 개의 담쟁이 잎들을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꿈꿀 권리』라는 책 이름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인권현실 앞에서는 꿈을 꾸는 것이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담 벽 너머의 세상을 꿈꿀 ‘권리’와 함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담 벽을 넘어야 한다는, 기어이 넘고 말아야 한다는 ‘의무’ 아닐까?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451 | 추천: 0
우울합니다. 평택 대추리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참담하다 못해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순박한 농민들을 상대로 헬기가 뜨고 순식간에 군인들이 철조망을 두릅니다. 그 전의 경찰들과 맞닥뜨렸던 상황과는 또 다릅니다. 그 막강한 위세에 힘없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속절없습니다. 일부 지원나간 소수의 사람들에게도 역부족인 현실입니다. 그렇게 이 땅의 중심부엔 새로운, 드넓은 군사기지가 태동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것이 오십여 년 이상 공포와 경원의 대상이었던 ‘북한’을 경계하기 위함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안보를 책임지겠다고 광분하는 그 숱한 매체들의 은근슬쩍 눈감음을 바탕으로 내부의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대로 국론분열이 심각한 상황인데도 그들은 원인 결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합니다. 오직 ‘제국’ 미국의 이익에 잘 복무할 수 있으면 그만인 듯 합니다. 이 순간 일제시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윤봉길의사나 안중근의사가 별 사람인가요? 자주독립을 희망한 사람 아니던가요? 친일청산 작업이 한창인 이 때에 뜬금없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친일청산 작업보다 더 중요한 게 친미(사대 매국)현상을 발본색원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대로 싸우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런 일은 촛불 하나 밝히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됩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가능성은 싹을 틔운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온통 패배의식에 젖어있을 때 8.15는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8.15는 우리에게 온전한 해방이 아니었습니다. 준비한 자에게 상급은 온다고 믿습니다. 온전한 해방, 온전한 평화, 온전한 자유를 위해 우리 모두가 기울여야 할 일은 아직 많습니다. 세상과의 연대를 비롯하여..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내일을 위하여! 만인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홍승권 위원은 현재 삼인출판사 부사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7 | hrights | 조회: 590 | 추천: 0
지난 주말 금강산에 다녀왔다. 백두산에는 가 본 적이 있지만 금강산은 처음이었다.(운이 좋아 백두산은 북한 쪽과 중국 쪽 모두를 가봤다) 봄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금강산은 마치 무릉도원 같았다. 버스로 이동할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북녘 주민들의 남루한 모습은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만 느껴졌다. 2년 전, 처음 평양에 갔을 때처럼 가슴을 누르는 고통은 없었다. 그때는 음식을 남길 때도 죄스러웠는데…. 일부러 모른 척 한 것인지, 세월이 흘러 심드렁해진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금강산에 간 것이 아니라, 조금 ‘불편한’ 설악산에 간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비행기를 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비무장지대를 관통해-휴전선을 뚫고-북으로 넘어간 것인데, 이리 무덤덤할 수 있다니. 무심해진 것은 나만이 아닌 듯 했다. 마을이든 산이든 어딜 가나 눈을 찌르는 붉은 색 ‘선전문구’에 대해 남쪽 관광객들은 무척 관대했다. 현대아산 소속의 가이드는 잘 보이지 않는 선전문구까지 일부러 가리키며 내용(‘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와 같은)까지 친절히 주워섬기는 것이었다. 남쪽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은 선전문구가 아니라 일종의 유물 혹은 관광 상품이 된 것 같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일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바르르 떨던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는데. 이것저것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은 것은 2년 전과 다름없었다. 먼저 버스로 이동 중 촬영금지. 북한 당국은 카메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입국 심사 때 카메라는 별도로 꺼내 심사를 받아야 했고, 일정 규모 이상의 줌 기능이 있는 카메라는 갖고 들어갈 수 없다. 관광객이 이동하는 길가에는 군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는지를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예전엔 200m 간격으로 촘촘히 서있었는데 요즘엔 비교적 헐거워진 것이라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선전문구 사진 -  이재성(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벌금’이었다. 입국할 때 나눠주는 방문증(관광증)이 있는데, 이 카드를 구기거나 볼펜 자국을 내거나 하면 10달러의 벌금을 내야했다. 카드에 기재된 이름이 틀려서 고치려다 벌금을 문 사람도 있다고 했다. 찍은 지 6개월이 넘는 사진을 제출했다 걸려도 10달러, 줌 기능이 좋은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다 걸려도 10달러였다. 등산을 할 때도 가이드를 추월해서 앞으로 나가면 벌금감이라고 했다. 일행 중에는 합법적 ‘삥뜯기’라며 기분 나빠하는 이도 있었고, 이 정도면 ‘애교’라며 기부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주겠다는 이도 있었다. 마지막 날, 해금강에 들렀다 삼일포-어떤 왕이 하루만 놀고 가려고 들렀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 삼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삼일포라고 했다-에 갔을 때였다. 앞서가던 동아일보 기자가 내 신분을 말했는지, 북쪽 안내원이 아는 체를 했다. ‘기지’ 바지에 운동화, 점퍼를 입은 전형적인 북쪽 남자였다.    “한겨레신문사에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겨레신문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네다. 진보적인 신문이라고 들었습네다. 우리 수령님(인지 장군님인지 잘 안들렸다)을 칭송하는 신문이라고 들었습네다.”  잘 안 들린다고 했더니 같은 내용을 다시 한번 말해줬다.  “아, 네. 칭송은 아니구요, 북쪽을 바로 보자는 거죠. 그동안 너무 왜곡된 시각으로만 보아왔으니,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대화가 한 번 삐끗했다. 북쪽 안내원이 다시 물었다.  “금강산에는 처음이십네까?”  “예 금강산은 처음이구요, 평양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백두산도 가봤구요.”  “그럼 금수산기념궁전은 가보셨습니까? 우리 수령님 계시는.”  “아니요, 거긴 못 가봤고, 만경대는 가봤습니다.”  “아 그렇습네까? 만경대 고향집에 가보신 소감이 어땠습니까?”  “뭐, 그냥 시골집이죠. 저희한테는 그렇죠.”  안내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뭔가 기분 좋은 말을 기대했을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속에 없는 말은 잘 못하는 성미인지라.  대화는 거기서 그쳤다. 일행들이 북쪽의 여자 안내원을 졸라 노래를 하게 한 것이다. 올망졸망 예쁘게 생겼는데, 두 볼이 발그레해지며 쑥스러워하면서도 노래를 잘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가이드가 “정상에 올라가면 반드시 안내원에게 노래를 청해서 듣고 오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정상에 올라가보니 바로 이 안내원이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거기서도 관광객들을 상대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노래를 듣고 내려가는데 뒤에서 이 안내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한겨레 기자 선생, 저랑 같이 가지 왜 먼저 갑네까?”  “아 그럴까요? 지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까?”   농담은 묵살되고 질문이 돌아왔다.  “금강산은 처음이십네까?”  “예 금강산은 처음이구요, 평양에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백두산도 가봤구요.”  “평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네까?”  “넓은 들판이요. 넓어서 거칠 게 없으니 좋더라구요.”  “아니 뭐 가본 데가 있을 거 아닙니까?”  “만경대도 가보고 개선문도 가봤습니다.”  “만경대를 보신 소감이 어땠습네까?”  앞의 대화와 패턴이 비슷해서 살짝 짜증이 났다. 똑같이 대답했다.  “뭐, 그냥 시골집이죠. 저희한테는 뭐 그렇죠.”  “만경대에서 xx(잘 모르는 단어였다)를 보셨습니까?”  “아니요 기억이 안 나네요.”  역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때 다른 누군가 끼어들어 대화는 잠시 중단됐다. 그 사람이 xx를 안다고 하자, 안내원이 나를 타박했다.  “아니 한겨레신문 기자가 만경대에서 아무 감흥이 없었습니까? 강정구 교수께서 만경대에 가서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이룩하자’고 썼다가 구속이 되셨는데, 기자 선생은 그럼 강 교수와 다르다는 겁니까? 진보적인 신문이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그럼요 다르지요. 진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닙니다. 같다 다르다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강정구 교수의 구속에 반대한다. 그의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그와 생각이 같지는 않다. 대충 그런 요지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대화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대한 이야기로도 이어졌다. 그는 조선일보가 밉다고 했고, 중앙일보에 대해서는 신뢰감을 표시했다. 나는 중앙일보의 한계에 대해 말했다. 그러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지점에 다다르자 그는 “아까 심한 말 해서 미안하다”며 “우리 힘 모아 조국 통일을 위해 힘쓰자”고 말했다. 나는 “다 이해한다”고 했다. 버스에 올라타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면 같은 ‘종교’임을 확인하고 위로받고 싶어 했던 것일까?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해서 (맹신이라는 의미의) 종교가 되었을까? 세계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 사회주의를 이처럼 종교로 만든 사례가 있던가. 마오쩌둥의 중국이든 호치민의 베트남이든 카스트로의 쿠바든 내가 아는 그 어떤 사회주의 국가도 권력을 세습하거나 종교화하지는 않았다. 왜 북한에서는 귤이 탱자가 되었을까? 맹목성은 우리 민족의 특질인가? 남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재벌도 세습하고, 교회도 세습하는 나라. 역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광신적인’, 그리고 격렬한 반공투사로서의 한국의 기독교. 북한의 사회주의와 남한의 기독교는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서북청년단이 남한 기독교의 뿌리라지만, 어쩜 그렇게 극과 극으로 닮을 수 있는지. 몰아의 경지는 아름다울 수 있지만 이성을 잃는다는 점에서 신뢰할 수 없다. 절대주의는 힘이 있지만 배타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하다. 최근 조선일보는 탈북자 출신이 만든 <요덕스토리>라는 뮤지컬을 수 십 차례에 걸쳐 대서특필해 억지 흥행을 시킨 바 있다. 그 뮤지컬을 보면서 나는 착잡했다. 뮤지컬을 만든 탈북자들이나 그걸 꼭 봐야한다며 대서특필하는 조선일보의 유아적 비명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북쪽의 인권현실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 간단치 않다. 폭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아니, 폭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쪽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안쓰럽지만 남북관계나 동아시아의 세력관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당장 쳐들어가서 북쪽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일부 극우파들의 주장을 논외로 한다면, 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죽음의 고비를 넘어가며 탈출을 감행한 탈북자들의 절박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해져야 하는 것 아닌지. 금강산이든 개성공단이든, 더디고 어렵지만, 그것이 통일로 가는 유일한 접근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등산할 때 가이드 신경 쓰지 않고 내 속도에 맞춰 가고도 싶고, 북쪽 주민들과 어울려 사진도 마음껏 찍고 싶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으랴.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한 장면 사진 출처- 한겨레  사회주의가 한번 흥했다 망했고, 세계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각종 부작용이 생기고 있는 게 요즘 현실이다. 사이클로 치면 몇 바퀴는 돈 상황인데, 우리의 지적 수준은 60년 전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한국전쟁 같은 비극을 또다시 불러 죽고 죽이는 칼부림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567 | 추천: 0
5월 말로 예정된 지방선거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은 나름대로의 색깔을 드러내고, 시민들은 또다시 지역사회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꾼다. 선거는 아름다운 제도이다. 정치인들은 구체적인 권리 주체로서의 시민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자신만의 청사(廳舍) 안에서 안주하던 정치인들은 선거가 가까워지면, 누가 자기에게 그 권한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때만큼은 정치인들도, 재산의 과소나 나이나 남녀 여부와는 무관하게, 1명의 시민에게 1명분의 선거권이 있다는 점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시민들 역시 과연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가 이번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지 여부를 고민하고, 친지들에게 그 후보자의 장점을 자랑하기도 한다.   사진 출처 - 경기도 수원 도(道)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 선관위 직원들이 5.31 지방선거 포스터를 점검하고 있다.  /신영근(수원=연합뉴스) 사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는 극심한 분열을 경험하고 있다. ILO 구제금융이 경제적 분열(양극화)을 가져왔다면, 참여정부의 집권은 일종의 이념적 분열을 초래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의 집권세력이 야당 세력과 별 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제1야당이나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 스스로는 참여정부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마도 다음 번 대통령선거는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다투어질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참여정부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조차도 현 집권세력이 정부를 구성할 권한을 가지고 그들이 자신을 통치한다는 점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절치부심하며 미래의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임기 중 탄핵과 같은 합법적인 절차 없이는 현재의 대통령을 부정하거나 현재의 정부가 아닌 다른 정부로부터 통치를 받겠다는 주장을 하지는 못한다. 최소한 절반 이상의 시민들이 현 집권세력에 비우호적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로지 다음 대통령 선거만을 기다리면서 술집에서 누군가를 욕하는 정도의 행동만을 하고 있다. 내가 흥미로워 하는 점을 간단하게 얘기하면, 정부의 선택과 관련하여 어느 누구도 이를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를 상상해 보자. 이 사회에는 여러 개의 정부가 있다. 삼성 그룹이나 현대 그룹과 같은 대규모 기업집단이 정부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고, 혹은 몇몇의 시민들이 조합을 구성하고 정부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시민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정부를 택하여 그 세무서에 세금을 납부한다. 정부들은 좀 더 많은 시민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세금을 할인하고, 다른 정부보다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시민들은 자신이 속한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다른 정부로 옮길 따름이지 선거를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지는 않는다. 이 사회에서 시민들은 가장 저렴한 세금을 내며 가장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이성적이고 단순한 이미지에 의하여 그 결과가 좌우되는 선거가 아니라 이성적이고 경제적인 판단에 따라 자신의 정부를 선택한다. 따라서 정부 선택의 문제에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도 없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저 다른 정부를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러한 정부 시스템은 시민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델이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그런데도 우리는 이와 같은 합리적인 정부 모델을 운용하지는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치광이로 취급될 것이다. 그 이유는 한 나라의 통치 시스템을 시장에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선거가 정부 선택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제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가장 민주적인 제도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기 때문이다. 즉 정부의 정당성은 민주적 선거제도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이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 주위에는 시장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 스크린 쿼터도 그 중 하나이다. 우리는 문화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나 용역과 같이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말이나 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공용어가 한글이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한국의 언어를 시장에 맡겨 결정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문화와 언어가 시장에 의하여 좌우될 수 없다면, 사람에 관한 문제는 어떨까? 사람의 삶과 존엄성을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요즈음 비정규직 문제에 대하여 여러 해법이 나오고, 그와 관련하여 여러 입장이 전해지고 있다. 부족한 지식과 식견 탓에 나로서는 어떤 것이 좋은 해법인지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해법들을 살펴볼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그 사람들을 시장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점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선거를 통하여 정부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것 역시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447 | 추천: 0
#1 최근 미국 소송변호사들을 위해 쓰여진 「소송 기법」(Trial Techniques, Thomas A. Mauer)이라는 책을 틈틈이 읽고 있다.  원래 관심 있던 분야였고, 우리나라도 내년 정도부터 배심제와 참심제가 혼합된 국민참여형 재판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하여 읽어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서론이 끝나자마자 배심원을 어떻게 설득하는지의 문제(Psychology of Persuasion)와 배심원을 선정하는 방법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일반인이 집중력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은 15분에서 20분 정도에 불과하므로 그 시간을 넘겨서 장황한 주장을 하지 말라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규 교육이 끝난 후에는 다시 학교교육을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소송과정에서 변호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듯한 분위기로 변론을 진행하면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것 같은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밖에 법정에서 변호사의 위치, 시선처리, 옷차림, 제스처까지 조언한다. 이처럼 고난도의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법정에서 배심원들을 상대로 직접 변론을 하는 변호사는 다른 변호사들과는 ‘노는 물이 다른’ 변호사로 평가된다고 한다. 이런 노하우들 때문인지 DNA 검사결과 아내를 살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0.1%에 불과하다던 O.J.심슨도 스타 변호사들을 앞세워 무죄를 받아낼 수 있었다.  O.J 심슨 사건을 예로 들며 배심제 도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는 것 같다.  배심제가 “무전유죄, 유전무죄” 현상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O.J 심슨 사건의 부정의한 결론은 배심원제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갈등에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배심원 12명 중 8명이 흑인이었고, 이들은 담당 형사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변호사들의 주장에 설득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우리사회에서 걱정해야 할 것 역시 배심제 도입 자체보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사회양극화 현상 아닐까?   아내를 살인한 협의로 수차례 재판을 받았던 전 미식 축구스타인 O J 심슨 #2 법원에 갈 때 변호사 배지를 달고 가면 좋은 점이 많다.  금속탐지기를 통과할 때, 가방속을 보여달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준비절차실 등을 출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탈 때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양복을 바꿔 입을 때마다 배지를 바꿔 달기 귀찮아서 배지 없이 법원에 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도 특별한 문제는 없다.  서류 가방을 들고 당당히 통과하면 된다.  법원에 근무하는 분들은 대체로 변호사와 일반인을 쉽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변호사의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배지를 달지 않으면 신분증을 제시해 달라는 요구를 자주 받게 된다고 한다.  최근 여성 법조인 수가 증가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법조계에서 마이너리티인 것이다.  미국에서는 어떨까.  관심이 있어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무더운 여름 날 냉방장치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형사법정은 매우 더웠다.  그 때 검사가 판사에게 재킷을 벗고 진행해도 되는지 물었다.  판사는 이를 허가했다.  바로 후 변호사(여성이었음)도 같은 질문을 하였다.  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옷을 전부 벗으면 몰라도 윗옷만 벗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그렇게 오래 전 일도 아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주목할 점은 여성들 외에 다른 인종의 변호사들(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차별도 광범위하게 존재해 왔다는 점이다.  미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하여 상당한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러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시일 내로 진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3 오늘의 마지막 이야기.  스텔라 상(Stella Awards)에 대해서 알고 계신지? 1992년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구입한 스텔라 할머니(당시 79세)는 실수로 커피를 무릎에 쏟아 화상을 입게 되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소송을 할 생각을 못했을 텐데, 스텔라 할머니는 맥도널드가 커피를 비합리적으로 뜨겁게 만들어 화상을 입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였다.  결과는 스텔라 할머니의 승소, 그것도 우리 돈으로 30억원에 가까운 돈(290만달러)을 받게 되었다.  스텔라 상은 미국에서 제기된 소송 중 이처럼 무모한(또는 무모해 보이는) 소송을 선정하여 주는 상이다.  작년 3위에 선정된 사건을 보니 은행 거래시 부과된 수수료 때문에 수면부족과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면서 소송을 제기한 것도 있다.  이러한 점들만 바라본다면 미국 사법시스템이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이 사법시스템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고, 감시할 수 있는 방안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는 점은 수 많은 약점들이 있더라도 우리가 수용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4월 12일은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에 따른 모의재판을 실시되는 날이다.  철저히 준비하고 시행되어 국민과 함께 하는 사법제도가 빨리 자리잡게 되기를 바란다.   정 원 위원은 법무법인 지평 소속의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488 | 추천: 0
학교에서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가족의 해체현상을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예전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던 부모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최근 결손가정의 모습은 부모 모두가 아이를 돌보지 않는 관계로 조부모와 친척이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일이 종종 있다.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지도하기가 가장 어렵다. 3월 새 학기가 시작 되면서 2, 3학년의 여러 학급에는 학부모들이 가출로 인해 학교를 결석하는 아이들, 한 아이를 여러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구타하는 일, 도벽으로 인해 인근의 경찰서에서 조사를 위해 학교를 방문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또한 아이들이 집의 컴퓨터 기능이 낮아서 학교의 컴퓨터 부품을 가져가려고 늦은 오후에 학교 창문을 통해 몰래 들어와서 컴퓨터를 만지다가 교사들이 알게 되어 처벌 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청소년의 가출과 학교폭력, 아이들의 범죄행위의 증가 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러한 일들이 발생되는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도 내가 10여 년 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보았던 일들이 지금은 중학교와 초등학교 5, 6학년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이들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학교에서는 학부모에게 연락을 하고 아이의 문제를 부모와 함께 해결하도록 노력을 한다. 그런데 학부모가 아이의 문제에 대해 무심한 모습을 보이거나, 아이 때문에 너무 지쳤다며 학교에서 알아서 처리를 하라고 하면서 연락을 피하기도 한다. 보호자가 없는 경우에 교사들은 더욱더 난감하다. 이러한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지원을 위한 후원회와 지역사회 협조, 학습을 도와줄 봉사단체와의 연계 등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2, 3년 전 일부학교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시적으로 사회복지사를 학교에 상주시키면서 교사들과 함께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과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후원기업을 연계해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 방과 후 방치되는 아이들에게 대학생 봉사 단체들을 연결해주고 공부방을 통해 방과 후 활동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는 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또 일탈행위를 방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그런데 학교 운영의 모범이 되었던 이러한 사례가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곧 없어진다고 한다.     가출과 학생폭력, 학생범죄는 가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에 속하는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부모의 맞벌이로 방치되거나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아 친척이나 조부모에 의해 양육되고 있는 사례가 많다. 아이가 우발적으로 가출이나 범죄를 행했을 때 이를 가르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가정이 없다는 것이 재발을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속해 있는 아이들에게 방과 후에는 공부방에서 밀린 학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가정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에게는 위로해 줄 수 있는 위탁가정을 마련해 주는 것은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데 매우 큰 힘이 된다. 따라서 예산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꼭 필요한 제도와 정책이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사회 미래의 자산이 될 아이들을 위해 보다 많은 투자를 해도 아깝지 않을 상황에 예산을 아끼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보인다. 비단 사회의 미래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지금의 아이들은 그 자체로 인권의 주체이고, 떳떳하게 아이로서 사회를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이 사회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인권을 위해 밝고 따뜻한 학교를 위해, 나아가 보다 밝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러한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예산을 마련하는데 가정과 학교, 사회 전체가 머리를 모아야 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494 | 추천: 0
지난 21일 둘째 아이가 다니고 있는 S초등학교의 제6기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위원 선거가 있었다. 선거를 하는 이유는 5명의 위원을 선출하는데 7명이 출마했기 때문이다. 학부모위원 출마자가 많아 선거를 실시하는 것은 학교운영에 대하여 그 만큼의 열의가 있는 것이니 반가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선거는 합법을 가장한 내용적인 불법이다. 제5기 위원들의 임기가 끝나는 3월 31일 열흘 전에 새로운 위원을 선출한 것은 합법이나 그 선거를 치르기 위한 현실적 진행과정은 다분히 비민주적이고 의도적이며 배제하고 싶은 출마자에 대한 조직적 공작이기 때문이다. 3월이면 모든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를 실시한다. 그리고 학교운영위원선거가 있는 해에는 통상적으로 학부모총회와 학교운영위원 선거를 같은 날 치른다. 학부모라면 누구든 알겠지만 학교에 방문하는 일이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쉬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S초등학교는 21일 학운위선거를 실시하고 22일 학부모 총회를 실시한다고 공지하였다. 즉 연 이틀 연거푸 학교를 방문하라는 것이다. 학교운영위원회의 중요성으로 볼 때 원칙적으로는 매일이라도 학교에 와서 학부모로서의 일정한 의무를 이행해야 옳을 것이다.   학교 운영위원회의 모습 사진출처 - 한겨레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틀 연이어 학교에 와야한다면 학부모 총회를 선택하여 방문하는 학부모가 대부분일 것이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염려속에서 오전 10시 30분에 유세 장소에 도착해보니 예상되는 우려가 정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출마자 7명중 6명이 왔고 선관위원4명과 학교에서 교감, 교무부장, 서무부장이 자리하고 유세를 들어야할 학부모는 정작 7여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거권자들이 앉을 의자도 두어줄 놓여져 있어 그야말로 썰렁함 그 자체였다. 유세순서를 정하고 다섯 번째로 준비한 유세문을 낭독할 수 있었지만 유세 순서 마지막 한사람을 남겨놓은 시간에도 18명이 자리할 뿐이었다. 이후 오후 2시까지 학부모가 편리한 시각에 방문하여 투표를 진행한다고 하였다. 투표를 하는 사람들은 무슨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하여 투표에 임할까? 학교에서는 직접 투표를 위한 영상자료나 출마자의 의견을 담은 유인물 등 그 어떤 자료도 준비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도적으로 출마자의 의견이 유권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오로지 출마자의 개인적 관계만으로 선택하도록 방조하고 오히려 유도하였으며 그것을 위해 학교 임의단체장들과 임원들을 출마토록한 것이다. 이해관계가 있는 소수자들은 얼마든지 조직할 수 있는 것이다. 출마자들의 유세를 듣는 권리를 박탈하여 유권자들의 판단을 흐려 투표가 진행된 것이다. 3시가 넘어 투표결과가 나왔다는 서무부장의 연락을 받았다. 900여명 학생수에 유권자 수는 297명이고 오후 2시까지 진행하여 150여명이 투표에 참가했다는 것과 단기명으로 써야하는데 연기명을 써서 무효표가 2표이고 떨어진 두 사람은 민족작가협회 소속 시인과 전교조 소속 교사인 본인이라고.. 그리고 8표, 7표를 득했노라고... 학교의 장은 학교운영위원회의 바른 구성을 위해 되도록 많은 학부모가 참여토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한다. 지난 5기 학교운영위원회 선거 때에도 학부모위원 등록에서부터 등록 시간 운운하며 등록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아 물의를 일으키더니 급기야는 이런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여 특정한 사람을 배제하다니 분노가 앞선다. 교육의 주체인 학부모와 교사, 지역 인사들이 모여 민주적인 학교운영에 대하여 논의하고 결정하라는 학교운영위원회의 원래 취지는 이런 관리자들에 의해 얼마든지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공연한 비밀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학교운영위원 무투표 당선의 대부분은 학교 입맛에 맞는 사람을 학교에서 인선하여 등록하도록 부탁하고 학부모는 또 부탁 받은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을 세우며 수락한다는 것을... 그리고 학교의 권유가 없었던 사람이 등록 했을 시에는 이런 식의 보이코트가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학교의 민주적 운영을 위해 만든 학교운영위원회지만 그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학교에 의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학교운영위원회구성 및 운영의 바른 길로의 행보는 앞으로도 길고도 먼 듯싶다. 오늘의 사례가 그 길로 가는 걸음을 좀더 앞당기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677 | 추천: 0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잘못된 행동이나 사람에 대해 비꼬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땀 흘려 수고한 만큼의 결과를 값지게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결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를 향한 작은 미소로도 서로가 행복한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선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후하게 대접할 줄 아는 미덕은 감사함을 낳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막막한 순간에 누군가의 도움을 입은 사람이라면 그 순간의 기쁨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 마음의 뿌듯함과 행복을 맞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예수님의 ‘평화를 빌어주라’(루카 10, 5-6)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됩니다. 상대가 잘되고 평안하도록 복을 빌어주는 마음만큼 그 선한 기운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반대로 저주하고 미워하는 만큼 그 어두운 감정에 사로잡혀 나를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합니다. 그 어두운 감정이 우리가 물리쳐야 할 큰 유혹입니다. 유혹은 우리 안의 선한 마음을 삐뚤어지도록 꾀는 악이기에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특히 유혹은 사람을 거짓되게 하고 인색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우리 주변에 유혹에 빠진 고위 공직자들이 손가락질 받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일삼습니다. 성희롱과 성폭력에 거론되며 충격을 주는 경찰, 국회의원 뿐만 아니라, 신중하지 못한 총리의 골프행각을 봐도 그들이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다른 이들의 행복과 어려움은 조금도 고려치 않는 인색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성서에는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켜온 사람이 ‘자신의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슬퍼하며 돌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르 10, 17-27).   외국인 노동자 자녀를 돌보고 있는 모습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과 나누는 것에 울상이 되어 버린 것은 지나친 인색함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어려움과 행복에 눈감아 버리고 자신의 영광과 즐거움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유혹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의 인색함을 책망하기 전에 우리 자신은 얼마나 가진 것을 잘 나누고 있는지,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봉사의 활동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면 사실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 동안 단식을 합니다. 단식이라는 극기의 삶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단식을 통해 이웃의 배고픔과 어려움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 6-7) 하시며, 우리가 행하는 단식조차도 어려운 이들에게 향하기를 바라십니다. 이 사랑의 마음이 모든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힘입니다. 그렇지만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일예로, 추위에 떨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 곁을 지나가던 사람이 너무 불쌍해 보여 아이에게 다가와서 말합니다. “이렇게 추위에 떨면 감기 걸린단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음식도 잘 먹고, 건강하게 해야 해요!” 그는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어느 때보다도 친절하게, 자식을 키우는 사람으로서 애정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흡족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범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말만 번지르한 사람. 사회 안전망 구축에 대해 말만하는 사람. 그들은 자신의 것은 조금도 내어 놓지 않습니다.   파키스탄 지진피해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펼치기 위해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이 인천공항에서 의약품 상자들과 함께 출국 수속을 하고 있는 모습 /진성철/사회/ 2005.10.13        사진출처 - 연합뉴스                                                                              노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동안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 약속이 말이 아닌 참된 실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지난번 스나미 때나 필리핀의 산사태 등 가난한 나라들의 어려운 상황에서 구호활동에 동참한 우리나라를 보고 국제구호단체들이 감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도움을 받던 나라가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뀌었으니 자신들이 행하는 ‘가난한 나라의 구호활동’에 자부심이 느껴지고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마음속으로 깊이 ‘뿌린 대로 거두는’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사회가 사회 안전망의 구축을 위해, 공동선을 위해, 좋은 제도와 법을 많이 뿌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개개인은 좋은 결실이 얻어지도록 남을 위한 배려와 축복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뿌린 대로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58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