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발자국통신

‘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대학에서 인권을 가르치며 나는 강좌내용에 되도록 많은 주제를 담으려 한다. 인권에 대한 오해, 인권의 개념과 역사, 세계인권선언 및 국제인권규약의 이해, 유엔의 인권보호제도와 절차, 인권개념의 보편성과 아시아적 가치, 인권과 민주화, 국가보안법에 담긴 이데올로기 및 법과 인권의 문제 등을 이론적 접근에서 다루며, 각론에서는 한국 사회에서의 생명 및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법과 인권, 노동기본권, 신자유주의와 사회권의 문제, 교육권과 청소년 인권, 환경과 건강권, 보건의료권, 장애인 인권, 여성 및 아동의 인권, 문화권, 과학기술과 인권, 사형문제, 북한 인권과 세계의 인권문제와 인권운동,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이해 등을 조별 발표 및 토론을 위주로 하여 다룬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실천의 문제로서 인권운동 및 인권교육의 현황과 과제, 각자가 할 수 있는 인권실천 방안 등을 논하며 실천을 독려한다. 이러한 한학기의 수업과 시험 등이 학생들에게 인권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할 좋은 기회인 것임은 분명하겠고 학기말시험을 채점할 때 그런 생각은 확실해진다. 그러면서도,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기에 학기말에 근접하여 추가로 과제를 내는데, 주로 내는 세 가지 문제는 이번 강좌에서 다루지 않은 중요한 인권 현안들을 제시해보라는 문제, 세계인권선언 30개 조항을 어떻게 보완해야할지 31조부터 33조를 추가해보라는 문제, 그리고 가정인권헌장 10개항을 작성해보라는 문제이다. 우선, 첫 문제를 풀면서 학생들이 제시한 인권 현안 중에서 예리한 감수성이 보여지는 것들을 몇 가지만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노숙자 문제 중에서도 여성 노숙자의 성폭력 문제, 인터넷 마녀사냥 문제, 에이즈 및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문제, 찜질방 탈의실의 CCTV 문제, 문맹 혹은 난독증인 이들을 위해 가급적이면 영화자막 대신 더빙을 해야 한다는 주장, 입사지원서를 쓰면서 재산, 주거형태, 부모의 학력 등까지 적도록 요구되는 현실, 흡연자 및 비흡연자 각각의 정당한 권리, 채식주의자들의 음식선택 기회의 평등문제, 개인생체정보 자기 결정권, 이슬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편견과 불관용의 문제, 자발적 성매매여성의 성매매 문제, 기업의 비윤리적 경영, 학교에서의 특정종교 강요 문제, 난민인정문제, 미군기지화로 인한 대추리 주민들의 인권문제, TV와 인터넷 등에 벌어지는 특정계층 및 집단의 희화화 문제, 농촌 총각의 결혼할 권리, 여학생들의 생리결석 인정 문제, 간통죄 폐지 논란,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드러난 흑인 차별에서의 교훈, 다른 어느나라에도 없는 소년소녀가장문제, 뚱뚱한 이들에 대한 차별 및 외모지상주의의 문제, 공개입양에 대한 찬반론 등이 제기된다.    "나는 학생들이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들도 제시하는 것을 보며 이들이 인권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인권감수성도 키워가고 있음을 본다" 사진출처 - 한겨레, 연합뉴스, 주간한국, 프로메테우스   더 나아가, 화장실 청소부 아줌마들이 당할 수 있는 수모, 출산 직후 아기가 거꾸로 들려 엉덩이부터 맞지 않을 권리, 직장여성이 해고의 걱정 없이 임신할 권리, 장애인 여성이 사회복지의 혜택을 받으며 임신 및 출산할 권리, 동물의 권리, 죽은 자의 인권(예를 들어, 쯔나미 사태에서처럼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되지 않고 장례 치러질 권리, 무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훼손되지 않을 권리, 죽은 이의 신원 및 사인이 밝혀질 권리, 의문사의 경우 진상 규명, 그리고 명예회복의 권리, 죽은 자의 초상권) 등도 제기된다. 세계인권선언의 보완으로는 성적(性的) 정체성 권리, 양심적 병역거부 및 대체복무의 권리, 사이버 공간에서의 인권, 환경권, 불치병 환자의 치료약 접근권의 국제적 보장, 전쟁 및 테러로부터의 보호와 평화권, 유전자조작 금지 및 자신의 생체정보보호권과 자기결정권, 의학기술과 인권, 정보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 약소국가에 대한 차별 금지, 다국적기업의 윤리 문제, 인간 및 모든 종(species)의 보호의무, 중대한 인권범죄의 경우 공소시효배제, 그리고 인권교육을 받을 권리와 국가의 인권교육을 행할 의무를 별도의 조항으로 추가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가정인권헌장에서는 세계인권선언에서 열거한 각종 인권들을 가정 내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묘안들이 속출하는 데, 예를 들면, 가족 모두는 평등하기에 상호 존중해야 한다,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동등한 발언권과 의사표현의 자유를 가진다. 개인의 수입 및 용돈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다. 자신이 받고자 하는 교육, 일하고자 하는 직업, 그리고 결혼할 상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모두 건강할 권리가 있으며 서로 보살펴야 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가족으로서의 의무 이행이 앞서야 한다 등이다. 그리고.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가족회의를 정기적으로 열어야 하며 이때 술에 취한 상태로 참석하는 것은 금한다 등의 단서조항도 제시된다. 이렇게 각자가 작성한 가정인권헌장을 지금부터라도 거실 벽에 가훈처럼 붙여놓고 실천해보라는 취지를 학생들은 십분 공감하는 것 같다. 이러한 과제물을 읽으면서 나는 학생들이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들도 제시하는 것을 보며 이들이 인권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인권감수성도 키워가고 있음을 본다. 아직도 대학에서 인권을 정규수업으로 강의하는 대학이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되는 게 현실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발견은 인권을 꾸준히 가르치는 선생에게 소신과 사명감에 더하여 보람을 키워주는 것이라 하겠다. 인권교육을 받을 권리는 그 자체가 인권에 속한다. 세계인권선언 제26조에서 언급하듯, “사람은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 . 교육은 인격을 충분히 발전시키고, 또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경을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입시위주의 정규 교과 속에서 인권교육을 못 받고 자란 한국 사회 구성원 거의 모두는 이러한 인권을 구조적으로 만성적으로 침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권교육이 필요한 이유이며, 인권교육의 활성화가 인권운동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인 이유이며, 아울러, 인권교육이 하나의 운동, 즉 인권교육운동이어야 하는 이유이다. 대학에서 인권을 가르치며 나는 오늘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며 다짐을 새로이 한다. 그러한 다짐에서 시작하는 인권교육은 늘 보람과 희망을 준다. 인권을 배우고 감수성을 키우는 젊은이들이 많아질수록 이 시대의 희망은 커진다.   김 녕 위원은 현재 서강대학교 교양학부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463 | 추천: 0
얼마 전 북한을 다녀왔다. 학술교류 행사를 취재하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개성공업지구 근처에서 한나절 머문 게 전부였다. 비슷한 일로 금강산에 다녀온 걸 포함해 두 번째 ‘방북’이었다. 이젠 평양 다녀온 것도 특별한 ‘자랑’이 되지 못하는 시절이다. 금강산은 초등학생 수학여행 코스다. 개성은 남한 기업인과 노동자들의 삶터가 되고 있다. 여기서 중뿔나게 무슨 방북기를 쓸 염치는 없다. 다만 내 직업적 특성 때문에 겪은 일들이 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남북 사람들의 첫 인사는 서먹하기 마련이다. 마음의 장벽을 허는 데 시간이 적잖이 걸린다. <한겨레> 기자는 예외다. 소속을 밝히는 순간,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난다. 그들이 <한겨레>를 구독하고 있을 리 없다. <로동신문> 등에서 인용한 <한겨레>의 ‘이미지’를 각인하고 있을 터이다. “우리 민족이 하는 일을 열성으로 후원하는 신문사로 알고 있습네다.” 그리곤 다른 기자들에게 말한다. “**일보는 왜 온겁네까?” 그런데 그게 반갑지만은 않다. ‘호의’는 거의 언제나 ‘동류의식’에 기반 한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은 스스럼없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게 만든다. 내 소속을 확인한 뒤, 그들은 거의 곧장 ‘정치토론’을 벌이려 한다. 만남의 주인공인 학자들이나 당국자들끼리도 어지간해선 나누지 않는 주제를 도마에 올린다. 대부분은 직설적이다.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이번 개성 방문 때는 도청 수사가 첫 주제였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직후 밥술도 뜨기 전에 나는 예의 그 정치토론의 상대자로 ‘간택’됐다. 날씨가 좋다는 둥, 많이 드시라는 둥, 다른 테이블에서 오가는 의례적인 대화조차 생략됐다. 그들은 <한겨레> 기자를 너무 ‘특별하게’ 대한다. “6.15 세력에 대한 수구반동들의 대대적 공세 아닙네까. 그동안 쌓아올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 이 땅에서 참화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신건, 임동원 등을 구속한 일이 6.15 선언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도발’이라고 보고 있었다. 인권이라는 가치가 남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민주화 세력이라 할지라도 이를 침범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참화’라는 말도 신경이 거슬렸지만, 마구 대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자들의 ‘돌출행동’ 탓에 남북교류 행사가 파행을 빚은 일이 적지 않다. “참화가 일어나서는 안 되죠. 그런 일이 없도록 다같이 노력해야죠.” 문제의 핵심은 피하고, 속절없이 화합을 권유하며 술잔을 내밀었다.   사진 출처- 한겨레  유엔 총회는 11월 17일(현지시각) 유럽연합(EU)과 미국이 공동 제출한 ‘북한 인권상황에 대한 결의안’을 찬성 84, 반대 22, 기권 62표로 가결했다. 그런데 ‘인권’을 먼저 꺼내든 건 북쪽 인사였다. “우리끼리 잘 살겠다는데, 부시가 자꾸 못살게 굴면, 방법이 없잖습네까.” 얼마 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북한인권 결의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핵 문제가 더 이상 안 통하니까 인권을 걸고넘어지는 것 같은데, 우린 충분히 인권적으로 살고 있습네다. 자기들 인권이나 생각하라고 하시라요.” 곧이어 일본 이야기도 했다. “인권을 말하자면, 그 사람들이 (일제시대에) 저지른 참상부터 따져야지요.” 나는 다시 피해갔다. “서울에 오신 적은 있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 용케도 다시 주제를 이었다. “그 경찰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 온통 우리를 둘러싸가지고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요.” 은근히 남한 인권을 말하려는 눈치다. 그 대화가 오간 식당 밖으로 50m도 나가지 못해 북쪽 군인들에게 제지당한 내 처지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역시 토를 달지 못했다. 뭐, 이런 식이다. 그러니 북쪽 음식을 맛보는 자리가 나로선 언제나 불편하다. 언젠가 한번 ‘제대로’ 토론해야겠다는 결심만 거듭할 뿐이다. 그런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점심때의 대화가 자꾸 ‘변조 증폭’됐다. 도청, 북한 인권, 미국, 대북제재, 진보-보수 세력, 북한 정부…. 이런 것들이 하나의 연관과 맥락 속에 자리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매개는 ‘인권’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 북쪽 인사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인권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때, 그것은 거의 언제나 ‘권력’의 문제다. 인권을 보장하거나 억압하는 일 모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조건을 변형시키는 ‘힘’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더구나 특정 집단이 인권을 문제 삼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인권은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과 환경의 문제이며 이를 변화시킬 물리적 힘에 대한 사안이다. 하물며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인권이 화두가 될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인권을 매개로 권력이 작동할 때, 사람들이 이를 서로 다른 관점으로 대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거론된 사안만 따져 봐도, 노무현 정부, 김대중 전 대통령, 한나라당, 부시 행정부, 북한 정부 등의 시선이 복잡하게 엇갈리고 있다. 인권의 가치를 중심으로 정치이력을 개척해온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막상 재임시절의 ‘도청’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얼버무렸다. 전 세계 민중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 미국은 분명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정치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 서울 경찰의 ‘경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북한 사람들은 군대의 물리력이 결정적 구실을 하고 있는 북쪽 사회의 현실에는 둔감하다. 흔히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논리가 ‘이중 잣대’다. 뭐 묻은 놈이 겨 묻은 놈 나무라느냐는 반박은 적어도 인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반박의 논리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그 반박이 ‘옳다.’ 모든 권력은 기본적으로 특정한 누군가에 대해서는 인권침해적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권에 대해선 모든 권력이 자신의 몸에 뭔가 구린 것을 묻히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중 잣대의 논리가 횡행하는 와중에 정작 인권의 실체는 실종돼 버린다. 특정한 인권침해 상황을 문제 삼는 손가락질의 ‘음험한 정치적 의도’를 손가락질하고 나면, 남는 것은 정치토론 밖에 없다. 부시 행정부가 망하기 전까지, 세상의 누구도 북한의 인권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는 환원론적인 논리만 남는다. 남쪽에 극렬반북인사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까진, 북쪽 사람들의 경호는 언제까지나 철통같아야 한다는 단순함만 남는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앙상한 정치 논리 사이로 다시 인권의 문제가 작동한다. ‘인권적 상황’은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으니, 정치적 쟁투가 끝난 뒤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잔존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 국정원은 도청을 한다는 건지 안한다는 건지, 어떤 경우에 해도 좋다고 허락해야 되는 건지, 이에 대한 국민적 감시는 어떻게 가능한 건지에 대해선, ‘오리무중’이다. 잡아간 사람의 정치적 의도와 잡혀간 사람의 정치적 반박만 남아있을 뿐이다. 특별히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북한 인권이다. 특징적이었던 것은 이번 방북 때, 핵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선 북쪽 사람들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6자 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가 대화 체계 안으로 녹아들었음을 방증하는 일이었다고 믿는다. 그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이는 중요한 변화다. 핵을 거론하는 미국의 ‘의도’를 문제 삼고 핵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는 북한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체적 해결을 모색하는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천인 핵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5차 6자회담 개막 모습 북한 인권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를 문제 삼는 미국의 의도는 분명하다. 북쪽 인민들의 탈북을 ‘기획-조직-선전’하는 일부 보수 세력의 속내도 뻔하다. 북 인권을 빌미로 진보개혁진영을 비난하는 그 목소리도 가소롭다. 그들 모두는 지금 인권이 아니라, 인권의 탈을 쓴 정치권력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치의 인권’이 아니라 진정한 ‘인권의 정치’를 작동시킬 책임이 남쪽 인권단체에게도 있는 것은 아닐까. 북쪽의 인권 문제를 그저 정치적으로 비토하기만하고 팔짱을 낄 게 아니라, 이를 제대로 된 테이블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실질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6자 회담 등이 탄생했듯이, 적어도 북한 인권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건 다룰 수 있는 건강한 마당을 형성하는 게 옳지 않을까. 길게 보자면, 북핵 문제가 일정한 매듭을 짓게 되더라도, 북한 인권을 둘러싼 논란은 다시 등장할 것이다. 남북 교류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가동했던 ‘화해의 정치’가 끝내 수구보수 세력의 중상비방을 잠재우고 있듯이, ‘인권의 정치’는 북 인권에 대한 터무니없는 정치도구화의 시도를 넘어설 유일한 방법이다. 엄밀히 보자면 인권에 국경은 없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인민은 미국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된 ‘테러용의자로 추정되는 이슬람인’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인권침해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여기서 세계 인민은 미국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게 아니다. 해당 정부의 물리력이 허용하는 공간에 인권의 자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할 뿐이다. 국가가 주체가 되는 외교의 무대에 인권을 올리는 것은 인권의 문제를 오히려 은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시민사회가 인권을 문제 삼는 것은 국가의 오류를 스스로 바로 잡게 하는 토양이 된다. 미국과 유엔이 북한 인권을 함부로 말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한국 시민사회가 이를 담담하고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미국 중앙정보국의 ‘믿지 못할’ 정보에 기반한 편견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고리를 끊어낼 힘이 사실은 바로 한국 시민사회단체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도대체 북한 인권 문제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 일은 인권의 보편원리에 비춰 어느 정도의 사안인가. 북 인권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남쪽 인권 문제나 집중해도 되는 건가 아닌가. 만일 북쪽 사람들과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대화의 성과는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진보개혁진영에겐 필요하다. 아직도 우리는 북한을 너무 모르거나 인권을 너무 모른다.   안수찬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6-01 | hrights | 조회: 400 | 추천: 0
여섯 달 전 아들이 태어났다. 서른일곱에 첫 아이를 본 것이다. 장가를 늦게 간 데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보니 출산이 늦어졌다. 1억2천만분의 1의 경쟁률을 뚫고, 아니 몇 조는 족히 넘을 ‘형’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인간의 얼굴을 하고 태어난 아이가 대견스러웠다. 원래 여자를 좋아해서, 딸이길 바랐지만, 아들 딸 구별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냥 좋았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나니 출산을 늦췄던 이런저런 이유보다 더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생후 2주도 안된 녀석이 세균감염으로 열흘 동안 병원신세를 지지 않나, 무슨 감기는 또 그렇게 달고 사는지, 기침이 끊일 날이 없다. 기관지염으로 입원한 적도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난관은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아내가 석 달의 출산휴가를 마치고 출근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직장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직업 특성상, 그것도 지금 맡고 있는 일의 특성상,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 하루도 없다는 것이다. 단 하루도 말이다. 주말은 주말대로 쉴 수가 없다. 기사 마감이 월요일과 화요일 오전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사람은 게을러야 창의력이 생긴다’는 내 지론과는 정반대의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칼’ 퇴근해서 아이를 찾아오는 아내-아내는 조선의 9급 공무원이다-의 스트레스는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밤늦게라도 젖병을 씻어대는 등 ‘면피’를 획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겨레문화센터 기자학교 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늦게-새벽이니 일찍인가?-들어간 날 급기야 사단이 벌어졌다. 아내는 문화센터고 뭐고 다 때려치우라며, 취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나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다음 날, 나는 결심했다. ‘아이가 새벽에 깨서 울면 전적으로 내가 책임진다. 잠이 좀 모자라도 정신력으로 버티자.’ 그런데 결심은 채 이틀을 못 갔다. 아내는 화를 내서 미안했던지 “잠이 모자랄 텐데, 어서 자라”며 따뜻한 말을 해줘 내 차가운 결심을 무너뜨렸다. 이젠 아이가 여간 울어서는 알아채지도 못 하게 됐다. 우리 회사에도 육아휴직 제도가 있다.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쓸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육아휴직을 한 남자 기자는 단 두 명,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진적으로 남자 육아휴직 제도를 도입할 때였다. 그러나 두 사람 다 한달만에 불려나왔다.(규정상 석 달을 쉴 수 있다)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이후 아무도 육아휴직을 신청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사정이 더 좋지 않다. 지난해 80여명의 동료들이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몇 안 되는 인력으로 더 질 높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 그야말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일하고 있다. 문제는 공무원 조직을 비롯한 ‘여유있는 직장’에서도 육아휴직을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는 것이다. 승진 등의 불이익을 감수하고 육아휴직을 감행하는 용기 있는 사람은 드물다.   사진출처- 한겨레 맞벌이가 생활의 기본이 되면서, 친정 엄마들의 수난시대가 시작됐다고 한다. 시집 간 딸이 시어머니보다는 마음편한 친정 엄마들에게 아이를 맡기기 때문이다. 손자도 가끔 봐야 귀엽지, 근력도 예전 같지 않은 노인네들이 하루 종일 한 생명을 건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편히 쉬어야할 인생의 제2막을 보모로 저당 잡힌 노인들의 처지가 안쓰럽다. 아이를 낳으면 몇 십 만원을 주겠다는 식의 발상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30년 뒤면 이 사회에 온통 할아버지 할머니만 득실거릴 거라고 협박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잠시 쉬었다 오려다 영원히 집에서 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IMF 직후의 후일담만이 아니다. 갈수록 수위를 높여가며 득세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와 정부의 출산장려 운동은 애초부터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덕분에 이제 ‘둘째’ 생각은 싹 없어졌다. “애를 위해서라도 둘은 있어야지”라고 말하던 우리 부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됐다. “몇 년 지나면 달라질 거”라는 주변의 조언이 제발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육아휴직을 하고 싶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20 | 추천: 0
“핏자국은 남아 있지 않군요?”, “벌써 닦아 냈을 수도 있겠지. 루미놀 반응이 있나 살펴보자구.”. 닉이 루미놀 용액이 들어있는 스프레이를 실내 구석구석에 뿌린다. 잠시 후 마루바닥이 반딧불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바로 저기군, 남아 있는 혈흔에서 샘플을 채취해봐야겠군.” 그리섬 반장이 말한다.     CSI 과학수사대라는 미국 외화시리즈에 종종 등장하는 장면이다. 갑자기 무슨 미국 외화시리즈를 이야기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초등학생들의 장래 희망 순위에 감식전문가, 법의학자를 당당히 진입시킨 1등 공신이 바로 위 드라마 시리즈이다. 하지만 우리 초등학생들이 장래에 그리섬 반장 같은 멋진 감식전문가나 법의학자가 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현재로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특히 법의학 관련 분야는 우리와 소득 수준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추어 볼 때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법의학 발전 정도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다음 세 가지 정도를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첫째, 우리나라의 검시는 사법검시에 편중되어 있다. 검시의 책임을 검사가 지고 있기 때문에 변사체 중에서 범죄와 관련이 있거나 그러할 우려가 있는 시체에만 부검이 실시되고 있다. 따라서 범죄와 관련성이 적다고 판단될 경우, 국민보건 정책 수립이나 각종 사고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이 필요한 경우에도 사인확인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또한 법의학적 전문지식이 부족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범죄와 무관하다는 판단을 할 경우 실제로 범죄와 관련이 있는 죽음도 부검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은폐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선진국의 경우 의혹의 소지가 있는 죽음을 유형화하여 해당 유형은 반드시 부검을 실시하도록 정하고 있다(예: 15세 미만 양자가 사망한 경우, 교도소 등 구금시설의 재소자가 사망한 경우 등). 둘째, 검시에 관여하는 사람의 전문성이 부족하다. 검시의 책임자인 검사, 실제 집행자인 사법경찰관, 변사체에 대한 검안과 부검을 담당하는 의사 모두 법의학에 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선진국의 경우 법의학에 관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자는 검안이나 부검에 관여할 수 없도록 정해져 있는 것과 대조된다. 만약 장준하 선생의 사망 당시 전문성을 갖춘 의사가 부검을 실시했다면 적어도 사인에 관하여는 지금과 같은 논란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해마다 군대에서 발생하는 의문사 역시 검시에 관여하는 군의관의 비전문성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셋째, 검시기관의 독립성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의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상당수 행해진다. 국과수는 행정자치부 산하기관으로 설치되어 있지만 운영과 감독을 경찰청장이 수행하므로 사실상 경찰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못하다. 이처럼 수사기관에 종속된 기관이 검시를 행하는 결과 수사결과의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다. 특히 부검에 있어서는 사체에서 얻는 정보 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얻는 정보가 사인을 판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현장의 단서를 경찰 등 수사기관에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사인에 대한 판단이 왜곡될 우려가 크다. 그래서 선진국의 경우 법의학 전문가가 변사현장부터 참여하여 관련증거물을 주도적으로 수집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사인확인제도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지만 그동안 충분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그 원인을 밝히려는 것 자체가 망인에 대한 결례가 된다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의식도 원인 중 하나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2003년 12월「사인확인기관의 설립ㆍ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하여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최근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유시민 의원 등 143인이 발의한 「검시를 행할 자의 자격 및 직무 범위 확인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계류 중인 상태다.  위 법률안이 통과되어 우리나라 사인확인제도 개선의 기틀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CSI 과학수사대에 흥미를 느낀 분이라면 ‘여검시관 히카루’라는 만화를 읽어볼 것을 권유해 본다. 아래 내용은 만화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노숙자가 아이를 익사시켰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망한 사건에서 검시관 히카루는 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재차 부검을 시도한다. 그녀는 집도하기 전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아저씨, 마모루 아저씨 용서해주세요. 전 진실을 알고 싶어요. 아프지만 한 번만 더 참아주세요”. 사인확인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바탕에 두고 있다. 우리의 사인확인제도가 개선되어 억울한 죽음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기원한다.   정 원 위원은 법무법인 지평 소속의 변호사로 활동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14 | 추천: 0
최근 수원에서 차량통행문제로 시비가 붙은 폭력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5명의 피의자에게 폭행을 당하자, 주변에 있던 2-30명의 시민에게 “112에 신고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모두 구경만 했고, 몇몇 사람들은 휴대전화로 사진까지 찍는 등 시민들이 외면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매우 당황했다.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중학교 1학년 한 학급에서 정신지체를 지닌 특수학급의 영수(가명)가 교사(담임,특수학급교사)에게 팔뚝과 다리의 심한 타박상을 보이면서 학급의 학생들이 자신을 너무 괴롭힌다고 울면서 이야기를 했다. 평소에 자신의 의사 표시를 잘 하지 않던 학생이기에 놀란 담임교사가 학급의 학생들과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은 학급에서 가장 힘이 센 남학생이 기분이 나쁘거나 불쾌할 때 영수를 때려서 기분을 풀었고, 얼굴을 마주치면 벽보고 서있으라고 하며 움직일 때마다 영수를 때렸다고 했다. 학급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은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무심하게 바라보거나 지나쳤고 심지어는 핸드폰의 카메라로 찍는 학생들도 여러명 있었고 이 사진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놓고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교사들이 이 학급의 학생들과 대화를 한 결과 너무도 다른 생각의 차이에 당황했다. 여학생들은 장애학생들이 불결해서 가까이 가기 싫고(영수는 부모의 많은 노력으로 매우 깨끗한 학생임), 남학생들은 힘이 센 학생과 더불어 같이 때리는 것에 죄책감이 없고, 영수가 아퍼서 소리 지르고 울면, 말리기보다는 핸드폰의 카메라로 찍으면, 옆에서 같이 찍고 했던 행동들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었다고 담담히 이야기 했다. 이 학급이 특별히 문제가 있는 학급도 아니므로 다른 학급학생들의 생각이나 행동도 비슷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교사들은 장애자인 친구가 고통을 당하면 말리고, 교사에게 도움을 청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학생과 교사의 생각의 차이 때문에 문제가 표면화 되었을 때는 이미 시간이 흘러 많은 고통을 겪고, 더이상 학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청주 금천초등학교에서 열린 통합교육 사례 발표회에서 장애 어린이와 비장애 어린이들이 이 함께 어울려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달리 담임교사들이 교실에서 학생들을 관찰하기가 어렵다. 아침조회시간 30여분과 짧은 종례시간, 그리고 청소시간에 학급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학생들을 알게 된다. 교사의 보살핌보다는 하루종일 같은 학급에 있는 학생들이 장애학생이나 소외된 학생들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 없이는 학교생활이 매우 힘들어 진다. 학교는 학생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생활하는 공간이다. 서로 다른 개개인이 모여서 생활을 함으로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을 서로의 이해와 도움으로 극복하고 성숙해 진다. 이는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배운 인성교육과 학교에서 교육하는 타인과 약자에 대한 배려와 공공질서의식이 바탕이 된다. 최근에 학생들은 자신의 인권과 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있으면 참지를 못하고 친구나 교사에게도 공격을 한다. 하지만 권리에 따르는 책임에는 무관심하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사고가 많아진 학생들에게 양보와 질서를 가르치는 교육은 매우 힘들고 어렵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누구의 탓으로 돌리며 후회하는 모습보다는 가정과 학교가 협조하며 노력하는 교육이 되었으면 한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불광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09 | 추천: 0
점심 시간하면 떠오르는 아련한 추억이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있다. 난로에 쌓아올린 누런색 도시락, 누룽지가 앉은 김나는 뜨끈한 도시락, 도시락 반찬에 대한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와의 갈등어린 추억, 운반과정에서 반찬국물로 인한 냄새나 교과서에 생긴 흔적, 계란이나 쏘시지 반찬을 싸온 부러운 아이들, 혼식 검사에 걸리지 않으려는 여러 가지 눈속임용 수법 등. 그러나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지나간 시절의 풍습쯤으로 치부되어 요즘 아이들에게는 영~ 상상하기 어려운 일로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요즘 아이들은 모두 학교 급식을 통해서 점심식사를 해결하기 때문에 도시락이란 어쩌다 있는 현장학습 날 준비하는 특별한 점심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초등학교 1, 2학년은 4교시 후 하교하여 엄마가 차려주는 점심을 먹었는데 이때 집에 갔을 때 엄마가 반겨주지 않는 아이가 얼마나 불쌍한 지를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3, 4학년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는 날이 1주일에 며칠 되지 않아 오히려 도시락 싸가지고 가는 날을 기다렸었다. 반찬에 신경 써주기를 바라며 엄마를 괴롭히던 아이들 역시 이 즈음의 아이들로 기억된다! 5, 6학년 아이들은 거의 매일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므로 위에 기술된 여러 사례들과 같은 도시락에 대한 추억을 만들어 나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글의 화두를 도시락으로 시작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이 먹는 급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학부모 입장에서 볼 때, 학교급식 시행으로 저학년 아이를 둔 학부모(특히 엄마)는 아이 점심 차리는 일 때문에 집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락을 싸갈 정도의 다 큰 아이를 둔 학부모들 또한 아침의 분주함으로부터도 역시 해방되었다. 아마도 여성의 노동력이 사회로 환원되는데 큰 힘이 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학교급식일 것이다. 그러나 교사 입장에서 보면 업무량이 많이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수업만하고 하교 하던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이는 일, 편식하지 않도록 지도하고 배식할 때 골고루 받도록 꼼꼼히 봐 두는 일, 식사 후의 잔반 처리 등. 특히 편식과 인스턴트 음식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 편식지도를 꾸준히 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그러다보니 처음 학교생활을 하는, 학습이나 생활면에서 정해진 규칙을 익혀야하는 1학년을 지도하기란 매우 힘들다. 결과적으로 1학년은 교사들이 꺼려하는 학년이 된 것이다. 이토록 긴 이야기가 교사로서의 고충을 토로하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요점은 아이들을 중심에 놓고 보았을 때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급식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하여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학부모와 학교와의 이런 현실 속에서 학교는 저학년 급식을 위해 학부모들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방법은 배식과 잔반처리에서 소속 학부모들의 순번을 정하고 정해진 시간을 통보한 후 배식을 시행한다. 이런 방식은 학교의 시설에 따라 달리 적용되기도 한다. 식당이 있는 학교는 식당의 배식구에서 정해진 학부모가 자기 아이를 포함, 정해진 학년의 아이들에게 배식(이 경우 배식 당번 순서가 상당히 기나 다른 반 아이들을 배식하게 됨)하고 식당이 없는 학교는 보통 교실에서 배식하는데 우리 아이 반 아이들에게만 배식(이 경우 배식 당번 순서가 매우 짧은 단점이 있으나 우리 아이만 배식하는 장점이 있음)한다. 물론 시간을 내서 배식에 참여하면 좋은 장점들이 많다. 우리 아이의 학교생활(친구관계나 생활태도 등)을 실제적으로 알 수 있고 직접 급식을 시식함으로써 급식의 내용을 확인하여 좋고 학교운영에 참여함으로 주인의식도 키워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부모(특히 엄마)들이 직장을 가지고 있어 점심시간에 짬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학부모를 제외시키다보면 참가하는 학부모로서는 너무 많은 횟수가 돌아와서 억울하게 생각되고 궁여지책으로 나온 방법이 참석 못하게 되는 학부모가 소정의 금액을 내고 사람을 사서 책임분을 채우는 것이다. 당연히 무엇인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보통 이런 학부모들이 종종 학교나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이와 관련, 얼마 전 학교운영위원회가 있어 참석, 안건을 논의하던 중 어이없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충분한 공간 확보는 아니지만 식당이 있어 점심식사를 식당에서 해결하던 아이들이 교실에서 배식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위에서 제기한 민원이 잦아 교육청으로부터 시정을 권고 받고 고민하던 중 교실에서 아이들이 배식하는 것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있던 식당을 놔두고 말이다. 공부하는 장소와 식사하는 장소가 별도로 갖추어져야 교실에서 음식냄새도 나지 않을 것이고 잔반처리 때문에 점심시간 이후의 수업시간도 보장되는 것인데 말이다. 있는 식당도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다시 뒤처진 이전체제로 돌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급식을 해결해주는 것이 좋다. 이왕이면 질 좋은 식재료(우리 농산물)로 위생적이고(직영) 누구나(무료)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으로 공급하는 것이 미래의 우리세대를 키워내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그래야만 학부모(노동가치가 높은 대부분의 국민)가 지닌 노동력이 사회로 문제없이 환원될 것이다. 그리고 교사로서도 학교마다 식당이 갖추어지고 점심식사로 인해 수업시간이 방해 받지 말아야하는 체계가 마련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성장기의 아이들이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바른 음식의 회귀본능도 가능)할 수 있고 높은 교육의 질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있다! 바로 국가에서 관여하는 것이다. 어짜피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고 이것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또한 노동력도 국가 발전의 기틀이므로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 주어야한다고 본다. 즉, 국가는 교육재정(현재는 GDP의 4.1%)을 대폭(전교조 6% 요구) 늘려 학교를 지을 때 수용인원에 맞는 식당과 조리실을 갖추도록 하고 교육의 공공성확보 차원에서 무료 급식을 보장해주며 또한 일자리 창출의 의미로라도 학교에 인력을 공급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여건이 가능한 학부모들은 내 아이를 떠나 사회봉사의 개념으로 학교운영에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한다. 다음 세대를 건강하고 바르게 키우는 것을 개인의 차원이 아닌 국가 존속의 의미로 생각하고 전폭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한다. 그래서 학교 현장에서 이렇게 가야할 방향을 거슬러 가는 궁여지책이 나오지 않도록 만들어야한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을 정말 소중히 여긴다면....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73 | 추천: 0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진리를 물리치고 옳지 않은 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궁지에 몰리고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영광과 명예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로마서 2,7-10). 가톨릭의 4대 교리 중 하나로 '상선벌악'(賞善罰惡)이 있습니다. 착한 이에게는 상(賞)이, 악한 이에게는 벌(罰)이 내린다는 상식적인 진리입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목욕을 다녀온 여동생이 불만스러운 얼굴입니다. 이유인즉, 어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가면 혼자 오신 노인 분들의 목욕을 수발하느라 제 몸 씻을 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속마음은 절뚝거리는 불편한 몸으로 노인들의 목욕을 도와드리는 어머니께서 혹시라도 넘어져 다치실까하는 걱정에 속이 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목욕을 가시면 만사제쳐 놓고 달려와 모시고 갑니다. 투덜거리는 동생에게 어머니께서 한 말씀하십니다. “너희 할머니 생각해서 그런다. 오죽하면 혼자 목욕을 오셨겠니?  내가 할머니들 10번 밀어드릴 때 누군가 한번이라도 우리 노인네 등이라도 잘 밀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너도 엄마가 있으면 나도 엄마가 있어 이것아!” 오늘도 어느 목욕탕에서 각자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열심히 노인들의 목욕을 거들고 있는 두 딸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이해하며,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도 나 자신과 내가 소중히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입니다.  달리 말하면 나와 내 사랑하는 이들이 설령 잘못이나 큰 실수를 했다고 해도 누군가 내가 보여준 용서와 관용의 마음으로 내 사랑하는 이들을 대접해 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자식이 그리고 내 부모님이 밖에서 사람들에게 항상 사랑과 이해와 너그러운 대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때 내 사랑하는 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을 지닌 이들의 후한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루가 6, 31)”는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서, 내게 다가오는 많은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너그럽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그만큼.   외국인 노동자 자녀를 돌보고 있는 모습 우리도 어려운 시절 남의 나라에 가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땀 흘려 일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고생과 사람들의 냉대도 받았지만, 친절한 배려도 많이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노동자로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네 사랑하는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가방 청소봉사를 하는 모습 자연은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많이 맺습니다. 자연의 결실만큼이나 사람들도 사랑의 결실을 많이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 정치적으로도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대화하고 좋은 길을 찾아나가는 성숙함을 쌓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이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가져오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베푼 온정은 언젠가 어떠한 모양으로든 내게 돌아옵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388 | 추천: 0
요즈음 내가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철이 든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데올로기를 숭배하기엔 너무 게으르고, 원칙을 고수하기엔 너무 약하다. 그렇지만 무엇이 온당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지능은 가지고 있다. 거칠게 얘기한다면, 내가 보기에 1987년 보다는 현재가 더 온당한 세상이다. 그러나 이따금씩 나는 군사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우리 사회가 옛날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하여 한 노력과 희생에 비하여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뒤처진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좀 더 민주적인 모습을 띠고 진실로 소수자와 시민을 위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누가 자신들을 선출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시민의 고통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현재의 집권층에 대해서 분노하기도 한다. 때때로 현재의 집권세력과 그것을 다투는 야당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식의 정부라면 야당이 다시 집권하더라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다. 요즈음 모 교수의 발언 때문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내가 거실에 앉아 편하게 TV를 보는 동안에도, 여러 사람들이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이와 관련하여 논쟁을 하고 있었다. 정말 그 사람들은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들이 안쓰러웠다.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내가 철이 든 이후 계속 들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매번 일정한 주기에 따라 되풀이되기는 하였다).     강정구 교수 사진출처: 연합뉴스 만약 공중파 방송사들이 토론자들을 조금이라도 동정하였다면, 바쁜 사람들을 그렇게 불러 모으지 말고 옛적의 녹화 테이프를 틀었어야 했다. 시간을 많이 소요할 필요도 없으니 줄여서 토론 요지만을 방송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과연 이 다툼이 무의미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며 옛날의 경험이 되살아났었다. 마치 그것은 나에게 ‘네가 자꾸 그렇게 불평만 하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자신이 있느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아마도 지금의 이런 광경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원칙적인 입장에 터 잡아 다음 선거에서 투표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선거구에서 개인적으로 훌륭한 인물이 야당의 후보로 나오더라도 그 사람에게 표를 줬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가 투표하였던 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의 다툼을 보고선 나는 다시금 우리 사회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낮춰진 나의 의식 수준은 다른 시민이 불명예를 안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걸 모른 채 성장하는 세대가 다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숨기는 것도 부족하여 그 시민들과 가족들에게 불명예를 안겨 주었던 세력들이 집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민이 만든 법이 어떤 세력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이 한 가족의 평화와 인권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성장하였던 많은 시민들이 그런 두려움 속에서 이번 논쟁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고뉴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의 야당이나 일부 언론 역시 제한적이나마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니 야당이나 일부 언론을 비난할 필요도 없고, 설령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개정을 서두를 것도 없다.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한 국가의 민주화는 천천히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부탁할 게 있다면, 이제 그만 해도 된다는 것이다.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당신들이 더 이상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다시 세력을 얻고 싶다면 새로운 방식을 생각해 냈으면 좋겠다. 당신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이 한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28 | 추천: 0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빨간 베레모의 공수부대 중령 출신. 친미 우익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는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실업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거리로 뛰쳐나와 저항하는 민중의 편에 서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실패하여 옥고를 치르고 나와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인물이다. 그가 국민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며 일독을 권한 책이 있다. 올해 출판 400주년을 맞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이다. 스페인의 시골 귀족이 기사도 소설 읽기에 탐독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 스스로 ‘돈키호테’라고 자칭하는 기사가 되어 세상의 부정과 부패를 없애고 학대당하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몽상에 빠져 낡은 갑옷과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로시난테라는 앙상한 말을 타고 그를 따르는 하인 산초 판사와 함께 겪는 좌충우돌의 모험담을 내용으로 하는 풍자소설이다. 흔히 돈키호테를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자, 시대의 이단아, 앞뒤 계산도 없이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저돌적 인간형과 연결시킨다. 호기심도 많고 고민도 많지만 가는 곳마다 현실세계와 충돌하며 우스꽝스럽게 돌출행동과 돌출발언을 일삼는 돈키호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주변 사람들과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아도취에 빠져 엉뚱한 것에 집착하고 무모한 도전으로 결국 실패를 맛볼 수 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돈키호테.   스페인 광장에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동상 그런데 그는 국민들에게 돈키호테를 따라 배우자고 하고 있다. 정부 예산으로 돈키호테 소설책 100만권을 제작해  공공장소에서 국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며 “우리 모두 소설 돈키호테를 읽어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없애고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나서는 전사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며 “돈키호테의 추종자가 될 것”을 역설하고 “앞뒤 재지 않고 이상을 향해 용기있게 나아가는 행동형 인간이야말로 불평등과 불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필요한 현실주의자”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어쩌면 돈키호테적 발상을 가진 어느 나라 대통령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우리와 별로 상관도 없을 터인데 그냥 관심없이 넘어갈 수도 있다. 그는 19세기 스페인 식민시대 중남미 독립의 전설적 영웅 시몬 볼리바르를 계승해 자주적 진보국가를 건설하고 제2의 중남미 해방을 꿈꾸며 볼리바르 혁명이라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의 독특한 민중혁명을 추진 중에 있다. “민중에게 권력을 주지 않는 한 가난을 없앨 수 없다”는 신념으로 민중의 참여를 볼리바르 혁명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정말 돈키호테 같은 발언과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당당하게 미국의 정책을 제국주의적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미국 주도의 정의롭지 못한 세계를 바로잡자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미국에 종속되고 의존하는 중남미 지역의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경제적 착취의 역사를 종식하기 위해 미국 주도의 중남미 자유무역지대에 맞서 세계 5위의 자국의 풍부한 석유자원을 매개로 한 에너지 협력, 중남미 은행 창설 등 미국의 굴레에서 벗어난 중남미 지역의 독자적 경제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제국 중심의 자유시장, 자유무역, 국영기업의 민영화 등을 기치로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대항해 “민중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이지, 시장이 결코 신이 아니다”라고 주창하며 민중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빈익빈 부익부의 현실에서 벗어나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대안의 경제체제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돈키호테적 열정은 브레이크 없는 기차마냥 멈출 기세가 없다. 미국의 노골적인 암살 위협에도, 군사적 침공 위협에도 거침없는 행보를 막을 길이 없으니 말이다. 친미 기득권 세력의 쿠데타도, 총파업 시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쿠데타 세력에 의해 유배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대통령궁은 그의 복귀를 요구하는 민중들의 시위 인파로 뒤덮였다. 대통령직에서 몰아내기는커녕 며칠 만에 복귀함으로써 민중권력이 강화되어 볼리바르 혁명의 가속도만 붙는 형국이 되었다. 석유산업의 명실상부한 국유화를 통해 확보한 재정을 바탕으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프로그램이 확대되었다. 지주들로부터는 토지를 몰수하여 경작 농민들에게 분배하였고,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 100만 예비군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중남미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중동의 알자지라와 같은 방송국을 설립하여 제2의 중남미의 해방을 위한 볼리바르 형제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사진출처: 연합뉴스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의 볼멘소리가 들린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북한과 쿠바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어 걱정스럽단다. 1998년 대통령 선거, 2004년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국민소환투표 등 중요한 고비마다 선거혁명으로 오뚜기처럼 부활한 그를 두고 좌파 포퓰리스트(민중주의자)의 선거제도를 악용한 선동에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현혹되었단다. 볼리바르 혁명을 지향하는 그로 인하여 중남미에 좌파 포퓰리즘이 확산되어 중남미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게 되었단다. 앞으로 중남미 각국의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에 그가 개입하지 않을 선거가 없을 것이란다. 그래서 멕시코, 볼리비아, 니콰라구아, 콜롬비아 등 친미성향의 정권이 흔들거리고 있단다. 민중의 힘을 등에 업은 돈키호테 대통령. 신자유주의에 맞서 돈키호테 정신으로 우고 차베스와 함께 시몬 볼리바르와 체게바라의 전설을 이어가는 베네수엘라 민중들. 우리가 보기에는 초강대국에 당당하게 맞서 조금도 식을 줄 모르는 에너지로 제2의 중남미의 해방을 꿈꾸는 그들이 너무나 무모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불의와 허구에 찬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돈키호테처럼 씩씩하게 싸우고 있을 때 우리는 그동안 살아왔던 무기력한 모습 그대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미동맹의 예찬가를 부르며 어두운 터널 속에 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돈키호테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를 찾아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돈키호테의 꿈이 가소롭게 여겨진다면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이 지겨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언제까지 거꾸로 역사를 읽고 거꾸로 된 세상을 보며 거꾸로 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돈키호테가 되어 돈키호테와 같은 용기와 꿈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우리 모두가 돈키호테가 되는 날 세상은 비로소 바로 돌아갈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80 | 추천: 0
‘수돗물불소농도조정사업’(수불사업)이 중대한 국면을 맞고 있다. 그동안 일부 지자체에서 실시해 오던 ‘수불사업’을 중앙정부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실시하도록 의무화하는 ‘구강보건법 개정안’이 지난 6월 국회에 제출된 상황에서, ‘수불사업’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의견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개정안은, 충치예방 효과가 뛰어나고 인체에 무해한 수돗물 불소화를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되, 지방자치단체의 문제 제기가 있는 경우에는 여론조사를 실시해 명시적 반대 의사를 밝힌 사람이 과반수가 되지 않으면 그대로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출처: 노컷뉴스  ‘수불사업’이 처음에 ‘상수도수불화사업’이라는 공식명칭에서 ‘수돗물불소농도조정사업’으로 바뀌게 된 이유는, 수돗물에 불소를 과다하게 첨가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불소는 자연 상태에도 도처에 존재하므로 수돗물에서 불소의 농도를 적절한 수준으로 조정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고 있다. 공식명칭이 바뀌게 된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수불사업’은 과학적인 논쟁의 문제라기보다는, 지역사회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라고 본다. 불소의 충치예방 효과는 권위있는 여러 연구들에게 이미 입증된 바이고, 그 안전성에 대해서도 큰 의문이 없다. ‘수불사업’에서 권장하는 수돗물의 불소 농도는 0.8~1.0ppm이다. 이에 비해 설악산의 오색약수를 비롯한 여러 약수들은 불소농도가 1.3~1.5ppm이고, 차에도 불소가 1ppm 이상 들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불소의 충치예방 효과와 안전성에 대해 지역주민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주민들의 몫이 아니라 ‘수불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사진출처: 한겨레  우리나라는 여러 개의 핵발전소를 가동하고 있다. 유가의 변동에 대처하고, 미래에 원유가 고갈될 것에 대비해서 핵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입장은 완고하다. 하지만, 핵발전소 가동에 따르는 핵폐기물을 처분할 핵폐기장을 건설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어느 지자체도 핵폐기장 건설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핵 전문가들과 정치권은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과 더불어 지역주민들을 설득하여 동의를 이끌어내는 절차를 거쳐야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적인’필요를 앞세워 안면도 사태, 부안 사태와 같은 무리수를 두고 있다. ‘수불사업’을 추진하는 분들은 이들과 어떻게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건치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다수 주민이 원하는데도 소수의 반발로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지역 관료들이 불소화 시행을 거부하고 있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개정안의 취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요체는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이 아니라, 소수의 의견을 어떻게 수렴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본다. ‘수불사업’은 한국 사회가 형식적인 민주화 이후에 지역자치의 차원에서 실질적인 민주화를 진행해가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46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