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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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지속가능한 발전(개발)’이란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한창 운동의 다양한 조류에 민감하던 대학생시절이었다. 인권운동을 얘기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거론하는 것은 근래 들어 미래 우리의 후손들이 거닐 삶의 지형을 떠올리게 되는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살려보면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들과 비정부 민간단체 대표들이 함께 한 가운데 열린 이른바 리우환경회의에서 '환경과 개발을 위한 리우선언'을 채택하면서 지구환경보전을 위한 기본원칙으로 설명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컸던 이들에게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은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때 이 개념이 내게 ‘가슴’으로 와닿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회주의 몰락 후 이념의 푯대를 잃고 부유하던 소위 운동진영에 있던 이들에게 이 개념은 건강한 노동이나 삶을 위한 이론으로 다가섰다기보다 현학적 지식욕을 만족시켜주는 좋은 구실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코앞에 닥친 농촌활동 준비까지 보류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언급한 이러저런 책들을 섭렵했던 것은 그만큼 갈증이 컸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무지한 탐식의 결과 그나마 오늘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개념 한 덩이가, 거칠게 표현하면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것 모두가 과거, 그리고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책에서는 ‘다음 세대가 필요로 하는 여건을 훼손함이 없이 현 세대의 욕구에 부응하는 수준의 개발’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변증법적 사고에서 보면 하등 새로울 게 없는 귀결이었기에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을까, 이후 ‘지속가능’이란 개념은 당장 ‘삶의 지속’을 힘들게 하는 세파 속에서 옅어져갔던 것 같다. 새삼 10년도 훨씬 지난 지금 예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찌됐든 지금껏 삶의 뿌리이자 전부라고 생각하며 이어온 이 운동이 ‘지속가능’할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자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물음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운동이랍시고 해온 것을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놓여 있다. 이른바 소비자운동이니 무슨 권리운동이니 하는 ‘운동’이 팔리고(?) ‘운동권’이었던 게 ‘돈’이 되는 상전벽해의 시대를 살다보니 갖게 되는 혼란도 이런 생각에 일조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떠올려보면 그리 오래 전도 아닌 시기, 운동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삶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지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이들 사이에는 ‘기분좋은’ 비장미 같은 게 흘렀고 웬만한 허물은 서로 덮어줄 줄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는 지금, 비장미는 둘째치고 운동이 운동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비애가 서리는 것은 괜한 기우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리는 상품(?)이 되었으니 축하할 일일지 모르지만, 문제는 한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상품으로 내어놓기까지 한다는데 있다. 좀더 비싸게 팔리기 위해. 그러나 본질적이고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한 ‘상품화 과정’에서 드러난다. 더 잘 팔리는 상품이 되려다 보니 내용보다 포장이 우선되기도 하고 ‘경쟁’이 도입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를 닮아 있다.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운동’은 아예 배제하든지 철저히 억눌러야 하는 자본주의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한 인권운동가의 어린 아들은 장래 꿈이 제 아버지를 닮은 ‘인권운동가’라고 한다. 또 다른 인권 단체의 동지는 그런 아이의 아버지를 꼼수나 부리는 이라고 폄훼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과연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지 되묻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고 저항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 학생시절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던 이런 류의 구호도 ‘과연 그런 운동이 가능할까?’라는 자괴감으로 바뀌는 요즘이다.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우리가 해오고 있는 운동을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과장일까. 지금의 운동이 지속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을 최소한 우리가 물려받은 수준’으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닌 미래 세대를 위한 결단이 필요하다. 자본 위에 눌러 앉아(그럴 수도 없겠지만) 그 달콤한 유혹을 향유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이 드리우는 그늘 속으로 더 깊이 나아갈 것인지.   서상덕위원은 가톨릭신문 기자로 재직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17 | 추천: 0
성매매 종사자인 외국인 여성들이 있습니다. 사회 통념적으로 매춘행위는 지탄받는 일입니다.  성매매는 근본적으로 근절하기 어려운 문제이기에 정부규제를 통해 효율적으로 ‘감독’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윤리 도덕적으로 매우 부적절한 행위이며,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죄악시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들을 만나 상담하며 그 삶의 여정을 듣다보면 누구도 이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한 여성으로서 꿈과 희망과 사랑이 가득했던 이들이 매춘이라는 죄에 빠지게 된 것은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가난이라는 무거운 짐 때문입니다.  ‘외국여성 성매매 실태조사’(설동훈 2003)에 따르면 외국인 여성 성매매 종사자의 국내 유입 원인으로, ①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국가들 간의 불균등 발전과 성의 상품화, ② 인력을 해외로 송출함으로써 영리를 추구하는 국제인력송출업자 또는 국제인신매매조직, ③ 가난과 실업이 만연한 송출국 사회와 자국인의 해외 송출을 장려하는 정부정책 및 가부장제 문화, ④ 성산업에 필요한 여성을 충원하려는 한국사회와 그것을 방관한 정부정책을 꼽고 있습니다.  외국인 여성 성매매 종사자 중 상당수는 무용수나 연예인 등의 직업을 소개받아(예술흥행 비자 E-6)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계약과는 달리 유흥업소에 넘겨져 매춘을 강요당하며 인권을 유린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노동사목위원회는 2001년 2월에 성매매 종사자인 외국 여성들이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피기 위하여‘벗들의 집’이라는 쉼터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매년 30여 명이 넘는 외국 여성들이 매춘 소굴에서 탈출하여 도움을 호소합니다.  이들은 벗들의 집에 머물면서 과거의 아픔을 딛고 잃어버린 꿈을 키우며 정상적인 일자리를 찾아 노동자로 살아가거나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받은 육체적 학대와 정신적 상처가 크기에 의료지원 및 심리치료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이 앞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 주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이들이 재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나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 미비하거나 전무한 상태이고, 쉼터도 벗들의 집 한 곳뿐입니다. 벗들의 집에 입소한 외국인 여성의 국적을 보면 구소련과 필리핀 여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중국(조선족), 베트남, 태국, 페루, 스리랑카, 네팔,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피지, 루마니아, 몽골 등 다양합니다.  이 여성들이 비록 매춘행위를 했지만 대부분 폭력과 협박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 이들이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벗들의 집에 머물렀던 여성들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 여성들은 전문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들입니다.  자국에서 유치원이나 학교 교사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30-50달러(4-7만원 정도) 정도 받는 급여도 6-7개월 체불되어 있는 상태에서 500달러(70만원)이상을 벌 수 있으니 한국으로 가자는 브로커(국내 포주들과 연계되어 있는 러시아 마피아)의 유혹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목소리로 들렸답니다.  거의 대부분은 이미 러시아 여성들이 한국에서 성매매에 종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가족이 굶주리고 병든 부모님을 살리려는 마음이 앞서기에 ‘내 몸가짐 바로하면 되지!’ 하는 의지를 가지고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열심히 일해서 잘살겠다는 희망과 기대가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유혹인지도 모르고 한국에 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들 앞에 펼쳐진 삶은 협박과 감금이요 강요된 매춘으로 몸과 마음이 병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꿈도 희망도 사라집니다.  한 여성으로서 극심한 수치심에 시달리고, 몸과 마음이 황폐화되어 가는 속에서 수십 번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그 일이 몸에 익어서도 아닙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든 지간에 어떻게 해서든지 단 10불이라도 가족에게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몸부림인지 모릅니다.  마치 일제시대 잘 살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하와이 집단 농장 등 여러 나라에 노예로 팔린 신세가 되었던 지난날 암울했던 우리네 여인들의 기막히고 가련한 삶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고 말이 다르지만 이들도 엄연히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꽃다운 아가씨로서의 희망과 미래에 대한 청순한 꿈을 지닌 우리네 딸들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도 어린시절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가정의 심각한 가난 때문에 고생을 했었는데, 그 때 제 여동생이 중학교 과정도 마치지 못하고 16세에 공장생활을 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오빠 공부시키고 불편하신 어머니 봉양하기 위해서 일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의 삶을 가족을 위해 희생한 동생이 대견하고 고마움에 머리 숙여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가난한 나라였다면 우리 여동생들도 가족의 생계와 부모봉양을 위해 손가락질 받는 이 외국인 여성들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이제 다시 한번 바라봅시다.  애정의 시선으로, 가족의 마음으로 그 여성들을 바라보면, 그 외국인 여성들이 다름 아닌 우리의 여동생이요, 우리의 딸이요, 우리의 손녀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찌 손가락질 하겠습니까!  가족을 사랑하는 그 아름다운 마음을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적 보호 장치가 부족한 현실이지만 많은 NGO단체와 종교단체들, 사회봉사자들이  이 여성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분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의 상품화와 값어치를 따지는 세상에서도 ‘사람을 사람으로 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을 지닌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손길을 잡으며 인간의 자기 존엄성조차 상실해 가고 있는 외국인 성매매 여성들이 희망을 가지고 죽음에서 삶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더욱 깊이 인식하고 그 봉사의 열정이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국가는 성매매 근절을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마련에 더욱 힘써야 하겠지만, 당장 시급히 요청되는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인 쉼터를 확충하고, 인력 및 시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허윤진 위원은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17 | 추천: 0
상반기 사회적 화두 중의 하나가 교원평가일 것이다. 교육부에서 처음 이 정책을 내 놓았을 때 학부모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였다. 반면에 교원들은 교원통제 강화니 구조조정의 음모니 하며 한 목소리로 저항하였다. 어느 쪽이든 교육을 잘하여 바른 인격을 갖춘 인간을 육성하는 것을 동일한 목표로 내세우는데 교원들과 학부모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비추어진 것이다. 필자는 교사이면서 동시에 학부모이기 때문에 양쪽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본다. 학부모들이 바라는 교원(또는 학교)의 모습은 좀 더 열려있고 친절하며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일 것이고, 교사들이 바라는 학부모의 모습 또한 교원(또는 학교)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학교 운영을 지원하는 모습일 것이다.   양측의 입장은 모두 맞다. 황희 정승의 일화에서 나온 말처럼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은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교육은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는 것처럼 시간과 비례하여 물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체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격을 갖춘 인간을 만들어내는 교육은 그 과정에 많은 변수가 작용하여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시절 담임선생님이 던진 한 마디에 자신의 진로를 정했다거나 그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또한 어느 시점의 구체적 교육은 좀더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이라는 행위를 이행하는 과정상의 한 부분이므로 완성된 형태의 결과로써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사들이 행한 교육적 행위를 일정한 방식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리고 단순하게 교육 행위를 수치로써 가늠하고자 할 때, 모든 교육적 행위 자체가 그 수치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나갈 위험이 있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런 상황에서의 교육 내용이 지극히 염려스러운 것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교원들의 신분이 불안한 상태에서 소신있는 교육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교사들의 철밥통 수호’라고 종종 지적받음에도 불구하고 교원들이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이유는 사실 이 두 가지에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교사들이 자신의 발전을 위한 어떠한 거름 장치도 없이 한평생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지탄을 받게 된다. 물론, 이러한 지적이 일정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우선 교사와 관련된 차원에서, 인성으로나 실력으로나 질 높은 교사를 뽑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한다. 여기서의 장치란 교사 양성기관인 사대와 교대의 교육과정상의 문제를 개선하고, 임용 과정상의 투명성과 엄중함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리고 교사로 임용된 후에는 교사자신의 발전을 위해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야 하며, 연수 내용을 교육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체계적인 틀거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육경력에 따른 부족한 시대감각을 일깨우게 되고 시대적 요구를 인식하게 되며 교육내용에 적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교원평가 정책에서 학부모들이 원하는 것은 교사로서의 자질이 안되는 사람을 걸러내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모든 교원단체도 동의하고 있다. 부정⋅비리를 저지른 교사, 성추행, 성희롱 교사, 그리고 과도한 체벌을 일삼는 교사, 성적을 조작하거나 촌지를 밝히는 교사 등은 당연히 교단에서 사라져야한다. 그러나 이 부분도 많은 고민과 전제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서울에서만도 사립 중고등학교가 80%를 육박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적용될 사립학교법 개정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또한 왜곡된 승진구조와 임용구조, 교육부 등 상급기관의 관료주의, 지나친 행정업무 부담과 과도한 수업시수, 왜곡된 입시경쟁교육체계 등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선결되어야 자질있는 교사를 기대할 수 있다. 구조적인 접근을 도외시하고 단순히 개별 교사 차원에서만 ‘문제 교원’을 거론한다면 결코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문제 교원’들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을 요구한 것은 교원단체였고, 교육부나 교육청은 솜방망이로만 대처했을 뿐이다. 엄중한 처벌 없이 다른 학교로의 전근이나 미약한 징계 등만을 내린다면 이후의 또다른 사건을 예방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미래는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 달려있고 교육이 그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총체적인 체계인만큼 교육은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중요하다.  그래서 교육을 행하는 교사와 학교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이토록 중요한 교사와 학교가 사회적으로 주어진 막중한 책임을 다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들이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우선 국가는 현재 GDP의 4.2%에 불과한 교육재정을 6%로 확대하여 법정정원교사의 100%확보, 수업시수 감축, 콩나무 교실 개선, 학교시설 확충 등을 지원해야 한다. 사립학교법이나 초중동교육법 등처럼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법안이나 승진, 대학입시, 임용구조 등 이해관계가 부딪히기 쉬운 구조들도 관료들의 권위주의가 아니라 순수하게 교육의 질을 위한 내용으로 개선돼야 한다. 교원이나 학교에도 과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권위적인 자세를 버리고 좀더 열린 자세를 통해 교육의 3주체인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를 투명하게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국가가 이를 위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때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   황미선 위원은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81 | 추천: 0
“김선일을 살려내라!”는 그 무수한 외침이 있었던 때로부터 어느덧 1년, “김선일을 기억하라!”는 추모의 외침이 들려 온다. 고 김선일씨 1주기 추모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었다. 포스터에서 김선일씨의 아버님은 아들의 추모 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계신다. 아버님의 감사의 말씀에도 이에 부응하는 추모의 열기는 왜소해 보인다.    작년 김선일씨의 절규는 우리를 일깨웠다. 이른 아침 뉴스에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나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김선일씨의 절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국민의 여론도 무시한 채 국익론과 한미동맹의 현실론을 내세워 다국적군 중 세번째로 많은 3천여명의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 분명하였다. 거리에는 김선일씨를 살리기 위한 촛불이 켜졌다. 김선일씨가 이라크 저항세력의 참수 위협에 직면해 생명이 경각에 달린 바로 그 때 그들은 이라크 추가 파병 방침을 철회하여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대신에 추가 파병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혔다.  김선일씨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촛불을 밝힌 수많은 국민들의 염원은 그렇게 짓밟혔다.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더 소중한 국익과 한미동맹을 위하여. 제2, 제3의 김선일씨와 같은 더 이상의 희생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죽음의 한미동맹과 노무현 정권을 규탄하는 분노의 함성이 타올랐다. 김선일씨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납치된 이후 알 자지라 방송에 의해 김선일씨가 절규하는 피랍 장면이 방영되기 전까지 미국과 한국 정부는 김선일씨의 납치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주장하였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한국 정부는 자국민이 납치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자이툰 부대의 추가 파병을 최종 결정 발표하였고 발표 며칠 뒤 알자지라 방송에 의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김선일씨가 근무한 회사의 사장은 알 자지라 방송 보도 이전에 이미 김선일씨의 피랍 사실을 확인하였고 개인적 차원에서 저항세력과 접촉하며 김선일씨 구명 노력을 하였다 주장하였다. 그는 당국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조용히 민간에서 인질 석방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 저항세력을 자극하지 않고 인질의 안전한 석방을 위해 더 효과적이다라는 판단으로 미군 당국과 이라크 주재 한국 대사관에 김선일씨의 납치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한다. 그는 인질 구명 협상을 진행하는 기간 이라크 주재 한국 대사관을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단순히 업무 협의만을 하였고, 미군을 상대로 한 군납업체의 하청일을 하는 업체의 사장으로서 미군을 상대로 군납 하청일을 하던 소속 근로자가 납치되었는데도 원청 업체, 미군 당국, 현지 경찰에 전혀 납치 사실을 알리지도, 신고하지도 않은 채 인질 석방 협상을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였다고 한다. 정말 납득하기 어렵다. 그는 알 자지라 방송 이후 언론과의 최초 접촉에서는 알 자지라 방송 보도 이전에 이미 미군과 김선일씨 피랍 사건을 협의하였다고 하였다가 이후 그러한 언론의 보도가 거짓이라고 하면서 완강하게 미군과 협의하지 않았다고 진술을 번복하였다. 한편 AP통신은 알 자지라 방송 보도 이전에 이미 저항세력에 의해 제작되어 배달된 납치된 김선일씨의 인터뷰 화면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먼저 입수하였고 이 비디오 테이프에 의하면 김선일씨는 자신의 국적, 이름, 주소를 정확히 확인해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P통신은 김선일씨의 납치 사실을 즉시 세상에 '공개보도'하기는 커녕 미군 당국과 한국 정부에 피랍자의 신원을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AP통신은 알 자지라 방송 보도 이후에야 뒤늦게 자신들도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한 바 있다고 하면서 김선일씨가 국적, 이름, 주소를 정확히 확인해 주는 장면은 삭제한 편집된 비디오 테이프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편집된 비디오 테이프 내용만으로는 마치 김선일씨의 국적 등 인적 사항을 확인하지 못한 양 AP통신은 혹 한국인이 아닌가 싶어 자신의 서울지국을 통해 한국의 외교통상부에 한국인 납치자가 없는지 “문의”를 하도록 조치를 취하였으나 외교통상부 공무원들로부터 한국인 납치자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보도하였다. AP통신의 이러한 보도로 알 자지라 방송 보도 이전에 한국 정부의 김선일씨 납치 사전 인지 여부가 더욱 논란이 되었다. 미국과 한국 정부의 김선일씨 피랍 사전 인지 여부를 밝히는 것이 핵심적 진상 규명 내용이라 할 국회의 국정조사기간 열린 청문회에서 AP통신이 입수한 편집되지 않은 원본 비디오 테이프가 한나라당 박진 의원에 의해 공개되는 순간 그 화면에서 김선일씨는 자신의 국적, 이름, 주소를 정확히 말하고 있었다. 언론기관으로서 초보적 사명도 책임감도 저버린, '공개보도', '통보'가 아니라 '문의'에 그친 본말이 전도된 자신의 행태를 합리화하기 위해 비디오 테이프를 조작하면서까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AP통신의 작태를 여지 없이 드러내 보이는 순간이었다. AP통신이 김선일씨의 국적, 이름, 주소가 정확히 밝혀진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하고 서울 지국에 한국 정부측에 확인하도록 하고서도 같은 시기 이집트인과 터키인의 피랍 테이프를 즉시 공개한 반면 유독 김선일씨의 테이프를 방영하지 않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AP통신은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한 이후 이를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 사령부 및 미군에 분명히 전달하였고 비디오 테이프 방영 여부에 대하여 협의를 진행한 결과 한국의 이라크 추가 파병을 앞둔 상황에서 한국인의 피랍사실이 알려질 경우 예상되는 한국 내 여론 악화로 인한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 파병이 차질을 빚을 것을 우려한 미군 당국의 엠바고 요청을 받아 들여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의혹에 대하여 이제라도 공개적으로 성실하게 답변하여야 한다. 국회의 국정조사특위 활동에도 불구하고 김선일씨 피랍살해 사건의 의혹은 해소되기는 커녕 AP통신의 행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새로운 진상 규명의 과제들을 남겨 놓았을 뿐이다.  의혹을 해소하고 진실을 밝히는 노력은 과제만을 남긴 채 그것으로 종료되었다. 국회 국정조사특위의 활동이 어떻게 종료되었는지 그 누구도 더 이상 추궁하지도 더 이상 답하지도 않는 가운데 시간이 흘러 김선일씨 사망 1주기를 맞았다.     1년이 지나도 노무현 정권의 소신에 한 치의 변함이 없다. 통탄할 일이다. 지난 5월 30일 자이툰 부대 인근에 로켓포 4발이 떨어지는 등 이라크 저항세력의 위협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바야흐로 자이툰 부대가 철군하지 않는 이상 제2, 제3의 김선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터에, 아르빌에 위치한 유엔 ‘이라크원조기구’(UNAMI) 청사 경계임무까지 맡아 자이툰 부대의 역할을 확대하고 자이툰 부대의 추가 파병연장까지 추진할 모양이다. 노무현 정권의 넋두리도 여전하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힘을 앞세워 국제법을 무시하고 범죄행위를 감행하는 데 동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로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 한반도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강대국 미국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를 들고 있다. 파병을 통해 한미공조자세를 변함없이 보여준 후에라야 핵문제 해결에서 군사적 선택도 배제하지 않는 미국에 대하여도 할 말도 할 수 있고 평화적 해결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주도적으로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한미동맹의 강화를 핵심적 논리로 하는 파병의 국익 기여 주장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비견된다. 식민과 분단의 한세기 동안 한민족을 짓눌러 옥죄며 굴종을 강요한 넌덜머리가 나는 사대주의적 발상에 다름 아닌 지겨운 변명이요, 허튼 궤변이다. 비밀리에 극적으로 자이툰 부대를 방문하여 눈물을 흘리며 파병 장병들의 노고를 격려하고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보임으로써 조중동의 찬사를 받았다고 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가담한 파병의 불법성이 치유될 수도, 국익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다고 보는가. 김선일씨의 피랍 살해의 근본적인 원인이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마당에 이제 만일 단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더 희생된다면 노무현 정권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기만적이고 허구적인 국익 논리에서 벗어나 자주적 외교의 기원을 열어가는 정책으로써 자이툰 부대의 파병연장을 거부하고 철수하는 결정을 통해 역사의 법정에서 거듭 태어나는 심정으로 속죄할 것인가, 아니면 블레어처럼 부시의 푸들이라는 오명을 안고 제2의 김선일이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불덩이를 머리 위에 인 채 정권의 위기를 자초할 것인가.   참수 직전까지 평화와 생명을 갈구한 김선일을 기억하라! 즉시 자이툰 부대를 철군하라! 죽음의 한미동맹을 파기하라!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1973 | 추천: 1
요즈음 다시 비정규직 법안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정부의 관련 법안에 대하여 반발하고 있다. 노동계는 정부안이 통과될 경우 총파업을 하겠다고 발표하였지만, 정부의 입장은 쉽게 변하지 않을 듯 하다. 정부는 비정규직 고용 자체에 대한 통제가 시장질서를 교란시킬 수도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걱정 때문에 사유 제한 방식을 통하여 비정규직의 고용 자체를 통제하자는 노동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해 이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오해가 있다. 첫째는, IMF 사태 이후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비정규직의 고용 자체를 그 채용 사유에 따라 제한하면 노동시장의 왜곡이 올 수 있다는 우려이다. 순서대로 얘기해 보겠다.     첫째, 우리는 IMF 이전에는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정규직이었고, IMF 사태 이후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급격하게 비정규직이 늘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IMF 이전에도 우리나라의 전체 근로자 중 45% 내외가 비정규직이었다. IMF 이후에 7% 내지 9% 증가하였을 따름이다. 이는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가 시장경제질서를 택하는 한 비정규직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은 노동시장에서의 수요공급에 따라 생겼다고 소멸하고,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다보면 곧바로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왜 요즘 들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분야에서 사용되는 비유를 들어 보겠다. 변호사들은 과로사가 일어나는 시점을 양동이에 물이 넘치는 상황과 비교하곤 한다. 어떤 근로자가 사망한 후 재판 과정에서 그것이 과로사인지 여부가 문제될 때 항상 제기되는 질문이 ‘왜 다른 근로자들은 그 정도의 업무량을 소화해 내는데, 그 근로자만 죽었느냐?’란 것이다. 이 때 변호사들은, 어떤 근로자가 자기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넘어선 일을 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은 스스로 버틸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런 상황을 양동이에 물이 거의 찼지만 아직 넘치지는 않는 상태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특별한 계기로 비정상적인 과로 상태에 이르거나 충격을 받는 경우를 그 양동이에 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으로 비유한다. 즉 특정 시점의 물 한 방울로 인하여 양동이의 물이 넘치듯 그 근로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역시 같다. IMF 이전 우리 사회는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정규직을 고용하기 어렵거나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을 때 비정규직을 채용하였다. 그 비율이 약 45% 내외였던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좋지 않은 경우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 정도는 우리 사회가 버틸 수 있었다. IMF 이후 우리 사회는 정규직 근로자의 삭감과 비정규직으로의 대체 고용을 구조조정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 때도 우리는 비정규직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경제가 회복되면 다시 정규직 고용이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IMF 사태가 극복이 된 이후에도 이러한 사정이 변화되지 않자,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 사회는 늘어난 비정규직을 짊어지고서 일시적으로 버틸 수 있지만,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늘어난 비정규직이 양동이에 떨어지는 마지막 물 한 방울이 되어 우리 사회의 존속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민주적인 모습으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지 여부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둘째, 비정규직 법안에 관한 정부, 경영계, 노동계의 다툼은 비정규직의 사용을 일정한 범위 내로 제한할 것인지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 정부와 경영계는 비정규직의 채용. 사용 여부는 시장질서에 맡겨야 하고 법률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한다(사용자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얘기이다). 노동계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사용할 수 있는 사유를 법률로서 제한하자고 주장한다. 비정규직의 고용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제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을 시장질서에 맡겨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시장이 왜곡되어 있다는 점이다. 노동력의 매매에서 근로자와 자본가 즉, 사용자의 힘은 동등하지 않다. 취업을 할 때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자신의 연봉이나 근무조건에 관하여 회사와 협상하지 않는다. 근로자들이 게을러서일까? 아니다. 협상 자체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을 협상하는 근로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원하는 조건을 관철시키기는커녕, 그 채용이 거부되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근로자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일을 하여 돈을 벌지 않으면 굶어죽게 된다. 비정규직 법안의 첫번째 목표는 IMF 이후 늘어난 비정규직 비율을 IMF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 노동계도 비정규직의 사용 자체를 금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구호로서의 ‘비정규직 철폐’는 이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때, 혹은 그 사용이 합리적일 때 회사는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막자고 하는 것은 시장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다. 현재 문제되는 것은 사용자측이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 사회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법률은 시장질서를 왜곡하여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법률이더라도 시장질서를 왜곡시키고 공정한 거래질서를 훼손한다면, 그것은 경영자뿐만 아니라 근로자에게도 비극적인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시장질서가 불공정하게 형성되어 있을 때, 법률은 그 한계적인 상황하에서 개입할 수 있다. 법률은 시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법률은 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필요한 범위 내에서만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노동계의 주장에 대하여, 정부는 이것이 시장질서를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노동계가 얘기하는 바대로 비정규직 법안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노동시장에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쓸 수밖에 없는 범위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사는 합리적인 필요에 기하여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다. 즉 법률이 비정규직의 사용 사유를 제한하더라도,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고, 비합리적인 이유에 기하여 비정규직 근로자를 사용하고 있는 일부 사업장에서만 유효할 따름이다. 즉 사유 제한 방식을 택한다는 것은 왜곡된 시장질서에 대하여 경고를 보내는 정도의 역할만 할 따름이다. 이런 결과가 온다고 하여 시장질서가 왜곡된다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의롭지 않던 것이 정의롭게 되는 것으로 변화하는 것, 혹은 비합리적인 상황이 합리적인 상황으로 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누군가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시장이다’라는 얘기를 하였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노동계 역시 시장을 무시할 수 없다. 법률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장을 무시한 법률은 효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시장질서가 불공정하거나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여 다른 시민의 생활을 위협할 때, 법률은 적용될 수 있다.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된 노동계의 주장은 한계적인 상황 또는 협소한 범위에 한정되어 있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것을 마치 시장질서 전체를 무시하는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유치한 행동이다. 정부가 시장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비정규직 법안을 올바르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를 기원한다. 도재형 위원은 현재 강원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627 | 추천: 0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건 무조건 막아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건 무조건 막아. 걔들은 겁이 없잖아. 각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도록 해.” 현재 화제가 되고 있는 ‘제5공화국’ 중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이 광주 고등학생들의 동태 보고를 들으면서 하는 대사다. 고등학생들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그런데 묻고 싶다. “왜? 왜 무서운데?” 사실은 겁이 없어서 무서운 게 아니다. 그 투명함이 무서운 것이다. 그 진실성이 무서운 것이다. 불의 앞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진정 무서운 것이다.     단발의 추억 개인적으로 전두환의 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다. 교복 자율화와 두발 자율화가 그것이다. 자라나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교복의 틀 속에서 가두고 짧게 쳐버리는 식민주의적, 권위주의적, 군사문화적 제도를 해체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모양만 바뀐 교복과 여전히 개성이 무시된 짧은 스타일의 머리 모양이 등장했다. 1970년대 고등학교를 다닌 선배들에게서나 들을 법한 바리깡으로 학생의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는 일이 오늘의 학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단발령에 항거한 구한말 최익현이 들었으면 땅을 쳤을 일이다. 유교적인 소신이 학생들의 단발을 반대하는 논리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 만큼 소중한 것이고,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천부적 인권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에 경악한다. 마약 수사를 하면서조차도 피의자의 머리카락 몇 올을 뽑으면서 피의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동의를 얻지 못하면 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영장이 필요하다. “왜 내 몸에 손대? 영장 가져와!!” 학생들이 교사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할 건가?   ▲ 지난달 14일 오후 4시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 앞에서 열린 '학생인권보장 청소년축제'에서 참가 학생들은 자율발언 등을 통해 두발단속, 야간자율학습 강요, 학생회 간섭, 교문앞 용의검사, 인터넷 글쓰기 금지, 단체기합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촉구했다. 두발 단속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뜻을 담은 '마지막 바리깡'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2005 오마이뉴스 권우성   너희들은 공부나 해! 수능시험을 보는 중간에 수험생이 자살을 하고, 심지어 인문계고등학교 고교생이 중간고사를 치루는 도중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2008학년도 대학교 입시안이 발표되었다. 내신 성적 중시 입시안이었다. 고1학생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교육청은 학교장 훈화 및 지도 강화로 학생들의 집회 참석을 막겠다고 하고 교육부는 촛불집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을 교칙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내부방침을 정했다. 너희들은 시키는 대로 공부나 하란 말이다.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출범 2005. 6. 6. 서울에서 13개교, 경기 11개교, 대전 8개교, 경남 3개교, 울산 2개교, 경북 1개교, 전남 1개교 등 전국 47개 고등학교의 학생회가 가입한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한고학연)가 출범했다. 제1기 의장으로 선출된 김백건군은 출범선언문을 통해 “학생다운 생각과 학생 또한 교육의 수혜자로서 학교를 구성하는 주체 중 하나라는 주인의식으로, 명목적인 활동에 그치고 있는 전국 고등학교 학생회의 제자리 찾기와 바람직한 운영을 도모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고등학생들의 권익을 보호, 증진하고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교육이념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활동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아니나 다를까. 고등학생들의 전국 조직이 생긴다니 여기저기서 긴장되는 모양이다. 모 신문은 고교생 전국조직 순수성 유지될까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일부에서는 특정 정치적 목적을 가진 대학생과 일반인이 이 단체를 주도하고 있다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학생들이 주장했듯이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노선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방송사는 한고학연의 출범을 두고 ‘한총련과 같은 학생조직이 생긴다.’고 보도했다. 교육부와 교육청 관계자가 출범식에 참관했다. 그래서일까? 의장 김백건군은 비폭력, 비정치성을 근간으로 학생회가 활성화되도록 지원하고 각종 연구 작업을 할 것이라고 한고학련의 활동방향에 대해 말한다. 기대되는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의 활동 고등학교에 적용되는 초중등교육법 제17조와 대학에 적용되는 고등교육법 제12조의 내용은 동일하게 “학생의 자치활동은 권장·보호되며 그 조직 및 운영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학칙으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학생자치활동의 핵심은 학생회활동으로 나타난다. 현재 대학의 학생회는 학교운영의 한 주체로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고등학교 학생회는 기껏해야 특별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학생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선거권이 부여되는 연령을 만18세로 낮추려는 움직임이 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선거권이 주어지는 상황이 온다. 선거권 부여만으로 그들의 정신적 성숙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기본권을 스스로 행사하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학교의 운영에 참여하고, 자신에게 적용되는 교육제도에 관하여 의견을 피력하며 스스로 권익을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의 전국적 조직에 대하여 고등학생은 어리다거나 색깔 시비를 거는 것은 두려움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광주학생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모두 정치적 계기이다. 그 중심에 고등학생들이 함께 했다. 비정치적 노선을 견지하겠다는 선언을 하지만 스스로 활동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어느 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노선을 견지할 것을 주문하는 신문 사설과 한총련과 같은 학생조직이라는 방송사의 멘트가 정치적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주체가 소외되어 버린 오늘날 교육현실 속에서, 스스로 주체성을 인식하고 작금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학생들의 참신한 외침, 그 뜨거운 함성을 간절히 고대한다. 위대영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50 | 추천: 0
“손톱은 슬플때 자라고 발톱은 기쁠때 자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긴긴날 영어(囹圄)의 몸을 견디었던 장기수 선생님들 사이에 새 희망을 기다리는 지혜의 격언으로 구전되었던 말인데 양심수였던 김경환 씨가 그의 책을 통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숨막히는 더위뿐인 붉은 황토길을 걷다가 신발을 벗으면 발가락이 하나씩 잘렸다던 한센병 환자 한하운의 “소록도 가는 길”만큼 싸리하게 아린 그 말이 더운 계절의 중심을 향해 걷는 저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잠 안오는 새벽, 골목길에 나섰다가 먹다남은 피자박스까지 주워담는 등 굽은 노인을 보며, 생활고에 못이겨 자신과 자신의 살같은 자식을 허공에다 던지고 눈물 한방울을 유서로 남긴 어떤 여인의 죽음을 보며, 가질것 다 가지고도 모자라 더 빼앗을것 찾는 제도화된 자본과 권력의 탐욕을 보며, 또 대학이라는 하찮은 구조에 세상을 꾸깃꾸깃 처넣고 그안에 들어가지 않은 다수를 조롱하듯 히죽거리는 어느 공당의 대변인을 보며, 올한해 부지런히 자라날 내 손톱의 길이를 가늠할수 있습니다. 나의  삶이 슬픔에서 왔으니 슬픔으로 가도 좋지만 그 눈물 떨군 자리 찬란하게 피어날 황홀한 일몰의 깊이는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어야겠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더 지날 하루가 없는날 일지라도 내 시선에 고정된 슬픔이 선홍빛 꽃물드는 그날을 덮어두진 말아야 겠습니다. 손톱을 깎아야 할때가 많이 지났고 발톱은 아직 한참이나 많이 남았습니다만, 저는 부지런히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또 다른 오늘을 터벅터벅 건너가겠습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779 | 추천: 0
3월 이후 지역 건설업체와의 집단교섭 및 근로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던 울산 건설플랜트의 노조의 파업이 71일 만인 5월 27일 노사정 합의를 통해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6월 1일 조합원 투표가 찬성으로 결정나더라도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겨두게 되었다. 주요 쟁점이었던 사측과의 집단교섭이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고, 노조가 이후 합법적인 활동을 약속함으로써 그동안의 파업이 불법적이었음을 시인한 결과가 되었으며 파업과 관련한 민·형사상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합의 주체인 ‘공동협의회’의 성격이 애매하여 합의사항이 이행되지 않더라도 법적인 구속력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70여일간의 장기파업에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노조가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즈음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던 시민사회가 이들의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투쟁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눈 부릅뜨고 합의사항 이행과정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막노동 하는 노가다는 사람도 아니랍니까?” “저희는 더 이상 남편들이 모멸감 속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는 꿈을 꾸며 올라 왔습니다.” 지난 5월 23일 오전 아주머니 몇 분이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을 풀어 놓으셨다. 농성 중이거나 구속된 울산 플랜트노조 노동자 가족들이 직접 남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모진 꼴을 겪은 뒤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목이 메어 안타까움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이미 새로운 천 년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고 전쟁과 착취의 20세기 닮은꼴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였지만, 민주화를 이루었다며 그 성과물들을 자랑해대는 이 대명천지에 80년대에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노동조건과 기업의 행태에 분노를 진정하기 힘들었고 뒤늦게야 남편들의 작업환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 거리에 나선 부인들의 마음이 읽혀져 괴로웠다. ‘정직원 외 출입금지’ 라는 간판이 달린 식당이나 휴게실, 화장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니 가족들에게는 말할 수 없었겠지만 현장에서 겪었을 모멸감을 20-30년씩 어떻게든 참아가며 일해야만 했을 노동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법이 있잖아요. 약한 자를 위해서 있는게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게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하루였어요.” 농담처럼 내뱉곤 하던 말이었는데, 허가를 받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집회에서 연행되었다가 나온 한 아주머니가 이야기 끝에 남긴 이 이 한마디가 너무도 절절하게 들렸다. 가족들은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정부에 있음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기껏해야 근로기준법의 노동보호제도와 고용보험 등 사회보장 제도를 무력화시켜 버리는 다단계 하도급 체계를 개선할 것과, 화장실과 식당 그리고 휴게실 설치가 요구의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전체 72개 하청업체 중 41개 업체가 교섭 대표단까지 꾸렸다가 돌변하여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검찰과 경찰은 파업 돌입 5일만에 노조 지도부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하며 발빠르게 과잉진압에 나섰으며, 언론까지 가세하여 노조의 폭력성만을 일방적으로 부각하여 보도하는 등 마치 기업과 공권력과 언론이 사전모의라도 한 듯 삼위일체가 되어 대응하는데 어찌 정부가 이에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인가. 이미 대표적인 비리부패산업으로 알려져 있는 건설 분야에 어떻게든 그들 모두가 깊이 유착되어 있고, 노조로 인해 그 비리구조가 드러나고 끊어져 나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막노동이라는 단어는 “닥치는 대로 하는 육체노동, 막일, 대수롭지 않은 허드렛일”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라면 울산 건설플랜트 현장의 노동자들은 절대 막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닥치는 대로 하는 성격의 일도 아닐뿐더러 대수롭지 않은 허드렛일은 더구나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결단이 필요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역군들이다. 행동과 성질이 거칠고 불량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노가다’가 아니라 이 사회와 역사의 주인인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을 막노동이라 부르던 허드렛일이라 부르던, 그들을 노가다라고 부르던 노동자라 부르던 그들이 주인이다. 부디 울산 건설플랜트 노조의 노동자들이 누군가의 도움으로가 아니라 스스로가 주인임을 깨닫고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앞으로 상황이 어찌 진행되던 안주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 바란다.   김대원 위원은 현재 성공회 서울교구 신부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833 | 추천: 1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이스라엘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테러다 뭐다 해서 얼핏 위험하고 시끄러운 곳이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인류 역사와 그 역사에 필수불가결하다시피 뒤따르는 분쟁의 축소판이란 생각에, 거기에다 뭔가 재미있는 게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구미가 동했다. 대부분의 여행, 특히 고향땅을 벗어나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방문한 나라의 좋은 면만을 보는 게 일반적이다. 비싼 돈까지 들여 큰 맘 먹고 나서는 길이니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게 여행은 언제부터인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많은 삶, 그리고 그 속에 놓인 아픔마저도 함께 하고픈 마음을 잠시나마 풀어놓고 오는 장으로 자리해오고 있다. 그것은 아마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껏 줄기차게 생각해오고 있는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연민이나 안타까움 같은 게 내면 깊숙이 놓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국적기를 이용하는 바람에 이집트를 거쳐 가야하는 여정이 좀 번거로운 면도 없지 않았지만, 나로서는 도착한 날부터 이집트에서는 수십 년만에 일어났다는 데모 소식을 들을 수 있어 색다른(?) 체험이었다. 1981년 집권과 동시에 비상계엄을 실시하며 이집트를 철권 통치해온 무바라크 대통령이 나라 안팎의 반대 여론에 밀려 올 2월 26일 직선제 개헌안을 내놓은 이후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데모는 우리가 머물던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시민들에게마저도 뉴스거리가 될 정도로 그들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야권과 시민단체 등이 벌이고 있는 무바라크 퇴진 운동은 ‘키파야(‘충분하다’는 뜻의 아랍어) 운동’이라 불리는데 독재도 충분하고, 24년간의 대통령직 재위도 충분하고, 무바라크가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려는 정치 조작도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뼈아픈 독재를 체험해야 했던 시절이 떠올라 어떻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치밀기도 했지만 어찌하랴 잠시 스쳐가는 3자인 것을…. 이스라엘 땅에 첫발을 들여놓던 때는 무척이나 긴장된 순간이었다. 가방에 넣어갔던 ‘팩소주’ 때문에-아마 그들의 입장에선 액체폭발물이 아닐까 염려할 만도 하다-몇 시간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잡혀 있어야 했다는 선배의 경험담이 뇌리에서 생생히 살아난데다 이스라엘 보안요원들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도 인상이 하나같이 딱딱해 원래 웃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세계지도를 펴놓으면 간신히 점 하나 차지하는 나라, 전라남북도를 합친 크기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인류의 역사에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내 생각은 온통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질문은 인류와 인류의 존재양식에 관심을 지닌 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숙제로 연결됨을 알게 됐다.   거리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군인들. 처음엔 늘 전시상황이니 그런가보다 했는데 군인들의 얼굴이 아무래도 어려 보여 알아보니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이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국민이면 남자는 3년, 여자는 2년을 의무적으로 군에서 복무해야 한다는 설명에 가슴 한 곳이 무거워졌다. ‘저들이 총을 들기에 충분히 이성적일까?’라는 생각보다는 ‘저들이 왜 비슷한 또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살상하는 일로 내몰려야 할까’ 하는 생각에 슬픔이 몰려왔다. 세계 3대 종교의 성지답게 인간의 종교 혼으로 이뤄진 듯한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은 저마다의 신을 가슴에 품은 순례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성경을 알면 믿음을 알고, 이스라엘을 알면 세계사를 안다’는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예루살렘은 순례객들로 하여금 지금껏 자신이 지녀온 뭔가를 확인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을 심어주었다. 통곡의 벽(Western Wall), 게쎄마니 동산, 최후의 만찬, 올리브산, 십자가의 길 등 무수히 많은 말들이 역사와 얽히는 땅을 돌아보는 가운데 숨이 턱 막히는 체험을 했으니 그 곳이 바로 분리장벽 건설이 한창인 베들레헴이었다. 2년 전 이스라엘이 “자살폭탄 테러범들의 침입을 차단한다”는 명분 아래 쌓기 시작한 이 8미터짜리 장벽으로 예루살렘시 경계에 걸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분리장벽에 포위된 모양새였다. 또 팔레스타인 자치도시인 베들레헴 안에 있는 유대교 성지 라헬의 무덤을 시 구역과 분리해 이스라엘 쪽에 포함시킴으로써 흡사 벌레 먹은 사과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순례자의 눈을 잠시 떠나자 자신들만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수많은 이들을 감옥 아닌 감옥에 가두려는 인간의 노력이, 하늘에 오르려 바벨탑을 쌓던 그토록 지혜롭던(?) 인류의 조상들에 겹쳐 떠오르며 가슴까지 먹먹해지는 아픔이 밀려왔다. 인류를 분열시키고 전쟁으로 몰아갔던 게 그 알량하고 얄팍한 지식 때문이 아니었던가. 예수가 묻혔다는 ‘거룩한 무덤성전’. 지금도 가톨릭을 비롯해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교회, 에디오피아 정교회 등 수많은 종파가 갈가리 찢어 소유하고 있는 성전은 인류가 그토록 갈구하는 평화와 사랑이 지상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며 저마다의 평화만을 평화로 강요하는 현생 인류의 모자람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이 이 오명을 벗고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평화 속에 살기 위해선 그 자신들만의 힘만으로는 힘들다는 게 순례 속에서 건진 결론이었다. 그들에겐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돌아보게 하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착한 사마리아인’이 필요하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 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484 | 추천: 1
이중국적자들이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한국 국적을 버리는 것을 제한하는 국적법 개정안이 지난 4일 국회를 통과했다. 6월초부터 개정법이 시행되면, 병역 의무를 다하기 전에는 한국 국적을 자유롭게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개정법 시행 전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매일 백여 명씩 국적 포기를 신청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병역 의무를 피하기 위해 국적 포기를 서두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까지는 이중 국적을 가진 남성이 모든 면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살다가, 17세 이전에만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재외동포’가 되면 병역 의무를 회피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추가적인 법 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국내 체류기간 한정, 대학 입학 때 재외동포 특례입학과 편입 대상에서 제외, 부동산 취득 제한, 금융거래 제한, 건강보험 적용대상 제외 등을 통해서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버린 사람들이 내국인과 같은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막겠다는 의도이다. 또한 병역 기피를 위한 국적포기자는 차후에도 국적회복을 불허하고. 재외동포법상의 모든 권리와 자격을 박탈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라고 한다. 뉴스가 전하는 여론은 새로운 국적법 개정안에 찬성하는 쪽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 국민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하는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중국적을 이용하는 계층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속지주의를 채택한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 국적을 얻고, 또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얻은 ‘운좋은’ 어떤 남성이 한국에서 일정한 나이가 될 때까지는 한국의 사회적인 혜택을 누리다가, 군대갈 나이가 되어서야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일반 국민들로서는 ‘많이 손해 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상당히 여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혜택만 받고 의무는 짊어지지 않으려는 일부 얌체족에 대한 질타는 당연하다(한국 국적을 가지고 태어나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그들이’ 혜택으로 여기는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한편으로는 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특정한 소수의 사람들을 꼭 집어서 주류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논리를 가지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수많은 재외국민, 동포들이 온 세계에 널리 퍼져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이러한 법이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중국적을 얻게 된 사람들의 처지를 포용할 수 있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한번 국적을 포기하게 되면 다시는 한국 국적을 회복할 수 없고, 재외동포로서의 자격까지 잃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경직된 법적용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이런 일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언급된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명예로 여겼던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서구에서는 기득권층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참가해서 목숨을 잃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 없는 일반 국민들은 훨씬 더 많은 수가 희생을 당했다. 강제징집을 당해서 전쟁에 참여하거나, 군인도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이유도 없이 죽어간 일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사유재산과 그들이 가진 사회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참전한 기득권층의 ‘이유 있는’ 용기를 칭찬하기 보다는, 저항하지 못하고 전쟁 속에서 죽어간 민간인들이 희생되어야 했던 필연성을 따져보아야 하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던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아니라, 전쟁에 대한 반대가 우리의 구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일을 보고 한 원로 소설가는 군대에서 음식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을 먹고, 드럼통에 얼굴을 처박는 혹독한 기합을 받았던 일을 자랑스럽게 추억하면서, ‘그 모두가 사람 되라고 받은 훈육과 기합’이었다고 감격스럽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군대가 이렇게 추억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군복무를 할 수 있을 때, 군대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기꺼이 국방의 의무를 준수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끝으로,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를 몰아내는 좋은 방법은, 이런 저런 수단으로 껍데기를 분간해내서 비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살만한 사회를 만들어감으로써, 기득권에 매달려 체면도 없이 이기적인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껍데기를 골라 버리는 방법이다. 우리가 할 일은 껍데기를 골라내는 데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가 스스로 부끄러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창엽 위원은 현재 치과 의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5-31 | hrights | 조회: 566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