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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과의 결별? (이재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08 17:41
조회
412
1.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개월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따라 외국에서의 6개월을 보내고 얼마 전 돌아왔다. 30년 넘게 살던 땅이지만 공항을 나서는 순간 나는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다. 후텁지근한 공기,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숨이 막히는 매캐한 먼지, 거칠게 질주하는 차들 그리고 무엇보다 무표정한 얼굴들. 6개월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내게는 너무나 익숙했던 일상과 풍경들이 너무나 낯설었다. 6개월 동안의 떠남이 아니었으면 그저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일상이었을 것이 갑자기 낯선 현실로 다가오는 바로 그 순간이란….(인간의 마음은 이리도 간사한 것이었을까?)

 
2. 낯선 또는 낯설어진 현실에 직면한 인간이 대처하는 방식은 두 가지인 것 같다. 도망치거나 혹은 다시 적응하거나. 나도 공항에 내리는 그 순간 다시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픈 충동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럴 수 없는 것이 또 현실이니 적응하는 수밖에…. 하긴 가만 생각해보면 이 현실에 다시 적응하는 것이 그리 고역은 아니었다.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에 매몰되고 나니 지난 6개월은 한 이틀 휴가정도의 기억으로 압축되어버렸다.(아 나의 우둔함이여, 나란 놈은 애당초 생겨먹길 이것밖에 안되나니. 난 역시 쳇바퀴 체질이야!)

 
3.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자전거를 사는 일이었다. 외국으로 나갈 때 차를 폐차시켰기 때문에 뭔가 이동수단이 필요했다. 회사야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면 되지만 어정쩡한 거리에 있는 할인매장에 다닐 때나 동네 가까운데 일보러 다닐 때가 제일 애매했다. 당장은 차를 살 형편도 안 되고 요즘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다고 하니 나도 운동 삼아서 자전거를 타 볼 요량이었다.(운동도 되고 환경도 생각하고 좋지 뭐. 아! 친환경 친생태적인 내 삶의 자세여…. 역쉬!)

 
4. 발품을 팔아 동네 자전거포 네 다섯 곳을 돌고 인터넷도 여기저기 기웃거려 요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00모델로 최종결정했다. 한 인터넷 공동구매 사이트에서 이 모델을 제일 싼 값에 팔고 있었고, 며칠씩 배송을 기다릴 필요 없이 직접 매장에 들러서 바로 제품을 수령할 수도 있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해서 내친 김에 바로 매장으로 달려갔다.

“아저씨, 00자전거 주세요.”

그런데 직원 왈, “아, 그거요. 괜찮은 자전거죠, 많이 팔리구요. 근데 요런 점은 좀 안 좋고 저런 점도 좀 안 좋아요. 나쁘다는 건 아녜요. 그런대로 탈만해요.(도대체 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근데 옆에 있는 요 모델은 조금 비싸긴 한데, 뭐도 좋고 뭐도 좋고 다~좋아요.”(오호! 이놈을 사라는 얘기군)

“그래요? 그럼 그거 주세요.” (아, 나의 여린 귀여, 얇아진 지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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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2006 김대홍 오마이뉴스


 
5. 그렇게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나는 바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는 맘에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차들이야 피해서 조심해서 다니면 되고, 운전자들도 알아서 피해주니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지만 배기가스는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광합성을 하는 식물도 아닌데 그 이산화탄소, 일산화탄소, 질산화물에 미세먼지까지 다 들이마시면서 어떻게 살아남기를 바란단 말인가. 자전거가 유산소 운동이라고? 운동은 무슨 개뿔! 이러다간 제 명에 못살지. 이렇게 사서 고생하느니 예전처럼 차를 타고 창문 꼭꼭 닫고 에어콘 빵빵하게 틀고 쌩쌩 달리는 게 제 맛이지.(그래서 다음날 바로 자동차 대리점으로 달려가 신차 카달로그를 받았다. 오~ 멋진데…. 근데 차 값은 왜 이리 비싼겨! 젠장)

 
6. 여전히 고역이긴 해도 자동차 배기가스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요즘은 일주일에 서 너 번씩 자전거를 탄다. 그럴 때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문득 낯설어졌던, 그리고 그 이후 점점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문득 문득 되살리려고 애쓴다. 무감각해져가는 코와 귀와 눈을 깨워 그때 그 매캐한 냄새와 눈을 따끔거리게 하던 뿌연 하늘과 귀에 거슬리던 자동차들의 소음을 더 또렷이 기억하고 싶다. 사실 덜덜거리며 배기가스를 내뿜는 그 수많은 차들 가운데엔 귀찮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별 생각 없이 살아가던 나 자신도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차는 언제 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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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2006 김대홍 오마이뉴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